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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성장, 위기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 돌파구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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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성장, 위기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 돌파구들(1)

admin | 일, 2021/09/05- 06:03

이제 개발도상국이나 세계 최고 부국의 실천적인 전망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경제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인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 대한 확산된 지식경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명료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경제의 경제적 성장과 위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적어도 19세기 후반의 한계주의 전향 이래로 주류의 경제적 사유는 시장의 작동방식에 결함이 없는 경우 수요와 공급은 서로 조정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시장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결함은 완전경쟁에서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함들이 없는 경우에 수요와 공급은 균형에 이를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 과정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 인간의 노동을 포함해서 자원들이 가장 효율적인 용처들에 투입되는 것을 보장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에 따르면 공급과 수요의 각 원천들은 수요와 공급이 상호 조응하게 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기제에 대한 이해와는 관련이 없다. 공급이나 수요의 원천이 무엇이든 간에 (시장 지배력뿐만 아니라 정보를 포함한 어떤 차원에서도) 완전경쟁의 실패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방해하지 않는 한 수요와 공급은 결국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서로 조정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 아래서 우리는 수학적 표현을 이용하면서 수요와 공급을 각기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정량으로 상상한다. 이제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에 대한 수학적 분석과 수요와 공급의 확장이나 축소의 원인에 대한 설명을 구별할 수 있다. 우리는 경제학의 개별적인 분야들, 특히 경제성장 이론과 경기순환 연구나 더 일반적으로 (그런 분과가 존재 한다면) 경제위기 연구에 인과적 탐구를 할애할 수 있다.

나는 공급과 수요에 대한 사유의 또 다른 방식, 즉 포용적 전위주의를 제안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지식경제와 그 미래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을 밑받침하고 있는 일부 가정들을 명료화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견해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까지 희망할 수 없지만, 이러한 견해가 경제사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많은 부분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러한 측면 중에는 지식경제의 진화와 현재 상태와 관련되는 측면들도 있다.

모든 일반적인 견해와 마찬가지로 내가 개략적으로 제시한 견해도 직접적인 경험적인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견해가 경험적 도전에 난공불락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사실문제에 대한 결론들에서 넓은 주변부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러한 주변부에서 반증가능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관념들이 있다.

첫 번째 관념은 경제성장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연속적인 돌파구들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성장이 지속되기 위해서 경제의 수요측면에서의 진전은 공급측면에서의 상응하는 진전을 만나야만 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접근도 이와 똑같은 관념을 통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접근은 특정한 시장의 불완전성이 가로막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에서 공급측면의 진전과 수요측면의 진전 간의 일치가 자동적이라고 표상한다.

우리가 수요와 공급에 대한 지배적인 설명에 붙잡혀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하나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모든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공급의 증가가 수요의 증가를 창출하고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유발한다면 공급과 수요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아야 한다. 한계수확체감의 제약(지금까지 경제생활에서 보편법칙의 배역에 가장 그럴 듯한 후보자)이 경제적 침체를 충분히 해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혁신들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주류사고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상호조정은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낳을 수도 있다.

두 번째 관념은 공급과 수요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은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확장하는 방법들은 다양하다. 각 방법은 각각의 작동방식과 그 잠재력과 한계와 같은 각기 고유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경제의 수요나 공급측면에서 확장을 지속시키는 이와 같이 특징적인 방식들은 각기 다른 파급 범위, 유효성과 지속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식은 다른 방식보다 더 일천하고 더 단명하다. 어떤 방식들은 신속히 소진되지만 다른 방식들은 자체 보존적인 성격을 더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들은 경제주체들의 역량과 경제적 제도와 관행에 대해 더 변혁적인 효과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양상들을 계층으로 배열할 수 있다. 마치 이러한 확대양상 중에서 하나의 양상이 지닌 잠재력을 소진시키고 나면 다음 양상으로 이행이 보장되는 듯이 하나의 양상에서 그 다음 더 강력한 양상으로의 직접적인 혹은 자동적인 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공급이나 수요를 증가시키는 하나의 기초에서 계층적으로 우위에 있는 그 다음의 기초로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사정을 고려하여 나는 수요와 공급의 확대를 불연속적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관념들과 달리 공급과 수요의 단기적 부침들과 경제성장 및 경제침체의 원인들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불연속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중에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위한 이와 같이 다양한 기반들을 개관하고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 잠재력의 역순으로 그러한 기반들의 순위를 매겨보겠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경제성장 메커니즘의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데에 있어서 각각의 기반은 그 이전 단계의 기반보다 전도유망하다.

세 번째 관념은 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이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진전과 공급이나 수요의 다른 측면에서의 진전 사이에는 자동적인 일치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수요를 지지하는 데에서 진전으로부터, 즉 이러한 진전을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또 다른 기초로 진전된다는 것(예컨대, 가계부채의 장려를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에서 누진세 및 사회 지출을 통해 구매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으로부터 경제의 공급측면에서 일치하는 진전(예컨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이 없는 공급 확대에서 그러한 혁신을 동반한 공급 확대로의 진전)을 달성할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타율성은 불연속성의 효과를 심화시킨다. 불연속성은 일면적이다. 불연속성은 수요나 공급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기초에서 그 다음 더욱 효과적이고 변혁적인 기초로의 자동적인 이행이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타율성은 양면적이다. 타율성은 경제의 한 측면(수요나 공급)에서의 진전이 다른 한 측면에서의 진전을 보증할 수 없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네 번째 관념은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의 불연속성과 타율성이 경제불안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중단되기 쉬운 근본적인 이유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것(시장의 결함이 없는 경우에 공급과 수요는 상호조정을 거쳐서 자원과 노동을 가장 효율적인 용처에 배정하는 것을 보장한다)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공급확대와 수요확대 사이의 자동적인 일치의 부재가 경제불안의 제 1의 원인이라면, 경제불안의 제2의 원인은 실물경제와 금융의 관계가 과부하상태이고 가변적이라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장의 다음 부분에서는 케인스가 매우 강조했던 이 관계의 측면(화폐가 중요하다)을 논평하겠다. 특정한 생산적 활동과 유리된 화폐시장균형들의 유동성은 그러한 균형들이 두려움과 탐욕, 절망과 희망과 같은 충동들의 유순한 도구로 복무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질에 따른 이와 같은 화폐비축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가 보여주는 더욱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측면에 대해서 부수적인 사정일 뿐이다.

시장체제의 조직에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이 없는 것처럼 시장체제의 한 측면, 즉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형성에서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유일한 방식은 없다.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상이한 방식들은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이완시킬 수 있다. 금융과 실물경제의 연결이 느슨해질수록 또한 실물경제의 거래가 더욱 금융활동의 참된 관심사라기보다는 그 구실이 될수록 그와 같은 금융이 폐해를 야기할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다.

부유한 국가들에서 현재 확립된 안배들 하에서 생산체계는 대체로 금융을 자체적으로 조달한다. 생산자금은 주로 기업의 재투자용 사내유보이익, 따라서 생산체계 안에서 창출되는 자금에 의존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을 창출하는 것(벤처캐피털 및 유사한 금융형태들의 관심사)은 금융활동의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심지어 1차적인 기업공개나 2차적인 기업공개도 금융의 비교적 작은 부분을 나타낸다. 이러한 안배들 아래서 금융은 좋은 하인보다는 나쁜 주인이 될 공산이 크다.

