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감정원이 10일 발표한 주간 아파트 가격동향에 따르면, 지난 7일 기준 직전 일주일간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은 0.01% 상승했는데 이는 전주(0.1%) 대비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건 집값 상승의 진앙지인 서울의 집값이 75주만에 하락했다는 사실이다.(서울 아파트값 75주만에 하락)
8.2대책 효과…서울 집값 75주만에 하락
8.2부동산 대책의 효과를 속단하긴 이르지만 매매 및 분양권 거래가 급감하고, 가격이 안정되는 걸로 봐선 투기 수요 억제라는 정책목표는 주효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8.2부동산 대책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내는 것 같다. 대책 이후 서울 집값이 75주 만에 하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환수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정의로운 과세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과제가 돼야 한다.
8.2부동산 대책은 특정 지역을 청약조정대상지역, 투기과열지구, 투기지역으로 나누어 청약, 세제(양도세 중과), 재건축 및 재개발, 대출 등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정책수단들을 일거에 투사한 대책으로 정책조합과 시점 모든 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 하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시장에 붙은 급한 불은 일단 끈 것 같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호흡을 고르고 부동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여전히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에 대해 어떤 철학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을 물가상승률 수준으로 관리하고 주거복지를 확대하면 족한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설사 부동산 시장과 건설 관련 연관 산업이 위축되는 한이 있더라도 부동산 시장 가격을 보유세 등을 통해 동결시키고(부동산 가격이 특정 시점에 동결된다면 물가와 임금 등의 상승을 감안하면 부동산 가격은 사실상 하락하는 셈이다) 불로소득을 환수해 기본소득 등의 재원으로 삼는 수준의 담대하고 혁명적인, 부동산 공화국과 작별하는 기획을 구상하고 있는가?
부동산 불로소득 GDP의 24.3%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시장안정에 안도하지 말고 부동산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시민들의 집합적 요구가 ‘나라 다운 나라’. ‘적폐 청산’,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촛불시민들은 진정 정의롭고,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을 갈망하고 있다. 촛불시민들이 문재인 정부에게 요구하는 건 시시한 개량이나 째째한 타협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적폐 중의 적폐, 특권 중의 특권, 거악 중의 거악은 부동산 불로소득이다.
몇몇 통계만 봐도 그런 사실은 증명된다. 2015년 말 기준 한국의 국민순자산은 1경 2,359조원인데, 이중 부동산 자산이 무려 9,136조원이라는 사실, 2007년부터 2015년 사이에 연평균 317조원에 이르는 부동산 불로소득(매매 및 임대소득)이 발생했는데 이는 GDP의 24.3%(피용자 보수는 GDP의 43.6%)에 해당한다는 사실, 가격 기준으로 개인이 지닌 대한민국 사유지 중 65%가 10%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 등등의 통계가 대한민국이 불로소득 천국이며 부동산 공화국임을 증명한다.
단언컨대 부동산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를 통한 부동산 공화국의 해체 없이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한 대한민국은 불가능하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시민으로 상징되는 주권자들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주권자들의 뜻을 받들어 부동산 공화국 해체에 나선다면 대한민국은 평화적 촛불혁명으로 정치혁명을 이룬 국가가 된 데 이어, 사회경제적 혁명으로 세계에 우뚝 선 일등 국가가 될 것이다.
안토니우 구테헤스(Antonio Guterres) 전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가 10월 13일 차기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됐다. 구테헤스 전 대표는 반기문 총장이 물러나는 내년 1월부터 5년 임기를 시작한다.
지난 10월 13일, 차기 UN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안토니오 구테헤스. 그는 포르투칼 총리와 UN난민기구 대표를 맡았다. 사무총장 선출이 확정된 뒤 그의 첫 일성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난민 문제’에 뛰어든 행동파
구테헤스 내정자는 직업 외교관 출신의 반 사무총장과는 결을 달리하지만, 고인이 된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전 사무총장과 여러모로 닮았다.
‘백신의 황제’,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 전 총장은 빌 게이츠 등 유력 인사를 에이즈 퇴치 운동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경제 성장’, ‘안보’에만 쏠려있던 세계의 관심을 ‘빈곤’ 등의 문제로 옮겨놓는 데 기여했다. 질병 퇴치에 쓸 WHO 예산이 늘어난 건 당연하다.
‘난민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테헤스 내정자의 경우 헐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 등 유명 인사를 난민 구호 활동에 참여시키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이끌어 냈다. 난민 문제를 ‘우리 문제’로 인식을 바꿔 놓는 물꼬를 열었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 수장 자리에 오른 이 전 총장이 당초 가나 출신의 코피 아난 7대 유엔 사무총장 후임으로 유력했다는 점도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꼽힌다.
이 전 총장은 불행히도 차기 총장 선출을 앞두고 목전에 둔 2006년 5월 집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후 8대 유엔 수장 자리는 반기문 총장에게 돌아간다.
반면 구테헤스 내정자는 유엔 산하 기구 수장으로서 검증된 능력을 높이 평가 받으며 ‘유엔 최초’ 타이틀을 노렸던 ‘여성’ ‘동유럽’ 출신 후보들의 거센 도전을 따돌렸다.
