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지역

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admin | 금, 2021/08/27- 03:14

[인터뷰]

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김동우 작가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정리 : 김혜영 선임연구원

‘뭉우리돌’의 사전적 의미는 ‘모난 데가 없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큼지막한 돌’이다. <백범일지>에서 차용한 이 단어는 독립운동 정신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 선생은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자신을 협박하자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올곧은 일에 생을 바치고자 했던 뭉우리돌들, 전 세계 곳곳에 굳건히 박혀 대한 독립을 일궈낸 뭉우리돌의 역사. 독립기념관 자료를 샅샅이 뒤져 주소 한 줄, 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니며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과 그곳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사진과 글로 남긴 김동우 작가를 만나보았다.
김동우 작가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신문사 기자로 일했으며 세계 60 여개국을 여행했다. 중국, 인도, 멕시코 등 10 여개국의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 200여 곳을 직접 방문, 카메라로 기록해 2019년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그 후 독립운동사적지와 그곳에 사는 후손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차례 개최했다. 지난 5월 18일부터 강북구의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 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열고 있으며, 최근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의 우리 독립운동 유적지를 다룬 <뭉우리돌의 바다>를 펴냈다.

●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의 포스터와 도록, 이번 <뭉우리돌의 바다> 표지가 모두 같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가?

●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기획이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뭉우리돌의 바다>도 멕시코와 쿠바를 핵심 지역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멕시코와 쿠바 이주 한인을 상징하는 애니깽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다. 책이나 전시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사진이라 생각한다. 책의 제목도 그래서 ‘뭉우리돌의 바다’이다. 태평양을 건너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태평양을 건너가야 하고 멕시코와 쿠바도 그렇다. 표지를 정할 때 출판사에서 제가 찍은 바다 사진으로도 시안을 만들었는데, 바다가 들어간 사진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애니깽 사진으로 했다. 애니깽이 모든 걸 상징하기도 하고.

●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작 <뭉우리돌을 찾아서>와 제목도 비슷해서 사진집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 몰랐던 역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교과서 밖 이야기들을 전달하고 싶었다. 실제로 독립운동가 후손 분이 해주셨던 말씀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다. 사진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진이 만능은 아니다. 제가 없어도, 제 설명이 없어도 사진 한 장 한 장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충분히 이 책 한 권으로 소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는 학생들과 국군장병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국군장병들이 읽으면 나라를 지키는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고 느낄 것 같다. 자긍심도 생기고.

●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가 사진으로 기록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 독립운동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간 세계 일주를 다녀왔고 다녀온 국가는 60개국 정도였다. 그러다가 2017년 인도 마날리를 여행하다가 결정적 계기를 만났다. 여행 중에 불현듯 친분이 두터운 PD님이 “홍범도 장군 묘역이 카자흐스탄에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인도에는 독립운동 사적지가 뭐가 있나 찾아봤더니 레드 포트(Red Fort)가 광복군 훈련지로 나오는 거다. 레드 포트는 인도 무굴제국의 왕도 건축물이다. 흔히 독립운동의 사적지라고 하면 상하이나 만주, 미주만 생각하는데 광복군이 인도까지 왔었다니 그 경위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날리에서 라다크로, 다시 델리로 진입해 레드 포트에 갔고 현장을 카메라로 담았다. 지금까지 찍었던 세계 일주 사진과 전혀 느낌이 달랐다. 여정 중에 계속 고민을 이어갔던 중, 국외 독립운동사의 지역을 담아낸 분은 많은데, 하나의 궤로 엮어 본 사진작가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사적지에 가서 그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이를 기록하는 건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라고 결론짓고 이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 오래전의 국외 사적지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지 않았나?

● 집요한 시선으로 100년 전의 감정을 잡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출발 전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공부하고 지도를 펴 샅샅이 살피지만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글로 쓴다면 스토리를 담아내겠는데 저는 사진 한 장으로 얘기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잘하고 있는 건가. 내가 현장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게 맞는건가’ 하고 계속 생각했다.

