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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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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admin | 월, 2019/12/23- 19:59

대학의 탄생과 변화

대학은 1000년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기술도 거의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지상에서의 존재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라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대학도 중세에서 현대, 후현대로의 역사적 변천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현재 세계의 상태를 고려할 때 고등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무엇일까?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고등교육은 인간이 더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증진시키도록 도움으로써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은 이런 역할에 실패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도덕적 헌신을 상실하고, 다른 면에서 잘못되고 파괴적인 사고방식에 헌신하며, 또 다른 면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걸 어렵게 만들기조차 한다.

현대 대학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다. 과거에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제 매우 세속적인 기관이 됐다. 한때는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이제 수백만의 학생들에게 열려있다. 이론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는 동시에 지극히 실용적이어서 문학비평과 이론물리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엔지니어링, 경영, 디자인과 나란히 존재한다. 대부분 학문분과들이 각자의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졌지만, 대학의 전반적 구조는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갉아먹는다. 대학들은 경제성장에의 헌신이라는 지배적 문화에 긴밀하게 묶여있는 동시에 이성과 숙고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려는 기관이면서도 이런 전통의 기본적 가정들이 타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세계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거나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현재 형식의 대학을 심각하게 재고할 이유가 없다. 현대 대학들은 세계가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부분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여했다. 그러나 최소한 진보의 길에 서지는 않았다. 현대 대학들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적과 바탕의 가정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은 산업과 정치의 지도자들, 계획가와 분석가들, 교사와 시민들을 교육하며 우리의 파괴적 관행을 떠받치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발전시키고 합법화한다. 현대 대학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환경위기가 가장 심각하고 사회적 부정의(이는 환경의 쇠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가 역사상 가장 증가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 해체와 환경 파괴에서 대학이 해온 역할은 크게 주목 받지 않는다. 환경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과잉인구, 과소비, 대규모 산업, 공공정책,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등에 초점을 두었다. 대학은 대규모 산업, 정부, 종교의 이해와는 떨어져 있거나 거기에 적대적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했다. 전반적으로 대학구성원들의 입장은 자연세계의 파괴에 대한 비난이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동체 붕괴에 있어서도 대학의 책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 대학들이 도시화를 촉진하는 이동성과 개인주의를 교육한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돼왔다.

 

현대적 믿음에 대한 대학의 헌신

나는 현재 형식의 대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특히 학문분과, 철학적 유물론, 그리고 경제주의-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헌신 때문이다. 대학이 세계의 선을 위한 세력이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넘어서야 하며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 지구와 모든 서식자의 내재적 가치, 생명이 갖는 상대적 속성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보증해야 한다.

학문분과는 매우 강력한 동시에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특별한 방식의 구조적 사고이다. 대학이 분과 형식의 사고에 매진하는 한, 대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학문분과의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일관성과 통일성과 의미가 부족하다. 한 분과의 다양한 전제와 발견은 다른 분과의 전제와 발견에 의해 영향 받거나 점검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무제한의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가정하는 반면 물리학자들은 지구의 파괴를 경고하는데, 이런 경고와 발견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려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은 모든 실재가 물질로 환원되고 그런 물질은 내재적 가치, 경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는데 비해 (암묵적으로는 대다수 과학자들을 포함해서) 대학의 다른 학자들은 최소한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고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의 행동과 믿음에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대학의 분과구조는 이런 모순적 관점이 어떻게 두 가지 모두 진리로 통용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전반적으로 통일된 실재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는 대신, 서로 정반대인 추상적 개념을 내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 대학은 현대성의 한 버전인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후현대적 입장을 보태놓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 그리고 중력 같은 물질적 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대학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세계관, 즉 오래 되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잔여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세계관이다. 유물론은 초기의 이원론에 비해 더 큰 장점을 갖는다. 비이원론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분명한 실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데 따른 문제를 피해간다.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것에는 경험(인간의 경험을 포함), 자유(인간의 자유를 포함), 내재적 가치(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포함), 도덕적 미적 규범 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생명이 없고 의미와 목적을 피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을 향유하는 개인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현대 대학은 또한 경제주의에 경도돼 있다. 경제주의에 따르면 세계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돈으로 해결되며 돈은 은총처럼 무한하다. 세계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섯 배나 팽창했는데도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다수가 더 나빠졌다는 사실, 전반적인 환경이 전지구적 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대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심각하게 쇠퇴했다는 사실은 이런 믿음에 대한 반증이 되지 않는다. 세계의 경제활동이 무한히 팽창하며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주고 건강한 생태권역과 양립 가능하다는 믿음이 너무 깊은 나머지, 경제주의가 보편적 부라는 공공연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에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주의는 잘못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점점 큰 지구의 쇠퇴와 인간의 고통을 가져온다. 단순히 말해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현대 대학들이 직간접적으로 경제주의를 지지하는 한, 환경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세계와 한편이 될 수 없다. 경제주의는 삶의 의미를 소비와 소득의 관점에서 정의하기 때문에 이런 목적을 수용한 대학은 자연세계의 파괴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고통을 증진시킬 뿐이다.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데도 대학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이 있다.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생각이 진리로 간주되며, 전 세계의 고등교육기관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인증됐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자신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 열세 가지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실재는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2. 우주는 목적이 없다.

3. 진리, 정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주관적이어서 중요하지 않다.

4. 사회 전반의 건전도는 GDP로 측정될 수 있다.

5. 광범위한 경제적 불평등은 문제가 아니다.

6. 교육은 직업훈련과 출세에 관련된 것이다.

7. 공장식 농축산업은 효율적이고 필요하며 지속가능하다.

8. 모든 중요한 문제는 시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9. 개인이 사회보다 더 현실적이다.

10. 가능한 최선의 세계질서는 하나의 슈퍼파워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미국이다.

11. 글로벌 경제는 필연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12. 전쟁과 부정의는 피할 수 없다.

13. 경제성장은 기후안정성이나 생물다양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루려면, 고등교육을 재발명하거나 현재 상태의 고등교육을 다른 종류의 고등교육으로 보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에 도전하고 그것을 보다 진실에 가까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해주는 형식의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위에 제시한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토론하고 이 목록에 다른 생각들이 추가되기를 바란다. 아마 내가 만든 목록은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미국 중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 요점은 대학들이 당대의 문화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몇몇 중요한 생각들은 현재 구축된 고등교육의 맥락에서는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형식의 대학이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학의 구조와 관련이 있고, 둘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형태 짓는 광범위한 문화적 가정과 관련이 있으며, 셋째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대학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

오늘날 대학은 학문분과에 따라 조직돼 왔다. 과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고 미래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 학문분과는 탐구분야, 기본적 가정의 세트, 방법론으로 구성된다. 학문분과에 맞지 않거나 현재 분과의 기본가정과 모순되는 생각은 오늘날 고등교육의 맥락 안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내가 지구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해롭다고 꼽았던 위의 모든 생각들은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만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분과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능성을 음미하는데 닫혀있다. 이론상 철학 같은 다른 분과는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거나 이것이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물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된다거나 우리는 물리학자들의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초점은 실재하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대학이 구조화된 방식 때문에 이런 생각이 대학에서 타당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산업화된 농업은 산출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토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들어보겠다. 농경제학이라는 분과는 그것이 바이오기술과 결합돼 있는데다 대규모 농화학제품 기업들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때문에 위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증명하거나 토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시해버린다. 많은 대학에 있는 환경연구, 지속가능발전, 음식연구 관련 학과들이 현대 농업은 지속 가능하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만, 이런 학과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일반적으로 대학 안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한다. 이 학과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농업정책과 관행을 만들어내는 농과대학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학들이 위의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이 이미 “상식”이 되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성취라는 생각과 끝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는 쌍둥이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모든 사람들이 경제성장은 끝없이 가능하며 대학에 가는 이유는 좋은 직업을 얻는 것, 즉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이 고강도 노동, 탁월한 경제정책과 함께 삶을 엄청나게 개선한 주역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생각에 도전하는 것은 상식을 배반한다. 그러나 전체 그림은 좀더 복잡하다. 한국의 삶이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아니며, 10년마다 두 배가 되는 경제성장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강의 기적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이것은 경제성장이 끝없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가정에 그 뿌리가 있다.

대학은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된 “상아탑”으로 불려왔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깊은 진실은 대학이 사회적 구성물이며 문명의 상식이 교육과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경영대학원과 경제학과는 경제학이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학, 최소한 미국 대학들이 “경제학은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을 고려하는 게 지극히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다. 미국에는 대개 소규모인 사립대학들과 대개 대규모인 공립대학들이 섞여 있다. 미국의 대다수 학생들은 공립 대학에 다니고 있다. 공립대학 교수들은 각 주에 고용돼 있다. 일부는 종신직위를 보장받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현재는 70%의 교수들이 종신고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교수들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자유를 누리지만, 매년 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이런 자유는 다음 학년초에 계약을 연장해야 한다는 열망에 의해 제한된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다시 고용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강의하는 게 결코 편안하지 않다. 슬프게도 정규직 교수들조차 종종 승진하지 못하거나 학생들의 평가에서 별점을 덜 받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피한다.

한국 대학들이 대개 사립이라고 하더라도, 내 짐작으로는 상식적 생각들에 도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압력들이 존재할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반적으로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대해 다루지 못한다. 이런 일반화에는 예외가 있으며 이런 예외를 축하해야 하지만, 이런 예외가 더 큰 진실을 가리도록 허용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학들은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는다. 대체로 자신들의 상당한 권위를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잘못되고 파괴적인 생각에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지식”을 재생산함으로써 상황을 점점 나쁘게 몰아간다.

 

대학을 변화시키는 두 가지 제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통할 수 있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두 가지 제안은 가능성의 전부가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제안이 더해지길 바란다.

큰 대학의 교수들은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에 대해 탐구하는 독서그룹을 조직할 수 있다.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독서그룹에서 한 학기 동안 한두 권의 책을 공들여 읽도록 한 다음, 이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자신들과 전공이 다른 동료들과 서너 번 만나도록 하면 된다.

우리는 애팔래치안 주립대학(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중간규모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이것과 비슷한 강의를 시도했다. 주제는 기후변화와 그것의 사회적 함의였다.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많은 교수들이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과 만나고, 자신들의 특수한 학문분과 바깥에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환영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가르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학의 분과구조였다. 비록 임시적 토대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교수들이 자신의 전공을 넘어 함께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현재의 대학 구조를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독서그룹이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어떤 생물학과 조교수가 학생들이 생물학 전공기초 강의에서 전지구적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 부분은 선택강의이며 많은 강사들이 이 부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생물학과는 전공기초 강의에서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를 필수강의로 지정했다. 이론상 다른 학과의 교수들도 전공기초를 정하면서 비슷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강의에서 얻은 또 다른 결과는 약 100명의 교수들이 기후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정보를 자신들의 강의에 넣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것이다. 이런 서약은 교수들에게 부과된 의무사항이 아니라 개인적 결정이었으나, 그들이 이 서약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현대 대학처럼 오래 되고 존경 받는 제도를 금방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함께 독서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들이 변화를 위한 맥락을 만들어내는데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종류의 분과를 횡단하는 노력들이 현대 대학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가질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제안은 대학 바깥에 대규모로 존재하는 성인학습센터와 관련된 것이다. 1920년에 독일 철학자 프란츠 로젠츠바이그는 독일 대학들의 비인격적 교육에 맞서 레흐르하우스(Lehrhaus, 교육의 집)로 알려진 기관을 설립했다. (역자주: 당시 독일에서 제기된 평생교육의 필요성에 부응하면서도 유대의 전통에 기초한 성인교육기관으로, 회당(synagogue)을 학교(lehrhaus)로 바꾸되 거꾸로 하지 말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유대역사에서 첫번째 레흐르하우스는 제1차 바빌론 유수때 세워졌으며 혁신적 교육방법으로 신앙의 의무를 지켰다.) 레흐르하우스의 강조점은 전통적인 유대식 삶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에 대응하고 비위계적인 교수법을 도입하는데 있었다. 1930년대에 나치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레흐르하우스는 독일에서 가장 활기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970년에 레흐르하우스 모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느 정도 부활했다.

1960년대에는 몇몇 “대안대학”들이 미국에 설립됐는데, 이는 그 시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제도권 대학들이 실패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 건강한 공동체, 지속 가능한 경제학 같은 구체적인 문제 혹은 생태적이고 정의로운 문명을 증진시키는 발상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조직하는 성인학습센터 혹은 “대학”을 설립하는 게 가능하다. 이런 “대학” 혹은 성인학습센터는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을 얼마든지 탐구할 수 있다.

나의 주안점은 현재 형식의 대학들이 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운영하는 대학들은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생각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무능력하다. 물론 문화 자체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고등교육을 변화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학을 내부와 외부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현대 문화의 모든 다른 측면들까지 변화시키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출발점은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고등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커스 피터 포드

철학자, 『현대 대학을 넘어: 구성적 후현대 대학을 향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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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또 다른 심층적인 특징은 지식경제가 우리가 작업하는 방식과 정신이 관념을 발전시키고 발견을 성취하는 방식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을 수립해준다는 데에 있다. 생산이란 우리의 힘을 향상시키는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연을 변형하고 자연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지식성장이 경제활동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신규제품이나 신규자산, 이를 형성하는 새로운 방식은 우리의 추측과 실험을 상품과 서비스로 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식경제의 이와 같은 성격규정에서 경제생활에 중요한 어떤 것들, 예컨대 생산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 즉 협력체제나 기술적 노동분업 나아가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안배들은 배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식경제의 중요한 충동을 급진화함에 따라 실천적인 목표를 달성하고자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은 상상력의 표현이 된다. 이 방향으로 더 전진하기 위해서는 미시적 수준에서, 즉 현장에서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경제와 정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여 이러한 안배들이 시장과 국가에 관한 확립된 가정과 안배들을 당연시하기보다는 우리가 이를 초극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허용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정신활동의 두 측면에 대한 견해를 확립하지 않고서는 상상력을 협력으로 전환하는 데에서 무엇이 관건적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한 측면에서 정신은 구닥다리 기계, 즉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에서 중요했던 기계의 일종과 같다. 이러한 정신은 모듈과 같아서 (뇌가소성에서 한계가 존재하는 한) 뇌의 구분된 영역들과 연결된 다양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공식과 같아서 판에 박힌 공식, 규칙 또는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신의 행동 또한 반복적이다.

다른 측면에서 정신은 모듈이나 공식과 다르다. 이러한 정신은 뇌가 소성을 이용하여 뇌의 물리적 하부구조의 다양한 부분들에 유사한 역량을 부여할 수 있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여타 모든 것과 재조합할 수 있다. 이는 수학에서 회귀적 무한(recursive infinity)이라고 부르는 역량이다. 이러한 정신은 자신의 정립된 관행이나 방법을 기각하고 자신의 확립된 전제들에 도전하고 계속해서 발견을 이루거나 정신이 회고적으로 명료화하는 통찰들, 적절한 관행들, 방법들, 전제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는 시인이 부정적 능력이라고 불렀던 권능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측면이다. 상상력은 기계로서의 정신과 대조적인 반(反)기계로서의 정신이다. 상상력의 측면에서 정신은 두 가지 구성적 작동방식을 가진다. 첫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강조했던 것으로서 거리두기이다. 그 이미지는 인식의 기억이다. 두 번째 작동은 칸트가 간과한 것으로서 변형적인 변주이다. 우리는 어떤 자연적이거나 계획적인 개입에 반응하여 현상의 변화를 기획하거나 자극함으로써 현상을 파악한다. 우리는 그 현상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그 현상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지와 같은 인접한 가능성들의 범위에 현상을 포섭함으로써 그 현상을 이해한다. 생산과 상상력의 근접성은 지식경제의 심장이며, 지식경제가 확산되고 심화될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생산과 상상력의 유사성을 탐구할 수 있다. 하나는 작업을 조직하는 방법이나 노동의 기술적 분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기계로서의 정신과 반기계로서의 정신(상상력)의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뇌의 물리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상대적 권능이나 우위성은 생산의 제도와 관행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조직에 의해 형태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만약 정치가 인간관계의 형태를 둘러싼 투쟁을 의미한다면) 정치의 역사는 정신의 역사에 내재적이다.

지식경제 하에서 우리가 함께 일하는 방식(기술적 노동분업)은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의 작동방식과 닮기 시작하고, 그 각각의 특징들, 한편으로는 정신의 비모듈적이고 비공식적인 특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 더욱 완전하게 발현됨에 따라 그 회귀적 무한의 역량과 부정적 능력을 갖기 시작할 수 있다. 생산은 이러한 특성들과 능력들 덕분에 인접한 가능성의 잠재영역에서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생산의 가능성들을 이용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 감독적 역할과 집행적 역할 간의 차이나 결과적으로 전문화된 집행적 역할들 간의 차이가 완화될수록, 생산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현할 기회는 더 나아진다.

생산계획은 집행과정에서 작업반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결과적으로 작업반 내에서 전문화된 역할들은 더 이상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역할들 간의 구분의 고착성은 개념 정립과 집행 간의 차이의 명료성의 이면일 뿐이다.

기술적 노동분업이 어떻게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는 경제에 적용되는 경우 당혹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더 익숙한 군사적인 응용사례를 가지고 있다. 재래식 정규군으로 조직된 보병여단은 지휘관과 병사의 엄격한 구분과 야전에서 고정된 역할들을 가진 지휘통제구조를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보병여단은 자체적으로 구비한 군사기술의 잠재력, 즉 화력기술 및 통신장비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서 매우 제한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보병여단은 기습전에 대응하여 전장에서 재편성하고 변통하는 능력에서도 제한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적절한 훈련을 받고 기술을 습득하고 장비를 갖춘 비정규군은 전투의 계획과 실행 사이에 그와 같은 뚜렷한 차이를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군대는 엄격한 지휘통제구조를 피할 것이며, 긴급한 장애와 기회에 비추어 계획을 조정할 더 큰 재량을 하급 장교와 하급 부대에 배정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군대는 스페셜리스트에게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되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부대가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면 부대는 뛰어난 작전능력을 구비할 것이고 전통적인 정규군보다 화력과 통신장비를 더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대는 야전에서 흩어지고 다시 집결하고, 일관성과 추진력을 상실하지 않은 채 기습전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적 진화의 노선은 정규군이 상황에 따라 자체적으로 확장하고 중앙의 (그러나 느슨하고 유연한) 통제를 수용하고 야전에서 일관성과 추진력을 보존하는 능력을 유지하면서 비정규군의 일부 특성들을 외부로부터 획득하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 경제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지식경제의 발전과 확산에서 진보를 의미한다. 현장에서 협력방법은 더욱 완전하게 상상력의 특징들을 띠게 된다.

이제 상상력으로서의 생산이라는 동일한 아이디어가 기술적 노동분업 뿐만 아니라 기계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기계화된 제조업과 그 후속형태인 공장제 대량생산) 아래에서 노동자는 마치 자신이 기계의 일부인 것처럼 일했다. 애덤 스미스의 핀공장이나 헨리 포드의 조립 라인에서 그의 동작은 기계들의 동작을 연상시켰다. 노동자와 기계의 유사성은 은유나 먼 비유 그 이상이었다. 그러한 유사성은 프레더릭 테일러와 같은 산업조직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고 정전화되어 경영자와 작업반장에게 실제적인 지침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하에서 우리는 심지어 그러한 관행의 가장 신중한 표현형태에서도 기계로서의 정신을 본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교육을 경제성장의 기본요소 중 하나로 떠받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 시대의 노동자에게 교육을 통해 요구되는 바가 사실상 거의 없다는 사정은 당연하다. 이러한 노동자가 필요로 했던 것은 복종심,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리력, 손재주, 특히 손과 눈의 협응력이었다.

지식경제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은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상상력의 모형에 따른 생산의 쇄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또 다른 실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이러한 변화를 지도하는 원칙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기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개관으로 제시한다.

아주 최근까지 기계의 요체는 우리가 반복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를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계들을 공식과 같은 것이라고 부르자. 기계가 틀에 박힌 공식과 같이 작동한다는 사실은 기계의 가장 큰 가치가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공식과 같지 않게 행동하도록 허용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그 기계의 사용자는 반복하고 기계 장치로 코드화하는 것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활동들에 그들이 가진 최고의 자원,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자원(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와 사용자의 이와 같은 관계는 생산방식의 역사에서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량생산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실례가 보여주듯이, 노동자는 더욱 빈번히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모방하거나 다양하지만 비교적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기계를 보완함으로써 마치 그가 자신의 기계 중 하나인 것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비교적 단순하고 경직된 기계일지라도 사용자들로 하여금 기계를 모방하는 대신에 기계를 최선으로 이용하도록 허용하는 기술의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술의 잠재력은 주류 경제사의 주변으로 내몰리게 된 공예적이거나 장인적인 생산형태로 달성되었다.

생산방식의 역사와 이러한 생산방식을 배태한 경제, 정치, 문화의 역사는 기계의 진화를 위축시키고 또한 기술적 노동분업을 형성해왔다. 기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기계가 아닌 것, 반(反)기계, 또는 비공식적이거나 비알고리즘적으로 작업하는 방식이라는 아이디어는 지금까지도 순전히 사변적인 가능성에 그쳤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현재의 고립적이고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형태에서도 기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이용방식을 거부하는 기계들의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도래는 특히 현재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으로 알려진 기술혁신의 가장 혁명적인 분야에서 그러한 발전을 수반하였다. 지식경제의 초기 역사에서 지금까지 발전된 기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두가지 기본적인 방식이 있다.

