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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성명] 국립공원위원회 결정은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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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성명] 국립공원위원회 결정은 무효다

익명 (미확인) | 화, 2015/09/01- 15:00
[기자회견문]

국립공원위원회 결정은 무효다
설악산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2015년 8월28일 자연환경을 지키라고 만든 환경부가, 국립공원을 잘 관리하라고 만든 국립공원위원회가, 설악산의 생명들에게 비보를 날렸다. 설악산을 시작으로 지리산, 소백산, 신불산, 마이산 등 전국의 국립공원과 명산들에 난개발의 빗장을 열어준 셈이다.

원칙과 기준을 무시하고 오색 케이블카 조기추진을 지시한 대통령, 그 지시 하나에 자기부정도 서슴치 않은 환경부, 그리고 여기에 동조한 양심도 소신도 없는 공무원들과 전문가들, 이윤을 위해서라면 국립공원마저 사유화하려는 전경련. 이 모든 이들이 이번 잘못된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할 장본인들이다.

애당초 불공정한 심의였다. 국립공원위원회 구성은 정부 당연직 관계자가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전문가라는 포장의 대표적인 케이블카 찬성인사 만이 공원위원과 민간전문위원을 동시에 겸직하였다. 투명한 정보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토를 위한 충분한 기간이 보장되지 않았고, 공청회는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공원위원회는 이 엄청난 사안을 당일 보고받고 결정하였다. 설악산을 두 발로 걸으며 환경단체가 작성한 현장조사 결과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당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설악산은 설악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국토의 문제이면서, 다음세대의 삶이 걸린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결정을 바로잡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과 향후 활동계획을 밝힌다.

▶ 8월28일 국립공원위원회의 결정은 원천무효다. 강원도 양양군의 계획은 내용적으로 가이드라인과 검토기준을 명백히 위배한다. 7가지나 되는 조건을 달고서 통과시킨 것 자체가 애당초 부결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설악산의 생태가치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 절차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표결강행의 결과다. 국립공원위원회의 과반수 이상이 정부 관계자인 상황에서 표결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절차상 내용상 공원위원회 결정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

▶ 환경부의 윤성규 장관과 정연만 차관은 사퇴해야 한다. 사업을 엄정하게 심의해야 할 기관이 사업 추진기관이 되었다. 원칙을 저버린 환경부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립공원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라. 존재 이유를 상실한 부처의 장관이 책임져야 한다. 또한 국립공원위원회 위원장인 정연만 차관은, 바로 지난 정부에 4대강사업의 환경영향평가를 통과시킨 당사자다. 강을 망치더니 이제는 설악산을 망치고 있다. 환경부 차관 자격이 없다. 환경부 장관과 차관은 책임을 통감하고 즉각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 국립공원위원회는 해산해야 한다. 국립공원을 잘 보전하고 관리 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통령 입맛대로 망가뜨리는 결정을 하는 국립공원위원회는 필요 없다.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추진을 결정한 현재의 국립공원위원회는 해산되어야 마땅하다.

▶ 오색 케이블카 사업은 국립공원위원회의 결정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이 아니다.  설악산은 천연기념물이면서, 백두대간보호구역에 속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화재청과 산림청 등의 추가 심의와 행정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심의과정에서 오색 케이블카 사업은 다시 엄정하게 검토되고, 부결되어야 한다.

▶ 국회는 국립공원위원회의 이번 결정에 대해서 국정감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검증해야 한다. 국립공원은 전 국민을 위한 자산이면서, 미래의 국민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다.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는 설악산 국립공원을 지켜야 할 마땅한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자연공원법 개정이 시급하다. 자연공원법 개정안은 이미 국회에서 발의되어 있다. 개정안은 전 국토의 1%에 불과한 국립공원 자연보전지구 안에 케이블카와 같은 환경훼손 시설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불공정한 국립공원위원회 구성을 바로잡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국립공원의 훼손과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막기 위해서는 법령 정비가 필요하다.

