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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 시리즈 1편 – 궁중족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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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내몰림 시리즈 1편 – 궁중족발 인터뷰

익명 (미확인) | 화, 2018/02/06- 14:54

둥지내몰림 시리즈 1 궁중족발 인터뷰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고통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찾는 이가 늘어난 만큼, 쫓겨난 이도 늘고 있습니다.

바로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 이야기입니다. 동네는 떴지만 슬픈 이들이 있습니다.

서촌이 뜨자 서촌에서 궁중족발을 운영하시던 분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이들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세입자였습니다. 건물주인이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297만 원이던 가게를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1,200만 원으로 올렸습니다. 족발 팔아서 얼마나 큰돈을 번다고, 보증금도 아니고 어떻게 월세만 1,200만원을 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경실련도 제작년부터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대책 마련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가 돼버린 젠트리피케이션! 정책과 제도를 바꾸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소리를 잘 담아 알리고 싶어 둥지내몰림 시리즈 인터뷰를 기획했습니다.

첫 인터뷰는 최근 법원의 강제집행 과정에서 왼손가락 네 개가 부분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서촌 궁중족발 김우식 사장님과 윤경자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Q: 어떻게 서촌궁중족발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서촌에서 분식점 2년하고 7년동안 실내포장마차 해서 번 돈에다 대출금 받아서 궁중족발을 차렸어요. 빚 좀 갚아나가며 장사가 좀 되겠다 싶었는데 건물주가 바뀐 거죠.

요즘 진짜 약삭빠른 사람들은 한 장소에서 가게 오픈해갖고 3~4년 하다가 팔고 나가요. 근데 저희 같은 경우에는 여기가 고향이란 말이에요. 독립문이 고향이기 때문에 친구들이랑 다 여기 있고. 다른 동네 떠날 생각을 아예 못 한 거에요.

저희도 부동산에서 나와서 부추겼어요. 팔 생각 없냐고?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서촌이라는 이름이 뜰 때부터요. 사장님네 가게 정도면 권리금 1억 5천에서 8천까지 받을 수 있다고 자기가 받아주겠다고 파시라고 했어요. 근데 저희는 이 동네가 고향이고 여기 떠나서 살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건물주가 바뀌고 나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거에요.

 

Q: 강제집행은 언제 시작됐고, 최근 3차 집행까지 있었는데 지금까지 과정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10월 10일에 1차 집행이 있었어요. 법원, 사설용역 포함해서 100명 넘게 왔고, 저희는 60명 정도로 막아냈어요. 새벽 6시 반부터 4시간 대치해서 ‘집행불능’하고 갔어요. 2차 집행은 11월 9일에 야간집행이란 걸 신청하고 왔어요. 야간집행은 법원에서 판사가 허가를 내려야 되는 거고, 소수 인력으로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거래요. 20명 내외로 왔는데, 돈은 더 많이 들었다고 해요.

3차 집행을 또 해서 1월 15일 들어왔고 막아냈습니다. 근데 이번에는 집행관이 집행불능이 아니라 집행중지를 내렸어요. 둘의 차이가 큰데, 불능은 집행신청 다시 하려면 건물주가 다시 신청을 해야 해요. 그럼 또 돈이 들어가요. 근데 중지는 그게 아니라 중지된 상태, 말 그대로 휴전인 거에요. 그러면 언제든지 또 들어올 수가 있는 거에요.

집행관이 처음에는 불능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건물주가 집행관을 불러서 뭐라고 하니까 집행관이 다시 와서 중지라고 하더라고요. 건물주가 항의하니까 바꾸더라구요.

 

▲ 작년 11월 9일 왼쪽 손가락이 네 개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접합수술 후 회복중이신 김우식 사장님과 윤경자 사모님(왼쪽부터).

 

Q: 손가락 다치셨을 때의 상황을 좀 듣고 싶습니다.

2차 집행 때 사설용역이 사복차림에 손님처럼 가디건에 후드티 입고 모자쓰고 와서 여자들부터 끄집어 냈어요. 족발 꺼내려고 주방에 있는 남편도 끄집어 내려고 했는데 남자다보니 저항하는 게 틀리잖아요. 3~4명 사설용역이 붙잡고 빼는데 윗도리까지 다 벗겨지고 했는데도 죽을 힘 다해 싸우니까 힘을 못 당하니까 건물주가 용역대장, 제일 힘쎈 사람을 1명 더 불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확 낚아채니까 그냥 딸려 나온 거에요. 그 과정에서 조리대 밑에 홈을 잡고 버티다가 새끼 손가락이 제일 심하게 다친 거였고, 네 개 손가락이 거의 절단이 됐죠. 다행히 접합은 잘 됐지만 정말 끔찍했어요.

