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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가 된 운명,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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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가 된 운명,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익명 (미확인) | 수, 2017/03/08- 13:03

<대선후보자 시리즈>

다른백년은 ‘금주의인물’ 코너를 통해 매주 소개해 온 인물 가운데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을 추려 <대선후보자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어떤 후보자는 소개 시점이 빨라 지금 상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후보자도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의 과거 행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이번 시리즈가 올바른 선택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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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드에 오른 폐족, 안희정 충남도지사 (2016. 9. 13)

SNS를 든 싸움닭, 이재명 성남시장 (2016. 10. 14)

말이 통하는 보수주의자, 유승민 의원 (2017. 1. 20)

계급배반을 꿈꾸는 금수저, 남경필 경기도지사 (2017. 2. 14)

‘아스팔트 우파’의 마지막 희망,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2017. 2. 21)

길 잃은 ‘새정치’,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2017. 3. 2)

대세가 된 운명,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그가 23년 만에 거리로 나서야 했던 날, 딱 한 번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201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둔 날이다.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서울중앙지검 정문 앞에서 손팻말을 꺼내들고 1인 시위를 했다. ‘허위사실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조현오 경찰청장을 즉각 소환조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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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앞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 전 돈을 받았다”는 발언을 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 대한 소환조사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는 모습. 결국 조현오 전 청장은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사진 출처: http://www.wikitree.co.kr/)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 때 연좌농성을 한 이후 처음으로 나선 거리 시위다.

분명 ‘쇼’는 아니었다. 5분도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식사를 하러 드나드는 동안에도 그는 몇 시간이고 그곳에 서 있었다. 아침 5시30분에 경남 양산의 자택에서 일어나 식사도 어영부영한 채 서울로 온 터였다.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탈한 태도로 그는 말했다. “분노를 이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 답답하다.”

그 후에도 후속 취재를 위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얼치기 초짜 사회부 기자의 전화를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받고 성실히 답해 주었다.

부드러운 원칙주의자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64)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굿맨’ ‘젠틀맨’이다. 민주당 내 전략통이자 비문계인 강훈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 너무 굿맨이라 주변에 별난 분들을 통제하는 게 좀 서툴다.”

한때는 권력의지조차 보이지 않아 답답했지만, 확실히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후에도 하는 말이 이렇다.

“대통령이 목표가 아니다. 자리가 목표였으면 훨씬 더 정치를 빨리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뀐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직은 수단이다.”

“확실히 말해두겠다. 나는 정권 교체라는 국민의 열망을 구현하는 대의에만 헌신하겠다. 내가 꼭 대통령을 해야 한다는 직위에 대한 집념은 없다. 단지 현재로서는 내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으로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굿맨’인 대통령 탄생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문 전 대표는 독보적인 1위를 유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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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 제일 좋은 대통령 후보 아니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2002년 대선 당시 부산 유세 연설은 유명하다.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통령감’이 된다고 믿었던 친구, 그 친구가 이제 진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

가난한 실향민…’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던 수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 시골집에 놀러갈 때마다 참 부러웠습니다. 우리 집은 이북에서 피란 온 실향민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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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당시 밧줄 사다리에 매달려 수송선을 기어오르는 피난민들의 모습. 문재인의 가족도 이들 중 하나였다. 이런 가족사를 가진 문재인에 대해 ‘종북’이라는 색깔공세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재인 전 대표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이다. 대대로 문씨 집성촌에 살았다. 부친 문용형씨는 ‘수재’ 소리를 들었다. 명문 함흥농고를 졸업한 뒤 흥남시청 농업계장·과장을 지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월남해서 거제 포로수용소 인근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문 전 대표가 태어났고 7살 때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적수공권으로 월남한 실향민이 자리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자로 일하다가 장사를 벌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집안 사정은 극도로 어려웠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강한옥씨가 좌판 옷장사, 구멍가게, 연탄배달 등을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나갔다.

