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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톡] 용산참사 10년, 떠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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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톡] 용산참사 10년, 떠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

익명 (미확인) | 월, 2019/02/04- 12:07
<div class="xe_content"><h1 dir="ltr">용산참사 10년, 떠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h1> <p dir="ltr"> </p> <h3 dir="ltr" style="text-align:right;">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h3> <p dir="ltr" style="text-align:right;"><strong>인터뷰 및 정리 김경희, 홍정훈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strong></p> <p dir="ltr" style="text-align:right;"> </p> <blockquote> <p dir="ltr">2019년 1월 8일 그를 찾았다. 매년 그맘때면 그는 정신없이 바쁘다. 올해 10주기를 맞는 용산참사 추모위원회를 준비하기도 벅찬데, 마포아현 철거민 박준경 열사의 가족을 돕는 일도 맡았다. 작년에는 참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공동정범’을 개봉했고, 그 작품은 2018년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평가받는다. 오랜 잔상을 남긴 그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목소리를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을 만났다.</p> </blockquote>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 10주기를 맞는 소감은</strong></p> <p dir="ltr">용산참사 이후 장례를 치르기까지 355일이 걸렸다. 더 미룰 수 없어 장례를 위한 협의를 하고 장례를 치른 것이다. 당시 대책위의 정식 명칭을 아는 사람이 없을 거다. ‘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라는 긴 이름이었다. 당시 사건의 책임을 분명히 하자는 의미로 ‘이명박 정권’을 대책위 이름에 넣었다. 대책위를 해소하고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로 전환했다. 당시에 장례를 치르면서 10년 안에 진실을 밝혀내자, 이것을 과거사로 넘겨버리지 않도록 하자고 약속했는데... 약속했던 10년이 되어버렸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 10주기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본다면</strong></p> <p dir="ltr">10주기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고민은 용산참사 이후 10년의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가족들의 입장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규명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10주기를 맞이하면서도 지난 10년을 절망적인 세월로 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찬히 돌아보면 지난 10년 동안 함께 싸웠고, 유가족들은 지치지 않고 앞서서 걸어왔으며, 그 과정들을 통해서 조금씩 사회를 바꿨다는 의미를 잘 찾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지만 경찰 진상조사위원회 결과도 있었고, 정부 차원에서 용산참사에 관한 과잉진압을 인정하고 국무총리의 사과 표명도 이끌어냈다. 최근 문제가 많이 드러나고 있지만, 검찰도 자체 과거사위원회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함께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싶었다.</p> <p dir="ltr"> </p> <p dir="ltr">또 잘 드러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기억들이 지난 10년 동안 개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조금씩 이끌어왔다. 2008년까지 뉴타운 광풍이 한국 사회를 지배할 정도로 들끓었고, 부동산에 대한 욕망과 가격 거품을 정권차원에서 부풀리고 떠받쳐왔다. 2009년 용산참사가 터지고, 현장에 찾아와 자기고백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도 그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면서. 물론 집이나 부동산을 둘러싼 욕망들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긴 하지만, 용산참사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그 욕망들이 거짓되었다는 점, 그에 대한 반성이 분명히 일어나기 시작했다.</p> <p dir="ltr"> </p> <p dir="ltr">용산참사 이후의 세대, 용산참사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청년들도 있다. 강제철거, 상가세입자가 쫓겨나는 문제에 대응하는 활동을 하거나, 주거권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이나 현실을 이야기할 때 용산을 호명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10주기에는 이런 사회적 의미, 개인들이 갖고 있는 기억이나 의미들을 잘 살리기 위해서 #용산참사_그리고_나 캠페인을 하고 있다.</p> <p dir="ltr"> </p> <p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46108494244/in/dateposted/&quot; title="20190108_복지동향 인터뷰_이원호" rel="nofollow"><img alt="20190108_복지동향 인터뷰_이원호" src="https://farm5.staticflickr.com/4807/46108494244_c2761d0e44_c.jpg&quot; /></a></p> <p dir="ltr"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f1c40f;">#용산참사_그리고_나 캠페인을 소개하는 이원호 사무국장 <사진 = 참여연대></span></p>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_그리고_나 캠페인을 소개해달라</strong></p> <p dir="ltr">해시태그 #용산참사_그리고_나를 넣은 글, 사진, 영상 등을 SNS에 공유하는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을 통해 개인들이 기억하는 용산참사와 그 의미를 모아보고자 했다. 당신은 어떻게 용산을 기억하고 생각하는지, 당신의 삶에서 용산참사는 어떤 의미인지 모아보고자 했다. 용산참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기억들이나 느낌들, 다양한 활동을 모아내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작년에는 영화 <공동정범>이 큰 화제가 되었다</strong></p> <p dir="ltr"><공동정범> 이전에 <두개의 문>을 기획할 때부터 용산참사, 그 날의 진실을 밝혀보자는 뜻이 있었다. <두개의 문>은 진실의 한 축인 철거민들이 감옥에 있는 상황이니, 당시 특공대원들의 진술이나 기록을 가지고 사건을 재구성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제목이 공동정범은 아니었지만, <두개의 문 2>를 기획할 때는 철거민들이 출소했으니 이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다른 버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자 애초 기획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흘러갔다. 당사자들의 기억들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고, 서로가 기억하는 것이 다르고, 그 날에 대한 기억이 원망으로 가득하기도 하고, 그 원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기억들로 가득했다. 법정에서 들었던 이야기, 혹은 누군가 주장했던 내용이 실제 경험한 것과 뒤섞여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직접 목격하지 못했을 법한 일도 본인은 확실하게 기억한다고 주장한다던가, 본인 입으로 이야기한 것인데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런 기억들을 제대로 모아내기 위해서, 정확한 기억을 가로막는 것 중 하나, ‘그 날 왜 망루에 올라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를 규명하는 것이 필요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스스로를 규명한다는 말이 인상깊은데</strong></p> <p dir="ltr">용산4구역 철거민들은 농성에 대한 결의를 가지고 망루에 올라갔다. 하지만 용산에 연대했던 타지역 사람들은 철거민 조직에 속해있었고, 당일 비밀스럽게 모인다는 사실만 알고 갔는데, 현장에 도착해서야 망루농성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도 있었다. 연대했던 사람들은 짐을 나르고 망루를 쌓고 내려가는 것으로 논의 되었고, 당사자들도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용산4구역 철거민들의 농성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하루 도와주지만, 곧 철수해서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사람들이었고, 농성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공동정범>이 그 날과 관련한 철거민들의 기억을 힘겹게 끄집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strong></p> <p dir="ltr">용산에 연대했던 사람들은 그 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 용산참사 당일 자신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규명하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동료는 죽고, 자신은 경찰을 죽였다는 죄목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됐다. 자신이 왜 감옥에 가야했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이 분명히 있었다. 이충연 용산4구역 위원장은 어떻게 농성 준비를 했고, 왜 자신들에게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는지, 망루농성은 언제부터 계획된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p> <p dir="ltr"> </p> <p dir="ltr">반대로 이충연 위원장은 용산참사 당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아버지를 비롯한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떠올리는 것이 되니까. 그는 과거를 되짚기보다, 앞으로 우리가 뭘 할지를 이야기하자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피해자들 사이의 갈등이 불거졌다. 어떻게 진실을 밝혀낼지, 어떻게 힘을 모을지 이야기하자고 하는데, 그 날이 해석되지 않으니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과 갈등이 반복되고 심화되었다. 영화에서 그런 갈등을 드러내는 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그런 갈등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더욱 힘겨웠을 것 같다</strong></p> <p dir="ltr">국가폭력 관련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들어봤는데,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갈등은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했다. 국가라는 거대한 대상과 싸울 때, 피해자들은 초기에 똘똘 뭉쳐 싸우다가 해가 갈수록 국가는 아무런 응답도 없고 누구도 책임 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다 결국 책임의 손가락을 주변에서 찾게 되는 방식이 국가폭력 피해자들한테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한다. 용산참사도 그러한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했을 수도 있는데, 철거민들이 감옥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나중에서야 부각된 것이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영화는 마치 심리치유 방식처럼 진행되기도 한다</strong></p> <p dir="ltr">용산참사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심리치유 사업의 방식을 시도한 적도 있는데,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켰다. 