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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민참여로 재벌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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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민참여로 재벌개혁을

익명 (미확인) | 수, 2016/12/28- 10:45

(이 칼럼은 한겨레신문(2016. 12. 28)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촛불 시민들은 ‘개헌’이라는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정치권은 개헌 논의로 시끌벅적하다. 촛불 시민은 내년 대선에 누구를 지지하자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언론에서는 매일 대선후보 지지율을 보도한다. 수백만명의 시민이 개헌하자고, 대통령 잘 뽑자고 9주째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떨면서 이렇게 소리 질렀나?

개헌도 분명히 필요하고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는가도 정말 중요하지만, 경제시스템 변화 없이 민주주의는 공염불이다. “규제는 암 덩어리”라면서 전경련의 민원처리반 역할을 해온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경제 강자들의 특권과 반칙은 상상을 초월했고, 그 정점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있다.

특히 대통령이 삼성 이재용 등 재벌 총수들과 독대한 사실, 삼성의 정유라 지원, 재벌들의 미르, 케이(K)스포츠 재단 갹출 건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모든 것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안종범 전 수석에게 “삼성의 합병을 도와주라”는 지시를 했다는 사실, 그 직후 수천억원의 국민의 노후자금이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지출된 사실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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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전,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찬성 결정하도록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긴급체포했다. 그 배후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는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3자 뇌물죄’ 적용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사람들은 이것을 ‘정경유착’이라 말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박근혜 2세와 이병철 3세 등 세습권력자들 간의 부당거래로 보인다.

재벌 2, 3세 9명이 30여년 만에 아버지 할아버지가 앉았던 청문회 자리에 다시 앉은 현실은 왜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는지, 왜 청년들에게 한국이 ‘금수저’의 나라, ‘헬조선’이 되었는지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비선 권력의 전횡이 이번 박근혜 게이트의 핵심이라면, 세습 재벌의 존재 자체, 그리고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독대, 청와대의 전화 한 통으로 수십억, 수백억원의 주식회사 돈이 이사회의 논의도 거치지 않고 지출될 수 있다는 사실, 국민의 노후자금이 온갖 편법으로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지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이 아직 시장경제, 법의 지배와 공정경쟁의 초입에도 들어서지 않은, 특권과 약육강식과 무법천지임을 말해준다.

재벌의 하청기업 노동자, 모든 비정규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지난 4년 동안 거의 매일 부당노동행위, 노조 파괴, 용역폭력,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재벌 모기업의 ‘갑질’에 분을 삼키면서도 정부, 검찰, 언론, 공정거래위원회, 법원의 결정에 항의조차 할 수 없거나 항의해도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세습 재벌의 위세 때문이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년 동안 시민사회, 노동계, 중소기업 대표자들과는 거의 접견조차 하지 않은 채 오직 재벌 총수들과 독대했다는 통계는 그 현상일 따름이다.

지금 개헌론자들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자고 한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 특히 모든 임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재벌 대기업은 제왕이 아니라 거의 염라대왕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촛불 시민은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관념상’으로는 주권자의 기쁨을 누리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경제전쟁터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84%를 차지하는 10대 재벌, 세습 권력은 거의 모든 한국인들에게는 ‘갑’ 중의 ‘갑’이다.

SEOUL, SOUTH KOREA - DECEMBER 06:  (L-R) Sohn Kyung-shik, chairman of CJ Group, Koo Bon-Moo, chairman of LG Group, Kim Seung-Yeon, CEO of Hanhwa Group, Chey Tae-Won, chairman of SK Corporation, Lee Jae-Yong, vice chairman of Samsung, Shin Dong-Bin, chairman of Lotte Group, Cho Yang-Ho, chairman of Hanjin Group and Chung Mong-Koo, chairman of Hyundai Motor Group, take an oath at a parliamentary hearing of the probe in Choi Soon-sil gate at the National Assembly on December 6, 2016 in Seoul, South Korea. South Korea started the parliament hearing with leaders of nine South Korean conglomerates including Samsung, Hyundai, Lotte over the tens of millions of dollars given to foundations controlled by Ms Park's friend Choi Soon-sil, the woman at the center of the scandal.  (Photo by Jeon Heon-Kyun-Pool/Getty Images)
지난 6일 열린 최순실 국정조사 특위에서 재벌 회장들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 재벌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박근혜-최순실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사실상 공범이다. (사진 출처: Getty Image)

청문회 석상에서 재벌 총수들에게 호통치는 의원들도 티브이 카메라가 꺼지면 ‘을’의 신세가 되고, 삼성을 압수수색하는 검사들도 내일의 직장 로펌에 갈 생각을 하면 곧 ‘을’이 된다.

재벌들이 정유라와 재단에 준 수백억원은 국민의 피땀이며 눈물이며 한숨의 결정체다. 그 돈이 공정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제대로 분배되거나 정당하게 세금으로 징수되었다면 혁신 중소기업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 임금 인상과 내수시장 확대 등의 방식으로 한국 경제에 기름칠을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오늘 한국 경제와 정치의 모든 문제가 재벌 체제에서 기인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재벌 개혁은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경제민주화’ 공약을 휴지처럼 버리는 것을 이미 보지 않았던가?

이제 민주당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관련 법안 통과 등을 통해 재벌 개혁에 나서겠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개혁보수를 지향하는 비박계도 동참하리라 기대한다.

