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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 특별기획]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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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 특별기획]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

익명 (미확인) | 수, 2015/08/12- 20:29

뉴스타파는 해방 이후 최초로 친일후손들의 거주지를 추적했다. 사는 지역과 주택 형태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의 상태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8개월 동안의 거주지 추적 결과를 공개한다.

1. 친일 후손 거주지 475곳 확인

뉴스타파는 지난 8개월 동안, 친일파 후손 20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자료와 판결문,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국가귀속한 친일 재산의 지번을 하나하나 확인해 친일 후손들의 소유 거주지 475곳을 확인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300곳, 100곳으로 전체 84%가 수도권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2. 강남 3구 거주 비율 절반 가까운 43%

서울의 거주지 300곳으로 한정해 살펴보면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3구의 비율이 130건으로 43.3%에 이른다. 절반 가까이가 강남 3구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비율이다.

주거형태로 보면 단독주택의 경우 한남동, 이촌동, 성북동, 평창동 등 전통적인 부촌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 3구와 경기도 분당지역에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144명으로 집계됐다. 친일파 후손들의 주거형태도 시간에 흐름에 따라 사대문 안 전통의 ‘강북’에서 신흥 부의 상징인 ‘강남’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밖에 뉴스타파의 확인결과 23명의 친일파 후손들이 상가와 임대주택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상가 건물의 경우 선대로부터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부의 대물림이 이뤄지고 있었다.

3. 친일파 재산 여의도 150배인 4억3천만㎡ 추정, 어디로 갔을까?

친일파가 축적했던 토지는 1억3천만 평 그러니까 4억3천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서울시 면적의 2/3 규모이고, 여의도 면적의 150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들 토지는 이후 제대로 국가에 귀속됐을까?

4. 친일파 재산 중 0.3%만 국가귀속 후 매각된 것으로 확인

해방 후 60년 지난 2006년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가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조사위의 대상 토지는 5천 필지, 2,181만 ㎡였다. 친일재산 추정치 4억3천만㎡의 5%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친일재산으로 결정 확정해 국가로 귀속한 토지는 1,300만㎡에 불과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해 쓰겠다며 매각된 것은 고작 135만 ㎡였다. 결국, 4억3천만㎡로 추정되는 친일 재산 가운데 0.3% 만이 매각 처리된 것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친일 청산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결과로 읽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취재 동영상과 <친일과 망각> 특별 웹페이지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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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2015-08-07 15:06:17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1부 '친일 후손 1177'

 

뉴스타파는 해방 70주년을 맞아,1948년 반민특위의 좌절 이후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친일청산의 문제 등을 집중 조명하는 6편의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 편성 방송합니다.

'친일과 망각’ 4부작은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을 추적해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고 직업은 무엇인지, 특히 친일문제와 친일파로 공인된 선대에 대한 의식은 어떤지 조사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추정해왔던 친일파 후손들의 현재 모습을 인구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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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보기 - 친일인명사전 편찬 18년의 역사

 

금, 2015/08/0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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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칼럼] 친일파 후손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민주행동 공동대표)

오는 8월15일은 광복(光復)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은 길고도 긴 세월이다. 그 기간에 겨레는 ‘광복’이라는 문자의 뜻 그대로 빛을 되찾고 살았는가? 일제의 무자비한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70년 동안, 1960년의 4월혁명 이후 한 해 남짓, 1998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빼면 60년 가까운 세월의 대부분은 독재와 쿠데타, 지배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로 얼룩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강점당한 민중이 가장 열망한 것은 진정한 독립과 자주였다. 그러나 광복 70년이 되는 현재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미군정에서부터 찾아야 마땅하다. 독일과 프랑스는 ‘친나치행위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는데 미군정은 오히려 친일분자들을 비호하고 중용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한민국은 친일파나 그 후손이 득세해서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대통령 박근혜와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다.

박근혜는 2005년에 나온 <나의 삶 나의 아버지>(동아일보사 펴냄)라는 책에 실린 글(‘아버지의 딸로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부모님을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특히 정치를 시작한 뒤 아버지를 닮았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게 당연하겠지만, 정치인이 된 지금은 그 말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가장 큰 지혜는 삶의 모델을 보고 배워서 얻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중요한 3가지 만남 중 하나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다.”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인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 박근혜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고 들었다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월 초에 공개한 자료(<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를 보면 박정희는 우리 겨레를 노예로 만든 일제의 수괴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청년 친일분자’였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그는 만주군에 지원하면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라는 혈서와 함께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인용자)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뼛속까지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찬 이런 박정희조차 박근혜에게는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는 말인가? 박정희의 ‘심복’으로서 한때 비서실장 이후락이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던 강창성(전 보안사령관)은 <중앙일보> 1991년 12월 24일자(‘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이렇게 적었다.

