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시민단체, 간토대지진 진상규명·명예회복 성명 발표 1일 오후 충남 천안시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임광순 ‘기억과 평화’ 이사가 한일 양국 정부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낭녹하고 있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대표 김종수)는 1일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조선인학살 제98주기 추도 행사에서 한일 양국 정부에 진상규명과 사과, 명예회복 등을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간토학살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발생한 규모 7.9의 간토대지진이 일본 수도권 일대를 강타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이 다수 살해된 사건이다. 특히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한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 경찰, 군인에 의해 6천661명(독립신문 기록)이 희생된 참사이기도 하다.
성명서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 사건의 책임 인정과 사과, 한국 정부의 진상규명·명예회복 조치와 국회의 특별법 제정, 한일 역사학계·교육계의 조선인 학살 사건 연구와 교육 등을 촉구했다.
이 성명에는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1923제노사이드연구소,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등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대학, 연구소, 종교계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임광순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 평화’ 이사는 이날 충남 천안시 동남구 소재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 역사관’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성명서는 “간토대지진은 자연재해였지만 뒤이은 피해는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며 “당시 일본 내무성은 전국 지자체에 ‘조선인 폭동’을 사실화하는 유언비어를 타전했고, 피해지역인 사이타마(埼玉)현 경찰서는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의 망동이 있으므로 급히 상당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전파해 치안 당국뿐만 아니라 일본인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에 불을 붙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1923년 이후 조선인 학살은 은폐되는 듯했으나 여러 연구자와 시민운동 덕분에 진상이 널리 알려졌고 2013년에는 한일 공동학술회의가 열려 진상규명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며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 정부는 당시의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은 채 추도 메시지도 거부하고 있고 한국 정부와 국회도 진상규명과 피해복구에 눈을 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행사에는 다나카 마사타카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사무국장, 이유재 독일 튀빙겐대 교수, 조정현 1923재일시민연대 운영위원,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대표가 추도사를 했다.
배영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이재선 천도교 청년회 중앙본부 회장, 구와노 야스오추금 일본 닛코리회 대표, ‘엿장수 구학형’·’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의 기록 번역팀이 연대사를 발표했다.
김종수 대표는 “2년 앞으로 다가온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에 맞춰 진상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는 다양한 사업에 양국 시민단체가 함께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친일 세력, 민족 정기라는 걸 우리가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거든요? 거기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우리 자신이 친일파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되어 버렸어요. 자손들한테 ‘민족 정기다, 애국해라’, 무슨 얼굴을 갖고 그런 얘기하겠어요? 친일파를 처벌하지도 못했고, 그 사람들이 날뛰는 꼴을 그대로 봐놨고, 그들에 대한 단죄가 없는 그 세대로서…”
부끄러워하는 그 마음이 느껴졌다. 평생을 친일반민족 행위 연구에 헌신했던 임종국 선생이 1988년 CBS 라디오 대담에서 했던 말이다. “무슨 얼굴로 애국을 얘기하겠냐”는 그 말을 당시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이가 바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다.
그로부터 23년 후, 임 소장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일제 식민통치는 염치없는 인간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니 일제 잔재 청산이란 것도 단순히 인적 청산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염치없는 인간 대량 생산’이라는 식민통치 이데올로기를 청산하는 일이기도 하다”며 이렇게 확언했었다.
“이걸 못하면 민주주의도 허상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하는 등 역시 친일 청산에 힘을 썼던 그였기에, ‘일제시대 염치없는 인간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염치와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지난 12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그와 마주 앉았던 이유다. 먼저 염치의 정의에 대해 물었다.
인간다움, 그리고 부끄러움과 참회
▲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 이정환
– 염치없다는 말이 인간의 기본을 버렸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그들의 이야기를 다 합치면 그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다움. 지구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염치가 있어요. 예의가 됐든 사회규범이 됐든 그 기본이 되는 게 염치입니다.”
임 소장은 “지구상에 인간을 공존하게 만드는 모든 질서 자체가 예의에서 비롯된다”며 “인사를 잘 하거나 어르신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그런 게 아니다, 사회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와 같은 예의를 어겼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인간답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염치없음은 “수치를 모르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반대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은 참회로 이어질 수 있다. 임 소장은 이렇게 예를 들었다.
“굴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갇혔어요. ‘누구 하나 때려잡아 먹자’, 그런 상황에서 사람 고기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워먹었던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 후 그 사람이 참회를 하느냐 마느냐, 이런 차이인 거죠.”
– 인간다움을 잃어버렸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염치다?
“그렇죠.”
“염치없는 친일파 가면 미국이 더 예쁘게 만들어 줘”
▲ 1966년 9월 10일 <동아일보>에 실린 “친일문학론” 광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임종국 선생이 당시 유명 작가들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와 반대로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사람, 철면피란 말의 사전적 정의다. 임 소장의 말이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철면피가 양산되는 건 전쟁이 끝난 다음입니다. 전쟁으로 윤리 의식이 허물어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제시대부터 생겨요.”