그런데 정치권을 믿어도 될까? 탄핵이 촛불의 힘에 의해 가능했듯이, 이 일도 이해 당사자인 온 국민의 토론과 참여를 통해 진행되었으면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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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글은 호주국립대학이 주관하는 EastAsiaForum에 기고된 칼럼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은 국제적으로 패권국가들(미,중,러)에 이어 유럽강국들과 캐나다 호주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중견국가로 평가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필자인 로버트슨 교수는 연세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한국 외교가의 관료적 형식주의와 폐쇄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에 대한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지금이라도 민족의 역사적 흐름에 부응하여 중견국가로서 외교적 역할과 위상을 찾아 가야 한다.


 

오늘날 한국이 외교적으로 강력한 중견국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반향으로 돌아올 최선의 결과는 논란거리이고, 아니라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 정부의 캠페인에 힘입어, 한국이 중견국가라는 학술적 언론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국제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해당 주제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세심히 살펴본다면 현재 한국이 취하고 있는 대외정책의 취약점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최근 북한 관련 이슈를 해결하려는 한국의 노력들을 살펴보면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은 당시 맞붙고 있던 미국과 북한간의 설전 속에서 정세에 알맞은 위기 외교를 펼쳤다. 이는 높은 수준의 의사결정 능력과 동반자 및 동맹들과의 긴밀한 공조, 명확한 메시지 전달, 제한적이고 실제적인 목표, 그리고 타협에 대한 의지를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위기관리 외교는 큰 성공을 거뒀고, 북미간의 지나친 긴장 조성을 억제하면서 오판과 갈등의 위험성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관리 외교의 효과는 시간에 제한을 받는 것이었고, 긴장을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을 바꿀 수는 없었다.

중견세력(middle power)의 행위기반 이론에 따른다면, 한국의 위기관리 외교는 곧바로 중견세력의 외교로 이어졌어야 했다. 안보에 대한 긴장이 줄어드는 즉시, 중견국가로서 주도권을 행사했어야 했다.

한국에겐 다른 중견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협상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고 (연합형성),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외교적 장치들을 이용해 목표를 달성할 기회가 있었다 (행동외교). 또한 한국에는 비교우위를 제공할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할 기회가 있었고 (틈새외교),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스스로의 노력을 홍보할 기회도 있었다 (세계시민의식).

그러나 중견국가로서 외교를 상실한 상태에서, 한국은 북한과 미국이 벌리는 예측 불가능성에게 대외정책 방향의 운전자석을 내주었다. 미국은 막무가내이고 예측이 불가하며, 다른 한 쪽은 구제불능에 이해가 불가능했다 (사실 이러한 비판들은 상대를 바뀌어 평해도 유효하다). 한국은 상대해야 할 두 행위자들에 대해 협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그들의 행동을 억제할 능력도 없었다. 결국 남한은 스스로의 주도적 행위성을 양측의 관계 안에 종속시켜 버렸다.

싱가포르와 하노이 회담을 보도한 서방언론의 취재는 이 점을 부각했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북미간의 비핵화 협상은 미국, 북한, 그리고 주최국인 베트남의 문제처럼 보였고, 한국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에게는 이제 추후 협상 개최 여부, 관련된 제도와 기구의 내용을 만들어 갈 힘이 없다. 이는 고위급 회담에 기반한 현재의 외교적 노력들에 유연성이 자리잡을 공간을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 시점에서 어떤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그 성공은 2년(트럼프1기), 3년(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혹은 6년(트럼프2기)뒤에 있을 정권 교체와 함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북한은 자신들이 설정한 중기적 목표인 경제제재 완화를 외부적 제재의 해지라는 장기적 계획과 관계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협상 실패의 책임은 협상 상대국들의 정책 변화에 전가할 수 있고, 똑같은 정치적 게임을 미래에 다시 한 번 재개할 수도 있다.

북한 관련 이슈를 다룰 때의 한국이 중견국가로서 외교를 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배경들이 있다.

한국의 대외정책 형성은 철저한 위계중심형이다. 아이디어와 이니셔티브들은 대통령 보좌관들에게서 시작되어 외교부로 전해져 내려와 시행된다. 외교부처 내부에서 핵심적인 이니셔티브가 시작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말은 대통령의 외교 보좌관 그룹이 중견국가 외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필요한 아이디어가 부처로 흘러내려 간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중견 국가 외교는 부재하게 되는 것이다.

외교부처 내부의 조직 문화 또한 극히 보수적이고, 관료적이며, 위험을 극도로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새롭고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음을 열고 비전통적인 대외정책 행위자들과 교류하려는 의지도 적다.

해당 용어(중견국가론)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 중견국가 외교는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다. 한국에서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가장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아직도 (패권중심의) 현실주의이며, 강대국간의 패권경쟁이 가장 유명한 소재이다. 국제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의 중견국가 역할을 다루는 일은 거의 없다. 학술지에서 “중견국가”라는 용어의 사용이 급증하긴 하였으나, 용어의 개념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는 아직 널리 보급되지 못한 상태이다.

한국은 아직 중견국가로서 외교를 실행하고 있지 않다. 중견국가로서 외교의 시작을 위기관리 외교로 시작하긴 하였으나, 스스로 그 방향을 설정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리고 중견국가다운 외교를 상실한다면, 결국 한국의 대외정책은 북한 문제를 다루려고 했던 이전의 시도들만큼 처참히 실패하거나, 혹은 더한 실패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적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것이 중견국가로서 자주적인 외교는 아닌 것 같다.

