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화요일,<외모?왜?뭐!> 기획단 양성 과정 강연이 있었습니다! 디자이너 우유니게 님의 왜뭐관리센터 전시도 한켠에서 함께 했고요
우유니게 디자이너의 작품~ 내 외모가 왜?뭐! 왜뭐관리센터 부터 내 몸 사이즈를 재는 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줄~ 날 사랑해줄자!! 까지. 외모를 품평하며 끊임없이 사이즈를 재고, 재단하는 일상의 모습을 위트있게 풀어낸 작업이었어요
플라스틱 사회? 건강할 수 없는 사회
“플라스틱 사회? 건강할 수 없는 사회”라는 주제로 경북대학교 예방의학과의 이덕희 교수님이 말씀을 나누어 주셨는데요!
유해화학물질을 통해 다른 시선으로 건강이슈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_*
연사님은 우리가 질병에 걸리는 이유를 유전적/환경적인 원인으로 이분법을 해 바라볼 수 없고,
더불어 화학물질을 자세히 봐야 한다고 강연 내내 말씀하셨는데요!
알고보니 우리가 먹고, 마시고, 바르고, 숨쉬는EVERYTHING에 화학 물질이 다 존재한다고 하네요…! 그렇기에화학물질에 대한 일상적인 노출과 이것이 질병 발생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합니다.
화학물질에 관한 질문
Q. 허용 기준 이하는 안전하다?
지금까지의 허용 기준 심사에서는 용량과 독성 반응에는 선형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 대전제라고 하는데요~ 위 기존 실험 방식은 1. 개별 화학 물질이라고 전제하는 것 2. 모든 반응이 선형적 용량 반응 관계라고 전제하는 것, 이 두 가지 이유로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왜 문제가 될까요?
실제로 우리가 각각의 개별 화학 물질에 따로 노출되는 것은 아니죠. 여러 화학 물질에 동시다발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개별 화학물질로 ‘허용 기준’을 정해놓고 “그 이하는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허용 기준 이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전하게 여기지 말자는 것이죠.
Q. 해로운 화학물질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시장에서 퇴출하는 것이다?
해롭다고 알려진 화학물질을 시장에서 퇴출해도 제품 자체가 안전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환경호르몬으로 알려진 ‘비스페놀 A’를 금지했더니 이를 없애고 그에 대한 대체 물질인 ‘BPS’를 제품 생산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영어로는 “Jumping out of a frying pan and into the fire,” 한국어로는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와 같은 느낌인 것 같아요!
Q. 금지된 화학물질은 이제 안심이다?
화학물질이 금지되었다고 해도 DDT가 아직도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영향의 고리를 끊기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생태계 순환고리 안에서 음식을 섭취하며, 활동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럼…
이 화학물질 투성이인 사회에서,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그래서 등장한 게 호메시스 이론
“호메시스 이론”은 옛날 왕들이나 무사들이 독살을 예방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흔한 방법 중 하나로 일부러 독을 조금씩 먹으면서 독살을 대비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즉, 독성으로 작동하는 양보다 적게 특정 독성 물질을 섭취하면 이것이 오히려 몸에 좋을 수도 있다는 이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호메시스 이론을 일반 화학물질에 적용하는 것은 복합적인 영향을 예측하기 어렵고, 인구마다 다르게 작동할 수 있기에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사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호메시스 이론을 활용 할 수 있는 실천방안들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
식물성 식품 섭취->POPs의 오염 정도가 먹이 사슬이 낮은 식물성 식품이 낮고, 식물성 식품에는 식이섬유와 파이토 케미칼이 풍부하기 때문!
운동하기
햇빛 받기
5월 3일의 강연을 통해 ‘외형적인 몸’뿐만 아니라 ‘내부의 몸’과 진정한 건강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미세먼지나 유해화학물질 등에 대해, ‘허용 기준 이상’에 관해서만 심각함을 인식하고 경각심을 갖고는 하는데요. ‘허용 기준 이하’의 유해화학물질 노출에 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식물성 식품 섭취/운동하기/햇빛 받기- 등을 왜 해야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화학물질 배출 저감을 위한 요구. 한 ‘시민’으로서 정책을 감시하고 요구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지만요. 우리 몸이 가진 항산화시스템을 끌어 올리고, 면역력을 강화하는 것. 보통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허용 기준 이하’의 화학물질 노출에 관해서도 일상에서 ‘위험하다’고 느끼고, 사회적/개인적 노력을 함께 해나가는 것. 둘 다 필요한 일이겠죠.