● 사실 사진만 보면 무슨 사진인지 알기가 쉽지 않은데, 작가님 사진전을 갔을 때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느낌이 더 와닿더라. 그렇더라도 사진을 찍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역사적 사실 등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 같다. 책을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는 무엇인가?

●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여행의 여정을 붙이고 사진가로서의 고뇌도 담고 싶었다. 이 세 가지를 놓고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 쓰고 싶었다. 읽다보면 여행기인 것 같기도 하고 소회도 담겨 있기도 하고 그런데 거기 중간 중간에는 제가 논문을 조사하고 단행본을 뒤져가면서 발췌한 내용들을 다 녹여내서 쓰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한 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그 다음 편은 중국을 중심으로 쓰려고 계획하고 있다. 현장 하나하나를 공부하면서 촬영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적지 한 곳 한 곳마다 훨씬 깊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맞물려 있었다. 이미지로 다 보여드리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쉽게 녹여내 완결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다.

● 시리즈면 다음 편 제목은 무엇인가?

●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중앙아시아 편은 뭉우리돌의 들녘, 중국 편은 뭉우리돌의 대륙으로 생각하고 있다. 뭉우리돌이 들어가는 제목은 유지하면서 바다, 들녘, 대륙으로 하려고 한다.

● 뭉우리돌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나?

● 제목을 정할 때 무척 고심했다. 사실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와 출판사도 다르고 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전 출판사 대표님께 양해를 구했더니 “뭉우리돌은 김구 선생님 건데”하며 흔쾌히 양해해주셔 이 단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 시리즈면 완결이 되어야 할 텐데 언제쯤 2, 3권을 만나볼 수 있나?

● (웃음) 사실 언제 완결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년까지 두 번째 책의 초고를 완성하려고 하고 있다. 내후년이면 두 번째 책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장담할 수 없다. 이 책을 쓰면서 힘들었던 게 특정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 논문마다 다르게 나온다는점 등이다. 학계에서 정리가 안 된 게 너무 많은 거다.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에 시간을 많이 썼던 것 같다.

● 한 사건을 말하는 연도나 사실이 다른 경우 어떻게 취사선택했나?

● 예를 들어 숭무학교 개교기념일을 1909년으로 써놓은 논문도 있고 1910년으로 쓴 논문도 있다. 그런 경우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다른 전공자분들께 자문도 받았다. 그럼에도 어떤 걸 선택 할지가 참 힘든 숙제였다.

● 그 외에 작업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 흔적을 찾는 것도, 후손 분들을 추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사관에도 연락해보고 한인회, 현지 선교사님 등에게 물어물어 취재를 많이 했다. 사적지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독립기념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코너가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적지를 비교적 잘 정리해 놓았는데 실제로 가보면 주소나 지도 표기가 잘못된 곳이 종종 눈에 띄었다. 조사한 지가 오래돼 그렇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조사해 업데이트가 됐으면 좋겠다.

● 앞으로 가보고 싶은 지역이 어딘가?

● 사적지 숫자에 비해 공을 못 들인 곳이 만주다. 동북 3성은 너무 광대하고 넓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농장을 만들어서 운영하던 곳이 내몽골까지 연결돼 있다. 앞으로 만주에 집중해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 끝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에게 기억과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

● 멕시코의 경우 이제 ‘이민 7세대’까지 갔다. 국외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 겉모습에서 한인 모습을 찾아내긴 힘들다. 그런데 제가 가보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을 추억하는 방식은 똑같았다. 바로 ‘맛’이었다. 후손 분들이 하나같이 “자네, 오래 여행을 다녔는데 김치 먹고 싶지 않나?”라고 물어보더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후손 분들 전부 김치를 담근다. 한 번은 인터뷰 중에 김치를 입에 넣어주시기에 우물우물 씹는데, 울컥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어보다 질기고, 기억보다 또렷하다.’ 기억과 기록이란 게 그런 거 같다. 대물림돼야만 하는 것.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니까.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 폭파의거’ 72주년을 맞아 연구소는 광복회 화성시지회(지회장 안소헌)와 서울특별시의회(의장 양준욱)의 후원으로 7월 22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11