▶ 환경단체들은 시민들과 함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설악산을 지킬 것이다. 범 국민적인 소송인단을 모집해서 오색 케이블카 사업 추진을 막기 위한 법적 소송을 진행할 것이다.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하여 이번 사업 추진 과정 상의 문제점을 낱낱이 밝힐 것이다. 광범위한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서 환경부 장-차관의 퇴진 운동을 벌일 것이다.

자연을 향한 폭력은 결국 인간 자신에게 돌아온다. 설악산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이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 저항을 계속해갈 것이다.

 

2015년 9월 1일

자연공원케이블카반대범국민대책위원회 한국환경회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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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시작되고 푸르름이 깊어가는 요즘, 일 년 전 임신 6개월 차에 약간 부담이 되었지만 참여했던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지금 안가면 앞으로 언제 참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출산을 하고 보니 그때 다녀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2019년 7월에 화순곶자왈에서 진행되었던 ‘2019 곶자왈 생물다양성 탐사 프로젝트 곶자왈네이처링’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설명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생물다양성이고, 둘째는 네이처링이다. 
생물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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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시나무 멸종위기종 2급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은 1985년 미국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바이오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생물학적 다양성의 위기’에서 이론적으로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서명된 ‘생물다양성협약(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 CBD)’에 따르면 생물다양성이란 “육상, 해상 및 그 밖의 수중생태계 및 생태학적 복합체를 포함하는 모든 자원으로부터의 생물 간의 변이성을 말하며, 종간 또는 종과 그 생태계 사이의 다양성을 포함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생물다양성은 유전자다양성, 종다양성, 생태계다양성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내가 작년 7월에 화순곶자왈에서 참여한 행사는 종다양성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화순곶자왈에 얼마나 많은 생물종이 살고 있는지를 식물, 버섯, 새, 곤충 등으로 구분하여 조사하는 것이다.
네이처링

네이처링은 누구나 생물종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온라인 기반 자연활동 공유 플랫폼’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이다. 생물조사는 분명 전문적인 영역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주변 환경에서 만날 수 있는 생물에 관심을 가지고 알기 위해 노력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네이처링에는 내가 관찰한 생물종의 이름, 관찰 장소, 관찰 시각, 사진 등을 올릴 수 있으며 이것은 해당 지역의 관찰활동으로 데이터가 쌓이게 된다.

화순곶자왈 행사에도 전문가, 일반 시민, 가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으며, 핸드폰만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바로 앱을 통해 기록을 올릴 수 있었다. 주의사항으로는 사진을 찍을 때 생물종을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있도록 최소 3장을 찍어서 올리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무를 기록할 때에는 전체 모습(수형), 줄기(수피), 잎까지 최소 3장을 찍어주고, 특이사항으로 꽃이나 열매가 있으면 함께 찍어서 올려야 정확한 식물 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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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화순곶자왈 일부

화순곶자왈

화순곶자왈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 위치하고 있다. 화순곶자왈은 해발 473m의 병약(제주어로 골른오름)에서 시작된 용암류가 화순리 방향으로 총 9km에 걸쳐 흘러 만들어졌다. 병약곶자왈용암류는 평균 1.5km의 폭으로 산방산 근처의 해안지역까지 이어지고 있다. 

화순곶자왈이 포함되어 있는 병약곶자왈은 낙엽활엽수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종가시나무, 조록나무, 생달나무, 센달나무, 육박나무, 새덕이, 개가시나무와 같은 상록수림이 군데군데 분포하지만 대체로 단풍나무, 무환자나무, 팽나무, 꾸지뽕나무, 예덕나무와 같은 낙엽수림이 많이 분포한다. 화순곶자왈은 내부에 목장이 있어서 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벌채도 계속 이뤄진 상태라서 숲생태계의 변화과정을 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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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활동을 하며 식물을 관찰하고 있는 참가자들
탐사를 통한 곶자왈 살펴보기

화순곶자왈 탐사는 전문가 분이 동행해주셨다. 우리는 숲입구에서부터 본숲과 숲가장자리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본숲은 상록활엽수림이고, 가장자리는 키작은식물과 덩굴식물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장자리 식물은 덩굴이나 가시가 많아서 가장자리를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주변 침입으로부터 숲을 보호한다. 따라서 숲이 확장됨에 따라 가장자리 식물은 밖으로 밀려가게 된다. 가장자리 식물에는 탱자나무, 초피나무, 산초나무, 찔레, 쥐똥나무, 꾸지뽕나무, 마, 방기, 다래 등이 있다. 