대체로 15-16세기쯤, 흑사병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감소와 오스만 터어키의 지중해 장악으로 촉발된 원격지 무역, 그리고 증기기관의 발명 등으로 촉발된 산업화의 진척이 중세의 봉건적 농노제를 붕괴시키며 서서히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갔다.
이 과정에서 재산권을 중심으로 하여 왕과 귀족의 횡포를 제약하려는 계몽사상과 사회계약론을 출발로 하여 자유주의가 다양하게 전개됐고, 부의 지나친 편재를 경계하는 사회주의적 정치사상, 그리고 현실에 기초한 정의와 연대적 공동체론 등 다양한 입장들이 마치 제자백가 운동처럼 펼쳐졌다.
서구 복지사상의 형성
1789년에 있었던 프랑스 혁명은 인류사에 가치지향을 제시한 대사건이었다. 세가지 색깔로 표현되는 자유(흰색), 평등(붉은색) 그리고 박애(푸른색)은 당시 근대사상의 흐름을 집대성하고, 이후를 조향하는 역할을 했다.
서구 복지사상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연대의 정신은 거슬러올라가면 프랑스혁명의 사상에 이념적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벌어진 지나친 이념적 과잉과 반동적 역류 등에서 보듯이, 구체적 현실에 착근되지 못한 채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라는 단어가 가지는 애매모호함이 내용적 규정에 어려움을 겪으며 상당기간 방황해야 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 사상이 구체화되는데까지 백여 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앞의 칼럼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한국, 자유주의 결핍인가, 과잉인가), 자유주의의 역사는 수많은 논쟁과 갈래를 형성하고, 평등 역시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생산력을 증대하려는 역사적 순방향과 상충하며 심각한 대립과 분열 그리고 논쟁을 일으켰다.
박애 또는 형제애 개념도 당시에는 대략적으로 상층 계층이 가난에 찌든 빈민에게 베푸는 시혜적 성격 또는 개별적 인본주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라는 추상적 수준의 가치는 노동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2차 산업혁명의 진행 속에서 무르익으며, 정치 참여와 선거제도가 일반 대중에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지향점으로 수렴돼 비로소 존엄과 정의 그리고 연대라는 실천적 언어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자리를 잡은 세 가지의 실천적, 가치적 개념은 사회민주주의 사상적 기초이자 현대적 복지정책의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한국 복지사상의 뿌리, 최시형
그러나 필자는 사민주의의 기초이자 복지철학의 토대로써 존엄과 정의와 연대가 어쩐지 낯설기만 하다. 이러한 철학적 방향과 기초는 기본적으로 동양과는 거리가 멀리 떨러져 있는 서양 사회가 겪은 근현대의 수백 년 간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역사적 문화적 전승 속에서 살아온 우리로서는 여전히 스테이크나 햄버거 같은 이종의 격리감을 느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중에 접한 것이 이 땅에서 벌어졌던 구한말 사회변혁의 동력으로서 동학운동이라는 실제로 벌어졌던 이야기, 그중에서도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이라는 인물이다.
그를 통해 전해진 우리의 전승 속에 마치 구수한 된장찌개와 잘 익은 김치의 맛깔처럼 한국의 복지철학에 대한 근거지와 새로운 방향을 감지한다.
도울은 최시형은 한국 근현대사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왜 그럴까?
동학을 배경으로 한 개벽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담당했던 도올 김용옥 교수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최시형만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최시형이) 단국 이래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간디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필 농민전쟁의 중심인물인 녹두장군 전봉준도 아니고, 이등박문을 처단하면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하던 안중근의사, 국민투표에서 항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으뜸에 오르는 김구선생도 아니라 최시형일까.
그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이야기하면 항상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15세에 고아가 되여 머슴살이와 제지소 직공 그리고 화전민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상놈 중에 상놈이다. 그런 최시형을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치켜세우는 도올은 역시 도올답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참으로 좋아한다. 많은 사람은 그를 단순히 지적인 엔터테이너라고 깎아 내리지만, 그의 선불교에 대한 해석을 위시해서 공중파에서 보여준 동양고전의 강의는 실히 그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임을 보여준다. 도올은 기존 학문의 형식과 내용에 속박을 받지 않는 방랑적인 그러나 혁명적인 지성인이다.
