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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에 올라앉은 ‘올드보이’,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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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에 올라앉은 ‘올드보이’,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

익명 (미확인) | 목, 2017/04/27- 11:42

“안철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저는 앞으로 어떤 임명직 공직에도 진출하지 않겠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남겠다.”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가 4월23일 전남 목포에서 진행한 안철수 대선 후보 지원 유세에서 한 ‘선언’이다. 75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여의도 정치’의 한복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안철수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박지원이 ‘상왕’이 될 수 있다”는 네거티브에 그는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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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전남 무안읍 버스터미널 앞에서 안철수 지지연설을 하는 박지원 대표. 그는 같은날 목포 연설에서 “안철수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남기에는 그가 걸어온 길은 변화무쌍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여의도 최고의 ‘정보통’, ‘정치9단’, ‘저격수’, ’구태 정치인’ 등 그를 수식하는 말은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 가고 있기도 하다. 대선 이후 그를 수식하는 말은 무엇이 될까.

운명의 진로를 바꾼 DJ와의 만남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그의 첫 직업은 샐러리맨이었다.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한 그는 19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에 임명되며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가발 사업으로 성공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뉴욕 한인회와 미주지역 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미국 한인 사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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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열린 뉴욕코리안 퍼레이드. 왼쪽부터 김재택교수, 김세진 총영사, 카치 뉴욕시장, 한사람 건너 박지원 한인회장의 모습. (사진 출처: http://ny.koreatimes.com/article/693892)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82년 미국 워싱턴에서 망명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을 가지면서다. 김경재 한국자유총연맹 회장(민주당 전 의원)의 소개로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그는 자신의 자서전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회상했다.

 “선생님(DJ)과 나는 서로의 시국관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때로 내 생각과 다를 땐 반론도 펴고 하다 보니 제법 열띤 토론이 되었다. (중략) 

그렇게 솔직하면서도 명철한 선생님의 얘기를 들을수록 내 가슴은 이상한 환희로 벅차올랐다. 여태까지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보다는 이제부터 정말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박 대표는 DJ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라고 했다고 자서전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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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 미국 망명 중이던 DJ가 워싱턴D.C.에서 ‘김영삼 단식 지지’ 시위에 참가한 모습. 그의 목에는 ‘한국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이 당시 DJ와의 만남은 박지원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진 출처: 김대중 평화센터)

그는 호남과 섬에서 태어나 차별받던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김 전 대통령의 삶에 감정이입을 했다고 한다. 

“목포로 가니 섬놈이라고 놀림당하고, 그것이 싫어 서울로 올라가니 전라도 놈이라고 손가락질받고, 그도 싫어 떠난 미국에서는 차이니즈라고 멸시받았죠. 그래서 차별이라면 이골이 났지.” (헌 정치인’ 박지원의 화려한 ‘원맨쇼’ )

박 대표는 그 뒤 김 전 대통령의 망명생활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정치인 김대중이 미국에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후원 덕분이었다.

DJ의 복심…최고의 정보통으로 여의도 쥐락펴락 

 결국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4대 국회에 입성하며 국내 정치에 발을 들였다. 

타고난 언변을 바탕으로 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하고, 청와대 비서실장, 공보수석,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문화관광부 장관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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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 시절(1998-1999) DJ에게 보고하는 모습. (사진 출처: 박지원 의원실)

흔히 박 대표를 김 전 대통령의 ‘복심’, ‘입’이라고 부른다. 그는 김 대통령이 필요할 때 항상 옆에 있었고, 다른 이들이 혀를 내두를만한 성실성으로 신뢰를 쌓아갔다. 

대선 기간 내내 박 대표는 아침 6시께 동교동 김 전 대통령의 집을 찾았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치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성실함은 70대의 나이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목포에 지역구를 둔 4선 의원인 그는 의원이 된 뒤 ‘금귀월래(金歸月來, 금요일 저녁 지역구로 돌아가 월요일 새벽에 서울 국회로 돌아옴)’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여의도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지역구 활동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다. 

오랜 대변인 경력을 바탕으로 기자들의 전화를 놓치지 않는 습관도 유명하다. 언론으로부터 수백통의 전화가 쏟아져도 받지 못할 경우에는 나중에 일일이 다시 거는 그의 성실함에 상대 당 정치인들도 감탄하곤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그는 각종 권력형 비리를 폭로하며 ‘저격수’와 ‘정보통’이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또 3번의 원내대표를 하면서 상대 당과 협상을 이끌어내는 모습에서 ‘정치9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안철수 ‘상왕’될까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를 물려받은 그는 시대가 변하며 ‘구시대의 정치인’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과거 독재정권과 겨루던 정치방식과 호남의 박탈감에 기반을 둔 지역주의가 그의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넘어가자마자 그는 2000년 6.15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불법 대북송금을 한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2007년 2월 특별사면 될 때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이 당시 왼쪽 눈의 시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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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대북송금 특검에 의해 구속된 뒤 첫 재판에 나서는 모습. 구속될 때, 그는 “꽃잎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겠느냐”는 시를 인용하며 당시 심정을 말했다.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그는 2015년 당대표를 뽑는 2.8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후보와 경쟁할 때 당시 일들을 언급하며 문 후보를 공격했고, 지역주의를 자극해 당을 갈등으로 몰아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전북 전주 유세 중 “문재인은 대북송금 특검을 해서 우리 김대중 대통령을 완전히 골로 보냈다”고 주장해 지역주의를 조장했다는 논란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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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은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도전했지만, 문재인에게 패배했다. 이후 박지원은 ‘문재인 저격수’로 돌변해 지역주의 조장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최근 대선에서도 입만 열면 문재인 비판을 쏟아내 ‘문모닝’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지만, 저축은행에서 뒷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등 여러 비리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는 “검찰의 야당 탄압”이라고 반박해왔다.

‘영원한 비서실장’을 자임하던 그는 뿌리인 민주당을 떠나 안철수 대선 후보의 국민의당으로 자리를 옮겨 이제 ‘상왕’이라는 칭호까지 받고 있다.

물론 그는 이러한 시각에 선을 그으며 “정권교체가 꿈이다. 정권교체가 되면 ‘최초의 평양대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대선 이후 그의 행보가 호남에 갇혀 있을지, 평양으로 확장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치러지는 이번 대선에서 그의 영향력은 예전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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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압수된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의 업무수첩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내용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이 수시로 전화해 각종 지시를 내리면 그 내용을 암호처럼 줄여서 수첩에 받아 적었다.

우선 메모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나 집요하게 미르와 케이스포츠재단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해 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안종범 수첩(2015.10.21.일자)

안종범 수첩(2015.10.21.일자)

미르재단이 설립(2015년 10월 27일) 되기 일주일 전인 21일자 메모에는 재단과 관련한 대통령의 지시가 적혀있다. 재단 이름은 ‘미르’며 ‘용의 순 우리말’로 ‘신비롭고 영향력 있는’ 뜻이고, ‘이사장은 김형수’로 하라는 지시였다. 이어 이사진 명단을 불러주면서 ‘사무총장은 이성한’으로 하고 ‘조직표와 정관’을 사람을 통해 보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곧바로 인편으로 이들의 이력서와, 조직표, 그리고 정관을 보내주었고 김형수의 이력서에는 ‘이사장’이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는 것이 안 전 수석의 검찰 진술이다.

그는 또 대통령이 이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운영진으로 내정됐다는 것을 통보할 것을 지시하며 “다 검증된 사람이다”인 만큼 검증하지 말라는 취지의 지시까지 있었다고 진술했다.

