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 최봉선과 춘향사당 1931년 춘향제를 시작한 남원권번 으뜸 기생 최봉선과 전국의 권번과 남원 시민들의 성금으로 지은 춘향사당 ⓒ 화면캡처
날도 뜨거운데 남원은 ‘춘향영정 문제’로 나날이 더 뜨겁다. 1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춘향영정 봉안 문제는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는 한심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최근 <연합뉴스>(7.22) 기사(친일 작가가 그린 남원 광한루원 ‘춘향 영정’ 교체 왜 늦어지나)에 달린 댓글만 봐도 ‘소설 속의 인물인데 무슨 영정이냐? 춘향이한테 제사도 지내냐?’ 하는 볼멘 소리가 끝도 없다.
춘향제는 1931년에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축제다. 일제강점기 남원 예기권번의 수기생이었던 최봉선의 제안으로 춘향 사당을 만들고 영정을 봉안한 뒤 제향을 올린 게 춘향제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최봉선과 전국의 예기권번 기생들, 그리고 남원의 뜻있는 인사들은 왜 춘향제를 시작했을까? 당시 권번의 기생들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창기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는 예술인들이었다. 그런 기생들이 춘향의 제사를 지낸 이유를 알면 영정 문제를 결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춘향제는 남원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전국의 예기권번에서 성금을 냈고 100여명의 대표 기생들이 참여해 제향을 올리고 광한루에서 판소리 명창 대회를 했으니 가히 전국구 행사였다. 구경꾼들도 전국에서 수만 명 씩 몰렸다.
춘향사당을 짓는 운동은 1929년부터 시작되었다. 1929년은 만세운동 10주년이 되는 해였고 전국의 신간회와 청년동맹, 형평사 같은 항일운동 단체에서 제2의 만세운동같은 대규모 시국대회를 준비했다가 발각이 되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한 해다. 11월에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신간회가 다시 일어서고자 했으나 탄압을 받아 결국 국내 독립운동은 거의 힘을 잃게 되었다.
‘남원항일운동사’에 의하면 당시 남원에도 항일운동 단체로 신간회와 청년회, 형평사가 있었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지회장 겸 총무로 뽑힌 이현순, 그리고 청년회 회장이었던 정광옥, 이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최봉선과 함께 춘향사당 건립운동의 핵심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 전북 권번을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전북에서 유일하게 남원권번에서는 돈줄이었던 일본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던 일본말을 안 가르쳤다고 한다. 최봉선은 인물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창으로도 유명했으며 구례 수재민 돕기 공연을 펼치기도 한 매우 비범한 기생이었다.
최봉선은 29세에 기생을 그만두고 부산관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을 운영하면서도 사당 할매로 불릴만큼 영정과 사당을 지키는데 헌신했고 6.25전쟁 때는 영정을 머리에 이고 피난을 가서 영정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제수답으로 기증해 춘향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춘향선양회에서 발행한 ‘춘향제 60년사’에서는 춘향제의 시작을 ‘일제 하에 잠든 민족혼을 깨우쳐 주면서 춘향정절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 민족 모두의 가슴 속에 뿌리내려 춘향전의 문예적 가치를 만방에 빛낼 목적으로 발상하였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남원시민들은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91년 동안 춘향제를 지내왔다.
그런데 춘향영정에는 우역곡절이 많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조선식산은행장 하야시 시게조가 내선일체의 방편으로 당시 가장 인기 아이템이었던 춘향을 악용한 것이다. 당시 조선 고위층 부인들이 조선 총독에게 전쟁 승리를 위해 쓰라며 패물과 돈을 바치는 ‘봉차금납도’라는 그림을 그린 당시 최고의 화가 김은호에게 춘향 영정을 새로 그리게 했다. 그 때 그림값을 낸 사람은 호남은행장 현준호였다. 김은호와 현준호는 반민족친일인명사전에 나오는 우리나라 대표 친일파다.
▲ 춘향제를 탄생시킨 춘향영정 60여년간 남원향토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던 최초 춘향영정.이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고 제향을 지내면서 춘향제는 시작되었다. ⓒ 남원향토박물관
그 때 김은호가 그린 춘향이는 일본과 식민지 치하 조선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일본 전통극 가부키 형식의 춘향전에 등장하는 얼굴 하얀 춘향이었다. 그리고 그 춘향이를 16세 아가씨로 그렸다. 본래 영정은 어사부인이 된 30대 쪽진 머리를 한 춘향이였는데 말이다.
일제는 봉안식이 아니라 일본의 신사에서 하는 ‘입혼식’을 한 뒤 본래 있던 영정 위에 일본 춘향이를 덧세우게 했다.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이중 봉안이었다. 그런 치욕을 견디며 해방을 맞았건만 친일파 청산이 안 됐듯이 김은호가 그린 영정도 치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누군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칼로 찢어 버렸다. 일제의 국민정신총동원 전남 이사장이었던 현준호도 광주에서 피살되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그렇게 끝났다면 오늘의 영정 싸움도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1년, 6.25때 훼손되어 없어진 영정과 똑같은 영정이 다시 춘향사당에 쳐들어 오는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이쁜 춘향이로 대치하라(1965.5.11 조선일보)’는 명령과 함께 원래 영정을 내쫓고 김은호가 새로 그린 춘향이를 다시 올린 것이다. 그 춘향이는 예전에 없어진 것과 거의 똑같은 왜색 춘향이 그림이었다.
2021년 올해는 최초 영정이 쫓겨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1965년 조선일보에서 최봉선은 ‘관에 밀려난 고전 춘향의 초상화를 반드시 돌려 놓겠다고 관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1966년 신문 기사를 마지막으로 최봉선이라는 이름조차도 남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잊혀진 이름 최봉선과 최초 영정의 존재는 작년 친일화가 김은호의 그림을 내린 뒤 다시 떠올랐다. 영정이 남원 향토박물관 수장고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남원시는 당연히 그 영정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일부 시의원들이 좀 더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봉안을 막았고 거의 1년 가까이 시민들의 뜨거운 원성을 무시한 채 봉안을 미루고 있다.
미루는 것뿐만 아니라 작년 12월부터 ‘춘향영정 제작(선정) 기본계획 용역’ 설문조사(최초 영정 봉안이 우세하게 나왔으나 발표하지 않음)와 연구용역을 실시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그리기로 작정한 것이었기에 연구용역 결과는 그런 결과가 나왔다. 미술사 관련 전공자들로만 구성된 연구자들이 연구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보고서만 내놓고 지금까지 발표의 의무를 수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남원시는 최근 연말 안에 제3의 작품을 공모할 계획이라고 언론(7월22일 연합뉴스)을 통해 밝혔다. 그 이유는 최초 영정의 작가가 정확하지 않고(강수주 화백 낙관이 없고) 소설 속 춘향이는 16세인데 반해 영정 속 인물은 30대 어사부인이고 복식이 조선시대가 아닌 1920년대라는 이유다. 시가 이렇게까지 영정을 새로 그리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시민들은 몹시 궁금하다. 최초 영정은 안 된다면서 시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 대한 답은 내가 알려주겠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그린 영정에 누가 낙관을 찍을 수 있겠는가? 본래 영정에는 낙관을 안 찍는 경우가 많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김수로왕의 영정도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잘 봉안되어 있다.
복식과 나이가 안 맞는다고 했다. 최초 영정은 소설 속 예쁜 춘향이를 그린 게 아니다. 모진 고난을 이기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한 열녀를 그린 것이다. 그 항거정신과 한 남자를 향한 정절을 우리 민족을 향한 것으로 바꿔서 영정을 그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복식과 열녀로서 완성된 30대 어사부인을 그린 것이다. 열여섯살 예쁘기만한 어린 춘향이에게 뭐하러 제사를 지내겠는가? 이런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저런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축제인 춘향제의 위상은 최초 영정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악용된 춘향제가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는 매우 가치있는 일이고 굵은 땀방울이 아깝지 않은 뜻깊은 일이다. 1931년작 최초 춘향영정은 미술 작품이 아니고 영정이며, 박물관이 아니라 반드시 사당에 봉안되어야 한다.
모처럼 상식적인 이야기가 중국에서 전해졌다. 지난 7월 16일부터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된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의제 중 하나인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 대한 등재 후속 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초안대로 채택했다. 초안은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산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이 올해 6월 7일부터 9일까지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 방문과 온라인 회의를 통해 정리한 보고서와 결론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조사단의 임무는 ①각 시설의 전체역사 해석전략 ②한국인 등 강제노동 이해 조치 ③희생자 추모 조치 ④국제 모범 사례 ⑤당사자간 대화 등 다섯 가지 사항에 대해 일본정부가 2015년 등재 당시, 그리고 이후에 한 약속들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를 조사해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조사단은 위원회 결정의 여러 측면이 준수되었고 일부는 모범적인 방식으로 준수되었고 당사국의 여러 약속도 충족되었지만, 산업유산정보센터는 등재 당시 당사국이 한 약속이나 등재 당시와 이후에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아직 완전히 이행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조사단 보고서, 22쪽).”
디지털 해석 전략이라는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증강현실(AR) 지도와 몰입형 다중 디스플레이를 사용하여 세계적인 모범 사례를 구축했다고 평가했으나 한국 정부와 한일 시민단체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문제로 제기한 ‘전체 역사’에 관해서는 “여전히 불충분하며”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강제노동에 대한 기술이 없고, 희생자 추모를 기리는 시설도 없음에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한일 양국 정부와 전문가들의 의견 청취, 현장 방문과 관련 자료 조사 등을 근거로 보고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보고서 내용은 매우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서술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22일 군함도 탄광 등 일본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불이행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컨센서스로 채택했다. (사진합성·일러스트=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한 마디로 말해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조사단의 보고서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문이 지적하고 있는 핵심이다. 단순하지만 무게 있는 이 지적에 일본은 야단법석이다. 사실과 다르다니 한국 정부가 로비한 탓이라니 하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국제적으로 망신살을 뻗친 것이다. 이 망신살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은 등재에서부터 산업유산정보센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가토 고코라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공적 자산이자 공공기념 시설이 이처럼 한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부터가 공공성을 상실한 것이며 일본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가토 고코와 그가 전무이사로 있는 산업유산국민회의가 ‘역사수정주의’에 기초하여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모든 전쟁이 다 그렇다는 식으로 범죄성을 희석시키려 하듯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부정한다. 또한 난징대학살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의 역사를 교과서와 기념시설에서 삭제하려 한다. 그래서 어느 일본 평론가는 일본 역사수정주의를 “썩은 내 나는 것에 비단보를 덮어씌운 신판 황국사관”이라고 비판했던가. 그런데 최근 수년 동안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부인’과 ‘부정’을 넘어 오히려 한국 정부와 강제동원 피해자·유족들이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하고 있는 거짓말쟁이라고 국제무대에서 공격하고 있다. 산업유산과 관련해서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위탁 운영하고 있는 산업유산국민회의가 그 중심에 서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 3구역(참조 전시실)은 어린 시절 하시마 섬에 살았던 주민들의 구술 영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민족차별 없이 사이좋게 잘 지냈으며 강제노동도 없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가토 고코는 “한국이 왜곡된 역사를 선전하는 걸 바로잡기 위해서” 3구역을 만들었다고 조사단에 말했다. 탄광 노동을 하지 않았던 어린애들의 이야기로 수많은 강제동원·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생존 증언을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어처구니없다. 더구나 그 피해자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있으며, 인근 다카시마탄광에서는 연합군 포로들도 있었다. 주민들의 말대로라면 피해를 증언했던 그들 모두가 거짓말쟁이가 돼야 한다. 조사단의 질문은 왜 이런 피해자들의 증언은 전시돼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전시하는 흉내라도 냈더라면 보고서가 아마 이렇게까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 더 근본적인 비판을 하면,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비롯해 산업유산을 홍보하는 자료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의 삶조차 반영돼 있지 않다. 산업유산의 명암이 제대로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산업유산에는 단지 아시아 최초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는 기계와 ‘성공’이라는 빛바랜 신화만 등장한다. 이 유산에서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흘린 땀과 노력, 한숨과 눈물, 저항과 좌절, 그리고 희망과 절망 등을 읽어낼 수는 없다. 아니 그 흔적이라도 다음 세대에게 알려주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남은 것은 박제화된 전시장과 상품으로 바뀐 체험관, 그리고 녹슨 기계들뿐이다.
