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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 외면한 반역사적, 반헌법적 법원 판결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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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 외면한 반역사적, 반헌법적 법원 판결 규탄한다!

admin | 목, 2021/06/10- 18:41

[기자회견][다운로드]

[강제동원 소송 각하 판결 규탄 기자회견]

강제동원 피해자 외면한
반역사적, 반헌법적 법원 판결 규탄한다!

– 일시 : 2021년 6월 10일(목) 10시
– 장소 : 서울중앙지법 앞(교대역 법원 삼거리)
– 주최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 취지

  1.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지난 7일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등 85명이 일본 전범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하였습니다.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문제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 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한미동맹으로 안보와 직결된 미국과의 관계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근거를 들어 판결하였습니다.

  2. 이번 판결은 2018년 대법원전원합의체가 내린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전면 배치되며, 침략국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가해자(일본) 중심 국제정치 논리와 외교 편향의 자의적 잣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원통한 세월을 두 번 짓밟는 것으로 매우 충격적인 판결입니다.

  3.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은 가해가 일본의 입장이며, 외교관계를 문제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인권을 희생하는 사법부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법부인지 의심마저 들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원통함을 해결하지 않는 한일관계는 정의로울 수도 없으며, 미래지향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난 100년 한일관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4. 이에 이번 강제동원 소송 판결의 문제점을 강력히 규탄하며, 판결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귀사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를 바랍니다.

◎ 개요
사회자 : 정은주 겨레하나 국제평화부장
– 소개 및 취지 (사회자)
– 발언1 (김영환 강제동원 공동행동 정책위원장)
– 발언2 (김은형 민주노총 통일위원장)
– 발언3 (허권 한국노총 통일위원장)
– 기자회견문 낭독(장애린 흥사단 정책기획국 차장)

◎ 기자회견문

지난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반역사적이며 반헌법적인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으며 기나긴 소송투쟁 끝에 대법원 판결을 쟁취한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유린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만을 그대로 답습한 재판부는 인권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의 사명을 내팽개쳤다.

재판부는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선언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장벽을 뛰어 넘어 피해자 개인의 인권 보호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2018년 대법원 판결을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 재판부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더반선언’ 2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국제사회는 지난 세기에 강대국들이 저지른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역사청산을 요구하며 식민지주의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일 시민사회가 수십 년 동안 끈질긴 투쟁으로 일궈낸 소중한 성과이다. 법관은 헌법정신을 지키며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의 정신이 아니라 법관 개인의 왜곡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판결하여 주권자인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모욕했다. 이 판결은 사법농단의 가해자들이 단죄되지 않고 있는 오늘의 참담한 현실과 지금 왜 사법개혁이 필요한가 그 이유를 스스로 입증했다.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와 극우의 논리를 따르는 역사부정론의 그림자가 법원에까지 드리운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연대하여 투쟁할 것이다.

2021년 6월 10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관련기사

☞ KBS NEWS : 시민단체 “강제동원 피해자 외면한 법원 판결 규탄”

☞ 뉴스1 : “대법원 판결 폄훼·피해자 인권 짓밟아”…’강제징용 패소’ 비판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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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중 여성비율 3% 안 돼
“입증자료 부족” 공훈 심사 탈락 일쑤
남편 공적 인정 못 받으면 더 힘들어
옥바라지·경제활동·양육까지 병행
항일 투쟁서 여성 희생 재조명 필요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와 그가 남긴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우당기념관 제공

