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지난 6월13일 [이한열 기념관]과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현장인[남영동 대공분실]을 다녀왔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안내는 평화길라잡이의 새로운 활동 장소로 이날 첫 시범안내가 있었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은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87년은 전두환 이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해 1월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독재타도, 호헌철폐 그리고 대통령직선제를 외치는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그해 6월 대학생이한열은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쓰러집니다. 이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일 시청가야 하는데..."였다고 합니다. 만화동아리에서 활동을 했고, "혁이"라고도 불리었던 젊은 대학생은 그렇게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후 27일간 중환자실에서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된 87년 민주화 열기는 이한열 최루탄 피격 및 치사 사건을 정점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국민투표로 지금의 헌법으로 개정이 됩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며,첫번째 장소로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계단을 오르자 모자이크 속 청년은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가꾸고 그 건너편에 그가 좋아했던 "시"가그 청년 가슴에 맺힙니다. 그리고 입구에 붙어있는 많은 사람들의 애도의 글들...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이경란 관장님의 안내로 2층 전시실로 들어섰습니다. 2013년에도 서울KYC민주올레를 통해 방문했었는데, 그때와 다른 전시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6월9일 부터 9월25일까지 한시적으로 기존의 전시물을 잠시 교체하여, [운동화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기획전시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이 운동화는 87년 당시 이한열이 쓰러지면서 떨어뜨린 '운동화'를 최대한 당시의 상태에 가깝게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복원된 운동화는 3층 전시장에 보존처리된 의복, 가방등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2층 전시장에는 복원과정과 과정에서의 어려움들을 이경란 관장님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이한열이 남긴 한 짝의 운동화는 오른발입니다. 전시회에는 이한열이 남긴 오른발에 자신의 왼발 운동화를 나란히 놓은 코너가 마련되어 이었습니다. 이한열의 어머니, 동아리 선배, 쓰러지는 이한열을 부축했던 친구, 그리고 현재 이한열장학금을 받는 학생 등 각자의 왼발에는 자신의 소감이 적혀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이 왔다. 운명처럼 마주칠 그 날,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친구, 미안하다. 나는 올해에는 더 밝고, 더 즐거운 얘기를 우리의 청년들과 해보려 한다." -경제학과 동기 우석훈
이한열 기념관을 나오면서 지금 우리는, 87년 아스팔트위의 청년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숨으로 일궈낸 그 민주주의가 지난 8년간 꼼짝도 못하고 있는 현실이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오전 이한열 기념관을 나와 간단한 점심을 먹고 다시 남영동대공분실로 이동하였습니다.
남영동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만들어졌습니다. 1985년 김근태의원의 고문사건으로 세계언론에 실체가 알려지게 되었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사건으로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곳입니다. 1991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청 보안분실로 변경된 후 2005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본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된 건축물입니다. 건축주가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를 정확히 파악한 영리한 건축가의 영민한 작품(?)입니다. 외관은 멋진 일반 건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외부로 들어가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지금은 하얀 대문으로 바뀌었지만, 얼마전까지 두꺼운 철제 대문으로 소리만으로도 공포감을 주는 대문 몇층으로 가는지 알수없는 원형계단, 빛만 들어오도록 하여 조사자의 자살을 막는 좁은창문 등등 이 건물이 어떤 용도로 사용될 것인지를 설계자는 충분히 이해하고 설계한 것임을 곳곳에서 알수 있었습니다.
오늘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KYC에게는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 그동안 평화길라잡이 선생님들이 준비한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점으로 시민들에게 (물론 우리 회원분들이시만요) 소개하는 날이기때문입니다. 이날의 안내는 안은정 선생님이 해주셨습니다.
원형계단을 따라 5층 조사실로 가보았습니다. 5층 조사실 509 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던 장소이고. 이곳은 현재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시의 고문치사 사건후 은폐과정을 소개하였고, 같은층 515호에서는 김근태의원의 고문과정을 통해 고문은 고문피해자를 파괴하여 반대세력에게 국가에 저항하지 말라는 분명한 메세지를 학습하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문피해자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까지 힘들게 만들며, 고문피해자가 고문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때 가졌던 트라우마로 여전히 일상생활을 하는것이 어렵게 된다는 것을 해설을 통해 알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최근까지 이 공간이 조사장소로 사용이 되었고, 작가 조정래 선생도 이곳에서 조사를 받았었다고 합니다.
