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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책 읽기 – 복지국가 편’ 여섯번째 모임 후기 written by 최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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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책 읽기 – 복지국가 편’ 여섯번째 모임 후기 written by 최지희

익명 (미확인) | 수, 2015/06/0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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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30.토.

국가는 잘 사는데 왜 국민은 못 사는가
-도널드 발렛, 제임스 스틸 공저 / 이찬 역

중산층과 생산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부상하는 중국과 인도의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미국 내의 중산층을 파괴하는 정책들이자 그 정책을 만들기 위해 말그대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로비하는 다국적 기업들과 초극소수의 부자들이라는 것을 강력히 어필하는 책이다. 보수적 싱크탱크와 재단들이 부상한 시기와 중산층이 침체된 시기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소름돋는 이야기, 이른바 혁신 사업들로 불리는 사업들이 기존의 일자리들과 고용방식을 마치 구시대의 유물이자 망하는 지름길인 것처럼 갈아엎고 없애왔지만 사실은 그 결과 더 많은 서민들의 숨통을 조여 더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생생히 들려주고 있다. 앞에서 강연을 듣는 듯, 이야기를 듣는 듯 친근하고 위트있는 문체로 써내려간 이 책은, 사례들을 하나하나 읽다보니 어느덧 예정된 12시를 조금 넘겨 강독을 끝낼 수 있었다. 미국에서 십여년간 거주하다 오신 분이 계셔서 토론은 자연스레 미국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수많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이 책을 똑같이 대한민국 버전으로 써도 되겠다. (맞아맞아)

이게 실제로 미국에서 맞는 이야기인가?

큰 틀에서 맞는 이야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 401(K)제도는 일종의 저축처럼 임금에서 돈을 넣고, 사측에서도 매칭펀드 식으로 넣어주는 방식. 그래서 한 달에 50~100만원 정도가 나오긴 한다. 그리고 은퇴 후 노후엔 시니어 아파트라는 곳이 있다. 여기 렌트는 80~100만불 정도 되는데, 1/3만 내면 나머지는 정부에서 지원해준다. 식료품은 푸드스탬프 제도로 해결 가능. 그렇다면 의식주 중 식,주는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고 한달에 20만원 정도의 용돈으로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생활은 가능하다.

(이부분에서 나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한국에서 중산층이 무너졌다는 것은 노후에 정말로 생계가 막막한 수준의 붕괴인데, 미국의 중산층이 다 무너졌대서 엄청 심각하게 이 책을 다 읽고났더니 그래도 미국은 망한게 의식주 중 식,주는 이정도로 보장된 수준이라니!(그렇다고 문제의 경중이 더하고 덜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님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나라 중산층들은 진짜 어느 정도로 망한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들었다. 복지병 논쟁을 들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의 ‘복’자도 꺼내지 않은 상태인데 지금 우리가 있는 선이나 비교선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미국은 연방이 사회보장에서 큰 영향력이 없지 않나?
미국에는 카운티(county)가 존재한다. 카운티에 여러 city들이 존재.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주는 50여개의 카운티가 존재하고 지역의 카운티들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래서 예컨대 오바마케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연방이 연방의 몫인 안보, 외교 등을 나쁘게 하는 건 가능한데 교육, 복지 등을 좋게 하는 건 힘든 것 같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나라는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면 보다 더 쉽게, 더 많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좀 더 크다고 본다.

모든 사람이 정치에 목숨 걸지 않아도 되는 문화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정치에 참여, 노출 되어있다.

독서 모임 후, 함께 밥을 먹으며 이번 모임은 책과 실제 삶의 경험이 잘 어우러진 ‘반반치킨’ 같은 강의라는 평을 주셨다. 전날의 엄청난 삼겹살 파티 불금에 이어 독서모임 후 같이 점심 먹으면서 해장까지 함께한 것을 보면 금-토 환상의 콜라보레이션, ‘반반무많이’와 같은 날이 아니었나 평해본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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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위한 민주주의 강좌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열립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노동이 실제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공부해봅니다.

현재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 노동 있는 민주주의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기간 : 2017년 10월25일~12월20일, 수요일 저녁 7시

(세부 일정 포스터 참조)

장소 : 정치발전소(마포구 신촌로14 황해빌딩 3층)

수강료 : 10만원(비회원 15만원)

* 우리은행 1005-203-267406 사단법인정치발전소

수강신청 : bit.ly/노동있는민주주의

문의 : [email protected] / 카카오톡 @정치발전소

 

“노동은 모든 사회 구조물의 기반을 이루는 힘이다. 경제성장도 시장도 재벌 대기업도,

그리고 민주 정부도 모두 노동에 기반을 두고 서있다. 노동 없는 경제, 노동 없는 시장으로

달려 나가는 한국 사회의 ‘바닥으로의 질주’가 계속 된다면, 민주주의도 경제도 유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 자체를 잘 제도화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서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에도 최대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그것은 사회 발전의 성과물을 좀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공존을 위한

사회적 윤리를 창출하는 공동체 위에 시장과 경제를 올려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핵심에 노동이 위치해 있다.”

– 최장집,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中

 

수, 2017/10/1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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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내가 속해 있는 정치발전소의 ‘독일 민주주의 기행 프로그램’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9월 24일 치러진 독일 총선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계기와 맞물려 있던 탓에 독일 정치의 소용돌이를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주로 언론에 의존해 다른 나라의 정치에 관한 정보와 해석을 접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해외토픽 수준의 단편적인 정보이기 때문에 그 나라 정치의 움직임이나 정당, 정치인, 노동조합 등 주요 정치행위자들의 실질적인 고민을 알기는 어렵다.
물론 현장에 있었다고는 하나, 일주일여의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의 정치를 지켜본 경험과 느낌으로 독일 정치 일반을 말하는 것은 눈감고 코끼리 가죽의 어떤 언저리를 만지는 일처럼 한계가 크다. 다만, 이번 방문이 총선 전후의 긴박한 기간 동안 이루어졌음에도 다행히 주요 정당 및 독일 노총(DGB)과 금속노조(IG Metall) 등의 주요 관계자, 독일 정치 분석가 등을 인터뷰하고 독일 정치에 대한 그들의 고민과 전망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은 성과였다. 또 총선과 관련된 몇몇 정당의 선거행사에도 직접 참석해 현장의 분위기를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이지만 독일 민주주의라는 외부의 창을 통해, 익숙하기 때문에 둔감해지기 마련인 한국 정치의 몇몇 문제를 객관적 거리감을 갖고 낯설게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이 준 가장 큰 소득이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은 독일 정치에 대한 어떤 분석을 위한 글이 아니다. 독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바라보면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지점을 필자의 시각에 따라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선거”  
우리에게는 총선하면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 우리의 선거는 이렇다. 요란한 유세차와 율동패들, 하루 종일 지속되는 선거운동원들의 구호와 인사, 쏟아지는 명함과 선거 공보물, 언론에 나기 위해 쥐어짜듯 연출된 행보에 주력하는 정치인….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거리에서 밟히는 것은 전부 선거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한 과잉된 전쟁을 치룬다. 공통점은 이 모든 행위가 불특정 다수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사실 이런 일에 우리는 별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대체로 이런 것은 ‘선거니까 당연한 일’로 수용되었고 이제 관성화 되어 있다. 선거운동원 숫자부터 선거운동 방법 등 선거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관료적 통제 대상으로 삼아 정치활동 자유를 크게 옥죄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 선거와 정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선거는 어떨까. 약간의 설렘과 호기심을 안고 독일 총선일을 나흘 앞둔 지난 9월 20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의 주요 거리를 둘러보며 느낀 것은 “독일이 지금 선거 중인가”하는 의아함이었다.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차분했다. 거리 어느 곳에서도 소란스런 가두 캠페인이나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선거운동원을 만날 수 없었다. 유세차도, 길거리에 뿌려진 명함이나 홍보물도 없었다. TV에서도 정치인이 연예인처럼 분해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현란한 미디어 선거의 풍경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방인에게 독일이 선거 중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곤 거리 곳곳에 부착된 선거 포스터(Wahlplakat) 정도였다. 이마저도 거리를 오가는 베를린 시민들의 눈길을 붙잡는 것 같지 않았다.

▲ 베를린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선거용 포스터 ⓒ(사)정치발전소

선거일을 하루 이틀 남기고 베를린 시내에서 진행된 몇몇 정당 집회(우리는 마틴 슐츠 사민당 총리 후보가 참석하는 사민당 집회와 좌파당의 집회를 참관했다)도 우리의 광화문 선거 유세처럼 선거 막판 세과시를 목적으로 대규모로 동원된 집회는 아니었다. 총리 후보가 직접 참석한 집회조차 많이 잡아도 500명 미만의 사람들이 참석한 규모로, 장황하지 않고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굉장한 이벤트나 대중적인 명망가, 스타들을 불러 올려 막연하게 시민들을 불러모으는 것이 아니라, 당원과 지지자들이 스스로의 확신을 공유하고 표현하는 성격이 커 보였다.

