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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이야기 – 아이들과 평화를 노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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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이야기 – 아이들과 평화를 노래해요

익명 (미확인) | 금, 2018/06/01- 11:18

월간경실련에서 회원 인터뷰도 하고 있지만, 올해는 회원들 글도 직접 실어보려고 합니다. 이번 호는 북한산 아래 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있는 박미라 회원님 이야기입니다. 우리소리(민요)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이야기, 판문점 선언이 있던 날 아이들과 들살이 다녀온 이야기 보내주셨네요.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때에 좋은 글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들과 평화를 노래해요”

 

박미라 회원(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교사)

[email protected]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북한산 자락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

맑은 날이면 멀리 인수봉이 또렷이 보이고 맑게 흐르는 물소리 시원히 들리는 이 곳에서, 산만큼이나 물 만큼이나 맑고 밝은 아이들이 노래합니다.

저는 마을에 자리한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우리 소리(민요) 가르치고 있어요. 요즘 곳곳에서 들려오는 평화의 바람을 타고, 아이들과 바람 되어 노래하며 지내고 있어요. 우리의 바람 실은 노래가 바람 타고 온누리 널리 널리 퍼지고, 하늘 높이 높이 올라 하늘에 닿기를, 하늘에 닿은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어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름다운 평화의 바람

한라에서 백두 넘어 온누리 불어라’

 

우리 소리에는 흥과 한이 함께 있어요. 아주 슬픈 일을 만날 때, 아픈 상처로 괴로울 때, 울고 싶을 때 노래했어요. 지금의 아픔과 괴로움을 소리로 풀어내면서 동시에 희망을 내다보며 노래했어요. 흥겹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명나고 흥겹게 노래했어요. 내 형편이 어려우니 노래라도 신나게 해보자 했던 것이었을까, 마음의 신음 달래보자 했던 것이었을까, 지금은 힘들지만 곧 좋은 날 오겠지 했던 것이었을까, 우리네 어른들은 노래에 일상의 순간과 마음을 담았어요. 그래서일까 우리 소리 듣고 부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젖어들고 그네들 삶이 그려져요.

한반도의 평화를 노래하며, 우리 땅 곳곳의 소리들 찾아 아이들과 함께 부르고 있어요. 제주도를 시작으로 팔도의 노래, 북쪽 노래들도 함께 찾아 부르려고 해요. 노래 속에는 터한 곳의 말과 삶이 담겨 있어 재미나고 새로워요. 아이들에게 터한 곳의 이야기 함께 들려주면 노래들이 더욱 살가워 재미나게 입에 오르내려요.

우리 소리에 우리의 바람 담은 노랫말을 붙여보기도 해요. 즐겨 부르는 군밤타령, 아리랑, 진도아리랑, 너영 나영, 옹헤야 노랫말에 지금 우리네 삶과 흥을 새롭게 입혀보는 것이지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한라에서 백두넘어 어~얼싸 바람이 분다

얼싸 좋네 아 좋네, 생명 평화

에헤라 고운 울림이구나~

 

싸움다툼 멈추고서 새로만나 얼싸안고 옹헤야~

에헤에헤 (옹헤야) 어절시고 (옹헤야) 잘도논다 옹헤야~

 

남과 북이 만나 함께 평화 이루며 살자 약속하고 다짐하던 시간, 저는 용문산 허리춤 드넓은 곳에서 아이들과 마음껏 달리며 놀고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산과 들로 나가 마음껏 뛰어놀고, 자연이 주는 너른 품에 안겨 쉼을 얻는 ‘들살이’ 다녀와요. 그 날은 2박3일 일정으로 갔던 봄 들살이 마지막 날이었어요. 들살이 일정 중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고 설레 하며 준비하는 시간은 마지막 날 밤에 펼쳐지는 ‘뽐내기밤’이라는 시간이예요. 아이들이 함께 나누고 펼치고 싶은 것들 노래, 춤, 연주 등 다양한 공연들을 스스로 만들어 서로에게 뽐내는 시간이지요. 그 날은 모두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남과 북이 만나는 다음날을 축하하고 싶었던 마음이 서로 통했는지 남북정상회담 전야제와도 같은 공연들이 펼쳐졌어요.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이 기쁨을 누구에게 전할까

이 노래를 이 춤을 희망을 내일의 우리들에게..

 

문득 외롭다 느낄때 하늘을 봐요

같은 태양 아래 있어요 우린 하나예요

마주치는 눈빛으로 만들어가요

나즈막히 함께 불러요 사랑의 노래를

작은 가슴 가슴마다 고운사랑모아

우리함께 만들어가요 아름다운 세상

 

혼자선 이룰수 없죠 세상 무엇도

마주잡은 두손으로 사랑을 키워요

함께 있기에 아름다운 안개꽃처럼

서로를 곱게 감싸줘요 모두 여기모여

 

아이들이 꿈꾸고 바라는 마음이 서로 안에 고이 담기는 가슴 따뜻한 시간이었어요. 남과 북이 만나는 시간,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뛰어다니며 웃는 아이들 보면서 모두가 저렇게 마음 다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빌었어요.

남과 북의 약속이 그저 다짐이나 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담아, 우리 아이들이 함께 만들어 갈 하나 된 세상 꿈꾸며 오늘도 신명나고 흥겹게 노래합니다. 얼씨구~^^

 

▪ 월간경실련에 회원 이야기 싣고 싶은 회원님들은 언제든 연락주세요. ^^

(회원팀 윤은주 간사: 02)766-5628 / [email protected])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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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원 회원 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이번 회원 인터뷰는 1994년 KBS 기자로 입사해 아나운서, 앵커, 특파원 등을 거치며 20년 넘게 언론인으로 활약하시다 지금은 KBS 파업에 참여하며 언론 정상화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계시는 임장원 회원님을 만났습니다.

 

방송국이 총파업 하면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결방하는 것부터 생각해 아쉬워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또 파업하나보다 했지요. 하지만 최근 이명박, 박근혜 정권시절 권력과 결합되었던 국영방송의 파행이 드러나면서 언론적폐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KBS, MBC 언론인과 방송국 노동자들이 청와대 외압으로 민중의 눈과 귀를 멀게 한 KBS 고대영 사장, MBC 김장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긴 시간 파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투쟁하고 있는 언론인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임장원 회원님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 지난 11월 8일 여의도 KBS 근처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파업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파업의 목표는 고대영 사장의 퇴진입니다. KBS의 주인인 시청자들이, 또 내부 구성원이 공영방송에 기대하는 저널리즘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집권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우호적인 보도를 해왔고,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저항하는 제작진에게는 인사상의 보복이나 징계를 일삼아왔습니다. 그 결과로 조직의 토론 문화가 죽었고, 건강한 저널리즘은 실종됐습니다. KBS 뉴스는 ‘땡북’ 뉴스(북한 관련 뉴스가 많다는)라는 비아냥을 받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는 종편 채널들의 연이은 특종을 쳐다보기만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KBS 취재진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시민들의 야유를 받고, 쫓겨나고, 매체 신뢰도는 떨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은 보수정권이 집권한 지난 9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져왔고, 특히 현 고대영 사장 체제에서 극에 달했다는 게 다수 KBS 구성원들의 평가입니다.

 

 

공범자들 영화를 보거나 투쟁하시는 과정들을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분들은 말 못할 아픔과 어려움이 많을 거라 예상됩니다. 파업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이세요?

 

파업이 두 달을 넘기면서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것도 고통입니다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점은 KBS의 존재감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KBS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공영방송 파업이 국민들의 관심사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방송 매체가 워낙 많다보니 시청자들이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아요, 수신료를 JTBC에 주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KBS 뉴스에 대한 기대 자체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 나오는 양비론적 인식도 안타깝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코드 안 맞는 공영방송 사장은 어차피 쫓아내는 것 아니냐, 보수나 진보나 다 똑같다, 이런 거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수 KBS 구성원들이 월급 못 받는 파업을 하면서 고대영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는 결코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고 사장이 저널리즘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해왔다면, 고 사장이 ‘보수 색채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현 정권이 쫓아내려는 시도를 할 경우 KBS 구성원들은 오히려 정권에 맞서 사장의 임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할 것입니다.

 

방송문화진흥회가 고영주 이사장 불신임건을 가결하면서 MBC 사태는 해결될 실마리가 보여 희망적인데, KBS는 전망이 밝지 않다는 언론기사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지난 9년간의 MBC는 워낙 ‘막장’으로 망가져왔기 때문에, 해직 언론인도 여럿 나왔구요, 정상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열망이 높았고, 그게 반영된 결과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도, MBC의 정상화가 더욱 시급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만, 상대적으로 KBS가 관심을 덜 받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KBS는 전망이 밝지 않다는 기사가 나오는 배경은 이런 겁니다. KBS와 MBC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거대 야당이 ‘정권의 방송 장악’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붙이다 보니 현 정권 입장에서는 비록 그것이 공영방송 언론인 다수와 국민들이 바라는 개혁이라 해도 일사천리로 진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겁니다. 게다가, KBS의 경우 사장 임기가 1년 남아서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교체를 서두를 큰 실익(?)도 없으니, 내년 지방선거 등을 감안하면 야당의 ‘방송 장악’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는 정도로 발을 빼고 싶은 셈법도 나올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파업 투쟁 중인 다수 KBS 구성원들은 공영방송 정상화에 대한 정권의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냐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관건은 시민사회의 관심과 성원입니다. 정말 KBS는 이렇게 1년을 더 가도 좋은 것인지, 정치적 셈법으로 주판알을 두드리는 정치권에 KBS의 운명을 맡겨놔도 되는 것인지… 수신료를 내는 시민들이 더 큰 관심을 갖고 ‘다음은 KBS 정상화다’를 크게 외쳐주셔야 KBS 개혁이 앞당겨질 거라고 봅니다.

 

▲ 임장원 회원은 투쟁의 최종 목표는 고대영 사장의 퇴진이 아니라 KBS가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수신료를 내고 싶은 공영방송’으로 다시 정상화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파업 이후의 방향과 투쟁계획 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제가 노조 집행부가 아니라서 투쟁 계획은 드릴 말씀이 없구요,^^;; 중요한 건 고대영 사장의 퇴진이 투쟁의 최종 목표가 아니란 겁니다. 투쟁의 최종 목표는 리셋 KBS, 수신료를 내고 싶어하는 공영방송의 건설이구요, 리더십 교체는 그 수단이자, 디딤돌일 뿐입니다. 제가 기자이기 때문에 보도부문에 대해서만 말씀드린다면, 공짜로 볼 수 있는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 10대부터 노령층까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접하는 시대에 우리는 왜 수신료를 내고 KBS 뉴스를 봐야 하는가에 대해 답이 되는 뉴스를 생산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공공부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필요하지만 시장(민간부문)에 맡겨놓으면 나오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죠. 언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뉴스가 넘쳐나지만 검색을 해보면 쟁점이 되는 사안을 양비론적으로 늘어놓는 뉴스만 나옵니다. 양쪽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검증하거나 의혹이 생기면 끝까지 파고드는 뉴스는 가물에 콩 나듯 볼 수 있어요. 민영 언론사들은 기자들에게 기사 한 건을 오랫동안 취재할 시간을 줄 여력이 없고, 광고주들이 싫어할 만한 내용을 끝까지 파고 들게 할 수도 없거든요. 수신료가 중요 재원인 KBS는 구조적으로 ‘끝장 기사쓰기’가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언론사입니다.

 

기자님은 방송기자인데, 최근에는 온라인에 주로 삼성 관련 심층기사를 써서 반향을 일으키곤 하지 않았나요?

 

현 고대영 사장 체제가 출범한 직후인 2015년 12월에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를 9시뉴스에서 다뤄달라는 기자협회장의 호소를 보도본부 간부들이 부당한 압력이자 편집권 침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낸 적이 있었죠. 저는 당시 경인방송센터장으로 부장급 간부였는데, 마지못해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성명 참여를 철회하고 보직을 사퇴해버렸어요. 그 이후 인천지국에 평기자로 발령받아 ‘유배’ 생활을 하다가 디지털뉴스부로 옮겼죠. 디지털뉴스부도 일종의 유배지라 ‘진보 성향’ 기자들이 모여 있는데, 온라인 쪽은 수뇌부가 별로 신경쓰지 않으니 오히려 자기가 쓰고 싶은 기사를 마감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었죠. 그래서 제도권 언론이 잘 안 쓰는 기사, 겉핥기만 하는 기사, 검증이 부족한 이슈를 들여다보고 1주일에 하나 정도만 심층적으로 썼습니다. 건수로는 40여 개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이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나 섹션별 주요 뉴스 코너에 노출되며 격려와 제보 메일을 많이 받는 등 개인적으로는 뉴스 앵커 시절보다 더 뜨거운 성원을 받았습니다.

 

제가 특출해서가 아니라 기자에게 시간과 자유를 주면 더 깊은 기사, 더 좋은 기사가 나올 수 있음을 확인한 셈이죠. KBS 기자 수백 명을 시청률과 제작 경쟁에서 풀어주고 성역을 없애주고 시간과 자유를 주면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거라 확신합니다.

 

이번 사태를 공영방송 이사회 선출 방식 구조가 문제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당 추천 이사들이 방송국 사장을 뽑고 중요 안건을 처리할 수 있는 지금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구조적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맞은 말입니다. 당연하고, 그래서 또 오랫동안 지배구조 개편 문제가 제기돼왔지만, 정치권이 야당일 때와 여당일 때 입장이 달라서 여지껏 성사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배구조 개선이야 말로 공영방송 독립을 위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젭니다.

현재 KBS 이사진은 여당이 7명, 야당이 4명을 추천하고 MBC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진은 여당에서 6명, 야당에서 3명을 추천하지요. 현 여당이 야당일 때 제출한 방송법 개정안은 이사 수를 각각 13명으로 늘리고 여당과 야당의 추천 이사 수를 각각 7대6으로 해 불균형을 최대한 축소하고, 이사 3분의2 이상이 찬성해야 사장을 선임할 수 있게 하는 ‘특별다수제’를 도입해서 사실상 야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했을 때의 문제점은 여야 타협의 산물로 무색무취한 사람이 공영방송 수장으로 선임되기 쉽다는 겁니다. 여야 모두가 ‘오케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여야 모두의 눈치를 보고 어느 쪽에도 날을 세우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사실 중립성, 공정성이라는 게 무색무취를 의미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아예 정치권의 영향력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개편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이사들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시민들을 포함해 대규모 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천위원의 2/3가 찬성하는 후보자를 사장으로 선임하는 등의 방법이 대안이 될 수 있겠죠.

 

▲ 임장원 회원님은 수신료를 내는 시민들이 더 큰 관심을 갖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외쳐주길 당부했습니다.

 

회원 인터뷰인만큼 2006년부터 경실련 회원으로 지금까지 계속 큰 힘이 되어주시고 계신데, 경실련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경실련은 창립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87학번이에요. 6월 민주화항쟁 세대라고도 하는데, 제가 대학 다닐 때는 학교 출석하는 게 죄스럽고 출석하는 것보다 거리에 나가는 게 익숙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3학년 때 경실련이 생겼고, 군대 다녀와서 복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실련 활동들을 알게 됐는데요,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경실련 간사를 꿈꿨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동조했지만 운동권에 참여하지는 않고 변두리에 있었는데, 어쨌든 사회변혁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어요. 노동운동이라든가 야학에 참여할 용기는 못 내고 있는데, 마침 시민사회단체라는 공간이 좋아보였어요. 그런데 거기서 또 주저하게 된 거죠. 저희 집이 가난해요. 경실련 가면 가난할 거 같은데 솔직히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찾은 게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월급받는 게 뭘까 했을 때 ‘언론’일을 하게 됐어요. 실제 기자 생활 하면서도 시민단체 지향과 언론의 지향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사회변혁과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하는 역할들을 한다는 면에서 비슷하다고 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언론이 조금 더 제도권에 있고 안정된 생활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겠죠. 그래서 비겁하게 조금 더 안정된 기반이 있는 곳으로 전향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저는 시민단체 활동가들 늘 존경합니다.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언론활동 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반성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경실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경실련이 해 온 여러 가지 활동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아파트값 문제…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전문성을 가지고 경제정의 실천이라고 하는 설립 취지에 걸맞게 많은 사회적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을 하고 지금처럼 기조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단, 이제 경실련은 시민사회단체지만 갑입니다.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같은 권위있는 시민단체의 행동이나 발언 하나하나는 이미 언론보다 더 사람들의 신뢰를 받거든요. 조선일보가 말하면 안 믿어도 경실련이나 참여연대가 말하면 믿는다는 거죠. 그래서 그 책임과 신중함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올 초에도 경실련 보도자료 관련해서 오류인가 의도적 과장인가 확인해보고 싶어 담당자와 한번 통화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볼 때는 분명 논리적으로 과장된 부분들도 보였거든요. 사실 이런 부분들은 진보언론에서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내세우는 주장이라고 해서 정치(精緻)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특히 시민사회단체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전문가들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제기자로서 한 말씀 드려봤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책을 편집하는 과정 중에 방송문화진흥회가 임시이사회에서 김장겸 MBC 사장 해임안을 가결했습니다. MBC 파업 71일만입니다. 임장원 회원님 말처럼 사장 해임이 최종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그동안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해 진실을 은폐하며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한 왜곡되고 망가진 것들을 다시 세워 정상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언론을 통해 여러 소식을 접합니다.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해야겠습니다.

 

목, 2017/12/0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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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이야기 – 학림다방 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혜화동에는 학림다방이 있습니다. 학림다방은 대학로의 명소일 뿐 아니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 예술가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곳입니다. 경실련이 창립된 1989년보다 33년 전인 1956년 옛 서울대 문리대 건너편에 문을 연 학림다방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대학생들의 토론 장소는 물론 음악, 미술, 연극, 문학 등 예술계 인사들의 단골다방으로 지금도 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1980년대 대표적 공안사건인 ‘학림사건’이 대학생들의 첫 모임 장소가 대학로 학림다방이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도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요. 가까이 있었지만 특별한 인연은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회원들에게 잘 소개하고 싶어 4대 학림지기인 이충열 사장님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 학림다방은 부부 또는 자녀가 함께 오거나, 20대와 60~70대가 등을 맞대고 담소 나누는 풍경이 자연스러운 곳이다.