문 전 대표는 아직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집에 자전거가 없어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는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문 전 대표는 명문 경남중학교에 입학한다. 1978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보여드린 ‘잘 되는 모습’이자 “생전에 드린 유일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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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중 졸업 사진(왼쪽). 경남고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어 경남고에 진학해서도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별명은 ‘문제아’였다. 이름 탓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학교에는 용돈 씀씀이가 크고 ‘식모’까지 있는 부유층 자제들이 많았다. 빈한한 피난민 가정에서 자랐던 그에게 세상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갈수록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고 술과 담배에도 손을 댔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 됐다. 3선 개헌 반대 데모를 하고 교련시험 때 백지 답안지를 집단으로 내는 일 등이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진짜 ‘문제아’가 됐다. 다만 학교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부를 소홀히 한 탓에 결국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한다. 당시 경희대 설립자이자 총장이었던 조영식 박사가 ‘4년 전액 장학금’을 약속하며 경희대 입학을 권유하자 법대에 수석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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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법대 재학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대학 시절에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수감돼 학교에서 제적된다. 강제징집돼 특전사에서 복무하게 되는데 당시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와 여단장 전두환으로부터 두 차례의 최우수 특전사 표창을 수상하기도 한다.

전역 후 사법시험 준비를 하면서 학교에 복학했지만 1980년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실시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다.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는 극적으로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접하고 석방된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학생운동 전력이 문제가 돼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자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제안을 뿌리치고 1982년 부산으로 낙향했다.

노무현과의 만남

그 시절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의 시작이었다. 그는 노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노동·시국사건 변호를 주로 맡으며 민주화운동에도 투신했다. 1988년에는 노무현과 함께 김영삼으로부터 정계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다.

노무현은 정계에 입문해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다. 문재인은 그 후에도 계속 변호사로 일하며 법무법인 부산을 일궈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기도 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캠프에 합류,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건강 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네팔 산행 도중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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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2004년, 탄핵을 당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을 맡았다. 오른쪽 사진은 2004년 3월 12일, 김기춘 당시 법사위원장이 탄핵 의결서를 헌법재판소 민원실에 접수하는 모습.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뒤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문재인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주역이 됐고, 김기춘은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2005년에는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당시 한나라당은 그를 ‘왕수석’이라고 부르며 국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한다고 비판했다. 노영민 전 의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 국정 현안 중 95%는 문재인 비서실장 선에서 처리됐다. 끝내 의견 조율이 안 돼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간 국정 현안은 5% 정도도 안 된다. 그가 대권을 잡는다면 국정 현안을 파악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간 낭비는 없을 것이다.”

‘왕수석’이란 비난도 받았지만 문재인 전 대표의 자기관리는 철저했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내에게도 백화점 출입을 자제하라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골프 파동을 일으킨 이해찬 국무총리의 해임 건의를 하거나, 제안을 받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는 교육부장관에게 ‘그렇게 하라’고 할 정도로 원칙주의를 고수했다.

국회의원, 대선후보, 야당 대표…가장 빨리 성장한 정치인

참여정부가 막을 내리자 문 전 대표는 청와대를 나와 경남 양산으로 낙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를 다시 정치의 길로 끌어냈다. 이번에는 ‘참모’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홀로서기였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마지막 식사에서 들은 신신당부가 정치 입문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평생 동안 이룩한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반드시 정권교체 해야 한다. 지금 민주당 가지고는 안 된다. 시민사회까지 하는 범야권 대통합을 해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의 당부에 ‘혁신과 통합’을 만들었고 민주통합당이 구성됐다.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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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코 정치인이 되기를 마다했지만, 일단 정치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문재인은 다른 정치인이 수 십년 걸려 쌓는 경력을 단 몇 년만에 모두 거쳤다. 가장 왼쪽부터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 의원으로 당선된 모습, 2012년 대선 후보 포스터,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에 당선된 모습

정치인의 길은 승리보다는 패배가 많았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당 대표가 됐지만 재보선에서는 대부분 패배했다. 당도 쪼개졌다. 스스로도 정치에 입문한 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당 대표 때라고 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 영입에 이은 총선의 여소야대 결과로 한시름 덜긴 했지만 여전히 물음표는 남는다.

