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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 시리즈 1편 – 궁중족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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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 시리즈 1편 – 궁중족발 인터뷰

익명 (미확인) | 화, 2018/02/06- 14:54

둥지내몰림 시리즈 1 궁중족발 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고통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찾는 이가 늘어난 만큼, 쫓겨난 이도 늘고 있습니다.

바로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 이야기입니다. 동네는 떴지만 슬픈 이들이 있습니다.

서촌이 뜨자 서촌에서 궁중족발을 운영하시던 분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이들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세입자였습니다. 건물주인이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297만 원이던 가게를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1,200만 원으로 올렸습니다. 족발 팔아서 얼마나 큰돈을 번다고, 보증금도 아니고 어떻게 월세만 1,200만원을 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경실련도 제작년부터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대책 마련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가 돼버린 젠트리피케이션! 정책과 제도를 바꾸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소리를 잘 담아 알리고 싶어 둥지내몰림 시리즈 인터뷰를 기획했습니다.

첫 인터뷰는 최근 법원의 강제집행 과정에서 왼손가락 네 개가 부분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서촌 궁중족발 김우식 사장님과 윤경자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Q: 어떻게 서촌궁중족발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서촌에서 분식점 2년하고 7년동안 실내포장마차 해서 번 돈에다 대출금 받아서 궁중족발을 차렸어요. 빚 좀 갚아나가며 장사가 좀 되겠다 싶었는데 건물주가 바뀐 거죠.

요즘 진짜 약삭빠른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가게 오픈해갖고 3~4년 하다가 팔고 나가요. 근데 저희 같은 경우에는 여기가 고향이란 말이에요. 독립문이 고향이기 때문에 친구들이랑 다 여기 있고. 다른 동네 떠날 생각을 아예 못 한 거에요.

저희도 부동산에서 나와서 부추겼어요. 팔 생각 없냐고?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서촌이라는 이름이 뜰 때부터요. 사장님네 가게 정도면 권리금 1억 5천에서 8천까지 받을 수 있다고 자기가 받아주겠다고 파시라고 했어요. 근데 저희는 이 동네가 고향이고 여기 떠나서 살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건물주가 바뀌고 나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거에요.

 

Q: 강제집행은 언제 시작됐고, 최근 3차 집행까지 있었는데 지금까지 과정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10월 10일에 1차 집행이 있었어요. 법원, 사설용역 포함해서 100명 넘게 왔고, 저희는 60명 정도로 막아냈어요. 새벽 6시 반부터 4시간 대치해서 ‘집행불능’하고 갔어요. 2차 집행은 11월 9일에 야간집행이란 걸 신청하고 왔어요. 야간집행은 법원에서 판사가 허가를 내려야 되는 거고, 소수 인력으로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거래요. 20명 내외로 왔는데, 돈은 더 많이 들었다고 해요.

3차 집행을 또 해서 1월 15일 들어왔고 막아냈습니다. 근데 이번에는 집행관이 집행불능이 아니라 집행중지를 내렸어요. 둘의 차이가 큰데, 불능은 집행신청 다시 하려면 건물주가 다시 신청을 해야 해요. 그럼 또 돈이 들어가요. 근데 중지는 그게 아니라 중지된 상태, 말 그대로 휴전인 거에요. 그러면 언제든지 또 들어올 수가 있는 거에요.

집행관이 처음에는 불능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건물주가 집행관을 불러서 뭐라고 하니까 집행관이 다시 와서 중지라고 하더라고요. 건물주가 항의하니까 바꾸더라구요.

 

▲ 작년 11월 9일 왼쪽 손가락이 네 개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접합수술 후 회복중이신 김우식 사장님과 윤경자 사모님(왼쪽부터).

 

Q: 손가락 다치셨을 때의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

2차 집행 때 사설용역이 사복차림에 손님처럼 가디건에 후드티 입고 모자쓰고 와서 여자들부터 끄집어 냈어요. 족발 꺼내려고 주방에 있는 남편도 끄집어 내려고 했는데 남자다보니 저항하는 게 틀리잖아요. 3~4명 사설용역이 붙잡고 빼는데 윗도리까지 다 벗겨지고 했는데도 죽을 힘 다해 싸우니까 힘을 못 당하니까 건물주가 용역대장, 제일 힘쎈 사람을 1명 더 불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확 낚아채니까 그냥 딸려 나온 거에요. 그 과정에서 조리대 밑에 홈을 잡고 버티다가 새끼 손가락이 제일 심하게 다친 거였고, 네 개 손가락이 거의 절단이 됐죠. 다행히 접합은 잘 됐지만 정말 끔찍했어요.

 

Q: 최근 JTBC 뉴스룸에서 궁중족발 집행관에게 과태료를 부과했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강제집행 과정에서 잡행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집행관의 역할은 집행을 지휘하는 사람입니다. 건물주가 동원한 사설용역은 인원수만 채우는 사람들이에요. 물건은 만질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손을 쓰면 안 됩니다. 일반화돼서 내려오다보니 합법적으로 비춰지고 있는데 경비법에는 분명히 명시돼 있어서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건 명백한 불법이에요.

2차 집행중에 손가락 다쳤을 때도 집행관은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원래는 인사사고가 나면 집행관이 정치시켜야 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 할 일만 하고 방관했던 거죠. 그래서 저희가 법원 집행처에 진정서를 넣었어요. JTBC 뉴스룸에서 취재나온 게 ‘집행관 위반’으로 법원이 과태료 200만원 처분을 내렸는데, 법원이 노무자 관리 감독을 제대로 안 해 집행관에게 과태료 처분을 내린 건 우리나라 최초라고 하네요.

 

Q: 건물주는 어떤 분이신가요?

북유럽 수입가구 회사를 운영한다고 하는데, 투기성 입대업으로 돈을 버는 걸로 알고 있어요. 주로 비어있는 건물을 통째 매매하는데, 세입자들이 가져가야 할 권리금 부분이 없어져서 시세차익에 플러스가 돼서 그런 걸 잘 하신다고 해요.

그 분은 집행할 때도 직접 나오세요. 집행나오기 전에도 가게 앞 현수막이나 신문기사 스크랩해놓은 거 다 와서 뜯어버리고, 문자로 “너는 범법자다” 다쳤을때도 “쇼한거지?” “너 진짜 죽으려고 했었냐? 죽지 그랬냐?”고 했어요. 사람 괴롭히는데 일가견이 있으시더라구요. 저희 건물에 다른 가게들도 있었는데 소송까지 간 건 저희뿐이에요. 다 지쳐서 떨어져 나갔어요.

남편이 손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고, 저랑 사람들 있는 거 뻔히 알면서 2주 동안 가스 2번 끊고, 전기 개량기 아예 통째로 떼어가고 수도 잠그고 화장실 폐쇄까지 시켰어요. 사업자등록증 말소시키고 통장 압류까지 다 해놨어요. 그걸 2주 동안에 다 했어요. 수도하고 전기는 생존권이잖아요. 사업자등록증도 본인 아니면 말소를 못 시키는 건데… 저희가 관공서 쫓아다니면서 다시 회복시키느라 진짜 힘들었어요.