 

Q: 최근 JTBC 뉴스룸에서 궁중족발 집행관에게 과태료를 부과했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강제집행 과정에서 잡행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집행관의 역할은 집행을 지휘하는 사람입니다. 건물주가 동원한 사설용역은 인원수만 채우는 사람들이에요. 물건은 만질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손을 쓰면 안 됩니다. 일반화돼서 내려오다보니 합법적으로 비춰지고 있는데 경비법에는 분명히 명시돼 있어서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건 명백한 불법이에요.

2차 집행중에 손가락 다쳤을 때도 집행관은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원래는 인사사고가 나면 집행관이 정치시켜야 하는데, 이 사람은 자기 할 일만 하고 방관했던 거죠. 그래서 저희가 법원 집행처에 진정서를 넣었어요. JTBC 뉴스룸에서 취재나온 게 ‘집행관 위반’으로 법원이 과태료 200만원 처분을 내렸는데, 법원이 노무자 관리 감독을 제대로 안 해 집행관에게 과태료 처분을 내린 건 우리나라 최초라고 하네요.

 

Q: 건물주는 어떤 분이신가요?

북유럽 수입가구 회사를 운영한다고 하는데, 투기성 입대업으로 돈을 버는 걸로 알고 있어요. 주로 비어있는 건물을 통째 매매하는데, 세입자들이 가져가야 할 권리금 부분이 없어져서 시세차익에 플러스가 돼서 그런 걸 잘 하신다고 해요.

그 분은 집행할 때도 직접 나오세요. 집행나오기 전에도 가게 앞 현수막이나 신문기사 스크랩해놓은 거 다 와서 뜯어버리고, 문자로 “너는 범법자다” 다쳤을때도 “쇼한거지?” “너 진짜 죽으려고 했었냐? 죽지 그랬냐?”고 했어요. 사람 괴롭히는데 일가견이 있으시더라구요. 저희 건물에 다른 가게들도 있었는데 소송까지 간 건 저희뿐이에요. 다 지쳐서 떨어져 나갔어요.

남편이 손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고, 저랑 사람들 있는 거 뻔히 알면서 2주 동안 가스 2번 끊고, 전기 개량기 아예 통째로 떼어가고 수도 잠그고 화장실 폐쇄까지 시켰어요. 사업자등록증 말소시키고 통장 압류까지 다 해놨어요. 그걸 2주 동안에 다 했어요. 수도하고 전기는 생존권이잖아요. 사업자등록증도 본인 아니면 말소를 못 시키는 건데… 저희가 관공서 쫓아다니면서 다시 회복시키느라 진짜 힘들었어요.

저희가 다시 관공서 사람들 실사나오게 해서 복구시켰어요. 화장실은 앞에 사장님들이 두 군데나 키를 주셔서 사용하고 있어요. 통장 압류한 것만 아직 못 풀었어요. 그거는 또 다른 손해배상으로 넘어가는 거더라고요. 주택청약통장까지 다 압류당했어요.

10월 말에 투병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10월 30일날 돌아가셨는데, 탈상하고 1주일 만에 2차 집행을 들어온 거였어요. 그리고 그날 손을 많이 다친거죠.

SNS 하는 젊은 분들이 한달에 1,200만 원 월세가 말이 되냐고? 막 댓글달고 비난하니까 이 분이 명언을 남겼죠. “족발가격은 족발집 사장이 정하는 거고, 임대가격은 임대인이 정하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왜 문제냐는 거에요.

 

▲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11월 9일 이후 한달 내내 매일 울었다고 하신 윤경자 사모님.

 

Q: 이런 일들 겪으시며 심정이 어떠셨어요?

아무리 자본주의라지만, 건물주는 내 돈 가지고 내가 올리는데 뭔 상관이냐 이러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다쳤는데 더군다나 음식하는 사람이 손을 다쳤는데 그 당시에는 남편 손이 불구가 될 정도라고 병원에서 얘기했었어요. 회복이 빨라 정말 다행이지만.

지금은 웃으며 말하는데, 11월 한달 동안은 내내 매일 울었어요. 경찰서도 한번 안 가봤는데 생전 처음 관공서도 다 다니고 법원이며 경찰서며 혼자 다녔어요. 아이들은 다 커서 직장 다니고 군대 가있고 해요. 큰애가 아빠 병원에 있는 동안 병간호했는데, 다친 날 아빠 다친 걸 직접 보고 대성통곡하는데 그거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요.