“나날을 굶으며 지내는데, 생불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지할까. 고국에 다시 돌아가서 생활비라도
마련해볼까 하고 떠나서 왔다.”
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56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이 곧 독립운동가의 삶이었단 사실을 확인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지난 2018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인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1962년 남편 이회영에게 ‘독립장’이 추서된 지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당시 서훈에는 이은숙 여사가 1966년 완성했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가 큰 역할을 했다. 만주와 북경을 넘나들며 일가의 독립운동을 힘겹게 지탱했던 그의 삶이 회고록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2018년부터 보훈처의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이 본격화됐지만, 총 1만6,000여명의 전체 독립유공자 중 여성 비율은 여전히 3%를 밑돈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공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시되기 일쑤다. 옥바라지와 경제 활동, 자녀 양육을 병행해야 했던 사정이 ‘형무소 수감’이나 ‘독립군 참여’ 등의 기준 앞에선 넉넉히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3·1절을 맞아 한국일보가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망명과 도피를 거듭해야 했던 항일 투쟁이 당시 부인들과 며느리들의 뼈를 깎는 희생 없이 가능했을까”라고 반문한다. 당시 독립 운동은 ‘가족 단위’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남편을 따라 중국과 만주 등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독립운동단체 연락책부터 시작해 임시정부 산하 학교 선생님 등으로 일하며 해방에 기여했다.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수입이 없어 홀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심지어 일제에 붙잡혀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유족들이 “포상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노력을 없던 셈 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년 옥바라지와 17년의 망명 생활

동암 차이석 선생의 외손주 유기방(66), 유기수(64) 형제가 25일 인천 서구 자택에서 외할머니 강리성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맨 왼쪽은 유기방씨의 부인 권기선(68)씨. 이정원 기자

임시정부 파수꾼이자 백범 김구 측근으로 알려진 동암 차이석 선생에겐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중국 충칭 망명 시절 만나 혼인한 홍매영 여사는 뒤늦게 서훈을 받았지만, 그 전까지 상하이 망명을 함께 했던 첫째 부인 강리성 여사는 남편의 삶을 다룬 평전에 이름 한 번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 존재가 가려져 있다. 차 선생의 외손주들이 지난 2019년 강 여사에 대한 공훈 심사를 요청했으나 보훈처가 내놓은 답은 ‘입증 자료 미흡’이었다.

차 선생은 1910년 ‘105인 사건’으로 처음 투옥됐다. 그 손주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강리성 여사는 삯바느질로 감옥 안팎의 생계를 꾸려나가며 3년간 고된 옥바라지를 버텼다. 출소 후인 1919년 남편이 임시정부를 따라 상하이로 떠나자, 강 여사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섰다.

강리성 여사가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때의 모습. 유기방씨 제공

첫째 손자 유기방(66)씨는 당시 외할머니의 삶에 대해 “청사 인근에서 밥집을 하며 임시정부 인사들을 먹이고,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습격과 고문도 홀로 감당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1939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가자 강 여사는 둘째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 여사는 1961년 사망 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남편이 묻힌 서울 효창원에 합장됐지만, 무덤 앞엔 아직까지 이를 표시한 비문조차 없다.

임정 교사 이모, 사망 전 “쓸쓸한 노인”

차영애 여사와 진장권 선생의 1935년 결혼식 사진. 가장 위쪽에 서 있는 두 명이 강리성 여사와 차이석 선생. 유기방씨 제공

차영애 여사는 지난 1987년 3·1절 기념식에 병든 몸을 이끌고 행사장을 찾았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자리에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문전박대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자신을 도와달라며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다. “해방날이나 3·1절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마음이 아팠다”는 탄원서에 답은 오지 않았다. 그는 사망 1년 전 한 지역구 소식지를 통해서야 “독립운동가 차이석의 딸이지만 평생을 홀로 살아온” 노인, “뜻있는 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한 문장으로 기록됐다.

1986년 효창원추모제에 참석한 차영애 여사와 1987년 작성한 탄원서 일부. 유기방씨 제공

강리성과 차이석의 첫째 딸인 차영애 여사 역시 해방 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홀로 삶을 마무리했다. 차 여사는 1934년부터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고 그 기록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후손들의 서훈 신청에 보훈처는 “적극적 활동 여부 불분명”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반면 차 여사와 함께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남편 진장권 선생은 독립군 활동 등의 이력이 있어 1990년 애국장 서훈을 받았다.

