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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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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통일기행

익명 (미확인) | 목, 2015/09/10- 14:40

 

백두산 통일기행을 다녀와서

- 통일위원회 양승봉 변호사

 

천지는 푸르다.

천지는 맑고 넓다.

그리고 천지는 슬프다.

 

2015. 8. 21.일부터 24일까지 3박 4일 동안 민변 통일위가 주관한 통일기행 백두산 탐방을 천낙붕, 이광철, 서중희, 양창영, 설창일, 김용민,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7명의 단촐한 식구가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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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모토는 “가보자 북녘땅, 만나자 북녘동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을 시작할 즈음은 남북이 극단적 대치를 한 후 협상을 막 시작한 때로 통일 기행 내내 우리는 인터넷을 확인하며 협상 결과를 주시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통일을 위해 한창 교류를 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공유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남북 관계를 악화시켜 온 양쪽 수뇌부의 퇴행적인 행태가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21일-송강하를 향하다.

 

말로만 듣던 백두산 천지를 간다는 설렘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른 아침 인천공항, 간단히 수속을 마치고 약 1시간 10여 분에 걸친 짧은 비행시간 후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비자심사를 마친 후 가이드를 만나 심양공항을 배경으로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사진을 찍고 곧바로 백두산을 오르는 전초기지, 송강하라는 곳을 향하는 버스를 탔습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자랑하는 59살의 조선생님이라는 조선족이었습니다. 조선생은 해박한 지식으로 여행내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선생과 나눈 대화는 여행의 또 다른 맛은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선생의 할아버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출신이라고 하였고 조선생은 딸 둘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큰딸은 중국에서 판사를 하고 있고 작은 딸은 한국의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가이드를 낀 여행이 그렇듯이 조선생도 버스에 타자마자 간단히 심양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심양의 옛 이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봉천으로 현재 1,200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중국 5-6위에 해당하는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한동안 달려도 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심양에서 송강하까지 약 6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하여 본격적인 도로주행을 앞두고 우리는 중국의 구멍가게에서 중국이 자랑하는 맛난 칭따오 10병과 안주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무려 75위안!! 우리 돈으로 약 15,000원 정도에 불과해 돈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가 중국시간으로 오전 10시가 겨우 넘은 시간이었으니 우리는 취하면 애비도 몰라본다는 낮술을 점심 먹기 전부터 시작하는 소박한 호사?를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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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 차량이 거의 없었지만 의외로 속도를 크게 내지 않아 약간 더디게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양쪽에 옥수수밭을 지나 달리고 또 달려도 계속 옥수수밭,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지루하고 따분했을텐데 여행이 주는 설레임은 지루함을 못 느끼게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많이 살아 어쩌면 우리 땅이 되었을 수도 있는 만주벌판을 거의 다섯 시간 가까이 달려 3시 40분 경 늦은 점심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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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조선생은 이제부터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달린다 하면서 약 60km가 남았는데 세 시간 정도 가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기껏 60km를 세 시간에 간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막상 도로를 달려보니 곧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달린 길은 편도 1차, 왕복 2차선으로 된 좁은 도로였는데 그 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량은 흡사 곡예를 하듯이 달렸고 여러 번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도로 곳곳에 경운기가 다니고 소를 비롯한 가축을 싣고 가는 트럭들, 그리고 차선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량으로 도로의 모든 차량은 가다서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우리가 목격한 가장 압권인 장면은 터널 내부임에도 양쪽 차선을 꽉 채워 일방도로처럼 3대씩 줄지어 달리는 광경이었는데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송강하는 백두산 등정을 하는 관광객이 머무는 곳으로 이름도 왠지 멋지게 느껴집니다. 송강하를 거의 도착할 즈음 조선생은 1년에 약 300여 명의 중국인들이 백두산에 송이나 산삼, 약초 등을 채취하러 들어가 실종이 되어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믿기 힘든 말을 해주었습니다. 백두산을 부산모수(父山母水)라고 칭하여 아버지의 산이라고도 한다는 데 그 산에서 해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어 종적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하니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생이 말했던 것보다 약 1시간 일찍 우리는 숙소인 그린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이동하여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쳤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연길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오는 유가려 가족을 기다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유가려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의 여동생입니다. 여동생 유가려는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2주 뒤 결혼을 할 남편과 함께 왔습니다. 유가려는 국정원 합동심문센터에서 2013년 4월 26일 석방된 후 오빠의 재판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허위 진술을 하게 되었는지 조작 과정을 자세히 밝힌 후 2013년 7월 초 추방이 되었습니다. 반가왔지만 늦은 시간이라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다음 날 점심때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22일-천지를 보다

