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김성희의 정치발전소] 호남에서 정당 경쟁이 가지는 의미

지역

[김성희의 정치발전소] 호남에서 정당 경쟁이 가지는 의미

익명 (미확인) | 금, 2017/06/09- 10:50

왜 정치지도자는 ‘경상도사투리 쓰는 남자’ 몫인가?

 

며칠전 광주의 지인들과 대선 후 호남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리가 파할 무렵 한 지인은 “지난 대선에 나온 유력후보 4명이 모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라며 “DJ 이후, 호남 출신의 좋은 정치지도자는 이제 씨가 말라버린 것 아닌가 싶다”고 푸념하듯 말했다. 처음에는 지인의 그런 생각이 좀 생경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지인의 의문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의 중요한 문제와 연관된 것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만 예외적으로 경기도 출신의 여성 후보가 출마했을 뿐, 유력한 대선 후보들은 전부 영남출신이었다. 대선을 당대 정치지도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정치 경쟁의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자도자의 평균적 인물상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라고 한들 틀린 말이 아니다.
호남은 민주화 이후 민주파와 진보파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적 기반이자 정치적 자원의 화수분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호남 지역구를 상당부분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소속 현역의원의 다수는 호남 출신이다. 국민의당은 소속의원의 거의 대부분이 호남이다.
우리 민주주의에서 호남이 가진 중요성과 역할은 쉽게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의미 있는 호남 출신 정치지도자가 어느 당이냐를 떠나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물론, 정치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출신 지역이 어디냐 보다는 그가 추구하는 정치의 내용과 비전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정치지도자의 이와 같은 지역적 편중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호남에서 왜 변화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성장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하다보니 지난 총선과정에서 만난 한 전주 시민의 말이 떠올랐다.
알다시피 지난해 4.13 총선은 호남에서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경쟁함으로써 기존 민주당 일당 체제가 경쟁적 정당체제로 전환된 계기였다. 지난 총선과정에서 만난 한 전주 시민은 호남의 경쟁적 정당체제가 불러온 변화를 다음과 같이 ‘자신의 언어’로 표현했다.
“과거 민주당만 있을 때는 정치인들이 위만 바라봤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인들이 아래를 보기 시작했다.”
말인즉, 공천만 받으면 작대기를 꽂아도 당선된다는 1당 지배체제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이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당 지도부나 지역 유지들만 쫒아 다녔지만, 유력한 복수의 정당이 경쟁하는 정당체제에서는 표를 주는 유권자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정치지도자인 사람은 없다. 정치지도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던 간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가치를 위해 일관되고 완강하게 투쟁하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진다. 일정한 시간, 경력, 고난과 단련의 과정을 통과하며 대중의 신뢰와 지지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 다른 정치인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은 개인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를 조직적으로 체화한 정당에 기반해 다른 정당의 정치인과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유권자 속에서의 정치적 경쟁이 정치지도자를 만드는 단련의 과정이라 한다면, 경쟁적 정당체제야 말로 정치지도자 형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 전제이자 조건이라 할 수 있다.
호남의 정치가 지도자 없는 정치로 정체되고 있는 것의 문제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호남에서 경쟁적 정당체제가 형성되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과 관련이 깊다.
호남에서 경쟁을 배제했던 과거 민주당 일당체제는 중앙에 의존하고, 중앙만 바라보는 참모형 정치인들에게는 기회의 장이지만, 다른 정치인들과 차별화된 새로운 정치적 목표와 가치를 위해 유권자들 속에서 분투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미래의 정치리더에게는 매우 가혹한 조건이었다. 다시 말해 유권자 없는 정치가 지도자 없는 정치를 낳았다.
호남 유권자들은 이제 경쟁적 정당체제가 주는 이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총선이 민주당 일당체제에 대한 호남 유권자의 심판이었다면, 이번 대선은 과거 민주당과 다를 바 없이 호남에서 군림하고자했던 국민의당식 낡은 정치에 대한 심판인 면이 있다.
또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했지만, 호남에서의 득표율은 민주화 이후 집권한 역대 어느 민주파 정부보다 낮았다. 두 번의 선거를 거치며, 호남은 무조건 민주당이라거나, 될 사람 밀어주는 전략적 선택을 한다는 식의 통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호남도 사람 사는 곳이다. 호남 역시 어느 사회와 똑같이 기득권 질서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과 고통을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 호남에 경쟁적 정당체제가 자리 잡는 것은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시민들의 이해가 다양한 정당들에 의해 대표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안정화될 수 있다.
앞으로 어느 정당이 호남의 경쟁적 정당체제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될 수 있을까? 호남 유권자들이 다시 국민의당에게 기회를 줄까? 그것은 불분명하다. 국민의당은 대선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호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에 대한 선언적 강조 외에 민주당과 구별되는 정치적 가치나 대표하고자 하는 사회경제적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기존 체제와는 다른 선택지를 주지 못하는 정당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존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민의당은 호남을 대표한다고 말하기에 앞서, 국민의당이 우리 사회에서 왜 있어야 하는지에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호남의 경쟁적 정당체제를 만들어가는 주역은 이제 호남만의 정치에 침잠하거나 호남의 충성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호남이 가진 보편적 고통에 주목하는 정치인이자 정당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Democracy의 demo는 민중이라는 의미와 함께 ‘지방민’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지방, 역시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이며, 정당이 지방에 뿌리내리지 않고는 민주정치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호남이 경쟁적 정당체제를 수용한 것을 계기로 지금과 같은 5당체제 내지 다원적 정당 체제가 형성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당 스스로 새로운 선택지가 되어 그동안 적대적 양당체제에서 대표되지 못했던 유권자들을 발굴하고, 이들에게 종류가 다른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면, 모처럼 주어진 다원적 정치질서의 가능성도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날 수 있다.
언제나 그랬지만, 호남이 다시 한국 정치에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었다. 기회는 어느 정당, 정치인에게나 있다. 다만 누가 무엇을 통해 분투하고, 헌신할 것인지만 남아있다.

