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 개월간 파키스탄과 인도, 중국, 미국이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미사일 발사를 평가한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도발 행위로 해석된 경우도 있지만, 시험 발사의 의도를 신중히 점검하는 와중에도 대부분은 연구개발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북한이 한국과 일본, 태평양 주둔 미군을 향해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 공격을 자행할 가능성 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서로를 향해 핵 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불한당’ 같은 트럼프의 대북정책
북한을 둘러싼 현재 ‘위기’는 고립되어 피해망상증에 빠진 북한을 향해 미국이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공격무기를 과시하면서도 대화는 계속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책임을 다하겠다’는 증거를 한국이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도 미국과 한국 국회가 외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중요성을 간과하며, 최근의 외교 역사와 압박 효과에 대해 근거 없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수용 가능한 합의안을 협상하는 정부 능력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미군의 잘못은 아니다. 이들은 사령관의 지시를 따라 전문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이 잔혹한 독재 정권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무모함은 빠르게 불한당의 수준으로 나아갔다. 무엇보다 현재 미국에게 한국 및 동북아시아 관련 미국의 국익과 전략을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노출됐다.
미국의 체제는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4년 단위로 이어지는 대통령 임기가 5번 이어질 때까지 미국 대통령들은 동북아시아 위협을 해결하고 긴장을 완화하며, 미국과 동맹국, 기타 국가의 이익을 증진하는데 있어 준비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는 지난 일주일 간 이어진 대통령과 국무장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을 통해 이들 중 누구도 임무를 해낼 만한 경험을 갖추지 못했음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이건 결코 좋지 않다.
새로운 미국발 ‘북풍’…대선후보들의 선택은?
그렇다면 한국의 대선후보들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최근 한국 신문은 “제 2차 한국전쟁 발발?”, “한반도 긴장 고조” 등의 헤드라인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고(故) 마가렛 대처 영국 전 총리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은 “흔들거릴 때가 아니다.” 여기서 ‘흔들거린다’는 건 반민주적 보수세력이 지난 수 십 년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한 악명 높은 ‘북풍(North Wind)’의 최신 버전에 피상적 반응을 보이는 걸 의미한다.
이번 상황은 ‘북풍’ 대신 ‘위기풍(Crisis Wind)’, ‘사드풍(THAAD Wind)’, ‘트럼프풍(Trump Wind)’으로 부를 수 있겠다. 혹은 그냥 ‘북풍 2.0’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번 북풍이 노태우 정부나 김영삼 정부 때 북풍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바람을 일으킨 쪽이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대선 후보를 점검할 때에는 이들의 실제 성향과 2주 뒤 취임해서 보여줄 진지한 정책 방향을 대선 공약과 구분해서 생각하는 관대함이 필요할 지 모른다.
우리보다 유권자 마음을 잘 아는 후보들이 북한 미사일 발사나 핵 실험 가능성을 사드 배치와 서둘러 연결하는 전략을 택한 걸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트럼프의 트윗과 혼란스러운 공식 발언, 항공모함 항로를 근거로 미국의 전략을 성급히 해석한 것 또한 전술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기를 바래야 한다. 사실 이들 요소들은 실제로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은 미국과 한국이 대화를 거부하며 대북 압박정책을 쓰는 와중에 김일성 생일을 맞아 이루어졌다.
북한은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 열병식에서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탄도미사일 1발을 동해상으로 발사했지만, 실패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부대표들의 신뢰가 가지 않는 모순적 발언에는 일관된 전략이 없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보는 이런 상황을 재빨리 이해해야 한다.
그보다는 대선후보들이 미-북-중의 얽히고 설킨 요구를 전반적으로 어떻게 풀어갈지 들어보는 게 더 중요하다.
한국은 어떤 역할을 전개해야 하는가? 모두의 상황을 개선해줄 선택안이 한국에게 있는가, 아님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가?
지금 가장 확실한 건 중국과 미국이 한국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맞는 전략일까? 한국은 둘 중에 선택을 해야만 할까?
북핵문제 해결, 정파와 이념을 넘어 협력해야
차기 대통령은 초인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최대 난제에 직면해서도 강인함과 현명함을 잃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충분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된 대통령을 포함해 모든 성공한 대통령은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더불어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큰 업적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역사를 바꾼 대통령들은 그릇이 크고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를 기용해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반면, 경험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을 중요시 하고 자신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며, 큰 인물과 함께 일하는 걸 두려워한 대통령은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대통령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다음 달 청와대에 들어가고 싶다면, 동맹국∙조력국∙적국의 강점과 약점, 이해관계를 정확히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 능력은 흔히들 말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중국의 리더십과 이해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부시와 오바마 전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와 관련된 미국의 이해관계를 잘못 파악했다.