안종범 피의자 신문조서 중

당시에도 대통령께서 여러 민원이나 단체를 통해서 그런 정보를 얻어 제게 지시를 하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르재단의 경우에서처럼 대통령께서 미르재단 이사진 명단을 주시면서 ‘다 검증된 사람이다’라고 하셔서 저로서는 대통령께서 검증 절차까지 다 마친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시를 따랐을 뿐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 불찰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지시가 있던 날은 청와대와 전경련이 재단 설립을 위한 실무회의를 막 시작한 날이었다. 청와대와 전경련은 21일부터 4일동안 연속으로 회의를 열어 재단 설립 작업을 마무리 지었는데 실무회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박 대통령은 이사진은 물론 조직표와 정관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케이스포츠재단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개입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안종범 수첩’에는 케이스포츠에 대한 박 대통령의 지시가 모두 10번이 등장한다. 이 중 재단이 설립되기 전 메모는 모두 5번인데 4번이 재단 이사진 인사를 지시하는 내용이었고, 내용에는 사람들의 지위와 인적사항은 물론 전화번호까지 포함돼 있었다. 포스코와 관련해서는 30억 원이 적혀 있는데 포스코가 케이스포츠에 30억원을 출연하도록 하라는 취지로 보여진다.

안종범 수첩 (2015.12.11. 일자)

안종범 수첩 (2015.12.11. 일자)

안종범 수첩(2015.12.20. 일자)

안종범 수첩(2015.12.20. 일자)

안종범 수첩(2015.12.25. 일자)

안종범 수첩(2015.12.25. 일자)

안종범 수첩(2016.01.03. 일자)

안종범 수첩(2016.01.03. 일자)

안종범 수첩(2016.1.10.일자)

안종범 수첩(2016.1.10.일자)

재단이 설립된 이후 대통령의 지시는 이른바 체육인재 육성사업을 적극 지원하는 지시로 바뀐다. 예를 들어 ‘케이스포츠와 김종 당시 문체부 차관을 연결시켜라’, ‘관광공사 산하 그랜드코리아레저(GKL)에서 스포츠단을 운영하는데 케이스포츠의 마케팅회사인 더블루케이를 소개해 주라’는 식이었고 업체 대표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불러줬다. 더블루케이가 한국 내 영업권을 갖고 있는 스위스 건설회사인 누슬리의 국내 활동을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는 반복됐다. 심지어 재단 이사장의 월급을 현실화하라거나 특정 건물을 지목하며 재단 사무실로 임대가 가능한지까지 검토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안종범 수첩(2016.1.23.일자)

안종범 수첩(2016.1.23.일자)

안종범 수첩(2016.3.6.일자)

안종범 수첩(2016.3.6.일자)

안종범 수첩(2016.3.14.일자)

안종범 수첩(2016.3.14.일자)

안종범 수첩(2016.2.26.일자)

안종범 수첩(2016.2.26.일자)

안종범 수첩(2016.3.28.일자)

안종범 수첩(2016.3.28.일자)

최순실 씨는 검찰조사에서 자신이 두 재단의 운영에 관여한 것은 대통령의 지시때문이었다고 진술했다.

최순실 피의자 신문조서 중

미르재단과 마찬가지로 대통령님이 우수한 체육인재 양성 및 지원을 위해서 스포츠 관련 재단을 만드시려는 생각이 강하셨고, 이에 전경련에 속해 있는 기업체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재단을 만들려는 의지가 있으셨습니다. 이에 관하여도 대통령님이 저에게 의견을 물으셨고, 저에게 운영체계 등이 잘 돌아가는지 체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박 대통령이 안종범 전 수석에게 지시한 내용은 최순실 씨가 대통령에게 정호성 전 비서관을 통해 전달한 내용이었다.

최순실 피의자 신문조서 중

초반에는 재단법인 미르나 케이스포츠 같은 경우 그 내용은 공감하고 있었고 초반에 재단이 틀이 잡혀져야 운영이 제대로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이사장 등 임원 명단 중 일부, 재단 이름, 사업 추진 방향 등에 대하여 정호성을 통하여 대통령께 의견을 전달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르와 케이스포츠재단 설립,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기업 사냥과 각종 이권 개입에는 박근혜-최순실 기획, 안종범 실행의 구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권한 남용이 있었다.@@@


취재 최문호
편집 윤석민

월, 2017/01/1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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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른백년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뉴스팀과 함께 ‘사랑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6편에 걸쳐 우리 주변의 삶을 들여다본다. 장시간 노동자, 청년 실업자, 경쟁에 시달리는 직장인, 노인, 청소년들이 그들이다.  

노인은 말동무를 찾아 매일같이 탑골공원에 간다. 취업 못한 청년은 안전한 직장을 가질 때까지 스스로 고립된다.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은 연인을 만날 시간조차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사치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한다. 

당신은 사랑하고 계십니까. 

<프롤로그> 1. “들어줘서 고마워”      2. 한국인의 밥상

<청년 실업자> 1. “사랑도 유예가 되나요?”  2. “연애도 사치일 뿐”   

<자영업자> 1. “주말도, 휴일도 없는 30시간 편의점이예요”  2. 쉽게 문 열고, 쉽게 망한다.

(이 글은  전남 광주에서 24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혜숙씨(가명)의 육성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런 형식을 ‘사람책’이라고 한다. 

또 이 글은 경향신문( “365일 하루 30시간 부부 맞교대…군대 간 아들 면회도 못 갔어요)에 전재됐다)

남편이랑 저랑 둘이서 13년째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는 안 써요. 하루 24시간을 둘로 쪼개서 반반씩 근무하는 셈이죠. 저는 보통 새벽 3시쯤 일어나요. 식사를 준비해 놓고 도시락을 싸서 부지런히 집을 나서면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남편이 있는 가게에 도착해요.

아무래도 남편이 야간에 고생을 하니까 10분이라도 더 빨리 가려고 애를 쓰죠. 이때가 하루 중 남편과 제가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교대시간 전후로 한 두 시간 남짓이요. 그 시간 동안은 둘이 목이 터져라 얘기를 하죠. 진상손님 흉도 보고, 못했던 잔소리도 하고. 그때는 손님도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님이 오면 대화를 못하잖아요.

하루 2시간, 한 달에 이틀 반나절을 함께하는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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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쯤 남편이 집으로 가고 나면, 그날 팔 빵을 구워요. 우리 편의점은 빵이랑 쿠키를 직접 구워서 팔아요. 그리고 8시부터는 상온제품, 유제품 등 연달아 들어오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재고가 없는 건 추가 발주를 넣어요.

틈틈이 빵을 굽고 포장하면서 손님을 받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요. 보통 오전 11시 전에 가게에서 첫 끼를 먹죠.

정오가 되면 근처 대학에서 학생들이 점심을 해결하러 몰려들거든요. 그 전에 해치워야 해요. 밥은 카운터 안쪽에 간이식탁을 펴놓고, 집에서 싸온 몇 가지 반찬이랑 먹어요.

어떤 날은 손님이 몰려서 한 끼 먹는 데 두 시간씩 걸리기도 해요. 오후 3시 반쯤 남편이 다시 오면 저는 집으로 돌아가요. 정말 하루가 금방 가죠.

편의점 일이 편하다는 말은 다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예요. 정말 혼자서는 손발이 모자라죠. 쉽게 생각하고 덜컥 편의점을 시작했다가 한 달 만에 두 손 들고 나가는 경우도 여럿 봤어요.