▲ 9월 22일 베를린 도심에서 열린 사민당 총리 후보 마틴 슐츠 유세 ⓒ(사)정치발전소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한국에서 들었던 대로 이번 독일 선거가 “쟁점 없는 맥 빠진 선거”라거나 메르켈의 기민당 승리가 예견되는 “뻔한 선거”의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한 독일교포는 ‘자신이 경험해 온 독일 선거는 늘 이렇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사람들은 정치를 매우 중요하고, 진지하게 받아드린다”며 “직업‧계층‧연령‧취미 등 다양한 필요에 따른 풍부한 시민 결사체들이 있고, 지역의 작은 커뮤니티까지 잘 정비된 정당조직과 당원들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 활동과 대화는 일상적이며 참여 역시 조직적”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과 같은 보여주기식 선거운동은 여기서는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라고 했다. 일상 속에서 접하는 정당과 정치, 그리고 선거와 선거 사이에 정당이 보여준 활동에 대한 집합적 평가들을 통해 자신들의 선호를 결정한다는 설명이다. ‘이익 있는 곳에 결사 있고, 결사 있는 곳에 참여 있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다원주의적 원리가 독일 사회 전반에 잘 뿌리 내려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진지함은 각 정당이 선거공약(Regierungsprogramm)을 제시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기민/기사연합은 기민련과 기사련의 정치 협약의 형태로 선거 강령을 제시했으며, 사민당은 당대회(Parteitag)라는 당적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선거 강령을 확정했다.(주1)
선거공약이 선거를 앞두고 캠프 주변 몇몇 전문가들에 의해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원들과 당 주변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조직적인 협상, 토론, 동의과정을 통해 확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선거일이 임박해 구도를 흔들어 보기 위해 캠프가 없던 공약을 급조하는 일은 독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 메르켈 총리(CDU 대표)와 제호퍼 CSU 대표가 회담을 마친 후, 기민/기사연합의 선거강령 “Wohlstand und Sicherheit für alle(모두를 위한 번영과 안보)”을 발표하고 있다.(2017.7.3.) ⓒ CDU(www.cdu.de)

선거운동 역시 정당의 조직력에 기초해 기초 지역 단위부터 꾸준하고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민/기사연합의 청년조직인 JU(JUNGEN UNION, JU는 유럽최대의 청년 정치조직이다)의 관계자는 이번 총선을 맞아 지난 8개월간 독일 전역에서 100만 호에 달하는 가구별 방문을 통해 선거운동 활동을 지원해왔다고 밝혔다. 그들은 누적된 호별 방문을 토대로 지역별 지지자의 분포를 DB화하는 일도 함께 진행했으며, 이를 해당 지역의 지역당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호별 방문은 한국에서는 불법이라고 하자 JU관계자는 꽤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선거운동에 제약이 없다”며 그것은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기본권적 문제”라고 강조했다. 실제 우리 선거법은 선거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규제하고 금지하는 반면, 독일은 선거법에 선거운동과 관련된 금지 규정이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선거운동에 관한 사항은 각 지역별로 정당들의 자율적 협의에 맡겨져 있다.

▲ JU가 진행한 가구별 방문 선거운동의 모토. “Der Walhkampf steht Vor der Tür(선거운동은 문 앞에 서 있다)” ⓒ www.cdu.de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JU는 기민/기사연합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위성 조직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적 의사결정, 재정, 운영 등 모든 면에서 정당(기민/기사연합)으로부터 독립된 청년들의 독자적인 조직이라는 점 역시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단순 실무자나 율동부대, 또는 선거의 얼굴마담 격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차원의 정치활동과 선거활동의 전면에서 스스로의 조직에 기초해 자율적이며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청년 스스로 기초부터 정치활동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정당의 청년조직이 처해 있는 현실에 비춰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당원과 지지자가 주인공인 선거파티(Wahlparty)”
그렇다고 독일의 선거가 열정 없는 조용한 선거는 아니다. 현장의 뜨거운 분위기가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선거가 끝난 직후에 개최된 정당의 선거파티(Wahlparty)이다. 선거파티는 말자체가 생소하기도 했거니와 그 내용에서도 선거나 정당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된 인상과 현저하게 달랐다. 선거파티란 간단히 말하면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모여 선거의 종료를 축하하는 행사이다. 우리와 비교한다면 방송사 출구조사 시청 행사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중앙당 강당의 단상을 차지한 카메라 앞에 서열별로 줄지어 앉은 당 지도부가 출구조사 결과에 따라 환호나 박수 등을 연출 한다. 방송사 요청에 따라 사전 예행연습까지 한다. 출구조사 시청은 선거 마지막을 장식하는 빠질 수 없는 이벤트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 행사의 주인공은 당 지도부와 방송사이라는 점이다.
녹색당(Bundnis`90/Die Gruenen)의 선거파티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총선일 저녁, 베를린의 칼-맑스가(Karl-Marx Strasse) 인근 한 강당에서 개최된 녹색당의 메인 선거파티에 초청받았다. 우리 일행은 방송사 첫 예측조사가 발표되기 한시간 쯤 전에 현장에 도착했다. 행사장 안과 밖은 이미 수 시간 전부터 몰려든 당원, 지지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부터 평범한 노동자풍의 중년, 개성 넘치는 청장년과 노인들, 성소수자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들었다. 독일 녹색당 관계자는 선거파티장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과거 양조장이었던 홀을 간단하게 손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눈길을 끈 것은 공간의 구성이었다. 강당 어디에도 당 지도부를 위한 특별한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강당 옆에는 바(bar)가 설치되어 있어서 누구나 맥주와 와인 등 간단한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당 지도부 전면의 상석을 차지했을 카메라를 위한 공간은 강당 뒤편에, 기자들을 위한 공간은 2층 객석으로 구분되어 배치됐다. 강당의 메인 공간을 가득 메운 것은 당원과 지지자였다. 빽빽하게 들어선 강당 한 가운데, 마이크가 있는 좁은 단상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선거 종료와 함께 방송사의 첫 번째 예측조사(Hochrechnung)가 발표되자 사회자는 당의 공동 총리 후보인 카트린 괴링-에카르트(Katrin Göring-Eckardt)와 젬 외즈데미르(Cem Özdemir)를 호명했다. 당원들 속에 묻혀 있다 단상에 오르는 두 당 대표의 손에는 참모가 써준 연설문이 아니라 바로 직전까지 당원들과 함께 마시던 음료가 들려 있는 것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당원들을 한껏 고무시킨 두 공동 후보의 연설이 끝난 후 곧 그들은 또 다시 당원들 속으로 사라졌다. 인터뷰를 위해 당의 주요 인사를 찾아 이리저리 방송사 카메라와 아나운서들이 군중 속을 헤집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이방인의 눈엔 서로 격려하고 또 긴 선거운동의 노고를 나누는 그 자리에 운집한 사람들 모두가 당원이고, 또 한편으론 모두다 주요 인사처럼 보였다. 말그대로 당원들을 위한 파티였고,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 녹색당의 선거파티 장면. 선거파티에 참석한 당원들 속에서 연설하는 녹색당 총리 후보인 카트린 괴링-에카르트와 젬 외즈데미르가 보인다. ⓒ (사)정치발전소

예년에 비해 높았다고 하는 우리의 지난 20대 총선의 투표율은 58%였다. 우리는 절반을 조금 넘는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끌고 오기 위해 정당들은 선거 때가 되면 이름을 바꾸고, 실천의 뿌리나 축적된 노력 없는 공약들이 전략이라는 거창한 말로 대중에게 제시된다. 사나운 선거운동으로 거의 나라 전체가 내전을 치른다. 사회적 대표성이 취약한 정당이 만들어내는  “시끄럽지만 약한 선거”라 할 수 있다. 이번 독일 총선의 투표율 잠정치는 76.2%다.(주2) 2013년 총선에 비해 4.6% 증가했다고 한다. 누가 그 대상인지 알 수 없는 현란한 선거캠페인도, 이벤트도 없었다. 또한 이번 선거는 쟁점 없는 뻔한 선거라는 평가가 선거 직전까지 독일 안팎의 일반적 전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독일 유권자가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했다.
선거결과 5% 진입장벽을 넘어 독일 의회(Bundestag)에 진입한 정당의 수도 지난 총선의 4개(CDU/CSU, SPD, LINKE, GRUENEN)에서 6개 정당(CDU/CSU, SPD, LINKE, GRUENEN, FDP, AfD)으로 늘어났다. 물론 이 가운데는 극우정당인 AfD도 포함되어 있지만(AfD 문제는 3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더 많은 독일 시민들이 자신들의 더 많은 정치적 대표들을 의회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영국 등의 사례에서처럼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상황에서 여전히 활력 있고, 강력하며, 안정되게 작동하는 독일의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보는 것은 또 다른 감회이기도 했다. 강한 정당과 잘 조직된 사회에 의해 뒷받침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선거”, 이번 독일 선거를 보며 느낀 독일 민주정치의 힘이었다.