임 소장에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철면피는 당연히 이완용이었다. 그는 “법이 규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죄가 민족 배반 아니냐”며 “그런 큰 죄를 저지르고 나면 다른 건 우습게 보인다, 이완용은 나라만 팔아먹은 게 아니라 불법적인 재산 탈취까지 다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는 “친일파들의 본질은 ‘염치없음'”이라고 강조했다. “잘못을 알고도 행한 사람들”이며 또한 그래서 “자기가 잘했다고 우겨요”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임 소장은 “식민지 시대가 염치없는 사람들을 만들었고, 우리나라에 내려오던 염치의 근본이 그 때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고 말했다. 그 다음에도 이어진 뒤틀림을 임 소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광복이 된 후에도 친일파들은 가면을 바꿀 필요가 없었어요. 그 가면 그대로 쓰고 일본으로 향했던 눈을 미국에 돌리면 다 예쁘게 봐줬어. 그대로 이승만 독재에 핵심 인사들이 됐죠. 염치없는 친일파들의 가면을 미국이 더 예쁘게 만들어줬거든.”
그러면서 임 소장은 친일파들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민주주의와 안 맞는다고 강조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파시즘”이며, 그렇기에 “노동자들이 배부르고 잘 사는 거 못 보고, 인권이나 여성 인권 등에 체질 자체가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자기 머슴이어야 하며, 그래서 독재를 찬양하는 것”이란 주장도 잇따랐다. 그를 만나게 만든 질문으로 이어졌다.
“염치는 전염된다”… 친일인명사전 또한 그랬다
▲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임종국 선생의 유고. 친일반민족행위 연구에 헌신한 그의 아버지는 친일부역자였다. <친일문학론>을 쓰던 아들에게 “내 이름이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넣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임종국 선생이 평생을 바쳐 기록한 “친일인명카드”는 훗날 친일인명사전의 밑거름이 됐으며, 그의 뜻을 담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졌다. ⓒ 이정환
– ‘염치없는 인간들이 지금도, 미래에도 나오는 한 민주주의가 위태롭다’고 하셨습니다.
“투표의 자유가 있다고 자유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정치적 자유 뿐 아니라 사상의 자유, 경제적 자유, 생존의 자유도 보장되는 게 올바른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니까 몰염치가 많으면 사회가 불안해지는 건 당연하죠. 특히 파시즘적인, 극우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있는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불안해집니다. 올바른 민주주의가 그냥 선거하는 것만이 아니잖아요.”
다수결의 논리에 따라 염치없음이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고가 서늘하게 들렸다.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 염치, 전염성이 있나요?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도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동지’, 임종국 선생의 경우가 그랬다.
“1966년 1월쯤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빠가 그때 코트를 입고 있었으니까.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면서 헌 신문을 뒤지다보니 학병 지원 연설을 나간 아버지의 기사가 났습니다. 오빠는 그 글을 쓰다 말고 집에 와서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친일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학병 지원 연설한 게 나왔는데,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쓸까요? 그러면 공정하지가 않은데…’ 하자 아버지께서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고 하셨습니다.” (정운현, 임종국 선생 평전 중에서)
그리고 임종국 선생은 평생을 바쳐 친일인명카드를 기록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염치가 훗날 친일인명사전으로 옮아왔던 셈이다.
염치 없음도 전염되지만 염치 있음도 전염된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방문자들의 관람 소감. 2019년 12월 7일 방문자의 글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는 “나라에 부끄러운 짓을 한 친일파들은 저리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자들은 항상 탄압 받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건 잘못되었다. 바로 잡아야 한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18년 8월 개관했다. ⓒ 이정환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2019년 역시 다사다난이라는 표현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 해일 것이다. 연초에 비하면 남북 간 관계 개선의 전망은 어두워졌고, 북미 간의 교섭은 퇴보를 거듭하는 상황이다. 식민지 시기 일본 전범 기업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비상식적인 보복 대응은 동아시아 외교환경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게다 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몰상식한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면서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촛불의 힘으로 수립되었던 문재인 정부의 내치 성과도 그다지 신통치 않아 보인다. 지난 8월 이래 조국 사태가 부각되면서 검찰 개혁의 시대적 소명보다도 공정 가치의 실현이 더 근원적인 사회 이슈로 떠오른 상황이다. 다만 새로운 법무부 수장 임명을 계기로 검찰 개혁의 동력이 다시 탄력을 받기를 기대한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가 반환점을 돈 지금 시점에서 민생문제 역시 시급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가시적으로 내세울 만한 경제적 성과가 별로 없는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재인 정부의 노동 개혁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어 실망감을 주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한두 달 새 에는 수도권 집값이 급등 양상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이 절망과 허탈감에 빠져 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의 보수세력은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례성을 강화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 개편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보수 야당의 행태에서, 지역주의의 기득권에 집착하는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와 같은 보수세력의 모습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공정 가치의 실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9년의 마지막 호인 이번 77호에서도 다양한 내용을 구성하였다. ‘통일에세이’에서는 김오석이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가치와 활용에 대하여 다루었다. 비무장지대를 여러 차례 답사한 환경지리학자의 입장에서 비무장지대 경관 보존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현재의 군사시설 또한 미래의 역사유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번 호의 특집은 ‘한국과 일본,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제목 아래 네 편의 글로 구성하였다. 석주희는 일본 우경화의 핵심 조직으로 일본회의라는 비정당 우익세력에 주목하고 아베 내각과의 관련성을 살폈다. 아울러 일본 우익의 역사 수정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민간차원에서 한일 간 상호이해를 위한 시민연대를 지속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진우는 오늘날 일본의 상징 천황제가 과거와 같이 군국주의와 결부하여 부활할 가능성은 작으나, 아베 내각의 우경화 행보 속에서 천황제가 일본 우익 내셔널리즘의 중추로 떠오를 수 있음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하였다.