중국의 현 지도층 또한 한국에 대한 자국의 강점을 잘못 진단했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이 이 문제를 해결할 이니셔티브를 추진하고 싶다면, 우선 정부 내부 고문과 대학 및 NGO 등의 외부기관, 곳곳에 있는 연락책과 포괄적이고 심도 있는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차기 대통령은 누가 당선되든, 북핵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위해 이념과 정파를 떠나 넓게 의견을 구하고, 국내외의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
새 정부 앞에 펼쳐진 전략 및 안보 상황은 아주 험난하다는 게 다수 학자 및 관측자의 예상이다.
하지만,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은 과거 정부가 사용하지 못한 방안을 택하거나 지금까지 행사하지 못했거나 안 했던 유연성을 보여줄 수도 있다. 유엔을 좀더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안이 그 중 하나다.
중간국인 일본과 호주, 한국의 힘을 합해 큰 효과를 낼 수도 있다. 한미 동맹의 추락을 멈추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할 수도 있다.
핵심 원칙만 수용한다면, 모든 국민이 각자의 ‘색깔’에 상관 없이 새로운 정부에 기여를 하도록 과정에 참여시키는 건 물론이다. 차기 정부가 할 일을 설명할 때 ‘나’ 대신 ‘우리’라고 말한다면 좋은 시작점이 될 것이다.
일본 저널리스트 이토 다카시가 99년에 담은 북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듣고 제작진에게는 이같은 물음이 생겼습니다.
이토 씨는 일제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을 20년 넘게 취재해왔습니다. 한국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북한 지역도 취재했습니다. 특히 99년에 이토 씨가 영상에 담은 북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일본군의 잔악함이 여과 없이 담겨있었습니다.
▲ 이토 씨는 1992년부터 2015년까지 북한 ‘위안부’ 할머니 14명의 증언을 영상에 기록했다.
북한의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북한에 거주하는 일본군 ‘위안부’는 2000년 10월 기준, 218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북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일본군 ‘위안소’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다 더 자세히 알리기 위해 이토 씨가 담은 북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영상을 2주에 걸쳐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북한 지역에도 일본군 ‘위안부’가 존재하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92년 故 리경생 할머니(1917~2004)의 공개 증언을 통해서였습니다. 리경생 할머니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일제 순사에게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됐습니다.
“도교상이라는 놈이 “여기서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에게 몸 바쳐 말 잘 들으면 너를 잘 돌봐주겠다”고 말하고 그 장교 놈이 한 며칠 와서 그렇게 성노예 생활을 시작하더구먼. 이제 12살 난 게 어머니 품에서 어린양 노릇하던 아이가 성노예 생활이 뭔지 아나? 그놈이 들이대니까 아이 아래가 다 파괴돼요. 온통 구들바닥에 피가 쏟아지고 이래도 군인들이 쭉 들어와서 성노예 생활을 하다가…”
– 리경생 할머니
▲ 故 리경생 할머니(1917~2004). 12세에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군수공장에 끌려갔다.
일본군이 ‘위안부’에게 했던 고문과 만행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반인륜적이었습니다. 리경생 할머니는 자신이 열여섯 살에 임신이 되자 일본군은 그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낸 뒤 자궁을 들어냈다는 만행을 자행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일본군이 배에 아이 있다고. 임신했다고 ‘저년을 써먹어야겠는데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곱고 써먹어야겠으니 저년 자궁을 들어내 파라'”
– 리경생 할머니
리경생 할머니의 최초 증언 이후 북한 지역 곳곳에서 자신도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2000년 북한 단체인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0대의 어린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은 70%나 됐습니다. 강제 연행된 경우가 96명으로 44%, 일자리를 미끼로 유인당한 경우가 74명으로 34%, 나머지는 빚에 팔리거나 근로정신대에 모집됐다가 위안부가 됐습니다. 이 가운데 43명이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철부지 13살이 뭘 압니까. 하나도 모릅니다. 그 성기가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주머니에 있던 칼을 꺼내더니 잡아 둘러 매쳐놓고 그 칼로 쭉 잡아 찢습니다. 그렇게 하곤 자기 할 노릇을 했는지 까무러쳐서 나는 모릅니다. 벗지 않곤 말이 되지 않아.” – 김영숙 할머니(1927~2010) 13세에 ‘위안소’ 끌려감
▲ 故 김영숙 할머니(1927~2010). 13세에 중국 심양에 있는 ‘위안소’에 끌려갔다.
