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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고령자가 지배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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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고령자가 지배한다면?

익명 (미확인) | 목, 2015/12/31- 23:30

올 한 해를 돌아보며 ‘자유’라는 단어가 이만큼 수난을 당하던 시절이 또 있었나 싶은 생각을 했다. 꽤 오랜 기간 사회 현안에 대한 각종 토론 자리에 참석했지만, 올해만큼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을 많이 맞닥뜨린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한국과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 변화 추이와 65살 이상 고령인구 비율 추이를 지켜보면 놀랍도록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 동안의 변화를 보면,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달러가량에서 2만달러 수준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동시에 65살 이상 인구 비율도 7%대에서 14%대로 2배가 된다(그림1·2 참조).

같은 기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천달러 미만의 미미한 수준에서 1만1천달러대로 훌쩍 뛰어오른다. 또한 65살 이상 고령인구 비율도 3%대에서 6% 근처로 2배 커진다. 재미있는 것은 1995년 한국의 위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과 고령인구 비율은 거의 정확히 1970년 일본 수준에 있다.

일본에서 목격한 ‘제론토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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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수치를 보자. 이번에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 동안의 변화 추세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2만달러 수준에서 4만달러 이상으로 훌쩍 커졌다. 65살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이 기간에는 14%가량에서 23%가량으로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같은 기간 한국은 어떨까? 1만1천달러 수준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달러 남짓으로 2배 뛴다. 그리고 65살 이상 인구 비율은 6%대에서 11%대로 2배가량 뛴다. 결과적으로 2010년의 한국은 다시 한번 1995년의 일본과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이 그래프대로라면 한국의 다음 10년, 15년도 단순하게 떠올려볼 수 있다. 일본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예측을 종합해보면, 2030년 한국의 65살 이상 인구 비율은 2010년의 일본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높아질 것으로 추정된다. 또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의 일본 수준보다는 낮지만, 현재보다 꽤 높을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의 미래를 일본에 빗대본 것은 2014년 일본에서 목격했던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지난해 나는 일본에서 두 달 동안 지내며 일본 사회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센다이, 후쿠시마, 이시노마키 등 3·11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을 둘러보기도 했다. 일본 사회의 역동성을 다시 불어넣으려 애쓰는 젊은 사회적 기업가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오구마 에이지 게이오대학 교수를 만나게 됐다. 오구마 교수는 <사회를 바꾸려면> 등의 저서로 유명한 인문학자다. 그런데 그는 일본 사회의 여러 문제를 설명하면서 제론토크라시로 단순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론토크라시는 고령자 지배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오구마 교수는 일본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고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이 제론토크라시라는 내용에 덧씌워진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오구마 교수가 일본 사회를 제론토크라시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본 사회가 중앙부터 지역까지 촘촘하게 외부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제적인 고령자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특히 3·11 동일본 대지진 뒤 피해 현장에서 그 지배체제의 민낯을 목격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 지역경제에서 제론토크라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려면 현미경을 들이대야 한다. 오구마 교수도 피해 지역 현장에 가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며 그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알게 됐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맞는다. 경제는 저성장을 맞고 글로벌화로 기업들의 해외 아웃소싱이 일반화된다. 비정규직 비중이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하며 지역경제는 피폐해지는 과정이 진행된다.

고령자 ‘리더’가 ‘지배자’로 바뀌어가고

축소 및 노화되는 지역경제는 전국 각지에서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 동북부 이와테현의 도시 가마이시는 한때 철강산업의 메카였다. 신일본제철의 주요 제철소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제철소는 외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남아 있는 공장에서는 부산품 정도를 생산할 뿐이다.