2014년, 반기문 UN사무총장과 구테헤스의 모습. 반 총장은 구테헤스가 차기 사무총장으로 뽑힌 것에 대해 최고의 선택(superb choice)라고 말했다. (사진 출처: BBC)
구테헤스 내정자와 반 총장과의 인연도 새삼 화제다. 반 총장은 지난해 10월 구테헤스 당시 UNHCR 최고대표의 임기 연장을 거부했다. 하지만 회원국들의 광범위한 동의가 이뤄진 인사 문제를 사무총장이 거부한 전례가 없어 뒷말이 끊이지 않았었다.
물리학도에서 민주화 투신…중도 좌파 총리 지내
구테헤스 내정자는 1949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당시 포르투갈 최우수 학생상을 받았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아버지가 국영 전기회사 직원이었던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대학으로 진학하며 택한 전공은 이론 물리학과 존기공학이었다.
197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학교에 남아 조교로 물리학으로 가르치는 일에 만족했다. 물리학 박사가 돼 후학을 가르치고 싶다는 고교 시절 품었던 생의 첫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미 C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의 가장 환상적인 지적 열정이었다”고 말했다.
1974년 4월,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무혈 쿠데타로 이스타두노부 정권이 무너졌다. 이 혁명을 통해 포르투갈 인들은 처음으로 투표권, 전 국민 건강보험, 공공 교육, 노령 연금 및 노동권을 향유하게 됐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혁명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거리의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군인들이 그것을 총구에 꽂은데서 유래했다(왼쪽 사진). 2014년 카네이션혁명 4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리스본의 한 시민이 카네이션을 들고 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목격했던 격변기 포루트갈 사회의 모습은 구테헤스 내정자를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민주화 열기로 들끓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총리가 36년간의 재임 끝에 1968년 물러났지만 권위주의 통치체제를 청산하기까지 6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살라자르 전 총리 1970년 숨을 거뒀지만, 살라자르의 유산이자 파시즘에 기댄 ‘이스타두 노부’(신국가체제)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 탓이다.
민주화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고, 구테헤스 내정자의 관심도 정치 외교 문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대학을 벗어나 리스본 빈민가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한 그는 혁명에 눈을 뜬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우리나라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물리학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내가 속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얻는다는 건 엄청난 기회였다”고 말했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1972년 당시만 해도 합법화 되지 않았던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회당(Partido Socialista)에 입당한다.
1995년 9월 포르투갈 총선을 앞두고 사회당 지도자였던 구테헤스가 지방의 한 시장을 방문하자 지지자들이 그를 무등에 태워 환호하고 있다. (사진 출처: http://www.gettyimages.pt/)
1974년 무혈 혁명인 ‘카네이션 혁명’이 성공한 이후 1976년 실시된 첫 직선제 총선에서 구테헤스 당선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직업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1992년 사회당 대표가 된 그는 1995년 총선에 승리하며 총리직에 오른다. 10년간 정권을 이어간 정치인 구테헤스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 등과 함께 사회주의인터네셔널(SI)을 이끌며 좌파 지도자로 명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는 2005년 지방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사임한 뒤 UNHCR로 자리를 옮긴다.
포르투갈 총리 시절인 1999년, 구테헤스는 전세계 130여 개 중도좌파정당 모임인 사회주의자 인터네셔날(the socialist international)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사진은 사회주의자 인터네셔날 회의에서 당시 블레어 영국 총리와 농담을 나누는 장면 (사진: BBC)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 한 ‘난민의 아버지’
구테헤스 내정자는 2005년 UNHCR 최고대표가 된 후 ‘난민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그의 주 활동 무대였다. 2003년 이라크전 발발 이후 발생한 이라크 난민은 400만명에 달한다. 1948년 이후 최대 규모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ㆍ소말리아ㆍ콩고민주공화국 등 아프리카 3국에서 발생한 난민도 600만명에 이른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사태로 발생한 난민의 수는 지금까지 1,000만명을 넘어섰다.
구테헤스 내정자가 재임하는 10년 동안 난민 문제는 어느 때보다 심각했지만, 역대 어느 UNHCR 수장보다도 난민 문제를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1년 6월, 할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구테헤스 UNHCR대표와 아프리카 난민들이 몰려온 이탈리아 람페두사 섬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난민들을 따뜻하게 보호해준 섬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진 출처: AFP)
최고대표 시절 UNHCR 본부 인력을 3분의 1가량 축소하고 이 인력을 긴급구호 쪽에 배치하는 내부 개혁에 성공했다. 또 부유한 선진국이 난민들에게 국경을 열고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례로 2013년 시리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50억달러의 지원금을 국제사회로부터 끌어내기도 했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2012년 안젤리나 졸리를 UNHCR 특별대사로 영입하기도 했다. 난민 문제의 참상을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이 아니라 UNHCR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의 임무를 부여 했다.
구테헤스 내정자와 졸리는 2012년 터키 난민 캠프 방문을 시작으로 2013년 요르단, 2015년 몰타ㆍ시리아 등지를 찾아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동참을 촉구했고, 국제사회의 폭발적 참여를 이끌어 낸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하지만 반 총장이 지난해 임기 연장안을 거부하면서 구테헤스 당시 UNHCR 최고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시리아 난민 문제 등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던 때여서 반 총장의 선택을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로이터통신은 “UNHCR 최고대표 자리를 노리는 일부 국가들의 로비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반 총장의 권한이긴 하지만, 불행한 결과”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반 총장의 선택이 구테헤스 차기 유엔 사무총장의 탄생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다.
