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시민단체, 간토대지진 진상규명·명예회복 성명 발표 1일 오후 충남 천안시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임광순 ‘기억과 평화’ 이사가 한일 양국 정부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낭녹하고 있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대표 김종수)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학살 제98주기 추도 행사에서 한일 양국 정부에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 등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간토학살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발생한 규모 7.9의 간토대지진이 일본 수도권 일대를 강타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이 다수 살해된 사건이다. 특히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한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 경찰, 군인에 의해 6천661명(독립신문 기록)이 희생된 참사이기도 하다.
성명서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 사건의 책임 인정과 사과, 한국 정부의 진상규명·명예회복 조치와 국회의 특별법 제정, 한일 역사학계·교육계의 조선인 학살 사건 연구와 교육 등을 촉구했다.
이 성명에는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1923제노사이드연구소,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등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대학, 연구소, 종교계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임광순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이사는 이날 충남 천안시 동남구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는 “간토대지진은 자연재해였지만 뒤이은 피해는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며 “당시 일본 내무성은 전국 지자체에 ‘조선인 폭동’을 사실화하는 유언비어를 타전했고, 피해지역인 사이타마(埼玉)현 경찰서는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의 망동이 있으므로 급히 상당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전파해 치안 당국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에 불을 붙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1923년 이후 조선인 학살은 은폐되는 듯했으나 여러 연구자와 시민운동 덕분에 진상이 널리 알려졌고 2013년에는 한일 공동학술회의가 열려 진상규명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며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 정부는 당시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은 채 추도 메시지도 거부하고 있고 한국 정부와 국회도 진상규명과 피해복구에 눈을 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행사에는 다나카 마사타카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사무국장, 이유재 독일 튀빙겐대 교수, 조정현 1923재일시민연대 운영위원,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대표가 추도사를 했다.
배영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이재선 천도교 청년회 중앙본부 회장, 구와노 야스오추금 일본 닛코리회 대표, ‘엿장수 구학형’·’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의 기록 번역팀이 연대사를 발표했다.
김종수 대표는 “2년 앞으로 다가온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에 맞춰 진상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는 다양한 사업에 양국 시민단체가 함께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취소 항소심서 日변호사 주장 유족 “아버지 이름 야스쿠니서 반드시 빼내고 말 것”
도쿄고등재판소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적(敵)과의 합사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20일 도쿄고등재판소(법원)에서 열린 야스쿠니(靖國)신사 한반도 출신 군인 및 군속(군무원) 합사 취소 항소심 첫 공판에서 원고측 아사노 후미오 변호사는 논개를 왜장과 같이 모시는 형태의 사당을 가정해 야스쿠니 합사의 부당성을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을 고려할 때 한국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앞서 도쿄지방재판소는 지난해 5월 28일 야스쿠니 합사자 유족 27명이 지난 2013년 10월 제기한 제2차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합사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합사 사실이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합사됐다는 것이) 불특정 다수에 알려질 가능성이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유족들은 항소했고, 이날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열린 첫 항소심 공판에서 원고 측 일본인 변호인단이 구두변론을 했다.
구두변론에 앞서 야스쿠니 합사 한국인 유족 대표로 박남순 씨가 법정 진술을 했다. 박 씨의 아버지인 고(故) 박만수 씨는 1942년 11월 22일 남원 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군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2월 24일 전사했다.
박 씨는 “저는 2005년 국가기록원을 통해 아버지 기록을 받고서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며 “왜 희생자인 아버지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가해자, 전쟁범죄자들과 같이 합사돼 있어야 하냐”고 지적했다.
도쿄고등재판소서 진술한 박남순 씨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야스쿠니 합사 한국인 유족 대표로 박남순 씨가 20일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법정 진술을 했다. 박 씨의 아버지인 고(故) 박만수 씨는 1942년 11월 22일 남원 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군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2월 24일 전사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아버지 유골을 찾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아버지 묘소는 텅 빈 채로 있다”며 “일본 정부는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할 때는 일본 사람이었다며 무단으로 합사해 놓고, 유골 조사를 할 때는 한국 사람이라며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죄에 대해 반성과 사죄는커녕 이렇게 무책임하고 반인도적인 일본 정부의 태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는 머나먼 이국땅 브라운(섬)에 묻혀 있는 내 아버지의 유골을 당장 찾아서 저에게 돌려주고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는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반드시 빼내고 말 것”이라며 “그것만이 침략전쟁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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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친일파인 민영휘의 후손이 대한민국 정부와의 ‘친일재산 환수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2017년 3월 1심 소송 시작 후 3년 만에 나온 결과다. 민영휘 후손 측은 1심에서 이겼지만 항소심에서 국가에 패소했다. 대법원은 “법리 오해가 있다”는 민영휘 후손 측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심 판단을 확정했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최근 민영휘의 후손인 유모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영보합명회사(영보)가 “서울 강남구 세곡동 땅 1492㎡(약 451평)에 대한 소유권을 돌려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을 심리불속행으로 기각하고,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항소심 판단에 법리 오해가 없을 때 본안 심리를 열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것이다.
민영휘는 일제에 조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조선총독부에서 자작 작위를 받은 대표적 친일파다. 그는 그 대가로 거부가 됐고 ‘조선 최고의 땅 부자’로 불렸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7년 그를 재산환수 대상이 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단했다. 세곡동 땅을 놓고 국가와 소유권 분쟁을 벌인 유씨는 민영휘의 셋째 아들 민규식의 의붓손자다.
민규식은 22살이었던 1910년 시행된 일제 토지조사령에 의해 문제의 세곡동 땅을 소유하게 됐다. 유씨 측은 1933년 민규식이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매매회사 영보에 이 땅을 출자했고, 그에 따른 소유권이 후손인 자신에게 있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이 땅은 1949~1950년 ‘유상몰수·유상분배’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면서 국가 소유가 됐다. 민규식은 그 직후인 1950년 7월 납북됐다.
민규식의 후손들은 세곡동 땅이 제대로 분배·상환되지 않았고, 이럴 경우 당시 농지개혁법에 따라 원소유자에게 소유권이 반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처음 소송을 제기한 건 유씨의 어머니 김모씨였다. 김씨는 2013년 소송을 냈으나 “영보 명의의 땅에 대한 소송제기권이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그러자 유씨가 2017년 3월 “행정절차상 오류로 세곡동 땅이 국가에 잘못 귀속됐다”며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며 반박했다.
1심은 유씨 측 승소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민규식이 세곡동 땅을 친일행위로 얻었다는 근거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민규식이 토지 소유권을 얻은 1910년 휘문의숙을 막 졸업해 친일 행적이 보이지 않고, 아버지 민영휘의 친일행위 대가로 얻은 재산을 증여받은 것이란 증거도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항소심은 “세곡동 땅이 영보에 출자됐다는 증거가 없다”며 국가 승소로 판결했다. 토지 소유권의 전제가 되는 출자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과거 기록 사실조회 과정에서 유씨 측에 불리한 자료가 나왔다. 국가 측 소송대리인은 국가기록원·강남구청 등에 과거 자료를 탐문하면서 민규식이 납북되기 직전인 1949년 작성된 농지소표(농지분배 전 현황조사 자료)에 ‘경작자는 민규식’이라고 기록된 것을 확인했다. 유씨 측 주장대로 출자가 이뤄졌다면 영보가 소유자로 나와야 하는데 이를 뒤집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다만 재판부는 “세곡동 땅이 친일재산”이라는 국가 측 주장에 대해선 별도로 판단하지 않았다.
[한국타임즈 광양=권차열 기자] 전남 광양시는 지난 20일 시청 상황실에서 문화유산 보호관리 위원회를 개최해 유당공원 내 친일인물 비석에 대한 정비 방안을 심의하고 단죄문 설치를 의결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제 국권침탈 협력자인 이근호, 조예석 비석에 대한 정비 방안을 심의했다.
시에 따르면 유당공원에는 2008년 광양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3기의 비석이 있으며, 이 중 ‘관찰사이공근호청덕애민비’와 ‘행군수조후예석휼민선정비’ 2기가 친일인물 관련 비석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시는 지난해 9월 시정조정위원회 자문회의와 시의회 의원간담회를 열고 ‘유당공원 내 친일논란 비석에 대한 정비’ 안건을 상정해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
심의 과정에서 이적행위를 한 인물의 비석을 별도의 위치로 비석을 옮겨 다른 비석과 구분하고 단죄문을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동 시 천연기념물인 이팝나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고, 문화재 원형 보존의 원칙과 비석 13기가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있어 의미가 있다는 의견으로 인해 기존 비석 앞에 단죄문을 설치하는 것으로 의결됐다.