▲ 새로운 연방의원들이 자리잡게 될 연방의회 본회의장. ⓒ (사)정치발전소

주1)
기민당의 선거강령 결정과정과 내용은 다음의 CDU 보도자료 참조. https://www.cdu.de/artikel/regierungsprogramm-wohlstand-und-sicherheit-fuer-alle,
사민당의 선거강령 확정과정은 다음의 언론보도 참조. 사민당은 6월 25일 개최된 도르트문트 당대회를 통해 빽빽하게 정리된 116쪽에 달하는 선거강령을 확정했다. http://www.spiegel.de/politik/deutschland/spd-beschliesst-wahlprogramm-auf-parteitag-in-dortmund-einstimmig-a-1154172.html
주2)
독일에서는 선거 개표는 수개표로 진행하고 집계만 전자식으로 하기 때문에 검표까지 마치고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약 3주가 소요된다고 한다.

[email protected]
목, 2017/10/1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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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나라를 복수정당제의 허용 여부로 구분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이해 당사자들에게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 역시 민주주의의 기초 요건이다. 입법부가 아닌 대통령의 포고령이나 행정명령으로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면 그 체제를 권위주의라고 하지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경쟁하는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 의회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요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기능을 최소화하는 대신 민간 자율에 맡기라는 신자유주의의 반정치 담론만큼이나, 정당과 의회 및 이해당사자들의 역할을 냉소하면서 일반 시민이 직접 개헌하고 입법하고 정책을 만들고 부적격 공직자도 쫓아내도록 하자는 직접민주주의론 역시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촛불 집회를 직접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직접민주주의 체제라면 촛불 집회는 허용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물론 합법적으로 뽑힌 정부에 대해 비판과 반대를 조직할 자유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 기본권이다. 공론 조사로 대표되는 숙의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참여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안되고 발전된 대의민주주의 프로젝트의 하나다.

숙의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직접민주주의로 보는 것을 “난센스”라고 일축한다. 참여자들의 숙의 능력이 그 결과를 좌우한다는 점에서 다소 엘리트 편향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숙의민주주의의 한계이기도 하다. 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을 직접민주주의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국민투표식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 혹은 우파 포퓰리즘(right-wing populism)으로 부른다.

최근의 사례는 유럽의 극우 정당들인데, 이번 독일 총선에서 제3당으로 올라선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내건 슬로건,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이 대표적이다. 대의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라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간접민주주의는 정치 이론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일종의 통속어다. 이 말이 대대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2월 15일에 실시된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였다. 당시 야당과 재야 세력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확대되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 찬반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헌법학자들을 동원해 ‘간접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라는 이상한 유형론을 펼치게 했다.

과거든 현재든 직접민주주의론자들이 확고하게 추구했던 이상은 공적 사안을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총회에서 결정하는 것이었다. 9일에 한 번씩 민회를 개최했던 고대 아테네가 대표적이다. 시민 총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단과 조직, 결사는 인정되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의 경우 민회 밖에서의 그 어떤 집단 행위도 허용되지 않았다. 장자크 루소를 추종했던 프랑스혁명의 주도 세력들 역시 시민의 전체 의지를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정당은 물론 이익 단체의 결사를 법으로 막았다.

시민 총회에서 결정된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들 역시 독립된 행정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관료제는 없었으며 시민이 번갈아 행정관·평의원·배심원 역할을 맡았다. 아테네에서는 추첨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시민을 뽑았다. 선거로 동료 시민의 지지를 동원해 대표가 되는 것 역시 권력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같은 공직을 두 번 할 수 없었고, 임기는 1년 이하로 짧았다. 사회 규모의 확대는 최대한 억제되었다. 규모의 증가는 기능 분화와 전문화를 낳고, 그것은 곧 소수의 전문가 집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정치 참여는 의무였다. 아테네의 경우 참여가 법으로 강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참여하지 않는 시민은 비난받았다. ‘바보 멍청이’란 뜻의 영어 ‘idiot’는 고대 그리스어 ‘idi ̄ot ̄es’에서 유래한 말로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는 시민을 가리켰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제도와 원리를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직접민주주의가 해당 시기의 역사적 제약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현실적 최선을 추구한 실험인 것은 맞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이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일 때가 많다. 지금은 지금의 조건에 맞는 민주주의 발전론이 필요하다.

박상훈 정치학자 정치발전소 학교장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1024/86916628/1#csidxcfc3fd8be35f8ff9b8c185d8e2eba2a

화, 2017/10/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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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10월 살림살이 내역입니다.

 

2017년 10월 수입지출 내역

 

 

수, 2017/11/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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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발전소 9월 살림살이 내역입니다.

2017년 9월 수입지출 내역

수, 2017/11/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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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총선 전 이제는 바꿔야 할 선거제도>

내일 오후2시에 국회에서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5당 국회의원들과 정치개혁공동행동,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정치개혁특위가 공동주최하는 토론회가 열립니다. 선거법 피해 사례를 통해 본 선거제도 개혁방안을 논의하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화, 2018/07/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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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부인(否認)과 복지국가의 미래

 

김진석 l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최후의 만찬이 있던 날 밤의 장면이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Quo Vadis, Domine?)”라는 수제자의 물음에 예수는 “지금은 따라오기 힘들겠지만 나중에 날 따라오게 될거다.”라는 알 듯 말 듯한 대답을 남긴 채 떠난다. 예수의 이 말을 들은 그 수제자는 “내 목숨이라도 내놓고” 당신을 따르겠노라고 큰소리치며 따라나선다. 예수는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그 제자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을 남긴다.

 

한동안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의 완전체 실현을 목전에 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다양한 복지정책 관련 논의들이 정국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상급식으로 촉발된 보편적 복지정책의 논의는 무상보육을 거쳐 무상의료로까지 확산되었고, 반값 등록금 등 교육의제에까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흐름은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에 정점을 찍은 바 있다. 다른 모든 것을 걸고라도 복지국가의 미래를 앞당기고야 말겠다는 그 화려한 약속들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가 기억하기에 이미 세 번의 커다란 부인(否認)이 있었다.

 

가장 먼저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약속이 일찌감치 깨졌다. 지금은 기초연금이라 불리우는 소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20만원 지급’을 약속했던 기초노령연금이 어느덧 많은 것을 묻고 따져서 겨우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지급한 20만원을 기초생활보장수급대상 노인에게는 ‘줬다 뺏는’ 천덕꾸러기 기초연금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노인빈곤의 문제는 OECD 비교국가들 중에서 여전히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육사업과 같은 전국단위 사업은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게 맞다”는 무상보육 중앙정부 지원 약속 또한 번번이 깨져나가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안을 세울 때마다 보육예산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은 소위 보편적 무상보육이 우리나라 역사에 자리 잡은 이래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사이의 보육예산 줄다리기 싸움의 와중에 엉뚱하게도 무상급식으로 불똥이 튀어 애꿎은 경남의 아이들과 부모들만 울상을 짓게 되고 말았다.

 

2014년까지 국가장학금 확충을 통해 반값등록금을 실현하겠다던 약속이 다음이다. 소득기준 1-2분위의 저소득 출신 학생의 경우 대학등록금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지금 현재 국가장학금에 적용되는 상한금액은 주요 사립대학의 경우 등록금 대비 겨우 절반 수준에 미치고 있으며 국공립대학의 등록금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가뜩이나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 청년들은 대학졸업장과 함께 빚독촉장을 함께 받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허언이 되어버린 이와 같은 약속들은 사실상 하나의 커다란 약속의 틀 안에 갇혀있는 개별정책들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증세없는 복지확대’라는 또 하나의 약속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에 해당하며, 개념이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부질없는 파기가 예정되어 있는 그런 약속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현실성 없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소중한 정책과 제도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판국이다.

 

공적연금체계 개혁안 마련을 위한 지난 몇 달 동안의 사회적 합의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바와 같이 복지의 확대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비용은 세금이 되었든, 보험료가 되었든 결국 시민과 기업을 포함한 전체 사회구성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다. 복지의 확대를 위해 추가적인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추가적 비용을 결국 시민과 기업이 부담하게 될 것이라는 이 평범한 사실을 부인하는 데에서부터 일이 꼬여나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노인빈곤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선별적 기초연금에서 보편적 기초연금으로의 개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감당해야 할 몫인 것이다. 국가의 미래가 달려있는 저출산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의 아이들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돌보는 데에 공공이 의미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정책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양질의 보육을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요건들, 즉 보육을 위한 부모부담의 최소화, 양질의 국공립어린이집 증대, 교사의 신분보장과 처우개선 등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선제적인 투자가 필요하며 그 투자비용은 궁극적으로 중앙정부가 마련해야 할 몫인 것이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보편적인 고등교육 기회의 보장은 유의미한 정책적 수단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부모와 당사자 등 개인의 주머니로부터 지출되는 교육비 부담을 줄여줘야 하고, 이는 결국 공공 차원의 추가적인 비용부담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대단한 과학적 지식과 논리적 추론의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인 것이다. 이렇듯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의 집행을 위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과 이에 대한 시민과 기업의 추가부담 필요성을 정부와 대통령이 나서서 거부하는 순간 보편적 기초연금으로의 전환이든, 공공책임보육이든, 반값 등록금과 같은 제도와 정책들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은 ‘안(案)’이 되고 사회적으로 부인당하는 것이다.

