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지역

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admin | 수, 2021/07/28- 18:51

[식민지비망록 72]

일제패망기의 학교운동장이 고무공 천지로 변한 까닭은?

일본의 남방군(南方軍)이 보내온 침략전쟁의 전첩기념선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인들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전쟁 초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한다고 야단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전쟁이 아시아를 유럽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조선과 만주와 대만을 저들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둔 채 도발한 대동아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 떠벌린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에서 전사했다는 9명인가를 군신(軍神)으로 찬양한 노래를 배우기도 했던 것 같고, 일본군이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당시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이던) 씽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초등학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주어 학교 운동장이 온통 고무공 천지였고, 말레이시아 고무로 만들었다는 운동화가 학생들에게 지급되기도 했다.

 

이것은 1933년 경남 마산 태생인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선생이 남긴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41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무공 천지로 변한 학교운동장이 도대체 어떠한 상황으로 생겨난 것이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 몇 가지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42년 7월 8일자에 수록된 「빛나는 남방 선물(南方 膳物), 금일(今日) 고무공 첫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 아저씨, 참으로 고맙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산지인 마레이 보르네오가 우리 세력 범위 안에 들어온 오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무를 제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고 그 대신 동아의 천지에서 쫓겨난 미국과 영국은 지금 고무가 없어서 쩔쩔 매고 있는 형편이다. 관계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승리의 선물을 하루바삐 국내로 들여다가 총후에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를 바삐 하고 있는데 위선 전첩축하기념 고무공을 소국민에게 제1회 배급을 8일의 대조봉대일에 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전선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한 개씩 주기로 된 것이다. 운반관계로 8일에는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청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 남자 아동에게만 학교에서 직접 배급하고 여자용은 한 10여 일 늦어질 터인데 값은 남자용이 20전, 여자용이 25전으로 결정되었다. 중학생과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인 운동화, 지까다비도 이어 들어와 겨울까지는 배급하기로 될 터인데 승리의 선물에 우리는 감사하며 필승 신념을 더욱 굳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경성일보> 1942년 7월 9일자에는 남방 지역의 일본황군(皇軍)이 보내준 고무로 만든 ‘전첩 기념 고무공’이 경성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 학생들에게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9일자에도 남방 지역 일본군의 선물인 ‘전첩 기념 고무공’이 조선에 도착하여 경성 지역의 여학생들에게도 배포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소국민(小國民)이라는 것은 전시체제기에 ‘어린 황국민’이란 정도의 의미로 어린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 표현이다. 이 글에는 일제가 잇따른 침략전쟁의 말미에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전선을 남방(南方)으로 확대하여 1942년 2월에는 신가파(新嘉坡, 싱가폴)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세계 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급부상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된 풍부한 고무자원을 활용하여 고무공(ゴム毬; ゴムマリ), 운동화(運動靴), 지카다비(地下足袋, 바닥에 고무를 덧댄 버선 모양의 작업화), 게시고무(消しゴム, 지우개) 등이 만들어졌고, 다시 이것을 전첩기념선물(戰捷記念膳物)로 배급하는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전승분위기를 한껏 고취하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선물의 수혜대상은 비단 ‘내지(內地, 일본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도 널리 미치게 되었으니, 마침내 이른바 ‘황군(皇軍)’ 덕분에 남방전선에서 확보된 고무로 만든 ‘전첩 축하 고무공(戰捷 祝賀 ゴムボール)’이 조선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처음 전달된 것이 바로 1942년 7월의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의 조서가 내려진 1941년 12월 8일을 기려 매달 8일로 정하여 전쟁결의를 새로 다지는 날)이었다.
곧이어 고무신과 지카다비 등의 제품도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는데, <매일신보> 1942년 7월 28일에 수록된 「황군(皇軍)의 선물(膳物) 고무신, 전첩(戰捷)을 축하(祝賀) 조선(朝鮮)에 골고루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는 각 도별로 배당된 수량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혁혁한 남방 전과의 선물로서 전선의 황군용사들로부터 총후반도로 보내어 오는 고무신, ‘지까다비’등의 고무제품은 총후 국민들로 하여금 황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더욱 돋우고 특히 고무공은 소국민인 학동들로부터 ‘병정 아저씨의 선물’이라고 크게 환영되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제2회 고무제품의 배급과 함께 이름도 빛나는 ‘제2회 전첩축하 고무제품배급’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량의 특별배급 고무신이 들어왔다.
총수는 270만 켤레로 그 내용은 ▲ 운동화(運動靴) 820,000족(足), ▲ 지까다비 300,000족, ▲ 기타고무신 편리화(便利靴) 178,000족이고, 각 도별의 배급할당 예정수는
1. 운동화
경기 19,100/ 충북 19,700/ 충남 41,800/ 전북 45,900/ 전남 41,800/ 경북 73,000/ 경남 93,500/ 황해
44,300/ 평남 74,600/ 평북 44,300/ 강원 27,900/ 함남 59,800/ 함북 37,800
2. 지까다비
경기 31,200/ 충북 10,200/ 충남 16,800/ 전북 16,800/ 전남 24,900/ 경북 24,300/ 경남 26,700/ 황해 22,500/ 평남 25,200/ 평북 25,500/ 강원 24,900/ 함남 28,200/ 함북 22,800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의 37만 켤레가 특별배급의 ‘전첩축하배급’으로 되어 있어 제1회 배급보다는 훨씬 많다. 경성부내에 배급 할당된 총수는 19만 1천 4백 켤레로 그 내용은 ▲ 지까다비 9,900족, ▲ 편리화 20,600족, ▲ 일반용 운동화 12,300족, ▲ 동(同) 학생용 120,600족인데 제1회 때보다 약 4만 켤레가 더 많다. 배급은 8월 초에 각지 소매상조합과 도연맹, 군, 부, 읍, 면 연맹으로부터 다시 각 애국반을 거쳐서 또는 각 학교로 전선 일제히 산업전사들과 학도들에게 배급되기로 되었다.

