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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해요] 용산참사 10주기 추모위원이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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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해요] 용산참사 10주기 추모위원이 되어주세요!

익명 (미확인) | 월, 2019/01/07- 12:04

 

’국가폭력’에 공소시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용산참사 10주기 범국민 추모위원회’ 추모위원이 되어주세요

 

오는 2019년 1월 20일은 용산참사 1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용산참사 이후 10년, 우리는 함께 잘 싸워왔습니다. 진실규명의 길을 열었습니다. 10년 만에 과잉진압과 여론조작이 공식적으로 밝혀졌고, 정부의 사과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이명박, 김석기 등 책임자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국가폭력’에 공소시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살인개발과 철거폭력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국의 개발구역에서 벌어지는 용역 폭력의 양상은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마포 아현동 철거민 박준경님이 강제철거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마저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과 나아갈 길을 살피며, 함께 기억하고 함께 변화를 일구자는 약속이 필요한 때입니다. 결코 잊지 않았다는 다짐으로, 용산참사 10주기 범국민추모위원으로 함께 주세요.

 

참여방법

1) 용산참사 10주기 추모위원(단체/개인) 모집

‣ 추모위원 참가비 (단체 10만원 이상, 개인 1만원 이상 / ※ 여건에 따라 조정 가능)

‣ 추모위원 참여 및 후원 계좌: 국민 055202-04-150491 이원호(용산추모)

‣ 추모위원 참가단체 모집기간 : 2019년 1월 11일(금)까지(1차)

※ 추모위원 참가비는, 10주기 추모행사 등 진상규명 활동에 사용됩니다.

 

2) 10주기 추모행사 주요 일정(안)

* 추모제외 일정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세부 일정은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1. 용산참사 10주기 추모제

※ 참사 당일,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에서 추모제 진행.

① 일시 : 2018년 1월 20일(일), 14시 / ② 장소 :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

 

2. 용산참사 10주기_추모와 기억의 밤 “용산참사, 그리고 나”

① 일시 : 2018년 1월 18일(금) 저녁 7시 / ② 장소 : 조계종 전통문화공연장

 

3. 용산참사 10주기 빈민대회 : 강제철거 규탄 생존권 쟁취 투쟁 결의대회

① 일시 : 2018년 1월 19일(토) 오후 1시 경 / ② 장소 : 서울 도심

 

4. 그 외 추모주간

* 강제퇴거 증언대회 : 추모주간 중 / 국회

* 추모 전시회 : 추모주간 중 / 서울시청

* 추모 상영회 : 추모주간 중 / 인디스페이스, 기타 공간

* 기타 정책토론회 등 준비 중

 

문의 :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02-723-5303 [email protected]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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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7주기] 추모대회 및 전체 추모일정

 

 

오는 2016년 1월 20일은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해 다섯 철거민 민중열사들이 돌아가신 용산참사 7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참사발생 7년이 되어오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살인진압의 책임을 재대로 묻지 못한 채, 진압 책임자 김석기는 공기업(한국공항공사) 사장도 모자라, 내년 총선 출마(새누리, 경북 경주)를 선언했습니다. 
살인개발의 참혹한 참사현장은 그 진실이 규명되지 못한 채 봄부터 공사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박근혜 정권의 폭압과 국가폭력의 잔혹함이 거세지는 시기에 맞게 되는 용산 7주기는, 국가와 자본의 협력에 의한 야만적인 폭력과 참사에 "여기 사람이 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선언과 행동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 7주기를 맞아 ‘용산참사 7주기 추모위원회’를 제 단체와 개인 추모위원들로 구성하여 준비하고자 합니다.

용산을 기억하고 함께 싸워 온 귀 단체에서, 아래와 같이 ‘추모위원 참가단체’ 참여와 개인 ‘추모위원’ 조직 그리고 추모/투쟁대회 등 일정들에 적극적인 참여와 조직을 요청 드립니다. 

 

- 아 래 - 

1) 용산참사 7주기 추모위원 모집
‣ 추모위원 참여 및 후원 계좌: 국민 055202-04-150491 이원호(용산추모)
* 단체 / 10만 원 이상, 개인 / 1만 원 이상 (단체 및 개인 상황에 따라 조정 가능)
‣ 모집기간(1차) : 2016년 1월 11일(월)까지 (개인은 20일 까지)

2) 추모대회 등 주요 일정
■ 용산참사 7주기 추모대회 :국가폭력 규탄, 책임자처벌 촉구대회
-일시 : 1월 23일(토) 
2시 : 용산참사 현장 (이후 행진)

■ 묘역 추모제 
: 1월 20일(수) :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 (12시, 10시 반 대한문 버스 출발 : 사전 신청 바람)

■ 추모주간 일정(안) * 일정 조정 중, 추후 확정 공지 함.
13일(수)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 (10시, 용산참사 현장)
20일(수 *용산참사 당일 ) 묘역 추모제 (12시, 마석 모란묘역 / 10반 대한문 버스출발)
20일(수)~22일(금) 추모 상영회 _ “국가폭력 특별전 
: 용산 <두 개의 문>, 세월호<나쁜 나라>, 밀양<밀양 아리랑>” 
21일(목) 추모 촛불 기도회 (오후 7시반, 용산참사 현장)

* 김석기 총선출마 규탄, 추모주간 일정
14일(목) 살인진압 책임자 김석기 출마, 새누리당규탄 기자회견 (오후 1시, 새누리당사앞)
14일(목)~23일(토) 김석기 공천 반대, 새누리당사앞 1인시위 (11시반~ 오후 1시)
17일(일)~18(월) “김석기를 감옥으로!” 경주 1박 2일 투쟁 

용산참사7주기 추모위원회
문의 : 02-3147-1444 (010-4258-0614) / [email protected]

 

 

목, 2016/01/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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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기지촌에 각인된 기억에 관한 여행 <거미의 땅>과 용산 다큐 <두 개의 문>이 상영됩니다! <거미의 땅>은 '새로운 물결' 섹션에서 상영되며 김동령, 박경태 감독님이 참석 하는 관객과의 대화(GV)가 진행됩니다. <두 개의 문>은 '특별상영: 테크놀로지, 젠더 -불가능한 현재 가능한 미래' 섹션에서 특별상영되며 상영 후 김일란, 홍지유 감독님이 참석하는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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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3/05/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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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가 전성기였던 1989년, 한 명의 신인가수가 등장합니다.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모범생 같은 앳된 외모. 하지만 그가 들고 나온 감미로운 발라드 ‘텅 빈 마음’은 변진섭과 이문세 같은 쟁쟁한 발라드 가수의 히트곡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이에 기세를 몰아 1집은 물론 2집과 3집까지 차례로 대히트를 기록하며 당당히 유명 발라드 가수 대열에 오르게 됩니다. 수많은 팬을 거느린 ‘스타’가 된 것이죠. 하지만 그는 기존 스타들과는 좀 다른 길을 선택 합니다. 가수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출연을 고사하고, 당시만 해도 척박하기 그지없던 ‘공연장’으로 향한 것이죠.

“방송국 앞에는 팬들이 두 줄로 서 있고,
그 앞으로 차가 들어와 가수들을 모셔갔다.
거기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우쭐거리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 선택이 현재 가수 이승환의 진짜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TV 스타’라는 편안한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한 이승환은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게 됩니다. 나아가 직접 제작사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은 남김없이 다시 음악에 투자합니다.

음악에 집중하고 더 좋은 품질의 음악을 만든다는 면에서는 매우 이상적인 활동이지만 ‘마케팅’이란 측면에선 충분한 수익이 보장되기 어려운 방식입니다. 실제로 그가 차린 회사는 파산 직전의 상황에 반복적으로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고수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이 무리다,
장사가 안 된다고 해도

마치 ‘독짓는 늙은이’처럼
그렇게 만들어 왔고,

그는 그게 기본적인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명석-

그렇게 무려 26년이란 긴 시간이 흐릅니다. 그 사이 그는 11장의 정규앨범과 무려 1,000회 이상의 단독 공연을 하면서 자신의 방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냅니다. 특히 그의 공연은 음악을 선보이는 일반적인 콘서트를 넘어서서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같다는 극찬을 받게 됩니다. 그로 인해 데뷔 초기 붙여졌던 ‘어린 왕자’라는 별명은 어느덧 ‘공연의 신’이라는 새로운 별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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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체를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로 끌어올린 음악인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성환-

이젠 누가 봐도 자신의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그였지만, 그의 마음 속은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언젠가부터 일과처럼 생긴 ‘분노’를 인식했고 그걸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자신들도 더 잘 살게 될 줄 알고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찍어주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가수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누구라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느낌을 모든 가수가 음악 활동으로 표현하는 건 아닙니다. 자칫 자신의 음악 활동에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합니다. 그가 26년간 늘 서 있었던 ‘무대’ 위에서 말이죠.