차 여사는 생전 독립유공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결혼 당시 찍은 사진도 남아 있었지만, 당시 시댁의 반대로 남편 진장권의 호적엔 올라가지 못했다. 아버지 차이석 선생의 남은 보훈 연금은 이복동생인 차영조씨 앞으로 돌아갔다. 유기방씨의 동생 기수(64)씨는 이모의 삶을 두고 “기록 외의 활동은 무시당했고, 결혼하고도 호적에 올라가지 못했으며, 아들을 우선시하는 과거 보훈 제도 탓에 가난한 생애를 보냈다”며 “가부장적 관습의 총체적 피해자가 우리 이모”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남편도 번번이 탈락하는데 부인은…”

박애신 여사(의열단원 김태규 선생 부인)의 손자 김명곤(64)씨와 그의 부인 김정숙(60)씨가 25일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박애신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별도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은 이상, 독립운동가 부인의 공적서는 남편의 행적을 바탕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남편의 공적이 인정 받지 못하면 부인의 서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의열단 김태규 선생의 손자 김명곤(59)씨는 “사망연도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 차례 연속 할아버지 김태규의 서훈 신청을 거절당한 후, 할머니 박애신여사의 서훈까지 거절당했다.

김씨 부부에 따르면, 박애신 여사는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와 남편 김태규의 옥바라지를 연이어 했다. 파리평화회의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에 관여하다가 체포된 김 목사가 1년 형기를 거의 다 채웠을 때쯤 무렵 아들 김태규의 1년형이 확정됐다. 감옥으로 사식과 솜옷을 들이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은 스무살을 갓 넘긴 박 여사의 몫이었다.

“서훈 기준 바뀌어야”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25일 본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래 놓인 자료들은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배화여고 학생들의 형무소 기록. 배우한 기자

김씨는 “증조부 김병농 목사는 서훈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의 경우 마지막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단 이유로 본인은 물론 할머니 박애신의 서훈도 반려됐다”며 “일반 시민인 후손들이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조상 자료를 다 찾아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김씨는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의 자료 수집과 독해가 어려운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서훈 기준이 지금보다 확대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투쟁’ 전선에 뛰어든 기록을 중심으로 평가하다 보면 서훈을 받을 수 있는 여성들은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가정’을 지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들 가운데 이은숙 여사처럼 일생을 회고록으로 남긴 경우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대 부인들의 폭넓은 지원 활동 역시 사실상의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단순히 피해자 보상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차원에서도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남편의 생애에 가려 역사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머물러왔다. 하지만 실제 치열했던 항일투쟁 뒤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다.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당시 시대상에 비춰봤을 때, 남성 독립유공자가 1만6,000명이라면 그에 딸린 최소 1만명 이상의 부인들도 독립유공자여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남편 옥바라지에 자식들 교육,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경찰들까지 한꺼번에 감내하는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삶이었다”며 “무장 투쟁이나 감옥살이와 비교해 이들의 삶을 ‘당연한 내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동등한 독립운동가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01> 한국일보 

☞기사원문: 가려진 독립운동가 부인들 “내조 아닌 동등한 투쟁”

월, 2021/03/0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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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 161건에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억…더 강력한 역사 청산 방식”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경기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난파 홍영후 동상 안내판. 홍영후의 업적과 친일 행적이 같이 적혀 있다. *재판매 및 DB 금지

[수원=뉴시스] 이병희 기자 = “봉숭아를 비롯한 많은 가곡과 동요 100곡을 남기신 작곡가 난파 홍영후 선생은 우리나라 맨 처음 바이올리니스트이시다…2009년 대통령 소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

경기 수원시 권선구 88올림픽공원에 있는 난파 홍영후(1898~1941) 동상 앞에는 ‘음악계의 선구자’라는 홍난파의 업적과 함께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된 사실이 적혀 있다.

안내판에 홍난파의 업적만 쓰여 있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지적에 지난 2019년 9월 권선구가 친일 행적을 함께 적은 것이다.

친일 인물의 업적과 친일 행적, 즉 ‘공'(公)과 ‘과'(課)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가운데 88올림픽공원의 홍난파 동상처럼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알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친일 관련 행적을 없애버리는 ‘청산’ 작업을 넘어 공과를 같이 기억해 교훈 삼는 방식이 추진되는 것이다.