구테헤스 내정자는 유엔 사무총장 출마 선언을 하며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는 누군가 청색깃발(유엔기)을 볼 때 그들이 ‘나는 보호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가장 취약한 이들 위해 봉사할 것”
구테헤스 내정자의 현장 중심의 실무 능력과 오랜 경험은 국제무대에서 높은 평가를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안보리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 선정 사실을 발표할 때는 비탈리 추르킨 러시아 유엔대사와 서맨사 파워 미국 유엔대사 등 15개 이사국 대사가 모두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단합된 모습은 이사국 스스로도 놀랄 만한 장면”이라고 평했다.
구테헤스는 UNHCR 대표 시절, 선진국들이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BBC)
그테헤스 내정자는 지난 10월 6일 포르투갈 리스본 외교부에서 열린 후보 지명 후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소감을 대신했다.
그는 “분쟁ㆍ테러리즘의 피해자, 인권 침해의 피해자, 가난과 부정의의 피해자”들을 거명하며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도전에 맞서서 일하게 된 데 겸허한 자세를 취하고 싶다”고 소감으로 밝히기도 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높다는 ’가정용 전기료’에 대한 시민들의 걱정과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비슷한 제목의 기사들도 많다.
잠 못 이루는 밤 “에어컨 켤까 말까”… 에너지절약형 아파트 눈길(매경닷컴/7월 31일)
폭염보다 무서운 전기료…관리비 잡는 에너지절약형 아파트는 어디?(헤럴드경제/7월31일)
태양광·지열 발전 갖춘 아파트… “한여름에도 관리비 걱정 없어요”(한국경제/8월7일)
무더위에 에너지 절감 아파트 관심 ‘업'(아이뉴스24/8월 17일)
에너지 절약형 아파트를 소개하는 부동산 기사들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든 기사에 거의 똑같이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한국감정원 공동주택관리 정보시스템(K-apt)에 따르면 서울 서초구 반포 래미안퍼스티지(2009년 7월 입주)는 ㎡당 공용관리비 964원으로 같은 서초구에 위치한 반포경남(1978년 11월 입주) 아파트의 ㎡당 공용관리비 2897원보다 3배 이상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보도자료를 베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기사에 나온 한국감정원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에 전화를 걸었다. 책임자는 그러나 이런 보도자료를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감정원 공동주택관리 정보시스템에서 분류하는 ‘공용관리비’에는 일반관리비, 청소비, 경비비 등이 포함될 뿐 개별 세대의 전기료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확인해줬다. 공용관리비에 개별 세대의 전기료가 포함되어 있지도 않는데 공용관리비를 예로 들어 한국에서 1㎡당 시세가 가장 높은 초고가의 아파트를 에너지 절감형 아파트로 소개하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한국감정원 공동주택정보시스템에 직접 들어가 봤다. 전국의 아파트 단지별로 관리비를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해 놓았다. 여기에 나온 관리비 내역은 2-3개월 정도 후행한다. 그래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관리비 내역은 올 5월 치다. 기사에 인용된 서울 서초구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 아파트와 반포경남 아파트의 5월 공용관리비 액수를 보자.
반포레미안퍼스티지
1240원(㎡당)
반포경남
917원(㎡당)
래미안퍼스티지의 관리비가 세 배 이상 저렴하기는커녕 오히려 높게 나온다.개별 세대의 전기료는 어떨까? 올 여름 전기료는 확인할 수 없으니 지난해 8월 전기료를 살펴보자.
반포레미안퍼스티지
2797원(㎡당)
반포경남
730원(㎡당)
반포래미안퍼스티지가 반포경남아파트보다 무려 세 배나 넘게 전기료가 많이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요즘 신축된 아파트들의 경우 방마다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냉장고 등도 붙박이 형태로 되어 있어 전기를 많이 쓸 수 밖에 없다. 특히 아파트 분양시에 옵션으로 제공되는 냉장고나 에어컨 등의 가전제품이 일반적으로 에너지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가전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위에 열거된 네 개의 기사 모두 엉터리라는 말이다. 도대체 이 신문사의 기자들은 어디서 이런 엉터리 보도자료를 보고 베낀 것일까? 그리고 이런 기사를 쓰는 의도는 뭘까? 대형 아파트 건설사나 시행사의 홍보를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 이 네 기사 모두 기사 중반부터 최근 건설업계가 이런 에너지 효율을 따지는 수요자의 흐름을 감안해 에너지 절감 아파트를 시장에 내놨다고 홍보하고 있다. 삼성물산, SK건설, 현대건설, 대림산업 등이 서울과 수도권에 이런 에너지 절감형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고 있으니 낡은 아파트에서 무더위에 지친, 심지어 전기료까지 많이 내는 사람들은 빨리 가서 새 고급 아파트를 사라고 사실상 판촉하는 기사들이다.
이런 보도자료를 경제신문 등에 뿌리는 곳은 뻔하다. 이 기사에서 에너지 절감형 분양 아파트 단지로 언급된 한 시행사 관계자는 요즘은 아파트 분양대행사들이 “알아서 기자들이 기획형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보도자료를 뿌리고 있다며 이렇게 분양대행사들의 보도자료대로 기획기사를 쓰는 것이 특별히 새로운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총선에서 유권자가 알아야 할 정보 제공 위한 5번째 보고서
상위1% 후보·정당, 시민 이해 대변할 수 있을지 의문
부동산투자로 재산증식 여부, 막대한 재산 불구 상속세 0원 후보 등 소명해야
참여연대(공동대표: 법인, 정강자, 하태훈)는 총선에 나서는 주요 정당 후보자들의 재산 현황을 전수 조사하여 오늘(4/1) 이슈리포트 <유권자가 꼭 알아야 할 20대 총선 정당별·후보자 재산 현황 분석>을 발간했습니다.