화순곶자왈에서 몇 년 전 발견된 멸종위기종 개가시나무는 잎 뒤면에 갈색 털이 밀생하여 다른 가시나무와 구분이 잘 된다고 하였다. 제주도에 사는 네 종류의 가시나무 중에서 멸종위기종인 개가시나무는 분포의 99%가 곶자왈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본 개가시나무는 꽤 큰나무였는데, 이렇게 큰 나무가 멸종위기라는 것은 숲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씀해주셨다.

한가지 더 기억에 남는 식물은 더부살이고사리였다. 잎이 두 가지 종류인데 길게 뻗어가며 싹이 자라는 잎과 일반 잎 두 가지 방식으로 번식한다. 이런 방식의 장점은 후손을 빨리 퍼트릴 수 있고, 돌만 있고 토양이 적은 곶자왈 환경에 빨리 적응하여 장악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번 프로그램에서 총 26종의 식물을 관찰할 수 있었다. 
마치며

2019년 화순곶자왈에서 진행된 생물종 탐사 프로젝트는 내가 참여한 7월을 시작으로 11월까지 두 번의 탐사가 더 진행되었고, 그 중간에도 소규모 조사가 계속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 통해 2019년 화순곶자왈 생물종 탐사 결과를 네이처링 홈페이지를 통해서 살펴보면 1,010건의 관찰기록과 226개의 생물종이 발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의 참여자도 나를 포함하여 91명이나 되었다. 

내가 식물 조사를 하면서 느끼는 점은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무만 보기에도 바빴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다. 항상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분들은 나무를 통해 숲을 이야기해주셨던 분들이었다. 작년 탐사 때 화순곶자왈에서 관찰된 226개의 생물종은 숫자도 중요하지만, 그 생물종이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식물 조사를 안 나간지도 1년이 되어간다. 식물을 많이 알고 공부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자꾸자꾸 보는 것이다. 그래야 잊어버리지 않는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아기를 안고 곶자왈 숲으로 한번 다녀와야겠다.
 
[2019년 7월 화순곶자왈 관찰 식물종명(26종)]
참나무과 개가시나무(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종가시나무/ 녹나무과 녹나무, 참식나무, 새덕이/ 운향과 왕초피, 초피나무, 산초나무/ 산유자나무과 산유자나무/ 장미과 복분자딸기/ 미나리아재비과 으아리/ 보리수나무과 보리수나무/ 층층나무과 곰의말채나무/ 뽕나무과 꾸지뽕나무/ 산분꽃나무과 아왜나무/ 수국과 바위수국/ 다래나무과 개다래/ 오미자과 남오미자/ 쐐기풀과 왜모시풀, 개모시풀, 좀깨입나무/ 콩과 고삼/ 마과 단풍마/ 봉의꼬리과 큰봉의꼬리/ 관중과 더부살이고사리/ 고란초과 밤일엽
[참고자료]
김효철, 송시태, 김대신 지음, 『제주, 곶자왈』
생물다양성협약 공식 사이트 www.cbd.int
네이처링 사이트 www.naturing.net
한반도의 생물다양성(국가생물종목록) species.nibr.go.kr
2019년 화순곶자왈 생물종탐사 결과 보기 www.naturing.net/m/2947/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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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삶>은 필자가 제주에 내려와서 살고 정착하기까지 2년 동안 지내면서 겪은 제주의 환경, 생태, 생활 이야기를 담습니다. 








<필자 소개>




이승은 전 생태지평연구소 연구원, 제주도민




생태지평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대학원에서 환경과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제주도로 내려와 살고 있습니다.