우선, 지식경제의 기계들은 공식에 따르는 좀 더 고차원적인 장치들일 뿐이다. 우리는 특정한 용도에 한정하여 일련의 제한된 조작들의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그러한 장치에 코드화하는 것 그 이상을 수행한다. 우리는 그러한 장치가 사례와 경험에서 새로운 동작을 추론하고 그에 따라 1차적인 알고리즘과 공식을 변경하도록 허용하는 메타적인 공식들과 알고리즘들을 혹은 2차적인 추론규칙들을 그러한 장치들에 부여한다. 우리는 기계들이 자신의 절차들을 조정할 때 반응하는 경험과 사례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심지어 이러한 기계들에 무작위성의 요소까지 장착할 수 있다.

또 다른 이해에 따르면 이 기계들이 수행하기 시작한 활동은 고차적인 형태의 공식과 같은 활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계들은 일반적인 추론규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우리는 공식에 따르지 않은 기계기능을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과 같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차량을 안전하게 운전하는 방법과 같은 더욱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적응적인 조작능력의 획득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능력들은 과업들의 물리적 수행의 맥락에서 발전한다.

가장 발전한 기계들에 대한 두 번째 이해에 따르면 우리가 고차적인 추론규칙으로 파악한 것은 그러한 추론규칙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규칙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적응적인 진화적 상승에 대한 회고적 기술에 불과하다. 그러한 능력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은 피아제의 인지심리학에서 연구된 발달과정과 유사하다. 즉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 다음에 나타나고 개념적인 것은 조작적인것 다음에 나타난다. 공식적인 환원이나 표현에 반발하는 실용적인 여분은 존재한다

기계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 즉 지식경제에서 시작하고 지금 인공지능과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단계에 관한 메타-공식적이고 조작적인 이해들은 부상하는 새로움에 대한 대안적인 철학적 해명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해명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적어도 아직까지는 확보하고 있지 않다. 기계 역량들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이 두 가지 설명들을 등가적이거나 보완적인 것으로 더 이상 취급할 수 없다는 점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지점까지 진보하는 때가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술의 역사에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최종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든지 상관없이 사람과 기계의 관계에서 어떤 근본적인 사항은 이미 변하였다. 비록 그러한 접근 방식이 심지어 비교적 원시적인 초기 기술의 모든 잠재력을 허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 기계의 친구로서 배역을 주는 방식으로 대량생산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현재 고립적이고 단절된 형태에서도 지식경제의 노동자를 기계의 그림자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 기계들은 어떤 일에서는 인간 노동자가 일찍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계도 가질 수 없는 것, 즉 상상력을 보유한다.

공식적인 것에서 메타-공식적이거나 포스트-공식적인 것으로의 운동은 내가 앞에서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마음의 두 번째 측면을 기계(원칙적으로는 모든 기계)가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이 아니다. 상상력의 특징은 부정적 능력이다. 즉 상상력은 어떤 현상이나 어떤 사태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이윽고 변형적 변주들의 범위 안에 그러한 현상이나 사태를 포섭하는 정신의 능력이며, 정신이 아직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더 잘보기 위하여 정신의 확립된 방법들을 버리고 정신의 현재적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의 능력이고, 나아가 이전에는 생성될 수 없었던 통찰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반성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전제들을 공식화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역량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전에 관한 것이다. 기계는 원칙적으로 이와 같이 이탈적이고 예지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 상상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즉 인간 실존의 온갖 유한한 결정 요소들에 대한 인간의 초월성,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개념적이고 사회적인 세계 안에 유폐될 수 없는 우리의 역량에 뿌리박고 있는 힘이다.

이러한 기계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은 마치 자신이 기계인 것처럼 작업하거나 사고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의한 기계사용이다. 기계와 반기계(달리 말하면, 노동자)의 결합은 노동자나 기계가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우리는 기계에게 부여하였던 저차원의 규칙과 고차원의 규칙 이외에 이러한 규칙에 저항하는 능력과 이러한 저항으로 성취한 발견들을 반성적으로 이해하는 능력까지 기계에게 장착함으로써 기계를 상상력의 거점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인간과 기계의 격차를 줄이고 심지어 연산능력에서는 인간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계까지 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보다 앞서 간다. 거북이, 즉 우리가 손수 만든 거북이[기계]와의 가장 중요한 경쟁에서 아킬레스처럼 기계는 결코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서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도덕적 이익에도 응답한다. 우리가 늘 하는 일의 더 많은 부분을 기계가 수행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와 기계가 분열하는 세계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대부분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라는 유령을 불러왔다. 나는 나중에 급진화되고 경제 전반에 확산된 지식경제 아래서 노동의 성격은 변할 것이지만 노동의 총량은 줄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근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기술혁신에 대한 반론으로서 노동총량불변이론에 대한 정통경제학의 거부 태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진정한 위험은 그 반대다. 노동자층의 압도적인 다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기계가 할 수도 있는 일을 수행하도록 내몰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의 능력에 대한 존중을 통해 발전하는 경제라면 어느 누구도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시장경제의 제도적 안배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러한 잠재력은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방식을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논의하게 될 특정한 방향의 시장질서의 제도적 개편은 지식경제의 심화와 보급을 위한 주요한 요건 중 하나이다. 그러한 변화의 한 요소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서 일찌감치 언급할 만하다. 계약형태로 매매하는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지배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한, 지식경제가 선호하고 요구하는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는 억압되거나 통제되기 쉬울 것이다. 재산권의 이름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사람들이 경영 재량권의 극대화에 대해 갖는 이익은 이러한 잠재력의 달성을 억제한다. 이들의 권력적 이익은 엘리트 노동자와 기술자의 작고 고립된 세상 바깥에서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혁명적인 변화를 반대한다.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의 변화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대로 임노동이 점차 고차적인 자유노동으로서 독립자영업과 협동기업으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19세기 이상이 21세기의 현실과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경우 그 이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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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05-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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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특징은 지식경제가 생산의 도덕적 문화를 변화시키고, 생산작업에서 요구되고 허용된 신뢰와 재량의 수준을 향상시키며, 협력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능력을 고양시켜 모든 사회생활에 고질적인 협력과 혁신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경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은 이러한 생산방식이 번창하도록 하였던 시장질서의 유형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정도의 신뢰만을 요구한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사회이론가들(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은 그 시대의 “자본주의” 경제의 도덕적 전제들을 강조했었다. 사회경제생활의 초기 형식들에서 전형적이었던 차이, 즉 국외자들에게 보인 불신과 혈연이나 문화로 엮인 내부자들이 공유하는 고도의 상호신뢰 간의 예리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이러한 전제들에서 관건적이었다. 불필요하고 신뢰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불가능한, 이방인들 간의 협력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시장경제는 이방인들 사이에 일반화된 적당한 정도의 신뢰(낮은 신뢰)에 의존한다.

즉성(卽成)의 쌍무적 이행약속[쌍무계약]을 중시하고 지속적인 관계들을 계약법의 주변부로 격하시킨 19세기 고전적인 계약법은 이러한 비전을 법적 규칙과 교리로 발전시켰다. 19세기의 발명품인 통일된 재산권은 마치 자연적으로 한통속이기나 한 것처럼, 사물의 관계에서 일련의 권력을 결합하고 그러한 권력을 동일한 권리보유자, 즉 소유권자에게 부여하면서 계약법이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통일된 재산권은 많은 권리들 중 그저 하나의 권리로 그치지 않았다. 통일된 재산권은 모든 권리의 범례적인 형태로 봉사하였다.

소유자는 자신의 권리의 엄격하고 명확한 범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가능한 한 최소로 고려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재산비축은 연대의 요구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되었다. 그러한 재산비축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낮은 신뢰를 보편화하는 데에 몰두하였던 사회에 적합한 물권법이었다.

대량생산은 재산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계층적 전문화를 강조하면서 대량생산의 전 단계인 기계화된 제조업처럼 자본의 대표자들로서 생산과정을 감독하던 사람들에게 중요한 재량을 유보하였다. 대량생산은 개별노동자 또는 작업반에 허용된 재량영역을 최소화함으로써 임노동자에 대한 신뢰나 근로자 간의 신뢰에 의존할 필요를 제한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세계에서 협력의 요구와 혁신의 요구 간의 긴장은 첨예화되었다. 모든 혁신은 혁신을 집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협력하도록 요구한다. 기술적이든, 조직적이든, 제도적이든 혹은 개념적이든 모든 혁신은 기성의 협력체제를 동요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모든 혁신은 이러한 모든 협력체제에 착근한 권리와 기대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혁신은 혁신이 자신의 상대적 위치에 미칠 영향을 놓고 관련된 집단들 사이에 투쟁을 촉발한다.

우리는 협력의 필요와 혁신의 필요 사이의 긴장을 줄이는 활동을 통해 협력체제를 개선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노동자 각자에게 경제적 불안에 맞서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일련의 안전장치들과 역량을 향상시키는 경제적, 교육적 재원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는 생산기술뿐만 아니라 생산 제도에서도 혁신의 기회를 동시에 증가시키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순전히 일회적인 혁신보다는 지속적인 혁신 위에서 번창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생산방식은 일반화된 낮은 신뢰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감독 역할과 집행 역할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차이의 전복과 엄격한 전문화에 대한 선진적 생산방식의 양가성은 상사와 감독관들 안에서뿐만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더 넓은 재량과 더 큰 신뢰를 요구한다.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협력과 경쟁을 각기 특징적인 활동영역으로 분리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에 기업 내에서 뿐만 아니라 기업들 사이에서도 협력적 경쟁(협력과 경쟁의 유동적인 혼합)을 신뢰한다.

이러한 발언들은 사회자본(연결의 밀도)을 축적하는 것과 협력의 경향과 혁신의 필요성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지식경제의 기초라는 점을 시사한다. 나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시장경제의 제도적 개편(경제적 분산의 제도들)이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을 위한 주요한 조건이라고 주장 할 것이다. 또 다른 요구사항은 교육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에서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심화하고 확산시키는 데에서나 교육과 제도가 전부일 수는 없다.

협력의 능력은 주요한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한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협력적 능력의 상대적 강점을 불변적인 소여로 수용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협력적 능력의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일부 국가들은 경제의 제도적인 구조틀을 다수 시험하였으나 모조리 실패하였다. 다른 국가들은 제도적 실험에 대한 약속에 의해서든 국가적 비상사태로 인해서든 자신의 경제적 제도들을 변화시키면서 높은 수준의 협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국민적 정치문화에서 신성불가침적인 것으로 간주된 다수의 경제조직 형태들을 불가피하게 배제하고 이러한 문화에서 질색하던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했다. 그러나 인종적 선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계급적 선을 넘어서는 협력적 성향은 남아 있었다. 그 실제적인 결과들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과감한 제도적 혁신과 물리적, 재정적, 인적 자원의 대규모 동원의 결합은 국내총생산을 4년 만에 두 배로 증가시켰으며, 이러한 결과는 미국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평화시처럼 전시에서도 사회자본의 수준과 협력의 성향과 역량은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세속적 성공에 대한 열쇠였다. 미국인들은 실상과 달리 자신들이 무계급 사회에서 살고 있는 척하면서 자신들이 협력적 관행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저해하는 고착된 불평등을 공격하는 일에서 오랜 기간 억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에 미국인들의 자기기만은 그들이 보고 싶지 않거나 볼 수도 없었던 계급적 선을 넘어협력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단기적으로 그들에게 잘 봉사했던 것 같다.

지식경제에 대한 도덕적 배경은 그저 존재하거나 혹은 부재하는 어떤 상황이 아니라 어느 경우에든지 의도적인 행동과 프로그램적인 의도의 파급 범위를 넘어서 있다. 이러한 배경이 결여된 곳이라면 집단행동이 이러한 배경을 창출할 수 있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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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1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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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1-13일 간에 영국의 콘웰이라는 생소한 지역에서 소위 G7의 정상들과 유럽연합의 지도자인 미셀 의회의장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모인 회담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초청대상국(옵서버)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에 한국의 주류언론과 미디어매체는 한국이 세계 10대 강국의 반열에 들어섰으며 세계가 이를 공인한 것으로 크게 보도하여 왔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젊은 세대들이 헬지옥을 연호하고 천만이 넘는 시민들이 내일없는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가운데, 문재인 정권과 국내언론들이 보이는 자가도취에 대하여, 필자는 가장 위험한 그리고 위장된 독배는 언제나 달콤한 향을 담고 있음을 경고하고자 한다. 스스로 성취하고 자신의 판단과 이해에 기초하지 않은 행보에는, 더욱이 일반시민들의 지지가 흔쾌히 함께하지 않은 상황에는 항상 그리고 언제든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에 유념해야 한다.

우선 초청대상국으로는 한국뿐만 아니라 친미적 성향이 아주 강한 호주와 남아공 그리고 인도가 포함되어 ‘G7+4’라고 불리면서, 이번 화합은 미국과 영국이 공조하여 준비하고 있는 반중국 전선인 민주주의동맹 ‘D10’의 예비적 모임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G7의 역사적 배경은 1970년대 중동의 산유국 중심으로 기존 서구제국들의 식민역사를 비판하고 자원의 국유화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오일쇼크와 더불어 스테그-인플레가 심각해지자, 이에 대응하고자 근대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해온 경제강국 5개국이 중심이 되어 출발한 이후, 이탈리아와 캐나다가 추가되면서 G7이라고 불렸으며, 러시아가 한때 참여하여 G8이 되었다가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서방과 불편해지자 일방적으로 제명되면서 다시 서구중심의 G7로 복귀되었다 (일본은 20세기 근대화 이후 탈아입구의 서구연합임을 분명히 하여 왔다).

세계적 현안과 흐름 그리고 국제질서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자적이고 공식적인 유엔과 산하기구를 통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오만한 몇 개의 선진강국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해를 방어하기 위하여 유엔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를 마치 종복처럼 다루면서 별도의 협의기구로서 G7 및 G20를 만들고 별도로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OECD기구를 창설하였다.

순서와 절차로 따지자면 유엔 등 보편적 국제기구에서 토론하고 합의하면,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지난 식민제국시대를 속죄하는 의미에서도, 서구의 강대국들이 확실하게 책임을 분담하면서 솔선수범으로 결정사항을 이행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적반하장 격으로 서구제국들은 유엔이라는 다자국제기구를 실익이 없는 허명의 간판으로 활용하면서, 실제로는 식민제국의 시대에서부터 누적 형성하여온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해를 유지하기 위하여 강자들만으로 별도의 밀실을 차린 셈이다. 한마디로 패권에 의한 국제질서의 강행이라는 꼼수이다.

참가회원국들 면면이 그러하다, 모두가 세계1.2차 대전을 일으킨 당사자들과 관련국들로, 2차 대전 이후 벌어진 270여 차례의 국제분쟁 중 260여 건에 개입한 미국을 위시하여, 중동 및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부유럽의 온갖 내전과 침공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온 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엄청난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포함되어 있다.

과연 이들이 중심으로 형성된 모임이 만국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국제질서를 만들어 나갈 자격이 있을까? 실제 논의된 대부분의 현안들은 국제사회를 향한 보편적이며 다자적인 접근보다는 강대국들 중심의 과시적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 특별히 관심을 이끈 인물은 단연코 지난 1월 초에 집권을 개시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다. 오로지 자국우선주의와 단순하게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친 트럼프에 반하여, 올 1월부터 집권을 개시한 바이든은 매우 세련된 접근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면서 치밀하게 미국의 이익을 강화해오고 있다.

그는 G7과 Nato체제를 넘어서 D10과 Quad 등 기존동맹을 강화하고 새로운 연합을 구상하는 America is Back (in Alliance), 수조 달러의 재정을 추가로 투입하면서 미국의 경제와 산업의 재건을 향한 Build Back Better, 차기의 선거를 의식하면서 기존의 미국외교방식에 일대의 전환을 시도하는 Foreign Policy for Middle Class, 등 구호들과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제2차대전의 전후질서를 설정하고 주도하며 강요해왔던 미국의 일방적 패권의 지위가 흔들리자, 격변하는 상황에 응동하고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입지를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강화 유지하는 한편에, 자신의 위상을 위협하는 중국을 고립시키고 결국은 서구의 기존 질서에 굴복시키고 편입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기존의 캐논식 봉쇄라는 정치군사적인 접근을 넘어서 소위 하이브리드 전략을 구사하면서 첨단기술에서 확실한 우위 확보, 가치(인권, 민주주의, 투명성 – 반부패와 반권위주의 등)를 내세우는 새로운 연합전선, ‘신장 이슈’에서 보듯이 국제미디어를 동원한 문화적 이념적 공세 등을 파상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지정학적으로나 지경학적으로나 미중 간에 둘러 쌓인 대한민국의 포지션닝(Positioning)이다. 미국은 한국에게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동반자(하수인)의 역할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직간접적인 Quad의 참여, D10의 주요 국가로서 동행, 일본과 함께 첨단기술과 산업에서 한미일 연합구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새롭게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은 한미군사연합과 가치동맹을 뛰어 넘어 미래의 첨단기술전쟁에 한국을 반중 연합전선에 편입시키고 더 나가 중국과 산업기술적으로 단절Decoupling을 선언한 이래 점차적으로 미국산업 중심의 공급사슬 네트워크의 한축으로 한국산업을 재편성(강제편입)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미래의 승부는 군사력보다 기술과 경제가 결정한다).

이러한 전략과 판단의 일환으로 바이든은 대한민국의 삼성그룹과 문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대하여 속보이는 환대를 베풀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이번 G7회의에서는 영국과 합작하여 초대대상국 중에서도 공공의료기술과 백신공여 등에 관하여 한국에게 유별나게 역할을 부여하려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중국은 한중수교 29년을 맞이하는 현재 그간 한국의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제공한 이웃이자, 북한의 핵무장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균형과 안정이라는 토대를 마련하는 대국이다.

이제는 많은 전문연구기관들이 인정하고 있지만, 지난 2008년 전후 국제금융위기를 맞이하여, 선진 주요 국가군들은 양적완화라는 통화팽창정책을 추진하여 자국의 자산가 중심의 거품경제를 형성하면서 동시에 부채국가들에게 가혹한 긴축재정을 강요하여 이중적인 피해를 야기하여 온 반면에, 중국당국은 과감한 재정확대정책을 통하여 산업정책을 강화하고 인민의 생활경제를 지원하며 중국시장을 세계에 개방하면서 지구촌이 금융위기에서 벗어나는 매우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감당하여 왔다.

이후 중국의 세계경제에 대한 발전기여도가 25-30%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한중간의 상호공헌도는 타국들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유기적 관계를 깊숙히 강화시켜 왔으며, 이를 더욱 가속시키기 위하여 이미 한중일 FTA의 체결을 위한 실무적 검토가 완결되었으나, 한국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2020년 말로 예정하였던 타결서명의 일정이 무기연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더하여 내년인 한중수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한국증권거래소와 상해증권거래소 간에 투자상품(ETF)을 상호 개방한다는 MOU를 체결하였음에도 한국측에서는 이를 아직 공개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 대해서 문재인 정권에게 공개적으로 묻고자 한다, 미국의 간섭과 압력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 알아서 판단한 것인가? 우리는 미중의 쟁패라는 현재상황을 강요된 선택의 위기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민족의 명운을 걸고 반드시 묘수풀이라는 꽃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단연코 서구문명의 일방적 지배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지난 과거로부터 역사의 흐름을 보자면 대한민국은 G7국가들이 지닌 성격 즉 식민시대 종주제국이 아니라 가혹한 일제강점시대를 격은 이후 강대국들의 패권싸움으로 분단과 민족상쟁의 아픔이라는 과거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현재적으로도 여전히 동아시아의 화약고를 머리에 지고 있는 나라이다.

해방 이후 70여 년 세월 동안 우리가 성취한 오늘의 모습이 한편에서는 대견하게 평가할 수준이 이르렀다고 해도, 이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려가며 지신의 이해에 따른 주권적 판단과 결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들이 띄워준 애드벌룬에 취하여 행여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개방경제에 기반한 우리의 산업적 기반은 자칫 종속적인 동맹이나 맹목적인 진영의 논리에 휘둘리면 한 순간에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일부의 재벌과 기득권을 위해 손쉬운 임시방편을 취하면 중장기적인 전망과 방향을 잃기가 십상이다. 긴 호흡으로 남북한 8천만 모두가 상생과 평화를 꿈꿀 수 있는 한반도라는 터전의 기반을 설계하며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지난 70여 년의 한미동맹이 현재적 조건이자 한계라는 점을 현실의 지렛대로 삼되, 중장기적으로 수천 년 누래累來로 이어져온 배달민족의 염원을 역사로 복원하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이제 일년도 남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어진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이래경

6.15남측위 국제연대 공동위원장, (사)다른백년 이사장

화, 2021/06/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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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전세계적으로 지식경제는 선진 제조업, (종종 선진 제조업과 결부된) 지식집약적인 서비스, 정밀공학, 과학적 영농 등 고립된 전위 부문들로 한정되어 있다. 지식경제는 제조업과의 독점적인 연관성을 상실했지만 각 부문에서는 여전히 프린지로 남았다.

