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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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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admin | 수, 2020/01/29- 00:10

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전 기사] 중국 광저우에서 발견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흔적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2020-01-2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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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봉의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일제 잔재 청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대책을 세우라고 주장하며 시청 입구와 부천시청역 그리고 중앙공원에서 5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총 33회의 집회시위를 진행하였다

[부천타임즈:양주승 대표기자]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부천시는 시민들과 함께 친일파 박제봉의 단죄비(斷罪碑)를 세울 것을 제안하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13일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봉이 살았던 역곡동 고택은 작년 11월 경기도지정문화재 지정 신청 예비심의에서 변형으로 문화재 가치가 미흡하다는 결과를 받고 부결되었으며, 올해 6월 부천시 향토문화재 심의에서도 부결되었다. 경기도 뿐만아니라 부천시의 심사에서 탈락되어 문화재의 가치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 상황을 맞이하였다”고 말했다.

이어 민문연부천지부는 ” 경기도와 부천시의 문화재 심사 결과에 관계없이 친일행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음으로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부천시에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봉의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일제 잔재 청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대책을 세우라고 주장하며 시청 입구와 부천시청역 그리고 중앙공원에서 5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총 33회의 집회시위를 진행하였다”고 밝혔다.

▲ 친일파 박제봉 고택

(사)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가 집회시위를 오랫동안 진행한 이유에 대해 첫 번째, 문화재 심사와 별개로 역곡동 고택은 일제 잔재이며,두 번째, 어둡고 잊고 싶은 치욕의 역사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리고 시민들이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문연은 “우리 부천시는 여러 방법을 통해 부천의 인물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다”면서 ” 부천시청 1층 로비에는 부천을 빛낸 여섯 분들의 사진과 더불어 아름다운 업적을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앙공원에는 독립운동가 한항길 지사와 유일한 박사의 동상이 있으며, 변영로 선생의 논개 시비도 있다. 중동 안중근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유묵이 있어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큰 어르신인 김근태 장관의 표지석이 유네스코 로고와 함께 역곡동 일도아파트 부근 버스정류장에 세워져 있다. 김근태 장관의 표지석은 독재의 암울한 시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부천의 중요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민문연은 “부천의 자랑스런 인물들과 관련된 기념물과 표지석이 있듯이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적극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서도 기억을 하고 단죄하는 표지석을 만들어야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것은 잊고 지우자는 의미가 아니다. 추후에 국가적 위기가 찾아올 때 나라와 민족을 배신하는 반역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잊지 않고 기억하며 반면교사로 삼자”고 주장했다.

끝으로 “경기도와 부천시 문화재 심사로 수면위로 떠오른 박제봉의 과거 행적에 대해 덮어서는 안 되며, 부천시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단죄비를 세우고 일제 잔재 청산에 관한 교육과 홍보를 진행해야 한다”면서 “부천시는 적극적인 행정으로 일제잔재 청산의 의지를 보여줄 것이며 시민을 대표하는 시의원들 또한 적극적으로 동참하길 촉구한다.”고 밝혔다.

▲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제봉의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일제 잔재 청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대책을 세우라고 주장하며 시청 입구와 부천시청역 그리고 중앙공원에서 5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총 33회의 집회시위를 진행하였다

양주승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13> 부천타임즈

☞ 기사원문: 부천민족문제연구소, 친일반민족 행위자 박제봉 단죄비 세워야

※관련기사

☞부천시민신문: “76주년 광복절에 친일파 박제봉 단죄비 세우자”(종합)

화, 2021/07/1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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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성명] 국정원 재일동포 여권발급 공작사건에 대한 시민사회 규탄 성명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강력히 규탄한다.
정부는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자를 엄단하라!

◯ 지난 6월1일, MBC PD수첩은 “국정원과 하얀 방 고문 – 공작관들의 고백”을 통해 재일동포를 상대로 국정원이 저지른 여권발급공작을 폭로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국정원의 해외공작관이 어떤 임무를 수행해 왔는지가 드러났으며 우리는 국정원의 정치개입 공작의 실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 국정원 해외공작관은 “우리나라의 적을 상대로 하는 해외공작”(전향 등)이 임무이고, 외교부 지휘를 받는 영사로 영사관이나 대사관에 근무하며 국정원 임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2009년 공직 선거법 개정으로 재일동포 약60만명을 포함, 전체 재외국민 약 250만명이 새로운 유권자가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원세훈 국정원장이 취임하면서 국정원의 임무는 “북한관련 업무가 아니고 좌파척결”이 되었다고 전 해외공작관은 증언했다. 이 ‘좌파척결’은 새로운 유권자들에게도 적용되었는데, 이른바 ‘여권발급 공작’이 바로 그것이다.

“(좌파성향의) 동포들은 여권을 받아서 투표를 하면 야당을 찍을 테니 여권을 없애서 투표를 못하게 하면 2표의 효과가 있다는 거죠.”, “그 이상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지시가 내려 옵니다.”

PD수첩에 등장한 전 국정원 해외공작관의 증언이다.

◯ 여권발급에는 신원조사과정이 있는데, 보안업무규정에 따라 국정원의 개입이 가능하다. 영사관의 국정원 해외공작관들이 이 과정에서 동포들의 여권취득을 곤란하게 하여 재외국민투표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신분증명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권발급시 면담을 통해 동포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고, 이러한 일들이 동포사회에 퍼져 여권신청(재발급)을 단념하게 만드는 심리전 또한 지시받은 공작이라 밝혔다. 이명박 정부는 여권발급과정에서 국정원의 이러한 공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여권법 시행령까지 변경했다. (별첨1 참조)

◯ 원세훈 국정원장 재임시기 조선적 재일동포의 임시여행증명서 신청, 발급, 거부 건수와 한국국적 재일동포의 여권신청 및 재발급 건수를 보면 이러한 공작이 상당한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별첨2 참조)

◯ 우리는 2017년 <제18차 재외동포정책위원회>에서 결정한 여행증명서 발급제도 개선에 대해 논평을 하면서 우리가 동포들로 부터 받은 제보내용을 공개한 바 있다. 당시 제보 내용을 보면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변경한 동포들에 대한 폭언, 검열과 차별도 심각하였는데, 특히 여권기간 단축 및 재발급 여부를 두고 동포들이 겪는 불편과 불안은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였다. 조선적일때는 한국 국적으로의 변경을 요구하다가 정작 한국적을 받아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 안전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는 인물로 간주하였다.(별첨 3 참조)

◯ 우리는 여권법 시행령에서 여권유효기간을 제한할 수 있는 “외교부장관이 정하는 기준”을 명시한 문서를 정보공개청구했으나, “국가 안전보장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어” 비공개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최근 인권위는 외교부 장관에게 “여권법 시행령 제6조 2항 5호(국외에 체류하는 국가보안법 제2조에 따른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통일·외교정책에 중대한 침해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사람)를 적용함에 있어 실체적 요건에 대한 판단 없이 일률적으로 여권의 유효기간을 제한하지 않도록 관련절차를 정비하라”고 권고했다. 한통련 관련자들의 여권 유효기간을 제한하거나 심지어 여권 발급을 안해주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의견이다.

◯ 당시 우리는 이와 같은 재일동포 탄압에 대한 피해자 증언은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PD수첩에서 드러난 국정원의 공작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헌법의 기본원리인 국민주권주의를 뒤흔드는 국가폭력이다. 어떻게 국가공무원이 국민을 괴롭혀 국민임을 포기하게 만드는 공작을 하는가? 국정원은 누구를 위한 조직이란 말인가? 이것은 단순한 정보기관의 정치개입이 아니라 국가가 마땅히 보호해야 할 국민을 배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점에서 헌법질서를 유린한 매우 엄중한 문제다.

◯ 현 정부는 국정원 개혁을 위하여 두 개의 티에프(TF)를 설치해 ‘댓글 공작’ 등 국내 정치개입 사건들을 조사하였지만, 이번에 밝혀진 바와 같이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자행된 선거개입을 위한 여권발급공작과 같은 중대한 정치개입 사건은 조사한 바가 없다.

◯ 우리는 법치국가의 정보기관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재외국민에게 자행한 국가 폭력의 실체를 명명백백히 밝히고 책임자를 강력히 처벌할 것을 정부와 국정원에게 엄중히 요구한다.

1. 여권발급 공작사건 진상규명 실시하고 동포에게 사과하라!
국정원장은 이번 방송에서 제기된 내용에 대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한 진상을 밝히고 재일동포들에 게 사과해야 한다.