 

‘증세없는 복지확대’라는 모순적 원칙에 비추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영구적인 ‘안(案)’으로만 남겨져있거나 이미 용도 폐기되어버린 수많은 복지제도와 정책들이 복원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은 없는 것인가? 다시 보편적 기초연금‘안’을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노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처참하기조차 한 노인빈곤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로서 보편적 기초연금제도의 필요성과 그 제도적 효과성에 대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제도의 도입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기반으로 제도도입의 전제조건인 재원마련방안을 도출해내야 한다. 이와 같은 복지재정 마련방안이란 다름 아닌 시민과 기업의 합리적 추가부담 방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부자증세가 되었든, 보편적 증세가 되었든, 사회복지세의 도입이나 심지어 간접세의 상향조정이 되었든, 사회보험부담률의 증가가 되었든, 이와 같은 복지재정마련방안의 시작은 바로 제도도입의 필요성과 추가적인 비용부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합의의 도출과정에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음은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다.

 

앞서 언급한 그 예수의 수제자는 세 번 부인한 후에 잘못을 뉘우치고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로 발길을 돌렸다. 세 번 이상의 부인을 경험한 지금,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수, 2015/06/1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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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복지국가를 말하다

 

강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교수)

정리 : 이경민 사회복지위원회 간사

 

노르웨이에서 7월은 집단 휴가의 달. 필수기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아니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약 5주의 휴가를 즐긴다고 하는데, 일주일 남짓의 여름휴가도 눈치보고 사용하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면 참으로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노르웨이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르길래 ‘한 달 휴가’가 가능한 것일까? 환상을 품을 수 밖에 없는 북유럽국가,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다음은 7/30일 참여연대 느티나무 아카데미에서 진행되었던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들어가며

 

한국에서 북유럽 사회에 대한 동경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과거 개화기 인사들의 눈에 비친 유럽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라의 규모가 작음에도 독립을 지킬만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문명 수준도 높았는데 이와같은 북유럽 국가의 모습이 조선인에게 완벽한 나라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이후 공산주의가 몰락하면서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동구권에서 실현 가능한 지향 모델을 찾지 못하였고, 북유럽 국가의 등장으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식인들은 북유럽사민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북유럽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수준으로 한국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앞서 얘기한 휴가뿐만 아니라, 노동시간도 큰 차이가 난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평균 2100시간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3000시간이었고 그 당시 여공들은 주당 80시간 정도 일을 했다. 반면 노르웨이의 노동시간은 연간 1350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북유럽 사회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향으로 여기는 기저에는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북유럽 사회에서 의료와 교육은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다. 의료 같은 경우, 한국은 건강보험이 있어도 보장성이 약 55%밖에 되지 않으며 공공병원은 병상기준 90%이고 대부분은 민간병원이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반대로 민간병원이 10%정도이며 대부분 공공병원이다. 또한 약간의 수수료를 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의료는 무상이다. 만약 국내에서 치료할 수 없어 외국에서 치료받는 경우에도 국가가 치료비를 지불한다.

 

교육의 경우 대학의 박사과정까지 무상이다.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월급이 지급되는데 이는 준공무원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노르웨이는 대학입시가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대입입시를 위해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노르웨이 교육수준이 뒤처지지는 않는다. 교육과정의 난이도는 한국보다 낮을지 모르나 대학진학률은 전문대학까지 포함하면 60% 정도이다. 무엇보다 노르웨이는 대학이 평준화가 되어 있어 명문대학이라는 개념이 없다. 또한 자국민이 외국에 유학 갈 때, 장학금을 주고 장기상황으로 유학비까지 주고 있다.

 

한국은 준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이며 이런나라에서는 초과노동, 과도한 경쟁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북유럽 사회와 같은 복지국가의 모습을 동경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자본주이적 세계에서의 국가 순위가 다르고 복지제도의 기반이 되는 소득의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보다 4배 가량 높다. 결국 북유럽 사회는 부의 재분배가 잘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높은 소득 수준으로 자연스레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북유럽사회는 자본주의와 다른 체계인가?

 

북유럽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인가? 그렇다.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자본시장이 있기에 분명한 자본주의 국가로 수정자본주의, 국가 주도자본주의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국가주도자본주의사회는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개발정책도 이에 해당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북유럽 사회는 그 주도 방향이 복지국가였던 반면 한국과 같은 주변부 국가는 성장중심 자본주의국가였던 것이다.

 

북유럽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경우 국유기업이 많지만 개인이 주식을 소유한 형태의 기업도 있다. 노르웨이에 5대 상장사가 원래 국유기업이었으나 2000년대 부분적으로 사유화 되어가고 있다. 주택, 부동산 시장도 전체 주택의 80% 이상이 사유주택이다. 대부분의 개인들이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고 영구임대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주택가격은 계속 상승 중에 있는데 최근 20여 년 동안 4배가 상승했다. 여기서도 노동은 상품이다. 노동자를 해고해야 한다면 할 수 있다. 다만 한국과 다른 점은 한국에서 해고는 살인일지 모르나 북유럽사회에서는 해고를 특별히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해고를 할 시, 노조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해고 이후에도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실업수당 등의 제도가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제도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르웨이가 석유가 많아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조세정책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국고는 소득세, 재산제, 부가가치세 등 세금으로 구성되는데, 북유럽사회는 소득세가 한국보다 높다. 반면 법인세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 아니다. 일본 20-30%, 독일 29%, 노르웨이는 25-26%정도이다. 노르웨이 소득세는 최고세율이 60%인데 최근 46%까지 떨어졌고 전문직은 대략 45~55%정도이다. 즉 법인세는 상대적으로 낮고 소득세는 높은 편으로 재분배 시스템이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표준 법인세가 22%정도인데, 실제 삼성이나 LG같은 대기업의 법인세는 6~7%이다. 한국은 법인세나 소득세 모두 낮은 편이다. 다시말해 노르웨이가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세금 덕분이다.

 

북유럽사회에서 자본축적이 어렵지 않다. 이익률이 높지는 않으나 보장성이 높고 내수기반이 튼튼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실질 소득이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구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재분배 비율을 살펴보면 스웨덴, 노르웨이는 45~46% 이고, 한국은 25%로 세금을 통한 재분배 비율에서 2배의 차이가 난다.

 

이처럼 자본주의 현태가 정치적인 형태로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높은 수준의 재분배가 가능한 것은 왜인가?

 

바로 조직화된 노조의 힘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노조 조직률은 53%로 9%에 그치는 한국의 노조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노조 조직률은 프랑스 10%, 유럽평균 30%, 스웨덴 및 덴마크 등은 70% 안팎이다. 노조를 조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노르웨이는 중앙노총과 경총 간에 임금인상률, 노동조건, 복지 등에 대한 내용의 합의를 보는 중앙임단협의를 한다. 1935년 중앙임단협의를 시작했고 매년 노총과 경총사이의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의 내용은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장 높은 조직률을 보이는 조직은 금속노조, 은행, 교사 등으로 공무원의 경우 100%의 조직률을 보인다. 반면 가장 낮은 조직률을 보이는 직종은 서비스업이다. 조직률이 높은 노조가 조직률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노조의 임금 협상을 도와줌으로써 보다 높은 임금 체결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고 중앙노총에 모든 노조가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 고지식 노동자(연구자, 군장교, 목사 등)들은 중앙 노총에 가입하지 않고 보다 작은 노총에 가입한다. 한국과 크게 다른 점은 경찰이나 목사도 노조를 결성한다는 것이다.

 

튼튼한 내수시장, 노조의 높은 조직률, 사민당의 높은 지지율 등 이 외에도 북유럽 사회가 복지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세계대공황, 공산주의 체제의 위협 등이 있다. 역사적인 맥락이 같지 않은 한국의 경우 북유럽사회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핵심은 노동운동이다.

 

진보의 핵심운동은 노동운동이어야 한다. 북유럽 사회가 사민주의로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하고 큰 원동력은 대중이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가능케 했고 사회를 진보화 시킬 수 있는 중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대기업 고숙련자들의 재분배 시스템에 대한 지지도 사회 진보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직도 북유럽 사회 대기업 고숙련자들은 재분배 시스템을 지지하고 있는데, 이런 조직들의 세력이 자본층을 압박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정치화로 북유럽 사회는 수정자본주의 사회이지만 국가를 통한 재분배가 이뤄지며 내수기반 또한 튼튼하다. 즉 북유럽에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가 가능한 이유는 노동의 높은 조직률과 이러한 노조가 사회적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사회의 사민주의, 독립된 사회경제적 형태로 봐야 하는가?