 

이를 테면 느닷없는 고무제품의 풍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침략전쟁이 빚어낸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1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불인(佛印)서 고무공, 소국민(小國民)에게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는 싱가폴 함락에 앞서 이미 고무제품을 활용한 선물공세가 시도된 선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매일신보>1942년 6월 20일자에는 남방 전선의 전첩 선물로 고무공과 운동화가 조선인 학동들에게 배급된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병정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오른쪽) <일본제국관보>1941년 11월 21일자에 수록된 ‘상공성 고시’ 내역에는 ‘일불인 공동방위기념 고무볼(日佛印 共同防衛記念ゴムボール)’ 개당 판매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새해도 하루하루 가까워 오는데 이것은 또 굉장히 반가운 선사 ―. 늦어도 오는 정월까지에는 우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 불인(佛印)에서 수입된 고무를 재료로 하여 전국 25만의 귀여운 소국민들에게 25만여 타(打)나 되는 고무공(毬)과 4할이나 고무를 섞은 운동화 또는 일반노동자에게도 역시 4할을 섞은 지까다비가 배급된다. 우리 제국과 불인과는 지난 7월에 공동방위가 체결된 이래로 불인 측의 호의로서 다량의 고무가 수입되어 그 중의 일부분이 상공성을 위시하여육, 해, 문부성, 후생성과 기획원의 알선으로 귀여운 소국민들과 생산 확충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감투하는 산업전사 혹은 전선에서 활약하는 황군장병들의 적성에 대하여 보답키로 되었다.
고무공(球)의 수효는 남자는 3인에 한 개, 여자는 5인에 한 개씩 각각 배급되는 셈이니 결국은 각 국민학교에서 추첨케 될 터이나 종래와 같이 전표는 물론 학교장의 증명서도 필요 없게 되며 그 위에 품질은 사변 전과 똑같게 하였으며 고무공, 운동화, 지까다비 등은 모두 ‘일불인공동방위기념’이라는 ‘마크’를 넣게 되었다. 배급될 상세한 수량은 고무공이 소년용 9만 5천 30타(打, 1개에 가격이 24전씩이며 3인에게 한 개씩 배급될 터), 여자용 6만 1천 6백 40타(1개에 40전씩이며 5인에게 1개씩)이며 배급할 시기는 제1회가 금월말 내로 되어서 정월 설놀이까지에는 충분히 배급될 터이고 배급할 순서는 우선 6대 도시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차츰 각 지방으로 될 것이다.