저희가 다시 관공서 사람들 실사나오게 해서 복구시켰어요. 화장실은 앞에 사장님들이 두 군데나 키를 주셔서 사용하고 있어요. 통장 압류한 것만 아직 못 풀었어요. 그거는 또 다른 손해배상으로 넘어가는 거더라고요. 주택청약통장까지 다 압류당했어요.

10월 말에 투병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10월 30일날 돌아가셨는데, 탈상하고 1주일 만에 2차 집행을 들어온 거였어요. 그리고 그날 손을 많이 다친거죠.

SNS 하는 젊은 분들이 한달에 1,200만 원 월세가 말이 되냐고? 막 댓글달고 비난하니까 이 분이 명언을 남겼죠. “족발가격은 족발집 사장이 정하는 거고, 임대가격은 임대인이 정하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왜 문제냐는 거에요.

 

▲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11월 9일 이후 한달 내내 매일 울었다고 하신 윤경자 사모님.

 

Q: 이런 일들 겪으시며 심정이 어떠셨어요?

아무리 자본주의라지만, 건물주는 내 돈 가지고 내가 올리는데 뭔 상관이냐 이러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다쳤는데 더군다나 음식하는 사람이 손을 다쳤는데 그 당시에는 남편 손이 불구가 될 정도라고 병원에서 얘기했었어요. 회복이 빨라 정말 다행이지만.

지금은 웃으며 말하는데, 11월 한달 동안은 내내 매일 울었어요. 경찰서도 한번 안 가봤는데 생전 처음 관공서도 다 다니고 법원이며 경찰서며 혼자 다녔어요. 아이들은 다 커서 직장 다니고 군대 가있고 해요. 큰애가 아빠 병원에 있는 동안 병간호했는데, 다친 날 아빠 다친 걸 직접 보고 대성통곡하는데 그거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요.

시세차익으로 돈 버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하지만 자기가 돈 버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이건 사람의 삶을 파괴시키는 거에요. 애들한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요.

 

Q: 도와주시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은 많으세요?

저희가 3차까지 집행 막아내고 할 수 있었던 게 저희 도와주시는 분들 없으면 못 하는 거에요. 맘상모(마음편히장사하고싶은상인들의모임)는 저희처럼 다 장사하는 분들이세요. 저희처럼 이런 일 겪고 분쟁에서 합의봐서 다시 장사 시작하시는 분도 있고, 장사 아예 접고 회사다니는 분도 있고, 아직 분쟁은 안 일어났지만 이제 다음 다음 차례로 대기하고 계시는 분도 있어요. 맘상모가 법률자문부터 수요집회 등 저희와 항상 같이 해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그밖에도 기사랑 보도가 많이 되고, 뉴스, 인터넷 페이스북에도 많이 알려져서 분개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세요.

3차 집행 때는 새벽부터 모였거든요. 9시에 들어온다고 해서 새벽 6시부터 모였는데, 제가 처음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더라니까요. 우리가게 처음 오는 젊은 학생들이 집행을 막아내겠다고 왔어요. “사장님 힘내세요! 제가 보고 들어서 많이 알고 있어도 온 건 처음이에요. 많이 오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돼서 많이 못왔어요. 오늘 와 봤으니까 다음에 또 올게요”하고 가는 거에요. 그날도 건물주가 와서 행패부리고 하는 거 다 봤거든요. 두 달 동안 있으면서 저희한테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느껴요. 그러니까 버틸 힘이 돼요.

저희 가게 단골손님도 문이 항상 닫혀 있으니까 지나가만 갔었대요. “사장님 힘드시죠? 여기 지나만 갔었는데 항상 문이 닫혀 있어서 사장님 못 뵜어요. 저도 이 동네 살고 있지만 서촌이라고 뜨면서 이렇게 된 건데, 이제는 사장님의 싸움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됐으니까 사장님네가 쫓겨나면 여기 임대료 다 오르는 거에요. 사장님 꼭 이기셔야 돼요”하고 가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집에서 쿠키를 손수 구워가지고 그 앞에 메모를 붙여가지고 앞집에 쇼핑백을 맡겼어요. 자기네 온 가족이 우리네 족발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이기시라고…

그런거 보면서 참 세상이 진짜 나 혼자라고 느꼈는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구나 실감나게 느꼈어요. 처음엔 죽을 거 같았거든요.

 

Q: 영업을 못하셔서 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으시겠어요.

장사도 못하는데다가 계속 나가는 건 생기니까 어렵죠. 여기 지켜주시는 분들 생활하고, 한번 오면 스무명에서 서른명씩 오시니까 그 사람들 먹거리며 돈이 계속 들죠. 그래도 돈으로 안 되시는 분들은 음식으로 연대를 해주시고, 김장철에는 자기네 김치 담그시면서 한통씩 갔다주기도 하셨어요. 인터넷에 후원계좌 열어가지고 십시일반 모이는 게 그게 꽤 큰돈이 되더라구요. 큰 돈 송금하는 게 아니라 1인당 5천원, 1만원 모아지면 그래도 꾸려는 나가겠더라구요.

 

▲ 궁중족발집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돼버렸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제 법정싸움하고 경찰서 조사만 남아있어요. 법적으로는 진 건데요, 아직 손해배상청구 건도 남아있고, 유치권 소송이 진행 중이에요. 강제집행은 중지된 상태라 또 들어올 수 있어요. 저번엔 법원인력 20명 내외로 적게 왔었는데, 이번엔 더 많이 올 수도 있어요. 보통 건물주가 3차 4차까지는 집행을 안 하거든요. 무리라고 생각해서 안 한 대요. 4차까지 하면 그때서 아 안 되겠구나 포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 상태에서는 일단 잘 버티는 게 중요해요.

24시간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매일 요일별로 행사를 해줘요. 제일 고마웠던 게 옥바라지선교센터는 기도회를 열어주시고, 나머지 음악가들은 다른 음악가들 추천해서 공연, 시낭독회, 영화상영도 해줘요. 다양하게 문화제를 많이 해주시는 게 잡다한 생각하지 말고 기운 북돋아주려고 하는 거 같아요.

안쪽에 테이블 4개 놓고 손님 받던 방은 이제 가게 지키는 사람들이 잠자는 곳, 공연할 때는 무대가 돼요. 가수분들이 이 무대를 되게 좋아하세요. 신발 벗고 양말 신고 공연해보긴 처음인데 웬만한 공연장 못지않고 좋다고 해요.

홍대입구에 있던 두리반 사례처럼 저희도 빨리 해결돼서 마음 편히 장사하고 싶어요.

 

인터뷰 갔는데 가자마자 사장님과 사모님이 저희에게 떡볶이를 한 대접 주셨어요. 분식집하신 경험 때문이신지 정말 맛있었습니다. 영업도 못하시고 투쟁장으로 변해버린 가게를 보며 안타까웠지만 지지해주고 함께 지켜주는 이들과 함께 꿋꿋이 싸우시는 두 분에게서 오히려 힘을 얻고 왔습니다.

소액이라도 후원해주시면 십시일반 모여 큰 힘이 된다고 하시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 계좌로 후원해주세요.