 

4대 학림지기를 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학림지기를 하게 되셨는지, 학림다방과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셨는지 궁금합니다.

– 1987년 학림다방을 인수해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저는 서울대 출신도 학생운동권 출신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에요. 일제시대 때 지은 원래 건물은 지하철 4호선 공사를 하면서 헐리고, 시에서 보상해줘서 다시 건물을 세웠어요. 원래 위치에서 조금 변화도 있었고, 학림이 학림답지 못한 시기(경양식 레스토랑처럼 나비넥타이 맨 웨이터들이 있고, 유선방송 연결해서 음악을 틀어주던)를 거치면서 주변의 권유로 나처럼 모자라는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장님이 제일 좋아하는 학림다방 메뉴는?

– 손님들한테 맛있는 거 팔아야지, 맛없는 거 팔면 안 되죠. 다 맛있지만 학림만의 치즈케잌이 참 맛있지요. 비엔나커피가 유명한데, 비엔나커피는 예전부터 있었어요. 옛날에 강남의 사모님들이 대학로에서 연극보고 비엔타커피 마시고 가는 게 코스같은 시절이 있었죠.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연속극에 비엔나 커피 마시는 신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비엔나커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지요.

 

찾아왔던 손님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손님은?

  • 30년 넘게 하면서 먹고 살았으니 돈도 벌었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내노라하는 사람들 다 만날 수 있었다는 게 학림다방 운영하면서의 큰 행운이에요. 어느 특정인을 말하긴 어렵네요. 기억에 남는 손님이 수도 없이 많아서.

 

▲ 전직 사진가셨지만, 정작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말씀 도중 어렵게 한 컷 찍은 이충열 대표님(왼쪽)

 

 

자체 커피공방에 로스터기를 설치해 생두를 선별조합해서 커피를 볶아내고 하루에 스무 잔 이상의 커피를 마셔가며 연구한 끝에 학림만의 독특하고 변함없는 맛을 찾아냈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인에게 커피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변하지 않을 것도 있고 변해야 할 것도 있어요. 메뉴랄까 이런 것들은 새롭게 변해야지 옛날에 이랬으니까 계속 이것만 하면 망해요. 커피는 로스팅을 일찍 시작했어요. 대학로 스타벅스가 우리나라 2호점인데, 2호점 들어오기 전에도 로스팅을 하고 있었으니까. 글쎄, 커피철학까지는 모르겠고, 요사이 커피를 많이 마시면서 커피가 너무 유별나지는 거 같아요. 음식들도 경제가 나아질수록 퀄리티 좋은 것들 찾게 되듯이 커피도 똑같은 거 같아요. 인스턴트 먹다가 원두커피 먹고, 더 스페셜한 걸 먹게 되는데 음료고 기호식품인데, 너무들 유난을 떤다는 느낌이 들어요. 커피도 농산물이기 때문에 음식처럼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으면 그게 좋은 거지요.

 

▲ 이충열 대표님은 학림다방 뒤편에 자리한 학림커피에서 커피 로스팅도 하고 손님들에게 커피를 판매하기도 한다.

 

대학로도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점포들을 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 대학로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 우리나라 사람들 너무 쉽게 빨리 돈 벌려고 하는 거 같아요. 저게 될 거 같으면 금새 바꾸고 조금만 유행에 지나면 다른 거 다른 거, 대학로가 그렇게 바뀌어가는 거 같은데 글쎄 별로 썩 좋아보이진 않아요. 나는 유행에 민감하게 기웃거리지 않다보니 대학로에 30년 넘게 있어도 주변에 가게하는 사람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제는 좀 차분해졌으면 좋겠어요. 욕심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욕심이 있어야 추진력도 생기고 장사라는 게 항시 수익을 생각해야 하지만 마이너스 크게 안 되면 자기 만족하면서 해야 가게들도 오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너무들 다 들떠 있어요.

 

학림다방도 임대료가 오를 거 같은데 괜찮으신지 궁금합니다.

  • 지금까지 30년 동안 하면서는 어떻게 운 좋게 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어떻게 버텼는데, 앞으로는 사회가 그런 것들을 지켜갈 수 있는 여건이 돼야 해요. 이제는 개인이 지키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우리도 집주인이 지금은 나이도 많으시고 돈도 있고 하셔서 괜찮은 거지, 돌아가시고 상속되거나 주인이 바뀌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겠어요. 다른 나라가 가게를 100년, 200년 할 수 있는 건 사회가 그렇게 지킬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봐요. 자영업자들이 해보니까 99%는 망하는 거 같아요. 임대료내고 하면 사람 쓰고 그런 건 못해요. 가족들이 하고, 자기 인건비 까먹고, 그러다보면 뭔가 재료에 부실해지고 그러다보면 손님들 안가고 계속 악순환인 거죠.

 

2014년 서울특별시로부터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건물 전체가 영구 보존구역으로도 지정되었는데, 역사와 전통을 보전하는 것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미래유산 선정됐다고 하는데, 치적쌓기식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돈이나 혜택을 달라는 게 아니라 어렵게 해가는 것들을 계속 지켜갈 수 있도록 해주거나 다른 가게들도 그렇게 노력할 수 있게 뭔가 제도개선 이라든지 뭐가 있어야 되는데 너나없이 다 지정해놓는 느낌이 들어요. 나도 모르는데 지정해놓고, 동판 하나 세워주고, 계속 인터뷰 하자고 연락오고 하는데 뭔질 모르겠어요. 아직은 홍보용 수준 같아요. 예전같은 경우는 음식점에 모범음식점이 있어요. 그 집은 진짜 모범음식점이었는데 지금은 다 모범음식점이래요.

 

경실련 또는 시민단체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 정말로 집주인들이 부담감 가지고 마음대로 가게를 바꿀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여기는 정말 소중하다, 이거 없으면 안 된다’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집주인들도 자제가 되겠지요. 사회가 지켜야지 이제 개인이 열심히 해보려고 소신을 갖고 해도 안돼요. 모든 사람들이 문화적인 것들을 소중히 지켜가고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해요.

 

▲ 학림다방은 음악파일로 음악을 재생하지 않고, LP판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래된 LP판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운영하시면서 에피소드 같은 게 있으시면 나눠주세요.

– 별그대 같은 경우도 우리는 부수입 올릴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나중에 촬영하고 나서 저가여행상품 만들어가지고 중국관광객들이 관광버스 쭉 세워놓고는 무대기로 와서 사진찍고 가고 아주 곤란했어요. 관광공사랑 서울시에 전화해서 따지고 그랬죠. 물건 파는 거였으면 대박났을텐데. ㅎㅎ 차를 한잔씩 마셔야 하는데 사진만 찍고 우르르 가버리고. 아주 난리였죠. 드라마나 언론이나 이런 게 별로 안 좋은 게 막 띄우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래서 절대 인터뷰 안하고 있는데. 에이. 경실련 뭐 이런 거창한데서 와가지고. 민주화의 상징이라고도 많이 하는데, 데모가 끝나는 시점에 대학생들이 굉장히 개인주의로 바뀌잖아요. 그러면서 운둥권이나 민주화의 장소로서의 이미지는 많이 없었는데 나중에 검색기능이 발달하면서 여기가 어떤 곳이다 이런 걸 알게 되면서 다시 알려졌죠.

 

새로운 계획들 있으세요?

  • 그전 같은 경우는 50주년 때 김정환 시인이 서두르고 그래서 1주일 동안 예술가들이 일일사장 하는 행사도 하긴 했었어요. 그 이후로는 안했어요. 지금은 이제 다들 나이들어서.. 학림 마지막 세대들이 60대 후반들이니까. 이제 조금 젊은 친구들로 계승이 돼 가야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뭔가 전문성과 열정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계속 해나가야 학림도 100년 가고, 계속 갈 수 있어요. 대충 해가지고는 오래 못 버텨요. 자생력을 항시 가져야지. 학림의 브랜드가치 같은 것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해 너무 장삿속 아니고 잘 이어갈 수 있는 친구들이 하면 좋겠어요.

 

순박하고 선한 어르신을 만나뵐 수 있어 마음 따뜻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르르 몰려간 간사들에게 손수 내리신 커피도 대접해주셨습니다. 무엇이든 돈이 된다 하면 어느 도시든 똑같은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서는 시대에 학림다방이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이웃으로 역사와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가자는 마음 나누고 왔습니다.

목, 2017/12/0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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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슬프다

 

박지호 사회정책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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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들어왔던 게이트로 다시 나가면서 끝까지 감정을 정리한다. 압도당한다. 아니 표현이 부족하다. 환하게 슬프다. 아직도 부족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슬프다. 그러나 아름답다.

 

유럽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좋지 않다. 가능하면 가고 싶지 않을 정도.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유로 자의반 타의반 유럽으로 떠났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풍차. 튤립. 운하.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에서 그들이 함께 떠난 그곳. 이게 내가 네덜란드에 대해 알고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전부이다. 하지만 이번에 만나게 된 한 공간이 아니 인물이 네덜란드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 30. ~ 1890. 7. 29.) 그를 전혀 모르진 않다. 과거 다른 공간에서 그의 작품 다수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도 그의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의 우울이 슬픔이 좋았다. 한국에서도 수년전 그의 작품을 다수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프랑스스럽다(?). 한국에서 만난 전시도 그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당시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전시했다. 그래서일까. 그와 네덜란드를 쉽게 연결 짓지 못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죽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 프랑스에 치우쳐 있는 건 내가 그의 죽음에 더욱 더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드렸기 때문일까.

 

▲1973년에 개관한 반 고흐 미술관은 그의 작품 약 7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입장권마저 아름답다.

 

 

Sunflower

▲출처 :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 (https://www.vangoghmuseum.nl/)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그림이다. 고흐는 생전에 총 12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1889년에 그린 15송이의 해바라기를 보고 있으니 처음엔 당당함이 전해졌다.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노력을 여실히 느껴진다. 꽃병에 쓰여진 “Vincent”는 단순히 작가의 서명이 아니라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그때 함께 한 친구가 말한다. 슬프다고. “자신의 안에는 그림 속 여러 해바라기의 모습처럼 다양한 면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괴팍하고 우울한) 단면만 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라고 이야기한다. 친구의 이야길 듣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니 당당해 보던 그의 서명이 슬퍼지고 당당해보이던 해바라기마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일부러 바로 서 있는 빈센트 반 고흐로 보인다.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던 그의 감정이 스며든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서 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모든 작품을 다 보고 다시 한 번 해바라기를 찾았다. 그의 슬픔을 온 마음에 새기며.

 

Almond Blossom

▲출처 : 반고흐미술관 홈페이지 (https://www.vangoghmuseum.nl/)

 

1층부터 감정이 쭉 끌어올려져 해바라기를 건너 이 그림 앞에서 쾅하고 터진다. 마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같다. 환희다. 마지막 층에서 만난 Almond Blossom은 1890에 그려졌다. 정신병원에서 힘들게 지내던 날들 속에서 그는 아름답고 생명이 피어나는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조카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출생이라는 기쁨의 시간을 함께하고 싶지만 그는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더군다나 장거리 여행은 허락되지 않는다. 동생 테오는 “아기가 언제나 형처럼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어”라며 아이의 이름을 형의 이름으로 짓는다. 빈센트 반 고흐는 조카가 자신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삶을 살까봐 우려하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사실 매우 기뻤다. 조카의 출생과 자신의 이름을 따라 짓는다는 소식은 그에게 삶의 희망을 가져다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슬픔과 똑같이 빈센트 반 고흐의 행복과 웃음이 온전히 전해진다. 슬픔이 가득했던 마음속에 한 송이의 아몬드 나무 꽃이 피어난다. 아몬드 나무의 꽃은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으로 알려진다. 구름 가득한 가을 속의 네덜란드인데 갑자기 봄이 된다. 하늘색이라는 단어로 저 하늘을 표현하기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그림 속 하늘이 진짜 하늘이다. 봄이다. 슬픔 이후 봄. 또 다시 감정이 폭발한다.

 

러빙 빈센트

네덜란드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난 시간들은 가장 강력한 추억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제 누군가에게 네덜란드를 이야기할 시간이 있다면 난 자연스레 이야기 할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의 나라라고..

 

2017년 11월 9일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제작기간 10년, 영화 1초를 표현하기 위해 10일을 그렸다는 홍보 문구보다 영화 속 한 대사가 날 영화관으로 자연스레 인도한다. “당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알죠” 빈센트 반 고흐의 우울과 죽음만 알고 있던 나에게 던지는 물음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계절은 겨울로 가겠지만 나에겐 다시 봄이 시작될 것 같다. 글을 쓰며 그날의 사진을 다시 돌아보며 그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니 금방 봄이 눈앞에 와 있는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는 나에게 정말 아름답게 슬프다. 추운 봄이다.

목, 2017/12/0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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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사회적기업상 최우수기업 공감씨즈 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경실련은 재벌과 기업을 날카롭게 감시하는 활동도 하지만, 비판만하지 않습니다. 윤리적 경영,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은 발굴해 격려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상을 주고 있습니다. 해마다 좋은기업상, 좋은사회적기업상을 선정하여 시상을 하는데, 올해는 특별히 회원들에게 조금 더 소개하고 싶은 사회적기업이 있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지역사회공헌 및 사회서비스 제공부문 최우수기업에 선정된 공감씨즈입니다. ‘여행, 북한, 통일’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는 이 기업은 대구에서 북한 이주민 지원센터로 시작해 NGO에서 게스트하우스로 확장하며 사회적기업이 되었습니다.

여행사로 영역을 확장해 매출과 영업이익 등 재정적 측면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관광산업 부가가치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특히 단기적인 이익이 아니라 장기적 성장 계획을 갖추고 있어 현재보다는 미래가 기대되는 기업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럼, 인터뷰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 공감게스트하우스 본점 건물 전경

 

▲ 공감호스텔(공감동성로게스트하우스) 건물 전경

 

Q: 대구에서 북한 이주민 지원센터로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분들이 어떻게 모여 시작하게 되셨나요?

그 이야기는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데요, 2002년 당시 제가 몸 담았던 기관은 자원봉사운동 NGO로, 홈리스를 사회복지 차원에서 지원하는 부설 대구쪽방상담소를 복지부와 대구시로부터 위탁받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2002년 하반기에, 우연히 대구지역에 북한에서 오신 우리 동포들이 100여명이나 정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이들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이들을 위한 지역의 지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엔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 체계가 지금보다 많이 미비했던 상황이라, 이들을 위한 정착지원이 시급했습니다. 이후 2003년에 ‘북한이주민지원센터’를 개소하고 공식적으로 북한이주민을 위한 지원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Q: 여러 사업 중에 숙박업을 하신 계기는?

저희는 원래 당시 회자되기 시작했던 공정여행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들과 함께 백두산이라든지 북중국경지역 연수도 가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대구지역 시민들과 금강산 여행도 가보는 그런 여행사를 꿈꾸었습니다. 이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컨설팅을 받게 되는데요. 그 컨설팅과 내부토론을 통해서 게스트하우스를 먼저 설립하여 사업을 안정화 시킨 다음에 여행사를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대구지역에도 게스트하우스처럼 건강한 숙박시설이 들어서면, 많은 관광객이 불러 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대구지역 청년, 탈북 청년, 외국 청년, 전국에서 대구를 찾은 청년이 함께 ‘공감게스트하우스’란 공간에서 만나 얘기하는 것을 꿈꾸며 시작했습니다.

 

▲ 공감게스트하우스 1층에 위치한 ‘카페공감’

 

Q: 일반기업이 아닌 사회적기업을 하신 이유가 있으세요?

사실 사회적기업 지원사업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많은 증빙서류와 행정절차가 있는 사회적기업 지원기간을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회적기업 지원을 받기보다 독자적으로 살아 남아보자라는 의지가 왕성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보니, 이 업종이 생각보다 훨씬 노동집약적이었습니다. 예약전화 응대, 해외예약사이트 관리, 객실청소, 손님응대, 지역관광 안내자로서의 역할까지. 임금을 지원해주는 사회적기업이 되는 것이, 기업의 성장을 위해 중요한 부분이 되겠구나라고 판단했고, 결국 사회적기업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Q: 고객 입장에서 세계적인 숙박업체인 에어비앤비와 비교해서 공감씨즈만의 차별성이나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에어비앤비는 사실 저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지요. 에어비앤비의 기본개념은 본인이 살고 있는 집 안에 남는 방을 공유공간으로 싸게 빌려주자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실제로 한국에서는 임대료를 받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게 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유숙박을 하시는 분들이 게스트하우스(외국인도시민박업) 허가를 많이 신청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저희 공감게스트하우스는 6인실, 8인실, 10인실과 같은 도미토리 공간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숙박하며 만나는 공간이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어비앤비는 개인이나 소규모의 그룹이 집주인의 객실을 자기 집처럼 빌려서 프라이빗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죠, 저희 같은 게스트하우스는, 보다 다양한 곳에서 온 여행자들끼리 서로의 삶을 얘기하고 친구가 되는 공간으로 보시면 됩니다.

 

▲ 공감게스트하우스 객실(8인실) 내부

 

Q: 북에서 탈출해 남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부르는 말로 탈북자, 새터민, 북한이탈자등 여러 가지 표현 중 북한이탈주민이라는 표현을 쓰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희 기관은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북한이주민’이라고 사용해왔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이 용어가 우리나라 법에 명시된 공식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단체는 북에서 온 동포들이 통일이 되면 다시 고향에 가서 살수도 있고, 또 이곳에 북한의 가족들을 초대해서 살 수도 있다는 관점을 주요하게 생각해서 북한이주민이라고 사용해왔습니다만 한국사회에서 명칭과 용어와 관련해서 워낙 곡해와 다툼이 많은 관계로 법적인 용어인 북한이탈주민을 사용하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Q: 북한이탈주민들은 앞서 찾아온 통일이라는 마음으로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시는데, 통일에 대한 계획이나 준비하고 계시는 게 있으신가요?