 

Jeffrey Robertson(제프리 로버트슨)

호주 국립대학교의 아시아-태평양 외교 학부 객원 연구원
연세대학교 조교수
“Diplomatic Style and Foreign Policy: A Case Study of South Korea” (Palgrave 2016)의 저자

일, 2019/04/0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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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사의 최우성 연구원은 지난 1월 9일자 기사를 통해 미국에서 일고 있는 자본주의 구하기 운동은 소개하면서 보수적 인사들마저 독점기업을 해체하고 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 역시 미국식 자본주의가 막장에 이르고 있음을 스스로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장에서는 자본의 탐욕에 의해 왜곡되고 자기조정 기능이 실패한 기존의 시장경제에 대한 보완 또는 교체의 가능성으로 사회적 경제와 시민경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사회적 경제’와 ‘시민경제’가 동의반복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 뿌리와 배경 그리고 시장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섬세하지만 매우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연구 경험이 부족한 탓에 아래에 세가지 참조 서적을 소개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더하고자 한다.

우선 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에서 2016년 발간한 연구 저서 ‘사회적 경제와 지역혁신’은 실천적인 다양한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 본 저서에 의하면 사회적 경제가 태동된 배경으로 저성장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만성적인 구조조정에 따른 일자리 감소, 시장 경제의 활력둔화, 생산의 고비용, 산업의 불균등과 소득의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의 고착화에 따라 사회적 체질과 구조의 변화를 열거한다. 시장의 실패 또는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 양적 성장에서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지역단위에서 인력, 자원, 환경을 지속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모색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며,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를 통하여 기존의 시장실패와 복지국가의 정책을 보완하면서 사회적 유대로 가치를 실현할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모든 활동과 조직들을 사회적 경제의 영역으로 포괄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19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어 1990년 대를 거치면서 한국에서도 활성화된 사회적 경제 영역은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실천으로 시작하였지만, 현재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국가의 제도와 시장이라는 매개에 의존해서 지탱되고 있으며, 개념과 용어에 있어서도 사회적 기업 공동체 지역기업 자활 비영리부문 협동조합 등이 정확한 인식과 내부 정리가 없이 혼재되면서, 이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과 국가단위 복지정책의 일환이나 시장경제의 잔여적 영역을 넘어서는 통섭적 논의가 필요하고 그간의 성과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상기 저서는 밝히고 있다.

동시에 사회적 경제의 기반과 뿌리는 지역사회이며 지역단위에서 활동과 조직의 주체를 세우고 지역의 여건과 상황에 연계하여 지속적인 가능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혁신과 이를 돕기 위한 생태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생태계의 법칙으로 모든 것은 상호 연관되어 있고, 에너지 법칙에 의한 흐름과 방향에 따라 변화하고 있으며, 도법자연 道法自然이라는 고전의 가르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최선의 정책 임을 재확인하면서, 모든 것은 공을 들인 만큼 성취가 이루어 진다는 4가지 법칙을 기술하고 있다.

주어진 조건 및 상황에 상응하면서 생태적 환경에 따라 생성하고 진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3 단계로 나누어 첫째로 정부와 기업의 도움과 주도하에 양적인 성장을 하는 단계와 두 번째로 공공부문과 시장영역과 사회적 경제가 서로 공존하고 협력하며 진화하는 단계를 지나, 마지막으로 변화적 확산단계를 구상한다. 마지막 단계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호혜와 협력 그리고 연대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가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시장경제 영역에 대해서 우위적 위상을 갖추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상기 일련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리더쉽을 포함한 인적 조직, 전략 재무 지식 사회적 네트워크 등 다양한 자원들의 결합, 그리고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해당조직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참여자들의 공유와 열정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학습과 재교육이 핵심적 바탕을 이루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구체적 자료분석을 통하여 2007년 사회적 기업 육성법이 제정된 이래 양적으로는 상당한 성장을 보여 2015년 기준하여 누적인증 기업숫자가 1,600여 개가 넘어서고 고용 인원도 33,500 여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재무수요의 80% 이상을 정부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진 반면에 사회적 경제 단위로서 기업의 취지와 목표 그리고 사회적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낮은 효율과 지향하는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인식 부족을 드러내고, 조직의 지속성을 스스로 담보할 수익성을 실현해 내지 못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한마디로 정부재정이 끊어지면 대부분의 인증된 사회적 기업은 활동을 지속할 가치와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지 못했고, 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재무적 자원과 사업적 모델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역시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입법되면서 일만 개 이상 폭발적으로 늘어난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구체적 실태에 대한 별도의 조사와 분석은 없었으나, 조직의 재무적 성패에 대한 공동적 공유와 분담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업과 마찬가지로 전반적 상황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추정되면서, 현재 시점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가 지닌 미래 가능성을 되짚어 반성하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참고 서적은 문재인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회적 가치를 중점으로 추구하겠다고 선언한 맥락에 발맞추어 2018년 초 박명규 교수 등 학계를 대표하는 15 분의 지식인들이 역량을 힘껏 모아 발간한 ‘사회적 가치와 사회혁신, 부제 – 지속가능한 상생공동체를 위하여” 라는 저서로서, 전남대의 상기 보고서가 제기한 문제점에 대한 응답적 성격을 띠면서,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융합하여 평가하고자 노력을 경주하면서, 원주와 홍성이라는 지역의 구체적 사례 분석을 통하여 이를 사회혁신 수준으로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제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국제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현존의 많은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하면서 사회적 가치의 핵심 내용으로 안전과 일자리, 역능성(empowering)과 혁신, 공공성과 신뢰자본, 상생과 지속가능성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 분석하고, 실행적 영역으로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 이를 지원하기 위한 공공 구매와 공공 서비스,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공헌(CSR & CSV), 지속적인 사회혁신 추구 등 열거하며, 실현할 주체로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정부와 지자체 및 공공기관, 기업과 노조 및 공익 재단, 학교와 종교 및 시민단체 등을 총망라하고, 사회적 가치를 철학적 개념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과 혁신과 책임과 금융을 제도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항목은 시장 정부 비영리 3개 부문의 융합적 실패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기업에게 경제적 성과와 더불어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부여하고(참조: 제3섹터경제론 9장. 기업에 대하여) 이의 성과를 시장적 원리로써 평가하고자 하는 제안이다. 현재 기업사회에서 성취한 이해관계자 관리와 환경 및 사회에 대한 책임(ESG, Environmental, Social & Governance)을 고려하는 사회책임투자(SRI, Social Responsible Investment)의 비중이 자본시장 30%를 차지할 만큼 성장한 실례를 바탕으로 사회적 편익과 비용을 역으로 다시 시장의 가격기구에 편입시켜 반영하고 평가하자는 ‘사회적 가치측정 – 화폐가치 환산을 중심으로’ 라는 제안이다. 제안의 특징은 ‘사회문제를 시장이 해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적 가치를 시장의 가격기구에 편입시키고 화폐라는 정량적 평가로 환산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는 착안에 있다.