“최고의 원칙주의자” 

문재인 전 대표에게는 늘 최고의 ‘원칙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다.”

KBS를 그만두고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 고민정 아나운서는 문 전 대표를 떠올리면 한 마디로 ‘원칙’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최근에도 여쭤봤거든요. 저 나온 거 본 적 있으세요? 그랬더니 정말 없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보통은 없어도 그냥 본 거 같아요 하는데. 역시 원칙에 어긋나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으시는…”

“사람 좋은 문재인 말고 강한 문재인을 보고 싶다.” 시사인 인터뷰쇼에서 나온 청중의 질문에 문 전 대표는 이렇게 답한다.

“무엇이 강한 것인가? 아주 강경한 주장을 하는 것? 또는 정치에 능수능란해서 ‘정치 9단’이 되는 것?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모진 성품이 아니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는 일엔 아주 강하다.”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이 지난 대선에서 찬조연설을 할 때 밝혔듯, 특유의 원칙주의와 더불어 보수주의자들도 탄복하게 만드는 ‘인성’을 갖췄다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문재인 정부…과연 잘 할까?

문제는 그만큼의 정치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문 전 대표에게는 늘 ‘과연’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도 후보 본인의 호감도 증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염증과 정권교체를 바라는 열망이 작용한 탓이 크다. 원인이 어찌됐든 손학규, 안철수, 김종인 등 함께 일했던 정치인이 늘 적대관계로 돌아선다는 이미지도 하나의 부담이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아예 노골적으로 문 전 대표의 ‘무능’을 공격한다. “최순실이 써준 거 읽는 박근혜 대통령이나 딴 사람이 써주는 거 읽는 문재인 전 대표나 다를 게 뭐가 있나.”

19대 국회에서의 최하위권 의정 활동,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에서 불필요한 ‘사초 폐기’ 논란만 가중시킨 회의록 공개 주장도 ‘무능하다’는 주장에 근거를 더한다.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민정수석 재직 시절 결국 대통령 가족을 잘못 관리해서 노 전 대통령 서거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그가 핵심 역할을 했던 참여정부 자체가 그다지 ‘성공했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법원 개혁,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떠올려 보면 더욱 그렇다.

문 전 대표는 말한다. “공과가 있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성취를 거뒀지만 경제적 불평등,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나아질까. 물론 너나할 것 없이 몰려드는 탓에 옥석을 가리기 어렵겠지만 캠프 합류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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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세론이 확산되면서 캠프 인사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세 과시를 위한 무분별한 영입은 역풍이 될 수 있다. 옥석을 가리고, 어떤 사람과 어떤 나라를 만들지에 대한 믿음을 줘야 한다. 사진은 이래운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왼쪽)과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해 12월 암 투병 중인 이용마 MBC 해직기자를 만나 “언론 탄압에 앞장섰던 앞잡이들에게 철저히 책임을 묻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는 한편 미디어특보단에는 MB 정부 시절 연합뉴스 파업의 원인이 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친박 뉴스’를 주도한 인물로 분류되는 이래운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이 참여해 비판을 받았다.

비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의 남편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의 영입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삼성 출신의 양향자 당 최고위원,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인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귀족·악성노조’로 지칭하고, 이들이 일자리 창출에 장애물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참여정부 역시 역대 정부 중 가장 삼성과 친밀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문재인 정부는 이 같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이 정경유착이자 삼성그룹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 부분은 문제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청와대 정책실장이었고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 경제민주화위원장을 맡았던 이정우 같은 학자들이 이재명 성남시장 지지를 선언한 것도 불안한 마음을 가중시킨다.