경제불안 혹은 경제위기에 관한 이론은 경제성장 이론의 이면에 불과하다. 경제불안과 경제위기에 대한 이론은 성장의 붕괴가능성을 다룬다.

그리고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시간에 맞게 동적으로 서로 조정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경제성장과 경제불안의 문제를 단기적으로 처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다섯 번째 관념은 만일 우리가 공급과 수요의 확대에 대한 제약들을 극복하는 방식들의 [단계]를 멀리 넘어 가서 이러한 제약들을 폐지하는 더욱 파급력 있고 더욱 지속적인 방식들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러한 방식들이 공급을 증가시키는 데에 사용한 똑같은 수단으로 수요를 확대시키는 일단의 해법들(생산의 자원, 기회 및 역량에 대한 접근의 제도적 확장)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경제생활의 자연적인 상태로 상정하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은 실제로 경제조직의 예외적인 변형들(더 많은 경제주체들에게 생산적 활동의 수단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수요공급의 한계를 깨뜨리는 속성을 가진 변형들)이 가진 속성이다.

여섯 번째 관념은 다섯 번째 관념이 제시한 여건들 중 특히 유력하고 전도유망한 부분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집합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을 확장함으로써 수요공급의 제약을 깨뜨린다. 공급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경제의 가장 생산적인 분야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를 증가시킨다. 수요측면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회고적이고 보상적인 재분배의 수혜자가 아니라 부의 창조자로서 그들이 생산에 기여한 부에 대한 몫을 청구할 지위를 부여한다.

이와 같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라면, 수요와 공급의 확대 잠재력은 특히 크다. 지식경제는 기술혁신을 영구화하는 경향을 띠고 생산과정에서 투입요소의 증가에 대한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을 완화시키거나 역전시키겠다고 약속하는 생산적 활동형태를 허용한다.

헨리 포드는 한때 노동자들이 포드사의 차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급여를 후하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물건을 사거나 포드사의 경쟁업체들이 만든 차를 구입하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포드의 발언으로 야기된 문제에 대하여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계약상 해결책은 없다. 제도적인 해결책 밖에 없다.

지식경제의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로서 포용적 전위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도적 해결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더는 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수요공급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들이 불완전경쟁이 가로막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일어난 다고 그릇되게 가정하는 것[수요공급의 상호조정]을 시장경제에 새로운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달성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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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살인’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흑인에 대한 차별과 뿌리 깊은 인종주의의 민낯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실 모든 인종 이슈가 그러하듯 이번 사건의 본질은 ‘순수한’ 인종차별에 기인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백인 우월주의의 핵심은 피부색이 아니라, 백인 중심의 계급사회가 만들어낸 차별이기 때문이다.

조지 플로이드는 대부분 흑인 계층이 미국 사회에서 점하는 하층계급이다. 그로 인한 사회적 편견과 경멸은 미국의 ‘선량한’ 시민을 위협하며, 그는 마침내 미국의 ‘흑인’이 된다. 모든 흑인이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살인’ 위험에 놓이지는 않는다. 미국 흑인 농구 스타 마이크 조던이 미국 경찰 손에 어이없이 살해당할 일은 시카고 슬럼가의 청년이 월스트리트에 입성하는 것만큼이나 낮은 확률일 테니까. 플로이드 죽음을 미국 계급사회의 차별이 부른 살인으로 보는 이유다.

미국 건국이 소수의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 북미 원주민들을 내쫓고, 이후에는 아프리카에서 ‘사냥’해온 흑인들을 노예제로 묶어 부국강병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흑역사 정도는 이미 세계 슈퍼파워로 등극한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 하층계급의 상당수가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들로 이루어진 이상 계급문제가 가려진 ‘인종주의’ 논쟁은 무한 반복될 공산이 크다. 미국의 계급사회에서 유색인종의 처지는, 라틴아메리카 토착 원주민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사회가 흑인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편견이 만연한 곳이라면 원주민을 향한 라틴아메리카의 백인 지배계급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지난 수 세기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그들이 백인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예를 들면, 마야 원주민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미 과테말라 원주민들의 상황은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정복 이전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이들은 백인들에 의해 ‘미개한 인종’이 되었다. 유럽으로 이주한 소수 백인이 아메리카의 경제와 정치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였으며, 그렇게 그들만의 리그를 안정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정착시켰다.

“영원한 봄이라고 불리는 과테말라의 화사한 날씨와 푸른 자연환경은 신의 선물이라 해도 가히 손색이 없다. 과테말라 시티의 부촌은 정갈하게 가꾸어진 나무들과 거리,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사람들로 가득 차는 쇼핑몰의 깔끔한 외벽과 실내의 화려함은 눈이 부시다. 반면, 뉴스와 일간지에서는 매일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한 유아동의 사망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부촌의 저택에서 정원사와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젊은 원주민들의 새벽 발 빠른 출퇴근 모습은 흔하다. 아침마다 ‘주인’집 애완견을 산책시켜야 하는 메이드 복장의 원주민 소녀들의 모습은 흡사 식민지 시대의 봉건 사회를 연상케한다…(중략)”【1】

물론 과테말라의 이 계급 질서를 바꾸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역사상 유일했던 개혁 정부가 백인 지배계급 엘리트와 우파 군부의 쿠데타로 1954년 실각하자, 이후 약 36년에 걸친 내전을 치러야 했다. 1944년부터 약 10여 년 동안 계속된 개혁 정치는 기존의 과두 엘리트 지배계급과 원주민을 비롯한 다수의 피지배 계층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이어지며 결국 전쟁을 불러왔다. 내전은 명백한 계급전쟁이었고, 이 과정에서 약 2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의 대부분은 마야 원주민이었다.

군부에 의해 자행된 대대적인 ‘인종’ 학살은 궁극적으로는 당시 마야 원주민들의 정치 세력화를 두려워한 군부의 군사적 선택이었다. “마야 원주민을 섬멸한다”라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인종 제노사이드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이유다. 그러나 평화협상 과정에서 과테말라 내전의 원인이었던 계급 갈등은 ‘인종’ 갈등으로 치환되었고, 원주민들의 계급적 요구는 부정되었으며, 오롯이 ‘전통문화’ 회복 운동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내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마야인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고 이대로라면 더 나아질 가능성도 없다.

그리고 남은 것이 있다면 1992년 마야 원주민 여성 리고베르타 멘츄가 ‘최초’ 원주민 출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뿐이다. 마야인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고발하고 이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는 공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멘츄를 제외하고 내전으로 목숨을 잃은 20만 명에 이르는 마야인들은 멘츄의 ‘평화’상에 가려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요지부동한 과테말라 기득권 계층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며, 개혁을 요구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졌다. 이것이 20만 원주민의 희생 위로 멘츄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의 민낯이며, 계급적 요구를 인종 문제로 가려버린 결과였다.

36년 내전 중에 진행되었던 소위 ‘인종청소’는 엄밀히 말하자면 마야인 제거가 아니라,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기득권에 저항한 농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내전의 수많은 희생자에 대한 진실규명은 고사하고 원주민들은 아직도 국가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득권층으로부터 받는 배제와 차별, 그리고 이로 인해 확대 재생산되는 사회적 편견은 견고할 뿐이다. 게다가, ‘공생’이라는 이름으로 우파 정권과 연대하는 멘츄가 보여주는 정치권의 행보는 씁쓸할 뿐이다.