저희 사회적기업 공감씨즈는 지난 5년간 한반도와 북한이탈주민들을 주제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한반도와 북한이탈주민에 관심 있는 내외국인 자원봉사아카데미에 북한전문가를 모시고 특강을 듣기도 했고요, 북한영화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제, 북한음식 함께 만들어 먹는 행사 등, 문화적 차원에서 북한을 알아가기 위한 활동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저희는 대구란 지역에서 향후 통일을 준비하는 작은 역할들을 늘 고민하고 담당하고자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 개선된다면 북한의 금강산, 백두산을 상품으로 하는 여행사가 되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일에 더 기여하고자 합니다.

 

Q: 수익금을 북한이탈주민 지원을 비롯한 사회 공익사업에 20% 이상 지원하실 계획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업들에 쓰이는지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2016년 결산결과 처음으로 당기순이익이 났습니다. 저희는 정관에 순이익이 발생했을 때 사용처를 명시해놓고 있는 사회적기업입니다. 순이익의 50%는 사업확장을 위한 재투자 및 자부담 급여적립에, 20%는 북한이탈주민 관련 기부나 사업에, 20%는 취약계층의 고용창출과 직원복지 및 후생관리에, 10%는 소외계층과 사회공헌을 위한 기부활동에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당기순이익이 발생하였을 때 아직 정부지원을 받고 있고 대출금도 있는 재정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업의 원칙을 정확히 실현해 나가기 위해 통일부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에 북한이탈주민들의 취업역량강화에 써주시라고, 당기순이익의 20%인 512만원을 공식 기부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기업은 처음 설립 때의 초심을 유지하며 정관에 의거한 대로 사회공헌활동과 고용창출을 위해 지원을 지속할 예정입니다.

 

▲ 공감호스텔(공감동성로게스트하우스) 내부 사진

 

▲ 공감호스텔(공감동성로게스트하우스)에서 내외국인 손님들과 함께

 

Q: 그동안 만나온 북한이탈주민들 중에 소개해주고 싶으신 분들 있으면 한 두분 소개 부탁드리고, 계속 어떻게 관계를 이어가는지 궁금합니다. 그밖에 에피소드나 인상깊은 사건들 있으면 들려주세요.

저희 기업은 북한 출신 청년뿐 아니라 남한의 청년도 함께 일하는 기업입니다. 오랜 세월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활동을 해오면서, 해외의 난민정착사례와 이주자들의 정착현황을 알아보고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국내외 사례를 통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바로 사회통합형 프로그램이란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너무 많이 구분 짓는데 익숙합니다. 다문화, 탈북자, 결혼이주여성, 경력단절여성 등등,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제도는 결국은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또 다른 낙인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저희 기업은 출발부터 남북의 청년들이 함께 적응하고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설계하고 함께해 왔습니다. 지금은 1명의 북한출신 청년이 일하고 있고, 그동안 저희 게스트하우스를 거쳐 간 북한출신 청년은 10여명에 달합니다.

게스트하우스는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업입니다. 업종의 특성상 다른 직장보다 훨씬 더 사회와 인간관계를 배우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공감에서 일했던 탈북 청년들은 이곳의 경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어 해외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거나, 수도권에 취업하고, 공공기관에 취업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기업은 이 친구들이 더 성장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라며, 그 전까지는 이들의 디딤돌 직장으로서 기능을 해나 갈 계획입니다.

실은 이들의 삶이 너무 전쟁터이기에 특별한 에피소드를 꼽기는 어렵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남한에 와서 의대에 진학하고 인턴과 전문의 수련을 잘 거쳐, 당당히 의사가 된 친구입니다. 의사가 된 후에 저희를 찾아와서, “저도 후원하고 싶습니다. 후원카드 주세요.”라고 하더군요. 왠지 모르게 눈물을 났습니다. “저처럼 남한에 와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후배 탈북자들을 열심히 도와주십시오.”라고 그 친구가 적은 후원문구를 보았을 때, 이 일의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Q: 대구의 명소를 소개해주신다면?

몇 달 전 KBS <배틀트립> 프로그램에서 구구단 김세정씨가 저희 공감게스트하우스를 베이스캠프로 대구여행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대구는 아주 핫한 먹방투어지로 인기를 얻고 있답니다. 여전히 대구에 볼게 뭐 있어 라고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시겠지만 대구 구도심에 조성된 근대골목투어는 연간 200만명이 찾아오는 관광지이며, 전국지자체에서도 도심재생의 선진지로 찾아올 정도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근대골목투어 외에도 누구나 한번은 오고 싶어 하는 김광석 거리, 조선시대부터 평양시장, 강경시장과 더불어 조선3대 시장으로 불리던 명성을 느낄 수 있는 서문시장, 서울 명동보다 넓고 홍대클럽거리에 이어 2번째라고 불리는 클럽거리를 보유하고 있는 대구의 도심 동성로는 대구가 자랑할 만한 관광지입니다. 근대골목투어, 김광석거리, 서문시장, 동성로 이상 대구관광 탑4는 독자 여러분들이 대구에 오시면 꼭 들려보셔야 할 곳이랍니다. 게다가 이 네 곳과 저희 게스트하우스는 걸어서 20분 거리입니다.

 

▲ KBS 배틀트립 촬영 차 공감게스트하우스를 방문한 구구단 세정, 나영과 공감씨즈 직원들

 

Q: 경실련에서 이번에 좋은사회적기업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사업적기업을 이미 일구어가시는 분들, 또 새롭게 사회적기업을 꿈꾸는 분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면 나눠주세요.

초기설립과정의 어려움을 딛고 정착해나가는 과정에서 수상하게 된 이번 경실련의 좋은사회적기업상은 저희 기업과 구성원들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저희가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경실련에 큰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

저희에게 사회적기업은 도전입니다. 새롭게 준비하시는 분들, 꿈을 꾸고 계시는 분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며, 아프지 않고 하는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어느 외국 신부님의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보다 따뜻하게 살아가는 길, 그래서 우리 사회가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서로를 배려하는 공동체사회로 나아가는 길, 저희는 바로 사회적기업을 비롯한 사회적경제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함께 도전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서로 배려하는 사회를 우리들이 함께 만들어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읽어보시니 왜 더 소개하고 싶었는지 이해가 되시죠?

‘통일이 되겠어?’라는 체념이 가득한 시대에…

이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꿈꾸며

묵묵히 희망을 꽃 피워가는 아름다운 기업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머지 않은 시기에 대구에 놀러 가 추천해주신 명소들도 둘러보고 공감게스트하우스도 꼭 이용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공감여행사의 금강산 여행상품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감씨즈가 2000년 초반 품은 꿈이 지금의 공감씨즈를 이뤄냈습니다. 이 소중한 성과를 토대로 더 많이 나누고 더 아름다운 만남들이 이어지기를 경실련도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월, 2018/02/05-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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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 시리즈 1 궁중족발 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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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고통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찾는 이가 늘어난 만큼, 쫓겨난 이도 늘고 있습니다.

바로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 이야기입니다. 동네는 떴지만 슬픈 이들이 있습니다.

서촌이 뜨자 서촌에서 궁중족발을 운영하시던 분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이들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세입자였습니다. 건물주인이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297만 원이던 가게를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1,200만 원으로 올렸습니다. 족발 팔아서 얼마나 큰돈을 번다고, 보증금도 아니고 어떻게 월세만 1,200만원을 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경실련도 제작년부터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대책 마련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가 돼버린 젠트리피케이션! 정책과 제도를 바꾸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소리를 잘 담아 알리고 싶어 둥지내몰림 시리즈 인터뷰를 기획했습니다.

첫 인터뷰는 최근 법원의 강제집행 과정에서 왼손가락 네 개가 부분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서촌 궁중족발 김우식 사장님과 윤경자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Q: 어떻게 서촌궁중족발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서촌에서 분식점 2년하고 7년동안 실내포장마차 해서 번 돈에다 대출금 받아서 궁중족발을 차렸어요. 빚 좀 갚아나가며 장사가 좀 되겠다 싶었는데 건물주가 바뀐 거죠.

요즘 진짜 약삭빠른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가게 오픈해갖고 3~4년 하다가 팔고 나가요. 근데 저희 같은 경우에는 여기가 고향이란 말이에요. 독립문이 고향이기 때문에 친구들이랑 다 여기 있고. 다른 동네 떠날 생각을 아예 못 한 거에요.

저희도 부동산에서 나와서 부추겼어요. 팔 생각 없냐고?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서촌이라는 이름이 뜰 때부터요. 사장님네 가게 정도면 권리금 1억 5천에서 8천까지 받을 수 있다고 자기가 받아주겠다고 파시라고 했어요. 근데 저희는 이 동네가 고향이고 여기 떠나서 살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건물주가 바뀌고 나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거에요.

 

Q: 강제집행은 언제 시작됐고, 최근 3차 집행까지 있었는데 지금까지 과정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10월 10일에 1차 집행이 있었어요. 법원, 사설용역 포함해서 100명 넘게 왔고, 저희는 60명 정도로 막아냈어요. 새벽 6시 반부터 4시간 대치해서 ‘집행불능’하고 갔어요. 2차 집행은 11월 9일에 야간집행이란 걸 신청하고 왔어요. 야간집행은 법원에서 판사가 허가를 내려야 되는 거고, 소수 인력으로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거래요. 20명 내외로 왔는데, 돈은 더 많이 들었다고 해요.

3차 집행을 또 해서 1월 15일 들어왔고 막아냈습니다. 근데 이번에는 집행관이 집행불능이 아니라 집행중지를 내렸어요. 둘의 차이가 큰데, 불능은 집행신청 다시 하려면 건물주가 다시 신청을 해야 해요. 그럼 또 돈이 들어가요. 근데 중지는 그게 아니라 중지된 상태, 말 그대로 휴전인 거에요. 그러면 언제든지 또 들어올 수가 있는 거에요.

집행관이 처음에는 불능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건물주가 집행관을 불러서 뭐라고 하니까 집행관이 다시 와서 중지라고 하더라고요. 건물주가 항의하니까 바꾸더라구요.

 

▲ 작년 11월 9일 왼쪽 손가락이 네 개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접합수술 후 회복중이신 김우식 사장님과 윤경자 사모님(왼쪽부터).

 

Q: 손가락 다치셨을 때의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

2차 집행 때 사설용역이 사복차림에 손님처럼 가디건에 후드티 입고 모자쓰고 와서 여자들부터 끄집어 냈어요. 족발 꺼내려고 주방에 있는 남편도 끄집어 내려고 했는데 남자다보니 저항하는 게 틀리잖아요. 3~4명 사설용역이 붙잡고 빼는데 윗도리까지 다 벗겨지고 했는데도 죽을 힘 다해 싸우니까 힘을 못 당하니까 건물주가 용역대장, 제일 힘쎈 사람을 1명 더 불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확 낚아채니까 그냥 딸려 나온 거에요. 그 과정에서 조리대 밑에 홈을 잡고 버티다가 새끼 손가락이 제일 심하게 다친 거였고, 네 개 손가락이 거의 절단이 됐죠. 다행히 접합은 잘 됐지만 정말 끔찍했어요.

 

Q: 최근 JTBC 뉴스룸에서 궁중족발 집행관에게 과태료를 부과했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강제집행 과정에서 잡행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집행관의 역할은 집행을 지휘하는 사람입니다. 건물주가 동원한 사설용역은 인원수만 채우는 사람들이에요. 물건은 만질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손을 쓰면 안 됩니다. 일반화돼서 내려오다보니 합법적으로 비춰지고 있는데 경비법에는 분명히 명시돼 있어서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건 명백한 불법이에요.

2차 집행중에 손가락 다쳤을 때도 집행관은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원래는 인사사고가 나면 집행관이 정치시켜야 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 할 일만 하고 방관했던 거죠. 그래서 저희가 법원 집행처에 진정서를 넣었어요. JTBC 뉴스룸에서 취재나온 게 ‘집행관 위반’으로 법원이 과태료 200만원 처분을 내렸는데, 법원이 노무자 관리 감독을 제대로 안 해 집행관에게 과태료 처분을 내린 건 우리나라 최초라고 하네요.

 

Q: 건물주는 어떤 분이신가요?

북유럽 수입가구 회사를 운영한다고 하는데, 투기성 입대업으로 돈을 버는 걸로 알고 있어요. 주로 비어있는 건물을 통째 매매하는데, 세입자들이 가져가야 할 권리금 부분이 없어져서 시세차익에 플러스가 돼서 그런 걸 잘 하신다고 해요.

그 분은 집행할 때도 직접 나오세요. 집행나오기 전에도 가게 앞 현수막이나 신문기사 스크랩해놓은 거 다 와서 뜯어버리고, 문자로 “너는 범법자다” 다쳤을때도 “쇼한거지?” “너 진짜 죽으려고 했었냐? 죽지 그랬냐?”고 했어요. 사람 괴롭히는데 일가견이 있으시더라구요. 저희 건물에 다른 가게들도 있었는데 소송까지 간 건 저희뿐이에요. 다 지쳐서 떨어져 나갔어요.

남편이 손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고, 저랑 사람들 있는 거 뻔히 알면서 2주 동안 가스 2번 끊고, 전기 개량기 아예 통째로 떼어가고 수도 잠그고 화장실 폐쇄까지 시켰어요. 사업자등록증 말소시키고 통장 압류까지 다 해놨어요. 그걸 2주 동안에 다 했어요. 수도하고 전기는 생존권이잖아요. 사업자등록증도 본인 아니면 말소를 못 시키는 건데… 저희가 관공서 쫓아다니면서 다시 회복시키느라 진짜 힘들었어요.

저희가 다시 관공서 사람들 실사나오게 해서 복구시켰어요. 화장실은 앞에 사장님들이 두 군데나 키를 주셔서 사용하고 있어요. 통장 압류한 것만 아직 못 풀었어요. 그거는 또 다른 손해배상으로 넘어가는 거더라고요. 주택청약통장까지 다 압류당했어요.

10월 말에 투병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10월 30일날 돌아가셨는데, 탈상하고 1주일 만에 2차 집행을 들어온 거였어요. 그리고 그날 손을 많이 다친거죠.

SNS 하는 젊은 분들이 한달에 1,200만 원 월세가 말이 되냐고? 막 댓글달고 비난하니까 이 분이 명언을 남겼죠. “족발가격은 족발집 사장이 정하는 거고, 임대가격은 임대인이 정하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왜 문제냐는 거에요.

 

▲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11월 9일 이후 한달 내내 매일 울었다고 하신 윤경자 사모님.

 

Q: 이런 일들 겪으시며 심정이 어떠셨어요?

아무리 자본주의라지만, 건물주는 내 돈 가지고 내가 올리는데 뭔 상관이냐 이러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다쳤는데 더군다나 음식하는 사람이 손을 다쳤는데 그 당시에는 남편 손이 불구가 될 정도라고 병원에서 얘기했었어요. 회복이 빨라 정말 다행이지만.

지금은 웃으며 말하는데, 11월 한달 동안은 내내 매일 울었어요. 경찰서도 한번 안 가봤는데 생전 처음 관공서도 다 다니고 법원이며 경찰서며 혼자 다녔어요. 아이들은 다 커서 직장 다니고 군대 가있고 해요. 큰애가 아빠 병원에 있는 동안 병간호했는데, 다친 날 아빠 다친 걸 직접 보고 대성통곡하는데 그거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요.

시세차익으로 돈 버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하지만 자기가 돈 버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이건 사람의 삶을 파괴시키는 거에요. 애들한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요.

 

Q: 도와주시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은 많으세요?

저희가 3차까지 집행 막아내고 할 수 있었던 게 저희 도와주시는 분들 없으면 못 하는 거에요. 맘상모(마음편히장사하고싶은상인들의모임)는 저희처럼 다 장사하는 분들이세요. 저희처럼 이런 일 겪고 분쟁에서 합의봐서 다시 장사 시작하시는 분도 있고, 장사 아예 접고 회사다니는 분도 있고, 아직 분쟁은 안 일어났지만 이제 다음 다음 차례로 대기하고 계시는 분도 있어요. 맘상모가 법률자문부터 수요집회 등 저희와 항상 같이 해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그밖에도 기사랑 보도가 많이 되고, 뉴스, 인터넷 페이스북에도 많이 알려져서 분개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세요.

3차 집행 때는 새벽부터 모였거든요. 9시에 들어온다고 해서 새벽 6시부터 모였는데, 제가 처음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더라니까요. 우리가게 처음 오는 젊은 학생들이 집행을 막아내겠다고 왔어요. “사장님 힘내세요! 제가 보고 들어서 많이 알고 있어도 온 건 처음이에요. 많이 오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돼서 많이 못왔어요. 오늘 와 봤으니까 다음에 또 올게요”하고 가는 거에요. 그날도 건물주가 와서 행패부리고 하는 거 다 봤거든요. 두 달 동안 있으면서 저희한테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느껴요. 그러니까 버틸 힘이 돼요.

저희 가게 단골손님도 문이 항상 닫혀 있으니까 지나가만 갔었대요. “사장님 힘드시죠? 여기 지나만 갔었는데 항상 문이 닫혀 있어서 사장님 못 뵜어요. 저도 이 동네 살고 있지만 서촌이라고 뜨면서 이렇게 된 건데, 이제는 사장님의 싸움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됐으니까 사장님네가 쫓겨나면 여기 임대료 다 오르는 거에요. 사장님 꼭 이기셔야 돼요”하고 가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집에서 쿠키를 손수 구워가지고 그 앞에 메모를 붙여가지고 앞집에 쇼핑백을 맡겼어요. 자기네 온 가족이 우리네 족발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이기시라고…

그런거 보면서 참 세상이 진짜 나 혼자라고 느꼈는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구나 실감나게 느꼈어요. 처음엔 죽을 거 같았거든요.

 

Q: 영업을 못하셔서 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으시겠어요.

장사도 못하는데다가 계속 나가는 건 생기니까 어렵죠. 여기 지켜주시는 분들 생활하고, 한번 오면 스무명에서 서른명씩 오시니까 그 사람들 먹거리며 돈이 계속 들죠. 그래도 돈으로 안 되시는 분들은 음식으로 연대를 해주시고, 김장철에는 자기네 김치 담그시면서 한통씩 갔다주기도 하셨어요. 인터넷에 후원계좌 열어가지고 십시일반 모이는 게 그게 꽤 큰돈이 되더라구요. 큰 돈 송금하는 게 아니라 1인당 5천원, 1만원 모아지면 그래도 꾸려는 나가겠더라구요.