 

조선생은 백두산은 관광객이 너무 많아 늦게 출발하면 기다리다 지친다며 최소한 6시에는 일어나서 식사를 마쳐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일찍 식사를 시작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지런한 한국관광객들이 한꺼번에 식당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제일 단촐해 우리는 제일 일찍 백두산을 향했습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도 설레임을 주었습니다. 곳곳에 작약나무가 부러져 있었고 길 양쪽으로는 예쁜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조선생은 백두산을 우는 아기 얼굴이라고도 부른다면서(언제 어떻게 표정이 바뀔지 알 수가 없다는 의미로..) 은근히 천지를 구경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하였습니다. 길 옆 곳곳에 늪처럼 보이는 웅덩이, 그리고 무성한 숲은 남한 땅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는 그 곳이 바로 개마고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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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분을 달려 백두산 입구 매표소에 도달하였는데 가지고 간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 공안은 백두산 인근에서는 한글로 된 현수막을 펼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가이드가 드는 안내 깃발에 사용된 한글도 현출시키지 못하게 한답니다. 중국은 백두산에서 한글이 현출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강한 제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백두산을 포함한 인근의 땅에 대하여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나만의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조상들이 제대로 대응을 못해 멋진 땅을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이 다시 들었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 후 또 버스를 타고 백두산 천지를 향하는데 입장료와 버스표 가격이 무려 4만 원이 넘는 고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관광객들이 지불하는 돈이 모두 중국의 주머니로 향한다고 생각하니 참 아까왔습니다.

 

드디어 천지를 향해 버스를 타고 달립니다. 작약나무 숲을 지나고, 잡목을 스치고…나지막한 풀숲과 오밀조밀 이쁜 야생화를 굽이굽이 지나치면서 달렸습니다. 30분 정도 달린 후 우리는 드디어 천지를 향해 걷습니다. 일찍 서둘렀는데도 벌써 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있습니다. 1,441개의 계단을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한 걸음씩 밟고 올라갑니다. 날씨가 흐렸고 곳곳에 안개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천지를 보기는 글렀구나하고 내심 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에 보면 되지…근데 언제 또 올 수 있으려나….흠흠

 

마침내 계단을 다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본 순간, 잊을 수 없는 멋진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아 천지… 멋진 장면에 입이 다물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절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순간 뭉클하고 감동의 물결이 가슴을 스칩니다. 우리 일행 모두에게 감동의 물결이 스치는 것이 저절로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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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안 가본 사람들이 여행자랑을 하면 말을 섞지 말자고 하였습니다.–천지도 안가봤으면서–좋은 책을 일독을 권하듯이 저는 천지에 다녀온 후 지인들에게 천지를 권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권합니다. 앞으로 2-3년 내에 송강하에 직항이 생길 예정이라고 하니 훨씬 편하게 구경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에 뛰어 내려가 직접 물을 만지고 싶었지만 접근을 금지시킵니다. 직접 접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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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을 가면 두 번을 본다고 해서 백두산이라고 한다던 농담부터 시작해서 3대의 덕이 모여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까지…참 다양한 말들이 천지를 더 신비롭게 합니다. 우리는 구름이 걷히는 순간부터 해맑은 천지까지 멋진 모습을 모두 관찰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우리 일행 모두 천지를 보는 순간 참으로 들떠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오르는 방향에 따라 서파, 북파, 남파…라고 일컫는데 우리는 서파로 올랐습니다. 서파에는 북한과 중국의 경계비가 서있고 비록 북녘 동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천지에서 허용된 북녘 땅만 조금 밟아보았습니다.