[email protected]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영남 패권, 새누리당 고립으로 죽이자

영남 패권주의와 '더 많은 민주주의'

 

장은주 영산대학교 교수

 

지난 번 "호남이 세속화되어야 한다고?"라는 제목의 나의 '시민정치시평'(클릭)이 나가고 난 뒤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 등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의 반응을 접했다.

 

내 글을 두고 '감동적'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호응도 있었지만, 나더러 심지어 '싸이코패스' 같다고 하는 극언도 들었다. 그런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 양태가 지금의 야권 분열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여 무척 씁쓸했다. 조금이나마 이 분열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자는 게 시평을 쓴 의도였는데, 외려 내 글이 그 분열을 증폭시키는 촉진제가 되지는 않았는지 걱정도 들었다. 

 

김욱과 윤종대의 내 글에 대한 반론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관련기사①: "선거 전엔 '호남 몰표'! 선거 후엔 '호남 없는 개혁'?", ☞관련기사 ②: "호남 타령 그만하고, 영남 너나 잘하세요!") 내 글에 대한 오독도 오독이지만, 조금은 격앙되어 보이는 감정적 반응도 깔린 듯해서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조금은 불분명하게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논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분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글을 쓴 탓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나로서는 두 분을 포함한 당사자분들을 '서로 이견이 있는 친구' 사이로 여기고 싶은데, 혹시라도 이 근본 의도를 해치는 방향으로 이 논쟁이 진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우선 전한다.

 

물론 논의의 주제 자체가 매우 민감하긴 하다. 현실 정치적인 이해관계의 대립도 얽혀 있는 데다 흔히 '지역 (감정)'이라고 말해져 온 문제를 건드려서다. 많은 호남 사람들에겐 심지어 어떤 '한(恨)'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김욱이 이야기하는 '논리'의 차원에서만 논의를 전개하기는 어쩌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더 나은 논증(이 가진 설득)의 힘'을 믿으면서 두 분의 비판에 답해보려 한다. 혹시라도 논의가 서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두 분의 세세한 비판과 언급에 하나하나 답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내가 애초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해 보려 한다. 

