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둥베이의 봄은 신오국협화新五國協和로

지역

둥베이의 봄은 신오국협화新五國協和로

admin | 목, 2021/08/26- 20:05

그것은 순전히 중국판 무협 판타지 장르라는 쉔환玄幻과 (짐작하시는 바와 같이 현학玄學의 나라 중국답게 판타지奇幻이나 SF科幻에 빗대어 이런 표현을 만들어 냈다.) 이미 5억명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중국 웹소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설맞이 영화대목(春節檔이라 불린다)에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영화<소설가를 암살하라刺殺小說家>를 보러갔다. 나뿐 아니라 같이 영화를 본 중국친구들 모두, 트레일러만 보고, 성공한 웹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한 유명 인문사회과학출판사가 영화의 원작이 된 중편소설집 <비행가飛行家>와 작가인 솽쉐타오雙雪濤를 띄우는 것을 보고, 중국 웹소설의 수준이 대체 어느정도인지 궁금해졌다.

솽쉐타오 双雪涛

진짜 디스토피아가 돼버린 홍콩을 대체해 대륙의 영화촬영지로 입지를 굳힌 수직도시 충칭重慶과 액자소설속의 전설버전인 경성京城의 몽환적이면서도 화려한 배경, 빠른 이야기 전개와 이에 걸맞게 게임을 방불하는 그래픽이 압도적이었다. 알리바바의 마윈을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재벌기업의 총수가, 전설속에선 신이 된 빌런 적발귀赤髮鬼로 등장해 붉은 갑옷을 입은 ‘세일러문 전사’에게 응징당한다. 코믹하게 보일정도로 브리꼴라쥬 정신을 갖춘 중국판 X-man들이 소설가를 사이에 두고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이런 2차원문화 (중국 청년들이 일본 망가의 영향을 흉내내어 보이는 기상천외한 정서를 의미한다) 요소들도 꽤 신선했다. 영화의 주인공인 루저屌絲소설가와 유괴당한 딸을 되찾아 주는 것을 댓가로 그 소설가의 암살을 강요받은 전직은행원은 둘다 작가의 분신이라는 것은 대충 알겠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대자본가를 처단하겠다는 뻔한 결기말고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책을 뒤늦게 사읽고 원작이 웹소설과 아무 연관이 없는 둥베이 문예부흥의 대표주자인 빠링허우 소설가의 순문학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가는 등단직후부터 타이완, 대륙의 문학상을 차례로 휩쓸어 왔다.

<역사, 기억, 생산>(2016)이라는 둥베이 지역문화연구서에 의하면 이곳은 우리가 흔히 조선족자치구가 있는 그 지역에 갖고 있는 편견과 달리, 50-70년대에 일제의 만주국이 남겨 놓은 공업기반과 6.25를 계기로 시작된 소련의 지원에 힘입어 1949년에 갓 건국한 ‘공화국의 장자’ 노릇을 톡톡히 해낸 곳이다. 이곳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여기 사회주의식 노동자 문화를 꽃피워 민중들이 노동자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1978년 실은 바텀업으로 촉발된 중국의 개혁개방이 한때 농촌과 지역의 일시적 경제적 부흥을 가져왔다. 하지만, 90년대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둥베이의 대공장은 구조조정으로 문을 닫고, 자산은 조각조각 나뉘어 사기업에 팔려나갔다. 마치 작가의 고향인 션양瀋陽을 연상시키는 경성이 적발귀에게 당한 것처럼. 이를 반대하고 공공의 자산을 보호하고 싶어하던 이들은 사적이익을 노리는 소인배들에게 문자그대로 ‘암살’됐다. <북방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에서 소설가의 아버지, <암살..>에서 적발귀에게 죽임을 당한 소설가의 극중 아버지 지우텐久天 이야기이다. 그렇게 둥베이는 점점 슬픈광야가 되어 갔다. 둥베이문학과 영상예술은 이 과정에서 벌어진 비루하면서 아름답고, 비장하면서 익살스러운 이곳 사람들의 만인보를 그려나간 작품들이다.

이때 ‘정리해고’를 당해 길거리의 노점상으로 나앉은 후에도 가부장적 체면에 죽고 사는 북방의 노동자들은 표정을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자녀세대인 빠링허우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살기를 갖춰야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청소년기에 IMF사태를 겪은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가 가볍지 않다고 본 중국 정부는 둥베이부흥東北振興을 외치며 지역경제와 그 기반이 되는 대형국영기업을 살리기 위해 뒤늦게 돈을 쏟아부었다. 때마침 둥베이 집단, 향토, 사회주의 오락문화가 키워낸 쟈오번샨趙本山이 주도하는 희극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대도시에 진입하기 위해 분투하는 ‘촌스럽고 거친’ 둥베이인들의 위화감이 주요한 웃음의 소재였다. 리얼리즘의 대가 쟈쟝커도 둥베이를 가상다큐멘터리<24성이야기二十四城記>로 기억한다. 이 영화는 션양에서 청뚜로 이주한 한 군수공장단지에 거주했던 노동자군상과 그 가족들의 연대기이다. 국영기업의 일터와 그 임직원이 거주하는 사택단지가 하나의 독립된 공동체이자 세계였던 중국의 ‘따유엔大院’문화를 잘 묘사했다. 한국의 강우석도 투자한 저주받은 블랙코미디 <공장의 피아노鋼的琴>도 둥베이의 회한을 연극적 무대로 잘 표현했다. 둥베이의 황금기에 대한 노동자들의 향수와 이를 재현하고 싶어하는 의지는 극중극의 환상속에서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채색된다. 2010년 이후에는 자오번샨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빠링허우 희극배우 따펑大鵬이 이번엔 둥베이출신 농민을 지식노동자와 사업가로 업그레이드한 루저屌絲男士씨리즈로 성공을 거뒀다. 작년에 그는 뜻밖에도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동원해, 희극대신 동아시아의 향촌마을, 친족관계의 ‘살아있는 화석’인 둥베이 이야기를 극사실주의로 표현한 <길상여의吉祥如意>(2020)를 선보이며 둥베이문예부흥을 이어간다.

“영화속에선 소설이 시작되는 장백산(백두산)도 이름을 지워 장소성을 희석했더군요. 마윈을 현실에서 물러나게 한 건 소설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예술가가 아니라 소설속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시)황제쟎아요? 지금 중국에서 대자본 욕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둥베이문학을 웰메이드 차이나 블록버스터로 완전히 탈바꿈시킨 감독의 역량을 극찬하던 중국의 평론가들은 결국 현실의 무력감을 철지난 포스트모던 타령으로 때우려는 것 아닌가요?” 좀 직설적으로 물어봤더니, 젊은 중국인 평론가가 의미심장하게 답한다. “제가 보니 이 소설은 왕샤오보王小波의 대표작 <완쇼우쓰萬壽寺>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네요.” 중국의 카프카나 조이스로 불리는 요절한 천재 작가 왕샤오보는 글좀 쓰고 싶어하는 중국 젊은이들이 한시절의 성장통처럼 빠져드는 대표적 자유주의 지식인이다. 솽쉐타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액자소설 형식을 갖는 이 소설은 명문가출신 한족무장으로 한때 안록산의 난에 가담했다가 다시 황제에게 투항한 역사적 인물 설숭薛嵩과(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설인귀이다!) 그 주위 여성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이 설화를 이리 비틀고, 저리 뒤집어 변주하는 수많은 ‘리셋’ 서사로 반복하면서 권력자와 지식인을 통렬하게 풍자한 소설속 작가의 입담에 배꼽을 잡게 된다. 만일 솽쉐타오가 정말로 이 소설을 왕샤오보에게 헌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의 근대성 비판은 실로 매우 중층적일 것이다.

둥베이문예부흥과 달리 중국 정부의 대규모 투자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지난 10년간 이 지역 인구의 30%가 감소했다. 100년전 이 지역에서 저들의 구호인 협력 및 화합과 달리 오족을 고통에 빠뜨린 일본제국주의의 만행도 역사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백약이 무효라지만, 북조선과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열린마음으로 ‘신오국협화’를 이룬다면 둥베이에 다시 공화국의 봄이 올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주한 중국대사가 둥베이지역에 대한 한국의 관심과 투자를 환영한다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다(SCMP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둥베이 지역 정부는 미국기업들에게도 둥베이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이 서평의 축약본이 실렸습니다. 경향신문의 허락을 득하여, 다른백년에도 전재합니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105281413001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1. 개벽학과 고려학

작년에는 개벽파를 자처했습니다. 올해부터는 개벽학자를 자임합니다. 하노라면 나는 한국학자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냉큼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개벽학이 곧 한국학이라고 등치시키는 것에는 못내 주저케 됩니다. 본디 개화좌파였습니다. 20대 구미의 사회이론을 줄줄 외다시피 다녔습니다. 꼴에 반골과 몽니 기질은 다분해서 미국보다는 유럽을 선호했습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회화 테이프를 귀에 꽂고 캠퍼스를 누볐습니다. 농반진반으로 ‘모던 보이’시절이었다고 회고합니다. 하얗게 탈색된 머리칼을 휘날리며 유럽 배낭여행을 쏘다니던 때입니다. 퍼뜩 자각하고 자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서방의 사상에 해밝아도 한국 사회를 온전히 해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커녕 구미의 이론으로 한국의 현실과 현재와 현장을 난도질하며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변태적이고 병리적인 심리가 없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격정을 토해 비판하시는 것처럼 딱 개화에 중독된 ‘식민화된 영혼’이었던 셈입니다. 저 자신을 치유해야 했습니다. 제가 터하고 있는 땅과 해원하고 상생해야 했습니다. 제대 직후에 사회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던 까닭입니다. (심지어 군대마저 카투사를 다녀왔습니다)

_개벽_ 창간호 표지

애초에는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코자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의 기점을 ‘개항’으로 잡든 ‘개벽’으로 삼든, 지난 150년사는 주변 국가들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자각에 이르렀습니다. 영어는 물론이요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연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사보다는 동아시아사 연구로 들어선 연유입니다. 공부를 좀 하다 보니 근현대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동아시아의 고전에 달통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습니다. 사서삼경부터 캉유웨이와 후쿠자와 유키치까지, 한문과 중어와 일어로 축적된 한자문명권의 유산을 한껏 흡입했습니다. 그러다 중화문명권의 또 다른 일각, 베트남을 경험하고 나서 유라시아 문명사학자로 회심한 것입니다. 기왕의 동아시아 감각으로는 동남아의 최북단에 자리한 베트남조차 온전히 해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눈이 트이자 도저히 ‘중국사학자’로 30년을 보낼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3년 유라시아 견문을 감행한 까닭입니다. 1000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개벽파’이자 ‘고려인’으로 살겠노라 말합니다. 개벽파는 더 보탤 것도 없겠습니다. ‘고려인’이라 함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연결망이 가장 활발하게 작동했던 고려시대 사람들의 공간적 감각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겠다는 뜻입니다.