한마디로 사회성과를 회계학적 개념으로 접근하여, 그 동안 주로 산출 결과에만 의존해 왔던 방식을 벗어나 환경(E) 사회(S) 가버넌스(G) 등 다양한 영향의 일련 과정을 사회적 편익과 비용을 수치로 환산하여 가격기구로 내재화하자는 것이다.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면서도 이러한 노력은 아직 초보적 단계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복지와 사회적 영역을 평가하는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것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시장에서 직접 보상되지 않은 사회적 가치와 성과에 대해 과연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와 금융상품 및 투자의 기준 등을 통하여 충분하게 대체적 보상이 실현되고 지속적 조건의 기반이 형성될 것이냐 하는 기본적인 질문에 아직은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수많은 노력과 대안적 제안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규모로 전개되는 현실에서는 점점 양극화와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데 심각한 당면의 문제가 있다. 2017년 기준으로 26명의 초거대超巨大 부자들의 재산이 지구상 인구의 절반인 35억 명의 재산보다 많다는 사실과 더불어, 한국사회도 소득격차가 날로 커져 상위 10%의 종합소득이 전체의 50 %에 육박하면서, 하위 10% 소득의 30 배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더구나 미국발 불황과 세계적 규모의 경제위기가 다시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자연스레 치열한 현장의 노력과 이를 지원하는 이론적 지침을 배경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사회적 경제의 대세적 흐름이, 세계적 규모이던 한국이라는 단위국가이던, 과연 유의미하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에게 롤 모델로 제시되고 있던 유럽대륙조차 심각한 내홍을 겪으면서 미래의 좌표를 상실해 가고 있는 듯 보여진다. 인류 역사가 제2차 대전 이후 다시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필자는 지난 수세기 동안 물적 기반의 주류를 형성해온 기존의 자본제적 탐욕과 시장의 맹신적 자기조정 기능을 바꾸어내지 않은 한, 위에 언급한 사회적 경제 방식의 보완적이고 점진적 변화만으로는 현재 상황을 전환시키기에는 절대적으로 역부족이라고 판단한다. ‘악마의 맷돌’로 표현되는 탐욕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이 끊임없이 재생해 내는 구축 기반을 바꾸어 내기 위해서는 이를 추동하는 흐름을 차단하거나 이와 결연하고 훌쩍 뛰는 새로운 변혁적 동력의 발굴이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혁, 동학에서 이야기하는 개벽 세상에 대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저서로 이태리 시민경제학을 대표하는 볼로냐 대학의 스테파노 자미니 교수와 룸사 가톨릭 국립대학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의 공저 ‘Economia Civile,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라는 책이 2015년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특히 브루니 교수는 2016년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여 ‘모두를 위한 경제 EoC(Economy of Communion 공동체 경제학)’라는 주제로 명강연을 선사하여 시민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브루노 교수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서 그의 경제강연 EoC를 모두 공유경제 Commons Economy라고 오역하여 사용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그의 주제가 ‘우버’나 ‘에어비엔비’와 같은 인터넷과 SNS 환경을 이용한 사업수익 모델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EoC는 사회속에서 관계적 호혜을 중심으로 공동선을 이루자는 경제적 활동을 의미하는 바, 흔히 사용하는 공유경제라는 단어와 반드시 구별하여 ‘공동체 경제’ 또는 ‘시민경제’라고 번역하여 사용해야 한다. 공유경제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플랫홈 e-business사업 모델이 마치 미래의 희망과 만병통치약으로 착각하는 오염과 폐해가 우리사회 안에 심각함을 체험한다.

개념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시장경제와 시민경제의 정의와 성격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시장경제는 타자를 경쟁 또는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타산적(합리적) 개인個人에 기초하는 반면에, 시민경제는 시민사회에서 형성되는 관계성과 상호성의 결합으로서 인간人間에 기초한다. 시장 경제는 공리주의를 기초하여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면서 사람을 이해적 대상으로 삼는 반면에, 시민경제는 효율과 규칙과 사회를 상호성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인간적 삶에 대한 내용과 가치를 우선적 기준으로 삼는다.

