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남영동(南營洞)이라는 고약한 지명을 남기고 사라진 용산연병장 – 일본군대의 관병식과 일왕 봉도식, 친일파 장례식이 벌어지던 공간

지역

남영동(南營洞)이라는 고약한 지명을 남기고 사라진 용산연병장 – 일본군대의 관병식과 일왕 봉도식, 친일파 장례식이 벌어지던 공간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8:55

식민지 비망록 26

13일 용산연병장의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 수십 대의 전차는 서로 연하여 운전을 하나 오히려 올라탈 여가 없어 도보 혹은 인력거로 나오는 사람이 남대문에서 연병장까지 발자취를 서로 연함으로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다지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는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 겹, 스무 겹씩 둘렀고 산비탈 언덕 아래에도 사람으로 가리워 오후 2시경에는 십만 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 …… 그 다음에는 전조선 제일류(第一流)의 대경주를 개시하였는데 선수는 내지인(內地人) 네 명, 조선인 엄복동 황수복의 두 명이라. 용맹 활발한 여러 선수는 평생의 용맹을 다하여 명예 있는 일등을 다투는데 활동사진은 기념으로 사진을 백이며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와 좇아옴을 보고 더
욱 용맹을 내여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하략)

 

20

<매일신보> 1913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 안내광고.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실제 대회일정은 1주일이 연기되었으나, 이때 ‘엄복동’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사는 <매일신보> 1913년 4월 15일자에 수록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구전가요의 구절로 유명한 자전거대왕 엄복동(嚴福童, 1892~1952)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공동주최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全朝鮮自轉車大競走會)’는 인천, 경성, 부산, 평양의 네 곳에서 3주간에 걸쳐 연속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복동이 자전거를 탄 장소가 ‘용산연병장(龍山練兵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용산연병장은 그야말로 러일전쟁 이후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21

‘용산연병장’의 위치가 표시된 「경성급용산」 지도 자료. <조선철도여행안내>(1915)

22

<매일신보> 1917년 1월 9일자에 소개된 용산연병장 관병식 장면. 말 위에 앉은 이는 조선주차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육군대장.

 

1906년 4월부터 용산지역에 대규모로 진행된 일본군영지 조성공사의 산물이다. 이 당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군용도로와 연병장과 같은 기반시설이었다. 가령 남대문정거장 쪽에서 용산역으로 이어지는 한강통(漢江通, 지금의 한강로)이 개설된 것은 1906년 6월의 일이고, 후암동 방향에서 용산기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은 1908년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군사주둔지의 필수 구성요소인 연병장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08년 5월에 완공되었다.
이 연병장은 본연의 군사훈련장이라는 용도 이외에도 해마다 정초 또는 천장절이나 육군기념일과 같은 ‘경축일’이 되면 조선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관병식(觀兵式)이 열리는 공간으로 사용되곤 했다. 또한 1912년 여름에는 그들의 천황이 세상을 뜨자 성대한 봉도식(奉悼式)이 이곳 연병장에서 거행되었고, 이보다 약간 앞서 친일파의 거두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벌어진 적도 있었다.

23

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 나라하라 산지에 의해 제작된 ‘봉호(鳳號)’가 용산연병장에서 비행하는 장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비행기가 등장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매일신보> 1913. 4. 5)

 

용산 일본군 연병장은 서울 시내의 ‘훈련원 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수의 군중이 집결하기 용이한 위치에 있었던 탓에 여러 학교 단체의 운동회가 벌어지거나 갖가지 별스러운 흥행이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3년 4월에 일본해군 군속기사 출신의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 1877~1944)가 나라하라식 4호 비행기인 ‘봉호(鳳號, 오토리호)’를 서울에서 처음 선을 보였을 때 비행장으로 사용된 곳이 용산연병장이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일본의 제국비행협회가 파견한 오자키 유키데루(尾崎行輝, 1888~1964)의 ‘삼중호(三重號, 미에호)’ 축하 비행을 비롯하여 1917년 미국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Art Smith, 1890~1926)의 비행대회도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24

