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 군수기업 후지코시 공장에 강제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이 회사 측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이 이번에도 피해자들 손을 들어줬다. 2016년 1심 판결 뒤 약 3년만에 항소심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7부(부장판사 이원범)는 30일 피해자 5명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낸 5억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 측 항소를 기각하고 “후지코시가 피해자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쟁점은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는지 여부였다. 또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 1심이 인정한 위자료 액수가 부당하게 과다했는지 등이다.
재판부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취지를 토대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후지코시 측 주장에 대해선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사유가 있었다”며 “그런 주장으로 손해배상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대법원이 2012년 판결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법리를 설시(說示)했다”며 “청구권 행사 장애사유가 소멸했다고 해도 그로부터 3년 안에 소송이 제기돼 적법하다”고 밝혔다.
1심이 인정한 위자료 1억원이 부당하게 많다는 주장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헤어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하고 혹독한 노동에 강제로 종사해야 했고, 불법행위 뒤 상당한 기간 피해복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사정 등을 고려하면 위자료가 과다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배척했다.
이번 소송에 원고로 참여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는 김옥순(90)·박순덕(87)·오경애(89)·이석우(89)·최태영(90) 할머니 5명이다.
이들 할머니는 강제노동 등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피해를 입었다며 2015년 4월 후지코시를 상대로 1인당 1억원씩 총 5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후지코시는 일제강점기 12~15세의 어린 소녀들에게 ‘일본에 가면 공부도 가르쳐 주고 상급학교도 보내준다’고 속여 힘들게 일을 시킨 대표적 전범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 11월 1심은 “증거를 종합하면 김 할머니 등은 당시 만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는데도 가혹한 환경에서 위험한 업무에 종사했다”며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이 경험칙상 분명하고 우리 민법에 따라 불법행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 일본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승소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수년 전 1심에서 이미 원고 승소 판결이 났으나 항소심에 와서 계류되며 피해자들의 기다림도 길어졌다.
이런 상황은 지난해 10월 일본기업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된 강제징용 피해자들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들 손을 들어주면서 전환됐다. 이후 멈췄던 후지코시 항소심 재판이 재개됐고 대법원 판례 취지를 반영해 잇따라 원고 승소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공동행동의 기자회견과 동시에 왕복 4차선 도로 대각선 맞은 편에서 맞불집회 하고 있는 보수단체 회원들의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태극기와 성조기 등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는 보수단체 회원들의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배재대학교에 서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 철거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에 반대하는 보수단체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타나 ‘맞불집회’를 열었다.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동상철거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백만 민간인 학살 책임자 이승만의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시작 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동행동이 기자회견을 예고한 11시보다 앞선 10시 30분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미 길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맞불 집회를 시작했다.
이후 보수단체 회원들과 공동행동 회원들은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욕설이 오가며 충돌 위기까지 치달았으나 경찰과 다른 회원들의 만류로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은 공동행동 측을 향해 욕설을 쏟아 부었다. 이들은 “이게 나라냐, 이 XX들아”, “양심도 없는 것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은 북에 가져다 버려야 한다”는 등의 험한 말을 쏟아냈다.
이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든 채 이승만 동상과는 관계없는 ‘박근혜 대통령은 억울하다’, ‘사기 재판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감옥에 갇혔다’, ‘문재인은 나라를 이 모양 만들었다’, ‘김경수는 내보내 주면서 왜 박근혜 대통령은 가줘 두느냐’는 등 정치적 발언을 쏟아 냈다.
오전 11시가 되자 공동행동 주최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이에 보수단체들은 스피커의 볼륨을 더 올려 구호를 외치는 등의 맞불집회를 이어갔다.
공동행동 발언자로 나선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오늘은 1960년 4월 19일 대학교수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날”이라며 “이승만은 친일 부역자들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삼아 독립운동가들과 양심적 정치지도자들을 고문하고 탄압했고, 심지어 암살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건전한 상식과 양심, 그리고 사회정의보다는 눈치와 아부로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위한 온갖 부정과 사기가 당연시되어 왔다”면서 “배재대학교는 대체 이런 인물의 동상을 세워 놓고 학생들에게 무얼 배우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강영미 대전참교육학부모회 대표도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인물의 동상을 세워 놓고 우상화하는 것은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는 헌법정신을 유린하는 것이며, 수차례 이승만 동상 철거를 요구해왔던 학생과 대전시민들을 우롱하는 참으로 비교육적인 처사”라면서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전국의 이승만 동상은 모조리 철거되어야 하고, 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묘소도 당장 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재대학교 졸업생도 발언에 나섰다. 2008년 배재대 졸업생이라고 밝힌 김상기 배재대민주동문회 회원은 “배재대학교는 자랑할 인물이 그렇게도 없어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 놓고 그를 기념하려 하고 있느냐”며 “이는 학교를 빛내는 게 아니라 먹칠하는 짓이다. 학생들이 동상 앞을 지나가면서 침을 뱉고 있는데, 왜 철거하지 않느냐”고 분개했다.
