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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 특별기획]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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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 특별기획]친일과 망각 3부 ‘부의 대물림’

익명 (미확인) | 수, 2015/08/12- 20:29

뉴스타파는 해방 이후 최초로 친일후손들의 거주지를 추적했다. 사는 지역과 주택 형태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의 상태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8개월 동안의 거주지 추적 결과를 공개한다.

1. 친일 후손 거주지 475곳 확인

뉴스타파는 지난 8개월 동안, 친일파 후손 20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자료와 판결문,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국가귀속한 친일 재산의 지번을 하나하나 확인해 친일 후손들의 소유 거주지 475곳을 확인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과 경기도가 각각 300곳, 100곳으로 전체 84%가 수도권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2. 강남 3구 거주 비율 절반 가까운 43%

서울의 거주지 300곳으로 한정해 살펴보면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3구의 비율이 130건으로 43.3%에 이른다. 절반 가까이가 강남 3구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비율이다.

주거형태로 보면 단독주택의 경우 한남동, 이촌동, 성북동, 평창동 등 전통적인 부촌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 3구와 경기도 분당지역에서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은 144명으로 집계됐다. 친일파 후손들의 주거형태도 시간에 흐름에 따라 사대문 안 전통의 ‘강북’에서 신흥 부의 상징인 ‘강남’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밖에 뉴스타파의 확인결과 23명의 친일파 후손들이 상가와 임대주택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상가 건물의 경우 선대로부터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부의 대물림이 이뤄지고 있었다.

3. 친일파 재산 여의도 150배인 4억3천만㎡ 추정, 어디로 갔을까?

친일파가 축적했던 토지는 1억3천만 평 그러니까 4억3천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서울시 면적의 2/3 규모이고, 여의도 면적의 150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들 토지는 이후 제대로 국가에 귀속됐을까?

4. 친일파 재산 중 0.3%만 국가귀속 후 매각된 것으로 확인

해방 후 60년 지난 2006년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가 조사를 시작했다. 당시 조사위의 대상 토지는 5천 필지, 2,181만 ㎡였다. 친일재산 추정치 4억3천만㎡의 5%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친일재산으로 결정 확정해 국가로 귀속한 토지는 1,300만㎡에 불과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해 쓰겠다며 매각된 것은 고작 135만 ㎡였다. 결국, 4억3천만㎡로 추정되는 친일 재산 가운데 0.3% 만이 매각 처리된 것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친일 청산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결과로 읽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취재 동영상과 <친일과 망각> 특별 웹페이지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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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2015-08-03 11:39:35

 

 

 

 

[토요판]커버스토리 / 김무성과 아버지 김용주

더 상세히 드러난 아버지 친일행적
아들은 왜 미국에서 큰절을 했을까

미국 방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여느 정치인이 아니라 집권여당의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이기에 더욱 그렇다. 커다란 몸집과 당당하던 태도는 태평양을 건너자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넙죽넙죽 올리는 ‘큰절’은 환영은커녕 비웃음만 사고 있다. 아프리카 추장 같다거나 아예 부채춤을 추라는 조롱마저 날아간다. 그런데도 그는 내년에 또 큰절을 하겠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김무성 대표 아버지의 친일 행적에서부터 발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료를 뒤적여보기 시작했다. 아뿔싸. 선친 김용주의 과거 친일 의혹은 빠르게 지워져가고 있었다. 대신 절세의 애국자로 변모하고 있다. 친일이 애국으로 둔갑하는 현실을 막아보고자 김 대표 부친의 과거 친일 발언을 공개한다. 천황폐하를 위해 자식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고약한 내용이며 A4 용지 3장 분량이다. 그런 부친의 과거를 바꾸려는 시도나 미국에서 하는 큰절이나 모두 한뿌리에서 나온 콤플렉스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천황폐하 찬양…아들은 미국 장군묘에 “감사합니다”

▶ 김무성 대표의 선친 김용주의 일제 때 발언을 보면 그가 상당한 인텔리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고대사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는 역사를 넘나들며 일본과 조선이 한민족 한뿌리임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발언의 귀결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태평양전쟁에 용감하게 나서라는 것이다. 화랑 관창처럼, 사육신 성삼문처럼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다만 그 충성의 대상이 일본 천황일 뿐이다. 천황을 위해 벚꽃같이 지라고 한다

미국을 방문중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기행’을 보면서 “왜 저러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정치부 기자들은 ‘국내 보수층의 지지를 다지려는 의도’라고들 많이 분석하는데, 선뜻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김 대표는 이미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부동의 1위 아닌가. 표를 얻으려면 왼쪽으로 가야지 왜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만 가는지 설명이 안 된다. 분명히 손해 보는 짓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 계산이 아니라 본능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김 대표가 초대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묘 앞에서 큰절을 두번 올리고 나서 묘비에 묻은 진흙과 새똥을 직접 손수건으로 닦으며 “아이고, 장군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는 기사를 보고 퍼뜩 든 생각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두고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고 평가한 친형 이상득의 말도 떠올랐다.

“그런데 저래도 되나?”라는 게 이어진 의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김무성 대표의 아버지 김용주(1985년 작고) 전 전남방직 회장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김용주 회장은 일제 때 친일 행적이 분명한 사람이다. 해방 뒤에는 미군정청의 지원을 받았고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적산’ 전남방직을 전쟁중에 불하받아 부자가 되었다. 유시민 전 장관은 그런 가계도 때문에 김무성 대표를 ‘친일-반공-보수세력의 총아’로 지칭한 적이 있다. 그러니 김 대표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라도 눈에 드러나는 친미 행위는 피해야 할 처지다. 그런데 영 반대로 가고 있어 의아해한 것이다.

 

 

 

 

 

 

한겨레는 2년 전 ‘친일행적’ 정정한 적 없어

하도 이상해서 네이버에 김무성, 김용주, 친일 등의 단어를 쳐놓고 검색을 해봤다.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김용주 회장은 친일을 의심받기는커녕 절세의 애국자로 둔갑해 있었다. 각종 기사와 블로그 글들이 김용주의 친일을 해명하고 애국을 칭송하고 있는 거다. 2년 전쯤 분명히 같은 검색어로 찾아봤는데 그때하고는 하늘땅 차이였다. 글들을 클릭해서 읽어보고는 더 놀랐다. 그런 변화에 나 ‘김의겸 기자’가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2년 전쯤 ‘백년전쟁은 계속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김무성 대표를 거론하면서 “부친인 김용주는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비판한 것이다. 김 대표는 즉각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는데 내 나름으로는 김 대표의 요구를 선선하게 받아줬다.

내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칼럼에서 “김 의원이 ‘빨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표현했는데, 알고 보니 종북주의자, 좌파, 김정일의 꼭두각시라고는 했어도 빨갱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라고 정정해줬다.

부친의 친일 행적 부분도 반론을 보도해주는 걸로 쉽게 합의를 봤다. 그래서 “이에 대해 김 의원은 ‘당시 경북도회 의원들은 조선인 농민들의 편에 서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였으며, 김 의원의 부친은 사재를 털어 조선인 한글교육 야학을 개설하고 일본 자본에 맞서 조선상인회를 설립하는 등 애국자적 삶을 살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없으므로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밝혀왔습니다”라는 반론보도 문구를 김 대표의 변호사와 함께 작성했다. 반론보도는 정정보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정보도는 기자가 사실보도의 착오를 인정하고 내용 자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나 반론보도는 양쪽의 주장을 독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방어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자인 나야 사실관계가 틀림이 없고 친일파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지만 아들인 김무성 대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 반론할 기회를 주는 게 공정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칼럼을 쓸 당시는 김무성 대표의 행위(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NLL) 발언 왜곡)에 분개했지만, 돌아가신 부친까지 끌어들인 건 나도 나중에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이런 곡절을 거쳐 ‘김무성 의원 부친 관련 반론 및 정정보도’가 지면에 실렸다. 그 직후 김 대표가 출입기자들에게 돌린 문자가 나한테도 한 다리 건너 전달이 됐다. 김 대표가 반론보도문의 성격을 자기한테 너무 유리하게만 해석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더 이상 보도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걸로 이해하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잊고 살았다. 네이버 검색을 하다가 경악하기 전까지는.

2년 동안 생산된 기사나 블로그 글들의 제목을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김무성 “우리 부친은 친일파 아닌 애국자”

-김무성 친일 논란 정리, 해촌 김용주 선생의 애국활동

-김무성 대표 부친, ‘해촌(海村) 김용주’ 선생…공작 속에 묻혀버린 ‘애국자’

-김무성 대표 아버지가 친일파가 아닌 13가지 이유!

-“아버지가 친일파라고…차라리 나를 모욕하라” 김무성 의원이 직접 말하는 ‘나의 개인사와 가족사’

2년 전만 해도 인터넷에는 김 대표의 가족사를 거론하며 친일 의혹을 제기하는 글들만 있었는데 이제는 생태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김 대표의 적극적인 대응이 있었을 것이다. 김 대표는 어느 인터뷰에서 선친 문제와 관련해 “지금까지는 무시하거나 관용으로 대했지만 이제는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거나 고소 등 조처를 할 계획”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대응이 방어 차원을 넘어서 아예 공세로 넘어간 모양새다. 친일파가 아니라는 해명을 넘어 애국자, 애국활동으로까지 미화되고 있다. 김 대표 쪽의 적극적인 언론 접촉과 논리 제공이 있었을 테고, 가까운 언론매체나 지지자들이 글을 양산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런 환경 변화에 힘입었는지 김무성 대표의 공식사이트에도 ‘나의 아버지’가 비중있게 소개되는데, 부제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해촌 김용주’다.