정부는 이 지역에 공공일자리(Public Work)를 만들어 인구 유출을 막으려 한다. 정부가 지원금을 내어주면 그 돈으로 지역주민들이 공공사업에 고용되어 일하는 방식의 일자리 창출 정책이다. 그런데 대대적인 공공일자리 사업의 결과, 지역주민들이 의존적으로 변화해가기 시작한다. 공공일자리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인구가 늘어나고, 공공일자리가 줄면 사람들이 떠나가고 그러면 공공일자리를 더 줄일 수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지역사회의 배타적 제론토크라시를 인정하게 된다.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령자들이 비즈니스 리더이자 지역사회 리더이자 지역 정치인으로까지 변신한다. 리더가 아니라 지배자로 바뀌어간다. 당연히 지역사회는 활력을 잃는다.

정부는 각종 지원 정책을 쏟아붓는다. 그런데 지원 대상이 개인이 아니었다는 데 문제의 시작이 있었다. 일본 중앙정부는 지역사회와 지방정부를 지원 대상으로 삼았다. 취지는 좋았다. 개인을 돕는 것보다 공동체를 돕는 것이 지역사회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명분에서였다.

이런 방식으로 지원정책을 펼치다보니 지역을 지배하는 고령자들의 힘은 더욱 세졌다. 대부분 지역에 이미 지방정부나 공동체 지배구조를 주도하고 있던 고령의 지역 토호들이 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은 원래 지방정부를 운영하고 지역사회 규칙을 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서, 지역으로 들어오는 돈과 일자리를 배분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다. 공공일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사실상 이들이 결정하게 됨에 따라, 결국 지역의 경제력까지 차지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활력을 잃은 가마이시 지역은 제철소가 떠난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만다. 인구는 줄고 고령화가 진행된다. 9만 명이던 인구가 절반이 되었고 65살 이상 인구가 30% 이상으로 변화해간다.

오구마 교수는 이런 과정이 일본 사회의 전형적인 운영 방식을 보여준다고 본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패러다임을 계속 이어가면서 다음 세대의 일본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30년 불황·저성장 고착화의 원인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경찰관들이 무너진 건물에서 희생자의 주검을 옮기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배제되는 고령자 지배체제인 ‘제론토크라시’가 지진 복구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제론토크라시 체제가 갖는 잔인한 면이 눈에 띄게 드러난 것은 3·11 동일본 대지진 복구 과정에서다. 여러 경로를 통해 복구 과정에서 외국인, 장애인, 신규 거주자들이 지원에서 배제됐고, 여성과 청년들은 대피소 및 지원 물품 배정 등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건강한 지역공동체라면 약자와 소수자를 먼저 배려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피해 지역에서는 비상 상황이라는 이유 아래 경제성이나 환경영향평가 없이 대규모 건설공사가 마구 벌어졌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이들은 상당 부분 정부 지원사업의 일환이었다. 동일본 지역 곳곳에선 도로 복구공사와 해변의 대규모 방조제 공사가 벌어진다. 쓰나미를 막는다는 명분에서였다.

후쿠시마 지역의 방사능 제거 작업을 보자. 제목만 보면 첨단기술 공법을 동원할 것처럼 느껴지는 공사다. 하지만 사실 이 공사는 오염 지역의 땅에 있는 흙을 수십cm 파내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하는 초대형 토목공사다.

이들 대부분이 정부 돈으로 진행되는 공사다. 공공일자리가 대거 나온다. 그 일자리를 배정하는 권한은 다시 고령의 지역 토호들 손으로 넘어간다. 그들이 고령의 지역 정치인과 고령의 정부 관료들과 통한다. 그들이 받아온 돈으로 젊은이들이 생존할 수 있게 나누어줄 수 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지역주민 다수는, 특히 청년이나 여성이나 신규 이주자 같은 새로운 인구는 배제된다는 것이다. 이런 담합 구조 아래서 이것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이 환영받을 리 없다. 전형적인 폐쇄적 제론토크라시 상황이다.

1980년대 이후 30년 동안 제론토크라시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30년 동안의 불황이었다. 저성장의 고착화였다. 집권 ‘자민당’ 보수정치의 일당지배였다. 일본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 소니는 삼성에 밀렸고,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중국에 내놓았다. 정치도 경제도 악명 높은 담합 구조가 됐다. 오랜 기간의 고령화 추세와 소득수준 향상, 그리고 사회 각 부문에서 기득권을 온존시키면서 가져온 사회적 결과다.