놀랍게도 세계적 불황에 접어드는 2007년에 강원대 이병천 교수가 이미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간행물 속에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민경제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었다. 약간의 보완을 통해서 이교수의 글을 압축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경제적 공동체의 살림살이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으면 이는 단지 경제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선한 시민(good citizen)의 정치공동체마저 유지, 발전되기 어렵다. “경제는 사회구성의 토대” (마르크스)라거나,“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을 가질 수 있다” (맹자)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지극히 타당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공화주의는 현대 시장 사회에서 공동체로서 경제적 살림살이를 새롭게 꾸리는 문제, 또는 시장사회를 시민적인 경제 공동체로 전환시키는 중대한 문제에 대해 소홀히 해 왔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경제적 토대, 또는 항산의 문제라는 공간 안에서 새로운 대안 이야기를 풀어내야 한다. 중략

공공적, 시민적 행복이라는 개념을 경제학에 도입한 시민경제론의 구상은 대표적으로 루이지노 브루니와 스테파노 자마그니의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브루니와 자마그니는 근대 이탈리아 시민 인본주의 전통 속에서 시민경제의 사상이 발전했다는 것과 이 사상이 이후 부당하게 이기심과 효율성에 기초한 호모 에코노미쿠스 시장주의 경제학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탈리아 계몽의 경제사상을 대표하는 롬바르드 경제학파, 특히 나폴리 학파가 경제를 가정사로 묶어 놓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넘어서, 근대 상업사회와 마주하면서 그것이 지속가능하려면 시민적 덕성과 가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사고로 발전시켰으며, 이를 대표하는 안토니오 제노베시(A.Genovesi) 같은 인물은《시민경제학에 대한 강의》(Lezioni di economia civile, 1765)라는 저서를 남겼다(실제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10여 년을 앞선 인류 최초의 경제학 전문저술이다).

이들의 연구가 단지 사상사적 복원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브루니와 자마그니 시민경제론의 핵심은 효용(utility)이 아니라 관계속의 행복(eudaimonia)을 인간의 주된 욕구와 동기로 삼는 것이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서 행복은 타자와의 관계와 ‘관계재’(relational goods)에 의존한다.

브루니와 자마그니의 시민경제론이 순수하게 관계성의 가치와 공적 행복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관계성으로서 상호성의 행동은 타산적인, 조건적인 헌신 및 협력 행동과 결합된다. 따라서 시민경제 체제에서 상호성은 등가물의 교환에 기초하는 시장(효율성), 그리고 재분배(공평성, 정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가는 공적 행복과 자유의 원리인 것이다. 그러면서 시장적 인간형과 시장 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관계성의 기초 원리로 자리매김 된다.

브루니와 자마그니가 제시하는 행복 경제학으로서 시민경제론은 신공화주의 경제론과 차이가 있긴 하나, 시장사회 저편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진화 게임 이론적 정치경제학에서 제시하는 강한 상호성 모델에서는 협력의 목표 가치에서 인간 욕구의 문제가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소비 생활, 금융적 이득의 가치와 노동 생활의 가치가 충돌할 경우 그 조절 원리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신공화주의 경제학은 불분명하다. 시민경제론은 이에 대해 노동 생활을 우선하는 분명한 답변을 갖고 있었다. 신공화주의 경제학의 경우는 시장 사회에서 끝없이 치닫는 소유와 소비 경쟁, 지위재 (positional goods )의 획득을 위한 경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논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효율성, 공정성, 민주성의 가치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점에서 행복을 중심으로 다루는 시민경제학의 고유한 의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자본주의 사회 속의 이윤 추구와 경쟁, 시장적 인간형 속에서 어떻게 ‘시민적 행복 경제’가 성장, 발전할 수 있을 지가 문제다. 부분 영역으로서 시장사회를 보완하는 역할이라면 몰라도, 어떻게 행복의 가치를 우위에 두는 지배적 협력 행동이, 그리하여 하나의 독자적 경제 구성이 출현, 발전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시민경제학의 저자들 또한 진화 게임 경제학처럼 협력 행동과 공동체의 진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백지 위에서 게임을 할 수는 없다. 시장사회는 부단히 공동체적 협력 행동을 구축하는 효과를 낳는다(crowding out effect). 무임 승차를 비롯하여 집단 행동의 조정 실패 문제, 효율성의 확보 문제를 위시하여 시민경제학에서는 아직 이런 난문들에 대해 대답을 주고 있지 않다. 시민경제학에서 상호성의 개념은 다분히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행동에 기반한 경제가 하나의 지속가능한 질서로서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조정 규율에 대한 고민이 미약하다고 생각된다.