이근호(1861~1923)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으로 1902년 2월부터 제5대 전라남도 관찰사 겸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앞장 선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또한 일제 강점하 반민족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돼 있는 인물이다.
조예석(1861~?)은 1902년부터 1904년까지 광양군수를 지냈고,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관계한 조선 관리들에게 일본 정부가 수여한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2009년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인물이다.
위원회에 참석한 한 위원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후세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줘야 한다는 데 모든 위원이 뜻을 같이했다”며, “단죄문 설치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사실관계 확인 등을 통해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김복덕 문화예술과장은 “오는 4월까지 단죄문 설치를 완료하고 해당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적시해 시민과 유당공원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친일행적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겠다”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50년 뒤, 100년 뒤에도 남는 문학은 거대담론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는 세계문학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에요. 그렇지 않은 당대 베스트셀러는 풍화작용 속에서 사라질 겁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24일 종로구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소설 ‘광장’을 쓴 최인훈을 인용해 “민족 생존권을 본능적으로 알고 깨닫게 하는 것이 문학”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임 소장은 친일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으로 유명하지만, 본업은 문학평론가다. 문예지 ‘현대문학’에 1966년 ‘장용학론’을 투고해 평론가로 등단했고, 이후 ‘문학과 이데올로기’, ‘분단시대의 문학’ 등 문학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썼다.
그가 최근 소명출판을 통해 그간 발표한 글을 묶은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를 출간했다. 장용학, 이호철, 최인훈, 박완서, 이병주, 남정현, 황석영, 손석춘, 조정래, 박화성, 한무숙 등 이른바 “권력에 먹물을 뿌린 작가”를 살폈다.
임 소장은 “소설가들은 훌륭한 작품을 썼는데, 평론가들이 중요한 대목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알리지 못해 안타까웠다”며 “평론은 아니고 평론적 에세이로, 문학을 하지 않은 사람도 볼 수 있도록 재미있게 썼다”고 말했다.
흥미를 강조한 발간 의도와 달리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상당히 묵직한 편이다. 그는 신간 머리말은 물론 간담회에서도 ‘거대담론’이라는 용어를 거듭 강조했다.
임 소장은 “사악하고 추악한 시대에 살면서도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자세로 고고한 미학적 사도인 양 미세담론에만 열중하는 (문학계의) 그 편집증 현상이 거대담론을 부추겼다”며 “정치를 질타하는 문학만을 다뤄보자는 만용을 부리는 건 노망의 징조인가 싶지만, 늘그막에 객기 한 번쯤 부려보고자 (글을) 추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책에서 재조명한 작가들이 문단 파벌에 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권력을 견제했다고 주장했다. 또 작가들 공통분모로 통일과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독재를 찬양한 친일파 청산을 바랐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최인훈만큼 미국을 비판한 작가가 없다”며 “이병주는 박정희 어용 작가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 욕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담은 ‘반일종족주의’를 반박하려면 조정래 소설 ‘아리랑’을 읽어야 한다”며 “조정래는 현장을 직접 가보고 썼지만, 학자들은 자료만 읽는다”고 덧붙였다.
임 소장은 ‘거대담론’에 집중하지 못하는 정치권과 언론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언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뉴스를 과도하게 쏟아내고, 정치권도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북한 문제나 외교 문제를 등한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대일 관계에서 친일 청산 문제는 경제와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면서 “일본 자민당도 과거에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중국, 러시아와 교류한 사례가 있다”고 조언했다.
▲ 대전시가 시청 북문 앞에 있던 금송을 뽑아 한밭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다.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등은 금송이 일본 황실을 상징해 대전시를 대표하는 시청 출입구에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식을 요구해 왔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대전시가 시청 북문 앞에 있던 금송을 뽑아 한밭수목원으로 옮기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등은 금송이 일본 황실을 상징해 대전시를 대표하는 시청 출입구에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식을 요구해 왔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
대전광역시가 대전시청 북문 입구에 있는 금송 두 그루를 한밭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다고 25일 밝혔다.
박준용 대전시 청사관리팀장은 “시청 북문 앞 금송을 지난 23일 한밭수목원으로 옮겨 심었다”고 밝혔다. 박 팀장은 이식 배경에 대해 “금송은 일본이 원산지로 이에 대한 시민 정서를 고려했다, 또 북문 출입구에 심어져 있어 개방감을 확보하려는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문제의 금송은 지난 2000년 1월 신청사 개청과 함께 지역의 한 건설·토목업체 대표이사가 기증했다. 대전시는 금송이 있던 자리에 우리 고유 수종인 반송을 심었다.
앞서 대전민족문제연구소와 대전광복회는 지난해 8월부터 시청 북문 앞에 있는 금송 두 그루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나무가 일본 왕실을 상징해 대전시를 대표하는 시청 출입구에 있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금송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코야마키’라는 나무로 일본서기나 일본 신화, 일본 신사 등에 일본 사무라이 정신, 일본 왕실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옮겨 심기 전 대전시 북문 앞 금송. 이 금송은 지난 2000년 1월 신청사 개청과 함께 지역의 한 건설·토목 업체 대표이사가 기증한 것이다. ⓒ 심규상
홍경표 대전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다른 곳으로 이전을 요구해 왔다”며 “늦은 감 있지만, 대전시의 금송 이식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대전민족문제연소는 지난 해에는 아산 현충사 경내에 있던 금송을 옮겨 심게 했다.
충남도교육청은 지난해 부터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충남도내 56개 학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무분별하게 심어진 금송과 왜향나무(가이스카 향나무) 등 일본 원산지 나무 정리작업을 벌이고 있다. 충남도교육청의 전수조사 결과 362개교에서 왜향나무 7720그루, 금송 212그루를 확인했고 왜향나무를 교목으로 지정한 학교도 52개교에 이르렀다.
▲ 진주 “뒤벼리 민족반역자 이름 처리를 바라는 시민의 모임”은 1일 뒤벼리 입구에 안내판을 세웠다. ⓒ 강호광
“이재각, 이재현, 성기운은 민족반역자입니다.”
경남 진주 뒤벼리 입구에 이런 제목의 안내판이 다시 세워졌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부 회원들을 비롯한 ‘뒤벼리 민족반역자 이름 처리를 바라는 시민의 모임’은 1일 오전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1999년 이곳에 비슷한 내용의 안내판을 세워 놓았으나 이후 누군가 훼손한 흔적이 있었고, 이날 시민들이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시민들은 팻말 주변 정비 작업도 벌였다.
이재각, 이재현, 성기운은 민족반역자다. 일제강점기 때 민족을 배반한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이들의 이름이 진주 뒤벼리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바위에 새겨진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지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글자를 새길 경우 바위 훼손이 우려되고, 교훈을 삼아야 한다고 해 팻말을 세웠던 것이다.
시민의모임은 “뒤벼리는 진주8경의 하나로 옛날부터 남강의 명승지로 알려졌다”며 “1930년대 이후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이 더럽혔다”고 했다.
이들은 “일제에 부역하면 이름이 새겨진 바위처럼 영구히 빛나리라는 생각에서 경술국치를 맞게 한 천인공로할 반역자와 그 친족 이름까지 이곳에 새겼던 것”이라고 했다.
이재각(李載覺)은 일왕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오늘날 수백억 원에 해당하는 15만 원의 은사금을 받았고 일장기가 그려진 훈장을 받은 대표적인 친일파다.
이재현(李載現)은 군수와 관찰사 재임 중 조선말에 일어난 애국 의병들을 회유, 토벌, 재판한 주동자이고, 성기운(成岐運)은 경남‧전남‧충청 관찰사로 의병을 토벌하거나 재판을 했고 일왕으로부터 수백억원에 해당하는 15만원의 은사금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시민의모임은 <국사대사전>과 <인명대사전>, <고종‧순종실록>, <관보>, <매일신보>, <사법휘보> 등에 근거해 이들의 반민족행위를 표시해 놓았다.