공동행동은 기자회견문을 통해서도 “배재대학교는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한 대한민국 최초 사랍학교인 배재학당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며 “따라서 배재대학교는 배재인만의 자랑이 아닌 우리 대전시민 모두의 자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러하기에 우리는 배재인의 수치이자 대전시민의 수치인 저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을 하루빨리 치워 주길 바란다”면서 “3.1혁명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용기 있는 결단으로 대전시민에게 큰 의미있는 선물을 안겨주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보수단체 회원들이 내걸은 현수막. ⓒ 오마이뉴스 장재완
이러한 공동행동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보수단체 회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와 ‘대한민국 만세’ 등을 부리며 집회를 이어갔다.
이들은 ‘배재대 우남 동상을 지키기 위한 자유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이날 공동성명서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고 조작하는 ‘역사청산’이 시도되고 있다. 4.3 남로당 봉기는 반정부 민주화 운동으로, 이승만의 자유공화국 건국은 건국에 반대한 김구의 ‘가상(假想)민족’ 국가로 둔갑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승만을 괴뢰로 단죄하고 묘를 파내라는 역사 날조가 공중파를 타고 있으며, 대전의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이란 단체가 민간 사립대 교정의 동상을 치우라고 행패를 부리고 있다”면서 “4.19 의거 59주기를 맞아 우리는, 이러한 ‘대한민국 청산론자’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자 한다. 자유와 번영을 구가해 온 대한민국에 청산해야 할 역사란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과 타협을 강요하는 미군정이나 초대국회의 내각제세력과 맞서 싸울 때 한 치도 물러설 줄 모르던 분이었고, 나라를 걱정하며 불의에 맞서 싸우다 부상당한 젊은 학생들의 용기 앞에서는 그들을 위로하며 스스로 권좌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며 “신생독립국 역사에서 그런 ‘독재자’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끝으로 “그런 그를 미국의 괴뢰로, 양민 학살자로 묘사하며 국립묘지에서 파내고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나 집단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며 “선대가 세운 기념동상을 철지난 이념의 노예들이 철거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대부분 가이즈카 향나무…이토 히로부미가 대구에 처음 심어 -경남교육청에 심어진 향나무 뽑아내고 소나무로 교체 -교체 강제할 순 없지만 교체 적극 권장할 계획 -친일 음악가 조두남, 창원에만 7개 학교 교가 제작 -일장기 모양의 학교건물도 남아있어 -일본 식민주의 사관 넘어 향나무 뽑는 실천부터
■ 방송 : 경남CBS <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경남교육청 중등교육과 이일만 장학관
◇김효영> 여러분이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요. 교가는 누가 만들었는지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분류하는 음악가가 만든 교가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교육기관 곳곳에 친일 잔재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종훈 경남교육감의 지시로, 경남교육청에서는 전수조사가 실시가 되고 있습니다.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전수조사를 맡고 계신 경남교육청 중등교육과의 이일만 장학관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안녕하세요?
◇김효영> 특별히 전수조사까지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서 우리 교육청 차원에서 일제 잔재 청산과 우리 얼 살리기 교육사업을 전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해서 한 번 실시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이 돼서 2년간에 걸쳐서 실시를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조금 전에 제가 교가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교가 말고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오래된 역사를 가진 학교들에서는 가보면 교장실에 역대 교장들 사진이 걸려 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김효영> 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거기에 보면 일본인들의 사진도 그대로 걸려 있기도 하고, 사진이 없는 학교라도 명패 정도라도 이렇게 걸려 있는 그런 학교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가 1910년에 한일합방을 시키고 난 뒤 모든 학교를 군대화하는 형태로 이뤄지면서 교원들에게도 제복을 입혔고 학생들에게까지 교복을 입혀서 통치가 이뤄지다보니까 아마도 교장들의 사진에서도 제복을 입은 것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김효영> 경남교육청은 향나무를 뽑았던데, 친일 잔재란 이유로. 학교 교목도 친일잔재로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교목 같은 경우는 가이즈카 향나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본이 원산지로 돼 있고, 나사 모양으로 뒤틀려서 자란다고 해서 나사백이라고도 하고, 한자로 표기하면 패총으로 표기가 됩니다.
◇김효영> 패총.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조개무덤. 일제 강점기에 학교나 관공서에 많이 심어졌고, 100여 년 전인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순종 황제와 함께 대구 달성공원을 찾아 기념식수로 처음 심었다고 전해지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 지난 3월 1일에 우리 도교육청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가이즈카 향나무를 뽑아내고 우리 소나무로 바꿔 심었습니다.
◇김효영> 사실 그런 향나무가 관공서에 많지 않나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고 표현을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김효영> 거의 다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렇습니다.