화, 2020/06/2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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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4일, 미국 알래스카의 북극해의 해안마을 카크토비크에서 북극곰을 만났다. ⓒ남종영










15년 전, 나는 툰드라와 바다의 경계 지점에 있는 카크토비크 마을에 있었다. 마른 식물들을 밟으면, 상큼한 풀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따뜻한 여름날이어서, 갈라진 땅은 우수수 떨어졌다. 땅 속에는 하얀 얼음이 들어 있었는데, 그들은 한 입 베어물면 나타나는 찰떡아이스의 아이스크림처럼 ‘나, 오래된 얼음이야’라고 말을 걸었다.




그런 소리 말고는 적막했다. 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다. 바람은 소리를 내지 않고 이끼 위로 날아가기만 했고, 거대한 환초가 막아버린 파도도 성을 내지 않았다. 일주일 머무는 동안 나를 자극한 것은 어느 어린 북극곰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유일했다.




그날 우리는 에스키모들이 버리고 놔 둔 고래 사체 더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북극고래의 몸에 작살을 꽂고, 소형 야마하 엔진이 달린 보트가 끌고 온 것이었다. 바닷가에서 고기를 해체하고 마을 사람들은 잔치를 벌였다. 몇 해가 지났지만 북극곰들은 이 냄새를 맡고 저 멀리 바다에서 헤엄쳐 상륙한다. 북극의 여름은 깊어져 모기들은 득실대고 바다 얼음이 녹았으니, 북극곰은 한참을 헤엄쳐야 할 것이다.




사흘만에 나타난 것은 덩치가 작은 어린 백곰이었다. 아마도 갓 독립해 거친 북극의 환경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저 마을에 가면 이제 곧 에스키모들이 고래를 잡아 올 거라고. 먼저 가서 기다려’라고 누군가 말해주지 않았을까.




우리는 픽업트럭 안에서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감자탕에 붙은 고기를 파먹듯이, 북극곰은 몇 해 동안 얼었다 녹았다 한 고래 뼈에 붙은 살점을 뜯어먹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북극곰은 빨간 피를 얼굴에 묻히고 우리를 멀뚱이 쳐다봤다. 뒤로는 <눈의 여왕>에서나 나올 법한 잔잔한 은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 라고 쓰려니 인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면을 더럽히는 것 같다.




이렇게 표현해야 옳다. 흡사 폭풍전야처럼 고요하여 나는 숨막힐 듯 긴장했다. 세상은 갑자기 소란에에서 조화로 이행한 듯 했고, 이제 곧 진리의 신이 강림하여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리라는 착각에 빠졌다. 이 순간은 너무 아름답고 순수해서, 세상의 진리를 담은 결정체 같았다. 출장비가 찍히는 월급 통장이 없었다면 셔터를 누르던 나는 카메라를 팽개쳤을 것이다.




‘벅피버’라는 말이 있다. 동물이 가까왔을 때 사냥꾼이 느끼는 서늘하고 긴박한 감정이다. 총을 들지 않은 우리도 숲이나 바다에서 우연치 않게 고래나 북극곰, 고라니, 노루를 조우했을 때, 강렬한 느낌이 온 몸을 압도한다. 물론, 구석기 시대 우리의 조상들이 프로그래밍 해놓은 유전자가 오랜만에 기지개를 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벅피버와 에피파니는 동전의 양면이다.




많은 사냥꾼들이 북극곰을 마주쳤다. 기후변화가 북극곰을 멸종시킬 거라고 하지만, 북극곰이 2만2000~2만5000마리밖에 남지 않은 데는 과도한 사냥이 주 원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만큼 많은 북극곰이 죽어나가는 동안 동물의 영혼과 활기가 뿜어대는 벅피버는 축구 경기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많은 자연주의자와 환경운동가들이 에파피니를 마주친다. 찰나의 순간에서 경험하는 영원의 감각. 세계의 시원에 맞닿은 듯한 이 경험은 사람을 사로잡고 혁명적으로 삶을 바꾼다. 당신의 에피파니는 언제였는가? 당신의 삶이 남이 보기에 여전히 궁핍하고 쫓길지라도, 에피파니는 우리의 영혼 속에 여전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불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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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들었는데 신이 잠깐 왔다 간 순간, 소음과 혼란에서 갑자기 완벽한 조화가 찾아든 순간, 영원에 닿아있는 이 시간을 우리는 '에피파니'
라고 부릅니다.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동물과 자연에 대한 짧은 생각을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담아봅니다.