급기야 일본은 새로운 활력을 찾기 위해 위험한 국가주의를 만지작거리는 상황이 됐다. 헌법을 고쳐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기치로 국민을 결집시킨다. 혐한론과 반중 정서가 심해지면서 국수주의적으로 변해간다. 활력을 잃은 사회가 찾아가는 비뚤어진 출구다.

그게 바로 1995년 이후 2010년까지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어쩌면 한국에서 앞으로 10년, 15년 동안 벌어지지는 않을지 두렵다. 고령화율과 1인당 국민소득 추이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듯이 말이다.

이미 조짐이 보이는 듯해 불안하다. 행정부의 최고 의사결정 회의체인 국무회의에는 50대도 끼어들기 힘든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정당들은 노인층에 구애하는 정책을 궁리하느라 바쁘고, 아무리 개혁적인 법안이라도 노인층의 심기를 거스를 듯하면 바로 발을 뺀다.

노인층 심기 거스르지 않으려는 정치권

경제계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벤처기업가들이 혜성같이 나타나 한국 경제의 주요 리더로 등장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기업 서열은 그대로 고착되는 중이다. 42살 이민화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메디슨을 이끌며 벤처기업협회를 만들고, 37살 전하진이 한글과컴퓨터를 이끌며 국산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외치며, 33살 안철수가 안철수연구소를 세우던 때가 불과 20년 전인 1995년이었다. 그 뒤를 이어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이재웅, 네이버의 이해진,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등 30대 초반의 기업가들이 줄줄이 새로운 경제 리더로 등장했다. 그런 날은 다시 올 수 있을까?

어쩌면 한국에서 제론토크라시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과거 30여 년을 되돌아보면, 한국도 이대로 가다가는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이라도 무언가 충격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고령자 지배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도록 말이다.

[ 한겨레21 / 2015.12.31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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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11/2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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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5/11/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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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자동차가 잇따라 개발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와 테슬라는 이미 자체 제작 무인차를 모터쇼에도 가지고 나갔다. 구글의 무인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변을 시험주행 중이다.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첫 도로주행에 나섰다.

이미 드론은 마니아층을 넘어 일반인에게도 확산되고 있다. 리모컨으로 움직이는 조그만 비행기가 작은 짐을 싣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미국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은 향후 드론으로 구매 상품 배송을 하는 데까지 가겠다는 계획이다.

무인차 사고 나면 책임은 누구?

무인자동차와 드론은 일자리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다. 전문가들은 무인차가 일반화되면 택시는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무인차를 불러서 타면 되니 택시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무용지물이 된다. 무인차는 2030년이면 상용화할 수 있다고 본다.