지식경제와 여타 생산체계를 분리하는 경계선은 실제로 항상 다공성(多孔性)을 띤다. 전위 부문과 기타 부분의 차이를 완화시키는 경제활동 및 경제능력의 잠재 영역에서는 유출(leakage)이 존재한다. 많은 요인들이 그러한 누출에 기여한다.

지식경제 기업들이 판매하는 지식집약적인 제품과 서비스의 출시는 그러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숙련기술의 전파를 요구한다. 지식경제의 기술과 관행이 과학사에서 친숙한 유추와 일반화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생산 라인과 새로운 소비 분야로 확장됨으로써 그러한 기술과 관행은 발전한다. 외국의 전위 부문을 모방하고 자신의 전위 부문을 발전시키려고 안달하는 정부는 지식경제를 그 다공성 주변영역으로 확산시키는 것을 우대하는 개방적이고 실험친화적인 규제접근을 학습한다.

이와 같은 보급의 촉진요소들을 감안할 때 지식경제가 번창하는 프린지들로 대체로 지속적으로 한정되고 또한 결과적으로 지식경제의 가장 심오한 속성들의 표현과 더 큰 잠재력의 성취가 억제되어 왔다는 사정은 더욱 더 주목할 만하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다음 절에서 주장하려는 바와 같이,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축소되기보다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유출이 경제 전반에 걸친 생산방식과 생산역량의 향상을 위한 첫 번째 조치라고 판명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출은 새로운 생산방식의 심오하고 확산된 형태를 향한 운동의 출발점의 한 부분이 될지도 모른다. 유출은 자생적으로 그와 같은 출발점으로 복무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안적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행동해야만 한다. 이러한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때까지 포용적 지식경제는 요원한 목표로 머문다.

지식경제의 상대적 고립성은 이제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고립상태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립상태의 자연스러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규모의 제한성으로 인해 규모의존적인 기술과 대량생산의 절차를 흡수하지 못하게 된 전통적 소기업을 예외로 하고는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은 경제의 모든 부분의 변혁에 급속도로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선진적인 생산방식과 달리 지식경제는 어떤 특정 분야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특징적인 기술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거의 모든 규모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지식경제의 역량은 소기업의 세계가 다른 사유들로 지식경제에 접근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기업의 세계를 지식경제에 개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식경제가 고립적인 전위 부문들에 국한되는 현상은 완고하게 지속되어 왔다.

지식경제는 고립성을 회피하지 않은 채 제조업에의 국한성에서 탈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어떠한 경제체제들에서도 경제 전반적인 입지를 구축하지 않은 채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과의 독점적인 관계도 극복했다. 대량생산의 절정기에 자본집약적 경제와 노동집약적 경제 사이의 교역은 국제적 노동분업의 축일뿐만 아니라 국제통상론의 핵심적인 분석 주제였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공장제 대량생산)은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에 집중되었다. 더 원시적인 노동집약적인 생산은 나머지 국가들(개발도상국이라는 광대한 주변부)에서 지배적이었다.

새로운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출현은 세계의 노동분업에서 현저한 변화와 동시에 일어났다. 새로운 생산적 전위는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들, 즉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뿐만 아니라 주요한 개발도상국들(중국, 인도, 브라질 등)에서도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경제체제들의 선진적인 부분들은 기술, 자원뿐만 아니라 사람, 절차, 아이디어를 교류하면서 크든 작든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교통하고 있다. 실제로 다른 어떤 경제주체들과 세력들보다 이러한 전위들의 네트워크가 세계경제의 지배세력으로 간주될 자격을 더 잘 갖추고 있다. 그에 비해 국제금융은 부차적인 것이다.

변화하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에서 드러나는 지식경제의 국제적인 입지는 지식경제가 현재 국한되어 있는 프린지들에 포획된 상황이 제기하는 수수께끼를 심화시킬 뿐이다. 지식경제는 모든 주요한 경제체제뿐만 아니라 각 주요한 경제체제의 모든 부문에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여전히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경제의 국한성과 연관된 세력들은 경제적 침체를 우대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데 협력한다. 생산성 증가의 둔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지식경제의 고립성에 대한 대가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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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1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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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우리는 고립적인 지식경제를 내가 유사전위주의(quasi-vangaurdism)라고 부르는 것과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경영 또는 생산 공학의 수준에서 내가 서술했던 지식경제의 피상적인 특성들이나 지식경제가 발전되거나 전파됨에 따라 지식경제가 드러내는 더욱 심층적인 특성들이든지 간에 새로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숙달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이 부상하는 전위 부문, 특히 정보통신 공학과 매우 자주 연결되는 기술을 이용하는 광범위한 기업들의 모습이 바로 유사전위주의이다.

유사전위주의의 가장 흔한 형태는 복잡한 정보(예컨대 월마트와 같은 거대소매기업이 취급해야만 하는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디지털기술의 채택이었다. 그러한 기업들은 정보를 더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재고의 “적시” 보충과 같은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관행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기업의 대규모성은 기업에게 필요한 기술적 장비의 고정비용을 처리하는 데 결정적인 이점을 주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장비사용은 결국 기업이 자신의 시장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더 크게 성장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중 어느 것도 그러한 거대기업들을 지식경제의 대표자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보다 더 확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진정한 지식경제는 여전히 좁은 서클 안에 갇혀 있다. 이윤을 쌓고 시장지배력을 축적하기 위한 인센티브는 이러한 협애성을 강화한다. 지식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 대기업들은 생산과정에서 규칙화되거나 심지어 상품화될 수 있는 부분을 떼어낼 방법을 찾아낸다. 그들은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전통적인 대량생산 방법을 사용하면서 주로 미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된 기업들에게 이러한 규칙화된 부분들을 할당한다. 어떤 선진기업들은 심지어 “팹리스”기업으로서 큰 생산단위들(공장들)의 소유권과 아울러 그러한 단위들이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안정적 노동력에 대한 고용부담을 가능한 최대로 떨쳐버린다.

진정한 전위주의는 대량생산의 사회적 복잡성에서 벗어난 자본과 지식의 엘리트로서 기업가, 관리자, 기술자의 작은 내부 집단에 한정된다. 상이한 규칙 아래서 다른 국가의 다른 기업과의 하도급계약 또는 더 일반적으로 분산된 계약 네트워크는 종종 본국의 노동력을 지식경제의 업무로 통합하는 것을 대체한다. 그 수익의 알짜배기는 고립된 지식경제의 정점에서 활약하는 기업의 주주들에게 시세차익으로 돌아간다. 또한 그 알짜배기는 스톡옵션과 같은 임금에 준하는 혜택의 형태로 최고로 숙련된
노동자와 경영자 엘리트에게도 돌아간다.

유사전위주의에 의한 선진관행의 허위적 확산에 상응하는 현상이 진정한 전위주의의 초고립성(hyperinsularity)이다. 선진기업은 자신이 판매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온갖 물적 재화를 제조하는 회사들과 사무적인 계약관계로 후퇴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에 있는 몇 천 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계획 중 규칙화된 부분들을 중국에 있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조정한다.

초고립적 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진정한 형태이지만 축소된 형태이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허위적인 긴 그림자일 뿐이다. 유사전위주의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공존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점증하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을 내포하는 두 가지 동향을 야기한다. 첫 번째 동향은 글로벌 과점기업들이 획득한 결정적인 지위다. 두 번째 동향은 개발도상국들뿐만 아니라 가장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노동력을 점증적으로 불안정고용에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동향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점진적 후퇴국면에서 수행되는 노동과 초고립적 전위주의를 통제하는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들의 노동을 제외하고는 국민소득의 몫을 둘러싼 경쟁에서 노동보다 자본의 이익을 증가시킨다.

유사전위주의(월마트와 같은 기업들)와 초고립적 전위주의(알파벳과 퀄컴과 같은 기업들)는 모두 엄청난 규모성과 불완전경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두 가지 사례에서 거대기업은 가장 선진적인 설비에 대한 고정된 투자비용을 영리적으로 감당하는 능력에서 더 작은 경쟁업체보다 이점을 누린다. 게다가 지식경제의 전위 부문의 진정한 구현체인 초고립적 선진기업들은 효과적인 경쟁을 피하는 데에 세 가지 추가적인 이점을 갖는다. 그러한 이점들은 지식경제를 차이 나게 해주는 것(물리적인 기반시설에 의해 지원되고 물리적 장치에 의해 접근되기는 하지만 무형적인 아이디어, 능력, 네트워크의 작업에서의 우위성) 의 제한적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이다.

확장과 과점의 첫 번째 이점은 초고립적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과 같은 사업체들이 갖는 플랫폼효과에 있다. 이러한 기업들은 다수의 상품과 서비스를 서로 연관시키면서 제품을 플랫폼이나 생태계의 일부로서만 판매하게 된다. 플랫폼이 클수록 그리고 사용자의 수가 많을수록, 플랫폼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옵션들이 더 다양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새로운 고객에 대한 매력은 더 강력하게 된다.

두 번째 이점은 진정한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기술적 인재를 유인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이다. 막대한 유동자본을 보유한 거대한 사업을 위한 활동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편익에다 기술적 진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기업을 위해 활동한다는 매력이 추가된다. 그러한 기업들은 성공하려면 실험실을 닮아야 한다. 젊은 기술자나 기술적인 기업가, 과학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선진적인 작업과 접촉을 유지하는 팀의 일원이 되고싶어 한다.

세 번째 이점은 바로 다음의 소비자를 위한 재생산의 한계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제품과 서비스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이러한 이점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선 따분하고 천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즉각적이고 무비용에 가까운 조작은 소비자를 플랫폼으로 초대하고 플랫폼의 많은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거대기업에게 추가비용을 부과시키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고 사용자 모집단의 크기를 증가시킴으로써 향후 다른 사용자에게 플랫폼을 그만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할수도 있다. 겉보기에 사소한 특성들은 원래 의도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지식 및 이러한 지식을 통해 가능하게 된 사용자 커뮤니티들이 물질적인 제품과 프로세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산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모든 프로세스와 제품들은 성질상 보편적인 비용, 소모, 퇴화의 대상이다. 이 모든 현상은 한계수확 체감의 제약이 계속적으로 군림하는 세계에 속하는 사항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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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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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유사전위주의와 초고립적 전위주의가 수반하는 또 다른 동향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노동에 불리하게 변질된다는 점이다. 경제학의 가장 불변적인 교리 중 하나는 노동수익(실질임금)이 생산성 증가를 지속적으로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도그마는 부분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노동수익의 강제적인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원래대로 돌아가기 쉽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조건과는 별도로, 우리는 이 도그마가 명백히 거짓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다양한 요소부존량(특히 인구밀도와 천연자원의 부)의 발전과 제약에서 비슷한 경제를 비교한다면, 우리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국민소득의 분할에서 큰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떻게 이런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이러한 차이의 원인은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을 강화 또는 약화시키고 생산을 위해 노동자를 채용할 수 있는 조건을 규정하는 법적 제도에 있다. 경제성장은 수요측면과 공급측면에 대한 제약을 반복적으로 돌파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수요에 대란 제약을 돌파하는 가장 오래 지속되고 효과적인 방법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권을 통해 분배를 사후적으로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제도적 안배들을 혁신함으로써]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다. 경제적 이익의 일차적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 중에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법적 위상을 정하는 안배(계약법, 회사법, 노동법)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을 규정하는 안배(재산권 체제)가 있다.

자본과의 관계에서 노동을 강화 또는 약화시키는 방법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기반을 두는 경우에만 안전하다.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노동의 조직과 대표 방식은 그러한 기반을 확보하였다. 부유한 북대서양양안의 국가들에서 노동을 조직하고 대표하는 지배적인 안배와 지지대는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이거나 단체협상에 입각한 노동법 체제였다. 단체협상은 고용관계의 불평등한 여건에서 조직된 노동에 “대항력”을 부여함으로써 계약의 현실을 유지하려고 설계되었다. 중남미에서는 대안적인 조합주의적 노동법제가 등장하였다. 노동력의 절반 또는 그 이하를 관장하는 공식적이고 법적인 경제 영역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부의 보호 아래 직종별 노동조합에 자동적으로 가입되었다.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와 조합주의적 노동법 제체는 모두 기업 조직체들[협회들]의 비호 아래 확립된 생산단위(공장 등)에 안정적인 노동력을 특징적으로 결집시키는 공장제 대량생산을 자신의 경제적 배경으로 삼았다.

고립적인 지식경제의 등장은 대량생산을 유사하게 경제 전반에 퍼져있는 선진적인 생산방식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전위 부문의 동향은 전통적인 대량생산이 쇠락하는 상황과 안정적 노동력의 고용이 확고한 경제적 지원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대변한다. 기업들은 더 싼 노동력, 더욱 유연한 노동력의 고용, 세금 우대(노동과 세금의 차익 거래) 등을 찾아 세계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고립적인 지식경제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불안정계약의 제도들을 통해 업무를 할당받는 세계에 두루 존재하는 비전위 기업들도 계약주의적 노동법 체제와 조합주의적 노동법 체제가 공히 의존하였던 경제적 기반을 침식하는 데에 일조한다.

노동의 대표와 보호의 자연적 형태처럼 보이던 것들이 회고해보면 노동이 경제적 안전이나 시민권이 없이 주로 분권적, 계약적 안배들로 조직된 두 시대 사이에 상대적으로 짧은 간주기의 현상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공장제 대량생산과 계약주의적 및 조합주의적 노동법 체제 이전에는 선대제수공업(先貸制手工業)이 존재하였으며,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초반부에서 기술하였다. 이제 대량생산의 쇠락과 새로운 선진적이지만 독점적인 생산방식(지식경제의 고립적 혹은 초고립적 전위주의)에 의한 대량생산의 추월 과정에서 또 다른 선대제수공업이 세계적인 규모로 등장하였다. 많은 대량생산의 일자리들은 더 가난한 나라의 저임금 회사에 하도급으로 제공되었다. 다른 일자리들은 특히 서비스 분야에서 불안정한 도급직과 임시직으로 대체된다. 노동의 대표와 보호를 위한 대안적인 법적 체제가 부재하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포용적 전위주의로 향하는 활동들이 부재하다면 노동은 무방비상태가 되고 국민소득 중 노동의 몫은 감소한다.

초고립적 전위주의와 유사전위주의의 출현이 초래한 동향들(과점기업들이 두 가지 전위주의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과 많은 노동자들이 불안정 노동으로 전락하는 상황)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응들은 전체적으로 불충분하다. 이러한 대응들은 더 크고 더 넓은 변혁으로 휩쓸려 들어가야만 작동할 수있다. 현재까지 그러한 변화는 시행되기는커녕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주변의 미미한 신생기업들로 둘러싸인 과점기업들이 지식경제를 지배하는 상황에 대한 해답으로서 독점금지법을 고려해보자. 독점금지법을 적용할 수 있는 사실요건(예컨대, 특정한 제품의 확정된 시장에서 제품가격책정에 대해 측정 가능한 영향력을 통해서 경쟁을 억제하는 행위)이 자주 결여되어 있다. 독점금지법이 지식경제의 거대기업이 경쟁을 억제하는 양상을 다루는 방향으로 개정되거나 발전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개정된 법은 이 장의 앞부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소수의 글로벌 기업들에게 초고립성과 과점을 결합하는 데 결정적인 편익을 제공해온, 결합적이고 누적적인 요소들을 역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독점금지법의 개정은 시장경제의 제도적 법적 구조에서 파급효과가 더 큰 변화의 일환으로서만 작동할 수 있다.

더욱이 플랫폼기업들의 해체는 이러한 기업들이 사용자들의 단일한 커뮤니티로 결집시킨 다수의 사람들과 연결된, 기업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의 많은 부분을 파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플랫폼기업들을 소규모 회사로 분할하고 덜 포괄적인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대신에 플랫폼기업들을 유지하려고 결정하면서도 이 기업들을 새로운 지배구조 형태에 복종하도록 결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법에 의해 설립된 독립적인 신탁회사들은 시민사회의 대표자들과 합께 플랫폼기업들을 통제할 권한을 보유하고 그리하여 주주의 권리와 경영자의 권한을 동시에 제약할 수 있다.

독점금지나 지배구조 활동의 효과는 경제적 제도들에 대한 더욱 파급력이 큰 혁신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은 지식경제에 대한 참여 수단들, 즉 자본, 선진기술 및 선진관행 등에 대한 접근을 확대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혁신은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뿐만 아니라 정부와 신생기업들 간의 협력의 새로운 형식들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혁신은 기본적인 재산권 체제(사람들이 사회의 축적된 자본을 배치하고 생산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방식과 조건들)에 대한 다원주의적인 실험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은 현재 국한적인 형태의 지식경제의 계승자로서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에서 법적이고 제도적인 요소를 예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순서도이다.

유사한 취지에서 특정한 직업 보유와 무관하게 모든 노동자-시민에게 제공되고 그래서 보편적으로 휴대가능한 안정성-보장적인 안전장치와 역량-강화적인 기부재원의 발전에서 북구의 실험, 즉 “유연안정성(flexsecurity)”을 고려해보자.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은 모든 일자리에서 노동자와 함께 이동한다. 일부 이러한 제도적 안배는 새로운 생산현실 아래서 나타나는 고용불안에 대한 효과적인 해답을 구성해야만 한다. 유연안정성의 광범위한 채택은 유연성과 안정성이 역의 관계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증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혁신과 협력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체제의 일단을 범례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경제의 카르텔 형성과 연관된 독점금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응답의 단편 그 이상을 제공할 수 없다.

유연안정성이 제공할 수 있는 더 넓은 해법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경제를 위해 만들어진 기존의 노동법 이외에 또 다른 노동법체제를 탄생시켜야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노동법 체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뚜렷한 경제적 불안에 대한 완곡한 언어로 복무하는 것을 보증하도록 설계될 수도 있다.

체제의 원칙들 중 하나로서 아마도 차등제의 채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불안정노동이 통신기술과 지식경제의 관행의 도움으로 더 많이 조직되고 대표될수록, 고용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법적 개입이 불안정 노동을 보호할 필요는 그만큼 작아진다. 반대로 불안정노동이 덜 조직되고 대표될수록, 그러한 직접적인 법적 보호의 명분은 그만큼 더욱 강력해진다.

이러한 보호의 내용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원칙은 법이 유사한 업무에서는 안정적 고용과 시간제 혹은 과업지향적인 고용 중 선택의 가격중립성을 요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즉 계약직 노동자는 유사한 노동에 대해서는 최소한 정규직 노동자만큼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 목적은 지식경제의 관행과 관계들에 의해 요구된 유연성이 노동의 가격인하와 국민소득 중 노동의 몫의 감소에 대한 구실이나 위장수단으로 복무하지 않도록 보장하려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대안적인 노동법 체제의 진화의 후기 단계에서 노동법의 변화는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금노동이 농노제와 노예제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자유노동의 하자 있는 과도기적인 형태라는 19세기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카를 마르크스부터 존 스튜어트 밀까지)의 공유된 믿음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미래에는 경제적 종속노동은 고차적인 형태의 자유노동(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들이 종속적 또는 주변적 지위로 격하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그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식경제의 포용적인 형태의 제도적 안배들과 사법은 21세기 여건에서 19세기 이상을 쇄신함으로써 이러한 이상을 부활시키고 재해석할 수도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현재 세계화되었으되 고립적인 지식경제 형태의 증가에 수반되는 위협적인 동향들에 대한 적합한 유일한 해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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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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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지식경제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이러한 국한성의 극복은 가속적인 성장을 재점화하고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 속에서 극심한 불평등의 원인을 교정하는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그 초기형태들에서는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산방식은 생산성의 최전선에 도달하고 이를 유지할 최상의 전망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경제 각 분야의 프린지들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국한되는 상태를 묵인하는 것은 우리의 기술적 성취들이 이미 가능하게 만들었던 생산성의 단계, 그러나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안배들이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접근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던 바로 그 단계를 대다수 노동자와 기업들에게 부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역사적으로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서 모방과 변화를 고취시키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기술적이고 기업적인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용인하는 것은 그러한 생산방식의 방향과 영감의 가장 큰 잠재적인 원천을 나머지 경제에서 빼앗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열차의 기관실과 나머지 차량들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지식경제에서 일어나는 바와 같이 선진관행이 어떤 특정 분야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고 비록 늘 프린지에 국한되지만 실제로 많은 부문들에서 발판을 확보해왔다면 이와 같은 실패의 결과는 우리를 더욱 더 경악하게 하고 맥 빠지게 한다.

지식경제의 국한성이 경제침체를 유도하는 가장 의미심장하지만 거의 알아채기 어려운 방식 중 하나는 이러한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생산체계와 노동력의 분야들에서조차 이러한 국한성이 전위 부문 자체에 대해 미치는 결과이다. 만일 어떤 생산방식이 폭넓고 다양한 여건들에 적응하는 경우에만 그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산방식의 고립적 형태는 그러한 생산방식의 수행자나 수혜자에 의해서도 오해될 공산이 크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처음 출현하였던 첨단기술 산업과 분야를 특징지었던 특성들과 같은 가장 피상적인 혹은 우연한 특징들로 쉽게 오인될 것이다. 이전의 대량생산과는 달리 이러한 생산방식은 관행자체에 표준적인 형식과 널리 인정된 중요성을 부여해주는 공인된 이론이나 교리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당대를 풍미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것으로 머물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결과도 역시 중요하다. 지식경제의 고립성과 그 일자리들의 상대적 빈곤성은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를 심화시킨다. 부의 증가부분은 노동력의 감소부분에 의해 생산된다. 내가 초고립성으로 명명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악화시킨다. 대량생산 산업과 연관된 일자리 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서비스업에서의 일자리 구조는 두 부분으로 해체된다.