2. 여권발급 공작사건 책임자를 처벌하라!
정치개입공작의 책임자들이 다시는 국정원에 발을 못 붙이도록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3. 국회는 진상규명과 제도개혁에 즉각 착수하라!
일본뿐만 아니라 재외국민에 대한 국정원 정치개입 공작의 실상을 밝혀 공개하고, 이를 근절할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4.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재일동포의 삶을 파괴해온 간첩조작 사건 등과 이번 여권발급 공작의 근거가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해 국회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5. 정부는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완전 차단하라!
외교부는 여권법 시행령의 독소조항을 신속히 삭제하고, 재일동포들이 여권신청 및 재발급시 인권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면담실 CCTV설치, 녹화 및 녹취를 통해 동포들에게 행해지는 폭언과 각종 불법사항 등을 근절할 수 있는 조치들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2021년 7월 13일
조선적 재일동포 입국실현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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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1. 여권법 시행령 중 여권 유효기간 관련 조항

별첨 2. 원세훈 국정원장 재임시기 여행증명서(조선적), 여권(한국적) 현황

“별첨 3. 여행증명서 발급, 여권 신청, 재발급시 직원, 영사들의 폭언

화, 2021/07/1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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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1년 7월 13일 (화요일)
□ 진행 : 최형진 아나운서
□ 출연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최형진 아나운서(이하 최형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군함도 왜곡에 대해 강한 유감의 표현을 나타냈습니다. 2015년 일본이 군함도를 포함해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후속 조치로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노역을 포함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지켜지지 않으면서 문제가 된 건데요. 우리 입장에선 이런 현장이 어떻게 세계 유산이 됐는지부터 의아하긴 합니다. 군함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자세한 내용 짚어보려고 합니다. 2015년 군함도의 등재 심사 당시,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독일 현지에서등재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했던 단체가 있는데요. 군함도가 전범기업의 산업시설임을 알리고, 그곳에서 일어났던 강제동원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알리고 있는 분들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승은 학예실장 연결해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김승은 학예실장(이하 김승은): 네, 안녕하세요.

◇ 최형진: 먼저 이 질문부터 드릴게요. 지금 유네스코가 ‘강력한 유감이다’, 이런 표현을 했는데 이게 굉장히 이례적이고 강한 수위의 발언입니까?

◆ 김승은: 네, 국제사회에서 권고사항이라고 하는 것이 좀 유연하고 그런 발언으로 보통 표현이 되는데요. 이렇게까지 강력한 권고, ‘강력한 유감’, 이렇게 표명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최형진: 시간을 거슬러 가보겠습니다. 2015년에 독일까지 가셨다고요?

◆ 김승은: 네, 그렇습니다.

◇ 최형진: 거기서 어떤 활동을 하신 겁니까?

◆ 김승은: 당시에 저희가 산업유산시설들에 포함된 장소가 바로 우리 강제동원 전시기에 고통 받았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 산업유산이 등재될 당시에는 1910년까지의 역사만을 미화해서 아시아에서 비서구 국가에서 유일하게 산업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만 산업유산의 가치를 일본이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역사 속에서는 전쟁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산업혁명이었고, 일본의 근대화라는 것이 아시아의 침략을 통해서 이룬 성과 아닙니까? 그래서 주변국에 대한 역사인식을 전혀 배제한 채로 자신의 어떤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미화된 그런 역사만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당함에 대해서 알리고 싶었고, 그 장소는 저희 강제동원 피해자들만 고생한 곳이 아니라 중국인들도 있었고 그리고 연합군 포로도 같이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곳입니다. 그래서 세계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반성적 차원에서 산업유산들, 그리고 세계유산들을 지정하고 보호하고 해왔는데, 세계유산을 지정하는 유네스코 정신에도 위반된다, 이런 사안을 가지고 저희가 전시회도 열고 워크숍도 진행을 했었습니다.

◇ 최형진: 그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지금 군함도가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 등재하면서 이건 지키겠다고 했던 조치들이 지금 현재 이행되지 않으면서, 세계유산위가 강한 유감을 표한 건데요. 당시 등재가 되면서 일본이 취하기로 했던 조치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 김승은: 네, 앞에서 제가 얘기했듯이 그 시설들이 1910년까지만 미화될 수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설들이 가장 강력하게 산업유산으로써의 활동을 했던 시기가 바로 2차 대전 기간이었어요. 그 점들을 포함해서 40년대까지 일부 시설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여기에 강제적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동원됐던 사람들이 강제노역을 했다는 사실들을 포함한 전체역사를 알리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포메이션 센터의 설치와 그 희생자를 기리는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 이 두 가지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산업유산정보센터라고 하는 인포메이션 센터가 작년에 개관을 했습니다만, 알려야 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방식의 전시를 하고 있는 것이죠.

◇ 최형진: 1910년 이전은 미화를 했고, 그럼 1910-1940년의 역사가 안 담겨 있는 겁니까?

◆ 김승은: 전혀 안 담겨 있습니다. 홍보를 할 때는 이 시설들이 어떻게 서구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이 산업화를 이루는데 성공적으로 이 시설들을 만들었는지, 이것이 어떠한 규모였는지, 이렇게 산업적인 측면만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산업시설들 속에서 실제로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본인 노동자의 이야기도 빠져있고,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거죠. 그래서 저희가 2015년부터 계속 이야기 했던 것은 그 현장에는 분명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강제노역으로 희생된 분들. 그리고 거기서 존재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희생자들을 거기서 기려야 되고, 그들의 목소리가 이 역사 속에 담겨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죠.

◇ 최형진: 제가 이쪽에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직설적으로 여쭤보면, 가슴 아픈 역사고요.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요. 사실 보통 우리 국민들이나 시민들이 생각하면 세계문화유산이라고 들었을 때, 인간의 가치, 예술적인 가치, 이런 게 다 담겨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군함도가 어떻게 유네스코에 등재가 된 겁니까?

◆ 김승은: 그런데 조금만 저희가 생각을 해보면, 유대인 학살의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도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

◇ 최형진: 그렇군요.

◆ 김승은: 네, 세계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인류가 정말 공동으로, ‘어마어마한 인류 공동의 자산이야’ 라고 하는 그런 유산들도 물론 세계유산으로 지정이 됩니다만, 우리 인류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저질러졌던 일들, 다시는 반복되는 안 되는 일들, 그것을 이후에도 계속 교육적 가치로서 보전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반성적 성찰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역시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본에서 산업유산시설로 등재된 곳들 가운데 저희가 얘기하고 있는 다섯 군데, 시설로써는 일곱 군데인데요. 거기가 일본제철의 야하타제철소, 그리고 미쓰비시가 운영했던 나가사키조선소, 그리고 다카시마탄광, 하시마탄광, 미쓰이 재벌이 이용했던 미이케탄광, 이곳은 바로 전쟁과 군수산업을 통해서 성장한 재벌들이 운영한 그런 장소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 어떻게 뒷받침을 했는지 거기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이 되었는지, 더 나아가서는 식민지 조선인들, 그리고 중국인 포로들, 중국인 민간들도 강제연행이 되었고, 그리고 연합군 포로들,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서 전쟁에 희생되었다고 하는 역사가 같이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 최형진: 그래서 말인데요. 앞서 말씀하신 게 뭐냐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일본은 지금 오히려 부인하고 있다면서요?

◆ 김승은: 지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은 2015년에 유네스코 대사가 직접 현장에서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노역을 한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다고 발언한 다음날 바로 부정을 했고, 그 부정들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들을 지난 5년 동안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 정부가. 그래서 지금 개관된 정보센터 안에는 당시 하시마에 아주 어린 나이에, 그 이후에 거주했던 주민들의 목소리를 가지고.

◇ 최형진: 당시에 어렸던 사람들의 증언만 가지고 된 겁니까?

◆ 김승은: 네, 그 증언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거짓말 내지는 과장, 이렇게 왜곡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게 지금 홈페이지가 한국 사람들 많이 보라고 한국어로도 번역되어서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져서 홍보가 되고 있습니다. 그걸 만드는 단체가 지금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 정보센터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고요.

◇ 최형진: 일본이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거짓말을 한 거잖아요. 굉장히 화가 나는데요. 군함도, 지옥섬이라고도 불리는데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던 곳입니까?

◆ 김승은: 여기가 기본적으로 섬이기 때문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여러 장소에 끌려갑니다만, 섬이라고 하는 곳은 출입 자체를 할 수 없는 곳이잖아요. 마음대로. 그래서 아마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곳에다가 여기가 해저탄광이기 때문에 지하로 굉장히 깊이 들어가서 탄을 캐내야 하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고온, 온도가 높고 습기가 많고, 그래서 그냥 채탄을 하는 것도 굉장히 고된 일인데, 해저탄광에서의 열악한 환경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상징적으로 표현된 단어가 바로 ‘지옥섬’이라고 하는 표현인 것 같고. 이건 후대에 누군가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 지명, 상징어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스스로 여기가 지옥이다, 지옥섬이다, 라고 하는 표현에서 연유된 호칭이거든요. 그래서 당대의 경험을 통해서도 이 작업환경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야 나갈 수 있다, 여기는 살아서는 도저히 나갈 수 없다고 하는 극단적인 상황의 표현으로 지옥섬이라고 불렸던 것 같고. 한동안은 74년인가에 폐강된 이후에 거의 폐허처럼 방치되다가 지금도 시설들이 굉장히 위험해서 지금은 입도가 안 되는 상황도 반복되고 있고요. 그러면서 계속 거기에 산업유산으로써의 미화된 역사만 계속 선전되고 유포되고 그러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 최형진: 저도 영화나 자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긴 했는데,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곳 같습니다. 거기서 실제로 일하시는 분들은 어땠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은데요. 그럼 일본에서는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 겁니까?