경이로운 변화다. 게다가 내가 내보낸 ‘반론보도문’이 이런 세태 변화에 공헌하고 있다는 게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김 대표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당시 한겨레가 사설을 통해 해촌 선생이 친일행적을 보였다고 보도하자 김 대표는 ‘당시 경북도회 의원들은~애국자적 삶을 살았다’고 강조하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을 요청했다. 결국 한겨레는 지난 2013년 10월 언론중재위 조정에 따라 <김무성 의원 부친 관련 반론 및 정정보도>를 냈다.” 정정을 해준 건 빨갱이 부분일 뿐인데 이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마치 친일 부분이 정정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이어서 “해촌 선생의 친일 의혹은 특정세력의 명백한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한다. 기자인 내가 졸지에 공작 정치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김 대표 부친의 친일 의혹을 간단하게 거론하는 <오마이뉴스>의 어느 기사를 보니 중간에 엉뚱하게 내가 작성한 반론보도문이 끼어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원문이 아니라 첨삭이 된 문장이었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쪽에 기사 정정을 요구하며 그 반론보도문을 들이댄 모양이다. 내가 별생각 없이 합의해준 반론보도문이 나도 모르는 새 다른 언론의 재갈을 물리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겨레와 내가 조롱감이 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어느 기사에서는 이런 치욕적인 글귀를 발견했다. “한겨레는 이전에도 김무성 대표와 관련된 기사에서 오보를 게재한 적이 있었다. 김무성 의원의 부친이 친일파라는 보도와 김무성이 ‘빨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허무맹랑한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도 정정보도를 낸 적이 있었다.” 내가 허무맹랑한 기자가 되는 건 문제가 아닌데 회사마저 망신을 사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 여당 대표
선친의 친일행적 의식했다면
방미 중 발언과 행위 안 나왔을 것
친일 콤플렉스 떨쳐 버린건가
굴욕적 친미발언과 큰절이라니

“진정한 내선일체…충실한 황국신민
…야스쿠니 신사에 받들어질 영광”
‘미영 격멸’ 공직자대회 보도한
1943년 10월3일치 <매일신보>와
대회기록집에 김용주 상세 발언


A4 용지 3장 분량으로 드러난 김용주 발언

알고 보니 김무성 대표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배재정 민주당 대변인도 김 대표의 부친이 ‘친일인명사전에 대표적인 친일파로 등재됐다’고 논평을 냈다가 뒤늦게 동명이인임을 깨닫고 김 대표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김용주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니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러니 “김무성 부친 친일인명사전 민주당 거짓말! 사실 부친 김용주는 애국자” 등의 글들이 즐비하게 된 거다.

인터넷 경제전문지인 <스페셜경제>는 당시 “김무성 대표 부친 ‘친일 의혹’…거짓 속에 묻혀버린 진실. 알고 보니 애국자였다…친일 의혹 ‘명백한 공작’”이라는 단정적인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 기사에서는 “아울러 배 대변인의 거짓 논평뿐만 아니라 한겨레신문 역시 친일 의혹에 대해 정정보도를 하면서 김 대표 부친의 친일 의혹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김 대표 선친의 친일 행적을 정면으로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지난 2년 동안 사정을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알고 나서도 계속해서 침묵한다면 나는 역사 왜곡의 공범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친일을 감추고 싶어하는 것과 친일을 애국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또 나와 내가 몸담고 있는 한겨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뭔가 조처를 취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거다.

나는 사실 김무성 대표 선친의 친일 행적을 뒷받침하는 최소한의 자료를 이미 2년 전에 확보하고 있었다. 김 대표가 “법적 대응에 임할 것”이라며 내용증명까지 보낸 판이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1941년 12월9일치 <매일신보> 말고도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론중재위원회에 나가서 새로 입수한 자료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확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미군정-전쟁-독재로 이어지는 뒤틀린 우리 역사에서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 후손들을 다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정서에서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이다’가 아직도 기본적인 내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김무성 대표가 여느 정치인인가. 집권 여당의 대표이고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차기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인물이다. 그가 선친의 친일 행적을 의식하고 있었다면 방미 중의 발언과 행위가 나오지 않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친일 콤플렉스를 완전히 떨쳐버렸기에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굴욕적인 큰절이 나오고 “우리는 중국보다 미국”이라는 발언을 태연하게 뱉을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또 친일 타령이냐’거나 ‘웬 연좌제냐’는 얘기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아 찾아낸 건 <매일신보> 1943년 10월3일치 2면의 기사다. 징병제 시행을 고마워하며 미국과 영국 격멸을 결의할 목적으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를 다룬 기사로서, 제목은 ‘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2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 각 의원들의 열론’(銃後의 戰列에 總立, 第二日 公職者大會에 滅敵의 熱火漲溢, 各議員들의 熱論)이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의 부친 김용주(일본명 金田龍周, 경북도회 의원)는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敬神崇祖 報恩感謝)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사가 간단해서 더 구체적인 자료가 없을까 찾다가 이 대회 사무국이 1944년 1월에 발간한 <징병제시행 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徵兵制施行感謝 敵米英擊滅 決意宣揚 全鮮公職者大會記錄)을 발견하게 됐다. 그 책자에는 김용주의 발언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옮기고 보니 A4 용지로 3장이 넘는 분량이나 몇가지만 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회의에서 첫번째 의제는 “징병제 실시에 즈음하여 그 완벽을 기함과 함께, 2천500만 민중에게 고마우신 성지(聖旨)를 철저하게 젖어들게 하도록 구체적 시책 의견”이었다.

김용주는 박수를 받으며 등단해 “먼저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고 말하며 구체적 방책들을 제안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각 면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신을 공경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면 일본 정신의 진수에 철저히 젖어들게 할 수 있습니다”이다. 그는 이어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여 현세의 신이신 천황께 귀일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부모들이 천황폐하를 위해 기꺼이 자식의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면 단위마다 신사를 세워 신앙심을 고취시키자는 고약한 내용이다. ‘일본동맹통신사’에서 발간한 자료를 보면 김용주는 말만 내세운 게 아니라 실제로 대구신사를 건립하는 데 2천원을 기부한 것으로 나온다.

더 심한 건 신라시대 화랑 관창과 조선시대 사육신 성삼문의 사례를 들며 “우리는 이처럼 의용충렬한 선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자손인 자가 분투하여 굳건한 각오를 갖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논리를 편다. 우리 조상들의 충성심과 의기를 오늘에 되살려, 일본 천황을 위해 떨쳐일어나자는 얘기다.

2년 전 김무성 아버지 김용주의
친일행적 비판한 ‘한겨레’ 칼럼
반론기회 줘 반론보도문 게재
그뒤 인터넷 포털에서 김용주는
친일은커녕 애국자로 둔갑했다

김무성 대표 쪽은 언론중재위에서
“매일신보 믿을 수 없다”고 반박
한데 그 아버지는 “매일신보가 반도의 민지 계발에 공헌한다”며
한글판 추가발행까지 제안하기도


김용주는 자서전에서 친일행적 숨겨

김용주는 이어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한글판을 매주 1회 발행하자고 제안하며 그를 통해 “영미화란의 과거 수백년 동아침략의 실정 및 과거 현재에 통틀어 약소하고 전쟁에 패한 국가민족의 말로가 얼마나 참담하고 슬프고 애달기 짝이 없는 것인지를 명시하여 정부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고 일억 국민은 굳게 단결하여 죽어서라도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연설을 맺는다. 김용주는 두번째 안건에도 등장해 발언을 한다. 안건은 “대동아전쟁 바야흐로 저편과 이편이 결전양상으로 바쁘고 어지럽고 맹렬하게 됨을 돌아보고, 더욱 미영격멸의 결의를 새롭게 하고 조선서 필승 신념을 고양하며, 전력증강, 전시생활의 확립을 한층 심화 철저히 하는 건설적 의견”이다.

그는 이 의제와 관련해 “반도 2천500만의 반수인 부녀자의 생산방면 활동”을 높이기 위해 “취사는 아침 밤 2번으로 하고, 점심은 도시락제로 할 것” “요릿집, 음식점 등 유흥음식 시간을 미영격퇴까지 당분간 2시간 이내로 제한할 것” 등을 제안하기도 한다.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 자료를 통해 <매일신보>를 바라보는 김무성 대표 부자의 시각차가 드러나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나는 2년 전 칼럼에서 1941년 12월9일치 <매일신보>를 근거로 “김무성의 부친인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썼다. 실제 그날치 신문 기사를 보면, 김용주는 대구부 욱정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에 참석한다. 거기서 그는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했고, 이는 만장일치로 가결된다. 그리고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에 선출되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김무성 대표 쪽은 “<매일신보>가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고 당사자가 작성하지 않은 기고문조차 매일신보 기자가 임의로 작성해 보도한 사례가 있는 만큼 믿을 수 없다”고 언론중재위에서 반박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매일신보>는 반도의 민지(民知) 계발에 크나큰 공헌을 하고 있다”며 <매일신보> 한글판을 추가로 발행하자고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의 씁쓸한 한 단면이다.

김용주도 해방 이전 자신의 행적을 숨긴다. 그는 작고 1년 전인 1984년 <나의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을 펴내는데, 일제 말 행적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이러한 시국하에서는 만사에 있어 조심스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1943년부터는 일제 치하의 모든 면에서 스스로 후퇴하여 8·15 해방에 이르기까지 칩거생활로 들어간 것이다.” 1943년의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 발언은 깨끗하게 지운 것이다.