 

▲ 궁중족발집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돼버렸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제 법정싸움하고 경찰서 조사만 남아있어요. 법적으로는 진 건데요, 아직 손해배상청구 건도 남아있고, 유치권 소송이 진행 중이에요. 강제집행은 중지된 상태라 또 들어올 수 있어요. 저번엔 법원인력 20명 내외로 적게 왔었는데, 이번엔 더 많이 올 수도 있어요. 보통 건물주가 3차 4차까지는 집행을 안 하거든요. 무리라고 생각해서 안 한 대요. 4차까지 하면 그때서 아 안 되겠구나 포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 상태에서는 일단 잘 버티는 게 중요해요.

24시간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매일 요일별로 행사를 해줘요. 제일 고마웠던 게 옥바라지선교센터는 기도회를 열어주시고, 나머지 음악가들은 다른 음악가들 추천해서 공연, 시낭독회, 영화상영도 해줘요. 다양하게 문화제를 많이 해주시는 게 잡다한 생각하지 말고 기운 북돋아주려고 하는 거 같아요.

안쪽에 테이블 4개 놓고 손님 받던 방은 이제 가게 지키는 사람들이 잠자는 곳, 공연할 때는 무대가 돼요. 가수분들이 이 무대를 되게 좋아하세요. 신발 벗고 양말 신고 공연해보긴 처음인데 웬만한 공연장 못지않고 좋다고 해요.

홍대입구에 있던 두리반 사례처럼 저희도 빨리 해결돼서 마음 편히 장사하고 싶어요.

 

인터뷰 갔는데 가자마자 사장님과 사모님이 저희에게 떡볶이를 한 대접 주셨어요. 분식집하신 경험 때문이신지 정말 맛있었습니다. 영업도 못하시고 투쟁장으로 변해버린 가게를 보며 안타까웠지만 지지해주고 함께 지켜주는 이들과 함께 꿋꿋이 싸우시는 두 분에게서 오히려 힘을 얻고 왔습니다.

소액이라도 후원해주시면 십시일반 모여 큰 힘이 된다고 하시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 계좌로 후원해주세요.

[궁중족발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455-889687 (예금주:구자혁)

 

 

 

화, 2018/02/0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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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을 바라보다] 김성훈 공동대표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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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이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이합니다. 올해부터 30주년을 준비하며 그간의 경실련 활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30주년을 바라보며 경실련이 만나야 할 분들을 한분씩 찾아뵙고 인터뷰를 통해 그 내용을 담아보려 합니다. 첫 번째 인터뷰로 1989년 창립 당시 함께 하셨고 토지공개념, 재벌개혁, 농업개혁, 통일운동을 활발히 하시고 최근에는 소비자정의센터에서 반GMO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김성훈 前공동대표를 만났습니다.

 

 

1. 경실련 창립 당시 이야기를 조금 해주신다면?

89년 당시 사람들이 지금은 경실련에 하나도 안 남아있는 거 같아요.

7월에 발족해서 11월에 정식으로 사회적으로 선포하고 선언하고 시작했어요. 저도 7월에는 없었고, 11월부터 함께 했어요. 종로5가 다락방 시절 그때 생각하니 교수였어도 참 순진했었어요. 활동가들하고도 완전히 동지애, 아버지와 아들같은 사이로 지냈지요.

경실련은 크게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라는 두 뼈로 시작했어요.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지금 사회를 보면 후퇴하거나 모자란 부분도 많이 보입니다.

 

2. 말씀 꺼내주신 김에 경실련의 30년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토지공개념이 안 되는 바람에 농지가 다시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됐어요. 부재의 지주, 도시자본 투기자본의 먹이가 됐어요. 경실련 30년 동안에 금융실명제, 한국은행 독립이 이뤄졌지만 재벌개혁은 이제는 삼성공화국, 현대공화국으로 발전했어요. 더 나빠졌어요. 전형적인 예가 이재용 부회장을 무죄 석방한 부장판사에요. 다 삼성장학생이에요. 삼성장학생이 아닌 정부관리, 삼성장학생이 아닌 사법부 판검사, 삼성장학생이 아닌 교수, 학자들이 없을 정도에요.

그 당시 내세웠던 주택임대차보호법 계약기간 2년으로 늘린 것과 한국은행이 나름대로 그래도 독립성 한 것은 잘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직 많이 부족해요. 경실련 모토가 일한만큼 대접받자인데 노동자, 농민들은 대접을 못 받고 재벌들 돈 있는 기득권층만 이익을 다 가져가고 있어요.

토지공개념은 오히려 1949년 농지개혁 당시처럼 소작화가 만연해졌어요. 헌법에도 경자유전 원칙으로 하고 소작은 금지했는데 위장된 소작이 지금 지배하고 있고, 농지의 반 이상은 소작이고, 이름이야 임차농, 위탁경영 바뀌어있지만 눈감고 아웅하는 거죠. 경실련이 더 치밀하지 못했다고 봐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라, 코포라토크라시(Corporatocracy) 대기업 자본주의 세상이에요. 경실련도 자유롭지 못해요. 코포라토크라시에서 경실련이 살아남은 데는 성공했어도 경실련의 출발인 소위 시대정신을 실현시키는데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3. 어떻게 시민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앞으로 죽을 때까지 농(農)하고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중학교 3학년때부터 농촌을 살리고 농민을 살리는 것에 관심을 가졌어요. 농촌을 살린다, 농민을 살린다는 것은 약한 사람을, 취약한 산업을 살리자는 것이에요. 항상 약한 생명이 있는 곳, 농(農)은 바로 생(生)이에요. 생명이 있는 곳, 취약한 곳, 취약한 지역, 취약한 산업, 취약한 사람들을 돕고 그분들에게 새 빛과 새 얼(정신)을 심어주고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경실련 참여하기 전에는 우리농업지키기운동을 했었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 농업지키기운동에서 우루과이라운드에 위기감을 느끼고 농촌, 농민운동 살리자고 전국단위로 시작할 때 경실련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경실련에서 농업개혁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반 우루과이라운드 투쟁, 우리농업지키기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남북한 통일은 서로 자주 만나고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해서 경실련에 통일협회가 생겼죠. 통일협회에서 창립을 도와줬던 우리민족서로돕기 차원에서 북한을 12번 갔었어요. 북한에서 농사 실험도 했죠.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대표 하라고 해서 공동대표도 했었어요.

 

 

4. 김대중 정부 때 농림부 장관을 26개월 하셨었는데, 시민운동할 때와 어떤 점이 다르셨나요?

시민운동하면서 언론에 매일 나오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유심히 봤던 모양이에요. 그때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총장 할 때인데, 장관으로 임명됐다는 전화 받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무슨 장관인줄도 모르고 올라가서 임명장 받고 농림부장관인 줄 알았어요.

가서 저는 시민운동을 그대로 했어요. 한 건 똑같지만 훨씬 편해요. 예산 있지, 직원들 무조건 명령 따르지… 경실련에서 할 때는 일일이 설득해야 하고 반대하는 집단들 만나서 설득하고, 돈도 이곳 저곳 얻으러 다녀야 하는데, 악만 제대로 쓰면 기재부에서 예산 따다 하니까 경실련 대표보다 몇 배 쉽더라고요.

가서 협동조합 개혁, 농조개혁(수세폐지), 유기농 원년 선포, 농촌 정보화 등 네 가지 일을 끝내고 나서는 사직서 내고 나왔어요. 벼슬자리에 나아갈 때는 그만둘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제 할 일 하고 끝났다 생각해서 물러나고 바로 캐나다로 갔었지요. 2년 6개월간 경실련에서 파견한 장관이라고 생각하고 일했어요.

 

5. 북한 다녀오신 이야기와 통일운동 이야기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북한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같은 역사, 같은 문화,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어요. 나라마다 자기나라 체제가 있고, 다름은 인정해야죠. 왜 꼭 대한민국같은 신자유주의 자본가가 지배하는 이런 자본주의가 돼야 한다는 법이 없거든요. 자본주의도 결함투성인데, 체제의 다름만 인정해주자는 거예요.

체제의 다름만 인정하고, 서로 교류와 협력을 하면 우리에게 이익이 되고, 북에도 이익이 되는 일부터 하자는 거예요. 예컨대, 북한의 바닷가들이 우리보다 덜 오염 됐거든요. 거기에 우리 자본과 기술로 양식장 만들어서 해외나가서 팔건 우리 시장에 팔건 해서 이익금을 반반 나눠 갖는 거죠. 우리나라 메밀 부족해서 수입해 먹거든요, 북한에 메밀 심어주고 수확해서 이익 나눠갖자는 거예요. 우리나라 돼지새끼들 가져가서 거기서 키워서 나눈다든지 먼저 서로 이익이 되는 일부터 하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북에 이익이 되고 우리는 손해가 없는 것을 해서 신뢰를 쌓아야 해요. 우리는 남아도는 식량과 비료, 부족한 북한에 나눠주면 됩니다.

금강산에 내가 심은 나무, 개성공단에 심은 나무들, 지금쯤 많이 자랐을텐데 죽기 전에 그거 보는 게 소원이에요. 금강산 열리기만 하면 첫 번째로 갈려고 해요.

 

6. 최근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책을 쓰고 있어요. ‘밥이 민주주의다’ 우리가 삼시세끼 먹는 밥이 완전히 다국적 상업자본의 먹이가 돼가지고 안전한 먹거리가 아니라 유전자를 조작한 GMO라든가 유해색소나 유해첨가물이 들어간 입에 달콤한 눈에 보기 좋은 음식이 우리의 신체를 좀 먹고 있어가지고 병들어가게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기업이 식품산업협회라는 데가 식약처가 GMO보급의 선봉에 서서 GMO보급의 앞잡이가 되어 있어요. 생산자가 ‘내 것은 GMO가 아닙니다’ 하는 표시하면 잡아가도록 하고 있어요. 제품이 GMO가 들어있다고 하는 완전표시제를 못하게 하는 것까지 좋은데 ‘내 것은 GMO가 아닙니다’는 표시도 못하게 하는 법이 어디있냐고요. 내가 생산한 콩, 두부, GMO가 안 들어갔습니다 해서 잡혀간 사례가 있어요.

일찍이 세종대왕도 “식위민천(食爲民天)” 밥은 백성의 하늘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먹거리에 뭐가 들어있는가도 모르고 있는데, 이것만 제대로 고쳐도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다. 따라서 밥이 민주주의라는 거예요.

 

7. 마지막으로 경실련이 앞으로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경실련 30주년을 바라보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토지공개념 확립하는 일과,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실천하는 일은 영원히 경실련이 풀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해요. 경실련이 출범했던 당위성, 이유가 지금도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할 것이냐? 점점 돈과 권력의 장학생이 되어가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상근활동가들이 전문가가 돼서 이제는 전문가들을 이끌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경실련은 재창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봐요. 경실련이 출발했을 때 시대상황이 결코 더 나아지지 않았거든요. 경실련이 초심을 다시 살려서 재창립 선언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30주년을 맞아 경실련이 재창립한다는 정신으로 재창립 선언이 나오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월, 2018/04/0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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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 시리즈 2편] 노량진 카페 7그램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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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 2월호(통권 161호) 서촌 궁중족발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노량진의 카페7그램을 인터뷰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궁중족발 인터뷰 보시고,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생존을 위협당하는 상인들의 상황을 안타까워하시며 분노하셨습니다. 궁중족발은 개인이 건물주지만, 카페7그램은 기업이 건물주였습니다. 건물주가 개인이든 기업이든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입자 입장에서는 내쫓김을 당하는 억울한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둥지내몰림 두 번째 인터뷰는 건물주인 박문각과 소송을 진행 중인 노량진 카페7그램 박지호 사장을 만났습니다.

 

 

1. 현재 상황을 설명해주세요.

2012년 1월부터 박문각 학원 1층 지금 자리에서 카페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카페자리는 외진 곳이라 유동인구가 많지 않았어요. 외진 자리에 아무도 안 들어오니까 학원측에서 저를 유치하려고 주차도 무료로 해주고, 홍보를 위해 간판 설치도 협조하겠다고 했어요. 1억 3천에 66만원이라는 임대조건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계약을 했습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고 해서, 5년으로 해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해주더라고요. 그러면서 할 수 있으면 오래 하라고 해서 그 말만 철썩같이 믿었었어요.

그런데 점차 손님이 늘고 장사가 잘 되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박문각 측이 조금씩 갈등을 일으키더라고요. 2014년에는 학원 입구에 있던 홍보 배너를 강제로 이동시키고, 2015년에는 간판도 강제 철거하더니 급기야 2016년 6월 1일 매장을 비우고 나가라는 내용증명을 보내왔어요. 그 후 명도소송을 진행하더라고요. 저는 반소 안하면 변호사비, 원상복구 비용 등이 보증금에서 공제되기 때문에 보증금을 지키기 위해서 권리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어요. 법원에서 보상을 위한 감정평가 판결이 내려져 현재 감정평가 절차가 진행중이고, 간판 강제 철거에 대한 형사고소도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2. 서울시 분쟁조정위원회 조정이 열렸다고 들었는데 합의는 왜 결렬됐나요?

저희 가게에 1억 7천, 2억에 권리금 내고 오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내용증명 받고 나서 그러면 팔고 나가게 해달라고 했는데, 박문각 측에서 거절했어요. 재계약도 안해주고, 팔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무조건 나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시 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의뢰했어요. 저는 합의금을 7천에서 6천, 5천, 4천까지 내려서라도 합의를 원했어요. 박문각은 처음에 1천 5백만원을 얘기하다고 1천만원으로 내리더라고요.

제가 처음에 인테리어에 투자한 비용만 1억 8천만원이 들었어요. 그래도 저는 부동산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박문각과 싸울 자신도 없고, 좋게 마무리하고 끝내고 싶어 박문각이 제시한 1천만원에 매장을 비워주기로 하고 서울시 중재 합의서를 작성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박문각 측이 합의를 깨고 소송을 진행해버린 거예요.

 

3. 자리 잡기까지는 사장님이 노력한 부분도 많으실 텐데 억울하시겠어요.

저희가 처음 시작할 때 같은 1층에 있던 햄버거집, 피자집 1톤, 5톤 물류 트럭들이 항시 저희 카페 앞에 주차가 돼 있었어요. 6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관할관청에 신고하고, 불법주차 차주들 일일이 설득한 끝에 차 없는 인도를 만들고 구청의 협조를 얻어 주차봉을 설치하고 상권을 만들었어요.

영화이벤트, 뮤지컬이벤트도 하고, 손님들 끌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대로변 횡단보도 앞에 있는 약국에 한 달 동안 매일 찾아가서 홍보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서 약사님이 감동해서 포스터도 정문에 걸게 해주고, 배너도 놓으라고 해주더라고요.

 

 

4. 박문각에서 간판은 왜 떼었을까요?

2015년 박문각 사무실이 2층에서 1층으로 이전하는 시점에 학원 입구에 카페 간판이 먼저 보이니 학원 이미지에 안 좋다고 철거했는데 잘못된 것이죠. 실제로 간판이 철거된 이후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더군다나 간판 협조사항은 계약당시 특약사항에도 있는 내용이에요.

검찰에서 관리인이 나랑 합의해서 뗐다고 거짓말을 하더라고요. 돈 들여서 특약까지 한 것을 제가 합의해서 뗄 리가 없잖아요. 제가 처음에 찾아갔을 때 관리인이 회장님 지시라고 했거든요. 특약사인을 직접 한 사람이 전무에게 찾아갔을때도 회장님 지시라 막을 수 없었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자기가 혼자 했다고 그러고 전혀 엉뚱한 감사가 시켰다고 말을 번복하며 거짓말을 하더라고요.

서울시 분쟁조정위원회에서는 돌출간판은 불법이라 동작구청 행정처분으로 저희 간판을 철거했다고 주장하더라고요. 동작구청에 의뢰해서 알아보니 행정처분 사실이 없대요. 그리고 그 건물의 모든 돌출간판 중 저희 간판만 철거한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박문각측에 확인해보니 회장과 전무는 그런 지시를 한 사실이 없고, 그 당시 모든 건물관리를 감사가 했기 때문에 관리인이 감사의 지시를 받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노량진 학원가가 불법간판이 난무해서 동작구청, 경찰서, 교육청 관리자들이 모여 자정결의도 하고 그런 때여서 학원 담당자가 아마 구청에서 환경정화 차원에서 철거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답변했습니다.

 

5. 박문각이 이렇게까지 내보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희 옆 분식가게는 주인분이 암투병하시다 돌아가셔서 아내 분이 혼자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변호사 비용, 생계,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 두려워 함께 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하시고 2016년 11월에 권리금 전혀 못 받고 나가셨어요.

박문각에서는 저에게 저희 매장자리와 옆 가게를 연구실로 사용한다고 했는데, 내부 관련자들 통해 들은 바로는 카페를 하려 한다고 했어요.

상가임대차보호법에서 건물주가 1년 6개월간 비영리 사용시 보상 안 해도 된다는 법의 맹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꼼수를 쓰고 있는 거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박문각측은 학원시설이 부족해서 1층 가게 2개를 자습실이나 연구실같은 학원용도로 쓰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무료북카페 계획은 없다고 했습니다.

 

6. 지금 가장 힘든 게 무엇이세요?

자식과 와이프, 어머니에게 제일 미안해요. 명도소송 당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를 저희집 근처로 모시고 왔는데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데 죄송하죠.

저희 같은 세대는 부모님도 챙겨야 되고, 자식들도 챙겨야 되고 제 노후는 생각도 못해요. 장사도 안 되니까 다음 달 생활비 어떻게 할까? 여기 정리되면 나가서 뭐 해야 하나? 쫓겨나는 것보다 나가서 뭘 해야 하나가 걱정이에요.

건너편 테이크아웃 카페도 권리금 7천이에요. 권리금을 1억이든 2억이든 받아도 카페는 이제 자신이 없어요. 자리 찾기도 1년 걸렸어요. 죽기 살기로 했어요. 정말 새벽부터 올인하고 일했는데 건물주 욕심 하나에 모든 게 무너졌죠.