아마존은 이미 드론 택배를 도입하겠다며 ‘아마존 프라임 에어’를 발표했다. 현재는 미국 연방항공청에 상업용 드론 야외비행 허가를 신청해둔 상태다. 드론이 배송을 전담하면 택배기사 일자리는 사라진다. 그뿐 아니라 배달할 물건을 싣는 트럭 운전기사들의 일자리, 트럭에 기름을 넣기 위해 존재하는 정유회사와 주유소 일자리, 기존 택배용 트럭이나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업체의 일자리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에릭 브린욜프슨 교수와 앤드루 맥아피 박사가 이 공포의 현실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들은 미국의 경우를 들어 생산성과 총고용의 관계를 비교해 보여준다. 이들에 따르면 1953년 이후 1999년까지는 생산성과 총고용은 연평균 2.1%로 증가율이 같았다. 쉽게 말해 경제가 성장하면 일자리가 늘어났다는 이야기다. 더 좋은 기계를 사용해 사람이 직접 일한 시간 대비 산출량을 늘리면 결과적으로 일자리도 더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좋은 기계를 사용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부유해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1999년 이후 이 패러다임이 바뀐다. 생산성은 똑같이 연평균 2.1% 늘어났지만, 일자리 증가율은 0.5%에 그쳤다. 생산성 향상만큼 일자리가 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결론이다. 경제성장과 일자리 증가 사이의 연관성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브린욜프슨과 맥아피는 이를 ‘기계와의 경쟁’이라고 표현한다. 21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기술 발전과 일자리 증가 사이에 탈동조화가 진행되고, 결과적으로 기계와의 경쟁에서 인간이 패배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경제성장과 일자리 증가 사이의 탈동조화에는 해외 아웃소싱도 영향을 끼치지만,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밀어내고 있는 현상도 큰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다. 무인자동차와 드론뿐 아니다. 이미 기자를 대신해 사실관계만 입력하면 자동으로 기사를 써주는 로봇이 등장했다. 금융기사와 스포츠기사는 웬만한 기자만큼 잘 쓴다. 변호사 업무를 대신해주는 로봇도 등장했다. 의사 대신 로봇팔이 수술을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무인자동차나 드론 같은 신기술이 실제 상용화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등장한다. 기술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법과 윤리의 문제 탓이다.

법적 문제는 예컨대 이런 것이다. 무인자동차가 운행 중 사람을 치어 다치게 하면 누구의 책임인가? 따지기 쉽지 않다. 운전자는 없으니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운전을 프로그래밍한 소프트웨어 회사의 책임인가? 무인차를 만든 제조사의 책임인가? 무인차 소유주의 책임인가? 아니면 무인차에 타고 있던 승객의 책임인가?

벤츠가 자동차 보급에 회의적이었던 이유

더 깊은 차원의 윤리적 문제도 있다. 무인차가 고속 주행 중에 앞에서 보행자를 발견해 피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 차는 우선순위를 보행자 보호에 둬야 하는가, 아니면 승객 보호에 둬야 하는가? 둘 중 한쪽만 살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행자는 다수이고 승객은 소수라면, 또는 그 반대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법적·윤리적 문제는 당장 답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사람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신기술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어렵다는 게 신기술 비관론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던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이런 걱정은 기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 최초로 승용차 운전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벤츠자동차 창시자인 카를 벤츠다. 1888년 그는 자신이 만든 승용차에 가족을 태우고 길을 달린다. 그 길은 마차가 달리던 길이었다. 마찻길을 달리다보니 흔들리고 먼지도 많이 났다. 그러다보니 고장도 자주 났는데, 고쳐줄 정비사가 없어서 운전하던 사람이 내려서 수리해야 했다. 속도는 마차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 대가가 커 보였다. 도로도 없고 정비사도 없으니,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는 날은 영영 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벤츠 스스로도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1천 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자가 정비도 해야 했기 때문에 더 보수적으로 예측됐다.

2014년 한국 운전면허 소지자 수는 3천만 명에 육박한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3억 명을 넘어선다. 어쩌면 카를 벤츠가 처음 자동차를 몰던 당시 갖고 있던 걱정은 지금 우리가 무인자동차에 대해 하고 있는 걱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자동차를 몰 수 있는 도로가 없고 자동차를 고칠 수 있는 정비사도 없는데 사회는 영영 도로를 깔아주거나 정비사를 육성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당시엔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해줬다. 또한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그 책임이 운전자에게 있는지 소유주에게 있는지, 아니면 제조사에 있는지는 실은 복잡한 법적 문제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는 합의를 해냈다.

자동차를 둘러싼 문제는 결과적으로 보험제도와 도로 인프라, 관련 인력 양성을 사회가 합의해 진행해가면서 해결됐다. 마찬가지로 무인자동차를 둘러싼 법적 문제나 윤리적 문제도 사회가 적절하게 약속을 하면서 정리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일자리는 위기에 빠진 것일까? 무인자동차도 드론도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변호사 업무도 의사 업무도 모두 사라지면 사람의 일자리는 상당수가 기계로 대체되고 마는 것일까?