긍정적 평가할 대목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자료로 인해 김용주 전 회장이 단박에 ‘친일파’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용주 전 회장의 일대기 가운데 후손들이 평가해야 할 대목 또한 많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교육받을 곳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우려해 경영난으로 존폐위기에 처한 영흥학교를 새롭게 설립한 점이 그렇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당시 주일공사였던 김용주가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5대 궁궐과 4대문 등을 하나하나 지도에 표시해가며 우리 역사 유물과 주요 문화재들을 보호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고 하니 크나큰 공로다. 단지 이 자료를 계기로 있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다. 시인 김수영이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고 노래했듯이 친일과 독재라는 우리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고쳐나가려는 용기만이 우리를 진창의 역사에서 구원해줄 거라고 믿는다. 큰 꿈을 꾸는 김무성 대표가 그런 자세를 가질 때에라야 열강의 틈바구니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의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5-07-31>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 추가기

☞한겨레: 김무성의 집안…적산기업 불하 받아 전남방직 만들어

☞폴리뉴스: ‘친일파’ 김무성 부친, 애국자로 황당하게 둔갑

☞한겨레: 김무성 “좌파세력 준동…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파문

☞한겨레: 김무성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발언에 현직 교사 항의 편지

월, 2015/08/0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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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논란 속에 추진돼온 국정 역사교과서의 현장 검토본이 공개됐다. 정부는 이른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었다고 자부하며 집필진 31명의 명단도 함께 공개했다. 그러나 평가는 참혹했다. 그간 역사학계와 교육계를 중심으로 제기돼 온 우려 사항이 전혀 해소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더욱 큰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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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엔 면죄부, 박정희 치부는 은폐, 정경유착은 미화

정부가 발표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동안 이른바 ‘건국절 논란’과 관련된 1948년 정부 수립 관련 표현이다. 국정교과서는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정부는 과거 검정 교과서들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수립’을 혼용해서 사용해 왔다면서 큰 문제가 없는 표현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48년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기술이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구성과 이후 여러 독립운동을 통해 1948년에 대한민국을 ‘완성시켰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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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학계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미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에서 시작되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는 점, 그리고 만약 1948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이 시작된 것이라면 일제 치하에서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지키고자 했던 그 대한민국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냐는 점때문이다.

나아가 1948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규정할 경우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반민족행위를 하다가 1945년 광복 이후부터 미군정에 붙어서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사들의 숫자가 상당하다. 만약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이런 사람들은 친일파가 아니라 건국 유공자로 신분이 세탁된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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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과 관련된 내용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기존 검정교과서 6종 가운데 5종에 공히 실려 있던 5.16 쿠데타 당시 군복과 썬글라스 차림의 박정희 사진은 국정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박정희의 사진은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과 나란히 있는 한 장 뿐이다. 군사쿠데타의 주역보다는 경제발전을 주도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기를 압축해서 표현한 대목도 박정희 정권에 유리하게 교묘히 포장되어 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부는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고도성장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1972년 유신 체제가 등장하며 국민의 자유는 억압되었고, 시민과 학생들은 독재 정치를 비판하는 반유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문장을 보면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을 이룩한 점을 성과로 규정하면서도 장기 군사 독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선언한 점은 누락시켜,마치 고도성장을 대가로 국민의 자유가 불가피하게 억압된 듯한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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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박정희 정권기의 새마을운동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농촌사회 안정에 기여했다는 찬사 일색으로 서술됐다.또 이 시기에 관한 서술 중 뜬금없이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을 소개하면서 이병철과 정주영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들이 박정희 정권의 독점적 특혜를 받고 그 대가로 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동안 검정교과서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묘사하면서 기업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재계의 주장이 반영돼 이들 기업인들을 미화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근현대사 집필진 중 역사학자 1명… 고대·중세사 늘리고 근현대사 대폭 축소

국정교과서의 이런 문제점들은 근본적으로 집필진 구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꼭꼭 숨겨오다 드디어 공개한 국정교과서 집필진 31명 가운데 근현대사 집필자는 12명이었다. 그 중 현직 역사학 교수는 일제하 독립운동사를 주로 연구했던 한상도 교수 한 명 뿐이었다. 현대사 집필자 6명으로만 좁혀보면 역사학자는 아예 아무도 없고 법학과 정치학, 경제학, 군사학 전공자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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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참여했다는 교육부 설명과는 달리 뉴라이트 성향의 학자들이 7명이나 집필진에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현대사 집필진 가운데 김명섭 교수와 나종남 교수,세계사를 맡은 이주영 교수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중심인 현대사학회 회원이다.현대사를 집필한 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 한 신문 칼럼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표현한 바 있다. 또 정경희 영산대 교수는 기존 검정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고 북한 교과서를 베꼈다고 주장했던 인사이고,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교학사 교과서 필진이었다.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 직후인 지난달 ‘박근혜 대통령님을 위해 기도하자’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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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번 국정교과서에서는 기존 검정교과서들과 달리 근현대사 부분의 비중 자체가 크게 줄어든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6종의 기존 검정교과서들은 근현대사 비중이 70% 전후였던 것에 반해 국정교과서는 절반도 되지 않는 44%에 그쳤다.이와 관련해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역사 교육은 현재와 더 가까운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국정교과서는 굳이 전근대를 길게, 근현대는 짧게 구성하도록 했다. 이 역시 근현대사를 이루는 주요 내용인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축소 서술하려는 의도와 직결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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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급 교육청 협조 거부, 국민적 저항 고조…교육현장 적용 가능할까?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에 대한 여론을 오는 12월 23일까지 수렴한 뒤 이를 최종본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당초 일정대로라면 내년 3월이면 중고등학교 현장에 배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학계와 일선 교사들은 국정교과서 폐기가 마땅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시도교육청들도 국정교과서를 내년부터 교육 현장에 도입하는 데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촛불집회의 주요 구호 가운데 하나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기’일 만큼 국민적 저항도 거센 상황이다.

이에 따라 최근 교육부는 내년에 국정교과서를 전면 도입하는 당초 계획을 변경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논의하면서 청와대 및 새누리당과 조율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선 학교들이 국정과 검정 가운데 선택하게 하는 방안, 내년 한 해 동안은 시범학교에서만 도입하는 방안, 아예 시행 시기를 1년 연기하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 교육부가 이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더라도 사실상 국정화 폐기 수순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는 분석이 나오고 있어,결국 최근의 촛불집회 국면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따라 국정교과서의 운명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취재 : 김성수, 홍여진

영상취재 : 김수영, 김남범

영상편집 : 정지성

화, 2016/11/29-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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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으로 보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유행한 적이 있다. 특정한 주제나 소재를 프리즘 삼아 그 사회와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이다. 훈장은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이에게 바치는 최고의 영예이다.

▲ 대한민국 훈장, 건국훈장 등 모두 12개 종류의 훈장이 있다.

▲ 대한민국 훈장, 건국훈장 등 모두 12개 종류의 훈장이 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지난 68년 동안 대한민국이 수여한 훈장 건수는 모두 72만 건에 이른다. 전체 훈장 기록을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4개월 동안 대한민국 서훈 72만 건 내역 분석

뉴스타파는 지난 넉 달 동안 대한민국의 전체 서훈 72만 건의 상세 내역을 샅샅이 찾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6천여 명을 새롭게 조사했다. 자료 조사와 현장 취재를 병행했다. 지난 4개월 동안 진행된 뉴스타파의 훈장 취재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 등 헌법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가?”

“친일파에게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한 대통령은 누구일까? 그리고 왜 줬을까?”

“이른바 ‘셀프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은 누구일까? 그리고 몇 개나 받았을까?”

“왜 지금까지 정부는 훈장의 서훈 내역을 비공개해왔을까?”

▲ 지난 5월부터 뉴스타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여러 차례 회의와 공동 분석을 진행하며, 서훈 72만 건을 취재했다.

▲ 지난 5월부터 뉴스타파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여러 차례 회의와 공동 분석을 진행하며, 서훈 72만 건을 취재했다.

뉴스타파는 220명 넘는 친일 인사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4백 건 넘는 훈장을 받은 사실을 찾아냈다. 이 작업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했다. 대한민국 서훈 72만 건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와 민족문제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파를 교차 분석한 결과다.

200명 넘는 친일인사, 대한민국 훈장 400건 받아

친일인사들에게 수여된 상훈의 전모를 확인해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전체 명단은 뉴스타파 특별기획 ‘훈장과 권력’ 4부작 다큐멘터리와 뉴스타파 웹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대한민국 국가 서훈자 명단에는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도 있다. 뉴스타파는 그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3개의 훈장을 받는 기록을 최초로 확인한 것이다. 노덕술은 일제로부터 훈7등 서보장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을 받은 사실은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또 A급 친일파에다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된 박흥식도, 동족을 배반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민영휘도 각각 1977년과 1964년에 훈장을 받는다.