기념식에 앞서 이준 열사 집터 등 북촌 일대에서 ‘친일의 길, 항일의 길’이라는 주제로 회원, 시민 등 약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권시용 연구원이 안내를 맡아 이상재 집터, 여운형 집터, 김성수 옛집, 한용운 옛집, 진단학회 사무소 터, 손병희 집터, 이병도 집터, 한상룡 옛집, 윤보선 가옥, 정독도서관, 윤덕영, 윤택영 집터 등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의거 7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함세웅 이사장과 안소헌 지회장, 임헌영 소장 등이 부민관 폭파의거의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의거 70주년을 맞아 재현한 연극 ‘정의의 폭탄’을 녹화한 16분 분량의 요약 영상을 상영하여 참가자들은 부민관 폭파 의거와 의거의 주역인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분 독립투사의 삶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인 경성 부민관은 1935년 건립되어 여러 차례 명칭과 용도가 바뀌었으며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현재까지 서울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서울시의회 양준욱 의장과 사무처의 지원으로 본 회의장을 기념식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에서 영화 〈군함도〉 개봉을 맞아 배우 송중기 팬연합이 모금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기금(500만원) 전달식이 진행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

∷ 편집부

월, 2017/08/07- 11:41
149
0

[식민지 비망록 27]

주5일근무제가 정착된 요즘에는 거의 사용할 일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기성세대의 머릿속에 제법 남아 있는 언어습성의 하나로 ‘반공일(半空日)’이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반만 쉬는 휴일, 즉 토요일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표현의 초기 용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뒤져봤더니, <독립신문> 1898년 11월 29일에 공일과 반공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통상회 일자 개정] 돌아간 일요일에 독립협회 회원들이 통상회를 하는데 공의하여 가로되 일요일은 7일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공일인데 공일은 세계 각국에서 사람마다 쓰지 않고 의례히 쉬는 날이어늘 독립협회 통상회를 항상 공일에 하는 것이 대단히 불가하니 이 다음부터는 공일 전날 토요 반공일에 통상회를 하기로 영위 작정이 되었다더라.

이것 말고도 일요일을 가리켜 예배일(禮拜日)이라고 한 표현들도 곧잘 보인다. 1880년대 서양 각국과 맺은 수호통상조약 말미에 붙은 ‘통상장정(通商章程)’에 조선의 항구에 입항한 선박이 24시간 이내에 해관에 신고하는 규정과 관련하여 이때 “예배일과 정공일(停公日; 공무를 정지하는 휴일)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는 구절이 으레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일요일이 공휴일로 정착된 것은 언제부터의 일이었을까? 이에 관한 자료를 세밀하게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관보> 1895년 윤5월 12일자에 수록된 각령(閣令)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 제4조에 “일요일은 전일(全日) 휴가를 작(作)하고 토요일은 정오(正午) 12시로부터 휴가를 작함”이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아직은 태양력(太陽曆)이 정식 채택되기 이전의 시절이었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쉬는 날로서 일요일의 존재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각령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에 포함된 내용으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관리들의 출퇴근시간이다. 조선시대에는 흔히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 ‘묘사유파법(卯仕酉罷法: 묘시[오전 5시~7시]에 출사하고 유시[오후 5시~7시]에 퇴청하는 방식)’이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이 원칙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504년(1895년) 윤5월 10일 각령 제7호의 각 관청 집무시한