집단상담 방식으로 진행하다보니,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서 서로 상처받기도 했다. 영화 <공동정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유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유가족과 유가족 간의 갈등, 유가족과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의 갈등, 유가족과 생존한 철거민들과의 갈등, 용산4구역과 연대지역 간의 갈등이 중첩되면서 증폭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진실이 밝혀지는 것만이 유일한 치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그래서일까, <공동정범>은 촬영기간도 길었다고 들었다. 영화 이후 서로에게 미친 영향이 있을까</strong></p> <p dir="ltr"><공동정범> 촬영은 3년 걸렸다. 여러 차례 촬영하는 동안, 당사자들이 주변적 이야기나 앞으로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만, 당일 망루탈출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다른 데에선 용산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거나, 일부러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주변에는 아예 이야기를 꺼내지 않다가 우연히 택시에서 용산관련 뉴스가 나오자 택시기사가 철거민들을 옹호하는 말을 들었다거나, 감옥에 있을 때 개봉한 <두개의 문>을 통해 용산참사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용산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조금씩 신뢰가 생겼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카메라 앞에서 하나둘씩 자신의 이야기,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들도 진실을 밝히고 싶은 욕구가 컸고, 그렇게 마음을 털어놓는 과정 자체가 갈등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의 가편집본을 같이 볼 때쯤에는 함께 서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어떻게 용산참사의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하게 됐는가</strong></p> <p dir="ltr">용산참사가 발생하기 전, 용산4구역에 집회나 교육이 있을 때마다 갔다. 주거연합이라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주로는 비닐하우스촌 지역, 재개발 지역 중 왕십리 뉴타운 주민들을 조직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빈곤사회연대를 통해 용산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19일에 농성을 계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망루를 지었다고 하니, 며칠 있다가 가보면 되겠다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20일 새벽에 문자로 소식을 듣고, 바로 용산으로 달려갔다. 뉴스로 보는데 믿기지 않았다.</p> <p dir="ltr"> </p> <p dir="ltr">현장에 남아있다가 대책위 상황실에 파견되어 결합했다. 그런데 대책위의 상황실에 파견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3개월도 넘지 않아 ⅓도 남지 않고 빠지게 되었고, 이후 반년이 넘도록 장례도 못치르게 되면서 범대위 내부에서는 장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장례를 위한 협상을 하고, 이후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은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싸움을 이어가자고 결정했다.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이 내게 그동안 재개발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했으니, 이후 발족할 대책위를 맡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거부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지금의 모습을 보면 당신이 거부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strong></p> <p dir="ltr">거부한 이유는 명확했다. 당시에 주거권 관련 모임을 비롯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후속 대책위는 사건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뒤치다꺼리만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고민 끝에 사무국장을 맡은 이유는 철거민 운동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철거민 운동은 대중운동과의 접점이 있었다. 학생운동과 적극적으로 결합했고, 민주화운동과 발맞춰서 전개됐다. 그런데 이후부터 철거민 운동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다른 대중운동과의 접점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철거민운동의 문제만이 아니라, 철거민운동의 바라보는 사회운동의 시선에도 문제가 있었다.</p> <p dir="ltr"> </p> <p dir="ltr">용산참사는 그러한 철거민 운동과 다양한 사회운동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용산참사에 연대했던 철거민들은 수많은 시민들을 비롯해 문화예술인들, 종교인들이 연대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처음 경험하게 됐다. 용산참사대책위를 통해 내가 그 역할을 맡으면, 그 소중한 경험을 통해 철거민 운동과 사회운동을 더욱 강하게 연결시키고, 재개발·재건축 관련 싸움에서 개별 구역의 문제를 넘어선 대응을 모색하면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1월6일 방영된 MBC 스트레이트를 보고 착잡했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결정이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 의미와 한계를 짚어달라</strong></p> <p dir="ltr">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밀양 등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청와대에 독립적인 진상조사기구를 설치하라고 요구했다. 국가폭력 관련 사건들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하지만, 특별법을 제정할 만큼의 사회적 동력이 생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세월호와 같은 사건조차도 특별법이 겨우 제정될 정도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당시 문제가 있었던 기관들에 대해 정부가 자체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p> <p dir="ltr"> </p> <p dir="ltr">문재인 정부에서 출범한 경찰 진상조사위와 검찰 과거사위도 법령이 아닌 훈령에 근거한 위원회이며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는 기구라는 한계가 뚜렷했다. 용산참사는 여러 기관들이 서로 얽혀있는 사건이어서 검찰 및 경찰 산하 위원회는 당시 청와대의 지시, 국정원과 기무사의 여론조작 개입 등을 조사할 수 없었다. 검찰과 경찰 스스로 잘못한 행위에 대해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한계는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위원의 비율이 높은 점과 위원회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우선 지켜보기로 했던 것인데, 경찰 위원회의 결과를 보니 많이 아쉽다. 경찰 진상조사위는 조사 기한이 짧은데다 인력이 부족한 문제 등도 있었다. 게다가 유사한 국가폭력 사건들도 조사해야 했기 때문에 용산참사만 충분히 조사하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검찰 과거사위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strong></p> <p dir="ltr">경찰 진상조사위에서는 국가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조사의 경과 등을 충분히 공유하도록 요구할 수 있었는데, 검찰 과거사위는 그런 기본적인 소통조차 불가능하다. 용산참사를 담당하는 민간위원은 피해자 측과 통화하는 것조차도 부담을 느꼈다. 처음에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려는 것으로 생각해 의견서만 제출했다. 그런데 2018년 12월 말에 민간위원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했듯, 진상조사 과정에서 현직 검찰의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특히 용산참사 사건은 피해자 조사조차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종료를 앞둔 상황에서 3월까지 기한만 연장된 것이기에 매우 우려스럽다.</p> <p dir="ltr"> </p> <p dir="ltr">검찰 과거사위는 수사권을 부여받지 않았기에 용산참사 관련 책임자들을 강제소환할 권한도 없다. 검찰 과거사위의 목적은 검찰이 용산참사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고, 그 문제의 핵심은 불공정한 기소라고 본다. 당시 검찰은 용산참사의 철거민만 기소하고, 그 무리한 진압작전에 책임이 있는 경찰 관계자를 기소하지 않게 된 배경을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두 사정기관의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면, 검찰이 당시 경찰의 진압작전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적어도 경찰 진상조사위보다는 한 발 나아간 조사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p> <p dir="ltr"> </p> <p style="text-align:center;"><a href="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45919001075/in/dateposted/&quot; title="20190115_용산참사10주기 기자회견" rel="nofollow"><img alt="20190115_용산참사10주기 기자회견" src="https://farm8.staticflickr.com/7898/45919001075_542b9b37ef_c.jpg&quot; /></a></p> <p dir="ltr"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color:#f1c40f;">2019.01.15.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 중인 용산참사 피해자들 <사진 = 참여연대></span></p> <p dir="ltr"> </p> <p dir="ltr"><strong>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strong></p> <p dir="ltr">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비록 용산참사의 피해자는 아니지만. 용산참사 판결문을 읽어보면 총 6명의 사람이 죽었는데, 경찰 1명의 죽음에 대한 것만 조사됐다. 철거민 5명의 죽음 자체는 삭제된 것이다. 판결문은 사망한 5명은 생존한 철거민과 공모해서 경찰을 죽였으나,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책임을 묻지 못한다고 표현했다.</p> <p dir="ltr"> </p> <p dir="ltr">이후에 밝혀졌지만 용산4구역 재개발의 관리처분 인허가 과정에서 중대한 잘못이 있어서 그 처분이 무효로 결정됐다. 용산은 7년 동안 허허벌판으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 절차들을 다시 밟는 과정까지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않고 철거민들에게만 엄격히 책임을 물었다. 용산을 두고 ‘학살’이 아닌 ‘참사’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을 보면, 책임을 국가권력의 책임자로 단일화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우리가 비록 ‘피해자는 무죄다.’ 라는 구호를 쓰지만, 그 뜻이 피해자는 무결하다는 것이 아니다. 철거민들이 과도한 책임을 짊어진 것이고, 경찰의 잘못된 진압과 용산참사의 근원이었던 잘못된 개발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 원통하다는 뜻이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strong></p> <p dir="ltr">스스로 상처받았던 기억은... 나조차도 김석기 라는 사람이 용납되지 않는데, 유가족들도 당연할테다. 김석기가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적이 있었다. 