멘츄의 노벨평화상이 과테말라에 새로운 ‘평화’라도 가져올 것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미국에서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의 등장, 그리고 연이은 수많은 기대와 희망들이 좌절된 경험과도 유사하다. 미국 전체 선거 흑인 유권자 중 95%가 오바마에게 표를 주었고, 저소득 계층의 약 73%, 그리고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된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인 셈이다.

그러나 정작 흑인 대통령 오바마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월 스트리트의 꼭두각시였을 뿐 정작 그는 흑인 대통령으로 흑인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 없다,” 는 그를 향한 미국 흑인 사회의 비판은 뼈아프다. 이에 대해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흑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국민 모두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고 맞선다. 그 전체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의 이해관계도 포함되었으니, 개혁과 변화를 원했던 계층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백인 자본가들의 이해를 더욱 보장해 주었다. 미국 시스템은 견고하게 유지되었고, 계급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결국, 지금의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인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반동적’ 동력이 아니었을까.

기득권 계급의 특혜와 질서의 해체 없는 ‘개혁’은 개혁하지 않음과 다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월스트리트의 이해를 더욱 보장하고, 멘츄가 자신이 대변하는 원주민을 학살한 주체인 현 기득권과의 연대를 개혁의 방향으로 설정한 이상, 이들이 누리는 ‘최초’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는 개인의 ‘영광’일 뿐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계급적 살인은 계속되고, 과테말라 원주민의 빈곤과 그들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 차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인종 논쟁이 아니라 계급의 재소환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피부색 ‘논쟁’에 가려버린 미국 사회의 계급 질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여전히 ‘열등한’ 국민으로 규정하고 개도하려 드는 인종주의자들의 보편적 지배 담론을 구성하는 주요 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종이 아니라 계급에 의해 차별받는다. 가난해서 차별받는 현실을 피부색 논쟁으로 가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1】 필자의 연구논문에서 일부 차용한 것임. 정이나(2015),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 운동 정치: 계급과 문화사이에서. 중남미연구. Vol. 34. No. 2.

월, 2020/08/17-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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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에 타임 잡지를 설립하고 자매지인 Life & Fortune을 발간했던 Henry Luce는 “20세기는 미국의 세기”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였다. 경쟁이 없는 강력한 세력을 갖추고 단호한 의지를 지닌 미합중국이 세계를 자유로서 방어하고 모두를 위한 성장과 더 나은 행복을 보장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며, 이런 바램이 국력과 명성이 함께 어우러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지면서, 미국시민 모두에게 궁극적인 지혜와 궁극적인 물리력과 더불어 선의적 의지라는 거의-보편적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세기를 되돌아 보면 미국이 패권국가로서 때로는 잘한 일과 때로는 잘못한 일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확실히 Luce의 선언처럼 지난 세기(최소한 반세기)는 ‘미국의 시대’이었다 그러나 2020년을 지나는 지금, 21세기는 <미패권 종말의 시대(Anti-American Century)>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형성되었지만,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욱 현재화되고 분명해졌다. <미패권종말의 시대>라는 표현이 미합중국에 매우 적대적인 의미로 해석될 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미국의 세기’에 대한 안티-테제(헤겔의 변증적)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미국의 패권에는 세가지 기둥이 있는데,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정치(편집자 주: + 국제기구들과 거대언론매체)가 지난 세기를 규정지어 왔으나, 현재 시점에서는 이들 기둥들이 사라지고 있거나 혹은 시험대에 올라 있다. Robert Kagan이라는 작가는 최근 그의 저서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없는 국제사회는 다시 정글의 시대로 돌아갈 것으로 염려한 바 있다.

그의 걱정대로 미국이 사라지면, 중국이 등장하여 자유의 질서에 퇴보가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의 국내정치적 관점에서는 좌우파가 미국의 시대가 저문다는 것에 함께 연대하여 중국에 대응하고 있다. 좌파진영에서는 인종적 분열과 트럼프 행정부의 어리석음으로 미국이라는 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반면에, 우파진영에서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칼자루를 마구 흔들고 있다.

<미패권의 종말>이라는 출발점은 국제사회와 미국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78억의 인구가 사는 세계는 단일한 강대국의 지배 혹은 쟁탈하는 패권국가들의 싸움이 아니라 다면적인 협력을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거대한 잠재력과 동시에 수많은 결함투성이인 미국은, 여전히 과거에 속박될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성공에 대한 보장은 없지만 투자자로서 지위를 수용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자신만이 유일한 강대국이며 역사적으로 선택을 받았으며 문화적으로 위대하다는 믿음은 곧바로 실패에 이르는 처방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21세기 시작되던 20년 전에는 미합중국은 영원할 것이라는 느낌이 지배적이었고,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민주주의를 성공시킬 유일한 해법을 미국만이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유일한 패권과 유연함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 자신의 역할임을 자임하였다. 혁신과 개발, 교육 등 분야에서 모든 세계에 모범임을 과시하였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소망은 대부분 헛소리이었지만, 그러나 미국이 그 동안 세계에 미친 영향은 부정할 수 없었다.

팬데믹 상황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틈새의 결함을 노출시켰다. 동시에 중앙연방정부가 연방의 삼권분립뿐만 아니라 개별 주정부들의 자치권과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전쟁이 아닌 위난의 상황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을 드러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갈팡질팡하는 미국을 경멸과 조소로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은 사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벌려온 것에 대한 평가의 재판이다.

미국의 시대를 받쳐온 첫 번째 기둥으로 무너진 것은 군사력이다.

9/11사태 이후, 미국의 아프칸 개입은 알-콰이다와 빈-라덴의 근거지인 탈레반에 대하여 정당한 응징을 행한 것으로 국제사회에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뒤이어 2003년 봄에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국제여론을 악화시켰고, 서투른 점령정책과 십 수년에 걸친 게릴라와 맥없는 전투는 베트남 전쟁을 연상시켰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운 이라크와 관타나모에서 자행된 고문과 제재는 폭로와 더불어 문제를 크게 확대시켰는데, 이는 미국자신이 오랫동안 지지해온 제네바 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이었다. 이에 더하여 국가안보와 테러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국내감시의 스파이 행위는 ‘미국은 위대하다’라는 경건한 믿음을 배반하였고, 2008년까지 미국이 이라크에 잔류하면서 보여준 온갖 혼란상은 미국의 위상을 규모와 능력 모든 면에서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두 번째 기둥으로서 무너진 것은 경제력이다.

미국의 시대라는 Luce의 핵심적인 자부심은 공산주의를 분쇄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미국 경제시스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소비에트가 붕괴된 이후에도, 번창하는 미국의 경제는 지구상에 뛰어난 모든 재능을 불러모으고 혁신을 지속하면서, 1990년대의 인터넷 붐과 2000년대의 이차적 파급을 주도하여 왔다.

