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연합뉴스] 한일시민단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명예회복 요구 성명

지역

[연합뉴스] 한일시민단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명예회복 요구 성명

admin | 금, 2021/09/03- 20:19

한일시민단체, 간토대지진 진상규명·명예회복 성명 발표 1일 오후 충남 천안시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임광순 ‘기억과 평화’ 이사가 한일 양국 정부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낭녹하고 있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대표 김종수)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학살 제98주기 추도 행사에서 한일 양국 정부에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 등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간토학살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발생한 규모 7.9의 간토대지진이 일본 수도권 일대를 강타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이 다수 살해된 사건이다. 특히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한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 경찰, 군인에 의해 6천661명(독립신문 기록)이 희생된 참사이기도 하다.

성명서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 사건의 책임 인정과 사과, 한국 정부의 진상규명·명예회복 조치와 국회의 특별법 제정, 한일 역사학계·교육계의 조선인 학살 사건 연구와 교육 등을 촉구했다.

이 성명에는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1923제노사이드연구소,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등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대학, 연구소, 종교계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임광순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이사는 이날 충남 천안시 동남구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는 “간토대지진은 자연재해였지만 뒤이은 피해는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며 “당시 일본 내무성은 전국 지자체에 ‘조선인 폭동’을 사실화하는 유언비어를 타전했고, 피해지역인 사이타마(埼玉)현 경찰서는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의 망동이 있으므로 급히 상당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전파해 치안 당국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에 불을 붙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1923년 이후 조선인 학살은 은폐되는 듯했으나 여러 연구자와 시민운동 덕분에 진상이 널리 알려졌고 2013년에는 한일 공동학술회의가 열려 진상규명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며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 정부는 당시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은 채 추도 메시지도 거부하고 있고 한국 정부와 국회도 진상규명과 피해복구에 눈을 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행사에는 다나카 마사타카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사무국장, 이유재 독일 튀빙겐대 교수, 조정현 1923재일시민연대 운영위원,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대표가 추도사를 했다.

배영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이재선 천도교 청년회 중앙본부 회장, 구와노 야스오추금 일본 닛코리회 대표, ‘엿장수 구학형’·’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의 기록 번역팀이 연대사를 발표했다.

김종수 대표는 “2년 앞으로 다가온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에 맞춰 진상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는 다양한 사업에 양국 시민단체가 함께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2021-09-01> 연합뉴스

☞기사원문: 한일시민단체,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진상·명예회복 요구 성명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선생님을 보내며

▲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이화 선생 빈소 ⓒ 민족문제연구소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지난 40년 동안 선생님과 함께 우리 민족사의 현장을 탐험하면서, 빛나는 우리 민족사를 책으로 펴낼 수 있어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저 고단한 1980년대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역사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역사 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우리들 가슴에 심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역사 이야기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는 지혜였습니다.

1980년대에 진행된 선생님의 ‘역사강좌’를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은 힘찬 우리 민족사를 만났습니다. ‘한국근대민중운동사’를 통해 역사의 동력이 되는 민중과 민중 운동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역사 보는 눈을 활짝 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국토와 산하에서 펼쳐진 ‘역사기행’의 현장 강의를 통해 선생님은 온몸으로 온정신으로 민족사를 체험하게 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역사의 현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사 정신은 삶의 현장에서 체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에서, 그 민중의 함성을 들었습니다.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을 만났습니다. 김개남 장군의 집터에 ‘김개남 장군 생가터’라는 푯말을 선생님의 글씨로 세우기도 했지요. 지리산을 오르고,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들었습니다. 의병장 신돌석 장군과 의병들을 찾아 나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영덕의 농가에서 토론했지요. 아름다운 국토의 산하에서 펼친 우리들의 역사기행은 한판의 역사축제였습니다.

선생님은 당대의 사관이었습니다. 1994년부터 2004년 10년에 걸쳐 완성되는 <이이화·한국사 이야기>는 그 누구도 엄두도 내지 못할 경이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이 책을 펴내게 된 것을 한 출판인으로서 긍지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사 이야기>는 선생님의 저간의 연찬을 집대성 하는 혼신의 작업이었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신념의 소산이었습니다. 그 어떤 기득권과도 무관한 재야정신이 아니었다면, 그 어떤 제도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성취해낼 수 없는 역사정신의 실천이라고, 저는 책을 펴내면서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오늘의 역사 현실을 온몸으로 대응해내는, 역사의 현장을 걷는 역사가가 써낸 생동하는 역사이기에, ‘국민독본’으로 우뚝 서는 큰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늘 우리들과 함께 계셨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선생님의 역사정신이 더 절실해지는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역사란 특정인이나 특별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니고,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국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역사정신·민족정신이 큰 이야기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에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아,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

덧붙이는 글 | 김언호 기자는 출판인·한길사 대표입니다.

<2020-03-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이화 선생님의 역사 정신, 우리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역사학계 큰 별이 졌다”…각계서 이이화 추모 잇따라

경향신문: 행동하는 양심, 이이화 선생을 떠나보내며…‘억강부약’의 삶 잘 간직하겠습니다

☞전주문화방송: 동학혁명 연구 큰 별 역사학자 이이화

일, 2020/03/22- 04:56
0
0

친일잔재 청산·도민 알 권리 충족 방침

▲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6대 김학응 충남도지사와 제 7대 김홍식 충남도지사 ⓒ 충남도 누리집 갈무리

친일행위가 뚜렷한 인물이 버젓이 역대 충남도지사로 소개되고 있다는 <오마이뉴스> 보도와 관련 충남도(도지사 양승조)가 해당 인물의 친일 행적을 기록해 게시하기로 했다.

충남도 관계자는 “친일잔재 청산과 도민 알 권리 충족을 위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2명의 역대 충남지사의 친일 행적을 기록해 게시하기로 했다”고 25일 밝혔다.

이어 “도 본청 대회의실에 걸린 역대 지사의 액자 아래에 동판으로 친일 행적을 기록해 게시하고, 홈페이지에도 역대 도지사의 약력과 친일 행적을 병기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오마이뉴스>는 지난달 17일, ‘역대 충남지사 중 친일행위가 뚜렷하거나 의혹 또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사람이 5명에 이른다’며 ‘철거 또는 친일 행적을 기록 해 알리는 등의 조치가 요구된다’고 보도했었다. (관련 기사: 역대 충남도지사 중 친일반민족행위자 ‘2명’)

5명 중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역대 충남도지사는 제6대 김학용과 제7대 김홍식이다. 김학응(金鶴應, 일본식 이름 金子薰, 1899.1.25~ ?,충북 괴산 생)은 1955년 충북도지사를 거쳐 1958년 충남도지사(7.29-1960.4.30)를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관리로 충북 보은군수, 제천군수,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또 충남지사 재임 중 3·15 부정선거의 충남 지역 책임자로 기소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뒤를 이은 김홍식(金弘植,1909~1974, 충남 아산 생) 또한 일제강점기 때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1934)와 행정과(1935)에 합격해 평남 양덕군수에 임명됐다. 이때 황민화 운동을 주도하며 친일잡지 <내선일체>를 발간했다. 또 내선일체실천사 평남도지사의 고문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군수로 일하며 내선융화를 적극적으로 주도, 친일반민족행위가 인정됐다. 충남도는 친일행위 의혹 또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역대 도지사는 이번 친일 행적 기록 대상에서 일단 제외하기로 했다.

충남도 관계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친일행위 의혹 또는 논란이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이후 도의회에서 ‘친일잔재청산조례’가 제정되면 이 조례에 의거, 의회와 협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충남도의회는 지난해 7월, ‘충남도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김영권 의원, 아산 1, 부위원장 이선영 의원, 비례)을 각각 선임하고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다른 지자체에 비해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 이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방역 등 다른 업무가 많아 집중하지 못했다”며 “이달 초 양 지사께서 방침을 정한 만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역대 충남지사의 친일 행적 기록과 게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2020-03-2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충남도 “역대 도지사 친일 행적 기록·게시하겠다”

목, 2020/03/26- 03:58
0
0

군함도 정보센터 개관… 진실 외면ㆍ산업화만 미화

일제 강점기 최대 800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군함도.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 정부가 이번엔 ‘나가사키 군함도’ 관련 전시관을 도쿄에 개관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부인했다. 최근 역사 왜곡을 심화시킨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내놓은 데 이어 한일 갈등의 불씨를 더 키운 것이다.