시세차익으로 돈 버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하지만 자기가 돈 버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이건 사람의 삶을 파괴시키는 거에요. 애들한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요.

 

Q: 도와주시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은 많으세요?

저희가 3차까지 집행 막아내고 할 수 있었던 게 저희 도와주시는 분들 없으면 못 하는 거에요. 맘상모(마음편히장사하고싶은상인들의모임)는 저희처럼 다 장사하는 분들이세요. 저희처럼 이런 일 겪고 분쟁에서 합의봐서 다시 장사 시작하시는 분도 있고, 장사 아예 접고 회사다니는 분도 있고, 아직 분쟁은 안 일어났지만 이제 다음 다음 차례로 대기하고 계시는 분도 있어요. 맘상모가 법률자문부터 수요집회 등 저희와 항상 같이 해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그밖에도 기사랑 보도가 많이 되고, 뉴스, 인터넷 페이스북에도 많이 알려져서 분개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세요.

3차 집행 때는 새벽부터 모였거든요. 9시에 들어온다고 해서 새벽 6시부터 모였는데, 제가 처음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더라니까요. 우리가게 처음 오는 젊은 학생들이 집행을 막아내겠다고 왔어요. “사장님 힘내세요! 제가 보고 들어서 많이 알고 있어도 온 건 처음이에요. 많이 오고 싶었는데, 기회가 안 돼서 많이 못왔어요. 오늘 와 봤으니까 다음에 또 올게요”하고 가는 거에요. 그날도 건물주가 와서 행패부리고 하는 거 다 봤거든요. 두 달 동안 있으면서 저희한테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느껴요. 그러니까 버틸 힘이 돼요.

저희 가게 단골손님도 문이 항상 닫혀 있으니까 지나가만 갔었대요. “사장님 힘드시죠? 여기 지나만 갔었는데 항상 문이 닫혀 있어서 사장님 못 뵜어요. 저도 이 동네 살고 있지만 서촌이라고 뜨면서 이렇게 된 건데, 이제는 사장님의 싸움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됐으니까 사장님네가 쫓겨나면 여기 임대료 다 오르는 거에요. 사장님 꼭 이기셔야 돼요”하고 가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집에서 쿠키를 손수 구워가지고 그 앞에 메모를 붙여가지고 앞집에 쇼핑백을 맡겼어요. 자기네 온 가족이 우리네 족발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이기시라고…

그런거 보면서 참 세상이 진짜 나 혼자라고 느꼈는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구나 실감나게 느꼈어요. 처음엔 죽을 거 같았거든요.

 

Q: 영업을 못하셔서 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으시겠어요.

장사도 못하는데다가 계속 나가는 건 생기니까 어렵죠. 여기 지켜주시는 분들 생활하고, 한번 오면 스무명에서 서른명씩 오시니까 그 사람들 먹거리며 돈이 계속 들죠. 그래도 돈으로 안 되시는 분들은 음식으로 연대를 해주시고, 김장철에는 자기네 김치 담그시면서 한통씩 갔다주기도 하셨어요. 인터넷에 후원계좌 열어가지고 십시일반 모이는 게 그게 꽤 큰돈이 되더라구요. 큰 돈 송금하는 게 아니라 1인당 5천원, 1만원 모아지면 그래도 꾸려는 나가겠더라구요.

 

▲ 궁중족발집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돼버렸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제 법정싸움하고 경찰서 조사만 남아있어요. 법적으로는 진 건데요, 아직 손해배상청구 건도 남아있고, 유치권 소송이 진행 중이에요. 강제집행은 중지된 상태라 또 들어올 수 있어요. 저번엔 법원인력 20명 내외로 적게 왔었는데, 이번엔 더 많이 올 수도 있어요. 보통 건물주가 3차 4차까지는 집행을 안 하거든요. 무리라고 생각해서 안 한 대요. 4차까지 하면 그때서 아 안 되겠구나 포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 상태에서는 일단 잘 버티는 게 중요해요.

24시간 항상 사람이 지키고 있고, 매일 요일별로 행사를 해줘요. 제일 고마웠던 게 옥바라지선교센터는 기도회를 열어주시고, 나머지 음악가들은 다른 음악가들 추천해서 공연, 시낭독회, 영화상영도 해줘요. 다양하게 문화제를 많이 해주시는 게 잡다한 생각하지 말고 기운 북돋아주려고 하는 거 같아요.

