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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민족 분열만 초래” 경찰 동원 강제 해산…푯돌마저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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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민족 분열만 초래” 경찰 동원 강제 해산…푯돌마저 ‘수난’

익명 (미확인) | 목, 2019/04/18- 20:10

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남대문로 반민특위 본부 터>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에 위치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 심장부
48년 제헌의회서 제정한 헌법기관
반민특위 터, 2017년 미 금융사에 매각
지상 18층짜리 호텔, 터파기 공사 중
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푯돌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임시 보관
49년 6월 이승만 지시받은 경찰이 습격

친일 청산, 좌우 세력이 정치적 이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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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대문로84 옛 국민은행 명동 본점 건물이 호텔 신축을 위해 철거돼 사라졌다. 이 건물 지하주차장 모퉁이에 있던 반민특위 푯돌은 용산구 청파동2가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자리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구 남대문로84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제정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발족한 헌법기관이다. 1949년 8월 활동을 마칠 때까지 당시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을 독립 청사로 썼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전력 서울본부와 SK네트웍스 빌딩 바로 다음 건물이다. SK 명동 빌딩과 이비스(ibis) 앰배서더호텔을 지나면 명동 입구에 닿는다. 조선 건국 이래 광통교 아랫동네는 종각~을지로 입구~명동~숭례문을 잇는 남대문로 상의 최고 상권이었다. 길 건너편은 소공동 옛 반도호텔(롯데호텔)~옛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남대문로는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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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청사로 쓰였던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

반민특위 터는 철거돼 사라졌다. 사방에 둘러쳐진 가림막 안을 가만히 엿보니 텅 빈 터에 터파기(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는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이고, 수시로 공사 굉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철거 안내문과 건축 허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가림막 앞 보도에는 ‘명동 국민은행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서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장소성이다. 대지 면적 2589㎡(783평), 연면적 2만6764㎡(8096평)의 이 건물은 2017년 마스턴투자운용과 미국계 대체투자 운용사인 안젤로고든에 240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하 3층~지상 18층짜리 고급 호텔과 상점이 들어서면 남대문로의 풍경을 또 한번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반민특위 푯돌은 보이지 않는다. 공사 전 푯돌은 은행 정문을 지나 명동7가길로 꺾여 돌아가는 건물 주차장 입구 모퉁이에 엄전하게 있었다. 본래 이곳은 체포된 부역자를 가두던 유치장 자리였다. 1999년 푯돌 건립 당시 관계 기관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라면서 난색을 보였기 때문에 정문을 피해 유치장 터로 밀려난 것이다.

푯돌은 어디로 갔을까? 굴곡진 반민특위와 푯돌의 행로가 오버랩되면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말 푯돌 순례자의 두 눈으로 확인한 푯돌에는 ‘이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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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명동 지점이 철거되기 전인 2018년 9월 촬영한 반민특위 푯돌.

철거 과정에서 이 은행 지하주차장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푯돌의 행방이 묘연하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빌딩 1층 화단에 세웠으나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차례 다른 자리로 전전한 끝에 얻은 안식처였다. 그러나 푯돌의 옆면과 뒷면을 모퉁이에 바짝 붙여 놓아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푯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안팎곱사등이(가슴과 등이 병적으로 튀어나온 사람) 푯돌 신세가 처량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확인해보니 이번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면서 오갈 데가 없어 용산구 청파동 2가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언론인 정운현의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에 따르면, “반민특위 사무실은 1층과 2층 각각 100평 정도의 공간이었고, 1층에 칸막이를 만들어 제1, 2, 3조사부와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다. 김상덕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했다.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다. 반민 피의자의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해 총경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47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원들은 1층 구석 칸막이방을 사용했다”는 구술이 나온다.

업무 공간이 다소 좁아서 불편했지만 입지는 최고였다.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친일 명사들을 보려고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 의원)와 특별재판부(부장 김병로 대법원장), 특별검찰부(부장 권승렬 법무장관) 등 거국적인 조직을 갖췄다.