[궁중족발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455-889687 (예금주:구자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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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이야기] 고양이 책방 슈뢰딩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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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음, 학림다방에 이어 혜화동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는 낙산공원 올라가는 길에 있는 예쁜 고양이책방 ‘슈뢰딩거’입니다. 요즘 어딜 가나 길고양이들을 많이 만나실 텐데, 경실련 주변에도 길고양이들이 참 많습니다. 귀엽기도 하고, 때로는 안쓰럽기도 한데, 우리 주변의 고양이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김미정 책방지기를 만나 책방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나눴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양이 책방을 열게 되셨나요?

책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했었어요. 엄마가 시인이시고,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선생님이 동화작가셨어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었는데 엄마 따라서 도서관 다니다 보니까 사서가 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문헌정보학과에 진학을 했는데, 사서가 되지는 못했어요.

어쨌든 책과 관련된 일은 계속 하고는 싶은데 그건 잘 안 됐고, 그러면 제가 저를 고용하는 수밖에 없겠더라구요. 고양이 도서관을 만들까 했는데, 그건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걸로 수익모델을 찾기는 힘들 거 같더라구요.

책방 열 당시는 직장 다니다 그만둔 지 2년 정도 됐을 때였어요. 사서를 꿈꾸며 법학전문사서, 의학전문사서처럼 주제전문 사서가 되고 싶었어요. 어떤 특정주제에서 지식서비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일 좋아하는 주제가 고양이였기 때문에 그때 고양이 두 마리 키우고 있었어요. 지금은 4마리가 됐어요. 주제전문 서점이라고 하면서 제가 모르는 분야를 할 수 없잖아요. 제가 고양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실제로 경험해 본 것 중 하나 고양이고, 좋아하기도 해서 고양이를 주제로 열게 됐어요.

 

책방이름 슈뢰딩거는 어떻게 지으신 건가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시작은 물리학에서 나왔지만 문화 전반에 전유돼서 쓰이고 있어요. 모순된 것이 중첩된 상태(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다!?)가 재미있기도 하더라고요. 강아지서점 이름이 파블로프인 것과 비슷한 거죠.

사실 슈뢰딩거의 사고실험 자체가 고양이 친화적이진 않잖아요. 고양이 서점의 이름이 슈뢰딩거라 함은 약간 좀 아이러니 하면서도 재미있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책방 안에 당신이 원하는 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당신이 찾던 것의 존재 이유는 문을 여는 순간 정해지는데, 여기에 당신이 원하는 게 여기 원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식이죠. 당신이 찾는 게 여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나가실 때 당신의 고양이 한 마리는 마음속에 품고 가기 바란다는 마음으로 지었어요.

 

책방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거 같아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처음 시작은 신설동에서 했는데, 대학로로 옮기고 나서는 작게 카페운영도 시작했어요. 매니저가 대학동기인데 커피를 잘 내려요. 그밖에 고양이를 소재로 온갖 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그림그리기 클래스도 있고, 고양이 사진 잘 찍기, 글쓰기 수업도 있고, 펠트공예 수업도 있어요. 보통은 SNS 홍보 보시고 신청하고 오세요. 동물단체들에는 프로그램을 같이 진행할 여력은 없어서 정기후원을 하거나 비정기적인 활동으로 여기 수익금을 기부한다든지 하고 있어요.

 

 

고양이라는 주제가 색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도 창업인데, 창업이야기도 해주세요. 요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나 경험담 들려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일단은 서점일은 추천할 만한 업종은 아닌 것 같아요. ^^; 서점은 일반 자영업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어려움을 다 가지고 있고 거기다 플러스 서점만의 힘듦이 또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창업으로 서점은 권하지 않아요. 저희 서점은 비교적 나은 편이지만 최저임금도 못 버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람들이 책의 가치를 많이 알아주지 않는 것도 아쉬워요. 책 한권에는 저자가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공부하고 고민한 정수가 있죠. 내가 책을 구매한다면 그 사람의 몇 년에 걸친 공부를 시행착오 없이 가져오는 건데, 그것도 영구소장 한다고 생각하면 책이라는 것은 돈을 지불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책방창업이 이렇게 어려운데 슈뢰딩거는 어떻게 운영하고 계시나요?

여기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시는 분들이 여기서 구매해주시고, 공간에 대한 애정으로 여기 나오셔서 책도 보고 가시고 구매해주셔서 운영되고 있다고 봐요. 여기의 강점은 다른 인터넷 서점과 달리 오프공간이 있는 거잖아요.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곳이 아니고 고양이로 가득찬 공간에서 책을 본다는 경험 자체가 저희 컨텐츠에요. 여기에서 책을 보시는 거 자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카페도 식음료서비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잖아요. 책방도 책을 유통하는 소매업이라고 등록은 되어 있지만 컨텐츠사업, 지식서비스 제공자라는 마인드가 있어야 지속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작은 책방을 창업으로 염두하고 계신 분들은 서점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거랑 서적유통업 그 이상의 것으로 생각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일본원서 고양이책 찾는 분들이 계셔서 일본책들도 판매하고 있어요.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컨텐츠 강국이잖아요. 컨텐츠에 돈을 많이 쓰기도 하고, 고양이를 진짜 좋아하는 나라다 보니 고양이책이 쏟아져 나와요. 기획력도 좋구요. 사진책은 화질과 재질이 되게 중요한데 일본책들은 퀄리티가 괜찮은 책들이 많아요.

처음에 인터넷 서점만 보고 원서 구입하다가 실패를 많이 해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3-4달에 한번 정도 일본에 가서 직접 실물보고 체크해서 캐리어에 담아 직접 가지고 들어오고 있어요.

 

왜 대학로에 열게 되셨나요?

대학로로 계속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은 컨텐츠에 소비를 하겠다는 분들이시잖아요.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라면 여기 컨텐츠 가치를 알아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도 원래 이 동네를 좋아해서 항상 대학로 쪽에 하고 싶었어요. 처음 오픈한 건 2016년이었는데, 이걸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2015년 9월이었어요. 그 해 10월에 혜화로터리 쪽에 계약을 했었는데, 물이 새고 역류하는 바람에 돈도 좀 까먹고 시간도 날리고 했었지요. 한번 좌절을 겪고 집 근처 가까운 데서 빨리 열어보자고 해서 신설동에서 열었던 거예요. 근데, 손님들한테도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이태원이나 홍대에 있는 서점 같은 경우에는 온 김에 다른 데도 둘러보고 가는데 그때 그 동네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진짜 시장통 한가운데 오로지 저희 서점 하나만 보고 오시는 거거든요. 손님들한테도 미안하고 접근성도 너무 떨어졌었죠.

 

 

언제부터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셨나요?

저도 원래는 고양이 무서워했었어요. 밤에 고양이 마주치면 도망가고 그랬어요. 개, 고양이, 소, 닭, 비둘기 다 무서워했어요. 근데 성인되고 귀여운 짤(사진, 동영상)들 보면서 친근감이 생겼던 거 같고, 친구가 고양이 키우는 거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제가 키우게 됐는데 제 고양이가 예쁘니까 밖에 고양이들이 불쌍해지더라구요.