경주에서 4박5일 동안 천막농성을 하면서 김석기 낙선운동을 했는데, 딱 한번 유가족들과 김석기가 마주치는 기회가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 중 누구도 김석기를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 피켓을 들고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과 함께 김석기가 연설 중인 방송차 바로 앞까지 갔는데, 그 순간 김석기가 우리를 발견하고 용산참사 진압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면서 ‘저들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법 세력들이었다’는 식으로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 과정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유가족들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농성 중이었던 천막으로 다시 모시고 갔는데... 그때 엄청 후회했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어떤 점이 후회스러웠는지</strong></p> <p dir="ltr">지금도 그렇지만, 유가족들은 잊고 지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자꾸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먼저 제안하지 않으면 유가족들이 잊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용산참사의 트라우마는 아무리 애써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이 정말로 용산참사를 잊어버리는 상황이 당사자들에게 더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도… 그 때는 너무 섣부르게 경주로 가자고 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석기를 대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대면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유가족들이 또다시 그런 아픈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자책했다.</p> <p dir="ltr"> </p> <p dir="ltr">김석기가 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던 투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공기업 낙하산 인사 반대 투쟁을 벌였던 노동조합과 연대했다. 공항공사 노조가 민주노총 산하에 있었지만 정체성은 달랐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역할을 특별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연대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렸다. 노조가 김석기 사장 취임식 전날, 유가족 앞에서 무릎을 꿇고 ‘끝까지 가지못해 죄송하다’고 얘기하며 농성중이던 천막을 철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가족도 노조가 원하던 것이 관철됐으니 잘 됐다고, 축하드린다고 했다. 우린 노조를 원망하지 않지만 김석기가 다음날 취임식을 하니 천막만 그대로 두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노조는 사측과 천막을 철거하는 것까지 합의했던 모양인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천막이 철거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마지막 날은 노숙농성을 벌였다. 노조는 이후에 김석기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지지선언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민주주의 가치를 지향하는 노동조합의 산하 조직인데,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김석기는 승승장구해서 결국 20대 국회의원까지 됐다</strong></p> <p dir="ltr">김석기가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경주에 내려가 낙선운동을 했다. 19대 총선에서 했던 낙선운동에 대해서는 검찰이 선거법 위반 사항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검찰은 20대 총선의 낙선운동에 참여했던 유가족과 활동가들을 기소했다. 선거법 위반 건으로 재판을 받아야했고, 유가족이 재판장에 서야만 했던 것이... 다시 후회됐다. 김석기도 한 번도 세워보지 못한 재판장에, 김석기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김석기 때문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니까. 이런 안 좋은 기억이 10년 동안 많이 쌓였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한국 사회는 2009년 용산참사 이후로 확실히 변했다고 느낀다. 용산참사를 경험한 이후로 부동산 광풍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퍼지기 시작했고, 그 힘이 모여 결국 MB가 무력화시킨 종합부동산세가 2018년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strong></p> <p dir="ltr">집과 부동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용산참사 전부터 지금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철거민들의 고립감은 덜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부동산의 욕망에서 역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도 남아있긴 하다. 2009년 용산에 연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88올림픽 때나 있었을 법한 일들이 한국 사회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강제철거로 인한 문제들은 작게 보면 개발이 지정된 구역에 있는 사람들에 한정되며, 고립된 지역 안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발은 대상 구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기 때문에 ‘나’의 주거권에도 영향을 미친다.</p> <p dir="ltr"> </p> <p dir="ltr">도시를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는 방식의 공익사업은 원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주택 공급을 늘려 집이 없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겠다는 명목으로 추진됐다.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15%에 불과했고, 집이 없는 사람들이 집을 가질 수 없었으며, 주택 공급의 절반 이상을 다주택자가 차지했다.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가 처음 공개됐을 때 1,083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시대를 살아왔고, 집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집을 사고 집 없는 사람들은 집 때문에 계속 고민이 늘었다.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금융권의 대출상품을 이용하지 않고는 안정적인 주거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주거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용산참사를 계기로 자신의 주거권과 관련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철거민들과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최근 집값이 폭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몇몇 지역에서 대규모 개발제한을 해제하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서, 용산참사를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마포아현 철거민이었던 박준경 열사 대책위에 참여했던 활동도 소개해달라</strong></p> <p dir="ltr">용산참사 이후에도 철거민들의 죽음이 여러차례 있었다. 이름 없는 죽음은 언론을 통해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려지기도 했고, 사망사건이 발생했지만 유가족이 원하지 않아서 공개적으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적도 있다. 개인적으로 개별지역의 문제에 모두 결합할 수도 없고, 모든 개발지역 문제를 큰 공동대책위원회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발이라는 것은 기존의 지역 내의 관계, 경제적 상황이 완전히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역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 지역 공대위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사망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은 결국 사회적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역할을 하고는 있다. 용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상징적인 힘이 될 수 있으니까.</p> <p dir="ltr"> </p> <p dir="ltr">박준경 열사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착잡했다. 단독주택 재건축 문제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지만, 그에 대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 사실 용산참사도 마찬가지였다. 용산참사 이전까지는 주거세입자를 중심으로 터져나온 오랜 운동이 쌓여서 그와 관련한 정책들을 생산해냈다. 그런데 뉴타운은 예전과 같이 달동네를 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지역을 재개발하는 사업이었다. 상가세입자들의 문제가 대규모로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시민사회는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시민사회는 상가세입자의 문제는 이권과 관련이 있다고 치부하며 적극적으로 정책 마련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용산참사가 터졌다. 이전에도 상가세입자들의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는데, 시민사회가 외면했던 것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할까. 박준경 열사 사건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다. 재개발 문제도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데, 재건축 문제까지 대응하긴 어렵지 않을까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 반성된다.</p> <p dir="ltr"> </p> <p dir="ltr"><strong>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할 계획인가</strong></p> <p dir="ltr">용산참사는 10주기를 계기로 긴 시간에 걸친 활동의 의미를 드러내고, 추모제를 잘 진행하면서 큰 챕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전히 싸우고 요구할 것이 남은 상황이어서 많은 고민이 든다. 검찰 과거사위에서 경찰 조사 이상의 의미를 담은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른 대응도 필요하고, 유죄판결을 받았던 철거민들의 재심을 요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용산참사를 주제로 만든 다큐멘터리 중에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결국 내가 그 제목대로 된 것 같다.</p> <p dir="ltr"> </p> <blockquote> <p dir="ltr">인터뷰는 예정했던 시간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는 목이 메여 자주 말을 멈췄고, 빈 컵에 다시 물을 채울 시간이 필요했다. 용산참사를 두고 ‘10년이 지나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울부짖을 수도, 떠난 이들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그칠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을 다시 기록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상처를 겪고도, 지난 10년 동안 지치지 않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한국 사회는 아직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민들은 그렇게 10년의 세월동안 조용히 용산참사를 추모했다.</p> </blockquote></div>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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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요청]