102주년 3·1절인 1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는 지난해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 확인된 도내 친일 인물 관련 기념물의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도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의뢰해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통해 일제강점기(1905년~1945년 8월)에 형성된 생활 문화 속 친일 잔재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 결과 ▲친일인물 257명 ▲친일기념물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의 도내 일제잔재를 확인했다.

이 가운데 친일 기념물 161건에 해당 기념물이 친일 행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한다.

지역별로는 안성 57건, 화성 18건, 평택 13건, 용인 10건, 양주 9건, 이천 9건, 광주 8건, 여주 7건, 시흥 4건, 포천 4건, 의정부 3건, 수원 3건, 구리 2건, 파주 2건, 양평 2건, 연천 2건, 남양주 2건, 안산 1건, 과천 1건, 안양 1건, 고양 1건, 하남 1건, 부천 1건 등이다.

친일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송덕비’, ‘거사비’, ‘시혜기념비’, ‘기념비’ 등이 도내 곳곳에 퍼져 있다.

도는 오는 4월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선 선정된 10곳에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역사적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은 바로잡고, 친일 행적 등 역사적 기록을 명확히 알린다는 취지다.

이와 함께 용역 결과 확인된 친일문화잔재를 디지털자료로 기록·보존·관리하는 아카이브 포털사이트를 이달 도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시스템 개발을 비롯해 데이터베이스나 전시·홍보·교육·참여 관련 콘텐츠 구축을 마친 상태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과거에는 역사적 사실을 무작정 허물고 없애는 방식으로 친일 잔재 청산이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아픈 역사든 잘못된 역사든 역사이기 때문에 공이 있으면 공대로, 과가 있으면 과대로 같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없애버린다고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록하는 것이 더 강력한 역사 청산의 방식”이라며 “있는 그대로 기록해 과거와 직접 대면해 교훈을 얻을 수 있어 더 의미가 있다”라고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1-03-01> 뉴시스 

☞기사원문: “친일 기념물에 친일 행적 기록”…공과 함께 알린다

월, 2021/03/01-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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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절 맞아 “선조 희생” 강조해
與 서울시장 후보들도 막판 ‘총력’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위치한 이준 열사의 집터를 찾아 표석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유오상 기자] 3·1절을 맞아 이준 열사의 집터를 방문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선조의 희생과 헌신의 기록을 찾고 유지하고 전승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대표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이 열사의 집터 표석 앞에서 “표지석을 설치하고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어진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지만, 그런 일을 해주신 유지들께 감사를 드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부가 찾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민간 지사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도 후손으로서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한 이 대표는 “앞으로라도 우리는 어려운 시절에 독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던 선조들의 발자취,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의 기록을 찾고 유지하고 전승하는 노력을 강화해야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준 열사님은 헤이그특사, 그 일 자체 만국평화회의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셨던 분”이라며 “가셔서 끝내 돌아오시지 못했는데, 그런 비장한 생각과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분의 확고한 사생관(死生観)은 후대에게 깊은 깨우침을 주신다”고 언급했다

또 “이준 열사님은 돌아오시지 못하고 그 분의 마지막 사셨던 집터만 저희들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도 참 우리의 슬픈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후대의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장소”라고 방문 소회를 밝혔다.

이날 서울시장 보궐선거 최종 후보 확정을 앞두고 있는 민주당 소속 예비후보들도 각자 3.1절 일정을 소화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역임한 박영선 예비후보는 이날 “우리는 선열의 뜻을 받들어 일본의 수출 규제 위기를 기술 경제 독립의 계기로 삼았다”고 강조하며 “이제 우리는 ‘소재부품장비’ 기술 독립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상호 예비후보도 이날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기억을 언급한 우 후보는 “저는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민들을 많이 죽였다고 한 외신과의 인터뷰 발언을 빌미로 국가모독죄로 구속당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며 “참혹한 시절이었지만, 지금의 우상호를 있게 한 시절이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email protected]

<2021-03-01>헤럴드경제 

☞기사원문: 이준 열사 집터 찾은 이낙연 “정부 대신 민간이 발견…후손으로서 송구” 

※관련기사 

☞뉴시스: 이낙연, 이준 열사 집터 찾아 “선조의 희생 전승해야”(종합)

화, 2021/03/0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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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일)은 3.1운동 102주년이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그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듬해인 1920년 간도 지역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섰다. 간도 지역 독립군을 말살한다는 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벌어진 ‘간도참변’이다.KBS는 오늘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 일본총영사가 결재한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오늘 밤 9시 뉴스에서 집중 보도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간도참변에 참가했던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일제에게는 유능한 친일 한국인 경찰, 우리에게는 동족학살에 가담한 민족의 반역자들이다.