기실 ‘한국학’이라는 말부터가 고약합니다. ‘남한학과 북한학’이라고도 하셨죠. ‘남한학과 북조선학’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입니다. 또는 ‘한국학과 조선학’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휴전선 이북에 자리한 저 나라는 1945년 이후 단 한번도 ‘한국’을 표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학과 조선학의 창조적 대화로 정립하게 될 미래학을 ‘고려학’이라고 불러주고 싶습니다. 현재의 K-POP은 어제의 한류(Korean Wave)가 진화한 것입니다. 글로벌 문화산업과 토착의 풍류가 결합되어 창조적인 지구문화(Global Culture)를 발신하게 된 것입니다. 개벽학(K-Studies) 또한 기왕의 한국학(Korean Studies)을 돌파해 내야 합니다. 고려학으로 진화해야만이 지구학(Global Studies)에 값하는 신예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탐문해 봅니다.

그 개벽학과 고려학으로의 진화에 ‘중화’(中華)와 ‘개화’(開化)는 부채가 아니라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화문명에 속해 있던 무렵 중화는 세계문명의 최정점이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미국의 속국으로 보낸 20세기에도 일본과 미국은 개화문명의 최첨단이었습니다.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 기독교 일백년의 역사 또한 비옥한 토양입니다. 동서를 망라한 유구한 문명의 유산이 이 땅에 축적되어 있는 것입니다. 중화를 섬기고 개화를 떠받드는 몰주체적 태도가 문제이지, 제국에 젖줄을 대고 맹렬하게 빨아들인 중화문명과 개화문명은 더없이 소중한 영양소라 하겠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그토록 두터운 문명적 유산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장소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독창이란 외골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무릇 중도(中道)와 정도(正道)라 함은 사방팔방 사통팔달 활짝 열린 길일 것입니다. 중화와 개화를 포용하고 회통하는 문명횡단적 실험 속에서 비로소 개벽학은 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화도 개화도 사절하는 북조선식 주체사상의 착종을 복제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유학도 버리고 서학도 방기한 주체사상은 옹졸맞고 앙상했습니다. 개벽학은 필히 개방적이고 반드시 개혁적이며 기필코 계승적이어야 합니다.

동아시아론이 허구라는 비판도 통렬한 맛은 있으나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든 주장입니다. 과연 1860년 이후 한중일은 각자의 길을 걸었던가요? 1860년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중일은 전면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던 것이 아닌지요? 그 이전에는 소수의 지식인들만 상호 방문하고 교류하며 한자로 작동되는 ‘문예공화국’의 혜택을 누렸을 뿐입니다. 기층 민중들까지도 시장에서 일상에서 교류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내부의 상호 개항 이후라고 보아야 합니다. 즉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공간적 경험이 동아시아로 일대 비약한 것 또한 19세기 말부터입니다. 아니 ‘동아’(東亞)라는 개념 자체가 창출된 것이 그 무렵이라 하겠습니다. 물질적 실체가 분명히 작동했던 것입니다. 조선인들도 반도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열도로, 만주와 연해주로, 또 중원의 대륙으로, 동아시아 감각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919년 한성에서만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열도에서도 북방에서도 중원에서도 다양한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그 역사성을 동아시아가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포착할 수 있을지요? 도쿄에서 최신 사상을 공부하고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에 투신한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작품을 쓰고 베이징에서 혁명을 논한 경우 또한 숱합니다. 20세기 전반기를 수놓은 주요 정치인과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거개가 ‘동아시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파인 백범 김구도, 좌파인 몽양 여운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물질개벽과 물자교류를 선도하는 상공인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제3세계? 인도와 아프리카? 너무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힌디어와 아랍어로 작동하는 인도양세계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쉬이 접속될까요? 아프리카는 어마무진장 큰 대륙입니다. 사하라 이북과 이남은 딴 세계입니다. ‘영성적 근대’로 눙칠 수 있는 범위와 사례가 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침소봉대하면 곡학아세로 빠지게 됩니다. 20세기 후반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제3세계주의에도 ‘자생적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시나브로 수그러든 것입니다.

무릇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한 법입니다. 모든 인류애의 출발은 이웃애라고 생각합니다. 원수 같은 네 이웃부터 사랑하는 것이 지상천국 건설의 첫걸음입니다. 동아시아를 괄호에 치고 제3세계로 비약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생산적일지 저는 몹시 회의적입니다. 현실감을 결여한 관념론이기 십상입니다. 그보다는 한중일의 20세기를 대동소이(大同小異)로 접근하는 편이 더 생산적입니다. 개화파가 주류가 되어 ‘백년의 급진’을 질주했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입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틀로 보면 중국과 일본, 북조선과 남한의 사이에는 아득한 만리장성이 쌓인 것 같지만, 고금(古今)의 분단과 성속(聖俗)의 분화라는 개벽파의 눈으로 보자면 어금버금했던 것입니다. 동아시아를 버리고 제3세계로 비약할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딛고 동유라시아로 전 지구로, 온 우주로 도약해야 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자세를 견지합시다.

물론 기성의 동아시아론에도 한계가 없지 않습니다. 아니, 적지 않습니다. 다만 허구이고 허상이서가 아니라 편향되고 편중되어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쪽은 유학 중심의 전통에 치우쳤습니다. <전통과 현대>, <상상>이 대표적이죠. 전자는 유교와 자본주의를 접속시키려 들었고, 후자는 도교와 문화산업을 접맥시키려 했습니다. 은근슬쩍 개화우파에 합세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쪽은 개화좌파에 기울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진보적 지성’만의 결집을 꾀한 것입니다. <창작과비평>, <황해문화> 등이 선도했습니다. 돌아보면 ‘중화와 개화의 분단체제’가 여전했던 것입니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분단체제도 역력했습니다. 그래서는 신문명의 신천지, 개벽천하가 도래하기 힘들 것입니다. 서학과 유학과 동학의 합작을 이끌어야 개벽학이 살아납니다. 유라시아(구대륙)와 아메리카(신대륙)를 잇는 허브로 자리매김해야 한반도를 지구촌의 접(接=hub)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한국학(Korean Studies)보다는 고려학(K-studies)을 제안합니다. 마침 올해 8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리는 국제고려학회에 참여합니다. 김일성 종합대 교수를 비롯한 북조선의 주요 학자들도 참가한다고 합니다. ‘지구적 고려학’(Global K-studies)의 산실이 될 수 있을지 눈여겨 지켜보려 합니다.

인류세와 다시 개벽 세미나

 

2. 물질개벽의 최전선

한국 인문학계의 활로는 ‘인문학’의 틀을 깨야 비로소 열릴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인문’(人文)의 근간이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성지 <현대사상>의 올해 첫 특집도 ‘포스트-인문학’이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人)만이 주체가 아닙니다. 식물도 동물도 사물도 만물이 주체의 지위로 등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간과 더불어 국가를 구성하고 역사를 추동입니다.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네오휴먼 등 백가쟁명이 한창입니다. 이른바 ANT,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은 현재 가장 세련된 사회이론인바, 인문학의 틀을 넘어섰기에 브루노 라투르의 독창과 독보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글(文)의 처소 또한 급변하고 있습니다. 종이 위의 텍스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글은 이미 텍스트에서 데이터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도 빅데이터가 제공하는 실상과 통찰을 넘어서기 힘든 경우가 번다합니다. 즉 기왕의 인문에 안주해서는 인문학의 출로가 생길 리 만무합니다. 다시금 천지인의 옛 지혜를 빌려야 하겠습니다. 천문(天文)과 지문(地文)과 인문의 삼문(三文)을 회통해야 하겠습니다. 천문은 하늘의 무늬를 천착하는 학문입니다. 지구와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입니다. 지문은 땅의 무늬, 세계지리와 세계역사를 탐구하는 문명학입니다. 하늘 천(天) 따 지(地), 집 우(宇) 집 주(宙), 천지와 우주부터 학습해야 지구 진화의 말단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학문, 인문학도 살아날 것입니다.

선생님을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꾸린 하늘학회에 저도 종종 참석하지요. 천주교도도 있고 천도교도도 계십니다. 기독교 목사님이 원불교 경전도 공부하십니다. 서도와 동도를 가리지 않고 통섭하는 현장이 미덥습니다. 동학과 서학을 가르지 않고 융합하는 현실이 듬직합니다. 동/서를 나누지 않고 대도(大道)를 탐구하는 대학(大學)의 전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함에도 아쉬움은 짙게 남습니다. 여전히 인문학자들만 모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벽학은 반드시 인문학 외통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동학을 품은 서학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과학을 품은 도학이 요청됩니다. 도학을 담은 과학도 필수입니다. 필히 과학 공부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하 미래의 추동력은 압도적으로 과학혁명으로부터 비롯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학부 시절 수학을 공부한 점 또한 현재의 철학 연구에 알음알음 생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수학과 철학, 서학과 동학의 회통이 개벽학의 저변에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왼쪽)SKEPTIC, (오른쪽)김기석 성공회대 총장의 _신학자의 과학 산책_

제가 개벽학당 세미나에서 한국 개벽사상의 주요 텍스트를 읽기 전에 인류세를 비롯한 최신의 과학담론부터 먼저 토론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개벽학당 강의에도 과학자를 자주 모시려고 합니다. <물질개벽의 최전선>이라는 강의명도 궁리 중입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사물인터넷과 블록체인, 진화심리학과 후성유전학 등. 지지부진한 인문학에 견주어 과학의 질주는 눈이 부십니다. 맹목하지도 외면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직시하고 직핍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좋을까, 요즘 삼청동의 과학책방 <갈다>에도 발걸음을 자주합니다. 과학 잡지 <SKEPTIC>은 정기구독을 시작했습니다. 널리 배우고 제때 익혀야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개벽학도 일구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과 영성이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극한 이성과 극진한 영성은 궁극에서 아름답게 만날 것입니다. 작년 성공회대 총장으로 취임하신 김기석 선생님의 <신학자의 과학 산책> 또한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개벽학자’라고 하겠습니다. 김에 성공회대와 원광대학 사이의 공동학술연구를 제안합니다. 개화대학과 개벽대학 간의 대합창과 대합장을 권장합니다.