안쪽에 테이블 4개 놓고 손님 받던 방은 이제 가게 지키는 사람들이 잠자는 곳, 공연할 때는 무대가 돼요. 가수분들이 이 무대를 되게 좋아하세요. 신발 벗고 양말 신고 공연해보긴 처음인데 웬만한 공연장 못지않고 좋다고 해요.

홍대입구에 있던 두리반 사례처럼 저희도 빨리 해결돼서 마음 편히 장사하고 싶어요.

 

인터뷰 갔는데 가자마자 사장님과 사모님이 저희에게 떡볶이를 한 대접 주셨어요. 분식집하신 경험 때문이신지 정말 맛있었습니다. 영업도 못하시고 투쟁장으로 변해버린 가게를 보며 안타까웠지만 지지해주고 함께 지켜주는 이들과 함께 꿋꿋이 싸우시는 두 분에게서 오히려 힘을 얻고 왔습니다.

소액이라도 후원해주시면 십시일반 모여 큰 힘이 된다고 하시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아래 계좌로 후원해주세요.

[궁중족발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455-889687 (예금주:구자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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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이라는 미래

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가 만든 비극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용산참사 현장을 왜 남일당이라고 불러요?"

 

얼마 전 한 동생이 물었다. 그 건물 일 층에 남일당이라는 금은방이 있었거든. 그래서 남일당이야. 질문자는 한참 동안 대답을 믿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10년 동안 남일당이었다는 것은 조금 허망하다는 투였다. 원래 동네의 골목이란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일쑤다. 약국이 없는 사거리가 약국사거리거나 구청이 이전한 자리를 여전히 구청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골목이나 사람들이 사라진 동네는 예외다. 기억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이 되었다가 거대한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한강로5가 동, 용산4구역에서 핏줄처럼 흐르던 골목의 흔적은 더이상 느낄 수 없다. 2009년 1월 20일, 망루가 불타던 그날로부터 10년이 흘렀다.

 

10년 동안 외쳐온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용산참사는 이주대책을 요구하던 용산4구역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되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용산참사 이후 화재의 원인과 사망, 진압과정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경찰은 수사기록 3천 쪽을 제출하지 않았고, 증거들은 사라지거나 훼손되었다. 철거민의 화염병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철거민들에 의해 난 불로 인해 경찰이 사망한 것으로 재판은 결론지어졌고, 철거민 5명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다루지조차 못한 채 망루 안에 있던 철거민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10년간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은 다양한 사실을 밝혀냈다. 망루 안에 위험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지휘부가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원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 당시 경찰 서울청장이었던 김석기는 무전기를 꺼놓았다며 책임을 회피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 등 경찰의 작전이 매우 성급하고 무리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사카 총영사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현재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한 김석기는 무리한 진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이버수사대 요원 900명을 동원해 경찰 진압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댓글 공작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했다. 용산4구역의 개발 인허가는 이후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는 것이 확인되어 승인 취소되었지만 이로 인해 주거와 생계를 빼앗긴 이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용산참사 10주기를 맞아 유가족과 피해생존 철거민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아직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과 존엄을 파괴하는 강제철거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몇 가지 사실을 바르게 나열한다고 해서 진실이 드러나진 않는다. 용산참사의 진실은 우리가 본 불타는 망루에 담겨있다.

 

2009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새로운 금융기법이었던 프로젝트파이낸싱은 천문학적인 대출에 높은 이자를 지불하는 것이었으므로 빠른 개발만이 높은 이익을 보장했다. 빠른 개발은 철거민들의 빠른 퇴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강도 높은 폭력이다. 아직 살고 있는 주민들을 해코지하거나 장사하는 가게에 오물을 투척하거나, 빈집의 유리창과 문을 떼어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들은 모두 한국 사회 만연한 '철거'의 과정이다.

