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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우파’의 마지막 희망,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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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우파’의 마지막 희망,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익명 (미확인) | 화, 2017/02/21- 10:44

<대선후보자 시리즈>

다른백년은 ‘금주의인물’ 코너를 통해 매주 소개해 온 인물 가운데 이번 대선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을 추려 <대선후보자 시리즈>를 마련했습니다. 어떤 후보자는 소개 시점이 빨라 지금 상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후보자도 있습니다.

대선 후보자들의 과거 행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이번 시리즈가 올바른 선택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마운드에 오른 폐족, 안희정 충남도지사 (2016. 9. 13)

SNS를 든 싸움닭, 이재명 성남시장 (2016. 10. 14)

말이 통하는 보수주의자, 유승민 의원 (2017. 1. 20)

계급배반을 꿈꾸는 금수저, 남경필 경기도지사 (2017. 2. 14)

아스팔트 우파의 마지막 희망,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은 ’관운’이 좋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는 1980년 만성 담마진(두드러기)로 병역을 면제받고 이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징병 신체검사를 받은 365만여명 가운데 담마진으로 병역을 면제받은 남성은 4명에 불과하다 (2016년 6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자료). 

2006년과 2007년 검사장 인사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졌지만 고검장은 사법시험 동기 가운데 가장 빨리 올랐다. 고검장을 끝으로 검사복을 벗었지만 박근혜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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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권한대행은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부장관,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 권한대행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 박근혜 탄핵 이후 방향을 잃은 냉전보수세력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국무총리에 오를 때도 운이 따랐다. 2015년 5월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 게이트로 취임 두 달 만에 낙마하며 갑자기 국무총리가 됐다. 2016년 11월에는 김병준 책임 총리 후보자가 임명되며 ‘실업자’가 될 뻔 했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오히려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출마를 포기하자 여권 주자 가운데 여론조사 지지율 1위에 오르며 ‘황교안 대망론’까지 불고 있다. 

이제 그의 운은 시험대에 올랐다. 박근혜 정권의 핵심이었던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할지, 아니면 억세게 좋은 운이 그에게 다시 날개를 달아줄지 말이다.

“나는 흙수저”…유신시절 학도호국단장

 “여러분은 나를 금수저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흙수저 중의 무수저다.”

2016년 12월27일 기자 간담회에서 황 권한대행은 자신이 ‘무수저’라며 6.25 전쟁 당시 월남한 가족사를 언급했다. 그는 1957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는데, 북에서 피난 온 아버지가 고물상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그는 법무부 장관 재직시절 모교인 봉래초등학교에 방문한 자리에서 부유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언급하며 “돈을 많이 벌거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초·중등학교까지 황 권한대행은 반장을 도맡아 하는 등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지금의 그의 성향은 경기고 재학시절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동기생이던 이종걸 민주당 의원과 노회찬 정의당 대표는 유신 선포 1주년을 맞아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지만 황 권한대항은 이에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3학년 때 학도호국단의 연대장(학생 대표)을 맡기도 했다. 학도호국단은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한 ‘10월 유신’ 을 밀어붙이며 학생회를 폐지하고 만든 준군사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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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왼쪽부터 황교안, 이종걸, 노회찬. 이들은 경기고 72회 동기들이다. 아래 사진은 1975년 경기고 학도호국단 연대장때의 황교안 총리(맨 앞쪽 어깨띠와 완장을 찬 이)의 모습. (사진 출처: 경기고 졸업사진)

그가 총리에 올랐을 때 이종걸과 노회찬은 “황교안 총리는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대부분 학생들이 독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어용조직인 학도호국단 간부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법대를 노렸지만 실패한 그는 재수 끝에 1977년 성균관 법대에 입학해 고시공부에 매진했다. 반유신 투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였지만, 그는 ‘운 좋게’ 병역면제를 받은 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총리 청문회 당시 군 병원의 공식 진단 6일 전에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끝내 의혹이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피부병을 앓고도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기도 했다.

확신형 공안검사…민주정부에서 밀려나

그는 검사로 임용된 뒤 공안검사의 길을 걸었다. 대부분 공안검사들이 공안 경력을 내세우기 꺼리지만, 그는 법무부 장관 시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관보다 공안검사가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밝혔다. 