이미 기운을 다한 구한말, 서구제국주의의 거침없는 서세동점의 시대, 세상의 중심이라고 굳게 믿던 청나라마저 영국에게 힘없이 무너져 버린 아편전쟁의 역사가 살아있던 시절, 한편으로는 지배세력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고, 굶주림과 설상가상으로 온갖 전염병으로 이 땅의 백성들의 고통과 원통함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태어난 최시형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
동학의 사도 바울, 최시형
오늘은 우선 모심과 살림에 올라와 있는 그에 대한 평가의 글을 그대로 옮겨 소개한다.
“조선의 ‘사도 바울’로서 19세기 조선민중들로부터 ‘최보따리 선생’이란 애칭으로 널리 불린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이하 해월이라 칭함)은 1827년 3월 27일 지금의 경주시 황오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일찍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와 종이공장 직공을 지내던 그가 동학에 들어간 때는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본격적으로 동학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하던 해인 1861년 6월경 이었다. 해월의 동학입교는 그의 운명을 바꾸는 첫번째 사건이 되었다.
그는 동학에 입도한 이래 수운의 사후 동학의 도통계승자가 되어 1898년 4월 5일(음) 관병에 체포되고 이어 6월 2일에 처형되기까지 38년 동안 동학 교단을 지켜온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敎祖가 동학의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지 불과 3년 여 만에 체포되어 처형된 이후, 동학의 도통을 이어 동학 교리의 체계화, 동학 조직의 재건과 지역적 기반의 확대, 동학 경전의 집성, 동학의 각종 제도와 종교의례의 제정, 정기적 수련제도의 실시를 통한 지도자의 양성 등 동학 교단의 모든 사업들은 해월의 손을 거쳐 이룩되었다.
그러기에 그를 일러 동학의 ‘사도 바울’이라 부른다.
또한 1894년 1월 전라도 고창(古阜)에서 시작되어 1년 여 동안 조선 전역을 뒤흔든 동학농민전쟁에서도 동학군 봉기의 조직적 기반은 바로 해월의 손에 의해 이룩된 삼남(三南) 일대의 동학 조직이 근간이 되었고, 봉기를 주도한 각 지방의 핵심 인물들은 해월로부터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고 성장한 동학 접주들이었다.
따라서 동학사(東學史)에서 해월을 빼놓고서는 온전한 논의가 불가능함은 물론,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해월의 생애와 사상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연구과제의 하나이다.
동학농민전쟁 최대 전투였던 공주 우금티 전투 상세화
그러나 지금까지 동학에 대해 연구해온 연구자나 한국근대사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3년여의 활동 끝에 처형된 동학교조 수운(水雲)과 1890년대 초반 동학접주가 되어 갑오동학농민전쟁을 주도했던 전봉준(全琫準)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3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동학 조직을 이끌어온 해월에 대하여는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방치해왔다.
해월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남긴 소수의 연구자들마저도 동학농민봉기를 주도적으로 이끈 전봉준은 ‘위대한 인물’이지만 전봉준의 거사를 비난하고 봉기 그 자체를 만류한 것으로 알려진 해월은 ‘비겁한 인물’인 것처럼 묘사하는 데 앞장 서 왔다.
그 결과 해월은 우리들에게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 역사 발전의 방향을 거스른 ‘반동적(反動的)’ 인물로 각인되어 버렸으며, 대부분의 연구자들과 국민들은 누구도 그 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처럼 해월에 대한 이해가 매우 피상적일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40여년에 걸친 ‘도망자’생활 때문에 관련 자료가 없어지거나 흩어져 버린 때문이며,
둘째는 동학하면 최제우와 전봉준이요, 생활사속에서 민중들에게 끼친 동학사상과 동학교단의 역할에 대한 관심보다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요,
셋째는 갑오년이후 지속된 탄압 속에서 동학이 사회변혁운동에서 종교적으로 윤색되거나 신비화되어 민중들의 품에서 해월의 역할이 특정 교단의 무지랭이 교조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해월에 대한 올바른 연구를 위해서는 지나간 시대에 ‘저 높은 하늘로 신이 되어 올라가 버렸던 그를 우리들과 같은 사람의 모습을 가진 한 인간’으로 끌어내려 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보따리 하나 달랑 메고, 기적적인 교세 확장
나는 그의 위대함을 우선 그의 별명 ‘최보따리’에 있다고 본다.