조사 대상은 20대 총선 지역구에 출마하는 후보자 중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4개 정당 후보자들, 일부 지역(서울, 인천, 대구) 무소속 의원, 비례 대표 후보자들 (새누리당 20번, 더불어민주당 15번, 국민의당 5번, 정의당 5번)이며, 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재산 내역으로 분석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새누리당의 경우 267명 출마자의 평균자산은 약 39억 원에 달하며 채무는 7억 원, 더불어민주당은 26억 원의 자산과 4억 원의 채무, 국민의당의 경우 28억 원의 자산과 약 8억 원의 채무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국민의당 후보는 광주, 전남 지역 후보자들 중 가장 많은 재산 규모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평균 자산규모는 이들이 상위 1%의 부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민평균의 약 10배 안팎의 자산과 부채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중 순자산 100억 원 이상 보유한 후보자는 모두 15명으로, 새누리당 후보자 9명, 국민의당 후보가 3명, 더불어민주당 2명, 무소속 1명이었습니다. 또한 부동산 50억 원 이상 보유하고 있는 후보자는 새누리당 14명, 더불어민주당 3명, 국민의당 9명으로 확인되었으며, 현금 보유액으로 1억 원 이상 신고한 후보자는 모두 21명으로, 새누리당 8명, 더불어민주당 6명, 국민의당 7명이었습니다.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많은 후보자들이 재산증식을 위해 적극적으로 채무를 사용하여 부동산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례로 부채가 10억 이상이면서 부동산을 10억 이상 보유하고 있는 후보들은 모두 90명으로, 새누리당의 경우 39명, 국민의 당의 경우 30명이며, 무소속으로 나선 윤상현(인천 남구을), 주호영(대구 수성구을) 등도 포함됩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는 부동산가액이 시가의 약 60% 안팎에 못 미치는‘기준시가’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국회의원 후보들이 실제 보유하고 있는 자산가액은 더 높게 계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후보자들이 자신의 이해에 우선하여 주택과 상가 세입자로 살고 있는 시민의 이해를 적극 대변해줄 수 있는 후보인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게다가 자산규모가 20억 원 이상이지만, 채무 등으로 실제 상속세를 내지 않을 후보자들이 각각 새누리당 후보가 7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3명, 국민의당 후보가 5명으로 모두 15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보고서는 20대 총선 전에 유권자가 꼭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고, <19대 국회 나쁜 법안, 누가 발의 했나 이슈리포트>(2016년 3월 13일 발표), <19대 후반기 국회, 디딤돌·걸림돌 법안 표결 보고서>(2016년 3월 16일 발표), <한국사회 주요 이슈에 대한 19대 국회의원 발언과 태도>(2016년 3월 22일 발표), <유권자가 꼭 알아야 할 20대 총선 후보자들의 이런! 전력>(2016년 4월 1일 발표)에 이은 다섯 번째 보고서입니다.
<보고서 목차>
요약 3
주요 정당별 후보자 재산현황 개요- 국민평균 10배 재산 보유 4
막대한 채무로 부동산 투자하여 재산 증식한 후보 90명 8
막대한 자산 보유 불구 상속세 0원인 후보자들 12
광주·전남 지역 후보 중 국민의당 후보들이 가장 많은 재산 보유 13
<표 차례>
<표 1> 정당별 후보자 평균 자산과 부채 현황 4
<표 2> 순자산 100억 원 이상 보유 후보자 명단 4
<표 3> 부동산 50억 원 이상 보유 정당 5
<표 4> 현금 10억 원 이상 보유 정당별 후보자 명단 6
<표 5> 정당별 당선 예상권 비례대표 평균 재산 현황 7
<표 6> 정당별 부채 10억, 부동산 10억 이상 보유자 인원 및 비율 8
<표 7> 부채 10억, 부동산 10억 이상 보유자들의 평균 자산 구성 8
<표 8> 부채 10억, 부동산 10억 이상 보유 후보자 명단 9
<표 9> 자산규모 20억 원 이상이면서 상속세 0원인 후보 명단 12
<표 10> 광주·전남·전북지역 정당별 후보자 평균 자산 및 부채 현황 13
끝.
▣ 별첨자료
1. 이슈리포트 <유권자가 꼭 알아야 할 20대 총선 정당별·후보자 재산 현황 분석>
핀란드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었던 그는 재임 중 복지국가, 개헌, 중립평화외교를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 100년 만에 이뤄낸 핀란드의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의 재임 중 성과를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눠 2회에 걸쳐 싣는다.