실제로 그는 2009년 용산 참사 유가족을 위한 콘서트, 2012년 방송3사 공동 파업 집회 등 여러 집회 공연 무대에 오릅니다. 더불어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그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혹시라도 그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런 말들을 들으며 오히려 왜 이런 걸 겁내야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몇 번 이런 자리에 섰었어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다 말렸어요. 이상하게.. ‘그거 하면 너 이상해질지도 몰라’하면서.. 그러면서 사실 저도 많이 겁났습니다. 무서웠고. 그런데 순간 생각해 보니까 왜 내가 겁나야 하고, 무서워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박수치시지 마시고… 왜냐하면 지금도 무서워요.”
-2012년 방송3사 공동 파업 집회 발언 중-

어쩌면 그는 정말 무서워해야 하는 것에 무서워하려 애쓴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알아채게 됩니다. 300여명의 국민들을 구하지 않은, 그리고 그에 대해 책임도 지려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자신이, 그리고 국민들이 살고 있다는 진짜 무서운 현실을 알아채게 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참 불쌍한 국민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가가 우릴 지켜주지 못하는
혹은 지켜주지 않는

어떤 일에도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는
그리고 국민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하지 않으려는

그런 의지를 갖고 있는 이상한 곳임을 알아채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100일 집회 발언 중-

늘 그러하듯 그는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의 무대에 오르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합니다. 나아가 단식에까지 동참합니다. 하지만 1년여의 시간이 지나도록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월호 참사는 사람들에게 점점 잊히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는 ‘면목 없는 어른’으로서의 자괴감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먹먹한 마음입니다. 우리 정말 가만히 있었구나,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가만히 있는 사람이 돼 버렸구나 라는 생각 때문에 유가족 여러분께 면목이 없습니다.
특히 여기 와 있는 많은 어린 친구들, 학생 여러분께 면목 없는 어른이 된 것 같아서
더 이상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 행사에서 이승환-

하지만 그는 자괴감에 매몰되지 않고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한 곡을 직접 만듭니다. 더불어 해당 곡을 다른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사용하기를 바란다며 해당 곡에 대한 저작권 포기를 선언합니다. 신곡과 그 곡의 저작권이면 가수가 가진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별이 된 아이들을 그리고
또 기리는 마음에
<가만히 있으라>를 만들었습니다.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는데,
세월호의 슬픔을 공감하는데
뜻을 같이 하는 분에게는

이 곡의 지적재산권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런 그를 모두가 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특히 그를 발라드 가수로만 알고 있는 분들의 경우 다소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일부지만 혹시 정치를 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의심어린 눈초리도 존재하고요.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시선에 문제를 제기 합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 제 상식을 얘기하면 정치인 하려고 그러는 거란
편협하고 조잡한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겁니까?

연예인 이야기는 시시콜콜 그렇게들 하시면서 왜 정작 먹고 사는
아니 죽고 사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하는 겁니까?”
-이승환 페이스북-

더불어 자신을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과 팬들에게도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남깁니다.

“이 자리에 선다고 하니까 주위 분들,
특히 팬분들이 걱정을 많이 하더라.

왜 걱정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유치하거나
경직된 나라가 아니다.(관객들 웃음)

어릴 때부터 배워온 사람의 도리,
가수의 도리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거니 팬분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용산 참사 유가족 자선 콘서트 중-

‘도리’라는 말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길이란 의미입니다. 오래전 가수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른길을 위해 방송국 대신 TV를 택했던 그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길을 위해 지금의 선택들을 해 나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두 가지가 26년간의 시간 동안 조금씩 좁혀져 이제 하나의 길로 합쳐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하는 사람, 이승환’ 안에서 말이죠.

‘음악 하는 사람은 세상과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수 이승환-

수, 2015/10/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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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6일,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구속됐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 등을 불법 주도했다는 혐의였다. 구속 당시 그는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을 맡고 있었다. 그는 25년째 인권운동을 해오고 있다.

밀양 송전탑, 평택 대추리, 용산 참사, 쌍용차 농성, 강정 해군기지, 세월호 참사 등 대한민국의 굵직한 사회문제부터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가 25년 째 인권운동을 펼쳐왔던 원동력은 뭘까

▲ 대추리 황새울평화기념관에 있는 2006. 3. 6 촬영된 사진, 당시 박래군은 ‘대추 초등학교에 대한 경찰의 행정대집행 시도에 맞서고 있었다.

▲ 대추리 황새울평화기념관에 있는 2006. 3. 6 촬영된 사진, 당시 박래군은 ‘대추 초등학교에 대한 경찰의 행정대집행 시도에 맞서고 있었다.

지금까지 박래군은 4번 구속됐다.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2번, 2009년 용산 참사 현장에서 1번, 그리고 올해 세월호참사 1주기 추모집회에서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박래군을 가둔다고 해서 인권을 가둘 수 없다”고. 그리고 박래군은 한국 인권운동의 상징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를 ‘종북 좌파 운동권’이라고 비난한다. 그동안 박래군과 인연을 맺었던 이들로부터 그의 삶을 들어봤다.

이번 <사람 곁에 사람, 박래군>의 내레이션은 가수 요조가 맡았다.


글 구성 김근라
연출 박정남, 권오정

월, 2015/08/1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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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광화문 집회 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박.래.군.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모두가 박래군이다’ ‘박래군을 석방하라’ 도대체 박래군이 누구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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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6일,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구속됐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 등을 불법 주도했다는 혐의다. 구속 당시 그의 직함은 4.16 연대 상임운영위원이었다.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지난 25년 동안 그의 이름 앞에 붙었던 수식은 수도 없이 많았다. 용산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평택미군기지 저지 범국민대책위 대변인, 쌍용차 희망지킴이, 밀양 송전탑 앞에서는 할머니의 아들이었고, 제주 강정에서는 어민의 아들이었고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겐 형님이었던 사람이었다.. ‘박래군’은 대한민국에서 억압받아온 ‘인권’의 동의어였다.

1988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에서 시작해 27년 동안 인권운동에 투신해 온 박래군. 그에게 성별, 피부색, 신체적 조건 등 어떤 것도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농민 사이에선 농사꾼으로, 공장 노동자 사이에선 노동자로, 유가족 곁에선 유가족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할 줄 아는 타고난 인권운동가였다. 그 힘은 그 자신의 아픈 가족사에서 비롯됐다.

박래군을 알아가는 과정은 대한민국 인권운동의 역사를 더듬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의 대학 시절 선배부터 최근까지 함께 했던 세월호 유가족까지 ‘박래군이 지키려했던 인권’을 묻는다.

목, 2015/08/0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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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감상

법무법인 양재 안희철

 

“소수의견을 판결로 이끌어내기 위한 실질적 조건은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지요. 국민의 법감정에 기반한 강력한 여론의 지지, 유능한 변호사, 그리고 시대의 변화.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갖췄죠. 시대가 바뀐 거예요. 이제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가 된 겁니다.”