일본군들에게 ‘위안부’ 할머니들을 고문하는 것은 일종의 ‘놀이’였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성고문을 당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정옥순 할머니(1920~1998)의 가슴과 아랫배에는 당시에 겪었던 고문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 故 정옥순 할머니(1920~1998). 14세에 양강도 혜산시 일본군 병영에 끌려갔다.
“이 고문을 받을 때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어요. 문신을 독약으로 하는데 어떻게 정신을 안 잃어. 살이 다 헐었어요. 바늘 쏙쏙 들어간 자리죠. 이거 봐. 그 자리에서 열두 명이 죽었는데…”
– 정옥순 할머니
‘위안부’가 되기를 거부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돌아오는 것은 일본군의 가차 없는 학살이었습니다.
“한 처녀가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너희 개 같은 놈들한테 이렇게 맨날 이 단련을 받겠나?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니까 일본군이 “어 좋다.” 그 다음에는 가마니를 하나 끌어다 놓고 졸병을 시켜서 “모가지 잘라라.” 모가지 잘라 가마니에 넣고 “팔 잘라라.” 팔 잘라서 가마니에 넣고. “다리 잘라라.” 다리 다 잘라 담고 몸뚱이도 그저 몇 토막을 쳐서 가마니에 다 주워 담는 것을 보고 그걸 보고는 처녀들이 다 악악 소리치고 그 자리에서 다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리경생 할머니
이런 광기 어린 일본군의 학살에 죽어 나간 ‘위안부’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한 400명 데려다 놓고 하룻밤에 40명씩 타면서 아이들이 아래 하초가 깨져서 피를 쏟다가 죽은 아이들이 수백 명 됐다. 내가 말을 안 들으니까 팬티만 입혀서 이 하초를 쇠막대기로 다 지졌다. 왜 말 안듣냐고 지지고… 말 듣겠느냔 하고 또 지지고. 그렇게 아래 하초가 다 데여서 번직번직하니 거기 껍데기가 쭉 벗겨졌는데 군인들이 40명씩 또 달라붙더라.” -정옥순 할머니
일본군이 ‘위안부’를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해가며 저지른 학살은 ‘엽기’ 그 자체였습니다.
“계집애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못판에 못을 300개를 심었어요. 그게 못판에 팬티가 다 찢기고 하초에 닿으니까 살에 구멍이 뚫려서 국숫발 같이 피가 팍팍 뿜어요. 그렇게 15명을 죽여 놓고서는 “너희 계집 애들도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인다. 말 안 듣는 계집애들 죽이는 건 개 죽이는 것보다 아깝지 않다” 그렇게 말했다. 내가 피 눈물이 나와.” -정옥순 할머니
리상옥 할머니(1926~2005)는 ‘위안소’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곳에서 겪은 성고문과 함께 끌려간 동네 친구가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랑 같이 온 탄실이, 영순이. 하루는 신음소리가 나길래 보니까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내 방이 아니고 남의 방이니까. 그런데 그들이 죽는 것을 보고 ‘아, 이제는 이렇게 죽는 거다’하고 몇 달 지나갔어요.
리상옥 할머니
▲ 故 리상옥 할머니(1926~2005). 17세에 평안남도 순천시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끌려갔다.
리상옥 할머니는 그 당시 후유증으로 임신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평생을 홀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60년동안 홀로 떠안고 온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채 2005년 숨졌습니다.
어느 누가 자식도 하나 없고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나요? 당신네도 아들딸 있겠지요. 나는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살았어요. 나는 이제 다른 것 바랄 거 없어요. 당신네가 준 모욕 보상하라요. 왜 못하나요. 60년이 됐어요. 60년. 생각해보세요. 나도 남들이 잘사는 거 보면 부럽고 얼마나 가슴이 터져오는지 알아요?
리상옥 할머니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북한의 ‘위안부’ 할머니들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할머니들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단지 남한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2016년 8월21일(현지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주경기장에서 열린 2016년 리우올림픽 폐회식에 빨간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등장했다. 아베 신조(63) 일본 총리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게임 캐릭터인 ‘슈퍼마리오’ 차림을 하고 2020 도쿄올림픽을 알린 그의 변신은 뜨거운 화제가 됐다.