일본 언론들은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나가사키 군함도 등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소개하는 ‘산업유산 정보센터’가 도쿄시내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마련됐다고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군함도 원주민의 증언 동영상과 당시의 급여명세서 공개 등을 통해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한국의 주장과는 다른 진실을 전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 정보센터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함도에서 거주한 재일 조선인 2세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씨가 생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괴롭힘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모습 등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섬 주민 36명의 증언을 동영상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조선소에 동원됐던 대만 출신 노동자의 급여 봉투 등도 전시했다. 정보센터 운영 주체인 산업유산국민회의의 가토 고코(加藤康子)전무이사는 “1차 사료와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에서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학대당했다는 증언은 듣지 못했다”면서 “판단은 관람객들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보센터의 전시 내용은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에 약속했던 바를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23곳의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유네스코가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하자 조선인 등의 강제동원 사실을 알리고 피해자들을 기리는 정보센터 설치를 공언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군함도 등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3만3,400명이고,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도 각각 4,184명과 5,140명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외면한 채 자국의 산업화 과정만 과장되게 미화한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24일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억지 주장을 비롯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19종에 대한 검정 결과를 공개했다. 당시 외교부는 도미타 고지(富田浩司)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강력 항의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email protected]

<2020-03-31> 한국일보 

☞기사원문: 일본 또 역사 도발… “군함도 강제노역 없었다”

목, 2020/04/02- 06:29
0
0

사회유력인사로 징병 권유글 친일행적으로 인정, 박정희 때 받은 훈장 최근 박탈…군용기 건조 300원 헌납 등 친일행적서 일부 제외

2009년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하자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史觀(사관) 친일사전”을 통해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 과거 공산주의 단체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전력이 있고 대한민국 건국과 산업화에 이바지한 인물을 상처내기 위해 친일파 작업에 돌입했다며 인명사전 발표 배경을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등에 게재된 징병 권고문 등을 문제 삼아 김성수 전 부통령을 친일 명단에 포함했는데 당시 글들은 조선 사회의 지도적 인사들을 전쟁 동원에 앞세우기 위해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학생들도 ‘교장으로 있던 인촌이 학병에 나가라고 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고 했다.

▲ 2009년 11월9일 동아일보 사설

김성수가 만든 동아일보는 100년 전인 1920년 4월1일 민족지를 표방하며 출발했고,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한 손기정 선수 사진을 보도하며 일장기를 지운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 정간을 당하는 등 조선총독부 탄압을 감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사세를 확장한 조선일보와 차이를 보인 게 분명해 김성수와 방응모,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는 의미로 부통령직을 사퇴하거나 건국훈장을 받은 사실 등 김성수를 보통의 친일파의 행적과는 다르다는 의견이 힘을 얻는 면도 있다. 다만, 역사책 한쪽에 친일파라는 평가 자체를 지울 순 없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김성수의 증손자인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와 인촌기념회는 이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동아일보 측은 김성수가 징병을 권유한 글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망인(김성수) 관련 기사들(징병 독려 글 등)이 모두 명의가 도용됐거나 허위 조작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며 “망인이 3·1운동에 참여하고 동아일보사나 보성전문학교 등을 운영하며 민족문화의 보존과 유지·발전에 기여한 성과가 적지 않더라도 이 같은 사정과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친일 행적의 주도·적극성을 감쇄시킬 정도로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친일행위에서 제외한 활동은 김성수가 1941년 ‘황국정신 앙양(북돋움)’을 위해 만든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활동, 1937년 중일전쟁기에 라디오강좌와 강연회를 통해 시국인식을 철저히 할 것을 역설한 것, 군용기 건조비로 300원 헌납한 사실 등이다. 1943~44년 매일신보에 출정 군인 유족에 대한 원호사업을 철저히 시행하고 협력할 것을 역설한 부분도 친일활동에서 제외했다.

▲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왼쪽)와 이승만 전 대통령

미디어오늘은 판결 취지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 활동 중심으로 김성수 행적을 살펴봤다.

김성수는 1891년 10월11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14년 7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같은해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고,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고, 1936년 11월 ‘일장기 말소사건’ 여파로 취체역(주식회사 이사에 해당)에서 물러났다.

친일인명사전에선 김성수를 보성전문학교 교장과 동아일보 사장으로 소개했다.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약 3년간 교장으로 활동했고, 1937년 다시 교장 자리로 돌아왔다. 김성수는 1938년 7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해 이사를 맡았다. 1939년 4월엔 경성부 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았다.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도 겸임했다.

그는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하자 1943년 8월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격려문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인이 이제 황국신민이 됐다며 지난 500년간 문약했던 조선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같은해 11월6일 매일신보가 주최하는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서도 지원율이 저조한 이유를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이라고 했다.

▲ 친일인명사전에는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로 이 글을 자료사진으로 실었다. 김성수는 매일신보 1943년 8월5일 ‘선배의 부탁’이란 특집란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는 징병격려문을 기고했다. 보성전문학교장 김성수 명의로 자신의 사진을 함께 실었다. 사진=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같은해 11월7일 ‘매일신보’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란 글에서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여기서 의무란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로 살면서 받은 국가·사회·가정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다. 김성수는 학병에 지원하지 않아 ‘대동아건설’에 동참하지 못하면 일본인 즉 ‘내지’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달 20일 학병지원 마감일을 맞아 ‘경성일보’에 ‘학병 미지원자는 원칙대로 징용돼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고, 12월10일 매일신보에 한 사람도 주저없이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어가는”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권유했다. 또 같은달 17일 보성전문학교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세계무비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됐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있게 생활하라”고 훈시했다.

김성수는 해방 후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송진우(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독립운동가)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됐다. 같은해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 이듬해 2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이 됐고, 같은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을 맡았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6월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선출돼 이듬해 5월까지 일했고, 1955년 2월18일 세상을 떠났다.

1962년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승인을 거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동아일보 측이 반민규명위(정부)를 상대로 김성수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것을 취소하라는 소송에서 대법원이 2017년 4월 동아일보 측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판결을 반영해 지난 2018년 2월13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서훈을 박탈했다. 김재호 동아일보 대표와 인촌기념회는 서훈박탈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에 나섰지만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은 동아일보 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슬기 기자 [email protected]

<2020-04-01>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친일인명사전은 동아일보 김성수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관련기사 

☞미디어오늘: 친일인명사전,조선일보 방응모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목, 2020/04/02- 06:19
0
0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 [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신응균 묘지 아버지 따라 친일파가 된 아들, 대한민국은 ‘포병의 아버지’라 불렀다 친일파 신응균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가장 안쪽에 자리한 일본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 건너편에 위치한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에 위치해 있다. ⓒ 김종훈

1945년 4월부터 시작된 일본과 미국의 오키나와 전투는 치열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신응균 스스로도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해방 후 한참이 지나서야 “미군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라는 말을 듣고 미군에 투항한 뒤 조선으로 돌아왔다.

1946년 5월 신응균은 수년 만에 만난 부인에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했다. 당시 그의 부인은 훗날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가 된 노라노(NORA NOH)씨다.

“가까스로 살아나 산속에 숨어 지내며 게릴라전을 계속했소. 그러다 부상을 당해 어느 일본 여인에게 구조되었소. 그리고는 그 여인의 집에 은신하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았었소. 그런데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들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지 않겠소. 그 소문을 듣고 나는 용기를 냈소.” – <나의 선택 나의 패션> 중 일부 / 중앙일보. 2006.12.26.

▲ 전역 후 국방부차관에 임명된 신응균 ⓒ 국가기록원

신응균은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사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이다. 신응균이 태어날 때 신태영은 일본 나고야 3사단에서 복무 중이었다.

신응균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 53기로 입학한 후 스무 살인 1940년 2월 졸업했다. 이후 일본 육군과학학교 포병과, 육군중포병학교에서 신식 군사기술을 습득, 42년 12월에 대위로 진급한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신응균은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변신

1946년 3월,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신응균은 다른 친일파 출신 군인들과는 다소 다른 행보를 걸었다. 진명여고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1948년 7월, 제주 4.3 항쟁과 남한 단독정부 출범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다시 군으로 들어갔다.

항공이등병으로 입대해 보좌관으로 역할하며 국방법과 국군조직법 등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는 일은 고위직 업무였지만 직급은 이등병이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신응균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것을 반성하는 뜻으로 이등병으로 입대했다는 설도 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신응균은 이등병으로 입대한 지 한 달만인 48년 8월,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됐다.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다. 1949년 3월, 병기에 관한 모든 실무를 책임지는 특별 참모부서의 우두머리인 육군본부 병기감을 거쳐 호국군 간부학교 교장, 포병연대장, 육본 포병감 겸 포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땐 야전포병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야전포병사령관은 대한민국 국군 포병의 최고 책임자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은 신응균을 두고 ‘한국 포병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그는 2사단장, 육군관리부장을 거쳐 육군 중장에 올랐다. 48년 7월 이등병으로 입대한 지 만 7년도 안 돼 대한민국 육군 3성 장군이 된 것이다.

1959년 별 세 개를 단 장군으로 예편한 신응균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주 터키대사로 부임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1961년에는 국방부 차관을 거쳐 주 서독대사로 임명됐다. 1970년 박정희 정권에서 초대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에 임명됐으며 73년부터 82년까지 재향군인회 부회장을 지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한 신응균

▲ 1945년 6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오키나와 전투 상황 ⓒ 공훈전자사료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신응균이 일본군 장교로 오키나와 전투에 적극 참여한 사실’을 근거로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해 발표했다.

