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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포용적 전위주의와 부국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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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포용적 전위주의와 부국의 정치경제학

admin | 토, 2021/08/28- 19:49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거나 이러한 발전을 정치-경제적 기획으로서 상상조차 못한 것은 부유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국가의 정치에서 좌파와 우파에게도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는 관념의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정치생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요인들과 계급적 이해관계만으로는 부유한 국가들에서 정치의 방향을 설명할 수도 없고 이러한 요인들이 성장을 어떻게 촉진시키고 불평등을 어떻게 줄이는지를 알아낼 수도 없다.

이러한 사회들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사회들의 역사적 경험은 관념의 형성적 역할과 관념 부재의 형성적 역할까지도 동시에 보여준다. 이러한 역할의 실례로서 동시에 이 장에서 탐구한 여건들에 대한 배경으로서 미국과 여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집권한 진보파들과 개혁파들이 포용한 의제의 진화를 고려해보겠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그의 협력자 다수는 제도와 정책에 있어서는 견결하고 진정한 실험주의자들이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은 변혁적 의제를 추구할 수 있는 비상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뉴딜의 제도적 실험주의는 연방정부와 대기업 간의 조정된 행동에 관한 조합주의적 관념을 그 조직원리로 삼았다. 이러한 조합주의적 관념의 주요한 목표는 시장질서를 민주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를 재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조정된 행동의 실천은 나중에 전시경제의 여건 아래서 극단적으로 계속되었다. 경제 회복과 재건에 대한 활기찬 가정들과 회복과 고용을 위한 많은 정책들의 세부사항에서 초기 뉴딜은 초기 나치 정권을 포함하여 같은 시대 다른 국가들의 정부가 경제 불황에 대해 취한 대응과 닮았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은 그들이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때에는 필요로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싸워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권력과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민주당원과 독일 독재자는 모두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의 지배를 받았다. 조합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대안을 발견하고 싶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뉴딜 정책의 발전에서 조합주의적 충동은 경제불안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초점을 한정하였다. (사회보장 프로그램은 그 가장 중요한 실례였다.) 경제불안에 대한 해독제의 제공은 전쟁과 전쟁경제 이후에 대량소비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들로 차례로 이어졌다. 대량소비로의 전환은 부채와 신용의 확대, 흑자경제와 적자경제 사이의 극명한 불균형, 그리고 대중적인 케인스주의의 정신에서 경기순환에 대응하는 경제운영에 의존했다.

궤도의 각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동일한 가정들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러한 가정들에 따르면, 국가는 시장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할 수 있고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이용하여 불평등을 사후적으로 완화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은 시장체제의 구성적인 제도적 법적 안배들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배들은 원래 그대로이다.

지식경제의 포용적 형태의 발전에 유용한 사유는 이러한 가정들에 도전해야만 한다. 하나의 청사진이나 하나의 체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경로로 이해되는 법적 제도적 요건들은 이러한 대안의 조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이 경로는 정책적 아이디어들의 기성 재고를 구성하는 기획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경로는 재산과 고용의 법적 체제들에 대한 혁신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혁신들은 국가에 맞서 시장의 공간을 증가시키거나 축소하는 것 그 이상을 행한다. 그러한 혁신들은 하나의 시장질서를 다른 시장질서로 대체한다.

이러한 관념과 경험의 역사는 현대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의 담론형태를 설명하는 데 일조한다. 한동안 북미와 서유럽에서 통치 엘리트들의 지배적인 기획은 기성의 경제적 제도와 법을 거의 수정하지 않으면서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과 유럽식 사회적 보호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국가적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 중요한 의제는 사민주의를 효율성과 공정성의 이름으로 더욱 “유연하게” 만들고 동시에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주된 방법은 안정적이고 자본집약적인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내부자와 현직자들을 보호하는 노동법을 고쳐서 실업자와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들이 어떤 특정한 직업보유에 의존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휴대 가능한 것이 되도록 이러한 권리들을 설계하려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자는 주요한 제안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발생하는 이득에 비례하여 경제불안에 대한 보증수단들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종종 실현되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이러한 제안의 이행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흔히 있었던 것과 같이) 급속한 경제성장의 배경 아래서 행동하는 재정적으로 원활한 국가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성장은 경제 전반에 걸쳐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확산으로 가능하게 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요청할 수도 있다.

경제적 기회와 권한을 향상시키고 불안정고용과 투쟁함으로써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사민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랑할 만한 종합을 사실상 후퇴시키는 가운데 사민주의를 공동화하는 것이다.

요원한 경제적 정치적 성취물이 아니라 생생하고 영향력 있는 관념으로서 포용적 지식경제의 부재는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에서 우파와 죄파 나아가 중도파에게도 정치와 정책을 형성하는 데에 조력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가 경제 침체와 불평등에 미치는 결과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렇게 해왔다. 지식경제의 부재는 또한 이러한 부재가 경제정책과 경제성장의 현재 경로에 대한 대안들의 가정에 대해 미치는 효과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렇게 했다. 원리에서나 실제에서도 이러한 대안의 결여는 1930년대 위기에서 정부와 기업 간의 조합주의적인 조정 행동에 대한 발전된 대안의 빈곤이 야기한 영향만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사민주의적이고 사회자유주의적인 중도파의 왼쪽에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주도에 대한 신뢰를 잃었지만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사민주의의 자유주의화가 진보파들의 역사적 목표를 완수하는 방법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인식하는 좌파들이 있다. 그 중도파의 오른쪽과 사회민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파의 프로그램의 오른쪽에는 우익 포퓰리즘이 존재한다. 우익 포퓰리즘은 중도파의 기획이 해결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거론조차 못했던 문제들과 열망들을 가진 노동계급 다수의 충성을 얻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우파와 좌파의 공유된 가정들을 고려하고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대안을 인정함으로써 이들 간의 논쟁이 변화될 수도 있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첫째로, 19세기 이래로 고전적 또는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세력도 여전히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변형들”에 대한 문헌에서 탐구된 차이들과 같이 매우 제한된 범위의 변형만을 허용하는 안정적인 법적, 제도적 건축구조를 갖고 있다고 상정한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초기 단계를 넘어 발전을 이루려면 제산체제와 자유노동의 법형식에 대한 혁신뿐만 아니라 국가 또는 국가가 수립한 분권적 기구들이 기업과 함께 작업하고 기업들이 서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조건들을 규정하는 안배들과 같은 근본적인 안배들에 대한 혁신까지 요구하지만, 앞서 말한 좌파와 우파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을 아예 배제한다.

둘째로, 현대의 진보파들과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대안적인 시장체제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해 변혁적인 접근법을 가질 수 없다. 진보파들은 대체로 보수파들에게 공급측면을 내주고 수요지향적인 정책의 우선성에 전념해왔다. 공급측면에 대한 전통적인(고전적 자유주의적인 또는 신자유주의적인) 보수파들과 포퓰리스트들의 기획은 그들이 자명하다고 여기는 법적 제도적 내용을 가진 시장질서를 보존하거나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제도들을 재편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경제에 대한 정부개입으로 낙인찍고 시장을 억압하는 것과 이를 쇄신하는 것도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시장체제의 존재를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셋째로, 구조적 대안이 없는 경우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대량생산을 선진적인 제조업과 관련된 서비스업(경제생활의 부분들에서 지식경제가 취하는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하기보다는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을 방어하는 데 몰두한다. 스위트하트 약정은 해당 국가를 떠나거나 사업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기업들을 처리하고 무역 규제들도 동일한 [철 지난 공장제 대량생산]의 방향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더욱 발전된 후속 형태로 만들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서 대량생산을 지지하는 것과 포드주의 제조업의 사후세계를 사라진 대안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계속 누리고 있는 권위에도 불구하고 철지난 포드주의 대량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동일한 이유로 [선진국에서도]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정책이다.

넷째로, 이러한 좌파와 우파는 경제성장의 기본전략으로 금융완화정책(중앙은행이 시행하는 확장적 통화정책)의 사용을 묵인한다. 정부활동에 대한 재정적 제약은 확장적 재정정책의 역할과 특히 경제의 물리적 기반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공투자의 전망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금융완화정책은 잃어버린 경제성장 전략을 대신할 수 없다. 성장과 고용을 촉진하는 금융완화정책의 효과는 곧 소진된다.