 

 

영화 소수의견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제는 정말 우리 사회에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가 된 것일까.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지 1년조차 되지 않은 새끼 변호사지만, 형사사건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벌써부터 무죄주장을 해도 되는 것일까, 끝까지 싸우는 것보다는 정상참작을 바라는 것이 현 한국사회에서는 피고인을 더 잘 변호해주는 것이 아니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만큼 현실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100원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내용으로 하는 소수의견은 법조인에게는 법조인이 되고자 했던 당시의 초심을, 그리고 많은 국민들에게는 국가란 무엇인지 나는 국민으로서 보호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영화 제목만 들으면 왜 제목이 소수의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이내 제목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출근길 화요일 오전 지하철 안을 살펴보니, 수많은 소시민들이 웃음기도 별로 없이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혹은 피곤에 잠을 청하며 출근을 하고 있다. 분명 이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다수이지만, 소시민들의 의견은 소수의견이 되고만 세상. 그게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닌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런 한국의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고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소수의견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시사회 때 김성제 감독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영화가 용산참사를 그대로 그린 영화는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 용산참사, 나아가 이 시대 국가의 모습과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다만, 영화 속에서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민을 사지로 이끄는 국가권력의 모습이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무능한 정부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느꼈던 씁쓸하고 무거웠던 기분은 비단 나 혼자 느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요란하지는 않지만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변화의 흐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고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소설 원작의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 달이 해가 되는 때. 늙은 나무의 그늘로부터 새싹이 돋아나는 때. 나는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찔러대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금, 2015/06/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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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재개발 규제 완화 즉각 중단하라!http://www.peoplepower21.org/files/attach/images/37219/318/795/001/51f53... style="vertical-align:middle;color:rgb(102,102,102);font-family:'나눔고딕', NanumGothic, ng;font-size:16px;font-weight:400;text-align:justify;background-color:rgb(255,255,255);" />

과거 회귀, 재개발 규제 완화 정책 즉각 중단하라

주택 가격 급등, 주민갈등 발생, 세입자 주거권 침해 불보듯 뻔해

무분별한 재개발 막는 주거정비지수제 유지, 구역지정 요건 강화해야 

투기 방지와 개발이익 환수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의무 비율 상향해야 

 

서울시는 오늘(5/26) 「재개발 활성화를 위한 6대 규제완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방안은 ‘25년까지 24만호 주택공급을 본격화하기 위한 ▲‘주거정비지수제’ 폐지, ▲정비구역 지정기간 단축(5년→2년), ▲노후지역 신규구역 지정, ▲‘2종 일반주거지역’ 규제 완화 등이 주요한 내용이다. 오세훈 시장 당선 직후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 한 기대감이 투기를 부추기고 서울 집값 상승을 촉발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저층주거지에 대한 민간 재개발을 촉발하는 규제완화 정책을 발표하는 것은, 서울 전역의 투기와 집값 상승, 주거불안을 심화시킬 우려가 높다. ‘집’으로 인한 서울 시민들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과 고민없이, 스피드 주택공급만을 명분으로 다시 10여년 전 뉴타운 삽질과 용산참사 시대로 역행하려 하고 있다.

 

과거 오세훈 시장이 추진한 뉴타운 재개발 사업으로 둥지내몰림, 전월세가격 상승, 소형저가주택 감소 등의 수많은 문제가 양산되는 가운데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시는 2015년부터 재개발 사업의 구역 지정 요건을 강화하는 ‘주거정비지수제’를 도입하여 무분별한 구역 지정 남발을 막아왔다. 이를 과거로 되돌려 뉴타운 사업의 과오를 반복하려는 오세훈 시장의 재개발 규제 완화 정책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개발지역 주민들과 주거단체들은 오세훈 시장이 주택 가격 상승과 서민들의 주거 불안을 야기하는 재개발 규제 완화 정책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오세훈 시장은 과거 재임시절(‘06. 7~’11. 8) 이명박 정부의 뉴타운·재개발 정책을 계승하여 300여 곳의 재개발·재건축 정비구역을 지정했으나 부동산 경기 침체와 갈등 증폭으로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이에 서울시는 2009년 당시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를 통해, 뉴타운 재개발 전후 소형 저가 주택의 철거로 인한 멸실과 이주 수요 증가로 주변지역의 전세가 폭등 등 서민주거 불안이 초래되고, 재개발 사업 이후 원주민의 재정착 비율이 낮다는 진단을 내놓으면서 민간주도의 시행 방식을 공공에서 시행하는 방식으로 확대할 것을 개선방안으로 제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세훈 시장은 당시에도 ‘공공관리제’ 도입 정도의 미봉책만 제시했었다. 이후 서울시는 정비사업 추진과정에서의 갈등이 증폭되고, 폭력적인 강제집행과 철거가 지속되자, 2012년 뉴타운 출구 전략으로 600여 곳의 정비사업 구역 중 300여 곳을 해제하는 등 전면 철거형 개발에서 도시재생으로 전환을 추진해왔다. 

 

특히 서울시는 2015년 ‘주거정비지수제’를 도입해, 정비구역 지정단계에서 다양한 여건들을 고려하여 정비구역 지정을 억제해왔다. 주거정비지수제는 노후도 등 법정 물리적 기준만으로 재개발 구역이 지정되던 것에서 거주자현황 및 분포, 주민 참여 여건, 지역 특성 등의 정성적 요건을 구역 지정 심의 자료로 포함해 지정요건을 강화한 것이다. 서울시가 2015년부터 신규 구역 지정을 억제해왔지만, 이미 이명박·오세훈 전임 시장시절 과도하게 지정되어 300여 곳(재개발 133곳, 재건축 169곳, 2021.05 기준)에서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정부도 공공재개발을 통한 주택 공급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민간 재개발 활성화에 방점을 둔 오세훈 시장의 주거정비지수제 폐지 등 재개발 규제 완화 방안은 주택공급이라는 득보다 서민 주거불안 심화만 가속화시킬 것이다. 서울시와 시의회는 무분별한 정비사업의 추진을 막기 위해 ‘주거정비지수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정비구역 지정 요건을 완화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서울시는 무주택 세입자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며, 특히 재개발·재건축 지역의 세입자 비율은 70% 이상으로 높다. 재개발·재건축 지역에 거주하는 세입자에 대한 이주 대책 마련과 공공임대주택 공급 비율 확대가 시급한 이유이다. 재개발 세입자는 이주 대책이 마련되어 있으나 최초 정비구역지정 공람공고일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다수의 세입자들이 법적 대책에서 배제되어 쫒겨나고 있으며, 재건축 세입자는 법적 보상이나 이주 대책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정부는 재개발사업에서 임대주택 공급을 최대 20%까지 규정하고 있으나, 서울시는 임대주택 공급 의무 비율을 15%로 고시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거 세입자들의 주거 안정과 부담 가능한 주택 공급을 위해 공공임대주택 의무 비율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또한 재건축사업은 서울시가 소형주택을 인수해 공공임대주택으로 공급하는 있는데, 공공임대주택 확대와 개발이익을 환수하기 위해서는 2009년 폐지된 재건축 사업의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의무화하는 법개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오세훈 시장이 과거 뉴타운의 폐해와 용산참사 재발방지 대책 없이 다시 과거로 회귀한다면 또 다른 참사를 우려할 수 밖에 없다. 과거 재임시절 서울시가 자문위를 통해 진단한바 있는 소형 저렴주택 감소의 문제나, 대규모 이주수요에 따른 전월세 상승과 집값 상승의 문제, 원주민의 낮은 재정착률과 축출의 문제, 그리고 비극적인 용산참사로 이어진 미비한 세입자 대책에 대한 개선책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이윤추구형 민간 개발만을 부추기는 것은 서울을 투기가 판치는 부동산의 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부동산 도시에 희망은 없다. 서울시는 재개발 규제완화 방침을 철회해야 한다. 무분별한 재개발 막는 정비지수제를 유지하고, 구역지정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 서울의 집값 안정과 시민들의 주거불안 해소를 위해서도, 공공임대주택 의무 비율 상향 등 투기 방지와 개발이익 환수를 위한 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 

 

▣ 논평 [https://docs.google.com/document/d/1p3NKetpKjbPY4IowMVwnJLuKecMfwYvzt6iX... rel="nofollow">원문보기/다운로드]

