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11월 7~8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렸던 6월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고 촛불시민혁명을 조명하는 ‘한국의 민주화 30년-세계 보편적 의미와 전망’ 국제학술회의에서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이 발표한 ‘남북의 평화공존과 수교시대를 열어야–북핵보유에서 비핵화로 가는 과정’ 발제문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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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더욱이 그 민주항쟁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2016~17년의 촛불평화시민혁명 직후에 생각하는 한반도평화 과제는 엄중하다. 4월 민주혁명과 5.18 광주민주항쟁을 포함하여 지난 50여년 동안의 민주주의 쟁취역사는 분단압제 속에서도 쉼 없이 전개된 평화로운 투쟁사였다.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자루 속 같은 한반도 남쪽에 갇혀서도 결코 기죽은 적 없이’ 민주주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 한국 현대사였다.

그 한국현대사에 새로운 도전이 제기되었다. 9.3 북핵보유 선언 이전과 이후는 다른 시대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한반도 밖의 대외관계에서도 북한의 위상이 달라졌다. 1989년 독일 통일 그리고 동구권 붕괴와 소련방 해체가 가져온 세계사적 격동이 초래한 한반도에서의 남북 사이의 균형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 등장과 미국-소련 핵무기감축협상이 가져온 데탕트(탈냉전시대)에서 시작된 한국에게 유리한 조건은 한국에서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민권승리와 88서울 올림픽으로 변곡점에 이르렀다가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결정적 국면을 맞이했다.

한국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년)을 발표한데 이어 남북고위급회담을 개최했고 1992년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에도 합의했다. 그 과정에 1990년 러시아와 수교했고 1992년에는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과 중국과의 수교에 성공했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과 수교한데 이어 남북이 유엔에 동시가입 함으로써 미국과 일본과 수교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국제사회가 예상했던 4대국 남북교차승인이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은 유럽에서 일어난 사회주의권 붕괴가 동아시아(북한, 중국, 베트남) 사회주의권에서도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미국 일본 한국 세 나라가 힘을 모아(미·일·한 3국동맹) 북한을 압박하면 가능하리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북한은 1993년 이후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착수했고 그 대가는 제재와 봉쇄였으며 ‘고난의 행군’ 등 기아와 죽음이 이어졌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는 쌀 과잉생산으로 재고미가 쌓여 3년 묵은 쌀은 가축사료로 소비했다. 대북지원을 하지 않은 한국정부의 처사에 한(恨)이 쌓였을 것이다.

지난 25년 동안 계속된 북핵을 둘러싼 대결과 대화의 결과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였다. 한반도에는 핵전쟁의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다. 북한의 미 본토 보복타격이 가능한 핵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가 임박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미국은 이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국 일본과 함께 북한을 응징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불사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북한에서 대량살륙이 불가피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2016~17년 겨울 동안에 평화적인 촛불시위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한국 시민들은 한반도 전쟁위기를 소란 없이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신들이 탄생시킨 문재인 정권이 힘겹게 대응하고 있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북한의 이어지는 미사일·핵무기 실험에 대해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제공격 위협으로 언제든지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 거주 주민 수백만 명 이상이 어디로 피난할 곳도 없이 죽어야한다는 엄연한 사실도 알고 있다. 전쟁 기획자들은 한반도가 전쟁 피해를 외부로 확산시키지 않아 제한적인 핵전쟁을 수행하기에 최적의 지형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탈냉전시대 초기(노태우정부와 김영삼정부) 한국이 역사상 유례없는 국운융성기를 맞이했을 당시, 남북관계와 북방외교, 대미-대일 외교·국방을 담당했던 정책당국자들이 미국의 북한붕괴론을 찬성했거나 조장하지 않았는지 연구해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일부 인사들은 한국정부가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도록 권고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 일본이 평양에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을 경우, 북한이 아무리 비밀을 유지한다고 해도 핵개발을 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체제유지를 위협하지 않는데 핵개발을 강행해야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셈이다. 얼마나 치명적인 정책실패였는가. 또 한 차례 이어진 정책실패는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뒤에 김영삼 정권이 택한 대북강경론이었다. 곧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의 상대편 정상이 사망했으면 조의를 표하거나 조문을 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였으나 한국은 김일성 주석을 ‘전쟁범죄자’로 비난했을 뿐 아니라 대북특별경계령을 발령했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조의를 표했고 미국의 북핵협상 대표 제임스 갈루치 대사는 제네바 북한대표부 빈소로 조문했다.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이 사망했을 때 모택동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조의를 표했고 모택동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사망했을 때 장경국 중화민국 총통이 조의를 표했던 것을 참조해도 좋았을 것이다. 당시 형성된 북한의 대남 불신감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압도적 우위에 올라섰던 한국의 1990년대 이후의 대북 비교우위는 9.3 북핵보유 사태로 역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그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는 북핵의 존재를 ‘상수’로 상정하고 국내 논의를 객관적으로 냉엄하게 해야 하겠다.