서울을 찾아온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비행대회를 알리는 광고문안. 용산연병장에서 거행된 그의
비행묘기는 장차 비행사가 될 안창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매일신보> 1917. 9. 11)

 

그런데 1915년 6월 조선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주차군 편제를 상주군으로 전환하는 결정과 관련하여
용산병영지가 확장됨에 따라 신연병장(新練兵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일대)이 새로 조성되는 한편 종래의 연병장 터는 야포병연대(野砲兵聯隊, 1920년 4월 병영공사 준공)가 차지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현재 이곳은 통칭 ‘캠프 코이너(Camp Coiner)’로 용산미군기지의 북쪽 끝 지역에 해당한다. 이때 연병장 터의 서쪽 대로변에 접한 구역에는 따로 시가지가 만들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27일자에 수록된 「조선부대 신영공사(朝鮮部隊 新營工事)」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연병장(新練兵場)에 이전 후의 용산연병장 한강통 전차연선(漢江通 電車沿線) 전부의장(長)을 광(廣) 60간(間)에 긍(亘)하여 일대지(一帶地)를 시가지로 군사령부에서 총독부에 인도를 료(了)하고 기 후방(其 後方) 전부를 야포병연합대(野砲兵聯合隊)의 부지로7년도(1918년도)부터 병영공사에 착수하겠고(하략)

 

새로 생긴 동네는 일제가 정한 행정구역상으로는 한강통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가 이미 연병장 터로 각인되어 있었던 탓에 대개 ‘연병정(練兵町)’으로 통용되었다. 더구나 연병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구용산과 신용산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이곳 전차정류장의 이름은 여전히 ‘연병정’으로 사용된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4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경성부시(京城府市)의 행정구획정리」 제하의 기사는 그 무렵 ‘연병정’이 이미 속칭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강통 삼번지(漢江通 三番地) 부근은 속칭 연병정(練兵町)이라 하고 우(右) 칠번지각삼각정(七番地角 三角町) 등도 개(皆) 속칭이오 행정구획에 의하여 명명된 정명(町名)은 아닌 고로 금회의 정리에는 당연 우(右) 정명을 폐지하고 공식의 정명으로 변경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나 부당국(府當局)에서 혹 지방 거주자의 의지를 존중히 하여 현재 속칭 정명으로 그대로 명명하게 될지 알지 못하나(하략)

 

이러한 상태에서 일제패망기로 접어든 1941년 10월 1일에는 경기도고시 제379호를 통해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이 개정됨에 따라 종래 ‘한강통’으로만 불러왔던 용산 일대의 군영지 및 배후지역이 여러 동네로 세분화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조치에 따라 옛 한강통 3번지 일대의 땅은 ‘공식적으로’ 연병정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고, 여타 구역에는 한강통 몇 정목이니 용산정 몇 정목이니 하는 식의 명칭이 부여되었다.

 

25

이미 연병장은 사라졌으나 ‘연병정’은 전차정류장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진은 <경성과 인천>(1929)에 수록된 연병정 전차분기점의 모습.

 

이로부터 불과 4년여 만에 일제가 패망했으나 그들이 부여해놓은 지명은 그대로 이 땅에 남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 봐도 ‘연병정’은 그대로 용납할 수 없는 표현이었으니만큼 1946년 10월 일본식 지명 잔재를 일소하는 차원에서 종전의 ‘연병정’을 대체하기 위한 지명이 창안되었는데, 이때 성급하게 붙여놓은 명칭이 ‘남영동(南營洞)’이다.

26

<조선신문> 1925년 1월 13일자에 수록된 일본인 활동사진관 경룡관(京龍館)의 화재위문 답례광고. 이곳의 지번 주소는 ‘한강통 3번지’이지만 광고문안에는 ‘용산 연병정’이라고 소재지를 그대로 기재한 것이 눈에 띈다.

