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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성장, 위기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 돌파구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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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성장, 위기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 돌파구들(1)

admin | 일, 2021/09/05- 06:03

이제 개발도상국이나 세계 최고 부국의 실천적인 전망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경제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인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 대한 확산된 지식경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명료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경제의 경제적 성장과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 후반의 한계주의 전향 이래로 주류의 경제적 사유는 시장의 작동방식에 결함이 없는 경우 수요와 공급은 서로 조정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결함은 완전경쟁에서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함들이 없는 경우에 수요와 공급은 균형에 이를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 과정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 인간의 노동을 포함해서 자원들이 가장 효율적인 용처들에 투입되는 것을 보장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에 따르면 공급과 수요의 각 원천들은 수요와 공급이 상호 조응하게 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기제에 대한 이해와는 관련이 없다. 공급이나 수요의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시장 지배력뿐만 아니라 정보를 포함한 어떤 차원에서도) 완전경쟁의 실패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방해하지 않는 한 수요와 공급은 결국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서로 조정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 아래서 우리는 수학적 표현을 이용하면서 수요와 공급을 각기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정량으로 상상한다. 이제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에 대한 수학적 분석과 수요와 공급의 확장이나 축소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구별할 수 있다. 우리는 경제학의 개별적인 분야들, 특히 경제성장 이론과 경기순환 연구나 더 일반적으로 (그런 분과가 존재 한다면) 경제위기 연구에 인과적 탐구를 할애할 수 있다.

나는 공급과 수요에 대한 사유의 또 다른 방식, 즉 포용적 전위주의를 제안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지식경제와 그 미래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을 밑받침하고 있는 일부 가정들을 명료화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견해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까지 희망할 수 없지만, 이러한 견해가 경제사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많은 부분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측면 중에는 지식경제의 진화와 현재 상태와 관련되는 측면들도 있다.

모든 일반적인 견해와 마찬가지로 내가 개략적으로 제시한 견해도 직접적인 경험적인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가 경험적 도전에 난공불락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사실문제에 대한 결론들에서 넓은 주변부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러한 주변부에서 반증가능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관념들이 있다.

첫 번째 관념은 경제성장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인 돌파구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장이 지속되기 위해서 경제의 수요측면에서의 진전은 공급측면에서의 상응하는 진전을 만나야만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도 이와 똑같은 관념을 통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접근은 특정한 시장의 불완전성이 가로막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에서 공급측면의 진전과 수요측면의 진전 간의 일치가 자동적이라고 표상한다.

우리가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에 붙잡혀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하나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공급의 증가가 수요의 증가를 창출하고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유발한다면 공급과 수요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아야 한다.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지금까지 경제생활에서 보편법칙의 배역에 가장 그럴 듯한 후보자)이 경제적 침체를 충분히 해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혁신들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주류사고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관념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확장하는 방법들은 다양하다. 각 방법은 각각의 작동방식과 그 잠재력과 한계와 같은 각기 고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경제의 수요나 공급측면에서 확장을 지속시키는 이와 같이 특징적인 방식들은 각기 다른 파급 범위, 유효성과 지속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식은 다른 방식보다 더 일천하고 더 단명하다. 어떤 방식들은 신속히 소진되지만 다른 방식들은 자체 보존적인 성격을 더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들은 경제주체들의 역량과 경제적 제도와 관행에 대해 더 변혁적인 효과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양상들을 계층으로 배열할 수 있다. 마치 이러한 확대양상 중에서 하나의 양상이 지닌 잠재력을 소진시키고 나면 다음 양상으로 이행이 보장되는 듯이 하나의 양상에서 그 다음 더 강력한 양상으로의 직접적인 혹은 자동적인 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공급이나 수요를 증가시키는 하나의 기초에서 계층적으로 우위에 있는 그 다음의 기초로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나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를 불연속적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관념들과 달리 공급과 수요의 단기적 부침들과 경제성장 및 경제침체의 원인들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연속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중에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위한 이와 같이 다양한 기반들을 개관하고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 잠재력의 역순으로 그러한 기반들의 순위를 매겨보겠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경제성장 메커니즘의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에 있어서 각각의 기반은 그 이전 단계의 기반보다 전도유망하다.

세 번째 관념은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이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진전과 공급이나 수요의 다른 측면에서의 진전 사이에는 자동적인 일치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수요를 지지하는 데에서 진전으로부터, 즉 이러한 진전을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또 다른 기초로 진전된다는 것(예컨대, 가계부채의 장려를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에서 누진세 및 사회 지출을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으로부터 경제의 공급측면에서 일치하는 진전(예컨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없는 공급 확대에서 그러한 혁신을 동반한 공급 확대로의 진전)을 달성할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타율성은 불연속성의 효과를 심화시킨다. 불연속성은 일면적이다. 불연속성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그 다음 더욱 효과적이고 변혁적인 기초로의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타율성은 양면적이다. 타율성은 경제의 한 측면(수요나 공급)에서의 진전이 다른 한 측면에서의 진전을 보증할 수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 관념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불연속성과 타율성이 경제불안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중단되기 쉬운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시장의 결함이 없는 경우에 공급과 수요는 상호조정을 거쳐서 자원과 노동을 가장 효율적인 용처에 배정하는 것을 보장한다)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공급확대와 수요확대 사이의 자동적인 일치의 부재가 경제불안의 제 1의 원인이라면, 경제불안의 제2의 원인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관계가 과부하상태이고 가변적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장의 다음 부분에서는 케인스가 매우 강조했던 이 관계의 측면(화폐가 중요하다)을 논평하겠다. 특정한 생산적 활동과 유리된 화폐시장균형들의 유동성은 그러한 균형들이 두려움과 탐욕, 절망과 희망과 같은 충동들의 유순한 도구로 복무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에 따른 이와 같은 화폐비축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가 보여주는 더욱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에 대해서 부수적인 사정일 뿐이다.

시장체제의 조직에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이 없는 것처럼 시장체제의 한 측면, 즉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형성에서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은 없다.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상이한 방식들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이완시킬 수 있다. 금융과 실물경제의 연결이 느슨해질수록 또한 실물경제의 거래가 더욱 금융활동의 참된 관심사라기보다는 그 구실이 될수록 그와 같은 금융이 폐해를 야기할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다.

부유한 국가들에서 현재 확립된 안배들 하에서 생산체계는 대체로 금융을 자체적으로 조달한다. 생산자금은 주로 기업의 재투자용 사내유보이익, 따라서 생산체계 안에서 창출되는 자금에 의존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을 창출하는 것(벤처캐피털 및 유사한 금융형태들의 관심사)은 금융활동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 1차적인 기업공개나 2차적인 기업공개도 금융의 비교적 작은 부분을 나타낸다. 이러한 안배들 아래서 금융은 좋은 하인보다는 나쁜 주인이 될 공산이 크다.

경제불안 혹은 경제위기에 관한 이론은 경제성장 이론의 이면에 불과하다. 경제불안과 경제위기에 대한 이론은 성장의 붕괴가능성을 다룬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시간에 맞게 동적으로 서로 조정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경제성장과 경제불안의 문제를 단기적으로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다섯 번째 관념은 만일 우리가 공급과 수요의 확대에 대한 제약들을 극복하는 방식들의 [단계]를 멀리 넘어 가서 이러한 제약들을 폐지하는 더욱 파급력 있고 더욱 지속적인 방식들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방식들이 공급을 증가시키는 데에 사용한 똑같은 수단으로 수요를 확대시키는 일단의 해법들(생산의 자원, 기회 및 역량에 대한 접근의 제도적 확장)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경제생활의 자연적인 상태로 상정하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은 실제로 경제조직의 예외적인 변형들(더 많은 경제주체들에게 생산적 활동의 수단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수요공급의 한계를 깨뜨리는 속성을 가진 변형들)이 가진 속성이다.

