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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32회 예고 “2015 쌀 손익계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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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32회 예고 “2015 쌀 손익계산서”

익명 (미확인) | 목, 2015/11/0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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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지어서 풍년이면 기분도 좋고 해야되는데…
풍년이라지만 수입은 흉년이에요. 흉년”

수확의 계절이 돌아왔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올해도 쌀 수매가가 작년에 비해 약 10% 가량 하락했기 때문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이 전망한 올해 쌀 생산량은 약 426만 톤으로 작년과 비슷한 양이다. 그런데도 쌀 수매가는 작년보다 낮아진 것이다. 국민들의 쌀 소비량이 줄어든 영향도 있겠지만 농민들은 정부의 무분별한 쌀 수입정책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고 지적한다. 값싼 수입 밥쌀의 물량공세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풍요롭고 즐거워야 할 수확의 현장에서 신음짓는 농민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015년 쌀 손익계산서를 뉴스타파 <목격자들>이 조목조목 따져보았다.


방송 : 11월 7일 토요일 밤 11시 시민방송 RTV
다시보기 : newstapa.org/witness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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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1번째를 맞고 있는 부산국제영화제가 1996년 시작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14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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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서병수 부산시장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수많은 영화 중 하나인 <다이빙 벨>의 선정 중단을 요구한 데서 비롯됐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부산국제영화제의 당연직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독립성과 자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영화제 운영에 심각한 제동이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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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격자들 취재진과 만난 서병수 시장, 서 시장은 2014년 <다이빙벨> 상영금지 요구와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해촉 등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성을 뒤흔든 것에 대해 유감 또는 사과할 의향을 묻는 질문에 답변을 회피했다.

▲ 목격자들 취재진과 만난 서병수 시장, 서 시장은 2014년 <다이빙벨> 상영금지 요구와 이용관 집행위원장의 해촉 등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성을 뒤흔든 것에 대해 유감 또는 사과할 의향을 묻는 질문에 답변을 회피했다.

이에 대해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는 상영을 강행했다. 작품은 영화전문가들이 자율적으로 선정하고 평가는 관객의 몫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부산시와 부산영화제측 간의 갈등은 부산시의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고발, 이에 맞선 영화인들의 영화제 불참 선언 등 막다른 골목까지 갔다.

부산 국제 영화제 갈등 일지

2014년 9월 24일 : 서병수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다이빙벨’ 상영 반대 입장 표명
2014년 10월 :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다이빙벨 상영
2014년 11월 : 감사원 부산국제영화제 예비 감사
2015년 12월 : 부산시 감사원 요구에 따라 이용관 집행위원장 등 고발
2016년 2월 : 이용관 집행위원장 임기 종료
2016년 3월 : 영화인연대 등 영화인 단체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보이콧 선언
2016년 5월 : 검찰, 이용관 집행위원장 등 불구속 기소, 영화인단체 무리한 기소라고 비판

결국 올해 영화제 준비시한이 마지막 초읽기에 몰린 5월 9일, 서병수 부산시장과 강수연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만났다. 그리고 이들은 부산영화제의 또 다른 산파역을 맡았던 김동호씨를 조직위원장에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또 부산시장을 조직위원장으로 한다는 당연직 정관 조항을 삭제하기로 했다.

이날의 합의로 파국은 막았지만, 그렇다고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영화제 개최를 위한 일시적인 봉합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합의나 방안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모습

▲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모습

그렇다면, 부산국제영화제의 부활의 조건은 무엇일까? 뉴스타파 목격자들은 서병수 시장과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부활의 조건을 제시해본다.

1)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서병수 시장은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이빙 벨>을 상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 이유로 “정치적 중립이 훼손되는 작품을 상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고,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인 자신이 영화 선정 등에데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시는 해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60억 원 가량의 예산을 지원해왔다. 이런 이유로 부산시장은 당연직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맡아왔다. 일반적으로 영화제는 행정적인 책임자인 조직위원장과 실제 영화제를 운영하는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로 구성된다. 상영할 작품은 영화 전문가인 프로그래머가 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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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 등 세계적인 영화제에서도 조직위원장은 해당도시의 시장이나 행정가, 혹은 명망가가 맡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직위원장은 작품 선정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영화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상상력이 꽃필 수 있는 자유로운 토양이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조직위원장을 역임한 부산의 역대 시장들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왔던 것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의의 집행위원장의 이야기다.