경제활동 규제의 범위, 공공 서비스와 사회적 권리들의 수준, 금융조달 및 재분배적 특성, 누진세의 미덕, 심지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공적자원과 정부시책의 이용과 관련하여 이러한 좌파와 우파의 차이들은 실질적이다. 그러나 정책의 수립과 실행에 이르면 그 차이들은 정도의 문제로 내려앉는다. 내가 열거한 실천적인 정치경제학의 공유된 가정은 이러한 차이들의 의미를 제한한다. 공유된 가정들은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확보 실패가 공유된 가정들의 호소력을 떨어뜨리는 상황에서도 경제적 유연성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고 사민주의를 자유주의화하고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 만드는 중도적 프로젝트의 생명력을 갱신한다.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지평 축소는 그 의미를 해명해주는 역사적 배경(20세기 중반의 사민주의적 타협안과 타협 조건들에 대한, 내가 말한 중도파, 좌파, 우파의 재론실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타협안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란스러운 시기에 예견되었고 대전 직후 30년 동안 마무리된 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의 조건 아래서 생산과 권력의 조직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세력들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했다. (혹은 이러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은 국가정치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대가로 국가는 경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규제하고 누진적 과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며 경기순환에 맞서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사용하여 경제불안을 완화시킬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시장질서를 새로이 상상하고 만들려는 시도의 완전한 포기는 하나의 관념 그 이상으로 변하였다. 그러한 포기는 이러한 나라들에서 제도나 관행 나아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경제적 교리로 정립되었다. 그러한 포기는 내가 말한 중도, 진보, 보수적 입장들의 제도적, 이념적 맥락을 규정했다. 이러한 입장들의 전제들은 각 입장의 가정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 중 어떤 것도 이러한 타협안의 제도적, 이념적 여건들 안에서 해결될 수도 없고 심지어 거론조차 될 수도 없다. 그러한 문제들을 거론하고 해결하려면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제도를 혁신함으로써 사민주의적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구조적 변화가 일상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방식으로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와 20세기의 급진적인 프로그램적인 의제들이 상상하듯이 하나의 확정된 제도적 체제를 다른 제도적 체제로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형태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선진부문과 후진부문 간에 경제의 계층적 분할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분할은 대다수의 근로자와 기업이 더욱 생산적으로 되는 데에 필요한 수단을 거부하고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의 기반을 파괴한다. 역사적인 형태이든 최신의 자유화된 형태이든,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선진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사정은 그러한 사회의 현재 정치생활에서 매우 특징적인 좌절, 즉 노동계급 다수에게 자신의 이익과 열망이 희생당해 왔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바로 여기에 세계 최고 부국들에 대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의미가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의 가정과 제안들은 이러한 중도파, 좌익, 우익 진영의 그것과 차이를 보인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만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응답을 제공할 수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20세기 중반의 타협안이 배제한 것(시장과 국가의 관계에서 행동의 여지를 다소간 부여하기보다는 시장을 규정하는 안배들을 쇄신하려는 시도)을 고수함으로써 이러한 타협안의 조건들을 재론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 그 이상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정치와 실천적 정치경제학에서 하나의 입장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와 같은 정치경제학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세 가지 연결된 주제들 중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나머지 두 주제는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 나아가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재정은 나쁜 주인보다는 좋은 하인이 되어야 한다. 재정은 스스로에게 봉사해도 무방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생산적인 의제들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을 위한 자금조달은 현재로서는 자본시장 활동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장차 주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지식경제는 단순히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기획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집약적인 급진적 혁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부정적인 수단과 긍정적인 수단을 둘 다 활용함으로써 이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산출물 증가와 생산성 향상에 그럴 듯한 기여를 하지 못하는 금융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부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자본을 생산으로, 특히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자산의 창출로 연결시키고 자본에 대한 접근과 첨단 기술, 관행, 지식에 대한 접근을 조합하는 안배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긍정적인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

지식경제가 갇혀 있는 고립적 전위부문들 바깥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려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노동의 지지를 강화하는 일련의 제도적, 법적 혁신들이 필요하다. 노동수익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진시키는 데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더욱이 노동의 권한을 강화하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더욱 확산된 형태가 간직한 경제적 잠재력은 자산 소유자의 재정적 이익이나 경영자의 권력적 이익에 희생되지 않게 된다. 심화되고 확산된 지식경제는 자유노동의 여건에서 번창한다. 한마디로 더 자유롭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포용적인 지식경제의 법적 제도적 요구사항들에 대한 나의 논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요구사항들의 함축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우리는 생산의 재편이 세계경제에서 분산적인 계약상의 안배들과 노동과 세금 차익에 근거하여 노동력의 점차 많은 부분을 불안정한 고용에 내모는 것을 저지해야만 한다. 우리는 공장제 대량생산(민간고용)과 행정적 포드주의(정부고용)의 상황에 부응하는 기존 노동법 이 외에 새로운 생산의 현실조건들을 극복하기 위한 제2의 노동법을 만들어야 한다. 제2의 노동법은 시간제 업무, 임시적 업무 및 하도급 업무 혹은 임노동자가 누리는 보장과 혜택도 갖지 못한 임노동의 변형으로 수행된 비자발적인 자영업 등 변칙적인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대표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이 적절하게 조직 및 대표될 수 없거나 조직과 대표의 결과들이 충분하지 못한 경우 제2의 노동법은 불안정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고용관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보호형식은 가격중립성이라는 법적 요건일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 아래서 수행되는 노동은 안정적인 전일제고용체제 아래서 수행되는 가장 근접한 등가적인 노동과 최소한 동일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종속적인 임노동이 자유노동의 고차적인 형태, 즉 독립자 영업과 협동조합 또는 동업관계에 자리를 양보함에 따라 노동은 장기적으로 더욱 자유로워진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이 자원의 대규모 집적의 요구[규모의 경제]와 양립할 수 없다면,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자유노동의 지도적인 형태가 될 수 없다.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은 생산의 자원과 기회에 대한 분산적 접근의 조건, 즉 재산 및 계약 체제에 대한 혁신이 없다면 그러한 요구와 화해를 이룰 수 없다. 전통적인 통일적인 재산권은 분산적인 경제적 주도권을 조직하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재산과 계약에 관한 대안적인 사법체제들은 동일한 시장경제 내에서 실험적으로 공존해야만 한다.

지식경제의 보급되고 급진화된 형태의 확립, 금융을 생산에 더 훌륭하게 가동하기 위한 금융과 실물경제의 관계의 재편, 불안정노동의 보호에서 시작하여 자유노동의 고차적 형태인 독립자영업과 협동조합으로의 전진 등이 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와 자유사회주의와는 다른 대안의 핵심이다. 이러한 방안들은 20세기 중반에 자유화된 사민주의적 타협안이 더 이상 성취할 수 없는 과업, 즉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경제의 계층적 분할로 인한 불평등을 해결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경제적 의제의 주요한 축들을 규정한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은 초기 단계들을 넘어 전진하려면 이 책의 앞부분[특히 제3장과 제4장]에서 논의된 사회, 정치, 문화에서의 여타 변화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첫째로, 실천적 정치경제학의 이러한 의제는 의제에 합당한 역량을 갖추려면 기계와 백과사전으로서의 정신에 맞서 상상력으로서 정신을 지지하는 교육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의제는 모든 문화영역에서, 심지어 경제활동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도 실험주의의 강화에 의지한다. 이러한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 경험의 지배적인 성격은 발견에 대한 제약들과 함께 경제적 재건 프로그램을 압도하고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둘째로, 이러한 의제는 사람과 그 능력에 대한 투자라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최대 유산을 포기하기보다는 발전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적 포드주의(표준화된 공적 서비스의 관료적 제공)를 고수하는 것과 계약을 통해 공적 서비스를 이윤 추구 기업으로 이전하는 것 사이에 양자택일적으로 체념해서도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공적 서비스의 제공은 광범위한 협력적 활동을 통해 정부와의 협력관계에 시민사회를 참여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을 쇄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법적 제도적 형식에서도 혁신을 이루어야만 한다.

셋째로, 이러한 의제는 시장의 조직과 공적 서비스의 제공을 위한 안배들을 포함하여 사회의 기성구조를 압력과 시험의 대상으로 삼는 고에너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위기를 변화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구조변화를 일상적 경험의 평범한 연장으로 만든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우리가 사회와 경제의 형성적 안배들과 가정들을 부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로 바꾸도록 허용한다. 고에너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온도를 높이고 정치의 속도를 촉진하는 정치 제도 하에서 그렇게 한다.

