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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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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admin | 목, 2021/07/29- 11:18

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사진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진주지역 유해 임시 안치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좌(사진 3 형평운동 기념탑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우(사진 4 신현수 선생 頌公碑(송공비) 망진산 봉수대 아래).

▲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희생 경위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2021-07-27> 단디뉴스

☞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관련기사

☞단디뉴스: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➀ “아직도 풀리지 않는 70년의 한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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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일본군 군복을 입고 일본도를 쥐고 있는 박정희 사진을 “박원순이 만든 빨갱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작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으로 선동질을 하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던 보수단체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자경 씨가 법정 구속됐다.

10월 12일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이성호)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징역 4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하고 방 씨를 법정 구속했다.

문제가 된 사진은 일본의 누리꾼이 조작한 것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설립한 단체가 아닐뿐더러 “사진이 합성된 가짜”라고 감정한 친일문제 전문연구기관이다.

▲ 박정희 사진조작설을 유포하고 있는 방ㅇ경씨의 트윗

민족문제연구소는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 4월 12일 대법원의 원심 확정으로 500만원의 손해배상을 받아낸데 이어 형사소송 1심에서 방 씨의 유죄를 인정받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음해에 단호히 대응하여 징벌한다는 무관용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2016년 서울북부지검이 불기소처분을 내리고 2017년 서울고검이 항고를 기각했는데 서울고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어렵사리 재판이 진행됐다.”고 밝히고, “앞으로도 건전한 비판과 학술적 토론은 언제든 수용하겠지만 무분별한 허위사실 유포에는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서석구 변호사가 민사소송에 이어 형사소송에서도 방 씨의 변호를 맡아 눈길을 끌고 있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단독] 일본 누리꾼이 조작한 ‘박정희 친일사진’ 법정까지 간 사연 (2017.1.13)

☞경향신문: [단독]검찰 불기소 처분한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사건···법원 “공소 제기하라” (2017.5.24)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소송, 2심 승소와 스프레이 테러 형사조정
(2018.1.25)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박정희합성사진 조작관련 명예훼손 재판에서 연구소 최종승소 (2018.4.20)

금, 2018/10/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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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이준 열사 집터 표석 제막식 자료집]

 

이준 열사 순국일에 집터 표석 제막식 거행

 

▲ (좌) 이준 집터’ 표석 (시안), (우) 이준 열사의 집터이자 최초의 부인상점이 있던 안국동 152번지 구역의 현재 모습

헤이그특사사건 110주년과 이준 열사 순국 110주기를 맞아 이준 열사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될 당시에 거주했던 곳에 그를 기리는 집터 표석이 설치된다. 그간 이준 열사가 생전에 안국동에 살았던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구체적인 주소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함세웅)가 각종 문헌자료를 조사해 최초로 지번(안국동 152번지)을 확인한 결과, 덕성학원 재단 건물인 해영회관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될 당시 이준 열사가 거주했던 집터임이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 표석 설치를 신청하였고,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이번에 집터 표석을 설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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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적도면 위에 이준 집터(안국동 152번지, 장송루 자리)와 주요 인접 공간의 위치 관계를 표시한 자료이다. (『경성부일필매 지형명세도』,1929)

표석 문안에는 이곳이 1907년 당시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점 이외에 1905년 이준의 부인 이일정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부인상점을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사실도 함께 명기하였다.

표석 제막식은 이준 열사의 순국 110주기가 되는 7월 14일 오후 1시부터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덕성학원 해영회관 8층에서 열리며, 제막행사는 1시 40분에 해영회관 1층(하나은행 안국동지점) 전면에서 거행된다. 이번 제막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조광 국사편찬위원장, 김영종 종로구청장, 박상임 덕성학원 재단이사장을 비롯하여 이준 열사 유족대표로 조근송 이준열사기념사업회명예회장이 내빈으로 참석한다.

이에 앞서 낮 12시 30분부터 식전행사로 이준 열사의 생애와 이준 집터에 관한 사료 소개와 전시해설이 있을 예정이다. (재)리준만국평화재단(이사장 이양재)에서 제공하는 전시유물에는 이준 열사의 유묵(遺墨) 2점과 관련 자료 40여 점이 포함되어 있다.