5층에서 4층으로 내려오면 [박종철 기념전시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걱정을 했고,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대학생 박종철의 평범한 일상과 고문치사와 은폐조작 그리고 이사실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 과정을 이곳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군사정권시대에는 월북자, 납북어부, 재일교포 등 사회적 약사들이 고문으로 간첩이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시 공무원간첩조작사건처럼 탈북자가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고문피해에 대한 체계적인 실태조가나 치유대책, 고문방지법, 고문피해자구제지원법안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인재근 의원이 발의한 '고문방지와 고문피해자 보상 구제법안'은 국회에 계류중인 상태입니다. 헌법12조 2항에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라고 나옵니다. 이 법은 박정희 정권에 재정되었던 부분이라고 하는데, 참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자유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과 책임으로 사회를 운영하는것이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고문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성을 파괴하여 공동체를 위험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헌법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렇게 훌륭한 헌법을 가진 우수한(?) 대한민국입니다.
이 헌법에 나온대로 우리의 기본권이 누군가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잘 만들어 가는것이
살아있는 우리가 해야할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을 기억하며 서울KYC 회원들과 함께 했던 [이한열 기념관]과 [남영동 대공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평화길라잡이의 [남영동 대공분실]시민안내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7월 25일 토요일, 평화와 인권의 관점으로 역사적 현장을 해설하는 평화길라잡이의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바뀌었지만, 국가라는 이름 아래 무자비한 폭력이 이루어졌던, 아픈 과거의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한 곳이기도 합니다.
7월 시민 안내에는 총 21분이 오셔서 안내를 들었습니다.
우선 건물에 들어가, 80년대 사회상을 다룬 영상을 잠시 보았습니다. 80년대를 직접 경험하셨던 분들도, 교과서로만 민주화 운동을 접했던 젊은 분들도 주의깊게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영상을 본 뒤에는 뒷문으로 이동했는데요,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뒷문으로 들어가면 5층으로 곧장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올라가는지 자신도 모르게, 빙글빙글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5층에 도착합니다.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직접 계단을 걸어 올라왔습니다.
5층은 박종철 군과 김근태 전 의원을 비롯, 무수한 사람들이 조사를 받았던 공간입니다. 박종철 군이 고문을 받았던 509호는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가구,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좁게 만들어진 창문, 그리고 욕조까지. 좁은 공간이라 모두가 한번에 들어갈 수는 없어, 차례차례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김근태 전 의원이 고문을 당했던 515호 내부는 보존이 되어 있지 않고, 공간만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509호보다 넓었는데요, 더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고문을 했던 공간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내를 통해 이곳에서 이루어졌던 고문에 대한 설명도 듣고, 고문 이후의 후유증이 또한 얼마나 힘든 고통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설명이 끝난 뒤에는 박종철 기념 전시실이 있는 4층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에는 80년대 사회상과 박종철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과정을 보여주는 문서,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박종철 군의 사진과 그가 남긴 책, 옷가지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1층에는, 지금 변화한 모습의 인권센터를 소개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변한 것일까요? 양천 경찰서 고문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등 조사과정에서의 폭력은 과거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1층에서는 하나 더 생각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건물 입구에는 '주춧돌을 정하다'는 뜻의 '정초'라는 글씨가 있습니다. 이는 일제 시대 때 판검사를 지내고, 이후 서울고등지법 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 내무부 장관까지 올랐던 김치열의 흔적입니다. 그의 경력 뒤에는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사건 등 국가 권력의 폭력이 이어집니다.