저희끼리는 24시간이 아니라 ‘30시간 편의점’으로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말해요. 혼자서는 도저히 창고정리나 청소를 하기 힘들어서, 교대시간 전후로 둘이 같이 근무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사실상 남편은 하루에 15시간 이상 가게 일을 하고 있어요. 자영업이 다 그렇긴 하지만요.

주말도 휴일도 없는 연중무휴의 도돌이표 하루

편의점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가정주부였고, 남편은 은행에 다녔어요. 은행 지점장을 7~8년 정도 했어요. 2000년도였을 거예요. 외환위기 칼바람을 간신히 피했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마지막 해고바람이 불었어요. 그때 명예퇴직을 당했죠.

남편이 40대 후반이었고 첫째는 고3, 둘째는 겨우 중2였어요. 돈 들어갈 일이 너무 많은 시기였죠. 남편이 작은 개인회사에 재취업을 했었어요. 그런데 자금을 끌어오고 영업을 해야 하는 일이라 남편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만뒀죠.

당시에 은행에서 받은 퇴직금도 있고 집에 목돈이 꽤 있었는데, 사기꾼이 붙더라고요. 사기도 여러 번 당했어요. 남편이 돈을 벌어보겠다며 주식도 하고 사업투자도 했지만 다 여의치 않았어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그때 지인이 편의점을 하고 있었어요. 물어보니, 편의점은 장사경험이나 별다른 수완이 없어도 해볼 만하겠더라고요.

그때는 편의점 매출이 많지 않아도 본사에서 점주들한테 최저수입을 보장해주기도 했고. 그렇게 알음알음 시작하게 됐어요. 본사에서 주는 최저보장금이라도 다 챙겨보자고 생각했죠.

매장을 세 번 옮기면서 편의점을 하는 12년 동안, 제가 몸이 아팠을 때 잠깐 빼고는 아르바이트를 쓴 적이 없어요. 저희는 편의점을 처음 할 때 누군가에게 뭘 팔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컸어요. 지금도 서로 “장사는 정말 나랑 안 맞아”라고 말하죠.

영업을 잘해서 떼돈을 벌 자신도, 능력도 없었어요. 인건비를 줄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몰랐죠. 그래서 초기에는 둘이서 하루에 열대여섯 시간씩 근무하며 일을 배웠어요. 편의점이라는 게 쉬는 날이 없잖아요. 가게를 시작한 뒤부터 12년째 저희 부부는 주말도 휴가도 없이 집과 가게만 오가며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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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부부는 끼니 때가 되면 편의점 한 구석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는다. 사진은 김씨가 싸온 도시락 모습.

요즘에는 제가 몸 관리를 하느라 일주일에 세 번, 퇴근 후에 운동을 다니긴 하지만 집에 가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자려고 하죠. 몸이 너무 힘드니까. 하루 대여섯 시간 정도 자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아들 방학 때만 기다려요. 기댈 곳은 우리 아들밖에 없으니까. 둘째 아들이 다른 지역에서 대학원을 다니는데 방학이면 집에 와서 가게 일을 도와주거든요. 아들 덕에 일주일에 하루 이틀만 가게를 쉬어도 감지덕지죠.

편의점과 집 밖에서는 잠수인생

저희는 아들 둘 다 군대 면회를 한번도 못 갔어요. 첫째는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입소할 때 데려다준 게 끝이었고, 둘째는 면회는커녕 군대 갈 때 데려다주지도 못했어요. 편의점을 하니까 하는 수 없었어요.

그러다 잠깐 편의점을 쉬었던 5개월 동안 집에 있으면서 애들 밥해주고 집안일하면서 보냈는데, 작은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엄마가 집에서 밥을 해준다고. “엄마, 너무 좋아. 너무 좋아” 그러더라고요. 미안했어요. 둘째가 중2 때부터 제가 편의점을 한다고 집에 없었으니까요.

저희가 친정이나 시댁 식구가 참 많은데, 결혼식 등 경조사에 참석 못한 지도 10년이 넘은 것 같아요. 못 갔어요, 한번도. 가려면 또 대충 하고 갈 수는 없잖아요.

남편도 저도 365일 24시간을 편의점과 집만 왔다 갔다 하니까 입고 갈 옷이 없는 거예요. 애들 아빠도 회사 다닐 때 입던 낡은 양복 밖에 없고. 그런 상황이 돼 있었어요. 옷을 사고 구두를 사고 또 준비를 하고, 그러기가 싫었어요. 여유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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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남편은 은행지점장으로 일했지만 2000년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했다. 사진은 1998 외환위기때 대량해고를 당한 한 은행원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 출처: http://www.gokorea.kr)

친구들이 자식 결혼한다고 연락이 오면, 저는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하고 애들 아빠는 일 때문에 못 간다고 말해요. 그래서 저희 부부는 우리 아이들 결혼할 때 아무도 안 오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친정어머니가 치매예요. 처음에 남매들끼리 돌아가면서 돌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편의점 일을 하면서는 제가 어머니를 모실 수 없잖아요. 그때가 두 번째로 했던 편의점 매장 계약이 종료되고 잠깐 쉴 때였는데, 새로 편의점을 열기 전까지 한 20일 정도 저희 집에서 친정어머니를 모셨어요. 이게 마지막이다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어느 날은 오빠가 전화를 해서 “이제 네 차례니까 네가 좀 모시라”고 하는 거예요. 전 “다들 사는 거 바쁘고 힘들어서 집에서 어머니 모시기 힘드니까 요양원에 가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독하게 말해버렸어요.

남편이 은행에 다니고 제가 집안 일만 할 때는 사교모임이 많았어요. 취미생활도 하고. 그런데 편의점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친구들 모임에도 제가 먼저 잠수를 타게 되더라고요. 계속 모임에 나가지 않다보니 연락이 점점 줄고 자연스럽게 아무도 안 만나게 됐어요.

지금은 같이 편의점 하면서 알게 된 친구 말고는 연락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종일 편의점에 있다 보면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끊어야 하고, 시간 내서 누굴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동네 주민 모임은 회비만 내고 있어요.

자주 오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편의점은 단골 개념이 적기도 하고, 손님들과는 절대 친하게 안 지내요. 되도록 말 섞지 않으려고 하죠. 외상을 달라고 하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려워지거든요. 또 까딱 잘못하면 사기당하니까. 몇 걸음만 가면 근처 편의점이 두 곳이나 있는데 거긴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주인 얼굴도 몰라요.

저희 부부는 편의점이나 집이 아닌 곳에서는 일종의 잠수를 타고 있는 거예요. 사회생활, 사적인 생활 모두에서요. 라디오에서 저와 비슷한 사연만 나와도 꺼버리고 독하게 일만 했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이런저런 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지 않기로 했어요. 살다보니, 외롭고 슬프고 그런 감상에 젖어서는 내가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감정이 늙어버린 것 같아요.

“자식들 때문이 아니면 이걸 왜 하겠어요?”

두 번째 편의점 계약이 만료되던 때가 저희가 편의점을 시작한 지 딱 10년째 될 즈음이었어요. 처음 가게는 유흥가에서 했고, 그 다음 가게는 중학교 앞에서 했는데 술꾼들, 사고치는 중학생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한테 굉장히 치였죠.

정말 편의점 하면서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예요. 오는 손님들도 다 미워 보이고. 그래서 계약이 만료되면 다시는 편의점을 안 하려고 마음먹었었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행이나 다니면서 푹 쉬려고 했어요. 그런데 쉬면서 수입이 딱 끊기고, 있는 돈만 쓰니까 금방 불안해지더라고요.

