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1년 6월 10일(목) 10시
– 장소 : 서울중앙지법 앞(교대역 법원 삼거리)
– 주최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 취지
1.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지난 7일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등 85명이 일본 전범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하였습니다.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문제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을 상대로 청구권을 행사 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면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한미동맹으로 안보와 직결된 미국과의 관계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근거를 들어 판결하였습니다.
2. 이번 판결은 2018년 대법원전원합의체가 내린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전면 배치되며, 침략국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가해자(일본) 중심 국제정치 논리와 외교 편향의 자의적 잣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원통한 세월을 두 번 짓밟는 것으로 매우 충격적인 판결입니다.
3.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입장은 가해가 일본의 입장이며, 외교관계를 문제로 강제징용피해자들의 인권을 희생하는 사법부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법부인지 의심마저 들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하고 피해자들의 인권과 원통함을 해결하지 않는 한일관계는 정의로울 수도 없으며, 미래지향적이지 않다는 것은 지난 100년 한일관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4. 이에 이번 강제동원 소송 판결의 문제점을 강력히 규탄하며, 판결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공동 기자회견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귀사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를 바랍니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철저히 외면하고, 반역사적이며 반헌법적인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의 판결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으며 기나긴 소송투쟁 끝에 대법원 판결을 쟁취한 피해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유린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일본 극우세력의 논리만을 그대로 답습한 재판부는 인권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의 사명을 내팽개쳤다.
재판부는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선언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장벽을 뛰어 넘어 피해자 개인의 인권 보호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2018년 대법원 판결을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폄훼했다. 재판부는 ‘국제사회에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강변하지만, ‘더반선언’ 2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국제사회는 지난 세기에 강대국들이 저지른 식민지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역사청산을 요구하며 식민지주의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일 시민사회가 수십 년 동안 끈질긴 투쟁으로 일궈낸 소중한 성과이다. 법관은 헌법정신을 지키며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법의 정신이 아니라 법관 개인의 왜곡되고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판결하여 주권자인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모욕했다. 이 판결은 사법농단의 가해자들이 단죄되지 않고 있는 오늘의 참담한 현실과 지금 왜 사법개혁이 필요한가 그 이유를 스스로 입증했다.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와 극우의 논리를 따르는 역사부정론의 그림자가 법원에까지 드리운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가해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연대하여 투쟁할 것이다.
2021년 6월 10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중국에서 확인된 위안소만 1000곳 넘어
대만까지 1200곳 이상…”추가 발견 계속”
중 전문가 “역사상 유례없는 부끄러운 사건”
일본군에 점령된 중국 상하이(上海) 거리의 전쟁 폐허 속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가리키는 ‘황군위안소’ 안내 표지가 붙어 있다. 이 사진은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쑤즈량 상하이사범대 교수 제공=연합뉴스
중국 상하이(上海)시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에는 전면에 아치 모양 창문이 나란히 박힌 오랜 2층 서양식 벽돌 건물이 서 있다.
이 건물에는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가 바로 이 건물에 있던 것이다.
일본군은 1931년 11월부터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이곳에서 일본군 장교를 위한 위안소인 ‘다이살롱'(大一沙龍)을 운영했다.
다이살롱은 세계 최초로 들어선 일본군 위안소였다. 또 가장 오래 운영된 일본군 위안소이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 ‘다이살롱’이 있던 건물. 지난달 28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구 둥바오싱(東寶興)로의 옛 ‘다이살롱’ 건물 앞을 한 행인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성을 부정하는 취지의 논문을 써 거센 비판에 직면한 가운데 중국 지역에서만 다이살롱처럼 실제 존재한 것으로 확인된 일본군 위안소만 해도 1천 곳을 훌쩍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는 28일 연합뉴스에 지금까지 중국에서 각종 사료를 통해 실재한 것으로 확인한 일본군 위안소가 최소 1천127곳에 달한다고 밝혔다.
현행 성(省)·직할시별로 보면 후베이성이 295곳으로 가장 많았고 산둥성(208곳), 저장성(183곳), 상하이시(172곳), 장쑤성(70곳), 안후이성(70곳), 후난성(50곳), 광둥성(42곳), 윈난성(37곳) 등이다.