 

사민주의사회의 사람들은 모두 사민주의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오래전부터 전문직은 고세율에 대한 부담을 느껴왔다. 또한 자본을 가진 경영자들은 노동자와의 임금격차가 미국은 최대 500배까지 차이 나지만 노르웨이는 고작 3-4배인 것에 불만을 가지고 영국, 미국 등으로 이동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처럼 고세율에 대한 불만을 가진 부르주아들은 사민주의에 대한 적대심이 있어왔다. 그리고 80-90년대에 들어 발생한 이민문제 등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에는 사민주의에 적대적인 진보당이 있다. 진보당은 60년대에 고세율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는데 당시 개인소득세금은 80%였다. 현재는 60%정도로 낮아졌지만 말이다. 진보당은 한때 약 10여년정도 지지율이 28%정도까지 올랐던 적도 있었다. 진보당은 높은 세금 때문에 기업이 죽고,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문제 발생으로 인해 국민국가경계가 몰락한다고 생각한다.

 

자본과 노동이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는가?

 

노르웨이는 장기연립우파가 장기 집권 중이며 복지제도는 후퇴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북유럽사회는 자본축적의 국제화가 이뤄지면서 자본축적이 높은 속도로 국외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글로벌화로 스웨덴은 80년대부터 대기업의 국외 이익이 국내보다 커지기 시작했다. 노르웨이는 90년대부터 자본이 글로벌화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저가항공사로 유명한 노르비치아 항공사이다. 동남아시아 인력을 사용하고 있는 이 항공사는 빠르게 성장하여 현재 유럽의 3대 저가항공사가 되었다. 국유 형태를 벗어나 무한경쟁시장에 속한 것이다.

 

이어서 북유럽 자본들은 점차 자기들만의 경쟁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다. 북유럽 자본의 존속되어 있는 곳은 발틱 3국이다. 발틱 3국은 1991년에 소련에 독립해 독립국가형태를 갖췄지만 현재는 북유럽 금융지배를 받고 있다. 북유럽 국가는 발틱 3국의 현지 은행의 주식을 매도하면서 식민화하는 등 현재 금융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북유럽 자본이 해외자본을 착취하면서 국내에서 얻지 못한 이윤을 회복하고 국외자본축적에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외자본 축적 과정에서 악용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노르웨이 3대 기업 중 ‘텔레로사’통신회사의 불법고용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방글라데시 하도급 업체를 통해 청소년 노동자를 불법고용하여 저임금으로 노동을 착취했다. 또한 안전대책 없이 노후장비를 사용하여 수많은 사망자를 냈으며, 이제는 미얀마로 진출하려고 하고 있다. 미얀마와 같은 제3세계 사람들에게 북유럽국가는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이 되었다.

 

이민자들의 문제

 

북유럽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급증하면서 이들의 노동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노르웨이 중산층 가정에서 필리핀계 오페어는 일반적이다. 오페어는 노르웨이 가정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40-45만원의 믿기 힘든 적은 임금으로 가사일부터 육아까지 감당하고 있다. 이들은 덴마크에선 노조 가입이 가능하나 노르웨이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몰락한 동구권에서 유입되는 남성노동자의 문제도 심각하다. 노르웨이에는 폴란드계 노동자들은 15만 명으로 상당한 규모이지만 형식상 노조가입이 가능할 뿐, 실제로 상당부분 인력파견회사를 통해 취업하게 되어 있어 노조가입이 쉽지는 않은 구조를 갖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 인력파견업체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 업체를 통해 취업하게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노동착취를 당하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저임금 노동의 광범위한 계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사민주의를 이탈하고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민주의가 모든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온건좌파를 이탈하고 국우정당에 투표를 하기 시작했다. 저숙련 노동자들은 동구권에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해결하겠다고 나선 극우정당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좌파 사민주의 복지국가가 수정되고 있다. 비정규직 같은 경우, 현재는 개악이 되어 이유를 불문하고 비정규직 채용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스웨덴은 의료와 교육부문에 점차 시장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교육은 여전히 무상이나 최근에는 사립학교 창립여건 완화 및 영리형 사립학교 설립을 허가하였다. 또한 6년 전까지는 외국인에게도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했으나 현재는 등록금을 받고 있다. 노르웨이는 아직까지 무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머지않아 사회적 불만을 크게 일으키지 않은 선에서 스웨덴처럼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북유럽 사회의 사민주의는 죽어 가는가?

 

그렇지는 않다. 북유럽사회는 사민주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점차 신자유주의 요소들로 수정을 가하겠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복지제도의 기반 자체를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내수기반이 튼튼해야 실질소득의 증가를 보장할 수 있고 복지제도 또한 유지된다는 것을 자본이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유럽사회도 자본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강해지고 있고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겠지만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아닌 복지를 유지하는 북유럽사회만의 신자유주의가 될 것이다.

목, 2015/09/1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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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담 중복지론의 함정

 

한국의 복지국가, 어디로 가야 하나? 최근 정치권이나 학계에서 ‘중(中)부담-중(中)복지’가 답이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복지의 확대를 꺼려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 한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금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만 해도 노인인구의 증가와 각종 복지제도의 숙성에 따라 국내총생산 중 복지 지출비의 비중은 현재의 10% 정도에서 2030년 17.9%, 2050년 26.6%, 급기야 2060년엔 29.0%가 된단다. 가만히 있어도 2040년쯤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편적 복지의 주장에 재갈을 물리기에 딱 좋다. 그래서 당장 이 정도에서 멈추잔다. 그러나 이러한 장기추계에 필요한 수많은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전제들을 어떻게 처리한 것인지 설명은 없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심각한 위기와 고통의 무게는 상대적으로 가볍다.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중복지는 현실적 선택지이다. 우리는 북유럽국가들처럼 강력한 계급 정당의 역사도 없고 복지에 대한 시민의식도 낮다. 사회적 합의기반마저도 없기에 고부담도 불가하다. 특히 정치권이 중부담 중복지를 타협적인 선으로 생각하는 것같다.

 

이들 모두의 생각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먼저, 중부담 중복지 주장은 현재 저부담-저복지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그런가? 국민이 부담하는 세금 및 공적보험료 총량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2년 현재 24.8%인데, 국내총생산 중 복지 지출로 돌아오는 것은 9.6%이다. 낸 것의 38.7%만을 돌려받는다. OECD 국가들의 평균은 64.1%이다. 저복지국가라고 불리는 영미권 국가들도 68.6%에 해당한다. 우린 저복지인 것은 맞지만 이 정도밖에 받지 못할 만큼 적게 부담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부담한 만큼이라도 복지혜택을 누리게 해달라!

 

또 다른 중요한 오류는 복지국가의 수준과 단계가 결코 복지 지출비의 수준과 정도로 표현되지 않음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지출비보다는 복지국가의 내적 구성이 본질이고 그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적어도 세가지 유형의 복지국가가 존재한다.

 

먼저, 계층 간 타협과 복지정치의 작동으로 중산층까지도 동의하는 복지제도를 많이 만들어 나간다. 각종 사회적 위험에 모든 국민이 노출되기에 국가가 이에 대해 철저히 국민들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보편주의와 사회권의 원리가 깔려있다. 사회보험보다는 보편적 사회수당을 더 활용하고 사회서비스도 공공영역에서 적극 실행한다. 사회민주주의 모형이다. 이럴 경우 중복지를 거쳐 고복지로 갈 수 있는 경로가 열린다.

 

다음은, 각자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복지제도가 연결되어 복지혜택도 다르다. 복지에 있어 가족의 기능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책 수단들을 강구한다. 차등적으로 급여가 제공되는 사회보험에 더 의존한다. 보수주의 모형이다. 중복지 중부담 이상을 넘어서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복지는 자신과 시장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라서 오로지 그것에 실패한 이들만 국가가 책임지면 된다. 경제적 능력이 있느냐를 따지려 한다. 권리라기보다는 실패자에 대한 구제다. 받는 이는 부끄럽고 세금을 내는 이들은 아깝다. 자유주의 모형이고 결코 저복지 저부담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복지국가가 이런 세 가지 유형 중 하나로 고착되면 그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이른바 경로의존성이다. 저복지에서 중복지로 갔다가 상황 봐서 고복지로 갈 수 없다.

 

결국 복지국가의 기조와 동력, 정책수단들을 어떻게 확립해 나가느냐가 관건이다. 다행히 아직 한국의 복지국가는 초기 단계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민주의적 요소가 혼재한다. 어떤 요소를 주된 것으로 할 것인가? 한국의 미래에 결정적인 선택이다. 중(中)복지가 아니라 중(重)복지의 판을 치열하게 짜야 한다.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 이 글은 2015년 9월 13일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일, 2015/09/13-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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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복지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국의 작가 찰스 도지슨이 1865년 발간한 책이다. 적어도 174개의 언어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셀 수없이 많은 연극, 영화, 만화 등으로 재탄생하여 전 세계 어린이들과 어른들에게 친숙한 동화이다.

