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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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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 빼앗긴 나랏말쌈 –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

익명 (미확인) | 목, 2017/10/19- 17:29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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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가 편찬한 1학년용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독본>(1915) 표지와 본문>

 

10월 9일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한 날, 바로 한글날이다. 올해는 훈민정음을 반포한(세종 28년, 1446년) 지 571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국기’로, 그것도 ‘국어’의 지위를 빼앗긴 ‘한글’로 배우는 참담한 시대를 보여주는,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제1학년용 ????보통학교조선어와한문독본普通學校朝鮮語及漢文讀本????교과서이다.교과서는한사회의교육이념을반영할뿐아니라그 사회의 구조 및 지식 발전 정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국민소학독본????으로알려져있다.이 시기한성사범학교령,소학교령을공포하고한성사범학교 규칙과 소학교 규칙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8년에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을 공포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이 담긴 교과서들을 판매 금지시키는 한편,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국어’라는 명칭 대신에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고, 대부분의 교과서를 일본어로 기술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어’와 ‘한문’ 과목 이외의 대부분의 교과서는 일본어로 편찬되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일제의 충성스러운 제국신민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교육은 바로 이 「조선교육령」에 의거하여 이루어졌고, 조선총독이 모든 사항을 관할했다. 1911년 9월부터 시행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우리말이 ‘조선어’로 일본어가 ‘국어’로 바뀌었으며, 일장기를 ‘국기’로 가르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이른바 ‘교육칙어’를 근거로 식민화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독본????과 ????국어[일어]독본????은 식민정책을 알리고 시행하는 교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교과서의 내용은 ‘철자, 어휘, 절과 문장 학습, 글 읽기’ 등으로 이전 시기에 비해 좀 더 체계적인 모습을 띠게 되나,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이나 애국적인 내용은 모두 빠지게 된다. 그 대신에 주로 상식과 관련된 설명문, 우화 등의 이야기, 서간문, 속담, 노동, 수필, 문학 작품, 예절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총 120쪽에 84과(課)로 구성된 「보통학교 조선어와 한문 독본」은 기본적인 한글체계인 모음을 제1과로 시작하여 자음과 단어 연습, 짧은 문장, 수와 관련된 글자를 ‘조선어’와 ‘한문’을 혼용하여 설명했다. 가족관계, 신체, 시계 등 간단한 단어를 시작으로 예절, 국기, ‘천황’ 등 ‘예절과 도덕’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식민치하의 특수한 상황에서 강요된 규율과 지침이었다. “황국 신민다운 자질과 품성을 구유(具有)케 해야 한다.”는 일제의 교육목표처럼, 도덕과 예절은 식민지민으로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특히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병참기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대두된 ‘대동아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반영되었다. 따라서 일본을 중심으로 황국 신민화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소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의 단선 학제를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언어도 ‘국어’로 통일하여 조선어 말살정책을 실행하였다. ‘조선어 말살정책’은 1937년 이후 학교, 병영, 관공서, 사회 전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행된 정책으로 이른바 ‘국어상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를 반영한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바꾸어 사실상 폐지하였다. 이로써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조선에서의 ‘나랏말’ 교육은 사라져 버렸다.

∷ 강동민 자료팀장

시민들의 의견

열시 마산 수출2공구 회관

창원시민들의 팔용산 걱기 대회가

수원지에 작은 유람선이라도

물론 수상 안전요원도 필요케쬬?

어느 시인(시민의다른표현)동생은

삼성병원 방면으로 연결되는 둘레길이

인나…..업시모

양덕1동과 합성동의 봉암동

운동사마

출태권도  가넝하기로 하모하무…

……

 

토, 2019/04/20-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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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4.19혁명기념일 맞아 대전단체들,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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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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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공동행동의 기자회견과 동시에 왕복 4차선 도로 대각선 맞은 편에서 맞불집회 하고 있는 보수단체 회원들의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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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태극기와 성조기 등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는 보수단체 회원들의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배재대학교에 서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 철거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에 반대하는 보수단체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타나 ‘맞불집회’를 열었다.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동상철거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백만 민간인 학살 책임자 이승만의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시작 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동행동이 기자회견을 예고한 11시보다 앞선 10시 30분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미 길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맞불 집회를 시작했다.

이후 보수단체 회원들과 공동행동 회원들은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욕설이 오가며 충돌 위기까지 치달았으나 경찰과 다른 회원들의 만류로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은 공동행동 측을 향해 욕설을 쏟아 부었다. 이들은 “이게 나라냐, 이 XX들아”, “양심도 없는 것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은 북에 가져다 버려야 한다”는 등의 험한 말을 쏟아냈다.

이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든 채 이승만 동상과는 관계없는 ‘박근혜 대통령은 억울하다’, ‘사기 재판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감옥에 갇혔다’, ‘문재인은 나라를 이 모양 만들었다’, ‘김경수는 내보내 주면서 왜 박근혜 대통령은 가줘 두느냐’는 등 정치적 발언을 쏟아 냈다.

오전 11시가 되자 공동행동 주최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이에 보수단체들은 스피커의 볼륨을 더 올려 구호를 외치는 등의 맞불집회를 이어갔다.

공동행동 발언자로 나선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오늘은 1960년 4월 19일 대학교수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날”이라며 “이승만은 친일 부역자들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삼아 독립운동가들과 양심적 정치지도자들을 고문하고 탄압했고, 심지어 암살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건전한 상식과 양심, 그리고 사회정의보다는 눈치와 아부로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위한 온갖 부정과 사기가 당연시되어 왔다”면서 “배재대학교는 대체 이런 인물의 동상을 세워 놓고 학생들에게 무얼 배우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강영미 대전참교육학부모회 대표도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인물의 동상을 세워 놓고 우상화하는 것은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는 헌법정신을 유린하는 것이며, 수차례 이승만 동상 철거를 요구해왔던 학생과 대전시민들을 우롱하는 참으로 비교육적인 처사”라면서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전국의 이승만 동상은 모조리 철거되어야 하고, 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묘소도 당장 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재대학교 졸업생도 발언에 나섰다. 2008년 배재대 졸업생이라고 밝힌 김상기 배재대민주동문회 회원은 “배재대학교는 자랑할 인물이 그렇게도 없어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 놓고 그를 기념하려 하고 있느냐”며 “이는 학교를 빛내는 게 아니라 먹칠하는 짓이다. 학생들이 동상 앞을 지나가면서 침을 뱉고 있는데, 왜 철거하지 않느냐”고 분개했다.

공동행동은 기자회견문을 통해서도 “배재대학교는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한 대한민국 최초 사랍학교인 배재학당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며 “따라서 배재대학교는 배재인만의 자랑이 아닌 우리 대전시민 모두의 자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러하기에 우리는 배재인의 수치이자 대전시민의 수치인 저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을 하루빨리 치워 주길 바란다”면서 “3.1혁명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용기 있는 결단으로 대전시민에게 큰 의미있는 선물을 안겨주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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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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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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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보수단체 회원들이 내걸은 현수막. ⓒ 오마이뉴스 장재완

이러한 공동행동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보수단체 회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와 ‘대한민국 만세’ 등을 부리며 집회를 이어갔다.