1. 국내정책 편: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1), 어떻게 복지국가와 개헌을 이뤄냈나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최근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독일 방문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 중국 시진핑 주석, 일본 아베 총리,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등과 연속 회담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북핵 등 한반도 위기를 해결할 방법으로 ‘단계적, 포괄적 접근’과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해 트럼프 대통령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한중관계의 회복과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한미정상회담과 G20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정책의 운전대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북핵 등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이미지 출처: http://www.segye.com/)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독일 메르켈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사회적 시장경제의 진전, 그리고 북한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에 대한 공통의 관심을 피력했다.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에서 ‘베를린 평화구상’(2017.7.6.)을 발표해 북한 핵의 완전한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 추진,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 등 핵심 정책방향과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비상한 과정을 거쳐 집권한 뒤 신속하고 광범위한 개혁 의제 선점을 통해 초기 높은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이로써 복잡하고 어려운 위기 상황의 한반도 국제정세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보편적, 민주적 가치에 기반한 ‘유능한 협상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따른 긴장 고조는 물론 의회 내 다수의석을 점하지 못한 불안정한 정치상황과 개혁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 등 새 정부가 당면한 과제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쉽지 않은 국제, 국내 정치의 조건 속에서 한반도 평화공존체제 수립과 합의적 민주주의 구현 등 핵심 개혁 과제들을 어떻게 실현해 갈 것인가?
핀란드는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100년 전 독립을 이룬 핀란드는 100년 만에 복지국가와 중립적 대외정책을 확립했다.
20세기 동안 내전과 대외적 전쟁, 극심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 등을 지혜롭게 극복한 핀란드의 역사적 경험은 하나의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최근 세상을 떠난 한 전직 핀란드 대통령의 삶과 행동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를 보여준다.
독립 100주년, 핀란드인들이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의 죽음
2017년 5월 12일(금) 21시 15분, 핀란드 제9대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또(Mauno Koivisto)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다음날 핀란드 전역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제9대 핀란드 대통령 마우노 꼬이비스또의 초상화. 그는 올해로 독립 100주년을 맞은 핀란드에서 시민들이 가장 사랑한 노동자-철학자 대통령이었다.
현 대통령 사울리 니니스뙤(Sauli Niinistö)는 추모 성명을 발표했고, 공영방송 YLE는 하루 종일 추모 방송을 특집으로 편성해 내보냈다.
핀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한 대통령으로 인정받는 꼬이비스또는 1982년부터 1994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2회 연임). 전후 25년간 장기 집권했던 중앙당(Keskusta, The Centre Party)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Urho Kekkonen, 1956-1981년 재임)이 기력이 쇠해 사임할 당시 그는 사민당(SDP)-중앙당 연합정부의 총리를 맡고 있었다.
1982년 대통령 선거에서 폭넓은 지지로 당선되며 향후 30년간의 사민당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소련 붕괴, 경제위기, 유럽통합 등 대전환기에 핀란드를 이끈 그는 지혜롭고 합리적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1994년 퇴임한 뒤 부인 뗄레르보 꼬이비스또(Telervo Koivisto) 여사와 함께 시골집에서 숲과 정원을 가꾸며 소박한 삶을 이어가는 한편, 후임 아흐띠사리(Martti Ahtisaari, 1994-2000 재임), 할로넨 (Tarja Halonen, 2000-2012 재임) 대통령과 정부에 국제관계와 외교정책 등에 관해 조언하며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언론과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가 실용적 리더이자 독립적 지성인이면서 매우 소탈하고 겸손했던 정치인으로 진실로 ‘전 국민의 대통령’(koko kansan presidentti)이자 ‘나의 대통령’(minun presidentti)이었다며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평생 손으로 하는 노동과 작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철학, 국제관계 분야에 두루 정통하여 깊이 숙고하고 사유하는 것이 몸에 밴 사상가이자 저술가로 ‘철인왕’(philosophy king)에 종종 비유될 정도였다.
평생 배구를 즐겨한 그의 두 손은 노동과 사유 둘 다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꼬이비스또는 핀란드가 내전과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2차 세계대전 및 전후 냉전 질서가 부과한 국제정치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의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적 국제관계를 달성하는데 기여한 탁월한 정치가였다.
20세기 핀란드의 현대사 굽이굽이를 지나온 뒤 독립 100주년인 2017년에 삶을 마감한 그의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신생 민주공화국 핀란드의 첫 세기를 증언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어린 목수, 참전군인, 철학박사, 재무장관, 중앙은행장, 총리, 그리고 대통령의 삶
마우노 꼬이비스또는 1923년 핀란드 남서부 항구도시 뚜르꾸(Turku)의 한 가난한 조선 노동자(배 목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핀란드는 러시아 황제 치하의 대공국(Grand Duchy of Finland) 지위에서 갓 벗어난 신생 독립국이었다. 독립 직후인 1918년에는 좌우 내전이 발발해 약 4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정치적 분열과 적대의 상처는 핀란드 사회를 깊이 갈라놓았다.
열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죽고, 초등학교를 마친 뒤부터 항만에서 여러 일을 익히느라 꼬이비스또의 유년기는 짧게 끝났다.
16세이던 1939년에는 소련의 침공으로 이른바 ‘겨울 전쟁’(Talvisota, 1939-1940)이 시작됐다. 어린 꼬이비스또는 소방의용군에 편입된 뒤 전방 부대에 배치돼 ‘계속전쟁’(Jatkosota, 1941-44)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생사가 엇갈리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그는 정신적(종교적) 전환을 경험한다. 전쟁은 또 그가 세계정세에 눈뜨도록 만들었다.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했을 때 꼬이비스또는 16세였다(왼쪽 사진). 전쟁은 어린 청년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싸우게 했고, 세계정세에 눈뜨게 했다. 오른쪽 사진은 전후 대학생이 된 꼬이비스또의 모습.