당시 한국처럼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최소 137곳의 위안소가 운영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센터 측은 설명했다.
대만까지 합쳤을 때 중국어권 지역에서 발견된 일본군 위안소는 ‘1천264곳 이상’이다.
센터 측은 1천여 곳에 달하는 일본군 위안소가 각종 사료를 통해 철저히 확인된 곳만 추려낸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동북3성, 베이징시, 톈진시, 허난성, 허베이성, 푸젠성, 하이난성 등 일본군 위안소가 다수 존재했던 다른 지역의 경우 일본군 위안소의 전체적 규모를 산정하는 작업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어 향후 존재가 확인된 일본군 위안소 규모가 수천 곳으로 급증할 것으로 센터 측은 전망했다.
나아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중국 외에도 동남아시아 각국 등 각지에서 다수의 위안소를 운영한 사실까지 고려하면 전체 일본군 위안소 운영 규모는 훨씬 클 수밖에 없다고 센터 측은 설명한다.
이번에 1차 규모가 드러난 중국 내 위안소는 한반도 출신 위안부들이 큰 고통을 받던 장소다.
센터 소장인 쑤즈량(蘇智良)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사실 한국 출신 위안부 여성들이 주로 피해를 본 곳이 중국”이라며 “일본이 중국에 주둔하면서 북쪽의 헤이룽장에서 남쪽의 하이난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든 한국 위안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에서 확인된 것만 해도 1천 곳이 넘는 방대한 규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지적한다.
중국 위안부 문제 전문가 쑤즈량 교수. 연합뉴스
쑤 교수는 “많은 사료가 위안부가 자유를 잃고 일본군의 통제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위안소의 규모에 관한 것”이라며 “인류 문명사상 이런 시설이 이렇게 많이 설치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군이 상하이 한 도시에서만 해도 최소 172개의 위안소를 뒀는데 이는 매우 부끄러운 것”이라며 “우리는 중국의 10여개 성과 직할시에서 (위안소 분포를) 조사하고 있지만 계속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쑤 교수는 연합뉴스에 과거 위안소가 운영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찍힌 사진을 제공했다.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폐허가 된 상하이의 도시 한복판에 ‘황군위안소'(皇軍慰安所)라는 안내판이 걸린 모습이 나와 있다.
쑤 교수는 “이 사진은 일본군 점령 하의 상하이에서 촬영된 것으로서 주변이 대부분 폐허로 변한 전장 한복판에서도 일본군이 위안소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쑤 교수는 “과거 위안소가 있던 건물들이 도시 개발로 대량으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며 “우리 대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젊은이들이 계속 이어 연구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유족회 등이 지난 2일 경기도의회 소녀상 앞에서 램자이어 하버드 로스쿨 교수의 논문 폐기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홍용덕 기자 [email protected]정병호 | 교수
정병호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미국 하버드대의 램자이어가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라고 주장해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후원으로 석좌교수가 된 그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 논문을 반박하느라 애쓰고 있는 해외 학자들이 있다. 군사독재 시대부터 촛불혁명까지 한국 민주화와 인권을 지원하며 국제사회의 병풍이 되어준 70~80대 원로 교수들도 참여했다.
그런 해외 학자들에게 “외부인은 논할 자격이 없다”고 경고한 이른바 ‘친일’ 한국 학자들이 있다. 도대체 누가 ‘외부인’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나치의 강제노동 같은 인류에 대한 범죄는 시효도 국경도 없는 것이다. 인류 모두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편과 가해자 편이 있을 뿐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가해권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다. 수많은 희생 위에 겨우 자리 잡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모독이다. “권력에 맞서서 싸워보지도 못한 것들이!” 돌아가신 리영희 교수의 추상같은 일갈이 그립다.
국적을 가지고 자격을 논하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1910년 ‘한일합방’에 앞장서서 일제의 귀족 작위와 토지를 받은 ‘매국노’를 완곡하게 표현해서 ‘친일파’라고 했다. 1965년 ‘한일협정’도 대한민국 정부가 한 일이다. 일본군 출신 독재자가 시민들의 반대를 군사계엄령으로 누르고 조약을 체결하면서 받은 돈을 피해자들 모르게 돌려썼다.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도 그의 딸이 대통령이었던 대한민국 정부가 했다. 10만명 이상의 피해 여성의 피눈물을 단돈 백억원으로 갈음하고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친일’의 면면한 계보는 이어져왔다. 제국주의 권력과 그 조력자들이 맺은 사기성 농후한 협약도 국제간의 약속이라고 존중해야 하나?