심화되고 보급된 지식경제, 변증법적인 교육, 공적 서비스 제공에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한 시민사회의 자체 형성, 고에너지 민주주의 등은 상호보완적인 기획들이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서든 진전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우리의 진전이 제약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련의 기획들은 어떤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상황과 선택은 다른 전선에서 전진의 실패로 부과되는 제약조건에 봉착하기 전에 어떤 전선들에서 우리가 먼저 전진해야 할지를 정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의 과정에서 포용적 전위주의 프로그램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모든 도덕적 이익뿐만 아니라 물질적 이익도 상당한 경제적 침체와 무력화의 상황에서는 달성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경험, 권능, 보수를 공유할 기회를 거부한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노선을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정치에서 좌파, 우파, 중도파 사이의 관계를 재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중적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환상적인 비제도적인 지름길로서 포퓰리즘이라는 정치적 사고와 행동 형식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생산역량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물질적 이익과 행위주체성(개인들로서, 나아가 국가의 보호 아래 조직된 사람들로서 경제와 국가의 기성제도에 대해 작용하고 혁신하고 형세를 전환시키는 우리의 능력)의 고양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이익을 연결시킨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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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야오 샹뱌오 인터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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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부터 아시아의 근대성을 선구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했던 일본의 루쉰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 시작하는 일련의 책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책은 매우 평이한 언어로 기술돼 있다. 학부 2학년부터 6년간 작성한 민족지를 기초로한 석사논문 <경계를 넘나드는 커뮤니티 – 베이징‘저쟝촌’의 생활사>가 단박에 중국인문학의 고전이 돼, 베이징 대학의 천재로 불리던 현 옥스포드대학 인류학과 교수 샹뱌오는 대중과 소통할 때 난해한 현대 서구이론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향신鄉紳‘의 관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교조적 논리가 아니라 자기의 부근에 존재하는 문제에 개입해, 생활의 맛이 우러나는 언어로 독립적인 서사를 만든다. 그로부터 출발해 세계에 대한 비젼을 그려낸다. 글로 쓰는 대신 대담 방식을 사용한 것도, 이렇게 명료해진 개념만이 자신의 목소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샹뱌오의 석사논문이 유명해진 것은 관점의 전환때문만은 아니다. 샹뱌오가 6년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직접 개입하며, 세심히 기록하고 분석한 것은, 철옹성처럼 보이는 중국의 국가 시스템의 구멍을 비집고, 중국의 유동하는 ‘민간’이 만들어낸 역동성있는 소사회였기 때문이다. ‘민간의 자치와 결집‘이라는 근사한 명제만으로는 담기 부족한 날것의 생명력이 느껴지는데다, 전통적 인간관계에서 진화한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몇년전 출간된 개정증보판에 추가된 서문에는 중국 사회의 규범화, 제도화가 이미 근대적 위생의 관념으로 이 미생물적 사회를 정리해버렸다는 암울한 보고가 추가돼 있다. 이것은 국가와 자본의 동학의 결과이지만, 목적론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근대화의 귀결로 보는 것이 더 공정할듯 하다. 전가의 보도처럼 신자유주의나 전체주의의 유령을 소환할 때마다, 모든 서사의 디테일이 사라지고, 비극적 허무주의 아니면 공허한 혁명의 구호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 어찌보면 산만해 보이는데다 구멍이 뻥뚫려 있다. 80년대 중국 전역은 개혁개방의 ‘문화열’로 온 나라가 들떠있었다. 80년대 후반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술회하는 그의 대학생활은 92년 시작되는 캠퍼스 생활에 앞선 일년간의 병영 군사훈련으로 이어지는데, 중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홍콩문제도 입질이 오기에 낚싯대를 당기니 빈바늘만 딸려온다. 책에 인용된 과거의 글들을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고 나서야 무릎을 쳤다. ‘Occupy Central 센트럴 점령’당시 홍콩을 근거리에서 관찰하던 그는 중국내의 음모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천안문사태의 후과가 홍콩사태의 한 원인이 됐음을 밝히는 동시에, 두 체제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중층적 역사를 근거로, 홍콩시민들의 급진적 요구도 자제를 당부한다.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비록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연구대상인 동시에 스스로 유동하는 경계인인 그의 자리가 지금은 꽉 막혀버린 중국의 안팎을 연결할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둔다. 정치경제학과 문사철에 기반한 하나의 대서사에 익숙하던 선배들과 달리, 인류학자인 그는 생활속의 수많은 작은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묘사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을 제안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탈출구 없는 초경쟁사회가 된 중국에서, 그는 개인과 국가만 존재하는 가운데 중간이 되는 사회 ‘부근’이 사라진 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풀자면 곁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공동체이고, 조선의 선비에 해당하는 향신은 마을의 어른이다. 동아시아 인류학자들의 관점이 모이는 지점에서 다시 대화가 재개될 것이다.

 

*이 글의 축약본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허락을 얻어, 다른백년에도 옮깁니다.

 

김유익

목, 2021/07/0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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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지역으로 가져오기

때론 세상에 온통 나쁜 소식만 들려오는 것 같다. 기후혼란, 생물멸종, 고용불안, 빈곤, 폭력사태∙∙∙. 이런 소식들은 우리를 답답하고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대부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여러 문제를 따로 해결할 필요 없이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저개발국가에서 가장 산업화된 선진국까지, 세계 여러 곳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무엇이 문제인지 확실히 알았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경제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의 우선순위를 혼동하는 바람에 잘못된 순위를 앞세워 다른 대안들을 묵살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글로벌 경제를 지지한다. 글로벌 경제는 몹시 비대하고 강해져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글로벌 경제는 기술-경제 체제로서 인간생활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상품으로 만든다. 글로벌 경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키며 번영하고 있다.

그러나 꼭 이런 길로 가야 할 필요는 없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구태의연한 권력기관과는 전혀 다른 풀뿌리 운동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경제구조를 지역화하여 생태계와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육대주에서 일어나 힘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경제가 문화와 생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생태가 경제를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풀뿌리 운동은 사람들의 힘과 인내, 선한 의지를 증명하고, 신속하게 확산하여 앞으로의 정치와 경제 지형을 바꿔놓을 것이다.

지역화는 글로벌 경제가 입힌 손상을 만회하는 가장 전략적이고 효과적이며 상식적인 방법이다. 지역경제가 튼튼해지면 개인, 즉 ‘내부’의 변화뿐 아니라 정치 변화, 곧 ‘외부’의 변화까지 일어난다. 지역화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경제학이다. 빈부 격차를 크게 줄이고, 에너지 사용과 공해를 줄인다. 아울러 지역화는 행복의 경제학이다. 개개인을 공동체, 그리고 자연과 다시 이어주기 때문이다.

지역화는 고립화가 아니다. 사실 정책적으로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전환하려면 국제협력이 필요하다. 글로벌 은행과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유무역조약이 아니라 환경을 보호하는 구속력이 있는 협정을 맺어야 한다. 풀뿌리 운동에서도 시급히 정보를 공유하고, 국가와 사회 안팎의 각계각층과 협력해야 한다. 지역화는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처방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활동을 변화시켜서 지역사회와 인간을 다양하게 만든다. 나는 지역화를 ‘경제를 지역으로 가져오기(bring the economy home)’라고 부르고 있다.

 

큰 그림 행동주의

글로벌에서 로컬로 방향을 바꾸는 지역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사뭇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즉 풀뿌리 운동과 정책 변화를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 상향식 풀뿌리 차원에서 로컬의 수많은 기업은 현재 기본수요를 장악하고 있는 소수의 독점기업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지역사회기반의 경제구조는 사회와 경제 구조를 재편하여 자연과 인간의 기본욕구를 모두 충족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더 확대하려면 하향식 정책변화도 필요하다. 세금혜택과 보조금을 로컬로 돌려야 하고, 무역과 금융을 규제해서 (은행을 포함한) 기업들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사회가 정한 규칙과 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세계화를 지원하는 공공정책의 방향을 지역화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까닭은 전 세계의 정책결정권자들이 대기업과 은행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운동이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운동은 발전의 방법(동반경제성장, 무역진흥, 첨단기술, 기업후원 등)이 정확히 일치하는 보수나 진보의 정치인들에게 희망을 걸기 보다는,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시민운동은 서로 연대하여 양분된 좌우를 초월하고, 구태의연한 정치를 넘어서고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 현 체제를 조금 손보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의 수가 임계치에 달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근본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의미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변화를 만들어낼 결정적 다수를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는 ‘큰 그림 행동주의(big picture activism)’의 목표다. 시민의 의식을 높이려면 이론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지역화 사업의 감동적인 사례를 날마다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건하자마자 다양한 정신적∙심리적∙실용적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큰 그림 행동주의는 기본 전제에 잘못이 없는지 폭넓게 재검토한다. 신화와 잘못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 오늘날의 소비자문화는 모순적인 개념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저녁뉴스에서 소비자 지출이 감소하면 당장 세상이 멈출 것처럼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자의 탐욕이 세상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제체제를 만든 것은 개인의 탐욕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보조금과 법, 세금을 이용해 지구와 개인의 안녕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제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최근까지 글로벌 경제를 해체하는데 필요한 폭넓은 관점은 찬밥 신세였고, 그 분야에는 편협한 시장근본주의자들이 득세했다. 결과적으로 유일한 길은 계속 팽창하는 비인간적인 경제규모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고, 부와 권력은 더 적은 소수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큰 그림 행동주의는 우리에게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해준다.

큰 그림 행동주의가 성공하려면 몇 가지 장벽을 극복해야만 한다.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곧장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우리는 이미 경제가 문제라는 것도 알고 있고 기업이 너무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왜 그걸 계속 논의하고 앉아있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세력이 환경문제와 사회정의문제 이면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많아도, 경제가 문화와 개인의 자부심을 허물고, 민족∙인종∙종교 갈등을 높이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무역조약이 기업과 은행에 막대한 힘을 실어준 덕분에 그들은 사실상 세계정부가 되고 좌익이든 우익이든 어떤 정당이 선출되더라도 그 정당을 배후에서 지배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미 기업의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이 글로벌과 로컬을 아우르는 폭넓은 관점을 가지면 문제에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로컬의 미래를 위한 정책 제안

(1) 로컬 경제를 위한 대안무역 지침

국가들은 글로벌 무역규제를 계속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대신 함께 힘을 모아 건강한 국가경제와 로컬경제를 우선하는 협약을 체결할 수 있다. 앞으로 무역의 목적은 기업의 이윤과 국내총생산(GDP)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잉여생산물을 시장에 공급하고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재화를 획득하는 것이다.

무역규제철폐를 더 이상 관용할 수 없는 개인과 단체들이 이미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유럽에서는 80개가 넘는 단체들이 연대해서 대안무역지침의 초안을 마련했고 총선후보자 193명이 그 지침의 목표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2) 지역기반의 금융체계 확립

은행과 금융체계를 다시 규제해서 유령자산을 만들지 못하게 제한하고 무질서한 자본의 흐름을 줄여야 한다. 아울러 지역투자부문에서는 지역민이 연금기금과 증권교환을 통해서 지역사회에 투자하는 길이 거의 막혀있는 구시대적인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

은행의 대출관행도 변해야 한다. 상업은행들은 대기업에 비해 상당히 높은 대출이자를 요구하면서 작은 기업들을 차별해왔다. 게다가 대기업 중역들에게는 개인대출보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소상공인들에게는 요구하기도 한다. 지역사회의 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을 더 많이 지원하고 이용하면 훨씬 더 다양한 중소기업이 번영할 수 있다.