◇김효영> 이번 전수조사에 가이즈카 향나무도 포함이 되고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학교에 특히 향나무를 교목으로 하고 있는 학교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교체를 하라마라 강제성을 둘 수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교체를 할 수 있도록 권장을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우리가 흔히 보는 향나무는 대부분 가이즈카 향나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대부분 나무들이 보면 둥근 모양으로 돼 있는, 우리가 흔히 향나무 하면 떠오르는 그 나무들 거의 대부분이 가이즈카 향나무로 알고 있습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나무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에 앞서 말씀 드렸던 교가 문제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교에서 작사가나 작곡가 중에 친일 인물로 분류할만한 사람들의 작품이 많이 있습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저희들은 곳곳에 산재한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친일 작곡가, 작사가의 개념이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규정짓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저희들이 친일인명사전이라든지 그런 자료들을 통해서 파악을 했을 때, 오래된 역사들을 갖고 있는 학교들에 대해서는 특정인에 의해서 작사, 작곡된 교가들이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김효영> 장학관님께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가 대신해서 좀 말씀을 드리자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친일 작곡가로 분류되는 사람이 조두남인데요. 이 조두남씨가 창원에 있는 학교 7개 학교의 교가를 작곡을 했습니다. 창원의 성호초등학교, 온천초등학교, 완월초등학교, 합포초등학교, 내서중학교, 경상고등학교, 무학여고. 이렇게 7개의 교가를 만들었고요. 그리고 창원대학교 교가도 조두남씨가 작곡을 했던 겁니다. 참고하시면 되겠고요. 창원 지역만 제가 예를 들었습니만, 창원만 그렇지는 않겠죠?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다른 지역에 대한 부분은 지금 현재 조사 중이기 때문에 5월 정도 되면 전수조사 결과가 집계가 될 것으로 저희들은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서 말씀하셨던 조두남 같은 경우는 그때 당시에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 그래서 여러 학교에서 조두남 작사, 작곡의 교가가 있지 않나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나무나 교가 말고, 또 어떤게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학교 담부터 시작해서 화단 모양 이런 것에서도 일제 잔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함안의 모 학교 같은 경우에는 운동장 바로 옆에 건물이 하나 있거든요. 그걸 위에서 쳐다보면 일장기 비슷하게 된 그런 오래된 건물이 하나 지금도 있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김효영> 이렇게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무관심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무관심’이라는 표현 자체가, 있어 왔던 것에 대한 익숙함. 그래서 문제의식을 가지기 보다는 있어왔으니까 그대로 가는 그런 형태가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합니다.
◇김효영> 그냥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것이 일제 잔재였는지에 대한 고민도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김효영> 다른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라 역사를 배우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니까 그래로 둬서는 안된다는 결정을 하신 거군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렇습니다. 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면서 더욱 더 우리 도교육청에서는 우리 얼에 대한, 그리고 나라사랑 교육을 심어주고자 하는 교육감님의 뜻에 따라서 저희들이 그 부분에 대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전수조사를 한 다음에는 외부 전문기관의 도움도 받으시는거죠?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우선 전수조사가 끝이 나고 나면, 20명 안팎의 TF팀을 꾸리려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TF팀을 꾸려서 전수 조사된 내용을 충분히 분석을 하고 이 결과를 가지고 민족문제연구소나 다른 대학 등 전문기관에 의뢰도 하고 도움을 받아서 운영을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친일잔재 청산작업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이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호숫가에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서 물결이 파장이 일어서 변화가 나타나듯이, 이 일을 계기로 해서 그 동안 무심코 넘겼던 일제의 잔재라든지 어떤 흔적들,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습관들까지도 바꿀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일제의 잔재를 깨끗하게 없애버린다는 것 보다는,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이러한 것을 어떻게 현 시점에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정표의 기회가 분명히 일제잔재 청산 정책의 기본 취지라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적어도 알고는 있자는 겁니다. 기억하자는 것이고. 끝으로 한 말씀 하시고 오늘 인터뷰는 마치겠습니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본 사업은 지난 100년간 우리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함께 살아온 일본 식민주의 사관의 결과로서 이 100주년을 넘어 온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 속에서 사명감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작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청도 교목이나 교가 하나 바꾸는 것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 이상인 민주, 평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고 세계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리더십으로 거창의 미래를 바꾸겠습니다. 산업은 미래로 키우고, 농업은 소득으로, 교육은 희망으로, 복지는 삶의 품격으로 완성하겠습니다. 승강기산업 고도화 및 국방과학기술 육성으로 미래 먹거리와 고급 일자리를 확보하겠습니다. 지역 대학 및 특성화고 연계 산업 맞춤형 교육을 통해 청년이 돌아오는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스마트농업 확대, 신소득 작목 개발 및 가공 수출 플랫폼 구축으로 소득 중심 농업을 실현하겠습니다. 가조온천 활성화 및 실버웰니스·실버케어 산업 육성으로 관광·실버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일자리를 확대하겠습니다. 의료 복합타운 완성, 맞춤형 돌봄 강화 및 청년·신혼부부 주거 지원으로 보건·복지 여건을 개선하겠습니다. 달빛내륙철도 유치, 고속도로 조기 완공 등 교통 인프라 확충으로 물류 허브 거창을 만들겠습니다. 수요 중심 실무자 주도 행정, 공정한 인사, 예산 투명성 강화 및 군민 참여 확대로 행정을 혁신하겠습니다. '거창 파리장서 독립청원운동' 기념관 건립 및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 배상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겠습니다. 취수원 다변화 및 황강 취수 반대 입장을 견지하겠습니다.