양기호는 해방 이전 일본 전범 기업 강제동원 피해 보상에 대한 해법으로, 한국 정부는 피해자와 원고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반성이 담긴 기금의 설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영채는 일본군 위안부합의 문제와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를 계기로 한일시민사회가 문화교류와 상호 네트워크 형성을 활성화하여, 한일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획들을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박상수가 동아시아론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동아시아 담론들이 그 자체에 담긴 인식론적 한계들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동아시아를 ‘트랜스 내셔널리즘’의 공간으로 사유 한다면 동아시아가 서구 근대의 성취까지 왜곡 없이 온전히 포용하는 더 큰 보편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지금 우리는?’ 코너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미동맹의 미래, 용산 미군기지의 공원 조성 문제, 그리고 홍콩의 송환법 반대 투쟁 등 세 개의 주제를 다뤘다. 오혜란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을 촉진하고 평화번영통일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한미동맹에의 지나친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염복규는 용산이라는 장소가 지녀왔던 역사적 시간대의 기억을 최대한 남겨, 그 역사성을 후대에 전승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용산공원이 조성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강인화는 2019년을 뜨겁게 달궜던 홍콩시위를 다각적으로 분석하면서, 기존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잃은 홍콩 주민들이 스스로 신뢰를 회복하며 새로운 사회와 정치를 만들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인물로 보는 역사에서는 임경석이 지난 호에 이어 이탈리아어판 『코 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남만춘, 장건상, 이동휘, 김규식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사실 체크에서는 두 편의 글이 기획되었다. 이정희는 식민지 시기 조선 거주 화교가 한국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음을 실증적으로 살펴보았다. 김용흠은 전근대 우리 역사 속에 존재했던 유교 문화를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유교 문화에 가졌던 문제의식과 고민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내일을 여는 책에서는 두 권의 책을 다뤘다. 정명현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임원경제지』의 재해석을 통해, 조선 후기의 문명을 창조적으로 되살려 활용하는 실용적 복고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정대성은 독일 태생의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인간의 조건』을 다루면서, 그의 연구가 신자유주의 적폐해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21세기에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음을 살펴보았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서민교가 3·1운동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 관이었던 우츠노미야 타로의 일기를 소개하였다. 북한의 이해에서는 정우영이 북한에서 대집단체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고 대집단체조로 대표되는 북한 공연예술의 특징을 검토하였다.
예인열전에서는 최열이 겸재 정선의 작품들에 대한 글을 실었다. 겸재의 작품 전반을 싣기에는 이번 호의 지면이 넉넉지 않아, 이 글은 다음 호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호에서는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 그리고 한양과 그 주변 지역을 소재로 한 겸재의 실경산수화를 다루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이나바 마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 예술제인 아이치트리엔날레 2019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평화의 소녀상>이라는 작품이 전시 중단되는 사태를 조명하였다. 한진금은 2019년 한해 전국 각지의 박물관과 전시관에서 기획, 진행되었던 3·1운동 100주년 기념 전시를 검토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3·1운동 서사의 주체가 되는 경향성에 주목하였다.
역사와 공간에서는 꾸준히 좋은 글을 연재하는 김창회가 충남 홍성의 조선 시대 읍치 유적에 관한 내용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이번 호의 서평에서는, 『3월 1일의 밤–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권보드래 저, 돌베개, 2019)에 대한 이찬수의 글을 실었다. 그는 이 책이 향후 근현대 문학과 한국사는 물론, 한반도 평화사 분야에서도 스테디셀러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번 호에는 자유 기고의 형태로 두 편의 글을 실었다. 최병택은 친일 청산의 문제는 권선징악의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 자리 잡은 국가주의와 비민주성의 잔재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사 람들을 미화하는 책인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엄중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양조훈은 제주 4·3의 비극에, 이승만 정권뿐만 아니라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책임과 역할이 작지 않았음을 장문의 글을 통해 강조하였다.