목, 2021/05/27-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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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04/0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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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xe_content"><h1 dir="ltr">용산참사 10년, 떠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h1> <p dir="ltr"> </p> <h3 dir="ltr" style="text-align:right;">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h3> <p dir="ltr" style="text-align:right;"><strong>인터뷰 및 정리 김경희, 홍정훈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strong></p> <p dir="ltr" style="text-align:right;"> </p> <blockquote> <p dir="ltr">2019년 1월 8일 그를 찾았다. 매년 그맘때면 그는 정신없이 바쁘다. 올해 10주기를 맞는 용산참사 추모위원회를 준비하기도 벅찬데, 마포아현 철거민 박준경 열사의 가족을 돕는 일도 맡았다. 작년에는 참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공동정범’을 개봉했고, 그 작품은 2018년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평가받는다. 오랜 잔상을 남긴 그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목소리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을 만났다.</p> </blockquote>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 10주기를 맞는 소감은</strong></p> <p dir="ltr">용산참사 이후 장례를 치르기까지 355일이 걸렸다. 더 미룰 수 없어 장례를 위한 협의를 하고 장례를 치른 것이다. 당시 대책위의 정식 명칭을 아는 사람이 없을 거다. ‘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라는 긴 이름이었다. 당시 사건의 책임을 분명히 하자는 의미로 ‘이명박 정권’을 대책위 이름에 넣었다. 대책위를 해소하고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로 전환했다. 당시에 장례를 치르면서 10년 안에 진실을 밝혀내자, 이것을 과거사로 넘겨버리지 않도록 하자고 약속했는데... 약속했던 10년이 되어버렸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 10주기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본다면</strong></p> <p dir="ltr">10주기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고민은 용산참사 이후 10년의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가족들의 입장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규명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10주기를 맞이하면서도 지난 10년을 절망적인 세월로 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찬히 돌아보면 지난 10년 동안 함께 싸웠고, 유가족들은 지치지 않고 앞서서 걸어왔으며, 그 과정들을 통해서 조금씩 사회를 바꿨다는 의미를 잘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지만 경찰 진상조사위원회 결과도 있었고, 정부 차원에서 용산참사에 관한 과잉진압을 인정하고 국무총리의 사과 표명도 이끌어냈다. 최근 문제가 많이 드러나고 있지만, 검찰도 자체 과거사위원회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함께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싶었다.</p> <p dir="ltr"> </p> <p dir="ltr">또 잘 드러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기억들이 지난 10년 동안 개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조금씩 이끌어왔다. 2008년까지 뉴타운 광풍이 한국 사회를 지배할 정도로 들끓었고, 부동산에 대한 욕망과 가격 거품을 정권차원에서 부풀리고 떠받쳐왔다. 2009년 용산참사가 터지고, 현장에 찾아와 자기고백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도 그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면서. 물론 집이나 부동산을 둘러싼 욕망들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긴 하지만, 용산참사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그 욕망들이 거짓되었다는 점, 그에 대한 반성이 분명히 일어나기 시작했다.</p> <p dir="ltr"> </p> <p dir="ltr">용산참사 이후의 세대, 용산참사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청년들도 있다. 강제철거, 상가세입자가 쫓겨나는 문제에 대응하는 활동을 하거나, 주거권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이나 현실을 이야기할 때 용산을 호명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10주기에는 이런 사회적 의미, 개인들이 갖고 있는 기억이나 의미들을 잘 살리기 위해서 #용산참사_그리고_나 캠페인을 하고 있다.</p> <p dir="ltr"> </p> <p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46108494244/in/dateposted/&quot; title="20190108_복지동향 인터뷰_이원호" rel="nofollow"><img alt="20190108_복지동향 인터뷰_이원호" src="https://farm5.staticflickr.com/4807/46108494244_c2761d0e44_c.jpg&quot; /></a></p> <p dir="ltr"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f1c40f;">#용산참사_그리고_나 캠페인을 소개하는 이원호 사무국장 <사진 = 참여연대></span></p>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_그리고_나 캠페인을 소개해달라</strong></p> <p dir="ltr">해시태그 #용산참사_그리고_나를 넣은 글, 사진, 영상 등을 SNS에 공유하는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을 통해 개인들이 기억하는 용산참사와 그 의미를 모아보고자 했다. 당신은 어떻게 용산을 기억하고 생각하는지, 당신의 삶에서 용산참사는 어떤 의미인지 모아보고자 했다. 용산참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기억들이나 느낌들, 다양한 활동을 모아내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작년에는 영화 <공동정범>이 큰 화제가 되었다</strong></p> <p dir="ltr"><공동정범> 이전에 <두개의 문>을 기획할 때부터 용산참사, 그 날의 진실을 밝혀보자는 뜻이 있었다. <두개의 문>은 진실의 한 축인 철거민들이 감옥에 있는 상황이니, 당시 특공대원들의 진술이나 기록을 가지고 사건을 재구성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제목이 공동정범은 아니었지만, <두개의 문 2>를 기획할 때는 철거민들이 출소했으니 이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다른 버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자 애초 기획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흘러갔다. 당사자들의 기억들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고, 서로가 기억하는 것이 다르고, 그 날에 대한 기억이 원망으로 가득하기도 하고, 그 원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기억들로 가득했다. 법정에서 들었던 이야기, 혹은 누군가 주장했던 내용이 실제 경험한 것과 뒤섞여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직접 목격하지 못했을 법한 일도 본인은 확실하게 기억한다고 주장한다던가, 본인 입으로 이야기한 것인데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런 기억들을 제대로 모아내기 위해서, 정확한 기억을 가로막는 것 중 하나, ‘그 날 왜 망루에 올라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를 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스스로를 규명한다는 말이 인상깊은데</strong></p> <p dir="ltr">용산4구역 철거민들은 농성에 대한 결의를 가지고 망루에 올라갔다. 하지만 용산에 연대했던 타지역 사람들은 철거민 조직에 속해있었고, 당일 비밀스럽게 모인다는 사실만 알고 갔는데, 현장에 도착해서야 망루농성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도 있었다. 연대했던 사람들은 짐을 나르고 망루를 쌓고 내려가는 것으로 논의 되었고, 당사자들도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용산4구역 철거민들의 농성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루 도와주지만, 곧 철수해서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사람들이었고, 농성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공동정범>이 그 날과 관련한 철거민들의 기억을 힘겹게 끄집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strong></p> <p dir="ltr">용산에 연대했던 사람들은 그 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 용산참사 당일 자신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규명하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동료는 죽고, 자신은 경찰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됐다. 자신이 왜 감옥에 가야했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 분명히 있었다. 이충연 용산4구역 위원장은 어떻게 농성 준비를 했고, 왜 자신들에게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는지, 망루농성은 언제부터 계획된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p> <p dir="ltr"> </p> <p dir="ltr">반대로 이충연 위원장은 용산참사 당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아버지를 비롯한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떠올리는 것이 되니까. 그는 과거를 되짚기보다, 앞으로 우리가 뭘 할지를 이야기하자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피해자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졌다. 어떻게 진실을 밝혀낼지, 어떻게 힘을 모을지 이야기하자고 하는데, 그 날이 해석되지 않으니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과 갈등이 반복되고 심화되었다. 영화에서 그런 갈등을 드러내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그런 갈등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더욱 힘겨웠을 것 같다</strong></p> <p dir="ltr">국가폭력 관련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들어봤는데,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갈등은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했다. 국가라는 거대한 대상과 싸울 때, 피해자들은 초기에 똘똘 뭉쳐 싸우다가 해가 갈수록 국가는 아무런 응답도 없고 누구도 책임 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다 결국 책임의 손가락을 주변에서 찾게 되는 방식이 국가폭력 피해자들한테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한다. 용산참사도 그러한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했을 수도 있는데, 철거민들이 감옥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부각된 것이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영화는 마치 심리치유 방식처럼 진행되기도 한다</strong></p> <p dir="ltr">용산참사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심리치유 사업의 방식을 시도한 적도 있는데,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켰다. 집단상담 방식으로 진행하다보니,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서 서로 상처받기도 했다. 영화 <공동정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유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유가족과 유가족 간의 갈등, 유가족과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의 갈등, 유가족과 생존한 철거민들과의 갈등, 용산4구역과 연대지역 간의 갈등이 중첩되면서 증폭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실이 밝혀지는 것만이 유일한 치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그래서일까, <공동정범>은 촬영기간도 길었다고 들었다. 영화 이후 서로에게 미친 영향이 있을까</strong></p> <p dir="ltr"><공동정범> 촬영은 3년 걸렸다. 여러 차례 촬영하는 동안, 당사자들이 주변적 이야기나 앞으로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만, 당일 망루탈출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다른 데에선 용산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거나, 일부러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에는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 않다가 우연히 택시에서 용산관련 뉴스가 나오자 택시기사가 철거민들을 옹호하는 말을 들었다거나, 감옥에 있을 때 개봉한 <두개의 문>을 통해 용산참사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용산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조금씩 신뢰가 생겼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카메라 앞에서 하나둘씩 자신의 이야기,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들도 진실을 밝히고 싶은 욕구가 컸고, 그렇게 마음을 털어놓는 과정 자체가 갈등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의 가편집본을 같이 볼 때쯤에는 함께 서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어떻게 용산참사의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하게 됐는가</strong></p> <p dir="ltr">용산참사가 발생하기 전, 용산4구역에 집회나 교육이 있을 때마다 갔다. 