아울러 머리 공부로만 그쳐서도 아니 되겠지요. 21세기의 벽청은 20세기의 문청과 다르기를 바랍니다. 이성과 지성만 비대하게 성장하는 심신(心身) 불균형의 문학청년은 사절입니다. ‘입진보’의 비아냥 또한 과학 공부가 부족하고 몸 공부가 미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념 논쟁보다는 가설과 실험과 입증으로 실질적이고 실리적이며 실무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입놀림보다는 손발을 놀리고 몸을 써야 합니다. 체감하고 체득하여 육화된 언어, 육성으로 발화해야 합니다. 개벽학당에서 수련과 수양과 수행을 강조하는 연유입니다. 그래야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건강한 인재가 양성됩니다. 건강은 부강을 능가하는 최상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이야말로 삶의 기술(테크네)이자 살림의 예술(아트)입니다. 벽청들이 건강해서 저는 참 뿌듯합니다. 부암동의 그 아름다운 산세와 근사한 한옥도 모자라 텃밭 가꾸기까지 자청하는 모습이 더없이 예쁩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사람의 피부(身)와 지구의 피부(土)를 접촉하면 할수록 천인합일의 애틋한 사랑이 피어오르고, 천인합작의 우주적 영성도 깨어날 것입니다. 개화우파 국민과 개화좌파 시민을 넘어서 하늘을 쏙 빼다 닮은 개벽파 하늘사람을 지극하게 모시고 극진하게 섬깁시다.

 

벽청들이 가꾸어 갈 텃밭

 

3. 해방공간의 재재인식

천도교 청우당 로고

곧 꽃피는 4월로 진입합니다. 우리의 서신도 ‘포스트 3.1’로 이행하면 좋겠습니다. 동학혁명(1894)에 이어 삼일혁명(1919)도 끝내 좌초합니다. 한성을 지운 경성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휘황한 개화도시의 아성으로 변모합니다. 모던걸이 득실거리고 모던보이가 우글거리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기어코 삼세판의 기회가 열린 것이 1945년입니다. 도둑처럼 해방이 왔습니다. 광복(光復), 빛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서둘러 조직을 재건한 것이 청우당(1946)입니다. 천도교의 이상세계를 세속에서 구현하는 전위정당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동학이 표방한 개벽국가 건설의 적기가 열리는 듯 보였습니다. 과연 청우당은 해방공간 남(접)과 북(접)을 잇고 엮는 범한반도적 연합정당으로서 매우 인상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제출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개화좌파에 기울었습니다. 21세기 초엽에 등장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뉴라이트, 개화우파에 치우쳤습니다.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을 위해서라도 남/북과 좌/우와는 별개의 접근이 긴요합니다.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고자 했던 성-속 합작의 청우당 연구가 유력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북과 남에 모두 걸쳐있으면서도 남한과 북조선으로 흡수되지 않는 독자적인 국가건설 구상을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왼쪽)해방 직후 재건된 청우당의 당원명부(함경도) 표지, (오른쪽)입당원서의 본문

특히 북접 2.0, 북조선 청우당이 이채롭습니다. 2월 8일에 창당합니다. 자부심이 남달랐습니다. 항일운동의 원조이자 적통을 자처했습니다. 1946년 창당의 뿌리 또한 1860년 동학 창건에 두고 있습니다.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 자그마치 86년간 축적된 경험에 바탕하여 새 나라 만들기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해방공간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신생정당들과는 족보가 달랐습니다. 과연 삽시간에 30만에 육박하는 당원을 확보합니다. 소련을 등에 업은 북조선 노동당에 못지않았습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사회주의에도 어깃장을 놓았습니다. 유물적 경제만으로는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필히 정신개벽이 수반되어야 하노라 역설했습니다. 고로 북조선에서 노동당과 청우당은 협력하면서도 경쟁하는 미묘한 관계였습니다. 미국식 자본독재를 비난함은 물론이요 소련식 무산독재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적 신민주주의’ 국가를 선창했습니다. 서구형 민주와 동구형 민주가 아닌 동방형 민주, 개벽민주의 깃발을 휘날린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의 곡예가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김일성이 아무리 항일무장투쟁에 열성이었다 한들 동학의 후예를 자임하는 청우당에 비하면 역사와 연륜이 모자랐습니다. 게다가 ‘왜놈’을 대신한 또 다른 외세 ‘로씨야’의 뒷배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었습니다. 친일파 개화우파를 이어 친소파 개화좌파로 이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청우당이 주창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는 좌우합작에 그치지도 않았습니다. 개화의 지존인 미국과 북방의 신중화로 등극한 소련이 융합하는 창조적 공간으로 한반도를 환골탈태시키는 지정학적, 지리문명적 구상력을 내장했던 것입니다. 북접 2.0(북조선 청우당)과 남접2.0(한국 청우당)을 아울러서 한반도를 아메리카와 유라시아의 허브로 전변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기획한 것이 ‘3.1재현운동’이었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틀어지고 남북 분단이 굳어져 가던 1948년의 3.1절에 1919년의 3.1혁명을 재연시키고자 했습니다. 북과 남의 청우당이 합작하고 남과 북의 민중들이 연합하여 다시 3.1운동, 또 다시 개벽운동을 일으킬 것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전선이 복잡하고 다기했습니다. 1919년처럼 다종교연합으로 대연정을 연출할 수 있을 만큼의 통일전선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소련에 아부하고 미국에 굴종하는 내부의 기생 세력들이 세를 키워 갔습니다. 1948년 꾀했던 ‘다시 3.1운동’의 실패는 청우당의 쇠락에도 결정적인 사태였습니다. 노동당의 수장 김일성이 직접 청우당의 ‘우파’들에 대한 숙청과 축출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레닌보다 수운 최제우를 높이 치는 청우당은 눈엣가시였습니다. 모스크바와 스탈린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청우당은 북조선 내 통일전선의 파트너(友黨)에서 노동당의 어용, 관제야당으로 강등됩니다. ‘조선적 신민주주의’가 만개하지 못함으로써 소련의 아류, 일당독재국가로 귀착된 것입니다.

분단체제는 거울상으로 작동합니다. 남쪽의 청우당 또한 쪼그라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직의 성격 자체가 변질됩니다. 수양과 경세를 겸장했던 교정쌍전(敎政雙全)은 온간 데 없이 사라집니다. 남북분단, 좌우분열의 난세 속에서 종교적 수행 운동으로 퇴각해 버린 것입니다. 대승을 버리고 소승에 귀의했습니다. 동학과 천도교의 특장을 스스로 기각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청우당이 정치 일선에서 자취를 감춤으로써 천도교의 정치운동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미국을 등에 업은 개화우파의 적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개벽파는 역사의 최전선에서 퇴각해 버립니다. 1960년, 동학 창도 100년을 맞춤한 4월 혁명 4.19에서도 천도교의 공헌은 미미했습니다. 도리어 <군자들의 행진>에서 추적하는 것처럼 유림들의 활약이 적지 않았습니다.

강습교재중 천도교청우당론 표지

최후의 일격은 역시 한국전쟁입니다. 해방이 개벽파의 기사회생이 아니라 치명타를 가하고 치명상을 남기게 된 것도 한국전쟁 탓입니다. 북에서는 개화좌파가 득세하고 남에서는 개화우파가 득의양양하게 됩니다. 고로 분단체제의 심급 또한 단순히 남북분단과 좌우분열에 그치지 않습니다. 동학으로 싹틔운 자생적이고 자각적인 근대에 결정적인 사망 선고를 내린 격입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좌우를 망라하여 세속화 일방으로 일주했습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각기 서구형과 동구형의 ‘조국 근대화’로 내달렸던 것입니다. 그 조국은 1894년과 1919년에 염원했던 ‘나의 소원’, 동학국가와 개벽국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내발적 이상향과 실제로 구현된 (분단)국가의 실상 간에 아득한 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분단체제의 알파이요 오메가입니다. 그러하다면 2019년 <개벽파 선언> 연재가 시작되었다 함은, 비로소 분단체제가 최종적 해체 국면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상징적 징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쓰라린 마음으로 청우당의 ‘가지 못한 길’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심정으로 그 실패와 좌절의 처절한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너무 혁신적이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를 먼저 살았습니다. 때가 맞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때가 무르익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련은 진즉에 제풀에 무너졌습니다. 미국도 돌이킬 수 없는 하강세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세속주의 일방의 근대화가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탈세속화와 재영성화의 메가트렌드가 유라시아 도처에서 도저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영성’으로 성성했던, ‘성속합작’의 원조였던 청우당을 꼼꼼하게 복기하려는 까닭입니다.

1946년 8월 1일부터 <개벽신보>(開闢新報)라는 당 기관지를 주간으로 발행했다고 합니다. 1948년 4월 1일부터는 일간지로 발행했다고도 합니다. 1919년 3.1혁명이 <개벽>(1920)을 낳았고, 1945년 해방이 <개벽신보>(1946)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내년 창간을 준비하고 있는 가칭 <개벽+>는 촛불혁명의 결실일 것입니다. 참조해 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허나 천도교중앙도서관과 독립운동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자문을 구해도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합니다. 감질이 납니다. 당장 읽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해방공간의 ‘가지 못한 길’, ‘개벽하러 가는 길’을 복원해 내고 싶습니다. 올 여름방학은 모스크바에서 지내기로 결정지었습니다. 소련군이 수합했던 북조선 문서고를 샅샅이 뒤져보아야 하겠습니다. 21세기에는 가볼 만한 길일 것입니다. 아니, 가야 할 길일 텝니다. 개벽로(開闢路)야말로 지난 백년과는 다른 새로운 백년의 신작로일 것입니다.

