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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일성 만세' 대자보, 내가 다시 붙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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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일성 만세' 대자보, 내가 다시 붙이는 이유

익명 (미확인) | 수, 2015/12/09- 11:41

지난 7일 '미디어오늘'에 경희대, 경찰 전화받고 학생 대자보 뗐나 라는 기사가 실렸습니.  한 학생이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를 대자보에 옮겨 적고 학교에 게시 했는데 경희대학교 측에서 학생 동의를 받지 않고 대자보를 수거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이에 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시민교육 강사(다산인권센터 활동가)가 다시 미디어오늘에 글을 보냈습니다. 다음은 그 글의 전문입니다. 


'김일성 만세' 대자보, 내가 다시 붙이는 이유


경희대 재학중인 김수영이라는 학생이 김일성 만세라는 글을 썼다 한들, 대학은 글을 읽어야지 글을 찢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학은 게시물을 철거했다. 소위 외부에서 우려스러운 문의가 온 후 딱 십 분 만에 떼었다 한다. 그것도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우려스러운 문의는 경찰 신분을 밝힌, 경찰 관계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니 학내의 대자보를 경찰 전화를 받고 십 분 만에 떼어버린 일이 대학에서 벌어졌다. 무덤 속의 김수영이 벌떡 일어서 다시 김일성 만세를 외칠 일이다.

 

언론을 통해 접하고서, ‘라도 학생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말하고 싶었다. 표현의 자유가 시르죽고, 살아난 독재의 칼날이 시퍼렀다 애통해하는 시기에 김일성이름을 걸고 시대에 정면 도전한 학생이 있으니, 후마니타스의 교육 목표는 당신으로 인해 이미 이루었다, 뿌듯하다 말하고 싶었다. 몇 년 동안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시민교육에 몸담으며 학생들을 가르친, 선생이라 말하기도 부족한 라도 말이다. 비록 직접 가르친 학생은 아니더라도 몸담고 있는 교육터전에 당신과 같은 학생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말해주고 싶었다.

 

탁월한 개인, 책임 있는 시민, 성숙한 공동체 성원을 양성하는 것이 후마니타스칼리지의 교육목표다. 탄탄한 교양의 기초 위에 쌓은 자신의 지식으로 사회에 크게 기여하고, 세계로 열린 시야를 통해 지구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미래인재. 이러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이야말로 21세기가 요구하는 대학의 미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육목표 중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마(후마니타스 칼리지)의 행정실이 당신의 대자보에 손을 댔다. 경희대 구성원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변명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김수영이라는 학생이 쓴 시로 오인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조차 이해하기 힘들다.

텍스트만 제대로 읽어도 학교는 이러한 천재적 학생이 있구나 하며, 자랑스러워했어야 했다. 합리와 이성이 무덤으로 갔는가, 왜 이 시가 우려스러운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김수영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정말 읽히지 않는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이 의심스러울 뿐


               (사진출처: 미디어오늘)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만세

韓國言論自由出發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1960년 김수영 <김일성만세>)

 

오늘 그 부끄러움을 대신하기 위해 국제캠퍼스, 당신의 동료 시민과 학생들이 있는 멀티미디어관에 대자보를 게시할 예정이다. 예의 김수영의 시를 써서 붙일 생각이다. 국제사회가 비난하는 국가보안법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질 것이며, 도대체 무엇을 불온하다 막는지, 이 정권에게 그리하여 위축된 학교와 시민사회에 이야기를 걸어볼 생각이다.

 

그리하여 논란을 불사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강사까지 나서 김일성을 찬양했다비난하는 글을 쓸지라도 각오하고, 불화의 맞불을 놓는다. 나는 아직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내놓을 자신은 없다. 다만 달을 가르키니 손끝만 보는 당신들을 걱정한다는 대답을 미리 드린다.

 

시민교육 강의하며, 늘 빚진 기분이었다. 치열한 인권현장을 오가며, 일주일에 단 한번 당신들을 만났다. 당신들은 늘 미래에 대한 고민과 격정으로 빛나는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당신들의 열정과 진심에 빚졌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당신들로 인해 다독여졌었다.