그는 1987년 서울지검 공안검사를 시작으로 대검찰청 공안 1·3과장과 서울지검 공안2부장을 지냈으며, 공안을 총괄하는 서울지검 2차장을 맡았다. 김현희 칼(KAL)기 폭파 사건과 임수경 방북 사건, 1980년대 말 학생 운동 등 여러 굵직한 공안 사건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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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권한대행이 1988년 펴낸 ‘국가보안법’. 그는 이 책으로 ‘미스터 국보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그는 공안검사의 ‘본색’을 고수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김대중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  <국가보안법 해설>이란 책을 써서 ‘미스터 보안법’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2009년에 쓴 <집회·시위법 해설>에서 “집시법 역시 4·19 혁명 이후 각종 집회와 시위가 급증하여 무질서와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5·16 혁명 직후 제정됐다”며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규정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공안검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꿋꿋이 고수했다.

아예 그는 ‘좌파정권에 저항하다 밉보인 투사’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사장 인사에 밀린 것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미운털이 박혀서라는 주장이었다. 

2011년 그는 부산고검장 시절 교회에서 한 특강에서 이렇게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김대중씨는 계속 재야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도 조사를 받고 검찰에서도 조사받고 정부하고는 계속 갈등했던 분이다. 그런데 이런 분이 대통령 딱 되고 나니까 그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던 검사들이 전부 좌천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공안부 검사들에 의해 대우중공업 사태와 관련해 구속까지 된 분이다. 이런 분이 대통령이 되니까 공안부에 오래 있던 사람들에 대해 여전히 곱지가 않았다”

박근혜 아바타…공안통치 좌장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그는 법무부 장관, 총리를 거치며 정권의 해결사 노릇을 했다. 

2013년 9월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를 지휘하던 중 ‘혼외자’ 의혹이 불거진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의 감찰을 지시해 옷을 벗게 했다.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하려 하자 “법률가의 양심”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당연히 대선개입 사건 수사는 힘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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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은 법무부장관시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를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 사건이 박근혜정부의 정통성과 직결된 사안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박근혜의 아바타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헌정 사상 최초인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를 총지휘하기도 했다. 

검찰이 세월호 참사 이후 해경 123 정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하려던 것을 막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 기간 연장 요청에 그는 20일 현재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으며 야당의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실정법보다 교회법이 우선

공안검사와 함께 그를 설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이다. 문제는 그의 신앙이 공적인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7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탈레반에 납치됐을 때 무분별한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이 일자,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런데 과연 납치된 그들은 비난받을 일을 한 것인가?”라고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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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권한대행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데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 사진은 2012년 2월 열린 ‘변호사 친교의 밤’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는 황교안의 모습. 오른쪽은 아내 최지영씨가 낸 복음성가집 앨범 (사진 출처: http://www.bluetoday.net/)

그가 쓴 <교회와 법 이야기>에서 “주일에 사법시험 치르는 것을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결정해 유감이다”라며 실정법 위에 교회 논리를 앞세우기도 했다. 

결국 그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공안검사’, ‘독실한 기독교 신앙’, ‘박근혜 정권의 해결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철저하게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지향했고, 이른바 ‘애국 보수세력’의 가치를 대변해왔다. 

실제로 그의 대망론을 부채질하는 것은 자유한국당(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몸으로 막겠다는 ‘아스팔트 우파’들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안 하며 주가를 높이고 있다. 황 권한대행의 출마 가능성에 대해 여론조사지지율이 20%까지 오르지 않으면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권한대행이라는 중책을 쉽게 내려놓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분명한 건 광장의 촛불 민심은 그를 황교안 개인이 아닌, 박근혜 대통령의 ‘아바타’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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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라는 용어에 대하여