시민의모임은 “민족반역자의 이름을 제거하기에 앞서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교훈으로 삼고자 안내판을 시민의 힘으로 세웠다”고 했다.
▲ 진주 “뒤벼리 민족반역자 이름 처리를 바라는 시민의 모임”은 1일 뒤벼리 입구에 안내판을 세웠다. ⓒ 강호광▲ 진주 “뒤벼리 민족반역자 이름 처리를 바라는 시민의 모임”은 1일 뒤벼리 입구에 안내판을 세웠다. ⓒ 강호광▲ 진주 “뒤벼리 민족반역자 이름 처리를 바라는 시민의 모임”은 1일 뒤벼리 입구에 안내판을 세웠다. ⓒ 강호광
해방된 지 75년. 그 긴 세월이 흘렀지만, 신사(神社) 참배는 한국 천주교회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신사 참배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는 친일 행각을 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했다. 55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교회는 2000년 대희년 12월 과거사 참회 예식을 거행, 신사 참배와 함께 일제 침략 전쟁에 협력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신자들을 단죄한 잘못을 참회했다.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국가 신도’는 금지됐지만,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명맥을 계속 잇고 있다. 군국주의 망령이 일본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국가 신도 또한 부활할 것이라는 생각이 우려만은 아니다.
한국외방선교회 유가별 신부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학부 통합과정과 석ㆍ박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한 뒤 ‘1882년부터 1936년까지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사 참배를 주제로 한국과 일본 교회, 교황청 등지의 사료를 기초로 쓴 최초의 박사 학위 논문이다. 3ㆍ1절 101주년을 맞으며 유 신부의 논문을 기반으로 ‘신사 참배’를 주제로 한 특집을 싣는다.
1920~1930년대 한ㆍ일 교회
1932년 5월, 일본 예수회가 운영하는 도쿄 조치대 학생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 이에 조치대에 파견됐던 교관은 격분해 이 사건을 일본 육군성에 보고하고 대학에서 전격 철수한다. 이 사건으로 장교 임용이나 군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조치대 입학 지원자가 격감하고 조치대는 존폐 기로에 선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선 사회적으로 반가톨릭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학 측은 다시 교관을 영입하려 했지만, 1933년 12월이 되기까지 불발했다. 신사 참배 허용을 비롯해 일본 국가주의에 충성하겠다는 구체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는 교관 재임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1934년 12월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현 오시마에서 일본 국가주의와 신사 참배 요구가 강화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오시마에서 선교 중이던 캐나다 출신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 반국가주의적 행위를 했다는 오명을 썼다. 오시마 주민들은 성당을 약탈했고, 온갖 위협과 폭력에 시달린 끝에 오시마 선교사들은 결국 철수했다. 또한, 오시마의 거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배교를 선언하자 나가사키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사 참배를 허용했고, 일본 주교단 또한 이 지침을 뒤따랐다.
조선은 어땠을까? 1924년 10월 강경공립보통학교(현 강경중앙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바위본당 신자 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교장 지시에 불응해 퇴학당했다. 또한, 1925년 10월 서울 조선신궁(현 서울 남산공원과 안중근의사기념관 일대) 진좌제(鎭座祭, 신령이 내려와 위패에 깃들게 하는 제사 의식)를 전후해 대구 효성여학교(현 효성초등학교)를 비롯한 가톨릭 학교들이 진좌제 관련 행사에 불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문부대신을 만나 “가톨릭교회는 신사 참배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이처럼 한국 교회는 일관되게 신사 참배를 우상숭배로 봤고, 참배를 막았다. 1931년 전국 대목구장 공동명의로 발표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도 신사 참배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신자들의 참석을 금지했다.(466항)
한ㆍ일 교회는 왜 신사 참배를 금했나
일본과 한국 교회는 당시 왜 신사 참배를 금지했을까? 신사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셔놓고, 그 신을 재장(齋場)ㆍ교장(敎場)의 성스러운 터전으로 믿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사 대상이 된 ‘카미’(神)는 자연신을 총칭한 것으로, 포괄적으로는 신화적, 역사적 인물이나 위인, 조상의 영들도 카미로 숭배했고, 이를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라고 불렀다.
메이지유신 초기, 일본 정부는 ‘신도 국교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종교계 반발에 부딪히자 ‘신사신도’(神社神道)의 비종교화를 추진한다. 메이지 정부는 1882년 ‘국가 신도화 법령’을 반포, “신사 신도는 국가 제사이지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신도를 종교에서 분리했다. 이후 내무성 산하에는 종교국을, 문부성 산하에는 신사국을 두어 행정적으로 신사신도를 일반 종교의 범주에서 구분시켰다. 동시에 국가 신도는 더는 종교에 해당하지 않기에 정치와 종교 분리 원칙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했다.
그러나 1910년대로 접어들며 신사 참배가 가톨릭교회와 얽히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국가 공무원의 의례 행위로만 봤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가 1911년 모든 학교 학생들에게 교사 인솔 하에 신사 참배를 할 것을 의무화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입장
이에 따라 교황청과 일본 간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한 교섭이 이뤄진다. 1916년 필리핀 교황사절 주세페 페트렐리 주교는 늦게나마 1912년 즉위한 다이쇼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일본과 바티칸 간 수교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됐다. 그의 파견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일본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황청 개입 필요성이 언급됐다.
이어 이듬해 2차로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페트렐리 주교는 방일 중 나가사키ㆍ도쿄ㆍ하코다테 등지 교구장 주교들과 만나고 일본 외무대신 모토노 이치로(本野一)와도 접견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신사 참배 관면은 별다른 진전 없이 논의로만 끝나고 만다.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 교회의 노력은 계속됐다. 1919년 일본 해군 제독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야마모토 신치로(山本進次郞)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바티칸과 일본 수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티칸과 일본 당국자 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밝히며 20여 가지의 청원을 담은 편지를 교황청에 보낸다.
이에 따라 교황사절이 파견된다. 초대 주일 교황사절은 이탈리아 출신 푸마소니 비온디 주교(1919∼1921년 재임), 제2대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오 자르디니 주교(1922∼1931년 재임)였다. 제3ㆍ4대 주일 교황사절은 미국 출신 에드워드 무니 주교(1931∼1933년 재임)와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1933∼1948년 재임)이다. 이 두 주교가 일본의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 신사 참배를 위해 메이지 진구(明治神宮) 앞에 모여든 일본 군인들과 일본ㆍ만주간 친선 서약을 하는 사진을 게재한 일본 신문 이미지.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제사 허용 문제
그래도 1920년대까지는 신사 참배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데 이어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학교에서 문제가 커졌다. 이에 주일 교황사절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는 초대 중국 교황사절인 첼소 콘스탄티니 주교에게 요청,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1742년 7월 반포한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회칙」(Ex quo singulari)과 관련해 조상 제사의 문화적 측면을 다시 한 번 논의해 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의 공자 의례 문제와 한ㆍ일 신사 참배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자 의례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ㆍ중ㆍ일 가톨릭교회에서 신사 참배가 허용되는 데 실마리가 되는 회의는 1935년 3월 12일 만주국 수도 신징(현 창춘)에서 만주국 주재 교황청 대표 오귀스테 가스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만주국 주교단의 공자 의례에 관한 회의였다.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제사 중 위패(位牌)에 절하는 문제였는데, 만주국 주교들은 위패에 절하는 문제를 문화적 행위로 보고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교황청에 보고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이에 따라 1935년 5월 28일 만주국 주교단의 결정을 인준하고, 공자 의례 예식에 일부 금지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아 신자들의 참여를 허용했다. 이어 1936년 5월 26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훈령을 통해 제사와 함께 신사 참배를 전격 허용한다.