여섯 번째 관념은 다섯 번째 관념이 제시한 여건들 중 특히 유력하고 전도유망한 부분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집합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을 확장함으로써 수요공급의 제약을 깨뜨린다. 공급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경제의 가장 생산적인 분야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킨다. 수요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회고적이고 보상적인 재분배의 수혜자가 아니라 부의 창조자로서 그들이 생산에 기여한 부에 대한 몫을 청구할 지위를 부여한다.

이와 같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라면, 수요와 공급의 확대 잠재력은 특히 크다. 지식경제는 기술혁신을 영구화하는 경향을 띠고 생산과정에서 투입요소의 증가에 대한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을 완화시키거나 역전시키겠다고 약속하는 생산적 활동형태를 허용한다.

헨리 포드는 한때 노동자들이 포드사의 차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급여를 후하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물건을 사거나 포드사의 경쟁업체들이 만든 차를 구입하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포드의 발언으로 야기된 문제에 대하여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계약상 해결책은 없다. 제도적인 해결책 밖에 없다.

지식경제의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로서 포용적 전위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도적 해결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더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수요공급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들이 불완전경쟁이 가로막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일어난 다고 그릇되게 가정하는 것[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시장경제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달성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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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에 타임 잡지를 설립하고 자매지인 Life & Fortune을 발간했던 Henry Luce는 “20세기는 미국의 세기”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였다. 경쟁이 없는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단호한 의지를 지닌 미합중국이 세계를 자유로서 방어하고 모두를 위한 성장과 더 나은 행복을 보장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며, 이런 바램이 국력과 명성이 함께 어우러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면서, 미국시민 모두에게 궁극적인 지혜와 궁극적인 물리력과 더불어 선의적 의지라는 거의-보편적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세기를 되돌아 보면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때로는 잘한 일과 때로는 잘못한 일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확실히 Luce의 선언처럼 지난 세기(최소한 반세기)는 ‘미국의 시대’이었다 그러나 2020년을 지나는 지금, 21세기는 <미패권 종말의 시대(Anti-American Century)>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지만,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욱 현재화되고 분명해졌다. <미패권종말의 시대>라는 표현이 미합중국에 매우 적대적인 의미로 해석될 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미국의 세기’에 대한 안티-테제(헤겔의 변증적)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미국의 패권에는 세가지 기둥이 있는데,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정치(편집자 주: + 국제기구들과 거대언론매체)가 지난 세기를 규정지어 왔으나, 현재 시점에서는 이들 기둥들이 사라지고 있거나 혹은 시험대에 올라 있다. Robert Kagan이라는 작가는 최근 그의 저서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없는 국제사회는 다시 정글의 시대로 돌아갈 것으로 염려한 바 있다.

그의 걱정대로 미국이 사라지면, 중국이 등장하여 자유의 질서에 퇴보가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의 국내정치적 관점에서는 좌우파가 미국의 시대가 저문다는 것에 함께 연대하여 중국에 대응하고 있다. 좌파진영에서는 인종적 분열과 트럼프 행정부의 어리석음으로 미국이라는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반면에, 우파진영에서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칼자루를 마구 흔들고 있다.

<미패권의 종말>이라는 출발점은 국제사회와 미국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78억의 인구가 사는 세계는 단일한 강대국의 지배 혹은 쟁탈하는 패권국가들의 싸움이 아니라 다면적인 협력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거대한 잠재력과 동시에 수많은 결함투성이인 미국은, 여전히 과거에 속박될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성공에 대한 보장은 없지만 투자자로서 지위를 수용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자신만이 유일한 강대국이며 역사적으로 선택을 받았으며 문화적으로 위대하다는 믿음은 곧바로 실패에 이르는 처방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1세기 시작되던 20년 전에는 미합중국은 영원할 것이라는 느낌이 지배적이었고,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민주주의를 성공시킬 유일한 해법을 미국만이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유일한 패권과 유연함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 자신의 역할임을 자임하였다. 혁신과 개발, 교육 등 분야에서 모든 세계에 모범임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소망은 대부분 헛소리이었지만, 그러나 미국이 그 동안 세계에 미친 영향은 부정할 수 없었다.

팬데믹 상황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틈새의 결함을 노출시켰다. 동시에 중앙연방정부가 연방의 삼권분립뿐만 아니라 개별 주정부들의 자치권과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전쟁이 아닌 위난의 상황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을 드러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갈팡질팡하는 미국을 경멸과 조소로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은 사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벌려온 것에 대한 평가의 재판이다.

미국의 시대를 받쳐온 첫 번째 기둥으로 무너진 것은 군사력이다.

9/11사태 이후, 미국의 아프칸 개입은 알-콰이다와 빈-라덴의 근거지인 탈레반에 대하여 정당한 응징을 행한 것으로 국제사회에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뒤이어 2003년 봄에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국제여론을 악화시켰고, 서투른 점령정책과 십 수년에 걸친 게릴라와 맥없는 전투는 베트남 전쟁을 연상시켰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운 이라크와 관타나모에서 자행된 고문과 제재는 폭로와 더불어 문제를 크게 확대시켰는데, 이는 미국자신이 오랫동안 지지해온 제네바 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이었다. 이에 더하여 국가안보와 테러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국내감시의 스파이 행위는 ‘미국은 위대하다’라는 경건한 믿음을 배반하였고, 2008년까지 미국이 이라크에 잔류하면서 보여준 온갖 혼란상은 미국의 위상을 규모와 능력 모든 면에서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두 번째 기둥으로서 무너진 것은 경제력이다.

미국의 시대라는 Luce의 핵심적인 자부심은 공산주의를 분쇄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미국 경제시스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소비에트가 붕괴된 이후에도, 번창하는 미국의 경제는 지구상에 뛰어난 모든 재능을 불러모으고 혁신을 지속하면서, 1990년대의 인터넷 붐과 2000년대의 이차적 파급을 주도하여 왔다.

1980년대에 안착한 워싱턴-컨센서스는 1989년 이후 동유럽과 러시아의 재건에 청사진을 제시하며 자유시장경제를 이끌어 왔다. 동시에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라는 간접적 기구를 이용하여 세계무역의 장벽을 낮추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며, 자본의 국제적 흐름을 위하여 금융시장을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러시아를 위시한 몇 개 국가들은 이런 처방에 심각하게 손상을 당했으며, 미국의 엄청난 경제력은 모든 국가에게 다른 대안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은 대상에서 예외가 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규모가 거대하다는 배경도 있고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이후 결국은 미국의 모델을 따라할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독자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후 중국의 경제적 발전이 미국의 지배력을 잠식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력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2008-2009년간의 세계금융위기이었다, 지난 수년간 투자자들의 판단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의 국가부채와 부실채권이 언제쯤 중국을 붕괴시킬 것인가?” 그러나 실상은 중국의 은행들이 아니라 미국의 은행들이 ‘문제투성’이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재앙이 되었다. 미국정부의 구제조치로 금융시스템은 회복되었지만, 미국경제에 대한 명성, 즉 Luce가 미국패권의 핵심이라고 이해했던 경제의 위력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둥은 민주주의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은 잘 짜인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개인적인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공동체의 에너지를 잘 결합시키는 유일한 제도라고 자랑할 수 있었다. 일상적으로 동맹이나 경쟁국들에게 개방적인 민주화를 추천하기도하고 압박하기도 하였다. 독재자를 견제하는 길은 민주주의밖에 없으며, 전제정치를 방어하고 풍요를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제도 역시 민주주의이었다.