(3) 건전한 경제지표 적용

의사결정권자들은 흔히 국내총생산(GDP)이 성장하면 이를 가리켜 정책이 주효한 증거라고 말한다. 국부의 척도라는 GDP가 끔찍한 혼선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르는 소리다. GDP는 시장의 활동, 주인을 갈아타는 돈의 총량을 말해줄 뿐이다. GDP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비용과 이익을 구별하지 않는다. 암, 범죄, 교통사고, 기름유출에서 나가는 지출이 증가하면 GDP도 덩달아 오른다. GDP에는 돈이 오가는 거래만 고려하고 가족과 공동체, 환경의 기능은 산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돈은 GDP에 들어가는 반면 가족이 집에서 자녀를 돌보는 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에 사람들은 GDP를 대신할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실질진보지표(GPI)이다. 기존의 지표에다 경제∙환경∙사회의 중요한 요소를 단일체계에 넣어서 발전과 실패의 정확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다. 오스트리아, 캐나다, 칠레, 프랑스, 핀란드,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영국에서는 이미 GPI를 계산해서 발표하고 있다.

(4) 편파적인 세금체계의 개선

거의 모든 나라가 체계적인 세금규제로 중소기업을 차별한다. 지속 가능한 소규모 생산은 보통 더 노동집약적인데 소득세, 사회복지세, 근로소득세 등 무거운 세금을 노동에 부과한다. 한편 자본집약적, 에너지집약적 기술을 사용하는 대기업 생산자는 세금우대(가속상각, 투자세공제, 세액공제)를 받는다. 편파적인 세금체계를 바꾸면 로컬경제를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기계보다 사람을 더 선호하게 되어 일자리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생산에 쓰는 에너지에 세금을 물리면 첨단기술투입에 덜 의존하는 기업, 곧 노동집약적인 소기업이 진흥한다. 게다가 생산과 소비로 일어나는 환경파괴대책을 포함해 화석연료에 세금을 부과하면 실비가 가격에 반영될 테니 운송은 줄고 지역소비를 위한 생산은 늘며 경제는 건강하게 다각화될 것이다.

(5) 재생에너지의 분산작업

현재 재생에너지 기술로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은 화석연료에 비해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불균형을 뒤집으면 오염은 줄어들고 일자리는 늘어나며 장기적인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를 비롯해 어떤 형태의 에너지든 발전소는 분산하는 것이 좋다. 에너지원을 최종 용도에 가까이 두면 전송망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에너지원을 분산하면 지역경제에서 돈이 새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정치권력도 확실히 분권화한다.

완벽한 정책은 없지만 전 세계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분산된 재생에너지의 확산을 촉진하는 새로운 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를테면 세금우대, 보조금, 발전차액지원제도 같은 금융지원, 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제도 등이 있다. 미국은 주 차원에서 재생에너지를 일정비율 의무적으로 공급하도록 하는 정책인 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제도(RPS)가 불씨가 되어 태양광발전소와 풍력발전소가 급격히 늘어났다.

(6) 다품종 유기농 생산지의 확대

대다수 국가는 농업보조금을 대규모 산업농 기업에 몰아준다.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사이에서 보조금의 3분의 2는 부유한 거대농가가 받는다. 농업연구자금도 생명공학과 화학∙에너지 집약 단일품종농업에 크게 편중되어 있다.

소규모 다품종 농업을 장려하는 연구를 더 많이 지원하면 농촌경제가 활기를 띨 뿐 아니라 생물이 다양해지고 토양이 건강해지며 식량안보를 이룩할 수 있다. 또한 식단에 균형과 다양성이 생기고 식재료가 더 신선해질 것이다.

(7) 소규모 로컬생산자를 위한 규제 완화

소규모 기업은 대규모 생산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규제하는 법 때문에 부당한 세금을 내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예를 들어 공장형 밀집사육방식의 양계장은 분명히 환경과 보건규제를 철저히 받아야 한다. 그러나 닭 여남은 마리를 놓아 기르는 소농 같은 소규모 생산자도 기본적으로 같은 규제를 받기 때문에 치솟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일리노이주는 일명 ‘코티지푸드’ 법안을 통해 잼과 피클 같은 여러 보존식품을 소규모로 생산하는 생산자를 위한 규제완화를 고려하고 있다. 비슷한 법안 17개가 미국 전역에 도입되었다.

(8) 토지사용규제의 합리적 개선

지역과 지방의 토지사용규정을 개정하면 야생지와 공지, 농지를 개발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토지신탁에 정치지원과 금융지원을 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공공자금으로 농지개발권을 사서 교외 확장을 막고 농부들의 금융부담을 덜어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사례도 있다.

(9) 로컬미디어와 로컬엔터테인먼트 지원

지역사회 라디오 방송국부터 라이브 뮤직과 극장 등에 이르기까지, 지역의 공연예술문화시설을 지원하면 세계화한 미디어를 대신할 대안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춤과 노래, 축제 같은 공동창작 엔터테인먼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지역사회의 유대감은 한층 더 튼튼해질 것이다.

(10) 로컬에 기반한 교육으로의 전환

학교교육은 장차 현재의 아이들을 고용할 기업의 요구에 맞게 점차 변하고 있다. 기업에 맞춘 교과과정에서 벗어나 지역에 기반한 다양한 형태의 학습으로 전환하면 막대한 혜택을 얻을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 경제를 위한 경쟁적이고 전문화를 장려하는 교육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과 문화, 지역화한 경제에 맞게 변할 것이다. 지역에 맞는 농업과 건축, 적합한 기술교육을 제공하면 기본수요를 충족시키는 생산분권화가 더욱 진전할 수 있다.

 

세계 지역사회의 다양한 풀뿌리 활동

(1) 로컬금융

공동체은행과 신용협동조합은 주민들이 멀리 있는 기업이 아니라 마을과 지역사회에 투자할 수 있는 금융기관이다. 이 두 곳에서는 창업자금을 대기업에만 대출해주는 시중은행과 달리 소기업에도 낮은 금리로 대출해준다.

지역투자는 앞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이룰 것이다. 슬로머니(로컬 식량체계에 대한 자본투자를 돕는 비영리단체)의 여러 지부에서는 이미 많은 투자를 소농과 식품기업에 유치했다. 지역증권거래, 소액투자편드, 협동조합투자편드, 지역에서 투자하는 연금펀드 같은 여러 구상도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지역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면 돈을 지역경제 안에 붙잡아둘 수 있다. 마찬가지로 타임뱅크(비시장영역에서 봉사활동을 시간가치로 환산하여 기록, 저장, 교환하여 공동체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운동으로, 시간의 가치교환을 위해 가상화폐를 발행하기도 한다)와 지역통화운동(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은 사실 대규모 지역사회 물물교환체계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희망금액을 게시한다. 따라서 돈이 부족하거나 실물화폐가 없는 사람들도 지역경제 안에서 돈을 흐르게 할 수 있고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2) 바이 로컬, 로컬기업

바이 로컬(Buy Local)운동은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로컬기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 운동은 지역경제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먼 곳에서 제조해서 인위적으로 가격을 낮춘 상품에는 환경과 지역사회가 지불할 비용이 숨어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교육효과도 있다.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연대해서 연합체를 만들면 서로 지원하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북미의 자영업자 약 3만개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80개 이상의 네트워크를 갖춘 지역생활경제기업연합(BALLE)을 조직했다.

(3) 로컬에너지

전 세계에는 지역사회가 소유하는 분산형 에너지시설에 투자한 도시가 많다. 예를 들어 콜로라도주 포트콜린스에서는 600킬로와트 ‘태양광 정원’ 설립을 계획하고 있고, 인도 비하르주 다니이마을에서는 350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태양광 에너지 ‘마이크로 그리드’를 설치하고 있다. 이러한 소규모 사업들은 무공해 재생에너지원을 이용한다는 것 이상의 이점이 있다. 첫째, 현지에서 전력을 생산하기 때문에 송전인프라를 확충할 필요가 없다. 둘째, 주민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전력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에너지 비용을 관리한다. 셋째, 지역투자자들은 남는 전기로 수익을 얻는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다른 지역 투자자 소유 전력회사(IOU)에 넘어간 에너지체계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되찾으려고 지방정부를 설득하고 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완전히 다시 공영소유로 만들거나 시와 군이 IOU 외에 지역에서 새로운 전력공급자를 지정할 수 있는 지역사회 선정권(Community Choice)이라는 정책을 채택하면 된다.

(4) 로컬푸드

로컬푸드 운동은 전 세계에서 매우 큰 성공을 거둔 풀뿌리 활동이다. 소비자와 근거리에 있는 농부를 직접 연결하는 공동체지원농업(CSA) 덕분에 규모가 작은 다품종 농장들이 번창하고 점점 더 늘어났다. 소비자들은 대개 자신이 먹을 식재료가 자라는 농장을 직접 알고 있고, 농장에서는 일손이 부족하면 소비자들의 도움을 반긴다. 소농들은 믿을 수 있는 안정된 시장을 확보할 수 있고, 소비자들은 슈퍼마켓보다 더 신선하고 건강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미국은 1986년에 단 두 개였던 CSA의 수가 2014년에는 6200개 이상으로 급증했다.

농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농부직거래장터 역시 지역경제와 환경에 이롭다. 미국의 농부 직거래 장터의 수는 1994년 1755개에서 2014년 8268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직거래장터와 관련해 로컬 유기농 먹거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유기농 농지면적이 2001년부터 두 배로 증가했다.