◆ 김승은: 아까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출발은 아마 식민지민이기 때문에 당시 식민지 지배 속에서 총동원법이나 이런 법에 근거하여 조선인들을 데려다가 쓴 것은 합법이다, 라고 하는 큰 틀에서의 식민지배 합법론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서의 어떤 노동환경이나 이런 것들의 민족차별은 없었다, 당시 전시에는 다 같이 힘들었다, 한국과 일본 차별 없이, 전시라고 하는 것은 원래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사이좋게 잘 지냈다, 이웃으로 잘 지냈다, 이런 이야기들만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큰 틀에서 보면 식민지배라고 하는 것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본에 의해서 저질러진 모든 것들은 근거 있는 합당한 행동이라고 계속 주장을 하는 것이고요. 우리는 대법원 판결에서도 식민지배가 불법이라고 하는 것을 강하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당시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갔던 강제노역 역시도 이건 불법 행위에 의해서 저질러진 범죄인 것이고 거기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사죄와 보상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런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생존해 계신 분들, 그리고 고인이 되셨지만 생전에 증언 영상을 남기셨던 분들, 이런 분들의 목소리들을 담아서 저희가 이번 7월 16일 날 세계유산총회가 열리는 날인데, 그날에 맞춰서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실제로 강제동원이라고 하는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그 분들의 목소리로 온전히 들을 수 있도록 전시를 꾸몄거든요. 그래서 상상하시기 어려우시다면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최형진: 실장님, 이거 취소시켜주면 안 됩니까? 일본이 약속도 안 지켰는데, 어떻게 취소 안 돼요? 죄송합니다. 제가 국민으로서 좀…

◆ 김승은: 제가 권한이…

◇ 최형진: 이거 취소 좀 시켜주세요. 제발.

◆ 김승은: 그렇다기보다는 저는 취소해서 없애버리는 것보다는 세계유산으로서 우리가 배워야 될, 기억해야 될, 그리고 그 속에서 전쟁은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식민지배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들이 저질러졌는지, 제국주의자들이 저질렀던 역사적인 범죄에 대해서 계속 알려나갈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지금 유네스코의 권고대로 이 산업시설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체의 역사, 부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산업화를 통해서 작년 같은 경우는 노예노동에 대해서 엄청난 역사적인, 다시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반대운동들이 다시 벌어지는 그러한 상황들을 우리가 목격을 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제국주의라고 하는 그 시대, 지난 200~400년 동안 제국주의국가들이 식민지국가들을 향해서 저질렀던 일들이 제대로 기억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저는 이 장소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유산이요. 그래서 저희는 이 피해자들, 연합군 포로들, 중국인 피해자들, 그리고 당시 일본인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어떠한 일들을 겪었는지를 전체 역사를 담아서 소개하는 장소가 되어야 된다, 이렇게 요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 최형진: 한 가지 짧게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도쿄올림픽 앞두고 강행은 합니다만, 세계의 지탄을 일본이 받고 있고, 이번에 세계유산위가 강한 유감을 표했습니다. 일본이 타격을 입거나 자존심이 좀 꺾이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 김승은: 지금 이 유네스코 권고사항은 사실은 지난 5년 동안 저희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에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라고 하는 시민연대단체에서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매년 이러한 사항들의 요구를 넣은 것의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아마 자신의 입장만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은 더 이상은 전개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더구나 올해는 POW연구회라고 일본에 전쟁포로로 와서 강제노역을 하셨던 그런 피해자분들도 4월에 성명을 발표하셨거든요. 그렇게 연대운동들이 더 거세질 것 같고, 그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그것이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전시되도록 하라는 저희의 활동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외면하고 그런 거짓말을 계속 할 수는 없겠죠.

◇ 최형진: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김승은: 고맙습니다.

<2021-07-13> YTN라디오

☞ 기사원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군함도’, ‘희생자들을 위한 후속 조치’ 일본은 왜 안 지키나요?”-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

화, 2021/07/13-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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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교육정책연구소, 일제 잔재 현황 파악
25곳 학교 교가 친일 인물 작곡 또는 군가풍

전북지역 학교 안 일제 잔재 현황을 연구한 보고서 표지.

“학교 안 일제 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전북도교육청 전북정책연구소는 전북지역 초·중·고교의 ‘학교 안 일제 잔재 현황’을 조사한 결과, 교가에서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에 의해 친일 인물로 분류된 작곡자가 작곡하거나 군가풍·엔카풍(일본 대중가요 장르)의 멜로디를 포함하는 학교가 25곳 발견됐다고 13일 밝혔다. 특히 25곳 중에서 ‘조국에 바쳐’, ‘○○학도’, ‘이 목숨 다하도록’ 등과 같은 일제군국주의 동원체제에서 비롯한 비교육적인 표현을 담은 교가도 대부분이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전북교육청은 25곳을 청산 대상 교가로 선정한 가운데, 2019년 10곳에서 교체작업을 마치고 교가를 새로 만들었고, 나머지 15곳은 올해 교가 교체작업을 진행 중이다.

학교표식에서는 21곳 학교에서 일제를 상징하는 욱일문, 일장기, 일본 황실에서 사용하는 벚꽃문과 국화문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전쟁·경기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 모양이 75곳, 욱일문·월계수 등과 유사한 형태가 41곳, 맹수·맹금류·방패 등 군 관련이 29곳으로 집계됐다.

일제 잔재가 남은 학교 건물 외곽.

일제 잔재로 평가받는 가이스카 향나무, 금송 등을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는 91곳이었다. 가이스카 향나무는 이토 히로부미가 식민통치를 기념하며 심었다고 알려진 나무다. 학교 터에 일제강점기의 석물·건축물이 남아 있는 학교도 일부 있었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시정표(→시간표), 시건장치(→잠금장치), 절취선(→자르는 선), 졸업사정회(→졸업평가회), 내교(→학교 방문) 등도 개선대상으로 지적됐다.

연구소는 △일제 잔재 관련 조례 제정과 역사교육 등 교육청 차원의 지원 △학교 안 일제 잔재 관련 석물 등의 현황 파악과 활용 △일제 잔재 인식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등을 제안했다. 최은경 전북교육정책연구소장은 “일제 잔재를 생활 속에서 교육적으로 활용하도록 지도하는 게 중요하다. 활용을 위해 발간 책자를 각 학교와 도서관에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의 한 학교에 있는 봉안전 기단에 일제양식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번 연구는 초중등교사와 연구사 등 9명이 지난 1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했다. 연구소는 전북지역 학교의 일재 잔재 현황을 주제로 9월 말에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박임근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전북교육정책연구소 제공

<2021-07-13> 한겨레

☞기사원문: “학교 안 일제 잔재,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관련기사

☞KBS 뉴스: 아직도 일선 학교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는?

☞전북도민일보: ‘교가, 교목, 교표에 친일 잔재 여전히’ 전북지역 학교 일제 잔재 드러나

수, 2021/07/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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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목, 2021/07/15-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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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차 수요시위 옛 일본대사관 앞서 열려… 방역지침 따라 1인시위 형식으로 진행

▲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 14일 낮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500회 수요시위에서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이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 정의연

지난 92년 시작된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가 14일 1500회를 맞아, 코로나19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 격상에 따라 1인시위 형식으로 진행됐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 이나영)는 14일 낮 12시부터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1500회 수요시위를, 현장참가자 없이 1인시위 형식으로 진행했다.

1500회 수요시위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대만, 미국, 캐나다, 노르웨이 등 총 14개국 1565명 국민과 단체가 주관했다.

특히 이날 수요시위는 방역지침에 따라1인 시위 형식으로 진행하면서 대부분은 영상으로 대체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성명서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시위가 1500차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정부가 성노예제를 중대한 반인도적, 반인권적 범죄로 인정하고 법적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인권이 보장될 것”이라며 “우리 모두가 식민지와 전쟁, 군국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넘어 설 때, 비로소 평화의 새 장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사랑과 평등, 신뢰와 연대의 물결이 혐오와 차별, 두려움과 분노를 뒤덮을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며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1500번을 이어온 바위처럼 강한 연대의 힘으로 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전했다.

1500회 수요시위에서는 일본정부를 향해 ▲ 전쟁범죄 인정 ▲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진상 규명 ▲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 ▲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배상 ▲ 일본군성노예제 범죄 책임자 처벌 ▲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역사교과서 기록해 교육 ▲ 추모관과 사료관 건립 등을 촉구했다.