■ KBS, 간도참변 참가 한국인 경찰관 48명 공적서 최초 발굴

KBS는 일본 외교사료관 ‘서훈 및 행상’ 분류 자료 가운데 1921년 작성된 ‘간도 사건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구체적인 반민족 행위가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훗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金剛) 선생. 선생은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다.

KBS가 찾은 공적서에는 한국인 순사 김학원이 “김강 체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민간인 부락에 침입해 학살에 가담한 정황도 확인된다. 순사 백원장은 한인 마을 5곳을 급습하는 데 가담했고, 독립운동가 체포에도 앞장섰다.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를 보면, 간도참변의 많은 사건 가운데 가장 끔찍한 학살로 기록되는 ‘장암동 학살 사건’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도 확인된다. 당시 일본군과 경찰은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을 모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사 박원식에 대한 공적서를 보면, 일본군이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와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다. 장암동 사건의 가담자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한국인 경찰관은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보병총 35자루를 압수한 공로”가 인정받는가 하면, “왕복 8리(3km)를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을 노획”해 오기도 했다.

김광만 KBS 객원연구원은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들이 간도 토벌에 참여했던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공적서로 써주고, 간도총영사관이 공적서를 취합한 다음에 외무성에 보고했다”며 “우리나라 동포를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학살자들의 고백록이자 죄상 기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등 전국 각지에서 파견된 친일 한국인 경찰관들이었다.

만주 지역 항일운동 연구의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간도대학살 때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일제가 조선인 경찰을 간도 현지에 있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최초의 발굴 자료”라고 강조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증보판>에 등재 예정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증보판에 KBS가 발굴한 친일 경찰관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 일제로부터 종군기장을 실제로 수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다른 과제도 남아있다. 공적서에는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 17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KBS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했을지도 모르는 이들에 대한 보훈처의 공적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


KBS 사회부는 정확히 100년 전 오늘(1921년 3월 1일) 작성된 600쪽 가량의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을 일제 입장에서 적은 문서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곧바로 간도참변이라는 끔찍한 보복에 나선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여 명. 일제는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서에 이름을 올린 경찰들은 일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이지만, 우리에게는 같은 민족을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들의 구체적 행위가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발굴 문서를 보면 이들이 ‘동족학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공동 취재로,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에 기재된 해당 경찰관들의 소속과 계급, 주요 공적 내용을 토대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봤다.

■ 일제로부터 상훈 받은 9명…연금 받고 진급까지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이다. 단서는 1928년 8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의 부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 경찰관 9명이 1920년 12월 25일 ‘종군기장’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이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 각각의 전쟁마다 종군기장의 종류도 달랐는데,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다.

충북 청주경찰서 순사 백창돈(白昌敦)은 1920년 5월 17일 간도 지역에 파견됐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 당시 적을 경계하고 재류민을 보호한 것(2) 토벌대에 배속돼 귀순자 처리 및 선전 업무 종사 등이다. 물론 이때의 ‘적’은 우리에겐 독립운동가를 뜻한다.

간도참변 이후 그의 행적을 따라가봤다. 조선총독부 연금자료에서 추가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1년 본래 소속돼 있던 충북 청주경찰서로 귀환한다. 이후 1930년 제천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긴 뒤 퇴직했다.

재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부보 최태욱(崔泰郁).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밀정 사용 및 은닉 총기의 소재지에 관해 내사, 독립운동가 행동 조사에 관한 사무에 복무해 그 공적이 현저(2) 1920년 10월 5일~7일 출동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총영사관 경찰관과 재향군인으로 경비대를 조직해 임무를 완수 등이다. 공적서는 그가 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간도참변 당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가리킨다.