벽란도의 유라시아 네트워크

<개벽신보>를 함께 읽고 논하는 세미나도 해보고 싶습니다. 당장은 개벽학당이 가장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충분치 못합니다. 한국의 벽청만으로는 미진합니다. 북조선에서도 벽청을 키워 가야 하겠습니다. 남과 북의 벽청들이 어울려 <개벽신보>를 함께 읽어가는 근미래를 내다봅니다. 장소 또한 평양이나 서울은 적절치 않습니다. 개성이 최적입니다. 개성은 본디 개경(開京), 열린 도시, 오픈 시티였습니다. 개경으로 이어지는 예성강의 끝자락 벽란도는 유라시아의 만인과 만물이 오고가는 허브(接)였습니다. 또한 개경은 최초의 대학, 국자감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21세기의 문명대학, 개벽대학을 세움직합니다. 개성공단은 재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확대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대학을 세우면 청년과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모여듭니다. 개성을 20세기형 산업단지, 공업도시로 만들어서야 쓰겠습니까. 21세기형 문명도시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14-15세기의 베니스, 17-18세기의 암스테르담, 20세기의 뉴욕을 참조해 볼만 합니다. 응당 북과 남으로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기왕이면 동북아연합의 국제개벽대학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개성에 개벽대학을 세웁시다. 그리고 ‘고려청우당’도 재건합시다. 그래서 그 개벽인과 미래인들이 주역이 되어 만들어가는 통일된 동학국가의 대망과 대업도 완수합시다.

개성의 국자감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의 물꼬를 청우당으로 틔웠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의 개벽파가 어디 천도교뿐이었겠습니까. 그 푸르른 벗(靑友)들 가운데는 원불교도 있고 개신유교도 있으며 토착화된 기독교와 천주교 및 혁신불교도 없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소망과 소원들을 하나 둘 밝혀주고 새 숨을 불어넣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죽은 불씨를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해 주실 만한 이야기보따리가 적지 않으리라 기대됩니다. 맞장구와 추임새를 기대합니다. 만시지탄과 지청구도 없지 않을 테지만요.

금, 2019/03/29- 14:39
16
0

1. 어느 고려학인가?

남한학과 북한학이 아니라 한국학과 조선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지적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학이라고 한 것은 개벽학의 발신지가 북조선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한국’이라는 의미이지, 결코 그 대상이 남한에 한정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 범위는 지구학이자 미래학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개벽학이 한국학의 영역이라는 말은, 량수밍의 동서문화론을 연구하는 분야는 중국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학과 조선학을 고려학이라고 부르자는 제안도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신라학, 고려학, 조선학이라고 할 때의 고려학과 구분이 안가니까요. 확실히 외국인들이 우리를 ‘고려인’(Kore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만, 외국인들이 중국을 China라고 부른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중국’을 버리고 ‘진(秦)’이라고 명칭을 바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고려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전적으로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도 가능하면 남북학자들이 합의해서요.

조선사상전사

작년에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님이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를 출간하셨습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시작해서 김대중과 김정일에 이르는 한반도의 문학·역사·철학·종교의 흐름을 개관한 역작인데, 이상하게도 책 제목을 『한국사상전사』라고 하지 않고 『조선사상전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인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에 ‘조선사상전사’라는 이름을 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종의 ‘한반도사상전사’라는 뜻으로 ‘조선사상전사’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라사상사, 고려사상사, 조선사상사라고 할 때의 조선사상사와 구분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남북을 통칭하는 공식적인 학술용어가 아직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시대에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지칭했던 개념이 최치원 이래로 ‘동방(東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사상사’나 ‘한국사상사’를 ‘동방사상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문제는 남을 것입니다. 지금은 ‘동방’이라는 말을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사용하고 있고, 그 의미도 한반도를 가리키기보다는 ‘동아시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동방’이라는 말에는 중국에 대한 ‘동’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치원 자신은 ‘동’을 중국에 대한 ‘동’이 아니라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만-.

이렇듯 개념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개념이 발화될 때의 문맥과 상황을 반영할 뿐입니다. 노자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2. 개벽은 깨어있는 자세

제가 지난 20세기의 한국 인문학이 중화와 개화의 포로와 노예가 되었다고 한 것은 중국과 서양을 배척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중국과 서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과 수학은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초 정도는 마스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학과 과학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100% 공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개벽’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깨어있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누군가가 개벽에 사로잡혀서 동학이나 개벽사상만이 제일이라고 하는 맹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이것이야말로 反개벽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손병희 학술대회(박길수)

지난주에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대표님이 어느 학술대회에서 「손병희의 개벽사상」으로 발표를 하셨는데, 제일 인상에 남는 대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 리더들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는 건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저는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한국과 비슷하게 식민지지배를 당한 아프리카에서도 ‘흑인의식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가 인도나 아프리카의 근대와 유사성이 있다는 뜻이지, 결코 지금의 한국이 제3세계와 비슷하다거나, 오늘날 동아시아 담론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중국과 일본의 개벽파를 찾아내고 발굴하는데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영성적 근대론’은 그것이 한국 근대라는 사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근대론을 포괄할 수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저는 한국의 근대나 한국의 사례를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이나 학설에는 이제 관심이 적어졌습니다. 그것은 제 주된 연구 분야가 한국근대사상사이기 때문에 오는 한계일 것입니다.

 

3.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해방공간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이라는 흥미로운 발상을 제안하셨습니다. 사실 제 요즘 관심분야도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입니다. 덕분에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었던 현대사의 중요한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1948년에 천도교에서 3.1운동을 재현하려 했다는 사실은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었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

해방정국(1945~1948)에서 개벽의 입장을 대변한 건국철학이 『천도교의 정치이념』(1947)과 원불교의 『건국론』(1945)인데 둘 다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남과 북, 성과 속을 모두 아우르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수록된 임형진 교수님의 해제 「천도교청우당, 새로운 세계를 기획하다」(모시는사람들)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에 실려 있는 백낙청 교수님의 논문 「통일사상으로서의 송정산의 건국론」(모시는사람들)이 두 문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백낙청)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1923년에 창당된 천도교청우당의 세 가지 기본이념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인데, 이돈화가 『신인철학』에서 주창한 삼대개벽과 용어가 동일합니다. 그런데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의하면 “실제로 청우당의 활동 목적은 민족개벽과 사회개벽의 두 가지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48쪽)고 나와 있습니다. 즉 정신개벽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개벽이라 함은 여러 가지 의의가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자는 것이 제일의적이었고, 사회개벽이라 함은 자본 사회의 제도를 개혁하여 무산계급을 해방하자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청우당의 현실적인 정치이념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보국안민(輔國安民)은 천도교의 신조요 염원인 만큼 천도교의 그것은 곧 당의 이념이 된다. 그런데 해석상 보국(輔國)은 민족해방이 되고, 안민(安民)은 계급해방이 되는 점에서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48쪽)

저는 이 대목에서 8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한 이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민족개벽=민족해방은 이른바 NL계열의 주장과 유사하고(대상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사회개벽=계급해방은 이른바 PD계열의 주장과 유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가 고민한 보국과 안민의 문제는 한반도의 영원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천도교의 정치이념』의 경우에는 보국(민족)이나 안민(계급) 중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양자를 모두 병진하려 했다는 점인데, 이것은 원래 동학에서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을 표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의 정치이념』에 나오는 도식대로라면, 1차 동학농민혁명이 ‘안민’(계급)의 문제로 일어났다면, 2차동학농민혁명은 ‘보국’(민족)의 문제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4. 천도교의 이중과제론

『천도교의 정치이념』에서는 보국과 안민의 문제를 ‘이중 과업’과 ‘양대 과제’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조선민족에게 부여된 정치적 사명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민족해방이요, 둘째는 사회해방이다. 연합국의 위대한 전승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해방이 대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주독립을 완성하지 못한 만큼 아직도 이 이중적인 정치 과업은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 조선의 특수한 사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하고 주밀하게 논의하여 민족 만년 대계인 이 양대 과제를 완전히 수행해야 하겠다.”(51쪽)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삼대개벽을 지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대개벽으로 축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양대개벽을 추진할 정신적 동력인 정신개벽은 논의에서 빠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도교인 개개인이 정신수양을 게을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서의 정신개벽에 대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은 80년대 운동권에 이르면 더욱 심화됩니다. 사회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정신수양이나 영성수련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제 생각에 원불교에서 ‘정신개벽’을 들고 나온 것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5. 『건국론』의 중도주의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가 쓴 『건국론』은 『천도교의 정치이념』보다 2년 빠른 1945년 10월에 나왔습니다. 해방 직후에 나온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첫 장(章)부터 「정신」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치」, 「교육」에도 ‘(정신)훈련’이나 ‘정신교육’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같은 ‘교정쌍전’이라고 해도 천도교가 ‘정(政)’에 방점을 두고 있다면 원불교는 상대적으로 ‘교(敎)’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국론』의 정신개벽의 특징은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국은 단결로써 토대를 삼고, 단결은 우리의 심지가 명랑함으로써 성립되며, 명랑은 각자의 흉중에 갊아있는 장벽을 타파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장벽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간단히 그 대요를 말하자면, 1. 각자의 주의에 편착하고 중도의 의견을 받지 아니해서 서로 조화하는 정신이 없는 것이요…” (제2장 「정신」)

건국론

저는 여기에서 말하는 ‘중도주의’야말로 우리가 해방 이후로 잃어버린 정신적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중립화 통일론’을 주창해서 감옥에 갔다고 하는데, 『건국론』의 중도주의와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중도주의이든 중립화이든, 이들이 말하는 ‘중’은 단순한 ‘중간’이기보다는 “배제를 거부하는 포함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설령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투쟁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그들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장일순의 표현대로라면 ‘보듬으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건국론』에서 말하는 “내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내 마음의 장벽”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달려온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영성‘ 대신에 ’아성(我性)‘을 공고히 해 왔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정신은 『건국론』이나 장일순이 말하는 ‘중도’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이른바 ‘혐오문화’도 이런 정신의 상실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상대의 존재를 긍정하려 들기보다는 처음부터 부정하려는 태도가 앞서는게 혐오니까요.