이들은 ‘배재대 우남 동상을 지키기 위한 자유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이날 공동성명서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고 조작하는 ‘역사청산’이 시도되고 있다. 4.3 남로당 봉기는 반정부 민주화 운동으로, 이승만의 자유공화국 건국은 건국에 반대한 김구의 ‘가상(假想)민족’ 국가로 둔갑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승만을 괴뢰로 단죄하고 묘를 파내라는 역사 날조가 공중파를 타고 있으며, 대전의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이란 단체가 민간 사립대 교정의 동상을 치우라고 행패를 부리고 있다”면서 “4.19 의거 59주기를 맞아 우리는, 이러한 ‘대한민국 청산론자’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자 한다. 자유와 번영을 구가해 온 대한민국에 청산해야 할 역사란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과 타협을 강요하는 미군정이나 초대국회의 내각제세력과 맞서 싸울 때 한 치도 물러설 줄 모르던 분이었고, 나라를 걱정하며 불의에 맞서 싸우다 부상당한 젊은 학생들의 용기 앞에서는 그들을 위로하며 스스로 권좌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며 “신생독립국 역사에서 그런 ‘독재자’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끝으로 “그런 그를 미국의 괴뢰로, 양민 학살자로 묘사하며 국립묘지에서 파내고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나 집단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며 “선대가 세운 기념동상을 철지난 이념의 노예들이 철거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2019-04-1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학생들도 이승만 동상에 침 뱉어”… “빨갱이들은 북으로” 

※관련기사 

☞뉴스1: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여부 놓고 찬반 갈등 심화

☞디트NEWS24: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찬반 ‘맞불집회’

※뉴스영상 

☞YTN: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찬·반 집회 열려화

토, 2019/04/20-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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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학교 친일잔재 청산 전수조사 나선 경상남도교육청

-대부분 가이즈카 향나무…이토 히로부미가 대구에 처음 심어
-경남교육청에 심어진 향나무 뽑아내고 소나무로 교체
-교체 강제할 순 없지만 교체 적극 권장할 계획
-친일 음악가 조두남, 창원에만 7개 학교 교가 제작
-일장기 모양의 학교건물도 남아있어
-일본 식민주의 사관 넘어 향나무 뽑는 실천부터

■ 방송 : 경남CBS <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경남교육청 중등교육과 이일만 장학관

◇김효영> 여러분이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요. 교가는 누가 만들었는지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분류하는 음악가가 만든 교가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교육기관 곳곳에 친일 잔재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종훈 경남교육감의 지시로, 경남교육청에서는 전수조사가 실시가 되고 있습니다.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전수조사를 맡고 계신 경남교육청 중등교육과의 이일만 장학관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안녕하세요?

◇김효영> 특별히 전수조사까지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서 우리 교육청 차원에서 일제 잔재 청산과 우리 얼 살리기 교육사업을 전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해서 한 번 실시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이 돼서 2년간에 걸쳐서 실시를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조금 전에 제가 교가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교가 말고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오래된 역사를 가진 학교들에서는 가보면 교장실에 역대 교장들 사진이 걸려 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김효영> 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거기에 보면 일본인들의 사진도 그대로 걸려 있기도 하고, 사진이 없는 학교라도 명패 정도라도 이렇게 걸려 있는 그런 학교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가 1910년에 한일합방을 시키고 난 뒤 모든 학교를 군대화하는 형태로 이뤄지면서 교원들에게도 제복을 입혔고 학생들에게까지 교복을 입혀서 통치가 이뤄지다보니까 아마도 교장들의 사진에서도 제복을 입은 것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김효영> 경남교육청은 향나무를 뽑았던데, 친일 잔재란 이유로. 학교 교목도 친일잔재로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교목 같은 경우는 가이즈카 향나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본이 원산지로 돼 있고, 나사 모양으로 뒤틀려서 자란다고 해서 나사백이라고도 하고, 한자로 표기하면 패총으로 표기가 됩니다.

◇김효영> 패총.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조개무덤. 일제 강점기에 학교나 관공서에 많이 심어졌고, 100여 년 전인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순종 황제와 함께 대구 달성공원을 찾아 기념식수로 처음 심었다고 전해지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 지난 3월 1일에 우리 도교육청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가이즈카 향나무를 뽑아내고 우리 소나무로 바꿔 심었습니다.

◇김효영> 사실 그런 향나무가 관공서에 많지 않나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고 표현을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김효영> 거의 다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렇습니다.

◇김효영> 이번 전수조사에 가이즈카 향나무도 포함이 되고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학교에 특히 향나무를 교목으로 하고 있는 학교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교체를 하라마라 강제성을 둘 수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교체를 할 수 있도록 권장을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우리가 흔히 보는 향나무는 대부분 가이즈카 향나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대부분 나무들이 보면 둥근 모양으로 돼 있는, 우리가 흔히 향나무 하면 떠오르는 그 나무들 거의 대부분이 가이즈카 향나무로 알고 있습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나무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에 앞서 말씀 드렸던 교가 문제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교에서 작사가나 작곡가 중에 친일 인물로 분류할만한 사람들의 작품이 많이 있습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저희들은 곳곳에 산재한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친일 작곡가, 작사가의 개념이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규정짓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저희들이 친일인명사전이라든지 그런 자료들을 통해서 파악을 했을 때, 오래된 역사들을 갖고 있는 학교들에 대해서는 특정인에 의해서 작사, 작곡된 교가들이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김효영> 장학관님께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가 대신해서 좀 말씀을 드리자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친일 작곡가로 분류되는 사람이 조두남인데요.
이 조두남씨가 창원에 있는 학교 7개 학교의 교가를 작곡을 했습니다.
창원의 성호초등학교, 온천초등학교, 완월초등학교, 합포초등학교, 내서중학교, 경상고등학교, 무학여고. 이렇게 7개의 교가를 만들었고요.
그리고 창원대학교 교가도 조두남씨가 작곡을 했던 겁니다. 참고하시면 되겠고요.
창원 지역만 제가 예를 들었습니만, 창원만 그렇지는 않겠죠?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다른 지역에 대한 부분은 지금 현재 조사 중이기 때문에 5월 정도 되면 전수조사 결과가 집계가 될 것으로 저희들은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서 말씀하셨던 조두남 같은 경우는 그때 당시에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 그래서 여러 학교에서 조두남 작사, 작곡의 교가가 있지 않나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나무나 교가 말고, 또 어떤게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학교 담부터 시작해서 화단 모양 이런 것에서도 일제 잔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함안의 모 학교 같은 경우에는 운동장 바로 옆에 건물이 하나 있거든요. 그걸 위에서 쳐다보면 일장기 비슷하게 된 그런 오래된 건물이 하나 지금도 있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김효영> 이렇게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무관심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무관심’이라는 표현 자체가, 있어 왔던 것에 대한 익숙함. 그래서 문제의식을 가지기 보다는 있어왔으니까 그대로 가는 그런 형태가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합니다.