“신응균은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중포병학교에서 복무하던 중 전세 악화에 따라 오키나와에 파견됐다. 신응균은 독립 중포병 제100대대 중 일부를 직접 지휘하면서 종전까지 일본군의 오키나와 방어전에 직접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위원회가 신응균의 보고서에 직접 인용한 후지와라 아키라의 <일본군사사>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는) 적의 손에 함락되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은 천황제 이데올로기 전쟁관이 만든 비극”이었다. “3개월의 격전 끝에 오키나와 의용군을 포함한 약 10만의 수비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 과정에서 은신처와 식량을 빼앗긴 20만의 오키나와 현민 역시 전화의 희생양이 됐다.”

신응균 자신도 오키나와 전투 참여에 대해 <(일본 육사·해사)동기생사 정간보>에 기록을 남겼다.

“우리 대대는 1944년 6월 중포교에서 편성된 현역병 정예부대였다. 7월 중순 큐슈 북단에서 승선해 오키나와로 향했다. 미국 잠수함이 출몰하는 위험한 항로였지만 우군기의 계속된 호위로 비밀리에 무사히 나하에 상륙했다. 나는 선임 소대장이었기 때문에 대대 주력으로부터 떨어져 89식 150mm 캐논포 2문의 소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도 북부를 맡고 있는 독립혼성 제44여단에 배속됐다.”

▲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평화의 비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 제주다크투어

신응균이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 오키나와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끌려와 비행장 구축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 ‘군부(군대에 소속된 잡역부)’라는 이름을 달고 강제동원됐지만 정확한 규모나 피해 상황은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에는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면서 “총알받이로 내몰린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온 한국인‧대만인 등 식민지 주민, 군국주의에 세뇌당해 스스로를 소모전에 바친 어린 병사들이 오키니와 전쟁의 희생자”라고 기술되어 있다.

90년대 들어 오키나와 남부에 위치한 평화공원 안에 ‘평화의 비’가 세워졌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24만여 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졌다. 이 중에는 한국인 364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82명, 대만인 34명 등의 이름도 포함됐다.

박정희 건너편의 신응균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에 신응균의 묘가 있다. ⓒ 김종훈

1996년, 신응균은 일흔 다섯 나이에 사망한 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1묘역에 묻혔다. 김백일,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과 마찬가지로 국립묘지법 제5조 1항 마항목 “장성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이라는 게 근거다.

두 마리 호랑이 석상이 지키고 있는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이 신응균의 묘다. 그의 묘 건너편에는 신응균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4기수 후배인 박정희 대통령 묘소가 있다.

그의 묘 하단에는 “조국의 국방, 외교, 과학기술분야는 물론 로타리인으로서 초아의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부끄럼 없는 소신으로 다방면에 업적을 남겼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신응균의 묘는 2009년 그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된 이후에도 그대로다. 현행 상훈법 제8조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 신응균 (1921~1996) – 일제강점기엔 일본 군인, 해방 후엔 대한민국 포병의 아버지? 일본 육사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으로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1940년 2월 스무살 나이에 일본 육사 53기를 졸업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는 “신응균은 독립 중포병 제100대대 중 일부를 직접 지휘하면서 종전까지 일본군의 오키나와 방어전에 직접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응균이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해 활약했을 당시?오키나와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끌려와 비행장 구축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해방 후엔 미군에 투항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육군본부 병기감, 포병연대장을 거쳤다. 한국전쟁 땐 야전포병사령관으로 활동, 대한민국 국군은 지금도 그를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 부른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2020-03-3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대한민국 포병의 아버지? 그는 일제에 충성한 일본군 장교였다. 신용균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친일 행적만 22페이지, 그는 어떻게 현충원에 묻혔나 김백일편

목, 2020/04/02- 06:48
0
0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 번역 출간

(서울 = 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 살아있는 사람을 얼리거나 세균을 주입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지켜보고 산 채로 해부하는 만행을 저지른 ‘731부대’의 이름은 한국에서도 웬만큼 익숙한 편이다. 그러나 인터넷 블로그나 삼류 저작물, SNS를 통해 나도는 정보는 거짓이거나 부풀려진 것이 많다. 생체 해부 사진이라거나 한국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생체 실험의 희생이 됐다는 이야기 등이 그렇다. 큰 틀에서 이 부대의 존재와 역할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히 입증된 만큼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근거가 없는 정보로 이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지를 강조하기보다는 세부적인 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 더 긴요한 작업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본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단체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15년 전쟁과 일본의 의학의료연구회’라는 모임이다. ’15년 전쟁’이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을 거쳐 1945년 일제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15년을 하나의 연속된 전쟁이라고 보는 개념이다. 이 모임은 의학계·의료계의 전쟁 책임에 대해 자신의 문제로 직시하고 일본의 의학과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발휘하자”는 취지로 2000년 결성된 이래 매년 정례회와 회지 발행을 통해 15년 전쟁과 관련된 사실 규명 작업을 해오고 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731부대'(건강미디어협동조합·원제 NO MORE 731)는 주요 탐구 대상 가운데 하나인 731부대에 관해 자료를 찾아 분석하고 관련자들로부터 증언을 듣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과 동문이며 그와 직접 대면하기도 했던 원로 의학자를 비롯한 의대 교수, 의사들과 731부대의 최말단에서 손발의 역할을 한 소년대원, 중국인 피해자, 언론인, 연구원 등의 증언과 조사 결과 등을 담았다.

731부대 보일러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가해자라고 분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시노즈카 요시오(篠塚良雄)는 실업학교 재학 당시인 1939년 소년대원으로 지원해 당시 만주국 하얼빈(哈爾濱) 외곽 핑팡(平房)의 731부대에 배치된 후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한다. 그는 세균을 대량 생산할 때 쓰는 균주(菌株)를 운반하는 것과 같은 허드렛일을 맡았다. 지위상 고급 정보에 접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증언한 내용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과 일치한다. 1939년 일본과 소련의 노몬한 전투 때 세균을 무기로 사용했다거나 1940년 페스트균 양성을 위한 벼룩을 운반했는데 그것이 닝보(寧波) 등지에서 중국인들에게 공중투하된 것 같다는 것과 같은 증언이다. 그는 생체실험과 생체해부에도 참여했다. “처음 본 희생자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그는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점차 익숙해졌고 별다른 느낌을 갖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731부대의 사체 소각로 – 731 부대에는 이 같은 사체 소각로가 3개 있었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세균전 피해자들의 증언도 나온다. 대개 어린 나이였던 증인들은 중국 화중(華中) 지역에 투하된 페스트균 폭탄으로 가족들이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전염 우려로 희생자들의 시신은 제대로 된 장례도 없이 버려졌고 남은 가족들은 강물 위에 띄운 작은 배 등에 격리돼야 했다. 731부대의 페스트 세균전은 일본 법원이 전후 제기된 소송에서 인정한 바 있다. 도쿄지방법원은 2002년 8월 중국인 피해자 180명이 낸 소송판결문에서 “731부대는 1940~1942년 페스트균을 감염시킨 벼룩을 상공에서 살포하거나 콜레라균을 우물이나 음식물에 넣는 등 방법으로 세균전을 실시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일본 법원은 사실관계는 인정하면서도 배상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여러 사정을 전제로 고차원의 재량에 따라 결정해야 할 문제”라면서 기각했다.

책은 이밖에 생체실험을 간접 입증하는 731부대 참여자의 논문, 세균 및 독가스 실험시설과 세균 무기 연구 및 생산시설 등을 갖춘 731부대 터 현장 조사 자료, 도쿄 전범재판 기록과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 측 보고서와 같은 여러 자료를 분석한다. 그러나 대부분 단편적이고 간접적인 자료들이며 731부대의 만행의 구체적인 전말과 최종 책임자를 가려줄 일목요연한 증거나 고위급의 자료는 없다. ’15년 전쟁’ 모임을 비롯해 731부대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을 애태우는 것은 전후 미국과 일본의 야합으로 진상이 은폐됐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미국과 일본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세상에 드러날 자료들이 남아 있다.