일본 정부가 다음 세계 산업유산으로 사도광산을 등재하려고 한다. 이 사도광산의 정보센터에는 일본인 노동자가 읊은 <나의 노래를>이라는 글이 전시될 수 있을까.
“사도금광은 나라의 보물. 언제나 황금꽃이 핀다. 조그마한 연립주택에서 광산으로 창백한 노동자의 행진곡소리-아직 밝지 않은 아이카와 바다로 퍼진다. 여기에 천 명의 삶은 굳어지고 눈뜨고 볼 수 없는 지하의 노동. 노동자는 바뀌고 또 바꿔서 오랜 세월 여기 무덤의 왕국 전각을 쌓아 올리고, 광산의 소리는 날마다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는 우리들의 소리일까? 지하 1천 척 갱도에서 생명줄 칸델라에 죄수처럼 곡괭이를 흔드는 노동자, 오늘도 ‘규폐’로 피폐해진 2번 갱의 노동자, 불사신의 나는 날마다 비틀거리고, ‘비틀거리’면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나, 놈들은 결코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1931년)
세계유산위원회가 권고한 ‘전체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을 포함한다. 그럴 때 비로소 산업유산은 ‘희생자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장, 시민 학습의 장, 국제적인 학술 교류의 장’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필자는 한일 정부와 시민사회에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역사 갈등의 장이 아니라 함께 ‘동아시아 공동 기억의 집’으로 만들어 가자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그러나 지금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볼 때, 이런 제안은 사치스럽다. 세계유산위원회가 결정문을 채택하자 가토 고코는 산업유산국민회의 누리집에 올린 ‘유네스코 결의, 유네스코·이코모스 전문가 보고서에 대해’라는 글에서 보고서 내용이 사실에 반하며, 전문가들이 한국인 피해자를 전쟁포로(POW)로 잘못 알고 있다고 황당한 주장을 한다.
도대체 어느 전문가가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를 전쟁포로라 했는가. 산업유산의 ‘전체 역사’에 한국인 외에 연합군 포로도 강제노동했다는 사실을 기록하라고 요구한 걸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오해인가 무지인가. 게다가 그는 ‘희생자’에 대한 견해가 조사단과 다르다고 항변한다. 그는 희생자라는 단어가 가해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쓰기 싫어하는 속내를 내비친다. 그래서 그냥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희생자 추모’를 대체하려는 편법을 제시한다. 위원회의 결정을 전혀 외면할 순 없으니 이런 저런 형태로 물타기를 시도하려는 모양이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올해 초, 한 인사가 친일파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주거 격차를 드러낸 사진을 가져와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뭘 한 걸까? 100년 전에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또한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등 한일간의 역사에서 비롯된 갈등을 바라보는 주류의 시각 중에는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여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박시백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광복 76주년,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다.”
일본에 강제 병합된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35년에 이르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만화로 풀어낸 작품 《35년》의 저자 박시백이 《친일파 열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35년이라는 방대한 역사에서 친일파의 역사로 초점을 좁혀 촘촘하게 훑어내어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친일 청산’이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현재성을 불어넣는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왜 친일 청산이 여전히 현재의 문제인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방이 된 후에도 친일파는 청산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우리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역사를 빼놓고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침략자에 붙어 민족을 배반했고 해방 후에도 주류가 되어 떵떵거렸던 당사자들은 이제 생물학적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의 혈연적, 사상적 후예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35년》이 던진 질문에
《친일파 열전》으로 답하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다룬 전작 《35년》에서 저자는 3‧1운동을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독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3‧1혁명 이후로 독립운동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으며, 조선의 민중은 근대인으로 거듭났다. 일제 또한 크게 당황하여 식민 정책을 바꾸었고 감시의 눈은 더욱 은근하고 집요해졌다. 그런 와중 3‧1혁명을 ‘절호의 기회’로 본 이들이 있었다.
“능력이 없으면 나라가 부강해질 수 없다”, “조선 청년이여, 경거망동을 그만두어라”, “반성만이 살길이다” 등 ‘불령하고 어리석은 조선인’을 향한 수많은 경고와 꾸짖음이 신문과 강연 등을 통해 쏟아져 나왔으며, 더러는 직접 진압봉을 움켜쥐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에게 있어 3‧1혁명은 하나의 ‘건수’였으며 총독부의 눈에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졌던 학생항일운동, 비밀리에 움직인 크고 작은 독립단체 등 숱한 ‘기회’마다 ‘건수’를 놓치지 않은 이들의 손에 무고한 목숨들이 스러져갔다.
친일파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친일파 열전》은 외교권을 빼앗겼던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이후까지, 친일파의 탄생부터 이들이 어떻게 세를 불리고 어떻게 부를 쌓아왔는지 또 해방 이후 어떻게 그 죗값을 피해갔는지를 상세하게 추적한다.
《35년》에서 저자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역사를 왜 배우는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흔히 답한다. 혹자는 역사에서 살아갈 지혜를 얻는다고도 한다. 그런데 항일투쟁의 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던 반면 친일 부역의 길은 안락과 영화의 길이었다. 후자처럼 사는 게 역사에서 얻는 지혜가 되어버리고 만다면 역사를 배우는 건 너무 참담한 일이 된다.”
《친일파 열전》은 이 문제에 대해 저자가 내놓은 한 가지 해결책이다. 친일파들의 후손이 현재진행형으로 걷고 있는 안락과 영화의 길 아래에는 이제는 잊힌 수많은 목숨이 깔려 있다. 해방 이후, 무수한 친일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얄팍한 변명을 통해 처벌을 피해갔다. 이 책은 흔히 ‘친일을 했다’라고 뭉뚱그려지는 행위가 실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무고한 이들을 사지로 내몬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비극이 거기서 기인했는지 치밀하게 추적하여 그려냄으로써 건조한 사실에 진실의 음영을 더한다. 그럼으로써 비틀린 순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그간 은폐해왔던 우리 사회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에 맞는 처벌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지혜를 얻을 만한 역사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이후까지,
친일의 탄생과 역사를 파헤치다
이 책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의 인물 중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150여 명의 친일파를 가려내어 그 행적을 낱낱이 공개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인물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3장으로 구성했다.
먼저 제1장 ‘친일의 역사’에서는 강화도조약부터 해방 직후까지 친일의 형성과 역사를 넓게 짚는다. 뒤이어 소개할 각계각층의 친일파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시간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굵직한 인물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제2장 ‘우리는 황국신민이다’에서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등의 국적들,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 경찰과 밀정들, 만주에서 활동한 친일파들 등을 각각 분류하여 소개한다. 제3장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주름잡았던 명망가들의 친일 행위, 관리들과 군인들, 문학계, 연극계, 영화계, 음악계 등 각계각층에서 활약한 친일파들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부록으로 수록된 ‘박시백의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150여 명의 친일파의 행적을 찾아보기 편리하도록 정리했다.
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의 정신을 이어받다!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특별 기획
평생 친일문제 연구에 헌신한 임종국 선생이 1989년 타계한 후, 그 유지를 이은 후학들이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를 열었다. 1999년 ‘제2의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자’는 운동을 시작, 2009년 11월 8일, 드디어 4,389명의 친일파 명단이 들어간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다. 박시백 작가는 《35년》으로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로부터 제14회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기념사업회는 ‘역사의 사각지대를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국내외에서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는 시점에 창작을 통해 역사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박시백 화백의 노고와 도전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 작가를 수상자로 결정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 30주년 특별 기획으로 박 작가에게 친일파의 탄생과 역사를 새로 구성한 역사 만화책 출간을 제안한 것도 바로 이런 인연 때문이다. 박시백 작가 역시 임종국 선생의 유지대로 ‘각 분야의 친일파들을 널리 알려 그들이 우리 현대사에 자리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위상을 바로잡는 것이 시대적 과제인 친일 청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고, 광복 76주년을 맞아 《친일파 열전》을 출간하게 되었다.
■ 저자 소개
박시백
제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후, 〈한겨레〉의 만평으로 데뷔했다. 스토리가 있는 시사만화 ‘박시백의 그림세상’으로 독자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2001년 돌연 신문사를 떠난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는 작업에 매진했고, 12년 만인 201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을 완간했다. 이 작품은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으며 대한민국 만화대상, 부천만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후 일제 강점 ‘35년’의 역사를 만화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고, 각종 자료 수집과 공부 끝에 2018년 《35년》 1권을 출간했고, 2020년 전 7권으로 완간했다. 《35년》은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사관과 관점이 균형 잡혔다는 평을 얻으며 제14회 임종국상을 수상했고, 2020 청소년 교양도서에 선정됐다.
■ 차례
제1장 친일의 역사
제2장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제3장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특별부록 | 친일인물약력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취재기] 40여 일간 찾은 유해만 400여 구, 이번 주 1차발굴 마무리
▲ 주말에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유해 발굴지는 비 피해가 전혀 없었다. 비 피해에 대비해 유해발굴지 위에 천막과 비닐을 덮었다. ⓒ 심규상
2일 오전 7시. 일찌감치 골령골(대전 동구 낭월동)로 향했다. 유해발굴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발굴 현장 부근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한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의 전미경 회장이 기자보다 먼저 도착했다. 이날 유해발굴을 위한 자원봉사자에게 점심을 제공하기 위해 멀리 부여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전 골령골은 전쟁이 나던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대전 형무소 재소자 등과 대전 충남·북 일원의 보도 연맹원 등 적게는 4천여 명에서 많게는 7천여 명의 민간인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살해된 땅이다.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청 주도로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등이 지난 6월부터 유해를 발굴 중이다.