연금 조금 나오는 것 가지고는 생활하기 힘들어요. 우리가 앞으로 10년만 살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놔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른 일을 해보려고 집에서 가까운 직업훈련소에 몇 달 다녔어요. 저는 제봉을 배우고 남편은 양재를 했어요. 편의점을 그만두고 앞으로는 무조건 둘이서 붙어 다니자고 합의를 했거든요. 계속 서로 못 보고 살았으니까.

2개월 넘게 다녔는데 전망이 너무 없어서 그만뒀어요. 직업훈련소는 별로 쓸모가 없어요. 정부는 왜 그런 데 돈을 쓰나 몰라요. 그러고는 5개월 만에 다시 편의점을 열었어요. 남편이랑 편의점 쪽은 쳐다보지도 말자고 했었는데, 다시 24시 편의점을 하게 된 거예요. 이 나이에 저희가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편의점을 다시 하게 된 건 아이들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자식들이 다 독립했으면 저희가 왜 이걸 하고 있겠어요?

첫째는 아직 경제적으로 자리를 못 잡았고, 둘째는 취직 대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우리 애들 나이가 서른넷, 서른하나예요. 예전 같았으면 벌써 독립해서 장가갈 나이인데 아직 그러지 못해서 저희 부부가 이러고 있죠.

저희 또래들이 요즘에는 다 자식 때문에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것 같아요. 세상이 그렇게 변해서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참 힘든 건 사실이에요. 힘들어요.

가게를 그만두면 남편과 여행을 가고 싶어요.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한번도 못 갔어요. 그런데 자식들 결혼도 안 시켰고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사회적으로 복지가 최저생활이라도 가능한 정도만 지원되면, 저희가 편의점을 그만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월, 2017/02/2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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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실세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인물인 최순실, 차은택 씨 관련 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커뮤니케이션즈(이하 플레이그라운드)가 회사 관련 자료들을 대거 폐기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한 정황이 뉴스타파 취재과정에서 포착됐다. 이들이 폐기를 시도한 자료엔 청와대 등 정부기관은 물론 대기업 고위관계자들과 플레이그라운드 측이 관계를 맺어왔음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포함돼 있다. 또한 미르재단과의 연관성이 확인되는 자료들도 폐기하려 한 것으로 드러나 검찰 수사에 대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최순실 관련 법인 중 유일하게 거액 챙긴 ‘플레이그라운드’…증거인멸 정황 포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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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홍보 회사인 플레이그라운드는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관계자인 차은택 씨의 차명 소유 의혹이 제기돼 온 회사다. 최순실 관련 법인 중 유일하게 거액을 챙긴 사실이 드러난 집중 조명을 받아 왔다. 미르재단 설립 20일 전인 지난해 10월 7일 설립된 이 회사는, 설립하자마자 현대자동차 그룹, KT 등 대기업 광고를 대거 수주했다. 올해 상반기 매출만 17억 여원. 신생 광고회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대통령 해외순방 공연 행사를 총괄하며 15억 원의 국고보조금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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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그라운드의 현 대표는 삼성그룹 출신의 김홍탁 씨다. 그는 차은택 씨와 업계 선후배 관계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K스포츠재단을 적극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의 고교 동창이다. 최순실-차은택 라인 뿐 아니라 정부 차원의 특혜를 받아온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 이유다. K스포츠재단이 최순실 관련 법인인 ‘더블루K’를 통해 스포츠계 사업 이권에 개입했다면, 미르재단은 ‘플레이그라운드’를 통해 문화예술계 사업을 장악하려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플레이그라운드가 폐기한 자료에서 청와대 등 정부기관 명함 대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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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최근 플레이그라운드 측이 증거인멸 의도로 폐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내부 자료를 일부 입수했다. 그리고 자료 더미에서 청와대 등 정부기관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았다.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미래창조과학부 등 모두 11곳 정부기관 관계자들의 명함이었다. 설립된 지 1년밖에 안 된 신생 광고회사가 받은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명함의 면면은 화려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명함은 미래전략수석실, 고용복지수석실 소속 행정관 명함이었다. 모두 광고회사 업무와의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취재진은 이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왜 플레이그라운드와 명함을 주고 받았는지 물었지만, 대부분 김홍택 대표나 플레이그라운드라는 회사 자체를 모른다고 답했다.

김홍탁 씨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플레이그라운드라는 회사를 알지도 못하고 김 씨와 명함을 주고 받은 기억이 없다. 그가 왜 나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다.청와대 김 모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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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수한 자료에선 신생 광고회사가 접촉하기 어려운 유명 대기업 회장들의 명함도 발견됐다. 그 중 눈에 띄는 건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임명됐던 김성주 MCM 회장의 명함. 그는 최순실 씨와 친분이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뉴스타파는 왜 신생 광고회사와 명함을 주고 받았는지, 이 회사 관계자와 어떤 관계인지를 묻기 위해 김 총재 측에 연락했다. 그러나 MCM 측은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컨퍼런스 등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치듯 명함을 주고 받은 것 같다. 어떤 행사에서 명함을 줬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김홍탁 대표를 알지도 못 하고 개인적인 만남은 없었다.MCM 홍보팀 관계자

폐기된 자료에서 미르재단 법인카드, 최순실 카페 ‘테스타로사’ 직인도 나와

플레이그라운드가 미르재단, 최순실 씨와 직접 관련됐음을 보여주는 단서도 여럿 확인됐다. 먼저 확인된 건 플레이그라운드 내부 직제표. 직제표에 적힌 임직원들 중 상당수는 미르재단, 최순실 씨와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그 동안 미르재단의 사무부총장인 김성현 씨가 플레이그라운드의 이사로 활동했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져 왔는데, 김 씨 말고도 플레이그라운드 임직원 여러 명이 최순실씨와 관련이 있는 인물임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은 재무이사인 장순호 씨. 그는 최순실 씨가 운영한 까페 ‘테스타로사’의 건물주이자 까페 운영업체인 존앤룩씨앤씨의 이사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최순실 씨 모녀가 독일에 설립한 법인 ‘비덱’의 임원도 맡고 있다.

취재결과 장 씨는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 계절학기 수업으로 중국에 갔을 때 동행했던 보디가드 중 한 명과 부자관계로 확인됐다. 이곳의 재무팀장 역시 최순실 씨 비서 역할을 했던 엄 모 씨였다. 뉴스타파가 확보한 직원명단을 통해 플레이그라운드가 최순실, 미르재단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 동안 “미르재단이나 차은택 씨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 온 김홍탁 플레이그라운드 대표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 뉴스타파 취재결과 지난 여름방학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가 계절학기 수업으로 중국에 갔을 때 동행했던 보디가드 중 한 명은 플레이그라운드의 재무이사이자 최순실 씨 최측근인 장순호 씨 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 뉴스타파 취재결과 지난 여름방학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가 계절학기 수업으로 중국에 갔을 때 동행했던 보디가드 중 한 명은 플레이그라운드의 재무이사이자 최순실 씨 최측근인 장순호 씨 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입수한 자료 더미에선 미르재단 법인카드와 최순실 소유 까페 테스타로싸의 인감으로 보이는 회사 직인 등 중요한 회사 기물도 나왔다. 또 ‘미르’라는 단어와 함께 사업진행 절차가 적힌 메모지들도 발견됐다. 플레그라운드가 검찰 수사에 대비해 최순실, 미르재단과 관련한 증거들을 없애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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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플레이그라운드 김홍탁 대표에게 청와대 인사 및 미르재단과의 관계 등을 묻기 위해 수차례 전화와 문자로 연락을 취했다. 직접 자택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김 대표는 자택에도 열흘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다. 최순실 관련 회사의 핵심 인사인 김성현 이사, 장순호 재무이사 등의 행방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번에 플레이그라운드에서 폐기된 자료들은 검찰이 신속하게 수사에 착수하지 않은 사이 많은 증거들이 인멸됐을 가능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늑장수사, 부실 수사가 결국 봐주기 수사로 끝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의문이 제기된다.