친일인사 훈장 수여, 박정희와 이승만 집권 시기에 집중

친일인사들에 대한 서훈은 이승만과 박정희 집권 기간에 집중됐다. 훈장 수여는 대통령 고유권한이다. 두 통치자가 친일인사들에게 무더기로 훈장을 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친일인사들은 훈장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 청남대에 세워져 있는 이승만과 박정희 동상

▲ 청남대에 세워져 있는 이승만과 박정희 동상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 훈포장 잔치도 추적

뉴스타파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반민주 행위자들의 서훈 내역도 확인했다.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신군부 세력들의 훈장 잔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들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훈장을 수여한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 12.12 군사반란 직후 촬영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단체 사진, 사진에 등장하는 신군부 34명이 받은 102개의 서훈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 12.12 군사반란 직후 촬영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단체 사진, 사진에 등장하는 신군부 34명이 받은 102개의 서훈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자료를 추적하고, 당사자와의 만남도 시도 했다. 지난 4개월의 취재 과정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와, 군사독재 하수인들의 뻔뻔한 민낯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굴곡진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KBS가 못한 훈장 데이터 분석, 뉴스타에서 풀어내

당초 훈장 취재의 시작은 KBS였다. 지난해 1월 KBS 탐사보도팀 기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3년 간의 소송 등을 통해 서훈 기록 72만 건 전체를 최초로 입수했다. 그러나 KBS 간부들의 반대에 막혔다. KBS 기자들은 지난해 광복70년 특집으로 훈장의 역사를 다룬 프로그램을 보도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일부 내용만 나갔고 친일과 훈장 등 핵심 내용에 대한 방송 일정은 기약 없이 밀렸다.

“훈장과 권력” 7월 28일부터 4주 연속 방송

결국 KBS에서 훈장 취재를 맡았던 기자가 올해 2월 뉴스타파로 이직하면서 뉴스타파에 훈장 전담 취재팀이 꾸려졌다. 그리고 행안부가 공개한 60여만 건의 데이터와 뉴스타파가 자체 수집한 자료, 민족문제연구소와의 공동 분석한 결과물 등을 토대로 대한민국 훈장 데이터를 새롭게 구축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해방71년 특별기획으로 준비한 “훈장과 권력” 4부작을 7월 28일부터 8월 18일까지 매주 목요일 4주 연속 방송할 예정이다.

7월 28일 첫 방송으로 나갈 1부 ‘민주 없는 훈장’ 편에서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독재세력에겐 관대했고, 민주인사들에게는 인색했던 대한민국의 서훈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2,3부 ‘친일 훈장’ 편에서는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인사들의 전체 명단을 처음으로 확인해 공개할 예정이다. 또 4부 ‘훈장의 수사학’ 편에서는 역대 대통령들이 서훈 행위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이면과 각 훈장의 의미를 분석한 결과를 담아낼 예정이다.


공동기획 : 민족문제연구소
취재 최문호, 박중석, 송원근, 조현미
촬영 최형석, 정형민
데이터 최윤원, 김강민, 이보람, 연다혜
CG 정동우
편집 정지성, 박서영

월, 2016/07/2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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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을 공포하며 조선을 대륙 침략의 기지로 삼고 ‘내선 일체’, ‘황국신민화’를 통한 대대적인 민족말살 정책을 펼쳤다. 이 때 조선의 많은 자산가와 지식인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며 친일과 변절의 길을 택했다. 독립과 여성해방운동을 이끌던 여성지도자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 여성들도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자
– 김활란 (1899-1970)

다른 학교 학생들은 정신대에 지원을 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 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 황신덕 (1889-1983)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 여성으로서 천황 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 박인덕 (1896-1980)

그러나 이러한 변절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길을 굽히지 않고 걸었던 사람이 있었다.

김마리아. 그녀는 동경 유학 시절,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2.8 독립선언서를 몸에 감추고 국내로 잠입했다. 국내로 온 후에는 모교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출소 한달만에 당시 최대의 여성비밀 항일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했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재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인 근화회를 창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독립 운동을 이어갔다.

김마리아는 평생 일제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막대기로 계속해서 머리를 때리는 고문으로 고막이 터지고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메스토이 병에 걸렸으며,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고문으로 인해 한 쪽 가슴도 잃었다. 그녀가 남긴 안섶과 겉섶 길이가 다른 한복 저고리는 그녀가 받은 잔인한 고문을 짐작케 한다.

전 생애에 걸쳐 흔들림 없이 독립의 길을 걸었던 김마리아. 10여 년의 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끝까지 일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는 활동을 펼쳤지만,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3월 눈을 감고 말았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는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 김마리아

금, 2016/01/2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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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가 일제 강점기인 1940년 대에 ‘일제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낸 사실이 지난주 ( 관련 기사 보기 – 김무성 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새롭게 나온 가운데, 김용주가 일제에 군용기 헌납 모금 대회에 동참했다는 기록이 또 확인됐다.

뉴스타파 취재결과, 1943년 김용주가 참석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 전 조선 공직자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비행기 <전선공직자호>로 이름붙인 군용기를 일제 육해군에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으로 도회 의원의 경우 50원을 갹출하기로 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로 이름붙인 일제 군용기 헌납운동에 동참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전선 공직자호>로 이름붙인 일제 군용기 헌납운동에 동참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이 같은 내용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중 친일파 서병조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자료에 나온다. 또 1944년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이 일본어로 작성한 전선공직자대회기록에 자세히 나온다.

서병조는 대구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사로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또 김용주와 함께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로, 같은 해에 경상북도 도회의원(관선)으로 선출됐다. 당시 경북도회 의원 40명(관선, 민선 포함) 가운데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한 조선인 의원은 단 두 명으로 기록돼 있는데, 바로 서병조와 김용주다.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서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서 참석한 것으로 나온다.

▲전선공직자대회 기록문건 겉표지와 당시 대회 사진

김용주가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참석한 전선공직자대회는 1943년 10월 1일과 2일 이틀에 걸쳐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다. 대회 슬로건은 ‘징병제시행감사(徵兵制施行感謝) 적미영 박멸 결의선양(敵美英 撲滅 決議宣揚)’이었다. 말 그대로 일제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내모는 징병제 실시를 감사하고,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는 궐기대회였다. 이틀 동안 진행된 이 대회에는 고이소 조선총독부터 정무총감까지 대거 나선다.

김용주는 이 대회에서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 전쟁에 동원되는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귀여운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영광”이라는 표현까지 하는 등 강도높은 친일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관련 기사 – 김무성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특히 뉴스타파가 확인한 당시 자료를 보면 대회 참석자들은 ‘전선공직자호(公職者號)’로 이름붙인 군용기를 일제의 육해군에 헌납하기로 결정한다.

아래 글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보고서가 1943년 10월 3일 자 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매일신보 기사 내용 발췌

▲출처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중 서병조 편, 2009

 그리고 비행기 헌납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별도의 실행위원을 선출하는데, “전선(全鮮)의 공직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비행기 <전선공직자호> 4대를 헌납”하기로 하고, 도회의원의 경우 50 원을 내는 등 모든 공직자가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하는데 앞장 설 것을 결의한다. 김용주는 당시 경북도회 의원으로 지내고 있었다.

 아래의 글은 1944년 전선공직자대회사무국이 작성한 당시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전략)

一 비행기헌납에 대해어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전선의 공직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비행기 <전선공직자호> 4대를 헌납하기로 하고, 각 공직자는 다음의 기준에 의하여 갹출하는 것으로 한다.

도회의원 부회의원 읍회의원 면회의원 학교 조합의원 학교 협의회원
50원 50원 30원 10원 20원 20원
671명 421명 1,456명 22,704명 5,760명 2,325명
33,550원 21,050원 43,680원 227,004원 115,200원 46,500원 487,020원

▲출처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문 중 서병조 편, 2009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 작성 전선공직자대회기록 1944년

▲사진설명 : 전선공직자대회 사무국이 일본어로 작성한 당시 결의사항, 전선공직자호(군용기) 헌납을 위해 도회의원, 읍회위원 등으로 분류해 할당량을 제시하고 있다.

또 김용주가 참석했던 전선공직자대회 둘째날인 1943년 10월 2일 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공직자 맹서 (公職者 盟誓)”를 특별위원에 위촉해 제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참석자들은 폐회 직전 이 맹서를 제송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했다고 돼 있다. 아래는 당시 제정된 맹서의 전문이다.

一. 우리들 공직자는 천황폐하에게 모든 것은 받들어 바친다.

二. 우리들 공직자는 솔선궁행(率先躬行) 바르고 명확하게 일하려고 한다.

三. 우리들 공직자는 협력일치, 이 성전(聖戰)을 이겨낼 것이다.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이밖에 전선공직자대회에서는 참석자 만장일치의 결의로 두 개의 감사전문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각각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와 일본군에 대한 감사였다. 이 감사전문의 수신처는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해군대신 등이었다.

아래는 감사전문을 발췌한 내용이다.

徵兵制施行感謝決議電文 (징병제시행감사결의전문)

본 대회는 만장일치의 결의로써 오랫동안 대망하고 있던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성의를 표하는 동시에, 어디까지나 이 성과를 擧揚(거양)하는 데 협력할 것을 맹서한다.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황군(皇軍)에 대한 감사결의전문(感謝決議電文)

본 대회는 이에 만장일치의 결의로써 황군의 위훈(偉勳)에 대하여 심심한 감사의 意(뜻)를 표하는 동시에 오등(吾等)은 어디까지나 이 성전(聖戰)을 이겨내기를 맹서한다. (중략)

(▲출처 :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중 서병조 편)

 

김용주는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침략전쟁을 벌이던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할 것과 조선 청년들이 대동아전쟁에 적극 나설 것을 독려하는 광고를 아사히 신문이 조선에 배포하는 ‘남선판’과 ‘중선판’에 게재한 사실이 드러난데 이어, 1943년 전선공직자대회에서도 <전선 공직자호> 4대 헌납 운동에 동참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가 1940년 이후, 즉 일제 강점 말기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사실을 또 다시 보여주는 사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1937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10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벌인 각종 친일행위는 적극적인 전쟁범죄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평가한바 있다.