전쟁이 끝나고, 유공자로 전역한 꼬이비스또 앞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그는 1947년에 핀란드 사민당에 가입했고, 항만 노동조합에서도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했다.
당시 노동조합은 사민당과 공산당 활동가들로 진영이 갈려 파업 전략 등을 두고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 사민주의 노선을 추구한 꼬이비스또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꼬이비스또는 1947년부터 야간 학교를 다니며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이후 대학에도 입학했다. 교직 활동을 병행하며 학업을 계속한 끝에 1956년 ‘뚜르꾸 항만의 사회적 관계들’을 주제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역 후 노조와 직업 활동을 병행하면서 꼬이비스또는 공부를 계속해 1956년 뚜르꾸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2년에는 향후 65년 간 평생을 함께 하며 가장 중요한 조언자가 되어준 부인 뗄레르보(Telervo Koivisto)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학위 취득 후 꼬이비스또는 1957년 헬싱키노동자저축은행(Helsingin Työväensäästöpankki)의 대표 자리를 제안받고 헬싱키로 이주한다.
이후 12년간 저축은행 대표 역할을 맡은 그는 경제 전문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사민당이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둔 1966년에는 재무장관에 발탁됐다.
1968년 핀란드 중앙은행장에 임명된 직후에는 총리로 다시 임명됐다.
께꼬넨 대통령 집권 시기에 성립된 사민당-중앙당 연합정부에서 총리(1968-1970, 1979-1982)와 재무장관(1966-67, 1972)직을 두 차례씩 역임한 그는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총리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립적 사유와 숙고된 판단을 중시하는 그는 강한 카리스마로 정치적 도전자를 잘 용납하지 않는 께꼬넨 대통령과 오래 호흡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내각에서 물러나 있는 사이에도 핀란드 중앙은행장으로 계속 활동했고, 이 시기 그가 획득한 경제와 재정 정책의 전문성은 경기 과열과 대소 무역의 붕괴 등으로 인해 그의 대통령 재임 후반기에 발생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경제 전문가였던 그의 재임 시기에 경제위기가 발생, 심화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소련 붕괴가 가져온 경제적 충격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환율 정책에 신중한 나머지 1980년대 후반의 인플레 현상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된다.)
핀란드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이끌다
그가 처음 총리로 임명된 1968년, 은 20세기 후반 핀란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이다. 핀란드 역사상 최초로 노사정 대표가 3자 협의체를 구성해 전국적인 임금 인상률과 주요 경제, 사회정책의 방향을 결정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임 빠시오(Rafael Paasio) 총리 때부터 추진된 협상은 꼬이비스또가 총리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결실을 맺었다.
1930년대부터 3자 합의에 바탕해 보편적 복지국가로 이행한 스웨덴, 덴마크와 달리 핀란드는 북유럽 국가이면서도 내전과 대소 전쟁 등의 여파로 같은 경로의 발전이 한 세대 동안 지연되었다.
사용자들은 노조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자주 총파업 등 물리적 투쟁으로 맞섰다. 내전 뒤에도 좌우 대립은 계속됐다. 나아가, 각 진영 안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들 간에 치열한 논쟁과 대결이 벌어졌고, 정국은 자주 소용돌이쳤다.
대소 전쟁 등 국가적 위기를 거치면서 민족적 단합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용자단체와 노조 간의 단체 협상이 개시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께꼬넨 대통령이 첫 취임한 1956년에도 대규모 총파업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 갈등이 지속됐다.
1968년 노사정 합의를 계기로 핀란드는 민주적 코포라티즘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 시스템을 건설했다. 사진은 당시 역사적 합의를 도출한 노사정협의회 회의 장면.
그렇다면 1968년의 제도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중도우파로서 안정된 대러시아 관계 구축과 국내 사회통합에 역점을 둔 께꼬넨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정치적 뒷받침, 경기 인플레 등에 기인한 환율 재정위기라는 외부요인이 부과한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 196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사민당의 주도적 역할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가능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신조합주의(neo-corporatism)적 3자 이익 협상 체계가 제도화되었다. 일시적 중단 사례가 있지만 큰 틀의 변화 없이 현재까지 제도가 지속되면서 핀란드 노동시장 및 관련 사회⦁경제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제가 되고 있다.
노사관계의 안정과 고속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핀란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고용, 주거, 교육, 의료, 사회보장 등의 영역에서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복지국가 관련 법제와 정책들을 완비할 수 있었다.
꼬이비스또가 각료와 총리로서, 나아가 대통령으로서 재임한 시기에 핀란드 사회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팽창과 완성을 목도했던 것이다.
의회주의와 현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
핀란드가 또 하나의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을 실현해가는 과정은 분열과 대결을 특징으로 하던 ‘캠프 정치’(camp politics)의 시스템과 문화가 ‘합의 정치’(consensus politics)로 전환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역사적, 지정학적 여건과 선거제도의 영향 등으로 핀란드의 정치 체제는 극단적으로 파편화된 정당 시스템과 ‘진영 정치’의 양상을 보였다. 준(準)대통령제 시스템 속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우르호 께꼬넨 대통령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때때로 내각과 의회를 해산했고, 정치적 교착으로 인해 관료 내각이 들어서는 경우들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시도된 적록연정(punamultahallitus, 사민당-중앙당 연정)과 중앙 노동조합 조직들의 통합, 그리고 노사정 3자 협상의 제도화 등에 힘입어 핀란드 정치 시스템은 점차 안정돼 갔다.