직장인의 마지막 보루가 자영업인데, 장사가 안되고 최저임금 오르고 이런 건 내가 극복이 돼요.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되니까. 최저임금 오르고 하면 서로 공감대가 생겨서 열심히 하니까 잘 돼요. 그런데, 건물주에게 쫓겨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다른 데 가서 할 수도 없어요. 또 쫓겨나면 어떻게 해요? 트라우마가 생겨요.

 

 

7. 사장님처럼 억울한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개선되어야 할까요?

가장 좋은 것은 법 밖에 없잖아요. 최소한 10년은 보장해줘야 돼요. 임대료 빼고 초기 투자비용만 1억 8천 든 거 생각하면 10년은 돼야 기반잡고 넘어가는 게 가능해요.

10년 보장해주더라도 자영업자가 이미 너무 포화상태잖아요. 경쟁이 치열하고 장사가 안돼서 접는 거는 얘기 못해요. 자기 책임이니까. 근데 사회적인 환경 있잖아요. 상가임대차보호법 문제, 환산보증금 문제, 건물주 갑질, 법이 맹점을 이용해서 1년 6개월 비영리 조항을 이용해가지고 저희처럼 이렇게 내쫓는 것은 막아야죠. 비영리 1년 6개월 조항같은 것은 악용할 수 있기 때문에 빼야 돼요.

권리금은 무조건 세입자가 받을 수 있게, 이럴 땐 주고 이럴 땐 안주고 하지 않도록 해야해요. 저 사람한테 하면 1억 받는데, 건물주에게 가면 천 만원도 못 받고 그런 상황이 생기면 안 되는 거죠.

 

8.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로선 언론에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기업인지라 언론플레이도 잘하고, 언론에 예민하더라고요. 간판 강제철거 형사 수사 관련 담당검사가 2017년 7월 이후 4번이 바뀌고 아직도 수사중입니다. 이런 일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하는데, 참 어렵네요. 지금으로서는 많은 시민들이 관심 가져주셔서 법적인 잣대보다 사회적인 여론을 잘 만들어주시면 큰 힘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건물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국내 학원업계 굴지의 기업입니다. 더구나 경찰, 검찰 공무원 교육과 부동산 강의를 하는 학원입니다. 둥지내몰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법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시대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기업이 가진 사회적 이미지에 맞게 문제가 잘 해결되길 기대합니다.

목, 2018/04/1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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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본부에 지역팀이 생겼어요!!!

 

노건형 지역지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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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저는 1996년 10월 경실련에 채용되어 2달간의 연수를 거친 후 수원경실련 간사로 경실련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수원경실련이 사무국을 맡았던 ‘수원 로컬아젠다21’ 간사를 시작으로 부설 연구소인 사)경기지역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활동을 했습니다. 이후로는 경실련 사무국에서 활동하여 부장, 사무국장, 경실련 경기도협의회 사무처장을 거쳐 2018년 중앙에 새로이 만들어진 부서인 지역팀장으로 4월부터 상근하고 있습니다. 담당하고 있는 일은 조직위원회와 지역경실련협의회 운영위원회 활동 및 지역 지원 활동입니다.

 

지역 경실련, 왜 만들어 졌나?

경실련 가족분들이면 많이 아시다시피, 경실련은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지향하여 경제정의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경실련은 부동산투기 및 불로소득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경제정의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지금도 많이 알려진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이란 대안을 한국사회에 제시하였습니다. 경제파트와 부동산파트가 여전히 경실련의 핵심운동파트로 진행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역경실련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역사회에서의 경제정의를 이루기 위해서일까요? 현재 약 25개 지역에 지역경실련이 있으며, 많은 지역경실련의 창립이 90년대 중, 후반에 이루어 졌습니다. 이는 당시 지방자치의 부활에 맞춰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지방자치의 확대와 발전을 위해 지역운동이 필요하다는 판단과 내부적으로는 경실련운동의 확장을 도모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경실련이 우리사회에 최초의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제시했다면, 지역경실련 창립과 활동은 지역운동의 시초였다고 생각됩니다.

 

지역 경실련의 역할, 지역협의회의 탄생

초기 지역경실련은 주로, 지방정부와 지방의회 감시 및 견제, 환경운동, 지방선거 및 해당 지역 현안의 대응, 공명선거협의회 활동 등을 활발히 진행해 왔습니다. 지방정부를 감시하는 지역운동의 모델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군(軍)보다 우리사회의 영향력이 컸던 경실련은 96년 하반기에 ‘현철이 테이프 사건’을 시작으로 ‘간장 파동’, ‘대필사건’ 및 ‘백화점식 시민운동’ 등 언론과 여론의 많은 질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계속적으로 터져 나오는 문제로 인해 환경개발센터 등 부문조직의 독립, 많은 활동가 이탈, 청년회 및 대학생회 해체 등 조직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게 됩니다.

조직 내부에서는 이러한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을 조직민주화 및 의사결정구조라고 판단하였으나, 발런티어나 부장, 간사들의 의견은 실, 국장들의 의견을 넘기 힘들었습니다. 이후 지역경실련들이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게 됩니다. 1년 동안 중앙과 지역 간의 갈등 속에서 지역경실련 협의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중앙경실련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지역경실련의 활동과정에서 지역경실련협의회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역경실련의 성과

중앙경실련이 우리사회에 합법준수, 대안제시, 정책제안, 제도개선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가져왔다면, 지역경실련은 지방자치 정착 및 확대, 지역현안 대응 및 주민과 함께하는, 피부에 와 닿는, 현장에서의 지역사회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지방선거 대응 ‘우리사회, 이렇게 바꾸자’ 정책자료집 발간과 대한민국 최초의 예산운동인 ‘예산감시네트워크’ 활동과 IMF 시기 전국 경실련이 함께 한 ‘실업극복 국민운동본부’ 활동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재, 지역경실련은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지역경실련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 시민운동의 어려운 상황과 궤를 같이한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계신 분들께 고맙다는 마음도 갖고 있습니다. 규약 상 지역경실련의 목적은 ‘지역사회의 경제정의,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한 평화적 시민운동을 한다’라고 모호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각 지역경실련의 활동이 해당 지역사회의 경제정의,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한 활동인지 자체적으로 판단하여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지역경실련의 존재 이유가 상근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조직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특정 개인(공동대표 또는 집행위원장, 사무처장 등)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도 아닙니다. 지역에서 각자 자기지역의 활동을 되돌아 봐야할 시점이 아닌 가 생각됩니다.

 

지역에 경실련 운동을 지속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한 과제

건강한 시민운동을 펼쳐야 할 것이며, 안정적으로 시민운동을 펼칠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객관적 지표라 할 수 있는 회원수와 월 회비액수를 볼 때 대부분의 지역경실련, 특히 기초 지역경실련의 경우 매우 상황이 어려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타 지역 경실련 사례들을 공유하여 함께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둘째로 경실련에 맞는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평균적으로 20여년의 활동을 하면서 각 지역마다 많은 인적 교체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교체이후 경실련 운동 및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전달되지 못해 힘들어 하는 지역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꾸준한 정체성 교육과 더불어 조직 구성원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지역운동과제의 재정립과 향후 운동과제 발굴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현재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운동 컨텐츠를 끊임없이 발굴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대부분 1인 상근자 구조를 갖춘 지역경실련 혼자서 하기 힘들기에 지역팀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저 혼자 무슨 잘난 능력이 있어서 이런 과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은 함께 고민하는 장들을 마련하는데 주안을 두도록 하겠습니다. 차근차근 진행하되 꾸준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금, 2018/06/0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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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이야기] 고양이 책방 슈뢰딩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책방이음, 학림다방에 이어 혜화동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는 낙산공원 올라가는 길에 있는 예쁜 고양이책방 ‘슈뢰딩거’입니다. 요즘 어딜 가나 길고양이들을 많이 만나실 텐데, 경실련 주변에도 길고양이들이 참 많습니다. 귀엽기도 하고, 때로는 안쓰럽기도 한데, 우리 주변의 고양이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며 김미정 책방지기를 만나 책방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 나눴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양이 책방을 열게 되셨나요?

책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했었어요. 엄마가 시인이시고,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선생님이 동화작가셨어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었는데 엄마 따라서 도서관 다니다 보니까 사서가 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문헌정보학과에 진학을 했는데, 사서가 되지는 못했어요.

어쨌든 책과 관련된 일은 계속 하고는 싶은데 그건 잘 안 됐고, 그러면 제가 저를 고용하는 수밖에 없겠더라구요. 고양이 도서관을 만들까 했는데, 그건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걸로 수익모델을 찾기는 힘들 거 같더라구요.

책방 열 당시는 직장 다니다 그만둔 지 2년 정도 됐을 때였어요. 사서를 꿈꾸며 법학전문사서, 의학전문사서처럼 주제전문 사서가 되고 싶었어요. 어떤 특정주제에서 지식서비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일 좋아하는 주제가 고양이였기 때문에 그때 고양이 두 마리 키우고 있었어요. 지금은 4마리가 됐어요. 주제전문 서점이라고 하면서 제가 모르는 분야를 할 수 없잖아요. 제가 고양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실제로 경험해 본 것 중 하나 고양이고, 좋아하기도 해서 고양이를 주제로 열게 됐어요.

 

책방이름 슈뢰딩거는 어떻게 지으신 건가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시작은 물리학에서 나왔지만 문화 전반에 전유돼서 쓰이고 있어요. 모순된 것이 중첩된 상태(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다!?)가 재미있기도 하더라고요. 강아지서점 이름이 파블로프인 것과 비슷한 거죠.

사실 슈뢰딩거의 사고실험 자체가 고양이 친화적이진 않잖아요. 고양이 서점의 이름이 슈뢰딩거라 함은 약간 좀 아이러니 하면서도 재미있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책방 안에 당신이 원하는 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당신이 찾던 것의 존재 이유는 문을 여는 순간 정해지는데, 여기에 당신이 원하는 게 여기 원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식이죠. 당신이 찾는 게 여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나가실 때 당신의 고양이 한 마리는 마음속에 품고 가기 바란다는 마음으로 지었어요.

 

책방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거 같아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처음 시작은 신설동에서 했는데, 대학로로 옮기고 나서는 작게 카페운영도 시작했어요. 매니저가 대학동기인데 커피를 잘 내려요. 그밖에 고양이를 소재로 온갖 활동들을 하고 있어요. 그림그리기 클래스도 있고, 고양이 사진 잘 찍기, 글쓰기 수업도 있고, 펠트공예 수업도 있어요. 보통은 SNS 홍보 보시고 신청하고 오세요. 동물단체들에는 프로그램을 같이 진행할 여력은 없어서 정기후원을 하거나 비정기적인 활동으로 여기 수익금을 기부한다든지 하고 있어요.

 

 

고양이라는 주제가 색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도 창업인데, 창업이야기도 해주세요. 요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나 경험담 들려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일단은 서점일은 추천할 만한 업종은 아닌 것 같아요. ^^; 서점은 일반 자영업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어려움을 다 가지고 있고 거기다 플러스 서점만의 힘듦이 또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창업으로 서점은 권하지 않아요. 저희 서점은 비교적 나은 편이지만 최저임금도 못 버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람들이 책의 가치를 많이 알아주지 않는 것도 아쉬워요. 책 한권에는 저자가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공부하고 고민한 정수가 있죠. 내가 책을 구매한다면 그 사람의 몇 년에 걸친 공부를 시행착오 없이 가져오는 건데, 그것도 영구소장 한다고 생각하면 책이라는 것은 돈을 지불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책방창업이 이렇게 어려운데 슈뢰딩거는 어떻게 운영하고 계시나요?

여기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시는 분들이 여기서 구매해주시고, 공간에 대한 애정으로 여기 나오셔서 책도 보고 가시고 구매해주셔서 운영되고 있다고 봐요. 여기의 강점은 다른 인터넷 서점과 달리 오프공간이 있는 거잖아요.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곳이 아니고 고양이로 가득찬 공간에서 책을 본다는 경험 자체가 저희 컨텐츠에요. 여기에서 책을 보시는 거 자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카페도 식음료서비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잖아요. 책방도 책을 유통하는 소매업이라고 등록은 되어 있지만 컨텐츠사업, 지식서비스 제공자라는 마인드가 있어야 지속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작은 책방을 창업으로 염두하고 계신 분들은 서점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거랑 서적유통업 그 이상의 것으로 생각을 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일본원서 고양이책 찾는 분들이 계셔서 일본책들도 판매하고 있어요.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서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컨텐츠 강국이잖아요. 컨텐츠에 돈을 많이 쓰기도 하고, 고양이를 진짜 좋아하는 나라다 보니 고양이책이 쏟아져 나와요. 기획력도 좋구요. 사진책은 화질과 재질이 되게 중요한데 일본책들은 퀄리티가 괜찮은 책들이 많아요.

처음에 인터넷 서점만 보고 원서 구입하다가 실패를 많이 해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3-4달에 한번 정도 일본에 가서 직접 실물보고 체크해서 캐리어에 담아 직접 가지고 들어오고 있어요.

 

왜 대학로에 열게 되셨나요?

대학로로 계속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은 컨텐츠에 소비를 하겠다는 분들이시잖아요.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라면 여기 컨텐츠 가치를 알아줄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도 원래 이 동네를 좋아해서 항상 대학로 쪽에 하고 싶었어요. 처음 오픈한 건 2016년이었는데, 이걸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2015년 9월이었어요. 그 해 10월에 혜화로터리 쪽에 계약을 했었는데, 물이 새고 역류하는 바람에 돈도 좀 까먹고 시간도 날리고 했었지요. 한번 좌절을 겪고 집 근처 가까운 데서 빨리 열어보자고 해서 신설동에서 열었던 거예요. 근데, 손님들한테도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이태원이나 홍대에 있는 서점 같은 경우에는 온 김에 다른 데도 둘러보고 가는데 그때 그 동네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진짜 시장통 한가운데 오로지 저희 서점 하나만 보고 오시는 거거든요. 손님들한테도 미안하고 접근성도 너무 떨어졌었죠.

 

 

언제부터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셨나요?

저도 원래는 고양이 무서워했었어요. 밤에 고양이 마주치면 도망가고 그랬어요. 개, 고양이, 소, 닭, 비둘기 다 무서워했어요. 근데 성인되고 귀여운 짤(사진, 동영상)들 보면서 친근감이 생겼던 거 같고, 친구가 고양이 키우는 거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제가 키우게 됐는데 제 고양이가 예쁘니까 밖에 고양이들이 불쌍해지더라구요.

동물원도 많이 갔었어요. 데이트 하거나 해외여행가도 꼭 동물원 가고 그랬는데, 고양이 키우면서는 못 가겠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가족과 주변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서 계속 밖으로 나가는 거잖아요. 동물한테도 적용되는 거 같아요.

 

주변에서 많이 만나는 길고양이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고양이는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죠. 고양이는 기본적으로 겁이 굉장히 많은 동물이거든요. 영역동물이고 밖에 안 나가려고 해요.

캣맘, 캣대디들이 밥을 주시는데, 밥 주고 TNR(중성화 사업)까지 해야 제일 좋아요. 발정기 오면 영역싸움하느라 소리를 많이 내거든요. 그리고 쓰레기 찢는다고 싫어하는 분들도 많은데 배가 고파서 그래요. 걔네도 밥이 있고 배가 부르면 쓰레기 봉지 찢을 일이 없거든요. 한 켠에 오히려 밥 내주시면 쓰레기봉투 뒤지거나 찢지 않아요.

2000년 초반인가 종로구에서 길고양이를 살처분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종로구에 쥐가 들끓은 거에요. 나중에 다시 길고양이 생겨나면서 쥐가 없어졌다고 들었어요. 도시가 사람만의 것도 아니고요. 작은 공간하나와 밥 한끼 내줄 여유가 있으면 좋겠고, 예뻐해주실 건 없지만 괴롭히지는 말자는 그런 말씀 드리고 싶어요

길고양이 관련해서는 제가 여러 이야기 하는 것보다 책을 하나 추천해 드릴게요. 한국고양이보호협회와 이용한 작가님이 쓰신 <길고양이 안내서>라는 책이에요. 길고양이에 대해 참고할 만한 모든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책방 운영하시면서 제일 보람을 느끼실 때와 제일 힘들 때는 언제입니까?

좋을 때는 사람들이 오셔서 좋아할 때, ‘예쁘다 귀엽다 여기서 살고 싶다’ 하시면 보람을 느껴요. 고양이 키우며 이러 이러한 상황인데, 책 좀 추천해줄 수 있냐고 조언을 구해오시면 거기에 맞는 책을 추천해줄 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 저는 고양이를 잘 모르고 키워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만 그분들은 여기 와서 저한테 물어보고 제대로 된 정보를 가져가서 저 같은 시행착오를 안 겪으실 거 아니에요. 그게 반려인 뿐 아니라 반려동물에게도 좋은 거잖아요.

조금 힘들거나 맥 빠질 때는 오셔가지고 이것저것 다 물어보시고 책 목록 추천 잔뜩 받고서 그냥 가버리시는 경우에요. 예의상 1권은 사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제 노동력이라든지 제가 가지고 있던 여기에 대한 지식이라든지 그런 가치는 조금도 생각 안하는 것 같아서 힘이 빠져요.

 

새 정부가 유기견 토리를 입양해 화제가 되기도 했었고, 동물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보이는데, 앞으로 제도적으로 개선돼야 할 부분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저도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제일 근본적인 것은 법에서 지금 동물을 사물로 취급하는데, 동물에게 제3의 지위를 주는 게 제일 중요할 거 같아요.

지난번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개헌안에 아직 조금 미흡하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발전된 안이 있었어요. 조금 아쉬운 면도 있지만 동물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게 있었거든요. 그래서 꼭 통과됐으면 좋겠다 했는데 국회에서 저러고 있는 거죠. 국회에 화가 많이 났어요. 100%는 아니지만 동물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안이 있다는 거 자체가 굉장히 고무적이었어요. 개헌이 빨리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주변에 이런 재밌고 의미 있는 곳들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한 번에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날씨 좋은 날, 대학로로 봄나들이 오셔서 고양이 책방 ‘슈뢰딩거’에서 동물감수성을 키워보세요!