‘친일’은 역사가 아니라 늘 현실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유린하며 시위를 하는 그들에게서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 앞에서 피자를 먹으며 야유하던 모습과 비슷한 역겨운 가학성이 보인다. 미국과 일본으로 다니며 ‘위안부는 가짜다, 강제노동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그들. 왜 그렇게 집요하게 피해자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가?
최근 나는 해방 후 스스로 가해권력이 된 ‘친일파’ 역사의 한 단면을 되짚어볼 기회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오키나와 전투를 준비하면서 무기를 나르고 참호를 파는 인력으로 긴급하게 조선의 장정들을 끌고 갔다. 주로 경상북도 각 마을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동원됐다. 일본인 대신 조선인 순사와 면서기, 군청 직원, 지역 유지들이 이들을 잡아서 훈시하고 격려하면서 전장으로 보냈다. 도망치고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은 가족들 때문에 억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군부들은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며 전장에 내몰려 죽고 처형까지 당했다. 패전 후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일본 군인의 이름을 마지막 한명까지 찾아 기리면서 희생된 조선인은 몇천, 몇만명인지 규모조차 밝히지 않았다. 어느 마을 누구까지 지목해서 끌고 갔던 일본은 조선인 강제연행 기록을 은폐하고 피해자들의 진술은 부정하고 있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해방된 지 1년이 지나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참혹한 전장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친일 경찰과 관리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 편에 서서 새로운 권력이 된 그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강제연행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탄압했다.
일제의 반인도적 범죄 피해자들을 숨죽이고 살게 했던 대한민국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처세와 출세를 위해 ‘친일’했던 사람들은 해방 후 보신을 위해 ‘반공’에 앞장서며 가해 행위를 정당화했다. 냉전 대립과 전쟁을 겪으며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군사독재 권력이 됐다. 국가를 대표해서 식민피해 보상금을 협상하고 그 돈을 전용한 그들은 또다시 피해자들을 침묵시키는 가해자가 됐다.
일제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친일’은 냉전 이념의 그늘에 가려진 회복되지 않은 정의의 문제다. 수십년 전 역사상 저질러진 폭력에 직접 책임이 없다고 해도 그 행위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누리는 경우 간접적으로 과거 범죄에 연루된 ‘사후종범’이다.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와 눈물 위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와 특권의 근원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가해 역사를 덮기 위해 지금도 가학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는 친일파는 현재진행형 가해자다. 죄과를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이 두 권의 책에 등장하는 스무 명의 인물 중에 태어나 처음 들어본 이름이 무려 네 명이나 된다. 명색이 20년 넘게 아이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온 현직 교사로서 면구하기 짝이 없다.
학교에서도 근현대사를 주로 가르쳐왔고, ‘현대사 전문가’라는 상찬까지 들으며 십수 년 동안 여기저기 대중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도 수강생들도 그런 나를 현대사와 관련된 박사 학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줄로 안다.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가령, 신석구와 한형석. 신석구 선생은 3.1 운동 당시 기독교를 대표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시고, 한형석 선생은 1940년대 광복군 선전대에서 활약한 항일 음악가다. 해방 후 친일 청산 노력이 물거품 되면서 지금껏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친일파들이야 그렇다 해도, 독립운동가의 생애는커녕 이름조차 낯설어하는 내가 과연 한국사 교사 맞나 반성하게 된다.
솔직히 일독을 권유받았을 때, 마치 감수자라도 되는 양 스스로 거들먹거렸다. 수업 교재나 교양 도서로서 어디 하자는 없는지 찾아 훈수를 두려는 거만한 태도로 책을 폈다. 내용을 살펴보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 것도 그래서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다 아는 내용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거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두툼한 세 권의 <친일인명사전>보다 불과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이 두 권의 책이 친일 청산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친일인명사전>을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이 책을 먼저 읽은 한 아이의 소감이다. 이심전심. 스스로 박학다식하다고 능력 있는 교사는 아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동기부여하는 데 능숙한 이라야 제대로 된 교사다. 책이라고 다를까.