2020년 새해 벽두부터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총선 정국이 시작될 것 이다. 하지만 총선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풀어야 할 산적한 과제들이 잊히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남북 관계 및 북미 관계의 개선, 검찰 개혁 등도 시급히 성과를 거두어야 할 사안이지만, 정부의 각종 정책을 비웃는 듯한 수도권 집값의 급등은 다주 택자들에 대한 더욱 강력한 징세 정책을 요청하는 형국이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 시에 내세웠던 각종 노동공약의 실천은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 전교조는 여전히 법외노조의 상태에 있고, 최저임금 1만원 시대의 도래도 언제 실현될지 기약하기 힘들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역시 너무나 미진하며, 주 52시간 노동 상한제 적용 역시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김용균법의 국회 통과에도 불구하고 ‘위험의 외주화 금지’ 문제는 여전히 방치되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면 저무는 해를 아쉬워하면서도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년 연말에는 올 연말에 가졌던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내일을 여는 역사』 현 편집위원들의 역할도 2019년을 끝으로 종료된다. 2020년 새해에는 새로운 편집위원들과 함께 『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더 나은 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편집위원 정요근
<내일을 여는 역사> 77호 겨울호 목차
04 여는 글
○ 2020년 새해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기대하며 / 정요근
11 통일에세이
○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 김오석
19 특집 : 한국과 일본, 어디로 갈 것인가?
○ 일본 우익에 대한 소고 – 아베내각과 일본회의 / 석주희
○ 현대 일본인의 천황관과 역사인식 / 박진우
○ 1965년 체제의 한계, 극복은 가능한가 / 양기호
○ 아베정권의 대한국 무역보복조치이후 한일시민연대운동의 현황과 과제 / 이영채
81 쟁점으로 보는 역사
○ 한국의 ‘동아시아’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 / 박상수
95 지금 우리는?
○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한미동맹의 장래: 주한미군 철수는 가능한가? / 오혜란
○ 용산공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염복규
○ 2019년 홍콩시위와 민주주의, 그리고 ‘탈식민’ / 강인화
131 인물로 보는 역사
[코민테른인명사전]
○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2) – 남만춘, 장건상, 이동휘, 김규식 / 임경석
149 사실 체크
○ 조선화교가 우리 근대사에 던지는 문제 제기 / 이정희
○ 유교 문화에 대한 오해와 이해 / 김용흠
173 내일을 여는 책
○ 조선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에서 구하는 실용적 복고 / 정명현
○ ‘인간의 조건’의 상실과 정치 –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 정대성
“공식적 약속이지만 구두로 이뤄져…구체적 권리·의무의 창설 불분명” 헌법소원의 대상은 되지 않지만, 피해자의 청구권은 남아있다고 판단 위안부 합의 근거로 손배 청구에 응하지 않은 일본 정부, 정당성 잃어
헌법재판소는 2015년 박근혜 정부와 일본 정부가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가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내용들뿐이라서 정치적·외교적 행위 이상의 의미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시민 기본권을 침해한 국가권력의 행사가 아니면 헌법소원 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헌재는 사건 결론을 ‘각하’로 내렸다.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이번 헌재 결정에 의미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헌재는 27일 각하 결정문에서 이 합의를 두고 “양국 외교장관의 공동 발표와 정상의 추인을 거친 공식적인 약속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면서도 구속력이 없다고 했다. 서면이 아닌 구두로 이뤄졌고, 구속력이 있는 조약에 부여되는 명칭이나 조문의 형식도 갖추지 않은 채 ‘기자회견’(일본은 ‘기자발표’)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헌재는 “구두 발표의 표현과 (양국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발표문의 표현조차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했다”며 “국제법상 구속적 의도를 추단할 수 있을 만한 표현 역시 사용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모호하거나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돼 있다”고 했다.
헌재는 “무엇보다 합의의 내용상, 한·일 양국의 구체적인 권리·의무의 창설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했다.
헌재는 합의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시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지만, 그게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목적으로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헌재는 “합의에 피해자가 입은 피해 원인이나 국제법 위반에 관한 국가책임이 적시돼 있지 않다”며 “일본군 관여의 강제성·불법성 역시 명시돼 있지 않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합의 이후에도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해결돼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한 점은 이 합의가 법적 효력이 없는 선언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판단의 근거가 됐다.
합의의 또 다른 주요 내용인 재단 설립과 일본 정부 출연을 두고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의무 이행의 시기·방법, 불이행의 책임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헌재는 봤다. 헌재는 “이 합의에는 ‘해야 한다’라는 법적 의무를 지시하는 표현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며 “대략 10억엔 정도의 일본 정부 출연금 규모가 언급됐다고는 하나, 정확한 출연금액과 시기, 방법은 언급되지 않았고 이 같은 출연금 규모의 언급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게재 발표문에는 표시조차 되지 않았다”고 했다. 헌재는 “국가 간 정치적 합의에 따른 협력조치의 시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일본 정부가 과거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을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의료·복지 용도로 사용하도록 한 사례를 들었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부족했다면서 피해자 중심의 조치를 모색하겠다고 발표한 상황도 고려했다. 헌재는 “피청구인(외교부 장관)은 이 사건 합의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일본이 진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명예·존엄 회복과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노력을 계속해 줄 것을 기대하며 미래지향적 협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며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한의 행사를 포기했다고 단정할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번 결정에서 중요한 부분은 피해자 권리를 확인한 것”이라며 “각하라고 결정은 했지만, 헌재가 피해자 권리의 실현을 정부의 할 일이라고 주문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결정이라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조 연구위원은 “위안부 합의는 법적 책임에 대한 게 아니기 때문에 향후 이런 부분을 정부가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헌재가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피해자와 가족들 개인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헌재는 이날 결정에서 “합의에 구체적인 청구권의 포기 및 재판 절차나 법적 조치의 면제 보증 등이 전혀 규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의 포기나 처분을 다뤘다고 볼 사정이 없다”고 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해결됐다면서 피해자들 소송에 응하지 않는 일본 정부 주장에 정당성이 없어진 셈이다.