평화통일론, 복합국가론, 남북정상선언 합의의 연원은?

#장면1

그 날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

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렬

연기가 깔린 저녁 길에

도깨비 같은 그림자들

문과 창이 없는 거리

바람은 나뭇잎을 날리고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

아무도 죽은 이의

이름을 모른다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신경림, 창비시선 ‘농무’ 1975년>

1957년에 불거진 진보당 사건으로 죽산 조봉암 선생이 1959년 7월 30일 대법원 형확정 판결이 난 다음날인 7월 31일 사형집행당한 충격을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그렸다. ‘북진통일’ 구호가 요란했던 50년대 중반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진보당 대통령 후보는 평화통일론을 제기하면서 “전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으며 북진통일정책은 국내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탄압책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이승만 독재의 본질을 지적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 직전,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조봉암 후보는 선거 막판 후보단일화에 합의했고 다음날 호남지방 유세에 나섰던 신익희 후보가 돌연 서거하는 급변사태가 일어났다. 광범한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있었으며 조병옥 등 민주당 지도부는 조봉암 후보에게 민주당 지지표가 옮겨가지 못하도록 신익희 후보 추모표를 통해 무효표를 유도하고 있었다. 504여만 표(55.6%)를 얻은 이승만에 비해 214만여 표(23.9%)를 얻은 조봉암의 선전은 전쟁을 치른 지 3년 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집권세력은 물론 민주당도 4년 뒤에 있을 4대 대통령 선거를 내다보면서 조봉암을 위협의 눈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조봉암이 생존해있었다면 4월 만주혁명 뒤에 분열로 지리멸렬한 진보진영의 모습은 당연히 달랐을 것이다. 4월 혁명 뒤 무력통일론은 자취를 감추고 모든 정당들이 평화통일론을 내세웠다.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난 문익환 목사. 당시 탈냉전 긴장완화의 세계흐름에 한반도도 함께 올라타려면 돌파구, 초극(超克)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문 목사의 결단이 낳은 북행이었다.(자료 사진: 한겨레신문)

#장면2

1972년 7월 4일 남북당국은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외세의존 없는 평화통일, 상호비방 중지와 군사충돌 방지, 제반의 남북교류활성화, 남북적십자회담의 적극화, 서울-평양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 민족의 이름으로 합의사항에 대한 준수 약속 등 7개항에 양측은 합의했다. 우리 정부와 이른바 ‘괴뢰’정부의 대표가 만나 합의했다는 발표에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4월 민주혁명 이후 분출했던 평화통일론, 남북교류론과 중립화통일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5.16군사쿠데타 세력이 북한과 평화통일하자고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야당도 재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과 가장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었던 장준하 선생만이 “7.4성명이 민족통일에 전향적 조건을 마련했다”고 환영했다. 야당은 장준하 선생을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천관우, 유진오, 김정한, 이병린, 계훈제, 김동길 등이 주축이 되어 재야의 구심점으로 활동했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가 ‘남북공동성명에 관한 공청회’를 마련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민수협 공동대표였던 전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선생이 공청회 결과를 대표집필한 것이 ‘민족통일을 위한 나의 제언’(1972년 9월호 가톨릭종합월간지 <창조>게재) 제목의 ‘복합국가론’이었다. 7.4남북공동성명으로부터 뒤이어 나타날 10‧17유신독재체제까지 100여 일 동안 잠시 지속된 ‘통일론의 열린 시공간’에 힘겹게 빛을 본 시론이 ‘복합국가론’이었다.

이 시론은 1960년에 발표된 김일성 주석의 ‘남북연방제’에 내포된 ‘국가연합제적 성격’ 즉 “우리가 말하는 연방제 안은 당분간 남북 조선의 현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 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식으로 실시하자는 것”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집어냈으며, 남북의 평화공존을 통해 통일에까지 이르는 과도적 기간을 설정하여 “통일이라기보다는 불완전한 통합이나마 우선 복합국가라는 방안이라도 검토하자”는 설계를 담고 있었다.