미국은 전쟁범죄로 고발해야 할 731부대 관계자를 ‘냉전’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그 죄를 ‘면책’했고 그들이 얻어낸 세균전 등에 관한 노하우를 끌어내기 위해 731부대의 모든 것을 은폐했다. 미국 육군의 의학연구 관계자는 731부대의 연구 자료에 관해 “그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와 여러 해의 연구를 통해 얻은 성과이다. 이러한 정보는 인체실험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우리 실험실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 데이터를 입수하기 위해 든 비용은 25만엔이며 실제 연구를 하는 데 드는 비용과 비교하면 아주 소액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는 독일 전범재판에서 생체실험 등에 참여했던 의사 전범 20명이 기소돼 7명이 사형을 선고받는 등 무겁게 처벌된 것과 비교된다. 심지어 소련조차 전쟁 후 만주를 점령한 뒤 731부대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전모를 거의 파악했고 100명이 넘는 관계자들 가운데 12명을 기소했다. 소련은 조사 내용을 미군 측에도 넘겼으나 미국은 반인도 범죄를 처벌하는 대신 731부대의 연구 성과를 넘겨받고 일본을 냉전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기 위해 용인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전범 처벌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미국 역시 731부대에 관해 상세히 조사할 필요성은 느꼈을 것이고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지난 1989년 아사히(朝日) 신문은 “미국의 육군기록관리부장이 731부대에서 입수한 자료를 박스에 넣어 일본 정부에 반환했다”고 보도했다. 이 자료의 행방에 관한 일본 의원의 질의에 일본 정부는 “1958년 미국이 압수한 구 육군 자료를 반환받아 현재 약 4만건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나 세균전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고 발뺌했다.

’15년 전쟁’ 모임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731부대 관계 자료의 전면 공개’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정부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라며 거부해 오고 있다. 일본 의학계의 대표단체인 일본의학회도 진실 규명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15년 전쟁’ 모임 등이 정기 총회나 심포지엄 등을 통해 731부대 문제를 비롯한 과거의 잘못을 직시하는 주제를 다룰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의학회는 응하지 않고 있다.

한일 통·번역가 하세가와 사오리 씨와 함께 책을 공동 번역한 최규진 씨는 역자 후기에서 “731부대를 ‘광기’나 ‘악마’로 치부하는 것으로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없다. 더욱 냉정하게 그 너머에 있는 제국주의의 민낯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몰고 간 사람들과 그것에 편승한 사람들, 그로 인해 짓밟힌 사람들이 같지 않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731부대의 피해는 주로 중국과 중국인에 집중됐지만, 우리 피해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 여러 자료로 입증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양심 세력과 연대하고 진실 규명에 힘을 보태야 하는 이유다.

408쪽. 2만2천원.

[email protected]

<2020-04-02> 연합뉴스 

☞기사원문: 미·일 야합으로 75년간 은폐된 731부대의 진실

금, 2020/04/03- 04:27
0
0

문명교육재단의 교사 징계 철회 촉구 목소리 확산

문명교육재단이 국정 한국사 교과서 시범학교 반대 교사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강행하면서 적반하장식 징계 시도 철회를 촉구하는 교육계의 요구가 확산되고 있다.

문명교육재단은 2일 2017년 당시 문명고 국정 한국사 교과서 시범학교 지정에 반대한 교사 3명에 대한 징계위원회(징계위)를 연다. 이날 열리는 징계위는 문명교육재단이 지난 2월 징계의결요구서를 보낸 5명의 교사 가운데 현재 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교사 3명에 대한 것으로 교사 2명은 중징계, 나머지 1명은 경징계의결요구를 받은 상태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국정화저지넷)는 징계위가 열리는 2일 성명을 내고 시대착오적 징계 시도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국정화저지넷은 “위법한 국정 교과서 연구학교 지정으로 학생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게 당시 법원의 분명한 판결이었다.”면서 “교육자적 양심에 따라 국정교과서 연구학교 운영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반대 운동에 동참한 교사들에 대한 징계 요구는 부적절하며 시대착오적”이라고 강조했다.

2018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당시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위법·부당한 행위를 한 공무원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고, 17명은 검찰에 수사 의뢰하였지만 이들은 지금까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실무를 담당했던 중하위직 공무원들은 상급자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교육부에 남아있다. 경북교육청과 문명교육재단 역시 연구학교 지정 관련 교육부와 위법·부당한 정책을 교사들에게 강요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국정화저지넷은 이 같은 상황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양심 교사에 대한 징계 시도 철회 △경북도교육청의 행정지도 △문명교육재단에 대한 교육부의 지휘 감독권 행사 등을 촉구했다.

▲ 경북교육연대는 징계위가 열리는 2일 문명교육재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당징계 시도 철회를 촉구했다 © 경북교육연대 제공

전교조 경북지부 등 경북지역 교육사회단체로 구성된 경북교육연대는 징계위가 열리는 2일 경북 경산 문명고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당한 징계 의결을 즉각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경북교육연대는 “국정 한국사 교과서 연구학교는 잘못된 정책이라는 정부 사과와 사법적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강행했던 문명교육재단이나 학교장은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난 3년을 보내다가 징계시효 만료가 다가오자 해당 교사들에게 징계를 요구했다.”는 말로 적반하장 식 징계 시도 철회를 촉구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도 지난달 30일 성명을 내고 부당징계의결 철회를 촉구했다. 전국 역사교사 1034명이 서명한 항의서도 문명교육재단에 팩스로 전송했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은 “국정 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최종본에서도 발견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의 오류였고 수많은 시민, 역사 연구가와 교사들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부정하고 오류로 가득 찬 국정 역사 교과서를 거부하였다. 연구학교 지정을 막고자 노력한 것은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의 의무이자 권리 행사였다.”면서 “학생, 학부모, 교사 3주체가 함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공간인 학교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돌리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나아가 “학교는 설립 주체에 상관없이 사회의 공공재로 민주시민의 자질을 기르는 배움터의 역할에 충실해야한다.”면서 문명교육재단의 징계 철회와 사립학교 재단의 부당한 권리 행사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을 촉구했다.

전교조는 지난 1일 전국 2282명의 교사들이 참여한 부당징계 철회 촉구 서한을 문명교육재단에 팩스로 제출했다. 재단이 징계 의결을 강행한다면 오는 6일부터 부당징계 철회 촉구 탄원서 제출 투쟁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은 문명교육재단 교사들에 대한 징계 철회를 촉구하는 국민청원(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Temp/pMTD7t)을 진행한다.

강성란 기자

<2020-04-02>교육희망 

☞기사원문: 위법한 한국사 국정화 연구학교 막은 것이 징계사유? 

※관련기사 

☞뉴스민: 경산 문명고, 3년 전 국정교과서 반대 교사 5명 징계 추진 

☞교육희망: “교육부도 국정교과서 반대 교사 징계 취소”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크워크: [보도자료] 문명교육재단의 양심적인 교사 징계 움직임, 참으로 개탄스럽다.

금, 2020/04/03- 04:37
0
0

지난달 31일 도쿄 신주쿠 정부 청사에서 개관식
“조선인 노동자 차별 없었다” 증언 영상 전시돼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신주쿠(新宿)구 소재 총무성 제2청사 한쪽에 개관한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를 비롯해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의 산업시설을 표시하는 지도가 전시돼 있다. 산업유산국민회의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등의 영향을 고려해 당분간 센터의 일반 공개를 보류한다고 밝혔다. 도쿄=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의 상징 ‘군함도’의 역사를 왜곡하는 또 하나의 시설이 일본 도쿄 한복판에 세워졌다. 2015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당시엔 강제징용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겠다고 약속했던 일본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린 사이 이 같은 전시관을 슬그머니 열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3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같은 소식을 알리며 “그야말로 개관 시기도 기가 막히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일본정부는 지난달 31일 도쿄 신주쿠구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서 산업유산정보센터 개관식을 열었다. 전시관엔 일본 근대 산업시설 자료가 전시됐지만, 군함도의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한 언급은 빠졌다. 오히려 군함도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주위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섬 주민들의 증언 자료 등을 소개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해당 정보센터의 개관식에는 관계자들만 참석했고, 일반 공개는 당분간 허용되지 않는다. 서 교수는 이를 두고 “전 세계인들이 코로나 사태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딱 ‘도둑장가’를 가는 격”이라며 “정말이지 일본 아베 정권은 꼼수의 대마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미쓰비시 석탄광업의 주력 탄광이었던 하시마섬. 군함을 닮았다고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나가사키=홍인기기자

공식 지명은 ‘하시마’인 군함도는 나가사키항으로부터 남서쪽 18㎞ 해상에 있는 섬으로 모습이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라는 별칭이 붙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2017년 자료에 따르면 군함도 등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은 약 3만 3,400명에 달한다.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 근대산업시설 23곳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네스코로부터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권고를 받았다. 일본은 이에 조선인 등이 강제로 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서 교수는 “이런 전시 내용은 일본 정부가 계인들 앞에서 한 약속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이라면서 “조만간 유네스코 측에 이러한 역사왜곡 현장을 제대로 알려줄 것”이라고도 전했다.