언제까지 친일청산 타령? 이 책으로 답합니다
▲ <한 시대 다른 삶> 1, 2권의 표지와 목차 ⓒ 서부원
이 책은 ‘웹툰 북’, 곧 만화책이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얹자면, 만화책이라고 우습게 보다간 큰코다칠 수도 있다. 앞서 고백한 대로, 한국사 교사조차 부끄럽게 만든 책이다. 형식은 가볍지만 내용은 묵직하다. 가독성이 뛰어난 데다 교훈적이기까지 하단 이야기다.
말 그대로 술술 읽힌다. 역사 공부에 젬병인 아이들조차 단숨에 읽어낼 만큼 쉽고 재미있다. 한 아이는 주말 아침 식사 후 읽기 시작해 점심 먹기 전에 두 권을 다 읽었단다. 시험에 출제된다면야 이름과 생몰년, 업적, 저서 등을 암기하느라 페이지를 넘기는 게 만만치 않겠지만, 그럴 부담이 없어 다 읽고 나면 고스란히 ‘엑기스’가 남는 책이다.
역사에 흥미가 없는 이라도 일단 첫 장을 넘기게 되면 끝까지 읽게 되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내용이야 일관된 주제지만, 만화를 그린 화가가 여럿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곧, 만화를 감상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이 책은 두 권이 아니라 열 권을 읽는 셈이 된다.
그림도, 글씨체도, 배치도 각각 다르다 보니, 읽는 데 지루할 틈이 없다. 만화와 캐리커처에 관심이 많다는 한 아이는 책을 읽다가 메모장을 꺼내 그림을 따라 그려봤다고 했다. 그는 이 두 권의 책이 ‘만화의 교본’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책의 미덕은 단연 ‘대조’에 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면면을 시대순이나 가나다순으로 단순히 나열한 책은 이미 차고도 넘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런 책들은 독서를 통한 교육적 효과도 미미할 뿐더러 굳이 따로 공들여 제작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한 시대 다른 삶,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 이 책의 표제다.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서로 가는 길이 극명하게 달랐던 두 인물의 생애를 넘나들며 비교하려는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책의 제목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학교의 수업에서든, 학교 밖 대중 강연에서든, 인물의 ‘대조’는 일제강점기를 설명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이다. 친일파의 행적만 나열하게 되면, 설령 천인공노할 만행일지라도 이내 지루해 한다. 그러고는 몇몇은 심드렁한 얼굴로 전가의 보도처럼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먹고 살려면 친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위대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건 맞지만, 당시 친일 행위를 두고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단죄와 응징 운운하는 건 지나치다고 봐요.”
거칠게 말해서, 이 질문의 요지는 두 가지다. 당시 일제에 저항하지 않고 굴복한 이들은 친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과, 대체 언제까지 친일을 우려먹을 것이냐는 비판이다. 전형적인 물타기이자 ‘물귀신’ 전략이지만, 일일이 대응하기가 여간 힘든 지점이기도 하다.
반론하다 보면 자칫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정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고 하면, 당장 선정 기준을 문제 삼거나 좌우 이념 대립의 결과물이라며 논점을 흐리고, 정치적 흥정의 산물로 폄훼하기 일쑤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김일성과 박정희, 현재 북한과 남한의 경제력 등을 비교하는 지경에 이르고, ‘빨갱이’와 친일파 중에 누가 더 나쁘냐는 황당무계한 질문에 답하라며 생떼를 쓴다. 이는 비단 어르신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요즘엔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싫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알다시피, 해방 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6.25 전쟁을 겪었으며, 친일파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수십 년 동안 친일 청산은 입에 담지조차 못했다. 이는 나 몰라라 하고 아직도 친일 청산 타령이냐고 묻는 건 파렴치한 짓이다. 그들은 입만 열면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떠들어댄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어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사건 직후 유가족과 시민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수년 동안 묵살해놓고선,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이냐며 욕지거리해대는 이들과 친일파들의 행태는 빼다 박은 듯 닮았다. 그들을 상대하노라면,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이럴 때 들어맞는 표현인 듯싶을 때가 많다.