지난 50년동안 북반구와 남반구에서는 청년들이 농촌을 떠나는 추세여서 도시화가 빠르게 이어졌고 농촌사회도 사라졌다. 오늘날 여러 청년농부는 그러한 트렌드를 뒤집고 있다. 미국에서 결성된 전국청년농업인연합(NYFC)은 600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했다. 전 세계 73개국 2억 농민이 연대한 비아캄페시나에는 청년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단체가 있다.

(5) 로컬미디어

지역사회의 대중매체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고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안을 알려준다. 아울러 시민들의 힘을 모아서 지역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결속을 다지고 지역문화를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망 중립성’이 공격을 받아 위협에 처하자 통신망 접근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유지하려는 여러 단체가 힘을 합쳐서 싸우고 있다. 최근 ‘지역사회가소유한브로드밴드’ 운동이 일어나 지역사회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제하는 힘을 기르고 있다. 2015년 현재 미국 전역에서 500개가 넘는 지자체들은 자체 브로드밴드 망을 구축하고 더 많은 주민이 믿고 쓸 수 있는 빠른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여 지역경제를 살린다.

(6) 대안교육

자연결핍장애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자 야생지나 농지를 교육장소로 활용하는 학교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예를 들어 숲속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종일 야외에서 지내면서 현지에서 자라는 식물과 버섯 종류에 정통한 전문가가 된다. 청소년과 성인에게 야생에서 자립할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데 미국 버몬트주에 있는, 전통기술을 익혀서 뿌리를 되찾겠다는 뜻의 루츠(ROOTS) 학교도 그러한 곳이다.

(7) 로컬기반의 보건의료

몇 해 사이에 전통대체의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일반의사들조차 약초치료법, 동종요법, 바디워크요법, 이완요법에 관심을 가질 정도다. 이같이 차분하게 예방을 강조하는 의술은 더 인간적인 보건의료체계로 돌아가는 길이다. 지역에 기반한 보건의료체계는 인간의 전인(全人)을 강조하며 생명을 더 넓게 바라본다.

(8) 로컬 계획공동체의 건설

규모가 몇몇 가구에서 수백 가구에 이르는 생태마을은 매우 인기가 높고 성공적이고 다양한 계획공동체의 하나다.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연합체로서 ‘글로벌 에코빌리지 네트워크’를 통해서 연결된 생태마을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 걸쳐 수백 곳에 이른다.

전환마을은 탄소집약적인 글로벌 경제에서 전환을 선택한 소도시와 대도시의 공동체 모임으로, 북미와 유럽에서 인기가 높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식량, 에너지, 상업, 예술, 교통, 보건 등 로컬 경제의 여러 부문별 사업을 계획한다.

 

갈림길에서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수십 년 동안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 다른 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체제는 더 이상 대다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이 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진정한 지속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거주형태, 에너지원, 식량생산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분산을 시켜서 사람과 자연의 밀접한 관계를 재건해야 한다.

이 새로운 경제의 중요한 요소는 규모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자립경제에 기초한 경제적 지역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역중심의 경제에서는 사람과 환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금융구조와 상업활동이 지역과 문화에 맞춰 변화할 것이며 문화와 생물, 농업 등 모든 면에서 다양성을 존중할 것이다. 진정한 지역화가 이루어진다면 의미 있는 일자리들이 많이 생기고, 튼튼하고 탄력 있는 지역사회의 토대도 구축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소속감과 목적의식, 결속력이 높아지면서 마음 충만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로컬퓨처스 대표, 『오래된 미래』 저자

화, 2020/03/1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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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람들은 국회 공무원인 국회 전문위원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또 국회의원과 전문위원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널리 알리고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항상 고심한다. 그러다가 최근 괜찮은 교재 자료를 발견했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언론기사가 눈에 띈 것이다.

바로 7월 12일자 <아시아경제>에 게재된 “정무위 전문위원실 단톡방·유튜브發 불량코인 유사투자자문업 단속해야”란 제목의 기사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회 정무위원회 전문위원실이 가상자산 법안 검토보고서를 통해 오픈채팅방·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유포되는 불량코인 투자자문 영업형태에 대한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현재 발의된 4개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SNS 관련 내용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단체채팅방을 통한 불량코인 투자자문 행태가 만연하니 규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제언이다. 수석전문위원 검토보고서는 법안1소위원회 법안 심의 과정에서 사실상 가이드라인이 되는 자료, 향후 법안 병합심사 과정에서 관련 규정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의 가상자산 관련 법안 검토보고서“4개 법안에는 관련 규제 내용이 없지만, 최근 오픈카톡, 유튜브 등 SNS를 통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가상화폐 투자자문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용료를 수취하는 영업행태가 있다이에 대한 규제 방안도 필요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코인 발행업체 심사에 금융위원회 뿐만 아니라 기술 이해도가 높은 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참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3개 법안(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이 코인 발행업체에 대해 금융위원회 신고·인가·등록을 규정한데 따른 보완 조치 성격이다. 검토보고서는 심사를 금융위원회 (혼자) 수행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코인 개발이 충실히 이뤄진 것인지 기술적인 면을 심사하려면, 산업 이해도가 높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부 등도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자료: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에 대한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 검토보고서

3개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 의원안)이 규정한 피해보상 규정과 관련해서는 손해배상 책임을 법에 명시해 투명성과 안전성을 제고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손해 방지를 위한 주의 의무이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고 했다. 또 김병욱 의원안이 담고 있는 역외조항(자국 영역 외에서 발생한 법률 문제에 대해 자국법을 적용하는 일)을 제시하며 해외요인으로 시세조종 등이 발생해 피해가 야기되는 경우도 있으니 효과적인 불공정행위 제재를 위해 국제적인 협력과 공조도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료: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에 대한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 검토보고서

한편 가상화폐 관련 4개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13일 전체회의에 상정돼 법안1소위원회로 회부된 뒤 이달 중 본격적인 법안심사가 진행된다. 법안 1소위 심의 과정에선 수석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 의견이 상당부분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여야 모두 당내 가상자산 태스크포스(TF)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안의 필요성에 대한 큰 틀의 합의는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국회 공무원이 지원차원을 넘어 입법을 판단하고 결정하다

본래 국회 공무원은 국회의원을 ‘지원’하는 위치에서 ‘지원’하는 업무에 종사해야 한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국회도 당연히 그렇게 운영되고 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한 위의 기사에서 우리는 국회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국회는 국회 전문위원이 ‘지원’ 차원이 아니라 명백하게 국회의원의 ‘상위’에 존재하면서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다. 국회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침해’하고 ‘훼손’하면서 사실상 입법의 ‘주인공’ 역할을 담당하며 입법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국회의원을 선출하면서 국회의원에게 입법권을 부여한 것이지 이들 국회 공무원에게 입법권을 부여한 적이 없다.

필자는 이렇듯 국회 공무원이 명실상부하게 입법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재의 국회 시스템은 명백하게 위헌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국회의원들은 왜 이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우선 이 시스템이 국회의원에게 너무 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가만히 있어도 옆에 있는 국회 공무원, 입법관료들이 다 알아서 해주니 편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독일 의원들은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법안 검토보고를 위해 분주히 활동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 의원들은 그렇게 고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 제도인가! 우리 국회에서 초등학생을 국회의원 시켜도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바로 이 같은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다음으로 이 전문위원 검토보고 제도가 박정희 유신정권 무렵부터 존재한 시스템이라 이미 수십 년이나 ‘관행’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은 어느 나라든 본래 법안 검토가 국회 공무원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미 국회 공무원의 ‘파워’가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화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은 국회 공무원들이 입법을 좌지우지하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이 시스템을 바꾸라는 문제 제기와 시정 요구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렇게 문제 제기도 없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에게 너무 편하고 귀찮은 일 할 필요도 없는 현 시스템을 바꿀 필요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듯 전문위원이 국회의원의 상위에서 입법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정보와 로비도 국회의원이 아니라 전문위원으로 몰리게 된다. 각 상임위 소관 행정부처를 비롯하여 이를테면, 법원행정처나 검찰의 각종 자료와 정보가 전문위원실로 보고되며, 각종 로비단체와 이익단체의 주장과 로비도 전문위원실로 쏠린다. 김&장 법률사무소 같은 곳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오늘 국회 전문위원실은 국회 입법의 핵심이요 꽃이다.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법안 발의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더구나 법안발의 건수로 소속 정당의 공천 점수도 결정되고, 또 시민단체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을 수 있으니 ‘무책임한’ 날림 법안발의 건수는 엄청나게 많아진다. 그래서 우리 국회의 법안발의 건수는 세계 의회에서 당당 1위다. 겉으로 보면, ‘일하는 국회’의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그야말로 ‘소리만 요란한 깡통’, ‘빛 좋은 개살구’ 그 자체이다. 그러면서 국회는 점점 더 왜곡되어 간다.

 

국회의원이 그 직무를 방기하는 국회, 그것은 국회가 아니다

분명한 점은 우리처럼 국회 공무원이 이렇게 법안 검토를 하면서 국회의원의 윗자리에서 법안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우는 전 세계 어느 의회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국회처럼 국회 공무원이 법안을 좌지우지, 결정권을 보유하고 사실상 입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며 의회 시스템 기본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행태이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우리 국회의 본질이요, “일하지 않는” 국회의 ‘숨겨진’ 진실이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의 본업을 수행하지 않는 국회, 국회의원이 자신의 직무를 방기하는 국회, 그것은 ‘국회’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국회’일 수 없다.