목, 2017/07/1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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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 군국가요 작곡한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 내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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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 화면 갈무리. 이날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대중음악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의 성격상 KBS가 자료 검토 및 선곡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친일 행적이 있는 음악인의 노래를 선곡해 방송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에선 가수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이날 하은은 425표를 얻어 1승을 거뒀다. 하은의 열창과 탈북 청년들이 고향을 등지게 된 사연이 어우러져 뜻깊은 무대가 됐다.

그러나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1급 친일 작곡가의 곡으로 알려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방송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이 만든 노래다. 박시춘은 평생 동안 3000여 곡을 작곡, 이 가운데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신라의 달밤’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원 혹은 밀양보전을 졸업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밀양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대중음악계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82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시춘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중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1등급’ 친일파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인들을 징용·징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38년부터 지원병 제도를 실시,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에 동원했다. 1943년 공표되고 이듬해부터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서도 한국인들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입대를 기피하거나 거부하지 않도록 ‘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예술인들을 동원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천황제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영화와 가요를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적극 호응한 이가 바로 박시춘이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는 박시춘의 친일 행위에 대해 “1942년부터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내용의 ‘고성의 달’, 1943년 징병제 실시 기념영화 주제곡 ‘조선해협’,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축하 특별 기획음반 수록곡인 ‘혈서 지원’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942년 죽음을 각오하고 승리를 다짐하는 군인의 모습을 묘사한 가요인 ‘아들의 혈서’, 1943년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후방의 여인 및 부모의 모습을 그린 ‘결사대의 아내’, 부상을 입었음에도 일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내용의 ‘즐거운 상처’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 1943년 산업전사위문격려위문예능대에 참여해 활동함”이라고 밝혔다.

위 <결정이유서>에 따르면,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는 이외에도 ‘낭자일기'(노래 남인수) ‘병원선'(노래 남인수) ‘아세아의 합창'(노래 김정구) ‘진두의 남편'(노래 박향림) ‘지원병의 집'(노래 장세정) 등 13곡이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는 군국가요 작곡가로선 최다 기록이다.

지난 2016년엔 밀양 출신인 박시춘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가 ‘박시춘 음악제’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친일파를 기리는 음악행사를 도비를 지원받아 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이 빗발치면서 밀양시는 박시춘 음악제 개최를 백지화 했다. 박시춘 외에도 안익태·현제명·홍난파·남인수·김기수 등 다수의 음악인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 행적이 확인된 바 있다.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국장 겸 친일잔재조사위원회 연구원은 11일 통화에서 “대한민국 100년 특집을 하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 나와서 내 귀를 의심했다”면서 “박시춘은 친일 전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동원의 제일선에 서서 징병 유도 가요를 만든 대중음악계의 일급 친일파”라고 설명했다.

이지훈 국장은 “화려한 친일행적을 가진 이가 (친일의 대가로) 평생 호의호식한 데다 대중음악계 최고의 별로 아직까지 자리매김한 것은 씁쓸한 현실”이라며 “관계자들이 자료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임정 수립 100년 특집에 나온 것도 우려스러운데, 우승을 했다고 해서 더 당황했다”고 개탄했다.

<2019-03-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절 특집’에 1급 친일파 노래를? KBS의 황당한 결정.

수, 2019/03/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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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관련기사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⑯ [단독] ‘틀린 표현 버젓이’ 역사교과서…“일본 더 진전하기도”(2017/10/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⑮ [단독] 빈약한 강제동원 교과서 기술…심한 경우 3줄뿐 (2017/09/28)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⑭ [단독] 빛 좋은 개살구?…총체적 난국 ‘강제동원역사관’ (2017/09/26)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⑬ [단독] 혈세 522억 어떻게 흘러갔나…수상한 국립강제동원역사관 (2017/09/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⑫ [단독]오류투성이 ‘피해자 명부’…창씨개명 알아야 확인 가능? (2017/09/1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⑪ “한국인은 열람 못해”…여전히 찾지 못한 이름들 (2017/09/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⑩ 16년간 연락 없는 외교부…”우리가 귀찮은 존재인가” (2017/09/12)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⑨ “화장실 따라와 늦게 나오면 매질” 근로정신대 끌려간 13살 소녀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⑧ 친일파비가 현충시설…정부는 ‘나 몰라라’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⑦ “노동자상 기부한다”는데…‘안 받겠다’는 국토부 (2017/08/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⑥ “너무 배고파 개밥까지” 94세 피해자의 눈물 (2017/08/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⑤ [단독] 58년만의 부고…“곡괭이 잡은 채 생매장됐다니” (2017/08/1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④ “내가 죽더라도 알려야 한다” (2017/08/0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③ “개 묻듯 묻었다” 탄광노동자 기록, 누가 지켜야 하나 (2017/08/07)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② “우리마저 손 놓을 수 없어”…일본의 소도시가 우키시마호를 기억하는 법 (2017/08/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① 우키시마호 참사 72년, 가라앉은 귀향의 꿈 (2017/08/01)