 

일제와 독재를 견뎌 온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골목을 지켜주세요

 

● 일시_ 2015년 7월 1일 오전 10시

● 장소_ 종로구청 앞

 

  1. 무악제2구역은 일제시대부터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 앞에 위치한 옥바라지 여관 골목으로 100년의 시간 동안 일제와 독재정권에 의해 핍박 받아 온 이들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던 곳이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곳입니다.

 

  1. 옥바라지 여관 골목은 종로구청의 골목길 해설사의 해설 코스 중 하나로 종로구가 강조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도심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입니다.

 

  1. 그럼에도 이 곳은 무악제2구역으로 묶여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으며 현재는 관리처분계획 승인을 앞두고 있습니다.

 

  1. 박원순 서울시장은 옥인 재개발과 관련하여 역사성의 유지를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으며 서울시는 일찌감치 뉴타운 출구전략을 통해 재개발 위주의 개발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1. 무악제2구역은 사직제2구역과 함께 서울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울성곽의 주변 환경을 이루는 중요한 경관적 가치와 더불어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지역임에도 아파트 재개발을 계속 추진하는 것은 기존 재개발의 부풀려진 사업성으로 인한 조합원 피해를 넘어 공공의 역사문화 자원을 훼손하거나 훼손을 방관하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1. 무악제2구역은 관리처분계획의 내용에 대한 정보공개청구가 접수되어 있으며 서울시에 갈등조정 신청이 접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로구청은 법적 기한인 30일 보다 훨씬 앞당겨 충분한 확인과 검증 없이 관리처분계획을 승인할 방침입니다.