특히 1982년 마우노 꼬이비스또의 대통령 취임 이후 중요한 정치적, 입헌적 개혁들이 시행됐다.
전임자 께꼬넨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줄이고 의회와 내각 중심의 국정 운영을 촉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부터는 소련의 반대 등으로 27년간 내각에 참여하지 못했던 보수당(Kokoomus)이 사민당과 ‘블루-레드 연정’(sinipunahallitus)을 통해 집권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는 이른바 ‘무지개정부’로 불리는 초다수적 연합정부 (super-majority seeking coalition government) 수립이 일반화되었다.
꼬이비스또의 재임 시기에 헌법개혁위원회가 출범해 바람직한 헌법 개혁 방안을 지속적으로 검토, 제안했고,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점진적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우선, 그동안 300명의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전환돼 시민 참여가 대폭 확대됐다.
둘째, 대통령의 임기 제한 규정을 마련해 6년씩 2회(최대 12년)만 역임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1995년 핀란드의 유럽연합 가입에 맞추어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전면 개정해 <유럽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 부합되도록 개편했다.
개정 헌법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근대적 주권 원칙에 기반한 시민권 모델을 뛰어넘어 보편적 인권 원칙을 헌법과 기본권 보장의 기본 원리로 수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기존의 부분적 개정 내용들을 집대성하고, 나아가 권력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전면적 헌법 개혁이 단행됐다. 회기를 달리한 두 차례의 의회 동의를 거쳐 2000년부터 발효된 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는 대신 의회와 총리의 권한을 강화했다.
꼬이비스또의 재임 시기 핀란드는 의회주의와 인권국가를 향한 단계적 헌법 개혁을 이루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헌법 전면 개혁이 단행됐다. 사진은 1980년대 이후 핀란드의 전현직 대통령들과 그 배우자들이 2012년 12월 6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참석한 모습.
가장 중요한 변화는 총리 인선과 내각 구성의 권한이 대통령으로부터 의회로 이양된 것이다. 총리와 내각은 대통령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벗어나 의회에서 선출, 구성되고, 총선 결과를 반영해 원내 정당들 간의 협상을 거쳐 다수결로 선출되는 총리는 내각과 행정부의 운영에 대해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책임지도록 했다.
아울러 대통령의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에도 중요한 제약이 가해졌다. 대통령은 여전히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고, 의회 해산권과 법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 기능은 형식적 절차의 차원으로 국한됐다.
대통령의 정부 정책에 대한 통제, 특히 께꼬넨 이래 대통령의 배타적 권한 영역으로 인식되던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중요한 개혁 조치가 취해졌다. 외교 정책에서도 정책 주도권이 총리와 내각으로 넘어간 것이다.
2000년 헌법 개정 이후 핀란드의 헌정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준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이지만 실질적 측면에서 표준적 형태의 의회주의(parliamentarism)로 전환되었다고 정치학자들은 평가한다.
최근 2012년의 헌법 개정은 의회주의적 권력 구조 개편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유권자 5만 명 이상이 서명한 경우 의회가 그 입법 정책안을 심의하도록 하는 시민발의제도(citizens’ initiatives)를 도입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했다.
그 자신 한 번도 국회의원이었던 적이 없었던 꼬이비스또가 의회중심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일견 역설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당 내부에서 커리어를 쌓아간 기성 정치지도자들과 다른 경로를 통해 장관과 총리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전임 대통령과 달리 소수의 측근들로 구성된 권력의 요새를 구축하지 않았고, ‘올드보이들’ 간에 벌어지는 폐쇄적 권력 투쟁 성격의 정치행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시 의회와 제 정당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께꼬넨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퍼져있었고, 이는 의회주의적 헌법 개혁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합의와 추동력을 제공했다.
(핀란드가 사랑한 대통령(2), 대외정책 편은 다음에 계속)
(이 글의 저자인 서현수 박사는 지난 5월 핀란드 땀뻬레대학에서 핀란드의 의회정치와 시민참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여기(☞Reaching Out to the People)를 클릭해 다운받을 수 있다).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으로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고 헌재를 떠난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은 지난 13일 열린 자신의 퇴임식에서 이같이 말했다. 헌법재판관을 포함해 30년의 법관 생활을 마감하며 내놓은 짧은 소회다.
이 전 재판관은 선고일인 10일 분홍색 헤어롤 2개를 머리에 달고 출근해 화제를 모았다. 헌재 관계자는 “이 권한대행도 머릿속에 오로지 ‘탄핵심판을 어떻게 원활하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밖에 없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전 재판관의 ‘헤어롤’을 세월호 7시간처럼 가장 긴박한 순간에조차 고수해야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와 비교하며 진정한 리더십의 의미를 되새긴 사람들이 적지 않다.
법관으로서 최고 명예의 자리까지 오른 뒤 내려온 이 전 재판관의 나이는 이제 55세에 불과하다. 이 전 재판관의 퇴임 후 계획은 아직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사회생활을 그만두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인 만큼 그가 과연 어떤 변신을 할지 주목된다.
고3 때 10ㆍ26사태…법대 진학 결심
이 전 재판관은 1962년 울산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녔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이 경남 마산으로 전근을 가면서, 이 전 재판관도 마산여고로 진학한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1979년 이 전 재판관은 그곳에서 역사의 순간을 대면하게 되고, 수학선생님이었던 장래 희망을 바꾼다.