한ㆍ일 교회의 신사 참배 허용
만주국 주교단의 이 같은 결정은 한ㆍ일 주교단의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독일 출신으로 일본 히로시마대목구장으로 있던 요한네스 로스 주교도 1932년 ‘신사 참배에 관한 교회법적 허용 가능성’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교회법적 근거를 제시한 것도 영향을 줬다. 그는 1983년 개정 이전 구 교회법 1258항 ‘가톨릭 신자의 비가톨릭적 종교예식 참여에 관한 규정’에서 신사 참배 참여 허용 원리를 찾아냈고, 주일 교황사절 에드워드 무니 주교는 이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사 참배의 길을 열었다. 무니 주교는 이 논문을 한ㆍ일 주교단에 모두 보내고, 논문을 본 소감을 달아 회신하라고 요구한다. 이어 도쿄대교구장은 논문의 결론을 도출하고, 주일 교황사절은 신사 참배가 허용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제시한다. 이 논문을 접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는 1933년 10월 신사 참배 반대 입장을 바꿔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같이 신사 참배에 긍정적 입장을 표명할 정도로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도쿄 도심 메이지 진구(明治神宮)에 모여든 일본인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한국 교회 내 갈등
당시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26년에 펴낸 교리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를 통해 신사 참배를 금지했다. 또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공의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사목 지침서에서도 신사 참배는 금지됐다. 하지만 1932년에 내놓은 「천주교요리」 개정판에서는 입장이 확 달라져 신사 참배를 허용했다.
1932년만 해도 서울ㆍ대구ㆍ원산대목구와 평양ㆍ연길지목구 주교단 중 대구의 드망즈 주교를 빼고는 모두 신사 참배를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주교들도 입장을 바꾼다. 신사 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하던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이 1935년 갑작스레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해 한국의 모든 지역 교회는 신사 참배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다.
끝까지 반대하던 메리놀회 선교사 월터 콜만 신부와 레오 스위니 신부는 미국으로 소환됐다. 콜만 신부는 탄원서를 교황청 성무성성(현 신앙교리성)에 보냈지만, 초대 주일 교황사절을 지낸 포교성성 장관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이 이를 묵살했다.
1933년에 결정된 신사 참배 반대 번복을 교회가 곧바로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주교회의 안에서만 공유하다가 번복 사실을 공개한 것은 3년 뒤 「경향잡지」 1936년 4월 호를 통해서였다. 이어 한 달 뒤 포교성성 훈령이 발표되자 한국 주교회의는 신사 참배와 관련된 사목 지침서 조항을 개정, “신사 참배는 애국 행위의 표명”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36년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 조사위원회’를 꾸려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 대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 위원회 역시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사 참배 종언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쇼와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신사 참배는 사실상 종언을 알린다. 그해 12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는 “국가 신도와 관련된 모든 교육과 지지, 홍보 등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처를 내린다”고 발표한다.
신사 참배가 공식 금지된 지 이제 75년이 지났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에서 ‘신사신도’가 ‘국가신도’가 되면서 비롯돼 군국주의 망령 속에서 횡행했던 신사 참배는 이제 공식적으로는 수면 아래 잠겨 있다.
1995년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평의회가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애국주의라는 미명하에 수용했고, 아시아와 태평양 주변 국가 신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아픔을 줬다”고 고백하며 공식적으로 신사 참배 허용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편집회의서 일제 입장 용어 강요, 조선일보 폐간되자 조광에 일제전쟁 미화…수차례 침략전쟁 옹호 강연도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발간사에서 이를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이라 했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서문에서 “참회와 화해의 첫걸음이 되길” 바랐다. 이는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조광 발행인)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고,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방응모를 친일파로 규정하자 조선일보 측은 반발했다.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손자 방우영 전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방응모 전 사장이 친일행위를 한 적 없다”며 정부에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방우영 전 회장이 2016년 세상을 떠나자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등이 다툼을 이어갔다. 법원에선 방응모를 끝내 친일파로 봤다. 다만 8년에 걸친 소송에서 친일행위의 범위가 줄었다.
▲ 계초 방응모. 원래 호는 춘해였다가 뒤에 계초로 고쳤다. 친일인명사전에선 방응모를 조광 발행인으로 분류했다.
원래 반민규명위에선 잡지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 일제에 군사물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에서 발기인·감사를 지낸 행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등 세 가지를 친일행위로 봤다. 대법원은 이 중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만을 인정했다.
여전히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조선일보와 방 사장 일가가 방응모의 친일행적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아서다. 방응모는 자신의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방재윤의 아들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방상훈 현 조선일보 사장은 방일영의 첫째 아들이다.
이에 미디어오늘은 법원 판결취지와 방응모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살펴봤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해 백범묘소 앞을 찾은 다음날인 2009년 11월9일 경향신문 1면 사진기사.
방응모가 첫 인연을 맺은 신문사는 동아일보다. 그는 1884년 1월3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잠깐 교편을 잡았고 변호사사무실에서 대서업을 하거나 여관업 등에 종사하던 그는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한 뒤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지국장이 됐다. 1927년 5월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에서 물러나 동아일보 고문을 맡았다.
방응모는 금광개발로 큰 돈을 벌어 그 중 일부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했다가 1932년 교동광산을 135만원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게 팔았다. 1932년 6월 조선일보 영업국장,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 같은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1935년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1936년 8월 경쟁신문사의 불행이 시작됐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 조선중앙일보가 휴간하자 조선일보는 전국에서 발전 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사세확장의 기회로 활용했다. 이후 방응모는 본격 친일행위에 나섰다.
그는 1937년 2월 원산 순회강연에서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해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정한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으로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1월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 등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자고 주장했다. 일제 입장의 표현을 쓰자는 주장이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반대하자 방응모는 서춘에게 힘을 실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몇십만원 손해를 봤고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총독부가 조선일보 지면이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고 평가했다. 1938년 2월 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가 만든 조선춘추회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했다. 또 방응모는 수차례 강연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이 평화를 위한 활동이라고 왜곡·미화했고, 조광에 글로 남겼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당했고 방응모는 월간지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해 친일활동을 이어갔다. 같은해 11월호 ‘조광’ 권두언에서 “국민된 자로서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태평양전쟁 개전소식을 들은 뒤 감상을 적은 1942년 2월호 글에서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 동양 전체의 죄인”으로 칭하며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 동양을 이탈해 세계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응모는 일제가 전쟁에 이겨야 한다며 조선 민중에게 다음을 요청했다. 첫째, (일제)군관 당국을 절대 신뢰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 둘째,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관념을 가지고 국민개로운동(국가총동원)에 동참할 것. 셋째, 장기전을 대비해 물자를 절약할 것. 넷째, 전비확충을 위해 저금을 많이할 것 등을 강조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돼 방응모의 정확한 사인, 사망시기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조선일보가 말하는 방응모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금광왕’
조선일보는 어렵던 신문사를 인수해 경영난을 돌파한 인물로 이 신문을 이끈 30인 중 한 명으로 방응모를 기록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신문사는 1932년 말 판권을 장악한 사채업자 임경래와 이에 반대하는 기자들 분란으로 신문을 제대로 발행하지 못했다. 당시 사장 조만식이 폐광 개발로 금맥을 발견한 방응모에게 경영을 부탁했다. 조선일보를 살리려 노력하던 주요한 역시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 인수를 설득했다.
방응모는 동아일보 정주지국장 경력이 전부일 뿐 서울에선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마흔살에 접어든 1924년 삭주 교동(다릿골) 폐광을 뚫기 시작해 3년 만에 금맥을 발견해 종업원 1000여명을 거느린 광산으로 성장시킨 인물로 알려졌을 뿐이라고 이 신문은 기록했다.
조선에서 금광개발로 거부가 된 사람은 방응모 말고도 최창학과 김태원 등이 있었다. 이들 성공으로 당시를 ‘황금광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방응모는 자선사업 정도였던 신문사업에 뛰어들었다. 조선일보는 잡지 ‘삼천리’ 1933년 10월호에서 “신문사업은 아직 소모사업”이라며 “금광왕들은 모두 방응모씨를 본받자”고 한 부분을 인용했다.
▲ 조선일보를 이끈 사람들 30인 중 하나인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갈무리
방응모는 50만원을 내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바꿨다. 당시 동아일보 불입 자본금이 35만원,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자본금이 50만원이었다고 전했다. 방응모는 1933년 4월27일 ‘드리는 말씀’에서 “(조선일보는) 우리 조선 민중의 공유물”이지 “몇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방응모 인수 이후 조선일보가 성장했다. 1933년 조선일보 부수는 2만9341부로 동아일보(4만9945부)와 2만부 가량 차이가 났지만 방응모 사장 취임 3년 만에 6만626부로 동아일보(3만1666부)를 두배정도 앞섰다. 1935년 언론사 최초로 취재용 비행기를 구입했고, 월간지 ‘조광’, ‘여성’, ‘소년’을 창간했다. 일제의 조선일보 폐간에 대비해 1940년 1월 출판부를 독립해 조광사를 설립했다.