 

용산4구역 철대위 위원장이었던 이충연은 망루에 오른 것은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피해 간 것'이라고 얘기한다. 더는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과 모욕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조합은 단 한 차례의 협의 조차 하려하지 않았다. 용산구청을 비롯해 조율에 나서거나 돕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들은 망루로 향했다. 망루를 오른 사람들은 남일당, 그 골목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난 12월 3일에는 한강에서 마포 아현동 철거민 박준경 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10년째 살던 집에서 7월과 9월, 두 차례 강제철거를 당해 쫓겨났고, 임시로 머무르던 주변 공가에서마저 11월 30일 퇴거당한 뒤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용산참사 이후 서울시의 경우 동절기 강제철거가 금지되었지만 12월 1일부터 동절기에 해당한다. 그 전에 퇴거를 완료하기 위해 철거지역은 전쟁터가 되고, 박준경님의 마지막 철거 역시 11월 30일이었다. 용산참사 이후 재개발지역 상가세입자의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났지만 재건축 세입자에게는 이조차 해당하지 않기에 우장창창, 궁중족발 등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십 년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용산참사 이후 개발지역 세입자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드러났고, 경찰 진상조사위원회과 검찰의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냈다. 비록 외압으로 인한 조사 부진과 한계를 갖고 있으나 유가족과 피해생존자,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용산참사 진상규명'의 초입에 섰다.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가깝게는 사망과 화재원인에 대한 규명과 진압 책임자의 처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도시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열심히 돈 벌어 건물주에게 바쳐야 하는 세입자들이 언젠가 건물주가 되길 희망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에 대한 몇 겹의 이해와 이를 개조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용산은 언제나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월, 2019/01/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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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을 바라보다]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통일협회 고문, 前이사장)

정리: 윤은주 회원팀 간사

[email protected]

 

경실련 30주년을 준비하며 그동안 경실련에서 활동하시며 시민운동을 빛내주신 분들, 또는 우리사회에서 존경받는 사회적 명사들을 찾아뵙고 삶의 혜안과 시대정신을 담은 소중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김성훈 前공동대표님에 이어 두 번째로 경실련이 만난 분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셨고, 현재는 고문으로 활동중이신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님입니다.

박 회장님은 WCC 아시아 국장, 초대 UN 인권대사를 지내시며 평화, 통일, 인권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작년 8월에는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여기신다는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하셨는데요, 적십자 활동 소개와 판문점 선언에 대한 평가 및 전망 등을 진솔하게 나눠주셨습니다. 

 

 

1.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습니다. 4.27 정상회담의 성과와 이번 회담이 동북아와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1년 만에 이뤄졌던 4.27 남북정상회담은 지금까지 72년 7.4 공동선언, 노태우 대통령의 91년 12월 13일 고위급 합의문서, 김대중 대통령의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의 연속성에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한 비핵화가 있고, 둘째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라는 준전시상태를 완전히 평화협정으로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선언이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지금까지 73년 동안 대치를 극대화 했었던 군사대치 국면을 해소시키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죠. 이 세 가지의 큰 틀에서 선언의 전문과 3항 13개조 원칙들이 발현된 거라고 봅니다. 과거의 선언들보다 남과 북의 양 정상이 세계를 향해서 한 선언이기 때문에 진정성 면에서 세계의 큰 반응을 일으킬 것입니다.

지난 73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과 아픔을 주었던 이산가족 문제를 포함해 민족 분단으로 발생된 남과 북의 인도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본격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서 감사하고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써보게 되었습니다. 6자 회담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평화 번영 통일을 위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남북이 협의해서 세계평화에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이 회담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2. 남북이 종전선언을 하고,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의 의미와 평화체제에 대해 조금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된다는 얘기는 73년 동안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있었던 상황을 완전히 180도로 바꾸는 거예요. 군사적 대치라는 것은 이제 없을 거고, 다만 평화체제를 지키는 평화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군대는 있겠지요. 내가 살았던 스위스마저도 중립국가지만 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군대라는 게 원래 남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의 안보를 지키려고 있는 거니까 자기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군대를 향한 대치국면이 완전히 해소가 될 것이고, 이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비자를 받고 서로 왕래하되 두 개의 체제가 평화스럽게 공존하기 때문에 서로 상호 존경을 하고 상호 인정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3.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구호활동부터 시작해 헌혈, 병원복지사업, 남북교류활동 등 정말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데 회장으로 취임하시면서 가장 중점을 두시는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한적십자사 소개와 현재 활동도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한 지 약 9개월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참 빨라요. 대단한 조직입니다. 적십자정신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봉사원 12만 명, 청소년적십자 단원 19만 명, 직원 3,700명 큰 예산을 가지고 움직이는 113년의 역사를 가진 기관입니다. 1905년 고종황제 칙령으로 설립되었어요.