또한 이 건물을 치밀하게 설계한 김수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센터, 올림픽주경기장 등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음에도, 이 건물에는 밝지 못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어두운 시절에도, 박종철의 시신을 보고 물고문을 알아채서 최대한 이를 알리려고 한 의사, 박종철 사건을 외부에 알리려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교도관 등 체제에 순응하지만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역할과 책임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라는 안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특기할 만한 사항은 대공분실 내부에서 안내를 들을 때도 끊임없이 들리는 남영역의 안내 방송이었습니다. 실제로 대공분실 건물은 남영역 플랫폼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건물이었는데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지나치는 것들 중에서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어쩌면 절대 평범하지 않은, 어쩌면 아연실색할 만큼 폭력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가 오고, 다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오신 시민 분들 모두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대공분실 현장을 보고, 안내를 들었습니다. 지인을 따라 오신 분, 메일을 보고 오신 분, 집 근처여서 와보신 분 등 오신 이유는 각자 달랐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한번 더 생각해보고, 현재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안내였습니다.
다음 안내에도 많은 시민 분들이 함께 해서, 가슴 아픈,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현장을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정된 8월, 9월 안내도 많이 신청해주세요!
회원들과 함께 한 권의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모임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도서 : <담론> 신영복 일시 : 8월 26일 저녁 7시 30분 장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야외옥상
저녁 하늘을 보며 하는 야외 생골입니다^^
[책소개]
우리 시대의 지성, 신영복의 삶과 철학!
신영복 교수는 1989년부터 거의 25년간 대학 강의를 하였다. 이제 그는 2014년 겨울학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학 강단에 서지 않고 있다. 비정기적 특강을 제외한다면, 대학 강단에서 그를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대신 저자는 강다네 서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의 강의를 녹취한 원고와 강의노트를 저본으로 삼은 책 『담론』으로 대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전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강의>에서 '동양고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탐색을 거쳤다면, 이번 책에서 그는 '사색'과 '강의'를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합쳐냈다. 그리하여 동양고전 독법을 통해 '관계론'의 사유로 세계를 인식하고, 고전을 현재의 맥락에서, 오늘날의 과제와 연결해서 읽어본다.
또한 저자 자신이 직접 겪은 다양한 일화들, 생활 속에서 겪은 소소한 일상들을 함께 들려줌으로써 동양고전의 현대적 맥락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강의> 이후 만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훨씬 깊어진 논의와 풍부한 예화를 담아낸 이 책에서 저자의 고도의 절제와 강건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어제 국방부에서는 북한의 고사포 1발과 직사포 3발이 DMZ 내 군사분계선(MDL) 남쪽 700m 부근에 투척됐다고 하였으며, 이에 남측에서는 수십발의 대응사격을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에서는 선제포격을 한적이 없으며, 20일 오후 5시부터 ‘48시간 이내에 대북확성기방송을 중단 철거하지 않을시 군사행동을 하겠다’ 는 전통문을 보내왔다. 또한 북한은 20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를 긴급 소집해 21일 오후 5시부로 전선지대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완전무장한 전시상태에 돌입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어제 경기도 연천과 파주를 비롯한 접경지역 주민들에게는 전쟁에 준한 주민대피령이 내려지고, 국방부는 최고 비상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조성되었다. 접경지역 주민 뿐만 아니라 온나라가 전쟁의 불안감과 공포에 떠는 위험천만한 상황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UFG(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조그마한 충돌하나도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남북간의 긴장이 최대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남북간 긴장이 더 격해진건 11년만에 재개된 대북확성기 방송 때문이다. 지난 8월 4일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 이후, 남측 당국은 이를 북의 소행이라며 대북확성기방송 재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를 부인하였고 대북확성기 방송 중단을 요구하며 군사적 대응을 경고한바 있다. 이후 이에 대한 명확한 사실규명없이 남측에서는 대북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였고 이로 인해 한반도는 초 긴장상태가 조성된 것이다.
한국청년연대는 당면한 한반도 전쟁위기에 우려를 표하며 위기관리엔 실패한채 대북대결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정부는 말로만 통일대박을 떠들어댈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대북확성기 방송을 당장 중단하고 남북간 긴장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당장의 위험천만한 상황부터 막아야한다.
지금은 호기롭게 자존심싸움을 하거나 쉽게 전쟁을 말할 때가 아니라 그야말로 전쟁이냐 평화냐의 기로에선 위기의 상황이다.