방응모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다. 안창호가 입원했을 때 500원을 냈고, 안창호가 세상을 떴을 때 조위금을 내 장례를 치렀다.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만해 한용운 선생 등의 장례에도 자금을 댔다. 또 독립운동가 소식지를 찍어내는데 활자를 제공하기도 했고 ‘이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했다. 방응모는 일제 요구로 시국강연에 불려 다니거나 임전대책협력회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 단체는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 지도급 인사들이 망라됐다고 기록했다.
방응모는 1950년 5·30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한 뒤 6·25 전쟁 발발 후 자택에 머무르다 7월6일 납북됐다고 한다.
* 이 글은 위안부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온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칼럼입니다.
지난해 10월, 저는 한겨레 전 부사장이신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임 선생은 그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그를 지지하기 위해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을 만들었는데 그들이 일본에 가니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 사무처장이 함께 가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불매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3박4일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저는 우에무라 기자의 자서전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를 읽었고,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삿포로 재판소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서 저는 또 다시 우생모와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그의 도쿄 재판소의 2심에서 또 다시 패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판결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전해 받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매우 큽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느낀 우에무라 기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누구이며, 어떤 재판인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62)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91년 8월 11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우에무라 다카시 “27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위안부 문제 보도하겠다” 뉴스톱 인터뷰 기사 참고). 그의 보도 사흘 뒤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우리에게도 많이 보도가 되었지만, 우에무라 기자의 보도는 한국보다 앞서 보도한 특종이었습니다. 그의 기사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간 주요한 외교문제로 만드는데 주요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 1월, 느닷없이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쿄기독교대학의 니시오카 스토무 전 교수가 <주간문춘>에,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사쿠라이 요시코가 <주간신초> 등을 통해 우에무라가 날조기자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의 1991년 보도가 날조라는 주장의 배경은 단순합니다. 우에무라 기자가 쓴 당시 기사의 첫 구절에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장으로 연행돼”라는 부분이 나오는 것을 트집 잡으며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고 썼다는 것이죠.
하지만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폭로하셨던 1990년대 당시에는 모두들 위안부와 정신대라는 표현이 혼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에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전신)도 단체명에 ’정신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는 분명합니다. 우에무라 기자도 당연히 “당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과 한국 언론에서 모두 일반적으로 썼던 표현”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밖에도 우익들은 우에무라 기자의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점 등을 빌미로 그가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도로 인해서 우에무라 기자는 우익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해당 보도들이 나올 당시, 우에무라는 아사이신문에 사표를 내고, 한 대학 강사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학교에 날조기자를 고용하지 말라는 항의가 이어져 그의 임용은 취소되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점을 보도했지만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우익들은 ‘일본의 매국노’라며 그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고, 심지어 고등학생인 딸에게 살해 협박까지 했습니다.
명예 회복을 위한 재판, 그러나 두 재판소 모두 2심까지 패소
이렇게 일본 우익으로 인한 공격에 시달리던 우에무라 기자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명예훼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재판은 니시오카 스토무와 <슈칸분춘>(週刊文春)을 대상으로 도쿄 재판소에서, 사쿠라이 요시코와 <슈칸신초>(週刊新潮) 등을 대상으로 삿포로 재판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삿포로재판소 1,2심 모두 우에무라 기자가 패소했고, 도쿄재판소도 1심 패소 이후 오늘(3월 3일) 2심 결과가 나왔는데, 마찬가지 결과였습니다.
두 재판소 모두 우에무라의 사회적 평가가 떨어진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익들이 ‘우에무라는 날조기자다’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안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은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상당한 이유’ 그 무엇도 전혀 ‘상당한 근거’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변호인 측은 두 항소심 재판 모두에 대해서 “최고재판소(일본의 대법원)는 명예훼손 재판의 경우 진실 상당성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재판소가 추론으로서 상당한 합리성이 있다고 판결했다”고 평하면서 이는 판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재판 이후 우에무라 씨와 변호인 측은 즉각 상고하겠다고 밝혔기에, 이제 두 사안은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일까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삿포로 재판을 방청하는 과정에서 저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삿포로 재판은 사쿠라이 요시코와 그의 글을 출판해 준 3개의 출판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쿠라이 요시코는 영화 <주전장>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대표적인 일본의 우익인사입니다. 그는 45년생이고 여성으로 베트남에서 출생하여 하와이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도쿄 지국에서 근무한 후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니혼 TV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오늘의 사건’에서 메인 캐스터로 일했습니다. 일본에서 여성 캐스터의 선구자적 존재이기에 그를 ‘저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을 번역한 것들이 제법 있던데요. 일본 ‘슈칸다이아몬드’ 2018년 3월 17일호에 실린 사쿠라이 요시코의 칼럼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진행 중, 문대통령과 보수파 간의 대립에 주목>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근거도 없는 허위조작정보이며, ‘프로 막말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재인이 구상하는 것은 헌법의 전면적인 개정입니다. 한국을 전혀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 전문에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자유’를 삭제하고 그냥 ‘민주주의적’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하면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부호가 맞기 때문입니다.”
“(문재인의 헌법 개정 내용 중 하나는) ‘국민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로 수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북한 김일성의 ‘인간중심’ 주체사상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재인은 적어도 이념에 있어서는 한국을 북한풍의 국가로 개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연방제를 거쳐 통일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척척 진행중이라고 판단해도 될 것입니다.”
“경계 대상은 북한의 김정은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재인이기도 합니다.”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 회원들이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재판에 참석한 모습
졌지만 이기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재판과정
삿포로 재판소의 2심에서 패소한 날,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도와주고 지지하는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함께 해주는 이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 모습을 보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 그는 “역사적으로는 이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재판은 일본의 전쟁범죄와 부끄러운 역사를 파헤친 언론인과 그 역사를 부인하고 다시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려는 일본의 보수 우익 아베 정권과의 ‘역사적’ 싸움입니다.
그리고 삿포로 재판을 응원하기 위해 두 번 일본을 방문하면서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는 많은 일본의 시민이 있으며, 한국의 우생모 등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일본의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작년 민언련은 일본의 무역보복 이후, 일본과 한국의 보수언론들의 하는 거짓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토크쇼를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한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책임연구자는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규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시민사회의 노력이 매우 진정성 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는 실감을 하지 못했죠. 하지만 두 차례 일본 방문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며 본인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양심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시민이 존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의 변호인단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우에무라 기자 말로는 삿포로와 도쿄에 계시는 약 270명에 달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삿포로에서 활동하는 900여명의 변호사들 중 107명이 우에무라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실제 내가 재판을 방청한 두 번의 재판 모두 상대방 변호인 측은 4명 정도의 변호인이 앉아있는 데 비해서, 우에무라 측 변호인은 그야말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계속 들어왔습니다. 변호인석의 모든 자리가 꽉 차서 간이의자를 가지고 오고, 그 와중에 더 자리를 좁혀서 앉아야 할 정도로 변호인의 수는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구성과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변호인부터 젊은 여성 변호인까지 정말 다양했고, 재판정에 들어서는 그들의 표정은 매우 따뜻하고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판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그와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시민을 대상으로 재판결과와 의미, 앞으로의 계획 등을 매우 상세히 알려주는 기자회견을 했고, 다시 시민사회를 대상으로 보고회를 했습니다. 많은 변호인들이 이런 과정이 끝난 뒤 우에무라 기자와 함께 한국음식을 먹는 회식 자리까지 함께 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모여서 우에무라 기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변호인단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시민들의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응원과 지지도 결연했습니다. 재판이 있을 때마다 재판과정에 대한 보고회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지난 10월 그 자리에 우리가 ‘우에무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며 인사했을 때, 여러 명의 일본인들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봤습니다. 감사와 환영과 연대의 표정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홋카이도 주민이면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는 홋카이도 모임>이라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신다는 나나오 히사코(七尾寿子, ‘우에무라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들의 모임’ 사무국장)라는 일본 여성은 ‘우생모’가 모이는 자리마다 오셔서 시종일관 손을 잡고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기 위해 방문한 것에 대한 감사와 연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올 2월 삿포로 판결 이후 열린 보고회에서는 ‘경남지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이경희 공동위원장(‘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대표)의 발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성금을 걷어주기도 했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우익들에게 ‘매국노’로 낙인찍혀있는 상태입니다. 우경화된 일본 사회 내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시민들과 정의로운 변호사들은 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비난하며 그를 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재판은 이런 한일 양국의 깨어있는 시민을 늘려나가고, 그들의 참여로 결국은 역사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싸움의 과정에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왜 이렇게 지극히 정상적인 기사 하나로 인해 한 인간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조차 받기 힘든 일본의 현실이 얼마나 엄혹한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2019년 제 7회 리영희상을 수상했다.