▲ 박선주 책임연구원이 아침 회의를 통해 작업 지시를 내렸다. 약 200여 구에 이르는 드러난 유해를 수습하는 일이 핵심 작업이다. ⓒ 심규상▲ 주말에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유해 발굴지는 비 피해가 전혀 없었다. 발굴단원들이 유해수습을 위해 천막과 비닐을 걷어 내고 있다. ⓒ 심규상
오전 8시 30분. 유족회 사무실 옆 유해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주말에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유해 발굴지는 비 피해가 없었다. 15여 명의 유해발굴단들이 작업 준비가 한창이다. 박선주 책임연구원이 아침 회의를 통해 작업 지시를 내렸다. 약 200여 구에 이르는 드러난 유해를 수습하는 일이 핵심 작업이다.
매장지를 덮고 있던 천막과 비닐을 펼쳤다. 순간 참혹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로 약 2미터, 세로 약 40여 미터에 가까운 긴 구덩이에 유골이 즐비했다. 두개골, 다리뼈, 치아, 탄피 등이 뒤엉켜 있다.
대략 눈 짐작만으로도 200여 구는 넘어 보였다. 그야말로 ‘유골밭’이다. 이 구덩이는 아직 발굴하지 않은 반대편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발굴 지역을 합쳐 셈해보니 한 구덩이 길이가 대략 100여 미터는 돼 보였다.
뒤엉켜 드러난 유해… 눈 짐작만으로도 200여 구 이상
▲ 매장지를 덮였던 천막과 비닐을 펼쳤다. 순간 참혹한 현장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로 약 2미터, 세로 약 40여 미터 가까운 긴 구덩이가 온통 유골로 뒤덮여 있다. 박선주 책임연구원이 드러난 유해를 가르키고 있다. ⓒ 심규상▲ 박선주 책임연구원(충북대 명예교수)이 발굴된 유해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한 구덩이만이 아니다. 그 위로 길게 또는 불규칙하게 유해가 묻힌 여러 개의 구덩이가 드러났다. 또 다른 구덩이에서 수습한 유해만 200여 구 남짓이다. 이미 수습한 유해는 인근 건물 수십 평 바닥을 꽉 채우고 있다. 약 40여 일 동안 가로 40미터, 세로 1미터 공간에서 발굴한 유해만 모두 400여 구에 이르는 셈이다.
박선주 책임연구원(충북대 명예교수)은 “이번 발굴로 한 개의 구덩이가 100여 미터에 이르는 구간을 찾아냈다”며 “여성은 물론 10대에서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유해가 뒤섞여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산기슭 경계를 따라 수십여 명이 묻힌 여러 개의 구덩이도 드러났다”며 “대부분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의 유해로 보이지만 정확한 희생자 유형과 매장지별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유해를 본격 수습하기에 앞서 현장 촬영이 시작됐다. 드론이 날며 유해 매장지를 입체 촬영했다. 또 각 유해를 세분화해 구역별로 세부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해매장 상태는 물론 매장지 지형 특성을 분석하는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또 이후 골령골 현장에 들어설 한국전쟁 민간인집단희생자의 위령 시설인 ‘진실과 화해의 숲’ 설계용역에도 사용된다. 행정안전부와 대전시 동구청은 지난해 12월 진실과 화해의 숲 국제공모 당선작이 선정된 이후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설계용역을 진행 중이다.
갑자기 거세진 빗줄기, “한나절만 참아줬더라면…”
▲ 유해 매장지 내 유해를 덮은 비닐과 천막 위로 누런 흙탕물이 쏟아져 고이기 시작했다. 수중 펌프를 설치해 고인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 심규상▲ 한 시간 남짓 퍼부은 비로 유해 매장지 내에 40센티미터 넘게 잠겼다. 수중 펌프도, 삽질도 역부족이었다. ⓒ 심규상
오전 10시 20분.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졌다. 현장 촬영도 중단됐다. 다시 비밀과 천막으로 유해매장지가 서둘러 덮였다. ‘소나기처럼 한 줄기 쏟아지고 말겠지’ 하며 기다렸지만 쉬이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빗줄기가 굵어졌다. 거세졌다.
오전 11시. 골령골 전체가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뿐이다. 사방이 흙물이다. 유해 매장지 내 유해를 덮은 비닐과 천막 위로 누런 흙탕물이 쏟아져 고이기 시작했다. 유해를 지키기 위해 발굴단원들이 뛰어들었다. 수중 펌프를 설치해 고인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유해 매장지 주변에 배수로를 내 물줄기를 돌리기 위한 쉼 없는 삽질이 시작했다. 발굴단원들은 흙탕물과 땀으로 속옷까지 흠뻑 젖었지만 빗속을 뛰어다닌다.
오전 11시 30분. 1시간 남짓 퍼부은 비로 유해 매장지 안이 40센티미터 넘게 잠겼다. 수중 펌프도, 삽질도 역부족이었다.
오전 11시 50분. 비가 그쳤다. 하지만 현장 촬영도, 유해수습도 당분간 어려울 만큼 피해를 입었다. 적어도 한나절 이상 현장을 말리고 또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배수로도 정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 책임연구원은 몇 번씩 “한나절만 참아줬더라면 드러난 유해수습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라며 “하늘이 야속하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유해발굴단은 이번 주 1차 발굴을 마무리한 후 내주에는 수습한 유해를 분석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어 오는 9월부터 두 달 여 동안 2개 구역에 대한 추가 유해발굴을 시작할 예정이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지난 2007년 지난 해까지 모두 유해 288구(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34구, 2015년 시민사회 공동조사단 20구, 2020년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청 234구)를 발굴했다.
▲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 신채원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공개와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일본대사관 앞 1인시위가 2일부터 진행됐다.
시민모임 독립(이사장 이만열 상지대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앞으로 한 달간 1인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한 달간 진행되는 1인 시위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라 1인씩 피켓을 들고 이어 나간다.
학생, 직장인, 자영업자 등 일반 시민들이 자원 참가하는 이번 1인 시위는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본 정부가 촉발하고, 조선인에 대한 혐오가 투영된 명백한 제노사이드 범죄임에도 일본정부가 진상공개와 공식사과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역사 부정의 현실에서 출발했다.
▲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사무총장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진실 공개와 사과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신채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시위 현장에 격려 방문한 이만열 이사장. 이 이사장은 “1인 시위가 하나의 역사적인 화해와 용서의 단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신채원
특히 첫날인 2일 1인 시위에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과 이재선 천도교청년회장이 나선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라는 참상을 목격하고 이재동포위문반(罹災同胞慰問班)을 조직해 실태 파악에 나선 것이 천도교 동경지부와 YMCA동경지부였기 때문이다. YMCA동경지부는 매해 추모제를 진행해왔으며 국내에서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1924년 1주기 추모식을 거행한 바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지난 2020년 추모식과 추모문화제를 거행한 바 있다.
시민모임 독립은 일본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일본 정부의 진상 공개와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1인시위 진행을 통지했다.
이날 격려차 현장을 찾은 이만열 이사장은 사건 발생 이후 98년이 되었는데도 사건의 희생자, 특히 조선인 희생자 숫자나 참혹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국민들과 일본인, 세계가 간토대지진 사건에 대해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서고 국회가 있음에도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진상조사와 희생자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국회와 정부로 하여금 10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특별법 제정과 희생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국회와 정부가 되기를 촉구했다.
끝으로 이만열 이사장은 “우리가 이런 시위를 하려는 것은 보복과 비난이 아닌 우리는 이 시위를 통해 100년간 쌓여온 원한과 원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진상규명을 통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이 1인 시위가 하나의 역사적인 화해와 용서의 단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재선 천도교 청년회장과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사무총장은 이날 현장에서 공동으로 1인 시위를 시작하며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일본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학살하고 진상규명이 100년이 다 되도록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해방된 국가를 가지고 있는 한국시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98년 전 희생된 희생자들의 영령을 추모하면서 해원할 수 있도록, 한일 간 화해의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고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한일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100년 전 일제에 맞서 심장부인 도쿄에서 희생자 조사를 한 유학생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와 차별에 대해 지적하며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과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이라고 밝혔다.
또 현장에서 1인 시위에 참여한 한 시민은 “일본정부에 대해 책임있는 진상규명과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하며 이것만이 과거청산을 통한 상호 호혜평등한 평화 공존 번영의 미래지향적인 동반자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시민모임 독립은 현재 전국적으로 진행 중인 ‘전봉준 최시형 서훈운동’을 이끌어낸 바 있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문제 제기로 전봉준, 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을 주제로 성일종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민형배, 이성만 의원, 열린민주당 강민정 의원이 공동주최로 국회에서 ‘전봉준‧최시형 등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의 당위’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고 현재 이는 전국적 ‘서훈운동’으로 확산되어 지난 6월부터 국가보훈처,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고 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 매그니튜드 7.9의 강진이 일어난 직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로 인해 군대와 경찰, 민중이 조선인 6천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참혹하게 학살당한 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고향이 있었고 이름이 있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은 98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민족차별이 불러온 학살의 기억은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참혹한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부터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금병동 등에 의해 일본에서 연구가 시작된 이후 한국에서도 소수의 역사학자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현재까지도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의 틀은 확장되지 않은 채 98년의 시간이 흘러왔다.
▲ 관동대지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오충공
재일교포 영화감독 오충공에 의해 1980년대 사건 당시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이 제작되어 국내에서 상영된 바 있다. 오 감독은 현재까지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일본 정부가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찾고자 희생자들의 유족을 찾는 등 진상규명을 위해 39년간 노력해왔다.
또 1980년대부터 민속학자 고 심우성, 극단 현대극장 대표 고 김의경, 전 서울신문사장 고 신우식 등에 의해 진상규명 운동을 진행해왔고 시민 모금운동을 통해 학살이 있었던 치바현 관음사에 위령의 종 ‘보화종루’를 세운 바 있다.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 모두 고인이 되었다.
▲ 보화종루 일본 치바현 관음사에 세운 “보화종루” 1985년 민속학자 故심우성, 극단 현대극장 대표 故김의경 등이 시민 모금운동을 통해 세운 위령의 종 ⓒ 신채원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밝혀야 할 과제가 많은 사건이다.
이번 1인 시위 운동으로 인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를 쓰지 않기 위해 용서와 화해로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표지 사진은 새벽 다섯 시경 애니깽 농장의 모습이다. 1905년 멕시코로 떠난 1,033명의 한인들이 매일 마주했을 풍경….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불과 5개월 전 ‘묵서가국’이라 불리던 멕시코로 떠난 조선인들이 있었다. 망조에 기운 나라를 떠나 살길을 도모했던 사람들은 애니깽 농장으로 가축처럼 팔려가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산다. 작렬하는 유카탄 반도의 햇볕을 피하기 위해 농부들은 새벽 네다섯 시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동을 시작했다. 하루 일해 겨우 하루 먹고살던 지독히도 고된 삶.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이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사력을 다했을 줄은.