민생 살핌 및 살림 정책 추진 창신 지역 특화 봉제산업 육성 및 제도적 지원 전통 시장(광장시장 등) 및 재래시장 육성 및 환경 개선 디자인 산업 지원 확대 및 패션/쥬얼리 인프라 강화 600년 역사 문화를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관광산업 조성 및 역사/문화관광벨트 구축 주민 삶 개선을 위한 새로운 정책 수립 및 사업 시행 교통과 상권 연계 정책으로 상권 교통 확보 및 강북~강남 광역 교통축 완성 교육 환경 개선을 통한 인재 유치 및 정주인구 증가 세대별 맞춤형 복지시설 확대, 어르신 쉼터 증설, 아동·청소년 돌봄 강화 친환경 사업 특화 지원 확대 및 골목길 노후시설 제거, 환경 개선 보행자 우선도로 및 스쿨존 안전 확대 안전하고 효율적인 교통 인프라 구축 및 교통영향평가 실시 스마트 신호등 시스템 및 AI 기반 CCTV 통합 안전망 구축 재난·화재 실시간 대응 시스템 강화 및 공사/하수/노후 위험시설 안전 점검 깨끗하고 아름다운 명품 문화종로 구현 및 골목 상권 활성화 종로 문화, 청년/창작/연극/공연 제도적 지원 교육특구 지정 추진 및 보육시설 확충 취약계층 아동 보육 정책 개발 및 AI 시대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 신혼부부 지원 확대 초고령화 시대 100세 복지 정책 개발 및 의료·건강 네트워크 구축
중랑을 명품교육, 복지, 역사, 문화의 중심지로 육성 신내 4공공 택지 및 도로 위 아파트 조성사업 원천무효화 전체 노인 월 30만원 노령수당 지급 및 노인 교통 복지 확대 소상공인 최저임금 5년 유예 및 중소기업 주 52시간 근무제 5년 유예 병역의무제 폐지 및 모병제 전환, 원자력발전소 확대 건설 지역 균형 발전 및 교통 환경 개선을 통한 새로운 중랑 건설
대규모 국책사업 유치 및 16조원 이상 투자 유치 구미-군위 고속도로 유치 및 광역 교통망 구축 도심 병목 해소를 위한 입체교차로 및 도로 확충 구미 브랜드 축제(라면축제, 푸드페스티벌 등) 성공적 개최 및 확대 도심 힐링 공간(맨발길, 공원) 및 생활체육시설 확충 필수 의료시설 확보 및 완전 돌봄 생활권 구축 (365소아청소년진료센터, 신생아집중치료센터 등)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미래교육 추진 (교육발전특구, 명문고 육성) 대중교통 정책 재설계 및 교통약자 이동 지원 강화 (시내버스 증차, 70세 이상 버스무료화) 생활쓰레기 수거체계 개선 및 공공시설 개방 확대 골목경제 활성화 및 소상공인 지원 강화 (특례보증 확대, 상품권 발행) 청년친화도시 조성 및 청년 성공 지원 (청년거점공간, 월세지원, 인턴쉽) 농업 예산 확대 및 농식품 산업 혁신 (푸드테크 연구지원센터, 로컬푸드 직매장) 구도심 재개발·재건축 촉진 및 행복주차장 확대 낙동강 중심 낭만문화 관광벨트 조성 (수변레저파크, 에코밸리, 자전거길) 구미산단 고도화 및 신산업 유치 (반도체 팹 유치, 국방반도체 클러스터) 우리아이 안심케어 및 교육 환경 강화 (육아종합지원센터, 영어프로그램) 노동자 권리 존중 및 행복사회 책임 복지 실현 어르신 복지 및 노후생활 지원 강화 (일자리 확대, 돌봄서비스) 각 지역별 맞춤형 발전 공약 추진 (예: 도량 대성지 둘레길, 인동시장 재개발)
맨발 걷기 산책로 조성 중도 선사박물관 건립 추진 달빛 어린이병원 지정 확대 (국비, 지방비 5:5 매칭, 시장 지정) 통학로 보행환경 개선 및 안전 시설 확충 악취 모니터링 및 저감시설 확충 캠프페이지 녹지 공간 최대 확보 (맨발걷기 공원 산책로 등) 보행, 자전거 친화형 도로 확보 및 조성 무인 알맹 상점 설치 운영 도심 교통 불편 해소 (운교동R-남부R, 팔호광장-효자R) 스마트 정류장 설치 및 대중교통 증편 공가 부지 활용 도심 공원 조성 (일부 반려동물 공원 포함) 야외 근로자 쉼터 조성 중장년 재취업 교육 (AI, 방과후 강사, 돌봄 등) 원도심 문화 탐방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 가로수 문화자산화 예술인촌 활성화 교동 전입 학생 지원 확대 오르막길 간이 쉼터 조성 청소년 문화의집, 체육시설 확충 지역아동센터 등 돌봄 공동체 육성 지원 (돌봄인원 증원, 터전 안정성 확보) 한부모가족, 맞벌이가족, 다문화가족 어린이 지원 확대 청소년 해외연수 추진 시니어 일자리 확대 및 근무기간 연장 폐지수거 어르신 전동리어카 보급 및 적재된 폐지 행정에서 순회 수거 1인 가구 어르신, 장애자 살핌과 돌봄 확대 (AI 기기를 통한 살핌망) 경로당 급식 확대 및 지역별 '어르신 행복식당' 설치 (행정인프라/민간운영) 교통약자 어르신 1000원 택시 택배, 우편, 배달, 청소 등 야외 근로자 쉼터 조성 전입 청년, 학생 지원 확대 원도심 문화유산 활용한 청소년, 관광객 탐방 프로그램 (소양정, 봉의산성, 당간지주, 향교, 칠층석탑, 교동~이외수 가옥, 소양로~박희선 생가, 약사동~권진규 가옥 등) 소양정을 춘천의 랜드마크로 추진 (원위치로 복원) 도시환경 정비 문화예술인 참여 (가로수 문화자산화: 시민분양 및 문화의길 조성) 춘천시립 미술관 조기 완공 근화동 의암호변 문화체육시설 추진 (생활체육경기장-축구, 야구, 배드민턴, 탁구)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도입 자원 재활용 포스트 설치, 어르신 일자리 조성
日정부, 오키나와 등서 전몰자 유골 수습하며 한반도 출신자는 제외 日 “韓 구체적 제안하면 협의” 약속해놓고 “제안 없었다” 말 바꿔 억울하게 목숨 잃고 묘지조차 없는 강제동원자 유골 2만2천구 추정
▲ 1944년 4월 일제에 징집돼 멀리 동남아시아 옛 버마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 사진 아랫부분에 ‘최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란 글귀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정부가 2차대전 당시 격전지에서 수습된 유골이 조선인의 것인지 감정하기 위해 협의하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반년 가까이 무시한 채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동안 유골 문제를 놓고 한국 정부가 협의를 제안하면 응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일본 정부지만, 정작 한국 정부가 협의를 공식 요청하자 “협의를 제안받은 바 없다”고 발뺌하는 것이다.