이 시론은 또한 북한의 연방제론이 “대체로 복합국가의 한 형태일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민족의 장래를 위해 또 우리 편의 이익을 위해 좋은 결과가 예상되는 것이라면 어느 편이 먼저 발상 혹은 발론(發論)을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대담하게 서술했다. 가혹한 국가보안법이 5.16군사쿠데타 이후 10여 년째 모든 통일논의를 탄압하고 있었을 때, 공개적으로 북의 연방제 수용 의사를 밝힌 것은 비상한 각오가 따르는 결단이었다. 또한 7.4공동성명 배후에서는 이미 성명 발표 이전부터 천관우 선생이 ‘복합국가론’에서 경계해 마지않던 “다른 목적의 저의와 그 밖의 불순한 책동”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10.17유신독재체제 선포로 ‘복합국가론’을 비롯한 모든 통일논의는 다시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장면3

잠꼬대 아닌 잠꼬대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 마음이었거든

한 마음

그래 그 한 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 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 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적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구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1992년 실천문학사>

 

문익환 목사는 1989년 3월 25일 정경모 유원호 선생 일행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다. 그는 그 해 연초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을 맡고 있는 필자를 자택으로 불러 “날자는 알 수 없지만 올해 안에 평양에 가겠다”고 결심을 밝혔다. 당시 그는 전민련의 상임고문이었으므로 전민련에 가해질 공안탄압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그는 “우리 통일역량은 나의 북행 정도로 무너질 만큼 허약하지 않다. 걱정 말라”고 낙관했다. 그리고 저 유명해진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한편을 주셨다.

문익환 목사는 이 시에 쓴 대로 북행길에 올랐다. 야당의 분열로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운동에 다시 공안탄압의 먹구름이 끼고 있을 즈음, 문익환 목사는 탈냉전 긴장완화의 세계흐름에 한반도도 함께 올라타려면 돌파구, 초극(超克)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필자 같은 후진들에게 “민주화운동, 평화통일운동을 하는 건 신랑이 신방에 들어가듯 기쁜 마음으로, 구름에 달 가듯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38선, 국가보안법 따위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감옥에 가는 것, 안중에 없었다. 아마 죽음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이미 절친한 친구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겪고 죽음을 넘어서서야 진정으로 민주에, 통일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두 사람은 서로 다가가 말없이 부둥켜안았다. 초면인 두 사람이 헤어져 만나지 못하던 두 형제처럼 껴안았다고 현장을 지켜본 정경모 선생(재일 저술가, 통일운동가)은 전했다. 문익환-김일성 4.2남북공동성명의 4개 항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니만치 이 둘이 분리될 수 없는 일체다.

나. 통일에 관한 남북 간 대화의 창구는 널리 개방되어야 하며 당국자들 사이의 독점에 맡기지 않는다.

다.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진대 연방제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경로인데 이의 실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

라. 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공존의 원칙에서 이룩되어야 한다.

4.2공동성명은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후 김대중 대통령이 문익환 목사의 뒤를 따라 평양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후 발표한 6.15공동성명으로 직결되었고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10.4공동성명으로 이어졌으니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공동성명의 시발점은 문익환 목사의 평양방문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평화통일론, 복합국가론(연방제, 국가연합제), 남북정상선언 같은 남북관계의 주요 전기를 만든 담론들이 어떤 노력과 희생이 있어서 얻어진 것인지 깊이 논의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운형, 김구 선생들의 생명을 바친 노력이 조봉암 선생에게 이어졌고 조봉암 선생 자신도 다시 희생되었지만 50년대의 ‘평화통일론’은 1960년 4월 민주혁명으로 국론으로 자리 잡았다. 5.16군사쿠데타의 주요한 목적은 평화통일론을 탄압하고 지우는 것이었다.

천관우 선생을 비롯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평화통일 노력이 ‘복합국가론’으로 구체화되었고 남북의 평화통일론의 접점을 제공했다.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4·2공동성명은 평화통일론과 복합국가론의 대강을 정리하면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의 뼈대를 제공했다.