동물원도 많이 갔었어요. 데이트 하거나 해외여행가도 꼭 동물원 가고 그랬는데, 고양이 키우면서는 못 가겠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가족과 주변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서 계속 밖으로 나가는 거잖아요. 동물한테도 적용되는 거 같아요.

 

주변에서 많이 만나는 길고양이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고양이는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죠. 고양이는 기본적으로 겁이 굉장히 많은 동물이거든요. 영역동물이고 밖에 안 나가려고 해요.

캣맘, 캣대디들이 밥을 주시는데, 밥 주고 TNR(중성화 사업)까지 해야 제일 좋아요. 발정기 오면 영역싸움하느라 소리를 많이 내거든요. 그리고 쓰레기 찢는다고 싫어하는 분들도 많은데 배가 고파서 그래요. 걔네도 밥이 있고 배가 부르면 쓰레기 봉지 찢을 일이 없거든요. 한 켠에 오히려 밥 내주시면 쓰레기봉투 뒤지거나 찢지 않아요.

2000년 초반인가 종로구에서 길고양이를 살처분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종로구에 쥐가 들끓은 거에요. 나중에 다시 길고양이 생겨나면서 쥐가 없어졌다고 들었어요. 도시가 사람만의 것도 아니고요. 작은 공간하나와 밥 한끼 내줄 여유가 있으면 좋겠고, 예뻐해주실 건 없지만 괴롭히지는 말자는 그런 말씀 드리고 싶어요

길고양이 관련해서는 제가 여러 이야기 하는 것보다 책을 하나 추천해 드릴게요. 한국고양이보호협회와 이용한 작가님이 쓰신 <길고양이 안내서>라는 책이에요. 길고양이에 대해 참고할 만한 모든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책방 운영하시면서 제일 보람을 느끼실 때와 제일 힘들 때는 언제입니까?

좋을 때는 사람들이 오셔서 좋아할 때, ‘예쁘다 귀엽다 여기서 살고 싶다’ 하시면 보람을 느껴요. 고양이 키우며 이러 이러한 상황인데, 책 좀 추천해줄 수 있냐고 조언을 구해오시면 거기에 맞는 책을 추천해줄 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 저는 고양이를 잘 모르고 키워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만 그분들은 여기 와서 저한테 물어보고 제대로 된 정보를 가져가서 저 같은 시행착오를 안 겪으실 거 아니에요. 그게 반려인 뿐 아니라 반려동물에게도 좋은 거잖아요.

조금 힘들거나 맥 빠질 때는 오셔가지고 이것저것 다 물어보시고 책 목록 추천 잔뜩 받고서 그냥 가버리시는 경우에요. 예의상 1권은 사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제 노동력이라든지 제가 가지고 있던 여기에 대한 지식이라든지 그런 가치는 조금도 생각 안하는 것 같아서 힘이 빠져요.

 

새 정부가 유기견 토리를 입양해 화제가 되기도 했었고, 동물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보이는데, 앞으로 제도적으로 개선돼야 할 부분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저도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제일 근본적인 것은 법에서 지금 동물을 사물로 취급하는데, 동물에게 제3의 지위를 주는 게 제일 중요할 거 같아요.

지난번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개헌안에 아직 조금 미흡하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발전된 안이 있었어요. 조금 아쉬운 면도 있지만 동물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게 있었거든요. 그래서 꼭 통과됐으면 좋겠다 했는데 국회에서 저러고 있는 거죠. 국회에 화가 많이 났어요. 100%는 아니지만 동물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안이 있다는 거 자체가 굉장히 고무적이었어요. 개헌이 빨리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주변에 이런 재밌고 의미 있는 곳들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한 번에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날씨 좋은 날, 대학로로 봄나들이 오셔서 고양이 책방 ‘슈뢰딩거’에서 동물감수성을 키워보세요!

금, 2018/06/0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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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xe_content"><h1 style="text-align:justify;">'용산'이라는 미래</h1> <h2 style="text-align:justify;">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가 만든 비극</h2> <p style="text-align:justify;"><br /><strong>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현장을 왜 남일당이라고 불러요?"</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얼마 전 한 동생이 물었다. 그 건물 일 층에 남일당이라는 금은방이 있었거든. 그래서 남일당이야. 질문자는 한참 동안 대답을 믿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10년 동안 남일당이었다는 것은 조금 허망하다는 투였다. 원래 동네의 골목이란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일쑤다. 약국이 없는 사거리가 약국사거리거나 구청이 이전한 자리를 여전히 구청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골목이나 사람들이 사라진 동네는 예외다.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허허벌판이 되었다가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한강로5가 동, 용산4구역에서 핏줄처럼 흐르던 골목의 흔적은 더이상 느낄 수 없다. 2009년 1월 20일, 망루가 불타던 그날로부터 10년이 흘렀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strong>10년 동안 외쳐온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는 이주대책을 요구하던 용산4구역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용산참사 이후 화재의 원인과 사망, 진압과정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경찰은 수사기록 3천 쪽을 제출하지 않았고, 증거들은 사라지거나 훼손되었다. 철거민의 화염병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철거민들에 의해 난 불로 인해 경찰이 사망한 것으로 재판은 결론지어졌고, 철거민 5명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다루지조차 못한 채 망루 안에 있던 철거민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지난 10년간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다양한 사실을 밝혀냈다. 망루 안에 위험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지휘부가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원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 당시 경찰 서울청장이었던 김석기는 무전기를 꺼놓았다며 책임을 회피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 등 경찰의 작전이 매우 성급하고 무리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그러나 이러한 잘못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사카 총영사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현재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한 김석기는 무리한 진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이버수사대 요원 900명을 동원해 경찰 진압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댓글 공작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했다. 용산4구역의 개발 인허가는 이후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는 것이 확인되어 승인 취소되었지만 이로 인해 주거와 생계를 빼앗긴 이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10주기를 맞아 유가족과 피해생존 철거민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strong>삶과 존엄을 파괴하는 강제철거</strong></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몇 가지 사실을 바르게 나열한다고 해서 진실이 드러나진 않는다. 용산참사의 진실은 우리가 본 불타는 망루에 담겨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2009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새로운 금융기법이었던 프로젝트파이낸싱은 천문학적인 대출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었으므로 빠른 개발만이 높은 이익을 보장했다. 빠른 개발은 철거민들의 빠른 퇴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강도 높은 폭력이다. 아직 살고 있는 주민들을 해코지하거나 장사하는 가게에 오물을 투척하거나, 빈집의 유리창과 문을 떼어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들은 모두 한국 사회 만연한 '철거'의 과정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4구역 철대위 위원장이었던 이충연은 망루에 오른 것은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피해 간 것'이라고 얘기한다. 더는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과 모욕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조합은 단 한 차례의 협의 조차 하려하지 않았다. 용산구청을 비롯해 조율에 나서거나 돕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들은 망루로 향했다. 망루를 오른 사람들은 남일당, 그 골목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지난 12월 3일에는 한강에서 마포 아현동 철거민 박준경 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10년째 살던 집에서 7월과 9월, 두 차례 강제철거를 당해 쫓겨났고, 임시로 머무르던 주변 공가에서마저 11월 30일 퇴거당한 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이후 서울시의 경우 동절기 강제철거가 금지되었지만 12월 1일부터 동절기에 해당한다. 그 전에 퇴거를 완료하기 위해 철거지역은 전쟁터가 되고, 박준경님의 마지막 철거 역시 11월 30일이었다. 용산참사 이후 재개발지역 상가세입자의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났지만 재건축 세입자에게는 이조차 해당하지 않기에 우장창창, 궁중족발 등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십 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용산참사 이후 개발지역 세입자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드러났고, 경찰 진상조사위원회과 검찰의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냈다. 비록 외압으로 인한 조사 부진과 한계를 갖고 있으나 유가족과 피해생존자,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용산참사 진상규명'의 초입에 섰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가깝게는 사망과 화재원인에 대한 규명과 진압 책임자의 처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도시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열심히 돈 벌어 건물주에게 바쳐야 하는 세입자들이 언젠가 건물주가 되길 희망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에 대한 몇 겹의 이해와 이를 개조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용산은 언제나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 </p> <blockquote> <p style="text-align:justify;">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a href="http://www.pressian.com/news/review_list_all.html?rvw_no=1661"&gt;클릭</a>)</p> <p style="text-align:justify;"> </p> <p style="text-align:justify;">*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p> </blockquote></div>
월, 2019/01/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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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을 바라보다] 김성훈 공동대표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경실련이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이합니다. 올해부터 30주년을 준비하며 그간의 경실련 활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30주년을 바라보며 경실련이 만나야 할 분들을 한분씩 찾아뵙고 인터뷰를 통해 그 내용을 담아보려 합니다. 첫 번째 인터뷰로 1989년 창립 당시 함께 하셨고 토지공개념, 재벌개혁, 농업개혁, 통일운동을 활발히 하시고 최근에는 소비자정의센터에서 반GMO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김성훈 前공동대표를 만났습니다.