북한에서는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청와대 김관진 안보실장에게 전통문을 보내 대북확성기 방송 중단을 요구하며 ‘현 사태를 수습하고 관계 개선의 출로를 열기 위해 노력할 의사가 있다’ 고 밝힌바 있다.
박근혜 정부가 진정으로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생각하고 통일을 바란다면 당장 북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청년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전쟁이 난다면 가장 먼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것도 우리 청년들이다. 한국청년연대는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국민들과 함께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마음 졸이며 남북회담을 지켜보셨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과정은 험난했고 양쪽 정부에 할 말도 많았지만, 더 이상의 무력행사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합니다. 물론 ‘혹시나’라는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 없지 않았습니다.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책이 떠오릅니다. 케인스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각국이 전후 수습 방안을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합니다. 영국 재무부의 공무원 자격이었습니다. 그 회담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담아 쓴 책이 바로 <평화의 경제적 귀결>입니다. 케인스는 이 책에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당시 회담에서는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이 패전국인 독일에 대해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요구합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정도의 배상금은 독일을 망하게 하거나 아니면 받을 수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나라에 돌아가 ‘적국에 이만큼 복수했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배상금을 청구하는 것이 각국 정치가들에게는 필요했지요. 또한, 전쟁 중 유럽 국가들에 엄청난 규모의 차관을 제공했던 미국은 전쟁부채 탕감이나 추가 차관 제공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케인스는 당시 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정반대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전쟁배상금을 강요하지 말아야 하고, 전쟁 채무는 탕감되어야 하며, 미국이 대규모 차관을 제공해 유럽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일도 함께 경제적으로 부흥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가 지지를 얻는 일에만 몰두한 리더들은 케인스의 합리적 대안을 무시하고 맙니다. 케인스는 결과적으로 정치가들의 이런 행동은 유럽에 다시 한 번 전쟁의 참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측합니다. 궁지에 몰린 독일이 되받아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측이었지요.
불행하게도 케인스의 예측은 맞아떨어집니다. 유럽에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발호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 전쟁의 전사자는 2천5백만 명, 민간인 희생자는 3천만 명이나 됩니다.
이런 경험 탓인지,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복수와 응징보다는 협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갑니다. 철강 등 산업연합으로 시작한 국가 간 경제협력은 유럽연합과 단일화폐인 유로화로까지 진전됩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가 국내 정치에서는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유럽연합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뒤늦게나마 단단히 협력하고 이해관계를 섞어두어야 전쟁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가 간 이해관계를 대립적인 것으로만 이해했던 유럽강화회의와는 다른 접근입니다. 국가 간 경제적 이해관계를 씨줄로 엮고, 사회문화적 교류를 날줄로 엮어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기도록 짠 틀입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독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주요국들은 수십 년 동안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로마시대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이 그칠 날 없던 나라들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남북한 사이의 긴장 상황을 보며 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공동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만들기 위한 교류, 문화적 공감대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면, 서로 쉽게 총구를 겨누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최악의 평화가 최상의 전쟁보다 나은 것이고, 평화는 의도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북 간 평화를 만들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공통분모를 더 늘려가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망제작소 소장
이원재 드림
우리 사회의 희망을 찾는 길을 고민하며 쓴 ‘이원재의 희망편지’는 2주에 한 번씩 수요일에 발송됩니다.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신 분은 희망제작소 홈페이지 메인에 있는 ‘희망제작소 뉴스레터/이원재의 희망편지’에 이메일 주소를 입력해 주세요.
해방70년, 강제징용과 피폭의 땅에서 생각하는 전쟁 그리고 평화 [2015 서울KYC 동아시아 이해를 위한 일본 평화여행 in 큐슈]
지난 8월8일부터 11일까지 3박4일의 일정으로 서울KYC회원 20명과 함께 일본의 강제징용과 피폭의 장소인 후쿠오카, 나가사키, 기타큐슈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1945년 전쟁은 멈추었고, 식민지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70년이 지난 2015년 일제강점기 당시의 상처와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런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또 하나의 과제를 안고 온 여행이었습니다. 가장 뜨거웠던 일본을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고 온 기억을 사진을 통해 되짚어 봅니다.