1980년대에 안착한 워싱턴-컨센서스는 1989년 이후 동유럽과 러시아의 재건에 청사진을 제시하며 자유시장경제를 이끌어 왔다. 동시에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라는 간접적 기구를 이용하여 세계무역의 장벽을 낮추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며, 자본의 국제적 흐름을 위하여 금융시장을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러시아를 위시한 몇 개 국가들은 이런 처방에 심각하게 손상을 당했으며, 미국의 엄청난 경제력은 모든 국가에게 다른 대안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중국은 대상에서 예외가 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규모가 거대하다는 배경도 있고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이후 결국은 미국의 모델을 따라할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독자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후 중국의 경제적 발전이 미국의 지배력을 잠식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력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2008-2009년간의 세계금융위기이었다, 지난 수년간 투자자들의 판단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의 국가부채와 부실채권이 언제쯤 중국을 붕괴시킬 것인가?” 그러나 실상은 중국의 은행들이 아니라 미국의 은행들이 ‘문제투성’이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재앙이 되었다. 미국정부의 구제조치로 금융시스템은 회복되었지만, 미국경제에 대한 명성, 즉 Luce가 미국패권의 핵심이라고 이해했던 경제의 위력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둥은 민주주의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은 잘 짜인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개인적인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공동체의 에너지를 잘 결합시키는 유일한 제도라고 자랑할 수 있었다. 일상적으로 동맹이나 경쟁국들에게 개방적인 민주화를 추천하기도하고 압박하기도 하였다. 독재자를 견제하는 길은 민주주의밖에 없으며, 전제정치를 방어하고 풍요를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제도 역시 민주주의이었다.

결함이 있더라도 모든 시민들이 권리로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미국은 그러나 다양한 측면에서 최강의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북유럽국가들이 최강의 제도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제도가 두 개의 기둥(군사력과 경제력)과 광범하고 활기차게 결합하면서 미국의 시대를 만들어 왔다. 그리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6년 이전에 미국의 민주주의는 결함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참여도가 현저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미 경고등이 켜졌다. 이에 더하여 트럼프의 당선은 미국의 능력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면서, 새로이 태생하는 포플리즘과 전체주의적 압력을 그토록 비난해오면서, 세계에 과시해온 미국 자신이 무색해 졌다.

물론 트럼프가 비난을 받는만큼 정말 그가 미국에 손상을 가했는지, 아니면 미국 대통령이라는 주요한 권력을 남용해도 이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는 것이 지독히게 어려운 국내 정치제도의 결함에서 손상이 발생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위력은 세계의 상징이자 희망이었고, 미국이 과시하고 키워온 기회를 잡기 위하여 재능을 갖춘 수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잠식시켰다. 동시에 위대한 미국의 이미지는 이미 197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서 수모를 당했고 제3세계에서 저지른 반민주적인(독재자-지원) 정책의 폭로로 인하여 퇴색되어왔다.

1980년의 경제적 번영이 없었다면 당시에 이미 미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당시에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제 팬데믹이 닥쳐왔다.

중국의 수상이었던 주은래가 언급하여 유명해진 이야기 “프랑스 혁명의 전설은 너무나 일찍 너무나 높게 평가되었다”처럼, 현재 창궐하고 있는 팬데믹의 대응역량으로 국가들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미국의 강점으로 평가되어 왔던 개별 주정부 단위로 분산된 지배시스템과 경합이 치열한 정치제도, 지역과 주단위가 지닌 지나칠 정도의 다양성 등이 이제는 약점으로 둔갑한 듯하다. 전제주의와 정부의 지나친 간섭을 거부하는데 익숙해진 미국인들의 자유가 이제는 모두의 단결이 절실한 국가적 재난상황에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에 발생한 팬데믹에 대처하는 미국의 모습이 민주제와 훌륭한 가버넌스의 전도사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박살내고 있으며, 동시에 미국의 시대라는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 내에서 그리고 세계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미국의 시대가 끝나가는 것은 비극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미패권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세계와 미국 자신에게 현재의 구조적 문제들을 대처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평화와 개인적 권리 그리고 번영에 대한 독점권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78억의 인류 그리고 크고 작은 200여 개의 국가들이 미국만큼 자신들의 집단적 이해를 처리할 역량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면 국제적인 안정과 번영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오로지 ‘미패권 시대’의 영속적인 지속뿐이다.

자연히 중국이라는 새롭게 굴기하는 국제적인 세력의 위상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국이 퇴조하는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실제로 중국은 (개인적) 권리에 대하여 미국과 달리 규정하고 있으며, 중국의 외부인 시각에는 중국의 체제가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중국의 체제는 자신들이 선전하듯이 지신들의 문제이며, 설령 중국이 자신의 힘을 국제적으로 과시하더라도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의 기본 관심이다. 중국과 함께하는 미래를 구상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인류역사에서 매우 기이하고 예외적인 국가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은 자신만이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예외적인 국가이며 미국의 시대가 끝나면 인류에게 퇴보가 올 것이라는 주문을 믿고 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지난 수십 년 동안, 특히 지난 수 년간 자신의 국내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생활의 수준은 저하되었고 같은 수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한참 뒤떨어 졌다. 인종차별이 성행하고 교육과 공공의료 및 생활 수준에서 미국처럼 격차를 보이는 나라가 없으며, 자신의 시각으로 평가하여도 한때 스스로 성취한 기준에 한참을 뒤떨어져 있다. 교육과 사회시설 가난구제 공공의료 그리고 국방비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전혀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물리적 지표에서는 50년 전보다 개선된 점이 있기는 하다. 수명이 늘어났고, 먹거리가 나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에 진학하고, 마을과 도시가 좀더 안전해 지긴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인 이제 자신의 나팔을 불어댈 자격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과 지위는, 군사력과 정치력 그리고 경제력 이에 문화적인 것을 추가하여, 천부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다. 현재의 미국은 과거에 행세하였듯이 더 이상 위대하지도 강력하지도 못하다. 다만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함께 도울 수는 있다.

이제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시대’에 진행되었던 흠결과 개입에 대하여 냉정하게 비판해야 할 시점이지만, 현재 미국의 모습과 미국인들이 익숙해져 있었던 모습이 너무나 달라서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예외주의라는 약속>이 아니라, <미국의 인본주의>이다 <미국의 시대>에서 벗어나 예외주의와 작별을 고하고 미국이 다른 국가들처럼 정상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많은 허점들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패권의 종말>은 현재 미국이 어떠한 궁지에 빠져 있으며, 결점들을 어떻게 고쳐나갈지 방법을 찾아가는 기회를 제공한다.

누가 알 것인가? 미국인들이 그러한 기회를 받아들일 지.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새로움을 찾아가는 출발점이다.

 

출처 : 포린폴리시(ForeignPolicy) on  2020-07-13.

Zachary Karabell

콜롬비아와 옥스포드 대학을 거쳐 하버드에서 박사를 취득한 후, 투자회사의 책임자를 거쳐 역사와 경제 및 국제관계에 관한 여러 저명 저술을 출간했으며, 세계 유수 언론에 기고하고 있다. “Inside Money – American way of Power” 출간 준비 중

목, 2020/10/0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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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조직, 국회사무처

국회 지원부서는 폐쇄적이다. 언터처블이다. 행정부의 감사감찰, 수사기능이 여기에 미치지 않는다. 국회입법고시 출신들이 강한 결속력으로 승진이나 혜택을 독점하고 비리는 서로 감춰준다. 국회의 주인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회사무처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11월 국회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남양주시갑)이 한 발언이다.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극심한 불신은 국회가 그 만큼 힘 있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국회가 반대하면 그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다는 일종의 ‘패배감’도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찬찬히 그 실상과 근원을 들여다보면, 국회 시스템의 기본을 장악한 세력은 “4년 계약직인 국회의원”이라기보다 오히려 붙박이 공무원인 국회 입법관료 집단일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국회의원은 빙산의 ‘일각(一角)’이고, 그 빙산의 ‘근저(根底)’는 입법 관료들이다. 이들 입법관료들의 힘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강하다. 사실상 입법권을 좌지우지하는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비롯하여 국회 예산과 운영에서도 실질적 지배자는 바로 입법관료라 해도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국회사무처란 마땅히 명실상부하게, 문자 그대로 국회의 사무 및 관리(administer)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 의회 시스템에서 행정 사무관리 업무를 보조, 지원하는 기관이 비대해짐으로써 결과적으로 행정부를 연상하도록 하는 제2의 관료체제로 전환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 사무처의 경우, 바로 이러한 행정관리 업무를 중심으로 관료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실상 제3의 세력 집단으로 성장해 있다. 이는 입법관료가 대표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국회사무처가 단지 국회의원을 보조하는 입법지원 기구일 뿐이라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비선실세, 법원행정처와 국회사무처