 

이 소설 12장엔 하트왕이 앨리스를 재판정에 세워놓고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재판을 진행하면서 그 경과가 여의치 않자 점점 몸이 커지고 있는 앨리스를 겨냥하여 “규칙 42. 누구든 키가 1마일이 넘는 사람은 법정을 떠나야 해!”라고 소리친다. 우스꽝스런 장면으로 우리 뇌리에 남지만, 그 책의 원제목처럼 ‘이상한 나라에서 겪는 체험’의 전형이다.

 

우리 주변에 그리 이상한 일이 어디 한 두가지이랴만, 오늘은 복지부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참으로 우스꽝스런 일을 짚어볼까 한다.

 

보수정부 8년차에 들어선 지금, 민주정부 10년간 초기 복지국가의 틀을 놓으려는 다양한 ‘대못질’은 아련한 추억으로 존재감도 사라져간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 자살률은 세계 최고이며, 노동시간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이며 의료, 노후소득, 고용의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널려있어도 ‘무위(無爲)’라는 노자의 철학을 고수할 뿐이다. 경제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철 지난 보수의 주술에 기대어.

 

이런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하지 않는 ‘무위’의 영역을 지방정부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중증장애인의 활동보조 시간을 24시간까지 확대하려는 지자체의 시도를 비롯하여, 장애수당의 추가 지급, 65세 어르신의 버스비 지원, 장수수당 도입, 6세 미만 아동의 의료비 지원, 공공산후조리원 설치 등등 지자체가 행하려는 그 가상한 노력을 보건복지부가 나서서 가로막는 기막힌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경상남도의 진주의료원 폐쇄 때는 발동시키지 않던 협의 및 조정 권한을 지금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작년 한해 심의 대상인 81개 사업 중 원안 그대로 시행이 허락된 것은 33건뿐이었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협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21건은 권고 또는 추가 협의 대상이 되었고, 불복하여 복지부에 사무국을 두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사회보장위원회의 조정 대상이 되었다가 끝내 19건은 불허되었다. 기존 사업과 중복된다거나 다른 지자체와의 형평에 어긋나서, 타당성이 떨어져서, 선심성이라서, 나아가 재정지속가능성이 없어서… 등이 불허의 이유였다.

 

제도는 있으나 그 보장 수준이 낮은 현실에서 기존 사업과 중복된다는 불허 사유는 맹랑하다. 지자체 간의 형평성이 문제가 된다면 중앙정부의 제도로 끌어올려서 전국사업화하면 된다. 타당성과 선심성 유무의 판단은 궁극적으로 주민의 몫이고 선거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 염려 붙들어 매어도 된다. 지방 재정이 염려된다면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재원 조달의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만 그만두면 될 일이다.

 

지방정부의 자주 예산으로 행하는 사업에 대해 중앙정부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 자체가 지방자치를 못 박은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지방정부의 다양한 복지서비스 제도의 도입과 실행이 선진복지국가로 가는 핵심임도 명백한 사실이다. 중앙정부가 의지 없으니 지방정부도 하지 말라는 심산인지 모르나 정말 이상한 복지부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단의 단초는 2012년 당시 박근혜 의원이 한국형 복지국가를 위해 야심 차게 발의하여 통과시킨 사회보장기본법의 제26조이다. 결국 2014년 활동보조인이 없는 사이 호흡기가 떨어져 끝내 유명을 달리한 근육장애인 고 오지석씨의 죽음이 그 법 조항이 만들어낸 현실이다.

 

하트왕의 난폭한 재판 과정에서 공포를 느낀 앨리스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 언니의 무릎 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법의 덫에 걸려 꼼짝없이 손발이 묶인 지자체는 어디서 희망의 빛줄기를 찾아야 할까?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 이 글은 2015년 7월 12일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일, 2015/07/1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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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교협의 정치시평] 복지 무력화하는 정부의 '입법 공격'

박근혜 정부, 복지도 '국정화' 하려 하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아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망연자실할 정도이다. 게다가 지난 11월 14일 민중대회 이후 복면시위는 금지시키겠다면서 국정교과서 집필진에게는 복면을 씌워주는 이율배반조차 벌어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반대와 저항이 이어지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망신을 당하고 있다. 역사의 해석에 하나의 견해만 인정된다는 것은 아무리 너그럽게 받아들이려 해도 도무지 될 수 없는 일이다.

 

복지는 중앙정부만 해야 하나?

그런데 이와 논조가 비슷한 일이 사회복지 영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국무총리 산하에 사회보장위원회가 있다. 이는 사회보장기본법에 근거한 위원회이다. 여기에서 지난 8월 11일 각 지자체가 자체 사회보장사업으로 실시하는 5,981개 사업 중 1,496개 사업(사업수로는 25.4%, 예산으로는 15.4%)이 유사, 중복 사업이라며 정비하라는 내용의 '지방자치단체 유사, 중복 사회보장사업정비 추진방안'(이하'정비방안')을 의결하였다. 이에 8월 13일, 보건복지부는 각 지자체에 지침을 공문으로 보내고 정비추진단을 구성하여 이를 추진 중이다.

 

말인즉슨 중앙정부가 행하는 복지사업과 유사하거나 중복되는 지방자치단체의 복지사업은 중단 또는 폐지하라는 얘기다. 복지는 중앙정부가 알아서 할 테니 지방자치단체는 손을 떼라는 말이다. 중앙정부가 충분한 수준으로 복지를 한다면 일면 수긍이 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얘기다. 전국적으로 공통 또는 기본적인 것은 중앙정부가 책임지고 해야 하지만, 지역에 특유하거나 부족한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보충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관련 법들을 보면 모든 복지사업이나 정책에 대하여 주어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 규정되어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파트너로서 공동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복지사업법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외에도 누구나 자유롭게 사회복지사업을 행할 수 있도록(법 제34조) 복지다원주의를 규정하고 있으며, 지역사회 주민 누구나 시장·군수·구청장에게 사회복지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법 제33조의2~제33조의8).

 

또한 지방자치제의 취지로 봐도 중앙정부가 지방자치단체의 복지사업을 해라 하지 말라 하는 것은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지역주민의 복지욕구는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보다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중앙정부의 제도가 섭렵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방자치단체가 보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정비방안의 위법성

이러한 정비방안은 법적으로도 위법성의 소지가 다분하다. 정비방안은 중앙정부의 지침이다. 지침은 법규범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법령을 위반하면 위법하게 되며 무효가 되는 것이다.

 

사회보장기본법 제20조 제2항 제7호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 및 비용부담에 대하여 사회보장위원회가 심의·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중앙정부의 사업 또는 지방자치단체에 위탁하는 사업에 대하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과 비용을 합리적으로 분담하게 하려는 취지의 규정이다. 정비방안이 요구하는 것처럼 지방자치단체의 고유사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송파 세 모녀 사건에 따라 제정한 사회보장급여의 이용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이하 "사회보장급여법")에서는 사회보장급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사회보장급여를 신청토록 하고, 보장기관(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은 그에 필요한 안내와 상담 등의 지원을 제공토록 하고 있으며(법 제4조 제1항), 보장기관은 지원이 필요한 국민이 누락되지 않도록 하고, 국민의 다양한 복지욕구를 충족시키고 생애주기별 필요에 맞는 사회보장급여가 제공되도록 노력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법 제4조 제2항과 제3항). 이 규정은 기존 사회복지사업법의 사회복지서비스 신청권에 관한 규정을 사회보장사업으로 확대하여 제정한 것이다. 법률은 이렇게 만들어 놓고 정부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 참으로 어불성설이다.

 

또한 지방자치법 제166조 제1항은 중앙행정기관의 장이나 시·도지사가 지방자치단체의 사무에 대하여 조언, 권고 또는 지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사회보장위원회는 중앙행정기관이 아니며 보건복지부가 할 수 있는 조언, 권고, 지도는 일반사무에 관한 것일 뿐 자치사무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17조는 지방자치를 규정하고 있으며, 지방자치법 제9조 제1항은 지방자치단체는 자치사무와 국가위임사무를 처리한다고 규정하면서 그 일환으로 주민의 복지증진에 관한 사무를 예시하고 있다. 사회보장기본법, 사회보장급여법 그리고 사회복지사업법에서 규정한 사회보장급여와 사회복지서비스는 지역주민의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지방자치단체가 사회보장급여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주민의 복리증진을 지향하는 지방자치의 본질적인 내용에 속한다. 이를 어기라고 지침을 내려 보내는 정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부의 입법적 공격

이러한 위법성을 인식해서 그랬을까? 최근 정부는 사회보장위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교부세를 감액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지난 9월 30일 지방교부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는데, 지방자치단체가 사회보장위원회의 심의·조정 결과를 따르지 않고 사회보장사업을 시행할 경우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대하여 교부세를 감액할 수 있는 조항(안 제12조 제1항 제9호)이 포함되어 있다.(이 시행령은 12월 1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편집자)

 

이번 지방교부세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그동안 거론되지 않던 사회보장기본법 제20조 제4항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사회보장기본법 제20조 제4항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위원회의 심의조정사항을 반영하여 사회보장제도를 운영 또는 개선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심의·조정은 사회보장기본법 제20조 제2항에 의해 사회보장위원회가 수행하는 심의·조정을 말하며 이 심의·조정의 대상은 사회보장기본계획이나 사회보장제도 평가, 사회보장제도 신설·변경, 급여 및 비용부담 등 사회보장제도 전반에 걸쳐 있다.