여행첫날, 인천공항에 6시에 집결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8시 비행기를 탔습니다. 후쿠오카에 도착하여, 강제징용의 역사를 온몸으로 전하고있는 배동록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여행 내내 저희와 함께 해주신 재일조선인 2세 선생님이셨는데, 연세가 70대의 고령이었지만, 늘 뛰어 다니실 만큼 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날이 너무 더워서 건강이 무척 걱정되었습니다.
답사 첫번째 장소는 지쿠호 지역의 [무궁화당] 지쿠호 지역 탄광에서 강제징용으로 끌려와서 가혹한 노동에 목숨을 잃은 조선인들의 유골은 방치되었고,
방치된 무연고묘를 2000년 지쿠호지역의 재일동포와 뜻을 함께 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납골당입니다. 당시 이 납골당을 만들었던 분들이 함께 해주셔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향에 못가는 안타까움을 [고향의 봄]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두번째 장소는 덕향추모비! 1936년 아소탄광 화재로 25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노동자들의 동요를 막기위해 추모비를 세웠으나, 관리하지 않아 쓰러져가는 추모비를 1997년 뜻있는 일본인들과 동포들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아소탄광은 전 총리였던 아소다로 집안이 운영하는 탄광으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 "위안부결의는 조작이다"라는 망언들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인적 드문, 주택가 공터에 자리잡은 덕향추모비 찾는 사람이 없는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외로운 추모비 앞에서 향도 피우고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도 한잔 올렸습니다. 지금이라도 편히 쉬셨으면 하는 마음...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강제징용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세번째 장소는 보타야마를 지나, 타가와지역의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로 갔습니다. 이곳은 미쓰이 타가와 탄광이 있던 곳으로 폐광한 후 석탄역사박물관을 만들었고, 가장 높은 곳에 한국인 강제징용자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생전에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았지만, 죽어서만은 가장 높은 곳에 영혼을 쉬도록 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석탄역사박물관은,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노동의 역사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 높은 곳에 세워진, 위령비가 당시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지쿠호지역은, 탄광이 밀집되어 있던 곳으로 큐슈 강제징용 역사의 아픔을 잘 보여줍니다. 그중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휴가묘지에서 우리는 모두 할말을 잃었습니다.
보타이시(쓸모없는 돌)로 겨우 이곳이 묘지였다는 표식만 되어있는 조선인 무연고묘인 휴가묘지
집에서 기르던 개 고양이를 기억하는 묘비까지도 세우는 이곳에서! 조선인의 묘는 작은 돌들로 표시되어 단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그 위치가 전해져 오는 곳이었습니다. 묘역표시인지, 그냥 돌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휴가묘역에서 실수로 돌을 밟기라도 할까봐 조심조심 걸으며, 배동록 선생님께서는 강제노역의 상황을 [신세타령]이라는 곡조로 증언해주셨습니다.
강제노역의 처참함과 고달픔, 배고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신세타령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들려줬습니다. 듣는것만으로도 아픔이 느껴지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새벽부터 시작한 첫날의 평화여행은 휴가묘지를 마지막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그런 더운날, 저 한복을 입고 잊혀질지 모르는 역사를 얼마나 알리고 다니셨을까요? 낡아진 배동록 선생님의 한복 바짓단을 보니, 더워도 덥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여행 두번째날은 나가사키로 이동하였습니다. 1945년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8월 9일! 조선인위령제는 나가사키 평화공원 '조선인위령비'앞에서 7시30분에 있어서 그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습니다.
일본 남쪽의 가장 큰 항구도시 나가사키는 2차대전 당시 군수품, 선박, 무기등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도시로, 두번째 피폭도시입니다. 물론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1차 피폭이 되었고, 피폭된 이후 이곳에서 사고처리까지 하게 되어 2차 피폭까지 입게되었습니다. 일본은 원자폭탄의 유일한 피폭국이 일본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피폭된 많은 수의 조선인들도 있었습니다. 재일조선인 피폭자의 인권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그리고 피폭자들이 이른 시간부터 많이 모였습니다. 정작 한국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계단 한켠에 자리잡고 반핵평화에 대한 기원 그리고 조선인 피폭자들을 추모하는 마음,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손피켓에 담았습니다.