결함이 있더라도 모든 시민들이 권리로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미국은 그러나 다양한 측면에서 최강의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북유럽국가들이 최강의 제도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제도가 두 개의 기둥(군사력과 경제력)과 광범하고 활기차게 결합하면서 미국의 시대를 만들어 왔다. 그리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6년 이전에 미국의 민주주의는 결함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참여도가 현저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미 경고등이 켜졌다. 이에 더하여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의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면서, 새로이 태생하는 포플리즘과 전체주의적 압력을 그토록 비난해오면서, 세계에 과시해온 미국 자신이 무색해 졌다.

물론 트럼프가 비난을 받는만큼 정말 그가 미국에 손상을 가했는지, 아니면 미국 대통령이라는 주요한 권력을 남용해도 이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것이 지독히게 어려운 국내 정치제도의 결함에서 손상이 발생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위력은 세계의 상징이자 희망이었고, 미국이 과시하고 키워온 기회를 잡기 위하여 재능을 갖춘 수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잠식시켰다. 동시에 위대한 미국의 이미지는 이미 197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서 수모를 당했고 제3세계에서 저지른 반민주적인(독재자-지원) 정책의 폭로로 인하여 퇴색되어왔다.

1980년의 경제적 번영이 없었다면 당시에 이미 미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당시에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 팬데믹이 닥쳐왔다.

중국의 수상이었던 주은래가 언급하여 유명해진 이야기 “프랑스 혁명의 전설은 너무나 일찍 너무나 높게 평가되었다”처럼, 현재 창궐하고 있는 팬데믹의 대응역량으로 국가들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미국의 강점으로 평가되어 왔던 개별 주정부 단위로 분산된 지배시스템과 경합이 치열한 정치제도, 지역과 주단위가 지닌 지나칠 정도의 다양성 등이 이제는 약점으로 둔갑한 듯하다. 전제주의와 정부의 지나친 간섭을 거부하는데 익숙해진 미국인들의 자유가 이제는 모두의 단결이 절실한 국가적 재난상황에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에 발생한 팬데믹에 대처하는 미국의 모습이 민주제와 훌륭한 가버넌스의 전도사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박살내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의 시대라는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 내에서 그리고 세계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미국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은 비극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미패권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세계와 미국 자신에게 현재의 구조적 문제들을 대처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평화와 개인적 권리 그리고 번영에 대한 독점권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78억의 인류 그리고 크고 작은 200여 개의 국가들이 미국만큼 자신들의 집단적 이해를 처리할 역량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면 국제적인 안정과 번영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오로지 ‘미패권 시대’의 영속적인 지속뿐이다.

자연히 중국이라는 새롭게 굴기하는 국제적인 세력의 위상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국이 퇴조하는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실제로 중국은 (개인적) 권리에 대하여 미국과 달리 규정하고 있으며, 중국의 외부인 시각에는 중국의 체제가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중국의 체제는 자신들이 선전하듯이 지신들의 문제이며, 설령 중국이 자신의 힘을 국제적으로 과시하더라도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의 기본 관심이다. 중국과 함께하는 미래를 구상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인류역사에서 매우 기이하고 예외적인 국가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은 자신만이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예외적인 국가이며 미국의 시대가 끝나면 인류에게 퇴보가 올 것이라는 주문을 믿고 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지난 수십 년 동안, 특히 지난 수 년간 자신의 국내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생활의 수준은 저하되었고 같은 수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한참 뒤떨어 졌다. 인종차별이 성행하고 교육과 공공의료 및 생활 수준에서 미국처럼 격차를 보이는 나라가 없으며, 자신의 시각으로 평가하여도 한때 스스로 성취한 기준에 한참을 뒤떨어져 있다. 교육과 사회시설 가난구제 공공의료 그리고 국방비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전혀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물리적 지표에서는 50년 전보다 개선된 점이 있기는 하다. 수명이 늘어났고, 먹거리가 나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에 진학하고, 마을과 도시가 좀더 안전해 지긴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인 이제 자신의 나팔을 불어댈 자격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과 지위는, 군사력과 정치력 그리고 경제력 이에 문화적인 것을 추가하여, 천부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다. 현재의 미국은 과거에 행세하였듯이 더 이상 위대하지도 강력하지도 못하다. 다만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함께 도울 수는 있다.

이제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시대’에 진행되었던 흠결과 개입에 대하여 냉정하게 비판해야 할 시점이지만, 현재 미국의 모습과 미국인들이 익숙해져 있었던 모습이 너무나 달라서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예외주의라는 약속>이 아니라, <미국의 인본주의>이다 <미국의 시대>에서 벗어나 예외주의와 작별을 고하고 미국이 다른 국가들처럼 정상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많은 허점들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패권의 종말>은 현재 미국이 어떠한 궁지에 빠져 있으며, 결점들을 어떻게 고쳐나갈지 방법을 찾아가는 기회를 제공한다.

누가 알 것인가? 미국인들이 그러한 기회를 받아들일 지.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새로움을 찾아가는 출발점이다.

 

출처 : 포린폴리시(ForeignPolicy) on  2020-07-13.

Zachary Karabell

콜롬비아와 옥스포드 대학을 거쳐 하버드에서 박사를 취득한 후, 투자회사의 책임자를 거쳐 역사와 경제 및 국제관계에 관한 여러 저명 저술을 출간했으며, 세계 유수 언론에 기고하고 있다. “Inside Money – American way of Power” 출간 준비 중

목, 2020/10/0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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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번 글을 시작으로 2주에 1번씩 함께살기의 복지국가 5.0 기획칼럼을 게재합니다. 필진은 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시재생, 도시계획, 주거환경, 현실정치, 공론장, 지방분권, 주거/문화정책, 노인복지, 사회사상, 복지국가이론, 사회보장정책, 건강정책, 영유아 돌봄, 청년정책, 세대갈등, 고용정책, 기후변화, 환경/에너지 정책, 행정개혁, 성평등 등 여러분야에 대해 심층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2010년대 초반 무상급식을 중심으로 복지국가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복지국가의 강화를 주창하는 것은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일부는 진보진영이 때가 되면 떠들어대는 지겨운 레퍼토리로 치부하기까지 한다. 현재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는 기본소득제 논의도 복지국가의 한계에 대한 지적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깊이 있는 분석과 사유에 기반하기 보다는 한 철의 유행으로 다뤄버리는 현실이기에 씁쓸하다. 정말로 복지국가는 무용해졌을까? 현대의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유럽에서도 복지국가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나라는 무용론이 적용될 만큼 복지국가였던 적은 있었던가?

 

통치패러다임으로서의 복지국가

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였던 적이 없다. 복지국가는 단순히 제도나 정책의 묶음이 아니라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의 논리와 가치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조직∙운영했던 적이 없다. 단지 부수적인 것으로 아니면 어려움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구성원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그때그때 이용될 뿐이었다.