 

  1. 이에 재개발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사업적 측면에서나 역사문화 유산의 보존 측면에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무악제2구역 재개발 관리처분계획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역사문화유산 보존 대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코자 합니다.

 

  1. 7월 1일 오전 10시 종로구청 앞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에 많은 관심과 취재를 요청드립니다.

 

2015년 6월 30일

 

 

무악제2구역재개발비대위, 사직제2구역재개발비대위, 노동당서울시당, 사단법인 나눔과미래, 재개발행정개혁포럼, 문화연대, 도시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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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06/3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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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김영종 종로구청장의 무악제2구역 재개발 관리처분계획 인가 보류 결정을 환영한다.


- 파산 직전의 서울시 뉴타운 출구전략에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바라며




종로구 무악제2구역재개발 관리처분계획 인가가 보류되었다. 종로구청이 6월 17일에 접수된 관리처분계획에 대하여, 예정되어 있던 7월 3일 인가 방침을 일단 철회한 것이다.


이는 지난 1일, 노동당서울시당과 재개발비상대책위원회,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목소리를 모아 무악제2구역 내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여관 골목’의 역사문화적 보존 가치와 재개발 진행 과정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인가 이전에 명확한 사실을 확인 할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 일정 부분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보도자료] “일제와 독재를 견뎌 온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여관 골목, 아파트 재개발로 인한 소멸 위기에서 지켜져야 한다” - 2015.7.1.

http://seoul.laborparty.kr/742




종로구의 결단, 그 다음은 적극적인 주거재생의 의지로 서울시가 움직여야 한다.


노동당서울시당은 직접적인 주민 면담을 통해 이번 결정을 이끌어 낸 김영종 종로구청장의 결정을 다시 한 번 크게 환영한다. 이와 동시에 뉴타운 출구전략에도 불구하고 잠재적 역사문화 가치가 높은 무악제2구역의 재개발 사업에 있어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해 온 서울시가 이에 계기로 적극으로 개입할 것을 촉구한다.


노동당서울시당은 그간 서울시의 뉴타운 출구전략 발표와 정비구역 재조정이 실질적인 성과를 드러내지 못하는 가운데 서울시 주거재생사업의 비전이 사실상 파산상태에 이르고 있음을 지적해왔다.


[관련논평] “왜 서울시의 뉴타운 출구전략은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가 되었나?” - 2015.6.15

http://seoul.laborparty.kr/706


무악제2구역 역시 마찬가지로 서울시의 이러한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채 관리처분계획 인가라는 벼랑 끝에 몰려있는 상황이다. 확인되지 않은 매몰비용을 어찌 할 수 없는 짐으로 떠안고 부득불 찬성 입장을 고수하는 조합원들과, 조합원 정보는 재개발조합이 독점하고 있음에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50% 이상의 동의를 주민 스스로 받아올 때까지 팔장만 끼고 있는 행정편의주의가 상황을 교착시키며 문제해결을 겉돌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당서울시당이 제안해 왔듯이 경제성 평가를 조합원이 실제 부담가능한 수준에 맞추어 재정착률을 높이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직권해제를 통해 더 이상의 재개발 난민 발생을 막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서울시의 기조가 기존 재개발 사업을 적극적으로 청산하고 대신 재정투자를 통한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그에 맞는 실질적인 사례를 발빠르게 만들어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뉴타운 출구전략은 빛좋은 개살구에 그치거나, 뚜렷한 관철 의지 없이 남발한 공수표에 불과하게 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무악제2구역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서울시 뉴타운 출구전략의 허점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노동당서울시당은 서울시가 지난 4월 22일 발표한 [뉴타운·재개발 ABC 관리방안](이하 ‘ABC방안’)과 잇따라 발표한 [주거재생 실행방안](이하 ‘재생방안’)이 극복해야 할 결정적인 문제점에 대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관련논평] “뉴타운·재개발 정책, 다시는 '희망고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 2015.4.28. http://seoul.laborparty.kr/657


그에 덧붙여 무악제2구역에서 드러나고 있는 구체적인 모순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BC 방안’은 단편적인 갈등요소평가와 사업 경제성 여부만 따져 개입의 수위를 정하는 평면적인 척도에 의존한다. 분명한 한계에 가로막힐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서울시는 두 달 여 전에 발표한 ‘ABC방안’에 따라 무악제2구역을 A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로써 발생하는 문제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조합원이 민원을 제기해도 서울시는 무악제2구역이 A유형으로 분류되어 있으므로 출구전략 대상이 아님을 확인하는 공문을 보냈다.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재개발 현장에서 민원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갈등요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가장 정확한 신호임에도, 기존의 허술한 분류에 따라 주민갈등이 없는 곳이라고 해당 갈등주체에 답하는 셈이니 말이다.


또한 무악제2구역에서는 재개발 사업 관련 정보가 조합원 내에서 충분히 공유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가운데 은폐되어 있던 주민갈등이 뒤늦게 불거져 나왔다. 암묵적 찬성 입장에서 실제 현황을 파악하고 부랴부랴 반대로 돌아선 조합원이 생겨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은폐된 갈등이 가능한 구조에 있다.