31

33<관보> 1895년 윤5월 12일자에 수록된 「각령 제7호 각 관청 집무시한」이다. 여기에는 일요일에 종일 휴가, 토요일에 반나절 휴가를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이것을 보면 계절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아침 9시 또는 10시에 출근하여 오후 3시 또는 4시에 퇴근하는 방식으로 점심시간을 빼면 하루 5시간 근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름철 근무시간으로, 정오가 되면 퇴근하여 반나절만 일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직무에 지장이 없는 한 대개 여름휴가를 즐겼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한제국 시절의 관리들은 개국 504년 각령 제7호의 적용을 받았으나 1908년 7월의 각령 제6호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때에도 몇 가지 세부사항이 바뀌었을 뿐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하절기에 오후 1시에 퇴근하는 근무방식은 변함없이 지켜졌다.
이왕 말이 난 김에, 일제 통감부에 속한 관리들의 근무형태도 함께 살펴보았더니 1906년 7월 14일에 제정된 통감부령 제22호 ‘통감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이란 자료가 눈에 띈다. 이것을 보면 6월초에서 9월말까지 집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정오 12시까지이고, 나머지 기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단, 토요일은 오후 1시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규정은 1907년 10월 27일의 통감부령 제40호로 개정되었는데, 계절별로 근무시간의 재조정과 더불어 여름철 반나절 근무기간이 7월 1일에서 9월 20일까지로 축소되었을 뿐 대체적인 윤곽은 종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규정은 새로 제정되었는데 1910년 12월 12일의 총독부령 제59호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하절기를 제외한 나머지 시기에는 평일 퇴근시간이 오후 4시로 일괄 단축 조정되었고, 그 이후 1911년 12월과 1912년 3월에 걸쳐 관련 규정이 잇달아 부분 개정된 적이 있었다.

34

<조선총독부관보> 1910년 12월 12일에 수록된 ‘총독부령 제59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집무시간’. 평일은 대개 오후 4시에 퇴근하고, 하절기에는 정오까지만 근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총독부 관리들은 통상 오후 4시에 퇴근하며 여름철에는 반나절만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근무형태였다. 예를 들어 1915년 12월에 경복궁 안에 개설된 총독부박물관(總督府博物館)의 경우 열람마감시간은 오후 4시로 정해졌는데, 이는 총독부령에서 정한 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그대로 맞춘 탓이라고 풀이된다. 

36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1월 19일에 수록된 「총독부고시 제296호 조선총독부박물관 설치」 관련 규정. 이것을 보면 관람마감시간이 총독부와 소속관서 집무시간에 맞춰 오후 4시로 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1922년 7월에는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총독부령이 전면 개정됨에 따라 여름철 및 토요일 반나절 근무제가 폐지되고 그 대신에 1년 통산 20일 이내 휴가를 부여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1924년 6월 28일에 총독부령 제37호가 고시되어 토요일과 하절기(7.21~8.31. 사이)에 정오 12시까지 근무하는 형태가 부활되었으며, 이 시기에 20일 이내의 여름휴가도 함께 주어졌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 개정 연혁

38

이때 정비된 집무시간에 관한 내용은 적어도 규정상으로는 일제 패망에 이르는 시기까지 유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규정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였는데, 문제는 역시 전쟁이었다.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산되자 전시동원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발맞춰 근무시간 변경의 조짐은 <매일신보>1938년7월10일자에수록된 「하기 반휴제 폐지(夏期 半休制 廢止)」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변 발발 이후로 작년 여름에는 조선 안의 각 관청에서 반나절씩 휴식하던 것을 시국관계 사무방면에 종무하는 인원만은 폐지되고 평상시와 같이 사무를 보았는데 사변 1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는 총독부에서는 사변 관계 사무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무가 분망하므로 금년 여름에는 반휴(半休)를 총독부 부령으로써 전폐할 방침을 결정하고 오는 21일부터 실시할 터이라 한다.