물론 문재인 전 대표는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삼성이 재벌 개혁의 시작이고 핵심”이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

‘귀족 노조’ 문제에 대해서도 “극히 일부의 노동자들이 누리고 있는 점을 내세워 오히려 ‘노조가 문제야’ 하는 건 문제가 있다. 정규직 노조가 양보한다고 비정규직 봉급이 올라가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 예비후보자 토론에서 법인세나 준조세 발언을 살펴보면 여전히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너무나 ‘비정상적’인 대통령을 오래 봐 온 탓일까. 대통령이 되면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집무공간을 만들고 “퇴근길에 남대문 시장 불쑥 들러서 그곳의 상인들과 함께 소주 한 잔 격의 없이 나누면서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문 전 대표의 말에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정치인 문재인의 행보가 그동안은 결코 성공적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시민들은 정치인으로서 그의 딱 한 번이자 마지막 성공을 기다리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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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광주’로 간 뉴스포차. 미국이 광주 학살을 묵인 혹은 승인했다는 문서를 최초로 공개했던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을 만났다. 1996년, 5.18 관련 미국정부 기밀 문건인 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폭로한 셔록은 현재 광주에 머물며 5.18 연구자들과 함께 이 문건을 다시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있다. 오는 24일, 분석 결과를 발표한다.

팀 셔록은 전두환 군부의 광주 군사작전을 사실상 승인했고, 쿠데타를 묵인했거나 방조했던 미국의 이중성을 고발한 ‘미국 기자’이다. 셔록과 만나 광주와 미국 사이에 숨겨진 진실을 들어보자.

백악관은 80년 광주에 대해 분 단위로 보고를 받았다.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한다.

전두환은 새빨간 거짓말쟁이

전두환 그룹이 광주시민을 학살한 것은 베트남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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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노동 탄압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던 셔록은 앞으로 변해갈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에 관심이 크다. 지난 7일, 당시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한-미 관계와 5.18에 대한 문 대통령의 생각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수, 2017/05/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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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대표적 ‘트러블 메이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이번에는 북한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에 대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취소 문제로 논란에 중심에 섰다.

박 처장은 지난달 28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강진석에 대한 서훈 심사 부실 문제가 제기되자 “서훈에 연좌제가 적용될 수 없다”고 강변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 일가의 훈장 추서를 옹호한 모양새가 되면서 당장 극우 진영이 반발했다.

보훈처가 당장 상훈법을 개정해 서훈 취소를 추진하겠다고 말을 뒤집으면서, 논란은 이동휘 장지락(김산) 권오설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 취소 문제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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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춘 보훈처장은 지난달 28일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김일성 부모에게도 서훈을 할 수 있냐”고 묻자 “검토해보겠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념보수의 아이콘인 박 처장이 반국가단체 수괴인 김일성의 일족에게 서훈을 부여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김일성 일가인 줄 모르고 훈장을 줬던 보훈처가 현대사의 여러 측면을 내포한 김일성 일가에 대한 서훈 문제를 이렇다 할 공론화 과정 없이 서둘러 결론 내리 것이다. 박 처장이 책임을 면피하는 동안 우리 사회를 다시 한 번 보수ㆍ진보 양 진영으로 찢기고 있다.

언론에 군사기밀 유출로 군복 벗어

지금은 갈등 유발자로 여겨질 정도지만 정치인 박승춘의 시작에는 조직을 위한 자기희생(?)이 있었다. 육사 27기로 1971년 임관한 뒤 줄곧 군인의 길을 걸었던 박 처장은 2004년 7월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선교신 허위보고 파문’ 때 처음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

당시 해군은 무력 충돌에 앞서 남북 함정이 ‘무선 핫라인’을 통해 3차례 교신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고, 이 같은 사실이 국가정보원과 북측 전화통지문 등을 통해 뒤늦게 확인됐다. 해군작전사령관이 상부에서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릴 것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보고를 누락한 사실도 드러나면서 논란이 가중됐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진상조사를 지시하면서 군 수뇌부에 대한 대대적 문책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육군 중장)으로 군 정보병과 최고책임자였던 박 처장은 당시 남북 함정간 교신 내용 등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전달하는 돌출 행동으로 군사기밀 유출 논란을 자처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박 처장이 사실상 ‘항명’과도 같은 언론플레이에 나서면서 군기문란 사건은 청와대와 군의 대결로 비춰지고, 결국 보고누락 사건은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경고’로 일단락된다. 군 기무사령부의 조사를 받게 된 박 처장이 자진전역을 신청해 군복을 벗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봉합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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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춘은 2004년 북한이 NLL을 침범했을 때, 남북 함정 간의 교신내용을 언론에 유출한 혐의로 당시 합참 정보본부장직에서 해임되고,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곧장 정치권으로 달려갔다. 사진은 1999년 6월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일어난 우리 군함과 북한 군함과의 교전 모습. (사진 출처: http://m.blog.daum.net/spinoza1677/902?categoryId=27)