‘백화점 왕’으로 군림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일본 관동군 첩자 노릇을 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춘원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비롯해 수도경찰청(서울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 친일 경찰 간부를 체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총 688명을 조사해 408명에게 영장을 발부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으며 221건을 기소했다. 이 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 7명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36년간의 식민 시기에 부역한 7천여 명에 이르는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해, 심판하겠다고 요란하게 출범한 것치고는 초라한 결과였다. 나치 독일에 5년간 점령당한 프랑스가 부역자 1만 명을 사형에 처하고, 10만 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례와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일파 처벌은 저주와 속박의 굴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드골 군대와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함께 점령군 자격으로 파리에 입성해 나치 협력자를 처단했지만, 우리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 기백명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을 뿐이다. 독자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맞지 못한 원죄가 앞을 가로막았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 숙청은 군정의 업무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들에게 해방된 약소국의 민족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은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미국에게는 치안 유지와 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이 중요했다. 친일부역자 처단보다 공산 세력 척결이 시급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라”는 비밀 지령을 좌익 세력에게 내려보냈다. 미국과 소련 양 대국에게 친일파 청산은 체제 경쟁용에 불과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의 백주 반민특위 테러 사건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반민특위는 힘을 잃고, 해체 과정을 밟게 된다. 1949년 6월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 대통령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6월9일자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셈이다. 지독한 반미·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의중과 맞아떨어졌다.

이 대통령은 “국내 기반이 없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친일 세력이고,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 부역자 처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경찰과 군 간부 대부분이 친일 부역자였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1946년 11월까지 경찰 간부 비율을 보면 경위 이상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였다. 하위직의 30%도 경력자였다.

군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군의 요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무엇보다 반민법 제5조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반민법은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숙명적 대결을 예고했다.

지금 우리에게 반민특위는 역사 교과서 속 교훈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도 좌우익 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 그 기회를 놓쳤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민족 통합의 좌절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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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 이전된 반민특위 푯돌.

반민특위 푯돌을 잘 보관 중이라니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서울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신축 과정에서 갈 곳 없는 푯돌을 시청 창고나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넣어두진 않을 터이다. 건물 옆 다른 자리에 임시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원위치하는 순서를 밟는 게 이치다.

그렇다면 혹시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간 단체이기 때문에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반민특위 푯돌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 신축 이후 푯돌이 제자리로 돌아갈지 장담 못한다고 한다. 반민특위 푯돌이 일본인 관광객 유치와 국민 통합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으려 한 권위주의 시대 관계 당국의 판단 착오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푯돌이 반드시 돌아와 반민특위 유치장이 아닌 정문 앞에 당당히 자리잡길 바란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19-04-18>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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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발표한 국정역사교과서 집필진 가운데 근현대사를 전공한 현직 역사교수는 1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현대사 부분을 담당한 집필진은 현대사 전공자 없이 대부분 법학과 정치학, 경제학 전공자로 구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교과서 발표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역사교과서 집필진은 현직 대학교수 12명과 중고등학교 교사 6명을 포함해 모두 31명으로 구성됐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논란이 됐던 근현대사 집필진에 현직 역사교수의 참여가 극히 저조하다는 것이다. 근대 3명 현대 6명의 집필진 가운데 역사를 전공한 현직 역사교수는 한상도 건대 사학과 교수(근대) 1명 뿐이었다.

한상도 건대 교수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을 주로 연구한 근대사 전공자로 현 국사편찬위원이기도 하다. 한 교수는 지난해 11월 뉴스타파가 근현대사 전공 현직교수 7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당시 국정화 반대 성명에 참여하지 않은 3명 가운데 1명이었다.(관련기사: 국정화 반대하지 않는 근현대사 전공 교수는 3명뿐)

특히 현대사 집필진 6명의 경우는 법학 전공 1명, 정치학 전공 2명, 경제학 전공 2명, 전쟁사 전공 1명 등 엄밀한 의미에서의 현대사 전공자는 1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또,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해당 분야의 권위자가 참여했다는 교육부의 설명과 달리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가 대거 집필진에 포함됐다.

현대사 집필진 가운데 김명섭 교수와 나종남 교수, 세계사를 맡은 이주영 교수는 뉴라이트 인사들로 구성된 현대사학회 회원이다.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현대)는 지난해 11월 ‘근현대사는 역사학자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문화일보 칼럼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면서 5.16군사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정경희 영산대 교수(세계사)는 기존 검정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고 북한 교과서를 베끼는 등 편향됐다고 주장했던 인물이고,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조선)은 대표적인 교학사 역사교과서 필진으로 강원대 사학과 교수 6명 가운데 유일하게 국정교과서 반대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현대)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하는 민주평통자문위 수석부의장의 신분으로 최순실게이트가 터지고 난 지난 10월 26일 ‘박근혜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하자’는 글을 SNS에 올려 물의를 빚기도 했다.