추모제 이후, 피폭도시 나가사키를 알기위한 필드워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리구치 선생님과 함께 나가사키 평화공원, 폭심지와 주변, 우라카미 성당 등을 답사했습니다. 모리구치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사출신으로 은퇴 후 일본의 전쟁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요구하는 일본시민모임에서 활동을 하고있는 자원활동가십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때의 상황과 복구된 지금의 모습을 모리구치 선생님의 꼼꼼한 해설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나가사키 형무소가 있던 평화공원 주변을 돌아보며, 피폭당시 떨어져나간 우라카미 천주당의 석탑, 형무소의 돌담의 흔적, 반공호 등등 70년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현장을 직접 둘어보았습니다.
자료가 가득 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따가운 뙤약볓 속에서 나가사키의 고통과 아픔, 일본의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책임을 이야기 하시는 모리구치 선생님 앞에서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더욱이 70세가 넘으신 모리구치 선생님이 피폭자였다는 사실에 우리는 잠시 할말을 잃었습니다. 본인이 전쟁의 피해자이기때문에, 더욱 생생한 증언을 할 수 있고. 그렇기때문에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비판에 더욱 울림이 있었습니다.
다음 장소는 스미요시터널입니다. 아직도 터널 위로는 도로가 놓여있어 이곳에 이런 터널이 있었을까 상상하기 힘든 곳에 터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일본 비밀 터널공장으로 미쓰비시 병기 스미요시 터널공장이었습니다. 이곳 역시 조선인들의 강제 노역을 통해 침략전쟁의 병기를 만들던 곳입니다. 처음엔 시원한 바람이 나와서 좋아했는데, 이곳의 용도를 알고 나니 오히려 서늘해졌습니다.
나가사키를 둘러보며 느꼈던 것중 하나, 일본은 원폭도시를 통해 전쟁 피해자의 모습만 보여줍니다. 전쟁가해국으로써의 책임과 반성은 나가사키 역사관에서도, 또 평화의 공원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일본의 가해책임과 보상문제에 초점을 다룬 자료관이 있었습니다. 1995년 오카마사하루 목사의 뜻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에 의해 운영되는 이 기념관은 원폭의 참상을 초래한 원인이 극도의 잔학함을 만든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있다는 사실과 일본의 무책임한 태도를 알리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료관입니다. 이곳에서 강제징용당시의 탄광 갱도의 모형, 당시의 피해자들의 참상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빡빡한 일정이 모두 이렇게 진지했던것만은 아닙니다. 개항도시인 나가사키의 데지마지역에서 항구도 걸어보고, 약간의 여유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세번째 아침은 처음으로 호텔조식을 먹었습니다. 새벽비행기, 새벽출발 등으로 매번 간단하게 빵이나, 삼각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는데, 모처럼 호텔조식을 먹어보았습니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
제대로 된 아침을 먹고 가야할 장소는 다카시마(高島) 입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과 전쟁포로들이 목숨을 걸고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곳이고, 군수품 생산과 수송등으로 재벌이 된 미쓰비시중공업이 있는 곳입니다. 다카시마는 하시마와 함께 이번 '메이지근대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 곳곳에 [근대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등재]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번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중 일부는 강제징용의 현장임에도,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공간이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훼리를 타고 도착하여 기무라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한국어를 공부하셨다는 기무라 선생님은 한국어로 해설을 해주셨는데, 이분도 교사출신으로 모리구치 선생님과 같은 자원활동가이십니다.
우리가 갈 장소는 나가사키에서 강제노동으로 돌아가신 조선인 무연고 묘지인 공양탑입니다. 가는길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물을 만나고 그 바로 옆에 방치된 수직갱도도 눈에 보였습니다. 또 이제는 관광상품이 되버린 강제노역의 지옥섬 쿤칸지마(군함도, 하지마)도 멀찍이서 바라보았습니다. (한수산씨의 [까마귀]라는 소설에 보면 이 쿤칸지마가 무대입니다.)