다시 말하자면 1960년의 4월 민주혁명은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론을 복권시켰고 천관우 선생의 복합국가론을 건져냈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문익환 목사의 4·2남북공동성명을 탄생시켰다. 한국사회의 질곡을 밀어젖히는 동력은 사회운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세력들이나 학계에서도 사회운동이 자신들의 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경우를 보기는 어렵다.

평화통일론, 복합국가론, 남북정상회담의 성과 등 남북관계 담론들은 9·3 북핵보유 사태 이후에 충격 속에 다시 논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핵 보유를 바라보는 시각의 편차가 극단적으로 표출되면서 다시 한국사회의 분열이 고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선제공격 위협과 협상의 가능성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과 정전은 미국 소련 중국 등의 국제적 개입과 타협의 산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과 북한의 정책과 의지에 관계없이 강대국들의 정책과 의지가 미치는 영향이 한반도의 현상을 규정해왔다. 특히 분단된 남쪽 한국의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온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를 용납하지 못한다. 특히 북한이 미 본토를 보복타격할 수 있는 핵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는 것을 넘어서는 안 되는 레드라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이 핵비확산조약(NPT)을 어기고 핵을 보유하는 것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일본과 한국의 핵보유 도미노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용납하지 못한다. 북한은 체제위협을 핵무장으로 지키려했고 그 목표에 다가서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압박으로 북한의 핵폐기를 유도하고 있지만 북한은 완강하게 핵무장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문재인 한국정부는 미국의 대북전쟁 전개가 한반도 전쟁, 특히 핵전쟁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평화유지, 대화정책을 견지하려 한다. 부분적이지만 한국은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견제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한국은 군사동맹으로서의 한미동맹의 테두리를 넘어 북한과 대화로 남북관계와 비핵화를 풀려는 태도를 보인다. 2017년 11월초에서 중순까지 이어지는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 특히 미중 정상회담과 미러 정상회담에서 9.3 북핵보유 사태에 따른 미국의 강경책이 협상정책으로 전환될지 주목된다. 또한 2018년 2월에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키리졸브 한미군사훈련이 중단되고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중단으로 이어질지도 주목된다. 세계 제1위 핵강국 러시아와 제3위 중국의 강력한 대미 견제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막고 북-미 협상으로 이끄는데 기여할지 지켜봐야 하겠다.

 

북핵 보유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

너무 오랜 세월 북핵 논란 속에서 살아온 한국사회는 북한이 핵보유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현실감이 부족하다. 차츰 그 심중한 의미를 절감하는 보수세력은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반 국민들 속에서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과 대등하게 맞서는 북한에 대해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일반 시민들도 있으며 북한이 같은 민족인 남한에 대해서는 핵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시민들도 있다.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 다시 진출하려거나 멸시한다고 분노하는 시민들 가운데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나면 감히 일본이 한반도(독도)를 다시 넘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으로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위한 북-미협상, 남북대화가 진행될 경우 북핵 보유에 대한 한국 안의 논의는 핵무기 불용, 독자 핵무장과 전술핵무기 재도입, 남북 두 개 국가론, 남북 평화공존과 수교시대론 등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다. 억제력으로서의 핵무기를 보유해야한다는 북한의 입장은 쉽게 타협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기술할 한국과 미국의 대북 체제위협 해소를 향한 정책과 실천에 따라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자세는 변할 것이고 변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나타날 대응 태세는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북핵 불용과 전쟁불사론, 주로 일부 보수세력을 주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절대로 북핵을 용납해서는 안 되고 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강경론이다.

한미일 동맹에 의거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기지를 선제타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급진적인 전쟁불사론은 현실적으로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주도로 선제타격을 하고 한국과 일본도 전쟁에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외과수술식 제한적 선제타격과 함께 김정은 참수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북한의 붕괴가 아닌 정권교체에 한정하려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는 불확실하다. 제한적 선제타격도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미국의 제한적 선제타격과 김정은 정권교체 한정론은 중국과의 막후협상을 전제로 한다.

2) 독자 핵무장과 전술핵 재도입론, 한국은 북핵협상에 기대를 갖기보다는 독자적으로 핵과 미사일 개발에 나서야한다는 주장이다.