광복 72주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정부는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피해자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대신 나선 이들은 수많은 ‘익명의 조력자’였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 기획 시리즈에서 다 담지 못한 강제동원 학계, 시민단체계 인사들의 ‘고군분투기’를 소개한다.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가의 협조가 절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기관은 전무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99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이후 김 연구원은 일본이 수탈한 조선의 인·물적 자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와 연구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역사문제연구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에 제안해 ‘강제동원진상규명 시민연대’ 시민단체를 꾸렸다. 이뿐만 아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초안도 김 연구원의 손을 거쳤다. 김 연구원은 강제동원 연구에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면 해당 자료 열람이 힘들어진다”면서 “우리 정부가 자료 연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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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서경 작가 제공

◀ 김서경 노동자상 조각가…예술로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서울 용산역 앞 세워진 국내 최초의 강제동원노동자상은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조각했다. 노동자상은 조선인 노동자가 어둡고 깊은 갱도를 나와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김 조각가는 이를 ‘불편한 눈부심’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 조각가가 노동자상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에 끌려갔다. 일부는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로나마 고향 땅에 잠드신 분들도 있다”면서도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조각가는 앞으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진상규명 위해 사할린에 흘린 땀방울

비포장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린다. 러시아 사할린 각 지자체 기록보존소에 연금, 노동자 카드 등 자료의 열람을 신청한다. 허가가 떨어지면 ‘서류철’로 된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산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정보 문제로 복사가 불가능한 자료도 다수다. 일일이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조사해온 방법이다. 방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활동, 사할린에 잠들어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발굴에 집중해왔다. 지난해에는 사할린에 홀로 파견됐다. 그는 약 500여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발굴해냈다. 방 교수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와 유가족 모두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이들의 수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자료가 부족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명부 발굴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포기할 수 없던 아버지의 ‘이름’

“이희자 보추협 대표에게 물어봐라. 이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취재 도중 만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과 피해자를 보듬으며 약 3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또한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관련 기록 찾기에 나섰다.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가까스로 아버지의 사망 사실이 적힌 명부와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명시한 문건 등 총 6건의 자료를 찾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피해 유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에는 보추협을 결성,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찾아낸 기록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려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출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난 45년 이후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면서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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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충 해결사’

장완익 변호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다. 지난 199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담당 변호사로 일하던 지인이 유학을 가면서 장 변호사가 대신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장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고충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업무를 진행했다. 장 변호사는 광복 이후 들어선 정권이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노태우·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사 해결을 경시했다”며 “이로 인해 강제동원 역사가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주도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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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외길 25년째 

“술맛 떨어지게 또 우키시마호 얘기냐”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이 지인을 만나면 듣는 핀잔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1948년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폭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아직 정부는 희생자 숫자는 물론 정확한 사고 원인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꾸준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반핵포럼에 참석해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됐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는 총 82명의 생존자를 만나 증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 2008년에서야 ‘우키시마호사건소송자료집’ 두 권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형식적 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 회장의 주장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단 2명. 전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우키시마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아직도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 묻혀 있을 유해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제작도 계획 중이다. 언제까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홀로 싸워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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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역사 알아야 바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수십 년간 자료를 분석, 수집해온 ‘강제동원 전문가’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의 제의로 강제동원 문제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 95년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을 도왔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지난 2015년까지 위원회 조사과장으로 1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등의 작업을 지휘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입수와 유골 봉환에 힘썼다. 위원회가 종료된 후에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한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를 기획 중이다. 경희궁 지하터널, 인천 동일방직터 등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은 8000여 곳이 넘는다. 인천과 부산 등 각 지역에 노동자상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 연구위원은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일본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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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문재인 정부, 노동자상 건립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