 

먼저 내가 이른바 '영남 패권주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겠다. 나는 그것을 영남이라는 지역 기반 위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 선동과 그 '우리'에 속하지 않는 '남', 특히 호남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와 배제를 통해 사회적-정치적 이득을 누리려는 세력들의 한국적 인종주의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바로 새누리당을 이끌고 지지하는 세력들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다. 

 

나는 우리 사회가 반드시 이 못된 인종주의와 그것이 낳은 반인권적, 반민주적 현실을 극복해야만 그 인간적 미래가 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나아가 영남 출신 지식인으로서 이 이데올로기의 극복에 대한 모종의 사명감마저 가지고 있음도 밝혀둔다.

 

이런 출발점이 공유된다면, 두 사람과 나의 근본적인 이견은 이 영남 패권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내가 부정하고 비판하고 싶은 것은, 김욱이 "은폐된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 운운하던 대목과 또 그 영남 패권주의를 또 다른 종류의 지역주의적 인식 틀에서 바라보면서 극복하자는 제안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장 왜 TK(대구-경북)와 PK(부산-경남)를 구분하지 않는가 또 왜 '서울'이라는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는가 하는 정희준 식의 반문도 가능하겠지만(☞관련 기사 ③: "'친노'도 '영남 패권'도 없다! 문제는 '서울'!"), 나로서는 그런 접근이 무엇보다도 영남 패권주의 극복을 위한 어떤 방법론의 차이를 무슨 절대적 진영 차이로 실체화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아예 방법론으로서 적절한지도 묻고 싶다.

 

내 생각에 영남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국의 민주 세력이 서로 연대하여 새누리당을 고립시키는 것뿐이다. 영남의 진보 개혁 세력은 그 세력대로 내부에서 새누리당 1당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영남 바깥에서도 모든 민주 세력이 그에 호응하여 손을 맞잡아야 한다. 

 

영남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김욱의 인식을 공유하는 듯한 홍세화도 최근의 <한겨레> 기고에서 이런 길을 지지하며 이를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부화를 위해서 몸부림치는 병아리를 나오게 하기 위해 어미닭도 밖에서 함께 껍질을 깨야 하는 것이다. (☞관련 기사④ : 영남 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

 

그런데 김욱 등은 영남 패권주의를 극복하자면서도 지금까지의 연대를 파기하고 호남만의 길을 가자고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누리당의 고립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임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글에서 호남에 대한 배신감 운운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반(反)영남 패권주의 전선으로부터 호남의 일부가 이탈하려는 데 대한 우려의 표현이었다. 

 

다른 차원의 걱정도 있다. 김욱이라면 '지역주의 양비론'이라고 비판할 나의 제안은 규범적 수준에서 보면 지역적 차이와 갈등을 넘어 민주적-시민적 연대를 지향하는 민주 공화국의 이상 위에 서 있다. 이 이상에 따르면, 패권적이든 저항적이든(홍세화는 두 지역주의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한다) 차원은 달라도 원칙적으로 모든 종류의 배타적 지역주의나 지역 감정은 잘못이다. 

 

어떤 것이든 (서로 다른 지역 출신) 시민들 사이에 불신과 반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민주 공화국이 터해야 할 시민들 사이의 깊은 상호 존중과 연대의 기반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호남의 세속화' 주장은 이런 이상의 추구(김욱이 '호남의 신성화'라고 이름 붙인 것은 바로 이것일 텐데)를 거부하자고 선동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규범적 기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일까?

 

어쩌면 김욱과 윤종대는 사실은 영남 패권주의에 대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지역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정치적 판단과 행동의 잣대이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인식 위에서 호남 및 다른 지역들에 대해 절대적 지배를 행사하고 거기서 오는 이익을 누리려는 '단일 실체 영남 사람들'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으로 말이다. 

 

바로 그래서 5.18이라는 '군부 독재 세력'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정말이지 엉뚱하게도 '영남' 사람들의 패권적 행태로 치환해 버리고(이는, 사실관계도 의심스럽지만, 단적으로 '범주 오류'다), 또 그 군부 독재 세력과 그 정치적 후예인 새누리당에게 온갖 핍박을 받으며 반대해 온 사람들까지 영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은폐된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자라고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일 게다. 