 

그건 당신들의 존재만으로 가능했다. 그걸 갚을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 나는 적어도 당신들이 혼자 분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당신들 곁에는 당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선생들이 분명 있다. 후마가 대자보를 떼었지만, 여기 당신들 곁에 선생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2015.12.9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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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혁명을 주장하고 계급을 얘기하는데, 고작 사랑 따위 타령을 운동씩이나 해야 하다니, 한심해서….” 기운 빠진 목소리가 기억난다. 그는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였다. 한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입바른 위로도 해주지 못했다. 감추어야 하는 감정과 감당했던 슬픔, 두려움에 대해서도 말했다. 정체성이 일상 속에 부대꼈다. 빚어낸 갈등이 발목을 오래 붙잡았다. 밝히지 못했기에 거짓말쟁이 같았다, 했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야만 하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어. 운동하면서도 나는 겉돌았지, 세상을 바꾸자고 얘기하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이제 다 밝혔는데, 또 드는 생각은… 언제까지 나는 정체성에, 사랑 따위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 말이야.”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애인 있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고 시절, 책상 서랍 속 “언니가 좋아요”라는 고백 담긴 쪽지가 떠올랐다. 밸런타인데이, 누군가 아침 일찍 넣어둔 편지와 초콜릿들이 있었다. 선머슴 같은 외모 때문이었는지 쫓아다니는 여자애들이 꽤 있었다. 동성에 대한 애정이었는지, 이성을 대체하는 감정이었는지 굳이 따지지 않았다. 일종의 환경이고 문화였다. 무엇보다 나는 가슴이 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 듣던 다른 레즈비언 친구는 “당신한테 했던 고백 때문에 뼈가 녹는 고통을 당한 이가 있었을지 몰라” 했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사랑이니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이 사랑이니까.


부채춤 앞에서 사랑을 외친 그대들

한국 사회는 서울시민인권헌장, 동성결혼 합법화, 퀴어 퍼레이드를 통해 성소수자의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 중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야기 중이라고. 12년 전 인권활동가 대회를 처음 시작할 때 인권운동에서도 성소수자운동은 낯설었다. 성소수자는 사진 촬영에 담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서울시청을 점거한 성소수자들을 보았다.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이 들어간 서울시민인권헌장 선포를 거부한 서울시에 대한 ‘무지개 농성단’의 항의 행동이었다. 인권활동가들만 있는 장소에서도 얼굴 밝혀지기 꺼리던 이들이 혐오세력이 득실거리는 시청 안을 일주일 동안 당당히 점거했다. 감격스러웠다. ‘벽장 속에서 나오다’(come out of the closet)라는 ‘커밍아웃’이 이렇게 당당히 실현되는 장면이라니!


“남자친구 있어요?”라는 질문조차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애인 있어요?” 정도 질문이면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이성애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배제와 소외가 시작됨을 알려주었다. 그들로 인해 내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그 시절 고백한 그녀들이 여성이라서 두근거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모든 남성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이유와 같았겠지. 사랑이 뭔지 아직 모르는데, 앞으로 무엇에 흔들릴지 내가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아니지만, 너를 인정한다’는 어줍지 않은 타자의 말을 거두라. ‘고작 사랑 따위 타령을 운동씩이나 해야’ 하는 고뇌를 품은 이들이 곁에 있다. 국제사회에서 인권 등급이 거침없이 추락하는 ‘아몰랑’ 사회에서 유일한 위로가 되는 이들이다. 그들이 얼굴 내밀고 퀴어 축제를 벌인 오늘, 우리 모두의 인권 수준이 높아졌다. 그 힘은 정체성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갈등과 수치심 그리고 뼈를 녹이는 사랑에서 나왔다. “똥구멍으로 그 짓 하는 게 지금 잘하는 짓이냐”는 절망의 부채춤 앞에서 혐오보다 사랑을 외친 그대들. 세상은 사랑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어쩌면 혁명보다 사랑!



2015. 7. 9. 한겨레 21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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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보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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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07/1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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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연휴, 모처럼 긴 휴가를 맞이해 읽고 싶은 책을 꺼냈다. 작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출간 당시 많은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한동안 이슈가 되었던 책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뒤늦게 읽게 됐지만, 명절을 앞두고 만나서 그런 걸까. 작가의 말처럼 설날에도 자꾸만 김지영 씨가 어딘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여느 며느리처럼 설날을 맞이하여 시댁에 들러 인사드리고, 전을 부치고, 고기를 다지고, 설거지하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러다 기억에 묻어둔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희망다반사’는 희망제작소 연구원이 전하는 에세이입니다. 한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시선이 담긴 글을 나누고, 일상에서 우리 시대 희망을 찾아봅니다. 뉴스레터, 김제선의 희망편지와 번갈아서 발송되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590394