법원의 행정을 지원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치된 법원행정처가 실제로는 법원의 최고 권력을 장악한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국회사무처와 같이 본래 행정과 사무의 보조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의 권한이 점점 확대되어 전도본말의 행태가 나타나기 쉽다. 법원행정처와 국회사무처를 연속 취재해 보도했던 모 방송국 PD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취재과정에서 드러난 국회사무처의 여러 행태는 법원행정처와 완전히 동일했다.”고 밝혔다. 정보공개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전진한 씨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적폐가 어디냐는 온라인매체 ‘오마이뉴스’의 기자에게 질문에 서슴없이 국회사무처라고 단언한 바 있다.

국회 예산 운영도 사실 문제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어느 기업이든 국가 기관이든 ‘돈줄’을 쥔 자가 가장 힘이 센 사람이고 사실상 주인인 셈이다. 정부에서 기재부가 힘이 센 것은 바로 돈의 힘이 아닌가?

그런데 국회의원도 국회 사무처로부터 월급을 비롯하여 각종 운영 경비를 받는다. 커다란 문제로 부상되었던 ‘특활비’도 사무처로부터 받고 각종 활동에 대한 각종 명목의 비용 역시 사무처로부터 수령한다. 또 ‘우수’라는 평가와 지출 모두 사실상 사무처의 ‘권한’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거꾸로 국회의원들이 사무처에 잘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너무 깊고 큰 것이어서 국회의원에게 돈까지 맡기는 것은 절대로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국회사무처가 검토보고 권한과 함께 이렇게 예산과 관련 운영을 ‘독점’하기 때문에 그 권한 역시 크게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주객전도의 적나라한 현장이다.

이들 국회 사무처를 비롯한 이들 국회 기관들이 사실상 유일하게 감사를 받는 곳은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대개 “자기 식구”라는 차원에서 매우 온정적인 분위기로 처리된다. 그러니 사실상 그 어디에도 국회기관들을 감독, 감사하는 곳이 없다. 이른바 무풍지대이자, ‘온실 속 화초’다. 하지만 감시와 견제가 없는 곳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간 국회에서는 2천 억 원 예산 규모를 넘는 의원회관을 비롯하여 의정관, 국회 한옥, 어린이집 등등…… 그 아름답던 숲과 아름드리나무들을 베어내고 파괴하면서 건물들은 계속하여 새로이 지어졌다. 지금도 국회 한 켠에서는 신축 건물들이 또 지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다지 투명하지 못한 이 과정에 상당한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 특히 2천 억대 규모로 진행되었던 의원회관 공사에서는 국회 고위층 비리설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하는 등 국회에서 새 건물이 올라갈 때마다 어느 누구를 위한 사업이라는 풍문이 돌곤 한다. 그 명칭부터 이미 국적 불명인 ‘국회 스마트워크센터’는 총 646억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시작부터 낙찰가가 입찰 예정가격을 초과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전근대적이고’ ‘비정상적인’ 행태는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국회사무처, 문자 그대로 사무와 보조에 그쳐야 할 조직

그러나 선진국 의회에서는 이와 전혀 반대다.

예를 들어, 독일 의회 사무처의 역할은 회의 준비 혹은 회의장 정리 등 그야말로 보조적인 차원의 업무를 수행하고 직원 역시 대부분 실무자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무처가 그 명칭과 실질이 부합하는, 명실상부한 ‘사무처’이다.

독일 연방의회조직도 처국과

덧붙이자면,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영국 등 국가의 의회에서는 의장과 양당 대표들로 구성되는 “이사회”(영국의 경우에는 하원위원회가 이에 해당하고, 독일의 경우는 최고평의회가 이와 유사하다)가 국회 내 조직의 인사와 예산을 총 관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산의 경우에는 ‘이사회’의 ‘재무회의’가 매주 1회 개최되어 재무회의의 승인 없이는 의회의 모든 지출이 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시스템이 정상이다. 이렇게 ‘돈줄’을 장악함으로써 의원들은 의회의 진정한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국회사무처란 마땅히 명실상부하게, 국회의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타이완 입법원에는 별도의 사무처가 없고 대신 입법원 산하에 비서처, 의사처, 공보처, 총무처, 자문처를 비롯하여 법제국, 예산중심(中心), 국회도서관 그리고 의정박물관을 두고 있다.

미국 의회의 사무처 역시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의회의 행정조직은 예외 없이 이러한 형태의 조직으로 구성된다. 의원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의회 사무처가 오히려 의원 본연의 업무를 침해하는 월권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야 한다. 미국 의회의 경우, 1946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고 입법지원 조직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 우리도 이를 모델로 하여 국회의원들로 구성되는 가칭 ‘입법부강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서 현 국회 행정조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진정한 입법지원 조직으로서의 국회 공무원 조직을 정립시켜야 한다.

특히 국회 전문위원은 이제 본래의 취지대로 ‘전문가’로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 국회도 처음에는 ‘국회 전문위원’은 의원들을 지원, 보좌하기 위하여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를 상임위원회에서 의원들이 직접 선발했었다. 하지만 이는 유신 정권에 의하여 결국 전문가가 아니라 관료들이 독점하도록 ‘변형’되었다.

이러한 왜곡은 이제 바로잡혀야 한다. 그리하여 국회의원이 진정으로 국회의 주인이 되고 명실상부한 ‘전문가’들의 입법지원 활동에 토대하여 진실로 국회다운 국회, 일하는 국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화, 2020/05/0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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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한국 유수한 대학의 국제대학원에 재직중인 미국인 교수가 한국의 정치와 외교에 던진 조언의 글이다. 한반도상황과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라는 주문은 매우 고맙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의 글속에서 동아시아 역사전반에 대한 몰이해, 근대역사에서 탈아입구를 추구하며 주변국들에게 패악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은 일본에 대한 무지, 미국의 패권을 위해 일본에 면죄부를 제공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패혜와 4.3항쟁에서 저지른 미군의 범죄 및 광주민주항쟁에 보인 미국의 패착 등에 대한 묵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에 대한 악의적 폄하 등을 엿볼 수 있다. 자연스레 과연 한국의 대학에 체류하는 미국 지식인들은 우리를 돕고 있는 우인(友人)인가? 아니면 미국의 패권유지를 위한 하수인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온전히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다.


2020년 세계보건회의에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 체제와 과학기술에 기반한 COVID-19 대응의 성공사례를 발표하였다. 그는 동시에 인간의 안전보장(human security)에 대한 협력분야에 세계적인 지도국가가 될 것임을 약속하였다.

이는 아시아에서 미들-파워로 부상하는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반영한 사례로, 지난 시절 식민지배와 격심한 전쟁을 겪은 과거의 역사와 극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미들-파워’라는 것은 다자주의에 기초하여 외교적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 한국의 외교정책의 성과에 대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다만 이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아시아에 있어서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옹호하고 북한의 도전에 응답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기도 한다.