역사 교사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2019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아이들과 관련 유적지를 무던히도 찾아다녔다. 한두 시간 거리인 개항장 군산과 목포의 근대문화유적을 비롯해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숱한 인물들의 자취를 찾아 1년 내내 주말을 반납하다시피 했다.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그렇지 지역에도 기억하고 답사할 만한 곳이 적지 않다. 이곳 호남에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백범 김구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지역민들조차 놀라워한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과 대종교의 창시자 홍암 나철,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일강 김철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백용성 조사 등 호남 출신 독립운동가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런가 하면 반면교사 삼을 만한 인물도 있다.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탓에 당연히 만석꾼 지주가 많았고, 그들 중 다수는 자산을 보전하기 위해 기꺼이 친일의 대열에 섰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대표적이다. 그들의 땅을 밟지 않고는 호남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일제에 부역한 대가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영화를 누렸다. (관련 기사: “역사왜곡은 맞지만…” 친일파 생가 못 건드린다는 고창군 http://omn.kr/1m2xq)
비록 주어진 교육과정에 따라 진도에 연연해야 했지만, 내심 올해 한국사 수업은 ‘현실에 안주 말고 역사에 살라’는 글귀를 주제로 삼았다. 아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삶을 대조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계기수업은 물론 과제와 수행평가도 의도에 맞춰 재구성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를 살다간 인물의 행적을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고 신념을 다듬는 것이야말로 역사 공부의 고갱이다. 수험용 지식으로만 여겨 머리에 욱여넣을 뿐 가슴으로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지식이란 그저 허세의 수단일 뿐이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 같은 공간에서 잠들다.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 행사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이번엔 아이들과 조금 먼 길을 나섰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자발적 참가 신청을 받아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고등학교 1, 2학년 아이들과 함께 ‘백범 로드의 끝에서 만난 친일파들’이라는 주제로 충남 공주의 마곡사와 국립 대전 현충원을 찾았다. 고작 두 곳이지만, 광주에서 오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다.
▲ 마곡사 백범당에서 함께한 고등학생들이 문화해설사로부터 백범 김구와 마곡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서부원
알다시피 마곡사는 김구가 20대 청년 시절 신분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깎고 잠시 승려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일제를 향한 적개심으로 일본 군인을 처단한 후 잡혀 감옥에 갇힌 뒤 탈옥하여 삼남 지방을 떠돌던 시기다. 당시 김창수(김구의 본명)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숨어다닌 길을 ‘백범 로드’라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
마곡사에는 그의 호를 딴 백범당이 새뜻하게 복원되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김구가 실제 머물던 곳으로 건물 벽에는 당시의 사진과 휘호 등이 걸려 있고, 곁에는 해방 직후 그가 이곳을 찾아와 심었다는 향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내로라는 사찰이지만, 백범당으로 인해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지만 마곡사는 경유지일 뿐,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이다. 그곳에 가야 비로소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함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국가 현충 시설인데도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김창룡을 비롯한 악질 친일파들이 수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묻힌 자리 위에 군림하듯 장군 묘역에 잠들어 있다.
우선, 장군 묘역으로 가는 도중 대통령 묘역에 잠깐 들렀다. 위치상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바로 앞에 울창한 숲이 없다면 현충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다. 그곳엔 최규하 전 대통령 내외가 묻힌 큼지막한 합장묘만 덩그러니 조성되어 있다. 그 옆으로 넓은 묫자리가 빈터로 남아있는데, 앞으로 세상을 떠날 대통령이 묻힐 곳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잠들어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해는 국립 서울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이후 세상을 떠난 대통령이 없기에 꽤 오랫동안 빈터로 남을 듯하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미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고, 이명박과 박근혜 역시 구속되어 죗값을 치르고 있으니 현충원에 안장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이들은 최규하라는 이름을 낯설어했다. 대개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제19대 문재인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을 순서대로 잘 알고 있지만, 최규하는 십중팔구 빠뜨리고 만다. 사실상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축출된 대통령이라고 설명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은 워낙 존재감이 없는 분이라 왕따당하듯 홀로 여기에 묻혀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 무덤에 분노하다
대통령 묘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문제의 장군 묘역이 있다. 주차장에서 중앙 계단을 따라 올려다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권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피라미드를 살짝 눕혀놓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기엔 6.25 전쟁 이후 순직한 육해공군 출신 장성들의 묘가 계급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그 사이에 친일파의 무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끼어있다.