언론은 “일본이 리우올림픽 폐막식을 빼앗았다”고 평가했고, 그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국내 누리꾼들마저 “신선하다”, “재밌다”는 호평을 쏟아냈다. 1985년 일본 닌텐도사가 창조한 슈퍼마리오는 배관공 마리오가 쉬지 않고 앞으로 달리며 장해물을 넘고 괴물을 쓰러트리며 공주를 구하는 게임이다.
거침없는 아베, 전후 최장수 총리
2012년 일본 총리에 오른 그는 이제 자신의 별명이 된 슈퍼마리오처럼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2016년 연말 64%로 3년 2개월 만에 국내 지지율 최고치를 기록한 그는 지난해 2021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새해 벽두부터는 전쟁을 금지한 현행 헌법 9조의 개정을 포함한 개헌을 천명했다. 자신의 장기집권을 바탕으로 ‘전쟁 가능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는 2017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과거사 문제로 아베 총리 임기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새해부터 부산 일본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로 일본 정부와 충돌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통화스와프 협의를 중단하고, 주한 일본대사와 부산 총영사의 귀국을 결정하는 등 강경 모드를 밀어붙이고 있다.
2017년 아베 총리가 거침없이 달려갈수록 과거 일본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한국 정부는 계속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아베 총리가 지난 4일 이세신궁에 참배하기 위해 각료들과 신궁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세신궁은 일본 전역에 있는 신사의 최정점에 있는 신사로,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모신 곳이다. 일본 천황은 이 건국신의 후손이라고 믿어진다.
아베는 1월4일 미에현 이세시에 있는 이세신궁을 참배한 뒤 신년 기자회견을 열고 2017년 국정운영 방침을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개헌과 장기집권에 대한 의욕을 감추지 않았다. 아베는 2017년이 “일본 헌법 시행 70년이 되는 해”라고 강조하며 “앞으로 70년을 내다보며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진행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우리 자신의 손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것”, “아이들과 손자의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아베를 포함한 일본 우익들은 현재 일본의 평화헌법이 2차 세계대전 뒤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압박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자주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즉 ‘우리 자신의 손’을 언급한 것은 이제 더는 ‘전범국가’ 일본으로 남아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김정일 회담에서 스타 부상
이러한 아베의 행보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아베 총리는 1954년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딸인 요오코와 아베 간의 아들 아베 신타로 전 외상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베는 정치명문가 출신이다. 외할아버지(왼쪽 4번째)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였고, 아버지가 아베 신타로 전 외상(오른쪽 첫번째)이다. 특히 이 집안은 일본 야마구치현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는 근대 일본 정치체제를 만든 메이지유신이 지금의 야마구치현(옛 조슈)과 가고시마현(옛 사쓰마) 출신 하급무사들의 반란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의 친할아버지 아베 간은 중의원 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도조 히데키(1884∼1948) 내각의 퇴진과 전쟁 종결을 주장한 인사다. 외할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용의자로 투옥된 적이 있는 우익인사다.
기시는 ‘평화헌법’을 대체하는 ‘자주 헌법’의 완성을 ‘일본의 진정한 독립’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총리는 정치적으로 친가 대신 외가의 피를 이어받았다. 스스로 “나는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DNA(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 말해왔다.
실제로 정치인으로서의 아베가 걸어온 길은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것을 방불케 한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유년시절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인이던 아버지와 지역구 관리에 힘을 쏟은 어머니 대신 그를 돌본 건 유모와 주말마다 손자를 부른 외할아버지라고 한다.
외조부를 롤모델로 정치인을 꿈꿨던 그는 세이케이대학 정치학과를 졸업, 미국 유학 뒤 귀국해 고베 제철소에서 3년 반 회사원 생활을 했다. 1982년 외상이었던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재직하다 1993년 37살에 아버지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중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외할아버지, 아버지의 후광에 비해 다소 평범한 정치 이력을 보인 그는 2002년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로 열린 김정일 국방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를 수행하며 스타로 떠올랐다. “타협은 안 된다”며 강경론을 주장하며 ‘용기 있는 정치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2002년 9월 방북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왼쪽)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과 인사하는 모습. 당시 관방부장관이었던 아베 신조(왼쪽 세번째)가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사진 출처: 중앙일보)
이에 그는 2003년 고이즈미 전 총리의 지지를 업고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자민단 간사장으로 발탁되고, 2005년 10월 관방장관으로 내각에 들어가며 탄탄대로를 걷는다.