 

월, 2015/09/2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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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인 해촌 김용주가 일제 말기인 1940년 대, ‘일제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기명 광고를 낸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또 1940년 이후 김용주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친일 단체의 주요 보직을 맡아왔으며, 지속적으로 강도 높은 친일반민족 발언을 한 사실이 당시 공식 문건과 신문 기사 등 문헌을 통해 확인됐다. ‘아버지는 애국자’라고 주장해 왔던 김무성 대표는 새로 발굴된 김용주의 친일 행적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친일 행적이 새롭게 드러났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친일 행적이 새롭게 드러났다.

9월 17일,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동안 사료발굴을 통해 군용기 헌납과 징병을 독려하는 아사히 신문 광고 등 김용주의 친일 행위를 새롭게 입증할 다수의 일제 공문서와 신문 자료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용주가 1920년대와 30년대 중반까지 야학과 신간회 활동 등 민족적 행보를 보인 것은 맞지만 1940년 이후부터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9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새로운 친일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는 9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새로운 친일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

김용주, 일제 말 ‘군용기 헌납’, ‘징병’ 독려 기명 광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는 일제가 벌인 대동아전쟁이 극에 달하던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태평양전쟁 중인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할 것과 조선 청년들이 대동아전쟁에 적극 나설 것을 독려하는 광고를 아사히 신문이 조선에 배포하는 ‘남선판’과 ‘중선판’에 게재했다. 두 광고 모두 김용주 자신의 창씨명인 김전용주(金田龍周)라는 이름을 내건 기명광고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은 “본인이 적극적으로 (대동아)전쟁에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일제에 과시하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 김용주가 일제 말기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기명 광고들.

▲ 김용주가 일제 말기 아사히 신문에 게재한 기명 광고들.

김용주, 일제 징병제 관련해 “자식을 기뻐하며 바쳐라”

김용주는 1943년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해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해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을 우선적 과제로 밝혔다. 김용주는 또 전쟁에 동원되는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고, “귀여운 자식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질 영광”이라 표현 등의 강도 높은 친일 발언을 했다.

▲ 전선공직자대회에 참가한 김용주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 천황의 귀일 등 징병을 독려하는 발언을 했다.

▲ 전선공직자대회에 참가한 김용주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 천황의 귀일 등 징병을 독려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경북도회 의원 40명 가운데 전선공직자대회에 참석한 조선인 의원은 단 두 명으로 기록돼 있다. 바로 경북지역 대표적 친일파인 서병조, 그리고 김용주다.

이밖에 김용주는 여러 친일단체에도 주요 임원으로 참여했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국민총력’과 ‘조선임전보국단’의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았다. 당시 경북도회 의원이던 김용주는 1941년 5월, 국민총력 경북 수산연맹 이사로 선출되고 같은 해 7월, 평의원으로 임명된다.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이기도 했던 그는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상임이사로 선출됐다. 당시 김용주와 함께 조선임전보국단의 경북지부 상임이사로 있던 서병조, 정해붕, 문명기는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결정한 친일파 1,006명에 포함된 인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1937년 이후 해방될 때까지 10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벌인 각종 친일행위는 적극적인 전쟁범죄행위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아래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 씨의 주요 친일 행적을 시기별로 정리한 타임라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 해촌 김용주
    1905.7.29 – 1985.1.27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05. 7. 29.

    경남 함양군 함양면 신관리 출생

  • 1923.

    조선 식산은행 본점 취직

    6개월 만에 포항지점으로 전출. 경북 영일군 포항읍 이주 정착.

    ※ 식산은행 : 1918년 설립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

  • 1924.

    ‘영일청년회’ 지육부장

    독서회 조직 및 노동야학 개설. 이후 교사로 참여

  • 1926. 5. 28.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

    검사분국으로 송치(5.30)됐으나 이틀 만에 방면

    출처 : 시대일보(時代日報) 1926년 6월 3일 2면

  • 1926.

    삼일상회(三一商會, 철도화물운송업) 설립

    “삼일 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뜻에서 붙인 것인데, 일찍이 민족의식에 눈떠 청년운동에 열중했던 나의 심혼을 표시한 그 상호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민족적인 인상을 풍기었다. ”

    출처 : 김용주 회고록 “풍설시대80년” 중

  • 1927. 7. 22.

    신간회 영일지회 정치부 간사

    ※ 신간회(新幹會) :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 독립운동 단체

    출처 : 조선일보(朝鮮日報) 1927년 7월 25일 2면
    중외일보(中外日報) 1927년 7월 27일 4면

  • 1936. 3.

    포항 영흥학교 인계 경영 및 교장 취임

    출처 : 동아일보(東亞日報) 1936년 3월 24일 4면

  • 1936. 9. 20.

    경상북도 포항 읍회 의원(민선) 당선

    출처 : 매일신보 1936년 9월 22일 조간 4면

  • 1937. 5. 10.

    경상북도 도회의원(영일군, 민선)

    1945년 해방때까지 도회 의원 유지

    출처 :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7월 6일
    매일신보 1937년 5월 12일 석간 1면

  • 1940. 2. 23.

    “국체명징관 내에서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 발언 – 12회 경북도희 회의 발언

    김용주 의원, 설치를 고려하는 국체명징관 내에서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릴 것.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 :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정신(皇道情神)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

    출처: 동아일보 1940년 2월 27일 자 석간 7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0. 2. 24.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으므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 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 줄 생각한다.” 발언 – 제12회 경북도회 회의

    김용주씨 (포항) 반도인은 황도정신에서 황국신민으로서 충량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음으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줄 생각한다.

    출처 : 매일신보 1940년 2월 26일(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0. 7. 11.

    김용주 창씨개명

    金龍周(김용주) – 金田龍周(가네다 류슈)

    출처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40년 12월 20일

  • 1940. 11.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 초대받음

    1941년 친일파 김갑순이 발행하는 조선신문사가 발행한 명단 중 김용주 수록 게재
    1941년 9월 일본동맹통신사 발행 “흥아일본건국사”에 명단 중 김용주 수록 게재

    ※ 일본 기원 2600년 축전(紀元二千六百年祝典) : 1940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식, 일본은 전시체제를 맞아 일본의 위대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출처 : 기원 2600년 축전기념 광영록(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念光榮錄) – 조선신문사(朝鮮新聞社), 1941.10, 46쪽(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일본내각관보 1941년 11월 21일 21쪽

  • 1941. 5. 17.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선임

    水産團體도 結合, 翼贊體制를 整備, 慶北聯盟 結成式 擧行(수산단체도 결합, 익찬체제를 정비, 경북연맹 결성식 거행)

    ※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산하 단체

    출처 :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5월 20일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7. 16.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 평의원, 도회의원 자격으로 임명

    1) 總力慶北聯盟, 新道議 網羅 後 最初 常會, 中心論題는 生活新體制(총력경북연맹, 신도의 망라 후 최초 상회, 중심논제는 생활신체제)

    2) 道會議員を評議員に加へ, 慶北, 聯盟役員の常會を開へ(도회의원을 평의원에 가입, 경북, 련맹역원의 상회를 개최)

    ※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지방 조직

    출처
    1)매일신보 1941년 7월 18일 3면
    2)경성일보 1941년 7월 18일 2면

  • 1941. 9.

    대구국체명징관 1천원 헌납, 대구신사 2천원 헌납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 :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정신(皇道情神)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

    출처 : 日本同盟通信社, 1941.9, 330~332쪽
    (皇統[皇紀]二千六百年記念誌)興亞日本建國史 ; 朝鮮銃後奉公錄(황통[황기]2600년기념지) 흥아일본건국사 ; 조선총후봉공록)(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9.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참여

    ※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 일제가 침략전쟁을 진행하면서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조선인 민간조직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참여 주요 인물
    지부장 : 장직상 (중충원 참의)
    이사장 : 신옥(신현구) 중추원 참의
    상임이사 : 서병조(중추원 참의) 문명기(중추원 참의), 정해붕(중추원 참의), 김용주 등

    출처 : 朝鮮臨戰報國團發起人·役員 名簿, “朝鮮臨戰報國團槪要”(조선임전보국단발기인·역원 명부 “조선임전보국단개요”) 27쪽(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10. 8~10.

    친일파 문명기(중추원 참의)와 함께 영덕과 영천 지역에서 개로운동을 독려

    국민개로운동의 취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불노유한무직자(不勞有閑無職者)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전시체제와 개로체제를 확립하도록 되었다. 중추원참의, 도의원 시찰일정은 다음과 같다.