 

 

1. 경실련 창립 당시 이야기를 조금 해주신다면?

89년 당시 사람들이 지금은 경실련에 하나도 안 남아있는 거 같아요.

7월에 발족해서 11월에 정식으로 사회적으로 선포하고 선언하고 시작했어요. 저도 7월에는 없었고, 11월부터 함께 했어요. 종로5가 다락방 시절 그때 생각하니 교수였어도 참 순진했었어요. 활동가들하고도 완전히 동지애, 아버지와 아들같은 사이로 지냈지요.

경실련은 크게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라는 두 뼈로 시작했어요.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지금 사회를 보면 후퇴하거나 모자란 부분도 많이 보입니다.

 

2. 말씀 꺼내주신 김에 경실련의 30년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토지공개념이 안 되는 바람에 농지가 다시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됐어요. 부재의 지주, 도시자본 투기자본의 먹이가 됐어요. 경실련 30년 동안에 금융실명제, 한국은행 독립이 이뤄졌지만 재벌개혁은 이제는 삼성공화국, 현대공화국으로 발전했어요. 더 나빠졌어요. 전형적인 예가 이재용 부회장을 무죄 석방한 부장판사에요. 다 삼성장학생이에요. 삼성장학생이 아닌 정부관리, 삼성장학생이 아닌 사법부 판검사, 삼성장학생이 아닌 교수, 학자들이 없을 정도에요.

그 당시 내세웠던 주택임대차보호법 계약기간 2년으로 늘린 것과 한국은행이 나름대로 그래도 독립성 한 것은 잘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직 많이 부족해요. 경실련 모토가 일한만큼 대접받자인데 노동자, 농민들은 대접을 못 받고 재벌들 돈 있는 기득권층만 이익을 다 가져가고 있어요.

토지공개념은 오히려 1949년 농지개혁 당시처럼 소작화가 만연해졌어요. 헌법에도 경자유전 원칙으로 하고 소작은 금지했는데 위장된 소작이 지금 지배하고 있고, 농지의 반 이상은 소작이고, 이름이야 임차농, 위탁경영 바뀌어있지만 눈감고 아웅하는 거죠. 경실련이 더 치밀하지 못했다고 봐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라, 코포라토크라시(Corporatocracy) 대기업 자본주의 세상이에요. 경실련도 자유롭지 못해요. 코포라토크라시에서 경실련이 살아남은 데는 성공했어도 경실련의 출발인 소위 시대정신을 실현시키는데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3. 어떻게 시민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앞으로 죽을 때까지 농(農)하고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중학교 3학년때부터 농촌을 살리고 농민을 살리는 것에 관심을 가졌어요. 농촌을 살린다, 농민을 살린다는 것은 약한 사람을, 취약한 산업을 살리자는 것이에요. 항상 약한 생명이 있는 곳, 농(農)은 바로 생(生)이에요. 생명이 있는 곳, 취약한 곳, 취약한 지역, 취약한 산업, 취약한 사람들을 돕고 그분들에게 새 빛과 새 얼(정신)을 심어주고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경실련 참여하기 전에는 우리농업지키기운동을 했었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 농업지키기운동에서 우루과이라운드에 위기감을 느끼고 농촌, 농민운동 살리자고 전국단위로 시작할 때 경실련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경실련에서 농업개혁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반 우루과이라운드 투쟁, 우리농업지키기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남북한 통일은 서로 자주 만나고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해서 경실련에 통일협회가 생겼죠. 통일협회에서 창립을 도와줬던 우리민족서로돕기 차원에서 북한을 12번 갔었어요. 북한에서 농사 실험도 했죠.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대표 하라고 해서 공동대표도 했었어요.

 

 

4. 김대중 정부 때 농림부 장관을 26개월 하셨었는데, 시민운동할 때와 어떤 점이 다르셨나요?

시민운동하면서 언론에 매일 나오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유심히 봤던 모양이에요. 그때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장 할 때인데, 장관으로 임명됐다는 전화 받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무슨 장관인줄도 모르고 올라가서 임명장 받고 농림부장관인 줄 알았어요.

가서 저는 시민운동을 그대로 했어요. 한 건 똑같지만 훨씬 편해요. 예산 있지, 직원들 무조건 명령 따르지… 경실련에서 할 때는 일일이 설득해야 하고 반대하는 집단들 만나서 설득하고, 돈도 이곳 저곳 얻으러 다녀야 하는데, 악만 제대로 쓰면 기재부에서 예산 따다 하니까 경실련 대표보다 몇 배 쉽더라고요.

가서 협동조합 개혁, 농조개혁(수세폐지), 유기농 원년 선포, 농촌 정보화 등 네 가지 일을 끝내고 나서는 사직서 내고 나왔어요. 벼슬자리에 나아갈 때는 그만둘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제 할 일 하고 끝났다 생각해서 물러나고 바로 캐나다로 갔었지요. 2년 6개월간 경실련에서 파견한 장관이라고 생각하고 일했어요.

 

5. 북한 다녀오신 이야기와 통일운동 이야기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북한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같은 역사, 같은 문화,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어요. 나라마다 자기나라 체제가 있고, 다름은 인정해야죠. 왜 꼭 대한민국같은 신자유주의 자본가가 지배하는 이런 자본주의가 돼야 한다는 법이 없거든요. 자본주의도 결함투성인데, 체제의 다름만 인정해주자는 거예요.