노동을 경쟁해온 기계와 인간

컨설팅회사 매킨지에서 낸 <매킨지 쿼터리>에는 이에 대한 반론이 나왔다. 브린욜프슨과 맥아피는 21세기에 벌어진 일을 두고 생산성과 고용의 탈동조화를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매킨지는 1999년 이전에 벌어진 일을 더 들여다보자고 이야기한다. 당시에는 분명 기술이 발전하면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일자리도 같이 늘었다. 그 순환 고리는 이렇다. 기술이 처음 나오면 노동을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소득이 늘어나면 그 소득을 소비하면서 다시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그게 당시 벌어지던 선순환이었다.

따지고 보면 부모 세대에도 기계와의 경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대신 쳐주는 타자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새로 등장한 워드프로세서, 개인용 컴퓨터와 경쟁하게 됐다. 과거에는 전화기 사용자가 전화기를 들면, 전화교환수가 먼저 전화를 받아서 수동으로 번호를 받은 뒤 전화받을 사람에게 연결해줘야 했다. 전화교환수들은 자동식 전화기와 경쟁해야 했다. 버스안내원은 버스카드와, 은행원은 현금자동입출금기와 경쟁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자리들은 모두 사라졌다.

경쟁의 규모와 범위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노동을 놓고 늘 기계와 경쟁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일자리는 계속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20세기 기술 발전은 일자리 증가와 동행했다.

그렇다면 21세기 기술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노동을 대체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빈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예전만큼 쉽지는 않다. 과거 고성장기에는 경제의 총량 자체가 빠르게 늘었다. 새로운 산업이 생기고 새로운 고용을 만들어내는 일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하지만 선진국 어디에도 20세기 후반만큼의 고성장을 기대하는 곳은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가치가 창출돼 손쉽게 새로운 일자리가 대량으로 생겨나는 일은 이제 찾기 어려워질 것이다. 특히 물건을 대량생산하는 제조업에서는 대규모 고용을 기대하기 어렵다. 기술은 점점 노동 절약적으로 바뀌고, 생산라인에서 노동하는 인간을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일자리가 늘지 않으면 소득 저변이 넓어지기 어렵고 새로운 상품의 수요는 성장세가 꺾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 과거 좋은 일자리의 핵심이던 제조업에서는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면 인간은 이제 생산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가질까?

오랜 기간 기계가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이 있다. 저성장 시대, 고령화 시대에도 수요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그 일은 돌보는 일, 창조하는 일, 그리고 연결하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공감하고 돌보는 일은 앞으로도 로봇이 인간보다 잘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인 간병도, 아이 보육도, 교사의 학생 상담도, 정성이 담긴 요리도 여기에 해당한다. 고령화 시대에 그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노년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돌봄은 산업이 되고 일자리가 될 수 있다.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의 일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창조하는 일 역시 로봇이 대체하기는 어렵다. 아주 먼 미래를 놓고, 아주 엉뚱한 상상을 하며, 아주 기발한 물건을 구상하는 일은 사람에게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 콘텐츠, 소프트웨어 같은 창조산업에서는 인간이 핵심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공동체를 이루게 만드는 일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는 정치가의 일이기도 하고 경영자의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일들에 자원이 배분돼야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돌봄에, 창조에, 연결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도록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자동차를 만든 이는 카를 벤츠였지만, 도로를 깔고 면허제도를 만들어 자동차를 확산시킨 것은 사회다. 사람이 여전히 노동을 할지, 또는 어떤 노동을 할 것인지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선택하는 일이다. 기술 발전으로 높아진 생산성은 그런 선택의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 한겨레21 / 2015.11.30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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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11/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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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주 출연하는 라디오 토론프로그램의 지난번 주제는 서울시의 청년활동지원금이었다. 취업 포기자, 불안정 노동자, 대학졸업 유예자 등 ‘사회 밖 청년’들 중 괜찮은 활동계획을 세워 온 이들에게 월 50만원씩 최대 6개월까지 지원하겠다는 정책 프로그램이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맞은편 토론자는 주장했다. ‘정부 지원사업과 유사중복사업이니 중단해야 한다.’ 그가 유사하다고 했던 고용노동부의 ‘취업성공패키지’ 사업은 미취업자가 직업훈련을 받을 때 월 40만원씩 지원하는 제도다. 하지만 청년활동지원금은 기존 취업 지원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 밖 청년의 사회참여활동 전반을 지원하려는 제도다. 직업훈련 지원과는 다르다.