    개로운동을 독려, 중추원참의, 도의들이 선두서
    文明琦一郞·金田龍周 氏, 동행자 森 職組 書記 10월 8일, 10월 10일 영덕·영천 양 군(兩郡)에
    (이하 생략)

    ※ 국민개로운동 :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선인의 노동력동원을 목적으로 조선인의 근로보국을 주장하면서 실시한 운동

    출처 : 매일신보 1941년 10월 7일 경상판 조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12. 7.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임명 및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 발언 제안

    1) 臨戰報國團 慶北支部設立, 結成은 卄九日擧行(임전보국단 경북지부설립, 결성은 29일 거행)

    2) 一死報國을 盟誓, 臨戰報國團 慶北支部 結成式, 七日, 盛大하게 擧行(일사보국을 맹서,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 7일, 성대하게 거행)

    출처
    1)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11월 24일 3면

    2)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 석간 3면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2. 1. 10.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 사업부장 임명

    大邱府民號十機! -臨戰報國團 支部와 協力實現에 邁進(대구부민호 10기! -임전보국단 지부와 협력실현에 매진)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1월 12일 2면

  • 1942. 2. 27.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미국과 영국을 격멸한 군용기 5대 헌납

    기사에는 임전보국단 경북지부의 단체명이 나오지만, 김용주 등 경부지부 간부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임보단서도 활동. 경북서 오기를 헌납

    경북 영일군은 애국기 헌납에 압도적인 성과를 보인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2달 후인 1942년 2월 경북 영일군에서만 총 8대의 군용기가 헌납되었다. 경북지역에서 2월말까지 30대 가량 헌납된 것을 감안하면 일개 군 단위의 실적으로는 놀라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이후 8월말까지 전국에서 헌납된 비행기는 280여대에 달했다. 도청소재재지가 아닌 지방에서 헌납기 명명식이 거행된 곳은 5대 이상의 실적을 올린 함남의 원산과 경북의 영일 단 두 곳이었다.(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2월 27일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2. 3. 11.

    “북지방면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밤낮으로 악전고투를 계속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도민을 대표하여 감사전보를 발송하자”고 제안 – 제15회 경북도회 회의 중

    尨大 豫算을 俎上에, 慶北道會 開幕(第15會), 劈頭 感謝電報 發送을 決議(방대 예산을 조상[도마 위]에, 경북도회 개막(제15회), 벽두 감사전보 발송을 결의)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3월 13일 경상판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9. 8.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뜻을 결의하기 위한 광고를 기명으로 게재

    광고 왼쪽 두 번째 줄 金田龍周 (김용주) 게재

    (廣告)待望의 徵兵制 實施,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半島의 靑少年들이여((광고)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난폭하기 짝이 없는 숙적 미영을 지금이야말로 물리쳐 멸망시키자. 징병제 실시에 대한 반도 동포의 간절한 요망을 드디어 구현했다. 반도 동포도 내지 장병으로 자리매김하여 당당히 대동아전쟁의 전열에 끼게 된 것이다. 우리 반도의 정예여. 일시동인의 천황의 위덕(大御稜威) 아래, 우리 반도의 인재가 빈틈없는 전우애로 미영 격멸의 전선에 서는 날이 온 것이다. 이 기쁨, 이 감사, 시정 30여년 역사에 전례가 없는 대전환이며 영광이다. 지금은 세계 대동란이 한창인데,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내걸고 대동아의 천지에 깊숙이 진군하여 황국의 흥폐를 양 어깨에 짊어진 황군이 숙적 미영 격멸에 혁혁한 전과를 거듭하는 가을. 2천 5백만 반도동포, 특히 젊은 반도청년에 거는 기대가 실로 크다. 일억의 환호와 축복 속에 있는 반도의 젊은이들이여. 궐연히 일어나라! 결전이 자네들을 부른다.”

    출처 :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남선판(南鮮版) 1943년 9월 8일 4면
    아사히신문 중선판(中鮮版) 1943년 9월 8일 4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10. 2.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

    경북도회 의원 40명 가운데 조선인 참석은 2명. 친일파 서병조와 함께 김용주 참석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정신문화를 키워온 신사(神祠)를 건립해 감사의 뜻을 발휘해야 한다”고 발언.

    銃後의 戰列에 總立, 第二日 公職者大會에 滅敵의 熱火漲溢, 各議員들의 熱論(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이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맹렬히 넘치다] 각 의원들의 열론[열띤토론])


    김전용주 (경북도회 의원)씨가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정신문화의 양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 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귀축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출처 :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석간 2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10. 2.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해 징병독려, 천황께 귀일 등 발언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5가지 구체적인 방안 발언, 특히 일본에 강제 징용 될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반도의 부모가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발언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그 구체적 방책으로 다음 5가지 항목을 들고 싶습니다. 첫째, 각 면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신을 공경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면 일본정신의 진수에 철저히 젖어들게 할 수 있습니다…(중략)그러므로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 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여 현세의 신이신 천황께 귀일하는 것입니다.

    출처 : 徵兵制施行感謝 敵米英擊滅 決意宣揚 全鮮公職者大會記錄(징병제시행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 全鮮公職者大會事務局(전선공직자대회사무국) 1944년 1월(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4. 7. 9.

    일제에 전투 비행기 헌납 선전 광고 기명 게재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라는 제목의 비행기 헌납 광고 기명 게재
    왼쪽 두 번째에 김전용주 이름 나옴.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
    시국은 확실히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의 한 가운데로 돌입하고, 더욱이 적은 공군으로써 승패를 결정지으려고 한다. 이때를 맞이하여 우리는 혁혁한 전과의 그늘에서 산화한 고귀한 영령 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적의 맹렬한 공습하에서 묵묵히 (조국)수호에 애쓰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우리 형, 우리 동생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그리고 “좀더 비행기를”이라고 외치는 필사의 요청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 아사히신문 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8월 15일, 김무성 부친 김용주 ‘미화’ 평전 출간돼

김무성 대표 측은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해 지금까지 “부친은 애국자적인 삶을 살았다”며 “부친의 이름이 도용되거나 날조된 것이다”라고 주장해 왔다. 김무성 대표의 홈페이지에 마련된 ‘나의 아버지’라는 코너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해촌 김용주 선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평전이 지난 8월 15일 출판됐다.

▲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평전이 지난 8월 15일 출판됐다.

해방 70년을 맞은 지난 8월 15일에는 김무성 대표 부친 김용주의 평전 <강을 건너는 산>이 출판됐다. 평전이라고 쓰여 있지만 김용주의 친일 의혹과 관련해서는 단 한 줄도 다루고 있지 않다.

김용주 평전 표지에는 ‘광복 70주년 기획, 새로운 역사인물 찾기 ①’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평전 어디에도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나 다음 편 인물, 다음편 출판 예정일 등이 언급되지 않았다. 출판사 측은 “다음 편 인물로 거론되는 분들이 있다”고 밝혔다.

김무성 대표 측은 또 “친일인명사전에 부친이 등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왔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직후 반민특위가 반민족 행위자로 7천 명 정도를 구상했지만,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는 1,006 명밖에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며 “진상규명위에서 지정한 1,006명이 아니라고 친일파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8월 15일 출판된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 8월 15일 출판된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

김무성 대표의 ‘역사 전쟁’

김무성 대표는 수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좌파와의 역사 전쟁’을 외치고 있다. “진보 좌파 세력들이 건국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욕의 역사라고 깎아 내리고 있다” (7월31일, LA 동포간담회)며 “좌파와의 역사 전쟁을 승리고 종식시켜야 된다” (2013년9월4일, 새누리당 근현대사 역사교실)고 주장해 왔다.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긍정적인 사관에 의한 교과서”(2013년9월25일)라고 옹호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역사는 공과 과가 있는데, 이제는 공만 봐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달 친일파 처단을 다룬 영화 <암살> 국회초청 상영회를 주관했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달 친일파 처단을 다룬 영화 <암살> 국회초청 상영회를 주관했다.

뉴스타파는 ‘군용기 헌납’과 ‘징병 독려’ 기명 광고 등 새로 발견된 김용주 씨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 김무성 대표 측에 입장을 서면을 통해 물어봤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 또 직접 찾아가 질의했지만 보좌진들은 기자를 막았고, 김무성 대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취재: 박중석, 김경래, 김새봄
촬영 편집 : 최형석, 김남범, 신승진, 정지성, 윤석민, 박서영
타임라인 구성 : 임종헌, 최미정
자료 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목, 2015/09/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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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걸려있는 집이 있다. 약산 김원봉의 막내 동생인 김학봉 (86살)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이다.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국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선 ‘잊혀진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그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끌며 일제강점기 현상금이 가장 높았을 정도로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해방 후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 잡혀 갖은 수모를 겪었고, 1948년 월북한 탓에 그의 가족들은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김원봉의 9형제 중 4명은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을 당했고, 나머지 형제들도 고문당하는 등 가문이 멸문하다시피 했다.

▲ 약산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1932년 생) 할머니.

▲ 약산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1932년 생) 할머니.

약산의 유일한 생존 혈육인 김학봉 할머니는 지난 2005년 국가보훈처에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의 월북이 문제가 된 것이다.

약산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차정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차정은 해방 후 50년이 되던 해인 지난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는다. 그녀의 항일 독립 운동이 뒤늦게나마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박차정 의사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지 않다.

해방 70주년을 맞은 지난 8월 15일. <목격자들> 제작진은 국립 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서 친일파 김홍량의 묘를 발견했다. 김홍량은 1977년 애국계몽활동을 한 경력이 인정돼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대동아 전쟁 당시 전투기 제작비 10만 원(현재 약 10억 원)을 조선총독부에 헌납한 사실이 드러나는 등 친일행적이 밝혀지며 지난 2011년 서훈이 취소됐다. 김홍량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서훈 취소 4년이 지났지만 김홍량의 유족은 국립현충원에서 이장하지 않고 있다. 김홍량의 아들은 노태우 정권에서 차관까지 지낸 바 있다.