설 연휴 잘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번 편지에서도 많은 문제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쓸 내용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논의의 범위가 방대해서 제 생각을 다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 저는 ‘한국사상사’라는 제한된 문맥에서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개벽’이라는 자생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근대’라는 번역어를 빌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세계 근대’나 ‘동아시아 근대’가 아닌 ‘한국 근대’라고 한 것이고요. 부제를 “개화에서 개벽으로”라고 했던 것은 종래에 개화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했던 관점에서 개벽 중심으로 근대를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분들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은 ‘중국’이나 ‘세계’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근대’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대상도 사상이나 철학보다는 ‘체제’(관료제)나 ‘시스템’(자본주의)과 같은 제도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고요. 반면에 저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국사상사를 서술하는 범주로서 ‘근대’라는 개념을 빌려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실학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학’에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실학담론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실학담론을 주창한 1930년대의 조선학운동가들은 “전통으로부터 근대(=지금과 ‘가까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 사상가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개벽파와 문제의식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요. 다만 양자의 차이가 있다면 조선학운동가들이 유학이라는 틀을 유지한 채로, 즉 유학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찾고자 했다면, 개벽파는 말 그대로 유학을 개벽해서, 유학과는 다른 ‘학’을 창조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똑같이 유학을 사상자원으로 활용하고는 있지만 개벽파의 경우에는 ‘학’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조선유학 500년이 끝나는 하나의 사상적 전환점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을 저는 ‘근대’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범위에서 ‘근대’라는 개념을 쓰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처럼 동아시아사나 세계사와 같은 거시적 시각에서 ‘근대’를 논하는 분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왜 굳이 그런 혼란스런 ‘근대’ 개념을 고집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벽’의 사상적 획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근대’라는 용어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곧바로 ‘개벽’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우리에게 ‘개벽’은 낯설고 ‘근대’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용어로 낯선 용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벽에 담긴 사상적 획기성으로 말하면 사실 ‘근대’라는 말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대’는 고대나 중세와 같은 단계적 시대구분론에서 나온 개념인데 반해, 개벽은 ‘개벽 전’과 ‘개벽 후’로 양분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이전과 이후로 나누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상사는 크게 동학 이전과 동학 이후로 양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사상의 ‘작’입니다. 개화파는 중국으로부터의 탈피는 했을지언정 여전히 ‘술’의 관행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1876년 강화도조약, 개항을 시발로 삼는 ‘개화기’라는 시대구분”을 탓하시면서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설파하신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동학에서 시작되는 한국사상의 ‘근대기’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개벽기’와 상응합니다.

이와 같이 ‘한국’ 근대의 기점을 동학으로 잡는 것은 저의 개인적인 한국사상사 서술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이 구분이 다른 나라나 인류 문명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과는 다른 한국사상사 서술방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최제우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최한기도 근대를 준비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기’ 개념을 중심으로 서양의 천문학과 정치체제 등을 수용하여 ‘기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최한기 기학의 선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홍대용도, 『의산문답』을 보면, 서양의 천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유불도 삼교와 성인의 권위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한기처럼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흔적이 뚜렷합니다. 이 두 사람만 보아도 확실히 조선후기는 뭔가 새로운 사상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아직 저의 역량이 부족해서 이런 사상가들을 본격적으로 논의에 포함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기학과 동학이 동시대에 나왔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김태창선생님께서 “앞으로 한국철학의 과제는 기학과 동학을 융합‧접목시켜 새로운 ‘학’을 만드는 일이다”고 하셨다고 들었는데, 탁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업이야말로 21세기 한국에 필요한 새로운 ‘개벽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근대’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실천적인 관심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인들은 ‘근대’라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편지에서 소개한 중국인 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서구 근대의 독을 가장 많이 먹은 나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근대화’되지 못해서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부정하면서 서구를 추종하고, 한편으로는 일본을 도덕적으로 미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근대화를 평가하는 상반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중국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노자는 노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근대는 근대로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근대로 상처받은 영혼을 근대로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학을 비롯한 개벽파를 ‘자생적 근대’나 ‘토착적 근대’로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비어 있는 ‘전통’과 ‘현대’의 사이를 ‘개벽’으로 채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통(유학중심)-근대(개벽중심)-현대(서학중심)”의 구도로 한국사상사를 나름대로 균형있게 서술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저의 문제의식(‘치유로서의 개벽근대’)에 공감해 준 서평이 하나 나왔는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박지영(인전) 교무님이 쓰신 「근대의 재발견으로 개벽종교를 치유하다」(『개벽종교』 80호)입니다. 저보다도 제 마음을 더 잘 알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개벽사상’과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종래의 탈식민주의론은 또 하나의 ‘술(述)’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상을 빌려다가 거기에 기대어서 자신이 처한 사상적 곤경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생님이 맑시즘 역시 개화좌파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중심주의에 갇히거나 그냥 공부로 끝날 뿐입니다.