인도에 간 한국광복군, 애니깽 농부들, 체 게바라의 동지,
한인 최초 백만장자, 우리 공군이 시작된 땅…
당신이 들어보지 못한 바다 건너 독립운동 이야기
《뭉우리돌의 바다》는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굴하고 기록한 최초의 다큐멘터리다. 작가는 세계일주를 하던 중 인도 델리 레드 포트에서 우연히 그 장소가 한국광복군의 훈련지였음을 알게 된다. “인도라니, 그것도 우리 독립운동사라니!”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아홉 명의 한국광복군이 인도에서 영국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접한 이야기에 작가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다. 신내림 같았다는 그날 이후 홀린 듯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사로잡혀 그들의 흔적을 좇기 시작한다.
독립기념관 자료를 샅샅이 뒤져 주소 한 줄, 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녔다. 2017년부터 카메라와 배낭을 메고 수차례 비행기에 올라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과 그곳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사진과 글로 남겼다. 인도에서 시작된 우연이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일본 등 10개국에 운명처럼 이르렀다. 이 책은 그중 바다를 건너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으로 간 한인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다.
바다를 건너간 한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멕시코와 쿠바의 애니깽 농부들, 하와이 사탕수수 농부들, 프랑스에서 전쟁 시체를 치우던 노동자들 등 고달픈 이민자의 삶 속에서도 한 푼 두 푼 피와 땀의 결정체를 모아 독립자금으로 보탰다. 김구는 《백범일지》 하권의 시작을 미주 한인 동포들의 눈물 나는 지원을 염두에 두고 썼다라고 밝히기도 한다.
이들은 어느 땅에 자리를 잡든 학교를 세워 우리말과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숭무학교 등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독립전쟁 일어나는 날, 도쿄의 하늘로 날아가리라” 각오로 공군을 양성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비행사양성소’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이곳을 지원한 한인 최초의 백만장자는 한 달에 비행기 한 대 값 이상을 운영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대한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친 ‘뭉우리돌’이었다.
‘뭉우리돌’ 그들은 누구인가
찬란하고 강인한 뭉우리돌의 역사
그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누가 남았을까
‘뭉우리돌’은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말은 김구의 《백범일지》에 독립운동 정신의 상징으로 나온다.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된 김구에게 일본 순사는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그를 협박했다. 그러나 김구는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김익주, 이근영, 이종오, 김세원, 임천택, 호근덕, 이윤상, 배경진, 김종림, 김형순, 장인환, 전명운, 황기환, 이우석…. 이 책에 나오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은 생소하다. 배우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교과서 밖에서 마주한 뭉우리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남김없이 골라내려고 했던 뭉우리돌은 비단 상해와 만주,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에 굳건히 박혀 대한의 독립을 일궈냈다.
찬란하고 강인했던 그들의 흔적을 찾았다. 때로는 남은 기록이 이름 석 자뿐일 때도 있었다. 김동우 작가는 대사관, 한인회 등을 수소문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는다. 불쑥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그들은 떠듬떠듬 부모로부터 배운 몇 마디 한국어를 건네며 따뜻한 한국식 밥상을 내왔다. 대한 황실의 후손 율리세스는 큰 반찬통에 담긴 김치를 꺼내와 작가의 입에 넣어주었고, 쿠바의 한인 모임에는 비빔밥이 차려졌다. “손님이 찾아오면 따뜻한 밥상으로 대접하라”는 부모로부터 배운 한국식 손님맞이를 기억하고 지키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호근덕의 후손 빅토르의 민박집에 묵었을 때 그의 아들은 “내가 독립운동 사진을 찍겠다고 네 한국 집에 머물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우리 아버지가 너에겐 돈을 받지 않으시겠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선대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과 애환, 고되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원망, 독립 정신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모두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이 가족에게 남긴 게 도대체 뭐냐고요. 예전에는 우리 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이란 자부심 하나로 살았어요. 그런데 점점 그게 아닌가 봐요.”_청산리 대첩 마지막 생존자 이우석의 후손 이춘덕
“아버지의 독립운동은 한국인으로서 그 시대 사명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그 사명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죠. 하지만 난 자라면서 내 가족이 아버지에 대해 불평, 불만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 모두 독립운동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인 거죠.”_안창호의 막내아들 안필영
친일은 꽃길, 독립은 가시밭길. 작가는 오늘날에게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는 이 수식을 지적한다. 한국과 교류가 적은 쿠바에는 아직까지 독립운동 서훈을 전달하지 못한 사례가 15건에 달한다. 2015년 한국일보 통계자료를 보면 국가의 지원을 제대로 받고 있는 후손은 10% 미만에 불과하다. 75.2%에 달하는 후손이 월 개인소득 200만 원 미만이며, 70%는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작가는 후손을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찍는다. 불과 백 년이라는 시간 만에 우리의 기억과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독립운동을 표현한 방법이다. 카메라 셔터 속도를 길게 설정하고, 셔터가 떨어지기 전에 후손을 파인더 밖으로 나오게 한다.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독립운동의 역사, 그 현장에서 만난 후손들의 이야기는 짙고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독립운동사의 빈칸, 시간에 파묻힌 영웅들을 찾아
국외독립운동사를 재구성한 최초의 기록물
이 책은 부실했던 국외독립운동 자료를 수집, 축적했다는 점에서 사료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크다. 멕시코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점인 ‘살리나크루스 해변’, 안창호가 멕시코 순방 당시 머물렀던 ‘프란세스 호텔’, 한인들이 일했던 애니깽 농장들, 독립운동가들의 묘소, 쿠바 대한인국민회 회관으로 쓰였던 건물, 친일파 미국인을 처단한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3·1혁명 2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던 뉴욕의 ‘타운 홀’ 등 주요 역사 현장을 직접 답사해 현재의 모습을 온전히 담았다.
국외독립운동사의 현장을 집요하게 추적한 취재기는 연신 놀라움과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이에 더해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작가가 가졌던 깊은 고민과 애정이 담긴 110컷의 사진이 책에 실려 있다. 단순히 취재기만 나열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스스로 독립운동사에 무지했음을 고백하며, 현장의 깊고 내밀한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를 파고든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자 질문이 산더미처럼 늘었다. 모든 단발성으로 끝나는 법 없이 여기저기 가지를 뻗어 나가며 입체적으로 이어졌다. 인물사 또한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으로 끝낼 게 아니었다. 거기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 상황이 한데 물려 있었고, 심지어 세계사까지 연결됐다.”
수많은 논문과 단행본, 국내외 기사를 망라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에 이르는 독립운동사를 꿰뚫었다. 오늘의 모습과 과거 역사적 사실이 날실과 씨실처럼 얽혀져 이제껏 우리가 들어보지 못했던 놀라운 대한의 독립운동사가 새롭게 펼쳐진다.
“역사는 기억 투쟁이다”_큰별쌤 최태성 추천사
우리가 독립운동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현장에서 작가가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빈 터’였다. 독립의 정신이 흐르지만 아무것도 남이 있지 않은 현장 앞에서 작가는 때론 울분을 토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사적지 현황과 변변찮은 보훈 정책을 지적하며 기록하고 기억할 때 비로소 역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가의 말대로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독립운동사가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이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까.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독립운동가 약 15만 명. 그들은 단지 ‘나라’를 지킨 것이 아니었다. 자유와 평화, 인권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고자 했기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은 각별하다.
이들의 생은 오늘날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들이 기필코 남기고 싶었던 고귀한 가치들이 다시금 대물림된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이제 기억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다.
“우린 모두 실패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던 조상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렸던 역사를 톺아보고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21세기 독립운동’이자 ‘대한이 사는 길’이다.”_본문 중에서
■ 작가 소개
김동우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일한다. 그러다 행복이 직장에 없음을 깨닫고 과감히 사표를 던진다. 한동안 여행자의 삶을 살던 중 우연히 인도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목덜미를 타고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렇게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사로잡혀 2017년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중국,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일본 등 10개국의 독립운동사적지와 그곳에 살고 있는 후손들을 취재했고 국내에서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그중 바다를 건너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으로 간 한인들의 독립운동사를 다룬다. 앞으로 유라시아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계속 정리해나갈 예정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기념관, 갤러리 류가헌 등 전국 각지에서 〈뭉우리돌을 찾아서〉 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 《뭉우리돌을 찾아서(사진집)》, 《세계에 남겨진 독립운동의 현장》, 《트레킹으로 지구 한 바퀴》, 《걷다 보니 남미였어》 등이 있다. 국가보훈처 보훈문화상, 다큐멘터리 온빛사진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메일 [email protected], 페이스북 facebook.com/dw1513,
인스타그램 instagram.com/road_dongwoo
■ 추천의 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삶의 자취는 온전히 남는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화, 인권을 추구한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은 각별하다. 그 안에 우리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실상과 미래의 지향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에네켄 농장에서 어린 후손을 만났을 때 느낀 슬픔과 격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척박한 삶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었다. 김동우 작가의 글을 읽는 동안 그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게 되었다. 산 자의 따뜻한 애정과 정성스런 발길로 죽은 이들의 숨결과 자취를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다양하고 생생하게 기록해놓은 이 책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철호(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역사는 기억 투쟁이다.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기억 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김동우 작가. 그는 이미 사라진, 그래서 더는 역사가 아닌 그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신념으로 누른다. 손끝을 통해 렌즈로 옮겨진 텅 빈 그곳에 사람이 있었음을, 역사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지금의 나와 우리를 있게 해준 역사.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예의다. -최태성(한국사 강사, 《역사의 쓸모》 작가)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우리가 소중한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책. 작가의 오랜 고민과 열정이 사진 한 장 한 장, 글의 한 문단 한 문단에서 느껴진다. 그의 정성스러움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그의 힘든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애달프고 뜨거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책에 나온 곳을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언젠가 이름 모를 그의 묘지를 찾아 여기, 당신을 잊지 않고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시들어가는 꽃 옆에 생기 가득한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채워 드리고 싶다. -유준상(배우, MBC 〈같이 펀딩〉 태극기함 프로젝트 진행)
친일 행적을 남긴 문화예술계 인사들 중 광복 이후에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일본은 지금 모든 고등학생에게 독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춰보면서 바짝 긴장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8·15 광복절을 맞도록 하자.
이승하 | 시인·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일본은 방위백서에 죽도(독도)가 자기네 영토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고등학교 사회과 과목에 독도 영유권을 반드시 명시하도록 했다. 자국 영토를 한국이 강제로 점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독도라는 말이다.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는데 아이들이 그 말을 믿지 않고 독도가 한국 영토라고 생각할까? 우리 세대에 되찾자는 왜곡된 애국심을 심어줄지도 모른다.