이날 주변에서 수요시위를 방해한 사람들을 향해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저들이 내뱉는 역사부정의 말들은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라며 “그래서 마침내 저들이 스스로 마이크를 내려놓을 날이 오리라고 저는 믿는다”고 말했다.

1500회 수요시위는 사진홍보 1인 시위, 평화네트워크의 ‘바위처럼’ 공연, 수요시위 영상 상영, 이옥선·이용수 할머니 발언, 문춘화 렌다 수녀·스프링세계시민연대 구보경 미국휴스턴 함께 맞는 비 대표·김지원 고등학생·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등의 발언, 춘천지역 근현대사 역사 연합동아리 날개짓의 ‘새물’ 율동, 수요 시위 에세이 ‘나와 수요시위’ 수상작 발표, 연대 영상,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의 성명서 발표순으로 이어졌다.

이날 정의연은 “역사적인 1500회 수요시위를 맞아 함께해온 많은 시민들의 염원과 연대를 함께 하기 위해 1500인 공동 주관인을 모집했다”며 “1565명이 참여해 성사됐다”고 밝혔다.

수요시위를 마친 정의연은 이날 오후 SNS를 통해 “총 14개국(대한민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노르웨이, 호주, 뉴질랜드, 아랍에미리트(UAE))에서 1565명·단체가 공동주관인으로 함께해주셨다”며 “비록 1인시위의 형태로 대부분의 순서를 영상으로 대체하긴 했지만 바위처럼 강한 연대의 힘으로 1500차 수요시위를 무사히 마쳤다”고 감사 인사를 남겼다.

수요시위는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첫 시작됐고, 14일 현재 1500회를 맞았다.

▲ 1500회 수요시위 14일 일본군 성노예 해결 1500회 수요시위는 토로나19 방역지침 격상으로 1인시위형식으로 진행했다. ⓒ 김철관

김철관(3356605)

<2021-07-15>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슬픈, 그러나 자랑스러운 시위”

※관련기사

☞KBS 뉴스: 1,500회 수요시위…이옥선 할머니 “사죄 전엔 계속해야”

☞노컷뉴스: 1500차 수요시위, 일본정부 진정한 사죄·법적책임 이행 촉구

☞뉴스1: 1500차 맞은 정의연 수요시위…보수단체·유튜버 항의에 몸살(종합)

목, 2021/07/1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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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세계유산위, ‘일본에 유감 표명’ 결정문 채택해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故) 서정우씨 등의 영상은 최초로 공개됐다. 2021.7.16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송은경 기자 =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당하는가’ 혼잣말을 하면서 매일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군함도(하시마·端島) 강제동원 피해자 서정우 씨)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 산업시설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최근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육성 증언을 다루는 자리가 마련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11월 7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연다고 16일 밝혔다.

전시 영상들은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고 있다. 열네 살에 하시마 탄광에 동원됐다가 이후 나가사키에서 원폭 피해를 겪은 고(故) 서정우(1928∼2001) 씨의 영상이 국내에서 공개되는 건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사복형사에게 연행돼 다카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던 손용암(78)씨, 후쿠오카 미이케 탄광·제련소로 강제동원된 류기동(79)·손성춘(76)·이영주(77)씨 영상은 올봄 촬영돼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다.

징용 경험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군수시설에서 탈출하려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잇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가 가늠될 정도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보통 강제동원을 떠올리면 ‘배고프다’ ‘아프다’ ‘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처럼 단편적으로만 안다”며 “이번 전시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과정으로 가게 됐는지, 현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은 어땠는지, 언어 소통은 어떻게 했는지 등을 느낄 수 있게 증언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제공한 영상도 이번 전시에 포함됐다.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중국인 포로, POW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증언 영상을 함께 전시해 강제노동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오른쪽 두 번째)이 1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 관련 브리핑을 마친 뒤 연구소 관계자들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해당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하시마 탄광(군함도), 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미이케 탄광·제련소 등으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공개했다. 2021.7.16 [email protected]

한편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은 일본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센터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 12일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군함도 등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조사단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을 일본의 관점뿐 아니라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등 피해자의 시각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번 조사를 토대로 일본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이르면 이달 21일 열리는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식 채택할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세계유산위원회가 공개한 권고를 지지하며 환영의 뜻을 표한다”면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이 권고를 채택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7-16> 연합뉴스

☞ 기사원문: 피해자 육성 담은 ‘일제 강제동원’ 전시회 서울서 개막

※관련기사

☞뉴스토마토: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등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 증언 공개

☞이투데이: ‘군함도 강제노동의 역사’,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19인의 증언

금, 2021/07/16-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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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차별 없었다는 일본 주장 반박

 

[앵커]

일본의 군함도 역사 왜곡을 지적하는 유네스코 결정문이 오늘(16일)부터 열리는 온라인 회의에서 채택될 예정인데요. 우리나라와 일본의 시민단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새로운 육성 증언을 공개했습니다. 일본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내용들입니다.

신진 기자입니다.

[기자]

1940년대 일본 총독부가 ‘인력 공출 대상’으로 지목한 건 ‘농촌의 가난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고 최장섭/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화면제공: 민족문제연구소) : 느닷없이 개 패듯 패가지고 강제로 들고 나갔지.]

손용암 할아버지는 16살 때, 아버지 심부름을 갔다가 사복 형사에 붙잡혔습니다.

[손용암/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화면제공: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민족문제연구소) : 옛날 ‘당꼬바지’라고 있잖아요. 형사들은 표가 났어요. 문 잠그고 내보내 주지를 않는 거예요. 납치죠. 완전 납치죠.]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가족들도 위험해졌습니다.

[고 최영배/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화면제공: 민족문제연구소) : 도망가면 부모를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앉히고 해코지하려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내가 죽으면 죽고 살면 산다 하고 (동원) 가는 거지.]

어딘지 모르고 끌려간 노동 현장은 ‘인간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군함도의 9층 건물 지하에 배치된 고 최장섭 할아버지는, 탈출하다 붙잡히면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고 최장섭/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화면제공: 민족문제연구소) : (조선인들) 숙소는 제일 하층에, 하층에 (바닥이) 질퍽질퍽한 데. 일본 놈들은 다 고층에. 밤에 잠을 자는데 여러 어른들과 아이들이 쥐가 나서, 기운이 부족하니까 힘이 드니까 소리를 지르고, 밤이면 그 아우성 소리가…]

제련소와 탄광 등 가장 위험한 현장엔 여지없이 조선인들이 배치됐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흔적은 남았습니다.

[류기동/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화면제공: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민족문제연구소) : 천장이 떨어져서 머리에 흉이 네 군데가 있어. 와이어 줄로 여기(발목)를 감아 끌려가다 다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며 기억도 흐릿해졌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김승은/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 : 고령의 생존자들이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을 지목해 강제동원했던 구장, 면장, 순사의 이름은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한·일 시민단체들이 새로 발굴한 피해자 19명의 육성 증언은 11월까지 서울 용산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됩니다.

(화면제공 : 민족문제연구소·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영상취재 : 이동현 / 영상편집 : 이지훈)

<2021-07-16> JTBC

☞기사원문: “개 패듯 패고 강제로 끌고가” 강제동원 피해자 새 증언

※관련기사

☞YTN: “두들겨 맞으며 끌려갔다”…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 공개

☞KBS: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日 강제징용자 육성 증언 공개

토, 2021/07/1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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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 57. 서울 4‧19 묘지 : 4‧19탑은 왜 수유리 골짜기에 있는가?

1995년 해방 50년을 맞아 보수언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진보진영의 민중사관에 맞선 한국현대사 재평가 움직임과 그 일환인 ‘이승만 복권운동’이었다. 보수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인 이승만 복권운동을 왜 이처럼 뒤늦게 벌이기 시작했는가? 그 답은 수유리에 있다.

“데모가 이적(利敵)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부정선거 다시 실시하라!” 1960년 4월 19일 오후, 시위대는 점점 불어나 근 10만 명에 달하기 시작했다. 전날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회 연좌농성을 마치고 귀가하던 고대생들을 이승만 정권이 사주하는 정치 깡패들이 쇠몽둥이 등으로 무차별 공격한 데에 분노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에서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4.19 혁명 관련 사진들. 초등학생들까지 참가한 것이 이색적이다.