 

소준섭

화, 2021/07/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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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저술한 『진보의 미래』에서 “(자신이) 그냥 앉아서 관료에 포획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한편, 문재인 정부에서도 실패하고 있는 관료 문제에 대해 어느 교수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들)’들은 ‘늘공(늘 공무원인 사람들)’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실 현재의 5년 단임제는 ‘영원한 관료지배의 충분조건’일지도 모른다. 각 분야 관료개혁의 세부적인 각론 없이 허허벌판에서 총론만 들고 적폐청산을 외치다 보니,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관료들에게 각론을 의지하게 된다.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장·차관, 기관장 몇 명 바꾸고 새로운 정책을 편다 해도 관료사회는 꿈쩍하지 않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문재인 정부, 아직 임기 500여일이 남았다”, <오마이뉴스> 2021. 1. 10.)

우리 사회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대통령 한 사람이 홀로 우뚝 서서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채 온 나라를 좌지우지 통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청와대 권력이란 단지 전체 공무원 조직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관료들은 바뀌지 않은 채 언제나 강고하게 온존하면서 그 핵심적인 자리를 장악한다. 국민들이 이름을 아는 장관은 거의 없을 만큼 너무도 수시로 바뀐다. 그러니 행정부 부처의 실질적 주인은 필연적으로 관료일 수밖에 없다. 환경정책이나 노동정책도 대통령과 장관이 지휘하는 듯 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불과 몇 가지 정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정책들을 관료들이 행사하고 있다.

국회 역시 겉으론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온갖 비난을 모두 들으면서 정치와 입법을 좌지우지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국회 입법관료들이 보이지 않은 실권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사실상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치(官治), 관헌(官憲) 국가이다. 이 나라는 대표적인 행정 비대 국가다. 정책 하나하나마다 수백 수천 명의 이해가 걸려 있다. 공무원이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법제가 입헌군주 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강점기에 만들어졌고, 그 뒤에도 그것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우리 법제에는 관헌국가적 잔흔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을 하고자 하는 자는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행정청의 권한을 간접적으로 규율하는 방식이 그 예이다. 이는 국민을 행정권 발동의 단순한 수동적 존재로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官)주주의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법’과 ‘규정’이 사회를 일상적으로 지배하게 된 이른바 ’87체제 이후 ‘법치주의’의 이름하에 결국 이들 관료집단의 지배력이 갈수록 확고해져왔다. ‘시험 권력’이 ‘선출 권력’을 사실상 조종하고 지배하는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실종된 사회다.

 

행정사무그리고 규정만이 군림하다

원래 행정사무 업무란 보조적 업무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전반적으로 행정사무 업무가 오히려 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그 대표적 사례다.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재판을 보조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인사관리와 기획조정 업무를 장악하면서 스스로 법관에 대한 감독기관으로 군림하였다. 국회사무처 역시 전형적 사례이다. 독재 권력이 국회를 하수인 혹은 거수기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도모한 국회사무처 소속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기제는 국회 입법관료에게 과도하고 ‘위헌적인’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관료 조직은 대부분 행정사무 부서가 인사와 예산 그리고 각종 사무분담 업무에 의거해 원래 보조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객전도요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공공성과 가치와 철학은 사라지고, 대신 오직 사무와 규정이 군림하면서 상명하복과 형식주의만이 만연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국회를 비롯하여 감사원, 대법원, 정당 등등 국가의 공공 시스템과 기관 중 자기의 명칭에 부합하는 위상을 지니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국회 전문위원’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전문가’들이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모두가 국회에서 순환 근무한 국회 공무원들이다. 이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토보고’라는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국회 공무원이다. 미국 의회의 위원회에 근무하는 전문가 스태프 조직은 모두 정당에 소속되어 있다. 독일 의회에서 이들 정책 ‘전문위원’은 독일 사회의 각계 전문가 출신으로서 자부심이 높은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시 정당 소속이다.

미국 의회 소속기구인 법제실의 법제관은 변호사나 법학박사 등 모두 법제 전문가로 구성된다. 반면에 우리 국회의 경우, 모두 순환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또 미국 의회예산처의 처장은 주로 경제학을 전공한 인사가 임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주로 국회사무처 공무원인 수석 전문위원 출신이 임명된다. 부실하고 왜곡된 우리 입법지원 기구의 모습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엉망이 된 우리의 정치과 경제, 사회, 노동 그리고 환경문제의 저변에는 언제나 관료집단이 도사리고 있다. 관료집단은 본질적으로 현상 유지와 친(親)재벌 사고방식의 보수적이고 기득권 편향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변화와 개혁에 저항한다. 더구나 외부로부터의 진입이 철저히 차단된 독점구조에서 감시견제 기제가 부재한 채 책임감과 의식 부재가 더해져 스스로도 갈수록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관료집단은 일반 시민과의 접촉은 별로 없고(혹 만나더라도 부정적이거나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기업 측 인사들은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관료집단은 ‘시장 친화적’이며 시장경제 옹호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등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이 고착화되고 보수화가 강화되며 한 치의 변화와 개선조차도 어려워지기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관료지배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심각하기 짝이 없는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의 문제에서도 관료집단은 아무 의식 없이 그저 규정과 관행만을 내세우고 모르쇠, 시간끌기로 일관할 뿐이다.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관료개혁 없이는 우리 사회의 어느 것 하나도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우리의 미래 역시 없다. 우리의 미래를 이들 낡은 관료조직에 맡길 수 없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과연 공정한 것인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시험에 의하여 공무원을 선발하는 방식이 최고의 미덕으로 치부된다. 그렇지 않은 그 어떤 공무원 채용도 불공정성으로 매도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공무원 선발제도를 일률적으로 중앙인사기관이 독점하여 고스란히 관리하는 시험제도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는 없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각 부처별로 인력을 충원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에는 1993년 정부혁신처(NPR; National Performance Review)가 설치되면서 인사관리의 분권화와 권한 위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처에 채용권한을 위임하고 각 부처는 자체 실정에 맞게 채용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운영 형태가 각기 상이하다.

일본의 공무원제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우리의 경우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일괄적으로 선발하여 각 기관에 배분하는 형식을 취하는 반면, 일본은 시험을 중앙 인사원에서 일괄적으로 실시하지만 각 기관별로 채용후보자 명부를 작성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바로 임용되지 않고, 우선 ‘채용후보자 명부’에 등록되어 명부 순으로 각 행정기관에 추천된다. 따라서 성적이 좋을수록 희망하는 기관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각 기관은 엄격한 면접과 심사로 임용을 다시 결정하기 때문에 어려운 관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대통령 공공관리 인턴(PMI: Presidential Management Intern)’ 프로그램이라는 고급공무원 임명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공공정책 분야에 우수한 석․박사 인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1977년 카터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의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매년 공공정책 프로그램의 분석 또는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약 200명 이상의 젊은 인재들이 미국 국민에게 연방정부 공무원이 되는 지름길로 인식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2년 동안 연방정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들은 ‘순환 인턴십 기회’를 통하여 거의 모든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게 되며, 이 프로그램에 의하여 우수한 석․박사 인력들이 연방정부에 채용되고 있다.

프랑스는 유명한 국립행정학교, 즉 에나(ENA)를 통하여 고위공무원을 채용한다. 2003년의 경우 총 선발인원은 100명으로서 이 중 50명은 외부 경쟁시험, 41명은 내부 경쟁시험, 9명은 ‘제3의 시험’을 통하여 선발된다. 외부경쟁 시험은 28세 이하이고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내부경쟁 시험은 현직 공무원에게만 지원 자격이 주어지고, 학력 제한 없이 5년 이상의 공공 부문 근무경력을 충족시킨 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한다.

‘제3의 시험’은 40세 미만이고 전문직 또는 지방자치단체 의원으로 8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자에게 응시자격을 준다. ‘제3의 시험’은 고위 공무원의 사회적, 지리적 배경을 다양화시켜 공무원 충원의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프랑스는 이렇게 하여 고급 공무원의 사회적 배경의 균형을 추구하고 전문가의 공직 진출 가능성을 제고시키기 노력하는 한편, 그밖에도 계급제의 단점인 충원 형태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하여 공개채용시험 외에 다양한 충원 형태를 운영하고 있다. 특별채용과 전체 공무원의 20%에 이르는 계약직 공무원 제도의 활성화로써 계급제 하에서 인력운영의 탄력성을 높이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한편 영국의 경우에는 속진(速進) 임용제를 적용하여 공무원 중 고위직 공무원 직위에 도달할 수 있을 우수 인재를 선발하여 별도의 훈련 및 능력개발기회와 조기승진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 영국 고위공무원단의 1/3에 가까운 인원이 속진 임용제를 통하여 선발된다.

 

고시 출신의 군림과 육두품 출신의 슬픔

공무원이 기피대상으로 되던 시기가 있었다. 공무원 임금이 너무 낮고 대우도 좋지 않아 일반 대졸자들이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5급 고시는 우수한 인력을 공무원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유인책’의 제도였다.