반면에 개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습니다. 최근에 유상용선생님이 “개벽은 나로부터 세계를 보는 눈을 여는 것”이라고 했는데, 탁월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편협한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에 빠진 것도 아닙니다. 유학과 서학을 시야에 넣으면서 ‘한울’이라고 하는 세계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개벽 이전에도,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홍대용이나 최한기는 예외라고 하고). 물론 개벽이 사상적으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학과 동학의 관계

유학과 동학의 관계는 저로서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은 거의 대부분 유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확실히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유학자였고, 이 점은 증산교의 교조로 알려져 있는 강증산이나 대종교를 창시한 홍암 나철, 그리고 원불교를 이론화한 정산 송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증산은 동학을 평가하면서 “유학을 버리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하였고, 실제로 동학 통문(通文)에는 ‘도유(道儒)’라는 표현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전봉준과 같은 동학접주의 대부분이 서당 훈장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부의 탄압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겠고요.

그런 점에서는 분명 선생님이 지적하신대로, 동학과 개벽파는 유학이나 불교와 같은 전통사상의 자산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학’을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 또는 ‘민중불교’라고 하지 않고, ‘동학’이나 ‘증산교’ 또는 ‘원불교’라고 새로운 이름을 붙였던 이유는 ‘학’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을 자산으로 삼고는 있지만, 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학’을 만든 것입니다. 최제우가 ‘다시 개벽’을 주창하거나 강증산이 ‘묵은 하늘’을 뜯어고치자고 한 것은 이런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학’이 나오게 된 이유는 종래의 유학적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시대적 전환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이 제가 동학을 말할 때 유학과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도 유학 경전을 버리고 독자적인 경전을 만든 이상 이미 유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유학을 유학이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시서(詩書)』라는 경전을 신봉하는 것인데 – 마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경』을 신봉하듯이요 – 동학교도들은 『시서』나 『논맹』이 아닌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경전으로 받들었습니다. 물론 교양으로는 유교경전도 공부했을 수 있습니다만, 농민들이 사서삼경이나 성리학 문헌을 공부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생각됩니다. 전봉준과 같이 유학자의 신분에서 동학에 입도한 경우라면 당연히 유교경전은 기본소양이었겠지만요 -.

그래서 이들에게 ‘유학’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기는 어렵습니다. 천도교인인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에게 “당신은 유학자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아마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냥 “천도교인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원불교 성직자도 마찬가지고요(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학을 배척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런데 ‘개신유학’이나 ‘급진유학’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여전히 유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주자학이나 양명학을 신유학이라고 하듯이요. 그래서 제가 이 표현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산교가 선도(仙道)를 개벽하고, 원불교가 불교를 개벽한 것처럼, 동학이 유학을 개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향벽설위에서 향아설위로의 전환”입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제사를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불경죄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벽’으로 상징되는 성인이나 조상보다 ‘나’를 더 존귀한 존재로 설정하고 있으니까요. 동학이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사교’로 지목당하고 최제우나 최시형이 처형당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명분(名分), 즉 예적(禮的) 질서를 무너뜨렸으니까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동학은 ‘개신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개벽유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원불교를 ‘개벽불교’라고 부를 수 있듯이요. 요즘에 저는 원불교를 ‘동학불교’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개벽/동학’과 ‘불교’를 다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동학도 개벽과 유학을 다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사상체계라는 뜻에서 ‘개벽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신’이나 ‘급진’은 하나의 독립된 사상체계를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새롭거나 과격하다는 수식어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개벽’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상조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개벽유학’은 ‘개벽’이라는 사상과 ‘유학’이라는 사상의 합성어를 의미합니다. 마치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이 한편으로는 최제우를 개벽의 선지자로 존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을 주체로 한다고 말하였듯이 말입니다. 아일랜드의 젊은 한국학자인 캐빈 콜리는 정약용의 사상체계를 ‘개신유학’이라고 하지 않고 ‘기독유학’(그리스도교+유교)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것도 비슷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개신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유학’ 하나로 한정되지만, ‘개벽유학’ 또는 ‘기독유학’이라고 하면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두 개로 늘어납니다. 이 중에서 ‘유학’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연속성이 강조되고, ‘개벽’이나 ‘기독(교)’을 강조하면 유학과의 단절성이 강조됩니다(물론 정약용의 사상은 유학적 요소가 그리스도교적 요소보다는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동학에는 두 측면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동학이 유학의 연속선상에서 논의된 측면이 강했다면, 저는 단절성을 강조해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이고요.

