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속투쟁기1
- 개만 격렬하게 저항하고
2015년 9월 13일, 이 땅 2천만 노동자의 목을 죄는 끔직한 합의가 노사정간에 이루어졌다. ‘9.13 노사정 야합’이 바로 그것이다. 그날 합의한 것들은 그 어떤 노동법보다 노동자에게 치명적이고, 악랄한, 대놓고 노동자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내용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해고’라는 단어가 문제가 된 것이 김대중 정권 초기인 1998년이었다. 그때 정리해고제를 막기 위해 무던히도 싸웠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옥쇄투쟁을 마지막 보루삼아 정권과 사투를 벌였으나 끝내 정리해고제 입법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영상의 긴박한 어려움이 있을 때 노사가 합의나 협의를 해야 가능한 정리해고가 아닌, 사장이 보기에 업무성적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마음대로 해고를 시킬 수 있는 일반해고법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정리해고가 판치고 있는 살벌한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마음대로 해고법’을 지들 마음대로 만들겠다는 선전포고인 것이다. 게다가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이고, 취업규칙도 마음대로 바꾸고, ‘임금피크제’를 통해 50대 가장들의 임금을 대폭 깎겠다고 한다. 드러내놓고 자본천국, 노동지옥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100만원이 약간 넘는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27%, 200만원을 못 받는 노동자가 60%를 넘는 대한민국이라는 삭막하고 살벌한 땅,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하는 젊은이들. 2014년 보훈처가 취업한 제대군인 3천 61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의 62.6%가 비정규직이고, 평균 연 소득은 2천 525만원으로 파악됐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를 넘어, 인간관계와 집을 포기하는 5포 세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꿈과 희망까지도 포기한 7포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그들. 이번 야합의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노동조합이라는 최소한의 방패막이도 없는 중소영세미조직노동자들과 비정규직, 그리고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취업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 젊은이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무자비하고 무제한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로 인해 ‘노동개악’을 ‘노동개혁’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경제학자 존 K. 갤브레이스의 말대로 통념은 진실일 필요는 없다. 통념으로 한번 굳어지면 다중의 힘에 의해 거대한 파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깨지기 힘들다. 문제는 이러한 통념이 대중의 작은 믿음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세력에 의해 조작되고 세뇌되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더 이상 사무실에 앉아서 이 사태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민들을 직접 만나서 이번 야합의 본질을 이해시키고, 같이 투쟁해 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2015년 10월 12일 민주노총 경기도본부는 수원역 광장에다가 천막을 치고 농성에 돌입했다. 그 농성을 실질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조직국장이 당시 나의 직책이었다.
천막농성을 시작한지 보름이 넘은 10월 29일, 아침 선전전을 마치고 허기를 달래고 있는데 급한 연락이 날아들었다. 본부 미조직비정규국장 집에 압수수색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밥을 먹다말고 본부장, 사무처장과 함께 그 집으로 달려갔다. 압수수색은 거의 마무리가 돼가고 있었다. 이게 뭔 짓이냐고 소리쳐봐야 허공에 대고 외치는 대답없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저 망연히, 허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압수수색 물품은 이번 노동절 때 입었던 옷과 신발, 선글라스, 목도리 등이고, 이유는 그날 경찰버스를 당겼던 밧줄을 가방에서 꺼내는 장면이 사진에 찍혔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경찰이 보여준 사진 속에 내 모습은 없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치 앞을 못 본 바보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이 바로 다음날 명쾌하게 드러났지만 말이다. 민주노총 중앙사무실에 연락을 하고, 법률원 변호사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대책회의를 하는 등 부산을 떨었으나,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상황을 계속 지켜보기로 하고 찜찜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다음날 출근을 하려고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시커먼 놈들이 달려들더니 “국장님, 들어가시죠.”하는 것이었다. ‘이 아파트에서 나를 국장님이라고 부를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데 누구지’ 순간 뒤통수를 강하게 치는 생각, ‘허, 짭새들이구나’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런 생각도,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순간, 그들이 내 손에서 핸드폰을 압수하고 말았다. 그때서야 드는 생각, ‘핸드폰에 저장된 중요한 내용들을 지웠어야 하는데. 모든 정보가 통째로 넘어 가버렸으니, 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압수수색에 순순히 임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파트 복도의 열린 창문을 보고 저리로 핸드폰을 던져버릴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할 수 없이 아파트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건장한 ‘떡대’들 5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출근한다고 나간 사람이 다시 들어오니 자기 방에 있던 아들 녀석이 잠깐 나와 보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직까지 출근도 안하고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가장님은 부스스한 모습 그대로 무슨 일인가 하고 안방에서 나왔다. 집에서 키우는 개만 주인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지 낯선 침입자들에게 격렬하게 저항을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됐다. 개에게라도 위안을 삼아야 하다니, 내 처지도 참...