26일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 한국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지난 4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일본 후생노동성과 외무성에 유골 문제에 대한 실무 협의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반년이 다되도록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격전지인 오키나와(沖繩) 등에서 유골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인 일본 정부가 발굴 사업 도중 찾은 유골 가운데 한반도 출신자의 것이 있는지 감정해보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외면하는 것이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쓰인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앞서 행정안전부는 이를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167명으로부터 DNA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태평양전쟁의 전몰자를 유족에게 인도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하고 이를 현장에서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해 해당 전몰자의 유족에게 유골을 인도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수습’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죽음으로 몰아댔지만 정작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국민이 아니라며 유골을 고향으로 되돌려주는 사업에서 제외한 것이다.
법 제정 후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가 한국인 전몰자의 유골도 찾도록 나서라고 재촉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이를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정작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난 4월 협의를 요청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있다.
▲ 韓시민단체, 일본 정부에 조선인 전몰자 유골반환 촉구 요청서
(도쿄=연합뉴스) 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가 8일 일본 정부에 한반도 출신 전몰자의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은 보추협 사무국 역할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오른쪽)이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담당자(왼쪽)에게 요청서를 주는 모습
연합뉴스가 협의에 응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후생노동성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요시다 가즈로 과장은 “한국 측으로부터 아직 (협의하자는) 구체적인 제안을 받지 않았다”며 “유골 수습 사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일본이 모국인 일본군과 군속이며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주일 한국대사관이라는 외교 루트를 통해 ‘구체적인 제안’을 했음에도 구체적인 제안이 없었다고 딴소리를 한 것이다.
이에 “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가”를 재차 묻자 그는 “그건 한국 측이 결정할 일”이라고 발뺌을 하기도 했다.
과거 후생노동성이 ‘한국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면 응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그는 “외교에 관한 일이니 우리들(후생노동성)은 답할 수 없다. 그건(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지) 외무성에 물어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제안했는데도 구체적인 제안이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체적으로 제안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 오키나와에서 일제에 의해 숨진 박희태 씨 관련 일본 정부 기록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제 말기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군속으로 끌려와 숨진 박희태 씨가 행방불명자로 기록돼 있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행방불명자 명부’. 박 씨는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참수를 당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를 사망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료제공 ‘오키나와 한(恨)의 비(碑)’. 2017.8.15 [email protected]
이 관계자는 “작년과 재작년에도 실무자들이 만나서 유골 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를 했는데, 우리는 이를 협의로 보고 논의 내용을 공식 기록에 남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집중적으로 펼치고 있는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1945년 제국주의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격전이 치러진 곳이다.
당시 20만명 이상이 숨졌는데, 이 중에는 한반도에서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군인·군속·노무자·정신대원 1만명 가량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가 전후 미군정 산하에 있었던 까닭에 유골 수습이 진행되지 못해 전몰자의 상당수는 어딘지 모를 곳에 묻혀 있다.
일본 정부의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통해서는 그동안 800구 가까운 시신이 발견돼 일본인 전몰자 유족들과의 DNA 감정이 진행됐지만, 대부분은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죽어 어딘가에 묻힌 채 유족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유골은 팔라우, 사이판, 필리핀 등 일본 밖에도 적지 않다.