한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한 우에무라 기자
마지막으로 우에무라 기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거듭 강조한 것은 한일 교류였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의 <슈칸 긴요비>(週刊 金曜日)의 편집장입니다. <슈칸 긴요비>는 일본의 진보적 주간지인데, 경영난에 처한 잡지사가 우에무라 기자를 편집장으로 초빙했다고 합니다. 현재 <슈칸 긴요비>는 우리의 〈시사IN〉과 기사 교류를 맺고 있습니다. 한편 우에무라 씨는 한국가톨릭대학의 초빙교수로 한국에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되었지만, 학기 중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힘겨운 재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그는 한일 예비 언론인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비 언론인’은 우리의 ‘언론사 지망 취업준비생’과는 조금 다릅니다. 일본은 사실상 언론사에 취업이 확정된 상태의 예비 언론인들이 학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한일 교류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는 2017년부터 ‘언론인 한일 학생 포럼’을 만들어서 한일 양국의 문제해결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론인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일감정이 매우 큰 편입니다. 그래서 처음 우에무라 기자의 이런 간곡한 호소를 들었을 때는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심 공판 당시 재판 과정을 미디어에 담고 후원하는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을 보면서 저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친일과 반일, 친한 반한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양국 시민이 함께 노력하는 과정은 분명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본 최고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남겨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를 위해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이 재판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그를 응원합니다.
*참고자료
공소인성명
오늘,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니시오카 츠토무 씨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니시무라 도쿄소송의 공소심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1심에 이어 우리는 패소했습니다.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오카 씨는 2014년 2월 6일호《주간문춘》의 기사에서 제가 쓴 전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기사 A를 “날조”로 규정하는 등, 저에 대한 “날조”공격을 되풀이해왔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격렬한 “우에무라 날조 배싱(bashing)”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내정되어있던 대학의 교수직을 잃었고,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2015년 1월 니시오카 씨 등을 고소했습니다. 저의 명예, 가족의 안전, 근무처 학생들의 안전, 그리고 전 “위안부”인 김 씨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오늘 고등재판소 판결에서는 니시오카 씨가 제 기사를 “날조”라고 주장하는 세 가지 점 중 두 가지에 대해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믿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니시오카 씨를 면책했습니다. 니시오카 씨는 저에 대한 직접취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니시오카 씨는 제 기사를 날조기사로 단정할 때에도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것이 1심에서 밝혀졌습니다.
이《주간문춘》의 기사를 보십시오. “이 때 자기 이름을 대고 나온 여성은 부모에게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그렇게 답하고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소장에서도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김학순 씨는 그렇게 답하지 않았습니다. “날조” 비판의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것입니다.
또, 니시오카 씨는 저의 기사 B에 대해, 저서『알기 쉬운 위안부문제』에서 김학순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던 것을 적지 않았으므로 “악질적이고도 중대한 날조”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언설을 무너뜨릴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여 고법에 제출했습니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던 김 씨가 처음 변호단의 청취조사에 응한 1991년 11월 25일의 녹음테이프입니다. 여기서 김 씨는 “기생”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테이프에 근거해 기사 B를 썼습니다.
그러나 고법판결은 이 새 증거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니시오카 씨의 결정적인 오류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려놓은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에무라 날조 배싱”의 장본인은 니시오카 씨입니다. 그의 언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배싱에 가담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던 대학에 협박전화를 한 남성이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제 딸을 트위터로 비방ㆍ중상한 회사원은 그 책임을 추궁 받아 배상금 지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판결에서 그 장본인이 면죄를 받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에무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은 기자 여러분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부당판결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라면 가짜뉴스가 거리낌 없이 유포되는 심각한 시대가 옵니다. 즉각 상고하고, 최고재판소에서의 역전판결을 기대하겠습니다.
이상
공소심 판결에 대한 변호인단 성명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씨가 전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에 관한 91년의 신문기사를 둘러싸고 주식회사 문예춘추와 니시오카 츠토무 씨를 고소한 소송의 공소심에서 도쿄 고등재판소는 오늘, 우에무라 다카시 씨의 공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우에무라 씨 등의 논문이나《주간문춘》의 기사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진실성ㆍ진실상당성의 항변을 인정한 도쿄지방재판소 판결을 거의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추인한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다.
니시오카 씨 등은 무에무라 기사에 대해 “기생이었던 김학순 씨의 경력을 쓰지 않았으니 날조다”라는 취지를 주장해왔다. 우에무라 씨는 공소심에서 91년 12월 기사의 근거가 된 김학순 씨의 증언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했다. 증언테이프 안에는 기생에 대한 증언이 없었다. 증언자가 증언하지 않은 내용을 기사로 쓰지 않은 것이 “날조”가 될 리 없다. 그러나 공소심은 해당 증언 테이프가 김학순 씨의 증언 전체를 기록한 것이라 인정하기 힘들다는 둥 믿기 어렵다는 트집을 잡으면서 그 증거력을 부정했다. 이런 주장은 상대방에게도 통하지 않아, 테이프의 성립과정을 입증하기 위해 신청된 본인 신문도 각하되었다. 고등재판소의 판결은 변호인단으로부터 반론의 기회를 빼앗은 기습적인 인정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판결은 8월의 우에무라 기사 중에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라는 기사가 “강제연행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우에무라 씨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1심의 인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8월에 기사에는 확실하게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써놓지 않았는가. 우에무라 씨에게 강제연행을 꾸며내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 따위를 썼을 리가 없다. 이 판결의 인정은 상식을 까마득히 벗어나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이 판결은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너무도 조잡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한편, 고등재판소 판결은 ① 우에무라 씨가 김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다는 경력을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는 사실, ② 우에무라 씨가 장모의 재판에 유리하도록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사실에 대해 공히 진실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공소심의 큰 성과로써 우에무라 씨의 명예를 일부나마 회복한 것이다.
변호인단은 이번 심리 과정에서 우에무라 씨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입증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전 “위안부”의 존엄회복 운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1심, 2심의 성과를 토대로 최고재판소에서 끝까지 싸워낼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교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이다. 조선반도에서 시행된 ‘황국신민화’ 교육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독특하다. 이는 음악이 지니는 정서적인 힘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운동장에서 조회하고 있는 학교 모습(위 사진)과 현대 들어 학생들이 교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 민족문제연구소·경향신문 자료사진
긴 겨울을 뚫고 만물이 생동하는 3월이다. 매년 이맘때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기지개를 켜는 곳이 있다. ‘학교’가 바로 그곳이다. 예상치 못한 사태로 인해 일선 학교에서는 학사일정의 혼선이 빚어진 상황이지만, 신입생들을 맞을 채비로 학교는 그 어느 곳보다 분주하다.
신입생의 신분으로 맞이하는 3월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이면서도, 무엇보다 새로운 학교의 역사와 학풍에 대해 익히는 시기이다. 학교의 전통을 상징하는 ‘교가’(校歌)를 처음 접하는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그런데 이 영구불변의 상징물인 교가를 둘러싸고 기억전쟁이 시작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일본 식민지배 이후 만들어진 교가 제국주의 위한 획일적 인간상 담아 조국·민족 위해 충성·헌신 요구 해방 후 대부분 교가에 그대로 전승 군사정권·독재시대 거치며 심화
‘교가’는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각종 행사를 비롯해 매주 조회시간에 제창 형식으로 부르게 되는 교육용의 노래이다. 학창 시절의 일과와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교가는 그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일상의 불가피한 속성인 ‘하찮음’은 교가가 담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적인 지점들을 간단히 덮어버린다. 그 별것 아닌 노래 속에 제국주의와 개발독재라는 질곡의 시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교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일본의 식민지배 이후이다. 메이지 정부의 국시인 근대화 또는 국민화 작업은 공교육 기관을 중요한 거점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국가 정책에 따라 기획된 교과목을 통해 어린 학생들은 황국신민으로 길러졌다. 여기에서 제국 일본과 그 식민지 간의 차이는 없었으며, 당시 조선 반도에서도 이른바 ‘황국신민화’라는 교육 목표는 동일했다.