전술핵을 재도입해야한다는 주장은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재도입하여 유지·관리하는 비용이 고려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항공모함과 핵추진잠수함 그리고 해외미군기지에서 발진하는 전폭기들이 확장 억지력을 항상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독자 핵무장론자들은 미국이 한미동맹에 따라 현재는 확장 핵억지력을 제공하고 있지만 만일 핵협상이 진행되어 핵동결과 평화협정이 교환될 경우,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제거하는 이른바 레드라인에만 합의하면 북한의 미 본토 핵보복 공격은 저지될 수 있어도 한국에 대한 북핵 위협은 제거되지 않는다고 본다. 평화협정이 합의될 경우 주한미군의 철수도 예상할 수 있으므로 독자 핵무장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NPT(핵비확산조약) 탈퇴와 한미원자력협정 파기에 따른 국제적 제재와 경제위기 등으로 한국도 북한처럼 ‘불량국가’로 전락하는데 대한 대책은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국가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과 국제적 제재를 감수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에 이어 한국의 핵무장은 일본의 핵무장으로 이어지고 이 같은 동아시아의 핵도미노는 세계적인 위기로 진전될 것이다. 특히 일본의 핵무장은 중국이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다. 미국과 심각한 분쟁을 겪어야 할 것이다. 이 주장은 1953년 정전협정 조인 당시 이승만이 주장했던 북진통일론처럼 미국을 한국에 붙잡아두려던 의도와 비슷하다. 독자 핵무장론을 통해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얻어내려는 의도가 그것이다. 이 주장이 강하게 제기될 경우, 북-미 협상에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을 맺을 당시의 조건과 현재의 조건은 많이 달라졌다. 주한미군의 성격을 바꾸고 주둔규모의 축소를 검토하는 타협안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독자 핵무장 능력은 짧게는 6~8개월, 길게는 1~2년 안에 가능하다는 평가가 있다.(퍼거슨 보고서) 월성 원자로 4기(중수로)를 이용하면 매년 416개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2,500kg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재처리 공장 건설은 4~6개월 안에 가능하다. 찰스 퍼거슨 미국과학자협회(FAS) 회장은 2015년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분석한 보고서를 핵 비확산 전문가 그룹에 제출했다. 해당 그룹 내에서 비공개로 회람된 소위 ‘퍼거슨 보고서’의 내용은 외부에 공개되자마자 국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왔다. 특히 퍼거슨 보고서에는 경제제재, NPT, 한·미관계 등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억제하는 요인들에 대한 반론들도 서술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3) 북핵의 민족 공동자산론, 국내의 일부 급진적 진보진영에서 주장하고 있는 논의이다. 앞의 두 개 주장의 정반대쪽 주장이다.

남북대화로 합의통일이 되면 북핵-미사일은 한민족을 지키는 남북 공동의 전략자산이 된다는 주장이다. 남북대화로 합의통일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 주장은 북핵 불용과 전쟁불사론 그리고 독자 핵무장과 전술핵 재도입론을 합리화시켜주는 구실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같은 주장은 한국 시민운동의 평화협정과 비핵화 실현, 한반도 평화운동을 곤경에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급진 진보진영의 반대편에 있는 극우 보수진영에도 비슷한 환상이 나타난다. 한국이 핵을 보유한 북한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룩하여 북한의 핵을 ‘우리’ 것으로 만들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다. 좌우 극단에 나타나는 이 같은 환상은 한국 사회의 무지를 드러내는 지표나 다름없다.

4) 남북 두 국가체제론, 이른바 국가연합제나 연방제 등은 지금 남북의 대립과 불신 그리고 동상이몽의 통일관 등을 볼 때 실현불가능하므로 남북이 두 국가로 일반국가관계를 맺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현실적인 대안은 DMZ(비무장지대)를 국경선으로 설정하여 두 국가체제로 평화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남북이 수교하고 북미수교와 북일수교를 한국이 주선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핵을 둘러싼 첨예한 분위기나 그동안 한국외교의 취약성으로 당분간은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것은 미국과 북한의 협상과 대결에 의존할 것이다. 다행히 전쟁을 피하고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한다고 해도, 최후의 평화는 남북 간의 두 국가체제에 의해 보장될 것이다. 서로 체제의 위협을 받음이 없이 지난 70여년 너무나 달라진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전념하도록 하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단일민족 단일국가’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북이 각각의 국가적 과제를 체제나 전쟁의 위협이 없이 성취하는데 힘을 집중한다면, 세계와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에 부합하는 ‘모델’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두 국가체제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것은 그 첫걸음이 될 것이다.