 

지역이라는 것은 민족과 마찬가지로 어떤 '비자의적 귀속 집단'의 한 단위로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아주 중요한 정체성의 한 기반일 수 있다. 내가 볼 때 영남 패권주의는 사실은 (서울에 기반을 둔)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 또는 (내 용어로 말하자면)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이 영남 지역민의 그와 같은 성찰되지 않은 자연적 경향성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해야 한다. 

 

어떤 정치적 구성 작용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실체가 될 수 없다. 김욱과 윤종대의 접근법은 혹시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렇게 인위적-정치적으로 구성된 실체를 어떻게든 깨트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항적 지역주의를 정치적으로 구성해서 그것에 맞서자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것은 결국 사실은 허깨비 같은 그 괴물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일 텐데도 말이다.…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나는 이미 2004년 4.15 총선 이후 <한겨레>에 기고한 한 칼럼(☞관련 기사⑤ : 영남 지역주의의 본질과 상생의 정치)에서, 탄핵 역풍 속에서도 '박근혜 바람'과 더불어 당시의 한나라당이 재기하는 것을 보면서, 영남 지역주의를 이렇게 규정한 바 있다. 

 

"그 지역주의는, 박근혜 바람이 몰고 온 박정희의 생환에서 상징되듯,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천민적 근대화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동일시의 표현이다. '잘 살아 보세'말고는 다른 삶의 가치와 목적은 모르는, 그러나 어쨌든 바로 그런 선동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허위의식, 그들의 알량한 기득권에 대한 보호 본능, 말하자면 어떤 방어적 패권주의가 그 영남지역주의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 진짜 문제는 단순히 어떤 지역적 개념으로서의 '영남'이 아니다. 진짜 적은 "성장 지상주의와 사회 다윈주의, 천박한 물신숭배와 권력에 대한 속물적 맹목, 마초적 공동체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중앙 집중주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모욕 등"(같은 칼럼)에 뿌리를 두고서 이 땅의 사회적 삶을 황폐화시키고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의 퇴행을 주도하고 정당화하는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의 헤게모니다. 영남이든 호남이든 또는 그 어디든 정치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수준에서도 어떻게 이에 맞서는 민주적 대항 헤게모니를 세우고 관철할 것인지가 우리 모두의 진짜 과제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목도되는 지역주의는, 그 기원이 무엇이든, 1987년에 수립된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어떤 한계가 악화시켜 온 정치적 병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지역주의로 극복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병폐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치유할 수 있다"는 서양의 격언을 빌려 말하자면, 그 병리는 호도된 지역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단지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지역주의를 강화시키는 단순 다수결 소선거구제의 혁파 같은 제도적 수준의 개혁을 추구함은 물론이고, 일상적이고 문화적인 수준에서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더 굳건히 하고 확대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호남에서 복수의 정당이 경쟁하게 한다는 식의 표피적 차원보다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역적 생활 세계가 더 많은 인권, 더 많은 관용과 상호 존중의 문화, 더 많은 참여, 더 많은 시민적 연대, 더 많은 민주적 경제 같은 가치로 충만하게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지난 글에서 호남의 '민주주의 부족'이 문제라고 했을 때, 그것은 호남이 그와 같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결정적인 진지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 희망을 다르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호남의 지금까지의 투표 경향도 어떤 지역주의적 몰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호남의 몰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령 더불어민주당의 제대로 된 진보성을 견인하거나 다른 진보 정당의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게끔 말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야권 분열 과정은 이런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지금 무조건적인 단결과 통합만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야권의 분화를 무턱대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주도 세력이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잘했다는 이야기는 더 더욱 아니다. 여기서 자세히 논의할 수 없기에, 내가 이 당에 대한 아주 신랄한 비판자이기도 하다는 점만 분명히 해 둔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야권 분열 과정에서 그 주체들이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은 고사하고 기초적인 민주적 가치에 대한 헌신이나 당적 규율과 민주적 절차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존중해야 할 많은 호남인들의 지역에 대한 선의의 애착을 몇몇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심을 은폐하기 위해 이용하면서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열은 말하자면 보수적 분열인데다, 호남을 넘어서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수준에서 새누리당만 이롭게 할 것이다.