 

따라서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지방교부세법 시행령 개정은 사회보장제도 신설·변경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회보장사업에 관한 심의·조정에 대해서도 지방교부세 감액이라는 채찍을 만들어 지방자치단체를 통제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나아가 이는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정비방안과 관련해서 지방자치단체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헌법과 지방자치법에 규정된 지방자치의 본질과 내용, 사회보장기본법 및 사회보장급여법 등에 규정된 주민의 욕구를 고려한 맞춤형 사회보장제도의 구축, 운영을 법률의 하위규범인 시행령으로 침해하는 꼴이 된다. 지난 누리사업 예산 편성을 시행령으로 지방교육청으로 떠넘긴 것과 같은 수법이다. 위법하고 위헌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를 건설하기는커녕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 무엇이었던가? 이렇게 복지를 후퇴시키는 것이 한국형 복지국가인가? 증세 방안에 대한 합리적 대안 없이 약속했던 복지공약의 일부라도 시행하려다보니 기존 예산을 깎고 깎아 새로운 복지프로그램의 예산을 마련하려는 꼼수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든다. 서민들과 빈민들에게는 더욱 추운 계절이다. 따뜻하고 자상한 복지를 기대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인가? 어려울수록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이 힘을 합쳐 공생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복지조차 중앙정부가 독점하겠다며 줄이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윤찬영 전주대학교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

 

* 이 글은 2015년 12월 1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화, 2015/12/0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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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가로막는 ‘사회보장 정비조치’

 

정부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정비조치’(이하 정비조치)에 대해 26개 지자체가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등 지역 자치단체와 복지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번 조치는 지자체 스스로 사회보장사업을 점검하게 하자는 취지여서 강제적인 것이 아니며, 지방자치를 침해하지도 않고 유사·중복사업의 정비를 통해 절감된 예산을 사각지대 해소에 쓰므로 복지총량은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해명이 과연 타당한지 생각해 보자.

 

첫째, 정비조치가 지자체 스스로의 점검을 유도하는 취지라는 정부의 해명은 사실과 다르다. 정부는 정비 대상사업을 5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각 범주별로 폐지, 사업내용 변경, 타 사업과 통폐합 등 정비유형을 정해 놓았다. 특히 사회보험료나 본인부담금 지원, 장수수당 등에 대해서는 폐지로 못박고 있다. 이처럼 정비유형을 사업범주별로 정해놓은 상태에서 지자체 스스로의 점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이들을 굳이 폐지하고 다시 사각지대 해소에 투입할 근거가 별로 없다.

 

둘째, 정부가 말한 대로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의 정책에 관여할 수 있다. 이번 정비조치의 대상사업은 지자체가 지방의회를 통과해 편성한 자체 예산에 의거해 시행하는 자체 사업들이다. 지자체가 민주적 절차를 거쳐 확정한 자체 예산으로 시행하는 사업을 정비유형까지 못박아 놓고 정비하라는 것은 지방자치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이다.

 

셋째, 정부는 지방교부세법 시행령 개정을 통한 교부세 감액은 이번 정비조치와 무관하고, 사회보장기본법상 신설·변경 시 협의의무 미이행에 관한 것이므로 이번 정비조치는 강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 시행령 개정안에 사회보장기본법 제20조 제4항을 위반한 경우 교부세를 삭감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 제20조 제4항은 사회보장위원회의 일반적인 심의·조정에 관한 것으로 신설·변경 시 협의·조정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현행 사회보장기본법은 박근혜 대통령이 의원 시절에 한국형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정을 주도한 법이다. 이 법에는 수요자 중심 맞춤형 복지 원칙이 평생 사회안전망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돼 있다. 평생 사회안전망을 구축할 의무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부과하고 있다. 또 ‘사회보장급여의 이용·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을 통해 사회보장급여를 필요로 하는 국민은 누구나 지자체에 신청할 수 있게 하고, 지자체는 욕구조사를 거쳐 개별지원계획을 수립해 사회보장급여를 중복되지 않게 지원토록 하고 있다. 정부가 말하는 유사·중복을 피해 지원토록 이미 정부와 대통령이 주도한 법률에 규정돼 있다.

 

게다가 사회보장기본법은 사회보장 품질관리체계까지 구축해 운영하게끔 명시하고 있다. 이런 조항들만 제대로 시행해도 중앙정부는 지자체에 그들의 자치권을 침해하지 않고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 이런 조항들을 놔두고 뜬금없이 정비조치를 들고 나온 것은 정부가 지자체의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복지국가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라더니 그 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남찬섭 동아대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부위원장

남찬섭 동아대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부위원장

 

* 이 글은 2015년 11월 2일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월, 2015/11/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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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세계 평화' 고민하는 세상 만들자

복지국가 건설은 기성세대의 책무


윤홍식 인하대학교 교수

 

청년들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을까? 문득 청년들의 고민을 듣고 싶었다.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우리는 청년들의 고민이 취업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안정적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꿈일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다니는 학생이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세상인 걸 보면 다른 청년들의 고민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면 북유럽 청년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살고 있을까? 몇 년 전 방문했던 북유럽 청년들에게 들은 그들의 고민은 '환경 오염과 세계 평화'였다.

북유럽 청년들은 이타적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고 한국 청년들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일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유전적 이유가 아니라면 두 사회의 청년들이 완전히 상반된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유럽 청년들이 '세계 평화와 환경 오염'이라는 고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적절한 보상을 받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 살다 보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눈을 돌릴 수 있고, 자신과 다른 사람이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라는 평범한 진리도 깨닫게 된 것이다. 반면 한국 청년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해도 생존하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 생존할 수 있는 '각자도생'의 사회에 살고 있다.


누가 이런 괴물 같은 세상을 만들었나?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사회과학 서적 좀 읽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으스대는 기성세대들이 우리 청년들에게 아무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세상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일부 기생세대들은 청년들에게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라고 하고, 분노하라고 한다. 그런데 기성세대들이 거리로 나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와 싸워서 만든 세상은 청년들이 친구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자신의 꿈을 위해 두려움 없이 노력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우리 기성세대는 민주화 이후 세상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가 지금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노동의 현재이다. 자신들이 뽑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위원장이 노동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부당하게 구속수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는 조합원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야 할 지경이라는 장탄식도 들려온다. 자신들의 위원장의 일에도 이토록 무관심한 그들이 청년들과 다른 시민들의 일에 분노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기성세대와 조직노동은 청년과 시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면하는 길은 철저한 반성에 기반해 세상을 제대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바로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것이다.

기성세대에 묻고 싶다. 민주화된 세상에 사니 행복하냐고. 조직노동에 묻고 싶다. 아직도 복지국가를 노동 해방에 반하는 개량주의라 생각하고 있느냐고. 조직노동이 자신만을 위한 "성공적" 임금과 단체협약 이외에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에서도 복지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오고 있다. 선거가 다가오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복지국가가 아버지, 어머니의 꿈이라던 대통령에게 충분히 기만당했다. 답은 하나다. 이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복지국가의 길을 열어보자. 그래서 우리도 우리 청년들의 고민이 "세계 평화와 환경 오염"인 세상을 한 번 만들어 보자. 그래야 조직노동과 기성세대가 얼굴을 들고 우리 자녀들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을 것 같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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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일, 2015/12/2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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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안에 복지국가 완성하기

 

나의 직업은 도킹디자이너이다. 수백 킬로미터까지 물건을 실어나르는 것으로 이미 상용화된 무인항공기 드론의 도킹 시설을 설계하는 직업이다.

 

요즘 나는 드론의 개념을 응용하여 사람까지도 간단히 실어나르는 새로운 이동수단 개발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최근 대학을 졸업했다.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다. 고등학교에서 관련 기술을 익혀 대학을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5년 정도 흘러 더 치밀하고 변화된 기술을 탐구할 필요가 있어 평생학습의 개념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고등학교까지도 그랬지만 학비는 전혀 들지 않았다.

 

극심한 기술 환경의 변화로 회사가 문을 닫거나, 혹 다른 분야로의 응용기술을 배우고 싶어 이 직장을 그만 둔다 해도 최대 2년까지는 봉급의 80%를 받으며 매진할 수 있다. 그 이후 일이 잘 안 풀린다 해도 실업부조제도가 있어 그리 큰 걱정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제도에 안주하여 빈둥거릴 생각은 전혀 없다.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은 모든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기에 사회에 기생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나는 하루 6시간 일하고 주 4일 근무가 기본이다. 연간 1,200시간 정도 일한다. 30년 전 부모세대 때는 연간 2,300시간을 일하였다니 야만의 시대였다.