39

중일전쟁으로 인해 총독부 소관 관청이 일제히 여름철 반휴(半休)를 폐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7년 7월 18일자 보도내용

여기에서 보듯이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총독부 소속관원들은 더 이상 여름철 반나절 근무제라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였다. 이때 하절기 반휴제의 철폐는 총독부령의 개정으로 명문화하지는 않았고, 다만 정무총감이 해마다 관통첩(官通牒)을 내리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러한 시국 변화에 맞물려 1937년 12월에는 겨울철 출근시간을 종전의 오전 10시에서 9시로 한 시간 당기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으로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되자 1942년 11월 1일 총독부령제275호 ‘전시중(戰時中)의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집무시간에 관한 건’이 제정되어 평일 퇴근 시간이 오후 4시에서 5시로 늦춰졌고, 토요일의 경우에도 정오 12시에서 오후 1시로 조정되었다. 이듬해인 1943년 7월에는 하절기 반휴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두 달 후인 9월에는 토요일 반나절 근무제도가 사라졌다. 일제의 패망이 완연해진 1944년으로 접어들어 총독부 관리들은 전시중 하절기 20일 휴가제의 철폐를 맞이한 데 이어 일요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40

<조선총독부관보> 1942년 7월 18일자에 수록된 정무총감 발신 관통첩(官通牒) 내용. 여기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여름철 집무시간은 단축 없이 평상시처럼 실시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해방 이후 시기에는 1949년 6월 4일에 제정된 ‘대통령령 제125호 공무원 집무시간 규칙’에 따라 ‘오전 9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의 대원칙이 확립되었고, 그 이후 여러 차례 규정 개정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이러한 근무형태가 정착된 것으로 나타난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일제의 침략전쟁이 없었더라면, 나아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 자체가 애당초 없었더라면 이 땅의 관공서 관리들은 적어도 출퇴근시간에 관한 한 “오후 4시 퇴근에, 여름철 반나절 근무”와 같은 태평성대를 여전히 누리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월, 2017/08/07- 15:19
148
0

식민지 비망록 29

이순우 책임연구원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6년 이후 한국통감으로 재임하면서 유달리 ‘동양평화’니 ‘우호선린’이니 하는 말들을 입버릇처럼 앞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관한 사진자료에는 갓을 쓴 한복 차림새로 영락없는 한국 사람의 행색을 한 모습도 남아 있다.
그가 과연 무슨 까닭에 이런 사진을 남겼는지가 궁금하여 무슨 단서가 될 만한 자료가 있나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일본복의 조선부인과 조선복의 일본부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진 화보 한 장이 눈에 띈다. 여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들은 한복 차림의 이토 사진에 나오는 그들과 완전히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의 면면과 옷차림에 비추어 보아 두 장의 사진은 모두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난다.
18

17

1906년 12월에 촬영한 한복 차림의 이토 히로부미와 특파대사 이지용 일행의 모습. <일본역사사진첩> 1912년 10월 발행.(왼쪽) /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자에 소개된 한복 입은 이토 통감 부인의 사진자료. 왼쪽부터 차례대로 박의병의 처 유주경, 이토의 딸 노리코, 이토의 부인 우메코, 이지용의 처 홍옥경이다.(오른쪽)

 

조선옷을 입고 뒤로 오른편에 선 부인은 공작 이토 히로부미 씨의 미망인 우메코(梅子)요, 왼편은 이토 공작의 딸 스에마츠(末松) 자작의 부인 노리코(德子)요, 앞으로 일본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은 부인은 이지용 씨 부인 이옥경(李鈺卿: 홍옥경-필자)이요, 왼편은 박의병 씨 부인 박주경(朴洲卿)이라. 이 사진은 지난 명치 39년(1906년) 11월 이지용 씨가 특파대사로 동경 갔을 때에 이토, 스에마츠 두 부인에게 조선의복을 선사한 답례로 두 부인이 이, 박 두 부인에게 일본의복을 선사한 기념사진.