‘탕탕탕!’ 갑자기 경무대 앞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의 총구가 불을 토했다. ‘피의 화요일’과 함께 4.19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수유리 4‧19 묘역에 가면 4‧19 민주혁명기념탑 뒤로 줄지은 묘비들이 늘어서 있다. 186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결국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경찰에 의존하고 경찰을 우대해온 이승만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시위대는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눈에 보이는 차를 징발해 시내를 누비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경찰과 계엄군에 쫓겨 저항본부인 고려대학교로 후퇴했다. 고려대학교가 ‘4‧19의 전남도청’이었던 셈이다. 5‧18의 전남도청 학살과 같은 참극이 고려대학교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전두환과 달리 당시의 지휘관이 두 명의 부관을 데리고 직접 학교 강당으로 찾아가 태극기로 덮은 시신들에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고, 이를 본 시위대가 군을 믿고 무장을 해제했다.

▲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시위와 관련해 고려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4.19혁명 기념 조각 ⓒ손호철
▲ 마산 3.15 기념관에는 학생 등 시민들에게 발포한 경찰에 대해 “총은 쏘라고 준 것이다”라고 한 이기붕 부통령의 망언이 쓰여 있다.

진정되어 가는 것 같던 정국은 학생들에 이어 교수들이 나서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미국까지 이승만의 등을 돌리면서 이승만 하야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그러자 이승만도 마지못해 하야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 성명 발표이후에도 갑자기 자신이 사임하면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사임서에 서명을 거부했다. 최후까지 비겁한 지도자의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다가 주변의 압력으로 결국 서명을 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이처럼 이승만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하고 이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목숨을 180여 명이나 빼앗고 쫓겨난 지도자이다. 즉 그는 박근혜에 앞서 국민의 손에 쫓겨난 최초의 지도자였다(최소한 박근혜는 이승만처럼 근 200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죽이고 물러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승만보다는 덜 나쁜 지도자였다. 박정희도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시위대에 발포를 해 이처럼 많은 국민들을 공개적으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그를 복권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 4.19 혁명 후 하야 압박에 굴복,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의 사진이 화진포 이승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기념관인 만큼 설명이 이승만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이, 4‧19의 원인은 사건사적 원인과 보다 구조적인 원인을 살펴봐야 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장기집권을 위한 3.15 부정선거와 이에 항의하는 대구의 2.28 시위와 마산의 시위과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 유기 사건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1회 ‘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프레시안> 2021년 3월 31일자와 12회 ‘진보의 요람과 보수의 아성 공존하는 도시’ <프레시안> 4월 2일자 참조). 설상가상으로, 이승만 정권이 4월 18일 깡패들을 동원해 고대생을 습격한 것이 4‧19를 촉발했다.

구조적으로는, 이승만 장기집권과 심각한 실업 등 경제 위기에 대한 반감이다. 특히 대학졸업생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등 청년실업이 심각해 청년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50년대 우리는 미국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산업(방적, 제분, 설탕이라는 ‘3백산업’)이 중심이었는데 1950년대 말이 되며 이 같은 원조가공 산업화가 소진된 데다 미국의 제3세계 전략이 원조에서 차관으로 바뀌면서 원조를 크게 줄이자 경제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에 미‧일‧한국으로 이어지는 안보 삼각동맹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압박했지만, 이승만은 말을 듣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를 교체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우선 ‘4‧19 혁명’이라는 명칭이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성공 후 4‧19의 명칭을 ‘4‧19 의거’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4‧19 혁명이라고 부른다. 4‧19는 정말 혁명인가? 혁명이라면 왜 혁명인가? 혁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승만을 성공적으로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라면, 4‧19는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항쟁’일 뿐이다. 사회구조 등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말에 시작해 2017년 초까지 계속된 촛불항쟁이 박근혜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촛불혁명’은 아니다. 나는 촛불 당시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그것이 촛불항쟁 속에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내자는 것을 넘어서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려는 급진적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살려서 촛불혁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현실은 전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즉 촛불혁명이 아니라 ‘촛불항쟁'(내지 ‘실패한 촛불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면 4‧19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단순히 ‘4‧19 항쟁’인가? 나는 4‧19를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4‧19는 혁명이되,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승만 하야 이후다. 4‧19는 이승만 하야와 함께 끝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 하야로 그 1단계가 끝나고 2단계가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정권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적 요구들이 거세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보도연맹, 거창 민간인학살 등 수많은 학살의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움직임이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유가족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특히 거창의 유가족들은 학살에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 이장에게 사과를 요구하다 거부하자 산채로 불을 질러 버렸다. 어용노조에 대항하여 교원노조와 같은 자주적인 노조가 생겨났고, 사회대중당,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들이 나타나 국회에 진출했다.

가장 극적인 것은 극우 분단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다. 남북한영세중립화를 통한 통일운동이 나타났고, 혁신정당들과 조직들이 자주·평화·민주 3대 원칙 하에 남북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결성했다. 1961년 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며 남북학생들의 평화교류를 추진했다. 이는 극우 분단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5‧16 쿠데타로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실패한 미완의 혁명이다.

또 다른 문제는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잘못된 경향이다. 물론 4‧19에서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들 못지않게, 어쩌면 그들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도시 하층민들이다. 이는 4‧19 희생자들의 분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86명의 희생자 중 학생은 22명에 불과하고 하층노동자 61명, 무직자 33명 등 도시 하층이 절반에 달한다. 따라서 4‧19를 단순히 학생혁명으로 보는 것은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외면하는 일면적인 인식이다.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 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 국민의 성금과 국고 보조로 이 공사를 진행하여 오늘로써 제막식을 거행하다.’

▲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 민주묘지 ⓒ손호철

나 자신이 ‘운동권 출신’인 만큼 수유리 4‧19 묘역은 가끔 찾아가는 ‘마음의 성지’지만, 이번 답사를 하면서 4‧19 혁명기념탑 앞조각 뒤편에 새겨진 이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4‧19 묘역이 5‧16 쿠데타 직후 쿠데타 세력에 의해, 그것도 재건국민운동본부라는 군사독재 냄새가 풀풀 나는 조직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이를 다시 ‘민주 성역화’ 한 것은 김영삼 정부다). 그것만이 아니다. 탑의 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승만을 ‘성웅 이순신 같은 위인’이라고 극찬했고, 4‧19를 짓밟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공화당의 창당선언문을 써주었으며 이후 유신과 전두환 지지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어용지식인 이은상이 썼다는 것도 발견했다.

아무리 5‧16 세력이 그와 친하다고 하더라도, 이승만을 ‘성웅’이라고 칭송하고 문인들을 모아 지원유세를 다녔으며 김주열 시신 인양과 함께 터져 나온 4‧11 마산의거에 대해 “적을 이롭게 하는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이며 특히 “고향 마산에서 터져 나온 일이기에 더욱 분개한다”고 했던 이은상에게 4‧19혁명기념탑 글을 의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몇 년 전 자신이 성웅이라고 칭송한 이승만을 무너뜨린 4‧19, 자신이 ‘북괴를 도와주는 이적 행위’라고 힐난한 4‧11의 연장인 4‧19에 대해 탑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이은상의 탑문은 현 4‧19묘역이 비극을 넘어 희극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 5.16 쿠데타 세력은 4.19 혁명을 기념한다며 이승만을 성군이라고 찬양하던 어용 문인 이은상에게 4.19 기념글을 짓게하여 써 놓았다. ⓒ손호철

놀라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원래 4‧19기념탑을 광화문에 세우려 했으나 데모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유리 골짜기로 귀양 보냈고, 탑은 친일인명사전에까지 오른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조각가인 김경승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는 전두환이 1987년 황토현 동학전적지에 세운 전봉준 동상도 세웠는데 정읍시는 최근 이를 철거하고 동학의 정신에 맞는 동상을 새로 세우기로 했다). 넓은 공간이 필요한 묘역은 몰라도 기념탑은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이나 청와대 앞에 세워야지, 왜 아무 관계도 없는 수유리에 세웠는가?

수유리 4‧19묘역을 떠나려는데, 한 자료에서 읽은 최석태 서울민족미술협회대표의 주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5‧16세력이 4‧19를 짓밟지 않았나? 그것을 가리려고 성역화한 것 아닌가? 4‧19탑에는 정신이 송두리째 빠져있다. (…) 4.19탑은 철거돼야 한다. 아니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야 한다. 친일작가들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증거로, 친일유물로.” 맞다. 새로운 4‧19탑을 역사의 현장인 광화문에 세워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21-07-19> 프레시안

☞ 기사원문: 4‧19기념탑에 새겨진 ‘친일‧친독재’ 흔적들

월, 2021/07/1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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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금, 2021/07/23-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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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하시마(군함도) 전경. 김영민 기자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이 ‘군함도’(하시마·端島) 등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담긴 결정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일본 정부를 향해 ‘강한 유감(strongly regret)’ 등의 강도높은 표현이 담긴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고 22일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의문에서 군함도에 관해 설명하는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선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역시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군함도 등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 다수 포함된 일련의 근대 산업시설을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 등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징용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 하지만 군함도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도쿄에 설치한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나 인권침해가 없었던 것과 같은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는 인권 침해의 역사를 부정하는 내용의 옛 군함도 주민 동영상 등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기도 하는 등 역사 왜곡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 정부와 뜻있는 한일 시민단체는 일본 정부에 징용 등 강제 노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도록 전시관을 개선할 것을 거듭 촉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약속한 조치를 성실하게 이행해 왔다”며 주장해왔다.