개벽포럼(도법스님)

지난달에 있었던 제1회 개벽포럼에 도법스님이 연사로 오셔서, 서로 생각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의견을 중재했던 경험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원효식으로 말하면 ‘화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건국론』의 중도주의나 장일순의 중립주의 나 보듬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개벽의 입장일 것입니다. 개벽은 양 극단의 가운데에 서서 ‘새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중도개벽’인 셈입니다. 19세기식으로 말하면 유학과 서학의 중간에서 양자를 아우르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개벽파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벽포럼(청중)

 

6. 21세기의 공통가치를 찾아서

마지막으로 『천도교의 정치이념』을 읽으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을 소개하면서 이번 서신을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보국과 안민이라는 서로 다른 과제를 추구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하늘’이라고 하는 동학의 기본이념이 깔려 있는 점입니다. 80년대식으로 말하면 NL과 PD가 우선시하는 과제는 서로 달랐지만, 양자의 바탕에는 “시천주”라고 하는 공통가치가 공유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시천주는 두 말 할 것 없이 인간과 만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말합니다. 이 점 또한 해방 이후에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일 것입니다. 각각의 진영에서 자기 주장을 외치면서 상대를 비난하려는 노력은 열심히 해왔지만, 입장이 서로 다른 상대와의 공통토대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에서 ‘공공’의 영역은 확보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개벽’이 주는 메시지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동학‧천도교‧증산교‧대종교‧원불교 등등이 비록 종교의 형태는 달랐지만 모두 ‘개벽’이라는 공통가치를 향해서 100년 넘게 계승하고 상생해 왔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개벽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 잃어버린 공통가치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입니다. 해방정국이 ‘좌’나 ‘우’라는 편도(偏道)를 고집했다면, 그리고 해방 이후가 ‘개화’라는 편도(偏道)로 치달았다면, 지금부터는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중도(中道)를 ‘개벽학’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보려는 것이지요.

유교, 개신교, 천주교, 천도교, 원불교 계열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동학을 공부하는 ‘하늘학회’(가칭)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공통가치로 삼아서 뭇 종교들을 아우르려는 중도의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과학자까지 가세된다면 금상첨화겠지만요. 앞으로 뜻있는 분들이 하나씩 둘씩 동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개벽학당도 그런 중도의 일꾼들을 길러내는 산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금, 2019/04/05- 13:00
15
0

인류문명은 크게 아리안족 문명과 셈족 문명 그리고 한족 문명으로 니누어 볼 수있습니다. 무엇보다 기원적 2천년전 코카써스 산맥 북쪽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아리안족Arya이 이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인류문명은 대융합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서쪽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에게해의 크레타 문명을 몰락시킨 후 그리스와 터키로 연결된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해상국가로 거듭납니다. 한편 남하한 아리안족은 이란을 거쳐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 이르러 기존의 드라비다족을 내쫓은 후 인더스문명의 뿌리를 내리게됩니다. 이후 이란을 거쳐 아라비아 반도로 내려온 아리안족은 수메르와 아카드문명에 뒤이은 셈족의 바빌로니아 문명을 패퇴시킨 후 독자적인 페르샤문명을 구축하게 됩니다. 결국 아리안족은 인류문명, 특히 서구문명의 주축을 이루는 그리스로마 문명과 페르샤문명 그리고 인더스 문명을 구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게됩니다.

사진: 서울신문

따라서 아리안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여러 측면에서 발현되는 다양성을 들수 있습니다. 이는 신관에서도 나타나는데 최고신을 Deva, Jeus, Deus, Dei라고 부르는 다신론으로 표현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삶을 살 수있다는 믿을을 전제로한 윤회사상을 믿어 왔습니다.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보면 특히 그리스로 이주한 아리안들은 주로 지중해 해안가 도시들에 살면서 바다를 상대로 교역을 해왔기때문에 항해시에 반드시 필요한 시각중심의 문명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이에따라 그들은 눈에 보여진 것(파도, 현상)과 보여지게 만드는 것(바다, 본체)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본체를 인식하는 능력인 이성을 중시하게 되는 로고스logos형이상학을 발달시키게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뒤에서 보듯이 본체 중심의 사고는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플라톤에 이르러 절대적 실체론으로 전개하게 됩니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에서 미리 정착했던 셈족 문명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무엇보다 사막이라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야했던 그들은 원초적으로 초능력자와 초월자를 요청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기에 초월성과 유일성 및 절대성을 문명의 본질로 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그들이 믿는 신은 아리안문명의 다양한 인격신을 배격하고 오로지 최고의 단일신, 예를들어 수메르의 엘, 바빌론의 마르두크, 가나안의 바알, 유대교의 야훼나 이슬람의 알라를 숭배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실았던 바빌론의 우르지역에서 믿었던 최고의 신은 마르두크였기 때문에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 유대인의 유대교 야훼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내용의 유일신이라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사막에서 살았기때문에 모래바람들이 내는 소리를 중시하는 청각중심의 문명입니다. 하여 야훼의 말씀이 창조를 이루고 율법(십계명)이 된 유일한 소리의 문명으로 남게된 것입니다. 따라서 시각을 배격하고 청각,즉 소리만을 유일신의 증거로 보았기에 신을 시공간속에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을 살펴봅시다. 중국인들은 인격신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독특하게 하늘을 신으로 상정하여 왔습니다. 즉 신에대한 설문해자를 보면 신은 하늘의 번개 모습을 띄는데 이는 하늘이 위력과 영묘함 그리고 길흉화복의 예측능력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신은 인간의 삶의 주재자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신은 창조자나 구원자가 아니라 인간사를 좌지우지하는 주재자이기에 그의 명령을 잘 따르는 자가 인간사회의 주재자, 즉 (황)제가 된다고 보는 천명론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즉 하늘의 천명을 받는 자는 덕을 갖춘 자이어야하기 때문에 천명론은 인성의 수양론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따라서 중국사상은 심(인간 마음)과 성(우주의 본성, 즉 하늘, 천명)은 출발부터 일치를 지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즉성 사상은 이후 인도로부터 들어온 불성사상(불성은 가능태로서 보통 실체인 여래장과 혼동되고 있습니다)을 심즉시불(마음이 곧 부처! 즉 불성은 현실태로서 본래성을 의미한다할 것입니다)의 사상으로 격의하여 점수가 아닌 돈오 중심의 6조 혜능의 돈오돈수 사상이 선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게 되어 오늘날 한국의 선불교의 모태가 됩니다.

그리면 이제부터 아리안문명이 서쪽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존에 터잡은 셈족 문명과 한족 문명에 끼친 영향을 알아봅시다. 먼저 아리안족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만나게된 셈족 문명,특히 기독교와의 만남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이 만남에서 촉매역할을 한 사람이 로마 시민권자이자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라할 것입니다. 그는 아리안 문명에 속한 로마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회심한 후에 셈족의 유대교를 벗어나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독교로 보편 종교화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신의 말씀인 율법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만의 종교틀을 벗어나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있기에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보편종교로서 기독교 사상을 구축하였는데 이를 이신득의,이신칭의라고 부릅니다. 이신칭의는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에 기독교를 본토 유대인만의 민족종교가 아니라 그 밖의 유대인 나아가 인종을 초월한 보편종교를 만들기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이를 뒷받침한 사상이 로마의 만민법사상과 스토아의 사해동포주의라할 것입니다. 하여 바울이 기독교 구축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할 것이나 근원적으로 당대의 그리스,로마의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실체론이었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는 바울을 만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이데아와 현상으로 세계를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질서로 보는 실체론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실체론은 실체를 독립적이고 고정불변한 존재로 보기에 단일하고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있으므로 후행존재의 원인이 되는 선행존재는 존재근거인 실체가 되어 상대방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를 도구로 지배하고 이용하게됩니다.

(그러나 실체는 인간이 대상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기위한 언어적 허구개념이라는 점은 수차례 지적하였습니다만 이런 실체 개념으로 2천년동안 지구를 지배해왔으나 이런 허구적 개념으로는 현대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없기에 새로운 존재론, 즉 생성론을 구축하여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을 제1원인의 실체, 즉 플라톤의 이데아로 간주하는 기독교는 피조물인 인간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지배할 권한을 갖게되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수직적 계서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질서는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인간과 자연을 무자비하게 지배하게되는 제국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또한 선과 악 또한 실체로 간주하기때문에, 즉 악은 박멸해야할 실체이기때문에 중세의 대표적인 악인 마녀를 불에 태워죽이는 끔찍한 행위를 도리어 정의로 간주하는 비정상의 행태를 보입니다. 따라서 만일 바울이 그리스,로마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문화를 찾아 동쪽으로 나아갔다면 상호의존의 연기법과 얽힘의세계로 이루어졌다는 화엄사상, 즉 상입상즉의 사상을 예수의 해방과 구원의 사상에 결합시켰더라면 오늘날 예수의 가르침은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요?