 

그러니까 이 사진들은 1906년 12월에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특파대사로 일본 동경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등장인물의 면면은 왼쪽부터 특파대사의 수행원이던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의병(朴義秉, 1853~1929) 내외이고, 가운데가 이토 통감 내외, 오른쪽이 특파대사 이지용 내외, 그리고 앞쪽 맨 오른쪽이 이토의 딸이다.
<서우(西友)> 제2호(1907년 1월)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이지용 특파대사의 수행원에는 내부 회계국장 김관현(金寬鉉), 시종원 부경 송태관(宋台觀), 경무고문부 통역관 와타나베 타카지로(渡邊鷹次郞)의 부인, 특파대사 부인의 어학교사 요코야마(橫山)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연유에 대해서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30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특사목적(特使目的)] 특파대사 이지용 씨가 금번에 수개(數箇) 목적을 달하기 위하여 특사를 도득(圖得)하였는데 기(其) 내용을 득문(得聞)한즉 이토통감 원류(伊藤統監願留)할 사(事)와 망명객 특사(亡命客 特赦)치 아니할 사(事)이라 하나 노고(勞苦)만 도비(徒費)하고 목적은 달(達)키 난(難)하리라고 항설(巷說)이 분분하더라.

 

19

통감 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경성부사> 제2권, 1936

 

이를테면 이토 통감을 계속 통감의 자리에 남아 있도록 청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준용과 박영효 등 망명객의 특사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특파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목적이었다. 당시 특파대사로 선정된 이지용은 이미 1904년에도 이토의 방한에 따른 보빙대사(報聘大使)의 임무를 한 차례 수행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유학(幼學) 이희하(李熙夏)의 아들로 용구(龍駒)라는 이름을 지닌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되는 흥인군 이최응(興仁君 李最應)의 손자로 출계하여 고종황제의 5촌지간인 근친황족으로 변신하는 인물이었다.
흥인군의 후사가 된 직후에는 이은용(李垠鎔)이라 했다가 1900년 9월 영친왕(英親王)이 이은(李垠)이라는이름을 갖게 되자 이 글자를 피해 이지용(李址鎔)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그는 황족이기에 앞서 그 누구보다도 친일매국의 행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서명한 당사자가 바로 외부대신 임시서리였던 그였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지를 마음껏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것은 그대로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05년 35세의 나이로 내부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에도 적극 찬동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친일과 매국에 앞장 선 공로와 황족이라는 신분에 힘입어, 그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는 한편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伯爵)’이라는 비교적 높은 작위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유명한 노름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1일자를 비롯한 여러 신문기사에는 그가 용산 강정(龍山江亭)에 박의병과 김승규 등을 불러 화투판을 크게 벌였다는 소식이 기재되어 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화투판 동료 ‘박의병’은 다름 아닌 1906년에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했던 박의병과 동일인이다.
그는 1905년 이후 한성부윤을 지내면서 용산 일대의 군용지 수용에 깊이 관여하였고, 1907년 9월에는 임시군용 및 철도용지조사국장을 맡아 일본해군이 진해만 일대를 장악하여 해군기지를 조성하는 일에 앞장 선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1910년 6월 무렵의 신문기사에는 이지용이 화투판을 급습한 일본헌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얼굴을 다쳤다거나 그들에게 “다시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사죄까지 하며 망신을 당한 일이 잇달아 수록되어 있다. 나라의 운명이 오늘 내일 하는 상황에서도 그가 얼마나 화투노름에 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20

이지용 백작을 비롯한 다수의 친일인사들이 어울려 ‘지여땅이(짓고땡)’를 하다가 발각되어 도박범 및 도박장개장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2년 2월 1일자 보도내용.

 