 

천지가 주는 웅장한 경관은 참으로 감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천지는 통일을 원하는 우리 동포의 염원을 모두 담을 만큼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멋진 천지를 우리 땅이 아닌 중국 땅을 통해 구경을 해야만 하고 여전히 우리는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조선생의 채근에 아쉬움을 가득 남기고 천지를 떠납니다. 또 언제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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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서 내려와 용암이 쓸고 간 흔적인 금강대협곡을 구경하였습니다. 백두산 바닥은 용암이 굳은 곳에 나무가 자라 뿌리가 야무지게 뻗지 못해서 곳곳에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곳을 빼고는 주변이 울창해 호랑이라도 튀어 나올 듯 합니다.

 

금강대협곡까지 돌아본 후 아쉬움을 두고 하산을 합니다. 매표소를 거쳐 강원도 식당이라는 곳에서 한국식으로 된 식사를 합니다. 그 곳에서 어제 약속했던 대로 유가려를 다시 만나 점심을 함께 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제 통화로 향합니다. 통화로 가는 길도 약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여 서둘렀습니다. 피곤하였지만 주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였습니다.

 

백산이라는 곳을 지나기 전에 본 석탄촌은 곳곳에 석탄이 쌓여 있었는데 아침에 석탄을 캐서 바로 성냥불로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은 자연자원은 재생이 안되니 후손에게 자연자원을 물려주자며 될 수 있으면 개발을 늦춘다고 합니다. 백산이라는 곳은 석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는 데 지금은 북한에서 석탄과 철광을 수입을 하고 있고 북한의 무산 철광을 수입해 철판으로 가공하여 돈을 버는 것은 일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요타에서 50년간 50억 불을 제공하기로 하고 철판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화는 제약과 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통화 중심부에는 비류수가 흐릅니다. 비류수는 부여와 고구려의 경계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몽을 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입니다.

 

우리가 백두산부터 오랜 시간을 달려왔던 그리고 내일 달려갈 모든 땅이 모두 고구려의 땅이었습니다.

 

통화에서는 저녁에 북한식당인 “묘향산”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당을 가기 전 일행은 발맛사지를 받고 백두산을 오르느라 고생했던 발에 호강을 시켜주었습니다.

 

북한 식당은 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입맛에 맞는 음식을 우리에게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술값이 너무 비싸서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맥주 1병에 1만 원, 소주 1병에 4만 원, 설창일 위원장님이 기분좋게 한 턱 쏘셔서 맛나게 먹었습니다. 생각보다 중국인 관광객도 제법 있었고 흥에 겨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북한 가수들의 노래에 어우러져 춤을 추는 모습도 정겨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푼 후 아쉬운 마음에 비류수, 통화의 강가를 7인의 낭인처럼 어슬렁거렸습니다. 통화는 상당히 깨끗하였는데 비류수 주변도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있어 운치있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도 아쉬움에 호텔 옆 가게에서 양꼬치를 시켜 기어코 맥주를 한 사발씩 먹고 들어갑니다. 식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주문을 할 수 없었는데 우리 7명이 주문한 양꼬치보다 옆자리에 앉은 대륙의 남녀 2명이 주문한 음식이 훨씬 푸짐하고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비스하는 남자가 우리를 쏘아보는 눈빛이 예사롭지는 않았다는…

 

23일과 24일

 