주거연합이라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주로는 비닐하우스촌 지역, 재개발 지역 중 왕십리 뉴타운 주민들을 조직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빈곤사회연대를 통해 용산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19일에 농성을 계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망루를 지었다고 하니, 며칠 있다가 가보면 되겠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20일 새벽에 문자로 소식을 듣고, 바로 용산으로 달려갔다. 뉴스로 보는데 믿기지 않았다.</p> <p dir="ltr"> </p> <p dir="ltr">현장에 남아있다가 대책위 상황실에 파견되어 결합했다. 그런데 대책위의 상황실에 파견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3개월도 넘지 않아 ⅓도 남지 않고 빠지게 되었고, 이후 반년이 넘도록 장례도 못치르게 되면서 범대위 내부에서는 장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장례를 위한 협상을 하고, 이후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은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싸움을 이어가자고 결정했다.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이 내게 그동안 재개발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했으니, 이후 발족할 대책위를 맡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거부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지금의 모습을 보면 당신이 거부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strong></p> <p dir="ltr">거부한 이유는 명확했다. 당시에 주거권 관련 모임을 비롯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후속 대책위는 사건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뒤치다꺼리만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고민 끝에 사무국장을 맡은 이유는 철거민 운동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철거민 운동은 대중운동과의 접점이 있었다. 학생운동과 적극적으로 결합했고, 민주화운동과 발맞춰서 전개됐다. 그런데 이후부터 철거민 운동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다른 대중운동과의 접점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철거민운동의 문제만이 아니라, 철거민운동의 바라보는 사회운동의 시선에도 문제가 있었다.</p> <p dir="ltr"> </p> <p dir="ltr">용산참사는 그러한 철거민 운동과 다양한 사회운동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용산참사에 연대했던 철거민들은 수많은 시민들을 비롯해 문화예술인들, 종교인들이 연대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처음 경험하게 됐다. 용산참사대책위를 통해 내가 그 역할을 맡으면, 그 소중한 경험을 통해 철거민 운동과 사회운동을 더욱 강하게 연결시키고, 재개발·재건축 관련 싸움에서 개별 구역의 문제를 넘어선 대응을 모색하면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1월6일 방영된 MBC 스트레이트를 보고 착잡했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결정이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 의미와 한계를 짚어달라</strong></p> <p dir="ltr">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밀양 등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청와대에 독립적인 진상조사기구를 설치하라고 요구했다. 국가폭력 관련 사건들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하지만, 특별법을 제정할 만큼의 사회적 동력이 생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세월호와 같은 사건조차도 특별법이 겨우 제정될 정도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당시 문제가 있었던 기관들에 대해 정부가 자체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p> <p dir="ltr"> </p> <p dir="ltr">문재인 정부에서 출범한 경찰 진상조사위와 검찰 과거사위도 법령이 아닌 훈령에 근거한 위원회이며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기구라는 한계가 뚜렷했다. 용산참사는 여러 기관들이 서로 얽혀있는 사건이어서 검찰 및 경찰 산하 위원회는 당시 청와대의 지시, 국정원과 기무사의 여론조작 개입 등을 조사할 수 없었다. 검찰과 경찰 스스로 잘못한 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한계는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위원의 비율이 높은 점과 위원회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우선 지켜보기로 했던 것인데, 경찰 위원회의 결과를 보니 많이 아쉽다. 경찰 진상조사위는 조사 기한이 짧은데다 인력이 부족한 문제 등도 있었다. 게다가 유사한 국가폭력 사건들도 조사해야 했기 때문에 용산참사만 충분히 조사하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검찰 과거사위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strong></p> <p dir="ltr">경찰 진상조사위에서는 국가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조사의 경과 등을 충분히 공유하도록 요구할 수 있었는데, 검찰 과거사위는 그런 기본적인 소통조차 불가능하다. 용산참사를 담당하는 민간위원은 피해자 측과 통화하는 것조차도 부담을 느꼈다. 처음에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려는 것으로 생각해 의견서만 제출했다. 그런데 2018년 12월 말에 민간위원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했듯, 진상조사 과정에서 현직 검찰의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특히 용산참사 사건은 피해자 조사조차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종료를 앞둔 상황에서 3월까지 기한만 연장된 것이기에 매우 우려스럽다.</p> <p dir="ltr"> </p> <p dir="ltr">검찰 과거사위는 수사권을 부여받지 않았기에 용산참사 관련 책임자들을 강제소환할 권한도 없다. 검찰 과거사위의 목적은 검찰이 용산참사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고, 그 문제의 핵심은 불공정한 기소라고 본다. 당시 검찰은 용산참사의 철거민만 기소하고, 그 무리한 진압작전에 책임이 있는 경찰 관계자를 기소하지 않게 된 배경을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두 사정기관의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면, 검찰이 당시 경찰의 진압작전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적어도 경찰 진상조사위보다는 한 발 나아간 조사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p> <p dir="ltr"> </p> <p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45919001075/in/dateposted/&quot; title="20190115_용산참사10주기 기자회견" rel="nofollow"><img alt="20190115_용산참사10주기 기자회견" src="https://farm8.staticflickr.com/7898/45919001075_542b9b37ef_c.jpg&quot; /></a></p> <p dir="ltr"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f1c40f;">2019.01.15.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용산참사 피해자들 <사진 = 참여연대></span></p> <p dir="ltr"> </p> <p dir="ltr"><strong>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strong></p> <p dir="ltr">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비록 용산참사의 피해자는 아니지만. 용산참사 판결문을 읽어보면 총 6명의 사람이 죽었는데, 경찰 1명의 죽음에 대한 것만 조사됐다. 철거민 5명의 죽음 자체는 삭제된 것이다. 판결문은 사망한 5명은 생존한 철거민과 공모해서 경찰을 죽였으나,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책임을 묻지 못한다고 표현했다.</p> <p dir="ltr"> </p> <p dir="ltr">이후에 밝혀졌지만 용산4구역 재개발의 관리처분 인허가 과정에서 중대한 잘못이 있어서 그 처분이 무효로 결정됐다. 용산은 7년 동안 허허벌판으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 절차들을 다시 밟는 과정까지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않고 철거민들에게만 엄격히 책임을 물었다. 용산을 두고 ‘학살’이 아닌 ‘참사’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을 보면, 책임을 국가권력의 책임자로 단일화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우리가 비록 ‘피해자는 무죄다.’ 라는 구호를 쓰지만, 그 뜻이 피해자는 무결하다는 것이 아니다. 철거민들이 과도한 책임을 짊어진 것이고, 경찰의 잘못된 진압과 용산참사의 근원이었던 잘못된 개발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 원통하다는 뜻이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strong></p> <p dir="ltr">스스로 상처받았던 기억은... 나조차도 김석기 라는 사람이 용납되지 않는데, 유가족들도 당연할테다. 김석기가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적이 있었다. 경주에서 4박5일 동안 천막농성을 하면서 김석기 낙선운동을 했는데, 딱 한번 유가족들과 김석기가 마주치는 기회가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 중 누구도 김석기를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 피켓을 들고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과 함께 김석기가 연설 중인 방송차 바로 앞까지 갔는데, 그 순간 김석기가 우리를 발견하고 용산참사 진압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면서 ‘저들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법 세력들이었다’는 식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 과정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유가족들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농성 중이었던 천막으로 다시 모시고 갔는데... 그때 엄청 후회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어떤 점이 후회스러웠는지</strong></p> <p dir="ltr">지금도 그렇지만, 유가족들은 잊고 지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자꾸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먼저 제안하지 않으면 유가족들이 잊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용산참사의 트라우마는 아무리 애써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이 정말로 용산참사를 잊어버리는 상황이 당사자들에게 더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그 때는 너무 섣부르게 경주로 가자고 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석기를 대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대면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유가족들이 또다시 그런 아픈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자책했다.</p> <p dir="ltr"> </p> <p dir="ltr">김석기가 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던 투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공기업 낙하산 인사 반대 투쟁을 벌였던 노동조합과 연대했다. 공항공사 노조가 민주노총 산하에 있었지만 정체성은 달랐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역할을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연대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렸다. 노조가 김석기 사장 취임식 전날, 유가족 앞에서 무릎을 꿇고 ‘끝까지 가지못해 죄송하다’고 얘기하며 농성중이던 천막을 철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가족도 노조가 원하던 것이 관철됐으니 잘 됐다고, 축하드린다고 했다. 우린 노조를 원망하지 않지만 김석기가 다음날 취임식을 하니 천막만 그대로 두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노조는 사측과 천막을 철거하는 것까지 합의했던 모양인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천막이 철거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마지막 날은 노숙농성을 벌였다. 노조는 이후에 김석기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지지선언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민주주의 가치를 지향하는 노동조합의 산하 조직인데,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김석기는 승승장구해서 결국 20대 국회의원까지 됐다</strong></p> <p dir="ltr">김석기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경주에 내려가 낙선운동을 했다. 19대 총선에서 했던 낙선운동에 대해서는 검찰이 선거법 위반 사항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검찰은 20대 총선의 낙선운동에 참여했던 유가족과 활동가들을 기소했다. 선거법 위반 건으로 재판을 받아야했고, 유가족이 재판장에 서야만 했던 것이... 다시 후회됐다. 김석기도 한 번도 세워보지 못한 재판장에, 김석기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김석기 때문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니까. 이런 안 좋은 기억이 10년 동안 많이 쌓였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한국 사회는 2009년 용산참사 이후로 확실히 변했다고 느낀다. 용산참사를 경험한 이후로 부동산 광풍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고, 그 힘이 모여 결국 MB가 무력화시킨 종합부동산세가 2018년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strong></p> <p dir="ltr">집과 부동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용산참사 전부터 지금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철거민들의 고립감은 덜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부동산의 욕망에서 역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도 남아있긴 하다. 2009년 용산에 연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88올림픽 때나 있었을 법한 일들이 한국 사회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강제철거로 인한 문제들은 작게 보면 개발이 지정된 구역에 있는 사람들에 한정되며, 고립된 지역 안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발은 대상 구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나’의 주거권에도 영향을 미친다.