시민경제에 대한 이병천 교수의 요약소개와 비판의 글에 감사 드린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중세 가톨릭에서 실천해온 공동체적 이웃사랑과 르네상스 시대에 부활한 인본주의가 한데 결합하여 18세기에 태동하였던 시민경제론은, 안타깝게도 영국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이래 공리주의로 무장한 시장경제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한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잊혀졌다가, 자본주의가 한계를 보이는 현재의 위기국면에서 다시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시민경제론에는 자본제가 전일적으로 강력하게 작동하는 현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원칙과 내용을 성공적으로 부활시킬 통로와 로드맵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 보완하고자 제3섹터 경제론을 시작하면서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시장경제론과 시민경제론을 융합시키려는 과정에서 정부의 선택적 양수 기능을 제안한다. 자본제하에서 형성된 심각한 문제들의 보완 장치로서 미약하게나마 형성되고 있는 사회적 경제 영역을 시장경제의 논리와 흐름에서 분리하고 차단시키면서 철저하게 시민경제론의 원칙에 입각한 운용이 뿌리를 내리고 재생적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영역에서 형성된 물적 기반과 자원을 사회적 경제영역으로 강제로 이동시킬 펌프와 자본의 탐욕을 걸러내고 시민경제의 원칙을 역방향으로만 흘러보내는 삼투막이라는 두 가지 수단이 긴히 필요하다.

상기의 펌프와 삼투막은 단지 시장경제 영역에서 시민(사회적)경제 영역으로 물적 자원만을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시민경제에서 형성되는 상호성의 원칙,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발적 호혜와 증여적 관행과 인간적 가치를 우선하는 규범을 시장경제 영역으로 침투시키면서 영향을 확산시켜야 한다. 양수와 삼투라는 강제적 정책 수단을 통하여 시장이 갖는 합리적 효율과 시민사회가 갖추어야 할 규범과 질서 그리고 인간중심의 가치 철학을 관계적 상호성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융합하는 미래경제의 모습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구조, 조세제도, 산업의 물적 기반, 혁신의 일상화, 협력과 공유의 제도화, 교육과 문화에 있어서 역량강화,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 등 다층적 분야에서 획기적 조치가 요구된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진행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되풀이 하자면, 시장경제는 타자를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탐욕적인 개인에 기초하는 반면에 시민경제는 상호성과 사회성의 결합으로서 인간에 기초한다. 여기서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다. 관계적 존재라는 의미는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라는 말이다. 더구나 타자의 핵심을 이루는 지구라는 물리적 조건의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 그리고 자원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세계는 더 이상 자기증식적이고 소모적인 자본주의적 경제운용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인류는 지속적 생존여부라는 심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개별적 탐욕과 성장중심의 사회경제적 흐름에서 사회적 관계와 상호성에 기초한 역량개발과 자기실현적 사회로 전환하는 동시에, 무제한적 생산중심 사회에서 탈피하여 지속이 가능한 공유와 배분중심 사회로 이동해야 할 개벽 세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정치의 우선성을 작동시킬 변혁적 주체로서 시민정부라는 권력구조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 주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고자 한다.

목, 2019/02/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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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의결권 도입은 사실상 백해무익,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입하고자 한다면

그 진정성을 담아 충분한 안전장치를 담아야

국회의원 채이배·경제개혁연대·경실련·민변 민생경제위·참여연대

「차등의결권 도입 문제 진단 및 지배구조 개선 상법 개정 모색 토론회」개최

경제력 집중과 총수 일가의 세습·사익편취 만연한 현실에서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 문제 지적·지배구조 개선 위한 상법 개정 촉구