금, 2018/06/0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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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을 바라보다]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통일협회 고문, 前이사장)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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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30주년을 준비하며 그동안 경실련에서 활동하시며 시민운동을 빛내주신 분들, 또는 우리사회에서 존경받는 사회적 명사들을 찾아뵙고 삶의 혜안과 시대정신을 담은 소중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김성훈 前공동대표님에 이어 두 번째로 경실련이 만난 분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셨고,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중이신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님입니다.

박 회장님은 WCC 아시아 국장, 초대 UN 인권대사를 지내시며 평화, 통일, 인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작년 8월에는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여기신다는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하셨는데요, 적십자 활동 소개와 판문점 선언에 대한 평가 및 전망 등을 진솔하게 나눠주셨습니다. 

 

 

1.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습니다. 4.27 정상회담의 성과와 이번 회담이 동북아와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1년 만에 이뤄졌던 4.27 남북정상회담은 지금까지 72년 7.4 공동선언, 노태우 대통령의 91년 12월 13일 고위급 합의문서,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의 연속성에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한 비핵화가 있고, 둘째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라는 준전시상태를 완전히 평화협정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선언이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지금까지 73년 동안 대치를 극대화 했었던 군사대치 국면을 해소시키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죠. 이 세 가지의 큰 틀에서 선언의 전문과 3항 13개조 원칙들이 발현된 거라고 봅니다. 과거의 선언들보다 남과 북의 양 정상이 세계를 향해서 한 선언이기 때문에 진정성 면에서 세계의 큰 반응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난 73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해 민족 분단으로 발생된 남과 북의 인도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본격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서 감사하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써보게 되었습니다. 6자 회담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평화 번영 통일을 위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남북이 협의해서 세계평화에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이 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 남북이 종전선언을 하고,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의 의미와 평화체제에 대해 조금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된다는 얘기는 73년 동안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있었던 상황을 완전히 180도로 바꾸는 거예요. 군사적 대치라는 것은 이제 없을 거고, 다만 평화체제를 지키는 평화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군대는 있겠지요. 내가 살았던 스위스마저도 중립국가지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군대라는 게 원래 남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의 안보를 지키려고 있는 거니까 자기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군대를 향한 대치국면이 완전히 해소가 될 것이고, 이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비자를 받고 서로 왕래하되 두 개의 체제가 평화스럽게 공존하기 때문에 서로 상호 존경을 하고 상호 인정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3.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구호활동부터 시작해 헌혈, 병원복지사업, 남북교류활동 등 정말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 회장으로 취임하시면서 가장 중점을 두시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한적십자사 소개와 현재 활동도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한 지 약 9개월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참 빨라요. 대단한 조직입니다. 적십자정신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봉사원 12만 명, 청소년적십자 단원 19만 명, 직원 3,700명 큰 예산을 가지고 움직이는 113년의 역사를 가진 기관입니다. 1905년 고종황제 칙령으로 설립되었어요.

지난해 터키 안탈리아에서 개최된 국제적십자사연맹 총회에서 191개국의 대표격인 관리이사회 이사국을 뽑는데 대한적십자사가 당선이 됐습니다. 취임사에서 언급했지만 대한적십자사를 `선진국형 적십자사`로 만들고 싶어요. 스위스나 독일에서는 적십자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참 좋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 각각 18년과 7년씩 아이들을 키우며 느낀 건 그 나라들은 어린아이 때부터 적십자를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관으로 교육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한적십자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타 공공기구 정도로 인식돼 있다 보니 각종 감사의 대상이 되고, 봉사정신과 관련이 없는 외부인들이 적십자 활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지난해 8월 취임 후 ‘동북아시아/한반도 인도주의 공동체 건설’이라는 새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대한적십자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포괄적인 접근법으로 제 3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요. IFRC, ICRC, UN 등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지금의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기관 운영에 있어서도 비효율적이고 관행적인 운영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대내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적십자사를 구현하는 데 주력하려고 해요. 이를 위해, 대한적십자사는 국내 비영리단체 최초로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했고, 기부금의 모금, 집행 과정은 물론 기관 운영과 관련한 재무 프로세스를 대폭 개선함으로써 조직 전반의 투명성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교류 활동에 대한 계획은 판문점 선언 이후 8.15 전후해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거예요. 이와 관련하여 6월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6월 북미회담 끝나면 평양에 가서 북한 적십자사하고 가서 이산가족 상봉 준비와 인도주의 원조 등에 대해 논의하고 싶습니다. 특히 인도주의적 지원에 있어 보건 지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북의 건강이 남의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의 기초건강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것 등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어떻게 튼튼하게 평화 공존을 통한 핵과 전쟁이 없는 한반도 인도주의 공동체 건설을 할 수 있을지 북과 마주 앉아 프로그램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상호 인정과 존중으로 남이 50%, 북이 50% 서로 양보해서 만들어 가야해요.

 

 

4. 경실련도 1994년부터 통일협회를 창립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통일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2006년~2009년까지 이사장도 역임하시고 같이 활동하셨는데, 경실련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고, 통일협회 활동하시던 때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경실련 통일협회가 참 일찍부터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내가 고문으로 있지요. 특히 이번 적폐청산 촛불 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고 큰일을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유엔은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평화, 지속가능한 발전, 여성, 아동, 청소년 NGO 단체를 먼저 불러서 의견을 청취합니다. 그런 건전한 NGO 중 하나가 경실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실련에 대한 굉장한 경의를 가지고 있어요.

경실련 활동은 내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인권대사 할 때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경실련통일협회에서 특강을 했던 게 계기가 됐어요. 인권대사를 그만두려고 하니까 경실련에서 이사장을 해주십시오 해서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때 이사장할 때 나를 도왔던 게 김근식 교수, 전 통일부 장관 홍영표 등 젊은 석학들이 나를 많이 도와서 참 좋은 추억도 많습니다. 저도 경실련의 한 식구에요.

30주년이 내년이라고 해서 기념행사에는 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모금도 쉽지 않은데 어렵게 일하는 경실련 직원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경실련이 지금까지 해왔던 큰일은 우리 민족의 선진화를 이뤄냈어요. 특히 판문점 4.27 선언 이후 국민의 계몽문제라든지 아직도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냉전 논리에서 있는 국민들을 잘 설득하는 일들도 경실련 통일협회가 잘 해가면 멋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5. 경실련이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습니다. 경실련에 바라는 점, 혹은 한국 시민사회에 바라는 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내가 관여하는 한국의 시민사회 전부가 정부의 보조금을 안 받아요. 촛불 정부 시대에는 경실련 등 시민사회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다 여러분의 세금이기 때문이에요. 한국 시민사회가 그동안은 ‘권위주의적 정부와 대치하면서 시민운동을 한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의 돈을 받을 수 없었지만, 지금 촛불 대통령은 다시 독재로 갈 일이 없으니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보조금을 받는다고 정부에게 싫은 소리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서양에서는 전부 정부 돈으로 움직이는데 더 소리치고 다녀요. 왜냐하면 “너희들이 준 돈이 우리 세금이다”라는 생각가지고 하는 거라서 그래요.

지금까지도 잘했지만 이제 정말 역사를 다시 쓰는 데 있어 끝까지 순수하게 국민의 편에 서서 건전한 NGO로 큰일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6.  ‘통일, 평화, 인권’하면 박경서 회장님이 떠오르는데,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언제입니까?

늘 이야기하는데 분단이라는 것이 모든 우리나라의 부조리의 원천입니다.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는 절름발이식 발전일 뿐입니다. 분단이라는 것이 우리 5천만, 북의 2,300만 7,300만의 목을 조이고 있는 한 모든 부조리가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용납이 돼버리는 시대를 산거에요. 우리를 옥죄고 모든 우리의 악의 세력들이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죄를 다 저지른 것을 이제는 과감하게 털어버린다는 그 가능성을 판문점 선언이 해줬기 때문에 판문점 선언의 의의가 크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여수순천 사건이 터졌어요. 사흘 동안 무릎 끓고 아스팔트에 나가있었습니다. 무고하고 순수한 민간인 4만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나라 전쟁이 터져서 외할머니 집에 피난 갔는데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조카 셋이 내 눈 앞에서 빨치산에게 대창으로 죽는 것을 봤어요. 그런 것을 보고 어렸을 때부터 전쟁이나 폭력은 안 된다. 평화, 인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제네바 18년 세월 동안에 르완다, 미얀마 학살, 북한의 굶주림 현장을 내 눈으로 보면서 인권, 평화, 지속가능한 발전, 개인의 안전 등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생각합니다.

 

7. 마지막으로, 초대 UN인권대사,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국장, 대한적십자사 회장까지 다양한 이력과 경험을 쌓아오시며 이제 우리시대의 어른이기도 하시고, 사회적 명사가 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요. 내가 조금 오래 살면 내가 그렸던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실현이 되는 구나. 시베리아를 거쳐 북한을 가는 날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는데 조금만 더 오래 살면 정말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1986년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국장을 할 때 그리온 남북교회 모임을 통해 남한과 북한 목사님들의 대화를 추진했었습니다. 88년 그리온 2차, 90년 그리온 3차, 4차는 92년 남북교회지도자 모임을 했어요. 89년 모스크바 남북 평화선언 그런 인연으로 인권대사를 하게 된 거죠. 그런 인연으로 7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를 여러 사람과 같이 만들고, 지금 대한적십자사 회장까지 왔습니다. 내 꿈은 결국 분단을 극복해서 어깨동무하는 정직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동체를 남과 북이 만드는 것입니다.

 

금, 2018/06/0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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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 10년 회원을 만나다] 정병오 오디세이학교 교사(前 좋은교사운동 대표)

 

“아이들이 가진 고민이 우리 시대 모순의 핵심과 연결돼있어요”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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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요. 이번 호에서는 10년 가까이 묵묵히 경실련을 지지해주신 정병오 회원을 만났습니다. 정병오 회원은 현재 서울시교육청에서 실시하고 있는 오디세이학교 교사이고,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상임공동대표도 맡고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 좋은교사운동 대표를 역임하시며 교사운동으로 교육을 바꾸는데 기여하는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종로구에 있는 오디세이학교에서 정병오 회원을 만나 이야기 나눴습니다.

 

 

  • 오디세이학교 교사는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오디세이학교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으신데 오디세이학교에 대한 자세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디세이학교가 2015년 설립됐는데 저는 설립 때부터 참여했으니까 이제 4년차입니다. 오디세이학교는 고교자유학년제라는 제도로 설립된 학교인데요, 입시에 매진해야 될 고등학교 1학년 시기에 국영수 같은 과목은 조금만 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유로운 탐색과정을 거치는 학교에요. 일반 고등학교에 똑같이 진학한 뒤에 그 학교에 적을 두고 1년 간 오디세이학교를 다니는 겁니다. 그 후에는 다시 그 학교로 돌아가지요. 2학년으로 돌아가는데 원하는 경우 1학년부터 다니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저희 학교에는 특정한 유형과 성향의 학생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학생들이 옵니다. 성적을 보더라도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일부러 그런 걸 지향하기도 해요. 특정 형태의 아이들만 오는 교육은 좋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선발 기준은 어떻게 되나요?

성적은 안 보니까 주로 자기소개서와 면접에서 당락이 결정됩니다. 학부모 면담도 해요. 혹시 이런 교육이 대학갈 때 스펙이 되지 않을까? 이런 분들은 저희가 받을 수 없고, 계속 입시를 시키면서 이것도 하겠다는 분들도 저희랑 맞지 않거든요. 저희는 학원도 다 중단하고 여기에 집중해달라고 하고 뜻을 물어요.

부모님들은 불안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잖아요. 고1이면 입시에 매진해야 할 시기인데 이 시기에 일종의 입시로부터 벗어난 교육을 시킨다는 건 결단이 필요한 거죠. 저희의 장점이면서 한계이기도 한 게 1년 후에는 다시 입시교육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학생들도 불안감을 계속 가지고 있거든요. 자기는 여기 와 있는데 친구들은 열심히 입시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라며 느끼는 불안감이 부모님들은 더 많거든요.

이런 것들에 대해 소통을 하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떨어지는 거 같지만 훨씬 더 주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다고 소통하면서 하는 거죠.

 

  • 1년 동안 어떤 교육을 받나요?

1년에 90명의 학생을 모집하는데, 이 학생들은 모두 4개의 기관으로 흩어져 교육을 받습니다. 은평구의 <혁신파크>, 영등포의 <하자>센터, 정독도서관 1층에 위치한 <민들레>와 오디세이 본부가 있는 종로에 <꿈틀>까지 4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4곳으로 흩어져 25명 정도의 학생들과 교사 3명이 1년 동안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거예요. 기숙은 아닙니다.

교육 내용은 기관별로 조금씩 다르긴 한데요. 주로 글쓰기나 인문학 수업이 많고, 자치회의와 여행 기획활동, 예체능, 실용기술 등을 배웁니다. 국어, 영어, 수학, 한국사, 사회, 과학 등 보통교과 과정도 있구요.

계속 묻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 너 생각은 뭐냐? 묻고 학생들이 결정하게 합니다. 폭력이나 교내에서의 술, 담배는 규제하지만 나머지는 다 스스로 하게 합니다. 여행을 많이 가는데, 어디로 갈지 왜 가는지 숙소, 예산 짜는 것 등 모두 학생들 스스로 합니다.

수업이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외부랑 많이 하니까 어른들을 많이 만납니다. 전태일 기념관도 가고 시민단체들도 만나고 계기마다 많은 분들을 만나니까 어른들이 우리를 억압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와주는 사람들이구나 어른들에 대한 신뢰도 생기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구나 꼭 입시 경쟁해서 이렇게만 살 게 아니구나 라는 걸 배우게 됩니다.

 

  • 2015년에 개교했으니 그 당시 고1이었던 학생들은 지금 고등학교를 졸업했을텐데 졸업생들이 오디세이학교의 교육 목표에 맞게 진로를 찾아 가는지 궁금합니다.

네 1기 학생들은 올해 대학을 가거나 재수를 하거나 대학을 안가고 다른 길을 가거나 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길을 가는데 1년의 기간들이 주체적으로 사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합니다.

한 학생은 중 3때까지 공부를 잘 해서 자사고에 갔는데 너무 학교에서 불안감을 많이 조성하는 거에요. 몇 등안에 못 들면 인 서울 못 간다 이러니까 쉬는 시간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힘들다고 하다가 오디세이에 왔어요. 여기 와서 많이 자유로워진거죠. 대학 안가고 여행 해보겠다고 해서 오디세이 마치고 1년 동안 여행도 다니고 검정고시 보고 논술 준비해서 철학과에 입학했어요. 얼마나 좋은 대학을 갔느냐보다 자기 삶에 대해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어떤 학생은 일반학교로 돌아가서 반장선거를 하는데 자기도 나갔는데 선생님이 유도해서 공부 잘 하는 애가 반장이 된 거죠. 학교에 건의했는데 안 들어주니까 교육청에 민원을 넣어서 결국 재선거를 했어요. 불의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된 거죠.

 

 

  • 좋은교사운동으로 더 많이 알려지셨는데, 교사운동을 통해 교육을 바꾸시겠다고 생각하신 이유와 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좋은교사운동이 95년에 창립했는데 창립하기 전에 92년부터 소모임을 했었어요. 그때부터 같이 했었고 2012년에 대표를 맡았다가 학교로 복직을 했습니다. 대표할 때는 휴직하고 상근해서 일하고, 끝나면 복직 하거든요. 좋은교사운동은 원래 여러 개의 기독교사모임이 연합한 모임이에요. 전신이 될 수 있는 모임이 아까 말씀드린 92년부터 시작된 기윤실 교사모임이에요.

군대 다녀와서 91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사를 했는데 고민이 많았었어요. 그때 만해도 촌지가 많았어요. 채택료도 있었고요. 기본적으로 학교 내에 불법적인 관행들이 많았는데 초임 교사가 그런 것을 거부하다보니 고민이 많았던 거죠.

예를 들면, 촌지 같은 경우는 개인이 결단하면 거부가 되는 거잖아요. 근데 학교 내에 육성회나 임원들이 있었는데 일종의 불법찬조금처럼 한 학급에서 5~10여명의 임원들한테 10만원, 20만원씩 돈을 걷어서 발전기금을 학교에 내는 겁니다. 발전기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니까 회계에 잡히지 않는 돈이죠. 초기에 제가 담임을 맡았는데 우리 반 애가 반장선거에 안 나가겠다는 거예요. 똘똘한 아이였는데 자기는 집이 가난해서 엄마가 학교에 기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가 반장이지 엄마가 반장이냐”며 나가라고 해서 그 아이가 됐어요. 근데 조금 있으니까 학급의 임원단을 구성해서 1인당 10만원씩 내라는 겁니다. 저는 못 하겠더라고요. 가난한 집 아이가 반장이 됐는데 어떻게 돈을 내라고 하냐, 이걸 걷는다는 게 말이 되냐며 안 걷었어요.

30학급이었는데 29학급에서 100만원씩 다 들어왔는데 우리반만 안 들어온 거에요. 교감선생님이 화가 난거죠. 뭐라고 하시고 저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교감선생님이 직접 저희반 임원들한테 걷어가더라고요. 좌절했죠. 불법이고 불의인데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내 한계도 느끼고 선배 교사들과의 관계에서의 한계도 있었고, 초임교사니까 아이들 지도하는데 있어도 미숙함이 많았고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기윤실에서 당시에 촌지추방운동을 했었는데, 촌지추방도 하지만 촌지 외에도 학교 내에 많은 문제가 있고 각자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많은데 풀어보자고 소모임을 시작한 거죠. 모임하면서 교육의 문제도 결국 교사가 풀어야 되는 구나 내부에서 풀어야 될 문제가 너무 많고 우리가 스스로 결단만 해도 풀 수 있는 문제도 꽤 있고 스스로가 공부하거나 노력을 통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많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 스스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은 힘을 합쳐서 이슈도 제기하고 하자 그렇게 모임을 하다가 우리 힘만으로 힘드니까 같은 크리스찬 성격의 소모임들이 더 있었으니까 같이 서로 묶어서 좋은교사운동이 만들어진 거죠.