미들-파워 국가로서의 한국의 위상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야망과 필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아시아의 지정학적 어려움으로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 그리고 여전히 군사적 위협과 인권이 무시되는 레짐(북한체제)의 한가운데 한국이 처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워싱턴과 동맹은 북한을 대응하는데 필수적이지만, 지난 시기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야기시킨 것처럼 자신의 주도적 전략이 결여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서울당국은 친(親)사회적 좌표와 기구들을 통해 아시아의 미래를 형성해 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정권의 새로운 남방정책의 목표는 실재적인(physical) 것과 디지털적인 인프라를 사회기제적으로 융합하는 방식으로 아시아의 남방과 북방지역을 연결하는 것이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혜택 국가로서 한국은 이해상충의 해결방식으로 군사적 대결과 무역전쟁을 피하고자 한다.

외무장관인 강경화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웃 국가들과 사전적으로 협력을 제안함으로써, 우리는 개별국가 간의 협력이 다른 개별국가들과 협력을 확대하는 선의적(virtuous) 사이클을 형성하고자 도모한다’.

물론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는 것은 환경과 타산에 의한 수동적 기능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신감과 확신에 기초한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을 국제무대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진국과 개발국을 연계하는 여러 종류의 국제회의 주관하고, 산업적으로는 삼성과 현대 등의 브랜드가 부상하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K-Pop, BTS 그리고 기생충과 같은 영화가 한국의 지위를 알려준다.

동시에 해외협력기금(ODA)와 유엔평화유지군 등에 유의미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도전을 받고 있는 아시아의 질서유지에 주도적인 미들-파워 국가로서 다음의 3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일본과 과거사에 대한 대립이 미들-파워 외교라는 에너지의 공급에 주기적으로 정전(停電)사태를 야기한다. 독도분쟁과 불충분한 과거사의 화해, 전쟁(강제노동) 보상 등 반일본의 정서가 미들-파워의 위상에 걸림돌로 돌출한다.

한국의 주요 언론매체들은 일상적으로 일본군사주의의 위협을 과장하고 도쿄당국과 협력의 중요성을 간과하면서, 한국이 지역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미사일방어 등에 대한 정보 교환, (북한의) 제재의 기피와 수출통제의 위반에 대한 확인, 항해의 자유보장과 재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에 대한 협력 가능성을 제한한다.

두 번째, 한국의 자유민주적 가치는 중국을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에 입각한 현실적 외교정책과 가끔 충돌을 한다. 한국당국은 평양과 외교적 접근은 북경을 경유한다는 믿음 때문에 때때로 가장 주요한 무역 파트너이자 강력한 이웃(중국)에 대하여 차별화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은 신장과 홍콩의 인권 상황과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착취당하거나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보이는 팽창주의, WTO 규칙의 준수여부, 그리고 일대일로가 국제적 규범을 지키는지 여부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

세 번째, 국내의 정치적 대립이 외교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양당체제 하에서 전임의 두 대통령이 감옥으로 보내졌고, 국회는 입법과정에서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는 실제적 전장터이다.

단임의 5년제 대통령 임기와 불안정한 정당정치 때문에 북한과 주변 이웃국가들에 대한 정책이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이러한 내부의 균열로 인해 외국의 개입전술에 쉽게 노출되고, 성과있게 운용되는 정권이라도 외교정책에서 자원할당의 주도권을 행사하기에 비효율적이며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대치적 정치상황이 정치적 지도력에 제한을 가하면서, 이념적 경쟁의 주변국가들에 대해 주도적 우위를 취하기보다는 주어진 법적 규정을 수동적으로 따르게 한다. 한국의 외교정책은 민주적 절차와 국가이익에 대한 전략적 사고를 갖추기 위해 투명성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한과 평화경제를 추구하기 위해 일본과 결별한다는 정책적 오류(fantasy)를 피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그리고 인권상황, COVID-19 팬데믹의 위기극복, 미국 미사일시스템의 한국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 등에 대하여 일관된 정책이 요구된다.

미들-파워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한국은 워싱턴과 동맹을 강화하고 북경과 평양과의 관계를 조정해가는 가운데 제로-섬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면서 중국과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동맹의 의무라며 국제적 질서유지에 기여하는 것보다, 패권국가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자유무역을 증진하고 기후변화를 완화시키는 소소한 분야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아시아 내에 새로운 협력기구를 창립하면서 이념과 역사의 갈등에서 외교정책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지역 내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합의에 의한 한반도 통일에도 다가갈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MIKTA(Mexco, Indonesia, S. Korea, Turkey & Australia) 협력기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남방정책에 있어서도 인도를 결합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또한 지역역량의 증대를 위해서 동반자 국가들인 호주와 아세안과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미들-파워 외교를 통하여 한국의 위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강화할 수 있고 다른 국가들과 국제적인 협력의 가치를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EastAsiaForum, 2020-05-27.

Leif-Eric Easley

이화여자 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화, 2020/06/0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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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을 ‘재발명’하는 일이다. 만물의 영장이자 자연의 정복자로 군림해온 인간이 지구생태계의 모든 존재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뿌리깊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위치를 다시 규정해야 한다. 문화사학자이자 환경사상가인 토마스 베리는 이를 인간의 ‘재발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종의 차원에서, 비판적 숙고를 통해, 공동체의 생명체계를 고려하여,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야기와 꿈을 공유하는 경험을 수단으로” 실천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Thomas Berry, The Great Work, New York: Bell Tower, 1999, p.159)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키케로는 “인간다움”을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타스”로부터 인문학(humanities)을 구상했다. 이는 세계 만물의 공통된 본질인 아르케를 탐구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거리를 두고 인간에 집중한 결과였다. 이 때부터 인문학은 과학과 거리를 두었으며 르네상스 이후에는 인간중심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인문학의 목표인 “인간다움”이 갖는 의미는 인간과 다른 존재의 연관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때문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좁은 정의를 벗어나 상호 연결된 존재로서의 진정한 인간다움을 탐구해야 한다. 근대화 이후 시민계급이 갖춰야 할 교양으로 자리매김된 인문학(liberal arts)이 점차 분과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을 중심에 둔 통섭의 학문으로 변신하는 이유다.

환경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은 전지구적 생태위기에 대한 인문학의 응답으로, 2000년대 이후 환경철학, 환경사, 생태비평, 문화·생물 인류학, 문화지리학, 정치생태학,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연구, 젠더연구, 종교학 등 다양한 인문학과들 사이의 연결을 추구하는 지적 프레임워크로서 등장했다.

환경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점차 고조되는 생태위기와 생태적 인식의 중요성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자본주의위기라는 두 가지 문제는 과학기술이나 정책 영역의 한계를 넘어섰다. 1992년 UN 리우정상회의 이후 한 세대가 지났지만 기술, 경제학, 정책에 의존한 해결책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우며 이 부분에서 인문학은 환경문제에 개입하고 대중의 의식을 바꿔놓을 수 있다.