 

복지플래너인 아내와 결혼하여 두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최근 출산한 아내는 앞으로 1년간 육아휴직을 하게 된다. 그 뒤 6개월은 내가 육아휴직을 쓸 차례이다. 그 기간 동안 월급의 80%가 보장되니 걱정 없다. 아내는 공무원이다. 주민들의 보루 역할을 하는 아내는 동네에서 사랑 받는 존재다.

 

나는 중상위권 정도에 속하는 소득을 벌고 있다. 소득세가 대강 15% 정도이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의 보험료 중 반을 근로자가 부담하기에 각각 8%와 7%를 내고 여타의 다른 공적보험으로 5%를 떼어 35% 정도가 월급에서 공제된다.

 

그러나 불만은 전혀 없다. 은퇴하여 내가 받았던 소득의 60% 정도를 받게 되니 안락한 노후생활이 보장된다. 이 세금과 보험료로 모든 가족의 건강과 안락한 기본생활이 보장되기에 나머지 돈으로 취미인 요트를 한강에서 즐기고 겨울 한 달 동안 오지 탐험 여행을 다니며 동해안에 마련해 놓은 별장을 관리하는 지출에 사용하고 있어 쪼들릴 일이 없다. 두 아이를 위한 보육료와 교육비도 특별히 따로 들지 않고, 내가 사는 집도 소득의 5%만 임대료로 내면 된다. 몇 십 년 전 국민연금기금을 공공주택 매입과 건설에 쏟아 부어 이젠 집을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이들은 거의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거나 비참한 생활에 놓여 한탄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열심히 일하고 벌되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부담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기여한다. 즉,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필요한 만큼 누린다.
요즘 가끔 부모님들은 이야기하신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자신들의 세대가 30년 전 우리나라를 복지국가로 만들고자 결단하여 이를 위한 거대한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의 물결을 만들고 이를 대변하는 진보정당들이 다수 출현하고 이들의 연정을 통해 지금까지 30년간 내리 집권당을 유지한 것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그 사이에 통일도 있었지만 오히려 성장의 동력을 새로이 얻는 계기가 되었고 이제 선진경제대국이면서도 선진복지국가로 발돋움한 나라에 내가 살고 있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연이은 세 개의 선거에서 재점화된 복지국가혁명의 열기가 신호탄이 되어 한 세대 만에 오늘 이런 나라를 만들었다니, 앞선 세대의 치열했던 분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두 아이의 눈망울에 더 큰 행복과 희망이 심겨지도록 나 역시 이 복지국가를 지켜 가리라.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이태수 꽃동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

 

 

* 이 글은 2016년 1월 3일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일, 2016/01/0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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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총선, 무엇을 심판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남찬섭 l 동아대 교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

 

들어가며

올해 4월 13일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중심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대통령선거가 쟁점을 형성하고 유권자들의 관심을 끄는 힘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4‧13 총선은 내년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도 하고 또 더 본질적으로는 행정부를 견제하고 민의를 대변할 대표자를 뽑는 선거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대선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이번 4‧13 총선이 현재 한국사회가 처한 전환기적 성격에 대한 대응을 주도할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중대한 기회라는 사실이다. 물론 역대 총선 가운데 우리사회를 이끌어갈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의미를 가지지 않은 총선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거는 다른 선거에 비해 시대적 의미를 달리 부여받는 선거가 될 수 있고, 필자는 이번 4‧13 총선이 그런 선거라고 생각한다.

 

총선과 복지국가논쟁

지금으로부터 벌써 4년이 더 지난 이야기이지만 2009년 말부터 2012년 초까지 대략 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사회는 범사회적인 규모의 복지국가논쟁을 경험하였다. 이 논쟁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전개된 논쟁이었으며, 21세기의 새로운 상황 속에서 한국사회를 복지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새롭게 디자인해야 한다는 대안사회요구의 분출이라는 의미를 가진 논쟁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안사회를 둘러싼 논쟁은 지난 2010년대 초의 복지국가논쟁이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투쟁도 당시의 한국사회를 민주화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구조화하려는 요청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안사회논쟁이었다. 또한 더 멀게는 1960년 4‧19 혁명과 그 이후 나타난 여러 시도들 역시 ‘재건’, ‘경제발전’으로 표현된 가치를 중심으로 당시의 사회를 재구조화하려는 대안사회논쟁이었다. 그리고 이런 시기에 치러지는 선거는 일종의 정초선거(founding election)와 같은 성격을 갖거나 또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갖게 된다. 1960년대 초에는 대안사회논쟁이 군사쿠데타와 그에 이은 군사독재에 의해 왜곡되었고 그에 따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1963년의 대선과 총선 역시 그런 왜곡 속에서 치러졌다. 반면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은 민주화라는 대안사회논쟁의 상징과 같은 의미를 부여받을 정도로 중요한 선거였다.

 

물론 복지국가논쟁은 2010년대 초에 있었고 지금은 소강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이번 4‧13 총선이 그런 복지국가논쟁을 통해 표출된 대안사회요구와 얼마나 관계가 있을 것인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13 총선이 복지국가논쟁을 통해 표출된 대안사회요구와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련성을 갖는다. 첫째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저출산‧고령화와 세계화‧탈산업화라는 새로운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극심한 양극화로 절망상태에 빠지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노인자살률은 10여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OECD 국가 중 1위를 하고 있다. 노인빈곤율 역시 수년 간 지속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에 있다. 청소년자살률도 매우 높으며 그 증가속도는 더욱 높은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근로시간은 OECD 최장임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은 OECD 최저수준이며,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노동시장차별문제 등으로 노동력재생산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결과는 매우 낮은 출산율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데,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5년이 가깝도록 1.3 미만인 초저출산을 기록하여 OECD 최저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몇 가지 지표로도 알 수 있는 절망상황은 최근 유행하는 ‘헬조선’이나 ‘N포세대’와 같은 조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런 절망상황은 아직도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대안사회요구가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는, 2012년 대선 당시 복지국가를 중심으로 한 대안사회요구, 한 마디로 말해서 복지국가민심을 포착하여 이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어 선거에서 승리한 현 집권세력이 집권 후에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복지공약만 선택적으로 채택하고 나머지는 헌신짝 버리듯 파기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현 집권세력의 행태를 보면 대체로 보편복지를 지향하는 공약은 파기하고 선별복지를 지향하는 공약은 채택하여 실행에 옳기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또 여기서 더 나아가 보편복지라는 요구 자체가 다시는 분출하지 못하게끔 제도적 억압장치를 구축하는 행태까지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선택적 채택 및 파기, 그리고 보편복지요구의 제도적 봉쇄 시도는 명백히 복지국가민심의 배신이며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과도 배치되는 행태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점을 종합하면,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대안사회요구, 즉 복지국가민심이 여전히 유효한데도 불구하고 이미 집권 초기부터 그 민심을 배신해온 데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4‧13 총선은 그런 평가의 기회라는 것이다. 또한 이번 총선은 그런 평가를 통해 더 이상의 역주행을 막고 내년에 있을 대선에서 보다 본격적인 평가를 할 토대를 마련하는 의미도 갖는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민주화투쟁의 연장선에서 보자면 2010년대 복지국가논쟁은 198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정치적 민주화를 계승하여 이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는 두 민주정부가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성취라는 역사적 과제를 부여받고 나름대로 노력하였으나 세계화‧탈산업화 및 저출산‧고령화라는 새로운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미완의 과제로 남고 말았다. 이 미완의 과제를 이행해야 한다는 복지국가민심을 배신한 정치세력에 대한 심판이 없이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며

그러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무엇보다 복지국가민심을 실현할 의지와 대안을 가진 정치세력을 선택해야 한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신자유주의적 처방은 더 이상 시민들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는 작년 영국에서 노동당 당수로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당선되고 현재 미국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인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거물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과 대등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데서도 나타난다. 작년 말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남부유럽 4개국에서 좌파연정이 승리하였는데 이것이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코빈과 샌더스는 그렇지 않다. 코빈의 노동당 당수 당선으로 블레어의 중도노선은 지지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샌더스 역시 힐러리보다 훨씬 좌파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다. 우리도 코빈이나 샌더스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대안을 필요로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당연히 나라마다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 되어야 하겠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인 것이다.

 

물론, 한국의 선거는 정책선거라기보다는 상호비방전의 성격을 더 많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코빈이나 샌더스 같이 자신의 신념을 거침없이 말하는 정치인이 그처럼 꿋꿋하게 성장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설사 어느 정도 성장했다 하더라도 온갖 정치공세에 시달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코빈이나 샌더스 같은 인물을 키워야 하고 또 그런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룰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거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상호비방 속에서도 후보자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각 후보자 및 그 후보자가 속한 정당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고 공유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현실정치적으로 볼 때, 야권의 분열로 일각에서는 현 집권세력에게 개헌선마저 내줄 정도로 총선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책선거를 향한 노력들을 모아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추진할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길이야말로 현 집권세력을 심판하여 역사적 과제를 완료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목, 2016/03/1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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