좋은교사운동 하면서 그동안 기독교사 모임이 서로를 돌보는 건 좋은데 교육계에 기여한 바가 없구나. 전교조 같은 경우는 만 명 이상의 교사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당하면서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고 기여한 바가 있는데 우리 기독교사들 그룹은 서로 돌보고 이런 건 했지만 사회에 기여한 바가 없으니 교육계에도 기여를 하자 그러면서 조직을 만들고 했어요.

처음에 준비된 게 없으니까 잘 할 수 있는 거부터 하자해서 한 게 실천운동들이었어요. 촌지를 안 받는다든가, 아이들 가정방문을 통해서 아이들을 더 깊이 이해한다든가, 학급에서 제일 어려운 아이들을 돌본다든가, 수업평가를 자발적으로 받자든지 그런 기본적인 실천운동들을 먼저 쭉 했고, 하면서 교육계 내에서는 조금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요. 이 단체는 기존의 전교조나 여타 단체들처럼 선명하게 제도개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나름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단체구나. 실력이 쌓이고 인지도도 쌓이고 하면서는 정책적인 대학입시 문제나 제도개혁 부분에서도 목소리를 냈구요.

 

  • 어떻게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 궁금하고, 선생님의 교육철학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제가 80년대 학번인데 그때는 민주화운동이 많이 일어나던 시기잖아요. 저는 그런 운동권의 핵심이 있진 않았지만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아픔이 많이 있어요. 그때 했던 생각이 저는 신앙인이니까 우리 시대 모순의 핵심에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고백도 했었는데

시대 모순의 핵심이 어딘지,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 건지 20대 초중반 나이로 알기 어려웠는데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한 거에요. 아이들을 만나면서 느낀 게 아이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있는데, 이 고민이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 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시대가 양극화 문제가 있으면 애들은 그 나이에 맞게 빈부차를 느끼고 있고, 우리시대가 대학입시 문제가 크면 그 나이에 맞게끔 공부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고 아이들도 우리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다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우리 시대 모순의 핵심과 연결되는 거다! 여기에 헌신해서 이 아이들의 문제에 응답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자 라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교사라는 것은 아이들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서 우리 시대의 모순에 응답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교사운동하고도 연결됐다고 볼 수 있죠.

일단 기본적으로 아이들에 대한 시각 자체가 한명 한명이 다 귀하다는 겁니다. 집에서는 다 귀하죠.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성적으로 한 줄로 세워야 되는 구조기 때문에 성적 외의 변수들은 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게 문제에요.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데 잘 알고 싶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앞서야 되기 때문에 공부해야 되는 게 문제죠. 어떻게 하면 한명 한명이 각자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은사와 재능과 소명을 발견해주고 키워줄 수 있을까? 그게 교사인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 현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가요?

문재인 정부가 소위 말하는 적폐청산은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국정교과서도 폐기한다든가 그 외 교육계 내 비리나 사립학교 비리 이런 걸 엄하게 하는 건 잘 하는데, 본질적인 개혁 있잖아요. 아이들을 입시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상대평가 체계를 절대평가 체계로 한다든가 이런 입시개혁이 사실 쉬운 건 아니죠. 그렇지만 이 정부는 그거에 대해서 전혀 안하려는 거 같아요.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남북관계 문제라든가 큰 문제를 풀어가다 보니까 국민의 지지를 얻고 그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교육은 표 까먹는 정책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수능 절대평가라든가 했을 때 국민 절반은 반대를 할 것이고 이게 굉장히 논쟁이 많은 주제거든요. 지금 공론화위원회에 올라가 있는데 그거 하나만 봐도 공론화위원회까지 맡긴다는 게 정부가 실제로는 의지가 없다고 보이는 거죠. 그냥 욕먹을까봐 아무 결정도 안하고 공론화위원회 맡겨 놓고 그것도 되게 축소해서 디테일한 걸 맡겨놓은 거거든요.

 

 

수능 절대평가는 아직도 논쟁이 많아요. 국민들 중에서도 절대평가하면 학생들이 자유로워지지만 대학입시에 교사들이나 대학의 정성평가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불공정 요소가 생기는 게 아니냐고 해요.

수능 점수로 한 줄 세우기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교육적으로 절대평가가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개인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는 점에 우려를 갖는 거죠. 그래서 기득권층이나 언론이 차라리 점수로 한 줄 세우는 게 공정하다는 논리를 많이 펴기도 해요.

이런 분들은 절대평가를 하면 이전처럼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해요. 보통 개천에서 용이 되신 분들이 이런 주장을 많이 하시죠. 그런데 사실 수능 점수 위주로 가게 되면 사교육 많이 하는 아이들이 유리해요. 냉정하게 데이터를 가지고 보게 되면 수능은 강남이나 특목고 아이들이 유리하다고 나와요. 결국 사교육 많이 하는 강남 아이들이 점수가 올라가거든요.

반면에 학종(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표되는 수시제도는 다양한 요소로 학생을 평가하는 거에요. 다양한 요소의 역량을 키우려면 더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고도 하지만 이 제도 때문에 시골에서도 서울대 가고, 학교 내에 동아리 활동 많이 하거나 내신이 좋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는 거예요. 학교교육이 다양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시험성적만이 아니라 학생회 활동이라든지 다양한 활동으로 학생을 보는 거죠. 이전에는 반장도 동아리도 공부한다고 다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하려고 하거든요. 이런 게 학종의 힘이죠. 물론 한계가 있고 완벽하진 않지만 큰 방향은 그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지가 청와대 쪽은 방향도 못 잡고 전문성도 없고 한 거 같아 아쉽습니다. 청와대에 교육 담당 비서관이 없잖아요. 사회문화수석이 다 하고 있는데 현재 김수현 사회문화수석은 부동산, 경제 전문가이시지 교육쪽 전문가는 아니시거든요.

진보교육감이 상당히 많이 됐지만 교육감이 할 수 있는 거는 초•중•고등학교 교육이지 대학입시부터는 교육감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이 사람들이 혁신학교를 하거나 초등학교 평가 제도를 바꾼다 이런 거는 할 수 있죠. 이 부분은 교육부가 해야 하는데 청와대의 의지가 없으니 교육부도 한계를 많이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  2007년에 가입해주셔서 10년 동안 꾸준히 경실련에 큰 힘이 돼주셔서 고맙습니다. 경실련 회원정보에 보면 추천인이 서포터즈라고 나오시는데, 어떤 인연으로 경실련 회원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대학 시절 시대의 불의에 대한 아픔은 있었지만 학생 운동권의 운동 방식에는 다 동의를 할 수 없었어요. 물론 당시 군부독재의 억압적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점은 이해를 하지요. 그런데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하고 있던 중 1989년 본격적인 시민운동단체인 경실련 창립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정말 원하던 방식의 사회개혁운동이었기에 1990년 제대하자마자 바로 가입을 했습니다. 경실련 주최 모임에도 함께 하고 경실련 내 교사모임을 만들려고 시도를 하는 등 10년 정도 꽤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경실련 임원들이 정치권에 많이 진출하면서 정치권과의 경계가 흐려지고 내부 노선 갈등이 심해지면서 탈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경실련이 아파트 원가 공개 문제 등 경제적인 정의를 위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여기에 힘을 싣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서 2007년에 다시 가입을 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 경실련이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습니다. 경실련에 한 말씀 해주세요.

경실련이 원래 창립정신인 ‘경제정의’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30년과 비교하면 정치적 민주화는 많이 진전되었지만 경제적인 민주화는 더 퇴보를 했잖아요. 지금 양극화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이라고 봐요. 그래서 경실련이 경제정의 혹은 경제민주화 관련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급진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을 거라고 봐요.

 

교사로서의 소명으로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교육 현장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행동이 귀감이 됩니다. 대학입시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이야기해주셔서 그동안 헷갈렸던 수능개편안에 대한 주장들에 대해서도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이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입시라는 고통에서 벗어나 배움과 삶의 주체로 당당히 서 가는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꿈틀꿈틀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화, 2018/07/3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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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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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30주년을 준비하며 경실련이 세 번째로 만난 분은 강철규 前공동대표님입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부패방지위원장을 역임하시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셔서 많이 알려지셨는데 경실련 창립 멤버이십니다. 경실련 창립 당시의 이야기와 경제정의연구소를 설립 이야기 등 30년 가까이 지난 오래 전 이야기지만 창립 초기 활동들을 생생하게 나눠주셨습니다. 경실련 창립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교육자, 공직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 재벌개혁을 위해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할 역할 등에 대해서도 고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1. 경실련 창립 당시 부동산 문제가 심각해서 전문가, 학자, 종교인 등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조그만 연구실에서 책상 놓고 시작한 모임이 경실련으로 발전했다고 들었습니다. 창립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89년 6월 발기인대회를 했는데, 그 이전에 3-4개월 전부터 뜻있는 분들이 나라 경제가 이래선 안 되겠다고 모였어요. 8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인 3저 호황(저금리•저환율•저유가)으로 한국경제도 성장세를 탔어요. 87년 6•10 항쟁 이후 88년에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 무렵부터 부동산 투기가 폭발적이었어요. ‘전 국토가 투기장화되고 전 국민이 투기꾼’이 된다는 말이 일상화 될 정도였지요. 너나 할 거 없이 전국을 누비며 땅 살 데 없나 집 살 데 없나 하고 돌아 다녔으니까. 노태우 정부가 선거공약으로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및 신도시 개발 등의 공약을 남발한 덕이지요.

그 과정에서 실제로 넓은 땅을 많이 산 건 재벌들인데 거기에 편승해서 일반 국민도 근로해 돈 벌려는 노력보다 땅 투기해서 일확천금 해보려고 했지요.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학자들, 종교인들, 시민운동가, 전문가들이 몇 사람씩 모이기 시작하다가 공감자가 크게 늘어났어요. 우리가 뭘 해야 되나? 이 나라가 일한만큼 대접받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경제정의를 실천하는 시민연대를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3-4개월시민운동조직을 위한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1989년 6월 3일 드디어 발기인대회를 YWCA회관에서 했어요.

발기인대회 끝나자마자 당시 경제정의 실현을 위하여 땅 투기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으로 7-8명 교수들이 숭실대학교 이진순 교수 방에서 매주 두 번씩 모여서 토론을 했어요. 여러 사람이 참여했지요. 경제학자, 부동산업자, 시민운동가 등등. 그렇게 모여 공부한 걸 종합 정리해서 8월 중순에 여의도 백인회관에서 최고의 공개세미나를 했어요. 내가 대표로 발제를 하였고 경실련 최초의 세미나에서 내세운 3가지 해결책이 토지공개념 3법이었어요.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를 제도화해서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경실련이 비판만 하는 단체가 아니라 대안을 내는 시민단체라는 것을 보여준 첫 세미나였고 첫 주장이었지요. 아직 창립총회도 하지 않았는데 당시 언론에서는 기대 이상으로 세미나 내용을 대서 특필하였지요.

경실련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떴다 알려지면서 경실련에 참여의사를 밝힌 회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인 1989년 11월 3일에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경실련이 생겼다고 볼 수 있지요.

 

2. 창립 이후 초기에는 어떤 활동들을 했나요?

경실련문고라는 책을 냈어요. 89년에 김태동 교수의 『땅, 투기의 대상인가 삶의 터전인가』라는 책이 처음 나왔고, 91년에 나하고 최정표, 장지상 교수가 공저해서 『재벌, 성장의 주역인가 탐욕의 화신인가』라는 책을 냈는데 많이 팔렸어요.

재벌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대토론회가 열렸어요. 재벌문제를 주제로 전경련에서 세 사람, 경실련에서 세 사람이 나와서 하루 종일 대토론회를 개최 했어요. 책을 쓴 다음이니까 자료가 많았어요. 전경련은 전경련대로 재벌을 옹호 대변하면서 경실련의 재벌개혁 주장에 대항하는 식으로 열띤 토론을 했죠. 당일 여러 중계방송차가 토론을 생중계하였을 뿐 아니라 이튿날 모든 신문 방송에서 대서특필로 나갔고, 경실련이 많이 유명해졌어요.

재벌 다음에 했던 게 금융실명제인데, 사회적으로 찬반 논쟁이 많았어요. 경실련의 주요 전문가들은 찬반토론회 나가서 금융실명제를 즉시 도입해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전경련에서는 금융실명제 하면 나라 망한다고 난리가 났었죠. 우리나라는 도장문화인데 실명으로 하면 투자가 안돼서 경제가 쇠퇴한다는 억지 주장을 하였지요.

93년 8월 15일 전격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도입을 발표했죠. 아마 사진 찾아보면 있을텐데 경실련 사무실에서 축배를 들며 축하를 하였지요.

 

3. 경제정의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연구소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부동산 투기를 막아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니까 땅을 가진 땅 부자들이 경실련을 좌파 정도가 아니라 빨갱이 단체라고 매도하기도 하였지요. 토지소유를 공개념하고 시장경제를 부정하며 기업을 비판한다는 게 이유였어요. 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지요. 우리가 무조건 기업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제정의에 기여하는 기업은 상을 주겠다는 아이디어를 냈죠. 이를 위해 경제정의연구소를 설립하고 경제정의 지표를 만들고 상장기업들을 평가하여 가장 우수한 기업들에게 상을 주기 시작했어요.

당시 미국에서 갓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경제정의기업상 기준 모델을 만들었어요. 김평기 원광대 교수, 홍길표 백석대 교수 등이 주축이 되었고, 김홍권 선생과 전병화 연구소 연구부장 등이 함께 노력을 했지요. 그 모델에 상장기업 데이터를 전부 넣어서 결과를 내본 결과 한국유리가 선정되었는데, 주위 평판도 검증하고 이사회에서 재차 확인해서 제1차 경제정의기업상 수장자로 상을 줬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4. 대표님은 어떻게 경실련 운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학생 때 학생운동을 했지요. 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와 단식투쟁, 75년 민청학련 사건과 서울의대 사건 등에 연루되었던 서울의대 법대 상대 후배들이 나를 배후자라고 하는 바람에 잡혀서 1년 서대문에 가 있기도 했어요. 이들 세 친구가 나한테 사회주의 경제와 남북문제에 대해 배웠다고 한 거예요. 관련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가서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간 겁니다. 당시 한국은행 다녔었는데 재판받고 하느라 그만두고 나중에 뒤늦게 유학 가서 공부한 후 학계로 가게 됐죠.

87년 이후는 민주화가 한 단계 성공, 도약을 했다고 봤어요. 근데 소위 학생운동 시민운동은 전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이었어요. 반정부투쟁, 비합법적인투쟁은 독재시절 정권을 타도하는데 적합한 민주화 운동이었지요. 87년 헌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가결돼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직접 뽑는 87년 체제가 시작된 거잖아요. 시민들이 다 나와서 넥타이부대까지 나와서 이룩한 6•10항쟁의 결과인데 그 법을 일단 지켜야지. 그래서 이제부터는 시민운동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야 하겠다. 앞으로 현실문제를 가지고 대안 있는 시민운동을 하고 법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경실련 운동에 함께한 것입니다.

비판도 있었어요. 사이비 시민단체 아니냐. 저항도 하고 투쟁도 하고 그래야지 무슨 법 테두리 안에서 한다는 거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판이 사라지고 참여연대가 95년에 나오고 같은 방식으로 운동하는 단체들이 계속 나왔죠. 경실련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시민운동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지요.

 

 

5. 참여정부 시절에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경제력집중 해소를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95년인가 경실련 안에 시민공정거래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시민이 공정거래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감시도 하고 비판도 하자 해서 변형윤 선생님이 대표하실 때 생겼죠. 그 때 시민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 했었던 인연이 하나 있고,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2003년 3월에 공정거래위원장이 됐어요.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되는 일은 시장경쟁을 보호하는 거예요. 시장의 경쟁자인 어느 기업을 보호하는 게 아니고 경쟁체제를 보호하는 것이 공정위에요. 공정거래법 1조에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는 역할의 키워드가 다 나와 있어요.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소비자를 보호하는 게 목적이에요. 공정, 자유, 경쟁, 그리고 소비자 보호.

경제적 자유가 중요해요. 존 스튜어트 밀의 ‘타자 위해의 원칙’이 시장에서도 적용돼야 해요. 나의 생명, 재산, 사상, 이런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유지만 단 하나 조건이 있는데 타자를 해치지 않아야 해요. 시장에서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되 남에게 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재벌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중소기업이 어떤 분야에 들어오려고 하는 걸 못 들어오게 한다, 일감 몰아주기를 해서 시장에서 쫓아낸다든가, 특허권을 다 구입해서 박살 내버린다든가, 무슨 부품 공급을 못하게 한다든가 등등 이런 것들이 전부 타자위해의 원칙에 위배되는 거라는 거죠.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를 적발해서 지키게 만들어주는 게 공정위의 역할이지요.

또 하나는 공정성을 지켜야 해요. 수많은 불공정 사례들이 있지요. 이들을 적발하여 시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재벌이 위법했을 경우는 법무팀 변호사들이 수백 명 있으니까 쉽게 빠져나가요. 가난뱅이 중소기업은 걸려놓으면 재판비용을 못 대거나 유명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서 여지없이 감옥에 간단 말이에요. 이런 게 소위 불공정한 거예요. 법률장벽을 어떤 사람은 뛰어 넘고 어떤 사람은 못 뛰어 넘는 거죠. 시장이 자유의 원칙을 지키고, 공정성을 지켜서 결국 소비자 후생을 증가시키도록 하는 것이 공정위가 할 일이에요.

 

6. 공정위 하실 때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하시는 것?

공정거래 역사상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간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직원들이 퇴임식을 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직원들이 스탠딩으로 강당에 서서 차도 마시면서 스크린을 내려서 강 위원장 3년 재임 중 10대 업적을 10위부터 하나씩 소개하는 특별한 방식이었어요. 저도 1위가 뭘까 궁금했지요.

아마도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마이크로소프트사 사건 아닐까 했는데, 그건 2위더라고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위법 판정하고 과징금 부과하고 시정명령 내린 사건입니다. EU에 이어 우리가 두 번째 한 거니까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었죠. 이 덕분에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세계 G7에 들어갈 정도였지요.