창시자 최제우 주위에는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시대에 참여할 수 없던 불우한 잔반(몰락한 양반), 시대를 걱정하는 지방의 양심적 관리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최제우가 대구에서 참수형을 당한 후에는 대부분의 제자들은 박해를 피해 은거에 들어간다. 예수의 십자가 순교 후 제자들의 행적과 비슷했으리라 추측한다.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자극받아 시천주라는 동학을 주창했던 수운 최제우가 위에 언급하였듯이, 주위의 학식 많고 지위 있던 제자들을 제치고 최시형을 제2교주로 지명한 점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다.
동학의 요점인 천지개벽 후 오는 평등세상은 상놈,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주인이 되는 것이니,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상놈 속에서 지도자가 나와야 개벽이 이루지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1대 교주 최제우, 2대 교주 최시형, 3대 교주 손병희. 몰락한 양반 출신인 최제우가 자신의 후계자로 상놈인 최시형을 선택한 것이 놀랍다. 최시형의 둘째 사위였던 손병희는 동학농민전쟁 이후 붕괴된 동학의 재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최시형은 그러한 결정을 한 수운의 기대에 보답하듯이, 개나리 보따리 짐하나 달랑 매고 삼남 일대를 하루도 쉬지 않고 풍찬노숙의 고생을 마다않았다. 죽을 고생을 수 없이 넘기면서 와해되었던 동학의 조직을 재건해내어 동학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에는 백 만이 넘는 엄청난 신자의 머리수를 만들어 낸다. 이는 한국사뿐만 아니라 전 인류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사건이다.
예건데 그 시점에서 수 천년 역사를 지닌 불교의 신자수가 기십만에 지나지 않았고, 서양교단의 물적 지원을 받았던 천주교신자도 십만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불과 30여 년 만에 1000만 조선인구 중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특히나 그의 주활동 무대였던 삼남의 농민 태반이, 동학을 신봉하고 지지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를 단순히 당시 시대상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상황과 더불어 최시형 개인의 초인적인 노력, 그리고 최제우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발전시킨 그의 위대한 사회변혁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그는 참으로 한국사의 거대한 위인이다.
온 우주가 한울님…그러니 “네 이웃을 하늘처럼 섬겨라”
해월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의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발전시켜 삶의 실천 속에서 마음에 모신 원형적 가능성으로서 한울님을 정성껏 키워 자신이 한울님과 닮도록(人乃天, 사람이 곧 한울이다)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쳐 가르친다.
그리하여 스승이자 교주였던 최제우의 시천주라는 선언적 개념은 최시형에 의해 실천적인 양천주(養天主)라는 개념으로 발전한다.
마치 서구에서 자유-평등-박애가 역사적 실천을 통해 존엄-정의-연대로 발전하였듯이, 한울님을 정성껏 모시고 실천을 통한 노력의 과정에서 그는 인식의 범위를 넓혀가며 드디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위대한 선언에 이른다.
불가에서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선언하며 생명의 고귀함을 일찍 설파하였고, 서양의 근대계몽시대 이후 천부적인 인권의 존엄을 이야기하였으나, 내용의 규모나 깊이에 있어서 사인여천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구한말 남대문시장의 모습.
예컨대 중인의 집안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맏며느리를 한울님이라 칭하고, 아이들도 이미 한울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까닭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때려서는 아니 된다고 가르친다.
이 사상은 현재 유명한 시인의 시귀절 “꽃잎으로도 아이를 때리지마 !” 로 되살아난다. 참으로 놀라운 생명존중사상, 진일보한 천부인권사상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 나아가 그는 새가 우는 소리도 한울의 소리,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한울의 소리 (天賦聲) 이라 이르며 온갖 사물에 한울님의 뜻과 혼이 깃들어 있음을 설파하고, 밥 한그릇에서 온 천지의 뜻을 읽어낸다.
이는 다시 장일순선생의 사상 ‘풀한포기에서 온 우주를 보다‘ 로 부활하여 생태운동, 한살림운동의 기초가 된다.