백두산을 본 뒤라 비교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천낙붕 변호사님의 제안으로 일정에 없었던 양정우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 가는 도중 10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는데 엄청난 폭죽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란 우리들을 향해 조선생은 결혼식 축포라고 하면서 적게는 몇 십만 원부터 많게는 몇 백만 원씩 비용을 들여 폭죽을 쏜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양정우는 동북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사람으로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었지만 중국에서는 기념관과 무덤을 둘 정도로 유명한 항일투쟁가였습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36세에 일본군과 대치하다 사살을 당하였는데 그와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들 중 조선인이 많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잘 꾸며서 후손들이 기리고 있는 모습은 부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양정우 기념관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살아서 영화를 안겨주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반드시 제대로 대접을 해줘야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정우 기념관 관람을 끝내고 내일 비행기를 탈 심양을 향해 갑니다. 다시 4시간의 긴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맛난 맥주를 사서 낮술을 먹습니다. 비교적 한가한 일정이라 버스 안에서 변호사스럽게 자신이 겪었던 훌륭하신 판사님과 검사님에 대한 초보적인 뒷담화를 시작해서 어느 덧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과 제도에까지 소재를 넓혀가면서 맛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재미난 이야기와 맥주로 배를 채우다 보니 저절로 생긴 뇨의는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버스기사님은 벌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고 결코 정차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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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도착하여 서시라는 시장의 양념파는 곳을 짧고 산만하게 구경하고 조선생님이 극찬을 하는 로벤교자라는 만두집으로 향합니다. 만두집이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 맛은 한국에서 먹는 만두와 별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짐을 풀었지만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합니다. 피곤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각종 서면이 기다린다….

 

시내에서 한가롭게 배회를 합니다. 인도가 참 널찍하니 사람이 많아도 산책하기가 수월합니다. 음악소리가 어찌나 크던지…..군것질도 하면서 산책을 합니다. 호텔로 복귀 후 친철하고 영리해보이는 아가씨가 서빙을 하는 대로변 양꼬치집에서 소박하고 즐겁게 맥주를 마셨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북릉이라는 곳을 방문합니다. 북릉은 황태극의 무덤으로 황태극은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로 청이라 국가이름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1592년에 태어나 1643년에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임진왜란을 겪었던 해에 태어나 자신은 우리에게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가 죽을 때 앉은 채로 사망하여 청에서 새긴 용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여하튼 우리와 좋은 인연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북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비교적 잘 가꾸어 놓았습니다.

 

북릉을 가면서 생각보다 교통이 덜 혼잡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출근시차제라는 것을 적용하여 직장의 아침 출근 시간을 조금씩 조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중국의 모습을 수탉의 모습이라고 묘사를 하면서 동북삼성은 닭의 모가지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생은 기마민족이 말을 타고 움직이는 습성이 있다보니 성격도 급하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도 기마민족이어서 성격이 급하고 우리나라의 버선코가 위로 굽은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기마족이 말을 달릴 때 유용하도록 신발을 만든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북릉을 구경하고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한식당에서 하였습니다.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에 한식을 주는 것은 만족을 느끼고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 같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새로 지은 박물관으로 이동을 하였지만 막상 휴관을 하여 구경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박물관에는 삼부인과 청동단검과 비파형동검 등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물건들이 있다고 하였는데 문을 열지 않았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조선생과 헤어졌고 우리는 다시 사랑하는 가족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공사에서 무작위로 업그레이드를 해주는 서비스에 우리 일행이 모두 비즈니스석을 배정받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비즈니스석을 배정받고도 이를 모른 채 언제 이런 자리에서 편하게 여행해보나..하는 생각으로 지나쳤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돌아올 줄이야…..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참 편합니다. 무지 편합니다. 잠이 안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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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며

우리가 3박 4일간 여행을 하면서 백두산 천지에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고 중국 땅, 그것도 길에 뿌린 시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천지가 준 감동은 오래 남았습니다.

 

비록 중국 땅에서 본 천지지만 언젠가 우리 땅에서 오르리라.. 통일이 되는 날 천지에 한 번 더 오르리라…우리 일행은 천지에 많은 다짐을 남기고 왔고 천지에 그런 다짐을 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즐겁고 가치있었습니다. 더불어 좋은 사람들과 같은 하늘아래에서 3박 4일가 어울린 것 역시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비록 북녘땅과 북한동포를 많이 접하진 못했지만 천지에 담은 희망으로 내일을 기약하면서 여행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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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위원회는 지난 4월 북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대응모임을 구성하였습니다.