</p> <p dir="ltr"> </p> <p dir="ltr">도시를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는 방식의 공익사업은 원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주택 공급을 늘려 집이 없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겠다는 명목으로 추진됐다.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15%에 불과했고, 집이 없는 사람들이 집을 가질 수 없었으며, 주택 공급의 절반 이상을 다주택자가 차지했다.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가 처음 공개됐을 때 1,083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시대를 살아왔고, 집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집을 사고 집 없는 사람들은 집 때문에 계속 고민이 늘었다.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금융권의 대출상품을 이용하지 않고는 안정적인 주거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주거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용산참사를 계기로 자신의 주거권과 관련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철거민들과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최근 집값이 폭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몇몇 지역에서 대규모 개발제한을 해제하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서, 용산참사를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마포아현 철거민이었던 박준경 열사 대책위에 참여했던 활동도 소개해달라</strong></p> <p dir="ltr">용산참사 이후에도 철거민들의 죽음이 여러차례 있었다. 이름 없는 죽음은 언론을 통해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기도 했고, 사망사건이 발생했지만 유가족이 원하지 않아서 공개적으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개별지역의 문제에 모두 결합할 수도 없고, 모든 개발지역 문제를 큰 공동대책위원회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발이라는 것은 기존의 지역 내의 관계, 경제적 상황이 완전히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역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 지역 공대위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사망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은 결국 사회적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역할을 하고는 있다. 용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상징적인 힘이 될 수 있으니까.</p> <p dir="ltr"> </p> <p dir="ltr">박준경 열사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착잡했다. 단독주택 재건축 문제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지만, 그에 대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 사실 용산참사도 마찬가지였다. 용산참사 이전까지는 주거세입자를 중심으로 터져나온 오랜 운동이 쌓여서 그와 관련한 정책들을 생산해냈다. 그런데 뉴타운은 예전과 같이 달동네를 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지역을 재개발하는 사업이었다. 상가세입자들의 문제가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시민사회는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시민사회는 상가세입자의 문제는 이권과 관련이 있다고 치부하며 적극적으로 정책 마련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용산참사가 터졌다. 이전에도 상가세입자들의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는데, 시민사회가 외면했던 것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할까. 박준경 열사 사건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다. 재개발 문제도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데, 재건축 문제까지 대응하긴 어렵지 않을까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 반성된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할 계획인가</strong></p> <p dir="ltr">용산참사는 10주기를 계기로 긴 시간에 걸친 활동의 의미를 드러내고, 추모제를 잘 진행하면서 큰 챕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전히 싸우고 요구할 것이 남은 상황이어서 많은 고민이 든다. 검찰 과거사위에서 경찰 조사 이상의 의미를 담은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른 대응도 필요하고, 유죄판결을 받았던 철거민들의 재심을 요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용산참사를 주제로 만든 다큐멘터리 중에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결국 내가 그 제목대로 된 것 같다.</p> <p dir="ltr"> </p> <blockquote> <p dir="ltr">인터뷰는 예정했던 시간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는 목이 메여 자주 말을 멈췄고, 빈 컵에 다시 물을 채울 시간이 필요했다. 용산참사를 두고 ‘10년이 지나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울부짖을 수도,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그칠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을 다시 기록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상처를 겪고도, 지난 10년 동안 지치지 않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한국 사회는 아직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민들은 그렇게 10년의 세월동안 조용히 용산참사를 추모했다.</p> </blockquote></div>
월, 2019/02/0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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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xe_content"><h1 style="text-align:justify;">'용산'이라는 미래</h1> <h2 style="text-align:justify;">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가 만든 비극</h2> <p style="text-align:justify;"><br /><strong>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현장을 왜 남일당이라고 불러요?"</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얼마 전 한 동생이 물었다. 그 건물 일 층에 남일당이라는 금은방이 있었거든. 그래서 남일당이야. 질문자는 한참 동안 대답을 믿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10년 동안 남일당이었다는 것은 조금 허망하다는 투였다. 원래 동네의 골목이란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일쑤다. 약국이 없는 사거리가 약국사거리거나 구청이 이전한 자리를 여전히 구청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골목이나 사람들이 사라진 동네는 예외다.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허허벌판이 되었다가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한강로5가 동, 용산4구역에서 핏줄처럼 흐르던 골목의 흔적은 더이상 느낄 수 없다. 2009년 1월 20일, 망루가 불타던 그날로부터 10년이 흘렀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strong>10년 동안 외쳐온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는 이주대책을 요구하던 용산4구역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용산참사 이후 화재의 원인과 사망, 진압과정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경찰은 수사기록 3천 쪽을 제출하지 않았고, 증거들은 사라지거나 훼손되었다. 철거민의 화염병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철거민들에 의해 난 불로 인해 경찰이 사망한 것으로 재판은 결론지어졌고, 철거민 5명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다루지조차 못한 채 망루 안에 있던 철거민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지난 10년간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다양한 사실을 밝혀냈다. 망루 안에 위험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지휘부가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원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 당시 경찰 서울청장이었던 김석기는 무전기를 꺼놓았다며 책임을 회피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 등 경찰의 작전이 매우 성급하고 무리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그러나 이러한 잘못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사카 총영사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현재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한 김석기는 무리한 진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이버수사대 요원 900명을 동원해 경찰 진압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댓글 공작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했다. 용산4구역의 개발 인허가는 이후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는 것이 확인되어 승인 취소되었지만 이로 인해 주거와 생계를 빼앗긴 이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10주기를 맞아 유가족과 피해생존 철거민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strong>삶과 존엄을 파괴하는 강제철거</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몇 가지 사실을 바르게 나열한다고 해서 진실이 드러나진 않는다. 용산참사의 진실은 우리가 본 불타는 망루에 담겨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2009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새로운 금융기법이었던 프로젝트파이낸싱은 천문학적인 대출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었으므로 빠른 개발만이 높은 이익을 보장했다. 빠른 개발은 철거민들의 빠른 퇴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강도 높은 폭력이다. 아직 살고 있는 주민들을 해코지하거나 장사하는 가게에 오물을 투척하거나, 빈집의 유리창과 문을 떼어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들은 모두 한국 사회 만연한 '철거'의 과정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4구역 철대위 위원장이었던 이충연은 망루에 오른 것은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피해 간 것'이라고 얘기한다. 더는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과 모욕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조합은 단 한 차례의 협의 조차 하려하지 않았다. 용산구청을 비롯해 조율에 나서거나 돕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들은 망루로 향했다. 망루를 오른 사람들은 남일당, 그 골목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지난 12월 3일에는 한강에서 마포 아현동 철거민 박준경 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10년째 살던 집에서 7월과 9월, 두 차례 강제철거를 당해 쫓겨났고, 임시로 머무르던 주변 공가에서마저 11월 30일 퇴거당한 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이후 서울시의 경우 동절기 강제철거가 금지되었지만 12월 1일부터 동절기에 해당한다. 그 전에 퇴거를 완료하기 위해 철거지역은 전쟁터가 되고, 박준경님의 마지막 철거 역시 11월 30일이었다. 용산참사 이후 재개발지역 상가세입자의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났지만 재건축 세입자에게는 이조차 해당하지 않기에 우장창창, 궁중족발 등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십 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용산참사 이후 개발지역 세입자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드러났고, 경찰 진상조사위원회과 검찰의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냈다. 비록 외압으로 인한 조사 부진과 한계를 갖고 있으나 유가족과 피해생존자,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용산참사 진상규명'의 초입에 섰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가깝게는 사망과 화재원인에 대한 규명과 진압 책임자의 처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도시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열심히 돈 벌어 건물주에게 바쳐야 하는 세입자들이 언젠가 건물주가 되길 희망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에 대한 몇 겹의 이해와 이를 개조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용산은 언제나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 </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a href="http://www.pressian.com/news/review_list_all.html?rvw_no=1661"&gt;클릭</a>)</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p> </blockquote></div>
월, 2019/01/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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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이라는 미래