유신이 선포된 지 7년만인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은 박정희 암살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마산여고에 다니던 이정미 재판관은 이 사건을 보며 법대 진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 해 10월 마산에서는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부산에 이어 일제히 타올랐다. 부마항쟁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기수이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안을 국회에서 변칙 처리하는 등 잇따랐던 유신 폭압 정치가 도화선이 됐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부마항쟁 수습책을 놓고 벌어진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의 갈등 속에 10ㆍ26사태로 종말을 맞는다.
이 전 재판관은 “어떤 방향이, 사회가 올바로 가는 길일까 생각하다 법대에 진학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지난 2011년 7월 헌재 재판관 취임 100일을 맞아 법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집 근처에서 과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저나 친구들은 다 충격을 받았다”며 “그런 사회 모습에 혼란스러워 했던 거 같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소수자였던 여성 법조인
이 전 재판관은 1980년 고려대 법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했지만 혼란의 연속이었다. 80년 서울의 봄은 5월을 넘기지 못한 채 역사적 비극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렇게 1984년 10월 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를 얻게 된 측면이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여성 법조인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소수자였다. 이 전 재판관보다 선배인 여성 법조인이 19명뿐이던 시절이다.
여성 법조인은 1951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이태영 변호사가 처음으로 합격했고, 1952년 황윤석 판사가 헌정사상 첫 여성 법관이 된다. 이후 18년간 명맥이 끊겼다가 1970년 훗날 스타 법조인이 된 황산성ㆍ강기원이라는 법조인도 탄생했지만, 여전히 소수였다.
사진 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여사가 1952년 법복을 입고 대법원 앞에 선 모습. 두번째 사진은 여성판사 1호 황윤석 판사. 세번째 사진은 여성검사 1호 조배숙 변호사의 모습.
이 전 재판관이 합격했던 사법시험 26회까지 3,094명 합격자 가운데 여성은 24명으로 여성 법조인 비율은 0.78%에 불과했다. 숫자만 적었던 게 아니다.
1961년 여성 판사 1호 황윤석 판사가 32세 나이로 의문사 하는 사건은 당대 여성 법조인이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경찰은 남편의 타살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물증을 찾아내지 못해 미제로 남았다.
이 전 재판관과 박보영 변호사, 윤영미 고려대 교수 등 사시 동기들과 그 해 11월 사시 여성합격자 축하 모임에 참석한 사실이 신문 기사로 보도될 정도였다.
이 전 재판관 등은 축하 모임에서 “지금까지는 책에만 매달려 법조인에게 정직 필요한 인간에 대한 공부는 부족하다”며 “주어진 위치에서 불우한 이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열심히 배우겠다”고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40대ㆍ비서울대ㆍ여성 헌법재판관
이 전 재판관은 1987년 3월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하면서 법관의 삶을 시작한다. 서른을 넘겨 결혼한 뒤 두 아이를 키우면서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일을 했다.
아이들이 잠든 이후에 사건 기록을 살펴봐야 했고, 아이들이 깨기 전 새벽에 판결문을 써야 했다.
이 전 재판관은 “여성이 소수이다 보니 조금만 일에 소홀해도 눈에 띈다”며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여성법조인에 대한 평가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전 재판관은 2011년 1월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으로부터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자, 비 서울대, 40대 재판관이란 타이틀로 주목을 받았다.
이 대법원장은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여 소수자 보호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히 대변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인지를 주요한 인선 기준으로 삼았다”고 지명 배경을 설명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헌법에 대한 전문성 여부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헌법에 관련해 학위를 취득했거나 관련 논문ㆍ저서도 없고, 법관으로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사례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재판관은 의원들의 지적에 “법원의 재판 자체가 헌법정신을 기초로 해 국민의 귄리를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반박했다.
이 전 재판관은 1987년 임관 이후 거의 모든 시간을 재판관 외길을 걸었다. 2004년 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3년 동안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한 기간이 유일하게 재판정 밖에서 보낸 시간이었을 정도다.
인사청문회에서 원친적 답변을 해 의원들로부터 ‘소신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 전 재판관은 청문회 통과 이후 “청문회를 준비하는 2주동안 짧게 생각하고 내 소신은 ‘이것’이라고 답하는 게 법률가로서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했다”며 “차라리 소신 없다는 비판을 받는 게 낫다는 게 제 소신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통진당 해산, 간통죄 위헌 등 참여… ‘법의 도리는 고통 따르지만 오래도록 이롭다’
이 전 재판관은 재임 6년간 헌정사에 남을 굵직한 사건에 다수 참여했다.
2014년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에선 주심 재판관을 맡아, “정당 해산 결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정당 활동 자유의 근본적 제약이나 민주주의의 일부 제한이라는 불이익에 비해 월등히 크다”는 통진당 해산 주문을 읽기도 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린 간통죄에 대해선 “간통은 가족공동체 보호에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는 소수 의견을 내기도 했다. 김영란법, 사시폐지, 성매매특별법에 대해서는 합헌 의견을 냈다.
지난 3월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퇴임식이 열렸다.
이 전 재판관은 지난 13일 열린 퇴임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법가 사상가 한비자의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는 문구를 인용하며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통치구조의 위기상황과 사회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그리고 인권 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며 “비록 오늘은 이 진통의 아픔이 클지라도, 우리는 헌법과 법치를 통해 더 성숙한 민주국가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주의, 그 요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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