전혼잎 기자 [email protected]

<2020-04-03> 한국일보 

☞기사원문: 日 코로나 틈타 ‘군함도’ 역사왜곡 전시관 개관… 서경덕 “꼼수 대마왕”

토, 2020/04/04- 00:08
0
0

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학연구회 엮음|128×205×10 mm|199쪽 10,000원|ISBN 978-89-93741-32-2 03810 | 2020.3.20

■ 시집 소개

45명의 독립운동가를 45명의 시인들이 기린 『겨레의 큰 별들』이 <독립운동가 기림 시선 2>로 출간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에서 지난해의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두 번째로 간행한 시집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고통을 겪을 때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과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잔재 청산과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데 큰 거울이 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기림 시선은 계속 간행될 예정이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일본의 강제 침탈과 외세에 의한 한반도 남북 분할, 이후 지난 70년 동안 그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데 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남북전쟁의 비극을 겪고 타의에 의한 한반도 분할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독립을 쟁취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내부의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 정치적인 부분은 물론 문화, 사고의 영역에서 여전히 일제강점기 시절의 흔적들이 잔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가운데 문화, 특히 문학 영역에서 마저 그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찬양하며 일본에 부역한 민족 반역자이면서 친일문인인 이들을 기리는 문학상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문학이 여전히 식민지 지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민족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과 우국지사들을 기리는 우리의 작업이 중요한 까닭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될 것이다.

―편집위원회

■ 발문 중에서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 뛸 듯이 기뻐한 사람들이 ‘민족반역자’들이었다는 것을 알면 놀랄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것은 진짜이다. 1965년 6월 22일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맺어는 것을 보고 놀라고 성난 임종국(林鐘國)선생이 그 한 해 뒤 펴낸 ‘친일문학론’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왜(倭)앞잡이 또는 심부름꾼이 되어 같은 겨레를 괴롭혔던 인숭무레기들을 ‘민족반역자’ 또는 ‘부왜반역자’라고 불렀지 ‘친일파’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니 땅 밑으로 스며들어 납죽 엎드린 채 준엄한 심판을 기다리던 ‘민족반역자’들 모습이 눈에 보인다. ‘민족반역자’ 또는 ‘부왜반역자’라고 불도장 찍히는 것과 ‘친일파’ 또는 ‘친일문인’ 소리 듣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저마다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민족반역자들’한테 그리하여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은 구세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친일’이라는 그 말이 구세주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치룽구니들이 하는 말이다.

이웃나라 “일본과 친하게 지내자는 ‘친일파’가 왜 나쁘냐?”

‘이름’ 이야기를 지질펀펀 늘어놓는 데는 까닭이 있으니 공자님 말씀이다. 정권을 잡게 되면 가장 먼저 무슨 일부터 하시겠느냐고 여쭈었을 때였다고 한다.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부터 하겠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나 피어린 민족사를 아파하는 이들은 이제도 ‘일본’이라고 하지 않고 ‘왜국’이라 하고, ‘일본인’이라고 하지 않고 ‘왜놈’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라는 날벼락을 맞아 산천과 백성이 짓이겨진 다음부터 디엔에이로 굳어진 것이니, ‘왜노(倭奴)’를 힘주어 말하면 ‘왜놈’이 된다.

우리 겨레가 겪고 있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을 줄 밑 걷어보면 만나게 되는 슬픈 역사가 있으니, ‘갑오왜란’이다. 아니, ‘강화왜란’이다. ‘일제침략 36년’이 아니라 ‘왜제강점 143년’인 것이다. 같은 이치로 ‘미제침탈 74년’이 아니라 1866년 7월 제너럴셔먼호 침략부터 보아 ‘미제강점 153년’이 될 것이다.

“문장이기위주(文章而氣爲主)요 법차(法次)니, 시자언지야(詩者言志也)라. (문장은 씩씩한 기상을 주장삼고 수법은 다음으로 치니, 시는 사상의 드러냄인 까닭인저.)”

어머니 누나와 세 식구가 서울로 부자리를 옮기려던 1964년 찔레꽃머리였다. 큰절을 저쑵고 나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시었다.

“이롭지 뭇헌 책은 읽지를 말구 쓸모웂넌 글은 짓지를 말거라”.

서둘러 방을 나서는데 시나브로 떨려나오는 할아버지 말씀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른바 역사를 올바르게 읽어낼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사람(史覽)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니-

“모름지기 사람이 되어야 허너니라.”

-김성동(소설가)

■ 목차

가네코 후미코_유승도ㅣ강상호_원종태ㅣ강우규_윤석홍ㅣ곽낙원_김혜영ㅣ김 구_차옥혜ㅣ김알렉산드라_ 김미승 ㅣ김창숙_배창환ㅣ김 철_최기종ㅣ나석주_ 정소슬ㅣ민영환 _ 이영숙ㅣ박상진_김태수ㅣ박 열_김 림ㅣ박은식_ 김은정ㅣ박자혜 _ 최종천ㅣ박희광_김윤현ㅣ서재필_임시현ㅣ송몽규_김채운ㅣ신규식 _ 윤일균ㅣ신석구_김학성ㅣ심 훈_정진남ㅣ안창남_김 선 ㅣ양한묵 _ 김준태ㅣ유관순_유현아ㅣ유일한_김종숙ㅣ윤희순_정진경ㅣ이경채 _ 김정원 ㅣ이동녕_여국현ㅣ이범석_김연종ㅣ이은숙_김자흔ㅣ이화림 _ 최기순ㅣ임용우_임종철ㅣ장준하_김황흠ㅣ정율성_김 완ㅣ정칠성_ 오미옥ㅣ조만식_박관서ㅣ조명희_성향숙ㅣ조봉암_채상근ㅣ차리석_ 조호진ㅣ최양옥_임영석ㅣ최용덕_주영국ㅣ최정숙_허영선ㅣ최현배_ 이주희ㅣ한백흥_김경훈ㅣ한용운_정일관ㅣ홍범식_박원희ㅣ

토, 2020/04/04- 08:32
2
0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낙준 묘지 민족을 붙들고 살리기 위해 ‘친일’ 을 택했다는 사람, 백낙준 친일파 백낙준의 묘는 국가유공자1묘역에 자리해 있다. 유공자1묘역은 이승만 대통령 묘소 바로 뒤쪽으로 친일파 김백일과 신응균이 잠든 장군1묘역으로 가는 길목이다. ⓒ 김종훈

국립현충원에 잠든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군인이 아닌 인물이 하나 있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자리한 그의 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전쟁을 앞뒤에 두고 나고 자라고 일하는 동안 민족을 붙들고 살리는 방도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일생 사업으로 교육에 종사하여 왔다.”

▲ 국가공인 친일파 백낙준 ⓒ 한국학중앙연구소

일제강점기 백낙준의 삶은 묘비에 새겨진 말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은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자이자 언론인, 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설교, 사설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특히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과 이사로 활동하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5월 20일 백낙준이 직접 작성해 <기독교신문>에 실은 설교문 ‘내 아버지의 집’ 중 일부다.

“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자기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다면 그 신하가 싸울 것이라 했다.”

백낙준이 직접 편집과 설교, 사설을 써가며 자신의 친일 행각을 알린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조선기독교협회에 의해 창간됐다. 4월 29일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로, <기독교신문> 창간 1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날이기도 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백낙준은 1942년 ‘종교보국’을 사명으로 창간된 기독교 신교 각파의 합동기관지 <기독교신문> 이사와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황민화 정책과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지면을 편집하고 직접 설교와 사설을 썼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석하고 전쟁협력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적극 협력했다.”

▲ 1943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항공기 관련 기사 ⓒ 공훈전자사료관
▲ 1941년 12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애국기헌납운동’ 관련 기사. 백낙준은 지대한 활동을 보였다. ⓒ 공훈전자사료관

백낙준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헌신적으로 부역하기 위해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애국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42년 9월 23일 <기독교신문>에는 이 단체에서 구입해 일제에 헌납한 해군전투기 ‘조선장로호’ 명명식 장면이 기사로 실렸다. 이 자리에는 목사 백낙준도 참석했다.

“남으로 북으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하고 있는 우리 육해공군의 분투와 노고에 보답해, 총후 37만 장로교도 일동은 우리 무적해군에 해군기 1대와 병기 2정을 헌납한 사실을 누차 보도했다. 이 보국호(조선장로호)의 명명식은 ‘대공의 제전’에 전개된 항공일의 의도 깊은 9월 12일 오후 1시부터 경성 함태영 목사, 백낙준 목수 외 80여 명 장로회 대표들이 열석하고, 군관민 내빈 5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성운동장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독립운동가 서훈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 1951. 부산, 한 초등학교 어린이 대표가 교과서 용지를 원조해준 미국의 원조기관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오른쪽 끝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 ⓒ NARA

해방 후 한 달 뒤인 1945년 9월 백낙준은 큰 어려움 없이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한다. 이어 10월부터는 경성대학(서울대학 전신)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부터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됐다.

1950년 5월부터 문교부 장관을 맡아 1952년 10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국민사상지도원 원장과 연희대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1953년에 다시 연희대학교 총장으로 복귀, 1957년 1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85년 1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을 지냈다.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가 열리자 박정희 정권은 백낙준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 이병도,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 출신 홍종인 등도 백낙준과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박정희 정권 때 활동했다.

2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친일행적

▲ 1943년 12월 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백낙준 관련 기사 ⓒ 매일신보 캡처본 재촬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백낙준의 친일행적은 A4용지 24장에 이른다.