▲ 김창룡 무덤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는 아이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악질 친일파 김창룡의 무덤이 국립 대전 현충원 장군 묘역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서부원
이곳에 묻힌 친일파의 대표 격인 김창룡의 무덤 앞에 아이들과 함께 섰다. 곁에 세워진 묘비의 내용만 보면, 존경할 만한 순국선열이요 호국영령이다. 김창룡의 묘비명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친일 사학자 이병도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미리 조사해온 자료를 읽으며 그의 친일 행적에 분노했고, 그런 자를 현충원에 안장한 이들의 생각 없음을 질타했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를, 아이들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 표현했다. 그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아직 죗값을 다 치르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마당에 그의 극악무도한 친일 행위에 대해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묘비 옆에 그가 악질 친일파였음을 알리는 별도의 팻말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즉석에서 아이들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이곳 장군 묘역에 숨어있는 친일파의 무덤을 찾아 인증 샷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친일파의 기준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로 한정했고, 묘비의 앞뒷면에 적힌 글귀도 꼼꼼하게 읽을 것을 주문했다. 스마트폰을 몸의 일부처럼 여기고 다루는 아이들에게 친일파 무덤 찾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묘비에는 죄다 6.25 전쟁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더군요. 그 어디에도 친일 행적은 적혀있지 않았어요. 어디선가 읽었는데, 6.25 전쟁을 왜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한 아이는 친일파 무덤의 묘비명에 혀를 내두르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북한의 남침을 가장 반겼을 이들은 다름 아닌 친일파들이었다. 일제의 주구로서, 관동군 장교로, 간도 특설대의 일원으로 독립군을 때려잡던 그들에게 전쟁은 ‘실력’을 발휘하고 범죄를 세탁할 절호의 기회였다. 6.25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친일파보다 빨갱이가 더 나쁘다’는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그들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났고 현충원에 당당히 묻힌 것이다.
▲ 친일파 김석범의 묘 김석범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간도 특설대에 복무했고, 만주국 창춘 보안사령부의 사령관까지 역임한 악질 친일파다. ⓒ 서부원▲ 친일파 백홍석의 묘 백홍석은 일본군에 배속되어 중좌의 직위까지 오른 친일파다. ⓒ 서부원
불과 10여 분만에 아이들 모두 과제를 완수했다. 스마트폰으로 무덤마다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친일파의 무덤을 속속 카메라에 담았다. 한 아이는 이곳에 묻힌 친일파 김창룡, 김석범, 신현준, 송석하, 백홍석 등을 을사오적에 빗대 ‘현충원 5적’이라고 부르며,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정부의 무지와 무책임을 탓하다
친일파들이 묻힌 국립 대전 현충원도 넓게 보면 ‘백범 로드’에 포함할 수 있다. 왜냐면 김구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 함께 잠들어 있어서다. 바로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와 큰아들인 김인 열사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 묻힌 김구의 유해가 이곳에 이장된다면, 국립 대전 현충원은 3대가 함께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될 것이다.
두 분의 묘소 앞에서 아이들끼리 논쟁이 붙었다. 친일파 무덤 옆에 별도의 팻말을 세우자는 기존의 주장과 친일파 무덤을 파묘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충돌했다. 곧장 파묘해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김구 암살의 배후인 김창룡과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이 같은 곳에 묻혀있다는 게 당최 사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무지와 무책임을 탓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함께 묻힌 곳이라면, 국립 현충원이라는 위상과 권위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생존해 계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죽어서 현충원으로 가기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분노한 아이들도 국립 현충원이라는 이름이 아깝다며 혀를 끌끌 찼다.
광주로 돌아오는 길, 열심히 과제를 수행하고 즉석 토론을 벌인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간 선물을 건넸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가 저문다고 해도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다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문하며, 정운현 선생이 쓴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를 선물했다. 비록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함께한 아이들은 분명히 완독해낼 것이라 확신한다.
아이들로부터 희망을 발견한 한 해였으니, 역사 교사로서 저물어 가는 2019년이 조금도 아쉽지 않다. 낼모레면 2020년 경자년 새해다. 새해는 무엇을 주제 삼아 아이들과 만날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순간 괜찮은 주제 하나가 머리를 스친다. 내년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아울러 친일 행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살이 된다. 2020년 새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해가 될 것 같다.
시즌4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57개 언론·시민사회단체,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 맞아 과거 반성 촉구 15일부터 조선-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 시작
(사진=전국언론노조 제공)
언론·시민사회단체가 올해 창간 100주년을 맞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향해 반민족적인 과거부터 반성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57개 언론·시민사회단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을 꾸리고 15일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두 언론사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민참여 릴레이 1인 시위를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오는 3월 5일, 동아일보 4월 1일 각각 창간 100년을 맞는다.
시민행동은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과거의 범죄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이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양심적인 언론인들과 언론개혁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힘밖에 없다. 이 운동에 국민들이 적극 참여해 달라”고 밝혔다.