취재 : 홍여진, 한상진, 강민수, 조현미
촬영 : 김남범, 최형석
편집 : 윤석민

목, 2016/11/03-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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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칼럼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에서 현재 한국산업구조의 근육질적 경직성을 지적하고 격변하는 외부환경에 응동할 수 있는 유연한 연성구조로 전환하여 급작스런 실패와 외부적 충격을 대비할 것을 제안하였다.

경직성과 더불어 한국경제가 지닌 심각한 위험요소는 주요재벌 그룹에 지나치게 편중되거나 의존되여 있다는 것이다. 재벌들이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 한국경제의 위험한 현실은 2015년 기준으로 상장된 싯가총액의 약 45%를 10대 재벌이 점하고 있고, 특히 삼성전자과 현대자동차 계열 양대그룹이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30% 수준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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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최대 리스크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 그 중에서도 삼성, 현대 등 일부 재벌의 집중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다. (자료: 홍종학 경제정책연구소)

삼성, 현대가 무너진다면?

우리가 매일 북한문제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다루고 있지마는 오로지 경제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남한 경제규모의 5%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북한경제수준이다. 자연히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그룹이 실패하여 파산될 경우 한국사회와 산업에 미치는 파장과 부담은 북한붕괴보다 훨씬 클 수 있다고 판단된다.

사정이 이렇게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양대그룹의 주요 결정이 소수의 총수가족들에 의해 족벌경영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대한민국 5천만 국민들의 운명을 이씨와 정씨 가문들이 사실상 틀어쥐고 있는 셈이다. 김동춘 다른백년 연구원장이 이런 모습의 한국을 ‘기업(영주)국가’로 명명한 것은 지극히 타당하며,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하에서는 박근혜정부 관료들은 이들 재벌가문의 마름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정부가 북한의 붕괴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하듯이, 당연히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그룹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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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현대가 망하면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될까. 한국경제가 통째로 망하진 않아도 워낙 이들 기업의 비중이 커서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들 기업의 혁신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관심이 클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ilyo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58)

혹자는 필자가 일어나지도 일을 침소봉대 과장하여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킨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이러한 비난이 맞기를 바라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불과 수 년전까지 핸드폰 분야의 절대강자였던 노키아의 몰락과 현재 선진국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의 창조적 단절적 격변과정을 지켜보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경제는 현하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보다 책임있는 자세다.

더구나 마른날에 폭우와 장마를 대비하는 것이 위기관리대책의 기본원칙이다. 요즘처럼 날씨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삼성은 안전한가

국가 또는 정권이 해야 할 가장 주요한 책무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다.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들은, 오로지 정권유지를 위해서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여 사드배치 등 온갖 분란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1)기후변화에 따른 전력 및 에너지정책, 2)자연재난 방지대책, 3)외생 바이러스가 가져올 대규모 질병위험에 대한 검역과 의료체계, 그리고 4)불안정한 재벌 독과점에서 오는 금융과 산업적 위기(contingency)을 예측하여 사전적 예방적 점진적으로 위기요소들을 분산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재의 박근혜 정권은 무능한 정도를 넘어서 한국의 미래를 자해하는 재앙적 집단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를 들여다 보자. 2015년 기준으로 계열사를 제외한 전자사업 분야만 연 200조 매출에 25조 수준의 영업이익을 내는 세계적 규모의 매머드급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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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포트폴리오는 거의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색가전,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이 경기변동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상호 완충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삼성도 극심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안심할 수 만은 없다.

사업분야도 백색가전, 반도체와 액정판넬, 모바일통신기기(IM)와 관련전자 부품 등으로 4-5개 영역으로 다변화되여 있고, 생산거점과 수요시장도 국내외를 포함하여 지역별 권역별로 균형적으로 잘 배치되여 있다. 겉으로 보면 난공불락의 요새로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간판 기업임에 틀림없다.

가전분야

사업분야별로 내용을 개략적으로 들여다보면, LG와 함께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가전분야는 다양한 제품과 디자인의 구성으로 당분간 위험요소가 없어 보인다. 가전제품 수명과 시장의 수요특성상 단기적이기보다는 3-5년 단위로 중기적 변동과 충격이 예상되며 핵심은 일상적인 기술개발과 혁신역량을 유지하는데 달려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시절 절대 강자이였던 일본의 소니와 유럽의 필립스 등이 지금은 잊혀진 존재가 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장기적 몰락은 삼성과 LG에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

디지털시대의 쌀이라고 할 반도체와 액정판넬은 천문학적 투자규모와 세계일류수준의 생산기술을 강력한 보호막으로 내세워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아마도 한나라의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을 독점할 수 있는 한국적 재벌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거대한 자국 수요를 기반으로 삼성을 능가할 수 대규모 투자를 암시하고 있고, 일본과 대만이 손잡고 기술과 규모의 양면에서 한국업체들을 항상적으로 협공하고 있다. 액정판넬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로 경쟁력을 유지하고 비메모리 반도체분야에서 경쟁적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수익을 즐겼던 위치에서, 조만간 적자를 감내하면서도 시장점유률 방어에 급급한 형세로 바뀔 수 있음을 예고한다.

조선분야에서 경험했듯이, 잘못되면 천문학적으로 이루어진 고정자산에서 발생하는 과다한 관리비용이 삼성전자라는 개별 기업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전반에 역풍을 불러올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할 것이다.

모바일과 부품분야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분야는 역시 모바일통신기기와 부품사업 분야이다. 삼성내 부품사업 분야의 수요는 대부분 삼성전자 자체수요이다. 따라서 모체인 삼성전자가 잘못되면 부품사업 분야는 대부분의 판로를 상실하고 파산할 수 밖에 없다.

협력사들의 기술을 편법으로 갈취하는 등 많은 전문기업들의 희생위에 자신들만의 계열자회사를 일방적으로 밀어주며 성장한 재벌들이 국민경제에 매우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 지점이다. 잘 나갈 때는 사업수익을 사적형태로 독점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계열전체가 동시에 무너지면서, 어쩔 수 없이 공적 영역인 금융과 재정 등이 동원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하여 국민경제의 또 다른 폐해와 부담을 요구하게 된다.

IM분야는 항상 창조적 기술이 급작스레 단절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이다. 1년 미만 단위의 초단타 혁신으로 기업의 생사존망이 결정되는 항상적 전투지역이다. 지금까지 너무나 잘 선방하고 있는 삼성의 IM사업부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노키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한때 핀란드 경제의 4-5% 비중을 차지했던 한 기업체의 파산으로 혁신과 교육의 일등국가로 알려져 있는 핀란드가 지금까지 수년간 심각한 마이너스 성장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현대자동차도 안심할 수 없어

현대자동차그룹은 규모면에서는 삼성전자의 절반도 안되지만 수천개 부품들의 조립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기계 금속 전기 전자 화학 등 여러 산업분야의 종합적 협력을 필요로 하는 자동차 산업의 특징을 감안하면, 제조업분야에 대한 파급력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오히려 삼성전자그룹보다도 크고 중요한 기업군이다.

IMF 위기 당시, 전세계 자동차산업 환경속에서는 BIG 3 만이 생존할 수 있다고 발표한 보스톤 컨설팅의 예측보고서(미국의 기업사냥꾼을 위해서 준비된)를 비웃기나 하듯이 세계시장의 강자로 우뚝 선 현대자동차그룹은 한국 국민의 자존심이다.