이에대해 BuddistChristian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아리안족이 동진하여 인더스강에 독자적인 인더스문명을 개척하여 다신교인 힌두교를 낳았으며 이후 부처라는 걸출한 각자를 만나 힌두교의 존재론과는 전혀 다른 종교인 불교를 성립하게 됩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큰 차이는 힌두교는 실체론에 근거한 사상이고 불교는 비실체론,즉 생성론,사건론,과정론 에 근거한 자연철학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힌두교는 범(Brahman)아(Atman)일여에서 보듯이 불교와 유사하게 보입니다만 힌두교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고 불교는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연기적 과정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연기법에의해 내재적으로 서로 생성과정에 참여하기에 우주의 뭇 존재는 연기로 촘촘히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존재는 상호 내재하므로,즉 상입하기에 서로 남남이 아닙니다(즉 자기언급self reference). 또한 같이 참여하기에 서로 등가적 존재로서 평등하므로, 즉 상즉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서는 지배복종의 계서적 구조는 사라지고 오직 수평적 상호관계만 존재하므로 강자에 의한 약자를 배제하는 변증법이 아닌 강자와 약자가 중첩하여 제3의 대안을 제시하는 창발적 중도법을 따르게 됩니다. 하여 비록 아리안문명이 인도에 다신론과 실체론에 기반한 힌두교를 낳았으나 그럼에도 석가모니라는 위대한 각자를 만나 불교라는 비실체적 존재론을 통해 아리안의 실체는 허상에 불과하고 연기론이 실상의 법칙임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제 인도불교가 중국에 미친 영향을 알아 보도록하겠습니다. 인도의 대승불교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연기사상외에 유가행 중관학의 공사상과 세친의 유식사상 그리고 화엄사상이 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도 고승인 달마대사가 중국 남부 양나라에 들어갔을 당시 중국불교는 호국불교 또는 기복불교로 전락되어 부처 본연의 가르침이 쇠락되어 버렸으며 이를 알고난 달마태사는 부처 가르침을 신도들이 직접 깨닫게 하기위해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행을 하게됩니다. 하여 달마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중국은 자신의 고유사상과 융합 convergence 또는 자신의 고유사상으로 격의 transformation한 중국만의 독자적인 선불교를 만들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중국의 고대 유교의 심성론은 심과 성 (본성,자성)은 일치한다고 (심즉성) 보았으며 또한 본성은 하늘로 부터 부여받았기때문에 부지런히 수행을 하여 마음의 덕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한편 인도에서는 불성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기에 자신이 불성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고 이후 수행을 통해 불성을 깨우쳐 우주의 실상을 깨닫는다는 것을 골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여 중국의 심즉성 사상과 인도의 심즉시불 사상(이는 이(불)사(심)무애사상에도 나타납니다)은 서로 유사성을 띄기에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에서 선불교로 정착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인도의 점수돈오 사상이 중국의 심즉성 사상에 힘입어 선불교로 격의하게되었다할 것입니다. 다만 차이점은 인도 불교는 불성을 여래장처럼 ‘가능태’로 보았기에 요가처럼 점수의 수행이 필요하였다고 본 반면 중국은 본성,즉 자성을 ‘현실태’로 보았기 때문에 찰나심에의해 돈오할 수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중국인들은 불성이 현실태이기에 즉시 알아차리기만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선불교는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나뉘게 되는데 남종선의 좌장인 신수대사는 인도불교처럼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야한다고 본 반면 6조 혜능은 본성 또한 본래무일물이므로 수행한다고 반드시 알아차릴 수있는 것만은 아니기에 수행이 의미없고 오직 찰라의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위에서 본 중국 전통의 심즉성 관점을 온전히 따르고 있는 입장이라할 것입니다. 즉 신수는 점수돈오이고 혜능은 돈수돈오라할 것인바, 이런 관점은 기존의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과는 내용이 다른 문제이니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한편 달마의 영향으로 중국인은 종래의 심성론을 불교적인 심즉시불 사상으로 다시 격의하게 되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심즉성과 심즉시불은 같은 의미라고 보았으며 결국 마음과 우주 본성은 일치한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금나라로부터 송나라가 남송으로 쫒겨나가게 되자 주희는 중화의 부흥과 사회기강의 확립을 부르짖게 되는데 이의 근본원인을 불교의 반사회성에 있다고 보았기에 불교를 척결하고 새로운 유교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는데 이 것이 신유학, 즉 주자학, 성리학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도는 불성을, 중국은 자성을 본성으로 보고 주객미분 이전의 본래면목이라하여 심즉성과 심즉시불 사상에 의해 본성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희는 우주의 본래면목(본성)을 주객을 번별하는 인간의 도덕성으로 격하시킨 후 성과 심은 일치하지가 않다며 이를 이원적으로 분리시킨후 성이 심을 수양하는 존재, 즉 (도덕)성 의 함양을 위해 성이 심을 양성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성이 아닌 심의 덕을 쌓기위해,즉 천명을 받기위해 심을 수양해야한다는 유학의 정신과도 배치된다할 것으로 주희의 신유학은 마음과 분리된 성중심의 실체론적 계몽주의라할 것으로 뒤에서 보듯이 실체론이 갖는 문제점을 모두 노정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는 성을 도덕성으로 축소시킨 다음 이를 ‘성’이 아닌 ‘리’라고 칭하였으며 성으로부터 분리된 ‘심’, 즉 마음을 지닌 존재를 ‘기’라고 격하시켰습니다. 이는 불교의 ‘이’와 ‘사’의 사상의 본 뜻(자연과 인간의 일치!)을 완전히 배격해버리고 단지 형식적 이원적 구조만을 흉내낸 것에 불과합니다. 즉 그는 불교의 우주 원리를 인간의 윤리로 도용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하여 그가 불교의 우주원리인 이사무애를 형식상 차용하였지만 실상은 이를 이용하여 인간사회의 윤리기강을 잡으려하였기에 실제로는 그는 이사무애,즉 이기무애가 아닌 이선기후를 추구한 것이라할 것입니다. 즉 중화를 중심으로 그틀의 가치나 제도를 보존하기위해 타 민족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 훈육하고자한 것에 불과하다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불교의 존재원리를 인간의 규범(도덕)원리로 격하시킨 후 선험적인 ‘리’에 경험적인 존재인 ‘기’가 복종해야 사회질서가 살아난다는 지극히 인간중심주의, 중화중심주의의 폐쇄적인 사상으로 유교를 전락시켰는데 이는 서구의 실체론 못지않게 리를 실체화시켜 못 존재를 그에 복종시키는 계서적 구조(3강5륜), 경직성(예론), 폐쇄성(중화사상), 인종차별(호론과 낙론) 등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중국은 근대의 과학화, 민주화, 산업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퇴행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계 문명은 항상 상호 작용에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있으며 나아가 실체론적 존재론(유일신사상과 신유학등)으로 무장한 문명은 개방성, 역동성, 창발성이 부족하기에 새로운 문명의 대안을 찾는 중도적 자세가 결여되어 반자연, 반인간, 반문명으로 흐른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있다할 것입니다.

ㅡ하여 바울이 서쪽으로 가지않고 동쪽으로 갔거나, 달마가 동쪽으로 가지않고 서쪽으로 갔으면 인류문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 2019/04/03- 10:14
15
0

역자해설:

작년 여름, 광저우의 80년대 청년문화를 그린 “커피에 설탕 좀 타기 給咖啡加點糖(1987) https://movie.douban.com/subject/2080567/?dt_dapp=1 ”라는 ‘데카당한’ 영화 한편을 관람했다.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한 중국 친구들은 관람후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동행했던 싱가폴 친구와 나는, 영화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면서 투덜거렸다. 막 개혁개방이 시작됐을 뿐인 당시의 중국 광저우 청년들이 이웃 도시 홍콩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탐미의식을 생활속에서 놀이문화로 즐겼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 후에 중국의 80년대와 관련한 글 몇편을 읽고, 소위 ‘80년대 문화열’ 시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실은 이 ‘백열상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경제위주의 개혁개방이 지속됨으로써,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예술인, 지식인의 공론장도 201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인류학자 샹뺘오 박사는 80년대 후반 고향인 져장성 원저우溫州의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남방의 지역도시까지 전파된 훈훈한 문예의 열기를 맛볼 수 있었고, 천안문 사태가 일단락된 1991년 베이징 대학 학부에 진학해서 개방의 시대 2막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 글은 8~90년대를 관통하며, 중국의 사회과학계를 재건해 나가고, 정부의 정책 방향에 끊임없이 아젠다를 세팅하는, ‘지식청년시대’ 지식인들의 공헌과 그들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특징과 이러한 특징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 그들의 강점과 한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향촌건설 운동의 지도자인 원테쥔 선생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중 한명으로서, 바로 글에서 묘사된 정부의 씽크탱크인 ‘중공중앙농촌연구실’ 출신의 연구관료였다. 이후에, ‘경제체제개혁연구소’산하 언론사의 대표를 거쳐, 인민대학 교수로 재직함으로써, 지식청년 출신 관료와 학자라는 양쪽 커리어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아래 사진1의 두룬셩 선생이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고, 현재 국가 부주석인 왕치샨은 당시 그의 사수였다. 이 글이 묘사하는 지청 지식인의 모습은 원톄쥔 선생과 ‘씽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는 2016년 인민대학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다양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학술연구는 그의 후학들인 후지청시대지식인 70허우, 80허우 연구자들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 글의 설명과 일치한다. 샹뺘오가 현재 협력하고 있는 칭화대학 왕후이 교수 등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서구이론의 도구적 사용 (아마도 오류가 있거나, 체리피킹하는 경향도 있는)이라는 공통점도, 많은 중국내외의 지식인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한국의 청년 인문학자가 이를 평한 것을 본 적도 있고 (https://begray.tistory.com/447 푸단대 역사학자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도론평), 홍콩에서 활약하는 대륙출신의 문학평론가 쉬즈둥許子東이 “서구 학자들은 방법론에 집중하고, 중국학자들은 문제 자체에 집중한다”는 커멘트를 하기도 한다. (“ 当时有个机缘,1987 年我去香港大学做访问学者,接触了西方流行的学术界理论,我看到了中西根本性的区别。内地做文学,像在前线打仗,你要治病救人,别管用什么方法,赶紧把病人救活。但在海外,就像医学院学生旁听的实验课,老师们做演示,学生在下面看。区别就在于内地文学批评,问题最重要,但西方学术圈,他们不讲问题意识,他们讲方法

https://shop.vistopia.com.cn/article?article_id=36txI&source=article).   