두 국가론은 분단과 전쟁 이후 남북의 적대감과 이질감이 극단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남북이 일반국가관계를 맺어서 평화를 확보하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에는 북한이 지난 25년 동안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오고 끈질기게 긴장을 조성해온 것에 대한 피로감과 혐오감이 깔려있다. 한국전쟁을 겪고 북쪽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60~70대 이상 연령대의 반북 정서를 능가할 정도로, 한국전쟁의 경험과는 무관한 20~30대 연령층에서도 혐북(嫌北) 증세가 강하게 나타난다. 2,000년 6.15남북정상선언이 나올 시기의 20, 30대와 비교하면 오늘의 20, 30대에서는 남북관계에 대한 지지 대 반대의 비율이 역전된 것으로 나타난다. 국민의 과반수이상이 ‘두 국가론’에 찬성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이 주장자들은 말한다.

북핵위기와 남북적대감이 고조된 시기의 여론을 정상적인 시기의 여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 등 왕조시대 이래 1,000년 이상 통일국가를 유지해온 것에 비교한다면 지난 70여년의 분단시대는 짧은 시기의 비정상적 시대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강점과 미국-소련의 분할 점령의 결과로 분단된 비극을 우리 자신이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또 하나의 당사자인 북한이 받아 들여야 ‘두 국가론’이 성립할 텐데 ‘통일조국’에 대한 배신이라고 선명공세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한국보다 국력이 뒤떨어지고 주민생활 수준이 낮기 때문에 남쪽에서 ‘두 국가론’을 제의하면 자신들의 체제위협이 줄어들 것이라고 하여 쉽게 수용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1960년 4월 민주혁명 이후 요원의 들불처럼 번졌던 중립화통일론도 우리가 선언한다고 중립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주장이었다.

5) 남북의 평화공존-수교시대 거쳐야.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선 북핵 보유 사태에 대해 위의 네 가지 대응방안을 살펴봤다. 네 가지 방안은 북핵 보유에 대해 환상적인 ‘민족 공동자산론’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용과 거부 입장을 보인다. 선제공격 등 전쟁수행도 미국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며 독자 핵무장론도 미국의 용인이 있어야 가능하다. 위의 네 가지 선택지 가운데 두 가지는 미국과 관계된 것이고 ‘두 개 국가론’은 북한과 관계된 것이다. 미국과 관계된 사안도 미국과의 갈등-대립이 불가피한 것이고 북한과 관계된 것도 상대방인 북한이 용납하지 않을 사안이다. 우리 내부에 논쟁과 분열을 촉발할 문제들이기도 하다. 북핵 보유로부터 동결과 비핵화, 평화협정 합의에 이르는 길고 지루한 협상에 한국은 어떤 자세로 대응할 것인가. 미국과 북한 사이에 초기의 대결을 거쳐 협상이 시작된다면 우리가 불용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사려 깊은 대응이 요구되는 문제들이다.

북핵을 아무리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라지만 남북 주민 대다수의 생명과 삶을 뿌리째 파괴할 전쟁, 특히 핵전쟁과 관련될 중대 사안이므로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핵을 해결하는 방안은 한반도에서는 평화 말고 다른 대안은 없다. 북핵을 비핵화에까지 이르도록 협상하고 평화협정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하며 한반도 주변국들과 한반도평화와 동아시아 공동번영을 이끌어내려면, 남북 간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과도 평화공존 하도록 한국 자신이 능동적 외교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이미 2007년 북핵폐기와 평화협정의 대강에 합의를 이끌어냈던 9.19 6자회담 합의를 주도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쉽게 불발로 그쳤지만 한국외교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이 남북의 평화공존과 수교시대를 거치는 것이다. 주변국들의 이익에 저촉되는 현상변경, 다시 말해서 한반도에서 세력권 변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남과 북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할 뿐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남북 관계가 호혜적 ‘중립지대’를 형성하고 그 중립지대를 중심으로 주변국들이 공동번영의 클러스터를 형성하도록, 남북이 중심적으로 역할 하는 동아시아경제평화기구를 추구한다.

북미대화와 남북대화의 복원, 평화협정과 비핵화의 장구한 협상을 거쳐 6자회담의 확대판 동아시아경제평화기구를 지향한다. 그 평화기구 안에서 남북의 중립지대로서의 중심적 역할을 통해 주변국들의 경계심을 늦추면서 남북 양측의 동질성을 높여가는 과정을 만들어간다. 이처럼 남북 평화공존과 수교시대를 거쳐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를 통해 빚어낸 ‘평화통일론’ ‘복합국가론’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복원하자는 지구전적 접근이다. 이 경로야말로 ‘오래된 새 길’이 될 것이다.