군칸지마는 1년전에 예약을 해도 입도가 쉽지 않다는 관광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겐 아픔의 공간인데, 일본인들에겐 근대유산(?)의 공간이 되버렸습니다. 각자의 기억이 이렇게 다를수가 있을까요?
조선인 위령비가 있는 공양탑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는 않았습니다. 숲속으로 들어가 낫으로 길을 만들어가며 찾아간 공양묘 주변은 한동안 인적이 없었던 것 처럼 주변에 풀들이 가득했었습니다.
각자 갖고 있는 장비들을 이용해서 주변 묘역을 정리하고, 각자 갖고 있던 음식들을 조금씩 내어서 제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먼곳에서라도 편히 쉬시라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제를 올렸습니다. 일본의 오봉이 얼마 안남은 날이라, 마치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내듯 모두가 절을 하고, 이제라도 편히 쉴 수 있기를, 돌아가신 분들의 평안을 기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시작한 [고향의 봄] 노래는 그곳에 있는 모든이의 어깨를 들썩거릴만큼 눈물지게 했습니다. 다카시마 공양묘를 나와 주변의 납골당과 다카시마 신사를 방문했습니다. 다카시마 신사의 위령비에는 어느순간 조선인의 이름이 빠졌다는 말씀을 들으니 죽어서도 차별받는게 너무 서러웠습니다. 다카시마를 나와 미쓰비시 조선소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이름없는 조선인들과 전쟁포로들이 목숨을 잃었을까요? 그리고 2차대전후 일본은 군수사업으로 재벌이 된 기업을 해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쓰비시는 주요산업을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기업입니다. 조선소 앞의 아리랑 고개를 바라보면서 함께 해주셨던 기무라 선생님과 이별을 하였습니다.
어제의 모리구치선생님, 오카사마하루에서 만난 일본인들 그리고 기무라 선생님을 만나고 나니, 보통의 일본은 전쟁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었으나, 이번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들을 통해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일관계를 평화적으로 풀어가는데는 이런 일본의 시민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시민들의 힘이 중요하다는것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이렇게 3일째의 답사는 마무리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자 교류회를 가졌습니다. 여행의 기억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가 더해져 진솔한 시간이었습니다.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강제징용의 피해자들이 많았다는것과 이 아픔의 역사가 과거가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각각 활동하는 공간은 다르더라도, 역사를 해설하는 자원활동가로써 한국에 돌아가서 이 아픈 역사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고, 잊지 않도록 해야 겠다는 이야기 등등 일본 평화여행을 통해 마음은 분노와 안타까움, 고마움으로 요동쳤지만, 적어도 평화가 왜 필요한지는 몸으로 눈으로 가슴으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8월 12일일 마지막날은 기타큐슈지역으로 갔습니다.
1901년 만들어진 야하타제철소, 뜨거운 용광로에 피땀을 흘렸을 조선인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의 큰 축으로 자리잡은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등의 일본의 기업들 .. 그 누구도 당시 조선인의 노역에 대해선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최근 한국법원 판결에서 일본제철이 조선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판결을 내리긴 했지만, 많은 일본기업은 65년 한일조약을 근거로 배상책임을 지려들지 않습니다. 65년 졸속으로 맺은 한일조약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강제징용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머물렀던 이곳에 학교가 만들어졌습니다. 후꾸오카 조선학교, 언덕배기 질척한 곳을 직접 일구어 만들었던 '우리학교'입니다.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비싼 학비를 내야 하는 현실이지만, '우리학교'이기에 모두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관몬터널을 지나 혼슈에 있는 시모노세끼로 넘어갑니다. 복어그림이 크게 그려진 칸몬터널을 뚫을때 조선인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저 터널을 지나 일본에서 제일 먼저 조선학교가 만들어졌다는 시모노세끼 조선학교를 둘러보았습니다.