긴급대응모임을 구성한 이유는, 그동안 탈북사건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총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이러한 발표를 한 것과, 탈북민들의 가족들이 자발적인 탈북이 아닌 유인, 납치에 의한 것으로서 어서 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딸들을 돌려달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과거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국정원에서 간첩 조작모의를 하더라도 변호사의 접견은 물론 외부와의 연락이 일체 차단된 상태에서는 탈북민들이 간첩협의 조작에 대해서 아무런 방어수단을 취할 수 없습니다. 또한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례적으로 집단 탈북사실을 발표했다는 것은 탈북 사실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는 의혹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긴급대응모임은 만약에 있을 간첩조작 및 탈북민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결성되었습니다. 아울러 이번 해외식당 여종업원들을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생할 탈북사건에 대해서, 탈북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 또한 이번 긴급대응모임의 목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 긴급대응모임은 5월 10일에 이루어 졌습니다. 첫 번째 긴급모임에서, 대책 기구를 구성하고 접견신청 및 진상조사 활동과 국제활동, 연대활동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다음 시민사회단체 긴급모임을 가졌습니다.IMG_2557 IMG_2590

5월 16일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진상규명 촉구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종업원들에 대한 접견신청을 하였습니다. 긴급대응모임의 8명의 변호사가 접견신청서를 접수하였는데, 국정원은 16일 오전 ① 탈북민 관련시설은 북한테러 등 신변위협에 대한 보호시설이지 구금시설이 아니며 ② 식당 종업원 12명은 자유의사에 따라 보호를 요청한 북한이탈주민으로 난민이나 형사피의자 등 변호인 접견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접견신청에 대한 거부를 하였습니다. 통일부 또한 정례 브리핑을 통해 민변 접견 불허방침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위와 같이 통일위 변호사들이 접견신청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와중 5월 18일 재미 해외언론인 민족통신에서 북측의 가족들이 민변에 대리권을 위임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12명의 이름과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뒤인 5월 19일 중국 청화대의 재미교포인 정기열 교수님께서 민변 대표이메일을 통해 가족 서명 위임장 및 사진을 전달해 왔습니다. 이때 대리인을 민변이라는 단체로 하지 않고, 장경욱 변호사만을 대리인으로 한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한편, 통일위 변호사들은 계속해서 접견 신청을 함과 동시에, 거부된 접견신청에 대하여 준항고를 제출하는 식의 대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 논평을 통해 민변의 입장을 발표하고 국정원에 종업원들을 접견 할 수 있도록 허가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송달받은 위임장을 통해서 5월 24일 수용되고 있는 종업원들에 대한 인신보호구제심사를 청구하였습니다.IMG_3523

그리고 다시 한번 접견 신청을 하였는데, ‘현재 피수용자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보호를 요청한 북한이탈주민으로 변호인 접견대상이 아니라’ 라는 국정원의 불허 이유를 반박하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목사님 및 신부님들 또한 접견신청 및 물품전달을 신청하였습니다. 피수용자들이 변호인 접견대상이 아니더라도, 종교인들의 접견마저도 막을 근거는 없기 때문에, 종교인들의 접견은 당연히 허용되어야 했지만, 국정원은 2달 후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식으로 사실상 접견을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그날 북한주민 접촉신고 수리를 위해 통일부 이산가족과의 직원들과의 면담을 진행했는데, 4일 후 통일부는 남북교류협력법 9조의 2 제 3항에 근거한다며 북한주민 접촉신고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인신보호구제심사청구에 배정된 판사가 변경되게 됩니다. 인신보호구제청구에 협조적이던 판사에서, 어떻게든 소를 각하하려고 하는 판사로 변경되어 앞으로의 재판에 큰 어려움이 닥칠 것만 같았습니다.