체제의 다름만 인정하고, 서로 교류와 협력을 하면 우리에게 이익이 되고, 북에도 이익이 되는 일부터 하자는 거예요. 예컨대, 북한의 바닷가들이 우리보다 덜 오염 됐거든요. 거기에 우리 자본과 기술로 양식장 만들어서 해외나가서 팔건 우리 시장에 팔건 해서 이익금을 반반 나눠 갖는 거죠. 우리나라 메밀 부족해서 수입해 먹거든요, 북한에 메밀 심어주고 수확해서 이익 나눠갖자는 거예요. 우리나라 돼지새끼들 가져가서 거기서 키워서 나눈다든지 먼저 서로 이익이 되는 일부터 하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북에 이익이 되고 우리는 손해가 없는 것을 해서 신뢰를 쌓아야 해요. 우리는 남아도는 식량과 비료, 부족한 북한에 나눠주면 됩니다.

금강산에 내가 심은 나무, 개성공단에 심은 나무들, 지금쯤 많이 자랐을텐데 죽기 전에 그거 보는 게 소원이에요. 금강산 열리기만 하면 첫 번째로 갈려고 해요.

 

6. 최근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책을 쓰고 있어요. ‘밥이 민주주의다’ 우리가 삼시세끼 먹는 밥이 완전히 다국적 상업자본의 먹이가 돼가지고 안전한 먹거리가 아니라 유전자를 조작한 GMO라든가 유해색소나 유해첨가물이 들어간 입에 달콤한 눈에 보기 좋은 음식이 우리의 신체를 좀 먹고 있어가지고 병들어가게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기업이 식품산업협회라는 데가 식약처가 GMO보급의 선봉에 서서 GMO보급의 앞잡이가 되어 있어요. 생산자가 ‘내 것은 GMO가 아닙니다’ 하는 표시하면 잡아가도록 하고 있어요. 제품이 GMO가 들어있다고 하는 완전표시제를 못하게 하는 것까지 좋은데 ‘내 것은 GMO가 아닙니다’는 표시도 못하게 하는 법이 어디있냐고요. 내가 생산한 콩, 두부, GMO가 안 들어갔습니다 해서 잡혀간 사례가 있어요.

일찍이 세종대왕도 “식위민천(食爲民天)”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먹거리에 뭐가 들어있는가도 모르고 있는데, 이것만 제대로 고쳐도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다. 따라서 밥이 민주주의라는 거예요.

 

7. 마지막으로 경실련이 앞으로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경실련 30주년을 바라보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토지공개념 확립하는 일과,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실천하는 일은 영원히 경실련이 풀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경실련이 출범했던 당위성, 이유가 지금도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할 것이냐? 점점 돈과 권력의 장학생이 되어가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상근활동가들이 전문가가 돼서 이제는 전문가들을 이끌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경실련은 재창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봐요. 경실련이 출발했을 때 시대상황이 결코 더 나아지지 않았거든요. 경실련이 초심을 다시 살려서 재창립 선언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30주년을 맞아 경실련이 재창립한다는 정신으로 재창립 선언이 나오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월, 2018/04/0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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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경실련에서 회원 인터뷰도 하고 있지만, 올해는 회원들 글도 직접 실어보려고 합니다. 이번 호는 북한산 아래 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있는 박미라 회원님 이야기입니다. 우리소리(민요)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이야기, 판문점 선언이 있던 날 아이들과 들살이 다녀온 이야기 보내주셨네요.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때에 좋은 글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들과 평화를 노래해요”

 

박미라 회원(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교사)

[email protected]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북한산 자락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

맑은 날이면 멀리 인수봉이 또렷이 보이고 맑게 흐르는 물소리 시원히 들리는 이 곳에서, 산만큼이나 물 만큼이나 맑고 밝은 아이들이 노래합니다.

저는 마을에 자리한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우리 소리(민요) 가르치고 있어요. 요즘 곳곳에서 들려오는 평화의 바람을 타고, 아이들과 바람 되어 노래하며 지내고 있어요. 우리의 바람 실은 노래가 바람 타고 온누리 널리 널리 퍼지고, 하늘 높이 높이 올라 하늘에 닿기를, 하늘에 닿은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어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름다운 평화의 바람

한라에서 백두 넘어 온누리 불어라’

 

우리 소리에는 흥과 한이 함께 있어요. 아주 슬픈 일을 만날 때, 아픈 상처로 괴로울 때, 울고 싶을 때 노래했어요. 지금의 아픔과 괴로움을 소리로 풀어내면서 동시에 희망을 내다보며 노래했어요. 흥겹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명나고 흥겹게 노래했어요. 내 형편이 어려우니 노래라도 신나게 해보자 했던 것이었을까, 마음의 신음 달래보자 했던 것이었을까, 지금은 힘들지만 곧 좋은 날 오겠지 했던 것이었을까, 우리네 어른들은 노래에 일상의 순간과 마음을 담았어요. 그래서일까 우리 소리 듣고 부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젖어들고 그네들 삶이 그려져요.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하며, 우리 땅 곳곳의 소리들 찾아 아이들과 함께 부르고 있어요. 제주도를 시작으로 팔도의 노래, 북쪽 노래들도 함께 찾아 부르려고 해요. 노래 속에는 터한 곳의 말과 삶이 담겨 있어 재미나고 새로워요. 아이들에게 터한 곳의 이야기 함께 들려주면 노래들이 더욱 살가워 재미나게 입에 오르내려요.

우리 소리에 우리의 바람 담은 노랫말을 붙여보기도 해요. 즐겨 부르는 군밤타령, 아리랑, 진도아리랑, 너영 나영, 옹헤야 노랫말에 지금 우리네 삶과 흥을 새롭게 입혀보는 것이지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한라에서 백두넘어 어~얼싸 바람이 분다

얼싸 좋네 아 좋네, 생명 평화

에헤라 고운 울림이구나~

 

싸움다툼 멈추고서 새로만나 얼싸안고 옹헤야~

에헤에헤 (옹헤야) 어절시고 (옹헤야) 잘도논다 옹헤야~

 

남과 북이 만나 함께 평화 이루며 살자 약속하고 다짐하던 시간, 저는 용문산 허리춤 드넓은 곳에서 아이들과 마음껏 달리며 놀고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산과 들로 나가 마음껏 뛰어놀고, 자연이 주는 너른 품에 안겨 쉼을 얻는 ‘들살이’ 다녀와요. 그 날은 2박3일 일정으로 갔던 봄 들살이 마지막 날이었어요. 들살이 일정 중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설레 하며 준비하는 시간은 마지막 날 밤에 펼쳐지는 ‘뽐내기밤’이라는 시간이예요. 아이들이 함께 나누고 펼치고 싶은 것들 노래, 춤, 연주 등 다양한 공연들을 스스로 만들어 서로에게 뽐내는 시간이지요. 그 날은 모두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남과 북이 만나는 다음날을 축하하고 싶었던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 남북정상회담 전야제와도 같은 공연들이 펼쳐졌어요.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이 기쁨을 누구에게 전할까

이 노래를 이 춤을 희망을 내일의 우리들에게..