박 처장이 불명예 전역을 택한 배경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박 처장은 2011년 3월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NLL 교신 기밀유출과 관련해 “정부 어느 조직보다 상명하복하고 계통을 세워야 되는 군인으로서 적절한 행위였다고 생각하느냐”는 당시 박선숙 의원의 질문에 “소신껏 적절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는 정보 유출이 불명예가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앞서 2009년 12월 강원 강릉에서 열린 한 안보강연에서 자신이 반기를 든 덕에 “노무현 정권이 ‘군 때리기’에서 ‘군 달래기’로 선회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임기 첫해인 200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제병지휘관으로서 국군을 대표해 군 통수권자인 노 전 대통령에 충성을 다짐했던 군인이 1년도 채 안 돼 반기를 든 것을 무훈(武勳)처럼 여겼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군복 벗자마자 정치권행…극강 보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박 처장은 군복을 벗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치권을 향해 나갔다.

전역한 지 오래지 않은 2005년 12월 한나라당 국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발탁된 박 처장은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후보 공모에도 참여하는 등 정치인으로 빠른 속도로 변신해 간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박근혜 후보 캠프에 몸담는 등 박 대통령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다.

박 처장은 하지만 끝내 스스로 전장(戰場)을 떠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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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춘 처장은 군복을 벗자마자 정치권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공직을 얻었고, 공직을 활용해 정권재창출에 기여했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윗선의 코드에 맞춰 처신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애국보수를 자처하지만, 결국 출세주의자 아니냐는 의혹이 따라붙는다.

박 처장은 2009년 1월 150여개 보수단체가 참여한 정책협의회에서 “용산철거민 사건은 친북세력과 전장의 전초전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며 우리사회를 단숨에 이념 대결의 전장으로 치환시켜낸다.

조갑제씨 등 우익단체 거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의 행보는 18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침이 없어진다.

박 처장은 안보강연 등을 통해 “북한은 김일성이 탄생한지 100주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오는 2012년을 결정적 시기조성 완성의 해로 선포했다”며 “북한이 전면대결 태세를 선언한 주 전선은 북한인민군의 도발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는 친북좌익세력”이고 역설한다.

극단적 색깔론과 이념 몰이로 그는 극우 보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한다.

이명박 정부이던 2011년 2월 보훈처장으로 임명된 박 처장은 보훈처의 ‘나라사랑교육’ 등을 통해 자신만의 전쟁을 이어간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화하는 내용이 포함된 안보교육을 진행하면서 대선개입 논란을 자처했다. 박 처장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된 직후인 2013년 1월 호국보훈안보단체연합회 신년교례회에서는 “성과가 지대했다. 여러분들 뜻하신 바를 이뤘다”며 대선 개입을 시인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그러면서 “제가 2년 동안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보훈 정책을 추진했다”고 스스로를 치하했다고 한다.

대선 앞두고 ‘국정원장 영전설’ 돌아

무관 출신이어서일까 박 처장은 늘 당당하다.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에게 큰 빚을 졌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 처장이 저렇게 당당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박 처장은 18대 대통령선거 개입 논란에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보전했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곡 지정 문제로 우리 사회를 두 쪽으로 갈라놓고도 지난 대선 당시 국민통합을 전면에 내세웠던,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문책은커녕 질책도 받지 않았다.