오키나와와 남태평양 등에서 발굴되지 않은 채 묻혀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자의 유골은 2만2천구로 추정된다. (취재 보조: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강제징용 유골 발굴 계기 된 1945년 잡지 ‘라이프’ 사진
(모토부초[일본 오키나와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1945년 5월 28일자 미국 잡지 ‘라이프(Life)’에 실린 무덤 묘표 사진. 오른쪽에서 각각 2번째와 4번째 묘표 속 ‘金村萬斗’와 ‘明村長模’라는 이름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김만두 씨와 명장모 씨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과 함께 게재된 르포 기사의 제목은 ‘오키나와-일본인이 아니라면 오키나와는 살기 좋은 곳이다’이다. [사진 제공=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 2019.2.17 [email protected]
▲ 허수열 교수가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통계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이영훈 이사장의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펴낸 책 가 논란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자 저자 6명이 모욕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 논란은 많지만 ‘학계’에서 정식으로 비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언론도 분명하게 비평·보도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69)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학자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를 꺼린다. 학회에서 논쟁은 하지만 언론에 직접 얼굴을 내밀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와 이 이사장은 고교(경북고)·대학(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동창이고 그 역시 식민지근대화론 창립자인 안병직 교수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영훈과 고교 대학 동기동창
-이영훈의 책 는 소설가 조정래의 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다. 뉴라이트 기관지 격인 2007년 여름호에 만경평야가 일본인에게 수탈당하는 것으로 묘사한 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글을 선입관을 빼고 읽어보면 틀림없이 ‘혹’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나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일제하 수리조합·토지 개량사업 자료 해제작업을 많이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수리조합 설립신청서는 낙성대경제연구소도 보지 못한 자료다. 이 자료를 보면 만경강 북쪽 옥구·익산·군산은 1909년 이미 빈틈 없이 수리조합이 있고, 만경강 남쪽 동진강 호남평야도 수리조합이 설립신청서는 냈지만 허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수리조합 설립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의 배경을 놓고 벌인 이른바 ‘벽골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영훈은 벽골제가 바닷물 유입을 막는 방조제로 그 하류 의 주인공이 살던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다·갯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리조합 신청서에 첨부된 당시 ‘동진강 수리조합 구역도’를 보면 이 지역에 마을과 수로 표시가 있다. 갯벌에 수로 표시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1872년 지도에는 전북 김제군에 5개 장시(5일장)가 있는데 그 중 2개가 벽골재 하류에 있다. 갯벌 위에 5일장이 열릴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은 조선후기 산업의 핵심인 농업이 몰락했고, 이를 일본 기술과 자본이 일으켜 결국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허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 몰락을 수치로 반박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문건을 보면 ‘두락당 지대량의 장기 추세’ 그래프가 있다. 1685년부터 1945년까지 논 한 마지기에 지대를 얼마 받았느냐를 회귀분석을 통해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지대가 떨어진 것을 생산량 하락으로 봤다. 그래프는 1910년 거의 바닥으로 농업이라는 산업기반이 무너진 것을 표시한다. 이 그래프에는 1685년 지대로 22말을 받았는데, 1935년에는 14말 받은 것으로 돼 있다. 1935년은 일제강점하 농업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1685년보다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선 농업의 몰락 사실은 이영훈 교수의 학문적 근거이자 바탕이다. 이런 허술한 그래프가 이론적 바탕인 것이 놀랍다.
“이 그래프는 30여개 지주 장부를 근거로 회귀분석한 것인데 회귀분석에서 유의성과 사실은 별개다. 이 지주 장부도 일관성이 없고, 연도별로 드문드문 있다. 그 중 전라도 영암 남평 문씨 문중 논에 대한 지대장부만 이런 추세를 보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일정하다. 이 1개 장부가 전체 통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한 개의 데이터가 매우 특이할 때 통계에서 그것을 제외해야 하는데 이영훈은 그리하지 않았다. 또 하나 문제는 조선후기로 들어와 소작제도가 변화하면서 지대를 받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걸 감안하지 않고 장부상 수치만 보다 오류가 생겼다.”
사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실증적 연구와 수학을 동원한 수량경제학을 강조한다. 조선후기 농업을 전공한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경제연구진이 전국 수리조합 창고를 뒤져 장부를 발굴해 쓴 는 조선후기·일제하 농업연구의 기반이 되는 연구서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책이다. 그런데 일제하 공업·노동을 전공한 허 교수가 이 책의 기반을 흔들었다. 2005년 이라는 책으로 식민지 시대 개발을 비판한 그는 2011년 이라는 책으로 아예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이론적 근거인 농업부문 허구를 폭로했다.
경제학자로서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
낙성대경제연구소(김낙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370쪽)가 추계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질농업생산액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1930년까지 평탄한 수준을 유지하다 다시 1940년까지 급속히 상승한다. 그리고 1942년까지 평탄하게 유지되다 끝난다. 결국 191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의 농업생산량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일본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이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한 기간으로 생산량이 증가할 합리적 이유가 없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지면적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일 것이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일제가 산미증식운동을 벌인 1930년대 이후 농업생산량이 비슷한 것도 오류”라고 말했다. 특히 이 그래프는 1942년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급격히 악화한 경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1943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졌다”면서 “이것을 빼고 일제가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개발이 조선인 생활을 향상시켰다는 주장도 “일제의 하천개수사업은 철저히 일본인과 일본군을 위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업생산량은 해방 후 급격히 늘었고, 한국 경제는 일본에 의해 성장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허 교수가 이렇게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라서 가능했다. 숫자와 통계를 들이밀며 얘기하면 국사학계 학자들은 반박을 못한다. 허 교수는 “이영훈의 특징은 숫자를 들이밀며 얘기해 반박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그 숫자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 허수열 교수가 이용훈 <반일종족주의>통계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그는 이영훈 이사장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에 대학도 같은 과를 다녔으니 매우 친하다. 학회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도 점심 때 같이 웃으며 식사하는 사이다. 허 교수도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으로 나를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들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이영훈 이사장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서울대생이며 대학생 시절 위장취업을 한 노동운동가다. 이 이사장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돼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겨우 복학했을 정도다.