◇김효영> 그냥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것이 일제 잔재였는지에 대한 고민도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김효영> 다른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라 역사를 배우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니까 그래로 둬서는 안된다는 결정을 하신 거군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렇습니다. 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면서 더욱 더 우리 도교육청에서는 우리 얼에 대한, 그리고 나라사랑 교육을 심어주고자 하는 교육감님의 뜻에 따라서 저희들이 그 부분에 대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전수조사를 한 다음에는 외부 전문기관의 도움도 받으시는거죠?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우선 전수조사가 끝이 나고 나면, 20명 안팎의 TF팀을 꾸리려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TF팀을 꾸려서 전수 조사된 내용을 충분히 분석을 하고 이 결과를 가지고 민족문제연구소나 다른 대학 등 전문기관에 의뢰도 하고 도움을 받아서 운영을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친일잔재 청산작업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이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호숫가에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서 물결이 파장이 일어서 변화가 나타나듯이, 이 일을 계기로 해서 그 동안 무심코 넘겼던 일제의 잔재라든지 어떤 흔적들,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습관들까지도 바꿀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일제의 잔재를 깨끗하게 없애버린다는 것 보다는,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이러한 것을 어떻게 현 시점에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정표의 기회가 분명히 일제잔재 청산 정책의 기본 취지라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적어도 알고는 있자는 겁니다. 기억하자는 것이고. 끝으로 한 말씀 하시고 오늘 인터뷰는 마치겠습니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본 사업은 지난 100년간 우리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함께 살아온 일본 식민주의 사관의 결과로서 이 100주년을 넘어 온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 속에서 사명감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작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청도 교목이나 교가 하나 바꾸는 것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 이상인 민주, 평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고 세계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김효영> 조사결과는 다음달에 나온다고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5월 즈음 전수조사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효영> 결과가 나오면 한 번 더 모시겠습니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고맙습니다.

[email protected]

<2019-04-18> 노컷뉴스 

☞기사원문: “학교 향나무, 이토 히로부미가 들여온 친일잔재”

토, 2019/04/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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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변화와 리더십으로 거창의 미래를 바꾸겠습니다.
산업은 미래로 키우고, 농업은 소득으로, 교육은 희망으로, 복지는 삶의 품격으로 완성하겠습니다.
승강기산업 고도화 및 국방과학기술 육성으로 미래 먹거리와 고급 일자리를 확보하겠습니다.
지역 대학 및 특성화고 연계 산업 맞춤형 교육을 통해 청년이 돌아오는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스마트농업 확대, 신소득 작목 개발 및 가공 수출 플랫폼 구축으로 소득 중심 농업을 실현하겠습니다.
가조온천 활성화 및 실버웰니스·실버케어 산업 육성으로 관광·실버산업 기반을 구축하고 일자리를 확대하겠습니다.
의료 복합타운 완성, 맞춤형 돌봄 강화 및 청년·신혼부부 주거 지원으로 보건·복지 여건을 개선하겠습니다.
달빛내륙철도 유치, 고속도로 조기 완공 등 교통 인프라 확충으로 물류 허브 거창을 만들겠습니다.
수요 중심 실무자 주도 행정, 공정한 인사, 예산 투명성 강화 및 군민 참여 확대로 행정을 혁신하겠습니다.
'거창 파리장서 독립청원운동' 기념관 건립 및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 배상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겠습니다.
취수원 다변화 및 황강 취수 반대 입장을 견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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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6/06/1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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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경제 기반 정책
세대를 잇는 교육 및 복지 정책
어제의 파주와 내일의 미래를 잇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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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6/06/13-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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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 살핌 및 살림 정책 추진
창신 지역 특화 봉제산업 육성 및 제도적 지원
전통 시장(광장시장 등) 및 재래시장 육성 및 환경 개선
디자인 산업 지원 확대 및 패션/쥬얼리 인프라 강화
600년 역사 문화를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관광산업 조성 및 역사/문화관광벨트 구축
주민 삶 개선을 위한 새로운 정책 수립 및 사업 시행
교통과 상권 연계 정책으로 상권 교통 확보 및 강북~강남 광역 교통축 완성
교육 환경 개선을 통한 인재 유치 및 정주인구 증가
세대별 맞춤형 복지시설 확대, 어르신 쉼터 증설, 아동·청소년 돌봄 강화
친환경 사업 특화 지원 확대 및 골목길 노후시설 제거, 환경 개선
보행자 우선도로 및 스쿨존 안전 확대
안전하고 효율적인 교통 인프라 구축 및 교통영향평가 실시
스마트 신호등 시스템 및 AI 기반 CCTV 통합 안전망 구축
재난·화재 실시간 대응 시스템 강화 및 공사/하수/노후 위험시설 안전 점검
깨끗하고 아름다운 명품 문화종로 구현 및 골목 상권 활성화
종로 문화, 청년/창작/연극/공연 제도적 지원
교육특구 지정 추진 및 보육시설 확충
취약계층 아동 보육 정책 개발 및 AI 시대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
신혼부부 지원 확대
초고령화 시대 100세 복지 정책 개발 및 의료·건강 네트워크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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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6/06/13-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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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을 명품교육, 복지, 역사, 문화의 중심지로 육성
신내 4공공 택지 및 도로 위 아파트 조성사업 원천무효화
전체 노인 월 30만원 노령수당 지급 및 노인 교통 복지 확대
소상공인 최저임금 5년 유예 및 중소기업 주 52시간 근무제 5년 유예
병역의무제 폐지 및 모병제 전환, 원자력발전소 확대 건설
지역 균형 발전 및 교통 환경 개선을 통한 새로운 중랑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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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6/06/13-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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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국책사업 유치 및 16조원 이상 투자 유치
구미-군위 고속도로 유치 및 광역 교통망 구축
도심 병목 해소를 위한 입체교차로 및 도로 확충
구미 브랜드 축제(라면축제, 푸드페스티벌 등) 성공적 개최 및 확대
도심 힐링 공간(맨발길, 공원) 및 생활체육시설 확충
필수 의료시설 확보 및 완전 돌봄 생활권 구축 (365소아청소년진료센터, 신생아집중치료센터 등)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미래교육 추진 (교육발전특구, 명문고 육성)
대중교통 정책 재설계 및 교통약자 이동 지원 강화 (시내버스 증차, 70세 이상 버스무료화)
생활쓰레기 수거체계 개선 및 공공시설 개방 확대
골목경제 활성화 및 소상공인 지원 강화 (특례보증 확대, 상품권 발행)
청년친화도시 조성 및 청년 성공 지원 (청년거점공간, 월세지원, 인턴쉽)
농업 예산 확대 및 농식품 산업 혁신 (푸드테크 연구지원센터, 로컬푸드 직매장)
구도심 재개발·재건축 촉진 및 행복주차장 확대
낙동강 중심 낭만문화 관광벨트 조성 (수변레저파크, 에코밸리, 자전거길)
구미산단 고도화 및 신산업 유치 (반도체 팹 유치, 국방반도체 클러스터)
우리아이 안심케어 및 교육 환경 강화 (육아종합지원센터, 영어프로그램)
노동자 권리 존중 및 행복사회 책임 복지 실현
어르신 복지 및 노후생활 지원 강화 (일자리 확대, 돌봄서비스)
각 지역별 맞춤형 발전 공약 추진 (예: 도량 대성지 둘레길, 인동시장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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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6/06/13-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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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걷기 산책로 조성
중도 선사박물관 건립 추진
달빛 어린이병원 지정 확대 (국비, 지방비 5:5 매칭, 시장 지정)
통학로 보행환경 개선 및 안전 시설 확충
악취 모니터링 및 저감시설 확충
캠프페이지 녹지 공간 최대 확보 (맨발걷기 공원 산책로 등)
보행, 자전거 친화형 도로 확보 및 조성
무인 알맹 상점 설치 운영
도심 교통 불편 해소 (운교동R-남부R, 팔호광장-효자R)
스마트 정류장 설치 및 대중교통 증편
공가 부지 활용 도심 공원 조성 (일부 반려동물 공원 포함)
야외 근로자 쉼터 조성
중장년 재취업 교육 (AI, 방과후 강사, 돌봄 등)
원도심 문화 탐방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
가로수 문화자산화
예술인촌 활성화
교동 전입 학생 지원 확대
오르막길 간이 쉼터 조성
청소년 문화의집, 체육시설 확충
지역아동센터 등 돌봄 공동체 육성 지원 (돌봄인원 증원, 터전 안정성 확보)
한부모가족, 맞벌이가족, 다문화가족 어린이 지원 확대
청소년 해외연수 추진
시니어 일자리 확대 및 근무기간 연장
폐지수거 어르신 전동리어카 보급 및 적재된 폐지 행정에서 순회 수거
1인 가구 어르신, 장애자 살핌과 돌봄 확대 (AI 기기를 통한 살핌망)
경로당 급식 확대 및 지역별 '어르신 행복식당' 설치 (행정인프라/민간운영)
교통약자 어르신 1000원 택시
택배, 우편, 배달, 청소 등 야외 근로자 쉼터 조성
전입 청년, 학생 지원 확대
원도심 문화유산 활용한 청소년, 관광객 탐방 프로그램 (소양정, 봉의산성, 당간지주, 향교, 칠층석탑, 교동~이외수 가옥, 소양로~박희선 생가, 약사동~권진규 가옥 등)
소양정을 춘천의 랜드마크로 추진 (원위치로 복원)
도시환경 정비 문화예술인 참여 (가로수 문화자산화: 시민분양 및 문화의길 조성)
춘천시립 미술관 조기 완공
근화동 의암호변 문화체육시설 추진 (생활체육경기장-축구, 야구, 배드민턴, 탁구)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도입
자원 재활용 포스트 설치, 어르신 일자리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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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6/06/13-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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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전병택 구미지회장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許亨植, 1909~1942)이 경호원 왕조경과 진운상을 데리고 소부대 현지지도를 다니던 중, 1942년 8월 3일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계곡에서 일제 관동군과 괴뢰국인 만주군에 의해 추격을 받아 교전중 33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1915년 음력 3월 장군이 6살 때 가문 전체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난 지 27년 만이다. 한편 허형식 장군보다 8살 어린,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출신 박정희(1917~1979)는 이 무렵 25살로 일본군이 세운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여 나중 일본군 장교가 된다. 박정희는 왜왕에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며 제국주의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지 77년 만에 추모식을 거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김도화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손성진 임영태.

