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Human Rights Concert, ‘Human Rights, Sing for Hope Again’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선한 사람이란 악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으며,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 존재가 가진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면, 선한 사람에 대한 정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미지근한 주장은 악의 번성에 기여할 뿐이라며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단호하게 선을 옹호하고 악을 응징하겠다는 결의만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럴수록 타인의 선의를 의심하거나 그를 ‘악의 조력자’로 몰아 공격하기 쉽다는 데 있다.
소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C S 루이스는 자신의 선의를 확신할수록 ‘철저하게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악마란 ‘타락 천사’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천사는 구원받지 못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은 나약함 때문이라는 존재론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구원자를 소망할 이유가 되지만, 천사는 애초에 타락할 수 없는 선의의 대변인이기에 그렇다. 선의라는 것이 내적으로 단단하게 다지려 노력해야 할 개인적인 과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런 선의가 앞세워지면 역설적이게도 선의는 줄고 적의는 커진다.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선의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미국 헌법을 주도했던 제임스 매디슨의 그 유명한 말처럼, ‘인간은 천사가 아니고 천사에게 정부를 맡길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동료 시민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위협할 수 있는 집단의 출현 가능성 때문에 정부를 만들게 되었고, 그런 정부가 전제정으로 퇴락하지 않도록 입헌적 장치 안에 묶어 둔 것이 민주주의다. 사적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박탈하면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되기에, 그 원인으로서 인간의 이기심을 제거하기보다는 누군가의 이기심을 다른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견제하게 하고, 공익에 유해한 영향을 미친 결과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 책임을 묻고자 했다.
요컨대 시민 각자의 권익을 최대화하려는 행위들이 사회 속에서 교차되면서 결과적으로 좀 더 선한 공익적 효과가 실현되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박근혜 정부의 사례가 보여 주듯 때로 실패할 수 있고, 그렇기에 끊임없이 교정하고 사후적으로 개선해 가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있었던 ‘선한 의지 논란’은 반성적으로 돌아볼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선의 여부가 논쟁이 될 때, 누구의 선의도 악의나 적의로부터 쉽게 희생될 수 있음을 잘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뒤 등장한 ‘분노’와 ‘정의감’ 그리고 ‘사랑’ 등의 선한 윤리적 언어들 역시 선한 기운을 북돋지 못했다. 정치에서 선의는 다툼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20세기 초 독일의 정치사회학을 대표하는 막스 베버는 정치가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과 가운데 하나로 ‘자신이 옳기 위해 윤리적 문제를 끌어들이는 일’을 꼽았다. 그것은 누가 더 옳은지를 두고 의견을 양분시킬 뿐, 모순적 요구와 갈등적 상황 속에서 사회적 균형을 만들어 가야 할 정치의 기능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지금 적의와 증오는 한국 사회에 상존하는 최고 위험이다. ‘촛불’과 ‘태극기’로 상징되는 거리의 상황도 걱정이고, 탄핵 인용과 자진 하야를 포함해 모든 사안을 두고 격렬한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 시민들 사이에서 지지 후보를 경계선으로 적대의 감정이 커진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정치에서 싸움과 논쟁은 피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잘 싸우고 잘 논쟁하는 데 있다. 좋은 논쟁은 민주주의의 엔진이지만 그렇지 않은 논쟁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해야 될 논쟁은 누가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말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논쟁은 선의를 독점하고자 윤리적 언어를 이용하는 일이다. 어떤 경우든 논쟁은 ‘내가 대접받기를 원치 않는 방식으로 남을 대접하지 말라’라는 황금률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반대편의 입장을 규정하는 데 있어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주장을 개진해야 한다. 반대편과의 사이에서 의미 있는 수렴 지점이 있는지를 찾으려 노력해야 하며, 논의를 해도 결론이 좁혀지지 않거나 오해 때문으로 볼 수 없는 차이가 확인되면 그때는 조정을 시작해야 한다. 논쟁될 수 없는 것으로 싸우거나, 합의할 수 있는 쟁점마저도 갈등적 쟁점으로 만드는 것은 좋은 정치의 역할이 될 수 없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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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청와대 상춘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오찬 회동을 한 5당 대표들.
왼쪽부터 정의당 노회찬, 바른정당 주호영,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
문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많은 사람이 지금의 정당 체계가 5당제인지 4당제인지를 묻는다. 이런 다당제가 지속될 수 있는지 불안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4당제든 5당제든 다당제는 유지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많다. 어떤 형태로든 양당제로 회귀하는 것이 ‘벗어날 수 없는 한국 정치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 정치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정당의 수’다. 정당이 하나라면 민주주의는 아니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일당제 내지 ‘당-국가(party state) 체계’라고 부른다. 전체주의 국가가 대표적인 예다. 복수의 정당이 경쟁하지만 야당 집권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는 권위주의 체계라고 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본다면, 과거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가 대표적이다. 결국 민주주의란 ‘야당도 집권 기회를 갖는 복수 정당 체계’라 할 수 있는데, 이때도 정당의 수는 중요하다.