 

문득 외롭다 느낄때 하늘을 봐요

같은 태양 아래 있어요 우린 하나예요

마주치는 눈빛으로 만들어가요

나즈막히 함께 불러요 사랑의 노래를

작은 가슴 가슴마다 고운사랑모아

우리함께 만들어가요 아름다운 세상

 

혼자선 이룰수 없죠 세상 무엇도

마주잡은 두손으로 사랑을 키워요

함께 있기에 아름다운 안개꽃처럼

서로를 곱게 감싸줘요 모두 여기모여

 

아이들이 꿈꾸고 바라는 마음이 서로 안에 고이 담기는 가슴 따뜻한 시간이었어요. 남과 북이 만나는 시간,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다니며 웃는 아이들 보면서 모두가 저렇게 마음 다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빌었어요.

남과 북의 약속이 그저 다짐이나 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담아, 우리 아이들이 함께 만들어 갈 하나 된 세상 꿈꾸며 오늘도 신명나고 흥겹게 노래합니다. 얼씨구~^^

 

▪ 월간경실련에 회원 이야기 싣고 싶은 회원님들은 언제든 연락주세요. ^^

(회원팀 윤은주 간사: 02)766-5628 / [email protected])

금, 2018/06/0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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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경실련 30주년을 준비하며 경실련이 세 번째로 만난 분은 강철규 前공동대표님입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부패방지위원장을 역임하시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셔서 많이 알려지셨는데 경실련 창립 멤버이십니다. 경실련 창립 당시의 이야기와 경제정의연구소를 설립 이야기 등 30년 가까이 지난 오래 전 이야기지만 창립 초기 활동들을 생생하게 나눠주셨습니다. 경실련 창립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교육자, 공직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 재벌개혁을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할 역할 등에 대해서도 고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1. 경실련 창립 당시 부동산 문제가 심각해서 전문가, 학자, 종교인 등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조그만 연구실에서 책상 놓고 시작한 모임이 경실련으로 발전했다고 들었습니다. 창립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89년 6월 발기인대회를 했는데, 그 이전에 3-4개월 전부터 뜻있는 분들이 나라 경제가 이래선 안 되겠다고 모였어요. 8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인 3저 호황(저금리•저환율•저유가)으로 한국경제도 성장세를 탔어요. 87년 6•10 항쟁 이후 88년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 무렵부터 부동산 투기가 폭발적이었어요. ‘전 국토가 투기장화되고 전 국민이 투기꾼’이 된다는 말이 일상화 될 정도였지요. 너나 할 거 없이 전국을 누비며 땅 살 데 없나 집 살 데 없나 하고 돌아 다녔으니까. 노태우 정부가 선거공약으로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및 신도시 개발 등의 공약을 남발한 덕이지요.

그 과정에서 실제로 넓은 땅을 많이 산 건 재벌들인데 거기에 편승해서 일반 국민도 근로해 돈 벌려는 노력보다 땅 투기해서 일확천금 해보려고 했지요.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학자들, 종교인들, 시민운동가, 전문가들이 몇 사람씩 모이기 시작하다가 공감자가 크게 늘어났어요. 우리가 뭘 해야 되나? 이 나라가 일한만큼 대접받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경제정의를 실천하는 시민연대를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3-4개월시민운동조직을 위한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1989년 6월 3일 드디어 발기인대회를 YWCA회관에서 했어요.

발기인대회 끝나자마자 당시 경제정의 실현을 위하여 땅 투기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으로 7-8명 교수들이 숭실대학교 이진순 교수 방에서 매주 두 번씩 모여서 토론을 했어요. 여러 사람이 참여했지요. 경제학자, 부동산업자, 시민운동가 등등. 그렇게 모여 공부한 걸 종합 정리해서 8월 중순에 여의도 백인회관에서 최고의 공개세미나를 했어요. 내가 대표로 발제를 하였고 경실련 최초의 세미나에서 내세운 3가지 해결책이 토지공개념 3법이었어요.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를 제도화해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경실련이 비판만 하는 단체가 아니라 대안을 내는 시민단체라는 것을 보여준 첫 세미나였고 첫 주장이었지요. 아직 창립총회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기대 이상으로 세미나 내용을 대서 특필하였지요.

경실련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떴다 알려지면서 경실련에 참여의사를 밝힌 회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인 1989년 11월 3일에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경실련이 생겼다고 볼 수 있지요.

 

2. 창립 이후 초기에는 어떤 활동들을 했나요?

경실련문고라는 책을 냈어요. 89년에 김태동 교수의 『땅, 투기의 대상인가 삶의 터전인가』라는 책이 처음 나왔고, 91년에 나하고 최정표, 장지상 교수가 공저해서 『재벌,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라는 책을 냈는데 많이 팔렸어요.

재벌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대토론회가 열렸어요. 재벌문제를 주제로 전경련에서 세 사람, 경실련에서 세 사람이 나와서 하루 종일 대토론회를 개최 했어요. 책을 쓴 다음이니까 자료가 많았어요. 전경련은 전경련대로 재벌을 옹호 대변하면서 경실련의 재벌개혁 주장에 대항하는 식으로 열띤 토론을 했죠. 당일 여러 중계방송차가 토론을 생중계하였을 뿐 아니라 이튿날 모든 신문 방송에서 대서특필로 나갔고, 경실련이 많이 유명해졌어요.

재벌 다음에 했던 게 금융실명제인데, 사회적으로 찬반 논쟁이 많았어요. 경실련의 주요 전문가들은 찬반토론회 나가서 금융실명제를 즉시 도입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전경련에서는 금융실명제 하면 나라 망한다고 난리가 났었죠. 우리나라는 도장문화인데 실명으로 하면 투자가 안돼서 경제가 쇠퇴한다는 억지 주장을 하였지요.

93년 8월 15일 전격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도입을 발표했죠. 아마 사진 찾아보면 있을텐데 경실련 사무실에서 축배를 들며 축하를 하였지요.

 

3. 경제정의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연구소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부동산 투기를 막아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니까 땅을 가진 땅 부자들이 경실련을 좌파 정도가 아니라 빨갱이 단체라고 매도하기도 하였지요. 토지소유를 공개념하고 시장경제를 부정하며 기업을 비판한다는 게 이유였어요. 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지요. 우리가 무조건 기업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제정의에 기여하는 기업은 상을 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죠. 이를 위해 경제정의연구소를 설립하고 경제정의 지표를 만들고 상장기업들을 평가하여 가장 우수한 기업들에게 상을 주기 시작했어요.

당시 미국에서 갓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경제정의기업상 기준 모델을 만들었어요. 김평기 원광대 교수, 홍길표 백석대 교수 등이 주축이 되었고, 김홍권 선생과 전병화 연구소 연구부장 등이 함께 노력을 했지요. 그 모델에 상장기업 데이터를 전부 넣어서 결과를 내본 결과 한국유리가 선정되었는데, 주위 평판도 검증하고 이사회에서 재차 확인해서 제1차 경제정의기업상 수장자로 상을 줬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4. 대표님은 어떻게 경실련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지요. 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단식투쟁, 75년 민청학련 사건과 서울의대 사건 등에 연루되었던 서울의대 법대 상대 후배들이 나를 배후자라고 하는 바람에 잡혀서 1년 서대문에 가 있기도 했어요. 이들 세 친구가 나한테 사회주의 경제와 남북문제에 대해 배웠다고 한 거예요. 관련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가서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간 겁니다. 당시 한국은행 다녔었는데 재판받고 하느라 그만두고 나중에 뒤늦게 유학 가서 공부한 후 학계로 가게 됐죠.