게다가 ‘ABC방안’은 문화유산의 가치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재개발이 강행될 경우 어떠한 잠재가치 높은 문화유산을 잃는다 하더라도 사업상만 있으면 서울시는 A 유형으로 분류하여 재개발 급행열차 티켓을 쥐어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역사문화자원에 대한 고려가 없음이 아니라 경제성 외의 어떠한 변수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결국 무악제2구역은 ‘ABC 방안’이 출구전략이 아니라 촉진전략으로 역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서울시는 실질적인 주민갈등 조정은 물론 종합적인 가치 판단, 적극적인 주거재생을 이루어낼 수 없다. 하기에 서울시의 출구전략 실질화를 위한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무악제2구역은 그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는 좋은 예로서 서울시가 말 뿐 아닌 실질적인 정책 의지 관철의 반환점으로 삼기에 충분한 근거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옥바라지 여관 골목’을 통해 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야


또한 무악제2구역은 역사문화적 가치가 경제성을 훨씬 초과한다. ‘옥바라지 여관골목’이라는 잠재가치가 큰 역사문화자원이 재개발 구역 거의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옥바라지 여관골목’의 문화유산적 가치는 지금도 여전히 그 곳에 영업중인 여관 골목으로 남아있다는 측면에서의 ‘생명력’과 서대문형무소 정문과 마주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는 ‘현장성’이 핵심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역사문화자원의 가치를 맨 처음 확인한 곳은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서두르던 종로구청이었다. 종로구청이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종로구의 특성을 살려 골목길을 순회하며 곳곳의 역사를 소개하는 ‘골목길 해설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옥바라지 여관 골목을 주요 역사적 자산으로 소개해 왔던 것이다.


문제는 재개발이었다. 재개발 추진이 탄력을 받자 해설 코스에서 제외되긴 했지만 구청이 설치한 여관 골목 안내지도와 표지는 아직도 여전히 현장에 남아있다. 엎질러진 물처럼 한 번 헐려 없어지고 나면 다시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 새로운 물을 담을 수는 있어도, 있던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역사문화자원을 소개하는 표지를 재개발로 철거해야하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개발 사업의 평가 기준에 역사문화자원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유사한 예로 돈의문뉴타운은 이미 역사문화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전면 철거 이후에 아파트 신축 공사가 한창이고 재개발 사업이 여전히 추진 중에 있는 사직제2구역에서도 같은 오류가 반복될 위험이 여전히 잠재해 있다. 사직제2구역은 서울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한창인 서울성곽 바로 아래에 위치한 권역이다.


일제시대부터 군부독재기까지 부당하게 옥고를 치러야 했던 수많은 수감자들을 옥바라지 하느라 드나들던 여관골목은 문화유산으로써의 서대문형무소와 따로 구분지어 생각할 수 없는 역사적 현장의 일부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측에서도 이 생명력과 현장성에 기반한 ‘옥바라지 여관골목’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주목하고 있는 탓에, 무차별 철거의 신호탄이 될 관리처분계획 인가 처분을 불안하게 지켜보며 여관골목 이전을 통해서라도 보존의 대안이 제시되기를 바라고 있는 점 또한 또렷히 기억해야 한다.


서대문형무소 역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 자체는 물론 그 주변환경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드레스덴 엘바강의 등재 취소는 이를 증명한다. 서울성곽 바로 아래에 지어지게 될 아파트, 서대문형무소 바로 옆의 아파트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불보듯 뻔 한 일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세금과 자원을 투여하면서도 그에 배치되는 재개발 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서울시는 문화유산 보존 측면에서도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는 재개발 사업의 추진이 불가할 정도로 추진력이 약한 곳만 직권해제 하고 주민 갈등이 있는 곳은 주민이 결정할 문제라며 한 발 물러서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보여주기식 성과만들기를 넘어서는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의지를 가졌다고 평가하기에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다.



다시 한 번 종로구청의 결정을 환영하며 서울시의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악제2구역은 서울시의 허울 뿐인 뉴타운 출구전략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법적으로 진행된 절차의 경과 수준을 놓고 볼 것이 아니라 재개발에서 주거재생으로 도시재생의 패러다임 전환을 꾀하고 있는 것이 진심이라면 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패러다임 전환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무악제2구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요청한다.


현실성 없는 제안이 아니다. 옥인재개발의 경우 박원순 서울시장의 취임과 동시에 적극적인 도시재생으로의 전환 의지를 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반려해가면서까지, 심지어 지난 6.4 지방선거 직전에 박원순 서울시장 스스로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반려 처분에 대한 패소 판결을 무릅쓰고 역사성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면서까지 의지를 보여주고 관철시키고 있는 사례가 되고 있다. 무악제2구역에 있는 ‘옥바라지 여관 골목’의 가치가 그 보다 덜 한 것도 아니며, 서울시의 뉴타운 출구전략의 실현에 대한 의지가 여전히 꺾여있지 않다면, 이를 무악제2구역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기를 다시 한 번 촉구한다.



2015년 7월 3일

노동당서울시당




* 관련보도



‘옥바라지 여관 골목’ 헐어야 합니까… 일제·독재 시대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가족 애환이 서린 곳, 국민일보, 2015.7.2.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143082&code=11131100&cp=du



"옥바라지 여관 골목 재개발은 역사·문화 훼손", 뉴스1, 2015.7.1. - news1.kr/articles/?230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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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07/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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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감상

법무법인 양재 안희철

 

“소수의견을 판결로 이끌어내기 위한 실질적 조건은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지요. 국민의 법감정에 기반한 강력한 여론의 지지, 유능한 변호사, 그리고 시대의 변화.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갖췄죠. 시대가 바뀐 거예요. 이제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가 된 겁니다.”

 

 

영화 소수의견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제는 정말 우리 사회에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가 된 것일까.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지 1년조차 되지 않은 새끼 변호사지만, 형사사건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벌써부터 무죄주장을 해도 되는 것일까, 끝까지 싸우는 것보다는 정상참작을 바라는 것이 현 한국사회에서는 피고인을 더 잘 변호해주는 것이 아니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만큼 현실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100원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내용으로 하는 소수의견은 법조인에게는 법조인이 되고자 했던 당시의 초심을, 그리고 많은 국민들에게는 국가란 무엇인지 나는 국민으로서 보호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영화 제목만 들으면 왜 제목이 소수의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이내 제목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출근길 화요일 오전 지하철 안을 살펴보니, 수많은 소시민들이 웃음기도 별로 없이 핸드폰이나 책을 보며 혹은 피곤에 잠을 청하며 출근을 하고 있다. 분명 이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다수이지만, 소시민들의 의견은 소수의견이 되고만 세상. 그게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닌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는 그런 한국의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고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소수의견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시사회 때 김성제 감독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영화가 용산참사를 그대로 그린 영화는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 용산참사, 나아가 이 시대 국가의 모습과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다만, 영화 속에서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민을 사지로 이끄는 국가권력의 모습이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무능한 정부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느꼈던 씁쓸하고 무거웠던 기분은 비단 나 혼자 느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요란하지는 않지만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 변화의 흐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고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소설 원작의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수의견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 달이 해가 되는 때. 늙은 나무의 그늘로부터 새싹이 돋아나는 때. 나는 가슴 한구석을 저리게 찔러대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금, 2015/06/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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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7주기] 추모대회 및 전체 추모일정