1940년대 교육과 문화, 언론, 종교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백낙준의 친일 족적이 그만큼 방대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백낙준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평가했다.

“백낙준은 평남 신성학교와 중국 천진신학서원을 거쳐 미국 파크대학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연희전문교수로 재직하며 문과과장을 지냈다. 194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 장로회 포교자로 허가를 받은 뒤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

백낙준은 ‘국가사회 유공자’라는 이유로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2009년 정부가 ‘친일파’로 결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다. 현행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됐다.

▲ 백낙준 (1896~1985) –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이 된 친일파, 연세대 총장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 직접 창간한 <기독교신문>에 실은 글이다.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창간했다. 10년 전,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성공시킨 날이기도 하다. 해방 후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57년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68년엔 친일파 홍종인 등과 함께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립현충원 11명의 국가공인 친일파 중 유일하게 군인이 아닌 인물이다. 그의 친일행적 기록은 A4용지 24쪽에 달한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유공자 심사를 친일파가? 연세대 학생들은 알까 백낙준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월, 2020/04/06- 02:25
5
0

저자: 내일을여는역사재단·민족문제연구소ㅣ출판사: 민연ㅣ값 15,000원ㅣ303pageㅣ발행일: 2020.03.01.ㅣISSN 1228-8802ㅣ9771228880200-01

바로가기 >>> [도서구매]  ㅣㅣ   [정기구독안내]

차례

04 여는 글
신종 감염병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 김용흠

11 쟁점으로 보는 역사
1910년대 식민통치 어떻게 볼 것인가 / 이형식 

25 지금 우리는?
미국의 이익을 재구성하자 / 정욱식
개성공단, 이제는 열자! / 김진향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교훈과 과제 / 이정윤

67 인물로 보는 역사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쯔지(布施辰治)와 조선 / 이규수
자유와 평화를 꿈꾼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 변은진
일본의 한국사학자 가지무라 히데끼(梶村秀樹)의 ‘따뜻한 역사학’/ 이홍락
[반독재민주화열전] 김병곤, 겨울공화국의 전설 / 김현서
[코민테른인명사전]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3) 조동호, 김시현, 여운형, 홍범도 / 임경석

143 사실 체크
‘만주(滿洲)’라는 이름의 유래와 뜻의 전환 / 이명종

155 내일을 여는 책
식민지 조선 역사학의 방향 전환,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 / 조형열

167 사료의 재발견
『경국대전』은 어떤 책인가? / 김용흠

197 예인열전
조선산수의 화종(畵宗) 겸재 정선 – 정선, 실경산수화의 동국제일명가 3 작품사(하) / 최열

225 역사와 공간
화성 융릉과 건릉 일대에서 수원의 옛 흔적을 찾다 / 정요근
문화와 서사의 힘 – 「춘향전」의 모태, 조선 전기 남원도호부를 찾아서 / 김창회 

275 북한의 이해
간추린 북한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 / 강호제
북한 인권 현황과 대응 :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 장은하

<여는 글>

신종 신종 감염병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감염병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병증 자체도 문제지만 빠른 전파력으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가로막고 있어 더욱 심각한 위기를 낳고 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저성장의 늪에 빠져서 곡예 하듯 아슬아슬하게 연명해 온 자본주의 체제가 국가간 대륙간 교역이 단절되면서 대공황의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세계에서 무역의존도가 가장 높은 우리나라 경제 역시 파국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양상을 보여주었다. 국가가 신속하게 대응 조치를 마련하여 실천에 옮겼고, 국민들은 여기에 적극 호응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헌신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조차도 경이롭게 여기고 주목할 정도이다.

우리들로서는 생존을 위해 각자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세계의 주목을 받으니 좀 얼떨떨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국가 또는 공동체에 대해 우리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집단 무의식이 발현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어제 오늘 사이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단련되어 나온 것이었다.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생존을 향한 집단 무의식은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왜곡되고 부정되기도 하였지만 면면하게 이어져왔다. 『내일을 여는 역사』는 창간 이래 그러한 역사 전통에 주목하고, 그것이 긍정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규명하는 작업에 매진해왔는데, 그것은 이번호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우선 미국에 주목하였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남북간, 북미간 정상회담이 여러 차례 열렸지만 평화협정은 요원하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냉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간의 과정을 통해서 남북간 교류와 협력을 미국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정욱식은 이러한 현실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이익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사실 남한과 북한이 경제적으로 교류 협력하게 되면 그 경제적 시너지 효과가 엄청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누누이 지적해 온 일이다. 남북교류는 당연히 만주와 시베리아로까지 확장되어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차원의 경제 협력을 활성화시켜서 침체 일로에 있는 세계 자본주의가 다시 불타오를 수 있는 폭발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세계 자본주의가 다시 활성화되어 발전하면 미국도 경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어 장기적으로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워싱턴 정가를 지배하고 있는 네오콘 등 군산복합체 세력이 이러한 새로운 정세 변화에는 눈을 감고 북한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에 사로잡혀서 남북 교류를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미국 자신의 국익에도 맞지 않는다고 이 글은 설파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김진향은 개성공단을 즉시 열자고 주장한다. 개성공단이야말로 평화경제의 상징인데 역시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으로 인해 다시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개성공단을 재가동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므로 한국 정부가 나서서 미국과 국제사회를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 단계로서 정부가 개성공단 재개를 선언하라고 요구하면서, 이것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위반한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후유증도 심각해 보인다. 사고 발생 이후 8년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그 후유증을 투명하고 분명하게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아베 정권은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비용 때문이다. 만약 방사능 오염수가 방류된다면 한국과 중국은 물론 태평양 연안 국가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이정윤은 오염수 저장 비용이 한국과 중국의 협력을 통해서 해외 원조로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동북 아시아 지역에 원전이 밀집되어 있어서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동북 아시아 3국에 미국 등 태평양 연안국가가 추가된 ‘동북아시아 원자력 안전 감시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이 긴밀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우리만 열심히 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했던 19세기 말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공동체를 신뢰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자세로 국가의 보다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을 앞장서서 유도해내야 할 것인데, 국제 원자력 안전 감시기구의 창설은 그러한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대응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북한에 대한 관심 역시 이번호에서도 이어진다. 강호제는 북한의 과학기술정책 70년의 역사를 정리하였고, 장은하는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북한의 인권 현황을 점검하였다. 분단으로 인한 정보 부족으로 북한에 대한 냉전적 편견을 고집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 방향과 일치되지 않으므로 북한의 현실을 사실에 입각하여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현실 인식의 산물이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우리 잡지의 간판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특히 일본인 가운데 우리에게 헌신했던 인물들을 발굴하여 소개한다.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일본 국가와 민족이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한일 노동 연대의 선구자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그리고 평생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 역사 연구에 헌신한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등이 그들이다.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일본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보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탈리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에 대한 소개도 계속되어, 이번호에서는 조동호, 김시현, 여운형, 홍범도 등을 다룬다. 공동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이들에 대해 공산주의자라는 굴레를 씌워서 매도하는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반독재민주화열전’에서는 1970년대 이후 유신체제와 그에 이은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다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김병곤의 불꽃같은 삶을 만날 수 있다.

역사 인식과 관련해서는 이형식이 1910년대 일본 제국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하였고, 이명종은 우리가 흔히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지명의 유래와 의미를 천착하였다. 우리가 가진 통설적 이해의 허점을 교정해보려는 시도이다.

‘내일을 여는 책’으로서 조형렬은 백남운의 일련의 저술을 소개하였다. 필자는 백남운이 일제시대에 보편사의 의미를 강조하며 민족주의 역사학을 비판하였지만 ‘민족’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길을 모색한 내재적 발전론의 선구자로 이해하였다.

‘사료의 재발견’에서 김용흠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기 법전 편찬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 역사가 국가의 연속적 발전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법전 편찬이 지배층의 계급적 착취를 위한 도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자인 민의 성장을 반영한 측면도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려 하였다.

‘예인열전’에서 최열은 이번호로 겸재 정선에 대한 소개를 마친다. 필자는 정선이 조선 회화사에 혁명을 일으켜서 동방 산수의 화종(華宗)이 되었으며, 정선양식을 스스로 끝낸 화가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선의 생애에 맞추어 제시한 그림에 대한 해설을 통해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과 함께 조선화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직접 답사하여 소개하는 ‘역사와 공간’에서는 이번에 수원과 남원 주변을 다녀왔다. 정요근이 수원 주변을 답사한 이유는 그 지역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어 공사를 앞두고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성의 융릉과 건릉의 옛터를 더듬어보고 독산성과 세람교 등 수원 옛 읍치 주변도 살폈다. 현대의 택지 개발이 불가피하더라도 유적지의 복원과 보존도 고려할 줄 아는 것이 김구 선생이 말한 문화민족이 되는 길일 것이다.