일시 및 장소 : 3월 21일(목)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1간담회실

1. 오늘(3/21) 국회의원 채이배·경제개혁연대·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민변 민생경제위원회·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는 「차등의결권 도입 문제 진단 및 지배구조 개선 상법 개정 모색 토론회」를 공동개최했다. 이번 토론회는 최근 벤처기업 육성을 이유로 ‘차등의결권 도입’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재벌 대기업의 기술탈취 등 불공정거래행위가 중소기업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벤처기업 등의 혁신성장을 위해서는 상법 개정을 통한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2. 「누구를 위한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인가」를 주제로 첫 번째 발제를 진행한 박상인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경실련 정책위원회 위원장)는 “차등의결권 주식은 소유와 지배 괴리도를 증가시키는 소유지배구조를 만드는 수단 중 하나”라며, 한국에서는 이를 통한 경영 세습과 경제력 집중 악용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재 차등의결권 도입에 대한 논란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될 수 있다며 “사익추구가 더 용이하고 자본확충 비용이 낮은 경우에 차등의결권을 도입한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벤처 활성화·적대적 M&A 방어 등을 위해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차등의결권 주식에 의한 부정적 영향이 덜한 북유럽 사례는 경제력 집중의 폐해와 재벌총수 일가의 세습과 사익편취가 만연한 한국의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한 박 교수는 “현재 한국 상황에서 차등의결권 도입은 백해무익하다”고 비판했다.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엄밀한 조건 하에서 차등의결권을 허용해도 이들 기업의 도덕적 해이와 벤처 버블만 키울 가능성이 높고, 차등의결권의 허용은 결국 재벌의 4대 세습의 유력한 방법으로 악용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재벌구조에서는 차등의결권을 불허해야 하지만, 벤처기업법에 차등의결권을 허용할 경우에는 ▲차등의결권 기업은 다른 기업(100% 자회사 제외)에 대한 출자 금지 ▲벤처기업에 적용되는 중소기업의 정의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보통주로 전환 ▲차등의결권 주식의 증여나 상속 시 보통주로 전환 ▲IPO 이후 차등의결권 주식 발행 금지 및 IPO 이후 10년 경과 후 보통주로 전환 등 최소한의 안전장치 도입을 차선책으로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혁신성장을 위해 정부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재벌개혁과 징벌배상 및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라고 지적하며, 혁신성장이 가능하고 소득주도성장이 효과를 내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제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제로 두 번째 발제를 진행한 이상훈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는 지배주주의 지배권 남용의 대표적인 사례이자 최근 이 변호사를 포함하여 참여연대·민변이 프록시 파이트(위임장 대결)를 벌이고 있는 대한항공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지배권 남용의 심각성과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조회장 일가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아직까지 지배주주의 지배권 남용 내지 재벌 총수 일가의 제왕적 권력 전횡의 폐해가 심각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분석한 이 변호사는 현재 상법에는 이를 규제할 민사적 구제조치가 없거나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지배구조 개선안을 담은 상법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될 필요가 있고, 이를 통해 조회장 일가에 의해 진행되었던 각종 불법행위 근절되거나 예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변호사는 ▲‘대표소송 지분요건 완화’로 조회장으로 인한 회사의 많은 피해들의 회복이 용이해질 수 있고, ▲‘다중대표소송제도 도입’으로 정석기업㈜의 자사주 매입건과 같이 현행법상으로 구제받을 수 없는 사건의 피해회복이 가능해지며, ▲‘전자투표제도 의무화’로 주주총회 참석이 어려운 소액주주도 의결권 행사가 가능해 져서 지배구조의 왜곡을 막을 수 있고, ▲‘감사위원 분리선임제 도입’으로 2018년 단기 차입금을 갑자기 늘리는 한진칼의 꼼수를 방지함으로써 대주주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감사기구를 구성할 수 있고, ▲‘집중투표제 의무화’로 조회장 일가의 친인척들과 특수 관계인만으로 이루어진 대한항공의 이사회를 보다 독립적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이 변호사는 대한항공에서 발견되는 이사 선임 의결정족수 강화, 회사 자금과 우리사주를 통한 우호 지분 등과 같은 각종 경영권 방어 장치들과 반대 위임장 모집의 어려운 제도적 현실을 고려하면 현재 재계에서 주장하는 지배주주의 경영권 방어 부담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지배주주의 경영권 방어 부담 경감’보다는 ‘지배주주의 지배권 남용에 대한 통제’에 보다 중심을 두어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4. 김우찬 교수(고려대 경영학과·경제개혁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토론회에서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과거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같은 제도의 재도입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창업자의 골든터치에 의한 기업의 성장은 장려되도록 해야 하지만 더 이상 경영권이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송옥렬 교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는 회사법의 주요 내용은 주주들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측면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러한 부분이 충분하지 못 한 부분이 있으며 특히 제도가 들어올 때 기형적으로 변형되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노종화 변호사(경제개혁연대)는 차등의결권으로 인하여 사실상 재벌 3~4세의 경영권 세습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서보건 변호사(민변 민생경제위원회)는 그간의 관련 연혁을 정리하며 어느 시점의 여야든 속내는 이러한 원칙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부분이 컸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변은 원칙적으로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배되고 재벌중심의 경제력 집중구조를 심화시킬 수 있는 차등의결권 도입에 반대함을 밝혔다. 최수정 박사(중소기업연구원)는 차등의결권 도입을 전제로 나탈 수 있는 몇몇 이점에 대해 설명하였다. 해당 정부부처 담당자의 추가 의견도 있었는데, 그 논리적 비약성과 합리적 근거 부족 등 충분한 도입 이유를 설명하지 못 하였다. 좌장을 맡은 김우찬 교수는 좌장으로서 말씀을 아끼셨다면서도 사실상 이 차등의결권 도입 의도가 매우 의심스럽고, 그 도입 근거도 매우 빈약하여 정부가 이렇게 도입을 주장하여서는 안되는 것 임을 조심스럽게 강조하면서 토론회를 마쳤다. <끝>

보도자료_차등의결권 등 토론회 개최결과

문의: 재벌개혁운동본부 02-3673-2143

목, 2019/03/2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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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근대철학은 데카르트에서 출발하여 자아의 주체성과 진리의 절대성, 즉 자아와 이성의 실체성(여기서 실체라함은 타자와 독립된 존재로서 단일한 속성을 지니며 고정불변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존재로 대표적인 예로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의 신, 근대의 자아 및 현대의 표상성을 들을 수있습니다)을 추구하였는데 그 근거는 자아는 이성적 존재이므로 이성과 과학에 의해 불변의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뉴튼의 근대물리학 성과를 철학적으로 반영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와 진리의 실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자 칸트에 이르러서 선험적 주체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진리를 주관화하면서 데카르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근대의 한계, 즉 자아와 이성의 실체성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플라톤도 인정하였듯이 자신이 제시한 실체 개념은 근원적으로 사유의 산물, 즉 관념이지 결코 현실적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여 근대의 자아와 이성은 중세의 신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복종 프레임을 벗어나기위해 초월적인 신을 우주밖으로 축출해버린 후 인간만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성적 존재인 자아를 실체로 인정하려했던 근대의 기획은 실패로 돌아가 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해석해주는 실체론의 허구성을 버리지 못하고 현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근대는 이성을 지닌 인간만이 감성으로 이루어진 자연을 지배할 수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정당화하기위해 이성과 자아를 절대적인 실체로 간주하였으나 그러한 이성은 인간만이 지닌 실체도 아니며 또한 이성(분별지의 한계는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의 한계로 인해 다시 신을 보증인으로 호출해야하는 한계 나아가 칸트의 이율배반에서 보듯이 이성으로는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현대에 이르러서야 직접 몸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성의 한계를 파악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며 과감히 실체론을 해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와 더불어 맑스는 기존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프로이트는 주체의 의식을 무의식의 산물에 불과 한 것으로 보며 근대의 주체와 진리의 실체성을 폐기하기 시작합니다.