<필자 소개>

남종영 생태지평연구소 운영위원 / <한겨레> 기자


15년 전 캐나다 처칠에서 북극곰을 만난 뒤 기후변화와 고래, 동물 등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수, 2020/06/24-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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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년 전 숲에서 빠져나온 이래, 인간은 숲의 입체성이 낯설기만 하다. 산양은 숨어있는 게 아니라 입체의 숲에서 깃든다. 2015년 7월22일 경북 울진군 두천리. ⓒ남종영 
똥 냄새나 실컷 맡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울진 산양 서식지 탐사팀에 합류한 나는 기대가 없었다. 산양은 정말 보기 힘든 동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원렌즈도 차 안에 두고, 단출하게 산에 올랐다. 
몇 분 뒤, 등산로를 벗어났다. 길이 없어진 게 아니다. 동물이 다니는 희미하고 어지러운 길을 찾는 것이다. 네 발로 기고, 서너 번 미끄러졌다. 짠내 나는 땀이 거먼 흙을 적시고 나서야, 우리는 산양이 누고 간 똥을 발견했다. 하마터면 ‘심 봤다!’를 외칠 뻔 했다. 사람들은 침착하게 똥알 수를 세고 똥알의 크기를 쟀다. 나도 침착하게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오늘 내가 가지고 갈 최고의 ‘전리품’이 될 터였다. 
적막한 울진의 숲. 산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산양의 행동권역은 1㎢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산양의 똥자리에 서 있다면, 여기서 가로 세로 1㎞ 안에 산양이 존재하고 있다는 거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울진의 숲을 들락거린 사람도 산양을 한두 번 볼까말까다. 도대체 이 동물을 보기 힘든 이유는 뭔가? 대체 왜?
그 이유는 우리의 조상이 숲에서 빠져나온 이유와 관련이 깊다. 인간은 숲에서 경쟁자를 피해 이족보행의 기능을 진화시키면서 숲에서 빠져나왔다. 두 발로 멀리, 오래 달릴 수 있었으므로, 새로운 사냥감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 능력은 퇴화했다. 입체적인 숲에서 빠져나왔으므로 3차원보다는 2차원을 보는 데 익숙해졌다. 그늘과 동굴, 절벽과 깊은 계곡에서 더 멀어졌다. 평면에 익숙해졌다.
숲에는 많은 주름들이 있다. 지도에서 1 ㎢를 펼쳐보자. 구겨진 종이를 펴듯 말이다. 그럼, 더 많은 공간이 펼쳐질 것이다. 바위, 나무, 동굴, 능선, 절벽, 계곡 안부 등. 구겨진 종이 속에 갇혀 있던 산양도 불쑥 나타날 것이다. 
숲의 미로에서 산양의 똥자리 몇 개를 본 뒤, 우주에서 귀환한 대원들처럼 우리는 입체에서 평면으로 빠져나왔다. 임도에 주차해 놓은 차의 시동을 걸고, 흙먼지를 뿌리며 비포장길을 내려왔다. 그때 차 안의 누군가 소리쳤다.

“저거, 뭐야!”
숨을 죽이고 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 산양 한 마리가 꼬리를 털털 털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덜덜 떨며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물론, 초점은 빗나갔다. 
서로를 응시한 경험의 질량을 시간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3~4초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산양은 별 관심도 없다는 듯, 구겨진 종이 속으로 들어갔다. 숲의 주름은 소중한 생명들이 사는 곳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감각으로 닿을 수 없는 세계다. 그런 숲이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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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들었는데 신이 잠깐 왔다 간 순간, 소음과 혼란에서 갑자기 완벽한 조화가 찾아든 순간, 영원에 닿아있는 이 시간을 우리는 '에피파니'라고 부릅니다.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동물과 자연에 대한 짧은 생각을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담아봅니다.

<필자 소개>
남종영 생태지평연구소 운영위원 / <한겨레> 기자
15년 전 캐나다 처칠에서 북극곰을 만난 뒤 기후변화와 고래, 동물 등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금, 2020/10/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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