 

환경인문학의 정의

19세기 후반 생물학의 하위분야로 출발한 생태학이 학제적 영역으로서의 환경연구로 확장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지만 대부분 자연과학의 관련 전공, 혹은 자연과학과 산업, 정책, 제도를 다루는 사회과학과의 결합이 초점이었고, 인문학은 그런 학제적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론 인문학의 여러 분과학문들은 1970년대 이후 각자 이론적 프레임과의 연관성에 따라 생태적 관점을 점차 도입했다. 환경철학이 1970년대에 나왔고, 환경사는 1980년대부터 역사학의 하위분야로서 자리잡았다. 생태비평 역시 1990년대 초반 제도화됐으며, 학제적 성격이 강한 인류학이나 지리학은 더 쉽게 생태적 사고와 결합했다. 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나 환경적 사고를 소재로 끌어들여 분과학문의 틀 안에서 연구하는 방식이었다.

환경철학과 환경사, 생태비평의 발전은 이전까지 생태학적 사고를 지배했던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했다. 자연, 야생, 생태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초적 자연”을 전제로 한 “보호” “보존” “복원” 등의 개념에 의문이 제기됐고, 환경 담론을 분석하는 것이 인문학계 환경연구의 핵심이 됐다. 자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자연과의 연속선상에서 인간을 파악함으로써 독립적·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관을 극복, 보완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계몽주의적 사고가 이성적·합리적 인간성을 중심으로 지식체계를 재편한 것처럼, 제2의 계몽주의에 비견되는 생태적 사고는 인간과 자연이 연결된 생명관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할 필요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 상호간,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태적 인문학”을 처음 제안한 호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두 가지 이론적 과제로 (1)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 (2)비인간을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영역 안에 재위치 짓는 것을 들었다. (Val Plumwood, Environmental Culture: The Ecological Crisis of Reason, Routledge, 2002)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켜 정신성을 가진 우월한 지위에 올려놓고 의미, 가치, 윤리가 없는 물리적 자연세계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조종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연-문화 이분법을 극복하자는 뜻이다. 이는 생태위기를 가져온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을 비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하며, 하나의 연결된 세계로서 지구시스템의 동력과 변화를 고려하면서 인간적 삶의 방식과 사회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필연성으로 이어진다.

 

이론적 과제

(1)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

인문학에서 환경철학, 환경사, 생태비평의 역할은 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이었다.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은 생태계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자연을 인간적 측면에서 평가하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원 또는 물질로 파악하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들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아야 하고, 인간은 최소한의 생존적 필요를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부함과 다양성이라는 근본적 가치를 해칠 권리가 없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간섭을 줄이기 위해 경제, 기술, 이데올로기를 고려한 정책 변화가 필요하며 생태적 세계관으로 전환하기 위해 선불교, 노장사상, 기독교 영성주의가 고려돼야 한다. 노르웨이 철학자 안 네스와 미국의 환경운동가 조지 세션스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8개의 강령을 발표했다.

환경사의 개척자인 미국 사학자 도널드 워스터는 『Nature’s Economy: A History of Ecological Ideas』(1977, 한국어 번역서 『생태학, 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 문순홍∙강헌 옮김, 아카넷, 2002)에서 18세기 이후 서구생태사상에 나타난 자연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을 “목가주의적 입장”과 “제국주의적 입장”으로 명명하고 양자의 긴장관계를 부각시켰다. 목가주의적 입장은 자연의 내적 가치와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인정한다. 고대 및 중세의 이교도적 물활론에 기원을 둔 이 관점은 다른 유기체와의 평화로운 상호공존을 복원하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지지하며 18세기 낭만주의에서 부활했다. 기독교 전통에서 기원한 제국주의적 입장은 인간에 의한 자원의 조작성을 강조하며 이성의 엄밀한 사용을 통해 인간의 자연지배를 확립했다. 생태학의 역사는 이런 두 가지 흐름의 경합과 갈등으로 구성됐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다양한 시대적, 문화사적 연관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생태비평의 경우, 생태적 관점을 문학연구의 중요한 도구로 수용하면서 주제 수준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생태문제를 다룬 새로운 정전을 발굴했고, 전통적 고전 텍스트를 생태적으로 재해석했으며,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사람뿐 아니라 생태를 어떻게 착취했는지 분석했다. 문학텍스트에서 식물, 동물, 사물, 풍경, 날씨 등 비인간 작용자의 역할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과정에서 순수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판타지, SF, 에세이, 여행기, 극영화, 애니메이션, 민속지까지 텍스트의 범위가 확대됐다.

생태비평은 문학사 전체를 생태적 관점에서 재구성했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교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장소성의 회복은 생태비평의 중요한 기여로 평가 받는다. 근대 이전의 설화나 서사문학, 비극 혹은 지방색문학에서 물리적 환경은 결코 장식적 배경이 아니었다. 자연환경과 대지는 나날의 삶을 방향 지으며 인간의 내밀한 정서와 상상력을 빚어내는 근원적 힘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인물의 행동과 사건이 펼쳐지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자연환경은 생태비평의 발전과 함께 문학적 상상력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복권됐다.

 

(2)비인간을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영역 안에 재위치 짓는 것

최신 과학적 연구성과를 수용한 포스트휴머니즘은 비인간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에 간섭하는지 드러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같은 용어로 묶이기 어려운 다양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다른 종, 기계, 물건, 시스템과의 관련 속에서 자유적 인간 주체를 탈중심화하는 운동이다.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지형은 다채롭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브루노 라투어)은 물질적·기호적 방식으로 서로에게 관여하는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비생물 행위자로 구성된 이질적 사회네트워크에 강조점이 있다. 시스템 이론(니콜라스 루먼)은 개인이 사회의 부분이라는 관념을 벗어나 양자를 서로의 환경에서 작용하는 시스템으로 바라본다. 신유물론(스테이시 알라이모)은 생태적 네트워크에서 인간 주체의 구성과 물질적 흐름, 즉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트랜스코포리얼 벡터”로 정의한다. 신물활론(제인 베냇)은 환경주의자의 방식과는 다르게 물질의 살아있는 행위성을 탐구한다. 사물이론(빌 브라운)은 사물의 외양이 인간과의 관계 및 중요성에 따라 구성됨을 밝히는 반면, 물체지향존재론(그래험 허먼)은 상호관계성에서 물체를 해방시켜 그 자체의 견지에서 탐구하면서 물체가 궁극적으로 인간지식으로부터 분리돼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연구(자크 데리다, 조르지오 아감벤, 다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정치적 함의로부터 찾는다. 복수종 민속지(안나 칭)는 인간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여러 종류의 살아있는 주체들과 인간의 얽힘의 효과에 관심을 가지며, 윤리적 민속지 혹은 민속적 윤리학(도미니크 레스텔)은 의미와 관심, 영향을 공유하는 혼성 인간-동물 공동체를 탐험하기 위해 사회과학과 동물과학의 방법론을 활용한다.

이런 학문들은 서로 공통의 기반이 없거나 서로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라벨 아래 분류되는 넓은 범위의 이론들은 인간 존재와 의도를 포함해 네트워크의 한 행위자로서 우리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인간이 동물, 식물, 자연 등 비인간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며 자율적으로 사고한다는 계몽주의의 자유적 인간주체의 중심성은 급격히 해체된다.