베를린 영화제는 상황이 좀 특수한데요. 정부와 베를린 시가 공동으로 영화제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독일 문화부 장관이 정부와 위원회를 대신해 수장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위원장으로 재직했던 지난 14년 동안 프로그램 구성에 어떠한 방해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디터 코슬릭 /베를린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도 과거에 몇 번 정부와 관계자들에게 비판적인 영화를 상영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작년 우리는 사비나 구잰티 감독 <라트라타티바> 라는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영화는 시칠리아 지역 마피아들과 비밀리에 불법협상을 받아들이고 결탁한 이탈리아 정부를 비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 재판이 진행중이었지만 당연히 영화 상영이 중단되진 않았습니다. 정치인들이 한창 재판을 받는 중에도 말입니다.
알베르토 바르베라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 디터 코슬릭 베를린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왼쪽), 알베르토 바르베라 베니스 영화제 집행위원장(오른쪽)

▲ 디터 코슬릭 베를린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왼쪽), 알베르토 바르베라 베니스 영화제 집행위원장(오른쪽)

2) 자율성과 독립성은 영화제 성공의 열쇠

영화인들은 입을 모은다. 영화제 성공의 핵심은 자율성과 독립성이다. 실제 부산영화제가 첫 시작한 것은 1996년. 영화에 대한 검열이 존재하던 시절이라 영화 상영을 두고 크고 작은 압력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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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제가 외풍에 흔들리는 순간 관객의 외면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영화인들은 외부의 압력에 맞서 영화제의 독립성을 지켜왔다. 이런 노력 끝에 부산영화제라면 그 어떤 영화라도 상영된다는 관객의 신뢰를 얻었다. 이 신뢰를 기반으로 부산영화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했고, 수많은 스타와 명작을 탄생시킨 한국영화의 요람이 됐다. 이용관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이야기다.

위기 상황이 없지는 않았죠 초창기에는 검열에 저희들 자체의 검열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검열이 있을 때 시작을 했으니까 그때 검열시스템하고 저희들이 싸우느라고 대단히 고생을 좀 했고 중국의 언더그라운드 영화들을 저희가 집중적으로 소개했지 않습니까? 전세계에. 그러다 보니까 중국 정부로부터 엄청난 항의도 받았고 그건 지금까지 계속되는 거니까 그런 것언더들을 다 해온 것은 ‘영화제란 해방구이자 독립성을 가진 축제다‘ 이런 것에 대한 저희들의 생각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이용관 /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 이용관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 이용관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3) 2004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에서 배워라.

서병수 부산시장이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국제시장’이다. 서 시장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중단을 요구한 ‘다이빙벨’ 못지 않게,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 ‘국제시장’ 역시 그 나름의 정치적인 색깔을 띠고 있다. 정치색 짙은 영화는 상영을 금지해야 하는 것일까?

2004년 칸 영화제에서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이 상영됐다. 911 사태 이후 이라크 침공 등 부시 행정부의 외교 난맥상을 파헤친 이 작품은 부시 대통령의 외교 정책을 정면 비판해 화제가 됐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칸 영화제는 화씨 911에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겨줬다.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설명이다.

칸 영화제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화씨 9/11>을 선정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굉장히 정치적인 성격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칸영화제가 정치적이었던 게 아니라 마이클 무어가 정치적이었던 것입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가 <다이빙벨>을 상영한 것은 이런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영화제를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게 보여진 이후에야 비로소 영화를 본 사람들을 통해 민주주의나 상호 의견교환과 논의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제’가 하는 역할이고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다양한 작품과 관점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분발하게 만드는 곳이 영화제다. 이렇게 개성 넘치고 도전적인 작품들이 나와야 영화제도 살고, 관객도 즐겁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부활을 응원하며 보내온 외국 영화감독들과 국내 영화인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새삼 묵직하다.