현대차의 고전을 예상했던 필자에게도 현대차의 선전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그러나 현하 자동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술혁신과 사업모델의 변화는 조만간 자동차산업 분야에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전기자동차

미국의 테슬라 사를 필두로 전기자동차가 실제로 양산되여 도로를 달리고 있는 현실은 지난 백여 간 자동차 동력기술의 중심였던 내연기관이 전동기 또는 Fuel-Cell(수소에너지)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으로 산업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리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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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자동차산업은 전기차로 넘어간다는 전망이 많다. 현대차도 이에 대비하고 있지만, 과연 경쟁에서 살아남을지 불확실성이 크다. 사진은 테슬라의 전기차 모습. (사진 출처: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10710594973854)

새로운 동력기술에 대해서 한국의 산업계는 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설령 현대자동차 측에서 R&D 수준의 차량을 개발한다 해도 이는 주요 기능품들을 외국의 선진기술업체에서 도입하여 껍데기만 씌운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미래의 산업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하여 무인운전차량이 시장에 보급되고 확산되기 시작하면, 우버 등이 시작한 콜택시 사업에 더하여 미국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한 차량공유시스템인 집카가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

공유 자동차

집카의 개념은 자신의 차량을 소유하지 않고도 대규모의 공유시스템을 통하여 필요한 시점에 차량을 요청하면 언제라도 요청지점 근처로 편하고 신속히 차량이 배치되고, 사용한 후엔 하차지점을 통보하고 주차시키면 다음 사용자가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차량의 공유네트워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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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여러 명이 필요에 따라 공유하는 시대도 성큼 다가왔다. 사진은 공유차 비즈니스 모델인 집카. (사진 출처: http://www.wikitree.co.kr/main/ann_ring.php?id=48788&alid=67194)

현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차량의 운전점유시간을 생각해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대부분 하루 일과 중 차량운전시간은 2-3시간 뿐이다. 출퇴근을 공공교통기관을 이용한다면 이 시간은 더욱 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콜택시와 차량공유시스템이 보편화되면 자동차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필요가 격감할 것이다. 상상의 영역이 아니라 미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이다.

이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이제부터 양적 생산규모를 확대하는 것은 미래의 자살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에서는 격변하는 기술 혁신의 경쟁을, 다른 한편에서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변해가는 과정을 겪어 나가야 한다. 이는 현대자동차가 속한 단일 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계 금속 전기 전자 화학분야 등 한국산업 전체를 재구성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동차회사들은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제조업에서 생산을 넘어서 공유자동차중심의 서비스 네트워크와 정비기술과 금융제공을 혼합한 새로운 사업모델로 변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예고편이기도 하다. 동시에 재료 및 부품 생산과 수송중심으로 편재되여 있는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와 협력사들도 단절적인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삼성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전문기업을 수탈하며 독점이익을 형성한 재벌계열의 갇혀있는 구조가 국민경제에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재확인하게 된다.

다행인 것은 자동차운용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용해야하는 인프라와 규칙이 선결되어야 하며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급작스런 변화가 오기 어렵다는 점이다. 점차적인 실행과정에 충분한 적응과 변신의 시간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두 기업의 혁신 이야기: 코닥필름과 후지필름

위에서 필자는 한국산업이 가지고 있는 재벌중심의 경직된 구조를 유연한 연성구조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와 독과점체계를 벗어나 협력과 공유를 중심으로 수많은 전문기업과 중소기업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산업클러스터적 조건과 환경조성이 시급히 필요한 배경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시각으로 국민경제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그룹의 사업내용을 개략적으로 분석하여 보았다.

이제는 한물이 간 필름산업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던 미국의 코닥과 일본의 후지필름의 경험사례를 소개하면서 한국정부와 기업들이 참조할 만한 내용을 살펴 보려한다.

이들 기업들의 사례는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면 모두가 대충 알고 있는 내용으로, 후지필름사는 혁신과 사업모델의 변신에 크게 성공한 사례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에 코닥은 완전히 몰락한 퇴물로 취급되고 있다. 기업단위로 보면 위의 이야기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개별기업이 아닌 지역경제라는 다른 시각으로 코닥의 새로운 역할과 지역사회에 보여준 남다른 기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후지필름의 도약

필름이미지 산업은 1990년을 정점으로 디지털 카메라가 대량 보급되면서 세계시장규모가 급격히 축소하여 2000년경에는 매출규모가 1/10 이하로 떨어진다. 이 과정에서 필름산업분야의 3대 업체로 불리웠던 독일의 아그파 필름이 2005년에 진즉 파산하고, 2012년에는 한때 세계시장의 70%까지 석권했던 코닥사가 재무불능상태를 선언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함으로서 전설의 시대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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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코닥사 규모의 10% 수준에 머물러 줄곧 ‘코닥타도’를 외쳐 왔던 후지필름이 2003년에 평직원으로 입사하여 30년 넘게 자사 근무를 했던 시케시타 고모리를 회장으로 지명하고 회사전략을 ‘탈필름산업’으로 전환하면서 혁신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당시 회사 매출의 57%를 점했던 이미지 솔루션 사업부( 필름과 카메라 등 광학기기 )를 대폭 축소하고 15,000명 종업원 중 이미지솔루션 사업분야 직원을 중심으로 5000여명 해고 하는 등 고통의 시간을 겪는다.

필름산업을 통해 획득한 화학공정과 약품 그리고 광학 및 영상처리 기술 등을 기반으로 새롭게 정보솔루션( 화장품,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 사업부를 대폭 확충해 간다. 이 과정에서 1962년 합자로 출발했던 후지제록스(다큐멘트솔루션 사업부로 매출의 40%를 담당했다)가 매우 중요한 사업적 재무적 기반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일본기업들이 정체되거나 축소되고 있던 2000년대 10여년 동안 후지필름은 40여개의 관련업체들을 인수합병하면서 2013년에는 매출규모가 두배로 늘어난 2.2조엔 그리고 종업원 8만명의 규모로 성장한다. 특히 적자기업인 도야마 제약회사를 인수하여 에볼라 치료제인 ‘아비간’을 개발하여 양산체제에 들어가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

2013년 기준으로 한 매출 2.2조엔의 구성에는 카메라중심의 이미지솔루션 사업부 비중이 13%로 축소되고 화장품과 의료중심의 정보솔루션 사업부가 급속히 확대되여 41%선을 차지하며 기존의 제록스사업부가 역시 45%선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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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후지 필름의 최고경영자(CEO)에 취임한 고모리 시게타카. 고모리는 필름 매출 하락을 상쇄시키기 위해 제약, 화장품을 자회사로 설립하는 등 뼈를 깍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세계를 주름잡던 필름산업의 주요 업체들이 파산하거나 몰락하고 일본경제가 축소일로의 어려운 과정속에 있었음에도 암울했던 10여년 기간에 매출을 두배 이상 신장시킨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이다. 일본 경영계에서 고모리씨를 경단련(한국경총에 준하는) 회장으로 모시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이러한 성공의 비결에는 전문경영자의 탁월한 예측능력(risk-hedging), 후지필름사의 기본에 착실한 기술력, 다중적 기업을 지향하는 일상적인 혁신프로세스(open innovation hub 운용), 개방적인 기업문화와 선진적인 경영기법에 더하여 이해관계중심( 사회, 환경, 고객, 주주, 파트너 및 종업원의 균형적 배려, www.fujifilm.com 참조)의 기업철학도 큰 몫을 했다.