패러다임은 패턴, 예시, 표본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παράδειγμα)에서 유래한다. 현대에 와서는,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 가치, 문제해결 방법 등의 총체’라는 의미로 사용된 후[1], 패러다임은 세계관, 사회관, 인간관, 믿음체계, 가치체계 등 보다 근원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이들에 기반해 형성되는 문제의식, 문제해결의 방식과 도구, 제도와 정책 등의 요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즉 하나의 영역이나 분야에 이러한 요소들이 지배적인 모습을 보일 때 패러다임이라 부르고 있다.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에도 이러한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치패러다임이라 부를 수 있다.

통치패러다임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기준들에 대한 종합적인 틀이기에, 당연히 전 방위에 걸쳐 대부분의 영역에서 적용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복지국가가 ‘복지’와 ‘국가’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이기에,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국가’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통치패러다임의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이해는 매우 단편적이며 표면적인 잘못된 이해이다. 복지국가는 통치패러다임에 의거해 복지국가의 사회정책, 경제정책, 문화정책 등을 자율적이면서 체계적인 논리와 기준들에 따라 수립하고 수행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기존의 다른 유형의 국가, 예를 들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구성원이 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는, 특히 경제활동에 개입하지도 않고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하지 않는 ‘야경국가 패러다임’을 교체하면서 대두되었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국민의 경제활동에도 개입하고 취약계층을 지원도 하며, 더 나아가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개입을 하는 국가이다. 즉 복지국가는 국가의 한 유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재정 전 영역에서 동일한 기준과 방식으로 국가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틀, 즉 통치패러다임을 구축한 국가이다. 이러한 통치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아니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은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에 기반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이다. 사회보장은 인간은 생존유지, 인간적인 삶 그리고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본래적으로 갖고 있으며 이 욕구를 사회적 연대의 방식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 자체로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다. 다른 어떤 외부의 원인들로 인해 사회보장의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존재이유가 침해되는 순간 인간의 삶은 불충분하게 되어 고통이 발생한다. 사회적 위험이란 바로 앞서 말한 근원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아서 고통이 발생한 상황을 말한다. 아파서, 마음 놓고 기거할 공간이 없어서,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서, 역량 함양을 위한 교육이 너무 비싸거나 교육기관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명확하다. 고통의 해소를 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노력하는 방법도 있고,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쳐 공동으로 해소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후자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이다. 공통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사회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응하여 위험을 해소하는 것이다. 사회보장이란 바로 이 공동의 대응방식을 포함한다.

하지만 단순히 제도와 실천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와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위험에 자신들도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다는 잠재적 보편성에 기반한다. 즉 제도와 실천 이전에 인간이 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나는 욕구와 그것의 미충족 가능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특정의 대응방식 등은 모두가 제도 이전에 인간을 구속하는 것들이다. 오히려 심층적인 요인들이 작동해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제도와 실천이 만들어진다. 사회보장이란 이처럼 보다 심층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현실에서 관찰 가능한 제도와 실천들 모두를 아우른다.

다만 인간이 사회보장을 실현함에 있어서 외부 환경이 이를 도와주거나 방해한다. 예를 들어, 경제체계는 이 외부환경에 속하면서 사회보장의 실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세기의 극단적 자본주의 경제체계는 사회적 위험을 발생시키고 이 사회적 위험에 대한 사회연대적 대응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외부요인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사회보장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내적으로 그 존재의 이유와 발생의 원인을 갖고 있기에 독립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외부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율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사회보장의 실현을 제1의 목표로 삼는 국가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개인이나 1차 집단이 주로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는 국가가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 그리고 그 충족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인데, 이러한 욕구 충족과 충족의 방식에 대해 국가가 전면적으로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득보장,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등을 관할하는 최종심급이 국가가 된 것이며, 경제 영역에까지 사회보장의 논리를 적용시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국가의 용인이 있어야 가능하게 되었다.

 

적응의 원리와 복지국가의 업그레이드

복지국가는 내∙외적 환경변화에의 적응(adaptation)을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로 삼고 있으며, 이 원리에 의거해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에 태동한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사회보장의 실현은 결국에는 주어진 현실의 환경 속에서 이루는 것으로, 상대적 자율성의 성격에 따라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적응은 바로 이 영향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적응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근원적 욕구의 사회연대적 충족’이라는 목적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당하다는 점이 재천명된다. 그리고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선택한 기존의 방법과 도구들, 즉 제도, 관행, 실천 등이 목적 실현에 적절한 것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한다. 그리고 보다 나은 다른 방법과 도구들이 없는지를 살펴본다. 그 결과 일부는 폐기하고 일부는 새롭게 선택된다. 이렇게 재구성된 방법과 도구들이 누수 없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가, 즉 최대의 결과물들을 낳고 있는지를 재검토한다. 이 과정을 통해, 관료주의가 개선되고 제도의 최종 성과물과 애초에 상정한 목표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효율성을 갖추게 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의 1.0 버전부터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경향의 확대에 적응한 4.0 버전까지 단계적으로 변화해 왔다. 19세기 전반기 내내 계속되었던 노동자들의 요구로 노동보호와 관련된 입법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이뤄졌고, 1880년대부터 사회보험체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취약계층에 대한 자선적 의미의 보호가 19세기 말부터는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위생, 전연병, 공중보건 등도 국가의 몫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복지국가 1.0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탄생했다.

태동기의 흐름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사이에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경험하며 복지국가 2.0이 만들어졌다. 독점자본주의 폐해의 확대 및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내∙외적 환경변화의 대표적 요소들이다. 이에 적응하기 위해,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은 복지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적용대상자의 범위 또한 넓혔다. 스웨덴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집권하여 가족정책과 주거정책 등에서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시장에서도 노사협의의 관행을 만들어냈다. 프랑스는 1930년대 인민전선이 집권을 함으로써 사회보장 제도들이 확대되었으며 미국에서조차 뉴딜정책과 사회보장법이 도입∙집행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소위 ‘영광의 30년’을 보낸 복지국가 3.0이 형성됐다. 전쟁의 경험이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에 대한 사회보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전에 준비된 내용들은 입법의 과정을 거쳐 제도적인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복지국가는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성격도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복지국가 3.0은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명실상부하게 통치패러다임으로 인정되고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생산모델인 ‘다품종 소량생산’이 널리 퍼지고 경제 자유화 및 금융 자유화가 일어나 자원의 국제적 이동이 커지게 되었으며 해외직접투자도 점차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위험의 내용도 달라졌다. 불안정고용의 증가, 장기실업의 등장 및 대규모화, 근로빈곤의 발생, 한부모 가구의 증가,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각종 차별의 사회문제화, 도시환경의 낙후(도시재생 및 구역개발의 필요성 대두) 등, 소위 ‘신사회적 위험’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각 나라가 구축한 복지국가 3.0의 문제해결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복지국가는 앞 서 2번의 적응능력을 보여주었듯 이번에도 적응에 들어갔다. 인적 역량의 강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투자, 소득보장에 있어서의 최저소득보장체계의 강화, 중산층을 위한 복지의 상대적 축소 및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 강화, 사회서비스의 민간제공주체로의 확대(즉 복지혼합), 사회보장의 지방분권 강화 등이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적응은 결국 복지국가 4.0 버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버전은 다시 새로운 환경변화에 직면하여 또 다른 적응의 압력에 노출되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압력을 가중∙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서의 복지국가의 위상

1980년대의 이후 ‘복지국가의 위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축적된 사회보장에 관한 자료들은 복지국가의 ‘후퇴’보다는 ‘안정적 지속’을 보여준다. 일련의 변화는 있었지만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변화들은 GDP 대비 공적 사회지출이 대략 5% 정도 축소하는 결과를 나았다. 즉 복지국가의 합리화가 5%의 축소에 한정해 이뤄진 것이다. 특히 경제체계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안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2]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실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복지국가의 수준이 높을수록 팬데믹에 대한 대응 또한 잘 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즉 2020년의 경제성장률은 그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이 국내외의 환경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 능력을 갖췄는지를 판단하는 종합지표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복지국가가 가장 잘 발달되었다는 북유럽 국가들 증 덴마크가 0.7% 증가하고, 핀란드와 스웨덴은 0.89% 하락했다. 이러한 수치는 다른 선진국들의 보인 2~5% 대의 하락과 비교한다면 매우 도드라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도 이와 유사하다. 북유럽 국가들이 0~3%대의 하락을 보인 반면, 다른 선진국들은 3~9%대의 하락율을 보였다. 결국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보다 공고히 자리잡은 나라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다.