 

 

오는 2016년 1월 20일은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해 다섯 철거민 민중열사들이 돌아가신 용산참사 7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참사발생 7년이 되어오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살인진압의 책임을 재대로 묻지 못한 채, 진압 책임자 김석기는 공기업(한국공항공사) 사장도 모자라, 내년 총선 출마(새누리, 경북 경주)를 선언했습니다. 
살인개발의 참혹한 참사현장은 그 진실이 규명되지 못한 채 봄부터 공사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박근혜 정권의 폭압과 국가폭력의 잔혹함이 거세지는 시기에 맞게 되는 용산 7주기는, 국가와 자본의 협력에 의한 야만적인 폭력과 참사에 "여기 사람이 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선언과 행동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 7주기를 맞아 ‘용산참사 7주기 추모위원회’를 제 단체와 개인 추모위원들로 구성하여 준비하고자 합니다.

용산을 기억하고 함께 싸워 온 귀 단체에서, 아래와 같이 ‘추모위원 참가단체’ 참여와 개인 ‘추모위원’ 조직 그리고 추모/투쟁대회 등 일정들에 적극적인 참여와 조직을 요청 드립니다. 

 

- 아 래 - 

1) 용산참사 7주기 추모위원 모집
‣ 추모위원 참여 및 후원 계좌: 국민 055202-04-150491 이원호(용산추모)
* 단체 / 10만 원 이상, 개인 / 1만 원 이상 (단체 및 개인 상황에 따라 조정 가능)
‣ 모집기간(1차) : 2016년 1월 11일(월)까지 (개인은 20일 까지)

2) 추모대회 등 주요 일정
■ 용산참사 7주기 추모대회 :국가폭력 규탄, 책임자처벌 촉구대회
-일시 : 1월 23일(토) 
2시 : 용산참사 현장 (이후 행진)

■ 묘역 추모제 
: 1월 20일(수) :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 (12시, 10시 반 대한문 버스 출발 : 사전 신청 바람)

■ 추모주간 일정(안) * 일정 조정 중, 추후 확정 공지 함.
13일(수)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 (10시, 용산참사 현장)
20일(수 *용산참사 당일 ) 묘역 추모제 (12시, 마석 모란묘역 / 10반 대한문 버스출발)
20일(수)~22일(금) 추모 상영회 _ “국가폭력 특별전 
: 용산 <두 개의 문>, 세월호<나쁜 나라>, 밀양<밀양 아리랑>” 
21일(목) 추모 촛불 기도회 (오후 7시반, 용산참사 현장)

* 김석기 총선출마 규탄, 추모주간 일정
14일(목) 살인진압 책임자 김석기 출마, 새누리당규탄 기자회견 (오후 1시, 새누리당사앞)
14일(목)~23일(토) 김석기 공천 반대, 새누리당사앞 1인시위 (11시반~ 오후 1시)
17일(일)~18(월) “김석기를 감옥으로!” 경주 1박 2일 투쟁 

용산참사7주기 추모위원회
문의 : 02-3147-1444 (010-4258-0614) / [email protected]

 

 

목, 2016/01/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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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짓밟는 이들과 세월호 참사


역사에는 야사가 있기 마련. 최근 몇 년 동안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이 많았다. 어쩌다 보니 태풍의 눈 같은 역사 속에 있었다. 인권운동이라는 같은 업계에 있다 보니 박래군과 나는 사건 들 속에서 자주 만났다. 대부분 선배인 그가 불렀고 때로는 내가 엉겼다. 야사를 함께 만들었고 가끔 술자리에서 소회를 나누며 웃기도 했다.


    ▲ 15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연대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래군 상임운영위원(가운데)이 '416연대를 

        지켜주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미디어스


희망버스 야사. 어떻게 처음 희망버스가 구상되었는지, 짚어 보니 그것도 우연 같다. 광주에서 1박 2일 회의 마치고 승합차 한 대에 우겨 타 서울로 올라오던 길이었다. 어디쯤인지 멈춰 점심을 먹을 때였다. 송경동 시인이 먼저 말을 건넸다. “김진숙 누이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녀요. 뭐라도 해 봅시다.” 당시 몇 일째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진 중공업 크레인 농성이 장기화되고 있었다. 모두 김진숙님 안부를 걱정하고 있는 차였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어떤 형태일지 알 수 없었다.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기차를 타자, 버스를 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송시인은 말 떨어지기 무서운 사람이다. “래군형은 통장을 만들고 박진은 글을 쓰고. 그렇게 사람을 모아 봅시다.”


박래군이 희망버스 통장에 이름을 내고, 오랫동안 법정에 서게 된 계기는 그것이었다. 그가 희망버스 법정에 서게 될 때, 가서 꼭 증언해주겠다고 했던 이유도 그래서다. 아쉽게도 다른 일들이 몰려, 박래군은 통장 개설 외에는 한 일이 별로 없었다. 검찰은 그날 자리를 사전 모의로 삼겠다고 덤빌지 모르지만… 단지 ‘우리 무엇이라도 합시다,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는 마음이 모였을 뿐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점심 먹은 모두를 형사 처벌하던지. 희망버스 타자고 선동 글 쓴 나는 왜 잡아가지 않는지. 어떤 경우든, 화살은 박래군이 먼저 맞았다. 대추리에서도 용산에서도 희망버스, 세월호에서도 그랬다. 현장에 함께 했던 동료들 마음은 그래서 더 아프다. 또 래군이 형이야…


    ▲ 인권 헌장 공청회 현장에서 박래군 소장은 밑도 끝도 없는 모욕과 구체적 폭력에 시달렸다. (사진=오마이뉴스)