▲ 김홍량, 강영석, 박성행은 독립유공으로 서훈을 받았다가 이후 친일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박탈됐다. 그러나 이들 3명은 여전히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 김홍량, 강영석, 박성행은 독립유공으로 서훈을 받았다가 이후 친일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박탈됐다. 그러나 이들 3명은 여전히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가 친일 행적이 밝혀져 서훈 자격이 박탈된 이는 모두 24명이다. 24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김희선, 박연서, 서춘, 김홍량, 박성행, 강영석, 장응진, 김우현, 김응순, 남천우, 박영희, 최지화, 유재기, 윤익선, 윤치영, 이동락, 이종욱, 이향발, 임용길, 장지연, 차상명, 최준모, 허용호, 정광조

모두 뒤늦게 친일반민족 행위가 드러나 서훈이 박탈됐다. 이들 24명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서훈이 박탈된 이들은 상훈법 제 8조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 35조에 따라 훈장을 반납하는 것은 물론 직전 5년 동안 받은 연금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 물론 국립현충원에서 이장도 해야 한다.

그러나 <목격자들> 취재 결과, 서훈 취소자 24명 중 절반인 12명은 여전히 훈장을 반납하지 않고 있었다. 김희선, 김우현, 김홍량, 남천우, 박성행, 윤익선, 윤치영, 이동락, 이향발, 장지연, 최준모, 허영호 등이다. 이들 유족들은 아직 재판이 계류 중이라는 이유로 훈장 반납을 거부하고 있다.

여전히 국립현충원에 안장 돼 있는 사람도 3명에 이른다. 강영석, 김홍량, 박성행 등이다. 또 서훈이 박탈된 24명의 유족 모두 국가로부터 받았던 유족 연금을 단 한 푼도 돌려주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국가보훈처는 이들에게서 연금을 돌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독립유공자들 중 친일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된 자는 모두 24명. 이들 중 12명은 여전히 훈장을 반납하지 않고 있다.

▲ 독립유공자들 중 친일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된 자는 모두 24명. 이들 중 12명은 여전히 훈장을 반납하지 않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가짜 독립유공자가 애국지사 묘역을 차지하고 떵떵거리는 나라. 진짜 독립운동가는 여전히 설 자리가 없는 현실을 뉴스타파 <목격자들> 카메라가 담았다.


글 구성 : 정재홍
취재작가 : 이우리
연출 : 박정남, 권오정

월, 2015/08/2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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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는 고백합니다

선조는 하나같이 반민족행위를 하였으나
1) 독립운동가 후손 보상을 제안하는 어떤 후손들과,
2) 친일파 재산 환수에 반대하는 어떤 후손들과,
3) 선조 대신 민족에 사과를 건네는 어떤 후손들과,
4) 선조를 애국자로 꾸미려는 어떤 후손들이 있습니다.

2.쇼미더힙합 제작 뒷이야기

MC메타
“힙합이 건들건들 내 하고 싶은 대로 뱉고,
마음에 안 들면 씹으면 되고,
짜증나면 배틀 붙으면 되는 게 다가 아니잖아요.”
.
최삼
“힙합, 그리고 음악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힙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건 이상하죠.”

 

금, 2015/08/2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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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5일.

해방 70년을 맞아 찾아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는 자격 없는 이가 있었다. 애국지사 묘역 196번에 안장된 김홍량이다. 김홍량은 1977년 건국훈장을 받았다가 2011년 친일행적으로 서훈이 취소된다.

witness_01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는 김홍량의 친일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39년 12월 육군지원병훈련소에 환자수송용 자동차 구입비 2,000원을 헌납해 1940년 상훈국이 주는 포장을 받았다. 1940년 6월 황해도 신천경찰서 건축비 1,000원을 헌납해 상훈국이 주는 포장을 받았다. (중략)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황해)으로 참여했으며, 10월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중략) 1942년 1월 ‘대동아전쟁’ 2주년을 기념하여 조선국애국부에 전투기 헌납기금 10만 원을 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이사에 임명되었다.

국가보훈처는 1996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김홍량을 포함해 친일 행적 논란이 있던 독립운동가 24명의 독립유공자 자격을 박탈했다. 서훈이 취소되면 훈장을 반납해야 하고, 직전 5년 동안 받은 연금도 국가에 되돌려줘야 한다. 국립현충원의 묘지도 이장해야 한다.

그러나 뉴스타파 <목격자들>의 취재 결과,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는 3명의 서훈 취소자들이 여전히 안장돼 있었다. 12명은 훈장을 반납하지 않았고, 연금은 단 한 명도 반환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공적보다 친일 행적이 논란이 돼 서훈이 취소된 이들이기에 연금을 회수해야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돌려받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36조의 반환의무 면제 대상이라는 이유를 댔다.

witness_02

해방 이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관련 서훈을 받은 사람은 1만 3,930명 이 가운데 ‘친일 행적’이나 ‘가짜 독립유공자’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지금까지도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국가보훈처가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제기된다.

목, 2015/08/2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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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누가 그들을 용서했는가

“사실 한국에선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 읽을 필요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배울 점은, 이완용 일대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스펙쌓기, 인맥다지기, 시세읽기, 기회잡기 등.”
-역사학자 전우용 (트위터 @histopian)

광복 70년, 대한민국은 왜 아직 ‘민족반역자’가 성공하는 사회일까요?

2.인디고서원

월, 2015/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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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개월 동안 뉴스타파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파 1,006명의 후손 찾기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후손으로 확인된 1,177명을 대상으로 그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친일 후손들이 친일 문제와 선대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가감없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 친일파 후손 1,177명의 학력과 직업, 거주지를 확인해 그들의 삶의 모습과 인생의 궤적을 파악하려 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친일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고,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단초를 찾아 역사적 화해를 시도하고자 했다.

뉴스타파는 1,177명 가운데 모두 350명과 접촉했다. 이메일과 전화, 사무실과 자택 방문을 통해서다. 이 가운데 이메일에 대해 답변을 보내 온 사람이 20 여명, 전화 연락에 응한 사람이 10여 명, 만남에 응한 사람은 10여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만남 자체를 회피했고, 일부는 친일 청산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본인이나 선대의 친일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를 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일제 강점기 하동군수를 지낸 이향녕, 일제의 선전활동에 동원된 ‘국경의 밤’의 시인인 김동환의 3남 김영식,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음성군수를 지낸 이준식의 손자 이윤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이들은 자신과 선대의 친일행적에 대해 공개 사죄를 했다. 해방 후 70년이 되도록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한 사람이 이렇게 적은 것은 사실상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뉴스타파는 친일후손 1,177명과의 만남을 시도하면서 선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솔한 사죄를 통해 역사적 화해의 장에 동참할 의향이 없는지 물었다. 뉴스타파의 요청에 응해서 선대의 친일행적을 카메라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한 후손은 3명이었다. 바로 문효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김경근 목사, 홍영표 의원이다. 비록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용기있는 자기 고백은 우리 사회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 8개월 동안 진행된 뉴스타파의 작업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줬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정치권력의 비호와 친일 세력의 저항으로 인해 친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정의가 부정되고 가치가 전도된, 뒤틀린 역사의 길을 밟아 왔다. 더 이상 정치적인 이유로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작업이 뒷전으로 밀려서는 안 된다.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의 과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금, 2015/08/1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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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3.1 운동으로 폭발한 민심에 놀란 일제는 힘으로만 누르는 무단 통치 대신 회유책을 병행하는 문화통치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조선인들은 ‘나도 노력하면 일본인이 될 수 있다!’는 일제의 기만적 전술에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일제가 친일파를 본격적으로 양성(?)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시기부터입니다.

일부 명망가들 역시 상황 논리에 기대거나 체념하는 방식의 주장을 합니다. 일제는 너무 강하고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독립을 이루자는 이승만의 외교론,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치를 이루자는 이광수의 자치론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전혀 다른 방식의 독립을 주장한 스물한 살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가 다름 아닌 의열단 단장 김원봉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기성세대와 달리 절망적 현실에 주눅 들지 않았던 그의 당당한 태도는 조국의 독립에 목말랐던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수많은 청년들은 그와 함께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은 우선 자신들의 타깃을 명확하게 규정합니다.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노, 매국적
4. 적의 일체 시설물

일단 타깃이 정해지면 깔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준비한 폭탄과 권총, 태극기 그리고 종이 한 장을 품고 홀연히 경성과 동경으로 떠나게 됩니다. 요인 암살과 일제 중요 기관 폭파가 이들의 최종 목표입니다.