아울러 어떤 A라는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B라는 사상자원을 활용했다고 해서, 새로 만들어진 A라는 사상을 반드시 B라는 사상 계열로 분류해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자원으로만 활용할 뿐, 내용 자체는 전혀 다른 사상체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동학과 서학의 문제

제 생각에 동학은 단지 서학의 도전에 대한 대응일뿐만 아니라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습니다. 최제우는 『동경대전』에서 “인의예지는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수심정기는 내가 새롭게 정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학뿐만 아니라 분명히 유학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동학이 유학도 아니고 서학도 아닌 제3의 길을 갔다고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동’에는 ‘서’에 대한 ‘동’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동’의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용례’는 일찍이 신라시대의 최치원에게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최영성교수님의 선행연구에 의하면, 최치원은 신라는 ‘동국(東國)’이고 중국은 ‘서국(西國)’이라고 하면서, 신라인을 ‘동인(東人)’이라고 하고, 한반도를 ‘동방(東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에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한반도에 사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에는 ‘동방’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동인, 동국, 동방은 모두 서세동점이 시작되기 이전의 개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학’은 ‘동양학’이 아니라 ‘한국학’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어떤 분들은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의 영향으로 탄생했다고들 말합니다. 『동경대전』에 나오는 ‘천주’나 ‘상제’ 개념을 예로 들면서요. 주로 그리스도교신학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주장이라고 생각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학은 서학의 ‘자극’을 받아서 탄생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로는 ‘상제’나 ‘천주’라고 쓰고 있지만 한글로는 ‘하늘님’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 ‘하늘님’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늘신앙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상제나 천주는 그것을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서 빌린 말이고요. 그래서 오히려 천주교의 신관이 이런 토착적인 하늘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하고, 동학도 마찬가지로 그런 토착적 신관 위에서 성립한 신종교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학의 자극을 받았을 수는 있는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다산 정약용이 서학적 신관을 수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부족하지만 ‘근대’와 ‘유학’의 문제에 대해 제 나름대로 답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제기하신 문제의 취지에 어느 정도 부합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개벽학의 모색

 마지막 부분에 제시해 주신 “술이 아닌 작의 필요성,”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 “밖보다는 안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개벽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개벽문화와 개벽학을 만드는 일이라고 보고요. 지난주부터 페이스북에 『개벽일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벽에 대해서 남에게 들은 이야기나 자신이 생각한 단상 등을 글로 남겨두고 있는데, 이것이 죽을 때까지 쌓이면 개벽학의 얼개가 대충 짜여질지 모르겠습니다.

“개벽기에 대한 시대인식”은 삼일운동의 사상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삼일운동’하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떠올리기 십상인데, 이것 역시 개화의 시선으로만 사태를 바라보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삼일독립선언서」의 사상적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개척정신(“자가의 신운명 개척”), 도덕주의와 시대전환 의식(“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등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요소들이야말로 개벽사상의 특징이었습니다. 개화파들은 쓸 수 없는 문장입니다. 이 개벽정신이 바로 삼일운동의 내적인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외적인 요인이었다고 한다면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삼일운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독립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독립은 물론이고 사상적 독립까지 아우르는 ‘독립’ 말입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독립한 상황이지만 사상적 독립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상적 독립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이 개벽의 자세입니다. 삼일운동에서 만개했는데, 아쉽게도 해방 이후로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깨어있어야 하겠지요.