세월호 참사 집회로 그가 다시 구속되었다. 실체적 법리는 사실, 소용없다. 집회가 차벽에 막히고 과격해 졌다. 과격해지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청와대 앞까지 간들, 도대체 무슨 위험이 있겠는가? 무릇 민주사회라는 것이 소란해야 하며 누구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는 것이 아닌가. 민주사회 통치자들은 마땅히 귀를 열고 들어야 하는 것이다. 막힌 길 끝에서 누군가 경찰차를 흔들었을 것이다. 책임을 모두 박래군이 져야 하는가? 그가 속한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나 4.16연대가 집회 신고를 냈다 한들, 수 천 사람 행위를 다 책임질 수 없다. 책임져야 한다면 그를 구속시킬 것이 아니라, 왜 사람들이 그토록 청와대로 가려했는지 물었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라서 사람이 모이는가, 그렇다면 같이 해결해보자, 당신이 책임 있게 나설텐가? 라고 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 통치자들은 틀려먹었다. 어떤 것이 책임인지 법정에서 따지려 들 뿐, 사회를 열어 듣지 않는다. 하긴 그러면, 박근혜 정부가 아니지.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독재의 유산이라 누가 욕하겠는가.


박래군 구속 이후 많은 이들이 그를 부른다. 소중한 목소리다. 먼저 잡혀가 아직도 구속 중인 이들이 떠올랐다. 함형재, 김현식, 강광철 등 6명이 여전히 감옥에 있다. 얼마 전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도 있었다. 작년부터 세월호 집회 구속자는 12명이다. 올 5월까지 연행자 수는  551명이다. 정부는 바다 속에 빠진 진실을 알고 싶어 거리로 나온 이들에게 죄를 물었다. 왜 궁금해 하는가? 왜 알려 하는가? 왜 정부에게 책임을 지라 하는가? 구속된 이들, 연행된 이들, 소환장 받은 이들, 거리에 나온 이들, 거리에 있지 못했으나 마음 아파 동동 거린 이들, 그런 모든 이들에게 진실을 알 권리는 죄가 되었다. 카카오 톡을 뒤졌고 휴대전화를 압수수색했다. 집회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감시와 사찰이 일상화되었다. 참사의 피해는 자유의 억압으로 확대되었다. 이 막막한 바다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일까.



         ▲ `용산참사'와 관련 불법 집회 주도 등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이종회, 박래군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과 남경남 전철연 의장 등 수배자 3명이 2010년 1월 11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경찰에 자진 출두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 발표와 나온 유족과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호송차에 오르는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맞벌이로 아이 키우는 김현식 구속은 벌써 5개월이 되어 간다. 남편 없는 빈자리를 채우며 종종거릴 아내와 아빠 얼굴 보지 못하는 아이가 떠오른다. 집회 현장이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던 함형재 구속 기간도 같다. 묵묵하던 그이는 한 뼘 구치소 창밖으로 어떤 풍경을 담고 있을까. 일산 킨텍스에서 환경미화업무 하던 강광철은 구치소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80세 넘으신 아버지 병세가 위독해 졌다. 그러나 그의 구속은 정지되지 않았고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경찰 방패를 뺏고 폭행했다는 것이 구속 이유였지만 그는 방패를 뺏지 않았다. 그의 행위는 영장실질심사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있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어떨까.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누군가의 친구였을 이들. 그들이 모두 감옥에 있다. 박래군과 같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뿐이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로 사라진 304명과 그의 가족들, 살아나온 이들의 고통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 곁에 서있었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형사 입건 된 사람은 셀 수도 없다. 그들 가족, 염려하는 친구까지… 참사 범위는 하루가 다르게 확대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인권 및 기본적 자유가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한 평화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국가는 이 선언문에 언급된 권리를 합법적으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받게 되는 어떤 폭력이나 위협, 보복, 사실상 또는 법률상의 불이익, 압력, 기타 자의적 행위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이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1998년 12월 9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인권옹호자 선언 일부다. 한국정부는 인권옹호자들에게 도전하고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자들, 기본권과 인권이 침해되는 것을 온몸으로 막는 자들에 대해 보복하고 불이익을 주고 있다.


박래군을 감옥에 보낸 날, 밤새 뒤척였다. 수면 무호흡으로 양압기 없으면 제대로 자지 못하는 그가 걱정되었다. 몇 해 만에 다시 감옥으로 아빠와 남편을 보낸 가족들 얼굴도 떠올랐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 심정은 어떨지…. 그러나 비단 그 때문만 아니었다. 박래군으로 인해 잊고 있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너무 잊고 있었구나, 함형재와 김현식들을…. 어쩌면 내일 당장 압수수색 영장 들고 우리 집 문 밀고 들어올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두려움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감당하며 살아야지 생각할 때마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 얼굴을 들여다본다. 얼마 전부터 고장 난 압력밥솥도 생각났다. 고무 패킹을 갈아야하는데…. 다산인권센터 후원행사는 어쩌지…. 자유를 빼앗긴 다는 것, 일상이 툭하며 깨져 버리는 것.


      ▲ 2014년 5월 28일 KBS 앞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촛불(길환영 퇴진)에서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승리했다는 소식 듣고 

         싶다"는 유가족들의 말을 대신 전했다ⓒ미디어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매번 바뀌었지만 박래군 구속은 으레 그래야 하는 일처럼 되돌이표다. 육십이면 은퇴하고 소설 쓰겠다는 그는 열 살 차이 나는 내게 종종 말했다. “나는 5년 남았다. 너는 10년 남은거야. 아니다. 너는 15년만 더 해라.”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내 소원도 그것이다. 래군형이 매번 주장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에로 소설’을 쓰면 독자로써 읽고 싶다. 어쩌면 그때, 부재를 감당한 누군가 감옥에서 소설을 읽을지도 모른다. 내 몫이어서 래군형이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면 영광이겠지. 은퇴 전까지 역사에 남을 야사 몇 개 더 쓰고 싶다. 함께 쓰고 싶다. 그가 빨리 감옥에서 나와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60세까지 5년밖에 안 남았다. 후배 된 도리로 그를 좀 더 부려먹어야 한다.


박래군과 함형재, 김현식들은 빨리 돌아와야 한다. 물론 기다리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만은 아니다. 은혜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일감들도 기다리고 있다. 박근혜는 어서 그들을 과로의 세계로 석방하라!


2015. 7. 30. 미디어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원문보기>

진실을 짓밟는 이들과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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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07/3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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