지난해 터키 안탈리아에서 개최된 국제적십자사연맹 총회에서 191개국의 대표격인 관리이사회 이사국을 뽑는데 대한적십자사가 당선이 됐습니다. 취임사에서 언급했지만 대한적십자사를 `선진국형 적십자사`로 만들고 싶어요. 스위스나 독일에서는 적십자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참 좋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 각각 18년과 7년씩 아이들을 키우며 느낀 건 그 나라들은 어린아이 때부터 적십자를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관으로 교육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한적십자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타 공공기구 정도로 인식돼 있다 보니 각종 감사의 대상이 되고, 봉사정신과 관련이 없는 외부인들이 적십자 활동에 이의를 제기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지난해 8월 취임 후 ‘동북아시아/한반도 인도주의 공동체 건설’이라는 새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대한적십자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포괄적인 접근법으로 제 3의 길을 모색하고 있어요. IFRC, ICRC, UN 등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지금의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기관 운영에 있어서도 비효율적이고 관행적인 운영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대내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적십자사를 구현하는 데 주력하려고 해요. 이를 위해, 대한적십자사는 국내 비영리단체 최초로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했고, 기부금의 모금, 집행 과정은 물론 기관 운영과 관련한 재무 프로세스를 대폭 개선함으로써 조직 전반의 투명성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교류 활동에 대한 계획은 판문점 선언 이후 8.15 전후해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을 거예요. 이와 관련하여 6월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6월 북미회담 끝나면 평양에 가서 북한 적십자사하고 가서 이산가족 상봉 준비와 인도주의 원조 등에 대해 논의하고 싶습니다. 특히 인도주의적 지원에 있어 보건 지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북의 건강이 남의 건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북의 기초건강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것 등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어떻게 튼튼하게 평화 공존을 통한 핵과 전쟁이 없는 한반도 인도주의 공동체 건설을 할 수 있을지 북과 마주 앉아 프로그램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상호 인정과 존중으로 남이 50%, 북이 50% 서로 양보해서 만들어 가야해요.

 

 

4. 경실련도 1994년부터 통일협회를 창립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통일운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2006년~2009년까지 이사장도 역임하시고 같이 활동하셨는데, 경실련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고, 통일협회 활동하시던 때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경실련 통일협회가 참 일찍부터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내가 고문으로 있지요. 특히 이번 적폐청산 촛불 운동의 한 가운데 있었고 큰일을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유엔은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평화, 지속가능한 발전, 여성, 아동, 청소년 NGO 단체를 먼저 불러서 의견을 청취합니다. 그런 건전한 NGO 중 하나가 경실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실련에 대한 굉장한 경의를 가지고 있어요.

경실련 활동은 내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인권대사 할 때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경실련통일협회에서 특강을 했던 게 계기가 됐어요. 인권대사를 그만두려고 하니까 경실련에서 이사장을 해주십시오 해서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때 이사장할 때 나를 도왔던 게 김근식 교수, 전 통일부 장관 홍영표 등 젊은 석학들이 나를 많이 도와서 참 좋은 추억도 많습니다. 저도 경실련의 한 식구에요.

30주년이 내년이라고 해서 기념행사에는 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모금도 쉽지 않은데 어렵게 일하는 경실련 직원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경실련이 지금까지 해왔던 큰일은 우리 민족의 선진화를 이뤄냈어요. 특히 판문점 4.27 선언 이후 국민의 계몽문제라든지 아직도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냉전 논리에서 있는 국민들을 잘 설득하는 일들도 경실련 통일협회가 잘 해가면 멋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5. 경실련이 내년이면 30주년을 맞습니다. 경실련에 바라는 점, 혹은 한국 시민사회에 바라는 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내가 관여하는 한국의 시민사회 전부가 정부의 보조금을 안 받아요. 촛불 정부 시대에는 경실련 등 시민사회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도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다 여러분의 세금이기 때문이에요. 한국 시민사회가 그동안은 ‘권위주의적 정부와 대치하면서 시민운동을 한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의 돈을 받을 수 없었지만, 지금 촛불 대통령은 다시 독재로 갈 일이 없으니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보조금을 받는다고 정부에게 싫은 소리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서양에서는 전부 정부 돈으로 움직이는데 더 소리치고 다녀요. 왜냐하면 “너희들이 준 돈이 우리 세금이다”라는 생각가지고 하는 거라서 그래요.

지금까지도 잘했지만 이제 정말 역사를 다시 쓰는 데 있어 끝까지 순수하게 국민의 편에 서서 건전한 NGO로 큰일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6.  ‘통일, 평화, 인권’하면 박경서 회장님이 떠오르는데,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언제입니까?