재판 시작 전 소장에 대해서 두가지 보정명령을 받았는데, 하나는 장경욱 변호사 외 민변 변호사들에 대한 가족들의 위임의사를 소명할 것과, 위임장을 작성한 가족들과 피수용자들이 실제 가족임을 소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소명하기 위해 피수용자들에게 위임장을 작성하는 가족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확인을 받으려고 했으나, 국정원은 또다시 협조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을 소명하기 위하여 법원은 14일 장경욱 변호사에게 심문 소환명령을 했습니다. 소가 각하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절치부심 심문준비를 하던 중 정기열 교수님에게 다시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민변을 대리인으로 하여 긴급대응모임의 모든 변호사들이 대리인으로 활동 할 수 있게 하고, 피수용자들의 가족사진과 가족들의 시민증을 한데 모아놓은 사진, 위임장을 작성하는 사진 및 동영상이 첨부되어 왔습니다.

이로써 두 가지 보정명령 모두 소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피수용자들의 구명활동에도 박차가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문기일에 종업원들은 출석하지 않았고, 양측의 변호인만이 참석했습니다. 그 후 인신보호구제신청은 각하되었고, 종업원들이 사회로 나왔다는 기사는 나왔지만, 국정원 직원 외에 종업원들을 본 사람도, 연락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번 북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탈북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앞으로 탈북자들의 권리를 보호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 할 때까지 긴급대응모임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구성원들 한명 한명의 노력이 결국 결실을 맺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사건에 대해서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금, 2016/12/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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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설립 30주년 기념행사 참석 후기]

 

청년 30년, 한길로 함께

민변 인천지부 사무처장 한 필 운 변호사

한필운변호사

 

총회 가는 길

 

민변 총회날, 갑작스럽게 변호인 접견이 잡혀 인천구치소에서 접견을 마치고, 조금 늦었지만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강남순환도로를 탔습니다(가는 길에 심심하지 말라고 많은 도움 주신 조미연 변호사님 감사드립니다).

 

평일 오후에 열리는 총회라서 일찍 참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서 빨리 총회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이유는 저의 ‘첫 총회’ 참석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경남지부 회원님들께서 성대히 맞아 주신 작년 총회가 저의 ‘첫 총회’였는데, 총회에 참석한 저의 소감은 ‘참 좋다’였습니다. 촛불 혁명 이후의 총회이기 때문이었는지, 통영 중앙시장 맛집이 너무 맛있었기 때문인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바라본 한려수도가 아름다웠기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날 그 경험이 너무 좋아서 이번 총회도 꼭 가서 참석하고 싶었었습니다(아마도 가장 좋은 것은 뒤풀이였겠지요. 통영에서 둘째날 늦은 새벽에, 제가 많이 취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한 시간 즈음 늦은 시각에 회장에 도착하여 윤대기 지부장님 옆에 앉은 순간부터 민변 설립 30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세 장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민변 창립회원이신 한승헌 변호사님의 ‘(축사 아닌)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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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서 민변 회원이시므로 셀프 축사를 하지는 않겠다 하시며 시작하신 ‘축사’는, 이제 막 민변을 알아가는 저에게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스스로를 ‘노병’이라 칭하시며, 민변 간판 값이 올랐으니 지분을 달라고 하시는 유쾌한 농담은 큰 가르침을 위한 프롤로그였습니다. 이어서 후배회원님들께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시라며 던져주신 다음의 세 가지 가르침은, 아마도 제가 앞으로 30년 민변 활동을 하면서 두고두고 되새길 가르침인 듯합니다.

 

인권변호사라 스스로 말하지 말라.

내가 의롭다 하여, 다른 이를 배척하지 말라.

민변 변호사가 다른 변호사와 다른 이유는 ‘사서 고생’하기 때문이다.

 

선배님의 가르침을 모두 받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민변 변호사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되새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민변 30주년 행사를 위해서 오랫동안 연습을 하셨던 중창단의 공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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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첫 곡부터 손수건 꺼내서 사용했습니다. 요즘 왜인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는데, 야속하게도 중창단 회원님들 때문에 터져버렸습니다.

 

세 번째는 민변 30년의 변론을 낭독한 ‘낭독 공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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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의 변론을 시작으로 촛불혁명의 성명서까지 우리 역사 곳곳에서 울려퍼졌던 아름다운 민변의 언어들을, 감동적으로 되새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이번에도 손수건 사용했습니다).