결국 고이즈미 퇴임 후 아베는 자민당 총재직에 오르고 2006년 9월 최연소이자 전후 세대 첫 총리를 맡으며 꽃가마를 타게 된다. 하지만 1년 만인 2007년 9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임했다.
펄펄 나는 일본, 손 놓은 한국
총리 재직시절인 2007년 3월, 위안부 동원 과정과 관련해 “강제성이 없었다”고 발언하며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는 총리직에서 내려온 뒤에도 과거사와 관련한 다양한 망언을 쏟아내며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불러낸 건 민주당의 저조한 지지율과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였다.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하고 5년만인 2012년 12월 다시 96대 총리에 오른 그는 경제 회복을 외치며 집권을 이어오고 있다.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으로 일본 경제의 고질적 문제였던 디플레이션을 다소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재집권에 성공하고 다시 자신의 우익 DNA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2015년 ‘전쟁 가능한 일본’의 디딤돌이나 마찬가지인 안보법 국회 처리를 밀어붙인 그는 지난해 자민당의 당규 개정으로 2021년 8월까지 자신의 집권 가능성을 열어놨다.
이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퍼즐을 통해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어 과거사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안보법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여전히 높아 지난해 안보법을 이유로 아베의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지기도 했다.
지난 4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에서 시민단체 회원이 아베 총리의 가면을 쓰고, 소녀상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 출처: 한국일보)
하지만 아베는 이를 외교를 통해 정면 돌파하려는 모양새다. 미·일 동맹을 중심에.두고 과거 식민지 침략을 부정하며 한국과 중국과 충돌하는 것이 아베 외교 전략의 뼈대다.
그는 2016년 연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연이어 만나며 뜨거운 연말을 보냈다. 국내에는 ‘망언’으로 대표되는 우익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아베는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국익을 극대화 시키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아베의 거침없는 행보에 한국 외교는 속수무책으로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 일본대사관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아베의 강경책에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한 합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확인한 당시의 합의를 근거로 아베는 1월6일 “10억엔(위안부 재단 기금)을 냈으니 한국이 제대로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계속 안기는 것은 물론이고 ‘주권국가’라고 말하기 힘든 상황까지 추락한 것이다.
아베는 오늘도 거침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지만, 한국은 박근혜 정부의 잘못된 합의에 발목을 잡힌데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로 인한 국정 공백으로 계속 헤매고 있을 뿐이다.
한국으로 들어온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 중에 16세 미성년자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통일위원회는 16일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구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리선미라는 여성 종업원이 99년 5월 18일생이라고 밝혔다. 채희준 변호사는 ‘종업원의 여권에 기재된 생년월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뉴스타파는 민변 측이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경욱 변호사는 “한국법에 의하면 19세가 성년이다. 미성년자가 부모 동의 없이 국외에 와 있는 상황이다. 법적으로 유인이 될 수 있다. 범죄가 될 수 있다”면서 국정원이 확인해 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16세 소녀가 부모 버리고 남으로 왔다?
16세면 북한의 기준으로도 미성년이다. 북한이 미성년자를 해외 식당 종업원으로 보내는데 어떤 법규를 적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성년인 것은 분명하다. 그 나이의 소녀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왔고 부모가 있는 북이 아닌 남을 선택하는 엄중한 결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는 판단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지배인과 언니들을 그냥 따라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좀더 상식적이다.
한국으로 오는 것도 모른 채 따라왔을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링보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던 종업원들 중에는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CNN에 출연해 ‘종업원들은 지배인이 동남아시아로 식당을 옮긴다고 해서 속아 따라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CNN에 출연한 종업원은 ‘떠나기 직전 밖에서 차가 기다리는 상황에서 지배인이 한국으로 간다고 이야기해서 몇 명한테 밖에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7명의 종업원들은 북한으로 가고 지배인을 포함한 13명은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북한 종업원, 항의 단식하다 사망했다?