3·1운동 100년을 맞아 식민과 분단, 독재와 이념의 장벽으로 가려진 대표적인 남한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경북 구미 출신. 13도 연합 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의 종질이자 이육사의 외당숙) 전적지 등 북만주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여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기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관한 역사평화기행의 핵심인 허형식 장군의 77주년 초모식을 중국 현지에서 고향 선산 쌀과 고국의 소주로 젯밥과 제주를 차리고 합동으로 절을 올리며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허형식 장군 유적지 답사팀은 하얼빈 공항에 도착한 후 항러빈 춘천 빈관에서 1박 후 하얼빈 시내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일제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실험을 자행한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비밀부대인 731부대 유적지를 답사한 후 동북항일연군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해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허형식 장군은 1909년 11월 18일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시산 허필(許苾 1865~1932.건국포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도 연합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 대한민국장)의 5촌조카이기도 하다. 허 장군은 만주에서 이희산(李熙山) 혹은 이삼룡(李三龍)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항일영웅열사 명단에는 허형식 장군과 동북항일연군 연합지휘부 참모장을 지낸 이홍광 장군, 동북항일연군 7군 군장 이학복장군 그리고 중국에서 수차례 영화로도 나온 바 있는 무단장에서 1천여 명의 일본군·만주군과 싸우다 총알이 떨어지자 일본군에 잡히느니 강으로 투신하여 죽음을 택한 8녀 투강의 주인공 동북항일연군 2로군 제5군 부녀단 이봉선, 안순복이 조선인으로서 항일영웅열사에 포함되었다.

제례를 진행한 김병길 어르신은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허형식 장군이 왜 부모
형제와 함께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까지 와서 이렇게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야 되었는지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는 우리가 상갓집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내 자식, 내 딸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병길 회원은 “왜 그런가? 주권이 없어 그랬다. 민족의 아픔, 민족의 설움을 허형식 장군이 먼저 깨닫고 느끼고 여기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서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왜놈들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냐?”며 “우리 적은 왜놈이다. 바로 일본제국주의자 후예들이 지금도 얼쩡거리고 있다. 참으로 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김병길 회원은 “우리 모두 이 역사적 사실을 명심하고 민족 자긍심을 강화해서 진짜 동방에서 떳떳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허형식 장군을 늦게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 하며 남은여생 동안 허형식 장군의 뜻을 받들어 살겠다”고 강조했다.

 