‘지청시대’ 지식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한국의 586세대와 포개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자식,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사명감과 주체성이 문자 그대로 공유된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역사실천안에서 민주화와 (후일 제도권안으로 들어온 이후엔)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에 무한한 관심을 두는 반면, “일상생활속의 권력관계가 낳은 다중적 모순이 만드는 미약한 파열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들지 않는 지적 편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2~30대 청년세대, 진보좌파, 페미니즘과 척을 진다. 중산층 계급의식 때문에, 이중인격에 속물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이제 고위급 정치가군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운동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사회과학계, 지식인 사회의 역할에 대한 전망과 제언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원톄쥔 교수를 포함하는 소위 중국의 ‘공공지식인’들이 왕성한 사회실천과 학술활동을 벌이던 시절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개발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이론이 ‘중국의 길’을 설명할 뿐아니라 세계체제에서 주변부나 준주변부에 속한 비서구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를 바랐다. 서구의 뉴레프트, 제3세계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오랜기간 지역의 근대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국, 일본, 타이완과 같은 동아시아 좌파 지식인들이 이러한 논의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학파’를 건설하고 싶다는 그들의 야심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시진핑 정권의 등장이래, 지식인 담론 공간이 거의 완전히 ‘체제화’하면서, 오로지 관방의 언어로 중국 주류사회에 공명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이제 중국 영토를 한발짝만 벗어나도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기 쉽지 않다.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학계의 담론 권력이 워낙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국 자신의 거버넌스 진화 문제, 그리고 홍콩과 신장 등 국내 지역 문제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 담론의 대외설득력이 떨어지게 된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중국내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샹뺘오 박사는 중국 학문의 규범화가 가져온 체제화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체제’라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류, 비주류 구분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비민간’ 혹은 정부와 정부의 직간접 영향이 있는 조직을 포함하는 ‘제도권’에 가깝다. 이를테면, 순수한 민간자본 기반의 사립대학을 제외하고, 중국의 대학은 소위 ‘사업단위’라고 불리는 정부의 ‘지도관리’하에 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는 조직들의 일부이고 그래서 ‘체제’안이라고 봐야 한다. 즉 ‘공공’이라고 불리는 영역조차 민간의 파이는 매우 작고, 거의 ‘체제’와 등치된다.     

샹뺘오 박사는 지청시대의 지식인과 관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은 후지식청년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 중국의 체제내 학계 출신이지만, 본인은 서구 학계인 옥스포드 대학에 소속돼 있다. 중국의 ‘중앙’, 핵심 ‘노른자’인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서도 수재로 꼽히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보다 근원적 정체성 기반은 고향인 ‘지방’ 원저우溫州의 소상공인과 몰락한 향신계급, 실증주의의 본고장 영국 학술계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역자가 그의 대담집인 ‘방법으로서의 자기’ 서평을 일간지에 기고하였다). 그가 사회학과에 소속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주변부를 지향하는 학과인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도 정체성과 부합한다. 그는 2014년 ‘어큐파이 센트럴’운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천안문 사태의 부정적 유산이 어떻게 홍콩사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논한 바 있다 (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 당시 중국 대륙의 국가 권력층과 홍콩의 시민들이 균형감있게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2019년 홍콩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른 것 같다. 이제 중국과 외부 세계의 지식인들, 중앙과 지방, 통일적 거대담론과 파편화된 작은 세계들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이어줄, 중국의 새로운 ‘공공지식인’ 샹뺘오의 활약을 여전히 기대해 본다. 한편 한국의 ‘후586시대’ 지식인들이 중국의 후지청시대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되기도 했다.  

보너스 – 중국의 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 듀오였던 웸이 서방의 대중청년 예술인을 대표하여 1985년 베이징과 광저우에서 공연을 갖은 것이다. 당시 북방과 남방의 거리와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생동하는 80년대 문화열의 분위기를 간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Wham ! Freedom (공식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BFwOs-jy53A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계열을 예로 들자면, 2015년은 아마도 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의 종언을 고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을 전후해서 1960년 이전에 출생했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산하향(하방)경험이 있는 학자들은 모두 은퇴했다. 이들 대부분이 교직을 떠났다. 동시에, 정규교육을 받고, 학교 외에는 별다른 인생경험을 해보지 못한 70년대 출생 학자들이 학계의 주류로 나서게 됐다. 지식청년의 배경을 갖는 학자들은 1978년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리더쉽이었고,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지식청년(이후 지청)의 시대’를 만들었다. 2015년 8월13일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으며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왕한셩王漢生 선생이 겨우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그의 죽음이 2015년의 의미를 내게 되새겨주었다.

지청시대의 종언은 이들 학자의 학술생명이 끝났다거나,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後지식청년시대’의 학자인 우리들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가까운 시일내에 그들의 연구업적을 전면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제와 관점은 미래 상당히 오랜 기간, 중국사회과학발전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지청시대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리더쉽을 발휘해오던 독특한 분위기와 기질의 학술실천 방식이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중국현대사회과학의 변천은 아마도 토마스쿤이 말한 패러다임 구축(지식이 점차로 쌓이는 과정)과 패러다임 전환이 상호교대되는 경로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듯 하다. 다른 세대간에 학술실천방식이 전환되는 것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과 축적방식의 변화이다. 만일 이런 축적방식의 전환을 파악하지 않으면, 유효한 지식의 축적방식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청시대의 학술실천은 제한된 물질적 조건하에서, 비공식적인 교류와 조직을 이용하고, 강렬한 사명감과 개척정신에 기반하며, 발산형 사고방식 (역자 주 – divergent thinker)을 택하고 있었다.  반대로 2000년 이후의 학술활동은 공식적인 기관안에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금을 따내고, 인정과 허가를 받으며 (이런식으로 학교순위가 매겨지고, 지도자가 칭찬을 하고, 학자 개인도 지명도를 쌓아간다) 전문연구자로서의 직업적 안정성과 커리어의 개발을 추구한다. 지청시대는 반半민간의 연구공간을 창조했지만, 국가기관과도 잘 소통했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공개토론을 하거나, 심지어는 여론을 형성해서 정부개혁방향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이제 후지청시대에 들어와서, 연구방법은 고도로 전문화했지만, 학술은 이제 행정관리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민간과 반민간이 함께 지식을 생산하던 공간은 사라졌다. 학자와 정부간의 협력은 정부관리효율을 높이는 것이 주요목표이다. 이른바, 폐쇄적인 씽크탱크 컨설팅이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이 주요한 방식이고, 정부의 논리와 정책 방향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사회과학의 지청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국가관료의 지청시대도 끝났다. 2010년 이후 대부분의 지청출신 지방정부 간부들도 은퇴했다. 그들은 대학의 학자들과 사회적 배경, 학습경험, 지식의 구조, 생활방식이 동일했다. 공무원의 지식전문화 그리고 규범화가 관료시스템에 새로운 합법성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점점 완고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한 동기로 삼는 집단으로 변해갔다. 공무원과 대학과 정부연구기관에 속한 학자들도 2014년 이후 모두 1990년대말에 시작된 ‘사회안정제일주의維穩’ 정책에 반대했지만, 사실은 자기 밥그릇 안정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사회안정제일주의’가 모두의 이익을 지키는 기반이 됐고, 연구주제든 방법이든 해바라기식唯上으로 변하게 된 이유도 그때문이다.

1980년대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달랐다. 당시, 정부의 연구기관, 대학과 반半민간문화단체의 지청세대 학자들과 정부내의 중하층간부, 그리고 지방정부 간부 (모두 대부분 지식청년 배경을 갖고 있다)들이 심리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의제를 주고 받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나는 1990년대 중기에 저쟝浙江성, 후난湖南성 등에 가서 필드조사를 했는데, 지도교수인 왕선생님 네트워크의 덕을 보면서, 이 공동체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방정부 간부들이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개혁연구소體改所, 특히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실農研室의 책임자는 최근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가 ? 힘있는 간부들은  끝도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힘없는 간부들은 나의 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드러내기 원했다. 모두 토론을 희망했다. 지금의 간부들은 소심한데다가 안온한 분위기만 좋아한다. 국가안전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이익만을 보호하려 한다.

<사진1> 지식청년시대를 창조한 반半민간연구공간은 정부부문과도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공개토론이나 혹은 정부개혁방향을 뒤엎는 제안도 서슴지 않았다. 농연실 시절의 두룬셩杜潤生, 왕샤오창王小強, 왕치샨王歧山 (왼쪽부터 오른쪽으로)이 농촌에 가서 필드조사를 하고 있다.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시대적 차이는 사회과학계와 관료시스템안에 있던 지식청년들이 은퇴하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상층부로 이동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13년까지, 엔지니어 출신이나 문화대혁명시기의 대학생 지도자들이 제도, 규범, 조화를 강조했다면, 2013년 이후의 키워드는, 돌파, 의지, 이상, 소그룹小組정치, 과단성과 박력 (大刀闊斧 역자주 – 큰칼과 도끼, 수호지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정치 상층부가 갖는 이런 ‘지식청년 기질’과 다음 세대의 지식인 및 중하층 공무원 그룹은 잘 맞지 않는다. 만일 이들과 같은 매개계층이 없으면, 상층 정치인들이  유효하게 서로 다른 사회의 이익을 적절히 대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청시대종언의 역사적 의미가 갖는 중요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과학 지청시대의 종언과 고급정치인 지청시대의 시작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는, 동일한 역사과정의 결과이다. 이중에서, 지식청년과 국가체제의 관계가 관건이 된다. 1980년대이래 지식청년 담론중에서 이들이 갖는 ‘민간’의 성격에 대해 많이들 논의한다. 문화혁명기간중에 특히 린뺘오林彪 사건후, 어떻게 지하에서 독서를 하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해왔느냐는 것같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것은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회복과 재건기간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두개의 중첩된 커뮤니티가 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해간다走上未來>>총서와 <<20세기문고>>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그룹이 있고, 두번째로는 구舊경제체제개혁연구소와 구舊중공중앙서기처농촌정책연구실이 중심이 되던 ‘씽크탱크’그룹이 있다. 당시에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과 베이징대학 등의 대학원생들도 이 두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두 그룹으로부터 중요한 학자들과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지식청년시대 학자와 학생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그들이 온전히 ‘민간’의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관심을 끌었고, 우선은 그 문제들이 사회주의 진영내 발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은 그들의 주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소련공산당내부의 모순, 1956년 이후 유럽좌파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1968년 이후 사회주의 경향의 사상 (싸르트르, 알베르 까뮈),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등이 특히 중요했다. 그들의 자아의식안에는, 상당히 강한 ‘공화국정서’가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사회주의 혁명의 자식이자, 인민공화국의 주인이라 여겼다. 그들이 제안하는 의제들은 중국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이냐였다. 가장 핵심은, 지식청년들의 활약이었다. 이들중의 리더쉽은 고급간부의 자녀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문혁기간중에 소위 ‘황피서(노란색 커버의 책)黃皮書’, ‘회피서(회색 커버의 책)灰皮書’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혁’이 끝나고, 최고통치자 집단은 이들 청년들을 자기편으로 여겼다. 지방정부에서도 그들을 무관의 제왕으로 대우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그들은 “내가 아니면 누가 맡으랴”는 자신감과 권위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기질을 갖게 됐다.