그의 추가 행적은 1926년 1월 16이 경성일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간도총영사관 소속 다른 경찰관들과 함께 승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의 계급은 경부보가 아닌 경부로 기재돼 있다. 간도참변 가담 당시 경부보였던 최태욱이 참변 이후 불과 5년 사이 경부로 진급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찰 계급 체계는 위로부터 경무총장-경무부장-경무관-경시-경부-경부보-순사 순으로 정비돼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출신 경찰들은 순사 계급에 머물렀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경시나 경부급 인사가 되기는 어려웠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경부보 최태욱의 공적서. 일제는 그를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했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당시 조선인이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라며 ” 1920년대 당시 조선인 경부는 각 도에 한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태욱이 어떤 연유로 경부로 승급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간도참변에 가담함으로써 얻은 공적이 직간접적으로 진급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KBS는 간도참변에 차출된 한국인 경찰관 48명 가운데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공주경찰서 등 소속 경찰서가 기재된 이들의 추가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공식 질의했다. 경찰은 ” 인사관리시스템에서 연관성이 있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정경찰서(현재:서울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1920년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張國煥).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국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을 찾을 수 있었다. 한자까지 일치하고 계급 승급 가능성이 있어 동일인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했다가 일제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순사 장국환(위)과 해방 후인 1952년 경기도 경찰국 소속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아래). 경찰은 두 인물 모두 인사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인물의 연관성을 확인해줄 수가 없었다. 장국환에 대한 인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52년 경기도 경찰국에 재직한 장국환은 정부 기록물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정작 경찰청이 보유한 인사기록에는 빠져 있었다. 경찰은 인사기록을 기준으로 인사관리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일부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구 동상 세운 경찰, 친일 잔재 청산은 사실상 ‘전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2019년 경찰청에 들어섰다.

경찰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본청 청사 안에 세웠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다. 경무국장은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이다.

2년여가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지 따져봤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조사했다. 이 가운데 70여 명(중복 포함)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는데, 각 경찰청·경찰서 홈페이지에는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 김상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지만, 영동경찰서 대회의실에 별도의 친일 이력 표기 없이 이름이 걸려 있다.

심지어 일부 경찰서 건물 안엔 여전히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이었던 김상규도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 형사로 근무하며 사상범과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재직 이력을 있는 그대로 표기했을 뿐 선양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친일 이력을 함께 또렷하게 적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표기하고 있다.

경기도 김홍국 대변인은 “친일 이력이 있는 인사의 재직 이력을 지우는 것도 사실 왜곡인 만큼, 기록 삭제 없이 친일 행적을 병기했다”라며 “친일 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 권리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반민특위’ 습격한 경찰…사과 요구에도 여전히 묵묵부답

경찰은 2019년 이른바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려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고 있다. 경찰은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고자 편찬위원회까지 꾸렸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빛’만 드러내고 ‘그늘’은 외면하는 꼴이다.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구성한 헌법기구였지만, 경찰은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위원과 직원, 특경대원 등 35명을 연행했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 기한은 본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됐고 같은 해 8월 31일 특위 활동은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 과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 6일을 ‘국치일’로 보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역사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2005년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경찰의 공식 입장은 나온 바 없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찰 지도부에게 과오를 과감하게 덜어내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반민특위 와해에 대한 진정한 사죄라든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KBS 사회부는 삼일절을 맞은 오늘밤 [9시 뉴스]에서 이번에 단독 발굴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는 한편, 취재진의 추적 경위도 생생한 영상으로 전할 예정이다.<

<2020-03-01> KBS 

☞기사원문: [발굴]① ‘동족학살’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확인 

☞기사원문: [발굴]② 경찰 48인 추적..친일의 그림자 청산되었나?

화, 2021/03/0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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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 헌정곡
노관우밴드가 부르는 ‘장타령’♬

민족문제연구소는 30주년을 기념하여 온라인 기념식을 진행하였습니다
https://youtu.be/QEDikInS_CY

수, 2021/03/03-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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