 

비핵화-평화협정 협상과정에서의 한국의 정책선택

9.3 북핵보유 사태는 1953년 정전협정체제 수립 이후 지난 64년 동안 존속해왔던 남북, 북미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다. 북한이 미 본토를 보복 타격할 수 있는 핵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할 경우, 이 사태는 자칫 한국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로서, 상호 핵전략 균형을 협의하는 러시아와 중국이 아니라 미국에 적대하는 북한으로부터 미 본토 공격을 위협당하는 처지에서 미국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도 도전하는 북한에게 선제타격을 가해서 응징할 것인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핵보유를 인정하고 협상에 나설 것인지 고심하고 있다. 미국 조야에서는 대북 강경론과 대화론이 엇갈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특히 미중 정상회담과 미러 정상회담의 성과에 따라 이후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단속적이지만 대화와 교류 관계를 맺어온 한국은 북한에게 남북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한국이 미국과 함께 대북제재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더욱이 핵보유를 공식화한 북한이 한국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주목된다.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가 체제 보위를 위한 무력이지 결코 대남공격용이 아니라는 당초의 자세에 변화가 있을 경우, 한국 안의 여론은 독자 핵무장 쪽으로 급진전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아베정권도 주시하고 있는 사안이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핵화 유훈은 지켜져야한다. 북한의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한국은 제재와 봉쇄에 참여하고 있지만 미국의 군사옵션 선택을 저지하는데 노력해왔다. 그리고 북-미 협상이 시작될 경우, 어떤 정책선택을 해야 할지 치밀하게 준비해야할 것이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최종 목표로 시작되는 북-미 협상 과정에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1) 남북대화를 즉시 시작해야한다. 한국은 북한을 움직일 레버리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2) 사드배치 등으로 소원해진 중국과 신속히 상의, 한국전쟁 당사국으로서 남북, 미국, 중국으로 구성되는 4자회담을 조속히 열 것을 제의한다.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는데 노력한다. 이 제의는 6자회담 복원에 기여할 것이다.

3) 북-미대화의 진전과 함께 북한에 대한 제재와 봉쇄가 단계적으로 해제될 것이므로 한국은 한미동맹을 존중하면서 그 동맹을 신속히 평화체제로 보완하는 과감한 정책선택 준비에, 남북대결구도로부터 평화공존 시대로 이행할 준비에 착수한다. 남과 북은 “남북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는데 합의했던 정신을 존중한다.

아래 부분이 한국의 선택 가운데 가장 핵심적 정책이 될 것이다. 1993년에 선택했어야할 정책을 한국 주도로 늦게 선택하는 것이다. a) 평화공존 시기를 전제로 하는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제의한다. 수교 이전에 서울과 평양에 임시대표부를 둔다. b) 미국과 일본에게 북한과 수교할 것을 제의한다. 두 나라에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임시대표부를 상호 설치하도록 촉구한다. 이런 조치는 북-미 간의 협상을 촉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c) 러시아와 중국에게도 북-미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각종 제재와 봉쇄를 해제할 것을 미국과 유엔에 요구하도록 한다. d)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도록 한다. 미국이 자신의 일정대로만 아니라 한국의 국익을 고려해서,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e)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에게 TCR, TSR과 TKR의 연결사업 및 가스파이프라인 연결사업을 즉시 착수하도록 남-북-중-러 사이에 협의를 진행할 것을 제안한다. f) 한국은 러시아에게 연해주-시베리아 투자에 미국, 일본, 유럽(독일)과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진출하는 것을 양해줄 것을 요청한다.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서도 북방경제가 가동되어야 한다. g) 북-미 협상이 진척되는데 따라 이미 배치된 사드기지 문제와 주한미군의 지위 문제를 미국과 논의한다. 주한미군 주둔 문제를 북-미 간 합의에만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차대한 문제다.

한국은 한반도 평화체제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 미국과 일본의 양해를 구하여 독자적으로 남북수교와 대표부 설치 등을 진행시키며 남북의 국내 법적 제약을 제거하는 문제를 협의한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경제관계 협의도 신속히 진행하여 새로운 정책노선 선택으로 초래될지 모르는 경제적 손실을 북방경제로 보전할 것을 모색한다.