더 큰 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수행되는 서비스업과 가장 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가장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들에서 수행되는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에서 저임금 일자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일자리들은 낮은 노동수익과 낮은 세수를 지불하는 경우에만 생존할 수 있는, 쇠락하는 대량생산의 잔여물에서 일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또는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생산과정의 일부를 규칙화하고 사업의 상품화된 부분을 흔히 매우 먼 나라에 있는 종속기업들에게 할당하는 방법을 터득함에 따라 이러한 거대기업들의 보조수단으로 역할해온 표준화된 제조업의 변형 안에서 그러한 일자리들은 입지를 창출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노동시장의 두 번째 큰 부분은 특권적인 일자리들, 즉 진정하고 배타적인 지식경제의 후미진 곳에서 구축된 비교적 소수의 일자리들이다. 대량생산이 지속적으로 쇠락하며 잔여물이나 보조적 지위로 위축되는 결과,이른바 “일자리 구조에서 중간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급부권은 시장경제의 기성제도들에 의해 생성된 불평등이 극단적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명료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문턱을 넘어가면 구조적 현실은 시정조치로 감당하기 어렵다. 예산의 증수(增收)측면(누진세)이나 지출측면(재분배적 사회적 권리와 이전)에서 시정적 재분배는 생산의 전위들과 후위들 간의 격차에 의해 야기되는 엄청난 불평등을 보상할만큼 규모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시정적 재분배는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기존의 경제적 제도들이나 유인책들과 충돌을 야기하고 과거의 경제성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널리 간주될 수 있는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과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면서 인간화하는 역할에서 누진세가 시장에서 결정된 결과를 뒤집고 경제를 해체하는 쪽으로 아주 멀리 나가는 경우에만 누진세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수 있다. 누진세가 그렇게까지 나가는 것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누진세는 거기에 이르기 한참 전에 중단된다.

더 유망한 경로는 일차적으로 더 작은 불평등 나아가 지분, 도구, 능력, 기회의 더 확산된 분배를 창출하는 다른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질서의 재구축이 요구하는 국가, 생산의 물리적 기반시설 뿐만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역량에 투자하고 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가장 급진적인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이를 위해 신규 또는 기존 사기업의 장래에 대한 지분을 매개로 그들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국가에게 금융을 조달하기 위해서 높은 세수가 필요할 것이다.

유사한 추론이 시정적 재분배의 이면인 사회적 권리와 이전지출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생산 체제의 전위 부분들과 후위 부분들 간의 차이에 착근한 극명한 불평등을 보상하기에는 항상 불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의 더 설득력 있고 효과적인 사용법은 성질이 다르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혁된 경제의 행위자가 될 만큼 대담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을 육성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사민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 즉 역설적으로 역진적이고 간접적인 소비세로 조달되는 사람과 그 역량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다른 형태로 지속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가장 큰 한계들(시장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는 것을 포기한 점,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한 진보적 접근을 결여한 점,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배분을 규정하는 안배들에 대한 변화보다는 시정적 재분배에 집착한 점,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서 공유된 역량 강화의 이상을 전반적으로 개혁되지 않은 경제체제를 인간화하려는 시도에 굴복시킨 점)을 극복하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가 경제성장의 논리와 기회, 능력, 이익의 원대한 평등과 포용을 향한 운동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이를 수행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후적인 교정책, 즉 새로운 상상과 쇄신을 이미 포기한 경제질서의 불평등결과를 완화시키려는 기획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기성의 경제질서를 다시 상상하고 쇄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짜놓은 상상적인 대안으로 기성의 경제체제를 환상적으로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대신에 부분별로, 단계별로 수행되는 누적적인 구조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기획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현재적 국한성이 야기하는 불평등-심화적인 결과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과업은 없다.

아래 세 가지 명제들을 통해 나는 불평등과 관련하여 오늘날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의 비교할 만한 재정적 경험을 요약하고 해명해 보겠다. 이러한 원칙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하며 다양하고 광범위한 여건 아래서 이루어진, 장기적이고 밀도 있는 경험에 의해 지지되지만, 오늘날 북대서양 국가들의 통치 엘리트들의 가장 두드러진 기획인 사민주의와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의 담론과는 대체로 이질적이다.

첫 번째 명제는 경제적, 교육적 기회와 능력에 대한 접근을 조직하고 결과적으로 이익의 1차적인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책들이 불평등의 미래에 대해 가장 중요하다는 명제이다. 제도적 안배를 바꾸는 시책들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권리와 이전지출에 의한 사후적 재분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오늘날 경제적 안배들 속에 불평등의 정착에 관한 논쟁의 주요 거점은 가장 선진적인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 즉 그러한 생산방식이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의 영역으로서 고립적 전위들에 국한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경제 전체에 징표를 남길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다.

지금까지 가장 예찬받는 경제사회적 조직형태는 북구 사민주의였다. 만약 세계가 투표를 할 수 있다면, 세계는 스웨덴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제안에 투표할 것이다. 그 경우 스웨덴은 현실적 스웨덴이 아니라 상상적 스웨덴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상적 재분배를 통한 시장질서의 인간화와 상상적 스웨덴을 연결하지만, 사회경제적 권리를 통한 이와 같은 인간화에 앞서서 유산계급들과 국가권력의 이익들을 둘러싼 수십 년간의 계급적, 이념적 전투가 펼쳐졌다는 점은 망각한다. 이 갈등은 국가의 왕조적 부호통치와 사민주의 인본주의자들의 규제적 재분배적 공약들 사이의 타협안으로 마감되었다. 세계는 선행하는 서사에는 주의하지 않고 결말만 듣고 싶어 한다. 나아가 세계는 간신히 조정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의 기성 조직형태의 한계 안에서 유럽식 사회보호와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을 조화시키는 것을 결정적인 야망으로 삼은 의제[제3의 길]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민주의] 프로그램은 고립적인 지식경제, 구제불능의 대량생산 제조업,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중소기업 사이의 생산체제의 분업에 착근한 불평등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제공할 수 없다. 인종적, 문화적 이질성이 결여된 사회적 시멘트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조직된 이전지출의 허약성이 폭로된 이래로 이러한 프로그램은 사회적 응집의 충분한 기반을 제공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프로그램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위기를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 삼지 않는 민주적인 정치생활을 창조할 수 없다.

불평등과 관련하여 현대 금융경험에서 추론할 수 있는 두 번째 명제는 세금과 사회지출이 중요하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과세 및 지출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세의 누진적 성격이 아니다. 관건은 총세입 규모와 이러한 재정수입의 지출방향에 있다.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진보적 재분배로 상실한 부분을 우리는 지출 측면에서 배로 만회할 수도 있다.

많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정률종합부가가치세와 같은 역진적 간접소비세는 높은 세수(稅收)를 달성하는 최상의 방법이고, 이러한 세수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권리들을 재정적으로 밑받침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진적인 간접소비세가 전통적인 진보적 담론에서 호감을 얻기에는 너무 역설적이다. 부가가치세는 정의상 상대가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립적인 세금이다. 부가가치세의 중립성을 침해하는 예외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한에서 부가가치세는 정부를 대신하여 모든 투입과 산출 간의 일정한 전환가치율을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부가가치세는 경제적 혼선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많은 세수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세수의 많은 부분은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평등지향적인 재분배로 포기한 부분을 보상하는 정도를 넘어서 재분배적 사회투자로 나아갈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자칭 진보파들은 매우 자주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월하다는 점을 놓친다. 진보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조세와 이전지출의 영역에서조차 대체로 변혁적 결과보다는 진보적 경건성을 우선시한다.

세 번째 명제는 우리가 재분배적 결과들과 조세 수단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조세체계를 설계한다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구조변화에 보조적인 재분배적 결과(첫 번째 명제)와 역진세에 의존하더라도 높은 세수의 유지(두 번째 명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누진세의 기본적이고 적절한 대상은 각 개인이 사회의 자원들을 꺼내서 자신에게 소비한 소득과 부로 인해 발생한 생활수준의 서열이다. 이러한 과녁을 맞추는 데에 가장 적합한 조세 수단은 개인적인 소비에 대한 세금이다.

케인스의 제자 니컬러스 칼도어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서 때로는 칼도어세로 불리는 이러한 세금은 각 개인의 총소득(자본수익을 포함)과 자기 자신에게 지출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해 가파른 누진율로 부과될 수 있다. 전통적인 소득세가 안고 있는 난점 이외에 누진소비세의 시행에서 특별한 기술적인 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누진소비세는 개인소득세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을 갖는다. 소득세는 두루뭉수리하고 혼성적인수단이라면 누진소비세는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게다가 누진소비세는 정치적 의지와 권력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높은 최고 한계세율을 허용한다. 누진소비세의 상한선은 100퍼센트로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적 지출의 일정 수준 아래에서 개인은 세금을 납부하기 보다는 환급받을 수도 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개인은 누진율에 따라 세금을 납부한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호화생활을 넘어서면 그는 자신에게 쓰는 1달러당 몇 달러씩을 국가에 납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진보파들이 과세의 재분배적 이용에 대한 헌신에서 명철함과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누진소비세는 선호할 만한 조세이다. 진보파들은 첫째로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선적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보상적 재분배와 관련하여 세수의 총계규모와 세금의 지출방향이 조세체계의 누진적 성격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불평등의 재조정에 관한 세 번째 사고단계에서 이러한 누진적 소비세를 선호할 수도 있다.

누진세의 이차적인 대상은 부의 축적과 사망에 의한 부의 세습이나 생전 증여로 획득한 경제력의 행사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 목표가 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세를 통해 달성할 전망이 적기 때문에 이차적이다. 부에 대한 세금이 자산의 현재 분배상태에서 중요한 변화를 희망할 수 있기도 전에 이러한 세금은 대규모가 되어야만 하고 그리하여 주요한 경제적 와해를 초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누진세가 갖는 최상의 가치는 현실적인 또는 예상된 상속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다. 생활수준의 서열보다 경제력의 행사와 관련해서 보자면 기회와 역량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경제적 안배들의 제도적 혁신은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우리가 사후적으로 성취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러한 혁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수단을 확대하는 것이다.

세금과 사회지출을 통한 진보적 재분배는 구조변화의 대체물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구조변화는 필경 하나의 불가분적인 경제체제를 다른 불가분적인 체제로 대체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왔다. 이러한 대체는 (대위기라는 비상상황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정치와 정책에서 써먹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대체의 기회가 열려 있다면 대체는 심히 위험한 것으로 우려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구조변화의 개념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변화들은 우리를 국한된 지식경제에서 벗어나 포용적 지식경제로 이끌게 할 부분적이고 점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적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급진적인 혁신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탐구는 이 책 나머지 부분의 주요한 논제를 이루고 있다.

고립적인 전위 부분들에만 존재하는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와 같은 침체와 불평등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전위 부문들과 나머지 부문들 간에 발생하는 격차의 원인들을 틀림없이 겨냥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에게 초래한 기회의 상실은 경제적 침체의 비용과 경제적 불이익의 불공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더 작고 더 빈곤하고 더욱 불평등한 존재가 된다.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 지식경제의 핵심은 상상력과 협력 사이에서 지식경제가 추구하고 수립해야만 하는 연결(우리의 협력적 관행들을 생산활동에서 함께 상상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협력을 상상력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기존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형태에서는 간신히 알아챌 뿐이다.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전파할 수 없다면 그러한 관행을 심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에도 이미 참여자들에게 일련의 물질적 혜택뿐만 아니라 도덕적 혜택, 즉 창조적 충동에 더 넓은 여지를 제공하는 과업에 대한 경험의 참맛을 쏟아 부어준다. 지식경제는 따분한 생산 현실 속에 공식이나 모듈 같은 기계로서의 정신보다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이 우월하다는 점에 대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우리를 더 큰 존재로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립되어온 국한된 전위주의가 함축하는 모욕들 중 가장 부유하고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사회에서조차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험의 기회를 부인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모욕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구사항들, 즉 공인된 지식체계에 대한 접근에서는 변증법적이고 사회적 환경에서는 협력적인 교육의 중시, 더 높은 신뢰와 더 큰 재량을 허용하고 요구하는 생산기풍의 쇄신, 나아가 시장질서의 제도적 구조와 법적 체제의 쇄신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보급하고 이러한 보급을 통해서 생산방식을 심화하려는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또한 우리의 경험을 범위, 능력, 맹렬성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고 그러한 높은 수준에서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사회 세계의 불운한 꼭두각시 노릇을 중단하고 대신에 이 세상의 판도를 바꿀 힘을 우리는 얻게 된다.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고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왜소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립적 전위주의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존재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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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1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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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포용적 전위주의는 급진화된 전위주의이다. 포용적 전위주의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그리고 이 모든 부문의 각 부분에서, 광범위하고 다양한 여건들을 가로질러 확산됨에 따라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은 그 가장 심층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발전시킨다. 그러한 생산방식이 협력적 활동과 상상력 나아가 영구혁신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생산방식의 참여자들에게 대량생산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청년기뿐만 아니라 일생에 결쳐 특정한 종류의 교육을 또한 요구한다.

이러한 교육양식은 일반교육과 기술교육의 구분을 가로지르며, 두 가지 교육을 모두 다음에 서술할 방향으로 개혁함으로써 두 교육을 연속과정으로 상정한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교육양식의 특성들에 대한 후속적인 설명을 일반교육뿐만 아니라 직업 훈련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기술교육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세계가 독일로부터 배웠던 기술훈련 모형(대량생산 시대의 경직된 기계도구들을 운영하고 엄격하게 구별된 직종과 전문직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직업별 및 기계별 기술을 강조하는 모델)을 거부해야 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독일식 기술훈련 모형을 일반적이고 유연한 고차원의 능력을 중시하는 모형으로 대체해야 한다.

수리적으로 제어되는 기계(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로봇 또는 3차원 프린터)는 특정한 생산라인과 확정된 전문직종 또는 노동력의 특정 분야에 연결된 협소하고 전속적인 용도를 갖지 않는다. 그러한 기계를 발명하는 것과 이를 재프로그래밍하는 것의 구분과 그러한 기계를 재프로그래밍하는 것과 이를 사용하는 것의 구분은 모두 완화되어 왔다. 기계의 조작자들은 기계의 발명가의 권능과 태도를 일정 부분 보유해야만 한다. 인공지능을 완전하게 활용하는 능력은 같은 방향에서 더 나아간다. 인공지능이 요구하는 노동자상은 공식에 따라 처리할 수 없는 과업에 전념하기 위하여 공식에 따르는 업무에서는 기계가 자신을 앞지를 수 있게 하는 법을 아는 노동자이다.

지식경제의 국한된 형태 아래에서도 기술적 노동분업은 계획과 집행의 차이뿐만 아니라 모든 전문적 업무 역할들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더욱 발전된 형태에서 지식경제는 모든 참여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신뢰와 재량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지식경제는 이러한 재량을 행사하고 이러한 신뢰를 누리도록 교육받은 수행자들을 필요로 한다. 지식경제의 수행자들은 생산과정의 외부에서 지시되고 일회적이 아닌, 생산 과정에 내부적이고 영구적으로 이루어지는 혁신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포용적인 형태의 지식경제의 주창자들의 교육은 네 가지 기본적 특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일반교육, 기술교육, 청년교육 나아가 평생교육에도 해당된다. 그 특성들은 지식경제의 발전에 중요하고 심지어 사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의 가치는 지식집약적 생산방식 자체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편익을 초월하고 민주사회에서 삶과 의식의 모든 측면에 관여한다.

첫 번째 특성은 교육의 방법이 분석적 능력과 종합적 능력, 더 일반적으로는 정보의 숙달보다는 상상력(반기계적인 것으로서 정신)과 관련된 권능에 우선권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콘텐츠의 진공상태에서는 아무도 이러한 능력을 습득할 수 없다. 그러나 콘텐츠는 주로 역량의 향상을 위한 여건으로서 중요하다. 따라서 두번째 특성은 이러한 교육이 콘텐츠와 관련하여 백과사전적 피상성보다 선별적 심오함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필수적인 능력과 정보의 활용능력을 발전시키는 데에서 주제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백과사전의 온갖 개요를 암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세 번째 특성은 이러한 교육이 사회적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교실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와 개인주의의 혼합보다 교육과 학습에서의 협력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학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간에도 학생 팀과 교사팀은 가르침과 배움의 주요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협력적 관행에 있어서 학생들 간의 상호교육 등 광범위하고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상상력과 협력의 만남은 지식경제의 어떠한 급진적인 형태에서도 중요하다. 지식경제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에 의해 지식경제가 예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수법과 학습방식의 네 번째 특성은 그러한 교육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주제와 방법은 적어도 두 개의 대조적인 관점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백과사전적 콘텐츠라는 목표를 버리고 범위보다 깊이를 선호하고 사실의 암송과 암기보다 분석적-종합적 능력을 선호하게 된다면,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이와 같은 변증법적 접근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대학문화의 정통 이론들은 청년들에게 지배적인 관념들을 사물 자체로 오인하도록 유도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방법과 주제의 결합을 자자연화(自然化)한다. 그러므로 경제학은 경제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19세기말 한계주의 경제학자들이 개척한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다른 방법에 의해 수행된 어떠한 경제연구도 경제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생산 및 교환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주제에 한계주의 방법을 적용한 연구는 마치 경제학이라도 되는 양 취급한다. 마찬가지로 불변적인 규칙성보다 시간적 변화의 우월성을 함축하는 역사적 연구는 자연사와 생명과학에 적합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우주의 역사성에 대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기초물리학에서 추방된다.

국정 교과과정들은 방법과 주체의 결합을 부당하게 자연화한 학술적 정통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정통이론들을 청년의 교육에 투영한다. 교과과정들은 결과적으로 학생을 정신적으로 무력화시키고 그를 지적으로 예속적인 삶을 위해 준비된 고등교육 단계로 넘겨준다. 교육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은 이러한 위험 앞에서 청년을 면역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대학문화가 피상적인 경우에 변증법적 접근은 깊이와 개방성을 제안한다. 변증법적 접근은 규율과 방법의 체계가 서로 분리해놓은 것을 뒤섞어놓는다. 변증법적인 방법의 목표는 다른 정신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철저한 의심과 지적 실험을 천재의 전유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이를 공유재산으로 전환하는 정신이다.

급진화된 지식경제는 제품과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에서 일회적 혁신보다는 지속적인 혁신을 요구한다. 민주주의는 정치가 사회의 구조를 초극할 수 있어야 하고 변화의 가능조건으로서 위기(파국이나 전쟁의 형태)가 없어도 구조변화를 생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교육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은 민주정치와 지식집약적 생산이 모두 의지할 만한 정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교육의 더 큰 비전은 이러한 의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학교는 모든 학생들에게 사회와 문화의 기존 질서 안에서 운동하고 그 질서에 저항하고 이를 초월하고 수정하는 도구들을 장착시켜 주어야만 한다. 학교는 모든 사람 안에 혀가 묶인 예언자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교육은 스스로 가족이나 국가의 도구로 타락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가족은 학생에게 나처럼 되라고 말한다. 국가는 학생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 학교는 이러한 메시지들을 거절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하며 미래의 목소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어떻게 낼 수 있으며, 누가 그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현재 사회의 어떤 권력들도 학교를 자신의 봉사기구로 위축시킬수 없도록 교육이 조직되어야만 한다. 교사와 학생은 국가와 가족의 영향력을 통제하고 나아가 학생과 교사가 민주주의하의 교육에서 중요한 긴장(현재의 제도와 가정들에 기초하여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과 그러한 가정과 제도들에 도전하도록 사람들을 독려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실험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정치적, 법적, 재정적 수단을 갖추어야만 한다.

구체적이지 않고 비타협적인 추상관념들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적 신념의 고백들은 딴 세상의 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은 급진화되고 보급된 형태의 지식경제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제에 가장 우호적인 정치체제(나는 이를 고에너지 민주주의9 2라고 부를 것이다)에서도 중요한 교육적 자극을 우리의 교육관에 불어넣는다. 우리의 상상적 활동의 모형에 따라 협력적 관행을 혁신하고 이러한 혁신을 일회적인 것보다는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어감으로써 지식경제는 참여자들이 일을 수행하는 것[맥락보존적 활동]과 그 일을 수행하는 데 배경을 이루는 제도들과 가정들의 틀을 바꾸는 것[맥락변경적 활동]의 차이에 점차적으로 구애받지 않는 정신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서 폐허나 전쟁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정치생활의 형식을 위한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한 체제하에서 사회생활의 전체 질서는 이론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에서도 경쟁과 실험의 대상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교육을 변화시킬 때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교육적 전위(그러한 프로그램을 계발하고 가동시키는 일에 투신한 수천명의 교사들과 교육운동가들)의 부재인 것 같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작은 범위의 예언가, 정치인, 공무원의 정신에서만 존재한다면 프로그램은 발전할 수 없다.