지난 설 연휴, 모처럼 긴 휴가를 맞이해 읽고 싶은 책을 꺼냈다. 작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출간 당시 많은 여성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한동안 이슈가 되었던 책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뒤늦게 읽게 됐지만, 명절을 앞두고 만나서 그런 걸까. 작가의 말처럼 설날에도 자꾸만 김지영 씨가 어딘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여느 며느리처럼 설날을 맞이하여 시댁에 들러 인사드리고, 전을 부치고, 고기를 다지고, 설거지하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러다 기억에 묻어둔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일곱 살쯤 되었을까. 명절을 맞아 차례를 지내러 가는 길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엄마는 현관을 나서다 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꼭 가야 하냐’고 말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엄마가 왜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시골 가는 길에 분위기를 망쳤다고 짜증 부리던 기억만 난다. 스물다섯이 된 지금에서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 어린 내가 친척 어른들에게 두둑한 용돈을 받는 동안, 엄마는 뒤편에서 사진으로만 접한 조상님을 위해 땀 흘려가며 차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또 다른 차례 준비로 고통받고 있을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3~4학년 때쯤, 우리집 명절 풍경이 달라졌다. 추석에는 엄마의 고향에 갔고, 설에는 아빠의 고향으로 향했다. 나는 그저 좋았다. 보고 싶은 친척을 만나고, 용돈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연휴 내내 즐거움을 만끽했다. 어린 마음에 한 번씩 번갈아 가는 게 공평해 보이기도 했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그게 당연한 거로 생각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명절 풍경이 또 달라졌다. 설에 시골을 가지 않고 우리집에서 차례를 지내게 되었다. 아빠가 장남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왜냐고 묻지 않았다. 더는 차례상을 준비하지 못하시는 할머니의 건강이 염려될 뿐이었다.

당시 집안일을 도맡았던 아빠는 설을 맞이해 과일을 사고,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쳤다. 엄마는 애쓴다며 장 보는데 필요한 비용을 보탰다. 다른 집에서 보기 힘든 흥미로운 그림이었다. 감정이 요동쳤다.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엄마가 더는 명절에 고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나쁜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설이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하고, 어떤 사람들은 며느리를 ‘사직’하고 친정에 갔다. 세상은 변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우리집이 차례를 지낸 후 남은 시간에 낮잠을 자거나 TV로 올림픽 경기를 보며 연휴다운 연휴를 보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자꾸 ‘82년생 김지영’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김지영 씨의 모습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엄마의 젊은 시절을 보았기 때문일까.

“자꾸만 김지영 씨가 진짜 어디선가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의 여자 친구들, 그리고 저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쓰는 내내 김지영 씨가 너무 답답하고 안쓰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살았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 ‘82년생 김지영’ 작가의 말 중

– 글 : 김수영 | 일상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

목, 2018/02/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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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도 심지어 배우조차 떠오르지 않는데 제목과 줄거리가 뚜렷이 기억나는 드라마가 하나 있다. ‘그 넋의 그림자’라는 제목이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다른 관계, 심지어 남편에게조차 아버지 흔적을 찾는다. 꼬이고 꼬인 갈등의 근본 원인을 헤쳐보니 아버지가 그리워 무의식중에 모든 관계를 아버지에 빗대고 있더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꽤 어린 나이에 봤는데 왜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다. 제목이 강렬했고 이해 불가능한 감정의 정체가 궁금했던가보다. 최근 들어 대통령을 볼 때마다 드라마 생각이 자주 난다. 저 양반이야말로 ‘그 넋의 그림자’에 포획된 딸이 아닌가.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집착으로 역사까지 바꾸겠다는…

사람은 집착의 동물이다. 내 오랜 화두도 ‘집착’이다. 사건과 현장에 대한 집착, 심지어 술에 대한 집착도 있다. 하루에 대여섯 번 설사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집착이니 문제는 장기에 있는 게 아니라 뇌에 있을 것이다. 무릇 성숙한 인간은 집착의 원인을 찾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집착은 관계의 파탄을 낳고 부담감과 지울 수 없는 상처도 안긴다. 자식에 대한 집착은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연심에서 비롯된 집착은 스토킹이 되고,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집착은… 역사를 바꾸겠다는, 오 마이 갓! 상상조차 못해본 상황에 이르렀다.


취임 이후 줄곧 궁금했다. 자기 아버지 넋으로부터 왜 저토록 자유롭지 못할까? 청와대 안주인으로 20대를 보냈으니 청춘이 없었을 것이다. 불행하게 양친을 잃은 안타까운 개인사도 안다. 그런데 그 이유만으로 설명이 될까. 심지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 아닌가. 정말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된 것일까. 이렇게 해석하니, 대한민국에 사는 한 방울의 나들은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싶어, 낯이 뜨겁다. 왜 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초라해지지?