 

<매일신보>1941년 7월 29일자에는 불인(佛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재 스미타 기관(澄田機關)의 스미타 소장(澄田 少將)과 도쿠(Jean Decoux)총독 사이에 공동방위에 관한 세목협정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 이 지역에서 들여온 고무원료로 제작한 고무공이 처음으로 ‘공동방위 기념품’으로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여기에 나오는 불인(佛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를 말하며,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비시 정권(Vichy Regime)의 등장에 따라 이 지역이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로 변하게 되자 일제가 일본군 진주와 남방 자원의 획득 기회로 삼고자 적극 개입한 결과물이 ‘일불인 공동방위 의정서(日佛印 共同防衛 議定書, 1941.7.23)’였다. 그러니까 이때에도 이 협정의 성사를 기념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기념 마크’가 새겨진 고무공을 저렴하게 배급한 전례가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일찍이 이러한 고무제품의 배급과 아주 유사한 사례도 하나 더 눈에 띈다. 만주사변 직후 1933년에 맞이하는 제2회 사변기념일에 등장한 이른바 ‘만주빵(滿洲パン)’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17, 8 양일(兩日)에 만주(滿洲)빵 판매(販賣), 시내의 빵은 전부 이것으로, 기념계획(紀念計劃)의 일항목(一項目)」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 <조선신문> 1933년 9월 18일자에 소개된 만주빵 제조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이다. 만주사변 2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만주침략의 부산물로 얻어낸 만주산 곡물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만주빵’이었다. (오른쪽) <동아일보> 1938년 9월 1일자에 소개된 파인애플 관련 기사이다. 여기에는 “파인애플은 열대지방 과실로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대만산(臺灣産)입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처럼 대만에서 생산되는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이 조선에까지 쉽사리 유통된 것은 이들 지역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에서 기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8월 1일자에 수록된 화태청(華太廳) 포획 해구신(海狗腎) 광고이다. 이러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곳 역시 일본의 점령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의 특산품이 여타 식민지로 쉽사리 유통될 수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20사단 경리부 작업소에서는 오는 18일 사변 당일 만주 소산인 소맥, 대두, 조, 고량 등 10종 곡물과 꿀과 계란을 가해서 ‘만주빵’을 제조해서 용산 일대 군인 가족 7천 인에게 노놔주기로 되었다. 그리고 18일 해행사에서 거행하는 기념연에도 특제빵을 사용할 터이요, 이것을 다만 군인의 가족에게만 배급해서는 널리 그 뜻을 알리지 못할 염려가 있어 일반 시민에게도 선전하기 위하여 13일에는 시내 각처 ‘빵’ 제조업자를 시켜 보통 ‘빵’의 제조는 중지하고 만주빵을 제조해서 전 시민에게 널리 팔게 할 터이라 한다.

 

일제가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그곳에다 자신들의 뜻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성립시켰으며, 그 와중에 만주사변을 기념한답시고 만주 벌판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만주빵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이 자랑스런 전리품처럼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들여와 다른 식민지역에 유통시킨 이국적이거나 이색적인 물품이 어디 이것뿐이었으랴!
지금으로서는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경성의 거리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이 넘쳐나고 해구신(海狗腎)에 관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잇따라 등장한 것도 알고 보니 이러한 연결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인 대만(臺灣)에서 들여온 것이고, 해구신 역시 그들의 점령지역이었던 화태청(樺太廳; 사할린) 관영(官營)으로 포획된 것이었으므로 결국 이들 모두가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씁쓰레한 웃음만 짓게 될 따름이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0
0

[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