선생님과 하자센터의 김현아 선생님이 기획해 주신 ‘개벽학당’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저로서는 10대 후반의 젊은이들과 함께 한국사상과 개벽정신을 얘기할 수 있는 첫 번째 자리이자 시험의 무대입니다. 아울러 원광대학에서도 박맹수총장님이 중심이 되어 개벽의 일꾼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사회를 이끌어 갔듯이, 한국사회도 개벽의 일꾼들이 진취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개벽이 이처럼 하나의 사회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개벽학’이라는 체계적인 ‘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언문」으로는 아무래도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고 단발적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주자학이 동아시아를 700년 이상 이끌어 갔듯이, 그에 상응할만한 개벽학이 요청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민주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개벽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금, 2019/02/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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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올해는 ‘천당에서 지옥으로’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지지율의 부침이 극심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의 완벽한 복수라고 할 대첩의 기억은 이제 희미하기만 하다. 전운이 감돌던 위기감, 남북 정상의 연이은 만남이 가져온 감동과 기쁨, 사상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이 야기한 흥분도 기억 저편에 있다. 눈 밝은 시인의 표현을 빌어 말해 보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룬 결과는 지지율 폭락

이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참여정부 당시의 경험을 오독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포스트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포함해 많은 경우 참여정부 당시에 포스트를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참여정부 실패(낮은 지지율, 연이은 선거패배, 정권채창출 실패, 노 대통령의 서거 등)의 가장 큰 원인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정책(물론 참여정부의 정책패키지가 근본적이고 급진적이었는가는 논쟁적인 주제다)의 추진에서 찾는 것 같다. 즉 ‘시간이 한참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데다 다수 유권자들에게 소구되지도 않는 정책들을 펼치다가 지지율 하락과 선거 참패를 불러왔고 급기야 노무현을 잃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이 이런 수준이라면 펼 수 있는 정책 조합과 선거전략은 자명하다.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남북 경협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면 투자와 고용, 성장의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에 올인하고, 사회경제적 모순과 개혁은 관리하는 수준에서 운용하며,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적어도 사회경제 개혁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가 그간 보인 스탠스를 보면 이같은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과 처방이 모두 틀렸다는 데 있다. 남북 관계라는 마차로 사회경제적 모순이라는 말을 견인할 수는 없으며, 양극화로 집약되는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국민적 일체감과 유대감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정치적 반대자를 만들지 않는 정치는 반(反)정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정책과 정무를 복무시키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남북관계를 힘있게 추동해야 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 적극적 지지자들과 격렬한 반대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언컨대 지속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위태롭기 그지 없는 지지율 80%보다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며 획득한 콘크리트 지지율 55%가 압도적으로 힘이 세며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는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루고 그 대신 지지율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과는 재앙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게도 구럭도 잃은’ 셈이다.

칼럼_190108

 

부동산공화국 혁파부터 시작하자

부동산 문제야말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대표적 영역이다. 집이 없는 중산층과 서민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집값에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완전히 배신당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경제는 압도적으로 부동산이다. 작년 7월 이후 본격화 된 문재인 정부 지지율 하락이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과 타이밍을 같이 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놀라운 대목은 문재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책임이 큰 김수현 수석을 정책실장으로 승진시킨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지나간 것은 잊자. 앞으로가 중요하다. 사면초가 상태에 몰린 문재인 정부가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길은 자명하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서 그걸 지렛대로 정치적 지지층을 강력히 복원시키는 길이 그것이다. 어렵고 힘든 길임을 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한다고 해서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공화국 혁파에 나서면 당장은 건설투자가 줄고, 고용지표가 악화되며, 부동산 자산이 감소할 것이다. 정치적 후폭풍도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되는 대한민국’, ‘공정과 혁신이 가능한 대한민국’,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동산공화국을 혁파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공화국 혁파로 생기는 정치적 반대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정치적 지지자들(그들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수혜자들(언뜻 비조직적으로 보이고 미덥지 않게 여길 수도 있는)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그런 안목과 믿음 없이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이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역사와 대의에 헌신하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를 지닌 정치인과 정당을 시민들은 끝내 지지하고 지켜준다는 믿음의 결합이다. 노무현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노무현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이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해 올해부터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담대한 길을 뚜벅 뚜벅 걷길 희망한다.

화, 2019/01/0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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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 긴급 기자회견

"사법적폐 판사 탄핵하라"

전국법관대표회의 법관 탄핵소추 촉구선언 채택, 국회는 즉각 나서라

 

 일시 및 장소 : 2018년 11월 20일 (화) 오전 11시, 국회 정문 앞

 주최 :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

 

11월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는 2차 정기회의를 열고 “재판독립 침해 등 행위에 대한 헌법적 확인 필요성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법관 스스로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에 대한 탄핵 소추를 촉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이하 시국회의)는 지난 10월 30일 적폐법관 6인에 대한 탄핵을 요구하였고, 주말 집회와 시국회의를 진행하며 지속적으로 적폐법관 탄핵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법농단 피해자 단체는 지난 15일부터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강력한 사법적폐 청산 요구와 투쟁이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국회가 더 이상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시국회의는 국회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하여 국회가 지금 당장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킬 것을 촉구할 예정입니다. 시국회의 참가단체 및 농성단 발언, 기자회견문 낭독 등이 있을 예정입니다. 기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를 요청드립니다.