북한 가족들은 CNN에 출연해 ‘딸이 자의로 남한으로 갔을 리 없다’고 했다. CNN과의 회견은 북한 당국이 주선한 것이고 선전의 의도가 있다고 봐야겠지만 갑자기 딸을 잃은 부모가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당국의 주문에 따라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인륜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CNN은 북한 가족들이 ‘딸들이 독방에서 단식투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 당국이 그렇게 알려줬다는 것이다. 북한의 입장을 전해온 한 언론은 ‘종업원 중 한 명이 단식을 하다 사망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한국 정부는 이런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통일부는 “탈북민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에 왔다. 건강은 좋고 단식한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라고 밝혔다. 한국 상황에서 종업원 중 한 명이 단식으로 사망한 것이 사실이라면 정부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정부가 철저히 격리된 종업원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의문스럽다.
그러나 사망은 모르되 단식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시각도 있다. ‘돈을 벌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속아 한국에 왔다는 김련희 씨는 2011년 합동신문센터에 도착하자마자 북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김 씨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단식을 했다고 한다. 김 씨의 이야기는 뉴스타파와 한겨레는 물론 뉴욕타임스, CNN 등을 통해 북한에도 알려졌다. 종업원들도 들어 알고 있을지 모른다. 만약 자의에 반해 온 종업원들이 있다면 김련희 씨와 같은 행동을 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북한 가족, 민변에 인신 구제 청구 위임 가능
민변 통일위원회는 16일 단식 사망 등 의혹을 풀기 위해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을 접견하고 싶다고 신청했다. 통일부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외부인의 접견은 적절하지 않다’면서 거부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법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상 변호인이 되고자 하는 자의 접견요청을 막을 수 있는 법 규정은 없다는 것이 민변의 설명이다. 실제로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에 대한 접견 신청을 거부한 국정원은 변호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했다. 만약 북의 가족들이 민변 변호사들에게 인신구제 청구를 위임한다는 의사를 밝힐 경우 새로운 국면이 될 수도 있다. 유가려 씨가 국정원 합동신문센터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유우성 씨는 변호인단에 동생에 대한 인신구제 청구를 해달라고 위임했다. 변호인단은 오빠를 대리해 인신구제청구를 했고 재판 당일 여동생은 풀려났다. 풀려난 여동생은 국정원이 오빠가 간첩이라는 허위자백을 강요했다고 폭로했다.
만에 하나 국정원 등 정부가 자유의사에 반해 온 북한 종업원들을 격리함으로써 그들의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화시키고 정부의 뜻에 따르도록 만들 셈이라면 그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정부가 종업원들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 격리할 수 있는 기간은 최장 6개월이다. 설사 그동안 성공적으로 그들을 격리시킨다 해도 그 뒤에는 세상에 내보낼 수밖에 없다. 독방에서 6개월 동안 담금질 되며 허위자백을 체화한 가짜 간첩들도 민변 변호사들을 만나면 예외 없이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잠깐은 거짓말 할 수 있지만, 영원한 거짓말은 불가능하다. 거짓은 진실을 만나면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선거에 써먹으려다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애물 만들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 사건이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애물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은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을 요구하기 전에 이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소재라고 한다. 그것이 북한 조평통이 아니라 적십자사가 이 문제에 대해 대응을 하고 나선 이유라는 것이다. 그는 “선거에 써먹으려다 앞으로 남북관계 개선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눈앞에 지나가도 잡을 수 없게 됐다”고 한탄했다.
지난 7월10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자민당은 승리에 취해 있었다. 자민·공명 연립여당과 개헌 찬성 세력이 개헌안 발의선(162석)을 넘는 165석을 확보했다. 곧바로 다음날 아베 총리는 숙원이었던 개헌 추진 의사를 공식화했다.
자민당 개헌안 초안에는 자위대를 정식 군대인 국방군으로 격상시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전쟁을 포기하고, 국가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셈이다.
200만의 생전 퇴위 의사…개헌 견제 의도(?)
아베의 계획이 발표되고 불과 이틀 뒤 NHK는 아키히토(明仁·82) 일왕이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보도를 내놓는다. 살아있는 일왕이 왕위를 내놓는 일은 오늘날의 일왕 체제가 갖춰진 메이지 유신 이후 처음이다. 거슬러 올라가도 1817년 고카쿠 일왕의 양위 이후 근 200년 만이다.
지난 8일, 일본 도쿄 시내에서 시민들이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의 의사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일본 열도의 관심이 집중됐다. 아베 총리가 야심 차게 꺼내놓은 개헌 논의는 그만 쑥 들어가고 만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개헌보다 일왕의 메시지가 더 폭발력 있는 이슈였다.