<사진2>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중앙선전부와 중앙편역국조직이 번역해서 ‘내부참고비판용’으로(일반인은 열람 금지) 출간한 정치, 역사, 철학, 문학작품 시리즈의 책 대부분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관련이 있다. 책표지는 대부분 옅은색을 띄고 있어서. 회피서, 황피서라고 불렸다.

1990년이후 (역자 – 천안문 사태가 종결되고), 국가체제와 지식청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는 조직의 책임자가 되어, 목소리를 낮추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공론장을 떠났다. 다른 일부는, ‘우리편’에서 제외되어, 그중에서도 학문에 뜻이 있는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술연구의 제도화에 힘썼다. 이들 사상가들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선진국의 학술연구를 동경한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80년대 급진사상운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다. 90년대 지식청년학술시대의 주제는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전문지식체계와 연구방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규범화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학술활동이 온건한 민주주의의 건설, 사회의 장기적 안정의 기초를 닦도록 돕는 것이었다.

현재 지식청년 세대가 고급정치가로 등장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수는 구체적으로 누가 선택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과 답일 뿐이다. 학계의 지청시대 종언은 그래서 바탕으로 돌아가, 학술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통해서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실패했다. 형식상으로는 규범화된 학술활동은 전면적으로 체제안으로 들어왔다. 사회과학원 체계의 변화가 특히 명확하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사회학자 잉싱應星이 지적한 것처럼, 지청세대의 학자들은 1990년후기부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싱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그들이 이중인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신과 기허, 개척과 탐욕, 무실과 속물성 創新與氣虛,開拓與貪焚,務實與媚俗”,역자주 – 2009년 칭화대학 사회학과 교수 잉싱이 ‘문화종횡’지에 발표한 글, 지청 학자들이 학계의 실력자가 되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함) 학계의 변화가 지식청년그룹의 도덕적 변신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지청학자들의 학술실천이 내재적으로 가진 모순이었다. 이 글에서는 사회학계안에서 드러난 두가지 모순에 대해서만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지청세대 학자들은 원래 비규범적인 학교체제바깥에서의 학술활동에 능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간 이후에는 학술의 규범화에 진력해야 했다. 두번째로, 지청세대 학자들은 다른 보통학자들이 얻기 힘든 풍부한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연구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하지만,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 이론에 복무하는 소재가 되고, 다양한 경험을 초월하는 통일 사상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다양한 측면의 모순간의 상호작용이 1990년대 학술생태계의 하나의 내적인 동력이었다. 지식청년시대의 종결은 모순운동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순의 구체적인 측면은 계속 존재했지만, 반대로 그 대립면이 사라지면서 생명력을 잃게 됐고, 부정적인 측면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지청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자산이 오히려 우리의 족쇄가 됐다. 규범과 비규범의 모순은 이제 ‘체재화’되었다. (지금 시대의) 상대적으로 협소한 경험과 이에 따른 관점이, 실사구시 정신과 자주적 혁신의 기초를 결여한 학술활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연구활동을 통한 파괴적 혁신을 방해하고, 체재화 앞에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모순운동이 지청시대 종결의 원인은 아니다. 훨씬 더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 사실 주요한 원인은 학계 내부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는 이 실마리가 우리가 현재 직면한 주요한 곤경을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나는 1991년에 일년간 캠프에 갇혀 군사훈련을 받고,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대략 대학 2학년에 해당하는 1993년에 왕선생님의 “유동流動농민공” 과제소그룹에 참여했다. 1990년대 베이징의 사회학자들사이에 소위 ‘왕한셩워크숍’이라는 타이틀은 왕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중국사회학에 핵심적인 공헌을 한 일군의 중년학자들이 자주 모여서 토론을 하고, 과제의 협력을 조직한 활동을 의미한다. 나는 1995년에 정식으로 왕선생님의 석사과정 지도학생이 됐고, 1998년에 졸업을 해서, 이 학자들과 더 깊은 교류를 갖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회합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는데, 즉 이들이 구성한 아주 독특한 사회적 관계와 학술실천 방법을 접했다. 왕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나는 운좋게도, 그분의 매력적인 인격을 직접 지켜봤을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사람됨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이다) 이러한 매력이 구체적인 인생경험이 농축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매력적인 사람됨이 환원되어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러한 실천과 유효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를 계승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이 글에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역사요소적 속성을 의미한다. 지청시대 학자들의 사람됨이나 학자됨을 적지 않은 ‘후지청세대’의 학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전체적 상황과 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다르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의 진퇴결정이 학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가 이 그룹의 기복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뿐이다.

(1/3)

 

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화, 2021/05/04- 20:15
14
0

마침내 1820년대 이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뒷마당’으로 전락할 처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이미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 선언으로 북미 이남의 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는 없었다. 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독립과 함께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카메라를 보며 ‘한국식(?)’ 인사를 하는 쿠바의 발랄한 청소년들의 모습(2018. 07).

쿠바의 독립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셈이다. 1860년대 이미 세계 설탕 공급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며 미국과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었고, 주요 교역국이 이제는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은행가들은 쿠바의 독립전쟁이 한참이던 19세기 말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탕 밭을 모조리 사들이며, 철, 니켈, 망간 등과 같은 광업 산업까지 매점, 쿠바 경제를 장악해갔다.

이로써 섬의 경제를 독점한 미국에게 이제 스페인을 아메리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기실 쿠바의 독립은 미국이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미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완성되었으니, 카리브해 섬의 독립은 이제 미국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독립 직후 제정된 쿠바 헌법에는 이른바 “플랫 수정안”을 추가하며, 이제 미국은 쿠바 공화국을 내정간섭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고, 신식민지의 시대를 열었다.

쿠바 경제를 장악한 미국 자본가들은 섬의 토착 지배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착취경제를 이식해 나갔다. 수출 단일 작물인 설탕 산업은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내의 소수 매판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며 쿠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미르의 지적처럼 신식민지 쿠바에서 미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쿠바의 소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소위 ‘계급적 동맹’을 이룬 경우였다.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쿠바 민족주의는 고조되었으며, 단일 작물 수출경제에 기반을 두는 대형 플랜테이션 경제는 다수의 빈곤한 노동계급을 양산하며 농촌사회를 붕괴시키고, 도시는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반면에 아바나는 수천의 미국인들과 부유한 쿠바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요트 클럽과 같은 폐쇄적인 사교 시설들로 넘쳐났다. 당시 쿠바 전체 인구의 3% 미만이 수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의 2/3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고 그마저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 같은 다수의 빈곤과 극단적인 불평등이 1959년 쿠바 혁명이 반제국주의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다. 계급적 요구를 담은 쿠바 혁명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운동은 쿠바 민중들을 수탈하는 토착 지배세력과 계급적 동맹을 맺은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며,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1959년 혁명은 당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던 미국의 지배와 토착 지배계급의 수탈에 응답한 쿠바인들의 저항이었고 그들의 자주적 선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갑론을박은 뜨겁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은 소위 노동계급 중심의 이론에 익숙한 서구 중심의 마르크스적 혁명 공식에 빗대어 비판을 받아왔다. 19세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서유럽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 이론이 20세기 쿠바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론은 현실을 지배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현실을 가능하게 했던 구체적 현실들이 이제는 거꾸로 이론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일갈한 베네수엘라 인류학자 사노하(Sanoja)의 지적은 새겨 볼 만하다.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심지어 그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는 19세기 이후 유럽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현실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현실적 토대가 되었다면, 약 100년 후 쿠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조건은 유럽의 그것과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쿠바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바 혁명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이었다. 민족과 계급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였고, 피델의 주장처럼 “1959년 혁명은 역사적으로 고착된 쿠바인들에 대한 착취와 횡포의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소위 21세기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끝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가 더는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동구권 국가들과 동맹을 이루고 있던 쿠바의 미래도 이와 함께 불투명해 보였음은 물론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도 역사와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시대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그 정점을 찍기 시작하는 19세기 이후부터 줄곧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많은 이들에게 실천과 행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반면, ‘자유’와 ‘시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자본주의 질서는 마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체제라는 공식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체의 활동들은 ‘자유’를 부정하는 불경한 일로 매도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쿠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기저에 흐르는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예로,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쿠바 사회가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서 가능했다거나, 국제의료활동은 쿠바 정부의 내정실패와 인권유린 문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 등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과연 쿠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체제일까. 우선 체제의 정치적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쿠바의 독특한 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동체적 가치와 합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 같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쿠바의 보건정책의 핵심은 무상의료라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제공되는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은 보편적 권리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지급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혜택받는 상품이 아니며, 모든 쿠바 국민은 이를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권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개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동등한 “모두의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같은 명제가 함의하는 바는 현재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권리와 의료 불평등의 최소화를 추구한 전략으로써 쿠바의 보건의료는 지역사회의학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모델의 주요 목적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책임의식과 참여,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이자 기획자로 주민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보건모델은 개인과 지역사회의 유기적인 협력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과 같은 보건 의료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으니, 이 모델이 쿠바 지역사회를 개인이 아닌 “이웃 사회”가 만들어지는 기제로 작용했을지, 혹은 그 역으로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이 같은 의료시스템을 안착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자본이었을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조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쿠바의 지역사회는 여전히 이웃 간의 정이 훈훈했던 과거 우리 시대의 많은 일상과 닮았다는 점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보건의료정책이 높은 의료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묘책의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쿠바의 지역사회에서 보건의료의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면 어떨까 한다.

화, 2019/10/29- 19:44
1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