이러한 황국신민화 교육에 있어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독특하다 할 수 있는데, 이는 음악이 지니는 정서적인 힘과 무관하지 않다. 음악이 인간의 심성을 결정한다는 에토스론적인 사상에 따라, 당시의 음악 교과서인 창가집에는 ‘용장 활발하고 쾌활한 정’이 넘쳐흘렀다. 우울하고 비탄에 젖은 감정은 퇴폐로 낙인찍혔다. 이 대목에서 ‘우울한 정서를 권하는 정권이 과연 있었던가’라는 의문을 잠시 던져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탄을 장착하고 자살 공격을 감행한 특공대 ‘가미카제’의 출항을 일본 여학생들이 환송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스
다시 교가로 돌아가보자. 수차례 개정을 거듭한 대한민국의 음악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각급 학교에서 여전히 불리는 교가 속에는 당시 제국이 요구했던 규범화된 인간상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대부분의 교가에서는 학생들에게 ‘조국’과 ‘민족’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겨레’의 ‘일꾼’이자 ‘등불’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학교 교가의 경우 진선미나 현모양처의 규범은 일종의 클리셰로 등장하고 있으며, 남학교의 경우 극단적으로는 ‘나라의 전사(戰士)가 되어’라거나 ‘이 몸을 깎아 기둥을 삼고’ 식의 선동적이고 호전적인 문구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유형의 가사들은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군국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며 한층 심화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문제는 백여 년 된 유서 깊은 학교의 교가든, 새로 개교한 학교의 교가든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사실상 판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가는 이전 시대의 규범을 단절 없이 계승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교가 하나 정도는 외우고 있을 터이니 그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교가를 ‘청각적 기억의 매체’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교가에 기록된 기억의 역사는 생각만큼 가볍지 않다.
진보 성향 교사들 중심 변화 바람 판에 박힌 가사·내포된 규범 둔 채 일상 속 식민주의 척결 ‘무의미’ 획일화된 규범에서부터 해방돼야 식민주의 청산 시작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요지부동의 교가에 최근 들어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변화의 주체는 주로 진보적 성향의 교사 단체들이다. 교가를 비롯한 교목, 교화, 교표 등 학교의 상징물이 지니는 식민주의적 속성에 문제의식을 느낀 이들 단체에서 교가 교체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에 침투해 있는 식민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준성역화되어 있는 학교 상징물에 외과적 수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그 내용인즉, 교가를 비롯한 학교 상징물들은 친일 혐의가 있는 인사와 관련된 경우가 상당수이며, 이는 식민주의의 잔재이므로 친일과는 무관한 인물에 의해 새로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친일 문제는 간단히 청산된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2019년 들어 소위 친일파로 분류되는 음악가가 작곡한 교가들은 상당수 교체된 바 있다.
교육계의 움직임을 추동한 현실정치의 맥락도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지소미아 종료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2019년 대한민국은 소위 ‘NO JAPAN’의 구호로 뜨겁게 달아오른 바 있다. 교육계의 친일파 척결 운동이 한·일 간의 관계 악화라는 정치적 맥락과 때를 같이한다는 사실은 교가가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소거하는지 그 실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연성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교가 교체 작업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므로 섣부른 판단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친일파 청산이 곧바로 식민주의 청산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판에 박힌 가사,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식민주의적인 규범은 그대로 둔 채 곡조만 바꾸면 식민주의의 기억은 소거될 수 있는가. 가사와 곡조 모두 교체된다 한들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없다면 무의미한 일이 아니겠는가. 식민지배 이래 공고히 구축된 규범화된 인간상은 아직까지 수정되지 못한 채 영속되고 있는 것이 교가 교체의 안타까운 현주소이다.
적어도 식민주의의 단절은 획일화된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식민주의를 계승한 국가주의 사상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규범은 자칫하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도쿄대학교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 교수의 비판이 말해 주듯이 전사자들의 죽음을 ‘숭고한 희생’으로 기리는 국가의 추모 의례는 전쟁의 실체를 가리는 은폐 행위이며, 이는 학교 교육을 통해 전승되는 규범화의 사슬로부터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교가는 기억을 작동시키는 청각적인 매체로서, 기억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장소이다. 특별히 기억할 일이 없는 교가이지만, 정작 잊으려고 하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 것이 또한 교가이다. 파편적으로 존재하던 온갖 기억들이 경합과 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소리의 기억을 둘러싸고 소리 없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도 함께 귀 기울여볼 때다.
조선일보 사시(社是) 가운데 첫째가 ‘정의옹호(正義擁護)’다. 조선일보는 정의옹호를 사시로 삼은 이유에 대해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서 정치적 정의, 경제적 정의, 사회적 정의를 옹호하겠다는 신념의 피력”이라고 설명한다.
민족지로서 민족의 정의를 으뜸가는 가치로 내세우는 조선일보가 과연 그 ‘사시’를 어떻게 구현해 왔는지 살펴보자.
1937년 1월 1일, 조선일보 1면 한가운데에 당시 일본왕 히로히토 부부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일제강점기였지만 그래도 ‘민족지’를 내세우며 한글 발행을 하는 신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나 시도할만한 지면 배치였다.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 1937년 1월 1일 1면에 일왕부부 대형 사진 올려
이날 자칭 ‘민족지’ 조선일보는 1면 제호 옆에 눈 쌓인 소나무 그림을 배치하고, 중앙에 일왕 부부 사진을 올렸다. 사진은 봉황 이미지와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으로 장식됐다. ‘원단(元旦)‧궁중(宮中)의 어의(御儀)’, 즉 ‘설날 아침 궁중의 의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왕을 ‘천황폐하’로 칭했고, 임금의 손을 높여 부르는 ‘어수(御手)’, 임금의 옷을 높여 부르는 ‘어포(御袍)’ 같은 극존칭 단어를 동원해 일왕을 찬양했다. 일왕 부부 사진 왼쪽에는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사진과 함께 그의 신년사를 빼놓지 않고 실었다.
▲ 1937년 1월 1일, 조선일보는 처음으로 1면에 히로히토 일왕 부부의 사진을 크게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 때부터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해마다 새해 1면을 일왕 부부의 사진으로 채웠다.
동아일보는 이듬해인 1938년 1월 1일부터 일왕 부부 사진 1면 게재를 시작했다. 1면 제호 옆부터 일왕 부부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배치했다.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봉황과 국화 문양으로 일왕 부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부터 1면에 일왕부부 사진 등장
동아일보는 이날 1면 ‘대본영하(大本營下)에 어월년(御越年), 황공(惶恐)-천황폐하어일상(天皇陛下御日常)’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일왕을 ‘천황폐하’ 또는 ‘대원수폐하’로 표기했고, 임금의 뜻을 높여 부르는 ‘성지(聖旨)’, 임금의 걱정을 높여 부르는 ‘성려(聖慮)’, 임금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성수(聖壽)’라는 극존칭을 사용해 일왕 히로히토를 칭송했다.
▲ 히로히토 일왕 부부를 1면 전면에 실은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자 신문. 봉황과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 등으로 장식했다.
두 신문은 이후 1940년 8월 폐간때까지 매년 1월 1일, 1면 중앙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실었다. 일왕 부부 사진을 장식하는 배경이나 문양은 해가 갈수록 화려해졌다. 봉황은 물론, 떠오르는 태양, 눈 쌓인 소나무, 날아오르는 학, 구름,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 문양 등이 일왕 부부의 존엄을 보조하는 상징으로 다양하게 동원됐다.
▲ 일왕 부부가 등장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39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940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1938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940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1939년과 1940년 1월 1일자 1면에는 예복이 아닌 군복을 입은 일왕의 사진을 실었다. 일왕을 전쟁을 지휘하는 ‘대원수폐하’로, 즉 중일전쟁 시기 최고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천황’을 강조한 것이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조선일보가 독자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 침략전쟁의 수행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 1939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예복이 아닌 군복을 입고 있는 일왕이 눈에 띈다.
