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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이름으로 회비가 출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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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이름으로 회비가 출금됩니다

익명 (미확인) | 월, 2015/12/21- 15:20

그동안 정치발전소는 청년유니온의 CMS 계정을 빌려 회원님들이 매달 보내주시는 회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통장에 찍히는 이름이 청년유니온이라서 정치발전소로 회비가 가는게 맞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느덧 정치발전소의 회원이 300명이 넘었습니다. 때문에 정치발전소도 이제는 정치발전소만의 계정으로 회비를 받으려고 합니다.

새로이 CMS 계정을 만들어 기존 회원님들의 정보를 모두 이전했으며 12월 18일 이후 출금부터는 청년유니온이 아닌 정치발전소의 이름으로 진행됩니다.

내년에도 정치발전소가 좀 더 안정적인 단체가 되고 다양하고 좋은 활동들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기틀을 만드는데 노력하겠습니다.

회원 여러분, 시민 여러분들도 정치발전소에 많은 관심가지고 활동들에 응원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그동안 정치발전소의 회비를 대신 받는 실무를 처리해 준 청년유니온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더욱 발전해나갈 정치발전소에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 정치발전소의 회비는 신청해주신 금액이 10, 18, 27일 중 선택하신 날짜에 출금됩니다.
  • 출금일이 휴일인 경우 다음 은행영업일에 출금됩니다.
  • 출금일에 잔액 부족 등의 사유로 정상출금되지 않은 경우 해당월의 마지막날에 미납출금이 진행됩니다.

정치발전소 회원가입 : http://bit.ly/join_powerplant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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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기사 모니터링>
안녕하세요, 정치기사 모니터링팀입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팀은 지난 세 달 동안 세미나를 진행해왔는데요, 드디어 긴 준비기간을 마치고 모니터링팀의 액션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

정치기사 모니터링팀 스터디 모습

정치기사 모니터링팀 스터디 모습

 

먼저, 세 달 동안 진행한 세미나의 결과물로서 <정치 기사 뒤집어보기>라는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 기사 뒤집어보기>는 세미나를 통해서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원들이 얻은 문제의식을 시민들과 공유하며, 앞으로 한국 정치 보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에 대한 정치기사 모니터링 팀의 의견을 제시하는 연재글입니다.

첫번째 글은 정인선 팀장님이 작성해주신 <‘정치 혐오’ 유발자는 누구?> 입니다. 정치기사 모니터링팀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잘 짚어주신 글입니다.
<정치 기사 뒤집어보기>는 앞으로 매주 화요일, 목요일 총 11회에 걸쳐 게시되오니, 관심 갖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프레시안 <정치 기사 뒤집어보기>링크 ☞  바로가기

 

수, 2015/09/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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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나라를 복수정당제의 허용 여부로 구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해 당사자들에게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 역시 민주주의의 기초 요건이다. 입법부가 아닌 대통령의 포고령이나 행정명령으로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면 그 체제를 권위주의라고 하지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경쟁하는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 의회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요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기능을 최소화하는 대신 민간 자율에 맡기라는 신자유주의의 반정치 담론만큼이나, 정당과 의회 및 이해당사자들의 역할을 냉소하면서 일반 시민이 직접 개헌하고 입법하고 정책을 만들고 부적격 공직자도 쫓아내도록 하자는 직접민주주의론 역시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촛불 집회를 직접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직접민주주의 체제라면 촛불 집회는 허용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물론 합법적으로 뽑힌 정부에 대해 비판과 반대를 조직할 자유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 기본권이다. 공론 조사로 대표되는 숙의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참여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안되고 발전된 대의민주주의 프로젝트의 하나다.

숙의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직접민주주의로 보는 것을 “난센스”라고 일축한다. 참여자들의 숙의 능력이 그 결과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다소 엘리트 편향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숙의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을 직접민주주의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국민투표식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 혹은 우파 포퓰리즘(right-wing populism)으로 부른다.