영화가 관의 하수인으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영화제가 정부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고 영화를 선택할 자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 일본 영화감독

한국정부가 민주주의의 진짜 가치를 안다면 부산국제영화제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선 안 되고 예술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 이란 영화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왼쪽),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오른쪽)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왼쪽),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오른쪽)

영화제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는 영화제를 해외 어떤 영화인들이 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게 아주 극단적으로 내 영화는 그러면 검열에 통과되었단 말이야? 내가 그런 영화제에 가야 해? 내 영화가 왜 그런 검열을 받아야 해? 이게 아주 영화인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지탱을 하는 경우는 단 한 사례도 없습니다.
이준동 영화제작자(영화 <오아시스>,<시>, <화이> 제작)

우리가 어렸을 때 영화 볼 때 어느 극장 갔는데 “야, 그 영화 커트했대” 그러면 안 갔잖아요. “그 영화 원본 어디있니?” 원본 찾아 봤잖아요 그래서 막 돌았잖아요. 암시장에서 똑같아요 어떤 영화제를 갔는데 그 영화제를 가면 이런 영화는 틀고 이런 영화는 안 튼대, 그럼 가겠습니까? 그거 하나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가 망가지고 부산국제영화제 망가진 후에 다른 영화제가 망가지면 국내 영화 산업 자체가 무너집니다.
오동진 / 영화평론가

레드카펫을 밟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막 점프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 굉장한 자유로움을 느끼거든요 앞에 바다가 쫙 펼쳐져 있고 그런 희열이 있어요. 그런 자유에 대한 감각이 있어요 영화제는 그게 없어지면 끝이에요. 저는 끝이라고 봐요 영화제는 반 토막이 났다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채 이 영화제가 계속 간다라는 건 아무 매력이 없죠.
추상미 / 배우 겸 영화감독

▲ 왼쪽부터 이준동 제작자, 오동진 평론가, 추상미 감독

▲ 왼쪽부터 이준동 제작자, 오동진 평론가, 추상미 감독


취재작가 박은현
글 구성 정재홍
연출 박정남

금, 2016/05/1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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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이상 노년층 유권자가 사상 최대를 기록하게 되는 이번 총선에서 종합편성 방송의 편파방송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종편 시청자의 40%가 60대 이상 노년층이기 때문이다.

JTBC를 제외한 TV조선과 채널A, MBN은 뉴스보도와 각종 시사토크 프로그램에서 여당을 두둔하고 야당을 깎아내리는 불공정한 방송과 보도를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다. 특히 총선이 다가오면서 그 양상이 심해지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큰 이슈가 됐던 새누리당의 윤상현 막말 파문 때 종편 출연자들은 여당의 표 걱정을 하는 가하면 ‘술을 먹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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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지난해 5월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의 막말 사태 때 종편 출연자들이 정 의원의 정치관을 들먹이며 맹공을 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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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천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에 대해서도 더민주당에 대해서는 친노 패권주의를 청산해야한다며 새누리당의 입장과 같은 주문을 하는가 하면, 공천이 마무리되자 친노가 아닌 친문으로 재편됐다며 야당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부각시켰다.

반면 새누리당에 대해서는 친박과 진박을 거론하면서 패권주의란 말을 쓰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마치 비박이 친박에 비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보도가 대부분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통신심의위 산하 20대 총선 선거방송심의원회에 최근 3개월 동안 접수된 심의 안건 26건 가운데 14건이 종편 프로그램이었다. 이 가운데 2건이 법정제재, 7건은 행정지도를 받았지만 종편의 편향성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지난 19대 총선 당시는 종편 출범 초기였기 때문에 시청률이 미미했지만 현재는 당시보다 적게는 2배에서 4배까지 시청률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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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편 시청자 가운데 60대 이상은 40.13%로 30대 8.66%, 40대 15.66%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2015년 9월 기준, 황성연(2015.10)-종합편성 채널의 시청률 성과와 전망)