1950년대에 “미국을 믿지 말자. 일본은 일어선다. 소련에 속지 말고, 중국에 죽지 말자. 조선은 조심해라”라는 말이 유행을 탔던 적이 있다. 일본이 올림픽을 악착같이 개최한 이유가 다시 일어서려는 몸부림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36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경술국치 한참 전인 1882년 제물포조약 때부터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갑신정변, 을미사변, 을사늑약이 다 침략의 마수를 뻗은 일들이었다. 이름만 대한제국이었지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외교권 등을 빼앗긴 상태였으니 반세기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자라나는 2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징병에 동원된 청장년들, 일본군 병영에 끌려간 여성들, 공장과 탄광에 끌려가서 죽도록 일하고 돈 한푼 못 받은 징용 인력들의 한을 잊지 말자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사를 살펴봐야 한다.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친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있었는데 그 행적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임종국이 1966년에 <친일문학론>을 펴내지 않았더라면 문인들의 친일 행각은 다 묻혀버렸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임종국의 부친이 친일 부역자였다는 것이다. 천도교 지도자였는데 수차례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침략전쟁에 동참할 것을 선동한 행적이 있었다. 임종국은 집필 중 아버지의 이러한 행적을 알게 되어 괴로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이 빠지면 죽은 책이다”라고 하여 아버지 임문호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반성을 하고 싶었는데 아들이 대속해주어 기뻤던 것이다. 하지만 책은 학계와 문단에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 덮은 일을 왜 들추느냐는 분위기여서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초판 1500부가 13년 동안 나갔는데 그나마 1000부는 일본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구입해간 것이었다.
일제 말기에 수많은 친일 잡지가 나왔다. 1939년 1월에 창간된 <동양지광>은 통권 83호까지 나왔다. 편집 및 발행인인 박희도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데 변절하여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다. 그는 3·1운동 때 2년여 옥고를 치렀고 1922년에 잡지 <신생활>을 창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또다시 옥고를 치렀는데 그 이후에 그만 변절해,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친일 단체에서 활약했다. <동양지광>의 고정 필자 최린도 33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조선총독 제1대 데라우찌 님의 시정방침에 대해서는 그 당시 무단정치니 무어니 하면서 여러 가지 비판도 있었습니다마는,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시대의 조선의 사정으로 볼 때 대단한 성의와 선의로써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글을 발표했다. 최린은 이 글에서 3·1운동을 ‘대정 8년의 사건’으로 부르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1940년 1월에 창간된 <내선일체>는 38호까지 나왔는데 어떤 목적으로 만든 잡지인지 제호가 말해준다. 창간 목적이 내선일체의 구현 외에도 황도정신의 발양, 총후(銃後) 후원의 강화, 내선 결혼의 실천, 국어(일본어) 보급의 철저 등이었다. ‘총후’는 후방이란 뜻이니 우리가 전시에 후방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말이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 결혼을 많이 해 내선일체를 이루자는 주장에는 소름이 돋는다. 이 외에도 54호를 낸 <신시대>, 39호를 낸 <춘추>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전과 전시에 나온 <대동아> <총동원> <국민총력> <녹기>가 다 우리 조상이 만든 친일 잡지다. 평론가 최재서는 <인문평론>을 <국민문학>으로 바꿔 일본어로 펴냈다. 이 잡지의 목차를 보니 당시의 유명 문인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들 중 광복 이후에 사과한 사람이 없었다. 일본은 지금 모든 고등학생에게 독도를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춰보면서 바짝 긴장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8·15 광복절을 맞도록 하자.
▲ 백제 오천결사대가 나당연합군과 최후까지 싸운 전적지로 알려진 황산벌 유적지가 있는 마을 명산(천호산, 논산 연산면 송정리)을 가로지르는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붉은 색 네모안 산 중턱이 공사로 산 허리가 드러나 있다. ⓒ 심규상
백제 오천 결사대가 나당연합군과 최후까지 싸운 황산벌. 황산벌의 정확한 위치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통상적으로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인근으로 본다. 연산면 작은 마을인 송정리에는 천호산이라는 뒷산이 있다. 천호산의 옛 이름은 다름 아닌 ‘황산’이다.
옛 황산 앞에 자리잡은 송정리는 지난 2015년부터 도로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3일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마을 앞. ‘결사반대’ 글귀가 선명한 수십여 장의 현수막이 도로변에 빽빽이 붙어 있다.
‘천년 성산(천호산) 파괴하는 국토부 해체하라.’
‘자연훼손, 주민들만 죽어난다.’
곧바로 권희용 마을 이장을 만났다. 권 이장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과 충남교육청 일제잔재청산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지역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과 식견도 남달랐다.
7년째 논란 중인 ‘연산~두마 간 국도 우회도로’ 공사 1구간
▲ 권희용 마을 이장이 마을 뒷산(천호산)을 가로 지르는 도로공사와 산의 심장부인 주령에 터널을 뚫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 심규상
국토부는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와 대전시 유성구 방동을 연결하는 연산~두마 간 국도 우회도로 개설공사를 벌이고 있다. 인근 국방대 이전과 계룡대 3군 본부로 인한 유동인구 증가로 시가지 교통체증에 따른 우회도로를 만드는 공사다. 총연장 8.5km에 공사비는 약 2500억 원이다. 송정리 주민들이 반대하는 구간은 1공구(1구간)의 3.4Km다.
공사 반대 이유를 묻자 권 이장은 대답 대신 마을 앞 도로(대전~논산 간 4차선 국도, 계백로) 건너편으로 안내했다. 마을 전경과 병풍처럼 펼쳐진 마을 뒷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권 이장이 마을 뒷산 중턱을 가리켰다.
“산 중간 한가운데 가로로 움푹 팬 곳이 보이나요?”
자세히 보니 산허리가 군데군데 가로로 잘린 흔적이 뚜렷하다.
“도로가 뚫리는 구간이 저기예요. 지금 한참 공사를 벌이고 있어요.”
마을 앞으로 뻥 뚫린 4차선 국도가 있는데 마을 뒷산 산허리를 싹둑 잘라 우회도로를 만든다고? 기자 또한 도로 공사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마을 왼쪽 뒷산 봉우리를 가리키며) 우회도로를 연결한다며 마을 수호산 심장부인 주령에 지금 터널을 뚫고 있어요. 산이 엉망입니다.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 잠도 제대로 못 자요.”
▲ 마을 뒷산 5부 능선께가 누런 속살이 드러난 채 깊이 파여 있다. 양옆으로는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다. ⓒ 심규상▲ 마을 뒷산 5부 능선께가 누런 속살이 드러난 채 깊이 파여 있다. 양옆으로는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다. ⓒ 심규상
곧바로 도로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마을 뒷산 5부 능선께가 누런 속살이 드러난 채 깊이 파여 있다. 양옆으로는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다. 골짜기마다 임시 설치한 우수관으로 빗물에 씻긴 황토가 쌓여 있다.
공사 현장에서 내려다보니 산 아래가 까마득하다. 서북쪽으로는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서쪽으로는 먼발치로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겹쳐 펼쳐져 있다. 이런 산 중으로 도로를 내야만 하는지 의문이 더 깊어졌다.
옛 이름은 황산, 말 무덤, 궁장골, 시장골, 궁상골, 사실고개…
‘오천결사대’ 관련 지명 수두룩
▲ 1971년 4월 10일 자 “황산벌 백제 오천결사대 합장 무덤 발견”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 “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시장골로부터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50m 떨어진 천호산 중턱에서 나당연합군과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한 백제군 오천결사대 병사의 합동 무덤으로 보이는 백제의총이 발견됐다”고 전하고 있다. ⓒ 동아일보 신문 갈무리
권 이장이 기자에게 옛 신문 기사를 내밀었다. 1971년 4월 10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황산벌 백제 오천결사대 합장 무덤 발견’ 제목의 기사에는 “나당연합군과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한 백제군 오천결사대 병사의 합동 무덤으로 보이는 백제의총이 발견됐다, 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시장골(병사들의 시체를 묻은 곳)로부터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50m 떨어진 천호산 중턱이다”고 전하고 있다.
기사는 이어 “천호산 중턱 궁장골(군사들의 활을 묻은 곳) 언덕바지에 있는 무덤 일부가 도굴 흔적을 보인 채 보존돼 있는데 주민들로부터 말 무덤 또는 큰 무덤으로 불려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홍사준 백제문화연구회장은 무덤 주위에 시장골과 중상골이 있고 인근에 백제 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천결사대 병사시체의 일부를 묻은 백제의총이 틀림없다”라는 고증을 덧붙였다.
<동아일보>에 등장한 논산 천호산이 우회도로 공사가 한창인 송정리 마을 뒷산이고, 천호산 중턱은 우회도로가 지나는 노선이다. 또 기사와 논산시지에 등장하는 시장골과 중상골, 궁상골이 모두 천호산에 있다. 하지만 말 무덤은 이후 충남도경찰청 의무경찰대가 들어서면서 진입로 공사로 송두리째 사라졌다. 관련 유적지들도 법적인 보호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황산벌 전투와 관련된 송정리의 지명은 이게 끝이 아니다. 사실고개(백제군이 활을 쏘는 훈련장), 중상(衆傷)골(오천결사대가 신라군과 싸우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곳), 대목골(사장골 위에 있는 골짜기), 황산(천호산의 옛 이름) 등 관련 지명과 유래가 이어진다.
천호산 벼랑에 자리한 월은사(마곡사 말사)에서는 지금도 황산벌 오천결사대를 추모하고 있다. 월은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주민들은 백제 말기 계백장군과 오천결사대의 유혼을 달래기 위해 절을 지었다는 유래를 들려준다.
“오천결사대 뿐만이 아닙니다. 천호산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복하고 신검의 항복을 받은 산이고, 산기슭에는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왕명으로 창건한 호국사찰이 있어요. 또 마을에는 한학을 익히며 살아가는 한학마을도 있고요. 이런 마을의 성산에 터널을 뚫고, 마구 파헤쳐 두 동강을 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천호산은 고려태조 왕건이 길몽을 꾼 후에 이곳에서 나타난 군사들의 도움으로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담긴 산이다. 본래 지명은 ‘황산’이었으나 후삼국을 통일한 후 하늘의 보호가 있었다고 해 천호산(天護山)으로 불렸다 유래한다.
▲ 천호산 중턱에서 한창인 연산-두만간 우회도로 공사현장 ⓒ 심규상
국토부 “주민들이 내놓은 대안은 사업 타당성 부족”
권 이장이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공사 이유다.
“현재 있는 마을 앞 4차선 도로(국도 4호선, 계백로)도 별로 막히지 않아요. 이후 교통체증이 걱정된다면 이 도로를 확장하면 되거든요. 백번 양보해서 꼭 우회도로를 내야 한다면 천호산 주령을 피해 대전 방향으로 1.5km 이동해 터널을 뚫으면 되니 천호산 주령과 산허리는 손대지 말라고 사정도 했어요. 그렇잖아요. 고작 3~4km 내달리려고 역사 현장이자 마을의 주산을 파괴해서는 안 되잖아요.”