 

????한국지명총람 1(서울편)????(한글학회, 1966)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서울 남쪽에 영문(營門)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남영동으로 개칭함”이라고만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영문’이 어느 시대에 존재했던 것인지, 아님 무슨 문헌상의 근거라도 있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관련 자료가 제시된 바는 없다. 그저 짧은 소견에 생각건대 남쪽에 있는 병영, 즉 남영은 일본군대의 용산 병영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이 와중에 지난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부터 존재했던 ‘남영역’은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매우 익숙한 생활공간의 하나로 정착된 지 오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작 이 철도역사의 소재지는 ‘남영동’이 아니라 ‘갈월동’이라는 사실이다. 행정구역으로만 따지자면 ‘갈월역’이 되어야 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지금껏 남영역이었고 앞으로도 이 이름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애당초 ‘연병정’이라는 이름은 일본군대가 이 땅에 침탈의 흔적으로 남겨놓은 것이고, ‘남영동’ 이니 ‘남영역’이니 하는 것은 다시 거기에서 파생한 말이니 이래저래 꽤나 고약한 이름이 아닐수 없겠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남영동’이라는 지명은 삭제되어야 하고, 다른 적절한 명칭을 찾는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정부가 발표한 국정역사교과서 집필진 가운데 근현대사를 전공한 현직 역사교수는 1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현대사 부분을 담당한 집필진은 현대사 전공자 없이 대부분 법학과 정치학, 경제학 전공자로 구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교과서 발표

교육부가 공개한 국정역사교과서 집필진은 현직 대학교수 12명과 중고등학교 교사 6명을 포함해 모두 31명으로 구성됐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논란이 됐던 근현대사 집필진에 현직 역사교수의 참여가 극히 저조하다는 것이다. 근대 3명 현대 6명의 집필진 가운데 역사를 전공한 현직 역사교수는 한상도 건대 사학과 교수(근대) 1명 뿐이었다.

한상도 건대 교수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을 주로 연구한 근대사 전공자로 현 국사편찬위원이기도 하다. 한 교수는 지난해 11월 뉴스타파가 근현대사 전공 현직교수 7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당시 국정화 반대 성명에 참여하지 않은 3명 가운데 1명이었다.(관련기사: 국정화 반대하지 않는 근현대사 전공 교수는 3명뿐)

특히 현대사 집필진 6명의 경우는 법학 전공 1명, 정치학 전공 2명, 경제학 전공 2명, 전쟁사 전공 1명 등 엄밀한 의미에서의 현대사 전공자는 1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또,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해당 분야의 권위자가 참여했다는 교육부의 설명과 달리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가 대거 집필진에 포함됐다.

현대사 집필진 가운데 김명섭 교수와 나종남 교수, 세계사를 맡은 이주영 교수는 뉴라이트 인사들로 구성된 현대사학회 회원이다.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현대)는 지난해 11월 ‘근현대사는 역사학자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문화일보 칼럼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면서 5.16군사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정경희 영산대 교수(세계사)는 기존 검정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고 북한 교과서를 베끼는 등 편향됐다고 주장했던 인물이고,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조선)은 대표적인 교학사 역사교과서 필진으로 강원대 사학과 교수 6명 가운데 유일하게 국정교과서 반대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현대)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하는 민주평통자문위 수석부의장의 신분으로 최순실게이트가 터지고 난 지난 10월 26일 ‘박근혜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하자’는 글을 SNS에 올려 물의를 빚기도 했다.

집필진 가운데 최성락,손승철, 한상도,유호열, 정경희 등 5명은 현 18대 국사편찬위원이다.

국사편찬위는 지난 3월 기존 위원 16명 가운데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했던 편찬위원 9명을 배제하고 찬성 인사들을 새로 편찬위원으로 위촉했는데 한상도, 유호열, 정경희 등 3명이 이때 새로 합류한 인사들이다.