남북수교 이전에도 북한과 경제교류를 통한 체제안전을 보장한다. 식량지원과 농업 기술교류로 북한의 민생을 지원한다. 북한과의 신뢰회복을 당국 차원 뿐 아니라 민생지원을 통해 시도한다. 한국이 지나치게 빨리 북한과의 체제교류를 이행하는 것이 북한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북한당국과 충분히 협의하여 진행하되 북한이 원하는 만큼만 진척시킨다. 생활용 소비재 생산공장 건설을 원하면 그 부분에 주로 투자한다. 수출입은행 장기차관으로 한국 중소기업들이 참여토록 한다.

 

맺는 말

요즘 상황을 보면서 1945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 과정을 생각하게 된다. 여운형 선생과 김규식 선생의 좌우합작. 통일정부 수립운동이 여운형 선생의 암살로 중단되자 그때까지 이승만 박사와 함께 반탁운동 쪽, 분단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당황하여 김규식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운동으로 선회했다. 남북협상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승만 박사의 단독정부수립이 1948년 8․15에 성사가 되면서 이듬해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여운형 선생과 김구 주석의 암살로 결국 남쪽에서 평화를 지킬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바로 한국전쟁으로 진전됐던 것이 역사를 추적해보면 드러난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은 말하고 싶어서다. 지금은 여운형 선생이나 김구 선생 같은 대단한 지도자가 있어서 그들을 암살하면 대중운동이 끝나버리는 시대가 아니다. 당시 대중들은 수동적이어서 어느 한 지도자, 우리를 절망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성향이 강했다. 여운형 선생이나 김구 주석 같은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운동 자체가 식어버렸다. 지난 몇 십 년의 민주주의 운동 과정을 통해서 지도자 중심의 정치사회운동이 높은 교육수준과 SNS보급을 통해 깨어있는 시민들의 집단적 지성과 지도력으로 성장해온 것이 아닐까 보인다. 87년 6월 민주항쟁이나 이번 촛불혁명을 되돌아볼 때, 종교인들이나 시민운동이 촉매역할을 했고 시민들의 잠재력을 이끌어냈다. 오랜 독재시대를 겪고 정권교체를 경험한 뒤, 정치인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던 시대는 끝났다.

남북의 평화공존과 수교시대에 들어가면 아래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동아시아경제평화기구, 즉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과 몽골까지 포함하여 주변국들의 경제평화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핵심이 남북의 평화공존에 있으므로, 어느 특정 주변국으로 기울지 않는 남북의 평화공존 속에서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치지 않게 하는 조절기능을, 자동차의 기어역할 같은 것을 남북이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호혜관계를 갖는 것, 그것이 바로 남북의 중립지대론이다.

중립화 선언 시도는 1960년 4월 민주혁명 시기에도 있었다. 중립화 선언을 한다고 해도 주변에서 인정하지 않는 선언은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외교적 경제적 역량을 가지고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면서 남북이 조심스럽게 동아시아 평화구도를 만들어가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하게 되면 동아시아 경제평화기구의 중심이 한반도로 올 수밖에 없다. 유럽연합(EU)의 초기 독일과 프랑스의 역할과 비슷하다.

촛불정국에서 시민들의 성숙함을 보면, 당장 남북이 ‘두 나라’를 선포하고 가는 것보다는 서로 존중하면서 동아시아 평화기구를 서로 논의해갈 수 있는 관계로 설정하는 것이 중립지대화 논의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싶다. 다름 보다는 공통을 강조하면서 가야 가능하겠다. 남북교류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남쪽이 북쪽을 배려해서 그들이 원하는 만큼만 교류를 한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데 과도하게 밀어붙여서 북쪽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정도가 되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문화교류든 어떤 교류든 정말 배려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 그들 자신보다 더 걱정해줄 수 있는 성숙함이 남쪽에게 필요하다.

한국사회는 해방 광복 한 세기를 맞는 2045년을 기점으로 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공존과 남북수교시대를 경유하여 평화통일을 달성하는 장거리 마라톤을 준비해야겠다.

1987년 6월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고 2016~17년의 촛불시민혁명을 조명하려고 열린 이 학술회의의 성과가 격랑에 휩싸인 한반도의 전망을 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