1939년 허형식 장군은 31세 젊은 나이로 조상지 군장의 뒤를 이어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에 올랐다. 중국인 조상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중국에서는 주하현을 상지시로 개칭하고 상지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로타리에 조상지 장군의 대형 기마동상을 세워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고 있다. 반면에 허형식 장군의 고향 경북 구미시는 물론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념비조차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역사를 망각한 나라, 영웅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한 일본제품 불매운동, 항일결의문 채택 등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구호가 남발하지만 이러한 과거 항일영웅에 대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널리 선양하는 일이야말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진정한 항일운동이며 일본을 뛰어넘고 이기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 장군이 유력하다고 학계에서 주장한다.
“허형식 장군이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이육사의 외삼촌 허발선생의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창 허발은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의 큰오빠이다.
허발, 허길, 일헌 허규는 남매 사이며 허길에게 허형식은 사촌동생으로 이육사의 외당숙이 되는 셈이다. 1930년대 말 이육사는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약한 외삼촌 허규와 함께 허형식 장군을 만주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금, 2019/09/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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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할아버지, 증손녀 올가예요. 겨우 한 줄 썼는데, 눈물부터 나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수용소. 평생을 대한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애쓰신 할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추운 곳에 가둬놓고 언 땅을 파게 했을까요. 2012년 KBS 역사스페셜 다큐를 만들 때, 제가 그곳에 갔어요. 문서에는 거기 병원 근처에 할아버지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아니었어요.
솔제니친도 갇혀 있었다는 그 수용소에는 무덤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대요. 강제노역과 영양실조로 쓰러진 수용자들이 눈을 감으면, 포크레인 같은 기계로 땅을 파서 시신을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대요.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깊이 묻지도 않아서 조금만 땅을 헤쳐도 유골이 산더미처럼 드러났대요. 그래서 옛날부터 그 동네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뼈를 가지고 놀았다고 그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이리나라는 할머니가 증언해 주셨어요.
할아버지의 조국에 갔어요. 국립현충원이란 곳에도 갔어요.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모신 국가묘지래요. 거기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어요. 제가 직원분들에게 애원했어요. 제발 우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서 이곳에 모셔달라고요. 그냥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빈말이라도 노력해보겠다고 답해줬으면 덜 야속했을 텐데….
그 수용소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갇혔대요. 자기 조상이 거기 묻혀있다고, 후손들이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대요. 일본 정부는 알았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유해를 가려내 자기 나라로 가져갔대요. 서울 가기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벌써 몇 년 전에 폴란드도 그렇게 했고, 그리스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그렇게 못해요? 저더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오던가, 할아버지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얘기해 달래요. 이건 나라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할아버지가 되찾으려 한 나라잖아요.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의 외손녀예요. 할머니는 3·1운동 몇 년 전 서울 사직동 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나셨어요. 돌아가시던 순간까지도 울면서 집에 너무 가고 싶어 하셨어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셨어요. 서울 집이며 동네 풍경을 그려주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릴 적에 엄마가 해주신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아빠 손을 잡고 구경 다닌 곳을 가보고 싶다고, 흐느끼셨어요.
스탈린 때는 이런 말이 있었대요.“벽에도 귀가 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어른들이 잘 때 헝겊으로 입을 막고 잤대요. 잠꼬대라도 하다가 스탈린을 원망하는 얘기가 새나가면 아이들까지 죽을 수가 있으니까요. 제가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직접 들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왜 이곳으로 끌려오셨는지,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말도 못 꺼내고 살았어요. 솔직히 지금도 좀 무서워요.
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엄마 아빠는 종일 일하러 나가시고. 우리 고려인들 많이 힘들었어요. 뼈에 사무치셨던지, 아니면 어린것이 못 알아들을 거라고 여기셨던지, 저를 다독이면서 혼잣말을 하셨어요. 그 얘기들이 너무 낯설고 신기했어요. 할머니는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오셨나?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닌가? “스카스카”를 해주시는 줄 알았어요.
“스카스카”는 동화라는 뜻의 소련말이에요. 저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게 저는 김경천 할아버지를 알
게 됐어요. 할머니 덕분에요.
할아버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어요. 그 모진 세월, “백마를 타고 일제 침략자들을 무찌르던 김경천 장군”의 전설이 동포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을까요. 2005년 할아버지의 일기가 발견됐어요.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피눈물로 쓰신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었어요. 거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동서양에 전쟁이 전개되면 우리는 중국의 동북 3성과 시베리아에 자연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백만의 우리 민족으로 세계에 대해서는 정의와 인도로, 일본에 대해서는 능히 혈전을 벌여 열강의 호의를 얻을 것이며, 독립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망명하기 직전인 1919년 3월 1일에 쓴 일기였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멀리 내다보셨다니! 할아버지 머릿속에는 진정한 자주독립의 경로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의 설움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이 독립전쟁으로 뭉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고,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도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로 독립군을 키우러 가셨어요. 무모한 짓이라고 손을 젓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호통을 치셨어요.

 

저 죄수복을 입은 청년이 무슨 죄가 있는가? 일본아, 네 죄에는 무슨 옷을 입겠느냐. 저 청년들은 내가 사랑하는 민족 중에 최고로 용감한 사람이다. 모두 20세가 되나 못 되나 하다. 저들은 동포라는 것을 알았다. 민족이란 것을 안 사람이다. 인종이 생긴 그 동시에 만물보다 더 먼저이며 최고로 아름다운 자유라 하는 것이 있음을 아는 자들이다.
호의호식하는 자칭 유지, 신사들아, 모두 어느 구석에 가서 숨었느냐. 외국유학도 쓸데없고 나이도 소용없다.…… 우리나라 신사나 청년이 두 눈이 멀거니 앉아 밥이나 먹고 있음은 죄인이다. 조국의 부름을 모르는가! 아아,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적이지만, 그대들은 모르는 체하는 적이다.

 

할아버지의 조국에 공부하러 왔어요. 경복궁에 처음 가봤어요. 어떤 분이 근처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거기가 이회영 선생님 기념관이었어요. 할아버지가 교관을 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분이요.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기념관 분들이 저에게 누구냐고 말을 걸었어요. 김경천? 후손들이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 찾는 게 아닌 줄로만 알고 나왔어요. 그때까지 저는 이회영 선생님을 몰랐으니까요.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1년쯤 지나, 이회영 선생님 손자인 이종찬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게 소망이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할아버지 유해를 찾고 싶다고, 할아버지 집터에 표지석을 놓고 싶다고, 백마 탄 할아버지 동상을 조국에 세워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할머니에게 증조할머니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유정화(柳貞和) 증조할머니.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대요. 할아버지 댁에 재산이 많았는데, 그걸로 독립운동하는 분들 돕고. 옥살이까지 하셨대요. 할아버지가 망명한 뒤, 일본육사 후배들이 만든 <전의(全誼)>라는 회보에 할머니 이야기가 실려 있대요. 어느 분이 알려주셨어요.

 

김 부인은 수년 이래 부채와 생활난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작년 겨울 소유하고 있던 가옥을 매각해 부채를 정리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김 부인은 지 부인의 비참한 상황을 동정해 가옥 매각 때 일금 100원을 지 부인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그 의기 장하다고 할 만하다. <전의(全誼)> 1923년 6월 24일자

 