김창회는 원래 대구를 답사하려 했는데, 신종 감염병 때문에 포기하고 남원으로 갔다. 먼저 오수에 들러서 의견(義犬) 설화의 흔적을 찾아보고 남원읍성과 그 주변 및 광한루를 돌아보았으며 율림과 용담의 흔적도 추적해 보았다. 또한 남원역의 불합리한 위치와 부서진 황산대첩비를 통해서 일제 식민지 통치의 악랄함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번호도 원래 기획한 내용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다져보려는 애초의 의도에 비추어 나름 체면치레는 한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그렇지만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것이 10년이 넘어가니 다들 좀 지쳐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편집위원들로 거듭나려 한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편집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새로운 편집위원들이 보다 알차고 재미있는 『내일을 여는 역사』를 만들어 주시리라고 기대해 본다. 

편집위원장 김용흠

월, 2020/04/06- 23:33
0
0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해병대 초대 사령관 신현준. 정부는 2009년 신현준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해 발표했다. ⓒ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홈페이지 캡처

“무적 해병의 아버지! 평생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신 님이여,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소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신현준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신현준은 경북 김천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해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자연스레 구사했다. 신현준 스스로도 자신의 책 <노 해병의 회고록>에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1932년 2월,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하얼빈시 남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이날부터 신현준은 1936년 4월까지 4년여 동안 일본 만주파견군과 만주국군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신현준이 모셨던 일본군 참모 중에는 만주군 제5군관구 수석고문으로 열하성 일대에서 활동한 세키하라 대좌(대령)가 있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 “장차 만주군 장교가 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알고 격려해 주었다”면서 세키하라 대좌와의 인연을 자세히 언급했다.

“세키 대좌는 35년 3월부터 나를 현지 실무부대(34사단)에 배속시켜 근무 경험을 갖도록 배려해주었다. 단장(연대장) 전속 통역으로 근무한 지 만 1년째 되던 36년 4월, 나는 마침내 소망하던 대로 만주군 장교가 되기 위해 봉천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됐다.”

신현준은 1937년 9월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했다. 이후 1937년 10월부터 보병 35연대 박격포련(박격포중대)에서 견습군관으로 복무한 뒤 그해 12월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38년 12월 1일부터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우다카와 요시히토로 창씨개명한 신현준은 1941년 3월 중위로 진급한 뒤 1943년 12월부터 열하방면으로 출동해 팔로군 및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했다. 1944년 3월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간도특설대 주요 간부 및 만주국군 보병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귀국한 만주군 장교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만주국군 8단 소속의 신현준은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집결지인 중국 싱룽으로 향한다. 8월 17일 싱룽에 도착한 신현준을 기다린 것은 일본의 패망 소식. 중국군은 신현준을 직위에서 해임하고 무장을 해제했다.

총검을 잃은 신현준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베이징행을 택한다. 당시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라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을 접했기 때문이다. 베이징 인근에는 광복군 3지대가 주둔 중이었다.

▲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로 만주군관학교로 간 박정희. ⓒ 자료사진

신현준은 만주국군 후배인 이주일,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다. 일본군 고위장교였던 신현준은 광복군 3지대 핑진(平津) 대대의 대대장이 됐다. 함께 이동했던 이주일은 1중대장, 박정희는 2중대장에 임명됐다.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던 만주국군 장교가 해방 후 대한민국 광복군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친일파 전문가인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2018년 10월 22일 <경남도민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했다”면서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2중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라고 지적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10일, 신현준은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한다. 이후 봉천군관학교 동기인 정일권의 권유로 간도특설대 출신 김대식(해병대 3대 사령관)을 만나 조선해안경비대 입대절차를 밟고 1946년 12월 중위로 임관한다.

이듬해 해병 소령으로 특진한 신현준은 1948년 5월 해군 진해통제부 참모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중령으로 진급한다. 이 해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뒤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해 저항세력을 진압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신현준 묘지 무적 해병’의 아버지 신현준, 만주군 장교가 되고 싶었다 친일파 신현준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신현준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신현준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면서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으로 해병대 창설을 정식 공포한다. 신현준은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신현준은 1949년 제주4.3사건이 발생하자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한국전쟁 후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에게 인계한다. 이후 1958년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유학한 뒤 1960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고 1961년 4월 국방차관보에 임명된다.

5.16군사쿠데타 후 군에서 물러난 신현준은 초대 모로코 대사와 초대 바티칸 대사를 지냈다. 제5대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도 역임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노년을 보낸 신현준은 2007년 10월 15일 만 9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닷새 뒤인 10월 20일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공식보고서에 “신현준은 만주국군 장교로서 1938년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창설기간 장교로 발탁돼 1944년에 이르기까지 만주지역 항일세력 무력탄압에 적극 협력했다”면서 “이러한 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3년 9월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6위 경운장을 받았다”라고 기록했다.

이어 “신현준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공식보고서에 명시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2007년 10월 현충원에 안장된 신현준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에 잠들어 있다.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신현준 (1916~2007) – 간도특설대에서 광복군으로 신분세탁 1932년,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 만주군 통역이 됐다.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다. 열하방면으로 출동해 팔로군 및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했다. 일본이름은 우다카와 요시히토.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 출신 조선인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을 접하고 만주국군 후배인 박정희 등과 함께 베이징 광복군 부대로 향한다. 당시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던 만주국군 장교가 해방 후 대한민국 광복군이 된 예는 적지 않다. 친일파 전문가인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이들을 ‘해방 후 광복군’으로 구별해 부른다. 1946년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 대한민국 해병이 된다. 여순사건 때 저항세력 진압에 앞장 선 뒤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4.3사건이 발생하자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박정희와 함께 돌아온 만주군 장교 신현준 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화, 2020/04/07- 12:20
3
0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조상에 대한 신의로 창씨개명 아니한 오직 그 이름 김석범으로 이곳까지 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에 잠든 친일파 김석범의 묘비 내용 중 일부다.

▲ 해병대 2대 사령관 김석범. ⓒ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홈페이지 캡처

김석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 공식보고서에 “만주국군 장교로서, 특히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했다”라고 기록된 인물이다.

1915년 11월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김석범은 1934년 중국 신징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견습사관을 거쳐 1937년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김석범은 1939년 4월 졸업성적 우수자로 발탁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만주국 신징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 대통령과 유사한 경우다.

1940년 9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김석범은 12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해 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임(책임자)으로 활동했다.

위원회는 김석범이 책임자로 활동한 간도특설대 정보반에 대해 “1944년 열하성 유수림자에서 정식 성립했다”면서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군중의 사상동태를 정찰해 (간도)특설대가 소탕활동과 항일군민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것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보반은 각 연(중대)에서 13명의 골간분자를 뽑아 조직하였으며 변절분자 중에서 약간 명을 흡수해 정보활동을 진행했다. 주요 임무는 정보를 수집하고, 반공선전을 전개하며 체포된 항일연군과 혁명군중을 직접 심문하고 기타 정보활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기록으로 남은 간도특설대 정보반의 악행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석범 묘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의 비밀 친일파 김석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범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래줄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김석범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재중사학자 차상훈씨가 남긴 기록도 첨부됐다.

“1944년 5월 열하성 유수림자에 주둔하고 있던 특설부대는 40세 좌우의 백성을 붙잡아다 사격 과녁으로 삼았다. 정보반 반장놈은 신병 매 사람에게 탄알 세 발씩 쏘게 했다. 30발을 쏘았으나 명중하지 못하자 노병사에게 사격하라 했고 단방에 그 백성을 명중했다. 1944년 5월 아키바 중대장 놈이 부대를 거느리고 사가장자 마을을 습격했다. 놈들은 여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악명 높은 간도특설부대> 중, 민족출판사, 1991.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간도특설대가 중국 허베이성 석갑진 일대에서 활동할 때, 정보반의 활동에 힘입어 ‘토벌’한 횟수는 34건이나 되었다”면서 “토벌로 팔로군 군정 인원과 주민 39명이 학살됐고, 체포된 자는 62명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됐다.

김석범은 1943년 9월 15일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듬해엔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했다. 1945년 무렵 만주국군 제6관구 보병 7단으로 전출돼 연장(중대장)을 맡았다. 당시 만주국군 7단은 후방진지 구축과 군용도로 건설을 맡은 부대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석범은 1945년 6월경 보병 제30단과 합동으로 경박호 서측지구 진지를 구축하다 8월 12일 명령에 따라 원대복귀 하던 중 소련군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면서 “일제가 패망한 후 신징으로 가 조선인 출신 만주국군 장교들이 주축이 돼 만든 신징보안사령부에 참가해 봉천군관학교 동기생인 정일권에 이어 사령관을 맡았다”라고 <친일인명사전>에 밝혔다.

김효순 기자가 쓴 <간도특설대>라는 책에 따르면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인의 약탈과 보복행위로부터 한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군과 관동군 복무자들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가 신징보안사령부”다. 해방 후 신징보안사령부 사령관이 된 김석범은 1946년 4월 신징보안사령부 소속 전원을 인솔해 인천으로 귀국했다. 당시 신징보안사령부에 참여한 인물에는 훗날 전두환의 장인이 되는 만주국군 경리관 출신 이규동도 있었다.