처음 공사계획이 알려진 2015년부터 마을 주민들은 공사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혔다. 500여 명의 주민이 연서명을 해 국토부에 의견도 전달했다. 정부 기관 곳곳에도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모든 민원이 대전지방국토관리청으로 이첩됐다.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의 대답은 판박이였다.
우리 청의 계획노선은 기술적 검토, 전문가 자문 등을 종합해 선정한 최적 노선으로, 마을 주민들이 요구하는 노선은 우리 청이 선정한 노선에 비해 우회 효과 등 타당성이 불리한 것으로 검토돼 반영이 곤란한 실정임을 알려드립니다. – 2017년 6월 대전지방국토관리청장 회신
2017년 주민 설명회 자료를 보면 마을주민들의 우려가 쏟아졌다. 주로 ‘천호산 절경을 보호해도 모자란 판에 산자락을 끊어 길을 내는 건 절대 반대’, ‘도로공사 편의만을 위한 공사가 누구를 위한 공사냐’는 의견과 항의였다. 그때마다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은 “교통시스템 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공사로 환경 훼손은 불가피하고 환경피해가 최소화하도록 친환경적으로 계획을 수립했다”고 강변했다.
당시에도 여러 주민이 “전국 도시 중 인근 계룡시 도로가 가장 한산하다, 4번 국도 도로 중 일부 신호등 지점에서 정체가 있으나 이는 전국 어느 도로와 별반 다르지 않다, 4번 도로 확장만으로도 교통체증은 충분히 해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은 “미래 교통량 증가에 대비해 우회도로 건설이 필요한 것으로 검토됐다”며 “우회도로 종점 교차로는 4차선을 6차선으로 확장하도록 협조 요청했다”고 동문서답했다.
주민들은 올해 들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문을 두드렸지만, 이마저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일제히 도로변에 현수막을 내걸고 도로를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다.
“3~4km 단축보다 수만 배 가치 있는 역사 현장 파괴 말라”
취재를 마치고 대전으로 되짚어가는 기자에게 권 이장이 혼잣말처럼 되뇌이며 반문했다.
“2~3분 빨리 가자고 멀쩡한 도로를 두고 수천억 원을 들여 마을의 천년 성산을 파헤치고 주령에 터널을 뚫어야 할까요? 조금 더디 가더라도 황산벌 유적지와 마을의 역사문화를 보전해 달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무리한 요구인가요? 선진국이라는 한국 땅에 주민들이 내놓은 대안과 요구를 성의있게 검토하고 답하는 정부 기관, 정치인은 정말 없는 건가요?”
퇴근 시간과 겹쳤지만, 대전 가는 4차선 국도는 한산했다. 도로변에 붙은 송정2리 청년위원회 명의의 현수막 글귀가 도드라져 눈에 띄었다.
“3~4km 단축보다 수만 배 가치 있는 역사 현장 파괴하지 말라.”
▲ 최근에는 일제히 도로변에 현수막을 내걸고 도로를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다. ⓒ 심규상
“저는 8살 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했고, 그 학살로 많은 가족을 잃고 혼자 오랜시간 고통속에 살아왔다. 오늘 이자리에 있기까지는 광장히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오게 됐다. 한국에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위해 한국 방문을 세차례나 했지만, 한국 정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사실에 대해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한국 국회가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 듣고 너무 반가웠다.”
▲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다시 한번 호소하는 응우옌 티 탄씨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씨는 간담회에 참가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고 비판하며 “특별법이 속히 제정되어 한국정부가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라고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 탄(Nguyễn Thị Thanh, 61세)씨는 한국 국회의 특별법 제정 노력에 대해 반가운 자신의 심경을 전했다. 그는 지난 두달간에 걸쳐(6.30~7.22) 세차례 열렸던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연속간담회’에서 베트남 현지에서 화상으로 참가해 아픈 과거와 현재 심정을 토로했다.
이어 응우옌 티 탄씨는 한국정부가 민간인학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기를 바라냐는 질문에는 “(1968년) 퐁니퐁넛 학살, 우리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저와 같은 어린 아이였거나 여성들이었다. 수많은 목숨들이 굉장히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 이 퐁니퐁넛 학살이다. 저 뿐만이 아니라 이 학살의 생존자들, 가족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학살을 기억하고 있고, 이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한번도 우리를 찾아온 적 없고, 이 사건에 대해 단 한번도 관심을 갖거나 이 사건의 실제에 대해 저희에게 물어보거나 조사한 적이 여지껏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정부는 우리가 겪은 고통에 대해 그동안 철저히 외면해왔다”면서 “저를 포함해 103명의 베트남 피해자들이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저희는 이제 한국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기뻐했다. 저는 이 청원서가 오히려 저희를 더 슬프게 할 것이라거나, 이 청원서를 받아든 한국정부의 지금 태도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특별법이 속히 제정돼 피해사실만이라도 제대로 조사하길 바란다. 역사적 진실이 밝혀져야 이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므로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다해서 부탁드린다”고 말하며 한국사회에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한-베 수교 30주년 앞뒀지만… 해결 못한 숙제
내년 한국과 베트남은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1955년부터 20년간 이어졌던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은 약 35만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8년 6개월간 한국군 피해는 사망 5099명, 부상 1만 962명으로 추정된다. 반면 구수정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약 9000명으로 추정된다(관련 기사: “살아남은 내가 진실 말해야”… 그분이 돌아가셨다).
▲ 베트남전 관련 빈안학살(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최대 민간인학살로 알려짐) 생존자 응우옌떤런씨는 지난해 11월 숨졌다. 그는 생전 빈안학살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20년간 증언해왔다. 지난 2015년에는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한국 정부에 진실 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 이재갑 작가) ⓒ 한베평화재단, 이재갑
1999년 구수정 당시 베트남 특파원이 한겨레21을 통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보도한 이래 학살피해 마을의 의료지원을 비롯해, 작가단체및 다양한 민간부문의 교류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일환으로 이어졌다. 한겨레사는 46주간 캠페인을 통해 앞지면을 할애하며 이 사건들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고, 긴 펀딩캠페인을 통해 10만달러를 모금해 2003년 베트남 푸옌성에 한베평화공원을 설립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참전군인들의 한겨레신문사 난입으로 한때 윤전기가 멈추는 등 이 문제로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활동과 지원은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을 계승하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을 통해 평화로 나아가고자 2016년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을 주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는 몇 종의 교과서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고, 제주 강정마을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베트남 피에타’ 조각 (김서경 김운성 작가 제작)도 세워졌다.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의 1기에 해당하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고, 2018년에는 시민평화법정이 열려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손해배상, 공식인정,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 모두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역사적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조사된 바가 없다.
▲ 베트남 평화의료연대 (평연)의 베트남 현지 진료 모습 치과 한의과 의료인및 일반 후원회원 320여명으로 구성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평연)은 1999년 이래 지속적으로 현지에서 구강보건교육사업및 수술등 의료지원 활동을 해왔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이에 민변을 비롯한 한국 시민사회가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한 ‘베트남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이하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중이다. 이외에도 2019년 4월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명은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조사및 사실인정, 공식 사과 및 공식 선언, 피해회복을 위한 조치를 요구했고, 응우엔 티 탄씨는 현재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청구도 진행중이다.
필자는 연속간담회에서 사회를 맡았고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인 김남주 변호사와 특별법 제정및 그간의 진상규명 노력에 대한 여러 쟁점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이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게된 취지와 배경은 무엇인가.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엔 티 탄씨를 대리해 개별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인정하라고 가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되는 제도다. 사실 가해자가 반성한다면 먼저 스스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다가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전쟁 당시에 민간인에 대해 여러가지 법적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사실에 대한 공적확인이 필요하다. 그것을 법률을 만들어서 제도로서 추진하고 한 개의 사건이 아닌 여러가지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자는 게 이번 법 제정의 취지다. 8월 25일 입법법안공청회를 하고 8월말 또는 9월초에 법안 발의를 할 예정이다.”
– 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에 진상조사, 공식인정, 손해배상,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의 책임을 인정한 시민평화법정의 판결 내용과 유사한가?
“진상규명에 초점을 맞춰놨다. 진상규명을 신청하고,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에 있는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 정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관련자를 출석시켜서 진술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조사절차 규정및 조사결과에 따라 진상규명 결정과 불능 결정등 공적인 결정들을 위원회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백서형태로 보고서를 만들어서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 보고서에는 시민평화법정에서 주문으로 담았던 피해보상, 사과,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 민간인 학살 관련 사실 전시등 이런 내용들을 담아서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의 목적은 사실규명에 있고, 그 이후에 피해보상등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않고 권고만 할 수 있어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며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반대가 심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부터 단계적으로 가려고 한다.”
▲ 베트남전 민간인학살TF 팀장 김남주 변호사 민변에서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TF 팀장을 맡고 있는 김남주 변호사(가운데)는 연속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며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고령의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 베트남은 진상규명과 사과를 원하지 않는데 왜 한국인들이 나서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오해가 많은 것 같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관계를 잘 모르는 잘못된 인식이다. 베트남의 피해자들은 이전에도 진상규명을 명확히 원하고 있는데 초기에 우리가 그분들과 소통하는 네트워크가 없었기 때문에 명확히 전달이 안되었을 뿐이다. 응우옌 티 탄씨 등 생존자들은 2015년부터 한국에 와서 국회에서 명확히 요구했다. 심지어 작년 103명의 피해자들이 청와대 청원을 통해 진상규명하고 사과하라는 명시적 요구를 했다. 베트남 정부가 명시적으로 요구를 하지 않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베트남 방문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했었는데, 사과를 하지 않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라는 유감표명으로 발언했다. 언론에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지만, 베트남정부에서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적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보도는 있었다. 위안부 문제처럼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할 순 없다. 국가보다는 피해자를 더 중심적으로 봐야하고, 피해자는 명시적으로 원하고 있다. 더 이상 논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전에 일제시대 일본은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에 대해서 강제낙태 등 인권침해 행위를 했었다. 그때 이 문제가 우리사회에는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일본시민사회에서 먼저 소록도를 찾아가 이분들을 면담하고 이분들 피해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했었다. 피해자가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해국가의 시민단체가 나서는 게 유례가 없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민간차원에서 일본도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듯 이것을 배워서 우리도 베트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주제를 다루는 싱크탱크 ‘프리덤 하우스’에 의하면, 베트남은 수십년간의 베트남공산당 (CPV) 일당체제로 표현과 종교의 자유및 인권활동이 완전히 보장된 성숙한 민주주의사회가 아닌 것으로 알고있다. 피해마을 유족이 문제해결에 목소리 내는 것에 대해 베트남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이 명시적으로 외부에 드러난 적이 없기에 입장표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정부는 사실상 이 문제를 막지 않고 있다. 베트남은 모두 관영언론인데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던가 응우옌 티 탄씨가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했다던가 이런 보도를 막지 않고 있다. 이 분이 소송하는 것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좋겠다, 또는 해결되는 것을 굳이 나서서 막진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 한국 정부가 2019년 103명의 피해자 청원을 받고서도 ‘국방부 공식기록에 확인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무성의한 답변을 했다고 들었다. 주월미군 감찰보고서, 한국 베트남 퇴역군인 증언, 피해자 증언 등 증거가 많은데도 베트남 청원인들에게 한번도 연락해보지 않고 자료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 피해자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정권교체 후 피해자들은 많은 개선과 변화를 예상했을텐데 현 정부는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저는 현 정부가 해결의지가 없다고 본다. 어느 나라가 학살기록을 하겠나. 당연히 국방부의 공식 교전기록인 ‘파월한국군전사’ ‘전투상보’엔 기록이 없다. 사실 해결하려고 하면 우선 자료만 볼 게 아니고 참전한 분들의 말씀도 들어봐야한다. 한겨레 21에서 해당 중대 소대장들이 ‘우리 중대가 퐁니퐁넛마을에 들어갔고, 우리 소대는 아니지만, 우리 뒤에 따라오던 소대에서 총소리가 났고, 학살했다고 하더라’라며 다 증언하셨다. 아직 생존한 분들이 계시는데 이분들에 대한 조사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당시에 중앙정보부에서 그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되니까 조사를 했다. 국가정보원에 있는 기록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베트남측 협조를 구하기 어렵다고 베트남 탓만 하는데 한국이나 미국 자료도 있고, 아직 생존자도 있다. 의지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충실한 조사를 하지 않고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의지가 너무 없는 거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고 저희는 전해들었는데 그게 관철이 안되는 건지, 즉 대통령의 뜻을 아래 기관들이 거스르는 건지, 대통령의 뜻이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소극적인 태도인건지 잘 모르겠다. 많이 아쉬운 점이다. 이미 50년이 넘은 일이다. 사실관계는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바탕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진실은 가둘 수 없는 것 아닌가.”