이 글에서 “김 부인”이 증조할머니이고, “지 부인”은 할아버지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이자 신흥무관학교에서 함께 교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부인이에요. 신흥무관학교에서는, 할아버지와 지청천 장군 그리고 동천(東天)이란 별호를 쓴 신팔균(申八均) 선생님 세 분을 가리켜 “ 삼천(三天)”이라고 불렀대요. 신 선생님은 고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申櫶) 어른의 손자로,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오셨대요. 할아버지들이 독립군 동지니까, 할머니들도 독립운동 동지였던 거예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늘 말씀하셨어요. 아주 먼 곳에 우리 고향이 있단다. 그곳은 참 좋은 곳이란다. 우리는 지금 갈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참아야 한단다. 우리가 여기서 고생을 해야 고향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잘살 수 있단다. 그게 무슨 뜻인지, 어릴 적에는 몰랐어요. 그러나 지금은 알아요. 할머니의 혼잣말은 할아버지가 맏딸에게 들려주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할아버지께 고백할 게 있어요. 어쩌면 할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것만 같아 두려워요. 저는 할아버지 조국에 와서 깜짝 놀랐어요. 어떤 나라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조국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동료들을 한동안 잊고 살았대요. 할아버지는 그럴 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일기에 이렇게 쓰셨나요? “아, 춥고 외로운 이 고독한 군대의 장졸들을 누가 위로할까. 이 장졸들의 심정을 훗날 누가 동포들에게 알려줄까.”
자기 뿌리가 뭔지 잊으면 어떡해요. 여기는 자본주의라서 그런지, 출세한 사람들이 다 돈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익만 바라보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럼 나라 망하잖아요. 할아버지는 날마다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가족도 잊어버리고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그 정신을 정말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그 일을 도울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께서 노력하고 계세요. 대통령 직속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100인 위원회도 생겼어요. 저도 100명 중 1명으로 참여하게 됐고요. 정말 고맙고, 기뻤어요. 그런데, 저는 회의에 가면 울음부터 나와요. 어떤 분들은 저더러 왜 그리 서럽게 우느냐고 물어요.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우리 고려인들이 100년 가까이 어떻게 살았는데…. 귀 막고 입 막고….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끌려가셨어요. 몇 년 만에 풀려나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가족 곁으로 돌아오셨지만, 두 달 만에 또 잡혀가셨어요. 모스크바감옥에 갇혔다가 시베리아수용소에서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돌아가셨어요. 저는 할아버지의 조국에 와서 결혼을 했어요. 얼마 전에 딸도 낳았어요.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의 첫 번째 후손입니다. 할아버지께 알려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의 핏줄이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왔다고요.
증손녀 김올가 올림(<100년 편지> 334호, 2019.4.9.)

금, 2019/09/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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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0]

용산중학교, 일본 군인과 철도종사원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 포진한 일본인 학교들의 연혁

 

이순우 책임연구원

 

총독부 기관지인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는 이른바 ‘용중(龍中, 용산중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인 무로 켄조(室兼三)라는 육군대위가 중국 난주(蘭州) 공습에 참가하였다가 고사포에 맞아 자폭(自爆)하면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그의 모교 담임선생이었던 마츠나가 교유(松永 敎諭)의 말을 빌려 그가 용산중학교를 다닐 때의 증언담이 이렇게 실려 있다.

 

무로 군은 소화 5년(1930년) 치바중학(千葉中學)에서 전학을 왔는데 소화 7년(1932년) 졸업 당시는 전체 생도 183명 중 141등으로 전혀 볼품이 없는 성적이었으나 졸업 후에 육사(陸士, 육군사관학교)의 난관돌파를 목표로 삼아 맹렬히 분발하여 마침내 희망하던 육사를 패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바리즘(頑張りズム)은 소위(所謂) 용중혼(龍中魂)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왼쪽) <경성일보> 1941년 9월 3일자에 수록된 ‘용산중학교’ 출신 육군대위 무로 켄조의 전사관련 보도내용이다. 그가 이 학교를 졸업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조선 주둔 제20사단장인 탓이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30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신임 제20사단장 무로 켄지 중장’의 모습이다.
그의 아들이 용산중학교로 전학 와서 졸업한 시기는 그의 재임기간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그가 애당초 일본에서 경성으로 전학을 온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이 용산 주둔 일본군 제20사단장인 육군중장 무로 켄지(室兼次, 1876~1966. 재임 1930.8.1~1932.8.8)였던 것이다. 일본 치바현(千葉縣)에 자리한 육군야전포병학교(陸軍野戰砲兵學校)의 교장이던 무로 중장이 조선군사령부 제20사단장으로 부임한 때가 1930년 8월인데,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에 따라 치바중학교에서 용산중학교로 전학했던 시기가 그대로 일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나타난 사례는 바로 용산중학교의 존재 이유가 일본군 병영지의 배후지역에서 주로 군인들의 자제들을 위한 중등교육기관이라는 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구나 이곳은 분명 일본인 학교인데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들이 이 학교를 다닌 경우가 더러더러 눈에 띄기도 한다.

 

1921년 8월 3일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충청남도 공주다. 일본육사 제26기 졸업생으로서 일본군 대좌를 지낸 유승렬(劉升烈)의 차남이다.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보령군수를 지낸 큰 아버지 유익렬(劉益烈)에게 양자로 출계(出系)했다. 다섯 살 되던 해 부친이 대위로 승진해 함경북도 나남으로 부임지를 옮기면서 경원군으로 이사했다.
경원의 소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나남소학교로 전학했다. 1년만인 1932년 부친이 용산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 대위로 옮기자 경성 삼판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 1932년 경성의 용산중학교를 입학했으나 3학년 때 부친이 평양 77연대로 전속(轉屬)되어 평안북도 일원의 신의주중학교, 신의주동중학교, 신의주상업학교, 의주농업학교, 정주 오산중학교의 배속장교를 맡게 되자 신의주중학교로 전학했다.
1937년 신의주중학교 4학년 2학기에 평양 77연대에서 일본육사 예과에 응시해 합격한 후 1939년 12월 일본육군예과사관학교를 입학했다. (하략)

 

용산병영지의 확장과 맞물려 1918년에 설립되고 다시 1919년 6월에 준공된 용산중학교의 모습이다. 이 학교는 원래 관립학교였으나 1925년 4월부터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경성과 인천(京城と仁川)>, 1929)

 

<매일신보> 1938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일본군 대대장 김석원(金錫源) 보병소좌의 가정탐방기사이다. 여기에는 그의 아들 김영철(金泳哲)이 용산중학교에 재학중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내용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수록된 일본군 대위 출신 ‘유재흥(劉載興, 1921~2011)’ 항목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유재흥 또한 1932년 용산에 자리한 삼판소학교(三坂小學校, 지금의 삼광초등학교)를 거쳐 용산중학교에 재학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일본군 보병대위였던 아버지 유승렬(1891~1958)의 근무지를 따라 다닌 결과로 볼 수 있다.
이것 말고도 제20사단 제78연대 대대장으로 중일전쟁에 가담했던 보병소좌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의 경우도 동일한 사례에 속한다.
<매일신보> 1938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출정장사가족(出征將士家族) 신년(新年)맞이, 가장(家長)의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祈願)으로 영신(迎新), 김석원 부대장 가정(金錫源 部隊長 家庭)」 제하의 기사를 보면, 그의 장남 김영철(金泳哲, 1921년 2월생)이 용산중학교 4학년생이면서 경성제대 예과 입학준비에 분주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용산중학교의 설립 연혁을 잠시 살펴보면, 이 학교는 1918년 4월 1일 조선총독부중학교 관제에 따라 대전중학교와 동시에 신설된 내력을 지녔다. 원래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중학교의 연원은 1909년 5월 22일에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소유였던 독립관 국민연설대를 빌려 개교한 ‘경성거류민단립(京城居留民團立) 경성중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5월 22일에 발행된 ‘경성거류민단립 경성중학교 개교기념엽서(2매)’이다. 독립문 오른쪽 언덕위에 보이는 돔 모양의 건물이 독립관에 딸린 국민연설대(國民演說臺, 일진회 소유)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 학교는 이내 1910년 4월 1일 관립학교(官立學校)로 전환되어 ‘통감부중학교’가 되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조선총독부중학교’로 개칭되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총독부중학교는 전국에 걸쳐 유일무이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이름을 갖지 않았다가, 1913년 4월에 부산에도 총독부중학교가 추가 설치되면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비로소 ‘경성중학교’로 명명되었다.
총독부중학교(관립)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던 지역을 중심으로 경성, 부산, 평양, 용산, 대전, 대구, 원산, 광주, 나남의 순서로 추가되었고, 1925년 4월 이후 제학교관제(諸學校官制)의 개정을 통해 일괄 공립중학교(公立中學校)로 전환되었다.