87년 이후는 민주화가 한 단계 성공, 도약을 했다고 봤어요. 근데 소위 학생운동 시민운동은 전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이었어요. 반정부투쟁, 비합법적인투쟁은 독재시절 정권을 타도하는데 적합한 민주화 운동이었지요. 87년 헌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가결돼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직접 뽑는 87년 체제가 시작된 거잖아요. 시민들이 다 나와서 넥타이부대까지 나와서 이룩한 6•10항쟁의 결과인데 그 법을 일단 지켜야지. 그래서 이제부터는 시민운동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야 하겠다. 앞으로 현실문제를 가지고 대안 있는 시민운동을 하고 법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경실련 운동에 함께한 것입니다.

비판도 있었어요. 사이비 시민단체 아니냐. 저항도 하고 투쟁도 하고 그래야지 무슨 법 테두리 안에서 한다는 거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판이 사라지고 참여연대가 95년에 나오고 같은 방식으로 운동하는 단체들이 계속 나왔죠. 경실련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시민운동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지요.

 

 

5. 참여정부 시절에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경제력집중 해소를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95년인가 경실련 안에 시민공정거래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시민이 공정거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감시도 하고 비판도 하자 해서 변형윤 선생님이 대표하실 때 생겼죠. 그 때 시민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 했었던 인연이 하나 있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2003년 3월에 공정거래위원장이 됐어요.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되는 일은 시장경쟁을 보호하는 거예요. 시장의 경쟁자인 어느 기업을 보호하는 게 아니고 경쟁체제를 보호하는 것이 공정위에요. 공정거래법 1조에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는 역할의 키워드가 다 나와 있어요.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소비자를 보호하는 게 목적이에요. 공정, 자유, 경쟁, 그리고 소비자 보호.

경제적 자유가 중요해요. 존 스튜어트 밀의 ‘타자 위해의 원칙’이 시장에서도 적용돼야 해요. 나의 생명, 재산, 사상,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유지만 단 하나 조건이 있는데 타자를 해치지 않아야 해요. 시장에서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되 남에게 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재벌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중소기업이 어떤 분야에 들어오려고 하는 걸 못 들어오게 한다, 일감 몰아주기를 해서 시장에서 쫓아낸다든가, 특허권을 다 구입해서 박살 내버린다든가, 무슨 부품 공급을 못하게 한다든가 등등 이런 것들이 전부 타자위해의 원칙에 위배되는 거라는 거죠.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를 적발해서 지키게 만들어주는 게 공정위의 역할이지요.

또 하나는 공정성을 지켜야 해요. 수많은 불공정 사례들이 있지요. 이들을 적발하여 시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재벌이 위법했을 경우는 법무팀 변호사들이 수백 명 있으니까 쉽게 빠져나가요. 가난뱅이 중소기업은 걸려놓으면 재판비용을 못 대거나 유명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서 여지없이 감옥에 간단 말이에요. 이런 게 소위 불공정한 거예요. 법률장벽을 어떤 사람은 뛰어 넘고 어떤 사람은 못 뛰어 넘는 거죠. 시장이 자유의 원칙을 지키고, 공정성을 지켜서 결국 소비자 후생을 증가시키도록 하는 것이 공정위가 할 일이에요.

 

6. 공정위 하실 때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하시는 것?

공정거래 역사상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간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직원들이 퇴임식을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직원들이 스탠딩으로 강당에 서서 차도 마시면서 스크린을 내려서 강 위원장 3년 재임 중 10대 업적을 10위부터 하나씩 소개하는 특별한 방식이었어요. 저도 1위가 뭘까 궁금했지요.

아마도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마이크로소프트사 사건 아닐까 했는데, 그건 2위더라고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위법 판정하고 과징금 부과하고 시정명령 내린 사건입니다. EU에 이어 우리가 두 번째 한 거니까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었죠. 이 덕분에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세계 G7에 들어갈 정도였지요.

그럼 1위는 뭘까 했는데, 소비자원을 경제기획원에서 공정위로 이관시킨 것이더라고요. 소비자보호원이 경제기획원(재경부) 소속이었는데 제 재임기간에 공정위 소속으로 가져와서 산하기구가 됐거든요. 공정위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소비자나 기업의 피해를 보상해주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소비자호보원이 들어오면 후생을 증대하고 보상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공정위업무가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는데 안 되다가 가져온 거죠. 공무원들한테는 그게 제일 좋았나 봐요.

또 하나는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을 세워서 로드맵을 만든 거예요. 금융계열사 의결권제한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2004년에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는데, 그런 내용을 포함해서 시장개혁 3개년 계획 만들어서 실천했었어요.

 

7. 언론에서 김상조 위원장이 ‘제2의 강철규’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하는데,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앞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소위 갑질제거 라고 하는 재벌이 아니라도 가맹사업자라든가 유통업자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 즉시 처벌하고 발견하고 시정하고 하는 일은 일정수준 성과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소비자 권익을 보호한다는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제도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데 아직 준비하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아직은 미완성이라고 봐요.

그 제도개혁의 핵심이 될 만한 것들이 뭐냐면 독과점(기득권자) 경제권력 재벌들이 쳐놓은 진입장벽이 있어요. 시장 안에 못 들어오게 만들고 있는 기업 배척해서 밀어내고 자기들이 독과점하면서 중소기업이 할 영역까지 해 나가고 있거든요. 각종 불공정행위와 더불어 이 진입장벽을 제거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되는데 앞으로 지켜봐야지요.

 

8. 한편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사회는 재벌개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계속 문제를 제기해야 된다고 봐요. 경제적 자유가 억압되고 있는 사례가 뭐가 있는지 시민사회가 그걸 찾아내는 거죠.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여 고발하고, 해결책은 시민단체가 대안을 내면 더 좋지만, 못 하더라도 정부가 해라, 학계가 해라 제시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이 고발을 자꾸 하는 게 중요해요. 구체적 사례를 많이 발굴하라고 하고 싶어요. 그게 힘이 있어요.

경제정의,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뭐가 잘못돼 있는지 그걸 찾아내서 계속 지적해야죠. 원칙적인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9. 마지막으로 30주년을 맞는 경실련 회원과 임원, 상근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30년이면 긴 시간이에요. 경실련 회원들, 활동하는 상근자, 임원들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원조 시민단체라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중요해요. 소위 민주화 투쟁 이후 시민운동 개념이 바뀌었잖아요. 새 시대에 맞는 시민운동의 맏형 즉 원조라는 걸 잊어버리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어요.

한꺼번에 엄청난 획기적인 걸 한다는 거보다도 그간의 축적된 활동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서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어떤 제도개혁이 필요한지 관심을 갖고 그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 벽돌을 하나씩 쌓아간다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성과를 낸다면 앞으로 또 30년을 내다보면서 힘 있게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화, 2018/07/3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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