이처럼 양천주의 사상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인식을 통하여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의 경지를 넘어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三敬사상으로 이르게 되면서 오늘날에도 전혀 손색없는 주기일원적 인신론체계, 생명사상, 평등의 인권사상 그리고 환경생태운동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한울님은 당위로서 관념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 동인으로, 법칙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규범으로서, 사람의 마음속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온세상 만물들의 제 현상과 사건과 계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을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고(以天食天) 해월은 표현한다.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 가르침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죽어서 영혼이 따로 있고 조상신과 귀신이 존재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하등 유의미한 사안이 아니다.
한울님의 작용은 남녀간에는 애정을 통해 자식에게로 이여지고, 사람들간에는 사회적 실천행위를 통하여 역사를 관통한다고 해월은 판단한 듯하다.
그가 주창한 향아설위법(向我設位法), 즉 귀신과 벽을 향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 제사를 지낸다는 이론은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왕조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인 제사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행해져 왔던 규범과 강제의 모든 틀을 뒤엎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의 주요한 문화적 유산은 제의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향벽설위는 저 벽쪽에, 내 시선의 저쪽, 시간적으로는 사후에만 천국이 있고, 약속의 땅이 있고, 행복된 낙원이 있다는 식의 구조이다. 자기 꿈과 모든 희망을 미래에로 저 벽쪽에 갖다 놓고 오늘을 견디고 희생하는 내용이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향아설위(向我設位)는 나와 현재를 중심으로 잃어 버렸던 오늘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사드리고 있는 나, 우리 그리고 한 사회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울님, 우주생명 등이 존재하며, 그래서 지금 여기에 낙원도 행복도 미래도 현재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상이 향아설위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다”
이러한 깨달음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서 집단의 공동체로서 동학교도들에게 생활의 주요한 지침을 함께 공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남녀의 차별을 금지하고 여성을 귀히 존중하며 과부의 재혼을 권장하였던 일이다. 여성들을 위하여 특히 임신부를 위한 내칙과 내수도문을 보급하여, 심고(기도)하는 법, 위생과 환경문제를 다루고, 태아의 중요성과 섭생, 정서, 건강관리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구한말 당시 전염병이 창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통하게 동학교도들은 전염병조차 피해 갔다고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동학교도들은 위생과 환경의 관리가 철저하게 생활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인습적 차별에서 해방을 선언하여 칠반천인(七般賤人)으로 분류되었던 승려, 광대, 기생, 무당, 점쟁이, 갖바치, 백정 등을 두루 포용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후에 갑신개혁당시 천민해방의 법령을 만드는 물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창시자 최제우가 살아있던 당시 동학을 비판하고 배척하였던 서원의 통문 기록(동학배척통문 1863)을 보면 “귀천이 같고 등위의 차별이 없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함께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포교소를 세워 과부나 홀아비들이 모여들며, 재물과 돈을 좋아하여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有無相資) 가난한 자가 기뻐한다”고 하였다.
이후 동학교도들의 생활에 지침이었던 유무상자는 현재 회자되는 공유경제 또는 돌봄경제의 원형으로 우리의 역사에 실제로 행하여졌던 살아있는 이야기이며, 물질 중심적이며 자본제적인 현실을 떠나 사인여천의 구체적 실천의 과정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갔던 진솔한 수평적 상호관계에 대한 사회적 기록이다.
세상의 만물과 더불어 하늘과 사람과 어울려 살아간 최시형은 머무는 곳마다 과실나무를 심고 한시도 쉬는 일없이 볏짚을 꼬거나 밭을 일구었다 한다.
사인여천과 유무상자의 정신,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어느 타민족의 역사에 이만한 감동과 깊이를 담아낸 서술적 내용이 있었는가 ?
우리 안의 복지사상
현재 복지선진국을 이루는 북유럽국가들의 등장 배경에도 중세를 관통했던 바이킹의 전승이 숨어 있다.
해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 바이킹에게는 모두가 함께 협력하여 힘을 모아내야만 생존이 가능했던 가혹한 삶의 체험적 역사적 기록이 있었다.
행여나 혼자 잘난 척하고 혼자 독식을 하는 순간 바이킹의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근세사에 진입하면서 서쪽으로는 강대해지는 유럽의 대륙세력과 동쪽으로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는 슬라브 민족의 사이에서 노르딕 민족이 살아남는 길은 오로지 서로가 힘을 합쳐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는 선택뿐이었다. 매우 소중한 예화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구한말처럼 안팎에 중층적으로 얽힌 복합적 위기상황에 다시 직면하여 있다.