박 처장이 지난 2014년 보훈처가 요구한 장진호 전투참여 미군 기념비 예산 3억원이 삭감되자, 국회 정무위원장실(위원장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을 찾아가 탁자를 내리치고 고함을 치는 등 소란을 피운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청와대라는 뒷배가 없고서야 차관급인 보훈처장이 어떻게 여당 중진 의원에게 큰소리 칠 수 있겠냐고 여당 의원들조차 혀를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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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춘 처장은 역대 최장수 보훈처장일 뿐 아니라 국회에서 3번 탄핵되고도 살아남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윗선의 절대적 신임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장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http://m.leaders.kr/news/articleView.html?idxno=25125)

더불어민주당ㆍ국민의당ㆍ정의당 소속 의원 166명은 지난달 23일 국가보훈처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해임결의안은 2013년ㆍ2015년에 이어 세 번째다. 보훈처가 올해 한국전쟁 66주년 기념 광주 지역 시가행진에 제11공수특전여단의 참여를 추진한 게 문제가 됐다. 이 부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에게 총을 쏜 계엄군이다.

하지만 박 처장은 이번에도 건재하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5년 6개월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박 처장은 보훈처장 역대 최장기 기록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박기석 처장의 5년 7개월 재임 기록 갱신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19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 1년 5개월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다시금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처장에게 새 역할이 부여될 수 있다는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기도 하다.

박 처장이 보훈처에서의 소임을 마치고 국정원장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다는 설이다. 박 처장이 군에서 30여년간 대북정보를 담당한 만큼 적임자라는 것이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이 지난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 때부터 안보분야 자문역으로 함께 활동했다는 점도 박 처장의 국정원 행을 점치는 근거로 언급된다.

목, 2016/07/1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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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의 변화와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문재인 대표께서 직접 영입한 인사, 일명 더불어 어벤저스의 일원인 유영민 포스코 경영연구소 사장의 부산 해운대 갑 선거운동 현황.
화, 2016/03/22-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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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로마트, 한국 민주주의 전환점 마련한 젊은이들 -김정은 이름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하던 청년들 -‘헬조선’ 등 총체적 난관과 세월호로 분노 표출 -촛불 혁명의 원동력…지속적 참여 가능성이 과제 아시아 태평양 지역 문제를 주로 다루는 미국의 외교전문지 <디플로마트>가 현실에 무관심하던 한국 청년들의 태도 변화가 촛불 혁명의 원동력이었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환점이라고 보도했다. 하버드대학 정치학 박사과정의 크리스 캐로써스는 지난 2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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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7/06/2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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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6차 핵실험 이후 천하의 여론방·토론방이 뜨겁다. 의견백출, 백가쟁명이 나쁘지는 않지만 어쩐지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이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문제가 큰 데다 워낙 변수가 많고 그조차 매우 복잡하게 꼬여 있기 (또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문제를 보는 시각과 주목하고 강조하는 지점이 백인백색이다. 국제적으로도 관련 당사국마다, 또 그 내부에서도 입장과 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크게 다르다.

양국체제는 중성미자와 같은 전혀 새로운 발상

이럴 때 전혀 새로운 착상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어질러진 테이블을 싹 밀치고 백지 위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중성미자
물리학에서 ‘중성미자’의 발견은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줄 핵심 열쇠로 주목받고 있다. 중성미자처럼 해방 이후 70여 년 동안 생각하지 못해왔던 것이 한반도 양국체제 아닐까? (이미지: 인터넷 캡처)

일례로 물리학에서 ‘중성미자(neutrino)’의 발견이 그렇다. 방사선 방출로 원자의 성격이 변할 때, 기존 입자와 새로운 입자의 에너지 합이 일치하지 않았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위배되는 골치 아픈 현상인데,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전혀 새로운 발상이 나왔다. 보이지 않고 관측되지 않는 미세입자가 이 변환 과정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역사적으로 뛰어난 착상들이 종종 그러했듯 이 생각도 처음에는 황당하다고 조롱받았다.