한 가지 특별히 놀랐던 것은, 영문 의견서를 낭독하신 회원님의 놀라운 발음이었고, 한 가지 특별히 아쉬웠던 것은, 제가 그 영어를 해석할 수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순서로 창립회원 선배님들을 무대위로 모시고 함께 부른 아침이슬에 또다시 손수건을 꺼내야 했던 기억,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으로 뒤풀이 행사를 진행하신 김준우 변호사님의 센스 넘치는 진행, 윤대기 지부장님과 인천지부 회원들, 김남근 부회장님과 서중희 위원장님까지 한데 모여 술잔을 기울이던 뒤풀이의 기억까지 모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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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기억

 

이번 행사 참석도 역시 ‘참 좋다’라는 기억만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올해 총회와 기념행사가 특별히 좋았던 이유가,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감동을 받아서인지, 뒤풀이에서 좋은 분들과 맛있는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민변 회원님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민변이 좋고, 민변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다는 것이겠지요. 좋은 것에는 이유가 없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청춘

 

노동위원회 뒤풀이 장소에서 한 신입변호사님께서 남긴 건배사가 ‘청·바·지’였습니다.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청년시기를 맞는 민변의 청춘도 다시 한 번 지금부터일 것입니다.

민변과 저의 나이가 비슷하니(뭐, 완전히 비슷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청춘도 지금부터이겠지요.

이제 청년의 꿈으로 날아오를 청춘 민변에서, 저 역시 청춘 30년을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한 길로, 참 좋은 이 느낌 그대로, 함께 날아오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소속위원도 아닌 저에게 밤새도록 술을 사주신 노동위원회 정병욱 위원장님과, 밤새도록 반겨주신 노동위원회 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셨으면 자동 가입이다’라는 통보도 감사드립니다.

목, 2018/05/3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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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노동정책 : 개혁인가 재앙인가?

‘을’들의 국민투표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민투표 소개]

- 8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고 “이제는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며 임금피크제와 직무성과급제 도입, 그리고 더 많은 노동유연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여러 수단과 비용을 들여서 하반기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직결된 결정과 정책들이 우리와 무관한 곳에서 벌어집니다. 그런데 박근혜표 노동개혁이 실현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요?

- 이제 국민들에게 묻겠습니다. ‘국민투표’는 전국에 1만개의 투표소를 설치해 2,000만 노동자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주권운동이자 직접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 노동조합, 사무실, 성당, 교회, 생협 매장, 거리 등 전국 곳곳에 1만개의 투표함이 설치되며, 동시에 인터넷에서도 투표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 국민투표 기간 : 10월 7일(수)부터 11월 12일(목) 자정까지!

- 투표하러 가기(아래 링크 클릭)

http://cpmadang.org/?q=story/44671

월, 2015/10/1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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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부활동기-대전 충청지부 정기총회

 

민변 대전충청지부 문현웅 사무처장

지부 제20차정기총회 1

2016. 7. 16. 민변대전충청지부 제19차년도 정기총회를 천리포수목원 인근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가족 포함 약 40명에 육박하는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한 이번 정기총회에서는 특히 청주지회의 예산 지원 문제와 장기적으로 청주지회가 지부로 독립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이후 참석회원 및 가족들은 천리포항 인근의 허름하지만 값싸고 맛난 횟집에서 만찬을 즐겼습니다. 아직 어린 자녀를 둔 회원들의 참가 덕분에 어린 자녀들의 재롱을 만끽할 수 있는 행운이 함께 했다는 것은 이번 정기총회의 하이라이트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지부 제20차 정기총회 2

만찬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회원들은 다시금 2차 자리에 모여 민변 지부의 당면 과제 및 신입 회원 확보 방안 등을 논의하였고 그 이후에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우야든둥 다음날 모두 제 시간에 기상하여 바다음식으로 시원하게 해장을 한 후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에도 천리포수목원을 해설사를 따라 혹은 자유롭게 거닐며 수목원의 아름다움에 포옥 빠져 부렀습니다.

소풍은 언제나 진리입니다…호호호호.

금, 2016/08/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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