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가 만든 비극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용산참사 현장을 왜 남일당이라고 불러요?"

 

얼마 전 한 동생이 물었다. 그 건물 일 층에 남일당이라는 금은방이 있었거든. 그래서 남일당이야. 질문자는 한참 동안 대답을 믿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10년 동안 남일당이었다는 것은 조금 허망하다는 투였다. 원래 동네의 골목이란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일쑤다. 약국이 없는 사거리가 약국사거리거나 구청이 이전한 자리를 여전히 구청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골목이나 사람들이 사라진 동네는 예외다.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이 되었다가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한강로5가 동, 용산4구역에서 핏줄처럼 흐르던 골목의 흔적은 더이상 느낄 수 없다. 2009년 1월 20일, 망루가 불타던 그날로부터 10년이 흘렀다.

 

10년 동안 외쳐온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용산참사는 이주대책을 요구하던 용산4구역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용산참사 이후 화재의 원인과 사망, 진압과정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경찰은 수사기록 3천 쪽을 제출하지 않았고, 증거들은 사라지거나 훼손되었다. 철거민의 화염병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철거민들에 의해 난 불로 인해 경찰이 사망한 것으로 재판은 결론지어졌고, 철거민 5명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다루지조차 못한 채 망루 안에 있던 철거민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10년간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다양한 사실을 밝혀냈다. 망루 안에 위험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지휘부가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원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 당시 경찰 서울청장이었던 김석기는 무전기를 꺼놓았다며 책임을 회피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 등 경찰의 작전이 매우 성급하고 무리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사카 총영사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현재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한 김석기는 무리한 진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이버수사대 요원 900명을 동원해 경찰 진압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댓글 공작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했다. 용산4구역의 개발 인허가는 이후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는 것이 확인되어 승인 취소되었지만 이로 인해 주거와 생계를 빼앗긴 이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용산참사 10주기를 맞아 유가족과 피해생존 철거민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과 존엄을 파괴하는 강제철거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몇 가지 사실을 바르게 나열한다고 해서 진실이 드러나진 않는다. 용산참사의 진실은 우리가 본 불타는 망루에 담겨있다.

 

2009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새로운 금융기법이었던 프로젝트파이낸싱은 천문학적인 대출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었으므로 빠른 개발만이 높은 이익을 보장했다. 빠른 개발은 철거민들의 빠른 퇴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강도 높은 폭력이다. 아직 살고 있는 주민들을 해코지하거나 장사하는 가게에 오물을 투척하거나, 빈집의 유리창과 문을 떼어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들은 모두 한국 사회 만연한 '철거'의 과정이다.

 

용산4구역 철대위 위원장이었던 이충연은 망루에 오른 것은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피해 간 것'이라고 얘기한다. 더는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과 모욕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조합은 단 한 차례의 협의 조차 하려하지 않았다. 용산구청을 비롯해 조율에 나서거나 돕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들은 망루로 향했다. 망루를 오른 사람들은 남일당, 그 골목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난 12월 3일에는 한강에서 마포 아현동 철거민 박준경 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10년째 살던 집에서 7월과 9월, 두 차례 강제철거를 당해 쫓겨났고, 임시로 머무르던 주변 공가에서마저 11월 30일 퇴거당한 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용산참사 이후 서울시의 경우 동절기 강제철거가 금지되었지만 12월 1일부터 동절기에 해당한다. 그 전에 퇴거를 완료하기 위해 철거지역은 전쟁터가 되고, 박준경님의 마지막 철거 역시 11월 30일이었다. 용산참사 이후 재개발지역 상가세입자의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났지만 재건축 세입자에게는 이조차 해당하지 않기에 우장창창, 궁중족발 등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십 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용산참사 이후 개발지역 세입자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드러났고, 경찰 진상조사위원회과 검찰의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냈다. 비록 외압으로 인한 조사 부진과 한계를 갖고 있으나 유가족과 피해생존자,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용산참사 진상규명'의 초입에 섰다.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가깝게는 사망과 화재원인에 대한 규명과 진압 책임자의 처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도시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열심히 돈 벌어 건물주에게 바쳐야 하는 세입자들이 언젠가 건물주가 되길 희망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에 대한 몇 겹의 이해와 이를 개조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용산은 언제나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월, 2019/01/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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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산업생태계와 역사문화가 보전되는 재생으로 전환하라

– 기존상인재정착률 15%, 도심산업면적 확보 10%, 임시영업장 제공 20% –
– 도심산업생태계 보호를 강조한 서울시 정책의 초라한 성적표 –
– 서울시는 재개발사업의 각종 특혜와 개발이익을 걷어내라 –

박원순 서울시장은 어제(16일)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세운상가지역 도심재개발 사업을 재검토한다고 밝혔다. 최근 서울시가 도심 규제완화로 주택공급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사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을지로의 오래된 식당들이 철거되고 도심산업상인이 폐업상황에 이르자 청계천 도심산업생태계도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와 비판에 따른 것이다.