늘 이야기하는데 분단이라는 것이 모든 우리나라의 부조리의 원천입니다. 분단을 극복하지 않고는 절름발이식 발전일 뿐입니다. 분단이라는 것이 우리 5천만, 북의 2,300만 7,300만의 목을 조이고 있는 한 모든 부조리가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용납이 돼버리는 시대를 산거에요. 우리를 옥죄고 모든 우리의 악의 세력들이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죄를 다 저지른 것을 이제는 과감하게 털어버린다는 그 가능성을 판문점 선언이 해줬기 때문에 판문점 선언의 의의가 크다고 보는 겁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여수순천 사건이 터졌어요. 사흘 동안 무릎 끓고 아스팔트에 나가있었습니다. 무고하고 순수한 민간인 4만 5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나라 전쟁이 터져서 외할머니 집에 피난 갔는데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조카 셋이 내 눈 앞에서 빨치산에게 대창으로 죽는 것을 봤어요. 그런 것을 보고 어렸을 때부터 전쟁이나 폭력은 안 된다. 평화, 인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제네바 18년 세월 동안에 르완다, 미얀마 학살, 북한의 굶주림 현장을 내 눈으로 보면서 인권, 평화, 지속가능한 발전, 개인의 안전 등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생각합니다.

 

7. 마지막으로, 초대 UN인권대사,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 국장, 대한적십자사 회장까지 다양한 이력과 경험을 쌓아오시며 이제 우리시대의 어른이기도 하시고, 사회적 명사가 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요. 내가 조금 오래 살면 내가 그렸던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실현이 되는 구나. 시베리아를 거쳐 북한을 가는 날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는데 조금만 더 오래 살면 정말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1986년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국장을 할 때 그리온 남북교회 모임을 통해 남한과 북한 목사님들의 대화를 추진했었습니다. 88년 그리온 2차, 90년 그리온 3차, 4차는 92년 남북교회지도자 모임을 했어요. 89년 모스크바 남북 평화선언 그런 인연으로 인권대사를 하게 된 거죠. 그런 인연으로 7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를 여러 사람과 같이 만들고, 지금 대한적십자사 회장까지 왔습니다. 내 꿈은 결국 분단을 극복해서 어깨동무하는 정직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동체를 남과 북이 만드는 것입니다.

 

금, 2018/06/0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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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차 분쟁에서 폭행사건으로까지 번진 서촌 궁중족발 사태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의 심각성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소위 상권이 뜨면 임대료가 폭등하고 지역상인은 쫓겨나는 현상이 반복되지만, 법제도의 허술함으로 임차 상인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임대인의 ‘갑질’은 정당화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2002년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누구나 최소한 5년은 안정적으로 장사할 수 있다’고 했지만, 한 자리에서 열심히 일해서 단골손님을 만들고 자리를 잡아도 5년 후에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면 임차인은 어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나가야 합니다. 

2015년에는 권리금(유형·무형의 재산적 가치의 양도 또는 이용대가)이 법적으로 명문화되었지만 임차인이 권리금 회수기회를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올해 1월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시행령 개정으로 임대료 인상률 상한이 9%에서 5%로 낮아졌지만, 이마저도 임차인 보호 기간(계약갱신 요구권)이 소멸하는 5년 뒤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핵심은 상가 건물에 입주한 임차 상인이 안정적으로 영업을 할 수없을 만큼 법이 미비하다는 것입니다. 상인에게 장사는 생존입니다. 법의 미비로 생존권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영국의 경우 임대차 존속기간을 두지 않고 있으며, 프랑스는 최소 9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업권을 하나의 별도 권리로 인정하고 있어 이에 대한 침해를 엄격히 규율합니다. 

20대 국회에도 임차인의 계약 갱신 청구 기간을 연장하거나, 권리금 회수 기간을 늘리는 등의 법개정안이 다수 올라가 있지만 법안논의는 진척이 없습니다. 

 

제2, 제3의 궁중족발 사태를 막기 위해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개정이 시급합니다.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정부가 나서서 법을 바꾸자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회가' 법을 바꿉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함께해주세요.

청원 목표 20만명을 채울수있도록 주변에도 많은 홍보 부탁드립니다.

 

청와대청원 링크 bit.ly/김우식청원

 

 

목, 2018/06/2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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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슬프다

 

박지호 사회정책팀 간사

[email protected]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는다. 들어왔던 게이트로 다시 나가면서 끝까지 감정을 정리한다. 압도당한다. 아니 표현이 부족하다. 환하게 슬프다. 아직도 부족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슬프다. 그러나 아름답다.