최종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8월 최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건립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 교토시 단바망간광산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이유로 일본 입국이 불허됐다. 일본 정부뿐이었을까. 한국 정부마저 노동자상 건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최 직무대행이 속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4월6일부터 매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최 직무대행은 지난 6월24일 열린 ‘노동자상 건립 촉구대회’에서 “정부는 강제동원 노동자 피해 보상을 위해 주권국가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력 끝에 노동자상은 지난 8월 용산역 앞에 세워졌다. 현재 부산에서도 노동자상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시민을 상대로 지지 서명을 받고 노동자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 오는 12월28일에 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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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군함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다

“소설 ‘군함도’ 집필은 운명이었습니다” 지난 7월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먼저 군함도의 비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한수산 작가다. 한 작가가 소설 ‘군함도’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년. 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은폐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작가는 오로지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해 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한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다만 이 분노를 분출할 길을 여는데 우리가 소홀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건국 이후 흔히 말하는 ‘친일 정부’가 이어졌다. 기득권 세력은 부단히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과거사 기록 작업이 더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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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수많은 희생자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의 전문분야는 일본 역사교과서다. 한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일본 역사교과서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지 꼼꼼히 ‘모니터링’ 해왔다. 한 박사는 일본의 각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왜곡된 부분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착취당한 일에 대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에는 전쟁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범죄, 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은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강요당했다”면서 “그런데 현재 역사 교과서는 희생자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박사는 “강제동원과 관련해 교과서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강제동원의 실태를 정확히 알리고,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짚어주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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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행동하는 일본의 양심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바라는 목소리는 일본에도 있었다. 지난 60년대부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사학자 고(故) 박경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후 일본 전역을 돌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네트워크 공동 대표를 맡는 등 주축이 됐다. 네트워크는 일본 내 흩어져 있던 400여 명의 강제동원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은 단체다. 히다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조사, 비밀 자료 공개 요구, 미불 임금 처리 등을 위해 힘썼다. 네트워크가 수집한 자료는 한국 위원회로 보내져 진상규명을 위한 토대가 됐다. 최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히다 대표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에서도 다시금 노력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정진용, 이소연, 심유철, 박효상, 박태현 기자 [email protected]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email protected]

영상=윤기만 [email protected]

<2017-10-05>쿠키뉴스

☞기사원문: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목, 2017/10/0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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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홍 “판사가 역사에 무식..즉각 항소할 것”

 

정미홍 전 아나운서. 2017.3.8/뉴스1 © News1 문요한 기자

(서울=뉴스1) 이유지 기자 =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血書)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58)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단독 김종복 판사는 31일 한국 근현대사 비영리 연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아나운서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의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시했다.

그는 “트위터로 글을 단순히 리트윗한 것이라 해도 타인의 글이 명예훼손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며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단체를 표방하는 바, 증거도 없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다고 적시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 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신문을 내세우기 전 과거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삼았지만 만주일보에 박 전 대통령의 혈서 기사가 있다는 것은 거짓이기에 박정희 혈서설은 조작됐다는 취지”라고 밝히고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아나운서는 선고 중 판사를 향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지속적으로 방송에 나와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설)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며 “위증죄로 증인을 고소한 건이 현재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어갔고 판사에게도 증거로 제출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는 선고 후 기자와 만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자 만주신문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라’라는 혈서를 썼다고 2009년 밝혔다.

정 전 아나운서는 2013년 2월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 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인용해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글은 ‘지난 5년간 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했으나 만주일보는 1908년 폐간된 신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7월 강용석 변호사와 정 전 아나운서를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고, 각각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강 변호사가 500만원, 정 전 아나운서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고, 2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원심을 확정했다.

 

<2017-08-31> 뉴스1

☞기사원문: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 1심서 벌금 30만원

※관련기사

☞ 연합뉴스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원

☞ SBS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 원

☞ 머니투데이 :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씨, 1심서 벌금 30만원

목, 2017/08/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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