세상은 의외로 복잡한 듯 보이지만 단순하다. 서로의 욕망이 뒤얽혀 있는데 욕망을 욕망이 아닌 듯 보이게 하는 것이 포인트다. 욕망을 공적 이익쯤으로 보이게 하는 능력들이 탁월하다. “내 아버지를 비밀독립군으로 불러라”라는 욕망과 자자손손 권력을 유지하고 싶은 이들의 욕망이 만났다. “지금까지 교과서는 좌편향이다.” “하나의 교과서로 공부해야 국론 분열을 막을 수 있다.” 반대하는 인간들은 원래 반대할 것이고, 갸우뚱하는 인간들은 그렇게 한두 번 ‘이상하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 욕망을 얼마나 세련되게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도록! 그렇게 그들은 나름 설득력 있는 포장지를 뒤집어썼다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은 염두에 없을지도. 정말 중요한 것은 강한 주먹이다. “대항하려면 운동 좀 하고 나오든지, 아니면 꺼져! 물론 니들이 힘 기를 틈은 주지 않아.”


당신 직업은 효녀가 아니야


집권 이후,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여기까지 온 뚝심이다. 교과서 국정화도 그렇게 할 것이다. 스무 살 청와대에서 배운 대로, 아버지가 나라를 통치해온 방식대로 그렇게 할 것이다. 김기춘 삼촌 없어도 나는 안 울어. 입맛 맞춰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그들 계산법에 들지 못한 채 유신으로 ‘커밍순’ 당하는 나는,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울화가 치미니 불우한 가정사 가진 당신에게 모진 말 하고 싶네. 당신 직업은 효녀가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아버지 넋에서 벗어나야 철드는 거라고. 당신네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고.


2015.10.26 한겨레 21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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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넋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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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10/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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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4·16 생명안전공원과 기억의 백지화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체코 수도 프라하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단연 비셰흐라드 공원묘지였다. 묘지라는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저 소박하고 따뜻한 느낌의 공원이라 여겼다. ‘고지대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비셰흐라드 언덕은 야경과 석양을 감상할 수 있는 넉넉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무엇보다 프라하 시민들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시내 가까운 곳에 있다.

묘지가 공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 전까지 내게 죽은 자들의 무덤이 모인 곳은 ‘전설의 고향’을 떠오르게 하는 공포 체험이거나 거룩한 추모의 대상이 되어 도시 바깥으로 멀리 밀려난 것이었다. 비셰흐라드 공원묘지에는 체코의 국민 작곡가 스메타나와 신세계 교향곡의 작곡가 드보르자크, 화가 알폰스 무하, 소설가 얀 네루다 등 체코를 빛낸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묻혀 있다.

비석과 묘가 모두 저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방문자들은 묘지의 주인을 찾고, 그 주인이 살아온 내력을 읽었다. 매력적인 일이었다. 죽음을 삶의 가까운 곳에 둔 그들이 그 후로 오랫동안 부러웠다.

비셰흐라드 공원묘지


독일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는 홀로코스트 기념비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에 충격을 받았다. 2711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도심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기념비는 국회의사당 가까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프리드리히 거리 등이 가까운 것을 보니 시민들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기념비 안에 들어서자 밖에서 볼 수 없던 압도적인 규모와 세심한 동선에 놀랐다.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음에 충격을 받았다. 가해자였던 자신들의 가장 가운데에 피해자들을 위한 죽음의 기억을 거대하게 세워둔 독일 시민들에게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안간힘을 쓰며 살기에, 삶이 이렇게 아비규환인 건 아닐까? 죽은 자들의 어제와 산 자들의 오늘이 연결되었음을 배울 방법은 없을까…. 적어도 6·13 지방선거를 앞둔 안산지역 몇몇 정치인들에게는 요원한 일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후보들은 ‘납골당 반대’ 프레임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다. 심지어 “나는 다른 공약 없다. 오로지 납골당 백지화만이 공약이다”라고 떠드는 후보도 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4·16 생명안전공원’이 마치 화랑유원지 17만평 전부에 들어서는 것처럼 속이고, ‘납골당’이란 말로 폄훼한다. 혐오는 공포와 함께 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등에 업고 안산이 우울한 도시가 될 것이라는 쓸모없는 예단을 정치 홍보 수단으로 삼고 있다.


맙소사, ‘엄마의 마음과 눈으로 출마했다’는 한 후보의 공보물에는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100년 살아가야 할 도시 한복판에 추모공원은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쓰여 있다. 그들에게 드보르자크 동상과 홀로코스트 기념비에 맺힌 빗방울의 장엄함을 설명해주면 알아들을까? 아니면 방문자들이 품게 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숭고함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나마 여행객들이 남기는 경제적 가치 정도에만 고개를 주억거리겠지….