그러나 이 착상에 몰두한 이들이 결국 그 존재를 입증해냈다. 애초에 ‘보이지 않고 관측되지 않는다’고 하였던, 그래서 조롱을 받았던 이 입자는 이제 물리학·우주론의 최대 총아가 되었다. 지구와 태양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가 하면,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줄 핵심 열쇠로 주목받고 있다. 보이지 않기는커녕 알고 보니 가장 많은 입자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몸을 수조 개의 중성미자가 투과하고 있다. 다행히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양국체제’가 중성미자 같은 것 아닐까? 해방 이후 70여 년 동안 생각하지 못해왔던 것, ‘보이지 않고 관측되지 않았던 것’이 한반도 양국체제 아닐까? 반드시 하나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문제 해결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는 것 아닐까? 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인데 말이다. 그 70여 년 간 좌든 우든 남이든 북이든 통일을 말해왔다. ‘분단’은 일시적이고 ‘통일’은 항구적이다 라고. 오직 하나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만 알면 곤란하다. 둘을 생각해 볼 때다.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가 남북의 독재 불러

반드시 하나라고 하니까 70년 동안 피차 죽기로 악착같았던 것 아닌가? 먹히지 않으려고 말이다. 서로 인정하고 제각각 잘 살아보자고 하면 안 되나? 절대로 불가능한가? 그렇다면 도돌이표다. 피차 사생결단, 죽기로 악착같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남이든 북이든 독재가 판쳤다. 독재를 끊어 보자고 4·19를 하고, ‘서울의 봄’을 하고, ‘광주항쟁’을 하고, ‘6월 민주화 대항쟁’을 했지만, 결국 다시 독재가 되돌아 왔다. 다이하드(die hard)였다. 잡초보다 끈질겼던,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였다. 이제 위대한 촛불이 또 한 번 독재를 끊었다. 이번에는 영영 끊어야만 하겠다.

그 지긋지긋했던 ‘독재의 순환고리’가 먹고 살았던 것이 ‘분단체제’다. 통일을 해야 하는데 저기 휴전선 너머 남에, 휴전선 너머 북에, 불구대천의 원수, 적이 있다. 이 흉악한 적과 맞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독재를 할 수밖에 없다고, 독재자들은 이야기해 왔다. 그것을 유신 독재라 하든, 인민 독재라 하든, 이름을 뭐라 그럴 듯하게 붙이든, 그것은 그냥 적나라한, 창피할 정도로 아주 지독한 독재였을 뿐이다.

남북정상회담

한반도 양국체제란 간단하다. 한국(ROK)과 조선(DPRK)이 수교하여 공존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 러시아와 수교한 것처럼, 조선도 미국, 일본과 수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정상(正常)이다. 이미 다 유엔 회원국들이다. 유엔헌장에 회원국들은 서로 주권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다. 유엔 회원국들끼리 수교를 안 하고 있는 게 비정상일 따름이다.

한 민족이 두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멀쩡히 잘 살고 있다. 옛적 통일신라와 발해도 멀쩡히 잘 살았다. 서로 하나라고, 반드시 통일하겠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둘이라고 오가지 못하나?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워진다. 서로 비자 받아 오가면 된다. 경제 협력이 안 되나? 이거야 지금보다 안 될 수는 없으니 두 말하면 잔소리다.

발해 신라
한 민족이 두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그렇지만 우리 민족도 옛적 통일신라와 발해가 멀쩡히 잘 살았지 않은가. 서로 하나라고, 반드시 통일하겠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양국체제일 때 남북협력 오히려 더 증진될 것

둘이 되더라도 초반에는 관계가 안정되기까지 덜컹거림이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익숙해지는 데 필요한 잠시 동안의 물리적 상수일 뿐이다. 시작이 반이다. 남과 북이, 한국과 조선이, 서로를 인정하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굳히는 것, 그 합의를 이루는 것이 우선이고 중요하다. 이 결심이 진실하고 솔직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면 된다.

하기로 하면 남 탓할 일이 많기는 하겠다. 그러나 남 탓 이전에 우리 내부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과 조선이 이렇게 움직여 갈 때, 주변 어느 나라도 이 길을 대놓고 반대하거나 방해하지 못한다. 도대체 어떤 나라가 그럴 권리와 명분이 있다고 나서겠는가? 세계가 축하할 것이다. 세계를 평화롭게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수, 2017/09/1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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