조선과 동아일보, 두 신문이 일왕 부부의 사진으로 1면을 장식한 것은 1월 1일만이 아니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천장절)인 4월 29일에도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배치했다. 조선일보는 1937년과 1938년, 동아일보는 1938년, 1939년 4월 29일 일왕 부부의 사진을 싣고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어휘를 동원해 일왕 생일을 ‘봉축’했다.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왕 생일(천장절)에도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실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37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1938년 4월 29일자 조선일보, 1938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 1939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0년부터 제호 위에 일장기 새겨, 모두 10건 확인
일제를 향한 조선일보의 충성은 1940년 1월 1일 지면에서 극에 달한다. 바로 조선일보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 놓고 인쇄한 것이다. 신문 제호 위에 일장기를 새겨 넣은 것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나 경성일보, 또는 일본 신문들이 하는 행태였다.
▲ 1940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놨다.
뉴스타파 조사 결과, 일제강점기 조선일보가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놓은 지면은 모두 10건으로 확인됐다. 새해 첫날은 물론 주요 기념일마다 제호 위에 일장을 새겨 넣었다.
1940년 1월 1일, 3일, 5일 그리고 우리의 개천절과 비슷한 일왕 기원절인 2월 11일, 일제 육군기념일인 3월 10일, 일왕 생일(천장절) 다음날인 4월 30일, 일제 해군기념일인 5월 27일, ‘지나사변(중일전쟁)’ 3주년인 7월 7일에 특별히 일장기를 새긴 것으로 나타났다.
▲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린 조선일보 지면. 왼쪽 위부터 1940년 1월 3일자, 1월 5일자, 2월 11일자, 3월 10일자, 3월 21일자, 4월 3일자, 4월 30일자, 5월 27일자, 7월 7일자.
뉴스타파는 일제가 조선의 젊은이를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던 시기에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어떤 보도행태를 보였는지 다음 편(3월 11일)에 보도한다.
뉴스타파는 조선일보 창간일인 3월 5일부터 동아일보 창간일인 4월 1일까지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의 정체를 알리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하고 이를 토대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개봉할 예정이다.
역사 대중화를 이끈 이이화 선생은 집필 활동만이 아니라 역사운동가로서 고구려사 보전 운동, 과거사 정리 운동, 친일청산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의 ‘역사 대중화’를 이끈 원로 역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이 18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철저한 고증 작업을 바탕으로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이를 통해 역사학의 높은 장벽을 허물어 ‘재야 사학계의 별’로 불렸다. 대학 중심의 ‘강단 사학’에 대비해 부른 말이지만, 그가 일군 학문적 업적은 역사학계를 비롯해 사회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6년 대구에서 주역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주역 팔괘에 따라 고른 ‘떠날 리(離)’에 돌림자 화(和)를 붙여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주역에서 ‘리’는 무언가를 녹여 새롭게 만드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이름자를 갖게된 그는 이름처럼 남다른 삶을 살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유명 역사학자가 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고, 부친이 학교를 보내지 않아 대둔산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사서(四書)를 배웠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가출해 각지를 돌며 고학을 하다 광주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중앙대 문예창작과의 전신)를 다녔다. 어려운 형편 탓에 대학을 중퇴한 그는 아이스케키·빈대약 장수, 술집 웨이터, 가정교사, 불교시보 기자 등 20여가지 직업을 거쳤다.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입사해 원고를 다듬고 수정하거나, 기사 색인 작업을 맡아보며 근현대사에 눈을 떴다. 그는 이 시절을 두고 ‘학사과정을 마쳤다’고 말했다.
그는 ‘허균과 개혁사상’,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같은 한국사 관련 글을 ‘창작과 비평’ 등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면서 30대 후반부터 필명을 얻는다. 역사 대중화를 위해 일반인 대상의 교양서를 써보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을 번역했고, 서울대 규장각에선 고전 해제를 쓰기도 했다. 고서의 가치를 밝히며 일종의 ‘박사과정’을 거친 셈이다.
고인은 계간지 ‘역사비평’을 펴내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당시 인권 변호사 박원순(현 서울시장)과 임헌영(현 민족문제연구소장), 서중석(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1986년 2월 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대중들에게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가 목적이었다. 그는 운영위원과 부소장을 맡아 근현대 민중운동사를 써내려간다.
고인은 역사를 케케묵은 옛이야기가 아닌 현실과 맞물린 오늘의 이야기로 인식했다. 다양한 책으로 한국사를 대중에게 알렸다. 대표작이 개인이 쓴 한국 통사로는 가장 분량이 많은 22권짜리 <한국사 이야기>(한길사)다. 한반도의 빙하기부터 1945년 해방까지 홀로 집필하는 전대미문의 작업이었다. 이 책은 무려 50만권이나 팔렸다. 그 외에도 <인물로 읽는 한국사>, <만화 한국사>, <주제로 보는 한국사>, <허균의 생각>,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을 발간했다.
그는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연구했다. 정치와 경제에 집중하는 문헌사와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생활사 간 경계도 뛰어넘고자 했다. 특히 50년 가까이 ‘동학농민전쟁’에 천착하며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사건을 드러내는데 힘썼다. 이전까지 한국사에 ‘아웃사이더’였던 의적 또는 동학세력들, 평민의병장이나 민중세력들의 활동을 재평가했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월성을 내세우는 민족주의 사관은 배격했다. 국정교과서 도입 등 역사 왜곡에 맞서고, 고령의 나이에도 ‘촛불 집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사회 참여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2011년 펴낸 자서전 <역사를 쓰다>(한겨레출판)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묵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근래 들어 과거사 청산 문제로 사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제고하고 민주 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사회로 가는 도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이이화 선생은 어릴 적부터 풍찬노숙하고 많은 고생을 거치면서 역사학에서 소신껏 연구해 일가를 이뤘다”면서 “야성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이자 행동인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고인은 단재학술상(2001년), 임창순 학술상(2006년)을 받았고, 2014년 원광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8월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도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희씨와 아들 응일씨, 딸 응소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1일 오전 10시. 장지는 파주동화경모공원이다.
지난 40년 동안 선생님과 함께 우리 민족사의 현장을 탐험하면서, 빛나는 우리 민족사를 책으로 펴낼 수 있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저 고단한 1980년대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역사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역사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우리들 가슴에 심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는 지혜였습니다.
1980년대에 진행된 선생님의 ‘역사강좌’를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은 힘찬 우리 민족사를 만났습니다. ‘한국근대민중운동사’를 통해 역사의 동력이 되는 민중과 민중 운동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역사 보는 눈을 활짝 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국토와 산하에서 펼쳐진 ‘역사기행’의 현장 강의를 통해 선생님은 온몸으로 온정신으로 민족사를 체험하게 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역사의 현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사 정신은 삶의 현장에서 체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에서, 그 민중의 함성을 들었습니다.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을 만났습니다. 김개남 장군의 집터에 ‘김개남 장군 생가터’라는 푯말을 선생님의 글씨로 세우기도 했지요. 지리산을 오르고,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들었습니다. 의병장 신돌석 장군과 의병들을 찾아 나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영덕의 농가에서 토론했지요. 아름다운 국토의 산하에서 펼친 우리들의 역사기행은 한판의 역사축제였습니다.
선생님은 당대의 사관이었습니다. 1994년부터 2004년 10년에 걸쳐 완성되는 <이이화·한국사 이야기>는 그 누구도 엄두도 내지 못할 경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을 한 출판인으로서 긍지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사 이야기>는 선생님의 저간의 연찬을 집대성 하는 혼신의 작업이었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신념의 소산이었습니다. 그 어떤 기득권과도 무관한 재야정신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제도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성취해낼 수 없는 역사정신의 실천이라고, 저는 책을 펴내면서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오늘의 역사 현실을 온몸으로 대응해내는, 역사의 현장을 걷는 역사가가 써낸 생동하는 역사이기에, ‘국민독본’으로 우뚝 서는 큰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늘 우리들과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선생님의 역사정신이 더 절실해지는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역사란 특정인이나 특별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니고,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국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역사정신·민족정신이 큰 이야기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에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아,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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