한가하게 중부담-중복지 따위의 철학도 없고 마음도 담기지 않은 정치적 언술이나 기능적 접근으로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손쉽게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와 정치권력은 모든 국민 개인 개인을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가능한 정책을 모색하고, 시민사회는 서로 간 형편을 살펴가며 부족한 것을 함께 채워가고 감싸 안는 동학적 사상을 기본으로 삼고 계기적으로 출발해야 한다.
더 나가서 복지체계의 심각한 한계에 봉착한 서구사회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드는 마련해서 동학의 사인여천과 유무상자의 정신이 21세기 동서양의 만나는 새로운 융합이며 중체서용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심 후보의 꿈은 애초 교육자였다.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거듭 응시해 1978년 합격했다. 아버지도 교사였고 언니도 교사였던 영향이 컸다.
‘긴급조치 세대’로 시위현장을 누비기도 했지만, 긴 생머리에 미니스커트, 7㎝ 높이 하이힐 차림의 얼치기 운동권에 가까웠다.
심 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재수까지 해서 대학 들어가면 지긋지긋한 참고서 말고 책 실컷 읽고, 여행 맘대로 다리고, 연애 멋있게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괜찮다 싶은) 남학생들 찍어서 뒤를 좇다 보면 영락없이 운동권인 거에요. 그 세계를 들어가야겠더라”라고 말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책 한 권이 뚜렷해 보이던 진로를 뒤흔든다. 심 후보가 “내 인생의 진로를 밝히는 등불”이라고 표현하는 ‘전태일 평전’이다.
직업훈련소를 다니며 어렵사리 미상사 자격증을 딴 뒤, 구로공단으로 가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미싱사 ‘김혜란’…8만원 월급쟁이에게 500만원 현상금
심 후보는 ‘걸크러쉬’(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의 면모를 과시한다. 여학생을 ‘학회의 꽃’, ‘학생회의 꽃’ 으로나 생각하던 때다. 당시 운동권에서도 만연했던 가부장제 문화를 깨기 위해 나섰다.
1980년 최초로 총여학생회를 만들었고, 초대 총여학생회장에 선출된다. 여학생만의 학회도 만들었다. 여성이 보조역이 아닌 주체로 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구로공단에서 야학활동을 하던 그는 구로3공단 남성전기에 ‘김혜란’이라는 이름으로 취업하면서 눌러앉는다.
13~16세의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다 다림질용 프레스 기계에 손이 눌리는 끔찍한 산업재해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경험하고 그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85년 6월, 서울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구속자 석방과 노동악법 철폐를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왼쪽 사진). 창틀에 걸터앉아 구호를 외치는 대우어패럴 노동자의 모습. <사진=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1983년 세 번째 직장인 대우어패럴에서 미싱사로 취업했지만, 1985년 해고된다. 그 해 6월 대우어패럴 노조 지도부가 구속되면서 ‘구로동맹파업’이 발생한다. 이 파업은 구사대 폭력과 경찰의 탄압으로 1주일 만에 끝났다.
심 후보는 노동사상 최초의 정치연대 파업투쟁으로 불리는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 된다. 국가보안법위반 혐의까지 씌워졌다.
미상사로 받던 월급이 8만원이었던 당시 현상금만 500만원이었다. 경찰에게는 1계급 특진 포상도 걸렸다.
심 후보는 9시 뉴스 화면에서 지명수배 소식과 함께 자신의 얼굴이 뜨는 것을 숨어서 지켜봤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에 합격했을 때, 온 동네에 자랑을 하고 다니던 아버지는 운동권 딸이 전국에 지명 수배되자 말을 잃으셨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9년간 이어진 수배 생활의 시작이다. 구로동맹파업으로 1,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해고됐다.
심 후보의 소재를 밝히라며 지인들에게 가해진 모진 고문은 더 큰 상처였다.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극악한 인권 탄압이 횡행했던 시절이다.
김문수는 보일러공으로 취직해 도루코의 노동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사진은 노동운동탄압규탄대회 방해에 항의하는 모습.