국제통화기금(IMF)는 각 국가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실시한 예산사업, 재난지원금 등의 현금 지원, 세액감면 등과 같은 직접적인 지원을 ‘추가지출 및 기존 세액감면(Additional spending or foregone revenues)’ 항목으로 집계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3] 이 자료 또한 복지국가패러다임 구축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북유럽 나라들의 직접지원은 GDP 대비 1~4%인 반면, 미국, 영국 등의 영미형 국가들은 14~16%,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대륙형 복지국가들은 7~11%였다.

결국, 북구형 복지국가들은 팬데믹이라는 응급상황에서 다른 유형의 국가들보다 국가의 지원이 매우 낮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은 더 좋았다. 이는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의거한 제도들이 촘촘히 구축되어 있어서 내∙외적 위기에 보다 더 용이하게 대응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평상 시에도 국민의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위기 시에도 별도의 추가비용 없이 국민의 일상적 삶을 보호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증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가의 통치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보여준다.

 

복지국가 5.0의 전면화 가능성 상승

서구 유럽에서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위기대응 능력에 대한 인정을 넘어 새로운 업그레이드에 대한 여러 징후들을 낳고 있다. 복지국가의 후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라인 영국에서조차 ‘복지국가의 복귀’가 언론상에 등장하고 있다.[4] 코로나19 팬데믹 과정에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특히 중산층에게까지 여러 지원을 했고 이로 인해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올라가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과거 황금기의 복지국가가 새롭게 재구축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복지국가 5.0 버전의 출발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복지국가 5.0의 등장은 1980년대 이후 형성된 복지국가 4.0이 해소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축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 여성의 경제참여 확대, 성평등의 제도화, 4차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 및 정보에 대한 사회화, 지방 자치 및 분권의 공고화, 이민자의 사회통합 강화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해, 사회보장의 원리와 원칙이 경제영역에서 보다 더 확대되어야 한다. 그 동안 미뤄두었던 생산수단의 사회화, 기술 및 지식의 사회화, 생산과정에서의 경제적 민주주의 강화,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조직의 역할 증대, 더 나아가 사적 재산권에 대한 제한, 금융의 사회화, 화폐민주주의의 강화 등이 추가되어야 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으로 복지국가 5.0을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사회에 내재된 여러 문제들을 표면화 시켰다. 사회보장의 기존 제도, 관행, 실천의 한계와 결함을 드러냈고, 지방자치단체의 역량 부족을 부각시켰다. 무엇보다도 IMF가 집계하는 직접지원이 GDP 대비 3.4%라는 점은 사회구성원에 대한 소득보장이 부실함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구축되어 있어 위기상황에도 직접지원이 덜 필요한 반면, 우리나라는 그러한 기반이 없음에도 직접지원은 그들과 유사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의 불가피한 소득결핍의 문제를 사회적 연대 방식이 아닌 개인과 가족의 자구방식, 특히 가계부채에 맡겼다. 이는 우리나라의 통치패러다임은 야경국가패러다임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위기는 기회이다’라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 유럽연합과 개별 회원국에서 나타나듯이,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발상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3개의 상이한 압력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 복지국가 3.0을 완료하지 못했기에 이를 보완해야 한다. 복지국가 4.0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아직 맛보기 수준이다. 거기에다 다가오는 복지국가 5.0이 해소해야 할 것으로 상정되는 문제들은 아직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우리나라가 당면한 복지국가의 구축은 매우 방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통치패러다임의 새로운 구성을 위한 공론의 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서구복지선진국이 1945~1975년 사이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패러다임의 지배적 위치에 최종적으로 올려 놓은 그 작업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서구유럽의 경우 복지국가패러다임이 지배적 통치패러다임이 되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렸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가 논의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간 길들을 짧은 시간에 주파하는 저력을 보여왔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도 그러한 저력이 펼쳐져야 할 장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해야 할 때이다.

 

[1] . 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nd E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2] . Paul Pierson, The Welfare State Over the Very Long Run, Zes-Working Paper No. 02/2011, 2011.

[3] . IMF, Fiscal Monitor Database of Country Fiscal measures in Response to the COVID-19 Pandemic, 2021/02/03 참고.

[4] . The Economist, “Covid-19 has transformed the welfare state. Which changes will endure? The pandemic may mark a new chapter in the nature of social safety-nets”, 『Briefing』, 2021/03/06.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정치학도로 시작해 프랑스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IEP de Grenoble)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연구실장으로 활동했음. 현재는 복지국가를 마을에서부터 만들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 사회사상, 복지국가와 복지정치, 사회보장, 건강 및 요양, 복지도시 등을 사회성(the social)과 이론-실천의 통합 관점에 기반해 연구 중

목, 2021/08/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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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에 있었던 홍콩지방의회 선거는 반중파(민주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한국을 포함하여 대부분 서방 언론은 마치 민주주의의 승리인양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홍콩인들은 이미 어느 국가의 누구보다도 자유와 자치분권을 누리고 있었다. 과연 이번 선거 결과가 홍콩의 잃어버린 영화를 다시 가져다 줄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일국양제 하에 있는 홍콩이 임의로 미국의 52번째 주로 편입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 본토의 지원과 협력이 없는 홍콩의 미래가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잔꾀가 많은 영국정치와 막가파식 미국의 패권에 희생당할 소지가 높아 보인다. 현재 독일의 자유도시에서 법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중국 젊은이의 색다른 견해를 아래에 소개한다.


소위 아시아 시위대는 자국인 홍콩 거리에서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약자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 모자를 쓰고 성조기를 흔든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지닌 미국인들이 이런 기괴한 광경을 보면 한편 즐겁지만 괴로운 메스꺼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시아 시위대는 공론을 통해 ‘민주 투사’ 또는 ‘인권 수호자’로 불려지곤 하는데 두 단어 모두 의미가 약해서 특이한 차림을 한 사람들의 진정한 정신을 잘 포착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몇 왜곡된 언론은 정신 이상의 의미가 잘 담기거나 또는 누군가 마침내 깨닫고 “시위대 옷차림은 딱 극우주의자 같아” 라고 말할 때까지 여러 차례 시위대를 무고한 천사로 그려낸다.