집필진 가운데 최성락,손승철, 한상도,유호열, 정경희 등 5명은 현 18대 국사편찬위원이다.

국사편찬위는 지난 3월 기존 위원 16명 가운데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했던 편찬위원 9명을 배제하고 찬성 인사들을 새로 편찬위원으로 위촉했는데 한상도, 유호열, 정경희 등 3명이 이때 새로 합류한 인사들이다.

분야 성명 전공 현직 직함
선사/고대 신형식 사학 이대 명예교수
선사/고대 최성락 고고학 목포대 고고학과 교수
선사/고대 서영수 동양사 단국대 명예교수
선사/고대 윤명철 사학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
고려 박용운 사학 고대 명예교수
고려 이재범 사학 전 경기대사학과 교수
고려 고혜령 사학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조선 손승철 사학 강원대 사학과 교수
조선 이상태 사학 국제문화대학원 대학 석좌교수
조선 신명호 사학 부경대 사학과 교수
근대 한상도 사학 건국대 사학과 교수
근대 이민원 한국학 동아역사연구소 소장
근대 김권정 사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현대 최대권 법학 서울대 명예교수
현대 유호열 정치학 고대 북한학과 교수
현대 김승욱 경제학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현대 김낙년 경제학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현대 김명섭 정치학 연대 정외과 교수
현대 나종남 사학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
세계사 이주영 사회학 건대 명예교수
세계사 허승일 서양사학 서울대 명예교수
세계사 정경희 동양문화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세계사 윤영인 일본사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세계사 연민수 사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현장교원(선사/고대) 우장문 사학 경기 대지중 수석교사
현장교원(고려) 김주석 사학 대구 청구고 교사
현장교원(고려) 유경래 역사교육 경기 대평고 교사
현장교원(근대) 정일화 역사교육 전 강원 평창고 수석교사
현장교원(근대) 최인섭 역사교육 충남 부성중 교장
현장교원(근대/현대) 황정현 역사교육 충남 온양한올중 교사
현장교원(세계사) 황진상 역사교육 서울 광운전자고 교사
월, 2016/11/2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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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백년은 이달 29일(목) 저녁 7시반, 국민TV 지하 카페(웰빙센터 지하)에서 제 8회 백년포럼을 개최합니다.

유난히 더웠던 2016년 여름이 지나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이 좋은 날씨와 더불어 역사학자이신 이병한 박사를 모시고 ‘다른 백년’인가, ‘다시 백년’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립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이병한 박사의 유라시아 현장 보고를 들어주시고 토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 2016/09/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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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 군국가요 작곡한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 내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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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 화면 갈무리. 이날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대중음악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의 성격상 KBS가 자료 검토 및 선곡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친일 행적이 있는 음악인의 노래를 선곡해 방송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에선 가수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이날 하은은 425표를 얻어 1승을 거뒀다. 하은의 열창과 탈북 청년들이 고향을 등지게 된 사연이 어우러져 뜻깊은 무대가 됐다.

그러나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1급 친일 작곡가의 곡으로 알려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방송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이 만든 노래다. 박시춘은 평생 동안 3000여 곡을 작곡, 이 가운데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신라의 달밤’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원 혹은 밀양보전을 졸업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밀양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대중음악계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82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시춘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중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1등급’ 친일파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인들을 징용·징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38년부터 지원병 제도를 실시,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에 동원했다. 1943년 공표되고 이듬해부터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서도 한국인들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입대를 기피하거나 거부하지 않도록 ‘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예술인들을 동원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천황제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영화와 가요를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적극 호응한 이가 바로 박시춘이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는 박시춘의 친일 행위에 대해 “1942년부터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내용의 ‘고성의 달’, 1943년 징병제 실시 기념영화 주제곡 ‘조선해협’,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축하 특별 기획음반 수록곡인 ‘혈서 지원’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942년 죽음을 각오하고 승리를 다짐하는 군인의 모습을 묘사한 가요인 ‘아들의 혈서’, 1943년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후방의 여인 및 부모의 모습을 그린 ‘결사대의 아내’, 부상을 입었음에도 일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내용의 ‘즐거운 상처’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 1943년 산업전사위문격려위문예능대에 참여해 활동함”이라고 밝혔다.