"계엄 선포 한 달쯤 전인가(1971년 10월 17일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박정희의 일본 이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공식 집무실에서 식민지 시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청와대에서 살고 있던 박근혜는 보았을까 못 보았을까?

최근에는 박정희의 둘째 딸 박근령이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친일 만세’를 부르고 나섰다. 그는 7월 4일 공개된 ‘한일관계에 대한 생각을 말하다’라는 인터뷰(일본 포털사이트 <니코니코>)에서 일왕을 ‘천황폐하’라는 극존칭으로 불렀다. 그는 가장 민감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관해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 천황 폐하께서 ‘통석의 염’이라고 이야기했다”면서 “당시 천황께서 애통한 마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그때 일본을 방문한 사람은 대통령 노태우였고 일왕은 아키히토였다. 박근령은 무지의 극치를 보이면서 아버지 못지않게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며 “아베 총리께서 야스쿠니 참배하는 것을 두고 ‘앞으로 전쟁을 일으켜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공격했다.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의 ‘대동아전쟁’ 합리화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과연 친일파 박정희의 딸다운 발상이다.

집권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지난 7월 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릿광대 같은 ‘큰절 외교’로 나라 안팎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친일파 김용주의 아들이라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그 문제를 일찍이 제기했던 <한겨레> 선임기자 김의겸은 그가 미국 방문에서 돌아오기 직전 그 신문 8월 1일자 토요판 커버스토리(‘김무성과 아버지 김용주’)에 “아버지는 천황폐하 찬양… 아들은 미국 장군묘에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김의겸은 2년 전쯤 <한겨레>에 올린 「백년전쟁은 계속되는가」라는 칼럼에서 김무성을 거론하며 “부친인 김용주는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썼다가 김무성한테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를 당했다. 김의겸은 당시 김무성과 적당히 타협하고 ‘반론보도’를 실은 것을 뉘우치면서 이번에 옛 기록을 뒤져 김용주의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김의겸은 한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자 2면 기사에서 김용주의 명백한 친일행적을 발견했다. 김용주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全鮮)공직자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 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

김의겸은 그 대회 사무국이 1944년 1월에 발간한 <징병제 시행 감사 적미영격멸 결의 선양 전선공직자대회 기록>에서 A4용지로 3장이 넘는 김용주의 친일행위를 찾아냈다. 박수를 받으며 등단한 그는 “먼저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외쳤다.

김의겸의 정밀 추적으로 김무성의 아버지 김용주가 명백한 친일파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2014년 6월 김무성이 새누리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을 때 나온 <새누리당 전당대회 특집>은 김용주가 ‘빛나는 애국자’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노동야학 개설’ ‘3·1운동 정신 이어받아 삼일상회 설립’ ‘사재 2만원 던져 사립 영흥교를 신축’ ‘상공번영회 창립’ 등이다. 그런 ‘업적’이 애국이라고 치자. 그러나 일제의 조선 식민지 미화 구호인 ‘내선일체’와 ‘충실한 황국신민’을 부르짖은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입증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김무성과 그의 지지자들은 지난 여러 해 동안 김용주가 친일파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온갖 ‘자료들’을 제시해 왔다.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차라리 김무성이 “아버지는 분명히 친일행위를 했으니 공인인 내가 사과하고 앞으로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면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친일파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때쯤이면 친일파의 아들인 김무성이 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크다. 추악한 역사의 도돌이표를 주권자인 국민이 언제까지 보고 참아야 하는가?

월, 2015/08/1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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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3.1 운동으로 폭발한 민심에 놀란 일제는 힘으로만 누르는 무단 통치 대신 회유책을 병행하는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조선인들은 ‘나도 노력하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일제의 기만적 전술에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일제가 친일파를 본격적으로 양성(?)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시기부터입니다.