그렇다. 이러한 유사함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 계속 심각하게 오래 지속되어 온 홍콩 위기 뒤의 추악한 진실을 밝힌다. 그리고 주류적 이야기인 경제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분명히 홍콩 부동산 재벌을 보면 독과점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세계 경제 침체, 미-중 무역 전쟁과 부인할 수 없는 외세 개입, 식민주의 잔존의 적폐 문제가 존재한다. 홍콩 거주민들이 중국 본토인들보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교육 부족’이 발생했고, 통합을 위한 노력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홍콩과 중국 본토 통합에 실패했다는 타당성을 내세울 수도 있다. 그것들은 모두 홍콩 위기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이지만 평이한 답에만 안주하다 보면 결정적 원인과 관련성을 놓치게 된다.

시위대 구호인 ‘홍콩을 해방하라. 우리 시대의 혁명으로’는 많은 사실을 드러낸다. 필자는 현재 홍콩이 직면한 위기는 근본적으로 정치 관련이 아니라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사회 계층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아를 찾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며 이익과 의무가 일괄적으로 표출된 형태로 나타난다. 거리의 홍콩 젊은 층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 있는 아이덴티타리언 (identitarian)과 동일하게 ‘잠재적 정체성의 도둑질 potential identity theft’에 분노하고 있다.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2017년 백인 우월주의자 집회가 일어났던 곳)과 홍콩은 공히 세계적으로 우익의 세력이 막강한 지역이다. 홍콩 시위대는 트럼프 대통령 유권자 대부분과 동일하게 ‘야심찬 후임자’가 지역 내‘ 교체를 주장하는’ 엘리트주의자와 협력을 통해 급상승하여 지위를 잃을까 봐 깊게 두려워하는 편집증과 음모론을 가지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과 마찬가지로, 반전통적인 현재 홍콩 내 소란은 기존 지배집단들이 외부인에게 끊임없이 확실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이다.

‘홍콩인들이 서양과 중국 본토에서 누리는 모든 특권에서 반드시 다른 중국인들을 앞서야 한다’는희망을 담은 홍콩 시위는 서구를 향한 웅얼거림이자 베이징을 향한 외침일 뿐이다.

중국 본토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마치 나치 독일의 유대인, 유럽의 이슬람교도, 미국의 멕시코인처럼 홍콩인들의 우월하다는 정체성 구조 아래 “다른 민족”으로 희생양이 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본토와 홍콩이 성공적으로 통합하려고 하면 할수록, 홍콩 ‘분리주의자’ 일부 세력이 더 초조해 할 것이다. 또한 베이징이 더 개방적이고 세계화를 향한 입장을 취하면 취할 수록, 홍콩인 일부 중 더 심한 외국인 혐오와 폐쇄적인 입장을 보일 것이다. 중앙 정부가 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할수록, 홍콩 시위대는 더 폭력적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본토 경제가 번영할수록 홍콩인 일부는 더 큰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폭력적인 홍콩 시위대가 주장하는 경찰의 강경 진압 이야기가 왜 쉽게 빠르게 신뢰성을 잃고 본토인들에게 거의 동정을 받지 못했는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시위대 구호 속 중국어 단어 ‘광푸 (guangfu)’는 일부 홍콩인들이 한때 홍콩 황금기였다고 여겨지는 1980년대를 추억하는 깊은 향수를 미묘하게 암시한다. 홍콩 황금기 시절 홍콩인들은 자랑스럽게도 ‘선진적’이고 부유한 서양 스타일과 상업 문명을 대표했고, 홍콩과 본토 사이 경제 격차는 엄청났다. 이런 식으로 홍콩 정체성에는 중독적인 우월함도 내재되었다.

하지만 그 격차는 빠르게 좁혀져 왔다. 중국 본토는 급속히 발전하면서 세계화와 다극화를 통해 계속해서 세계 권력 균형을 재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홍콩인들은 직접 차이와 변화를 실감하면서 변화한 현실에 대해 더 큰 타격을 받아 왔다. 상실감과 고통을 느낀 시민사회 단체들은 소위 옛 시절의 지위 계층을 재정립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우는 급진적인 후보에 대한 지지를 더 끌어올렸다.

자기 비하는 자존감(상실)에서 오는 죄악이다.

“물길이 되어라, 홍콩의 친구들이여.” 육지의 돌사자 동상에서 출발하여 광활하게 펼쳐지는 바다를 향해 연안을 통과하여 전진해 나가는 뱃머리(중국)에 매달려 그저 뱃전에 문구만을 새기려 하지 말고, 더불어 함께 물길이 되어 시대에 확고한 불굴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킬 자유와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중국어 구절 ‘ke zhou qiu jian’ 刻舟求劍에서).

 

루 양(Lu Yang)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Uni Freiburg)에서 법학 이론과 정치 이론 전공을 하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이자 독립연구자이다

수, 2019/11/27-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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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진리라 함은 주체의 인식과 인식 대상이 일치할 때 그 인식 내용을 일컫는다는 근대철학의 진리개념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하여 근대철학은 신이 예정해준 진리를 벗어나서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를 인식론이라고 부르게 됩니다만 당시 접근방식의 차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른 대륙의 합리론과 베이커가 이끌은 영국의 경험론으로 나누게 됩니다.

이후 진리의 획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무렵 칸트가 나타나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하여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진리를 주관화하며 절대적인 진리를 획득하였다며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이루었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한계를 상호 보완하는 측면에서 종합을 시도하였을 뿐이지 절대적인 진리의 인식방법론을 완성한 것은 아니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진리는 인식론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의 영역으로 승격되면서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기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근대의 인식론은 더 이상 존립할 토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특히 양자역학을 통하여 인식주체와 무관한 객관적인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주체와 대상 또한 양자얽힘에 의해 상호 내재적으로 생성관계에 있어 인식주체를 배제한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기술을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과학철학의 발달에 힘입어 실재론이 힘을 잃고 토마스 쿤이 주도하는 비샐재론, 즉 존재에 대한 진리의 기술은 단지 잠정적인 담론에 불과하다는 패러다임이론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절대적인 진리를 인식하거나 또는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라는 이론은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관찰이 대상을 창조한다고 보는데 이 이론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이 정통해석으로 받아들여진 오늘날 대상에 대한 관찰, 즉 인식작용은 단지 대상에 대한 앎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파악이론(특히 개념적)이나 지각이론의 상징적 연관개념을 통해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흡수하여 버리게 되면서 진리의 절대성과 보편성은 불가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이 또한 그가 아인쉬타인과 교류할 정도로 현대 물리학에 대한 소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진리에 대한 개념을 폐기해야할지 아니면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할 지를 고민할 시점이 오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즉, 근대의 진리개념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진리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타당한지 아니면 진리마저 폐기해버리면 무정부적인 세기말적 상황에서 인간은 중심가치가 없이 표류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리개념을 새롭게 정리하는게 타당한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진리를 논하기 전에 먼저 근∙현대의 철학적 존재론을 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고대 파르메니데스부터 근대 인식론까지 서구를 지배해온 존재론은 실체론인데 그 특징은 모든 존재는 실체(실체의 의미는 플라톤은 제1원인자, 자기원인자인 이데아라고 해석하였으나 근대철학자들은 타자와 내재적 관계가 없이 독립적으로 존속하는 존재)이기때문에 고정불변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은 이러한 실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기 때문에(예를 들면 신의 계시) 존재론은 겨우 유명론 논쟁 외에는 터부시되어왔으며 오로지 주체가 실체인 대상을 있는 실상 그대로 파악하기 위한 인식론만 발달하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철학의 시조이자 실체론의 파괴를 시도했던 니이체와 하이데거를 거쳐 화이트헤드에 걸쳐 실체론은 폐기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은 반실체론인 생성론(이는 달리 합생이론, 사건론, 관계론, 과정론이라고도 불립니다)이 21세기의 새로운 존재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생성론의 입장에서는 존재라 함은 사건들의 연속적인 인과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상의 사건들의 인과적 흐름을 존재라 부르기에 여느 존대도 다른 존재와 내재적 생성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가 없기에 우주는 하나라고 보게 됩니다.