앞서 일본은 유네스코의 지적에 반발해왔다. 지난 12일 결정문이 최초 공개되자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이튿날인 13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국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왔다”고 주장했다. 교도통신도 지난 17일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반론을 펼치기로 방침을 세우고, 일본은 (산업유산정보센터 관련 설명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하지만 결정문은 토의 없이 채택됐으며, 일본 측도 이에 대해 추가 발언을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2021-07-22> 경향신문

☞기사원문: 유네스코, ‘일본 군함도 왜곡’ 결정문 만장일치 채택

※관련기사

☞연합뉴스: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징용설명 부족”

☞한국일보: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결의 채택… “강한 유감”

☞아시아경제: 유네스코, 日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문 채택

☞뉴시스: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정문 채택…”강한 유감”

☞MBC: 유네스코, ‘日 군함도 역사왜곡 비판’ 결의 채택

☞SBS: 유네스코, 군함도 역사 왜곡 비판결의 채택…”개선하라” 요구

금, 2021/07/2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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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 59. 서울 문래근린 공원 : ‘역사전쟁의 현장’ 5‧16쿠데타의 발상지

“자, 이제 작전을 시작합시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6관구 지하벙커에는 별 두 개가 달린 모자를 쓴, 한 마른 군인이 날카로운 눈매로 앞에 모인 장교들에게 결연한 어투로 말했다. 한국현대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5‧16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5‧16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당시 제2군 부사령관이었지만, 쿠데타 1년 전까지 서울을 방어하는 이곳 6관구(이후 수도경비사령부로 변함) 사령관으로 근무해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곳이 서울중심부에서 가장 가까운 부대라는 점을 고려해 박정희는 이곳을 5‧16쿠데타 지휘본부로 선택했다.

▲ 1961년 5월 16일 새벽 6관구를 출발해 중앙청에 도착한 박정희 소장

사전에 모의한대로, 이날 새벽 출동한 김포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 등 2500여 명의 군인들은 한강대교애서 가벼운 총격전을 한 뒤 한강을 건너 육군본부와 서울의 주요시설을 장악했다. 4‧19혁명이라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가 1년 만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장소는 1985년 6관구의 후신인 수도경비시령부가 이전하면서 문래근린공원으로 변했다. 이 공원은 지하철 2호선 문래역에서 내려 5분정도 걸어가면 만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많은 지역 시민들이 산책을 나오는 이곳이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서울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주민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생 시절 이 근처에 살았었지만, 전혀 이 같은 사실을 몰랐다.

▲ 5.16 쿠데타의 지휘본부였던 6관구 지하벙커가 이제는 서울 문래근린공원에 방치돼 있다. ⓒ손호철

특히 이 지하벙커는 공원 제일 구석에 위치해 있고 굳게 닫힌 그 입구에는 아무런 표시조차 없이 운동기구들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로부터 잊혀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벙커 앞에 서자 이곳이 한국현대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비극의 현장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지하벙커에서 조금 가면 낯익은 얼굴이, 낯익지 않는 복장으로 우리를 맞는다. 별 두개 달린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는 박정희의 흉상이다. 5‧16쿠데타 당시의 박정희를 형상화한 동상으로, 그 밑에는 ‘5‧16혁명발상지’라는 한자어가 우리를 맞는다. 5‧16쿠데타가 아니라 ‘5‧16혁명’이라고? 오른쪽에는 초록색 새마을기가, 왼쪽에는 태극기가 펄럭이는 동상의 뒷면에는 오랜 세월동안 마모되어 읽기가 쉽지 않은 글씨들이 나타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불의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던
나라를 구하려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년 7월 7일’

▲ 박정희 흉상 밑에는 ‘5.16혁명발상지’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손호철

5‧16쿠데타 5년 뒤인 1966년, 즉 55년 전에 만든 동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동상을 올려다 보고 있자, 몇 년 전 처음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받은 경험이 생각났다. 수면내시경이라 주사를 맞자마자 잠들고 말았는데 잠에서 깨자 검사가 끝나 있었다. 헌데 근 20년간 몸이 아플 때면 찾아가 잘 아는 동네의사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 암이구나.’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래 몇 기에요?” 의사의 답이 황당했다. “몇 기가 아니라, 교수님 왜 박정희 욕을 그리 하세요?” ‘아니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 알고 보니 마취주사로 수면을 시키자 갑자기 “박정희 개XX”하며 계속 욕을 하더라는 것이다. 어린 대학시절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도 가고 대학도 잘렸지만, 그렇다고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깊은 잠재의식 속에 박정희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다니. 나 역시 놀랐고 ‘내 자신이 수양이 덜 됐구나’ 부끄러워 한 적이 있다.

이곳은 지나간 역사의 한 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현대사를 놓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전쟁’의 치열한 현장이다. 2000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박정희가 ‘한 목숨 다해 충성함’이라는 충성혈서까지 써서 만주국 일본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친일 경력에 주목해 이 흉상에 욱일승천기를 씌운 뒤 밧줄로 묶어 쓰러트려 홍익대로 가져가려다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영등포구청은 동상 철거 과정에서 코 부분이 훼손된 흉상을 다시 설치했고 2006년 ‘박정희 대통령정신문화선양회’가 코를 복원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이 거세던 2016년 12월, 조형예술가 최황 씨는 이 흉상에 빨간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흉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에도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하라’라고 쓰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만주군에 합류한 친일군인이었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으며, 경제발전을 빌미로 수많은 비민주적인 행위와 법치를 훼손한 인물이다. 또 한국사회에 ‘빨갱이’라는 낙인효과를 만들어낸 악인이다.” 법원은 그에게 이런 방법이 아닌 여론 청원 등 다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100만원 벌금형을 선고했고 최 씨는 항소했다.

이 같은 수난의 역사를 잘 증언하는 듯, 이 동상은 넓은 면적을 보호구역으로 만들어 4면을 철제 울타리로 보호하고 있다. 동상 옆에도 ‘경고 : 박정희 대통령 흉상과 지하벙커에 대하여 손괴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민형사 처벌함을 경고함 – 박정희대통령 흉상 보존회’라는 경고문과 ‘그립습니다, 우리의 영웅이시여. 전국여성구국총연합’이라는 화환이 놓여있었다.

▲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 흉상을 훼손하면서 흉상 주위에 철장을 쳐 보호하고 있다. ⓒ손호철
▲ 박정희 동상이 민주화 이후 여러차례 수난을 당하자 박정희 지지자들이 경고문을 설치해 놓았다. ⓒ손호철
▲ 박정희 지지자들이 보낸 화환 ⓒ손호철

이곳에 서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박정희는 최 씨와 진보세력의 주장처럼 다른 젊은이들이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군인에, 민주정부와 민주세력을 짓밟은 독재자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그의 동상은 철거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끄러운 역사로 보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는 냉전적 보수세력이 신봉하듯이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한 ‘구국의 영웅’인가? 두 극단적 입장 중간에는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일정한 공이 있지만 과오가 더 크다는 ‘공3과7론’으로부터 일정하게 과오가 있지만 공이 더 크다는 ‘공7과3론’ 등 다양한 입장이 있을 것이다. 이승만과 함께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임에 분명하다.

결국 이 문제는 1) 우리의 경제발전이 과연 박정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인가? 2) 만일 경제발전이 박정희 때문이라면 그 성과가 박정희가 가져온 많은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는 긍정적인 것이었는가라는 문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8. 구미 박정희생가, <프레시안> 2021년 4월 16일자 참조). 그러나 그가 확실히 보여준 것이 있다. 그것은 ‘총으로 일어선 자, 총으로 쓰러진다’는 교훈이다. 그는 부인(육영수)을 총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에 쓰러졌다.