최근의 사례는 유럽의 극우 정당들인데, 이번 독일 총선에서 제3당으로 올라선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내건 슬로건,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이 대표적이다. 대의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라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간접민주주의는 정치 이론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일종의 통속어다. 이 말이 대대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2월 15일에 실시된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였다. 당시 야당과 재야 세력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확대되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 찬반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헌법학자들을 동원해 ‘간접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유형론을 펼치게 했다.

과거든 현재든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이 확고하게 추구했던 이상은 공적 사안을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총회에서 결정하는 것이었다. 9일에 한 번씩 민회를 개최했던 고대 아테네가 대표적이다. 시민 총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과 조직, 결사는 인정되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의 경우 민회 밖에서의 그 어떤 집단 행위도 허용되지 않았다. 장자크 루소를 추종했던 프랑스혁명의 주도 세력들 역시 시민의 전체 의지를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정당은 물론 이익 단체의 결사를 법으로 막았다.

시민 총회에서 결정된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들 역시 독립된 행정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관료제는 없었으며 시민이 번갈아 행정관·평의원·배심원 역할을 맡았다. 아테네에서는 추첨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시민을 뽑았다. 선거로 동료 시민의 지지를 동원해 대표가 되는 것 역시 권력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같은 공직을 두 번 할 수 없었고, 임기는 1년 이하로 짧았다. 사회 규모의 확대는 최대한 억제되었다. 규모의 증가는 기능 분화와 전문화를 낳고, 그것은 곧 소수의 전문가 집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정치 참여는 의무였다. 아테네의 경우 참여가 법으로 강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비난받았다. ‘바보 멍청이’란 뜻의 영어 ‘idiot’는 고대 그리스어 ‘idi ̄ot ̄es’에서 유래한 말로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는 시민을 가리켰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제도와 원리를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해당 시기의 역사적 제약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현실적 최선을 추구한 실험인 것은 맞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이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일 때가 많다. 지금은 지금의 조건에 맞는 민주주의 발전론이 필요하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1024/86916628/1#csidxcfc3fd8be35f8ff9b8c185d8e2eba2a

화, 2017/10/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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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책읽기_불평등편>

다시 시작되는 책읽기 모임. 이번에는 ‘불평등’입니다. 부담은 덜고, 책은 좀더 알차게 읽기 위하여 월1회, 5회씩 상하반기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일년이면 총 10권의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 책읽기 모임은 분야를 정해 함께 책을 읽는 모임입니다. 책을 읽고 오시면 좋지만, 다 읽지 못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출석하겠다는 의지만 있으시면 됩니다.

다만, 이 모임은 세미나가 아니라 강독 모임입니다. 해설 없이 책의 주요 부분을 함께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니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집단적 책읽기의 묵직한 즐거움을 느껴보
세요.

진행 : 박선민 사회정책연구센터장
기간 : 2016년 2월~6월 매달 셋째주 토요일 오전 10시~ 12시 (월 1회/총5회)
장소 : 미디어까페 후(홍대입구역 2번출구)
참가비 : 5만 원(책은 개별 구매)
참가신청 : http://goo.gl/forms/lR0tJGvvKz
회비납부 : 농협 036-12-101163 박선민/ (입금순 마감)
*장소 관계 상 인원 제한이 있습니다.
문의 : [email protected]

1차(2월20일) 불평등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 (이정우,이창곤/후마니타스)
2차(3월19일)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열린책들)
3차(4월16일)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지그문트 바우만/동녘)
4차(5월21일) 거대한 역설-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 (필립 맥마이클/교양인)
5차(6월18일) 불평등의 킬링필드 (예란 테르보른/문예춘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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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16/02/0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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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상대를 공격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최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인사청문회에서 대립한 여야의 모습. 동아일보DB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경험이 반복돼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다. 공항에서 출입국 절차를 밟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죽음이라고 하는, 누군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도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것임에도, 대개의 인간은 천년만년 죽지 않을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슬픈 운명을 자각할 때가 많다. 실존에 대한 깊은 인식이 죽음과의 대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얄궂다.