이미 많은 상가가 건물철거에 따라 뿔뿔이 흩어지거나 폐업한 상황에서 박시장의 뒤늦은 재검토 발표는 아쉽다. 그동안 상인들은 서울시의 상인재정착대책이 실효성이 없다는 문제를 수차례 지적하고 대책마련을 요구했으나 서울시는 이를 묵살했다. 시의 정책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과거 개발 관행대로 사업을 방치해 이러한 사태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서울시는 일부 유명한 상점 몇 곳을 남기는 형식적 재검토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도심산업생태계와 역사와 문화를 살릴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도심재생정책을 제시하고 토건세력의 수익사업으로 전락한 재개발사업의 특혜를 걷어내어 주민 중심의 재생정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법제도개선에도 노력해야 한다..

1. 도심산업생태계 보호위한 서울시 대책은 실패한 정책이다.

2014년 서울시는 세운상가를 분리•존치하여 전통제조산업과 새로운 기술을 연결하는 도심제조업의 전진기지로 재생하고, 세운상가 주변지역은 도심산업의 발전적 재편과 역사문화 보전관리, 점진적 정비를 통해 주민과 소상공인의 재정착률을 높이는 내용을 포함해 세운상가 일대 재정비를 위한 상위계획 성격의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했다. 기존 전면 철거방식의 대규모 사업추진 방식으로는 도심산업생태계 보호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서울시가 제시한 상인대책은 사업자에게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기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임시상가는 상인 20%에게만 선별적으로 제공했고, 기존 산업상인들이 입주할 수 있는 산업공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실효성 없는 대책이었다. 도심산업의 특성상 연계된 사업장간 접근성과 협력시스템 유지가 산업생태계 보전의 핵심사항이며 이를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이주할 수 있는 임시영업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상인 20%에게만 사업장을 제공하면 나머지 80%는 뿔뿔이 흩어지거나 경쟁력을 잃어 폐업할 수밖에 없다. 왜 기존 상인 20%에게만 제공하는지에 대한 근거조차 없을 정도로 서울시의 대책은 엉터리다.

서울시가 천명한 도심산업생태계의 보호를 위해서는 최소한 기존 산업상인들이 지속적으로 영업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며, 도심산업의 발전적 재편을 위해서는 산업공간 확대가 고려되어야 하는데, 임시상가 20% 제공은 계획에서부터 원칙이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2. 낮은 상인재정착률, 실효성 없는 대책의 초라한 성적표다.

경실련 조사에 의하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세운 3-1/4,5구역의 사업 후 상인재정착률은 15%, 도심산업면적은 기존 사업장의 10%에 그쳤으며, 임시영업장은 20% 상인에게만 제공되었다. 서울시가 도심산업생태계 보호를 전면에 내세워 제시한 대책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지극히 초라한 성적표다. 사업자는 이런 실효성 없는 대책에도 시세 추정 470억원 상당의 용적률 인센티브를 챙겨갔다. 도심산업면적의 4배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인센티브란 기본적인 행위 외에 추가 기여가 인정될 때 제공되는 것이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에서 도심산업생태계 보호 및 도심산업의 발전적 재편은 계획의 기본 행위인데도 인센티브를 부여한 것으로 이는 개발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대책에 불과하다. 상인재입주대책이기 보다는 사업자 특혜 대책이다.

3. 재개발사업 활성화를 위해 사업자에게 준 각종 규제완화를 폐지하라

이번 사태는 청계천 도심산업생태계와 역사문화를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서울시가 도심산업의 특성과 역사성, 지역 주민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재개발사업을 경기부양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사업자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결과다. 주거타운화를 방지하기 위해 주거비율을 60%까지 제한하겠다는 계획원칙을 깨고 사업자의 편의에 맞춰 주거비율을 90%로 완화해 사업시행인가를 승인한 것도 기존 산업상인들을 위한 공간 확보를 어렵게 했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도심상업지역 주거비율 완화(현행 60% –>90%) 방안은 상인들의 생존권과도 직결될 수 있으므로 조례개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울러 재개발 사업자에게 부여된 막대한 특혜와 개발이익부터 걷어내야 도시재생정책이 정상화될 수 있다. 현재 재개발 사업자에게 주어진 강제수용권, 각종 건축규제 완화와 기반시설 확보 의무 완화(주차장 과 학교 건립의무 완화, 과밀부담금 면제)와 개발이익 환수 감면 규정을 폐기하고 세입자 참여와 이주 보상대책도 현실화해야 한다. 이를 위한 법개정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박원순시장은 노포들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유명한 식당만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이름 모를 소규모 상인들도 지역의 상권을 일구며 살아온 우리사회 소중한 구성원으로 지켜줘야 할 대상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재개발사업으로 세입자가 죽고 지역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뉴스를 들어야 하는가? 이제는 끝내야 한다. 박시장이 그 논의를 시작하라.끝.

목, 2019/01/1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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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향한 무자비한 경찰 폭력 확인된

용산참사, 조사위 권고 즉각 이행해야

경찰의 ‘대테러작전’ 과잉진압으로 인명피해 초래,

조직적 여론 조작, 유가족 미행, 사찰한 사실 드러나 

철거용역 폭력예방, 특공대 집회시위·철거현장 투입 금지 등

조사위원회 권고안 즉각 이행하고 재발방지책 마련해야

 

지난 9월 5일,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원회)는 2009년 용산참사 사건에 대해 ‘김석기 등 경찰지휘부가 안전대책 없는 조기 과잉진압을 강행했고, 이러한 결정이 다수의 인명피해를 야기한 원인이며, 국민의 생명·신체를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김석기 당시 경찰청장 내정자의 지시사항을 실행하기 위한 대응문건에서는 사이버수사대 900명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여론 조작을 시도한 사실도 밝혀졌다. 용산 참사 후 10년, 늦었지만 이제라도 김석기 등 당시 경찰지휘부의 책임에 대한 규명이 이뤄져서 다행이다. 주거권네트워크는 용산 참사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가 책임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처벌,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사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국민의 생명·신체와 재산을 보호하고, 범죄를 예방·진압·수사를 해야 할 경찰이 생존권을 지키려는 철거민을 과잉진압해 인명 피해를 초래한 것도 모자라 900명의 사이버수사요원을 동원해 각종 여론 조작을 시도하고, 유가족을 미행하고 사찰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김석기 등 경찰수뇌부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오른 철거민들을 대상으로 ‘대테러작전’을 한다며 강제진압을 정당화하려 했으며, 실제 고도로 훈련된 특공대원들을 용산 참사 현장에 투입했다. 이 같은 행위에 책임을 지고 처벌받아야 할 당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수사를 권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안의 심각성과 죄질을 고려할 때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하여 범죄 혐의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하는 것까지 고려함이 마땅하다.

 

경찰은 이제라도 지난 10년 동안 고통받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한다. 또한 그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찰은 조사위원회가 권고한대로 ‘진압작전 수행시, 안전대책을 충분히 마련하고 이에 대한 철저한 점검 등을 마친 후에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을 정비하고 제도를 만들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경찰공권력의 행사는 목적 달성에 가장 적합하고도 필요 최소한의 수단과 방법을 선택해야 하고 과도하게 행사되어서는 안된다. 대테러, 인질구조를 위해 설립된 경찰특공대가 집회시위, 철거현장과 같은 민생관련 현장에 투입되는 것을 금지하도록 ‘경찰특공대 운영 규칙’을 개정해야 한다.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등 공권력 남용 행위는 용산참사에만 그치지 않았다. 최근 조사결과로 확인되었듯이 용산참사 이후 경찰의 폭력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과 백남기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살인적 진압으로 이어졌다. 악의적인 여론몰이를 통해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진압하고 조작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곳에 공권력을 부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찰이 공권력으로 바로 서려면, 반드시 환골탈태해야 한다. 조사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하는 것은 경찰의 통렬한 반성과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최소한의 조치라는 것을 경찰은 명심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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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0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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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정범 The Remnants 연출 김일란, 이혁상│2016│Documentary│106min│HD│Color│16:9│5.1│2018.01.25 개봉 언어 : 한국어|자막 : 한국어, 영어 제작: 연분홍치마 배급: (주)시네마달 SYNOPSIS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의심이 시작된다! 2009년 1월 20일, 철거민 5명,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사망한 ‘용산참사’ 이후 억울하게 수감되었던 철거민들이 처음으로 한자리..
월, 2018/04/2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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