▲ 한국시민사회의 국방부앞 기자회견 모습 2019년 4월 4일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은 진상조사,사실인정, 공식 사과등을 요구하며 청와대에 직접 청원하였으나 2019년 9월 국방부는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 사료에 민간인 학살 기록이 없고 베트남당국의 협조가 없어서 조사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 한베평화재단
▲ 이길보라 감독의 다큐 <기억의 전쟁>중 2018년 베트남 시민평화법정 모습 민변에서 이 시민법정의 틀을 만들었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베트남전쟁의 의미를 따져보고 법률적 다툼을 진행했다. 피해 생존자가 원고로 참여했고 참전군인의 증언도 있었다. 재판부로 위촉된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현 헌법재판관), 양현아 서울대법학전문대 교수 3인은 대한민국의 책임 내용 (공식인정, 진상조사, 손해배상)등을 인정했다. ⓒ 배급사 시네마달
– 퐁니퐁넛마을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엔 티 탄씨가 현재 국가배상소송을 하고 있다. 소장이 제기된 지 1년 2개월 경과되었고 쌍방에서 쟁점 정리중이라고 들었다. 내년쯤 재판이 끝나고 1심선고가 예상되는데 승소할 가능성은 어떤가.
“내년에 선고될 것이라는 것은 추정이고, 재판 진행경과에 따라 다르다. 국내 군사재판에서는 민간인 살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례들이 꽤 있다. 전시 강간죄로 판결받은 판결문도 남아있다. ‘민간인을 살해한 적이 없다’는 건 맞지 않고, 이미 법원에서 공적확인을 받은 사례가 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일이 묻혀있다. 소송관련해서 증거는 꽤 많다. 당시 미군과 마을출신이 포함된 남베트남민병대가 약 400미터 거리에서 같이 망루에서 지켜봤다. 이 사건 직후에 이들이 마을에 들어가 생존자를 구조, 시신을 수습하고 사진도 찍었다. 미군 제3해군상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시작해서 미군, 남베트남민병대, 생존자들의 생생한 진술을 받았다.
그게 미국 문서보관서에 있었고 저희가 확보해서 법원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그 마을에서 작전했던 해병2여단 1중대 병사와 소대장들 증언을 모두 봤을때 한국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다. 이밖에 다양한 법적 쟁점도 있다. 국가배상청구를 할때 외국인이 청구할 경우에는 한국인도 베트남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는 ‘상호보증’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존재하냐 여부,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느냐는 쟁점도 있다. 사안의 입증 뿐만이 아니라 이런 법리적 쟁점을 넘어서야 하는 사건이라서 결과는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법원이 시효를 내세워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에는 인도주의에 반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국정원에게 퐁니퐁넛 사건의 조사기록을 요청하자 정보공개 소송절차통해 답을 받아가라해서 4년 소송으로 15글자만 받았다. 국정원의 사실관계 조사협조를 위해 관할인 국회정보위에 노력해달라고 간담회에서 발언하셨다. 국정원 개혁도 베트남전쟁 진상규명에 필수요건일까.
“저희가 퐁니퐁넛 사건에서 ‘국정원의 사실조회를 통해 자료를 제공하라고 명령해주십시오’라고 법원에 신청하자 법원이 저희 신청을 받아들여서 국정원에게 사실조회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은 사실조회에 응하지 않고 정보공개절차를 통해 받아가라고 답을 했다. 15자를 소송을 통해 받아낸 것처럼, 이는 기나긴 소송을 통해 뺏어가라고 하는 비겁한 결정이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 꼴밖에 안 된다. 인권 국가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이 할 행동은 아닌 것이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과거사진상규명법처럼 국정원에 자료를 요청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그를 통해서 국정원으로부터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한겨레가 46주간에 걸쳐 펀딩 캠페인도 하고, 앞지면을 할애해 대중적으로 사안을 널리 알려 마치 NGO 역할을 했다. 반면 참전군인들의 한겨레 신문사 습격사건은 한국사회내에서 베트남전을 ‘반공과 발전’의 가치로 신봉하는 냉전의 시각과 인권및 생명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쌍방간 기억방식에 간극이 큰데 이런 시각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이제는 서로 대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전에는 한겨레 신문사에서의 충돌처럼 서로 힘겨루기, ‘듣든 말든 나는 내 의견을 큰소리로 외치겠다’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도 들어보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전군인들도 어떤 점에서 불편한지 자세하게 알아보는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학대한 사실이 없는데 왜 참전군인 전체를 매도하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고, 베트남전이 게릴라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내가 민간인을 살해하긴 했지만 민간인과 게릴라가 구분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어서 내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또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잘못됐지만 상관 명령에 따라서 한 행위라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시는 분 등 여러 층위가 있을 것 같다. 또 ‘차제에 진상을 규명해서 문제되는 부대와 시기만 확인을 해달라’며 반대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 대화를 통해 특정행위가 국제인도법규범을 위반한 것인지, 자료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인건지 등 고민을 해봐야 되는 문제같다. 이에 더해 참전군인들이 연세가 무척 많으신데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사회가 같이 고민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 2001년 5월 하미 위령비 비문 사건에 대해서는 이번에 간담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1968년 청룡부대에 의해 주민 135명이 희생된 꽝남성의 하미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위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2만5천 달러를 지원해 2001년 위령비를 준공했다. 이는 양국간의 과거청산을 위한 민간단체 최초의 지원사업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한국 대사관 이용준 참사관 (<잊혀진 상흔을 찾아서>의 저자)및 참전군인단체의 개입으로 준공식전 비문을 덮은것은 독일에서 일본정부의 외압으로 있었던 베를린 소녀상 철거압박및 레겐스부르크 소녀상 비문 철거문제와 너무 닮았다. 이 비문을 다시 새기는 것도 진상규명과 아울러 필수 과제라고 본다.
▲ 한국정부의 외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팀장)은 하미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한베평화재단에게 한국정부의 압박으로인해 대리석으로 가려진 하미위령비 비문 내용의 액자를 지속적으로 전달받고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 이재정 TV 유튜브 갈무리
“저는 위령비 건립에 대해 전우회에서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에 의견을 낼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나 이분들이 느꼈던 공포나 분노를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 의견을 내거나 수정요청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더더욱 한국 대사관측에서 알고서 이 문제를 전우회측에 알리고 그 비문을 덮게끔 현장에서 관여했던 점은 매우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시 비문을 열어야하는데 한국정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미마을 유족회나 지역인민위원회는 한국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해서 비문을 덮고 있는 상태이기때문에 한국정부가 막고 있는 것인지, 다시 열어도 문제가 없는 것인지 한국정부의 의사확인이 필요하다. 현재 전우회가 없어져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기때문에 대사관측과 소통해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싶다.”
– 간담회중에 “베트남 피해 생존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고문을 그만 했으면 한다. 생존자가 ‘더 이상 오지말라, 아니면 약이라도 달라’고 아주 간절한 말씀 하시는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셨다. 지원측면에서 어떤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대통령이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겠다고 알려졌는데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서, 베트남정부가 원하지 않아서 안 했다고 한다면 그 절절한 마음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인도적 지원이다. 고령에다가 총 칼 등 많은 상처가 있으니까 치료가 제일 급하다. 고통 완화등 치료를 꾸준히 해야하는데 노무현정부 당시 종합병원이 지어진 이후에 지원이 없었다. 이동식병원 시스템으로 학살마을을 방문해 치료지원을 하면 좋겠다. 고령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이 제일 시급한 문제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한의사들의 베트남 현지 학교 방문 모습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소속 한의사들이 직접 베트남 현지의 학교를 방문해 성장교육을 진행했고 500여명의 베트남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 베트남평화의료연대 페북
– 19차례 의료지원사업을 해온 베트남평화의료연대를 비롯해 작가및 예술단체들이 민간에서 그간 꾸준히 교류가 있었다는 그 자체로 상당히 고무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무려 20년을 이어온 운동이 이렇듯 꺼지지 않는 불씨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이 운동을 해온 세대가 민주화운동과 그 이후의 세대들이라서 인권의 가치에 감수성이 높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80년 광주학살의 기억도 있어서 그분들에게 손을 내밀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우리도 겪었기에 동류의식이 있어서 동화가 잘 되는 것 같다.
아울러 멀리까지가서 많은 비용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탄탄한 조직력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조직이 주도하신 것 같은데 사회참여를 하고 싶어하는 치과의사들의 열망과 의료전문성을 잘 접목하고 조직화해 풀어낸 것 같다.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정말 대단하다.”