 

지금 와서 분열을 다시 봉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분열이 이제라도 호남 수준에서든 나라 전체의 수준에서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국민의당이 더불어민주당과 호남 지역의 맹주 자리 따위가 아니라 과두 특권 독점 세력의 제대로 된 격퇴를 두고 경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당과 지지자들이 서로에 대한 불필요한 적대와 혐오 때문에 우리의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진짜 적을 이롭게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소한 호남 바깥 지역에서는 반새누리당 연대를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선거 제도 개편을 매개로 삼아도 괜찮겠다. 양당의 지지자도 이런 연대의 필요와 당위를 명심하면서 그 방향으로 지도자들을 압박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를 끝까지 잃지 말았으면 한다. 이 논쟁이 그렇게 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월, 2016/02/15- 14:18
218
0

이번에 출간된 정치발전소 무크지, 정치에 대한 정치적 해석_폴리티쿠스 1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회원 여러분께 발송했습니다.

그동안 소중한 회비를 받으면서도 회원 여러분께 드리는 결과물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출간하게 되면서 그런 부족함이 조금이나마 채워지기를 기대합니다.

회원 여러분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한 권씩 보내드렸습니다.
지난 화요일(2/21)부터 금요일(2/24)에 걸쳐 250여 회원님들에게 우편/직접 전달 해드렸습니다.
이보다 더 많은 수의 회원님들이 계시기에 미처 주소가 확인되지 않았거나 실수로 배송명단에서 빠진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배송 시간을 고려하여 다음 주 화요일(2/28) 정도까지 책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email protected] / 카카오톡 @정치발전소 로 알려주시면 확인 후 발송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관련하여 두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정치발전소 회원은 회원가입신청서를 작성하신 후 CMS를 통해 매월 정기적으로 회비를 납부하여 주시는 분들입니다. 정치발전소의 시스템이 아직 미흡하여 회원 여부에 대해 문의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경우 메일이나 카카오톡으로 문의하여 주시면 빠르게 회원 여부를 확인하여 드리겠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번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회원 여러분들께 보내드릴 수 있게 된 데에는 보이지 않는 후원자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정치발전소 이사 중 회원 여러분께 책을 보낼 수 있도록 금전적 후원을 해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출판사를 통해 만들어진 책이기에 정치발전소 역시 책을 구입해서 보내드렸는데요, 적지않은 책 구입 비용을 후원해주셨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과 정치발전소의 성과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앞으로의 정치발전소 사업들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 정치발전소 후원계좌 : 1005-702-851358 우리은행 정치발전소

* 정치발전소 회원가입 : http://bit.ly/join_powerplant

금, 2017/02/24- 17:36
217
0

정치발전소의 2017년 1월 수입지출 내역입니다.

이번 달은 월말에 설 연휴와 주말이 끼어 있어서 27일 CMS회비 출금이 31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2월 1일에 출금된 회비가 정치발전소로 입금되었으며, 사무실 임대료 지출도 2월에 이뤄졌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2월 수입지출 내역을 보고하면서 포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강좌와 행사를 준비하는 시기인 만큼 큰 지출이 있지 않았습니다.
하루 빨리 좋은 강좌와 행사들을 준비하여 좋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위한 내용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1월 수입지출 내역

월, 2017/02/06- 16:08
214
0

 

박상훈의 민주주의 교실

<정당의 발견> 함께 읽기

> 정당은 왜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 2번의 선거와 촛불집회를 거치며 만들어진 다당체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정당들의 연정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떻게 가능한가
> 좋은 정치를 위해 정당은 어떠해야 하는가

* 이 프로그램은 <정당의 발견>을 교재로 하여 강독과 토론을 통해 진행됩니다.