사실 재무지표를 보면 별로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영업이익율 8-10%, 자본이익율 ROE 4-5 % 등 일반우수기업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반면에 R&D 투자액에 영업이익에 접근하는 6-7% 선을 계속 유지하며 지속적인 혁신과 인수합병을 추구하는 점, 회장 자신이 8만명 종업원의 한사람일 뿐이라고 겸손하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기업문화, 그리고 변하는 환경과 시장조건에 사전적으로 철저하게 대비하는 전문경영능력 등이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산업구조 조정기에 들어선 한국업체들이 당연히 본받고 깊이 연구할만한 내용이다.

코닥필름의 몰락

반면에 1881년 조지 이스트만이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설립된 코닥사는 2012년 법정관리신청에 들어갔고 한때 전세계에 종업원이 15만명을 거느렸던 대기업이 2015년 현재 종업원이 천명 이하로 추정되는 규모로 축소 몰락하였다. 한때 코카콜라와 맥도날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던 브랜드로 13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코닥 본사의 건물을 해체하는데 불과 18초가 걸렸다는 비아냥을 듣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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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닥의 몰락에 대해서는 많은 경영학 전문가들의 연구발표가 있어 왔다. 사실인즉 1975년에 세계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한 업체가 다름아닌 코닥사 자신이였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핵심적인 몰락의 가장 큰 이유는 존속기술과 현재이익에 집착한 기득권의 함정(active inertia)이였다는 것이 중론이고, 중국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무리한 계약을 체결했다가 입은 상당한 손실, 회사의 내용에 익숙지 않은 연봉거액의 외부경영전문가 영입에 따른 잇따른 실책 – 후지필름은 자사에 30년 이상 근무경험이 있는 고모리씨를 회장으로 지명한 사실과 비교해 볼 것- 그리고 파괴적 혁신을 시도한 사업모델이 연속적으로 실패한 점 등을 이야기한다.

망할 때는 코닥처럼 망해라

필자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는 코닥이라는 전설적 기업의 흥망사가 아니라 코닥사가 위치해 있던 ‘로체스터’지역이 코닥몰락 이후에 보여준 남다른 모습에 관한 것이다.

대규모 제조업체가 몰락한 도시는 rust-belt 라 불리면서 황폐해져가는 것이 미국사회의 상식이였다. 자동차산업의 메카였던 디트로이트, 동부의 산업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와 볼티모아 등이 이 경우에 속한다.

한때는 6만명 정도가 코닥본사에 근무했다가 이젠 천명도 못미치게 된 ‘로체스터’지역도 당연히 rust-belt 로 전락하리라 쉽게 예상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코닥이 몰락한지 십 여년이 지난 2015년 현재 ‘로체스터’의 경제지표가 미국내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우수한 지역에 속하며, 오히려 새롭게 9만여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면서 실업률도 미국평균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잘못된 대기업의 몰락, 大馬必死가 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지역경제를 부활시키고 활성화시킨다는 轉禍爲福의 매우 소중한 사례이다. 어떤 요인들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 거제와 울산 등 현안 지역를 지닌 우리의 뜨거운 관심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몇몇 신문사들과 시민단체들이 이 주제를 단편적으로 다루어 소개한 내용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내용인즉 매우 상식적 수준으로 지역사회내 시민단체와 대학과 정부기관이 효과적으로 연대하여 대응했다는 정도로 소개되여 있다.

필자는 이 주제를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내용을 넘어서서 보다 깊이 파고들고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아래의 내용은 필자 나름대로 조사한 것을 정리한 것으로 향후 추가적인 연구에 도움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1, NBN( Neiighbors Building Neighborhoods) 프로그램.

로체스터 시당국이 제안하고 추진한 내용으로 로체스터 지역을 10개 구역으로 세분하여 구역주민들의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참여하에 구역경제의 재건과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도록 한다는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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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하여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는 과정에서 행정당국은 직접적 개입은 자제하고 다만 프로그램을 촉진하고 필요한 자원과 예산과 인력을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구역내에 있는 기업과 학교(로체스터지역에는 20개가 넘는 직업대학이 존재) 및 전문단체들과는 협력적 파트너쉽을 구축하도록 유도했다.

처음에는 참여가 저조하고 실적도 미약하였으나 시장 등 지자체 관리들의 열정적 설득과 지속적인 노력으로 점차 활성화가 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매우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지역분권과 자치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2.EBP ( Eastman Business Park) 프로그램.

코닥은 그냥 몰락하지 않았다. 기업의 사회적 첵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뉴욕주정부와 협력하여 코닥본사가 소유했던 1,200 에이커(백오십만평)의 대지와 건물을 재개발하여 새로운 사업을 하려는 기업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EBP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EBP
코닥은 과거 공장 부지를 스타트업 기업을 위한 공간을 내놓았다. 사진은 EBP 프로그램에 따라 활용된 옛 코닥공장의 모습.

코닥이 제공하는 대지와 건물위에 뉴욕 주정부가 5천만불을 제공하여 창업 start-up program을 지원하였고 이후 발생하는 추가비용은 주정부와 코닥이 공동부담하는 원칙을 세웠다.

3년이 지난 2015년 현재 55개 기업이 입주하여 6,500여명을 일하고 있으며 활발한 창업과 혁신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다. 대부분 창업주와 해당 종업원은 기존의 코닥과 제록스 등에서 근무한 경험이 많은 엔지니어와 관리자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EBP 프로그램은 구조조정하여 잔류된 코닥사의 주요사업으로 start-up 기업을 상담하고 창업을 도우며 구매와 물류 등을 지원 관리해 주는 역할은 하고 있다. 크게 축소되기는 했지만 코닥사 자신도 130여년 역사가 남긴 다양한 고급기술에 기반한 수천종의 특허권을 중심으로 고수익의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EBP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기업이 창업과 혁신을 거듭하면서 이러한 활동들이 승수적으로 로체스터 지역의 경제활성화에 크게 공헌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창업주 조지 이스트만의 발자취

1881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코닥사를 창립한 조지 이스트만(1855-1932)은 미국기업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의 하나로 기록되여 있다. 대단히 인간미가 넘치고 개방적 성격으로 회사의 이익을 배분하는 임금배당제를 실시하였고, 실제로 자신 지분의 1/3을 직접 직원들에게 돌려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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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닥필름의 창업자인 조지 이스트만(사진 왼쪽)이 발명왕 에디슨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당시 미국내에서 가장 앞선 복리후생제도를 갖추고 있었고 기업경영을 통해서 자신의 사회철학을 실천하는 계기로 삼았다 한다. 마치 영국의 로버트 오웬을 연상시킨다.

매년 자신의 연봉에 80% 정도를 털어서 로체스터 기계연구소와 비영리기관 등에 지원하였으며, 특히 MIT를 높이 평가하여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거액인 2천만불을 ‘스미스’라는 가명으로 기부하였다. 지금도 MIT 교가에는 가명 스미스라는 이름이 언급돼 있다 한다.

또한 지역내 치과의료시설을 지원하고, 이스트만 음악학원 등을 설립하여 현재의 로체스터 지역이 미국내 교육과 의료와 문화의 유력 중심지가 되는 토대가 되었다 한다.

기업 경영중에도 기술개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분명히 인지하여 유능한 엔지니어들를 육성하고 지원하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한때 6만명을 고용한 규모였으니, 코닥을 거친 수많은 전문기술인과 관리자들 그리고 그들 후손들이 훌륭한 인적기반이 되여 로체스터 지역을 미국전역이 부러워하는 창업과 혁신의 중심지로 부활시켰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조지 이스만은 77세가 되던 1932년 어느날,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다했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는 점이다. 