1923년 1월 12일. 문화통치로 길들여진 잠잠한 경성 한 복판에 커다란 폭발음이 울려 퍼집니다. 온갖 고문이 가해졌던 종로경찰서에 누군가가 폭탄을 투척한 것입니다.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경찰부장 우마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기자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민심이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일부러 과격한 독립파 사람들이 어찌할 수가 없어서 최후수단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외다. 민심동요는 별로 근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마노는 민심 동요를 우려하여 보도 금지 조치를 내리고 즉시 정복 순사 1,000여 명을 풀어 수색을 지시합니다. 그렇게 10일 만에 경찰이 찾아낸 범인은 32살의 철물점 주인 출신인 의열단원 김상옥이었습니다. 의열단원 중에서도 명 저격수였던 김상옥은 권총을 양손에 쥐고 일본 경찰 400여 명을 상대로 무려 3시간이나 총격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발을 자신에게 겨누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인은 최후까지 권총을 두 손으로 쥐고 바른 손에는 사망한 후에도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걸고 권총을 힘 있게 쥐고 있었다며
여하간 범인은 처음에 발에 총을 맞았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것과 최후까지 총을 쥐고 죽은 것을 보면 매우 대담한 사람이라고 말하더라.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 ‘세군데 총을 맞고도 죽은 후에도 총을 쥐고 있어’)

1926년 12월 28일에는 토지수탈의 중심이었던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이 투척됩니다. 도심 한복판인 을지로, 그것도 백주 대낮에 말이죠. 심지어 뒤쫓는 경찰 7명을 권총으로 사살한 이 역시 의열단원인 나석주였습니다. 그는 자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의열단원들의 맹활약으로 인해 일제는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 잡기에 혈안이 됩니다. 암살과 폭파 자체가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자존감을 잃어가는 당시 조선인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심지어 김구보다 더 높은 현상금이 걸리게 됩니다. 현재 금액으로 치면 약 320억 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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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20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부산경찰서, 동양척식회사, 심지어는 동경의 황궁에까지 폭탄이 투척됩니다. 폭탄을 투척한 이들은 모두가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복 품속에 거사를 위한 무기(총, 폭탄)와 태극기만이 아니라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종이는 단재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작성한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고 싶었던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장의 종이에 6,400자의 글자로 담겨져 있습니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암살, 파괴, 폭동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치(해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단기 4256년 1월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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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의거를 한 자리는 현재 1호선 종각 역 종각지하 쇼핑센터 8번 출구 바로 앞입니다. 그 앞엔 아주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수, 2015/08/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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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가 8개월에 걸쳐 준비한 친일파 후손 찾기 프로젝트 제 2부! 이번 편에서는 친일 후손들의 현재를 보다 본격적으로 알아본다.

1. 친일 후손들의 학벌과 유학 경력

뉴스타파가 작성한 1,177명의 친일 후손 명단, 그 가운데 3분의 1 가량이 이른바 SKY로 불리는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학교 출신인 것으로 학인됐다. 이들은 명문대를 졸업한 뒤 해외 유수의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1,177명 가운데 27%가 유학 경험이 있었다.

2. 친일 후손들의 직업

후손 1,177명의 직업 가운데 가장 많았던 것은 기업인이었다. 기업인들은 376명으로 전체의 32% 정도였다. 특히 그중에서 상장 기업의 대표와 임원, 주주가 3분의 1을 넘었는데, 우리나라 310만여 개 기업 가운데 상장 기업은 단 2천 곳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수치였다. 대표적인 게 삼성 일가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친일파 김신석의 손녀 사위, 이재용 회장은 외증손자다. 금융인도 62명이나 됐다.

기업인 다음으로 많았던 것은 대학교수와 의사다. 대학교수는 191명, 의사는 147명이었다. 친일 후손 여성들의 직업 가운데는 대학교수가 가장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음대 교수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정치인과 공직자, 법조인, 언론인 등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을 움직이는 파워엘리트 그룹은 163명으로 14% 정도였다. 공직자 가운데는 외교관이 특히 많았고, 언론인 가운데는 이른바 조중동 등 족벌 언론과 KBS가 3분의 2를 차지했다.

3. 친일 후손들의 국적 포기, 그 이유는?

뉴스타파는 친일 후손들 가운데 346명이 국적을 포기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 346명에는 뉴스타파가 직업과 신원을 확인한 1,177명 이외의 후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친일파 후손의 국적 포기는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서서히 늘어나다 2000년대 들어 급증하고, 2010년대에는 다시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의 영향과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진행된 정부 차원의 친일 청산 작업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뉴스타파는 이밖에도 친일 후손들의 혼맥을 분석한 결과 35개 가문이 20건의 혼사로 연결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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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5/08/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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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칼럼] 친일파 후손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민주행동 공동대표)

오는 8월15일은 광복(光復)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은 길고도 긴 세월이다. 그 기간에 겨레는 ‘광복’이라는 문자의 뜻 그대로 빛을 되찾고 살았는가? 일제의 무자비한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70년 동안, 1960년의 4월혁명 이후 한 해 남짓, 1998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빼면 60년 가까운 세월의 대부분은 독재와 쿠데타, 지배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로 얼룩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경제·군사·문화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강점당한 민중이 가장 열망한 것은 진정한 독립과 자주였다. 그러나 광복 70년이 되는 현재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미군정에서부터 찾아야 마땅하다. 독일과 프랑스는 ‘친나치행위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는데 미군정은 오히려 친일분자들을 비호하고 중용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한민국은 친일파나 그 후손이 득세해서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대통령 박근혜와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다.

박근혜는 2005년에 나온 <나의 삶 나의 아버지>(동아일보사 펴냄)라는 책에 실린 글(‘아버지의 딸로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부모님을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특히 정치를 시작한 뒤 아버지를 닮았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게 당연하겠지만, 정치인이 된 지금은 그 말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가장 큰 지혜는 삶의 모델을 보고 배워서 얻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중요한 3가지 만남 중 하나가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다.”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인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 박근혜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고 들었다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월 초에 공개한 자료(<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를 보면 박정희는 우리 겨레를 노예로 만든 일제의 수괴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청년 친일분자’였다. 일본육사를 졸업한 그는 만주군에 지원하면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라는 혈서와 함께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인용자)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뼛속까지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찬 이런 박정희조차 박근혜에게는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는 말인가? 박정희의 ‘심복’으로서 한때 비서실장 이후락이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던 강창성(전 보안사령관)은 <중앙일보> 1991년 12월 24일자(‘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이렇게 적었다.

"계엄 선포 한 달쯤 전인가(1971년 10월 17일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박정희의 일본 이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공식 집무실에서 식민지 시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청와대에서 살고 있던 박근혜는 보았을까 못 보았을까?

최근에는 박정희의 둘째 딸 박근령이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친일 만세’를 부르고 나섰다. 그는 7월 4일 공개된 ‘한일관계에 대한 생각을 말하다’라는 인터뷰(일본 포털사이트 <니코니코>)에서 일왕을 ‘천황폐하’라는 극존칭으로 불렀다. 그는 가장 민감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관해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 천황 폐하께서 ‘통석의 염’이라고 이야기했다”면서 “당시 천황께서 애통한 마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그때 일본을 방문한 사람은 대통령 노태우였고 일왕은 아키히토였다. 박근령은 무지의 극치를 보이면서 아버지 못지않게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하며 “아베 총리께서 야스쿠니 참배하는 것을 두고 ‘앞으로 전쟁을 일으켜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공격했다.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의 ‘대동아전쟁’ 합리화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과연 친일파 박정희의 딸다운 발상이다.

집권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은 지난 7월 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릿광대 같은 ‘큰절 외교’로 나라 안팎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친일파 김용주의 아들이라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그 문제를 일찍이 제기했던 <한겨레> 선임기자 김의겸은 그가 미국 방문에서 돌아오기 직전 그 신문 8월 1일자 토요판 커버스토리(‘김무성과 아버지 김용주’)에 “아버지는 천황폐하 찬양… 아들은 미국 장군묘에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김의겸은 2년 전쯤 <한겨레>에 올린 「백년전쟁은 계속되는가」라는 칼럼에서 김무성을 거론하며 “부친인 김용주는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썼다가 김무성한테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를 당했다. 김의겸은 당시 김무성과 적당히 타협하고 ‘반론보도’를 실은 것을 뉘우치면서 이번에 옛 기록을 뒤져 김용주의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김의겸은 한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자 2면 기사에서 김용주의 명백한 친일행적을 발견했다. 김용주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全鮮)공직자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 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

김의겸은 그 대회 사무국이 1944년 1월에 발간한 <징병제 시행 감사 적미영격멸 결의 선양 전선공직자대회 기록>에서 A4용지로 3장이 넘는 김용주의 친일행위를 찾아냈다. 박수를 받으며 등단한 그는 “먼저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외쳤다.

김의겸의 정밀 추적으로 김무성의 아버지 김용주가 명백한 친일파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2014년 6월 김무성이 새누리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을 때 나온 <새누리당 전당대회 특집>은 김용주가 ‘빛나는 애국자’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노동야학 개설’ ‘3·1운동 정신 이어받아 삼일상회 설립’ ‘사재 2만원 던져 사립 영흥교를 신축’ ‘상공번영회 창립’ 등이다. 그런 ‘업적’이 애국이라고 치자. 그러나 일제의 조선 식민지 미화 구호인 ‘내선일체’와 ‘충실한 황국신민’을 부르짖은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입증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김무성과 그의 지지자들은 지난 여러 해 동안 김용주가 친일파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온갖 ‘자료들’을 제시해 왔다.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차라리 김무성이 “아버지는 분명히 친일행위를 했으니 공인인 내가 사과하고 앞으로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면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친일파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 임기를 마칠 때쯤이면 친일파의 아들인 김무성이 19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크다. 추악한 역사의 도돌이표를 주권자인 국민이 언제까지 보고 참아야 하는가?

월, 2015/08/1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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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0년을 맞아 뉴스타파는 처음으로 친일파 후손들을 최대한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대상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확정 발표한 친일인사 1,006명의 후손이다. 특히 일제로부터 후작, 남작을 받은 귀족,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일제 강점기 최고 엘리트의 후손들을 집중적으로 추적했다. 그리고 지난 8개월동안의 작업끝에 뉴스타파는 친일파 후손 명단 1177명을 작성할 수 있었다.

취재팀은 친일파 후손들의 학력과 직은 물론, 거주형태, 주소지를 파악해 친일파 후손들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친일파 후손들에 대한 실증적으로 구체적인 통계분석의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또 뉴스타파는 친일파 후손들과 숱한 만남을 시도했다. 이들이 선대와 친일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친일 청산은 물론 친일 극복과 함께 사회구성원간 화합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 했다.

목, 2015/08/06-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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