후기 : 마산의 역사전쟁

▲ 창원시 회원천변에 설치되어 있는 ‘5.16군사혁명기념비’. 이 역시 민주화 이후 시민단체들이 철거해 개천에 버린 것을 주민들이 다시 세웠다. ⓒ임영일 박사 제공

박정희와 5‧16을 둘러싼 ‘역사전쟁’은 문래동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창원시 마산의 회원2동(회원남로)이 대표적이다. 회원천변에는 임진왜란 이후 우리 역사를 지켜봐온 500년 된 거목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방자한 세력이 재앙을 부르는 것을 우리 군대가 나서서 위무도 당당하게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 밑에는 생뚱맞게도 이 같은 ‘5‧16군사혁명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5‧16쿠데타 발생 두 달 뒤인 1961년 8월, 쿠데타에 참가한 사단장 집안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끝장낸 부마항쟁이 20주년 되던 1999년, 열린사회희망연대라는 한 시민단체가 “유신 철폐에 온 몸을 불태웠던 민주의 고장 마산에 아직도 유신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이 비를 철거해 천변에 버렸다. 하지만 보수적 주민들이 비석을 끌어올려 원래의 자리에 다시 설치했다. 그 옆에는 동민을 대표한 보존회장의 이름으로 이를 다시 설치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이제는 여러 글씨가 없어져 읽기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글씨들을 복원해보면 ‘(…) 광명의 역사든 오욕의 역사든 (…) 보존하여 역사의 반면교사로 나라발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 다시 세운다’고 쓰여 있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21-07-23> 프레시안

☞기사원문: 철거냐 존치냐, 서울 복판 박정희 흉상을 보며

금, 2021/07/23-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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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친일잔재 청산 관련 조례 발의… 2019년 9월 18일
도내 유·무형 문화유산 대상, 잔재 조사연구 용역… 지난해 4월 완료
이재명 경기지사, ‘2021년 경기도 친일청산 원년’ 선포… 청산 박차
생활 속 무형의 잔재 주목… 실질적 실천운동 확산 노력

▲ 경기도는 도청 신관 4층 대회의실에 걸린 역대 도지사 액자 가운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대 · 2대 · 6대 · 10대 도지사의 액자 밑에 친일 행적을 부착했다. (사진=경기도 제공)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고유문화가 불순한 의도에 의해 훼손되거나 왜곡, 심지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받아들인 문화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화를 위한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강압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주입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한국인이 ‘싸움이나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하는 상태’를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말이 있을까.

일제잔재 청산의 문제는 이제 ‘지속적인 실천운동’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더 이상 간헐적인 지적과 막연한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방향성과 대상의 채택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 경기도가 지난 3월부터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120개소에 대한 알리기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사진=경기뉴스광장 제공)

경기도에서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 복원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발의된 것은 지난 2019년 9월 18일이다. 이 조례는 일제에 의해 도에서 사라진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복원하고 지원하는데 필요한 사항 규정을 목적으로 한다고 제1조를 통해 명시했다.

또한, 4조에는 도지사가 실태조사를 할 수 있고, 전문성과 인력을 갖춘 연구기관이나 법인 또는 단체에 이를 의뢰해 실시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 사업의 경우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 연구, 문화 복원 및 청산, 문화에 관한 출판물 발간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관리와 교육·홍보, 전문 인력 육성 등을 가능하도록 했다.

경기도는 곧바로 친일 목적으로 제작된 도내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잔재 조사연구 용역에 돌입, 2020년 4월 완료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예술 분야 일제잔재 청산 공모 사업, 친일문화잔재 기록보관소 구축 및 활용 사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 경기도가 실시한 ‘새로운 경기도 노래’ 작곡 공모전에 총 1084곡이 참여, 이를 선정할 도민심사위원단을 모집했다. (사진=경기도 제공)

당시 용역에서는 일제강점기(1905년~1945년 8월)에 형성된 생활문화 속 친일잔재에 대해 시공간적 범위와 용어 및 개념 정의, 이에 따른 자료 수집과 조사 연구를 통해 친일 인물 257명, 친일 기념물 및 송덕비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 일제잔재를 밝혔다.

이 가운데 대표적 친일잔재로 경기도가(京畿道歌)와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꼽혔다. 수십년 동안 불려진 경기도가가 친일파 이흥렬이 작곡한 것으로 드러나자 도는 발빠르게 공모를 진행, 도민들의 참여 속에 ‘경기도에서 쉬어요’라는 새로운 경기도 대표 노래를 탄생시켰다.

▲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2021년을 경기도 친일청산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강조, 철저한 조사와 준비작업을 통해 잔재청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진=경기도 제공)

이 노래는 매일 아침 경기도청 청사에 울려퍼지고 있다는데, 마치 우리에게 하루 한 번씩 ‘친일잔재, 일제잔재는 꼭 청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31일 송년 제야행사에서 처음으로 공개, 올해 시무식 행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선보였다는 점도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지난 3·1절 기념식에서 ‘2021년을 경기도 친일청산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나하나 철저하게 조사하고 착실하게 준비한 뒤 가열차게 추진해 나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경기도는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박힌 친일문화 잔재 청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일제잔재의 유형은 크게 인적·물적 잔재, 유형·무형의 잔재, 친일 잔재, 민족말살정책의 산물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문제들임에 틀림없다.

▲ (사진=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 포털서비스 홈페이지 메인 화면 캡처)

인적·물적 잔재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포함해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맺어져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기득권을 유지한 ‘친일파’,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친일재산을 말한다.

또 일제가 침략전쟁과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물과 선전 조형물 등 유형의 잔재와 장기간 식민지배 하에서 오염된 정신문화와 훼손된 전통문화 등을 일컫는 무형의 잔재가 있다.

이와는 별개로 그들의 행위와 주장을 미화·옹호하는 논리와 기념사업 등 친일잔재,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 멸실된 문화와 원형이 손상된 건축 문화유산 등 민족말살정책의 결과물 등이 여기에 속한다.

▲ ‘매일신보’ 1933년 10월 26일자. ‘조선잠업계(朝鮮蠶業界)의 은인(恩人) 미야하라(宮原) 씨 동상 건립(銅像 建立), 31일 성대한 제막식 거행’. (사진=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 포털서비스)

이 가운데 우선적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무형의 잔재’로, 그 중에서도 제대로 알지 못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거나 왜곡돼 전해지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소개하려 한다.

특히 생활문화 속 잔재들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짚어보고, 실질적인 실천운동으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예컨대, 일제식 생활잔재로 분류되는 ‘삼베 수의’의 경우 언제부터 쓰였는지, 그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등을 전문가들과 함께 자세히 알아보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한반도에 마을굿 대신 일본의 국체관념인 신사신앙을 이식하기 위한 정책이 본격화된, 1936년 이후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물론 보존이냐 철거냐를 놓고 논란이 많은 건축물이나 기념비 등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강헌)이 심혈을 기울여 진행 중인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 1차 사업으로 선정된 단체들 가운데 프로그램을 선별, 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도 갖게 될 것이다.

말그대로 부지불식간에,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잔재는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명확히 알고 없애기 위한 노력들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고유문화의 정통성을 찾고, 그 위상을 올바로 정립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뤄서는 안 되는 일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또한 기대해본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2021-07-25> 경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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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21/07/26-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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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기획
인터뷰/신카이 도모히로 강제연행 재판 지원모임 사무국장

유네스코 세계유산위 결정문 채택
“군함도 강제노역 피해 외면 유감”
일 강제동원 피해 규명 활동 시민들
“피해 목소리 들을 때 역사 숨쉬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 메이지산업혁명유산 23곳 가운데 한곳인 군함도. 2차대전 당시 일제는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를 군함도와 다카시마, 나가사키 조선소 등에 몰아넣고 비인간적 노동을 시켰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강제노동을 포함한 ‘전체 진실’을 알리라고 권고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6년째 모른 척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한국인 등의 강제노역 피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 추모 조치 역시 미흡했다는 데 강한 유감을 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가 22일 일본 나가사키현 군함도(정식 이름 하시마·端島) 등에서의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강제동원 진실을 감춘 일본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결정문을 채택했다. 통상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는 유네스코가 ‘강한 유감’이란 표현까지 동원해 날을 세운 것은 일본 정부의 태도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도쿄 신주쿠 총무성 제2청사 별관 건물에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과거 군함도 주민 입을 빌려 “군함도에서 (조선인이) 괴롭힘당했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이 친절했다”는 식의 가짜뉴스 홍보를 하고 있다. 애초 일본 정부는 2015년 7월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제39차 회의에서 군함도 포함 메이지산업혁명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조건으로, 이 센터를 통해 군함도 등에서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5년이나 뜸을 들인 끝에 문을 연 센터는 오히려 강제동원 역사 왜곡의 전초기지 구실을 하고 있다. 위원회는 세계유산 등재 때 해당국이 약속한 이행 조건을 2년마다 점검하는데, 지난달 조사단을 파견한 뒤 일본 정부가 ‘전체 역사’를 알리라는 권고를 여태껏 이행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지난 12일 누리집에 공개했다.

일본 정부는 왜 군함도의 진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2차대전 시기 강제동원 피해자를 돕는 일본 시민단체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신카이 도모히로 사무국장은 “일본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과거 불법적 식민지배와 아시아 국가 침략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20, 22일 <한겨레>와 한 비대면 화상과 서면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는 ‘징용의 특성상 대상자가 본인 의사에 반해 끌려왔을 수 있지만, 전시 징용은 합법적 수단이며 (법적) 문제는 없다’는 논리를 편다. 이런 배경에는 한반도 병합 자체가 합법이었으며, 이후 한국인을 상대로 한 일본의 모든 행위는 ‘법에 근거한’ 합법 행위라는 인식을 깔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카이 사무국장은 일본 내 평화운동가이자,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2차대전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해왔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한국 평화단체들과도 긴밀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일본 군함도 한 건물의 잔해. 연합뉴스

식민지배 구현한 두 얼굴의 군함도

―군함도는 어떤 섬이었나?