그럼 1위는 뭘까 했는데, 소비자원을 경제기획원에서 공정위로 이관시킨 것이더라고요. 소비자보호원이 경제기획원(재경부) 소속이었는데 제 재임기간에 공정위 소속으로 가져와서 산하기구가 됐거든요. 공정위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소비자나 기업의 피해를 보상해주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소비자호보원이 들어오면 후생을 증대하고 보상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공정위업무가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 그동안 숙원사업이었는데 안 되다가 가져온 거죠. 공무원들한테는 그게 제일 좋았나 봐요.

또 하나는 시장개혁 3개년 계획을 세워서 로드맵을 만든 거예요. 금융계열사 의결권제한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2004년에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는데, 그런 내용을 포함해서 시장개혁 3개년 계획 만들어서 실천했었어요.

 

7. 언론에서 김상조 위원장이 ‘제2의 강철규’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하는데,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앞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소위 갑질제거 라고 하는 재벌이 아니라도 가맹사업자라든가 유통업자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 즉시 처벌하고 발견하고 시정하고 하는 일은 일정수준 성과가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소비자 권익을 보호한다는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제도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데 아직 준비하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아직은 미완성이라고 봐요.

그 제도개혁의 핵심이 될 만한 것들이 뭐냐면 독과점(기득권자) 경제권력 재벌들이 쳐놓은 진입장벽이 있어요. 시장 안에 못 들어오게 만들고 있는 기업 배척해서 밀어내고 자기들이 독과점하면서 중소기업이 할 영역까지 해 나가고 있거든요. 각종 불공정행위와 더불어 이 진입장벽을 제거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되는데 앞으로 지켜봐야지요.

 

8. 한편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사회는 재벌개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계속 문제를 제기해야 된다고 봐요. 경제적 자유가 억압되고 있는 사례가 뭐가 있는지 시민사회가 그걸 찾아내는 거죠.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여 고발하고, 해결책은 시민단체가 대안을 내면 더 좋지만, 못 하더라도 정부가 해라, 학계가 해라 제시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이 고발을 자꾸 하는 게 중요해요. 구체적 사례를 많이 발굴하라고 하고 싶어요. 그게 힘이 있어요.

경제정의,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뭐가 잘못돼 있는지 그걸 찾아내서 계속 지적해야죠. 원칙적인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9. 마지막으로 30주년을 맞는 경실련 회원과 임원, 상근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30년이면 긴 시간이에요. 경실련 회원들, 활동하는 상근자, 임원들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원조 시민단체라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중요해요. 소위 민주화 투쟁 이후 시민운동 개념이 바뀌었잖아요. 새 시대에 맞는 시민운동의 맏형 즉 원조라는 걸 잊어버리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어요.

한꺼번에 엄청난 획기적인 걸 한다는 거보다도 그간의 축적된 활동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서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어떤 제도개혁이 필요한지 관심을 갖고 그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 벽돌을 하나씩 쌓아간다는 기분으로 차근차근 성과를 낸다면 앞으로 또 30년을 내다보면서 힘 있게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화, 2018/07/3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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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 시리즈] – 윤경자 서촌 궁중족발 사장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해서 제2의, 제3의 궁중족발 사태 막아야죠”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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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호에서 둥지내몰림 시리즈 첫 인터뷰로 궁중족발을 인터뷰를 했었는데, 5개월 만에 윤경자 사장님 인터뷰를 다시 하게 됐습니다. 지난 6월 7일 건물주 집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김우식 사장님이 건물주를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로 인해 김우식 사장님은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사건 자체만 보면 문제가 명확한 사건 같지만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시대적 과제가 숨어있다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12차 강제집행으로 가게에서 쫓겨난 윤경자 사장님은 6월 15일부터 매일 청와대와 국회 앞에서 김우식 사장님 탄원과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와 국회로 찾아가 윤경자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 매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윤경자 사장

 

  • 사건이 있던 6월 7일의 상황과 김우식 사장님은 지금 검찰에서 기소된 상태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라고 들었는데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 날(6월 7일)도 평소처럼 1인 시위하던 중이었어요. 4월부터 1인 시위를 했었어요. 6월 4일 지게차로 집행 들어오고 6일날 대치하다가 연대인들 물건만 빼고 저희 물건은 있는 채 가게를 못 들어가게 한 상태였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7일 아침 1인 시위하러 나간거예요. 나가면서 그 전전날도 건물주와 문자와 통화로 많이 싸웠어요. 이런 싸움 자체가 7개월 넘게 지속해서 있었던 거예요. 그 날도 평소처럼 협박성 문자와 전화가 계속 왔던 거예요. 다 구속시키겠다, 연대인들도 다 구속시키고 감옥에 가서 죗값을 받아야 한다, 실랑이하고 있으면서 아침에 1인 시위를 하러 갔는데 이 분하고 마주친 거예요.

지금은 검찰에 기소가 된 상태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데 이번 달 27일에 검찰, 검사, 판사, 변호사랑 재판을 어떻게 진행할건지 심리하고, 아직 날짜는 확정 안 됐지만 8월 중순쯤에 재판이 진행이 될 거래요. 저희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공동 변호인단 꾸려서 하고 있는데, 국민참여재판 신청할 예정이라고 하더라고요.

 

  • 지난 2월 인터뷰할 때 3차 강제집행까지 한 상황이었고, 그 과정에서 김우식 사장님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도 있었기 때문에 설마 더 하지는 않겠다 싶었는데 12차까지 집행을 했습니다. 12차까지 집행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는데, 이례적인 상황 같습니다. 지금 시정이 어떠신가요?

네 12차까지 하는 경우는 없어요. 전무후무한 사례에요. 3차 이후에도 크고 작게 여러 번 강제집행이 있었어요. 저희는 분쟁이 오래 돼서 가게 안에 저희가 지키고 있는 걸 건물주도 집행관도 다 안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12차 때 새벽 3시 넘어서 지게차로 세 번이나 문을 부쉈어요. 증거자료 없애려고 CCTV도 미리 다 가려놓고요. 안에 있던 사람 핸드폰으로 동영상 촬영한 게 그나마 있기 때문에 그 장면이 촬영이 됐지, 그거마저도 없었으면 밀고 들어왔던 상황이 알려지지도 않았을 거예요.

6월 4일 강제집행 들어오기 전에 박원순 시장이 기자회견을 했어요. 그때 분명히 중장비를 동원한 폭력적인 집회 허용치 않겠다고 했는데, 일주일 만에 실제로는 그런 게 다 허용이 돼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말뿐인 행정처리라고 느껴져요.

개인적으로는 안 좋아진 상황이고, 돌파구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건물주하고 대화해볼 여지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일단 여론에 많이 알려졌고, 건물주가 하신 일이 합당하다고 느끼는 분보다 오히려 법의 미비한 점이나 불합리한 제도가 바뀌어야 된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한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없지만 상가임대차보호법 바꾸자는 의견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더 신경쓰고, 더 많이 의견도 내주시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분들이 많아진 거는 나름 이점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저희한테 개인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건 없지만 임대차보호법을 바꾸자는 의견에는 본인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저거는 미비한 법이다, 저건 법개정 해야 된다 있으나 마나한 쓸데없는 법 왜 존재하느냐 거기에 더 신경쓰고 더 많이 의견도 내주시고 그리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분이 더 많아진 거는 나름 이점일 수 있죠.

 

  • 지난 번 인터뷰 때도 호소하셨던 부분인데,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이것은 사람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하셨었어요. 궁중족발 건물주와 또 건물주와 같은 입장을 가진 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자본주의 사회는 진짜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게 기본이잖아요. 물론 건물주들 중에도 자기가 진짜 노력해서 돈 많이 벌어서 건물을 하나 사고 그 건물 하나만 갖고 착하게 사는 분들도 있어요. 근데 그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은 그런 건물을 밑바탕으로 해서 시세차익 노리고 투기를 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땀 흘려서 노력해서 돈을 버는 건 아니잖아요.

비교하자면 자영업자 같은 저희 임차상인들은 내 노력과 내 땀으로 손을 버는 거잖아요. 하 열두 시간 이상씩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 돈으로 먹고살고 거기서 월세도 내고 거기서 조금 더 노력해서 돈 벌면 적금도 부을 수 있고 나름대로 자기 가게를 가질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고 집 살 수 있는 꿈도 꾸고 되게 소박한 꿈이잖아요. 그 밑바탕이 내가 땀을 흘리는 게 밑바탕이에요. 그렇지만 일부 건물주들, 특히 임대업으로 돈 버는 사람들은 남의 노력과 땀의 결실 위에 생겨난 불로소득 갖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거잖아요.

건물주의 재산권도 중요해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그런 결과물을 얻기 까지는 그 밑바탕에서 그 상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그분들이 시세차익을 더 받게 하기 위해 상권을 활성화시킨 그런 사람들의 노고가 있는 걸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그 밑에서 일하는 눈에 안 보이는 무형의 재산이 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는 거거든요. 내 재산권이 소중한 만큼 그 사람들의 재산권일 수 있는 권리금 부분 인정해줘야죠. 서로 잘 살고 서로 상생하려면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상대방 것도 소중하다는 걸 인정해주는 부분이 있어야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사회구조가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벌수 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서 살려는 사람들한테 배려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 상가임대차보호법이 개정돼 임대차 계약기간이 최소 10년 보호된다면 궁중족발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는 여론이 많은데 그렇게 법이 개정되면 문제가 조금은 해결될까요?

한시적으로는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문제가 기본적으로 법 자체를 기간만 늘린다고 해서 될 수가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그 기간이 5년에서 10년으로 늘어나면 10년 뒤면 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요? 또 있는 거거든요. 그 밑에 탄탄한 세부조항들이 있어서 만약에 10년을 장사했으면 그만큼 내가 더 노력한 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건물주 입장에서는 내가 10년이나 봐줬는데 이 사람 쫓아내지도 못하냐? 그러면서 분쟁이 생길 수 있는 거거든요.

상가임대차보호법은 돈에 관련된 거기 때문에 돈에 근거해서 서로 손해를 안 보는 조항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건물주가 퇴거를 요구할 경우에는 이 사람들이 매매를 할 수 있게 권리금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도록 보장을 해주던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건물주가 자체가 퇴거보상금을 해주던지 하는 거죠.

또, 10년 이상 늘려서 장사를 하게 되면 건물주 선에서도 손해를 안 볼 수 있게 10년 이상 계약했다는 계약서라든가 증빙서류 같은 것을 세무서에 신고할 때 소득감면을 해준다든지 하는 제도를 나라에서 만들어줘야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면 안 되잖아요. 한시적으로 기간만 늘려서 되는 게 아니고 조금 세세하게 따져서 내가 그 사람, 당사자가 됐을 때 임차상인이 됐을 때도 손해를 안 보고 건물주가 됐을 때도 손해를 안 보는 방안을 마련을 해야지 무조건 이슈화 됐다고 기간만 늘린다고 해결되진 않는다고 봐요.

 

▲ 청와대 앞 시위 마치고 국회 앞에서 1인 시위중인 윤경자 사장

 

  • 법 개정돼도 궁중족발 다시 찾을 수 없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운동 동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단 저희는 법 개정이 된다고 해도 혜택을 못 받지만 많이 알려졌을 때, 관심도가 높을 때, 정부도 시민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부각이 됐을 때 해야죠. 법을 지금 막 만들어야 되는 게 아니라 개정안이 발의가 돼 있는 거잖아요. 보완 과정을 거쳐 제정해서 시행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이렇게 해야지 그 법의 사각지대 놓여 있는 가게들, 저희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저희는 알려졌으니까 알지만 모르는 다른 가게들이 더 많이 있을 거고 이게 또 묻혀 진다면 저희처럼 저는 희생자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런 희생자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그럼 또 제2의, 제3의 궁중족발 사태가 벌어지는 거고 그렇게 때문에 여기에서 끝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힘들어도 하고 있는 거죠.

 

  • 청와대와 국회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계시는데요, 시위하면서 느끼시는 점과 어떤 마음으로 시위에 참여하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남편도 제가 1인 시위 못 할 줄 알았대요. 되게 유약하게 본 거죠. 일단 몸이 고달픈 거야 안 해보던 걸 하니까 힘든 것이고요. 그래도 주위에 계신 분들이 고생한다면서 ‘궁중족발 때문에 법도 바뀔 거 같다’며 힘내라고 해주시고, 위로와 격려를 많이 해주세요.

청와대 같은 경우는 다니면서 보시는 분들이 없어서 특별히 기대하는 건 없어요. 그래도 국회 앞에서 하는 건 효과가 있다고 느끼는 게 정문에서 하고 있으면 드나드는 사람이 보좌관들, 사무처 직원들, 출입 기자들이 그냥 허투루 지나가진 않더라고요. 저희가 국회에서는 전단도 배포하거든요. 어떤 분은 지나가면서 이건 꼭 해결돼야 할 문제라고 해주시고, 이런 분들 때문에 힘을 얻고 웬만하면 법이 개정된다고 선포될 때까지는 이어가려고요.

 

  • 김우식 사장님 탄원서에 많은 분들이 서명했고, 이 문제가 잘 해결되길 바라며 사장님들 응원하는 분들이 많으신데 그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정말 고마우면서 죄스러운 게 그거에요. 저희랑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장님들도 그렇고 연대인들도 마찬가지고 다른 투쟁현장, 다른 분쟁지역에 가서 똑같이 하셨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하필이면 우리를 만나서 더 힘든 과정을 겪었거든요. 다른 분쟁 같은 경우는 건물주가 연대인들까지 40명 넘게 다 고소고발 하는 경우가 없어요. 저희 건물주는 이름하고 전화번호만 알아도 주소를 몰라도 다 고소고발 했거든요.

살면서 경찰서 가서 조사받고 하는 일 드물잖아요. 근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셨어요. 다른 데 가서 연대했으면 안 겪을 일을 우리가게 와서 겪게 해서 그런 부분이 너무 미안하다 했더니 연대인들이 “사장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저희가 그런 게 두려웠으면 이런 일 자체를 안 해요. 저희한테 미안해하시지 마시고 그거는 저희가 알아서 할 문제고, 사장님이 잘못해서 벌어진 문제 아니니까 사장님이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라고 힘내라고 해주는 게 도움 많이 됐어요. 투쟁 7개월 넘게 하면서 돈이나 현실적으로 사는데 있어서는 잃은 게 많아요. 그렇지만 돈 주고 살수 없는 걸 얻은 게 훨씬 더 많아요. 그래서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 지금 가장 바라고 기대하시는 것은?

남편이 형을 안 살고 집행유예로 나오는 게 가장 큰 바람이에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요. 가장이잖아요. 가장이 없는 상태에서 사는 것과 있는 상태에서 사는 것은 크게 차이가 있으니까 나머지 차후 문제는 재판 끝나고 그 결과에 따라서 판단해야 할 거 같고, 우선은 그거 한 가지만 신경 쓰려고 해요.

 

▲ 지난 7월 11일 국회에서 개최한 임꺽정(임대료 걱정없이 장사하는 그날까지) 국민운동본부 출범식에서 결의문 낭독중인 윤경자 사장

 

  •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 개정안이 2년 전에 만들어진 법이거든요. 법사위원회에서 통과도 안 시키고 유보되고 있었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국회의원들이 건물주가 많고, 공무원 포함해서 나라에서 세금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본인은 장사할 일이 별로 없을 거 같아요. 주변에서도 드물 테고요. 그러니까 내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들 거 같아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계속 밀리고 밀리고 그런 거 같아요.

얼마 전에도 국회에서 발언 한 적 있는데, 국회의원이 왜 되셨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다는 말씀 다시 한 번 해드리고 싶어요. 국회의원이 되고자 꿈을 꿨을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국민들한테 어떤 걸 해줘야겠다 그런 꿈들이 나름대로 다 있었을 거잖아요.

 

  • 지금도 제2의 궁중족발 사례가 수두룩한데,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임차상인 분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대부분 권리금 주고 들어왔고 시설비 인테리어 이런 거 다 투자했고 중간에 뭘 바꾸게 되면 투자가 또 들어가는 거잖아요. 내가 들어간 비용을 회수하고 돈을 버는 게 남는 거예요. 그걸 아예 못했을 경우 자기가 돈 들어간 거 회수할 방법이 매매를 통해 권리금 받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근데 그거마저 못하게 되면 진짜 돈 한 푼 없이 쫓겨나는 거예요. 그것도 합법적으로요. 이건 자기의 권리에요. 누가 챙겨주지 않아요. 내가 내 권리를 찾아야 해요. 내가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남도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런 의지가 없으면 도와줄 사람도 없어요. 지금은 상가임대차보호법에 대한 모순도 많이 알려졌고 분명히 바뀌어야 하고 빠른 시일 안에 바뀔 거니까 지금 분쟁 중에 있는 분들도 조금 더 많이 알아보시고 좌절하지 말고 내 권리를 스스로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 마지막으로 일반 시민들에게 바라는 점 있으시면 한 말씀 해주세요.

사건 보도되고 인터넷에 댓글 다는 거 얘기하고 싶어요. 그 댓글 자체가 힘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어요. 잘 알아보고 달면 좋겠어요. 댓글 달고 의견을 제시하고 싶으면 기사 하나만 볼 게 아니라 여러 개를 찾아보고 정황을 판단한 다음에 달면 좋겠어요. 상대방이 상처받더라도 자기 의견 내는 건 자유지만 내 의견이 잘못된 의견이라면 책임감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함부로 장난스럽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본인은 그냥 바라보는 시각이지만 당사자는 삶이 오고 가는 거에요. 자기 목숨이 오고 가는 건데 신중하게 달면 좋겠어요.

 

소식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처음 인터뷰 때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윤경자 사장님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고 돌아왔습니다. 경실련 창립 모토가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인데 궁중족발 사태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기보다 투기로 불로소득을 얻는 게 더 쉬운 사회는 재앙입니다. 뿌리가 깊지만 언젠가는 뽑고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궁중족발과 같은 비극을 멈추기 위해 상가임대차보호법이 꼭 개정되길 기대합니다.

수, 2018/08/0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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