총독부중학교 설립 연혁

<조선총독부관보> 1925년 2월 13일자에 실린 총독부중학교의 생도모집공고문이다. 이 당시에는 보통학교 졸업자(조선인)라도 중학교(일본인 학교)에 입학지원은 가능하였으나, 구술시험 항목을 보면 “국어(國語, 일본어)에 정통하지 못한 자는 불합격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용산중학교의 등장에 따라 서울지역에서 일본인 남자학교는 경성중학교와 더불어 단 2개 학교만 존재했으며, 이러한 상태는 1936년 2월 29일에 성동공립중학교(城東公立中學校, 행당리 70번지)가 신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용산중학교는 개교 당시 경성중학교 재학생의 일부를 인계받는 형태를 취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경성부 편찬, <경성부사(京城府史)> 제3권(1941), 609쪽에는 용산중학교 설립 초기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매일신보> 1922년 5월 16일자에 공개된 ‘용산중학교’의 입학시험문제이다. 주로 일본어 해독능력을 측정하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용산중학교는 대정 7년(1918년) 3월 칙령 제50호 조선총독부중학교 관제 개정에 의해 설치된 관립중학교이며, 동교(同校)는 동년 4월 16일 부내(府內) 정동(貞洞) 소재 조선총독부의 한 청사(廳舍, 정동에 있는 3법원 자리) 내에서 가개교(假開校)를 행하고, 다시 동월(同月) 영락정(永樂町, 지금의 저동)에서 가기숙사(假寄宿舍)를 개시했다.
생도(生徒)는 이에 앞서 경성중학교 재학 제2학년 생도 중에서 50명을 인계받고, 제1학년 150명은 경성중학교장에 위촉(委囑)하여 2월중에 모집을 완료했던 것이다. 초대 교장으로는 후쿠시마 마타야(福島亦八)가 취임했다. 여기에다 동교는 익(翌) 8년(1919년) 6월 16일 부내 한강통(漢江通)에 신축중인 제1기 공사가 준공되면서 그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용산중학교의 설립시기가 일본군 용산병영지의 추가 확장 과정과 고스란히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일제는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師團)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고, 새로운 편제에 맞춰 이들을 위한 병영지 건설공사를 광범위하게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1916년 4월에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위 : 용산중학교에 이어 1922년에 군영지 배후지역의 일본인 중등교육기관으로 신설된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의 전경이다. 앞쪽으로 하천의 물길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문교의 조선(文敎の朝鮮)> 1938년 4월호)

아래 : 1919년 4월에 창립될 당시의 삼판소학교(현재 삼광초등학교 자리) 전경이다. 아래쪽에 보이는 밭들은 몇 년 후에 학교 운동장으로 변하게 된다. (경성부,<경성부사> 제3권, 1941)

 

이러한 변화에 맞물려 원래 대전(大田)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79연대가 1917년 11월말에 용산으로 재배치되었고, 이들이 머물 보병영(步兵營; 1917년 6월 기공, 1920년 3월 준공)’이 기존의 보병 제78연대 병영터 서쪽 일대에 남아 있던 광활한 대지를 정하여 새로 건설되었다. 또한 제28기병연대와 제
20공병대대(서빙고동), 그리고 제26야포병연대(종전 용산연병장 자리)의 본부와 병영이 완공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 결과로 용산 지역일대는 시가지 팽창과 더불어 인구유입이 급속히 늘어났고, 당연히 이들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 설립의 필요성도 증대되었던 것이다. 용산중학교에 이어 이곳과 인접한 지점에 통학거리의 편의를 고려하여 경성삼판공립심상소학교(京城三坂公立尋常小學校, 1919년 4월 설립)와 경성제2공립고등여학교(京城第二公立高等女學校, 1922년 5월 설립)가 비슷한 시기에 잇따라 들어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이 가운데 삼판소학교의 설립과정에 대해서는<경성부사> 제3권(1941), 603~604쪽 부분에 잘 요약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급격한 인구증가와 과밀학급해소가 주요한 배경이었음이 적시되어 있다.

 

경성학교조합(京城學校組合)이 경영하는 8개 공립소학교의 아동 총수는 대정 7년(1918년) 7월말 현재 8,140명으로 이를 146학급(學級)으로 편제(編制)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 일출(日出, 히노데), 남대문(南大門), 앵정(櫻井, 사쿠라이), 종로(鍾路) 및 용산(龍山) 등 5 소학교는 모두 18학급 이상으로 소학교령(小學校令)에 의한 제한을 초과하는 것이 총계 9학급에 달하고, 기타 3 소학교에서도 아동수용의 여지가 전혀 없어서 대정 8년도(1919년도)에 있어서 증가하는 취학아동 약 500인에 대해서는 새로이 1개교를 설립하지 않는 한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경성학교조합은 조합회의 결의를 거쳐 부내 삼판통(三坂通) 186, 187, 238, 239번지에 하나의 소학교를 신축했던 것이었다. 교사(校舍)의 대부분은 대정 7년도(1918년도)에 건축하고, 일부분은 필요에 따라 점차 건축하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대정 7년(1918년) 9월 7일부로 설립인가신청(設立認可申請)을 하였고, 동년 10월 2일부로 인가를 받았다.(중략)
또한 동교 구역은 고시정(古市町, 동자동), 길야정(吉野町, 도동) 1정목과 2정목, 삼판통(三坂通, 후암동), 서계동(西界洞), 청엽정(靑葉町, 청파동) 1, 2, 3정목, 강기정(岡崎町, 갈월동),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 2, 3, 4정목이며, 동 구역 내에 거주하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호수(戶數) 및 인구는 대정 6년(1917년) 12월말 현재로 호수 1,126호, 인구 3,963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거주한 경험을 지닌 일본인들로 구성된 경성용산공립소학교동창회(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가 펴낸 것으로 <용산소학교사·용회사(龍山小學校史·龍會史)>(1999)라는 책이 있다. 우선 이 책의 114쪽을 보면 “본교에 다니는 아동(兒童)은 철도(鐵道)와 군인(軍人)의 자제(子弟)가 많았다”는 설명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같은 책, 127쪽에도 이 학교의 가정환경과 관련하여 “군인관계(軍人關係), 철도관계(鐵道關係), 일반(一般, 주로 상공인) 세 가지로 대별(大別)된다”는 표현이 있는데, 용산 지역에 포진한 여러 일본인 학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학생구성상의 특징이 잘 묘사된 구절이 아닌가 한다.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병영지와 그 배후공간에 흩어진 흔적들은 상당수 사라지거나 변형되었지만, 유독 일본인들의 자제들이 다닌 학교공간만큼은 100년의 세월을 넘기도록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거나 비교적 고스란히 그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교육은 100년 대계”라는 말이 그리 틀리지 않는 얘기가 되고 말았으니 이 대목에서 그저 쓴웃음만 짓게 된다.