그런데 종편의 주시청자층은 우리나라의 유권자 비율하고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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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투표권을 얻는 19살 유권자 67만여 명을 포함시키더라도 20-30대 유권자는 천500만 명으로 19대 총선 때보다 60만 명 줄어든 반면 60대 이상 유권자는 약 158만 명 늘었다. 60대 이상 유권자의 비율도 전체의 23.2%로 40대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또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 1월 발표한 언론수용자 의식조사를 보면 60대 이상은 TV에 대한 매체 의존도가 74%로 40%~50%대에 머문 다른 연령층보다 훨씬 심한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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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우리나라 유권자 가운데 비율이 가장 높은 60대 이상의 경우 종편을 비롯한 방송의 편향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상현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는 “주시청층이 중장노년층으로 돼 있는 종편 방송이, 한 채널도 아니고 여러 채널이 동시에 공정성에서 어긋나는 방송을 지속, 반복, 강조하게 됐을 경우에 그 결과는 뻔한 것”이라며 권력을 비판하지 못하는 방송이 유권자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해서 우려했다.

지난 2012년 19대 총선에서 60대 이상의 투표율은 68%로 43%에 머문 20~30대나 52%를 기록한 50대보다 훨씬 높았다.

목, 2016/03/24-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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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려진 독립운동, 박자혜

‘단재 신채호의 아내’로만 기억된,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간호사

박자혜 열사의 이름을 다시 찾아서

2) 나라사랑교육 INSIDE

강사: 북한은 김일성 동상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어서 동사무소에 제출해야 정식으로 결혼을 인정받습니다. 학생 여러분~ 이런 나라에 살고 싶어요?

(새터민: 거짓말입니다. 결혼 등록 자체가 동사무소 안 갑니다.)

2012년부터 국가보훈처가 초중고생에게 실시하고 있는 나라사랑교육의 실태입니다.

월, 2015/12/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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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후원금은 낼 수 있어도 세금 낼 돈은 없다.

국회의원들에게 정치후원금을 낸 고액상습체납자들의 항변이다. 뉴스타파는 이들이 왜 세금은 장기 체납하면서도 정치인에 대한 기부는 끊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추적했다.

Case 1 –
‘의뢰인이 후원자로’ – 사채업자 최현호와 국회의원 박민식

정치자금을 내는 체납자 명단에는 이른바 ‘기업사냥꾼’이 있었다. 명동에서 대부업체를 운영했던 최현호 씨다. 종합소득세 등 약 150억 원의 국세를 체납한 최 씨는 지난해 공개된 체납자 가운데 9번째로 체납액이 많았다.

최 씨는 중견IT업체 H사를 비롯해 다수의 코스닥 상장업체를 ‘사냥’했다. 최 씨가 자금을 대고 공범들이 상장사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그리곤 횡령, 배임, 주가조작, 불법유상증자(속칭 ‘찍기, 꺽기’)로 돈을 빼냈다. 최 씨는 이 과정에서 연 120%의 고금리로 불법대부업을 하며 부를 늘렸다. 최 씨의 체납액 150억 원은 이를 알아챈 세무당국의 조사과정에서 발생했다.

최 씨 일당의 기업 사냥은 소액주주들에게 막대한 재산상 피해를 입혔다. 뉴스타파 취재진이 만난 한 소액 주주는 상장폐지로 2억 원을 날렸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 씨 일당은 회사를 찢어 먹은 돈으로 호의호식했다. 그때 생각만 하면 화가 치민다. 수사기관이 밝혀내지 못한 불법자금이 아직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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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기업이 깨지고 주주들이 돈을 날렸지만, 사채업자 최 씨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젊은 정치인을 장기간 후원했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이었다. 최 씨는 2010년부터 2년 간 매월 40만 원씩 총 920만 원을 후원했다. 2년 간 개인이 낼 수 있는 정치 후원금의 한도액(1000만원)을 얼추 채웠다. 대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박 의원은 뉴스타파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사 퇴직 후 변호사 시절에 한번 사무실을 방문했던 사람이다.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최 씨와 이후 별도로 연락을 한 적은 없어 그 사람과 관련된 사건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뉴스타파 취재 결과 박 의원이 변호사를 할 때 최 씨는 상법 위반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최 씨가 그 시기 ‘변호사’ 박민식을 만났다면 그것은 사건 의뢰 혹은 법률 자문 때문이었을 공산이 크다.