조선학교를 지나 만난 곳은 지금은 오오츠보라고 하는 똥굴마을입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분뇨처리장, 화장터 등등 혐오시설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었고, 그러다보니,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살던 곳이었습니다. 곳곳에 조선식 문패라던가 당시의 배수시설의 흔적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40년째 이곳에 거주하신다는 엄선생님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마지막 장소인 시모노세끼 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은 대륙침략의 발판이었던 관부연락선이 닿는 곳으로
조선과 일본,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연결시키는 곳이었습니다.
이 항은 많은 군수물자도 실어날랐지만, 많은 조선인들도 이곳으로 실어날랐습니다. 시모노세끼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제일먼저 도착하는 곳으로,
창고에 2~3일 감금되어 있다가 큐슈, 홋카이도 등으로 강제노동 현장으로 끌려가는 곳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얼마나 배고팠을까요?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일본 강제징용이 시작되는 출발점에서 이 평화여행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그 당시의 기억과 기록은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들이 보고듣고느끼고 배웠던 것들은 다시 또렷해지고 있습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3박4일동안 함께 해주신 배동록 선생님과
오랜 작별 인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다시 관몬터널을 지나 후쿠오카 공항으로 갔습니다. 이제 서울로 갑니다. 내 소중한 가족있고,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서울로 갑니다.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음이 이리 큰 기쁨인줄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지척에 가족을 두고도 못만났던 그때 그 사람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수 없었고, 죽으려 해도 죽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 전쟁이 만들어낸 참혹한 현실이 70년 전 과거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준 현실은 아직도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아베총리는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더 많고 사과도 여러차례했으니 이젠 전쟁을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하면서도
유사시 전쟁도 할수 있는 법안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본의 모습을 통해 일본의 잔혹함을 직접 당한 역사이기에 이런 일본의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번 평화여행을 통해,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픈역사라도 기억하고 잊지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역사를 해설하는 자원활동가로서 이런 역할을 우리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최근 몇년간의 평화여행중 가장 힘든 여정이었지만, 가장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여행이었습니다.
평화길라잡이 시민안내는 매주 일요일 오후 1시, 1시 30분, 2시 전시관(보안과 청사) 표지판 앞에서 시작합니다. (위에 있는 사진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라 적힌 판넬 보이시죠? 사진에 있는 장소에서 시작합니다!)
별도의 신청없이 해당 시간에 오시면 안내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길라잡이의 또 다른 도전! 남영동 대공분실 시민안내!! 매달 1번, 토요일에 시민안내가 진행됩니다.
* 9월 19일(토) 오후 2시 * 10월 24일(토) 오후 2시 * 11월 21일(토) 오후 2시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주중에만 개방이 됩니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우리사회 민주주의,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월 1회, 토요일에 특별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1970-80년대 국가폭력, 인권유린이 일어난 그 현장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야기하기 위해 박종철기념사업회와 협력하여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오셔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평화길라잡이를 응원해주세요!
- 만나는 곳 : 남영동 대공분실 입구(남영역 1번 출구 도보 3분) - 안내 시간 : 총 90분 - 신청 인원 : 20명 내외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20명 이상 불가) - 신청 방법 : 아래의 구글 신청서로 신청 - 비정기단체안내는 수시로 접수 가능합니다. 문의 사무국 02.2273.2276
참여연대 회원들과 남북 분단의 생생한 현장에서 평화생명의 이야기 나눠요 2015 참여연대 회원캠프 <분단 70년, 이제는 평화>
참여연대 회원과 임원, 상근자들이 함께 회원캠프를 떠납니다!
올해는 특별히 해방 분단 70주년을 맞아 시민이 한반도의 평화통일, 동아시아 공동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상생의 비전을 마련해보고자 강원도 인제의 DMZ평화생명동산을 찾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해안 펀치볼, 북녘을 바라볼 수 있는 DMZ을지전망대 답사를 통해 가족, 친구들과 평화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해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참여연대 회원들 간에 더 친해질 수 있는 공동체 게임과 강연과 회원대토론회 등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참여연대 회원, 회원가족, 임원, 상근자 여러분! 2015 회원캠프 함께 가요!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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