하여 실체론에 기초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버리고 유기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생성론의 존재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고 끝없이 상호작용하며 생성해가는 연속적인 사건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의 실상에 대한 파악은 주체나 객체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주체의 인식이 객체의 생성과정에 내재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기에 근대의 실체의 고정불변의 본질이나 속성 을 파악하려는 진리를 찾아내고자했던 인식론은 이제는 심리학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의 실상에 대한 앎으로서의 진리는 이제는 설 자리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진리의 개념을 바꾸어 진리를 추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실체론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존재의 본질이나 속성을 알아내는 의미에서의 진리추구는 무의미해졌지만 즉, 성론의 입장을 따르게 되면 절대적 앎이 허구라는 것이 밝혀졌읍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생성의 작용원리와 생성의 목적은 인간사회의 가치규범의 근거로서 반드시 밝혀내야할 과제로 다시 우리 앞에 놓여지게 되었기에 이러한 작용인과 목적인을 진리로 삼아 보편적인 지혜, 즉 직관지로 받아들여야만 뭇 존재의 질서와 평화가 가능해지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적인에 대해서는 오늘날 천체물리학과 복잡계이론의 성과를 반영하여 우주의 항상성 유지를 위한 자기 조직화를 목적인으로 받아들여 이를 인간사회에 부합되게 새롭게 재해석하여 우주 자체를 인간사회의 질서와 평화와 생명의 창조자로 받아들여야만할 것이며 나아가 작용인에 대해서는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과 불교사상과 복잡계이론에서 존재의 작용인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가 있는데 예를 들면 생성론의 연기법은 상호생성의 작용인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예시가 된다할 것입니다.

특히, 현대과학은 자연의 존재법칙과 인간사회의 당위규범이 서로 전혀 별개의 원리로 작용하는 것이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예를들면 오늘날 인지과학에 의하면 생명의 중요한 요소인 마음을 단지 정보에 대한 통합적인 관리시스템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복잡계이론의 자기조직화 기능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산소원자와 수소원자와 합해서 반드시 물분자만을 만드는 것도 자기 조직화 작용이 있다고 볼 수 있기에 산소와 수소도 마음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인간사회와 다른 생명체의 집단간에는 변용modification이 필요한 양적인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자기조직화와 창발작용을 하면서 복잡계를 유지하기에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차이가 없다고 보기에 우주의 자연법칙과 인간의 사회규범 간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기에 자연법칙으로부터 인문학적 존재론을 찾아내어 뭇 존재의 작용인과 목적인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여 종교와 과학을 융합하여 새로운 21세기의 철학을 구축하여야할 것입니다.

목, 2019/11/28-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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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타인,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란 맥락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대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문명은 농업부터 경제, 거버넌스, 교육, 종교, 교통, 의학, 건축, 예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타인, 그리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이 필요한) 현재 우리의 문명은 ‘현대문명’ 혹은 줄여서 ‘현대성’으로 불린다.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문명을 탐구한 뛰어난 학자인데, 그는 주류 제도들이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지 설명한다.

내 가정은 서구 현대성의 핵심이 사회의 새로운 도덕적 질서라는 것이다. 처음에 도덕적 질서는 몇몇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의 정신에 있는 단순한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광범위한 사회적 상상력을 형성하며 사회 전체로 퍼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 하나의 가능한 개념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도덕적 질서에 대한 이런 관점의 전환은 서구 근대성을 특징짓는 사회적 형식을 발전시켰다. 시장경제, 공공영역, 자율적인 인간이 그것이다.

테일러는 현대문명의 세 가지 명백한 특성을 강조한다. 1)우리는 상호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경제로서 사회를 상상하게 됐다. 2)우리는 낯선 사람끼리 상호관심사를 숙고하고 토론하는 은유적 장소로서 공공영역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우리는 초월적 원리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에 “기초”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이라는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이런 실천과 가치는 현대인에게 너무 자명해서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연 그럴까? 현대성의 개념적 토대를 생각해보자. 이른바 현대사상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 주체를 의미와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는 전환을 감행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단지 기계로, 자연을 정신과 사고의 모험을 위한 배경으로 간주했다. 그럼으로써 세계를 “사고하는 존재”와 “확장된 존재”둘로 나눴다.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자아”를 생각하는 주체로 특권화하는 개인주의와 쌍을 이뤘다.

개인주의는 자연스럽게 경쟁과 지배의 모델로 흘러갔다. 1649년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조건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며 따라서 지구상의 생명은 “추잡하고 짐승 같고 단순하다”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곧바로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든”(앨프리드 로드 테니슨)자연으로 해석됐다. 이런 지배의 태도가 인간 존재와 사고의 전 영역에 만연하면서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대국과 소국, 과학과 종교, 인간과 비인간, 부자와 빈자의 위계를 가져왔다. 물론 다양한 형식의 협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게 성공을 위한 더 근본적 전략이라는 공생(symbiosis)의 아이디어는 대개 배척당했다.

현대문명에서 사회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며, 유사하게 국가는 시민을 위해 배타적으로(“아메리카 퍼스트”) 존재한다. 존 로크는 그의 『통치론』 제2논고에서 국가는 재산권을 가진 (남성)시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국가의 목표는 각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런 현대적 이상의 대변인이 됐다. 밀은 이 전통을 확장시켜,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울 때만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의 행동은 살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직접 해를 끼쳐 국가가 규제해야 할 때까지는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개인은 공공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견해인 공동체주의는 현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주의를 이기지 못한다.

마침내 현대성은 스스로의 옹호자가 됐다. 이전 단계의 역사는 모두 “전(前)과학적’이며 과학시대에 비해 열등한 것이 됐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낡은 정치체제와 철학, 사회적· 정치적 조직의 형식들이 대체됐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룬 위대한 진보는 현대성의 원리 덕분이며, 사회는 점점 좋아진다는 신념인 사회개량론이 올바른 태도로 여겨진다.

 

우리는 현대문명의 끄트머리에 있다

당연히 현대문명은 유일한 문명이 아니다. 문명의 등장은 농업 발전과 연결돼 있는데, 기원전 3000년 최초의 문명은 농업이 인간에게 잉여의 음식과 안전을 보장했을 때 등장했다. 식량안전성이 증가하면서 많은 인구가 기본적 생존을 넘어 예술이나 여가 활동 같은 다른 문제들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문명은 인구의 집적, 문어(文語), 기념비적 건축물, 고유한 예술양식, 통치체제, 복잡한 분업, 그리고 사회적 계급으로 특징지어진다. 문명들은 농업과 더불어 등장하며 무역, 전쟁, 탐험 등으로 확대된다. 대부분 문명은 다른 확장되는 문명에 합병되거나 붕괴하거나 단순한 형식으로 회귀함으로써 사라진다.