Case -2
‘세금은 못 내도 은혜는 갚는다’ – 건설업자 허필용과 전 국회의원 윤진식

은혜를 갚기 위해 정치후원금을 낸 고액체납자도 있었다. 허필용 전 윤중종합건설 대표의 경우다. 2005년 회사가 부도난 뒤 그는 100억 원대 빚과 세금에 허덕였다. 그리고 2011년 고액 세금체납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이듬해 윤진식 전 새누리당 의원에게 정치자금 500만원을 후원했다. 그는 어떤 돈으로 후원을 했을까.

취재진은 허 씨의 소재를 수소문했지만, 어디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건설사가 있던 여의도 빌딩에도, 허 씨 소유였던 분당 아파트에도 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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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씨의 행방을 찾은 지 2주째. 흔적도 없던 허 씨의 최근 행적이 확인됐다. 중년층 대상의 한 잡지를 통해서였다. 허 씨는 이 잡지에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소개돼 있었다. 그의 인터뷰 기사에는 그가 찍은 풍경 사진 여러 장이 소개돼 있었다. 취재진이 잡지사를 통해 허 씨와의 연락을 시도하자, 잡지사는 허 씨를 인터뷰 한 기사를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잡지사 측은 “허 씨가 기사 삭제를 요구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인천의 한 다방. 취재진과 마주 앉은 허 씨는 “회사 부도 이후 수배를 당해 전국을 떠돌았다”, “살아갈 방법이 없어 강물에 몸을 던질 생각을 했다” 등의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체납자 신분임에도 윤 전 의원에게 후원금을 쾌척한 사연을 설명했다.

윤 전 의원 조카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 후원했다.

보은 차원의 후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금을 낼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 돈을 어떻게 내겠나. 세금이 19억 원인데, 그것말고도 갚아야 할 돈이 00은행에 20억, 00은행에도 20억 있다. 세금은 문제도 아니다.

허 씨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후원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윤 전 의원은 허 씨를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이름도 모른다. 후원한 사람의 상황에 따라 후원금을 받고 안 받을 수는 없다. (후원금을) 송금해 버리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Case-3
‘정치권 기웃거린 체납자’ – 전 부산자원 대표 박우식과 국회의원 김태원

‘부산자원’이라는 폐기물처리업체를 운영했던 박우식 씨는 현재 국세 9억6천만 원, 지방세 3천4백만 원 등 총 10억 원에 가까운 세금을 체납하고 있다. 그럼에도 박 씨는 새누리당 중앙위원회 의장인 김태원 의원에게 2013, 2014년 2년 동안 국회의원에 대한 정치후원금 최대 액수인 1천만 원을 후원했다. 김태원 의원 측은 “새누리당 중앙위의 후배를 통해서 박우식을 소개받았다. 박 씨가 세급 체납 중인 사실은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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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는 정계 로비와 청탁 의혹 등으로 각종 송사에 얽혔고, 부산자원은 경영난에 빠져 2009년 폐업했다. 박 씨는 한 차례 감옥에도 갔다 왔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내, 처제, 지인 등 여러 주변 사람들의 명의를 이용해 활발한 사업을 해 왔다. 박 씨를 잘 아는 주변인들의 증언이다.

평창동에 글로리아타운이라는 상가 건물이 있다. 박 씨의 아내 조모 씨가 00건설 돈을 끌어다가 거의 외상으로 건물을 지었다. 박 씨는 석방된 이후에 거기 자리 한 편을 마련하고 글로리아 상가 대표 명의를 가지고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00발전같은 공기업을 상대로 영업도 하고 있다.
– 허영우(가명), 박 씨 지인

취재 과정에서 그동안 박 씨가 정치권을 끊임없이 기웃거린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얘기도 들렸다.