양당제와 다당제 사이의 차이는 크며, 같은 양당제라 하더라도 일본처럼 하나의 우세 정당이 있는 곳과 미국이나 영국처럼 두 정당이 비슷한 영향력을 갖는 곳의 정치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같은 다당제라 하더라도 독일의 기민당과 사민당처럼 두 개의 주축 정당이 있고 이들 사이의 이념적·정책적 거리가 짧으며, 전체적으로 정당 수가 3∼5개 안팎인 ‘온건다당제(moderate multi-party system)’와 그렇지 않은 다당제 사이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온건다당제에 대비되는 정당 체계는 ‘양극다당제(polarized multi-party system)’라고 한다. 정당의 수는 5개를 넘는 경우가 많고, 정당들 사이의 이념적·정책적 거리는 배타적이라 할 만큼 크다.
정치를 분열시키는 힘은 좌와 우 사이에만 있지 않다. 좌와 우 사이에서 중도 정당들은 마치 쐐기의 역할처럼 정치 양극화를 가속화시킨다. 개별 정당 내부에 비토 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당이 어떤 협력, 어떤 연정을 하든 이에 저항하는 비타협적 힘으로 작용한다. 1920, 30년대 독일과 이탈리아 정치가 대표적인 유형으로 꼽힌다.
누구든 한국 정치가 양극다당제로 치닫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지금의 다당제를 잘 제도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때의 다당제는 온건다당제일 것이다. 반대로 정당의 수를 줄이기를 바라거나 양당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국 정치에서 온건다당제의 전망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된다. 승자 독식을 특징으로 하는 대통령제의 제도 효과 때문에 안 된다거나 이념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분단의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즐겨 꼽는 근거다.
그들에게 다당제는 곧 양극다당제 내지 그 유사한 것으로의 퇴락을 의미한다. 1988년 총선에서 등장한 4당 체계를 인위적으로 재편한 1990년의 ‘3당 합당’은 그런 논리로 합리화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3당 합당이 정당의 수를 줄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일본식의 일당우위 체계나 영미식의 안정적인 양당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주 내용으로 하는 양극화 정치를 가져왔다. 비단 여야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당 간 차이보다 친DJ 반DJ, 친노 비노, 친이 반이, 친박 비박 등 저급한 갈등이 당 내부를 지배하는 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양당제에서도 얼마든지 정치 양극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다당제가 불안하다고 해서 이를 작위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지난 대선에서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의 통합 시도가 젊은 유권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정의당의 독자적 목소리가 보수의 승리를 도와준다는 주장보다는 정치 발전에 기여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었던 것에서 보았듯이, 지금의 5당 구도는 나름의 합리적 기반이 있다. 다당제는 잘만 운영하면 연합과 협력의 정치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 정치 안정을 이유로 규모가 큰 통합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힘과 대결의 정치를 부추기기 쉽다. 5당제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온건다당제로의 길을 개척했으면 한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로 바꾸는 것은 그 첫걸음이겠지만, 각 정당도 인근 정당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협력과 경쟁의 합리적 기준이 분명해야 온건다당제는 생기를 띨 수 있기 때문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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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3/all/20170606/84732968/1#csidxf55765efe1e671695faf7f328a9d6d5 
2017년 새해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1월 7일 전국에서 열린 11차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서울 광화문 일대에만 60만 명이 모이는 등 전국에서 64만 3천여 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새해가 되면 촛불 시위의 동력이 약해지지 않겠냐는 예상을 깬 숫자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이틀 앞두고 열린 11차 촛불 집회의 주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와 진상 규명 요구였다. 이날 집회에는 특히 세월호 참사 당시 생존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발언했다. 참사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이들은 어느새 20살 성인이 되었다.

▲ 무대에 오른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한 당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
무대에 오른 9명의 학생들은 “저희들은 참사 당시 구조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탈출했다”고 말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나타나지 않았던 7시간 동안 제대로 보고받고 지시했더라면 지금처럼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조사는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또 “나중에 친구들을 만났을 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다 찾아서 책임을 묻고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왔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세월호 가족들은 천 일 동안 함께해 준 시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세월호가 인양되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촛불을 끄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단원고 2학년 5반 고 김건우 군의 어머니는 “세월호가 인양되지 않았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지도 않았는데 촛불이 꺼질까봐 두렵다”며 “세월호가 인양돼 미수습자들이 가족에게 돌아갈 때까지 촛불을 꺼뜨리지 말아달라, 잊지 말아달라”라고 말했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행사가 끝난 뒤 세월호 진상규명과 함께 특검의 철저한 수사와 박근혜 대통령의 조속한 퇴진을 요구하며 청운동사무소와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행진하기도 했다.
한편 박사모 등 친정부 단체 회원 3만여 명(경찰 추산) 이날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특검 수사 종료와 탄핵 기각을 요구했다.
취재 : 심인보
촬영 : 김수영
편집 : 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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