<프로그램 안내>
일     시 | 5월 22일~6월 19일(매주 월) 오후 7:00
장     소 | 정치발전소
정     원 | 15명
교     재 | 정당의 발견(후마니타스)
수강신청 | http://bit.ly/정당의발견
참 가 비 | 10만원(비회원 15만원)
입금계좌 | 1005-702-851358 우리은행 정치발전소

<커리큘럼>

날짜 제목 교재
1강(5.22) 정치와 정당, 그리고 민주주의 1, 2부
2강(5.29) 정당정치의 형성과 그에 대한 도전 3부, 4부
3강(6.05) 정당의 민주적 기능과 역할 5부
4강(6.12) 정당 조직과 체계의 변화 6부
5강(6.19) 정당정치를 좋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 7부, 에필로그
목, 2017/05/04- 14:55
213
0
[세상읽기]서울시 청년수당, 그 산고의 시간들
김경미 | 정치발전소 이사

‘웅~’ 하고 전화기가 진동했다. 서울시 청년정책과 주무관 전화다. “됐어요. 됐어요. 협의 통과했어요!!!” “아! 정말요? 진짜 축하드려요. 정말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아. 뭐 저희들이 했나요. 청년들이 했지요. 그런데 진짜 기뻐요. 하하하하.” 보건복지부 반대에 부딪혀 지급되지 못하고 있던 청년수당이 잠금 해제되는 소리였다.

대선정국에 묻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식이 하나 있다. 서울시가 형편이 어려운 청년들에게 최대 6개월까지 매월 50만원씩 지급하려던 청년수당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복지부 협의를 얻어냈다는 소식이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작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로를 탐색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작은 버팀목이라도 대어주자며 시작한 청년수당이 드디어 시행 가능하게 되었다. 크게 보면 촛불정국 때문이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이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청년수당을 처음 제안했던 청년들, 이것을 서울시 정책으로 적극 받아안은 박원순 시장, 정책적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었던 전문가들 등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이 17개월을 함께 버텨낸 사람들 중에서도 서울시 청년정책담당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거버넌스에 대해 요즘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어요.” 청년수당을 놓고 서울시와 복지부 간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청년과 과장이 속내를 꺼내놓았다. “청년수당을 놓고 청년들이랑 협의를 하는데 사실 너무 어렵더라고요. 매번 논의하지만 자꾸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고. 우리가 조금 양보해서라도 이 정책이 하루라도 빨리 진행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 청년들은 너무 이상적인 모델만 이야기하는 것 같고. 청년들과 협의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어요. 그런데 문득 우리 논의가 한자리에서 계속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마치 용수철의 나선형처럼요.”

“용수철의 나선형요?” “네! 용수철요. 청년수당 반대하던 사람들이 하는 말 있었잖아요. 청년이면 쇠도 씹어먹을 나이인데 왜 돈을 주냐고. 솔직히 말해 저도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청년들이랑 한 달, 두 달, 석 달 그렇게 몇 개월을 계속해서 만나고 토론하다 보니까 청년들이 말하는 ‘인간 존엄이 지켜지는 방식으로의 청년수당’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들의 삶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지난 시간에 나눴던 이야기들이 다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청년들과의 토론 시간은 제자리를 맴돌았던 것이 아닌, 사실은 촘촘하게 용수철이 감겨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요. 단단하고 탄력있게 잘 감겨진 용수철은 멀리 날아가잖아요. 저는 그래서 우리 청년수당 잘될 것 같아요.”

그의 말에 같이 있던 청년과 사람들이 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는 촛불정국도 아니었고, 복지부와의 협의도 잘될지 예측할 수 없었던 때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보자라는 이야기를 그는 그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싶었다.

또 하나의 풍경이 있다. 청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해볼 사회적 대화 프로그램에 대해 회의를 하던 때였다. 회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 1면에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를 하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한 19세 청년 김군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김군, 우리 청년수당 지급 대상자였는데….” 누군가 회의 중 이 말을 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 청년 문제를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 제목으로 ‘너는 나다’가 정해졌다.

그냥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 이야기하겠지만, 옆에서 보지 않았으면 모를 이야기들을 그 누군가는 기록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지면을 통해 남긴다. 이런 정성들이 알알이 배여 있는 서울시 청년수당이 단단하고 탄력있는 용수철처럼 우리 청년들의 삶을 오래오래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것, 매일 아침 옹기종기 모여 인사하던 그 구호로 이 글을 마친다. “청년이 미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4272036045&code=990100#csidx999a9cc40d8030eb02e394b9a84969d

금, 2017/04/28- 16:20
21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