더욱이 구조상 거대하고 불평등하고 연방적인 (또는 단일 국가와 중요한 권한 이양을 결합한) 나라에서는 개혁과 개혁자는 투자와 품질에 관한 국가적 표준과 지역적인 학교운영을 조화시키는 제도적 틀에 의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켜야 할 핵심 원칙은 청년이 받는 교육의 품질이 그가 어디에서 혹은 누구한테서 태어났는가와 같은 우연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의 수행성과를 평가하고 무엇이 최상으로 작동하는지를 발견하기 위한 국가적 시스템, 학교가 지역 재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더 부유한 곳에서 더 가난한 곳으로 자원과 인력을 재분배하는 메커니즘, 나아가 시정적 개입의 절차 등 세 가지 수단들이 필요하다. 지역적인 학교 시스템이 수용가능한 성과의 최저 기준에 지속적으로 미달하는 경우에는 중앙 및 지역 정부(또는 연방 정부 하에서 세 가지 수준의 정부들)는 지역의 미달 학교를 감독하고 독립적인 행정가와 전문가들에게 학교의 운영을 위탁하고, 학교를 교정하고, 교정을 거쳐 반환하기 위해 공동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그러한 절차가 없다면 교육 기회가 출생의 우연성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무시되고 만다.

나는 앞서 뇌의 물리적 구조에서 어떤 것도 정신의 두 측면(알고리즘과 공식들로 회고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굴성에 의해 지배되는 정신의 측면과 공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방법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립된 전제들을 초월하는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측면)의 상대적 힘을 정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뇌가소성은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상상력의 작업을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정신적 경험의 두 측면 사이에서 상대적 우월성을 정하는 것은 바로 사회와 문화의 조직이다. 정치의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정신의 역사에 내재적이다.

여기서 나의 관심을 끄는 정치사와 정신사의 부분은 지식경제의 잠재력이다. 나는 지식경제의 심화와 경제 전반에 걸친 지식경제의 보급이 같은 현상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주장해왔다. 만약 유사전위주의라고 불러온 형태의 엄호 아래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지식경제가 급진화 없이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새로운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전파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 경우 그 제품들, 즉 장치들과 서비스들만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확장 과정에서 획득한 능력과 태도는 구매한 제품의 제한된 사용에 필요한 능력과 태도일 뿐이다.

급진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우리의 경제활동뿐만 아니라 정신생활에서도 변화의 원인이자 그 결과이다. 포용적 전위주의 아래서 기계로서의 정신은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에 영토를 양도해야만 한다. 우리의 경제적 제도와 생산방식에서의 변화만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 변화는 또한 교육의 성격, 개념, 방법의 쇄신을 요구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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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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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창당 100주년을 맞이한 공산당이 주도하는 현대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을 추진한 이래 2001년 WTO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지난 수십 년간 고도의 성장을 이룩하면서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경제지표상으로 2010년대 중반에 이미 구매력지수 PPP기준으로 미국경제력을 추월하였고, 공칭의 달러기준으로 평가하는 경제규모도 2030년 이전에 미국을 앞지르는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클린턴 시절만 하여도 중국은 경제성장과정에서 자체의 요구에 따라 민주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서구체제에 편입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시진핑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공산당 지배체제가 오히려 강화되었고 신형대국으로서 러시아와 함께 상해협력기구SCO를 결성하고 일대일로BRI를 통하여 국제사회에 대한 상응한 역할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단계에 이르자, 오바마 정권은 급기야 대서양 중심에서 아시아로 회귀  Pivot to Asia의 전략으로 회귀하기 시작하였고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America-First(미국우선주의)를 외치었던 트럼프 시절에는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을 현존하는 최대의 위협으로 규정하며 무역보복을 포함한 강압적인 조치와 제재를 취하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시절의 거칠고 일방적인 대중정책을 계승하되 이를 세련되게 정리하면서, 미국이 돌아왔다 – America is Back in Alliance’라는 구호로 위기에 빠졌던 대서양 양안의 기존동맹을 재정립하고, 주요 전략거점으로 부상한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기존의 정치군사적 파트너십 성격인 Quad에 다양한 동맹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이를 확대 강화하고자 하는 한편,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투명성을 내세우면서 가치개념의 전략을 통하여 중국을 세계에서 고립시키려는 소위 하이브리드 전쟁을 전면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자신주도의 패권유지를 지속하기 위하여 새로운 형태와 접근방식의 신냉전을 전개하면서 21세기 인류사회의 전망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과거의 트럼프가 미국 블럭버스터 영화인 록키 또는 터미네이터 타입이었다면, 현재의 바이든은 영화 대부의 주인공 알-파치노처럼 교활하고 치밀한 작전을 펄치고 있는 셈이다. 이에 7월 20일자 뉴욕타임즈는 Trump was Bad, however Biden is even worse to China  중국에겐 트럼프도 나쁜 상대이었지만 바이든은 최악의 상대이다’라는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포린폴리시의 전 편집장인 Jonathan Teppermann은 Bidens Dangerous Policy라는 제목으로 중국에 대한 바이든의 편집광적인 냉전사고를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대중국 전방위적 하이브리드 전쟁양상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산업공급사슬의 차단과 첨단기술의 봉쇄에 이어 신장의 인종학살 및 강제노동에 대한 언론조작 그리고 우한연구소의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설WIV 등이 자리잡고 있다.

신장과 관련하여 필자는 지난 상반기 다른백년의 플랫홈에 10여 차례에 걸쳐 해외 칼럼과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면서 미국과 영국이 주요 언론매체들을 동원하여 내용을 심각하게 과장하고 왜곡하는 것을 넘어서 없는 사실까지 조작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고발한 바 있으며, 이로 인하여 현재까지 미국의 Facebook 등 온라인 매체에게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한편, 위그르 족을 포함한 신장지역의 소수민족들은 실제로 역사이래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다고 중국당국은 밝히고 있고, 현지를 방문한 제3국의 많은 인사들도 이를 재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핵심주제인 우한연구소발생설 WIV에 대하여 필자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개진하고자 한다. 우선 아래의 2019년 3월 이래 코로나바이러스의 흔적과 발생에 관한 기록을 참조하여 주시길 바란다.

이미 2019년 봄철,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유럽각지에서 코로나바이러스 또는 이의 항체가 발견되고 있었으며, 11월에는 프랑스 등에서도 다수의 코로나-19 추정 제로환자(Patient-Zero)들이 발생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별도로 2019년 가을 초입에 이미 대만의 감염전문가인 치과의사가 기존의 인플루엔자와는 전혀 다른 코로나바이러스의 증상이 미국과 하와이를 다녀온 관광객들에게 다수 발견되었고 3-4개의 변종이 확인되었다고 공개적인 방송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예전의 독감과는 다른 증상을 보이는 호흡기 환자들이 급증하면서 사망자도 속출하고 있었다. 

한 예로 미국 동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의 시장이 2019년 10월 경 신약발표회에 참석한 후 견딜 수 없는 감기몸살과 발열로 인하여 10여 일 고생 겪은 다음, 2020년 2월 코로나 역학조사에서 이미 자신의 몸에 항체가 형성되었다는 판정을 듣고 지난 10월 자신이 앓은 몸살감기가 바로 코로나바이러스임을 확신하는 내용을 미국언론에 기고한 바도 있다. 참조로 중국당국이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일자는 2019년 12월 8일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이미 2019년 봄 또는 여름부터 세계도처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호흡기질환의 초기증상이 발생하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대부분 감염분야의 전문가들과 기후생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으로, 코로나-19는 자연생태를 마구 해쳐온 인류의 지나친 산업활동과 이로 인한 생태환경적 급변에 대한 자연계의 대응 즉 보복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된다. 

세계 여러 곳에서 201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다발적으로 발생한 코로나-19 초기의 바이러스 종들이 몇 개월간 잠복과 매개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인체에 치명적인 상태로 발전하면서 때마침 2019년 11월에 국제군인체육대회를 개최한 대도시 중국의 우한을 거점으로 전세계로 확산된 것으로 일단의 추정이 가능하다. 당시 체육대회에 참여한 군인경기자들의 숙소가 문제가 된 화난해산물시장과 가까이 소재하고 있었으며, 참가자 상당수가 별난 장소인 화난시장을 관광차 방문한 것으로 알려지면 이러한 추정의 가능성을 높여 준다. 

상황이 점차 밝혀지면서 유엔산하 국제보건기구인 WHO연구팀과 중국연구진이 1개월 넘게 조사를 진행한 이후, 이의 활동을 근거로 지난 봄에 WHO 조사팀이 우한연구소의 진원설WIV에 대하여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extremely unlike)고 공식적으로 밝혔고,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하여 전세계를 대상으로 광범한 제2단계의 조사연구와 이를 위한 지구적인 협력체제가 긴요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서구의 언론매체들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조작과 가설수준의 정보에 의존하여 우한연구소의 진원설WIV을 자가발전시키는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깔려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첫째, 중국은 초기대응에 성공하여 단시일 내 정상으로 복귀한 반면에,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하여 여전히 전전긍긍하는 서구사회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패착과 무능에 대한 면피성 구실과 희생양이 필요한 상황이다.

둘째, 미국과 서구는 백신기술을 두고 상업주의와 자국이기주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땅에 떨어진 위상을 되찾고자 백신패권주의라고 칭할 만큼 이를 국제정치적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반면에, 중국은 국제적 협력프로그램인 코백스COVAX의 적극참여를 통하여 직접 제3세계 100여 개국에 백신지원을 제안하고 이를 수용한 50여 개국에 5-6억 회분을 제공함으로써 제3세계의 격한 호응을 받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이 미패권에 대응하는 중국의 도전기반 즉 다자적 협력의 국제질서의 출발점이 되는 것을 극히 우려하면서, 근거도 없이 중국백신의 무용설과 더불어 WIV가설을 퍼트리고 있다.

셋째, 반중 공포감과 혐오감을 이용하여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 그리고 동양인들은 파렴치한”라고 호칭한 트럼프의 저질 악성정치가 그를 구세주로 받드는 QANon조직과 더불어 미국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미국 국내정치의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주요 요인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바이든의 입장에서 이를 무조건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오히려 이를 공개적으로 대응하고 역으로 활용할 필요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종합하여 보면 코로나-19의 바이러스는 2019년 봄과 여름에 걸쳐 세계도처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점차 인간에게 잠복 전이 진화하면서 치명적인 형태로 발전했으며, 마침 11월에 중국의 우한에서 있었던 국제군인체육대회를 계기로 전세계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군사적 바이오실험을 통한 인공조작 또는 실수로 인한 누출사고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며, 이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지구적 협력체제를 통한 제2, 제3의 전문적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미래의 팬데믹 재발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여기에 특별히 주목을 받는 장소가 비로 미국 메릴랜드 주에 소재한 미군 바이오연구소 Port De-Dtrick Lab이다. 

상기 장소가 주목을 받는 까닭은 2019년 가을에 오수처리의 시설기반을 보강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미군 최대의 바이오 기지를 장기간 폐쇄하였다는 것이 결코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는 점과 더불어 당시에 상기 연구소에 근무하였던 인원 몇 명이 우한국제체육대회에 참가하고 화난시장을 방문한 것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이 보였던 역사적 행보가 혐의의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만주에 소재하였던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서시 등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하늘과 별과 바람의 시인 윤동주도 731부대에서 희생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은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인간생체실험을 통해 얻은 731부대의 모든 실험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제1급 전범이었던 일본천황의 제도를 묵인하였으며, 실제로 수천에서 수만 명의 인명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인공로할 731부대의 책임자들은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이후 존경을 받는 사회인사로 천수를 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은 731부대에서 넘겨받은 자료를 기반으로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에서 콜레라 장티푸스 흑사병 그리고 유행성출혈열 등 전염병 세균을, 의도적이거나 누출사고를 가장하여, 사용하고 전파해 온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전쟁국가인 미국은 저렴하고 가장 효과적인 생화학무기로서 세균과 바이러스에 대한 유혹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최근 주한미군은 자신들의 전용부두인 부산항에서 최근까지 수백만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가공할 치사병원체인 탄저균 실험을 한국정부에 통보도 없이 극비리에 진행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우리를 경악시킨 바 있다. 이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유튜브 동영상 서울대 수의학 우희종 교수 강연내용 <미국세균무기(탄저균) 현황과 한국> 등을 참조해 주시길 요청한다.

수십 억의 인류를 고통으로 몰아놓고 현재까지 4백만 명 이상 생명을 앗아간 코로나-19 출현의 배경과 원인을 반드시 밝혀내어야만 제2, 제3의 팬데믹 상황을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서구의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진영을 넘어서 중국과 러시아의 과학자들 포함하여 지구촌 모든 관련자들이 모두 총집결한 국제적인 협력체제를 통하여 진실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따라서 중국의 우한연구소 뿐만 아니라, 메릴랜드의 Port Detrick Lab 포함하여 전세계 도처에 소재한 미군의 바이오연구소들에 대해서도 예외없이 일반적이고 전반적인 탐색과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구가 중국에게 요구하는 범위와 절차와 수준의 재조사와 탐색이 미군 산하의 모든 생화학무기연구소에 대해서도 반드시 이루어져 한다. 

만약 미국이 자국의 안보라는 구실로 이를 거부한다면, 수백만 수천만의 인류를 희생시킨 팬데믹의 진실을 은폐한 악성 범죄국가로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이 칼럼은 7/24일자 프레시안에 사전 기고된 글입니다

이래경

수, 2021/07/2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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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포용적 전위주의는 도덕적 생산문화에서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변화는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신뢰와 재량 수준의 고양을 유지하는 작업방식뿐만 아니라 특징적이고 까다로운 특성들을 지닌 협력관행의 향상에 있다.

중요한 쟁점은 도덕적 생산기반에서 이러한 변화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문화의 소여인지 아니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실천과 의식의 특성인지이다. 이러한 변화는 포용적 전위주의를 향상시키는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 심화되고 보급된 지식경제의 도덕적 문화는 변혁적 행동이 닿을 수 없는 운명의 영역으로 남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도덕적 문화는 집단적 창조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 문화의 구성 요소와 요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문화의 강화를 바랄 수 없다.

작업장 내에서 지휘통제에 기초한 노동분업에 대한 접근 방식은 재량의 여지를 봉쇄하고 신뢰를 권력과 감시로 대체한다. 경직된 기계의 작동을 모방하는 작업의 반복적 성격은 생산적인 과업들의 전문화된 집행자들에게 집행을 담당하고 있는 바로 그 계획을 다시 정의할 기회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고용계약의 암묵적 조건(임노동의 계약적 형태)은 생산과정을 지시할 모든 나머지 재량이 법과 단체협상의 제약 안에서 소유자가 임명한 관리자들에게 유보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기성제도에서 생산적 자원과 기회의 분산적 접근을 조직하는 중요한 법적 장치들은 통일적인 재산권(19세기의 법적 발명품)과 이에 부응하는 계약법상의 장치로서 쌍무적인 미이행계약(간단한 급부로 완결되는 협상의 조건들을 빠짐없이 적시하는 사무적인 거래)이다. 통일적인 재산권과 쌍무적인 미이행계약[쌍무계약]은 공히 권리보유자가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거의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적인 재량의 영역(권리의 영역)과 다른 사람의 청구권에 복종해야 하는 주변 영역을 뚜렷하게 분리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무적인 거래와 거의 통제받지 않는 이기심의 영역은 사회적 상호의존성이 매우 두드러지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들(가족, 공동체, 교회)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의존성에서 더 효과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비축하고 또한 우리는 불완전한 합의를 권력, 교환, 충성이 거리낌 없이 섞이도록 허용하는 사회생활의 부분들(가족과 공동체)에 유보한다.

지식경제의 심화와 확산은 다른 도덕적 문화를 요구하고 그러한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포용적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도덕적 환경의 원인이자 그 결과이다. 그러나 포용적 전위주의는 결코 그 자신의 도덕적 기초의 만족스러운 건축가일 수 없다. 그러한 기초도 의도적인 행동의 결과이어야만 한다.

이 절의 도입부에서 환기시킨 두 가지 보완적 시각(신뢰와 재량의 향상과 우리의 협력적 성향의 강화와 정교화)에서 경제생활의 도덕적 기풍에서의 필요한 변화를 고려해 보겠다.

신뢰와 재량의 향상은 계획이 집행 과정에서 수정됨에 따라 생산적인 업무의 계획수립과 그 집행의 차이를 이완시키고 경쟁에 맡기는 활동과 협력에 맡기는 활동의 차이를 상대화함으로써 순차적으로 발전한다.

앞서 언급한 군사적 유추를 상기해보자. 지식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작업집단은 정규군보다 비정규군을 더 닮아야만 한다. 그러나 특수작전부대와 같은 비정규군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계속 활동하는 더 큰 군대의 엘리트적이고 보조적인 세력으로 작동하는 것과 정규군 전체가 비정규군의 특성을 조금씩 획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제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욱 야심적인 의제다. 정규군이 비정규군의 특성을 얻기 위해서는 정규군은 엘리트 부대의 극단적인 유연성과 기동성과 중앙통제를 비율상 확장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아직 어떠한 군대도 달성하지 못한 바로 이 과업을 급진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의 수행자들이 성취해야만 한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인지적-교육적 요건과 법적-제도적 요건과 관련하여 진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도덕적 생산문화에서의 변화는 그 초기 단계들을 벗어날 수 없다. 지식경제를 꽃피우기 위해서 다수를 위한 지식경제는 내가 앞서 기술했던 유형의 교육을 필요로 한다. 지식경제는 또한 생산적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 형태를 배가시키는 시장경제의 제도적 법적 안배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 혁신들에 달려 있다. 금융이 수익 중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신규 자산의 창출에 대한 기여도를 떨어뜨림으로써 지속적으로 사회의 생산적 의제보다는 금융 자체에 더 복무하는 한, 주요한 생산자산의 통제권은 자유로이 이동하는 자본의 대규모 공동자금을 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행사될 것이다. 우리가 생산자원의 분산적 접근 수단, 이른바 재산체제의 혁신을 이루지 못한다면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은 자유노동의 지배적인 형태로서 살아남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 도덕적 생산문화의 필수적인 변화는 시작되기는 하겠지만 지속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 의식과 관행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와 연계됨으로써 힘을 얻을 것이다.

신뢰와 재량의 수준을 제고할 필요는 간단히 말해서 더 일반적인 요구(기질과 기술을 포함해서 협력하는 능력을 강화하고 정교화하라는 요구)의 가장 긴급한 결론이다. 비록 제도들이 협력의 의향과 능력에 관련될지라도 그러한 의향과 능력은 순전히 제도적 설계의 피조물은 아니다. 협력적 능력은 사회적, 경제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독자적인 요소이다. 협력적 능력이 허약하다면 어떠한 제도적 체제도 이러한 체제의 창안자들이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협력적 능력이 강력하다면 협력적 능력은 다양한 제도적 체제들을 매개로 유익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 해링턴, 몽테스키외, 비코와 같은 초기 유럽 사회이론가들은 모두 협력적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과 이러한 능력은 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하였다. 이들은 ‘정신’ 과 ‘덕’과 같은 항목 아래서 협력적 능력을 연구하였다.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 짐멜의 이론에서 보듯이 후속적인 고전적 사회이론은 협력적 능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변형과 결과를 탐구할 기반을 결여하였다. 협력적 능력이 다양한 체제들의 역사를 관통한다고 말하려면, 이러한 이론적 전통이 부인하는 것(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체제보다 우리 안에 항상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는 통찰)을 전제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이 사망선고를 받고 난 다음 사회과학의 후기역사에서 협력은 “사회자본”(사회적 결속들의 상대적 밀도)이라는 위축되고 두서없는 형태 속에서 하나의 논제로 다시 등장하였다.

나는 협력체제를 상호작용의 관행적인 상호작용 형태들과 이러한 형식들과 연결된 태도들, 기술들, 가정들 나아가 이러한 형태들이 당연시하고 자신의 기반으로 수용하는 제도적, 법적 안배들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생산방식, 특히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발전에 대한 협력체제의 기여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산출과 생산성에서 협력체제의 다산성을 판단할 두 가지 중요한 기준이 존재한다.

첫 번째 기준은 협력체제가 최대다수의 경제주체들의 재능과 역량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이들에게 생산적인 자원과 기회에 대한 접근기회를 어느 정도 확장하는 지이다. 일정한 집단들이나 일정한 유형의 개인들에게 도달하는 데 있어서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방법 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 어떤 방법은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방식으로 도달한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유일한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심지어 다른 모든 경쟁적 형태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접근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조직 방식조차 여전히 결함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도 기회와 접근을 추구한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해법은 주어진 시장경제에서 (유일한 재산체제와 계약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포함해서) 시장의 유일한 법적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일 것이다. 경제적 주도권의 분산에 대한 대안적인 제도적 방식들이 이제 동일한 시장질서 안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할 것이다.