위 <결정이유서>에 따르면,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는 이외에도 ‘낭자일기'(노래 남인수) ‘병원선'(노래 남인수) ‘아세아의 합창'(노래 김정구) ‘진두의 남편'(노래 박향림) ‘지원병의 집'(노래 장세정) 등 13곡이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는 군국가요 작곡가로선 최다 기록이다.

지난 2016년엔 밀양 출신인 박시춘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가 ‘박시춘 음악제’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친일파를 기리는 음악행사를 도비를 지원받아 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이 빗발치면서 밀양시는 박시춘 음악제 개최를 백지화 했다. 박시춘 외에도 안익태·현제명·홍난파·남인수·김기수 등 다수의 음악인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 행적이 확인된 바 있다.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국장 겸 친일잔재조사위원회 연구원은 11일 통화에서 “대한민국 100년 특집을 하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 나와서 내 귀를 의심했다”면서 “박시춘은 친일 전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동원의 제일선에 서서 징병 유도 가요를 만든 대중음악계의 일급 친일파”라고 설명했다.

이지훈 국장은 “화려한 친일행적을 가진 이가 (친일의 대가로) 평생 호의호식한 데다 대중음악계 최고의 별로 아직까지 자리매김한 것은 씁쓸한 현실”이라며 “관계자들이 자료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임정 수립 100년 특집에 나온 것도 우려스러운데, 우승을 했다고 해서 더 당황했다”고 개탄했다.

<2019-03-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절 특집’에 1급 친일파 노래를? KBS의 황당한 결정.

수, 2019/03/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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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연구소 국정교과서 토론회

정부는 지난 11월 3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습니다. 이로써 정부는 국정 교과서의 제작에 돌입하였으며, 고시대로라면 2017년도 3월부터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정부가 직접 편찬한 교과서로 한국사를 공부하게 됩니다.

정부는 국정화의 추진 근거로 “현행 검인정제도는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검인정제도는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어왔을까요? 정부는 제도의 운용에 대해서는 한마디 자성도 없이 실패를 단언할 만큼, 검인정제를 취지에 맞게 잘 운영해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근현대사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와 접점을 가지고 있는 일본, 그리고 분단의 경험을 공유한 독일 역시 역사교과서 검인정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나라의 검인정제도 운영 실태는 각기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학문과 교육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세 나라의 사례를 비교검토해보고 이를 통해 민주적인 역사교육의 방향과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공개토론회]

한국·독일·일본의 역사교육과 시민적 대안

 


 일시 : 2015년 12월 23일(수) 오후 4시~6시

 장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주최 :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사회

이병천 강원대학교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연구분과위원장

 

발표

독일의 검인정제도와 한국 역사 교육에 대한 시사점이동기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일본의 검인정제도 운영 실태와 한중일공동교과서의 사례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HK 연구교수
한국의 검인정제도 하 교육부의 개입과 국정화 논리의 실체김한종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토론

민주적인 역사교육제도의 방향과 사회적 합의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시민사회의 대응 방향과 대안교과서의 지향점 모색김육훈 독산고등학교 교사, 역사교육연구소장

 

151223_공개토론회_한국·독일·일본의 역사교육과 시민적대안

 

 

 

문의 : 참여사회연구소(02-6712-5248, [email protected])

수, 2015/12/2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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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메르스, 백남기. 지난 4년 동안 한국 사회는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늘 ‘창조’란 말을 반복했으나 오히려 ‘헬조선’을 탄생시켰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통합진보당 해산 등등, 박근혜 씨는 역사를 유신 시대로 되돌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현 직무정지)은 최순실 일당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게 나라냐”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안이 압도적으로 가결됐습니다. 수백만 시민의 촛불이 이뤄낸 한국판 명예혁명입니다. 한국 사회는 이제 4년 만에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캄캄한 터널에서 가까스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4년 동안 박근혜 정권을 다룬 보도 영상을 통해 우리가 지나왔던 암흑의 세월을 돌아보고, 다시는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금, 2016/12/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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