민주주의도 그런 것 같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익숙한 민주주의 체제란 없다.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치체제로 여긴 철학자도 없다. 민주주의는 완전한 체제도, 완전해질 수 있는 체제도 아니다. 민주주의에 관한 명연설이 종종 장례 행사에서 행해진 사실을 의미 깊게 생각해 본다. 2500년 전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이 대표적인데, 많은 사람은 민주주의가 군사적으로도 강한 이유를 말하는 앞부분에 주목한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을 위로하는 연설 후반 또한 인상적이다. 특히 “슬픔이란 우리가 모르던 것을 탐낼 때가 아니라 익숙했던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것”이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적 비애임을 말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렇기에 페리클레스는 나이 든 시민(즉, 노인)을 향해 “슬픈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스스로를 위안”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30년째 중단 없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고 여야가 10년을 주기로 정부 운영을 번갈아 맡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민주주의이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여전히 혼란스럽다. ‘시민 구성원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의견을 갖는 것’이 민주적 권리의 요체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의견을 어떻게 나누고 모아야 전체를 위해 좀 더 합리적이고 유익한 결정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의견의 자유가 뜻하지 않은 갈등과 상처로 이어질 수 있다.

비민주주의 체제와는 달리 민주주의에서는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처벌하지는 않으니 평화롭고 안전할 거라 생각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말과 마음이 시끄러운 체제다.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저자’라 할 수 있는 알렉시 드 토크빌이 강조했듯,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공격하고자 하는 욕구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더 극렬하게 표출된다.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정치적 의견이 달라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경험은 민주주의하에서 더 일상적이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와 증오의 욕구가 민주주의에 내재된 사회적 병리현상임을 보여주는 사례는 끝도 없이 많다.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현실화해야 변화도 가능하다. 인사청문회를 두고 지금처럼 여야가 서로에게 완전한 기준을 요구하고 그 기준에서 상대의 불완전함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은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이 되면 변화는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통치 엘리트의 도덕적 수준을 점차적으로 높일 수 있는 ‘경과 기준’을 두고, 여야가 의미 있는 합의점들을 누적해갔으면 한다.

이런 과정에서 정당 정치가 좋아져야 민주주의도 미래가 있다. 그래야 의견을 달리하는 시민 집단 사이에서 ‘정신적 내전’에 가까운 공격성도 줄일 수 있다. 민주주의란 누구도 무엇이 확고하게 옳은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 정치체제다. 옳음이 하나일 수 없다는 ‘건강한 회의주의’에 기초를 둔 다원주의 체제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시민의 의견을 나눠서 조직하는 정당들의 공적 토론이 ‘숙고된 결정’과 ‘합의된 변화’를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여야 모두 서로가 야당이고 여당이었을 때를 돌아보며, 스스로부터 공정해졌으면 한다. 야당은 야당으로서 잘해야 여당이 될 수 있다. 집권 여당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청와대만 바라보며 존재감과 역할을 잃어가는 일을 집권당 스스로 선택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정부’ ‘책임정부’를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그에 충실하게 정국을 이끄는 일일 것이다. 집권당을 하위 파트너로 만드는 ‘청와대 정부’가 최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620/84962902/1#csidx6a76e9e53d38cb1b96e8579fe2e7bad

화, 2017/06/2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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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입력 2017-02-14 03:00:00 수정 2017-02-14 03:00:00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 문제에 대해 읽고 쓰는 것이 직업인지라 사적 영역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끝이 좋지 않아서다. 지지 정당이나 이념 성향이 같아도 지지하는 대선 후보가 다르면 더 그렇다.