경찰버스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힘차게 끌고 있는 내 모습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압수수색 물품 명단을 통보했다. 핸드폰, 핸드폰 케이스, 모자, 마스크, 반팔티, 청바지, 신발이 그 대상이었다. 대충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 속 인물이 내가 아니라고 우기면 지들도 증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진 속의 증거물품들을 확보하기 위해 친히 방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5월 1일에 있었던 사건을 이제야 들춰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 사진 속 인물이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박선봉이라는 것을 특정하는데 5개월 가까이 걸린 것이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압수 물품을 직접 찾아주겠느냐고 물어서 알아서 찾아가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하고, 소파에 주저 앉아버렸다. 항상 정신이 없는 우리 집 꼬락서니를 고려하면 그 물품들을 다 찾는데 고생깨나 할 거라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앉아있는데, 웬걸, 그 시간은 10분을 넘지 못했다. ‘헐, 이럴 수가. 나도 한 시간은 찾아야 다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저걸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그것도 정확하게 찾아낸단 말인가. 이것들이 미리 집안 수색을 하고 갔었나. 아니면 가장님이 혹시 저들과 내통을 했나? 혹시 격렬하게 저항하던 개가?’ 지미럴, 짭새들도 잘하는 것은 있었다.
그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난 뒤에 본부장과 사무처장이 숨을 헐떡거리며 들이닥쳤으나 이미 상황은 끝난 후였다. 총연맹에 연락을 하고, 변호사들과도 통화를 하고, 대책회의 시간을 정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난 후 수원 도본부 사무실로 향했다. 총연맹 관계자가 내려오고, 법률원 변호사들의 의견을 들어서 대책을 논의했다. 일단은 주변 정리가 필요해서 컴퓨터로 지울 수 있는 핸드폰의 SNS 내용은 다 지우고 모든 방에서 탈퇴를 했다. 관련 문서들도 없앴다. 다른 지부나 산별연맹에도 이런 사실을 알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소환장이 날아왔다. 저들의 총구는 명확하게 민주노총 경기도본부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소환대상자는 본부장과 조직국장인 나, 그리고 미조직비정규국장 등 3명이었다. 혐의는 특수공공물손상과 일반도로교통방해 등이었다. 총연맹의 판단은 1~2명은 구속이 불가피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3번째 구속에 대비를 해야 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현장에서 검거가 돼서 곧바로 구속이 되는 바람에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충분히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 제일 먼저 빵에 들어가서 읽을 책을 골랐다. 그동안 읽으려고 사놓기는 했으나 바쁜 일정에 밀려 책꽂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들이 20권이 넘었다. 그런 다음 주변에 널리 이 사실을 알리고 차근차근 충분하게 송별회를 가졌다. 거의 매일 송별회가 열렸고, 한 동안 먹지 못할 지도 모르는 술을 마음껏 마셔댔다. 이러다 구속이 안 되면 어쩌나 하는 찜찜한 마음을 한구석에 묻어둔 채.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11월 11일, 13시경에 총연맹 법률원 변호사를 대동하고 남대문 경찰서로 1차 소환조사를 받으러 갔다. 담당 형사가 보여주는 사진은 200장이 넘었다. 대부분이 내가 주인공인 사진들이었다. ‘아니, 저것들이 이 많은 사진을 언제 채증을 한 거야. 나는 도대체 이런 사실을 왜 몰랐을까?’ 조사 도중 쉬는 시간에 형사가 해준 얘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우리 집에까지 미행도 했다는 것이다. 9월 23일 집회가 끝나고 1차로 저녁을 먹고, 2차로 술을 먹은 장소는 물론이고, 전철을 타고 금정역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바꿔 타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행을 풀었다는 것이다. 섬뜩함과 함께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 정도로 긴장이 풀어져 있었던 건가. 미행방지 교육을 수차례 받기도 했는데...
변호사와 상의를 해서 인정할 거는 대부분 인정을 했다. 마지막까지 다툼이 있었던 것은 공모사실 여부였다. 경찰 쪽에서는 당연히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차원에서 공모를 했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고, 우리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우겼다. 다른 하나는 경찰버스를 나는 당기기만 했다고 주장했고, 경찰은 직접 버스 바퀴에 밧줄을 묶기도 했다는 것이다. 흐릿하게 내가 버스 바퀴 앞에 쭈그리고 앉은 사진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만 가지고는 판단이 되지 않아 나도 완강하게 버텼다. 조사를 마치고 경찰서를 나오면서 변호사에게 물어보니, 이런저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2개월 정도는 감옥살이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2015년 12월 2일, 강추위와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던 날2차 소환조사를 마치고 남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박선봉동우의 출소를 축하하며-고진(82/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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