그러자 그 토론자는 바로 다른 논리를 들이댔다. ‘총선을 앞두고 벌이는 선심성 사업이며 실효성이 없다.’ 정부 지원사업과 유사중복사업이면서 선심성이고 실효성이 없다면, 정부 사업도 선심성이고 실효성이 없다는 뜻 아닌가? 서울시의 청년활동지원금은 연간 예산 90억원을 쓰고, 유사하다는 정부 사업은 연간 예산 2100억원을 쓰는데 말이다.

감정을 거두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좋은 정책은 교과서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진다. 일반적인 과정은 대략 이렇다.

해결되지 않는 사회문제가 나타나면, 비영리와 사회적 경제 같은 민간 영역에서 먼저 뛰어들어 실험적인 해법을 들이대본다. 민간의 실험 중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정책을 지방자치단체에서 선택해 소규모로 실습해본다. 민간이나 지자체 사업 가운데 일반화할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해 중앙정부에서 전국화해 실행한다. 이게 새로운 문제 해결책을 역동적으로 내놓는 과정이다. 그러니 정부는 사실 지방자치단체의 실험적 사회정책을 최대한 권장하는 게 맞다.

청년활동지원금 제도는 청년들에 대한 투자와 같은 성격을 띨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투자자가 어느 청년의 새로운 사업아이디어에 투자한다면, 투자자는 그 청년과 함께 위험을 나누어 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 밖을 맴돌던 청년이 활동지원을 통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낸다면, 성과는 사회 전체가 나누어 갖는다. 물론 실패하면 손실은 사회 전체가 나누어 책임진다. 결과는 불확실하지만 일단 뭐든 해보도록, 가능성을 찾도록 하는 게 투자의 목적이다.

불평등 연구의 권위자인 앤서니 앳킨슨은 저서 <불평등을 넘어>에서 청년들에게 ‘기초자본’을 형성해줘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에게 성인이 되는 순간 ‘자본’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수천만원)를 제공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제안이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지 않은 사람도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자는 게 핵심이다.

서울시도 되돌아볼 점이 있다. 이 정책은 ‘지원’이나 ‘보장’이 아니라 ‘투자’라야 했다. 지원이라고 스스로를 제약하다 보니 액수도 적고 대상도 제한적이다. 물론 세금으로 운영하는 지자체에서 추진하다 보니 생겨난 제약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제안으로 마련된 청년희망펀드가 더 과감하게 청년 사회활동에 대한 투자를 실험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미 대기업을 중심으로 2천억원이나 조성된 이 펀드는 아직 이렇다 할 사업계획이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안전하게 이자놀이만 하며 관리인력 일자리만 만들고 끝날 가능성도 높다. 민간 기금답게 원금을 모두 소진해 청년들에게 가능성을 준다는 생각으로 과감한 실험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못하는 일들을 시도해봐야 한다.

어쨌든 지금은 뭐든 해봐야 할 시점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다 같이 가라앉는다.

[ 한겨레 / 2015.12.01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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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5/12/0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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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절체절명의 과제처럼 전문가와 언론이 늘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말로 생산성이 높아지면 무작정 모두에게 좋은 것일까?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산성이란 노동생산성이다. 산출물을 투입 노동량으로 나눈 것이다. 생산성이 높아진다면 같은 시간 일할 때 산출물이 더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런데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분모인 산출물을 조절하는 방법과, 분자인 투입노동량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대체로 우리는 ‘생산성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분자인 산출물이 늘어난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반대로 산출물은 그대로 둔 채 분모인 노동 투입량을 줄여도 생산성은 높아진다.