– 관련 특별법제정을 위해 시민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특별법이 특별한 법은 아니고, 과거 사실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간 수많은 의혹과 사회적 고발이 있었고 너무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것을 다 덮고 가기에는 우리 공동체의 가치지향, 또는 품격과 맞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아시아에서 인권을 선도하는 국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됐다. 해결의 방법으로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 진실속에서 평가가 나올 것이고 한걸음씩 내딛으면 된다. ‘당장 사과하고 당장 배상하자’라기보다는 차근차근 사실확인하고 그 단계에서의 재발방지, 여러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류는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면서 한걸음씩 전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되고, 전쟁에도 인권의 가치와 인권규범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험악해지는 미중패권 갈등 속에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은 가까운 미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베트남학살 진상규명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제에 닿아 있다. 한국 시민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같이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 한국시민사회로부터 자전거를 전달받는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 베트남나비평화기행 푸옌성 자전거 전달식 (2020년 11월 10일) 한베평화재단, 정의기억연대, 세브란스노사공익기금은 공동으로 푸옌성 베한우호친선협회를 통해 3개 학교 150명의 학생들에게 150대의 자전거를 전달했다. ⓒ 정의연 공식 블로그
고(故) 서정우 씨의 강제동원 피해 증언 영상이 나오고 있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확보 자료]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올해로 76년째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일본의 역사 왜곡은 진행형이다.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2015년 하시마(端島·군함도) 탄광 등을 비롯해 메이지시대 산업 시설 23곳을 세계 산업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 등을 명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결정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이들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구타를 당하며 탄광, 공장 등에서 강제 노동을 했던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났으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통한 이행 촉구가 절실해 보이는 이유다. 일요서울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확보한 피해자 증언 영상 자료를 토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차마 꺼내지 못했던 생생한 증언을 확인했다.
– 日 강제동원 명시 안 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이행 촉구 조치
– 강제동원 피해자들 “몸 아파서 쉬게 해 달라고 해도 엎드려뻗쳐 시키고 때려”
민족문제연구소는 유네스코 총회가 열린 지난달 16일부터 오는 11월7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 시설에서 강제동원을 당한 피해자 19명의 생생한 증언 영상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증언 영상은 한국·일본의 시민단체 및 정부기관이 수집, 소장해 온 구술 기록으로 피해자와 관계 기관 등의 동의를 받아 공개됐다.
하시마(端島·군함도) 탄광에 대한 설명 [사진=민족문제연구소 확보 자료]
탄광으로 강제동원
비참했던 실상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은 ‘탄광’이었다. 기술 훈련이나 안전 교육 등을 받았다는 증언은 드물다.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국가 명령에 복종’하도록 정신 훈련만 받았을 뿐이라고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가능한, 힘든 육체노동이 필요한 곳에 조선인들이 주로 배치됐다. 낯선 환경과 위험한 현장은 조선인 징용자들의 도주율이 높은 이유를 말해준다고 전했다.
일본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이 제공한 고(故) 서정우 씨의 증언 영상은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서 씨는 15살 무렵이었던 1943년 4월, 논에서 일을 하다 3명의 남성들에게 붙잡혀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후 나가사키조선소로 전환 배치되기도 했다.
증언 영상 속 그는 “숙소에 돌아와도 몸이 아파서 잠도 못 잤다. 음식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에 못 일어나면 ‘일하러 가라’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데 그래도 몸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있으면 담당관이 와서 ‘일하러 가라’고 독촉한다. 오늘은 몸이 아파 쉬게 해 달라고 말해도 ‘농땡이 치려 한다’거나 ‘꾀병이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계속 쉬게 해 달라고 하니 담당관은 사무소로 끌고 가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마구 때렸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일본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소재 제과점에서 근무하던 중 징용장을 받고 나가사키조선소로 강제동원 됐던 김성수(97) 씨(국가기록원 제공)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 괴로움을 줬다. 날마다 왜놈들이 우리가 출근하고 나면 숙소에 와서 소지품을 싹 다 뒤졌다. 그때 한 사람이 태극기를 갖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체포해가서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 한다”고 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2020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민족문제연구소 수행)’을 통해 증언한 손성춘(94) 씨는 마을 내 일거리를 하러 가자는 구장의 말에 속아 따라갔다가 일본 후쿠오카 미이케제련소에 끌려갔다. 손 씨는 “일하다가 허리가 아파 삽을 짚고 서서 쉬니까 ‘이렌까이 이렌까이’라고 빨리 퍼내라고 했다. 허리가 아파서 좀 쉰다고 한국말로 하니까 일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버렸다”고 증언했다.
하시마(端島·군함도) 탄광 [사진=민족문제연구소 확보 자료]
‘힘아리’ 없는 밥알
‘콩깻묵밥’ 끼니
1942년 야하타제철소로 끌려간 고(故) 최영배 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밥을 네 그릇 먹어도 양이 안 차더라”며 “쬐끄만한 공기에다 주는데 두 번 먹으면 (밥이) 없다. 어른이 그거 먹고 살 수 있겠냐”고 말했다. 다카시마탄광에 끌려갔던 고(故) 정복수 씨도 “그때는 식량이 귀한 편이라서 대두박이라고 콩기름을 짜고 만든 것이 나오는데 그것하고 쌀하고 콩하고 섞어서 그걸로 밥을 해줬다. 쌀은 안남미라고 하는 것을 줬다. 물을 좀만 부으면 불어나는데 밥알이 힘이 없고 질척하고 가늘다”라고 했다.
고(故) 최장섭 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콩깻묵밥에 쌀을 어쩌다 한 알씩 섞어주는데 말할 수도 없다. 그 밥을 나르는데 쥐가 거기에 덤볐다. 쌀겨가 하나씩 (섞여있으니) 쥐도 잘 안 먹는다. 깻묵밥을 먹고 그 기운을 내고 소화를 시킨다니 모든 힘을 쓸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일하다 다치는 건 다반사
도망가다 걸리면 ‘초주검’
미이케탄광에 끌려갔던 류기동 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천장이 머리 위로 떨어져서 머리에 흉이 네 군데가 있다. 하시라(기둥)를 양쪽에다 세우고 그 밑으로 가다가 잘못해서 (기둥을) 들이받으면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데 그럼 그 밑에 가던 사람들은 그냥 다 그걸 얻어 맞아야한다. 많이는 안 다쳤어도 세 번인가는 죽을 뻔했다”며 “와이어 줄로 여기(발목)에 감겨서 끌려가다 다쳤다. 그 흉터가 지금도 있다. 사람이 걸핏하면 하나씩 죽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미이케제련소에 끌려간 이영주(93) 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조선인들은 제자리에 놔두면 도망간다고 감시가 많았다. 그래서 허락이 없거나 돈이 없으면 못 나갔다. 감옥살이밖에 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자유를 주면 다 도망갈 사람들인데, 잡혀 온 놈은 그냥 맞아 죽는다”고 했다.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가족들 배급을 끊는다는 면 공무소의 협박으로 야하타제철소에 끌려간 고(故) 주석봉 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주로 탄광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도망갔다. 그때 ‘도리시마’라고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망가는 사람들을 붙잡는 역할인데 우리가 열심히 일할 동안 가만히 작대기 들고 슬슬 눈치 보고 다니면서 월급을 받아먹곤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장에서 입는 관복이 있는데 그 관복에 ‘조요(징용)’라고 박혀 있었다. 주변 눈도 있으니 그걸 입고 도망가긴 어렵다. 그리고 도망을 가봤자 고향의 식구들이 곤란을 당하는 걸 아니까 도망가지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박정희, 백선엽, 김성수, 방응모 등 친일파 153명 다뤄…”친일문제, 존재하는 그대로 봐야”
▲ 박시백 화백의 역사만화 “친일파 열전”(민족문제연구소 기획, 비아북 펴냄) 출판보고회가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 권우성
“친일파들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한 상황에서 ‘친일청산’이란 무엇일까. 그들의 친일행위 자체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이 시대의 친일청산이 아닐까 싶다. 친일파열전이 기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해 8월 <35년>을 완간한 박시백 화백이 정확히 1년 만에 친일파만 다룬 책 <친일파열전>을 꺼내들며 한 말이다. 이날 박 화백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올 초 민족문제연구소의 제안을 받고 이 작업을 시작했다”면서 9일 <친일파열전> 출간을 알렸다.
제주 출신인 박 화백은 1984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시절 전두환 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다. 이후 <한겨레>에 입사해 만평을 그렸다. 2001년 퇴사 후 박 화백은 <조선왕조실록>을 그리며 12년 동안 20권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후 독립운동 현장을 답사하며 일제강점기를 다룬 <35년>을 집중, 2020년 7권에 달하는 작업을 완료했다.
이번 책 <친일파인열전>은 <35>년의 후속작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00여 명 중 친일 행위가 심각했던 인물, 해방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인물을 중심으로 선별된 153명의 행적이 담겼다. 박 화백은 지난해 <35년>으로 제14회 임종국상을 수상했다.
▲ 박시백 화백의 역사만화 “친일파 열전”(민족문제연구소 기획, 비아북 펴냄) 출판보고회가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 권우성
이날 박 화백은 “책 속에 친일파 153명을 선정해 그렸다”면서 “친일파로서의 행각이 극심한 경우, 더불어 친일 행각이 덜하더라도 해방 이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특별한 경우에 포함시켰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협의해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들 중에는 대표적 친일파 이완용을 비롯해 이광수, 윤치호, 김동인, 김활란, 김성수, 방응모 등이 포함됐다. 그중에는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도 있다.
이에 대해 박 화백은 “친일의 문제는 존재하는 그대로 보면 된다”면서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행위는 역사적 사실이다. 책에서 이들을 다룬 것은 논란될 일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화백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 행각 자체는 많지 않지만 일제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출세하겠다는 마음으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지원했다”며 “일제시대 경력보다는 해방 이후 그가 현대사에서 차지한 역할과 정신을 고려해서 표지에 넣었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책에는 박 전 대통령이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보통학교 훈도(일제강점기 초등교원)로 일하다 신징군관학교를 입학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히 담았다. 특히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실린 그의 혈서 군관 지원서를 비롯해 일본 육사에 편입해 만주군 보병 소위로 활동한 이력,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숙군 작업 당시 체포됐지만 이후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제공한 대가로 사형을 면한 이야기 등도 가감 없이 실렸다.
이날 박 화백은 소설가 김동인을 언급하며 “1930년대 후반 이후로 해방 직전까지 친일파로서 행동을 했는데 해방 당일까지 조선총독부 정보과장을 찾아가서 시국에 공헌할 방도를 제안했다”면서 “해방 후에도 동인문학상 등으로 여전히 대접받는 것 자체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소설가 김동인은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일제강점기 학병, 징병 선전 및 선동활동, 내선일체 및 황민화, 침략전쟁 선전 등의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다. 그러나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은 1957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상이 처음 제정될 당시에는 사상계가 주관해 시상했으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폐간된 후 1987년부터 조선일보가 이 상을 주관하고 있다.
▲ 박시백 화백의 역사만화 “친일파 열전”(민족문제연구소 기획, 비아북 펴냄) 출판보고회가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 권우성
박 화백은 이날 회견을 마무리하며 “소수의 인물을 상징적으로 다룰지, 아니면 짧더라도 많은 이를 다룰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후자가 더 낫다고 판단했다”며 이는 “(친일파들의) 이름 석 자라도 알리는 게 더 의미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특별기획으로 출간된 <친일파열전>은 인세 중 일부가 친일문제연구에 쓰일 예정이다. 이 책을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3일 예약 판매를 시작한 <친일파 열전>은 정식 출간 전부터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역사 부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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