분야 성명 전공 현직 직함
선사/고대 신형식 사학 이대 명예교수
선사/고대 최성락 고고학 목포대 고고학과 교수
선사/고대 서영수 동양사 단국대 명예교수
선사/고대 윤명철 사학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
고려 박용운 사학 고대 명예교수
고려 이재범 사학 전 경기대사학과 교수
고려 고혜령 사학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조선 손승철 사학 강원대 사학과 교수
조선 이상태 사학 국제문화대학원 대학 석좌교수
조선 신명호 사학 부경대 사학과 교수
근대 한상도 사학 건국대 사학과 교수
근대 이민원 한국학 동아역사연구소 소장
근대 김권정 사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현대 최대권 법학 서울대 명예교수
현대 유호열 정치학 고대 북한학과 교수
현대 김승욱 경제학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현대 김낙년 경제학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현대 김명섭 정치학 연대 정외과 교수
현대 나종남 사학 육사 군사사학과 교수
세계사 이주영 사회학 건대 명예교수
세계사 허승일 서양사학 서울대 명예교수
세계사 정경희 동양문화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세계사 윤영인 일본사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세계사 연민수 사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현장교원(선사/고대) 우장문 사학 경기 대지중 수석교사
현장교원(고려) 김주석 사학 대구 청구고 교사
현장교원(고려) 유경래 역사교육 경기 대평고 교사
현장교원(근대) 정일화 역사교육 전 강원 평창고 수석교사
현장교원(근대) 최인섭 역사교육 충남 부성중 교장
현장교원(근대/현대) 황정현 역사교육 충남 온양한올중 교사
현장교원(세계사) 황진상 역사교육 서울 광운전자고 교사
월, 2016/11/28- 14:03
476
0

다른백년은 이달 29일(목) 저녁 7시반, 국민TV 지하 카페(웰빙센터 지하)에서 제 8회 백년포럼을 개최합니다.

유난히 더웠던 2016년 여름이 지나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이 좋은 날씨와 더불어 역사학자이신 이병한 박사를 모시고 ‘다른 백년’인가, ‘다시 백년’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립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이병한 박사의 유라시아 현장 보고를 들어주시고 토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 2016/09/07- 16:12
470
0

‘불후의 명곡’, 군국가요 작곡한 박시춘의 ‘비 내리는 고모령’ 내보내

0313-10

▲ 지난 9일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 화면 갈무리. 이날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러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대중음악 작곡가 박시춘이 작곡한 노래로, 3.1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의 성격상 KBS가 자료 검토 및 선곡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KBS

3.1운동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가 친일 행적이 있는 음악인의 노래를 선곡해 방송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지난 9일 방송된 <불후의 명곡> 특집 ‘대한민국 100년 겨레와 함께 노래하다’ 2부에선 가수 하은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불렀다. 이날 하은은 425표를 얻어 1승을 거뒀다. 하은의 열창과 탈북 청년들이 고향을 등지게 된 사연이 어우러져 뜻깊은 무대가 됐다.

그러나 해당 곡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1급 친일 작곡가의 곡으로 알려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으로 꾸며진 방송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948년에 발표된 ‘비 내리는 고모령’은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이 만든 노래다. 박시춘은 평생 동안 3000여 곡을 작곡, 이 가운데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신라의 달밤’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원 혹은 밀양보전을 졸업한 것으로 그간 알려졌으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밀양보통학교를 중퇴했다. 대중음악계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1982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박시춘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중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1등급’ 친일파에 등재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는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인들을 징용·징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38년부터 지원병 제도를 실시,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의 명목으로 전쟁에 동원했다. 1943년 공표되고 이듬해부터 실시된 ‘징병제’를 통해서도 한국인들을 강제로 입대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입대를 기피하거나 거부하지 않도록 ‘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예술인들을 동원해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천황제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영화와 가요를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적극 호응한 이가 바로 박시춘이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는 박시춘의 친일 행위에 대해 “1942년부터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내용의 ‘고성의 달’, 1943년 징병제 실시 기념영화 주제곡 ‘조선해협’,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축하 특별 기획음반 수록곡인 ‘혈서 지원’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942년 죽음을 각오하고 승리를 다짐하는 군인의 모습을 묘사한 가요인 ‘아들의 혈서’, 1943년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후방의 여인 및 부모의 모습을 그린 ‘결사대의 아내’, 부상을 입었음에도 일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내용의 ‘즐거운 상처’ 외 다수의 가요를 작곡 및 편곡했다. 1943년 산업전사위문격려위문예능대에 참여해 활동함”이라고 밝혔다.