사실 운동권에서 역사문제는 매우 치열한 ‘주제’였다. 특히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사회-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로 가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1930년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에게 맞추려면 조선에서 농업의 몰락과 자본주의 시작을 어디로 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경제사학자 중에 운동권·진보 성향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이사장 역시 백남운 이론에 심취하다 1980년대 17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가 오히려 줄고 19세기 조선 농업이 몰락하는 것을 발견, 백남운 이론에서 탈피했다. 이 이사장의 스승인 안병직 교수 역시 진보적 학자로 일제강점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설명했다. 이는 해방 후 미국 식민지로 이어져 80년대까지 운동권의 주요 이론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학문의 세계도 정치판과 비슷”
식민지근대화론은 1980년대 중반 ‘사회 구성체 논쟁’ 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진보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한말·일제침략하 자본주의 근대화론’ 논쟁이 일었다. 1922년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포기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허 교수는 “1970~80년대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던 시기에 중국 사회주의가 평등사회 모델로 많이 언급됐다”면서 “그러나 1991년 사회주의 환상이 무너지자 운동권이 대거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탄생이다. 그는 “극좌에서 중간까지만 갔으면 좋았는데, 극우로 간 것이 문제였다”면서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를 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제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의 정부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한다.(연세대 류석춘 교수의 위안부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일제하 공업·자본·노동이 내 전공이다. 1930년대 주로 북한지역에서 공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노동수요가 증가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노동규제를 실시한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일본·조선 경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강제징용이 시작된다. 조선총독부는 알선이라 하지만 실제는 강제다.”
-일본이 계속 주장하고, 우리나라 학자상당수도 종군 위안부 모집에 정부의 강제성 문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말 없는 것인가, 학자들이 찾지 못한 것인가.
“그런 문건을 조선총독부가 남겨 두겠는가.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총독부는 계속 서류를 소각했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일본 방위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개하지 않는다.”
-스스로 경제사학계의 ‘소수파’라고 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논박하는 교수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학문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치판과 비슷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교수 아래서 반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나. 경제사학을 전공해 밥먹고 살려면 서울대 이외에는 힘들다. 충남대의 내 밑에서 경제사학을 전공해 어느 대학 교수로 갈 수 있을까. 현실이 그렇다. 다수가 그러니 그냥 침묵하고, 나와 같이 엉덩이에 뿔난 사람만 소리치는 것이다.”
허 교수는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이영훈·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과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냈다. 대학 때 이영훈만큼 운동권은 아니었다. 조교를 거쳐 안병직 교수로부터 1985년 박사학위도 받았다. 1978년부터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 교토대 초빙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등을 지내고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가만히 허 교수를 보고 있으면 ‘점잖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 앞에서 기자의 뺨을 때린 친구 이 이사장과 180도 달라 보였다. 우정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겠지만 그래도 친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 기자가 임종국상 수상자이지 않았으면 인터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하기 전 2006년 임종국상 수상소감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 수상소감에는 13척으로 330척과 맞선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인용돼 있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사내가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횡행하는 지금 그의 심경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 같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
BTS, (케이) 팝의 역사를 다시 쓴다 / 이정엽
3·1운동 100주년에 ‘북간도’로 향한 이유 –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역사’ / 반태경
서평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보는 새로운 문제의 제기 –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 정재훈
책소개
한국의 20세기는 식민과 분단으로 인해 전쟁과 생존의 위협이 상존하는 시기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전쟁의 압살과 청일전쟁, 20세기 전반기의 러일전쟁,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남북 두 분단정부의 수립, 6·25전쟁 등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로 인해 민족사회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에 의해 비민주적 통치가 진행되었고,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시민이 되기보다 절대적 순종을 덕목으로 하는 신민이 되기를 요구 받았습니다. 물론 20세기에는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따른 거대한 전쟁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사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단 세계적 냉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은 냉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오히려 치열한 열전 상태로 돌입했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21세기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던 그때를 떠올려봅니다. IMF의 여파와 세기말 증후군이 겹치면서 회색빛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세기 전반에 비해 후반기에 우리 사회가 성취한 역사적 성과를 떠올리며 21세기는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이 컸습니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던 군사정부의 그늘과 지역주의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요하기 시작하고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이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여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우리의 현실을 살펴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핵전쟁이 곧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는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남북의 평화는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북미 정상의 협상은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갈증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조건이 그나마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대신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과 이란의 전쟁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리아 난민을 비롯한 지구촌 시민의 삶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16년에는 촛불시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굳센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지구를 휩쓸고 간 자리에 남긴 노동유연화, 위험의 외주화와 같은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절반의 절반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가 어떠한 시대가 될 것이라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역사를 볼 때 20세기가 직면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21세기 인류와 우리 민족사회가 계속해서 지고 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제에 접근하기 위한 역사학의 선택 가운데 하나가 20세기 식민·분단·전쟁 등 온갖 폭력에 맞섰던 저항을 조명하고, 민주·평화·평등의 시선이 확산되도록 노력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금단(禁斷)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구역 또는 범위 안에 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또한 금기(禁忌)는 ‘마음에 꺼려서 싫어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단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전자가 주로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스스로 애써 기피하려는 의식의 측면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체제가 철저하게 막아선 금단의 영역을 넘은 저항을 발굴함으로써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시선을 갖는 것, 이 또한 『내일을 여는 역사』가 상상하는 내일을 여는 방법입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편집위원회는 2019년 가을호(통권 76호)에 ‘여는 글’을 포함해 모두 23편의 원고를 수록했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북한에 대한 내면적 이해, 남북의 민간 교류를 세밀하게, 그렇지만 맛깔스런 필치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여러 편의 글을 실었습니다. 