시민행동은 두 언론사가 일제강점기, 유신정권 등 민족과 민주주의의 위기 때마다 ‘반민족적’, ‘반민주적’ 보도 태도를 취해왔다고 설명하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00년은 자랑스러운 100년이 아니라 부끄러운 100년”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전국언론노조 제공)
이어 “조선·동아의 부끄러운 100년 역사는 오늘의 언론 종사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언론사와 언론인들은 언제나 ‘역사’를 의식하면서 기사를 쓰며 주장을 펴야 한다는 것”이라며 “언론의 기록들은 그대로 역사로 남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민행동은 “기자는 엄중한 책임감을 갖고 기사를 써야 한다. 언론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줘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때때로 국민과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며 “‘어제의 범죄를 묵인하는 것은 내일의 범죄를 조장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100년의 부끄러운 언론 역사를 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민행동에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자유언론실천재단, 전국언론노조, 한국인터넷기자협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등 언론단체를 비롯해 종교·시민사회 단체가 참여했다.
[이뉴스투데이 경인취재본부 김승희 기자] 경기도가 도내 398개 읍·면·동을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명칭 변경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이 중 40%인 160곳이 당시 고유의 명칭을 잃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의식을 말살하고자 창씨개명 뿐만 아니라 창지개명(創地改名)도 했던 것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식민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1914년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우리나라 지명을 변경했다. 이 시기 전국 330여개 군이 220개 군으로 통합됐고 경기도는 36개에서 20개 군으로 축소됐다.
도는 이번 조사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동아시아역사연구소에서 2011년 발간한 ‘경기도 역사 지명사전(京畿道 歷史 地名事典)’에 수록된 읍·면·동 지명 변천사를 분석대상으로 정의하고, 관련 정보를 범주형 자료로 처리한 후 계량적 분포를 살폈다. 분석에는 전문여론조사 기관인 ㈜케이스탯리서치가 협조했다.
그 결과 과거 지명이 현재까지 유지된 읍·면․동은 137곳(35%)이고, 해방 전이나 해방 후를 포함해 지명이 변경된 읍·면·동은 228곳으로 분석됐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제가 변경한 읍·면·동 지명은 160곳으로 전체의 40%나 됐다. 그 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또는 해방이후 행정구역 통합·분리 조정으로 변경된 읍·면·동은 68곳(17%)이었고, 33곳(8%)은 신규 행정구역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경기도 전체 지명의 절반에 가까운 우리 고유의 읍·면·동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유형별로 살펴보면 두 지명에서 한 자씩 선택해 합친 ‘합성지명’이 121곳으로 가장 많았다. 대표적인 ‘합성지명’ 사례로 성남시 서현동이 해당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일제는 둔서촌, 양현리, 통로동 등을 병합하면서 한 글자씩 따 서현동으로 변경했다. 수원시 구운동, 성남시 분당동, 용인시 신갈동, 화성시 매송면 등도 두 곳 이상의 지명을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일제가 식민 통치의 편리성을 위해 숫자나 방위, 위치 등을 사용해 변경한 사례도 29곳이나 됐다. 광주시 중부면과 연천군 중면이 이에 해당되는데, 광주시 중부면은 1914년 군내면과 세촌면을 통합하면서 방위에 따른 명칭인 중부면으로 개칭됐고, 연천군 중면은 연천읍치의 북쪽이었던 북면을 ‘연천군의 중앙에 위치한다’해 중면으로 개칭됐다.
일제가 기존 지명을 삭제한 후 한자화 한 지명은 3곳이었다. 부천시 심곡동이 대표적으로, 일제는 1914년 조선시대 고유지명인 먹적골, 벌말, 진말을 병합하면서 심곡동(深谷洞)으로 변경했다. 심곡은 원래 토박이말로 ‘깊은 구지’라는 뜻이다.
지명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향토 정서가 왜곡된 사례도 있었다. 안성시 일죽면이 대표적인데, 일제는 1914년 죽산군을 폐지하며 남일면, 남이면, 북일면, 북이면, 제촌면을 안성군의 죽일면으로 만들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욕이었기 때문에 죽일면은 결국 이듬해 일죽면으로 변경됐다.
이 외에도 현재는 문제없으나 일제 당시 일본식으로 개칭됐던 사례도 있다. 일본이 시가지 지명에 일본 도시에 붙이는 ‘정(町 마치)’을 붙였던 것인데, 수원시에 11곳이 있다.
그 예로 조선시대 고등촌이었던 수원시 고등동은 1914년 고등리가 되었다가 1936년 일본식 명칭인 고등정(高等町)으로 개칭됐다. 수원시 매교동, 매산동, 영화동, 우만동, 인계동, 지동 등도 모두 일제강점기에 ‘정(町 마치)’을 붙였다.