친일파의 후손들이나 그들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온 이들이 이 책을 읽을 리는 만무하다. 다만,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포획된 청소년들과 장삼이사들에겐 이 책이 그들의 물타기식 질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답변이 될 것이다. 일일이 반론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책을 소개하기만 하면 된다.
두루 읽히고 싶은 책
▲ 2권 말미, 독립운동가 한형석과 친일 음악가 현제명의 삶을 대조한 부분. ⓒ 서부원
책의 구성을 잠깐 소개한다. 각 권당 220여 쪽 분량으로, 본문 뒤에 책에 등장하는 친일파들이 참여한 일제 협력단체들을 덧붙여놓은 것이 독특하다. 이는 그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공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본문은 두 권을 합해 열 꼭지다. 종교와 교육, 역사, 언론, 군사, 문학, 음악 등 분야별로 엇갈린 삶을 산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그려내고 있다. 친일파의 비루한 삶이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삶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대조’의 힘이다.
가장 인상적인 두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독자라면 대부분 공감할 테지만, 2권의 ‘광야의 지사’ 이육사와 ‘해바라기 시인’ 서정주를 비교하는 꼭지일 것이다. 30쪽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인 데다 역사적 사실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울림은 자못 크다.
이내 울림은 분노로, 분노는 다짐으로 승화된다. 11년 터울인 두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거물’이다. 시 <청포도>와 <국화 옆에서>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의 생애는 위대함과 비루함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서정주는 채 마흔 해를 넘기지 못한 이육사의 두 배도 넘게 살았다. 그것도 여든다섯의 삶 내내 부와 권력, 명예를 누렸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권력자가 숱하게 바뀌는 와중에도 그는 권력의 주변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굴종과 아부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에 대한 비난을 이렇게 다섯 글자로 반박했다. 시대에 무모하게 맞서기보다 현실에 체념하며 살아간 것일 뿐이라는 의미다. 달리 말한다면, 비록 존경받을 깜냥은 못 돼도 그렇다고 민족반역자라며 치도곤당할 일도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렇게 그는 <이승만 전기>를 썼고, 베트남 파병을 옹호하는 시를 박정희 정권에 상납했으며, 광주 학살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에 빌붙어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인물’이라며 그의 ’56회 탄신일’에 축시를 바쳤다. 그런데도 그가 사망했을 때, 유력 정치인과 문화계 인사 등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친일 청산이 백년하청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육사의 위대한 삶은 말하기 전에 옷깃부터 여미게 만든다. 불세출의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으로서 그의 삶은 서정주와 함께 거론되는 것 자체가 송구할 따름이다. 그의 시신과 유품을 거둔 아내 이병희 지사와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의 신산했던 삶은, 친일 청산은커녕 망각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매서운 죽비다.
이육사가 딸의 이름을 옥비(沃非)로 지은 연유는 슬프다 못해 서럽다. 부귀영화를 꿈꾸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는 것.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에서 그의 아내도 딸도 이육사의 이름을 함부로 내세울 수 없었으니, 이름은 그대로 예언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서정주의 두 아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의사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지난 겨울방학 때 올해 수업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역사 달력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서둘다 보니 오탈자와 잘못된 내용이 많았는데, 이 책이 모자란 부분을 훌륭히 메워줄 듯하다.
일단 도서관에 비치해 돌려 읽게 할 계획이다. 아울러, 원작이 웹툰이니만큼 주소를 링크해 수시로 읽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코로나가 물러난다면, 국립 현충원과 독립운동가의 생가, 유적지 등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답사하고 싶다.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일 성싶다.
끝으로, 책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와 전국시사만화협회 회원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온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비매품이지만 어떻게든 보급이 되어, 특히 청소년들에게 두루 읽혔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지금껏 이렇게 ‘가볍고도 무거운’ 역사책은 보질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https://minjok21.kr)
사족. 기획부터 출판까지 짧은 시간에 해낸 탓인지, 오타가 몇 개 보이는 게 ‘옥에 티’다. 대개 맞춤법이 틀렸거나 한자의 음이 잘못된 것이다. 1권의 38쪽과 127쪽에 각각 하나씩 있고, 2권의 72쪽에도 보인다. 또, 웹툰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군데군데 글씨가 작아 어르신들의 경우라면 돋보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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