그러나 이제 공무원은 이 나라 모든 젊은이들의 꿈으로 되었다. 9급 공무원 시험도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이다. 가장 우수한 인력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려들고 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이 밀집해있는 노량진역 부근은 공시족으로 언제나 인산인해다. 몇 년 전부터 이제 5급 공채(고시)나 7급 시험이나 차이가 없다는 주변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 우수한 인력들을 공무원으로 선발해 잘 운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문제는 고시 출신, 고시족들이 전두환 시절의 군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처럼 공무원 사회를 장악하고 독점하는 데 있다. 모두 고시 몇 기 몇 기로 통하고, 이들끼리 모든 요직과 지휘계통을 장악한다. 고시 출신이 아닌 다른 공무원은 마치 신라 시대의 ‘육두품’처럼 들러리로 전락한다. 진골과 성골 그리고 육두품의 출신 성분은 너무도 명확하다. 서슬이 퍼런 이런 계급 사회에서 기상천외하게 아부하는 재주가 있지 않는 한, 육두품 출신이 요직에 오르기 어렵다. 비(非)고시 출신으로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여 요직에 오르게 될지라도 이미 비고시로서의 정체성은 상실된다. 아니 오히려 비고시 집단에 적대적으로 스스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고시족 집단에 대한 높은 충성심이 이미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을 위한 역동성이나 미래지향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국회사무처의 경우를 살펴봐도 수석 전문위원과 전문위원을 비롯한 요직과 국장급에서 5급 공채, 즉 ‘입법고시 출신’의 비율은 매우 높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강화된다. 최근에는 과장급까지 고시 출신의 독점 현상이 나타난다. 실제 국회사무처의 주요 보직 중 고시 대 비고시 출신 비율은 2006년 48: 52였는데, 2011년에는 58: 42였고 2016년에는 80: 20으로 그 독점 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5급 공채로 관료사회에 진입하면 30대에 이미 3급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지나치게 빠른 승진이고, 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 경험이 적은 본인에게도 불행이다. 최근 판사 임용도 최소 3년 내지 5년의 법조 경력이 요구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와 같이 5급 공채라는 ‘특급 대우’를 제도적으로 제공하는 나라는 없다.

다양한 나무 품종으로 이뤄진 숲이 가장 번성한 숲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시험이라는 한 가지 단일한 형태로만 공무원을 선발하는 현재의 방식은 “우리가 남이가”의 가족주의와 온정주의를 낳고 이는 결국 부패와 무능을 심화시키게 된다. 그것은 오직 특권과 독점의 상징으로 되었고, 상명하복으로 권력에 무조건 아부하고 줄서기와 승진에만 몰두해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회 고위 공직자로 있던 어떤 후배는 필자에게 4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부분의 4급 이상 공직자들에게 ‘승진’에만 필요한 비상한 능력을 보유하고 발휘한다는 점 이외에 그들에게 특별히 대단한 능력을 가졌거나 실행하는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공무원 조직도 과거와 같은 일반 행정가로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 앞으로의 공무원은 ‘일반 행정가(generalist)’ 보다는 공직사회 내에서 특화된 전문 능력을 보유하면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종합적인 관리 능력을 보유한 ‘전문성을 지닌 행정가(specialized generalist)’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은 1940년대 이후 지역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가능한 ‘대표관료제(representative bureaucracy)’를 채택하고 있다. 대표관료제란 한 나라 전체의 인구 구성에서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집단별 인구비례에 따라 정부 공직이 배분되어야 한다는 인사 원칙이다. 미국에서는 이 대표관료제를 적용하여 고용평등조치, 차별철폐조치 그리고 적극적인 고용할당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인재의 지역할당제 역시 이러한 적극적인 인재할당 대표관료제의 일종으로서 인력충원에 지역이라는 변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일종의 ‘지역주권’의 신장을 추구한다. 대의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지역별 비례에 의하여 국가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선발된 인력이 국가 공직사회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출신 지역과 관련된 이익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적 대표성(political representativeness)’, 혹은 ‘정치적 대의성’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시험만에 의한 공무원 선발, 현대 국가에 적합하지 않다

고시제도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각급 공무원 시험제도는 사실 과거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흔히 과거제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공평성의 측면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왔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본래 치국의 인재를 배양하고 선발할 수 없고 도리어 황제 전제정치의 필요에 충실하게 부응한 제도이기도 하였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 고염무는 팔고문(八股文: 과거 시험이 엄격하게 요구했던 여덟 가지 형식)의 폐해가 진시황의 분서(焚書)와 같으며 인재에 대한 파괴는 오히려 진시황의 갱유(坑儒)보다 더 심하다고 갈파하였다. 그리고 결국 중국은 크게 낙후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선진국들은 공무원을 직무별로 수시 채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직 암기식의 단일시험 제도를 통해 일시에 공무원을 선발한다.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결정되는 승진과 급여 체계 대신 이제 성과와 실적에 의하여 결정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시험만으로 우수하고 도덕적이며 유능한 공무원이 선출될 수는 없다. 시험으로만 선발되는 현 공무원 제도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모든 시스템이 운영되어서는 전문성과 창의성 그리고 역동성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수요에 결코 효과적으로 부합할 수 없다.

 

소준섭

화, 2021/03/0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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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화석연료 중심의 성장과 소비 경제모델의 위협에 대한 인식의 증가에 대한 반응은 미디어의 기후변화에 대한 심각한 보도 차단과 교육과 정책토론에서의 심각성 경시풍조로 나타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앞장서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사회는 물론 경제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헌신적인 기후 운동가들, 심지어 구속되거나 신체 부상을 입을 각오가 되어 있는 기후환경운동가들조차도 여전히 석탄이나 천연가스로 가열된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디젤 동력 화물선과 디젤 연료를 사용하는 트럭으로 배달되어 석유로 만들어진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야채를 먹습니다.

시위를 조직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기사를 쓸 때 사용되는 컴퓨터와 전화기같은 부품들도 석탄 및 다른 유독물질을 사용하는 인도, 중국, 태국의 공장에서 제작됩니다. 함께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연결시켜주는 인터넷을 작동시키는 전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후변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의 퇴직기금은 화석연료 수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회사의 주식에 묶여 있습니다. (관련성이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음)

화석연료산업을 비난하는 시위표지를 작성하기 위해 석탄으로 가동되는 말레이시아 공장의 펜 부품에 사용되는 플라스틱과 석유연료를 사용하는 트럭과 비행기로 운송된 일회용 펠트펜을 사용한다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환경시위는 숨겨진 진실에 대해 주목하지만 행진이 끝나면 우리는 화석연료를 피할 수 없는 악몽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육식을 선택 또는 거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와 성장의 파산 개념과 일치하는 산업경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 시작은 미미할지라도 화석연료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요건이 주어진다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시위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화석연료와 전혀 연관되지 않은, 또는 관련한 산업으로 발생한 돈과 관련 없는 경제 체제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는것부터 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드는것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도덕적 시민들의 시위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추출적이고 약탈적인 경제 질서의 중간에 있는 약간의 환경보호적 활동이 아닌 새로운 대안 경제의 문을 열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시위가 나아가야할 다음 단계는 세계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화석연료를 100% 사용하지 않는(FFF) 지역사회 형성이어야만 합니다. 초기단계에서 100명 또는 500명만 지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역 차원에서 이러한 경제, 사회 및 정치 구성단위를 만든다면 대중에게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는 화석연료 사용금지에 기여하고자 하는 투철한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언행을 일치 시킬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단지 슈퍼마켓의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닌 플라스틱을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써 말입니다.

더 나아가 화석연료해방(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첫 단계는 즉시 실행 가능합니다. 냉소적인 정치가들이 20년 30년 걸려 실행할 탄소중립 경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FFF 커뮤니티 창조

FFF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은 초반에 상당한 용기와 희생을 요구할 것이며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제한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임계질량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FFF 커뮤니티가 음식, 에너지, 협동조합의 재정, 또는 화석연료와 연관된 은행들에 대해 100% 독립적일수는 없기에, FFF 커뮤니티는 오늘날의 단체들이 할 수 없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마음껏내며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설립 초기 단계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입니다.

이는 전 세계의 다른 지역사회에 모델이 될 것이며, 화석연료와 관련된 자금 의존으로 인하여 실행단계에 옮길 수 없었던 저널리즘과 교육시스템을 생산할 것입니다.

소규모 FFF 커뮤니티가 다국적 투자은행 및 석유회사를 인수 할 수 있는 강력한 경제 및 정치 플레이어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며, 수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화석연료 문제에 맞서는 데 있어 모호하고 결과가 정확하지 않은 대안이 아닌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화석연료 사용 종말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자료에 따르면 정부와 기업의 보고서에 제시된 2050년 탄소 중립 경제 창출은 터무니없이 늦은 시기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홍수와 폭풍, 해수면 상승, 사막 확산, 기아, 견딜 수 없는 폭염, 지구에 남아있는 부족한 자원을 장악하고자 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인해 수십억의 인간(및 다른 종)이 죽는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서는 몇 년 또는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주류 미디어는 기후 비상사태에 대한 시위와 정부의 선언문을 다루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가끔씩 지붕 위에 태양 전지판이 설치되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모든 식품을 현지에서 유기농으로 생산하고 태양열 및 풍력을 이용하여 모든 건물을 완벽하게 단열시키며, 100 %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대중교통의 동력을 공급하게 하는 법률은 (시행은 고사하고)거의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사회와 서로를 장기적으로 지원하며 지역사회에서 생산되는 FFF 제품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약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100% FFF 수송체계가 설립될 때까지). 만약 체포될 위험까지 감수하는 열렬한 환경운동가들이 있다면, 그 중 FFF 공동체에 기꺼이 헌신하려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멤버와 공동체간의 협약은 진중하게 다뤄져야 할 것입니다. 구성원들과 커뮤니티 간에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효한 계약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FFF 공동체는 애초에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 피상적인 소비문화, 분열, 단편적 사고와 같은 문화에 일치하여 운영될 수 없습니다.