화, 2018/11/2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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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xe_content"><h2>사법농단 판사 탄핵하라 촛불집회</h2> <h2>일시 장소 2019년 2월 15일 (금) 19시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h2> <p> </p> <p>재판거래, 법관 사찰 등 양승태 대법원의 광범위한 사법농단 전말이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으며, 사법농단의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구속기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법농단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비단 양승태 전 대법원장뿐만 아닙니다. 이에 가담한 법관들도 상응하는 정치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법농단에 가담한 법관들에 대한 대법원의 징계는 솜방망이에 불과했고, 처벌을 받아야 할 이들이 여전히 재판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법농단에 가담한 법관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고 탄핵을 해야 할 국회는 아무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p> <p> </p> <p>이에 국회가 사법농단 사태 해결을 위해 2월이 가기전에 조속히 법관 탄핵 소추안을 발의하고 처리할 것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개최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p> <p> </p> <p>▣ 사법농단에 적극 가담한 판사 명단</p> <p>1차 명단 : 권순일 정다주 이민걸 이규진 김민수 박상언 <a href="http://www.peoplepower21.org/index.php?_filter=search&mid=Judiciary&sea…; target="_blank" rel="nofollow">>>자세히보러가기</a></p> <p>2차 명단 : 김종복 나상훈 문성호 시진국 신광렬 윤성원 이진만 임성근 조한창 최희준 <a href="http://www.peoplepower21.org/index.php?_filter=search&mid=Judiciary&sea…; target="_blank" rel="nofollow">>>자세히보러가기</a></p> <p> </p> <p>▣ [서명캠페인] "어마마? 적폐판사님 아직도 계세요?" 사법농단 가담 법관 탄핵 촉구 서명하러가기 >> <a href="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ejBFZZ8M9thTZgDIMtvUk0mvSje-…; target="_blank" rel="nofollow">http://bit.ly/법관탄핵서명</a></p&gt; <p> </p> <p> </p> <p><img alt="20190215_이미지_법관탄핵촉구촛불집회.jpg" src="http://www.peoplepower21.org/./files/attach/images/37219/641/521/001/43…; /><a class="dropdown-toggle rounded font-face" href="http://www.peoplepower21.org/PSPD_press&quot; rel="nofollow">자료실</a></p> <p> </p> <p> </p> <p> </p> <p> </p> <p> </p></div>
수, 2019/02/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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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문 없이 결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4일부터 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9차 북-러 경제협력위원회>가 열렸다. 8차 경제협력위가 지난해 3월 평양에서 열린 것을 보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이건만, 마치 북한이 하노이 북미 회담에서 기대하던 제재 해제가 안풀리자 대안으로 러시아와 경제협력을 꾀하는 듯한 양상으로 일부 언론에서는 묘사하고 있다. 이번 경제협력위에서는 두만강 자동차 전용 교량 건설 문제와 러시아내 북한 노동자 이슈 등이 논의됐다. 김정은 위원장의 방러 문제는 이번 경제협력위에서 논의되지 않았다는데, 러시아 정부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방러 초청장을 전달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또 실무선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지만, 외교가에선 북한의 협상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여러차례 방문한 중국에 이어 러시아를 조만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직후,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극동개발을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했고, 러시아의 극동개발부에 맞춰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전담하는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했다. 또 2017년 9월, 3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자리에서 ‘신북방정책’을 발표하고 한-러간 실질적 경제협력 방안을 푸틴 대통령과 논의했다. ‘신북방정책’은 러시아와 몽골, 카자흐스탄 등 북방 나라들과 정치.경제,사회분야의 협력 강화를 추진하는 외교정책을 말하는데, 역대 정부의 북방사업이 남북관계의 부침에 따라 자주 중단돼 추진 동력을 잃었다는 인식에서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 등 G2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탈피하고 기존의 주력산업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신북방정책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지금 당장은 북방국가들과의 교역이 크게 늘지 않아 경제적 중요성이 커보이지 않지만, 북한의 문이 열려 국경의 개념이 없어지고 대륙을 바로 통과할 수 있게 되면 경제협력 규모가 획기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16년 9월 2차 동방경제포럼/ 블라디보스토크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유럽과 가까운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해온 러시아는 높은 유럽 의존도와 안보 위기를 줄이기위해 아시아.태평양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2012년 정부 내에 ‘극동개발부’를 신설하고, 러시아 극동 연해주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는 한편 아.태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를 꾀하는 ‘신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극동.시베리아 개발계획을 보면 2025년까지 9조 루블(390조 원)을 투입할 예정으로 돼 있다. 여기에는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0년 7월, 역대 소련 지도자들 중에서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을 만큼 아태 지역, 특히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푸틴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문재인 대통령 러시아 두마 첫 연설 (2018년 6월 22일)