 

인류세와 인문학

크뢰첸과 스톨머가 제안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Crutzen and Stoermer, The “Anthropocene”, Global Change Newsletter 41, 2000, p.17-18)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지구의 물리적 변화를 일으킬 만큼 중대하다는 인식을 급속히 확산시킴으로써 많은 논쟁과 함께 학문간 융합의 가능성을 낳았다. 인류세는 1만년 전 시작된 홀로세(현세)에서 인류가 지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기를 분리하자는 주장이다. 크뢰첸 등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제안한 반면, 루디먼은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이후 대기 중 온실가스가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William Ruddiman, The Anthropocene, Annual Review of Earth and Planetary Sciences, Vol 41: 45-68, 2013) 핵실험 성공 이후 방사성 물질의 확산, 플라스틱의 발명,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공해 등을 근거로 1950년대 이후를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인류세 논쟁은 인류세라는 규정이 적절한 지에 대한 지질학계의 대립에서 시작됐지만, 인류세가 또 다른 형태의 인간중심주의라는 반론을 거쳐 인간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인간의 중심적 역할과 이를 위한 사고와 가치의 재정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됐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데 장점을 가진 인문학이 환경담론에 개입하고 현실의 변화를 견인하는 가능성을 높였다.

환경담론으로서 인류세는 자원환경의 복원과 유지에 인간의 개입을 제한했던 기존 사고와 달리,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적 관점을 통해 자연-인간의 상호성을 바탕으로 인간문명이 환경문제에 긍정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일반대중이 참여하는 공동체 문화가 필요하다는 함의를 내포한다. 인류세는 지구를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복잡한 사회-생태적 시스템으로 본다. 즉,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사회의 경제, 인구, 생태, 정치, 상징적·문화적 측면의 분석을 모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지구의 모든 사람과 사회를 포함하기 때문에 분과를 넘는 다리놓기와 지식생산의 개방된 시스템에 대한 접근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리 개념으로서 인류세의 가능성은 단순히 다양한 학문을 통합하는 게 아니라 학문 내부, 혹은 학문 사이의 담론적 분할을 전경화한다는 점이다. 인류세는 사회와 정책결정자에게 과학적·기술적 지식을 제공하는 자연중심주의 내러티브, 인류의 행위가 지구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반성과 전망이 담긴 재난적 내러티브, 기술발전과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불평등과 환경재난을 야기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생태마르크시즘 내러티브,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이 해소되는 포스트모더니즘 내러티브, 지구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임파워먼트(역량강화 혹은 권한부여)와 실천의 내러티브 등을 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내러티브는 인식론의 모순을 드러내며 인류세를 경합적 개념으로 만든다. 예컨대 인류세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글로벌 변화에 대한 인간의 기여를 가리키며 여기서 인간은 ‘범죄자’로 여겨지는 단일한 글로벌 세력으로 재현된다. 그러나 인간행위자가 글로벌 규모의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의 차별화되지 않은 세력으로 축소돼서 지역간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차이가 사라진다면 사회적 변화가 인류세를 가져온 근본적인 동력이라는 점이 상실되고 만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또한 자연을 인간에 의해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재상상함으로써 환경주의 정치경제의 핵심인 지속가능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지속가능성이란 자연의 일정한 용량과 회복가능성을 전제로 하는데 비해, 인류세가 제시하는 대기와 지질의 변화는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세의 핵심은 통합된 지구시스템을 이해하고, 이를 위한 글로벌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구화의 결과로 등장한 통합된 인간사회 역시 지구시스템의 일부로 인식함으로써 인간의 역할을 부정에서 긍정의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복잡하고 변화하는 지구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을 긍정하는 것은 과학적,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측면을 가지며 더 지속가능하고 평등한 선택을 향한 정책 결정과 상호작용하며 돕는다.

인류세 담론의 분석에서 보듯이 환경인문학은 단순히 과학과 기술의 변화를 이해하는 개선된 방식을 제시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런 변화의 인간적 원인, 인간과 환경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기술적 생활세계가 변화함에 따라 인간은 이런 자연과 문화의 구성물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발명해 왔다. 자연과 문화가 결합된 이런 영역은 언어, 관념, 태도, 예술, 장소감각 등에 들어있다. 에너지 전환, 재활용 등 환경정책과 관련된 결정에서 역사, 철학, 문학, 예술에서 나온 인간적 지식을 제공받을 수 없다면 단순히 경제적 손익계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 결정이 현명하게 이뤄지기 위해 환경인문학의 역할이 필요하다.

 

환경과 인문학의 대화

환경과 인문학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인문학이 환경연구에 기여하는 바는 환경담론의 분석이다. 저널 “레질리언스”는 환경인문학의 존재 이유로 “환경문제를 진단하는 과학논문은 여전히 일관성 있는 지속가능성의 비전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인문학과 인문사회학에 중심적인 내러티브 기술, 비판적 사고, 역사성, 문화, 미학과 윤리학은 과학자들의 노력에 중요한 보완적 연구를 제공한다. 인문학의 생태적 가치가 지금보다 더 분명했던 적은 없다. 환경인문학은 우리의 생태적 미래에 대한 대화에서 중심에 서야 한다”(http://www.resiliencejournal.org/about/overview)고 밝혔다. 인문학은 여러 분야의 연구자료에 바탕이 된 전제를 분석함으로써 일관성 있고 조화로운 시각으로 이를 해석하고 활용하도록 돕는다. 현재 생태위기의 복합성과 지구시스템과학이 생산한 난해하고 엄청난 정보량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반대로 환경연구는 인문학에게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묻도록 자극한다. 인문학은 비인간세계를 배제하거나 배경으로 삼는 방식으로 “인간”에 초점을 두었으나 환경연구의 성과와 그것이 인문학의 분과학문에 끼친 영향력은 더 이상 이런 전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자립적이고 이성적이고 결정하는 주체라는 환원주의적 설명을 거부하면서 인간을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는 생태계의 참여자로 위치 짓고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인간성을 일컬어 “두터운 인간성(thicker notion of humanity)”(Deborah Bird Rose, etc., Thinking through the Environment, Unsettling the Humanities, Environmental Humanities, Vol.1, 2012, p. 1-5)이라 한다. 환경 안에 재위치된 주체는 인간을 자연 바깥에 놓음으로써 인간은 의미, 가치, 윤리가 없는 넓은 “자연” 세계 안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조종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여겨온 근대적 주체의 자연관을 넘어선다.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의 양분법이 붕괴하면서 기존 지식과 사고의 체계가 불안정해진다. 즉 인문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과감하게 재구성돼야 한다. 일례로 환경사가들의 연구 결과는 전통적인 인간의 역사를 더 넓은 지구사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이야기는 지질학, 진화생물학, 기후과학이 제공하는 시간에 대한 깊은 고려 위에 다시 씌어야 하는 과제와 만났다. 기존 학문의 재구성과 다양한 종류의 신생 학문은 머레이 북친이 지적했던 대로 계몽주의가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낸 기본사상이 된 것처럼 오늘날 생태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종합사상이 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입증한다.

한편 인문학 연구경향의 변화는 인문학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변화시킨다. 인간의 정의가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오늘날 인문학은 전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는 이론을 개발하고 현재의 도전을 받아들일 학생을 키우는 임무가 있다. 미국대학교육협회는 교육의 가치로서 “윤리적 판단, 통합성, 간문화적 기술, 계속적인 학습능력”(Hart Research Associate, It Takes More than a Major: Employer Priorities for College Learning and Student Success, Liberal Education, vol. 99 no.2, spring 2013, p. 22-29)을 들었는데, 이는 환경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치한다. 생태위기와 경제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과학기술과 윤리가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환경인문학의 이론과 실천은 중요한 교육적 수단이 된다. 미래세대가 자신들 앞에 놓인 세계를 보고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며 “지구의 청지기”로서 행동하도록 능력과 용기를 줄 수 있다.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화, 2020/03/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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