신규회원은 평생동안 그들을 책임지겠다는 공동체의 약속에 대한 대가로 FFF 커뮤니티에 자산을 위탁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형태의 깊은 사회적, 윤리적 약속 또한 가능합니다.

 

자본주의와 글로벌 농업: 포드(Ford)부터 몬산토(Monsanto)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화석연료해방 공동체(FFF)는 초반에는 작은 범위로 시작할 것이며, 우리가 계속해서 지속 가능한 접근법을 채택했을때 어떠한 사회가 될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해당 모델이 거의 없고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FFF 커뮤니티 경제의 핵심은 100% 유기농 식품을 생산해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수송하는 유기농 농장이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지역사회의 시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다양성이 현저하게 감소할 것이지만, 그들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진정한 화석연료 자유경제의 토대를 마련할 것입니다. 음식들은 집, 옥상, 인근 빈 공간에서 재배되거나 지역 농장에서 들여올 것입니다.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에서부터 해방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웃과 함께 협력하는 행위가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권력가나 재력가들을 로비하거나 환경 NGO 단체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완전한 의미에서 화석연료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플라스틱,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생산된 제품,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운송 된 제품이 없는 상태)은 FFF관련자들에게 결정적인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거래가 아닌) 농부와 시민 간의 협력을 장려하는 공동 시장에서 식품을 판매(또는 물물 교환을 통해 교환)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장은 화석연료에서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형태의 경제 교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며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기 농업 공동체는 전혀 급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기후를 파괴하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계나 인공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공동체를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지만, 그들을 제외한 미국의 지역들이 세계무역과 연관된 산업화된 비정상적인 농업 생산 시스템을 수용하는동안 이 공동체들은 지속적인 경제를 추구해오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유기농업 방식은 농업과 유통에서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일자리를 제공 할 것입니다. 지구의 파괴에 기여 하지 않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아 그 노력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도덕적 행동입니다.

공동체의 또 다른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음식 및 기타 물품에 대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FFF) 운송수단의 창출입니다. 초기에 제공된 FFF 운송만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심하게 제한적이더라도 시민들은 그것을 불쾌한 불편으로 간주하지 않고 도덕적인 용기의 서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깨끗한” 에너지를 제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정치인들은 천연가스, 전기 및 심지어 원자력이 당연히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FFF커뮤니티의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제조업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제조업에 관하여 완전히 다시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삶에 필요한 물품의 생산 및 사용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화석연료나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어떻게 물품들을 생산할 것인지에 대하여 반드시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경박스럽고 사치품과 같은 제품들의 마케팅과 소비를 완전하게 종료해야 합니다.

FFF공동체의 제조업은 100% 현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지역 및 세계적으로 공동체를 연결 할 수 있는 화석연료를 100% 쓰지 않는 운송체계를 갖추기 전까지).

화석연료를 제거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물품을 사용을 줄여야 하며 오랫동안 지속 될 수 있는 품목을 제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20-50년 이상 지속될 책상과 의자, 책장과 도마, 셔츠와 스웨터, 컵과 냄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경제의 이러한 변화는 상업적인 소비 중심 문화의 종식과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제작된 제품에 중점을 두며, 이미지가 아니라 제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FFF 커뮤니티에서 이케아(IKEA)나 갭(GAP)과 같은 관련 상품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100% 화석연료 비사용 제품의 생산과 유통은 우리 아이들과 이웃의 아이들에게 장기적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제조는 현지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내구성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은 우리 환경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경쟁, 자유 무역 및 산업화의 위험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장에 관한 잘못된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 개념, 태도의 변화

FFF 지역사회는 화석연료에 관한 선전과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충실한 삶을 살 수 없음을 주장하는 기업의 사상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기술과 거버넌스의 진보적 혁신이 아니라 태도의 혁명에서 시작됩니다. FFF 공동체는 자동차를 홍보하고 분별없는 음식 소비를 장려하는 광고가 없는 문화적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모든 시민은 기후변화가 지역사회에 있어 즉각적이고 압도적인 위협임을 인식해야할 뿐만 아니라 짚 깔기, 유리 재활용, 금속 해체, 비료사용을 위한 인분 수집, 카트를 통한 식품 수송, 또는 (운동에도 도움이 되는) 자전거를 통한 전기 생산 활동이 엄연히 도덕적인 것이며 가치 있는 사회적 기여라는 인식이 잡혀있는 문화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상업 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만족감과 즉각적 만족에 대한 숭배는 도덕적 철학, 절제, 겸손 및 정직한 선행으로써의 사회적 참여에 기초한 문화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완전하게 “진보적인”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겸허, 절제, 지적 및 영적 참여의 중요성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와 결부됩니다. 이러한 커뮤니티가 커질수록 전 세계를 지배하는 상업 문화에 대한 대안이 더 강력해질 것입니다. 전기, 소비, 재산의 막대한 증가, 도시화 및 개인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에 의해 인간의 환경이 개선되었다는 현대의 관념에서 비롯된 잘못된 추측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더 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시스템 생성에 도전하지 않으면 생존에 필요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친환경화는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에 입각하고 있는 화석연료의 생산과 유통에 뿌리를 둔 경제의 겉치레적인 변화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화와(그리고 영화 전후에 나오는 광고들) 뉴스 보도에서 강조하는 현대화의 신화 뒤에 감추어진 체계를 반드시 가시화해야 합니다. 사회의 전반에 깔려있는 생각은 아이폰을 사용하고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비싼 자동차나 전용 비행기로 전 세계의 수도에서 수도를 누비는 사람들, 넓은 집에 살고 좋은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나르고, 공공장소를 청소하고, 우리의 식량을 재배하며 요리하는 사람들보다는 아무래도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이 되는 자원낭비, 화석연료로 인한 환경오염,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된 부는 상업적 미디어에서 마치 선량한 도덕적 행동처럼 보여집니다.

FFF 공동체는 부동산, 개인 재산, 소유권에 관한 오해 소지가 많은 개념에 대해 완전히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는 언론에 의해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계약법과 기업 법에 의해 통제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돕거나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커뮤니티 회원 간 구속력 있는 계약이 없습니다. FFF 커뮤니티는 이러한 계약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FFF 공동체에 가입하여 화석연료의 사용을 끊고자 하는 충성 서약이 회원자격의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동산과 소수의 사람에 자본이 집중되기 전에 유럽, 아시아, 미주 지역의 농업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마을 계약과 동등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마을 계약은 상징적이라기보다는 구속력 있는 방식으로 각 개인이 식품, 도구, 가구, 운송 및 거버넌스의 생산에 기여해야하는 책임과 구성원들에게 평생동안 커뮤니티를 갖추어준다는 공동체의 책무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거버넌스 중심 환경과 인간 정착의 관계를 형상하는 이로쿼이 부족 (Iroquois Nation)의 헌법 부활은 금융, 재산권 및 부동산에 중점을 둔 법적 왜곡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됨.

현재 혁신주의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항의에 참여하는 동시에 화석 연료와 관련된 수익을 올리는 회사에 자산을 투자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행을 없애고 모든 투자가 지역사회 활동과 관련이 있고 FFF 경제 창출과 관련이 있는지 확인해야합니다.

FFF공동체 회원가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어야 하며 자산, 교육 수준, 문화 감수성 정도에 따라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Teslas를 구입하거나 태양 전지판 패널을 구입할 수 있는 상류・중산층 사람들에게 포커스된 녹색 경제가 인류를 구할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과 주변 매체를 통하여 기후위기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빈곤층과 노동 계급에게 기후위기를 설명하고 응답에 참여한 대가로 양질의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 디너, 억만장자의 기부 및 기타 활동으로 기후 변화에 대해 연설하는 것은 사회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만의 FFF 화폐를 만드는 것은 이 과정에서 대단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화폐는 개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나타내며 지역 사회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및 기타 제조 제품에 의해 뒷받침 될 수 있습니다. 초반에는 사용에 극히 제한적일 지라도 이 통화가치는 화석연료와 연관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즉, FFF 화폐는 지역경제 전반에 걸쳐 사용이 확대되고 결국 세계경제로 확장됨에 따라 화석연료와 연결되지 않고 유사한 독립적 인 금융 시스템의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세계무역과 기후변화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침묵입니다. 투자은행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구를 가로질러 상품을 운송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탄소배출과 공장지대 설립을 위한 산림 및 정글파괴, 자연을 희생하여 끊임없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공장의 설립으로 인해 엄청난 환경의 파괴를 가져다줍니다. 세계 무역에서 추진되는 식량(특히 육류)의 비생산적인 대량 생산은 토양, 산림 및 강과 바다에 장기적인 피해를 줍니다. 또한 식품 및 제품의 생산 및 유통에 대한 산업적 접근 방식은 지역 경제를 파괴하고 전례 없는 부의 집중을 조장하였습니다. FFF공동체는 시민들에게 이 파괴적인 악몽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을 최초로 제공합니다.

 

결론

우리는 미디어와 토론회에서 지구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관행을 바꾸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배출량은 소수의 다국적 기업에 집중되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삶에 탄소 발자국이 적기 때문에 세상을 구하고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논쟁을 목격하곤 합니다.

개인의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데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면 우리 경제의 깊은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매일 행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특정 원칙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세계 문화를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그 문화는 즉, 최선의 길은 두 가지 전략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개인적 선택을 지역 사회의 선택으로 만들고 그 지역사회를 대체 경제의 기초가 될 경제 단위로 만드는 것입니다.

화, 2020/03/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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