해방 후 해병대 2대 사령관이 되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석범 묘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의 비밀 친일파 김석범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범은 장군제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래줄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해방 후인 1946년 김석범은 대한민국 해군으로 보직을 바꿨다. 이후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내다 한국전쟁 중 해병대로 전과했다. 1953년부터 친일파 신현준에 이어 해병대 2대 사령관으로 4년 동안 재임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석범이 해병대로 전과하는 데는 봉천군관학교 동기이자 간도특설대 전우인 신현준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해병대 사령관을 마친 김석범은 국방대학원과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1960년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국군 장성들의 예비역 모임인 성우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8년 2월에 사망한 김석범은 국립대전현충원 제1장군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옆에는 만주 관동군 헌병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던 김창룡이 잠들어 있다. 1949년 6월 김창룡이 방첩대장을 할 때 그의 직속 수하인 안두희가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공식보고서에 “김석범은 만주국군 장교로 임관한 이래 일본의 패전 때까지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장교로 복무했다”면서 “특히 간도특설대 주요 간부로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항일무장부대 공격에 참여했고, 정보반 주임을 맡아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했다.

“김석범의 이러한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8년 2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김석범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김석범 (1915~1998) – 창씨개명만 하지 않은 잔인한 간도특설대원 1915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성적 우수자로 발탁돼 일본 육사에 입학, 이후 간도특설대 정보반 책임자로 활동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정보반의 목적은 팔로군, 지하공작원, 민병의 활동과 군중의 사상동태를 정찰해 (간도)특설대가 소탕활동과 항일군민을 체포하고 살해하는 것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40세 좌우의 백성을 붙잡아다 사격 과녁으로 삼았다. 놈들은 여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 후엔 대한민국 해군으로 변신, 해병대 사령관,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했다. 1998년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 제1장군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무덤 옆에는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던 김창룡이 잠들어 있다. 묘비엔 “조상에 대한 신의로 창씨개명 아니한…”이라고 적혀있으나 ‘창씨개명만 하지 않은’ 친일파였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창씨개명 안 해 자랑스럽다”던 해병대 사령관의 악행들 김석범 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화, 2020/04/07- 20:38
1
0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한 송석하 ⓒ wiki commons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송석하 편에는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5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송석하가 만주국 황제가 주는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받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일제가 인정한 ‘인재’였다는 뜻이다. 송석하 역시 만주군 시절 일제의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송석하. 1916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1999년 사망했다.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34년 장춘외국어전문학원을 수료했다. 이후 1936년 6월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37년 9월 5기로 졸업했다. 견습군관을 거쳐 그해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송석하는 보병 27단에 배속돼 활동했다. 간도특설대가 창설된 이후에는 특설대 기관총박격포중대에서 복무했다. 1941년 중위를 달고 1944년을 전후해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송석하의 공식보고서에 “1937년 11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일본의 패전 때까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으로 복무했다”면서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고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했다.

조선인 이범익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특수부대

▲ 이케다 대좌의 간도 특설 부대가 용정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모습. ⓒ 세계한민족문화대전 류은규

위원회는 송석하의 보고서에 1993년 길림인민출판사가 출간한 <위만군사>를 인용해 ‘특설부대성립의 역사적 배경과 조직연혁’이란 항목을 넣었다.

“7.7사변(37년 중일전쟁의 단초가 된 사건 – 기자 주) 후, 동북항일무장세력은 부단히 장대해져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일본의 큰 위협이 됐다. 당시 위만주국 간도성장 이범익이 일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일본이 제기한 ‘치안숙정’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을 모집해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특설부대를 조직할 것에 대한 건의를 제기했다.”

여기서 위만주국이란 만주국이 가짜국가였다는 뜻에서 만주국에 위를 붙인 것으로 중국은 만주국과 관련된 모든 단어에 ‘가짜’ 또는 ‘유사’라는 뜻의 ‘위(僞)’자를 붙인다.

위원회는 “일본 측이 이범익의 건의를 접수하고 즉각 건립할 것을 결정했다”면서 “안도현치안대, 훈춘국경감시대, 봉천만군군관학교, 기타 만군학교에서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족 위관 9명, 조선족 사관 9명을 선발해 특설부대 설립을 준비했다”라고 덧붙였다.

▲ 1939년 5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이범익 관련 기사. 가운데 사진이 이범익이다. ⓒ 김종훈

충북 단양 출신인 이범익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시작해 만주 거주 조선인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초반 경북 금산군수, 달성군수, 예천군수, 칠곡군수 등을 지낸 뒤 192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 내무국 내무부장으로 근무했다. 1929년부터 강원도지사를 지냈고 1934년 4월 충남도지사로 전임했다. 1937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성장에 임명돼 간도특설대 창설을 제안했다. 해방 후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 됐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해방 후 승승장구한 장군 송석하

해방 후 송석하는 김백일, 김홍준, 신현준, 김석범, 백선엽, 정일권 등 여타의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처럼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송석하의 선택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그는 단기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육사 동기 중에는 신징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국에서 근무하다 신현준과 함께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꿔 귀국한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송석하 묘지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창설에 가장 큰 영향 끼친 인물 친일파 송석하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송석하는 장군제1묘역 상단 좌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1948년 육사를 졸업한 지 2년도 안 된 시점에 송석하는 육군 소령으로 특진해 제2연대 부연대장이 됐다.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1개 대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1949년 8월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한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0사단장이 돼 참전했다. 1955년 1월 별 두 개인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6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해 1955년 1월 육군 소장이 되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1961년 육사 동기인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송석하는 한국국방연구원 원장에 임명됐다. 1963년 송석하는 전역과 동시에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으로 임명됐다. 1965년 민방위개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69년에는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도 맡았다. 1999년 1월 14일 만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틀 뒤인 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상단에 안장됐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작성된 공식보고서에 “만주국군 출신 송석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라고 평가했다.

특별법 2조 10호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가, 19호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가 각각 명시돼 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9년 1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안장된 송석하는 정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송석하 (1915~1999) – 만주국 황제에게 금시계 받은 조선인 1937년 봉천군관학교 5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만주국 황제가 주는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뒤 보병으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 창설 후에는 기관총박격포중대에서 복무하면서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고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간도특설대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시작해 만주 거주 조선인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매김한 이범익이 일본 측에 제안해 만들어진 항일무장세력 탄압 특설부대다. 해방 후엔 김백일, 김홍준, 신현준, 김석범, 백선엽, 정일권 등 여타의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처럼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1955년엔 육군 소장까지 올랐다. 육사 동기인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엔 한국국방연구원장에 임명됐다. 이후에도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 등 승승장구했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해방 후 신분 바꾼 친일파, 죽어서도 대접 받다 송석하 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금, 2020/04/10- 04:51
4
0

황교안·나경원 등 ‘낙선명단’ 8명 공개

총선 낙선자 발표회견 참석한 김삼열 회장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1대 총선, 친일 정치인 낙선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2020.4.9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장우리 기자 =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단체가 친일 청산을 위한 입법활동에 의지가 없거나 역사 왜곡 발언을 한 후보자들이라며 명단을 공개하고 낙선운동에 돌입했다.

70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아베규탄 시민행동’은 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개질의서를 보내 친일 청산을 위한 입법활동을 할 의지가 있는지를 검증하고 후보자의 발언과 행적을 점검해 집중 낙선대상자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개된 낙선 후보자는 총 8명으로 미래통합당에서 나경원·황교안·심재철·김진태·하태경·전희경 후보 등 6명의 이름이 올랐다. ‘세월호 막말’로 통합당에서 제명을 추진하는 차명진 후보와 무소속 윤상현 후보도 포함됐다.

시민행동은 이들이 ‘철없는 친일프레임 집착, 어린애 같은 정치'(나경원), ‘필요시 일본 자위대 입국 허용'(황교안), ”반일종족주의’를 읽고 무장한 전사가 되겠다'(심재철) 등 역사를 부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했다며 “총선에서 이들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전국 지역구 출마자 684명에게 이메일·팩스로 공개질의서를 보냈으나 148명의 후보만이 응답했다”며 “특히 미래통합당의 경우는 역사 문제와 관련해 많은 질타를 받아왔음에도 응답률이 3%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email protected]

<2020-04-09> 연합뉴스 

☞기사원문: “총선에서 친일 정치인 심판해야”…낙선운동 돌입

※관련기사 

☞친일정치인 낙선운동 홈페이지: NOJAPAN415.COM

☞오마이뉴스: 아베규탄시민행동, ‘친일정치인 불매운동’ 선언

☞MBC: 시민단체 “총선에서 친일 정치인 심판해야” 낙선운동 돌입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1대 총선, 친일 정치인 낙선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장(오른쪽 두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2020.4.9 [email protected]
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제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제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아베규탄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제21대 총선, 친일정치인 낙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금, 2020/04/10- 00:53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