“일본의 근대화에서 군함도는 여러 지위를 갖는다. 우선 정부 입장에선 품질 좋은 석탄 공급원으로 단기간에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를 이끌어준 원동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의 제철업이 성장해 산업화, 군사화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반면, 군함도는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비인간적 노동을 강요한 섬이기도 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2차대전 당시 한반도 사람들을 끌고 와 가혹한 노동을 시켰고, 1944년에는 중국인을 납치해 강제노동을 시켰다.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구현한 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 정부가 군함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애초 일본 정부는 군함도의 세계유산 추진이 국제적으로 큰 논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느슨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군함도가 일본 산업화의 상징 같은 재벌 기업인 미쓰비시 소유의 섬이자, 국가에 막대한 석탄원료를 공급했던 곳이어서 군함도를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산업혁명에 공헌한 지역으로 묶어 설명하려 했을 거다. 또 일본 함선의 모양을 닮은 군함도가 비주얼적으로도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바다 위에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와 4~10층짜리 고층건물 10여동이 세워진 군함도가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만큼, 관광자원이라는 점에서 군함도를 반드시 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함도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갱구와 호안 일부뿐이다.”

―군함도에 한국인 피해자가 유독 많았다.

“역설적으로, 일본 정부가 세계문화유산의 강제동원 지역 논란 때마다 주로 군함도로 관심을 돌리는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미국이나 영국 등이 강제동원 문제에 클레임을 제기하는 것이다. 마침 군함도에서는 연합군 포로가 일하지 않았다. 일본 입장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문제에서 연합군 포로가 초점화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군함도는 (주로 한국인 강제노동이 이뤄졌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대립’이란 구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정부 차원의 약속마저 지키지 않는 태도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사실 한반도에서 강제동원은 1939년부터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이를 ‘모집’이나 ‘알선’에 의한 것으로, 노동자 본인의 자유로 일본에 넘어온 것이지 강제동원은 아니라는 주장을 고수해왔다. 여기에 더해 1944년 9월 이후는 일본인도 영장이 나오면 징병·징용을 따랐던 시기인데, 이때 일본 정부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본인 의사에 반해서 이뤄졌더라도 불법은 아니라는 식이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오류다.”

군함도 강제징용 피해자 고 최장섭씨는 “강제징용 당시 느닷없이 개 패듯 패가지고 강제로 (나를) 들고 나갔다”며 “(군함도에서) 도주하다 붙잡히면 고무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당했다”고 기억했다. 징용자들이 이곳을 ‘지옥섬’으로 불렀던 이유다.

―산업유산정보센터에서 강제동원의 진실은 어떻게 은폐됐나?

“한국인들이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강제노동이나 차별은 없었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시 내용 가운데 부모님이 한국 사람으로 어린 시절 현지에 살았던 스즈키 후미오씨는 ‘조선 사람이라서 괴롭힘당한 걸 본 적이 없다, 반대로 귀여움을 받았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스즈키씨의 부친은 강제동원기 훨씬 이전에 온 일반 노동자로, 강제동원의 실상을 알 수 없었고 스즈키씨가 군함도를 떠난 건 8~9살 때였던 1942년이다. 아울러 군함도는 아니지만, 다른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서 중국인, 연합군 포로(네덜란드·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 강제동원 피해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했으면 한다. 군함도와 다카시마에는 중국인이,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는 연합군 포로가 한국인과 함께 일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에 대해 완전히 침묵한다.”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강제동원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고 서정우씨 등의 증언이 서적으로 남았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군함도 탄광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인원수나 이름을 추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군함도에 1944년에 연행된 중국인은 204명인데, 이들 전원의 이름과 출신지를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작성된 미쓰비시의 ‘사업장 보고서’를 보면, 사망자나 공상병자의 기록이 있다. 화장·매장 인허증 등으로 이름과 출신지, 사망 상황 등을 알 수도 있다. 머나먼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를 기억에 남기기 위한 전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본 시민단체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연행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신카이 도모히로 사무국장은 22일 <한겨레>와 한 비대면 화상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가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불법적 식민지배와 아시아 국가 침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숨쉬는 역사 위해 필요한 건 ‘진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와 국제사회의 거듭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적반하장식 태도를 바꿀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15년 7월 세계유산위원회 산업혁명유산 심의 때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던 일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도, 이후 불가피한 합법 행위란 식으로 둘러대고 있다.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결정문 채택은 어떤 의미가 있나?

“강제노동을 이해할 수 있는 ‘전체 역사’를 전시하지 않은 것, 희생자를 기억할 전시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유네스코 정신에 걸맞은 지극히 공정하고 온당한 것이다. 세계유산위가 당연히 내놨어야 하는 것이고, 이 권고를 지지한다.”

―어떤 방향으로 매듭지어야 할까?

“일본 정부의 역사 부정·왜곡 움직임을 정말 우려하고 있다. 2차대전 패전 후 70여년 동안 전쟁과 침략 행위, 식민지배 등에 관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립하지 못한 결과다. 교육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과거로부터 배우는 자세를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부과학성을 포함한 일본 정부가 근본적으로 역사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의 적반하장식 태도에 대해 각국 정부뿐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단체들도 활동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국내에선 민족문제연구소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등이 지난 16일부터 약 넉달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historymuseum.or.kr)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한 한·일 시민연대 온라인 공동행동도 본격화하는 등 더 강하게 어깨를 겯고 있다. 신카이 사무국장은 “전쟁 희생자, 피해자의 ‘소리 없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역사는 피가 통하고, 살아 숨쉬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24> 한겨레

☞기사원문: “일, 군함도 역사왜곡은 침략전쟁 인정 않겠다는 것”

월, 2021/07/2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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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그 후] ‘미니풋볼’ 제작사, 메일로 입장 보내와… “한국인에 상처될 줄 몰랐다”

▲ 전세계적으로 천만 명 이상이 다운받은 “미니풋볼” 게임에 등장한 욱일기. 경기장 이름이 Rising Sun, 욱일이다. ⓒ 미니클립
▲ 전세계적으로 천만 명 이상이 다운받은 “미니풋볼” 게임에 등장한 욱일기. 경기장 이름이 Rising Sun, 욱일이다. ⓒ 미니클립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 이상 다운로드 한 구글플레이 인기 게임 ‘미니풋볼(Mini Football)’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 경기장이 삭제 조치됐다.

19일 <오마이뉴스> 기사 <천만 다운 게임에 버젓이 등장한 전범 상징 ‘욱일기’>(http://omn.kr/1ui8h)가 나간 직후에 취해진 조치로, 해당 내용을 제보한 김아무개씨는 “이렇게 빠르게 변화가 생길 줄 몰랐다”면서 “이제 마음 편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미니풋볼을 제작한 미니클립 측은 보도 당일 오후 6시께 기자에게 이메일을 통해 “이 사안에 대해 사과한다”면서 “미니클립 측은 욱일기 경기장이 (한국인에게) 상처가 될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게임에서 제국주의 깃발이나 메시지를 묘사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문제를 유발한 인식부족에 대해 사과드린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한 마디로 욱일기의 의미를 몰라서 사용했다는 것인데, 앞서 18일 <오마이뉴스>는 미니클럽 측에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와 다르지 않은 일제의 상징(욱일기)을 게임에 사용한 의도’를 직접 물은 바 있다.

앞서 개발사 미니클립은 지난 9일 공지를 통해 “7월 15일 떠오르는 태양 시즌(Rising Sun Cup)이 시작된다. 새로운 이벤트가 8월 12일까지 이어진다”라고 알리면서 게임 속 경기장인 ‘Rising Sun(욱일)’ 운동장 바닥에 욱일기와 같은 무늬를 새겨넣었다.

해당 게임에서 경기장 바닥 배경으로 사용된 ‘욱일’ 문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사용한 제국주의 깃발 모양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작성한 ‘식민지 비망록’에 따르면 욱일기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 때마다 빠지지 않고 선봉에 등장했다. 일제는 시베리아 침략전쟁과 간도침공,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자신들이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욱일기’를 선두에 걸고 전쟁에 임했다.

한편 게임 미니풋볼의 제작사인 미니클립은 스위스 눼샤텔주에 본사를 둔 회사로 2001년 창립했다. 이후 핸드폰 모바일 시장이 발전함에 따라 회사 규모 역시 가파르게 상승해 매년 £2억(3150억 원)이 넘는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김종훈(moviekjh)

<2021-07-20>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욱일기’ 삭제 스위스 게임업체 “의도하지 않았다”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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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천만 다운 게임에 버젓이 등장한 전범 상징 ‘욱일기’

월, 2021/07/2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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