역사적 저항과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오늘날의 시민행동을 연속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통일에세이’에는 다양한 분야의 남북 교류사업의 성과와 과제를 담았습니다. 신주백은 2000년대 이후 학술 교류를 역사학 분야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와 정치적 배려 그리고 경제적 지원이 맞물릴 때 교류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권영길은 평화철도 연결운동이 현실적인 평화 만들기 실천의 길이고 이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두대간 사진전을 열기도 했던 뉴질랜드 사람 사진가 로저 세퍼드는 2011~2012년, 2017~2018년의 종주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남북한의 사람들, 문화, 그리고 산도 똑같았다면서 분단이 바꾸지 못한 것들을 말합니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주제인 코민테른과 신간회를 다뤘습니다. 김영진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코민테른이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에 관여했던 역사적 사실과 연구경향 등을 설명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한 코민테른의 ‘권위’가 각 지역별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폭넓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윤효정은 신간회에 대한 이해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민족통일전선론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조망한 뒤, 신간회 평가를 해소 문제에 국한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부정을 넘기 위해 중앙 및 지회가 대중과 접촉하면서 벌인 활동 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합니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오늘날 현재적 논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해와 편견도 섞여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세 가지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류동민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상관성을 정리했습니다. 양자의 양립 불가능성이 정치담론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가지 입론의 역사적 연원을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정현진은 전교조가 박근혜 정부 사법부를 통해 법외노조가 된 부당성과 합법화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정욱식은 분단체제 해체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국방비 동결을 추진해야 하며, 2019년 현재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7위, 일본이 6위, 북한은 18위로 평가되었다는 구체적인 사실도 제시합니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고투한 인물 군상의 모습을 주로 다뤘습니다. 먼저 음악가 채동선과 홍난파의 삶을 비교한 고(故) 노동은의 유고를 실었습니다. 민족음악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홍난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채동선의 삶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순섭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힘쓴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의 일대기를 간명하게 서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가 그렇듯이 그녀도 월북한 이후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김형수의 김남주 연대기는 시대의 변화와 시인의 삶을 연결하면서, 또 그가 썼던 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혁명을 고민한 김남주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한편 임경석은 이번 호부터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코민테른 인명사전’을 연재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기획된 인명사전에 수록한 14명의 인물 정보를 순차적으로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을 위해 집필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건조한 문체이지만, 강상주, 박진순, 박애 등 한인 사회주의자에 대해 기존 연구보다 한층 보강된 내용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6년 출간된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뛰어넘는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한 종합적 정리가 언젠가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톺아보기 위한 ‘사실체크’에서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과 일제하 수리조합사업을 분석했습니다. 한국의 민간협동조합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소남은 이 운동에 사회운동과 적극적 연계, 좌우 양편을 넘는 통합적 활동,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지원, 생명사상의 수용 등의 특징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연대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박수현은 수리조합사업이 일제 통치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 일방적 관제사업이었기 때문에, 중소지주와 자작농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조직적 저항이 속출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출간으로 재점화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지속적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동전 오기영 전집』과 『대명률』을 다뤘습니다. 『동전 오기영 전집』은 일제하·해방직후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삶을 영위한 오기영의 생각을 담은 책 모음입니다. 장규식은 오기영을 안창호의 대공주의를 계승해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 자유주의를 제창한 인물로 조명하면서 통일독립을 열망한 그의 활동을 높게 평가합니다. 『대명률』은 조선왕조 형법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서적입니다. 한상권은 14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대명률』이 조선에 수용·적용된 과정을 상세히 해설했습니다.
‘북한의 이해’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강응천은 북한의 국호가 조선민주주의공화국도 아닌, 조선인민공화국도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인민민주주의를 향한 후진국 사회주의의 기호이자, 민주기지론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문범강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출발한 북한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이 독자적인 조선화로 발전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조선화 화단의 상황을 소개합니다. 외부의 시선과 달리 활발한 논쟁과 화가의 독자적 작품세계가 실재함을 말합니다. 컬러로 수록한 작품을 직접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최열이 연재하는 ‘예인열전’은 지난 호에 이어 겸재 정선의 작품세계를,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과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문화평론가 이정엽이 케이팝(K-pop)의 흐름 가운데 방탄소년단(BTS)의 위치와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만든 반태경 피디는 명동촌으로 대표되는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삶을 영화화한 동기와 역사 속 기독교 신앙인이 펼친 사회적 실천의 가치를 담담하게 전달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평’에서는 정재훈이 최근의 화제작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다뤘습니다. 변화보다는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위 책이 왕조교체의 원인과 성리학 수용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역사를 큰 줄기에서 보는 시도들이 더욱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20년이 지난 21세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했는데, 『내일을 여는 역사』도 바로 21세기의 첫 해인 2000년 3월에 첫 호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제 성년을 맞은『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21세기와 함께 호흡해왔다고 할 것입니다.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지도 아닌, 폭넓은 대중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시사주간지도 아닌, 어떻게 보면 ‘주변’ 또는 ‘경계’에 서서 지난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주변과 경계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낳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금기를 넘는 시선이 이 지면을 통해 넘쳐날 수 있도록 더 정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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