첫 보도 당시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청 장관은 사실상 일왕의 생전 양위를 부인했다. 그러다 한 달 만인 8월5일 일왕이 입장을 미리 녹화한 영상연설 형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왕의 영상 연설은 흔한 일이 아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에 이어 딱 두 번째였다. 일왕은 8월8일 발표한 10분 남짓한 영상에서 ‘퇴위’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차례 외과수술을 받았고 고령에 따른 체력 저하를 느끼기 시작했다”며 “점차 신체 쇠약이 진행하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처럼 전신전력을 다해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뜻은 분명했다.(아키히토의 퇴위 방송을 보려면 클릭!)
일왕의 세습은 헌법상 왕실전범의 규정에 따르게 돼 있다. 왕실전범은 국왕 별세 시에 왕세자가 즉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생전 양위를 하려면 전범을 개정해야 한다. 이 작업에 2~3년은 걸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새로운 연호, 퇴위 뒤의 호칭, 역할, 거처 등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현 국왕에게만 적용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베 정부도 개헌보다 왕실전범 규정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게 됐다. 아베 내각이 허를 찔렸다는 반응도 흘러나왔다. 일왕이 결과적으로 개헌 논의에 찬물을 끼얹은 것 아니냐, 나아가 훼방을 놓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이유다.
자민당의 개헌안은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내용뿐만 아니라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 아니라 ‘원수’로 바꿔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왕이 이런 내용에 부담과 불안을 느꼈으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건강상의 이유’를 들었지만 아직까지 업무수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어린시절 패전 경험….미국인 퀘이크교도에게 교육
아키히토 일왕이 평소 보여준 평화주의 성향은 그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는 1933년 히로히토 일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부친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방공호 생활을 해야만 했고, 결국 도쿄를 떠나 닛코 시의 다모자와 황실 별저에서 칩거하다 종전을 맞았다. 패전 이듬해 새해 첫날 13세의 소년 황태자는 새해의 다짐을 적은 붓글씨로 ‘평화국가 건설’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아키히토 일왕(왼쪽에서 두번째)은 부친 히로히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도쿄 공습과 패전의 경험이 그에게 강한 평화주의적 성향을 심어줬다는 평가가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들은 1948년 그의 생일인 12월23일 처형됐다. 아키히토로서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아키히토는 1949년 가쿠슈인 고등과에 입학한 후 미국인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에게 지도를 받았다.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에게 끼친 영향은 미국식 사고방식뿐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닝 부인은 어떠한 폭력과 무력에도 반대하는 퀘이커 교도였다. 아키히토도 어떤 식으로든 평화주의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됐을 터이다.
이후 그는 가쿠슈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 진학해 어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부친이 생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처럼 아키히토도 국내외 학술지에 여러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어류학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아키히토 일왕은 젊은시절, 어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계적 학술지에 적지 않은 영어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9년에는 최초로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 쇼다 미치코를 아내로 맞아 화제를 뿌리기도 한다.
아키히토는 1989년 부친이 사망한 뒤 제125대 천황에 즉위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과거 태평양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지역을 차례로 방문했다. 1991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방문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중국, 2005년에는 사이판, 2006년에는 싱가포르와 태국을 방문했다. 2009년에는 하와이, 2015년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방문지에서 일왕 부부는 일본인 병사의 위령비와 함께 반드시 상대국의 위령비도 참배했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때에는 한국인 위령탑에 참배하기도 했다. 반면 야스쿠니 신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히로히토 역시 야스쿠니 신사를 8번 참배했으나 A급 전범이 합사된 1978년 이후에는 참배하지 않았다.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에는 일본의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과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때에도 “우리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슬픔이 항상 기억 속에 있다”고 밝혔다.
2009년 즉위 20주년을 맞아서는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라며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우경화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2013년 팔순 생일 기자회견 때는 패전 이후 어쨌든 평화헌법이 오늘날 일본을 일궈낸 초석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2015년 각료와의 신년 인사회에서도 아베 총리에게 “올해는 종전 7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라며 “많은 분이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다. 이 기회에 만주사변으로부터 비롯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서 앞으로 일본 본연의 자세를 생각해 가는 것이 현재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견제구를 던졌다.
지난해 8월15일에 이어 올해 8월15일에도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해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지난 15일, 종전기념일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 아키히토 일왕과 아베 총리의 모습. 이 자리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과거를 돌이켜 보면 깊은 반성과 함께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아베 총리는 일본의 가해사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내일을 살 세대를 위해 희망에 찬 국가의 미래를 개척해 가겠다”만 말했다. (사진 출처: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6/08/15/20160815001866.html)
일왕은 총리가 바뀌면 사적으로 신임 총리 부부를 왕궁에 불러 환영 만찬을 열곤 한다. 그러나 아베 총리만은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는데, 이것이 아베의 우경화 노선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할 정도다.