구로동맹파업 공개 상황실이 위치했던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심상정이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침을 받으며 전기 고문을 받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대학 후배로 유시민 작가의 친동생이기도 한 유시주 희망제작소 기획이사 등도 물고문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국내 최초 산별 협상으로 주5일제 관철…금속노조 ‘철의 여인’
심 후보는 9년의 도피생활 끝에 1993년 체포됐다. 오랫동안 전담반을 따돌려 온 거물이 잡혔다는 소식에 “얼굴 좀 보자”고 수사관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재판 끝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만삭의 몸으로 재판장에 선 심 후보를 본 판사는 “무죄를 선고하고 싶으나 관련 법규가 최소한 집행유예를 선고하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정부는 2001년 구로동맹파업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줬다.
심 후보는 수배자 신분이었을 때도 노동운동에 주저함이 없었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기업 단위의 노동조합을 뛰어 넘는 대중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탠다.
1985년 8월 창립된 서노련은 이듬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된다. 보안사령부를 동원한 관련자 구속과 고문 등의 탄압을 받으며 사실상 해체된다.
심 후보는 뒤이어 1988년 전국노동단체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만들어지면서 쟁의국장ㆍ조직국장 등의 중책을 맡는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발전적 해체를 하며 1995년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만들어진 뒤로 심 후보는 민주금속연맹ㆍ금속산업연맹에서 활동했다.
금속연맹이 산별 노조인 전국금속노동조합으로 발전해서도 사무차장으로 자리를 지켰다. 금속노조는 2003년 국내 최초로 산별 중앙교섭을 통해 ‘임금삭감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 합의를 이끌어 낸다.
심 후보에게 ‘철의 여인’이란 별명이 생긴 게 이 때다.
진보정당 비례 1번으로 원내 진출
노동운동가로 25년 외길을 걸었던 심 후보는 2004년 민주노동당 소속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한다. 진보정당 원내진출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어깨에 짊어졌다.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었지만, 경제 분야에서 발군의 역량을 과시한다. 경제부처에서 장ㆍ차관을 역임한 의원들이 혀를 내 두를 정도였다.
일례로 등원 첫해 국정감사에서 이헌재 당시 경제부총리를 상대로 재경부가 역외선물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방어하다 1조8,000억원 가량의 외환보유고를 날린 사실을 추궁해 밝혀냈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문제를 주도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지배구조 및 승계 문제 등 삼성의 편법ㆍ탈법ㆍ불법 행위를 밝혀내며 ‘삼성 저격수’, ‘재벌ㆍ대기업 저승사자’로 불리기도 했다.
17대 국회에서 여야를 통틀어 최고의 의정활동을 보인 국회의원으로 꼽혔지만, 2008년 총선 경기 고양 덕양갑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고양 덕양갑에 재출마해 170여표 차이의 신승을 거두며 수도권 최초의 진보정당 지역구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다.
민노당 해체 시련…탈당 뒤 정의당
하지만 시련이 연이어 닥쳤다.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던 통합진보당이 19대 총선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구 당권파에 의해 부정투표가 이뤄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내홍에 휩싸인다.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 심상정 대표가 2008년 2월3일 서울 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에서 열린 임시 당 대회에서 혁신안이 부결되자 퇴장하고 있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5월 열린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심 후보 등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공동대표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지만,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사태가 악화된다.
8월 부정투표의 수혜자로 꼽혔던 이석기ㆍ김재연 당시 의원의 제명안이 의원총회에서 부결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심 후보는 결국 탈당을 택한 뒤 진보정의당을 거쳐 지금의 정의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2016년 20대 총선에도 연거푸 당선돼 진보정당 사상 첫 3선 중진의원이 된다.
진보정치의 간판스타…”반드시 완주”
심 후보 대선 도전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권영길 전 의원에게 패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진보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지만,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단일화라는 대의 속에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를 지지하며 후보 직을 사퇴했다.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가 지난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정의당 정당연설회에서 해바라기 분장차림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부담은 앞선 두 번의 도전에 비할 수 없이 크다. 진보정당의 부활, 명가의 재건이라는 과제가 모두 심 후보의 어깨에 실려 있다.
앞선 15~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얻었던 득표율 3%를 넘어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둬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지는 조기대선이라는 환경은 의석 수 6석의 초미니 정당인 정의당에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수세에 몰리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정권교체를 대의로 하는 후보단일화 압박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심 후보는 두 자릿수 득표를 자신하며 “이번엔 끝까지 완주한다”는 말로 필승각오를 다지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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