협력체제의 개선을 판단할 두 번째 기준은 협력체제가 협력의 요건과 혁신의 요건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지 여부이다. 긴장의 완화는 협력에 대한 모든 접근에서 중요하다. 긴장의 완화는 혁신을 영구화하려는 생산방식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실천적 역량의 발전(경제성장과 생산성 증가는 그 일단에 불과하다)은 협력하고 동시에 혁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혁신이 기술적인가 조직적인가 제도적인가 심지어 개념적인가에 상관없이 혁신을 정식화하고 집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혁신은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든 혁신은 기존의 협력체제를 교란시킨다. 혁신은 기존의 협력체제에 참여하는 집단들, 즉 서로 대립하는 노동력의 부문들, 서로 맞서는 노동자, 고용주, 투자자의 기득권과 확립된 기대들을 위협함으로써 체제를 교란시킨다. 혁신의 채택이 상대적인 집단적 위치들에 미치는 효과에서 보자면 모든 혁신은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기술적인 혁신조차도 사회 전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의 참가자들에게도 불확실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결과들은 기계의 관념과 설계 단계에서, 누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기계를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가정들의 형태로 이미 시작된다. 실제로 기술에 대한 최상의 사고방법은 자연적 요소와 재료를 우리의 이익을 위해 배치하면서 자연을 변형하는 실험과 협력체제를 재구성하는 실험의 결합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기술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의 생산방식을 다른 생산방식보다 더 선진적인 것으로 만드는 특성은 그 생산방식이 앞서 말한 두 가지 실험의 결합에서 다른 생산방식보다 낫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실험의 수행에서 배운 교훈을 각각의 실험에서 구체화할 수 있다.

협력과 혁신의 요구들은 상호 간에 의존적이면서도 모순적이다. 그러나 두 가지 요구들이 철저하게 모순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긴장의 완전한 해소를 결코 희망할 수 없겠지만, 어떤 협력체제는 이러한 갈등을 줄임으로써 다른 체제와 차이를 만든다. 예컨대, 어떤 협력체제는 불안정에 맞서 안전장치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방식과 사람, 기계, 기타 자원의 혁신적 재조합을 억제하는 조치들을 분리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협력체제는 사회적 안배들의 가소성을 심화하면서 이러한 가소성이 공포와 불행을 야기하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

내가 지식경제의 도덕적 기반을 논의해온 과정에서 견지한 두 가지 관점(생산적 활동에 허용되고 요구되는 신뢰 및 재량의 향상과, 앞서 기술한 두 가지 기준에 의한 협력체제의 개선)은 중요성과 일반성에서 같지 않다. 전자는 후자의 표현이자 측면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재능과 역량을 활용하고 혁신의 필요와 협력의 필요를 화해시키는 방향에서 더 전진하는 협력체제는 참여자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에서(재량) 기존 체제보다 더 나은 체제가 될 것이다. 그러한 체제는 또한 참여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상호적 취약성과 불확실성(신뢰)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체제가 될 것이다.

그러한 체제는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을 담대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보호와 기부재원의 배경 아래서 그렇게 요구할 것이다.

발전되고 확산된 지식경제의 도덕적 조건에 관한 이와 같은 비전의 중심에는 우리가 카이저에게 돌리는 것(타자와의 관계가 도구적인 것으로 그치는 이기적 교환의 영역)과 신에게 돌리는 것(칸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리가 타자를 목적 자체로 처우하는 연대에 대한 우리의 실험의 영역) 사이에 어떤 극명하고 무제약적인 모순을 부인하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과 야망이 조금이라도 완화된다거나 또는 가장 친밀한 삶의 영역에 관습적으로 유보해온 상호인격적인 참여의 희망을 우리가 경제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견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식경제의 융성을 통한 생산력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생산의 도덕적 문화에서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견해이다.

지식경제의 도덕적 기반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도달하게 되는 문제는 우리가 도덕적 기반을 집단행동이이나 법적, 제도적 혁신을 통해서 발전시킬 수 있는지 여부이다. 우리는 실제로 이를 발전시킬 수 있다. 지식경제의 도덕적 기반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문화적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그 누적적이고 결합적인 효과를 통해 이러한 변화에 기여하는 기획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기획들을 경제활동에 대한 반향을 포함하여 경제의 외부에서 협력적 능력을 강화하는 기획, 협력 및 혁신의 필요와 영구혁신에 우호적인 협력체제를 향한 운동 간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기획, 협력체제와 그 배후의 제도적 안배들이 최대다수의 경제주체들에게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기획 등 세 가지 항목으로 묶어 보겠다. 첫 번째 기획은 문화와 정치에서의 변화를, 두 번째 기획은 노동시장에서 안정성과 유연성의 관계를, 세 번째 기획은 시장경제의 조직방식과 이러한 시장경제가 계약과 재산권을 통해 분산적인 경제활동의 조건들을 형성하는 방식을 각기 다룬다.

경제 외부에서 협력적 능력의 강화는 경제 내부에서의 협력적 능력의 강화에 이를 것이다. 일상적 경험의 전반적 기조는 사람들이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을 가르칠 것이다. 특히나 세 가지 [경제외적인] 영역에서 협력의 장애물들에 대처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협력의 능력과 의지를 강화하고자 시도하는 사회혁신의 사례들을 이제 검토해보겠다. 각 사례들은 독자적으로 가치 있는 사회적 목표들 달성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한 사례들은 또한 경제활동의 도덕적 기풍에 예측 가능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경제 외부의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경험을 변화시킨다.

첫 번째 사례는 교육의 협력적 성격이다. 우리가 학교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학교들 사이에서도 교사와 학생들 간의 협력을 통해 가르침과 배움을 협력적으로 수행하고 청년들에게 상호 간의 교육에 대해 적극적인 책임을 공유하도록 자극한다면, 협력의 충동은 개인의 형성 과정 초기에 착근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앞서 내가 서술했던 행정적 포드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의 취지에서 공공 서비스의 비영리적 공급과정에 국가와 나란히 시민사회를 동원하는 것이다. 국가 외부의 시민사회는 국가의 행동을 분산시키기 보다는 폭력을 억압하는 경찰과 더불어 공동체의 자체 조직을 보완하면서 (서비스 제공자들 또는 사회단체들의 연합들을 매개로) 건강과 교육의 협력적 제공을 통해 대중과 시민사회 자체를 동시에 형성할 수 있다. 세 번째 사례는 신체 건강한 모든 성인이 생산체제 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잡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원칙의 일반화이다. 자발적인 혹은 의무적인 사회봉사 활동은 정책적 법적 구조틀을 수립하여 이러한 노력이 사회적 연대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협력과 혁신의 필요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양자 간의 상호의존성을 활용하는 안배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그러한 제도적 안배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제도적 안배들이 개념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순에 해당하지 않는 어떤 과업을 성취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제도와 관행들을 도전과 재구성에 실현 가능한 최대로 개방하면서 역량 향상적인 (경제적 교육적) 기부재원을 개인에게 제공하도록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개인의 안전장치들을 설계하는 과업이다.

이러한 과업을 제도적인 형태로 고려하기 전에 먼저 이를 심리적인 표현에서 생각해보자. 자신과 타인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려면 개인은 항구적이고 마비적인 공포 속에 살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개인은 또한 순응에서 벗어나도록 충격을 받아야만 한다. 개인의 습관적인 행동형태는 주변의 모든 변화에서 도전을 받아야만 한다. 그가 겪어온 경험이 굴성(屈性)을 보임에 따라 경험의 성질은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습관과 순응은 생명력의 적들이다.

개인은 안전과 능력을 향유해야만 한다. 그러나 개인의 안전과 능력은 사회경제적 생활의 동결(凍結)을 조건으로 획득되거나 유지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개인의 안전과 능력은 일단 필수적인 보호이익과 권능의 안식처에서 확보되지만 개인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려는 의향의 이면임에 틀림없다.

개인으로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의 일부는 자신의 성격(경직되고 습관적인 자아 형태와 그 존재방식)에 대한 저항이며, 이러한 저항은 경화된 인성형태 안에서 조금씩 죽어가는 상황에서 우리를 구제한다. 그러나 사회와 그 경제 질서로서는 그 해법은 사회경제적 생활의 가소성(可塑性)-도전과 변화에 대한 개방성-에 대한 통제 요소들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안전과 능력의 보증을 제외시키는 것이다. 가소성에 대한 일정 정도의 간섭은 피할 수 없다. 안전과 능력을 보장하는 권리와 편익들은 비교적 안정적이어야 한다. 즉 그러한 권리와 편익은 단기적 정치의 의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외는 상대적인 제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보증과 기부재원의 내용과 범위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증과 기부재원을 최상으로 발전시킬 수단도 항상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적 의제를 더 훌륭하게 확장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것을 더욱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하여 정치적 경쟁과 사회적 실험의 의제에서 어떤 것을 제외한다. 우리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정체성에 대한 의식과 함께 혁신이 초래하는 불안정에 맞선 안전에 대한 의식을 사회경제적 생활의 기성형태를 보존하는 데에 허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경제, 사회, 심지어 주체의) 변화를 가로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창조적이고 변혁적인 권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개별 노동자-시민의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방향에서 운동의 작은 단초적인 사례는 유연안전성이라는 딱지가 붙은 역사적 사민주의의 현대적 개혁이다. 유연안전성은 노동과 관련된 권리와 편익을 특정한 직업보유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완전히 휴대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러한 권리와 편익을 다시 규정한 것이다. 유연안전성의 제안자들은 이를 오늘날 가장 부유한 나라의 통치 엘리트들이 가진 지배적인 기획(유럽식 사회보호와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의 조화)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유연안전성을 이와 달리 영구혁신의 충동을 내부화하는 협력체제들을 발전시키려는 더욱 광범위한 기획에서 하나의 계기이자 하나의 단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우리가 목표를 이렇게 다시 규정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병행하는 기획들을 통해 다양한 수단으로 이 목표를 추구해야만 한다. 첫 번째 기획은 예컨대 출생시에 모든 사람에게 그가 삶의 전환점마다 융통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상속분, 즉 사회의 생산자산에 대한 지분을 제공함으로써 안전장치와 기부재원의 패키지를 발전시킬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의 기획은 변화의 기회로서 위기[전쟁이나 경제 붕괴]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에도 사회의 기성 구조를 단편적이지만 누적적인 재구성에 더 개방함으로써 경제생활과 정치생활을 동시에 재정비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기획은 특정한 순간 또는 특정한 쟁점과 관련하여 충돌할 소지도 있다. 그러나 똑같은 비전이 두 가지 기획들을 자극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전면적인 모순이나 지속적인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의 어떤 단일한 조직도 만인의 잠재력이나 모든 경제적 실험 노선의 가치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비인격적 옮음(right)의 어떠한 체계도 좋음(good)의 실질적 관념들 사이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격적인 옮음의 체계는 공상적이고 위험한 중립성의 이상을 모순과 시정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유용하고 가치 있는 목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산적 경제의 이상도 자연적인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 즉, 사유재산과 계약의 자연적인 체계가 없음은 물론이고 시장질서의 확정적이고 전(全)목적적인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에 가장 순수하고 비타협적인 형태로 발전하였고 그 이후 사법과 법리에서 중심적 지위를 결코 상실한 적이 없는 재산권과 계약에 대한 특정한 접근 방식[고전적 자유주의 법학]은 사유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경제적 사고를 우리가 사유하고, 수립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경제적 기획을 우리가 수립할 수 있게 하는 자연적인 법률 언어가 아니다. 그러한 특정한 접근 방법은 제한적인 언어일 뿐이고 이러한 접근에 유리하게 동원된 중립성과 탄력성의 구실로 더욱더 제약적으로 되었다.

시장을 조직할 때 어떤 방식은 다른 방식보다 낫다. 어떤 방식들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더욱 분산적인 접근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나을 수 있다. 어떤 방식들은 또한 경제적 분산을 제도적이고 법적으로 형성하는 데에서 발명과 실험을 허용하기 때문에 더 나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장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분산적 경제활동을 위한 수단의 조직에서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재산권과 계약의 체제에서도 다양성과 실험의 여지가 클수록, 시장 조직이 특정한 집단, 계급, 경제주체들 및 생산활동 직군들에게 기득권을 제공하게 될 개연성은 그만큼 작아진다. 각 재산체제(달리 말하면, 생산적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을 조직하는 각각의 방법)는 서로 다른 유형의 행위자와 이해관계를 우대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개방성의 최적 보장은 시장근본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특정한 시장형태를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형태로 성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형태들(재산과 계약의 많은 체제들)이 동일한 시장경제와 동일한 법체계 안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하도록 허용하려는 것이다.

대체로 소수의 편익을 위한 단일한 시장형태의 구축 결과는 협력적 의지와 능력의 강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기업이나 경제에서 나아가 국가 전체 차원에서) 공통 대의의 함양에 대해 정당한 의구심을 던질 것이다. 연대의 이상을 위한 기본 쟁점은 언제나 그 구조적 가정들(분산적 활동의 기회를 풍부하게 간직한 경제를 조직하는 방법을 통해 연대의 이상이 당연시하는 것)을 확인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연대 방침의 해악은 불변적이고 심지어 인식조차 안 된 제도적 틀에 부여된 후광으로 복무해온 것이다. 협력의 요구는 갈등을 완충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예컨대, 협력의 요구는 특히 20세기 양차대전의 간전기 국면에서 유럽 정치와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발생하였다. 즉, 기업과 경제부문 전체에서 노동자와 소유자의 협력을 촉구하는 방식은 계급갈등을 국민적 통합과 사회적 조화로 전환하려고 노심초사하는 국가의 시야에서 노동의 전투성과 사회주의적 선동에 맞서는 무기로 봉사하였다. 그러한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발전되고 확산된 지식경제가 의존해야만 하는 도덕적 사회적 기반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약화시키는 결과를 발생시켰다.

협력체제의 향상에서 수용할 만한 유일한 형식은 이러한 오류를 회피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오류를 회피하기 위해서 협력체제는 시장경제의 유일하고 배타적인 조직 방식에 의해 포획되는 상황에 저항해야 한다. 그러한 저항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협력체제는 분산된 경제적 활동 및 생산적 자원과 기회들에 대한 분산된 접근이 동일한 시장경제 안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하도록 구조화하는 대안적 방식들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시장의 제도적 재구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지금 논의해 보겠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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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21/08/01-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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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지식경제를 국한되고 얕은 형태와 확산되고 심화된 형태로 구분하여 해명하고 지식경제를 심화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요구사항들과 이러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배경조건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주제에 관해 더 큰 세 가지 시각을 검토하겠다. 첫 번째 시각은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선택지들과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두 번째 시각은 세계 최고 부국들의 정치경제학 및 정치와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세 번째 시각은 경제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공급과 수요의 상호수용이나 반복적인 불균형)에 대한 지식경제(고립적 형태이든 포용적 형태이든)에 관한 나의 주장이 갖는 중요성이다. 이 세 번째 시각은 이어서 경제이론의 일부 중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이 함축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시각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연구가 경제생활의 가장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특성들을 파악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은 명백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후반의 발전경제학의 중요한 공식은 산업화가 표준적인 형태의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수립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산업화를 통한 가장 부유한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 공식은 내가 차차 논의하려는 이유들로 인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이 공식에 대한 대안, 즉 지식경제의 확산되고 포용적인 형태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강력한 제도적 역량과 교육적자원을 가진 가장 부유한 경제들조차 이런 방향에서 크게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건에서 더욱 빈약한 개발도상국들이 전진한다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낡은 전략은 실패한다. 새로운 전략은 낡은 전략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까다롭고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발전에 대한 모든 사유는 이 딜레마와 교전함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 딜레마는 경제발전에 가장 절박한 실제적인 도전이 되었으며, 동시에 현재 활용 가능한 발전 관념들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를 상기해보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은 기초 여건들, 즉 교육과 제도들에 의해 제약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전경제학이 ‘인적 자본’의 형성에 대해 했던 입에 발린 말에도 불구하고 발전경제학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 제도적 구조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에서 욕망의 현실적인 표적이었던 대량생산 방식의 산업화는 교육의 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요한 요구는 노동자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교육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타 근본적 제도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발전경제학은 역사적 상황(규제받는 혼합적인 시장경제)에서 기성품으로 발견한 경제적 제도들을 거의 수정 없이 추천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였다. 중요한 관심사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재산에서 또한 재산이 창출한 소득흐름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점과 국가가 장기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을 단기정책으로 전환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계획기구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중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최상의 방식은 노동자와 자원을 경제의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농업에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제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의 천편일률적인 특성과 대량생산을 위한 교육적 제도적 전제조건들의 상대적 소박성은 생산성 증가와 더불어 성장 증가가 단시간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장 증가는 계속 전진하다가 기초 여건에서의 상응하는 전진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한계에 직면한다. 그러나 선행하는 제약조건들과의 충돌은 위험요소가 되기보다는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관철된 부문(포드주의 제조업)으로 노동자와 자원을 이전시키면서 시작되었던 변혁을 지속시키는 자극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대량생산이 가장 부유한 사회들과 연결되었던 세계경제에서 산업화는 국제적 노동분업의 증가를 의미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이러한 처방에 더는 의존할 수 없으며, 자신들과 가장 부유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도 없다.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오래 전부터 너무 이른 탈산업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겪어왔다. 또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거대기업들에 유용한 지구적 가치사슬에서 (국제기준에 비추어) 저임금과 분업화되고 종속적인 틈새를 결합함으로써 대량생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개도국들은 그 상부국가, 즉 전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부국에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친숙한 고립적 형태를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의 상품화된 측면을 끌어안았다. 소수의 국가들(특히 중국과 인도, 어느 정도는 러시아와 브라질)만이 언제나 고립적 형태로서 세계적인 지식경제의 전초기지들을 설치해왔다.

발전경제학의 표준적인 산업화 처방이 작동을 멈춘 데에는 서로 연관된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세계에 산재한 그 독점적 기지들로부터 나온 선진적인 생산은 철 지난 대량생산을 점차 경쟁에서 물리칠 수 있다. 선진적인 생산은 전통적인 제조업의 제품들을 더 효율적으로 더욱 우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내가 초-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체제 아래서는 선진적인 생산은 생산라인의 표준화된 부분을 대체로 임금과 세금이 낮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공장에 할당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은 발전경제학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전위라기보다는 이제 지구적인 생산라인들에 대한 위성(짝패)으로 변한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적 산업화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의 증가와 더 이상 연관되지 않는다. 세계 경제에서 더 유효한 구분선은 제조업과 여타 모든 것(특히 농업) 사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선은 (과학적) 영농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확립된 선진적인 생산의 프린지와 여타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셋째,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의 중대한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부문들 간의 구분들은 효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구분들의 경직성은 상대적 후진성의 신호를 나타낸다. 모든 형태의 지식경제는 일천하고 제한적인 형태이든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이든 이러한 구분들을 전복한다. 지식경제는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넷째, 대량생산 제조업이 생존하는 경우에는 노동과 조세에서의 차익취득이 낙후한 생산의 입지를 몰아냄에 따라 대량생산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과 더 작은 세금을 향한 경주에 입각해서만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생산의 기반설비로서 운송, 통신, 에너지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능력에 대한 공적투자 재원의 부재와 저임금은 전위부문을 향하는 운동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계승형태는 대체로 어떤 일반적인 견해와 처방을 포기하였다. 그 계승형태는 빈곤층에 대한 상이한 정책들의 차별적인 효과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은 결함 있는 구조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 계승형태는 현대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와 일치하여 구조적 비전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경제 여건에서 이곳에서 그곳으로 이르는 데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개적인 조치들을 통해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에로의 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낡은 메시지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약속과 그다지 격차를 보이지 않는 경제체제에서도 포용적 전위주의가 외견상 영웅적이고 불가능한 기획으로 머문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교육적, 도덕적, 제도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더욱 요원해 보이는 사회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교육 및 법의 기초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극단적인 불평등과 방향들 및 체제들의 혼란(이러한 혼란은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독재를 통해서만 중단된다) 사이에서 자주 표류하는 나라들이다. 이러한 나라의 시민들은 최저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도 허약한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치를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른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을 고려하기 전에, 이 문제가 21세기 초반의 브라질과 같은 경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추구라는 과업이 제시한 도전이 부유한 경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불가피한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사례도 문제를 해결하기 적합한 형태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일조할 것이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자극 아래서 브라질의 남동부, 특히 상파울루 주에 위치한 브라질 제조업의 핵심은 대량생산이었다. 대량생산은 처음 설치된 시점에서도 이미 철 지난 것이었다. 대량생산은 제조업에서 탁월성의 기준에 도달하였고 그 이래로 일반적으로 이 기준을 유지해왔다.

어쨌든 대량생산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핵심에서 퇴행적인 제조업 생산양식으로 점차 변모해왔다는 부담 아래서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철 지난 포드주의는 노동수익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빈번히 속류-케인스주의의 엄호 아래 제공된 신용보조금과 세금우대 등) 국가지원에 대한 의존을 대가로 해서만 경쟁력을 갖는다.