후지필름이라는 기업단위의 혁신이야기와 코닥의 전설적 역사를 기반으로 한 로체스터 지역의 성공담을 통하여 위기국면으로 진입하는 한국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금, 2016/08/2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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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꼰대가 되어버린 민주화운동의 선두주자 ─ 386 세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퇴근 후에 넥타이를 풀고 찾아와 /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곡 워어어어 /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밤섬해적단, < 386 sucks >

 

제목이나 가사 모두 도발적인 이 노래는 2010년에 나온 밴드 ‘밤섬해적단’의 ‘386 sucks’이다. 이 노래 속의 386세대는 과도한 자부심에 휩싸여 젊은 세대에게 훈계만 늘어놓는 존재다. 사실 새로운 내용도 아니다.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 들린 지는 이미 오래다. 언젠가부터 젊은 세대의 눈에 비친 386세대는 과거의 영광에 매여 달라진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꼰대’일 뿐이다.

정치권의 386세대는 후배 세대로부터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전락해버린” 정치세력이며 “후배 세대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새로운 비전 제시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옛 ‘386’ 세월무상…”길을 비켜달라” 30대 정치 신인에 압박 받아, 한겨레, 2015년 7월 15일) 민주화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던 이들은 어쩌다 ‘꼰대’로 불리며 혁신의 대상, 냉소의 대상이 되었을까.

20대가 만드는 팟캐스트 <서복경의 정치생태보고서> 6화는 386세대의 등장 배경과 변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본다. 그저 이 집단 자체만의 문제라고 비난만 해서는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86세대에 속하는 게스트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과 진행자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 그리고 20대 방송팀원 두 명이 함께 386세대의 공과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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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이한열 열사의 운구 행렬이 서울 시청앞 광장을 지나가는 모습.

민주화의 주역, 386 세대

‘386세대’라는 말은 90년대에 처음 등장했다. 90년대 당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인 세대를 당시 유행한 386컴퓨터에 빗대어 부른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386은 이제 486을 거쳐 586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10년 단위로 이름을 바꿔야 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이제는 앞 숫자를 빼고 ’86세대’라고 부르자 하기도 한다.

사실 386세대라는 용어는 명확한 개념은 아니다. 서복경 교수는 “1993년 기준으로 대학 진학률이 30%밖에 되지 않았다”며 386이란 용어가 또래 모두를 “대학생, 대졸자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부정확한 개념이라고 봤다. 이철희 소장 역시 “그 당시에 태어난 모두를 386으로 묶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 소장은 본인은 386세대를 “80년대 운동권이었던 사람들 중 정치권에 진입한 사람”이라는 좁은 의미로 한정해 사용한다고 했다.

386세대는 그야말로 민주화를 이뤄낸 세대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항쟁 이후 폭발적으로 일어난 학생운동은 이후 80년대 전 시기를 거쳐 지속됐다. 그 절정이 1987년이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 사이엔 전국 24만여 명이 참가한 국민대항쟁기간이 이어졌다. 마침내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핵심으로 하는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 중심에 대학생이던 386세대가 있었다. 386세대 이전에도 비슷한 운동세대로 4.19세대(1960년), 6.3세대(1965년) 등이 있었다. 그러나 386세대는 이들에 비해 운동을 함께 한 기간도 길었고 규모도 압도적으로 컸다. 무엇보다 민주화를 성취했다. 이들의 자부심과 연대감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민주화 이후의 386세대

민주화 이후 30여년이 흘렀다. 대학생이던 386세대는 어느새 대학생 자녀를 둔 가장이 됐다. 가장 급진적이었다고 하는 386세대, 그들이 사회의 주역이 된 이후의 한국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이철희 소장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대표적으로 386세대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인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386세대는 200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들어갔다. 16대 총선이 있던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론’을 주장했다.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이때 대거 발탁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출신인 오영식, 이인영 의원, 임종석 서울시 정무부시장, 학생회장 출신인 송영길 전 인천지사, 우상호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정치권에 새 바람을 몰고 오리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진정성으로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년이 흐른 지금 386세대 정치인들이 거둔 성적은 초라하다.

이철희 소장은 386 정치인들이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꼽았다. 우선 이렇다 할 사회적 의제를 던지지 못한 점이다. 이 소장은 이들이 “자신들이 정치권에 서 할 게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젠다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평했다. 다음은 당 내에서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90년대부터 원내에 진출한 386그룹은 어느덧 당내 중진급이 됐다. 그런데 이들은 그 수가 적지 않음에도 “당내 개혁 분파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게 이 소장의 냉정한 평가다. 이철희 소장이 제기한 386그룹의 마지막 문제는 바로 눈에 띄는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이 소장은 “정통 학생운동 세력이라고 하는 전대협 세력의 본류”에서 나온 인물이 한 명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유력 대선후보, 당권후보 모두 대표적인 운동권 그룹과는 거리가 멀다.

 

민주화를 이뤘다는 우월의식이 386을 꼰대로 만들어

386정치인들이 이토록 무능하단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복경 교수는 운동세력의 목적 자체가 “기존의 체제를 폐절하는 데 있었지, 건설하는 데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현실정치에는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하는 데에 필요한 경험이나 지식이 필요한데, 운동세력은 기존 체제를 흔드는 게 우선이었기에 그 부분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왜 새로운 체제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느냐 질책하는 것은 쉽지만, 당시의 한국 사회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철희 소장은 냉정한 평가를 이어갔다. 그는 “그들이 (학생운동할 때) 배운 것과 그들이 정치권에 뛰어들었을 때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미스매치가 있었다”며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 미스매치를 적극적으로 맞추는 것이 바로 정치”라며 정치적으로 변하지 못한 386 정치인들을 지적했다.

이철희 소장은 이어 386 정치인들이 현실의 요구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하지 않은 이유를 짚었다. 이 소장은 “그 근저엔 우리가 학생운동을 해서 민주화를 ‘이뤘다’는 엄청난 우월의식이 있다”고 말했다. 이미 이 사회에 기여한 바가 많다는 ‘우월의식’이 대중의 요구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만든 요인이라는 것이다.

 

청년세대와 386세대

이철희 소장이 말하는 이 ‘우월의식’은 정치권 밖에서도 386세대가 반감을 산 가장 큰 요인이었다. 특히 청년 세대의 386세대에 대한 반감은 이 우월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방송에 출연한 <정치생태보고서>의 팀원 한민금 씨(23)는 “‘왜 우리처럼 나가서 행동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으면 반감부터 생긴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팀원인 오태환 씨(25)는 “‘요즘 애들은 패기가 없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판단하고 말하는 태도가 바로 세대갈등의 원인인 것 같다”고 했다. 제작진이 사전에 만난 20대 청취자들도 “먹고 놀아도 취직 잘 되던 시기의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한다”, “젊은 세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는 등의 비슷한 불만을 쏟아냈다.

젊은 세대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철희 소장은 우선 386세대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청년들이 처한 어려운 사회경제적 상황을 만든 책임 역시 386세대에게 있다”면서 먼저 “젊은 세대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년세대가 처한 어려운 조건을 바꾸려면 정치가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선 청년세대의 역할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청년세대들이 눈총과 지탄을 무기로 욕을 하고 화를 내야 정치가 달라진다”며 청년세대들에게 유권자로서 감시와 요구를 멈추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더 많은 이야기는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방송 링크: www.podbbang.com/ch/9418)
글: 정치발전소 팟캐스트 팀원 이선욱, 이심지

화, 2015/12/1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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