“백제 무령왕의 후손”….한국에 친근감
아키히토 일왕은 한국에도 친근감을 표시해 왔다. 2001년 68회 생일을 맞이한 일왕은 공개 기자회견장에서 “간무(桓武) 천황(재위 781~806년)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속일본기>에 기록돼있다. 한국과 깊은 연을 느낀다”고 밝혔다.
2004년에는 일왕의 당숙이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을 참배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왕실에 한국 요리사를 초청해서 김치·잡채 파티를 열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다 사망한 고 이수현 씨를 소재로 한 영화도 관람했다.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생전에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일부에서 아직까지도 아키히토 일왕을 군국주의 향수나 자극하는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다소 결을 잘못 짚은 사례로 보인다. 일본에서조차 천황제 자체에 반대하는 쪽에서도 아키히토 일왕 개인을 비판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공격은 그래서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은 잘못 짚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때에 따라서는 한일 역사화해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일왕의 손을 뿌리쳐 버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평범한 일본인들의 반감만 샀다.
아키히토 일왕은 2년 뒤면 즉위 30주년을 맞는다. 그는 ‘전쟁국가’로 질주하려는 아베 정권의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까?
그가 평화주의적 면모를 지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왕의 메시지가 일정한 효용을 지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헌을 저지하는데 일왕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것은 무언가 꺼림칙한 일이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는 “개헌을 원하지 않는다면 현재 민주주의 틀 내에서 결론이 나야 한다. 천황을 끌어들이고 활용하는 모양새 자체는 헌법을 지켜내더라도 불편하다”고 말한다.
일왕은 아베의 완충장치라는 견해도
따지고 보면 유구한 전통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천황제’라는 제도 자체도 근대의 산물이다. ‘만세일계’ 천황의 시조로 불리는 일본 건국의 시조 진무 천황(재위 기원전 660~585) 역시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이 현대 실증사학의 정설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 막부 시절 ‘천황’은 즉위식조차 올리지 못할 정도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민초들은 막부의 쇼군은 알아도 천황은 전혀 몰랐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주제를 가진 나라이다. 그 뿌리를 기원전 660년의 진무일왕(사진 왼쪽)으로 잡고 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랫동안 일왕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였다가 1876년 메이지유신 이후 절대권력자가 됐다. 유신주도자들은 그런 일왕을 실제보다 근엄하고 위엄있게 보이도록 상징조작을 했다. 메이지 일왕의 모습(사진 오른쪽).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 있는 ‘천황 숭배’는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근대 국민국가를 창출하기 위해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천황제를 이용한 메이지정부의 작품이다. 메이지정부가 천황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천황의 전국 순행을 실시했다. 진무 천황의 능도 이때 축조된다.
그 천황제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황국신민들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최면제로서의 신화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다.
패전 후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일왕이 지닌 전쟁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인을 포함한 전 국민 ‘1억 총참회’가 필요하다는 기상천외한 개념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그러나 일왕의 책임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일본 수뇌부가 종전을 미룬 것도 상황을 오판해서라기보다, 패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황실을 보전할 것인가를 궁리했기 때문이다. 생체실험을 진행한 731부대는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에 따라 창설된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
천황제라는 신화는 패전 후 천황의 ‘인간선언’으로 스러져 버린 것일까.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양위 선언을 계기로 다시금 물어보게 되는 질문이다.
아키히토 일왕 개인에 대한 평가는 남겨두고서라도, 불과 70여 년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천황제가 이제는 평화헌법의 수호자가 되고 있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결국 천황제가 보수적 일본 체제를 유지하는 안전장치와도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본다.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 퇴위를 하면 후계는 그의 장남 나루히토(왼쪽에서 3번째)에게로 넘어간다. 나루히토 역시 아버지와 같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일본 궁내성)
아베 총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아키히토 일왕이 “적어도 천황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일왕이 일종의 완충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장치가 있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다소 무리를 해도 된다는 설명이다.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천황제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마치 지금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천황을 지지해야 되는 것처럼.”
일왕이 영상 메시지를 전하던 날 왕궁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한 남성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본에서 천황제 신화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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