일부 명망가들 역시 상황 논리에 기대거나 체념하는 방식의 주장을 합니다. 일제는 너무 강하고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독립을 이루자는 이승만의 외교론,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를 이루자는 이광수의 자치론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전혀 다른 방식의 독립을 주장한 스물한 살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가 다름 아닌 의열단 단장 김원봉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기성세대와 달리 절망적 현실에 주눅 들지 않았던 그의 당당한 태도는 조국의 독립에 목말랐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수많은 청년들은 그와 함께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은 우선 자신들의 타깃을 명확하게 규정합니다.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노, 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일단 타깃이 정해지면 깔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준비한 폭탄과 권총, 태극기 그리고 종이 한 장을 품고 홀연히 경성과 동경으로 떠나게 됩니다. 요인 암살과 일제 중요 기관 폭파가 이들의 최종 목표입니다.

1923년 1월 12일. 문화통치로 길들여진 잠잠한 경성 한 복판에 커다란 폭발음이 울려 퍼집니다. 온갖 고문이 가해졌던 종로경찰서에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한 것입니다.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경찰부장 우마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기자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민심이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일부러 과격한 독립파 사람들이 어찌할 수가 없어서 최후수단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외다. 민심동요는 별로 근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마노는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보도 금지 조치를 내리고 즉시 정복 순사 1,000여 명을 풀어 수색을 지시합니다. 그렇게 10일 만에 경찰이 찾아낸 범인은 32살의 철물점 주인 출신인 의열단원 김상옥이었습니다. 의열단원 중에서도 명 저격수였던 김상옥은 권총을 양손에 쥐고 일본 경찰 400여 명을 상대로 무려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발을 자신에게 겨누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인은 최후까지 권총을 두 손으로 쥐고 바른 손에는 사망한 후에도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걸고 권총을 힘 있게 쥐고 있었다며
여하간 범인은 처음에 발에 총을 맞았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것과 최후까지 총을 쥐고 죽은 것을 보면 매우 대담한 사람이라고 말하더라.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 ‘세군데 총을 맞고도 죽은 후에도 총을 쥐고 있어’)

1926년 12월 28일에는 토지수탈의 중심이었던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이 투척됩니다. 도심 한복판인 을지로, 그것도 백주 대낮에 말이죠. 심지어 뒤쫓는 경찰 7명을 권총으로 사살한 이 역시 의열단원인 나석주였습니다. 그는 자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의열단원들의 맹활약으로 인해 일제는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 잡기에 혈안이 됩니다. 암살과 폭파 자체가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자존감을 잃어가는 당시 조선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심지어 김구보다 더 높은 현상금이 걸리게 됩니다. 현재 금액으로 치면 약 320억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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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20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부산경찰서, 동양척식회사, 심지어는 동경의 황궁에까지 폭탄이 투척됩니다. 폭탄을 투척한 이들은 모두가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복 품속에 거사를 위한 무기(총, 폭탄)와 태극기만이 아니라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종이는 단재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작성한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고 싶었던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장의 종이에 6,400자의 글자로 담겨져 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암살, 파괴, 폭동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해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기 4256년 1월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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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의거를 한 자리는 현재 1호선 종각 역 종각지하 쇼핑센터 8번 출구 바로 앞입니다. 그 앞엔 아주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수, 2015/08/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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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일신여학교 재학 당시 차별적인 식민 교육에 항거해 동맹 휴학을 주도하는가 하면 항일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며 개혁적인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했던 박차정. 서울지역 11개 여학교를 비밀리에 조직해 1930년 1월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한 박차정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0년 의열단에 합류했고, 이를 이끌던 독립운동의 거두 김원봉과 결혼해 사랑과 혁명의 길을 함께 걷는다. 1935년, 의열단 등 좌우 독립운동단체 5개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하자 박차정은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해 조선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과 여성해방을 쟁취할 것을 독려한다. 이는 박차정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이념이었다.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中-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후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박차정은 1939년 2월,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자주독립과 민주혁명을 이룬 통일조국이라는 박차정의 못다 이룬 꿈은, 그러나 김원봉 또한 보지 못했다.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은 미군정의 주도권 하에 있었고 소용돌이치는 해방정국 안에서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다. 역사의 모순이 빚어낸 참상이었다.

분단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지워진 역사. 박차정은 사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김원봉은 광복 70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금, 2016/01/0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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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스페셜 프로그램] 광(光). 복(復)의 시간 기억하지 않는 진실은 사라진다 매달 주제별로 시네마달의 작품을 소개하는 ‘스페셜 프로그램’이 돌아 왔습니다. 공동체상영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께도,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만나길 고대하고 있는 관객 분들께도, 유익한 지침서가 되길 바랍니다! 2013년 8월의 ‘스페셜 프로그램’에서는 다가오는 8.15 광복절을 맞아,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의미 있는 행보를 담은 영화들을 소개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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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3/08/0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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