이명박 서울시장 때 서울시에서 하는 무슨 초빙위원을 지낸 적이 있다.
– 박상도, 前 부산자원 자회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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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상으로는 소득도 자산도 없어서 5년 넘게 고액체납자 명단에 이름을 두고 있는 박 씨가 어떻게 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후원할 수 있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돈을 후원했는지는 의문이다. 국세청은 7년 째 박 회장의 세금체납액 9억9천4백만 원을 징수하지 못하고 있다.

목, 2016/01/2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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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은 학교 앞에서 독재타도와 민주쟁취를 외치며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당시 쓰러진 이한열 군의 사진은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이한열의 피에 빚을 졌다”고 말한다.

▲2016년 6월 9일, 이한열 군의 29주기를 맞아 연세대학교 앞에 동판이 세워졌다.

▲2016년 6월 9일, 이한열 군의 29주기를 맞아 연세대학교 앞에 동판이 세워졌다.

당시 이한열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29년이 지난 지금,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호헌철폐, 독재타도’ 이한열과 함께 민주주의를 열망한 그의 친구들

1987년 6월 9일 오후, 연세대학교 민주광장에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한열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당시 연세대 1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삼백 명 정도의 비교적 소수의 학생들이 모였던 거로 기억해요. 교문 밖으로 나가서 신촌 로터리나 시청 쪽으로 나가서 그다음 날 있을 집회 6.10항쟁의 집회를 알리기 위해서 전단을 나눠주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그때 겁나더라고요. 못 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러고 있는데 이한열 선배가 딱 손을 내미는 거예요. 가자고 그런데 도저히 그걸 못 뿌리치겠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잡고 갔죠. 이한열 선배는 내 앞줄에 있고 저는 그 이한열 선배 뒤통수 보고 이렇게 교문까지 나간 거예요.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전 MBC기자) / 당시 연세대 1학년

▲ 1987년 연세대 정문 앞의 모습

▲ 1987년 연세대 정문 앞의 모습

이렇게 이한열은 이상호 기자의 손을 잡고 연세대 교문으로 나서던 때, 그의 어머니는 광주 집에서 노심초사 걱정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제발 나서더라도 앞에 서지 말고 뒤에서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침에 TV를 틀어놓고 보면 연세대 정문에서 막 최루탄 쏘는 게 다 보여요. 그럼 한열이의 하숙집 주인아줌마한테 전화해서 ‘우리 한열이 좀 바꿔주세요’ 해서 ‘지금 오늘 아침에도 정문에서 최루탄 쏘는 게 다 보여 그러니까 뒤에서 하라’고 했단 말이에요. 하도 아침마다 전화를 하니까 저 애가 그러는 거예요. 엄마 아들을 믿으라는 거예요. 톤을 높여가면서 ‘엄마, 아들을 믿으라’면서… ‘그런데 뒤에서 한다고 막 소리 높여서 한 사람이 왜 제일 앞에 가 서 있었어?’ 이거 하나 묻고 싶네요.
배은심 / 故 이한열 어머니

연세대 교문 앞은 일촉즉발의 연속이었다. 교문 맞은편에서는 전투 경찰이 최루탄을 장전한 총으로 학생들을 겨누고 있었다. 곧이어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다. 이렇게 발사된 최루탄이 이한열의 뒤통수를 직격했다. 이한열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눈동자는 풀려있었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곧이어 한 학생이 달려와 이한열을 부축했다. 이한열의 친구 이종창 씨다. 29년이 지금까지도 당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기쯤 한 학우가 쓰러져 있었어요. 당시에 기억나는 건 정문 바로 기둥 옆에 전경들이 저를 계속 째려보면서 올까 말까 올까 말까 하는 그런 상황이 있었고요. 다행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는데 안 들어오고 저는 이한열을 한참을 더 끌고 올라가고 올라갔는데 주변에서 몇 사람이 저희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게 보였어요. 그걸 보고 저는 힘들어서 놓았어요. 너무 힘들어서…
이종창 / 당시 연세대 2학년

‘한열이를 살려내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한 장의 사진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 군과 이한열 군을 부축하는 이종창 씨

▲최루탄에 맞은 이한열 군과 이한열 군을 부축하는 이종창 씨

이종창 씨가 이한열을 부축하고 있는 순간, 한 외신기자가 그 모습을 포착했다. 정태원 로이터통신 사진기자다.