하지만 그의 고질적인 도박병은 쉽사리 고쳐지질 않았고 이내 화투판을 다시 전전하다가 1912년 정초에는 다른 친일 권세가들과 어울려 ‘짓고땡’ 판을 벌이다 발각되어 큰 사단이 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이 일로 공판에 회부되어 태(笞, 매질) 100대의 판결을 받았고, 동시에 ‘백작(伯爵)’의 예우는 1912년 4월 9일부로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1915년 9월에 가서야 겨우 복작되는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그 사이에 친일의 대가로 치부한 재산은 대부분 탕진하고 말았는데, <동아일보> 1920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오호(嗚呼)! 이백(李伯)의 말로(末路)! 당년영화금안재(當年榮華今安在)」 제하의 기사는 패가망신하다시피 한 그의 몰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가산이 탕패되고 생계가 곤궁함으로써 능히 백작이라 하는 영위를 보존키 어려울 뿐 아니라 도저히 귀족의 체면을 유지키가 어렵겠다 하는 이유로 백작 이지용 씨가 작을 내어 놓겠다는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는 소문이 매우 낭자하여 뜻밖에 이지용 씨는 세상을 주목을 받게 되고 말았다. …… 나날이 쇠잔하여 가기만 하는 가세는 마침내 불과 육십 원씩의 사글세조차 내기에 눈살을 찌푸릴 곤경에 떨어진 형편이라, 그런 고로 비록 허설일망정 작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나는 것도 실상은 괴이치 않은 일이라 하겠더라.

 

친일귀족 이지용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니 그의 처 홍옥경(洪鈺卿, 1870~?)과 관련한 기록도 빼놓을 수 없다. 황현(黃玹)이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지용의 처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지용이 특파대사가 되어 일본으로 갔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에 머물러 있기를 청원하는 일과 망명을 한 이준용과 박영효의 일을 다루기 위함이었다. 이지용의 처 홍씨(洪氏)도 자칭 이홍경(李洪卿)으로 이에 동행하였다. 우리나라의 부녀는 원래 이름을 쓰지 않고 단지 모씨(某氏)라고 지칭할 뿐이지만 이때에 이르러 왜속(倭俗)을 본떠 저마다 제 이름을 써서 사회에 머리를 내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홍경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홍경은 일본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와 정을 통하고, 또 코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와 통하고, 후에도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도 통하였으니, 하기와라가 질투하였으나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 일본 풍속에 남녀가 서로 보면 반드시 악수하고 입을 맞추는 것으로 친밀함을 표시하였다.
하기와라가 돌아가려할 때 홍경이 이를 전송하며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그의 입에 들이미니 하기와라가 그 혀를 깨물어 버렸다. 홍경은 아픔을 참고 돌아왔는데 장안의 사람들이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이를 비웃었다. 홍경은 일본어와 영어에 통하고 양장을 하고서 이지용과 더불어 손을 잡고 다녔다. 간혹 인력거를 타거나 얼굴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며 양양하게 달리니 행인들의 눈을 가렸다. (하략)

 

21

1904년 3월 이토특파대사의 방한 때 숙소인 손탁호텔 앞에서 이토의 수행원들과 주한일본공사관 관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한 사진자료. 동그라미 표시를 한 인물이 바로 이지용의 처 홍옥경과 염문을 뿌렸다고 알려진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2권, 1904년 5월 8일 발행.

 

여기에는 이지용의 처 이름을 ‘이홍경’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홍옥경’ 또는 ‘이옥경’의 잘못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 27일자에 “특파대사 이지용의 부인의 본래 이름이 ‘홍경현(洪敬賢)’이나 금번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차에 ‘이홍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탓에 벌어진 착오인 듯하다. 정확하게는 ‘홍옥경’이 맞으며, ‘이옥경’이라고 한 것 역시 일본인들의 풍속에 맞춰 남편의 성을 따른 표기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홍옥경은 일찍이 대한부인회 회장 또는 여자교육회 총재의 직함을 갖고 일본세력이 주도하던 경성사교계를 종횡무진하였으며, 일본애국부인회 평의원과 동양부인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병합 직후에는 작위수여에 대한 사은(謝恩)을 위해 조직된 귀족관광단(貴族觀光團)에 합류하여 일본 동경에서 황후를 배알하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 후로는 남편 이지용의 도박 취향으로 인해 가세가 빈약해진 탓인지 약속어음부도나 토지사기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얘기가 드문드문 전해졌을 뿐 이렇다 할 활동상이 알려진 바는 없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시기에 이르러 친일여성인사들로 조직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의 간사 및 헌금자 명단에 다시 홍옥경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걸로 보면, 그의 태생적인 친일본능이 얼마나 오래 세월 지속되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월, 2017/10/23- 11:42
141
0