과거 문명의 범위는 산과 대양과 원거리로 인해 제한됐다. 그래서 헬레니즘 문명은 중국문명이나 마야문명과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최초로 하나의 글로벌 문명 안에서 살고 있다.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전은 서로 다른 문명들을 갈라놓았던 지리적 한계를 극복했다. 스마트폰, 할리우드 영화, 인터넷은 군대와 전쟁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냄으로써 공유된 가치, 국가 간의 균형(혹은 불균형), 그리고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한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를 창조했다.

현대인과 현대국가는 이전에 없었던 하나의 글로벌 문명으로 함께 묶여있다. 점점 강력해지는 기술에 매혹됨으로써 소비자들은 전지구적으로 하나의 욕망과 열망 앞에 도열했다. 그 결과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은 점점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떤 군대와 예술작품, 문화적 성취도 성공하지 못한 곳에서 소비주의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글로벌 시민으로 묶어냈다. 물질적 성취에의 매혹은 거대한 자석이 돼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글로벌 소비자를 “예스맨”으로 만들었다.  “세계를 주머니에 넣는” 스마트폰은 전세계의 필수품목 가운데 하나다.

끝없는 진보라는 신화는 유혹적이다. 의약품은 질병을 물리치고 사망률은 떨어졌다. 오늘의 문제는 내일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이 소비자들을 위해 준비한 안락과 효율의 초입에 서있을 뿐이다. 더 큰 번영과 즐거움으로의 전진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삶은 점점 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 돈만 있으면 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시장의 성공 덕분에 더 많은 부가 창출되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계속 개선될 것이다.

이런 현대성의 마술은 화석연료 덕분에 가능해졌다. 전례 없이 에너지가 풍부해졌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대부분의 기술은 엄청난 탄소를 배출함으로써 유지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구의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인 모두가 이런 문명의 변화를 지지한 건 아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갈망하도록 했다. 인디아의 소농도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가졌다. 아주 외딴 마을의 주민도 서구식 티셔츠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신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오래 살수록 더 많이 소비해야 하며 지구에 더 큰 스트레스를 준다. 지구가 우리 욕망보다 먼저 고갈될 것이다. 지구 스스로 현대문명을 끝장낼 것이다. 현대의 막바지인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지난 몇 세기를 돌아보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문명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문명에 대한 짧은 학습의 결론은 분명하다. 앞선 모든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도 끝날 것이다. 언제 어떤 방식이 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끄트머리에 서 있는 건 분명하다. 이는 다음의 핵심적 질문을 불러온다. 현대성 뒤에 진정으로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명이 올까? 인간은 현재의 문명이 막다른 지점에 이른 뒤 땅,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경제, 급진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지구적 붕괴를 막고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까?

 

생태학에서 상호의존성을 배워야 한다

지난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생태과학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을 지켜봤다. 이제 생태적이라는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 단어는 살아있는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의 사실과 더불어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자연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지의 가치를 모두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생태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실과 가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생태계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태계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크다. 따라서 생태계와 관련된 사실은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홈즈 롤스턴에 따르면, “어원상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뜻하며, 이는 똑같이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 우리가 사는 세계)란 어원을 가진 ‘보편적(ecumenical)’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생태학은 탹월한 상호의존성의 과학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면서 모든 과학이 보다 근본적인 법칙을 이용해 복잡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생태과학 역시 다른 과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는 과학적 성공이 생태계에서 유기체로, 유전자로, 다시 생화학, 화학, 마지막에는 가장 기초가 되는 물리학으로 이루어진 환원의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예일대 삼림과학대학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특정 숲에서 전체 나뭇잎의 표면적을 계산한 뒤 나뭇잎들의 생화학적 처리능력의 총량을 이용해 그 숲의 진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태계 연구는 이런 식으로 환원적이지 않다.

생태계는 부분의 합보다 크고 복잡한 창발적 실재이며, 그런 복잡하고 통합적인 전체의 견지에서 개별적 유기체가 이해돼야 한다. 높은 수준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환원주의적인 설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종의 번성은 다른 종들의 번식률과 영양 수요에 달려있으며, 식물과 동물 간의 균형은 양쪽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이다. 매우 큰 유기체와 아주 작은 유기체가 상호의존의 복잡한 춤에 참여한다. 정교하게 조정된 그들의 공생적 관계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협동의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다윈 식의 경쟁이 여전히 존재하며, 자연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들이 경쟁자를 압도하고 더 많은 수의 자손들을 생식가능연령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 간의 협력이 그들의 생존과 생태계, 그리고 생태계를 이룬 다른 유기체들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유기체들은 서로 외향적인 영향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내향적으로도 상대를 변형시킨다. 포유류나 썩은 나무의 배출물이 다른 종들의 먹이가 된다. 생태계 내부의 이런 풍부한 상호의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생태문명은 생태과학의 이런 통찰에 따라 만들어진 모델이다. 이것은 경제와 정치, 생산, 소비, 농업 등의 사회 시스템이 지구적 한계 안에서 재설계되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향한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은 현대의 확장, 정복, 소비 정신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며 계약, 협력, 육성 등의 정신에 기초하여 살아있는 지구와의 조화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말한다.

 

생태문명은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문명이 기존 다른 문명들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자연세계와의 관계이다. 다른 문명 형태들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을 위한 자연의 조작인 것과 달리, 생태문명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의 웰빙도 고려하면서 자연환경을 지속 가능하고 공생적인 방법으로 변형시킨다. 이는 원초적인 자연의 순수성으로의 회귀와 같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며, 어쨌든 문명의 한 형식이다. 생태문명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번영을 위해 사람들끼리도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것까지 포함한다.

19세기까지는 다른 모든 문명을 정복하고 제거할 수 있는 하나의 문명, 즉 글로벌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지역적 형태를 띨 때는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기에 그 위험성은 낮았다. 오늘날 지구는 최초로 과학, 기술, 국가, 전지구적 소비자들에 기반한 현대문명이라는 하나의 글로벌 문명이 지배하고 있다. 과거 다른 문명들이 그랬듯이 이 단일 문명이 사라진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미국정부는 몇몇 은행이 “파산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이 글로벌 문명이 휘청거릴 경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인류 역사에서 50번째 혹은 100번째로 다시 한번 문명변화의 율동적인 순환과정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첫 번째 북소리가 지금 들린다.

다음문명, 즉 사회조직의 다음 패턴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생태문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 “생태적”이라는 말은 유토피아적 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최소 한도로 우리의 현재 문명 뒤에 올 어떤 것을 뜻할 뿐이다. 어쩌면 다른 문명이 없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무에서 살거나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끝난 뒤에도 어떤 종류의 안정된 사회가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지속가능한 문명이 돼야 한다. 즉 현대문명이 지금 초래하는 종류의 파괴적 손상을 피하거나 되돌릴 수 있을 만큼 환경과 충분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제레미 렌트에 따르면, “생태문명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생각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생 에너지에 투자하고 고기를 덜 먹고 전기 자동차를 운전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전지구적인 사회적, 경제적 조직의 내재적인 틀이 바뀌어야 한다.” 현대성이 (아마 말 그대로)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그 계승자가 등장할 때, 과연 어떤 종류의 문명-어떤 종류의 세계관과 생명관–이 부상할 지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과학은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문명의 종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의 고통스러운 실수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일으키고, 과소비 및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초래하고, 공공선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회구조를 형성했으며,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에너지원에 의존하도록 만든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결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우리의 생태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번역: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앤드류 슈왈츠(Andrew Schwartz)

미 생태문명연구소 부대표·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조교수

월, 2019/11/1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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