지식경제는 브라질에서도 출현했지만 매우 고립적인 형태로 몇 군데에서 신생기업들과 첨단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출현하였다. 유명한 준(準)국가적인 기술학교와 지원센터의 네트워크(바르가스 치세의 조합주의의 유산)는 선진적인 제조업에서 이러한 고립적인 활동들을 지원해왔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은행 중 하나를 포함하여 막강한 공공은행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가장 까다롭고 매우 이례적인 지원 형태, 즉 생산적 관행(농업 외의 확장 서비스)의 개선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기구도 보유한다. 이러한 지도관행에서 발전된 원리는 정부와 신흥기업 간의 분산적 협력관계와 그러한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을 서술한 “지역적 생산 협정제도(local productive arrangements)”의 개념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경제체제들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선진적인 중견기업)은 대체로 결여되었다. 나아가 브라질의 제도적 장치나 발전의 원리들(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재정적 신뢰의 추구까지) 중 그 어느것도 브라질이 너무 이른 탈산업화의 가장 두드러진 실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1세기 첫 10년간 상품가격의 상승과 농업, 목축업, 광업 제품에 대한 중국발 수요의 여파로 제조업은 생산과 수출품들의 백분율에서 극적으로 감소했다. 철 지난 포드주의는 대체되거나 전환되기보다 간단히 위축되었다. 브라질은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중이었으며, 지식경제를 성취하기도 전에 대량생산을 상실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기업적 문화들 중 하나를 계속해서 지원했다. 두 번째 혼혈인종의 프티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경로를 따르려고 시도하고 독립성과 주도성을 추구하는 이 계급의 문화를 포용하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브라질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강력한 담지자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경로를 따르고자 하였다.

동북부의 반-건조한 오지들과 같은 일부 극빈지역에서 17세기 선대제수공업부터 20세기 후반의 낡은 대량생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경제들의 다양한 관행, 법적 기구들, 심지어 기술이 공존하였던 페르남부코내지의 섬유산업지대와 같은 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기업가적 정신은 대체로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방향을 잃었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국가발전의 새로운 의제가 제시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그러한 의제의 원재료였다.

이러한 상황들이 제기한 질문은 온 나라가 나중에 다른 것이 되기 위해 철 지난 포드주의의 연옥에서 한탄하면서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가 먼저 되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이 나라와 이 정부가 남동부의 낡은 산업 중심지들 바깥에서 포드주의 이전 단계에서부터 포드주의 이후 단계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조직할 수도 있는 지였다. 이 질문에 대한 전자의 답변은 이 장의 도입부에서 열거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자의 경로를 답습하는 것은 전자의 결과를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은 세상에 전례가 없는 어떤 것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앞선 지면에서 기술한 발전의 딜레마의 브라질다운 형태에 불과하였다.

브라질 사례는 발전 딜레마의 몇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 번째 요점은 이 딜레마가 허위의 딜레마라는 점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은 어떤 조건에서도 어렵지만, 개발도상국의 조건에서는 특히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에 사후(死後)세계를 부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더 나쁜 것이며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한 제조업은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가정하였던 것과 같은 “무조건적 수렴”의 매개체로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으며, 앞서 내가 논의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작동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공장제 대량생산은 더 이상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므로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는 더 위축되고 더 제한적인 어조를 띤다. 그 메시지는 개발도상국에게 “관례적으로 산업화하고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히 겸손함의 호소력을 갖는다. 메시지는 잘 알려진 경로에서 인내심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우리의 생산능력의 진화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 노동분업에서 일어날 불가역적인 변화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주장은 모든 경제체제들이 자신보다 앞서는 경제체제들의 과거를 나중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미래로 예행연습하면서 똑같이 가차 없는 진화의 순서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견해에 의존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본성은 하나의 장소에서만 변화해온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은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에서 변화해왔으며 그 본성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입지는 직접적으로 또한 국제적인 노동분업에 대한 생산방식의 영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량생산을 국가적 발전의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브라질의 예에서, 브라질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로 바꾸려는 시도는 사라진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퇴각임과 동시에 투항으로 이해되는 후퇴, 달리 말하면 국제적 전위부문에서는 퇴각이고 생산의 전선에 도달한 국가들과 기업들에 대해서는 투항)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는 두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세계의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포용적 전위주의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구분해주는 (앞의 장들에서 논의한) 조건들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진적인 방식의 형성에 관건적인 자원(사회에 널리 확산된 부단한 활기와 기업가적 충동)이다. 그 특징적인 의식형태는 엄청난 수의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기보다는 프티부르주아적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과 독립성을 열망한다. 욕망의 기본 목표는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가족기업이다. 경제의 핵심적인 불행은 기회와 수단의 부족으로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와 생명의 엄청난 저량(貯量)을 거부하고 통제하고 위축시키면서 탕진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에서도 대량생산은 자립과 주도성의 세계로 진진입하려는 후보자들 중에서 소수만을 채용해왔다. 대량생산과 제조업의 제휴와 표준화의 이면으로서 대규모 대량생산에 대한 의존은 대량생산이 다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고립적이고 일천한 전위주의의 엘리트주의적 제약 아래에 있는 것으로 현재 알려진 지식경제는 이와 같은 내재적 제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적이고 심화되는 지식경제로 가는 경로는 고단하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에서 광범위한 경제성장을 위해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를 활용하려면 두 가지 문제, 즉 정치적 전략적 문제와 개념적 제도적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전략적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기획을 자신의 대의로 삼는 좌파가 소생산자계급과 이들의 물질적 야망과 도덕적 태도를 공유하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이다. 좌파들은 이러한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이러한 계급의 관점에서 만나고 이 계급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는 형태들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신에 전통적으로 이들을 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이는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러든지 혹은 말로만 그러든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게 고립되고 후진적인 가족기업이라는 기본형태 이외에도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제공해야할 필요성이다. 그것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조건에 대한 나의 앞선 논의에서 제시한 의제이다. 이 의제는 시장질서의 제도적 재구축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처음에는 생산자원의 접근 수단을 적절하게 수정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분권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조정을 형성하는 법적 혁신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분권화된 경제주체들이 사회의 자본자원을 이용하고 서로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들의 근본적인 확대와 다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예증된 세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에 봉사하도록 시장질서의 쇄신을 시작할 제도적 기제가 단편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제도적 기제의 부분들은 모든 주요 경제에 존재한다. 제도적 쇄신작업은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브라질 정부와 심지어 지역 주정부들도 내가 앞서 설명한 제도혁신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요구된 다수의 기구들에 의존할 수 있다.

즉 개발은행들, 자신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조직들, 개발도상국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업들이 보유한 수용의 여건과 역량에 기술을 적응시킴으로써 기술의 개발과 전수를 목표로 한 기구들, 선진적인 제조업을 전담하는 지원센터와 학교를 포함하여 기술학교들의 준정부적인 네트워크 등에 의존할 수 있다. 여전히 결여된 요소는 이러한 도구들을 종합하고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에 복무하도록 활용하는 방식이다. 접근형태들을 조정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보다는 대량생산이 절정에 이른 이후에 일어나는 발전경로에 관한 지도적인 이론적, 프로그램적 견해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차대하다.

이러한 발전의 딜레마는 진짜 딜레마가 전혀 아니다. 이 딜레마의 한축(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권고한 경로를 계속 따라가고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개발도상국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도달지평으로 수용하라는 선택지)은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놓는다. 딜레마의 첫 번째 축이 제공하는 것은 기껏해야 미래의 전망이 없는 현상유지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접근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견해가 없으므로 이러한 후방진지는 현실주의라는 부당한 평판을 획득한다. 이러한 후방진지는 익숙한 것에 대한 공상적 견고함에 의존할 수 있다. 21세기 초에 부유한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쇠락하는 대량생산을 국내외 경쟁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일이 우파 포퓰리즘과 동시에 전통적인 사민주의의 경제프로그램의 큰 부분을 이루었다.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영향은 이윽고 정신적 식민주의의 확립된 작동기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서 그 위신을 높여왔다.

이 딜레마의 다른 축(개발도상국의 여건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지식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러한 대안을 실천하는 열쇠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조각들로 분해하고 이를 단계별로 실천하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요건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실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중에 지도를 수정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궤도를 따라서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은 이 경로를 여행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거의 항상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식]경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가장 부유한 국가들보다 주요한 개발도상국에서 더 제한적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주장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야 다른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비교해 보자. 마르크스의 추론은 경제사회의 조직형태들이 단선적인 진화적 계기를 이룬다는 동일한 가정에 의존하였고, 이러한 가정이 그의 모든 사회경제이론을 고무시켰다.  오로지 선진경제들만이 불가피한 여정의 모든 단계들 완성하였을것이기 때문에 선진경제들은 역사가 지정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상대적 후진성의 조건에서 수행된 이행은 과정과 결과에서도 이론이 제시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서유럽에서 착수된 혁명적 사회체제들의 짧은 경험들이 보여주었듯이 선진경제국에서도 이행은 그러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주변부 경제에 대한 중심부 경제의 우위성 관념은 도전적인 교란이 유발하는 독보적인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관념은 다른 곳에서 수입된 제도적 안배들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달리 이곳에서 기능하지 않았고 기본적인 필요나 높은 희망을 충족시키지도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안배들을 거부하는 데에서 나오는 장점을 깨닫지 못했다. 중심부 경제에서 더욱 근본적인 대안들에 대한 개방성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 재앙의 자극이 없다면 점차 성취되기 어렵다고 드러났다. 그러한 자극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엘리트들의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연대는 역사적 기회의 창을 닫아걸고 중요한 대안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는 질서를 복원한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대체로 증명하였다.

다음 두 가지 요인들은 서로 결합하여 개발도상국들(특히 자신을 세계에서 지배적인 이익과 사상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라들)에게서 고립적 형태보다는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았다. 첫 번째 요인은 이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허약성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집단적 전제주의에 희생되거나 아니면 그 변혁적 잠재력이 북대서양 국가의 헌법적 안배들을 모방하면서 빠져나갔다.

두 번째 요인은 정신적 식민주의이다. 개발도상국의 지적 생활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가장 체념적인 나라들에서 우세한 사조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발전과 제도의 지역적 이단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제는 해독제가 겨냥하는 메시지만큼 그 목표에서 국제적인 메시지를 공식화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 정통[무조건적 수렴테제]에 맞서 이단들을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은 기존 생산형태의 한계점에 도달한 사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발전의 가장 믿을만한 공식[무조건적 수렴]이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응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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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8/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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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이러한 발전을 정치-경제적 기획으로서 상상조차 못한 것은 부유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국가의 정치에서 좌파와 우파에게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관념의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정치생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요인들과 계급적 이해관계만으로는 부유한 국가들에서 정치의 방향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러한 요인들이 성장을 어떻게 촉진시키고 불평등을 어떻게 줄이는지를 알아낼 수도 없다.

이러한 사회들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사회들의 역사적 경험은 관념의 형성적 역할과 관념 부재의 형성적 역할까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러한 역할의 실례로서 동시에 이 장에서 탐구한 여건들에 대한 배경으로서 미국과 여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집권한 진보파들과 개혁파들이 포용한 의제의 진화를 고려해보겠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협력자 다수는 제도와 정책에 있어서는 견결하고 진정한 실험주의자들이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은 변혁적 의제를 추구할 수 있는 비상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뉴딜의 제도적 실험주의는 연방정부와 대기업 간의 조정된 행동에 관한 조합주의적 관념을 그 조직원리로 삼았다. 이러한 조합주의적 관념의 주요한 목표는 시장질서를 민주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재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조정된 행동의 실천은 나중에 전시경제의 여건 아래서 극단적으로 계속되었다. 경제 회복과 재건에 대한 활기찬 가정들과 회복과 고용을 위한 많은 정책들의 세부사항에서 초기 뉴딜은 초기 나치 정권을 포함하여 같은 시대 다른 국가들의 정부가 경제 불황에 대해 취한 대응과 닮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은 그들이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때에는 필요로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싸워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권력과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민주당원과 독일 독재자는 모두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의 지배를 받았다. 조합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대안을 발견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뉴딜 정책의 발전에서 조합주의적 충동은 경제불안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한정하였다. (사회보장 프로그램은 그 가장 중요한 실례였다.) 경제불안에 대한 해독제의 제공은 전쟁과 전쟁경제 이후에 대량소비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들로 차례로 이어졌다. 대량소비로의 전환은 부채와 신용의 확대, 흑자경제와 적자경제 사이의 극명한 불균형, 그리고 대중적인 케인스주의의 정신에서 경기순환에 대응하는 경제운영에 의존했다.

궤도의 각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동일한 가정들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러한 가정들에 따르면, 국가는 시장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할 수 있고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이용하여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완화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은 시장체제의 구성적인 제도적 법적 안배들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배들은 원래 그대로이다.

지식경제의 포용적 형태의 발전에 유용한 사유는 이러한 가정들에 도전해야만 한다. 하나의 청사진이나 하나의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경로로 이해되는 법적 제도적 요건들은 이러한 대안의 조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이 경로는 정책적 아이디어들의 기성 재고를 구성하는 기획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경로는 재산과 고용의 법적 체제들에 대한 혁신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혁신들은 국가에 맞서 시장의 공간을 증가시키거나 축소하는 것 그 이상을 행한다. 그러한 혁신들은 하나의 시장질서를 다른 시장질서로 대체한다.

이러한 관념과 경험의 역사는 현대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의 담론형태를 설명하는 데 일조한다. 한동안 북미와 서유럽에서 통치 엘리트들의 지배적인 기획은 기성의 경제적 제도와 법을 거의 수정하지 않으면서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과 유럽식 사회적 보호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국가적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중요한 의제는 사민주의를 효율성과 공정성의 이름으로 더욱 “유연하게” 만들고 동시에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주된 방법은 안정적이고 자본집약적인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내부자와 현직자들을 보호하는 노동법을 고쳐서 실업자와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들이 어떤 특정한 직업보유에 의존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것이 되도록 이러한 권리들을 설계하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자는 주요한 제안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발생하는 이득에 비례하여 경제불안에 대한 보증수단들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종종 실현되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이러한 제안의 이행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흔히 있었던 것과 같이)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 아래서 행동하는 재정적으로 원활한 국가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성장은 경제 전반에 걸쳐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확산으로 가능하게 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요청할 수도 있다.

경제적 기회와 권한을 향상시키고 불안정고용과 투쟁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랑할 만한 종합을 사실상 후퇴시키는 가운데 사민주의를 공동화하는 것이다.

요원한 경제적 정치적 성취물이 아니라 생생하고 영향력 있는 관념으로서 포용적 지식경제의 부재는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에서 우파와 죄파 나아가 중도파에게도 정치와 정책을 형성하는 데에 조력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가 경제 침체와 불평등에 미치는 결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또한 이러한 부재가 경제정책과 경제성장의 현재 경로에 대한 대안들의 가정에 대해 미치는 효과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렇게 했다. 원리에서나 실제에서도 이러한 대안의 결여는 1930년대 위기에서 정부와 기업 간의 조합주의적인 조정 행동에 대한 발전된 대안의 빈곤이 야기한 영향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사민주의적이고 사회자유주의적인 중도파의 왼쪽에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주도에 대한 신뢰를 잃었지만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사민주의의 자유주의화가 진보파들의 역사적 목표를 완수하는 방법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인식하는 좌파들이 있다. 그 중도파의 오른쪽과 사회민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파의 프로그램의 오른쪽에는 우익 포퓰리즘이 존재한다. 우익 포퓰리즘은 중도파의 기획이 해결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거론조차 못했던 문제들과 열망들을 가진 노동계급 다수의 충성을 얻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우파와 좌파의 공유된 가정들을 고려하고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대안을 인정함으로써 이들 간의 논쟁이 변화될 수도 있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첫째로, 19세기 이래로 고전적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세력도 여전히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변형들”에 대한 문헌에서 탐구된 차이들과 같이 매우 제한된 범위의 변형만을 허용하는 안정적인 법적, 제도적 건축구조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초기 단계를 넘어 발전을 이루려면 제산체제와 자유노동의 법형식에 대한 혁신뿐만 아니라 국가 또는 국가가 수립한 분권적 기구들이 기업과 함께 작업하고 기업들이 서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조건들을 규정하는 안배들과 같은 근본적인 안배들에 대한 혁신까지 요구하지만, 앞서 말한 좌파와 우파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을 아예 배제한다.

둘째로, 현대의 진보파들과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대안적인 시장체제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해 변혁적인 접근법을 가질 수 없다. 진보파들은 대체로 보수파들에게 공급측면을 내주고 수요지향적인 정책의 우선성에 전념해왔다. 공급측면에 대한 전통적인(고전적 자유주의적인 또는 신자유주의적인) 보수파들과 포퓰리스트들의 기획은 그들이 자명하다고 여기는 법적 제도적 내용을 가진 시장질서를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제도들을 재편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으로 낙인찍고 시장을 억압하는 것과 이를 쇄신하는 것도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시장체제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셋째로, 구조적 대안이 없는 경우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대량생산을 선진적인 제조업과 관련된 서비스업(경제생활의 부분들에서 지식경제가 취하는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을 방어하는 데 몰두한다. 스위트하트 약정은 해당 국가를 떠나거나 사업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기업들을 처리하고 무역 규제들도 동일한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의 방향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더욱 발전된 후속 형태로 만들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서 대량생산을 지지하는 것과 포드주의 제조업의 사후세계를 사라진 대안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계속 누리고 있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철지난 포드주의 대량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동일한 이유로 [선진국에서도]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정책이다.

넷째로,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경제성장의 기본전략으로 금융완화정책(중앙은행이 시행하는 확장적 통화정책)의 사용을 묵인한다. 정부활동에 대한 재정적 제약은 확장적 재정정책의 역할과 특히 경제의 물리적 기반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의 전망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금융완화정책은 잃어버린 경제성장 전략을 대신할 수 없다. 성장과 고용을 촉진하는 금융완화정책의 효과는 곧 소진된다.

경제활동 규제의 범위, 공공 서비스와 사회적 권리들의 수준, 금융조달 및 재분배적 특성, 누진세의 미덕, 심지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공적자원과 정부시책의 이용과 관련하여 이러한 좌파와 우파의 차이들은 실질적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립과 실행에 이르면 그 차이들은 정도의 문제로 내려앉는다. 내가 열거한 실천적인 정치경제학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차이들의 의미를 제한한다. 공유된 가정들은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확보 실패가 공유된 가정들의 호소력을 떨어뜨리는 상황에서도 경제적 유연성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고 사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적 프로젝트의 생명력을 갱신한다.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지평 축소는 그 의미를 해명해주는 역사적 배경(20세기 중반의 사민주의적 타협안과 타협 조건들에 대한, 내가 말한 중도파, 좌파, 우파의 재론실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타협안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란스러운 시기에 예견되었고 대전 직후 30년 동안 마무리된 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의 조건 아래서 생산과 권력의 조직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세력들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했다. (혹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은 국가정치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대가로 국가는 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하고 누진적 과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며 경기순환에 맞서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사용하여 경제불안을 완화시킬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시장질서를 새로이 상상하고 만들려는 시도의 완전한 포기는 하나의 관념 그 이상으로 변하였다. 그러한 포기는 이러한 나라들에서 제도나 관행 나아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경제적 교리로 정립되었다. 그러한 포기는 내가 말한 중도, 진보, 보수적 입장들의 제도적, 이념적 맥락을 규정했다. 이러한 입장들의 전제들은 각 입장의 가정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러한 타협안의 제도적, 이념적 여건들 안에서 해결될 수도 없고 심지어 거론조차 될 수도 없다. 그러한 문제들을 거론하고 해결하려면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제도를 혁신함으로써 사민주의적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적 변화가 일상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급진적인 프로그램적인 의제들이 상상하듯이 하나의 확정된 제도적 체제를 다른 제도적 체제로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선진부문과 후진부문 간에 경제의 계층적 분할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분할은 대다수의 근로자와 기업이 더욱 생산적으로 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기반을 파괴한다. 역사적인 형태이든 최신의 자유화된 형태이든,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선진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사정은 그러한 사회의 현재 정치생활에서 매우 특징적인 좌절, 즉 노동계급 다수에게 자신의 이익과 열망이 희생당해 왔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바로 여기에 세계 최고 부국들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의미가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가정과 제안들은 이러한 중도파, 좌익, 우익 진영의 그것과 차이를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만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응답을 제공할 수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20세기 중반의 타협안이 배제한 것(시장과 국가의 관계에서 행동의 여지를 다소간 부여하기보다는 시장을 규정하는 안배들을 쇄신하려는 시도)을 고수함으로써 이러한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 그 이상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에서 하나의 입장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와 같은 정치경제학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세 가지 연결된 주제들 중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나머지 두 주제는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 나아가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재정은 나쁜 주인보다는 좋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재정은 스스로에게 봉사해도 무방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생산적인 의제들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을 위한 자금조달은 현재로서는 자본시장 활동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장차 주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지식경제는 단순히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기획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급진적 혁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수단과 긍정적인 수단을 둘 다 활용함으로써 이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산출물 증가와 생산성 향상에 그럴 듯한 기여를 하지 못하는 금융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부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을 생산으로, 특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로 연결시키고 자본에 대한 접근과 첨단 기술, 관행, 지식에 대한 접근을 조합하는 안배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긍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지식경제가 갇혀 있는 고립적 전위부문들 바깥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노동의 지지를 강화하는 일련의 제도적, 법적 혁신들이 필요하다. 노동수익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진시키는 데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더욱이 노동의 권한을 강화하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더욱 확산된 형태가 간직한 경제적 잠재력은 자산 소유자의 재정적 이익이나 경영자의 권력적 이익에 희생되지 않게 된다. 심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자유노동의 여건에서 번창한다. 한마디로 더 자유롭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포용적인 지식경제의 법적 제도적 요구사항들에 대한 나의 논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요구사항들의 함축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우리는 생산의 재편이 세계경제에서 분산적인 계약상의 안배들과 노동과 세금 차익에 근거하여 노동력의 점차 많은 부분을 불안정한 고용에 내모는 것을 저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공장제 대량생산(민간고용)과 행정적 포드주의(정부고용)의 상황에 부응하는 기존 노동법 이 외에 새로운 생산의 현실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제2의 노동법을 만들어야 한다. 제2의 노동법은 시간제 업무, 임시적 업무 및 하도급 업무 혹은 임노동자가 누리는 보장과 혜택도 갖지 못한 임노동의 변형으로 수행된 비자발적인 자영업 등 변칙적인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대표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이 적절하게 조직 및 대표될 수 없거나 조직과 대표의 결과들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 제2의 노동법은 불안정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관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보호형식은 가격중립성이라는 법적 요건일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아래서 수행되는 노동은 안정적인 전일제고용체제 아래서 수행되는 가장 근접한 등가적인 노동과 최소한 동일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 즉 독립자 영업과 협동조합 또는 동업관계에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노동은 장기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진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이 자원의 대규모 집적의 요구[규모의 경제]와 양립할 수 없다면,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자유노동의 지도적인 형태가 될 수 없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 즉 재산 및 계약 체제에 대한 혁신이 없다면 그러한 요구와 화해를 이룰 수 없다. 전통적인 통일적인 재산권은 분산적인 경제적 주도권을 조직하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재산과 계약에 관한 대안적인 사법체제들은 동일한 시장경제 내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해야만 한다.