조시현 연구위원

지난 9월 21일 대법원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올해 5월 12일에 나온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민족사랑 5월호 참조)이 확정되어 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를 둘러싼 친일논쟁은 사법적인 차원에서 일단락되었다.
방응모의 친일행적은 해방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공포, 법률 제3호)에 따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다루지지 못하다가 50여 년이 흐른 뒤인 2004년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규명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에 의해 2009년 6월 29일 방응모의 행위들이 친일반민족행위인 것으로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반민규명위는 그동안 밝혀진 그의 행위들이 반민규명법 제2조의 13, 14, 17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
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
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
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방응모는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사전의 발간에 대해 조선일보가 11월 9일 오피니언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자인 방우영, 방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방상훈이 원고로 또한 이들의 회사인 조선일보사가 원고 보조 참가인으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서울행정법원의 1심판결에 비춰보면 조선일보사의 일제시기 행위가 어느 국가기관에 의해서도 문제되지 않았는데도 조선일보사가 원고측에 선 이유를 약간 짐작할 수 있다. 판결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2005.12.29. 제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할 때 반민규명위
의 결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고 이에 따라 “재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사주의 행적과 재산상속, 언론사라는 상속된 회사의 성격과 활동, 뉴라이트, 건국절, 국정교과서 파동, 이른바 ‘역사전쟁’, ‘역사적폐’ 등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민규명위는 2005년 5월 31일 발족하여 2009년 11월 30일 활동을 종료하였기 때문에 위원회의 결정과 관련된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의 수행 등은 행정자치부 산하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맡게 되어 방응모결정 취소소송의 피고 역할을 하였다. 방응모의 상속자들과 조선일보사의 소송은 그 후 2010년 12년 22일 서울행정법원의 1심 판결,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 다시 2017년 5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과 이번의 대
법원 판결까지 6년여의 재판과정을 거쳐 5개의 판결문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13

담당관이 내무대신에게 전투기 제작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에 관한 승인을 요청하면서 이 회사 유일의 조선인 감사인 방응모를 ‘경성유력자’로 표시하였다.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의 건을 승인함」(일본내무대신, 1944.10.6.)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반민규명법 제2조가 열거하는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하여 결국 13호에 관한 위원회의 결정만이 적법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17호 관련은 2012년의 단계에서 절차적인 이유로 위법하게 되었고, 14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투어졌지만 역시 위법한 것으로 이번 판결로 확정되었다. 법원이 인정한 구체적인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잡지 ????조광????의 발행, 여기에 논설 투고한 것, 임전대책협력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서의 활동에 국한되었다. 조선항공공업의 주주와 감사로 활동한 것(14호 해당)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직과 선전부 위원이었던 사실(17호 해당)은 반민규명법의 문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형식적 논리로 친일이 아니라고 한 셈이다. 결국 위원회와 달리 법원이 볼 때는 방응모의 과거 행적은 일부만이 친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범위가 대폭 축소되게 되었다. 어렵게 친일반민족행위규명에 관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활동했지만 사법부에 의하여 그 의미와 효과는 반감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기각 판결에서는 ‘심리불속행’이라고 하여 상고심 자체를 열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떠
나서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일부 대법관들과 판사들이 배반하고 방응모에게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분노의 마음까지 든다.
이제 이해승의 친일재산에 대한 사건을 제외하고 방응모 재판이 종료됨에 따라 반민규명위와 관련된 소송들도 끝나고 친일반민족행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실천은 다시 시민사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친일문제에 대한 입법, 위원회의 활동, 사법 판결에 이르는 국가의 관여가 한 바퀴 돈 지금, 시민사회측에서 식민지배와 부역협력자들이 남긴 역사적 과제들을 다시금 점검해볼 때이다.

목, 2017/10/19- 18:58
13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