니체는 서구철학의 뿌리인 플라톤의 정적이고 점적인 시간관을 영원회귀의 동적이고 선적인 시간관으로 전환시키면서 고정불변의 존재라는 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영속적으로 변화, 생성하기에 고정불변인 실체는 이미 죽었으며 따라서 대표적 실체인 신 역시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플라톤이 이데아를 인간의 사유에 의해 만든 허구의 관념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후 현대에 들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여 니체를 계승한 푸코와 들레즈 그리고 데리다가 근대를 완전히 해체하게 되는데 이와는 별개로 하이데거와 화이트 헤드는 근대의 존재론을 바닥부터 의심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여 왔습니다.

한편 근대철학 입문서인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는 근대철학을 주체와 대상의 인식 그리고 진리라는 3가지 기준을 가지고 근대의 특징인 주체철학과 과학주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체와 인식과 진리라는 삼각점을 이어가면서 근대철학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다보니 서구 근대철학을 ‘인식론’의 측면에서만 파악하고 비판하는데 그쳤으며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근원적으로 비판, 해체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게됩니다. 즉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서구의 존재론인 실체론을 현대과학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비판하다보면 서구 근대철학의 한계와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관점에서만 비판하다보니 현대철학의 정수와 흐름을 존재론적으로 이해시키기가 다소 어렵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여 필자는 근대물리학이 제시한 존재론인 실체론과 현대물리학이 제시하는 존재론인 비실체론(생성론,사건론,과정론,관계론)을 비교, 분석하는 차원에서 현대철학을 설명해야 현대철학의 흐름, 즉 포스트모더니즘과 과정철학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해보자면 푸코나 들레즈 및 데리다는 실체를 동일자라고 똑같이 호칭하고 있는데 다만 동일자에게 포섭되지 않거나 배제되어버린 ‘다름’을 푸코는 ‘타자’ 들레즈는 ‘차이’ 그리고 데리다는 ‘차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동일자, 즉 실체를 해체하고 ‘다름’의 고유성과 등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 근거는 현대물리학은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모든 존재는 시공간상 사건들의 인과적 과정이라는 과정론을 존재론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철학에 도입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됩니다.

한편 동일자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푸코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를 없애자고 주장함으로써 비실체론 중에서 ‘관계론’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들레즈는 기존의 차이가 없는 동일성 개념을 해체하고 동일성의 의미를 차이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이는 ‘차이가 없는 동일성’을 ‘차이가 있는 동일성’으로 대체함으로써 기존의 차이가 없는 동일성 즉 실체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비실체론 중에서 ‘과정론’의 측면을 부각시킨 관점이라 할 것입니다.

들레즈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지 않고 굳이 유지한 이유를 지식담론의 생산적 효과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푸코도 평생 동일성을 해체하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나 말년에 이르러 해체해야 할 지식담론이 오히려 개체가 사회화되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필요악이기에 그나마 지식담론 즉 동일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라는 태도로 변경한 것과 동일한 입장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해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동일성’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고 ‘연속성’ 개념으로 대체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현대물리학에서는 존재는 시공간 사건들의 인과적 연속체이기에 들레즈가 언급한 차이의 반복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담아내는 개념으로서는 동일성보다 연속성이 훨씬 정합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써 지금의 내 몸은 태어나서 현재까지 차이의 반복 즉 현재의 몸은 태어날 때와 동일한 몸이 아닌 차이들이 연속된 몸이기에 동일성이 아닌 연속적 존재라는 개념이 더 실재와 부합한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연속성 개념은 생성과 연기의 일종인 윤회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유용하다 할 것입니다.

한편 데리다는 서구문명을 실체와 비실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의 계서적 문명으로 보았기에 아예 동일성 개념을 폐기함으로써 실체를 해체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사건과 사물은 모두 차연(차이의 연기라는 의미로 들레즈의 차이의 반복과 같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동일자 즉 실체란 인간이 만든 허상으로 실재 세계에는 있을 수 없으므로 소위 동일자인 텍스트를 직접 해체하여 동일자 뒤에 숨겨진 타자들의 진정한 차이 즉 타자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세상에 등가적으로 드러내어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 동일자와 타자로 가르는 서구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비실체론의 ‘사건론’의 측면을 부각시킨 관점이라 할 것이며 푸코나 들레즈와 달리 동일성의 유용성(개체를 사회화시키고 질서를 유지시키는 효과성으로서의 유용성)마저 인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실체를 해체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결국 현대철학은 크게 생성론의 과정철학과 해체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별되고 있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로지 해체만 언급하였기에 새로운 비실체론적 존재론을 재구성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들레즈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하는 태도가 자신이 해체하고자하는 동일성을 재부활시키는 작업일지도 모르기에 이를 거부한다고 밝히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존재를 ‘동일성의 실체’가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으로 존재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게된다면 우리는 세계를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있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차후 불교의 연기와 중도를 설명할 기회에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일성, 즉 실체를 해체만하는 입장이기에 대안으로 현대물리학의 존재론에 입각하여 비실체론적인 존재론, 즉 연속성의 생성론, 과정론의 존재론을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과정론의 존재론을 받아들여 현대과학에 부합하는 철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고정불변의 동일자(실체)가 아니며 노동 또한 항상 타자가 아니다. 하여 자본과 노동의 경계를 없애 버리자.‘

목, 2019/02/2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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