 

유럽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좋지 않다. 가능하면 가고 싶지 않을 정도.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유로 자의반 타의반 유럽으로 떠났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풍차. 튤립. 운하.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에서 그들이 함께 떠난 그곳. 이게 내가 네덜란드에 대해 알고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전부이다. 하지만 이번에 만나게 된 한 공간이 아니 인물이 네덜란드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 30. ~ 1890. 7. 29.) 그를 전혀 모르진 않다. 과거 다른 공간에서 그의 작품 다수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도 그의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의 우울이 슬픔이 좋았다. 한국에서도 수년전 그의 작품을 다수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프랑스스럽다(?). 한국에서 만난 전시도 그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당시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전시했다. 그래서일까. 그와 네덜란드를 쉽게 연결 짓지 못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죽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 프랑스에 치우쳐 있는 건 내가 그의 죽음에 더욱 더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드렸기 때문일까.

 

▲1973년에 개관한 반 고흐 미술관은 그의 작품 약 7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입장권마저 아름답다.

 

 

Sunflower

▲출처 :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 (https://www.vangoghmuseum.nl/)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그림이다. 고흐는 생전에 총 12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1889년에 그린 15송이의 해바라기를 보고 있으니 처음엔 당당함이 전해졌다.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노력을 여실히 느껴진다. 꽃병에 쓰여진 “Vincent”는 단순히 작가의 서명이 아니라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그때 함께 한 친구가 말한다. 슬프다고. “자신의 안에는 그림 속 여러 해바라기의 모습처럼 다양한 면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괴팍하고 우울한) 단면만 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라고 이야기한다. 친구의 이야길 듣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니 당당해 보던 그의 서명이 슬퍼지고 당당해보이던 해바라기마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일부러 바로 서 있는 빈센트 반 고흐로 보인다.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던 그의 감정이 스며든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서 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모든 작품을 다 보고 다시 한 번 해바라기를 찾았다. 그의 슬픔을 온 마음에 새기며.

 

Almond Blossom

▲출처 : 반고흐미술관 홈페이지 (https://www.vangoghmuseum.nl/)

 

1층부터 감정이 쭉 끌어올려져 해바라기를 건너 이 그림 앞에서 쾅하고 터진다. 마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같다. 환희다. 마지막 층에서 만난 Almond Blossom은 1890에 그려졌다. 정신병원에서 힘들게 지내던 날들 속에서 그는 아름답고 생명이 피어나는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조카의 출생을 축하하기 위해. 출생이라는 기쁨의 시간을 함께하고 싶지만 그는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더군다나 장거리 여행은 허락되지 않는다. 동생 테오는 “아기가 언제나 형처럼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어”라며 아이의 이름을 형의 이름으로 짓는다. 빈센트 반 고흐는 조카가 자신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삶을 살까봐 우려하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사실 매우 기뻤다. 조카의 출생과 자신의 이름을 따라 짓는다는 소식은 그에게 삶의 희망을 가져다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슬픔과 똑같이 빈센트 반 고흐의 행복과 웃음이 온전히 전해진다. 슬픔이 가득했던 마음속에 한 송이의 아몬드 나무 꽃이 피어난다. 아몬드 나무의 꽃은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으로 알려진다. 구름 가득한 가을 속의 네덜란드인데 갑자기 봄이 된다. 하늘색이라는 단어로 저 하늘을 표현하기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그림 속 하늘이 진짜 하늘이다. 봄이다. 슬픔 이후 봄. 또 다시 감정이 폭발한다.

 

러빙 빈센트

네덜란드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난 시간들은 가장 강력한 추억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제 누군가에게 네덜란드를 이야기할 시간이 있다면 난 자연스레 이야기 할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의 나라라고..

 

2017년 11월 9일 “러빙 빈센트”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세계 최초 유화 애니메이션이다. 제작기간 10년, 영화 1초를 표현하기 위해 10일을 그렸다는 홍보 문구보다 영화 속 한 대사가 날 영화관으로 자연스레 인도한다. “당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나 궁금해 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알죠” 빈센트 반 고흐의 우울과 죽음만 알고 있던 나에게 던지는 물음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계절은 겨울로 가겠지만 나에겐 다시 봄이 시작될 것 같다. 글을 쓰며 그날의 사진을 다시 돌아보며 그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니 금방 봄이 눈앞에 와 있는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는 나에게 정말 아름답게 슬프다. 추운 봄이다.

목, 2017/12/0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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