‘경기도 역사 지명사전’ 발간에 참여한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우리 조상들은 골짜기를 가장 이상적인 마을의 입지로 생각해서 마을 이름에 골짜기를 의미하는 ○○골, ○○곡(谷), ○○동(洞), ○○실 등을 많이 붙였으나, 이런 고유 지명들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며 “앞으로 지명(地名) 행정에 우리의 역사지명이 연구되고 반영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곽윤석 도 홍보기획관은 “반도체 수출규제 문제로 한일관계가 갈등국면에 놓인 이 시점에서 고유 지명이 사라졌던 역사적 치욕을 바라보며 진정한 민족의 독립과 문화 창달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끼게 된다”며 “향후 경기도는 시․군과 긴밀히 협력해 사라지거나 왜곡된 우리의 고유 지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경기도는 일제잔재 청산과 지역의 역사성·정체성 회복을 위해 현재 31개 시·군을 대상으로 행정구역 명칭 변경 의사 여부를 수렴중이며, 향후 대상지가 확정되면 행정구역 명칭 변경을 통해 고유한 행정지명 복원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시민단체는 16일 오전 서울 강남 삼성본사 앞에서 삼성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단체가 직원들을 불법사찰한 삼성을 규탄하고 나섰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시민단체는 16일 서울 강남 삼성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민, 종교단체, 정당 등 11곳을 불온단체로 규정하고 임직원의 후원이력을 불법 사찰한 삼성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손팻말을 들고 “노동탄압 악질삼성 불법사찰 중단하라”, “반인권 반노농 끝판왕 삼성 규탄한다” 등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삼성은 반헙법적, 초법적 행위로 생각과 종교까지 통제하려 한다. 이는 헌법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라며 “삼성은 헌법농단 관행이 우리 사회에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조를 하는 사람을 불법 미행하고 도청한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런 행위들이 근절돼야 한다”며 “경찰과 법원의 책임도 있다. 법원은 단 한 번도 삼성 앞에서 정의로운 잣대를 들이댄 적이 없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수사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발언자로 나선 윤택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위원장은 “삼성은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몰았지만 검찰과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며 “정의와 인권을 말하는 시민단체에게 빨간 딱지를 붙이는 현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의 삼성공화국”이라고 꼬집었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삼성의 연말정산 사찰이 언론에 나오기 전에 우리 사회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었다”며 “삼성은 사회적 책임을 다 한다는 의미를 다시 알아야 한다. 또한 이런 행위를 중단하겠다는 명시적인 약속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5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삼성은 진보성향 시민단체를 ‘불온단체’로 분류하고 계열사 임직원들이 연말정산 때 제출하는 ‘기부금 공제 내역’을 통해 후원 여부를 파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내용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재판 과정에서 알려졌다. 검찰은 법정에서 노조원뿐 아니라 일반 직원들의 개인정보도 불법적으로 수집했다며 ‘불온단체 기부금 공제 내역 결과’ 등의 문건을 공개했다. 2013년 작성된 문건에는 20여 개 계열사 직원 가운데 270명이 불온단체를 후원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야스쿠니 한국인 합사 취소 항소심서 日변호사 주장 유족 “아버지 이름 야스쿠니서 반드시 빼내고 말 것”
도쿄고등재판소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적(敵)과의 합사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20일 도쿄고등재판소(법원)에서 열린 야스쿠니(靖國)신사 한반도 출신 군인 및 군속(군무원) 합사 취소 항소심 첫 공판에서 원고측 아사노 후미오 변호사는 논개를 왜장과 같이 모시는 형태의 사당을 가정해 야스쿠니 합사의 부당성을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을 고려할 때 한국인을 야스쿠니에 합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앞서 도쿄지방재판소는 지난해 5월 28일 야스쿠니 합사자 유족 27명이 지난 2013년 10월 제기한 제2차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합사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합사 사실이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합사됐다는 것이) 불특정 다수에 알려질 가능성이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유족들은 항소했고, 이날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열린 첫 항소심 공판에서 원고 측 일본인 변호인단이 구두변론을 했다.
구두변론에 앞서 야스쿠니 합사 한국인 유족 대표로 박남순 씨가 법정 진술을 했다. 박 씨의 아버지인 고(故) 박만수 씨는 1942년 11월 22일 남원 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군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2월 24일 전사했다.
박 씨는 “저는 2005년 국가기록원을 통해 아버지 기록을 받고서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며 “왜 희생자인 아버지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가해자, 전쟁범죄자들과 같이 합사돼 있어야 하냐”고 지적했다.
도쿄고등재판소서 진술한 박남순 씨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야스쿠니 합사 한국인 유족 대표로 박남순 씨가 20일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법정 진술을 했다. 박 씨의 아버지인 고(故) 박만수 씨는 1942년 11월 22일 남원 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해군 군속으로 끌려갔다가 1944년 2월 24일 전사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아버지 유골을 찾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아버지 묘소는 텅 빈 채로 있다”며 “일본 정부는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할 때는 일본 사람이었다며 무단으로 합사해 놓고, 유골 조사를 할 때는 한국 사람이라며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죄에 대해 반성과 사죄는커녕 이렇게 무책임하고 반인도적인 일본 정부의 태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는 머나먼 이국땅 브라운(섬)에 묻혀 있는 내 아버지의 유골을 당장 찾아서 저에게 돌려주고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는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반드시 빼내고 말 것”이라며 “그것만이 침략전쟁에 끌려가 개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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