위 <결정이유서>에 따르면, 그가 작곡한 군국가요는 이외에도 ‘낭자일기'(노래 남인수) ‘병원선'(노래 남인수) ‘아세아의 합창'(노래 김정구) ‘진두의 남편'(노래 박향림) ‘지원병의 집'(노래 장세정) 등 13곡이 현재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는 군국가요 작곡가로선 최다 기록이다.

지난 2016년엔 밀양 출신인 박시춘을 기리기 위해 밀양시가 ‘박시춘 음악제’를 개최하려 했으나 당시 친일파를 기리는 음악행사를 도비를 지원받아 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이 빗발치면서 밀양시는 박시춘 음악제 개최를 백지화 했다. 박시춘 외에도 안익태·현제명·홍난파·남인수·김기수 등 다수의 음악인이 일제에 부역한 친일 행적이 확인된 바 있다.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국장 겸 친일잔재조사위원회 연구원은 11일 통화에서 “대한민국 100년 특집을 하면서 ‘비 내리는 고모령’이 나와서 내 귀를 의심했다”면서 “박시춘은 친일 전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동원의 제일선에 서서 징병 유도 가요를 만든 대중음악계의 일급 친일파”라고 설명했다.

이지훈 국장은 “화려한 친일행적을 가진 이가 (친일의 대가로) 평생 호의호식한 데다 대중음악계 최고의 별로 아직까지 자리매김한 것은 씁쓸한 현실”이라며 “관계자들이 자료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임정 수립 100년 특집에 나온 것도 우려스러운데, 우승을 했다고 해서 더 당황했다”고 개탄했다.

<2019-03-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3.1절 특집’에 1급 친일파 노래를? KBS의 황당한 결정.

수, 2019/03/13- 16:44
428
0

참여사회연구소 국정교과서 토론회

정부는 지난 11월 3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고시했습니다. 이로써 정부는 국정 교과서의 제작에 돌입하였으며, 고시대로라면 2017년도 3월부터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정부가 직접 편찬한 교과서로 한국사를 공부하게 됩니다.

정부는 국정화의 추진 근거로 “현행 검인정제도는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검인정제도는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어왔을까요? 정부는 제도의 운용에 대해서는 한마디 자성도 없이 실패를 단언할 만큼, 검인정제를 취지에 맞게 잘 운영해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근현대사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와 접점을 가지고 있는 일본, 그리고 분단의 경험을 공유한 독일 역시 역사교과서 검인정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나라의 검인정제도 운영 실태는 각기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학문과 교육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세 나라의 사례를 비교검토해보고 이를 통해 민주적인 역사교육의 방향과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공개토론회]

한국·독일·일본의 역사교육과 시민적 대안

 


 일시 : 2015년 12월 23일(수) 오후 4시~6시

 장소 :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주최 :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사회

이병천 강원대학교 교수, 참여사회연구소 연구분과위원장

 

발표

독일의 검인정제도와 한국 역사 교육에 대한 시사점이동기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일본의 검인정제도 운영 실태와 한중일공동교과서의 사례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HK 연구교수
한국의 검인정제도 하 교육부의 개입과 국정화 논리의 실체김한종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토론

민주적인 역사교육제도의 방향과 사회적 합의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시민사회의 대응 방향과 대안교과서의 지향점 모색김육훈 독산고등학교 교사, 역사교육연구소장

 

151223_공개토론회_한국·독일·일본의 역사교육과 시민적대안

 

 

 

문의 : 참여사회연구소(02-6712-5248, [email protected])

수, 2015/12/23- 15:01
406
0

세월호, 메르스, 백남기. 지난 4년 동안 한국 사회는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늘 ‘창조’란 말을 반복했으나 오히려 ‘헬조선’을 탄생시켰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통합진보당 해산 등등, 박근혜 씨는 역사를 유신 시대로 되돌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현 직무정지)은 최순실 일당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게 나라냐”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안이 압도적으로 가결됐습니다. 수백만 시민의 촛불이 이뤄낸 한국판 명예혁명입니다. 한국 사회는 이제 4년 만에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캄캄한 터널에서 가까스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4년 동안 박근혜 정권을 다룬 보도 영상을 통해 우리가 지나왔던 암흑의 세월을 돌아보고, 다시는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금, 2016/12/09- 18:00
39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