정치를 특정인 중심의 사적 문제로 전환하는 데 있어 TV의 정치 프로그램이 발휘하는 위력도 커질 대로 커졌다. ‘정치의 사사화(私事化)’ 또는 ‘사적 영역으로의 정치의 쇄도’라고 부를 만한 이런 현상은 탄핵과 대선의 국면이 중첩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작 정치의 역할이 중심이어야 할 공적 영역의 상황은 어떨까.

사정은 정반대다. 정치의 공적 기능은 발휘되지 못하고 있고, 그 기능을 더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만 높다. 사적 영역의 과도한 정치화와 공적 영역의 반(反)정치적 경향이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정치의 이상에 반하는 면도 있다. 민주주의란, 일상의 시민적 삶을 분열시키는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옮겨서 다루는 집합적 기예를 뜻한다. 그런 기능이 위축된 상태에서 사사화된 정치적 논란이 심화되면 공동체는 분열되고 시민들은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우연히 친박 집회가 열리는 서울의 시청역 앞을 지나가다 역 입구에 ‘군대여 일어나라’라고 적혀 있는 피켓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정치가 대통령 개인의 문제로 다뤄질 때 이런 무서운 말도 쉽게 하는구나 싶었다. 특정 후보 지지자들 사이의 비공식적 정치언어 역시 지나칠 때가 많다. 한 인터넷 토론방에서 ‘야당이 잘못한 건 개누리를 인간 취급한 거다. 인간이 아니라 박멸해야 할 벌레들이다’라는 글을 보며, 이렇게까지 심할 수 있구나 하는 걱정을 했다. 정치가 정당과 같은 공적 영역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더라면 이런 일은 훨씬 줄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 선거가 후보의 사설 캠프에 의해 주도되는 것, 그 때문에 정당이라는 공적 기구가 공허해지는 것을 좋게 볼 수가 없다. 최근 한 후보의 캠프 사무실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규모와 열기에 놀라면서도 이 또한 얼마나 큰 공적 낭비인가를 생각했다.

정치철학의 기본 개념 중에 ‘자연상태’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공적 영역에서 정치의 기능이 부재한 상태’이자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갈등과 차이, 이견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17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그런 자연상태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으로 묘사했다. 다른 철학자들 역시 안전한 자연상태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는데, 그렇기에 ‘코먼웰스(commonwealth)’라고 불리는 공적 영역을 불러들였고 이를 관리하는 정치의 역할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려 했다. 이런 정치 비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있다면 단연 파시즘이다.

물론 사적 영역을 비정치화하는 것이 처방일 수는 없다. 공적 영역의 활성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적극적 열정을 가질수록 민주적 규범은 지켜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인간이 가진 싸움의 본능을 평화롭게 처리하는 기제를 가리킨다. 어느 사회든 생각을 달리하는 시민 집단은 하나 이상이며, 그들 사이에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을 하나로 만들려 하거나 설득이 아닌 강제의 논리가 두드러지면, 이견을 없애려는 욕구만 커진다. 상대를 모욕하기 위해 정형화된 부정적 이미지를 부여할 때도 많다. 그러면 사회는 양극화되고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지기 쉽다. 민주주의가 논쟁을 엔진으로 삼아 작동하는 체제라 해도, 논쟁이 전쟁처럼 될 수는 없다. 논쟁과 전쟁은 반딧불과 벼락만큼이나 다르다.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전쟁과 달리 논쟁은 이견과의 공존을 전제로 사회를 좀 더 넓게 통합하는 합리적 경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간 야당이나 비판 세력을 ‘종북 좌파’로 공격하고, 하나의 국가관만을 교과서에 담아 가르치려 한 것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았고, 또 그런 식으로 사회를 적대와 대립으로 치닫게 한 것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된 것을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같은 종류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친박은 물론이고 그 거울 이미지 역시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214/82851739/1#csidxcd4716f6a17a791a84372710e4c491a

화, 2017/02/14-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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