지식경제의 보급되고 급진화된 형태의 확립, 금융을 생산에 더 훌륭하게 가동하기 위한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재편, 불안정노동의 보호에서 시작하여 자유노동의 고차적 형태인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으로의 전진 등이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자유사회주의와는 다른 대안의 핵심이다. 이러한 방안들은 20세기 중반에 자유화된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는 과업, 즉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경제의 계층적 분할로 인한 불평등을 해결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의제의 주요한 축들을 규정한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은 초기 단계들을 넘어 전진하려면 이 책의 앞부분[특히 제3장과 제4장]에서 논의된 사회, 정치, 문화에서의 여타 변화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첫째로,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이러한 의제는 의제에 합당한 역량을 갖추려면 기계와 백과사전으로서의 정신에 맞서 상상력으로서 정신을 지지하는 교육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의제는 모든 문화영역에서, 심지어 경제활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도 실험주의의 강화에 의지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 경험의 지배적인 성격은 발견에 대한 제약들과 함께 경제적 재건 프로그램을 압도하고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둘째로, 이러한 의제는 사람과 그 능력에 대한 투자라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최대 유산을 포기하기보다는 발전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적 포드주의(표준화된 공적 서비스의 관료적 제공)를 고수하는 것과 계약을 통해 공적 서비스를 이윤 추구 기업으로 이전하는 것 사이에 양자택일적으로 체념해서도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공적 서비스의 제공은 광범위한 협력적 활동을 통해 정부와의 협력관계에 시민사회를 참여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을 쇄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법적 제도적 형식에서도 혁신을 이루어야만 한다.

셋째로, 이러한 의제는 시장의 조직과 공적 서비스의 제공을 위한 안배들을 포함하여 사회의 기성구조를 압력과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 고에너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위기를 변화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구조변화를 일상적 경험의 평범한 연장으로 만든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우리가 사회와 경제의 형성적 안배들과 가정들을 부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로 바꾸도록 허용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온도를 높이고 정치의 속도를 촉진하는 정치 제도 하에서 그렇게 한다.

심화되고 보급된 지식경제, 변증법적인 교육, 공적 서비스 제공에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한 시민사회의 자체 형성, 고에너지 민주주의 등은 상호보완적인 기획들이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서든 진전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우리의 진전이 제약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기획들은 어떤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상황과 선택은 다른 전선에서 전진의 실패로 부과되는 제약조건에 봉착하기 전에 어떤 전선들에서 우리가 먼저 전진해야 할지를 정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의 과정에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모든 도덕적 이익뿐만 아니라 물질적 이익도 상당한 경제적 침체와 무력화의 상황에서는 달성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경험, 권능, 보수를 공유할 기회를 거부한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치에서 좌파, 우파, 중도파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중적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환상적인 비제도적인 지름길로서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사고와 행동 형식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생산역량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이익과 행위주체성(개인들로서, 나아가 국가의 보호 아래 조직된 사람들로서 경제와 국가의 기성제도에 대해 작용하고 혁신하고 형세를 전환시키는 우리의 능력)의 고양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이익을 연결시킨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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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8/2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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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개발도상국이나 세계 최고 부국의 실천적인 전망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경제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인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 대한 확산된 지식경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명료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경제의 경제적 성장과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 후반의 한계주의 전향 이래로 주류의 경제적 사유는 시장의 작동방식에 결함이 없는 경우 수요와 공급은 서로 조정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결함은 완전경쟁에서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함들이 없는 경우에 수요와 공급은 균형에 이를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 과정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 인간의 노동을 포함해서 자원들이 가장 효율적인 용처들에 투입되는 것을 보장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에 따르면 공급과 수요의 각 원천들은 수요와 공급이 상호 조응하게 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기제에 대한 이해와는 관련이 없다. 공급이나 수요의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시장 지배력뿐만 아니라 정보를 포함한 어떤 차원에서도) 완전경쟁의 실패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방해하지 않는 한 수요와 공급은 결국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서로 조정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 아래서 우리는 수학적 표현을 이용하면서 수요와 공급을 각기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정량으로 상상한다. 이제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에 대한 수학적 분석과 수요와 공급의 확장이나 축소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구별할 수 있다. 우리는 경제학의 개별적인 분야들, 특히 경제성장 이론과 경기순환 연구나 더 일반적으로 (그런 분과가 존재 한다면) 경제위기 연구에 인과적 탐구를 할애할 수 있다.

나는 공급과 수요에 대한 사유의 또 다른 방식, 즉 포용적 전위주의를 제안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지식경제와 그 미래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을 밑받침하고 있는 일부 가정들을 명료화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견해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까지 희망할 수 없지만, 이러한 견해가 경제사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많은 부분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측면 중에는 지식경제의 진화와 현재 상태와 관련되는 측면들도 있다.

모든 일반적인 견해와 마찬가지로 내가 개략적으로 제시한 견해도 직접적인 경험적인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가 경험적 도전에 난공불락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사실문제에 대한 결론들에서 넓은 주변부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러한 주변부에서 반증가능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관념들이 있다.

첫 번째 관념은 경제성장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인 돌파구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장이 지속되기 위해서 경제의 수요측면에서의 진전은 공급측면에서의 상응하는 진전을 만나야만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도 이와 똑같은 관념을 통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접근은 특정한 시장의 불완전성이 가로막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에서 공급측면의 진전과 수요측면의 진전 간의 일치가 자동적이라고 표상한다.

우리가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에 붙잡혀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하나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공급의 증가가 수요의 증가를 창출하고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유발한다면 공급과 수요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아야 한다.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지금까지 경제생활에서 보편법칙의 배역에 가장 그럴 듯한 후보자)이 경제적 침체를 충분히 해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혁신들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주류사고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관념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확장하는 방법들은 다양하다. 각 방법은 각각의 작동방식과 그 잠재력과 한계와 같은 각기 고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경제의 수요나 공급측면에서 확장을 지속시키는 이와 같이 특징적인 방식들은 각기 다른 파급 범위, 유효성과 지속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식은 다른 방식보다 더 일천하고 더 단명하다. 어떤 방식들은 신속히 소진되지만 다른 방식들은 자체 보존적인 성격을 더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들은 경제주체들의 역량과 경제적 제도와 관행에 대해 더 변혁적인 효과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양상들을 계층으로 배열할 수 있다. 마치 이러한 확대양상 중에서 하나의 양상이 지닌 잠재력을 소진시키고 나면 다음 양상으로 이행이 보장되는 듯이 하나의 양상에서 그 다음 더 강력한 양상으로의 직접적인 혹은 자동적인 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공급이나 수요를 증가시키는 하나의 기초에서 계층적으로 우위에 있는 그 다음의 기초로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나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를 불연속적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관념들과 달리 공급과 수요의 단기적 부침들과 경제성장 및 경제침체의 원인들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연속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중에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위한 이와 같이 다양한 기반들을 개관하고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 잠재력의 역순으로 그러한 기반들의 순위를 매겨보겠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경제성장 메커니즘의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에 있어서 각각의 기반은 그 이전 단계의 기반보다 전도유망하다.

세 번째 관념은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이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진전과 공급이나 수요의 다른 측면에서의 진전 사이에는 자동적인 일치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수요를 지지하는 데에서 진전으로부터, 즉 이러한 진전을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또 다른 기초로 진전된다는 것(예컨대, 가계부채의 장려를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에서 누진세 및 사회 지출을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으로부터 경제의 공급측면에서 일치하는 진전(예컨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없는 공급 확대에서 그러한 혁신을 동반한 공급 확대로의 진전)을 달성할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타율성은 불연속성의 효과를 심화시킨다. 불연속성은 일면적이다. 불연속성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그 다음 더욱 효과적이고 변혁적인 기초로의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타율성은 양면적이다. 타율성은 경제의 한 측면(수요나 공급)에서의 진전이 다른 한 측면에서의 진전을 보증할 수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 관념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불연속성과 타율성이 경제불안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중단되기 쉬운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시장의 결함이 없는 경우에 공급과 수요는 상호조정을 거쳐서 자원과 노동을 가장 효율적인 용처에 배정하는 것을 보장한다)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공급확대와 수요확대 사이의 자동적인 일치의 부재가 경제불안의 제 1의 원인이라면, 경제불안의 제2의 원인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관계가 과부하상태이고 가변적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장의 다음 부분에서는 케인스가 매우 강조했던 이 관계의 측면(화폐가 중요하다)을 논평하겠다. 특정한 생산적 활동과 유리된 화폐시장균형들의 유동성은 그러한 균형들이 두려움과 탐욕, 절망과 희망과 같은 충동들의 유순한 도구로 복무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에 따른 이와 같은 화폐비축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가 보여주는 더욱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에 대해서 부수적인 사정일 뿐이다.

시장체제의 조직에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이 없는 것처럼 시장체제의 한 측면, 즉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형성에서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은 없다.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상이한 방식들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이완시킬 수 있다. 금융과 실물경제의 연결이 느슨해질수록 또한 실물경제의 거래가 더욱 금융활동의 참된 관심사라기보다는 그 구실이 될수록 그와 같은 금융이 폐해를 야기할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다.

부유한 국가들에서 현재 확립된 안배들 하에서 생산체계는 대체로 금융을 자체적으로 조달한다. 생산자금은 주로 기업의 재투자용 사내유보이익, 따라서 생산체계 안에서 창출되는 자금에 의존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을 창출하는 것(벤처캐피털 및 유사한 금융형태들의 관심사)은 금융활동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 1차적인 기업공개나 2차적인 기업공개도 금융의 비교적 작은 부분을 나타낸다. 이러한 안배들 아래서 금융은 좋은 하인보다는 나쁜 주인이 될 공산이 크다.

경제불안 혹은 경제위기에 관한 이론은 경제성장 이론의 이면에 불과하다. 경제불안과 경제위기에 대한 이론은 성장의 붕괴가능성을 다룬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시간에 맞게 동적으로 서로 조정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경제성장과 경제불안의 문제를 단기적으로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다섯 번째 관념은 만일 우리가 공급과 수요의 확대에 대한 제약들을 극복하는 방식들의 [단계]를 멀리 넘어 가서 이러한 제약들을 폐지하는 더욱 파급력 있고 더욱 지속적인 방식들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방식들이 공급을 증가시키는 데에 사용한 똑같은 수단으로 수요를 확대시키는 일단의 해법들(생산의 자원, 기회 및 역량에 대한 접근의 제도적 확장)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경제생활의 자연적인 상태로 상정하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은 실제로 경제조직의 예외적인 변형들(더 많은 경제주체들에게 생산적 활동의 수단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수요공급의 한계를 깨뜨리는 속성을 가진 변형들)이 가진 속성이다.

여섯 번째 관념은 다섯 번째 관념이 제시한 여건들 중 특히 유력하고 전도유망한 부분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집합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을 확장함으로써 수요공급의 제약을 깨뜨린다. 공급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경제의 가장 생산적인 분야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킨다. 수요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회고적이고 보상적인 재분배의 수혜자가 아니라 부의 창조자로서 그들이 생산에 기여한 부에 대한 몫을 청구할 지위를 부여한다.

이와 같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라면, 수요와 공급의 확대 잠재력은 특히 크다. 지식경제는 기술혁신을 영구화하는 경향을 띠고 생산과정에서 투입요소의 증가에 대한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을 완화시키거나 역전시키겠다고 약속하는 생산적 활동형태를 허용한다.

헨리 포드는 한때 노동자들이 포드사의 차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급여를 후하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물건을 사거나 포드사의 경쟁업체들이 만든 차를 구입하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포드의 발언으로 야기된 문제에 대하여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계약상 해결책은 없다. 제도적인 해결책 밖에 없다.

지식경제의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로서 포용적 전위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도적 해결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더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수요공급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들이 불완전경쟁이 가로막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일어난 다고 그릇되게 가정하는 것[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시장경제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달성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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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21/09/0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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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소득 기준 없이 모든 대학생에게 반값등록금 이행하라!

대학생·시민단체 등 국가장학금 확대·학자금대출 무이자 도입 촉구

대학등록금 부담 완화 요구하며 교육부 장관 면담 요청서 제출

 

대학생, 학부모, 교육 시민단체들은 오늘(9/26) 오전10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대학 등록금 부담 완화와 교육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국가장학금 기준 제한 개선, △국가장학금 예산 확대, △학자금 대출 무이자 도입, △등록금 심의위원회 구성과 운영방안 개선, △사립대학 관리 감독 강화,  △계열별 차등 등록금 완화 등을 요구하고, 유은혜 교육부장관에게 의견서와 면담요청서를 전달하였다.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했던 반값등록금 정책은 임기 절반이 지나도록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면서 여전히 고통스러운 고등교육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교육부가 보다 적극적인 고등교육 재정 확대와 진정한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해 나설 것을 촉구했다.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이민하 공동의장은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가 지난 7월 진행한 <2019 전국 대학생 설문조사>에 참여한 2,314명 중 1,563명이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등록금 인하라고 답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이민하 의장은 한국의 대학생들은 OECD 최상위에 달하는 현재의 등록금을 납부하지만 등록금심의위원회, 대학평의원회와 같은 의사결정구조 뿐만 아니라 학교의 ‘장’인 총장을 직접 투표로 선출하지 못하고 있고, 정부와 대학의 책임회피로 인해 강사 미채용과 수업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은 수강신청조차 못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학들이 학생들의 의견조차 듣지않고 ‘한국대학교육협의회와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에서 등록금 인상 규제 해소를 위한 태스크포스’를 꾸려서 등록금 인상을 추진하는 것은 학생들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민하 의장은 이후 전국대학생학생회네트워크는 등록금 인하를 위한 ‘2019년 대학생·청년 정책 논의를 위한 공동 설문조사 및 전국 대학 학생회 토론회’를 진행하고 국회, 교육부, 청와대 등 관계 부처에 대학생·청년 정책 논의를 위한, 고등교육의 변화를 위한 간담회를 제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예술대학생네트워크 신민준 집행위원장은 “고등예술교육 분야에 대한 혁신 요구는 지난 90년대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왔다”면서, 2017년 계열별 차등등록금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고 각 계열별로 등록금 산정근거를 공개하는 법이 발의가 되었지만 예술계열의 실험실습비 문제, 국가장학금 문제, 대학설립운영규정 미준수, 학자금 대출로 인한 과도한 부채 등 여전히 고등예술교육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규탄했다. 신민준 위원장은 예술대학생을 포함한 대학생들이 요구하는 고등예술교육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교육부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년참여연대 조희원 사무국장은 2018년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에 따르면  30대 미만 청년들의 부채가 1인당 2397만원에 달하고, 지난 1년간 학자금 대출 신청자 수가 2만명 가까이 증가했다며 청년 대학생·대학원생이 과도한 빚을 안고 사회에 진입하는 현실을 꼬집고 진정한 의미의 반값등록금이 실현될수 있도록 국가장학금 예산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최근 안산시, 여주시 등 지자체가 반값등록금 조례를 추진하여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기위해 나서고 있는데 이에 비해 정부는 반값등록금 공약 이행에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지난 7월 기준금리가 1.75%에서 1.5%로 인하되었지만 학자금대출이자는 여전히 2.2%로 높다고 지적하면서 학생들이 대출이자 부담이라도 덜 수 있도록 학자금대출 무이자 정책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대학공공성강화를위한대책위원회 김병국 집행위원장은 우리나라 대부분 대학은 대학 운영을 등록금에 의존하는 실정이며 교원확보율이 법정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교육 여건이 열악한데도 학생과 학부모는 비싼 등록금을 부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대학의 공공성 확대와 질 높은 고등교육을 위해서는 적어도 OECD 국가 평균 수준 이상 고등교육재정의 안정적 확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문재인대통령의 공약인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 제정을 촉구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와 입학금이 폐지되고 국가장학금 성적기준이 일부 완화되는 등 성과도 있었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의 대학생이 불합리한 성적기준, 소득기준 탓에 국가장학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감사원이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약 10만명의 대학생이 국가 장학금 신청기한을 놓쳐서 혜택을 못받고 있는만큼 본인들이 신청하지 않아도 국가장학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행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최근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청년층의 지지율이 낮아지는 것은 기대했던 것 만큼 문재인 정부가 고등교육비 문제에 대한 개혁조치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실망감이 반영된 결과라면서 문재인 대통령, 유은혜 장관이 고등교육비 문제만큼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끝으로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지난 3월에도 국회 앞에서 등록금 부담 완화와 대학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는데 하나도 개선된 사항이 없다며  분노를 표명했다. 이들은 대학등록금 부담 완화와 교육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고, 교육부 장관에게 의견서와 면담요청서를 제출하며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  

 


<기자회견 개요>

제목 : 성적·소득 기준 없이 모든 대학생에게 반값등록금 이행하라!

일시, 장소 : 2019. 9. 26(목) 오전 10시, 정부서울청사 앞

주최 : 반값등록금국민운동본부·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예술대학생네트워크· 민생경제연구소·대학공공성강화를위한·청년참여연대·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진행안

사회 : 김주호 참여연대 민생팀장

발언1 :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 이민하 공동의장

발언2 : 예술대학생네트워크 신민준 집행위원장 

발언3 : 청년참여연대 조희원 사무국장

발언4 : 대학공공성강화를위한대책위원회 김병국 집행위원장

발언5 : 민생경제연구소 안진걸 소장

 


▣ 붙임1 기자회견 개요

▣ 붙임2 대학 등록금 부담 완화와 교육 공공성 강화를 요구 의견서 

▣ 붙임3  예술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완화와 교육공공성 강화를 위한 학생 요구안

 

보도자료 https://docs.google.com/document/d/1KAlpD5TgAujtmDlVvhObVUWLIIN40JYSbl7o... rel="nofollow">[원문보기/다운로드} 



목, 2019/09/2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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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의 사학혁신 추진방안 발표에 대한 입장

 

18일 교육부가 ‘교육신뢰회복을 위한 사학혁신 추진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7월 발표된 사학혁신위원회의 권고와 시도교육감협의회의 제안, 2019년 교육신뢰회복 추진단의 활동성과 등을 토대로 마련된 것으로 사학개혁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속적 의지표명으로 풀이된다.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40% 이상이 사립학교이고, 특히 대학의 경우 87% 가까이가 사립대학이다. 이렇듯 사립학교는 우리나라 교육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고 정부에서도 매년 많은 예산을 투여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후진적인 사립학교의 비리는 수십 년 동안 끊이질 않아 왔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결국 학내 구성원들과 교육현장, 지역사회의 피해로 돌아오고 있다. 관할 행정기관의 관리 감독의 한계에 더해 사학비리에 유독 관대한 검찰이나 사법부의 법 적용 역시 사학 문제를 키우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교육부의 안은 사학개혁을 위해 교육시민단체에서 그 동안 요구하고 제시해왔던 대안 수준에는 다소 못 미치는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금 번 안에 대해 몇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나라 교육의 고질적 병폐였던 사학비리의 척결과 사학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점을 평가할 수 있다. 2년에 걸친 사학혁신위원회와 교육신뢰회복 추진단의 활동과 여러 의견 수렴과정 등에서 확인되는 부분이다.

 

금 번 사학혁신 추진방안은 사학개혁을 위한 이상적 목표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부터, 단계적으로 바꿔나가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일부 정치권과 사학재단들의 전 방위적 저항이라는 녹록치 않은 현실을 감안할 때 불충분하더라도 실현 가능한 것부터 우선 접근하는 방향은 필요해 보인다.

 

교육부의 사학혁신 추진방안은 행정기관에 의한 관리감독 강화와 법 개정의 두 가지로 사학개혁의 방향설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후 중장기적 정부 정책추진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교육비리의 근절과 사립학교 개혁은 정부 정책과 입법에 기댈 수만은 없는 과제다. 국민적 관심과 함께 향후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교육시민사회 진영의 부단한 노력도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립학교개혁과 비리추방을 위한 국민운동본부에서도 정부의 바람직한 정책 추진에는 아낌없이 힘을 보탤 것임을 밝힌다.

 

2019년 12월 18일

사립학교개혁과 비리추방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목, 2019/12/19-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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