어떤 공장에서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같은 숫자의 노동자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면, 이는 생산성이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생산량은 그대로인데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면서 원래 있던 사람들을 해고해 버려도, 분자는 그대로이지만 분모가 줄어드니 생산성은 높아진다.

한국경제는 성 안 사람들과 성 밖 사람들로 나뉘어 있다. 성 안에는 안정적인 고소득 정년보장 일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이 있다. 성 밖에는 저임금에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기술의 발전이 성채를 확장시켜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성 밖 사람들의 일자리를 줄이면서 분모를 줄여 생산성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재앙이다. 성 밖의 고통은 더 커지고, 그 고통이 커진 결과로 만들어진 과실은 다시 성 안에만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11년 9월 보고서 한 편을 발표한다. <21세기 한국기업 10년: 2000년 vs. 2010년>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한국의 2000대 기업이 10년 동안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분석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기업의 글로벌 약진이 두드러졌다고 흥분한다. 2000년에는 IT,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 등 각 산업에서 한국 대표기업 매출 규모가 글로벌 기업에 크게 못 미쳤다. 그러나 2010년에는 글로벌 대표기업과도 당당하게 견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기업의 성장은 눈부셨다. 2000대 기업의 매출액은 그 10년 동안 815조원에서 1711조원으로 늘었다. 두 배 넘게 커진 것이다. 놀라운 성장이다. 외형성장을 했으면서도 재무건전성은 오히려 좋아졌다. 부채비율은 2010년 101%에 그쳤다. 10년 전의 200%에서 절반으로 떨어진 것이다. 상당수 우량기업은 차입금보다 현금이 오히려 많은 상태다. 영업이익률도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10년 동안 6.2%에서 6.9%로 소폭 상승했으니 말이다. 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 재무건전성도 두 배 좋아졌다. 이익도 안정적으로 낸다. 한국 기업의 10년간 성적표다.

그런데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나친 대목이 있었다. 그 10년 동안, 2000대 기업의 일자리는 2.8%밖에 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생산성 향상을 높게 평가했다. 매출액과 종업원 수를 분석한 결과, 한국 기업의 생산성이 10년 동안 두 배 향상됐다는 결론을 내린다. 종업원 1인당 매출액이 5억2000만원에서 10억6000만원으로 늘어났다고 분석한다.

생산성 두 배 향상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2000대 기업의 매출은 10년 동안 두 배로 늘었다. 그러나 종업원 수는 10년 동안 2.8%밖에 늘지 않았다. 그러니 직원 한 사람당 매출이 두 배씩 늘어난 것이다. 돈은 900조원 가량 더 벌었는데, 고용한 인원은 그 10년 동안 156만 명에서 161만 명으로 딱 5만 명 증가했다. 그것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합친 수치니, 정규직 숫자는 오히려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경제가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인구도 줄고 생산량 성장세도 꺾이고 있다. 동시에 대기업으로의 편중과 기술의 비약적 발전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좋은 일자리에 진입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좋은 일자리가 있는 기업에서는 그야말로 분자가 줄어드는 생산성 향상이 일어나고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궁극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더 적은 투입으로 더 많이 생산해서 다 같이 잘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생산성을 높인 결과 우리 중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받게 되고, 우리 중 대부분의 삶은 그리 좋아지지 않고, 우리 중 극소수만 더 큰 풍요를 누리게 된다면, 그 생산성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래서 언론이나 전문가를 통해 한국경제 생산성이 낮아서 문제이니 이를 높이자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늘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지금 저 사람이 이야기하는 ‘생산성’이란 어떤 ‘생산성’일까? 저 사람이 높이자는 생산성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의 생산성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 뉴스토마토 / 2015.12.02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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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5/12/0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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