금, 2019/09/2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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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뭉치면 산다

강인수

편집자주 – 지난 7월 하순에 일제강점기 형평사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강상호 지사의 아드님인 강인수 선생(대구 거주)이 북미교섭과 일본의 경제보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못마땅해하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행태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우국시를 보내왔다.


 

대통령이
6. 25 민족상잔을 겪은 우리 민족이
또 다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유럽으로 아세아로 아메리카로
온 세계로 동분서주
평화를 애걸복걸 절규하고 다니는데
왜 대통령을
좌파독재자라고 사정없이 몰아세울까
우리 동포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오순도순 잘 살자 하는 것이
어찌 좌파독재가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일제강점에서 해방한지
벌써 일 갑자년(甲子年)이 쑥 넘어섰는데도
일본은
아직도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다시 군국 제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
우리나라가 망하라고
경제보복으로 재침을 시작하였으니
아!
힘을 합하여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국민이 국론통일로 단결하여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우리 대통령이 아무 일도 못하게
무능한 대통령이니…….
온갖 막말을 주저 없이 내뱉으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반대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좌파독재자라면
대통령이 우리의 국적(國敵)이란 말인가
분하게도
일본 정치인이 무례(無禮)하게
감히 우리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내정간섭을 하고
일부 우리 언론인마저 대(對)일본 기사에서
한국인이 무슨 낯짝으로
일본을 대할 것인가라며 맞장구를 치고
어느 야 정당(政黨)도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사법부의 판결이 잘못된 것처럼
아베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무조건 항복하고 용서를 빌라 하니
아! 이 일을

일제강점은 한국을 개화한 통치가 되고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부로 전락되며
강제징용은 한국 실업자를 구제한
대일본제국의 선행(善行)이 되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자존심은 사라지고
친일정서(親日情緖)에 어울리게
손발이 착착 잘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권력다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통령을 정적(政敵)으로 망하기만을 원한
다면

동학란 이후 대한제국이 망한 것처럼
또 망할 것이다.
좌파독재니 빨갱이니 하는 이 지긋지긋한
욕설(辱說)은 듣기만 하여도
예나 지금이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두려움이다
우리의 참 적은 외부의 적이 아니고
내부의 우리 동포간의 분열이기 때문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하였다.

금, 2019/09/2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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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마당]

편집자주 ― 신호근 부산지부 회원이 8월초 편지와 함께 얼굴마사지기 100개를 연구소로 보내주었다. 사연인즉 <민족사랑> 7월호에 실린 결산서에 400만원 적자가 난 것을 보고 회비를 증액했다고 한다. 신 회원의 연구소에 대한 관심과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부산회원 신호근입니다. 저는 평생 과학기술자로 살고 있습니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몇일
전 소식지에 있는 결산서를 보고 운영 적자가 발생된 것을 알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십수년 전, 고향 형님, 선배들과 같이하는 자리에서 당시 친일재산환수 문제로 설왕설래하던 중 제가 민문연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 “야가!! 빨개이 아이가 니는, 니 혼자 저기 가서 먹어라”고 하여 충격받고, 이후 어디에서도 민문연 회원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참고로, 저는 부산에서 선조부터 20대 이상을 거주하고 있습니다.)
외삼촌이 해방 직후 철도청 근무하였는데 학교 동문들 모임에 찬조하였다는 이유로, 보도 연맹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오래전부터 알게 되었고 다른 외삼촌들은 적색분자 연좌죄로 공무원 취직도 안 되고, 군 생활에서도 보직 차별을 겪었다고 들어서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향 형님들 만나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정재계 활동하시다보니 이런 얘기는 피하는 입장인데, 최근 변화가 있더군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듯이 용기를 내어서 연락드리고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민문연 창립과 함께 초기 활동하신 분들의 초심과 같이 운영하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생각은 있으나, 저와 같이 나서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지, 연구소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으며 운영에 어려움이 봉착되면 후원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라며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민문연 발전을 기원하며
2019.8.1. 부산에서 신호근 올림

금, 2019/09/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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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가을역사강좌 ‘사료를 읽다, 근대 역사와 만나다’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에서 진행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세대근대한국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가을역사강좌가 9월 5일부터 시작하여 10월 22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일 시         강 사   주 제
9.5 .  (목) 서민교 진중일지에 기록된 의병학살
9.10  (화) 권보드래 매일신보로 본 3•1의 밤
9.17.  (화) 예지숙 회고록으로 본 친일여성들의 기억과 망각
9.19.  (목) 이태훈 시사평론을 통해 본 친일의 논리
9.24.  (화) 이임하 전쟁미망인 구술로 본 한국전쟁
9.26.  (목) 이형식 일기와 서한으로 읽는 식민지 조선의 침략자들
10.1.  (화) 이순우 항공사진으로 본 식민지 경성의 공간
10.8.  (화) 최우석 한일관계사료집으로 읽는 독립운동사
10.10.(목) 김민철 일기로 본 일제말기 전시수탈과 강제동원
10.15.(화) 송병권 GHQ문서에 담긴 해방 전후 한반도와 패전 일본
10.17.(목) 전명혁 일제강점기 형사사건과 형사기록물(치안유지법사건)
10.22.(화) 김승은 한일시민의 투쟁으로 공개된 한일회담 외교문서

 

사료를읽다,근대역사와만나다’를 주제로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화, 목요일 7~9시에 진행하는 강좌임에도, 매회 30여 명이 넘는 인원이 꾸준하게 참석하여 역사학습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 근현대사의 전개와 그 속에서 부단하게 움직인 한국인의 삶을 포착하고자 하는 강좌여서 내용이 쉽진 않다. 일기·서한집·사진 등 개인의 기록, 진중일지와 명부·신문(訊問)자료·외교문서 등 전시기 기록과 통치사료, 선언문·사료집 등 독립운동 관련 기록, 그 외에 신문·잡지 등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료를 관련 전문연구자들의 해석을 통해 생생한 역사상을 수강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번 가을역사강좌를 통해 회원을 비롯한 일반시민들이 공식 역사 서술로부터 소외되었던 구술, 일기 등 생생한 원자료를 접함으로써 근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식민지 근대’의 모습을 추체험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근현대 한국의 역사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19/10/29-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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