교문 앞에다 최루탄 발사를 하니까 시위하던 학생들이 ‘와’ 해서 교문 안으로 들어갈 거 아니에요. 그때 같이 들어가다 보니까 누가 쓰러지더라고 손이 위로 올라가더니 그냥 쓰러져 그래서 보니까 한열이. 그래서 내가 순간포착. 여기서 된 게 그 장면이에요. 쓰러져서 부축하는 거.
정태원 / 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 기자가 찍은 사진은 그 날 로이터통신을 통해 보도됐다. 그 사진은 이례적으로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이창성 중앙일보 기자의 설명이다.

우리는 찍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 로이터통신의 정태원 씨한테 연락을 했죠. ‘내가 사진을 구해야겠는데 좀 줄 수 없겠는가’ 그랬더니 자기 서랍에 몇 장의 사진을 만들어놓은 게 있으니까 그걸 가져가시오. 가져가서 보니까 엄청난 사진이 있어요. 아주 충격적인 사진. 그 사진을 딱 봤을 때 4.19 때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시체의 사진, 김주열 사진이 4.19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사진을 보고 이거는 김주열 사진에 버금가는 사진이 들어있다 싶어서 바로 그 사진만, 조선일보에 난 사진 말고 그 사진을 바로 편집국장에게 들고 갔습니다. ‘국장님, 이 사진이 기가 막힙니다. 이 사진을 쓰게 해주십시오’ ‘이거 너무 심하지 않겠어?’ ‘아닙니다. 절대로. 이 사진이 큰 영향력을 끼칠 겁니다’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기자

▲ 최병수 씨는 이한열 군의 사진을 보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목판화를 제작했다.

▲ 최병수 씨는 이한열 군의 사진을 보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목판화를 제작했다.

중앙일보 지면에 사진이 실린 뒤 국민들은 분노했고, 결국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87년 6월 항쟁의 상징이 된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판화가 제작된 것도 이 보도를 통해서였다.

버스에서 신문을 펼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이한열, 로이터통신 정태원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이 실린 거죠. 그 사진을 봤을 때 충격을 바로 받은 거죠. 무슨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어요. 그 사진을 봤을 때 이 기억은 아마 저한테 평생 갈 것 같아요. 사진 찍으신 정태원 기자도 “우리는 이 젊은이한테 피로 빚을 졌다” 이렇게 말씀하셨나. 아주 단순하게 딱 짧게 말씀하셨는데, 저도 피에 대한 빚이 있는 느낌이 들어요.
최병수 / 당시 ‘한열이를 살려내라’ 목판화 제작

아들 이한열을 대신해, 어머니는 지난 29년 동안 시국 시위 현장이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다. 지금 어머니는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지금 어떤 삶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생각해본다고 했다. 2016년 대한민국은 22살 이한열이 꿈꾼 세상이었을까?

▲ 2016년 6월 13일, 이한열 군의 모친 배은심 여사는 정부세종청사 앞 시위에 참여했다.

▲ 2016년 6월 13일, 이한열 군의 모친 배은심 여사는 정부세종청사 앞 시위에 참여했다.

어딘가에서 이한열의 모습을 찾아보고 싶어서. 이한열이 이렇게 안 죽고 살았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를 내가 생각해보면서 그 어린 나이에 모든 게 거기서 그냥 끝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추상적으로 우리 한열이 이렇게 컸으면 이런 세상을 살았을 거란 걸 내 몸으로 한열이를 찾아보려고 다닌 게 30년이네요. 그런데 없어요. 아무리 다녀도 없어요.배은심, 故 이한열의 모친


취재작가 구슬희
글구성 정재홍
연출 서재권

금, 2016/06/2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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