홀로코스트 기념비 지하에는 희생당한 유대인에 관한 기록을 보관한 박물관이 있는데 거기 한쪽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 이 점이 우리가 꼭 말해야 하는 핵심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4·16 생명안전공원’이 시민들 곁에 세워져야 하는 이유다. 그곳에 희생자들을 모시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018년 6월 4일/ 한겨레신문/ 세상읽기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7643.html#cb#csidx3aee5dad80ff57a802c9d920f55ef08 


목, 2018/06/0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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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그 남자의 소멸

그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상주들이 손님을 맞았다. 영정사진 속 남자도, 눈가가 붉어진 동료들도 이른 나이였다. 상가 안에도 바깥에도 이 죽음이 완전한 타인의 것이 아닌 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김정우 전 지부장(금속노조 쌍용차지부)은 말했다. “(한겨레) 기사 보고 전화했지. 만나서 술 한잔하자고 했어. 그러자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때 이미 마음을 먹은 다음이더라고.” 부질없는 소리겠지만 그때 알았더라면, 그때 말렸더라면… 속울음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10년 전 그날들이 없었더라면 평범하게 오늘을 살아냈을 특별해진 삶이 서른번째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그 남자는 며칠 전 <한겨레>에 등장했었다. ‘진압 10년 만에 쌍용차 복면인들 “이제야 말한다, 나였다고”’의 ‘나’ 중 하나였다. 2009년 여름은 잔인했다. 어제까지 한솥밥 먹던 형과 아우가 산 자와 죽은 자가 되어 대치했다. 그들을 먹여 살렸던 볼트와 너트는 무기가 되어 서로를 공격했다. ‘오 필승 코리아’는 동료의 아내가 목숨을 끊은 참혹한 날도 귀를 찢도록 울려 퍼졌다.

2009년 8월5일 옥상 위 8분은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을 심어주었다. 감옥에 끌려갔고 폭도로 불렸다. 갈 곳은 없었다. 받아주는 직장도 없었고 빚은 쌓였다. 가족들의 불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경찰 방패를 막고 있던 것처럼 몸을 말고, 말고, 또 말아도 당신이 있을 자리는 없다고 밀려났다.

얼마 전 경찰 대상 인권교육에서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특공대원을 우연히 만났다. 10년 전 일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컨테이너를 타고 내린 옥상 위는 노동자들이 발라놓은 윤활유 그리스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노동자들과 대치했는데 미끄러운 옥상 위에서 넘어진 순간에도 몸을 직각으로 세우는 초능력이 나오더라며 살아남기 위해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다. 감정은 10년 전 것이 아니었다.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아직도 밉다’고 말했다. 그에게 물었다. 경찰 당국이 10년 동안 당신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는 치유해주었는지를.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떠나간 남자와 경찰 모두에게 10년 전 8분은 과거가 아니었다.

<한겨레> 기사에 달린 어지러운 댓글들을 보았다. “죽을 힘으로 살지 그랬어.” “귀족노조 노동자 말고는 하기 싫었나 보지?” “누구나 사는 게 지옥이야.” 비아냥과 욕설이 뒹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 여겼을 것들이다. 도망칠 수 없는 세상이 거기 있었다. 네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책망의 말들에서 징그럽고 두려운 세상을 살아내는 또 다른 그 남자가 보였다.

어쩌면 농성자였고 경찰이었고 사측의 구사대거나 댓글을 달고 있는, 역할은 달라도 A씨, B씨, C씨…. 정작 책임지는 자들은 아무도 없는 사회에서 자신과 타인의 살을 대패로 미는 사람들. 그의 소멸에 책임 있는 자들은 얼굴이 없는데, 얼굴을 숨기려 몸을 동그랗게 말아도 피할 길 없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 그는 없는데 죄책감이 남았다. 고통을 미리 보듬지 못한, 더 투쟁하지 못했나 하는, 어쩌면 외면했던… 그를 인터뷰한 기자 역시 기사화한 것을, 그의 얼굴과 이름 담은 것을 죄스러워했다. 10년 전 옥상 위에도 국가가 없었는데, 오늘도 그렇다.

그러나 언젠가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다한 다음, 마지막에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도 늦지 않는 사회가 당신 덕분에 왔다고, 인사하는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을 만들어야지.

김주중씨 잘 가요. 당신 고통을 보살피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영면에 드시길.


박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한겨레 세상읽기 (2018.7.2)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1594.html#csidx243bf9f767a671a9fe8bb2a87c492aa 

화, 2018/07/0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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