지난해 6월 21일 19년 만에 러시아를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러시아 국가 두마(하원)에서 연설을 통해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은 평화와 공동번영의 꿈을 담은 유라시아 시대의 선언입니다. 내가 지난해 발표한 ‘신북방정책’은 ‘신동방정책’에 호응하는 한국 국민들의 꿈입니다. 나는 한국과 러시아의 협력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번영의 주춧돌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2017년 190억 달러였던 한-러 교역규모는 2018년에는 248억 달러로 증가했는데, 양국 수교 3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 양국간 교역액 300억 달러, 인적 교류 100만 명 시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한러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방한을 공식 초청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가 예상되지만 만일 2019년에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면,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에 러시아의 적극적인 개입과 역할이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주경기장 루즈니끼 경기장

필자는 2015년 7월 1일부터 2018년 6월 30일까지 만 3년 동안 KBS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 한러 수교 25주년 기념행사들을 치렀고 그해 9월엔 아태 진출을 열망하는 푸틴 대통령의 야심작 ‘제 1회 동방경제포럼’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이했다. 2016년은 소련붕괴 25주년, 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았고, 2018년엔 러시아 대선과 월드컵 경기를 동시에 치렀다. 그런가하면 2016년과 2017년 사이 북한은 3차례의 핵실험과 수십차례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감행하면서 ‘핵 보유국’지위에 도전했고, 이에 상응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의 강도도 높아져 북한의 외교적 고립은 깊어지고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다행히 2018년 들어 상황이 급반전돼 남북.북미, 북중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리면서 한반도에 해빙 무드가 진행되고 있다. 햇수로 4년간의 특파원 생활 기간 벌어진 숨가쁜 사건들을 목도하면서, 취재 현장에서 느낀 소회를 여기에 담았다.

크렘린궁 기자실에서 (2017년)

우선 첫 번째 글은, <남북한과 러시아>를 다룰텐데 북-러 관계와 남북러 3각 협력문제를 거론하면서, 특히 2016~2017년 사이 북한의 전략적 도발에 대한 러시아의 대응과 2018년 대반전 드라마를 서술하고자 한다. 두 번째 꼭지는 <푸틴의 극동개발 전략>으로, 동방경제포럼의 창설과 푸틴의 극동개발 노림수, 수교 30주년을 앞둔 한-러 관계를 짚어본다. 그 다음은 <푸틴과 러시아>로 20년째 장기집권중인 푸틴의 통치 비결은 무엇이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반정부 시위는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 크림반도 병합, 시리아 내전 개입 등 러시아의 대외현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또 <시베리아의 보배>에선, 북극개발에 적극적인 푸틴과 시베리아 야말반도의 가스전 개발, 한국산 세계 최초 ‘쇄빙 LNG’ 선박에 대한 얘기를 담는다. 이밖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러시아와 CIS(독립국가연합)내 고려인 이야기와 러시아의 군사 분야에 대한 얘기들을 추가하고자 한다.

한국이 북방으로 진출하려는 길목에 위치한 러시아. 러시아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고, 우리는 러시아와 어떻게 지내야할까.

필자는 한국에게 러시아는 아직도 저평가된 주식과 같다고 감히 평가하며 한러 관계가 더욱 긴밀히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화, 2019/03/12-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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