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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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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admin | 금, 2021/08/27- 03:14

[인터뷰]

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김동우 작가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정리 : 김혜영 선임연구원

‘뭉우리돌’의 사전적 의미는 ‘모난 데가 없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큼지막한 돌’이다. <백범일지>에서 차용한 이 단어는 독립운동 정신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 선생은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자신을 협박하자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올곧은 일에 생을 바치고자 했던 뭉우리돌들, 전 세계 곳곳에 굳건히 박혀 대한 독립을 일궈낸 뭉우리돌의 역사. 독립기념관 자료를 샅샅이 뒤져 주소 한 줄, 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니며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과 그곳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사진과 글로 남긴 김동우 작가를 만나보았다.
김동우 작가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신문사 기자로 일했으며 세계 60 여개국을 여행했다. 중국, 인도, 멕시코 등 10 여개국의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 200여 곳을 직접 방문, 카메라로 기록해 2019년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그 후 독립운동사적지와 그곳에 사는 후손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차례 개최했다. 지난 5월 18일부터 강북구의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 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열고 있으며, 최근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의 우리 독립운동 유적지를 다룬 <뭉우리돌의 바다>를 펴냈다.

●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의 포스터와 도록, 이번 <뭉우리돌의 바다> 표지가 모두 같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가?

●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기획이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뭉우리돌의 바다>도 멕시코와 쿠바를 핵심 지역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멕시코와 쿠바 이주 한인을 상징하는 애니깽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다. 책이나 전시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사진이라 생각한다. 책의 제목도 그래서 ‘뭉우리돌의 바다’이다. 태평양을 건너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태평양을 건너가야 하고 멕시코와 쿠바도 그렇다. 표지를 정할 때 출판사에서 제가 찍은 바다 사진으로도 시안을 만들었는데, 바다가 들어간 사진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애니깽 사진으로 했다. 애니깽이 모든 걸 상징하기도 하고.

●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작 <뭉우리돌을 찾아서>와 제목도 비슷해서 사진집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 몰랐던 역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교과서 밖 이야기들을 전달하고 싶었다. 실제로 독립운동가 후손 분이 해주셨던 말씀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다. 사진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진이 만능은 아니다. 제가 없어도, 제 설명이 없어도 사진 한 장 한 장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충분히 이 책 한 권으로 소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는 학생들과 국군장병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국군장병들이 읽으면 나라를 지키는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고 느낄 것 같다. 자긍심도 생기고.

●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가 사진으로 기록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 독립운동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간 세계 일주를 다녀왔고 다녀온 국가는 60개국 정도였다. 그러다가 2017년 인도 마날리를 여행하다가 결정적 계기를 만났다. 여행 중에 불현듯 친분이 두터운 PD님이 “홍범도 장군 묘역이 카자흐스탄에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인도에는 독립운동 사적지가 뭐가 있나 찾아봤더니 레드 포트(Red Fort)가 광복군 훈련지로 나오는 거다. 레드 포트는 인도 무굴제국의 왕도 건축물이다. 흔히 독립운동의 사적지라고 하면 상하이나 만주, 미주만 생각하는데 광복군이 인도까지 왔었다니 그 경위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날리에서 라다크로, 다시 델리로 진입해 레드 포트에 갔고 현장을 카메라로 담았다. 지금까지 찍었던 세계 일주 사진과 전혀 느낌이 달랐다. 여정 중에 계속 고민을 이어갔던 중, 국외 독립운동사의 지역을 담아낸 분은 많은데, 하나의 궤로 엮어 본 사진작가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사적지에 가서 그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이를 기록하는 건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라고 결론짓고 이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 오래전의 국외 사적지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지 않았나?

● 집요한 시선으로 100년 전의 감정을 잡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출발 전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공부하고 지도를 펴 샅샅이 살피지만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글로 쓴다면 스토리를 담아내겠는데 저는 사진 한 장으로 얘기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잘하고 있는 건가. 내가 현장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게 맞는건가’ 하고 계속 생각했다.

● 사실 사진만 보면 무슨 사진인지 알기가 쉽지 않은데, 작가님 사진전을 갔을 때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느낌이 더 와닿더라. 그렇더라도 사진을 찍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역사적 사실 등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 같다. 책을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는 무엇인가?

●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여행의 여정을 붙이고 사진가로서의 고뇌도 담고 싶었다. 이 세 가지를 놓고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 쓰고 싶었다. 읽다보면 여행기인 것 같기도 하고 소회도 담겨 있기도 하고 그런데 거기 중간 중간에는 제가 논문을 조사하고 단행본을 뒤져가면서 발췌한 내용들을 다 녹여내서 쓰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한 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그 다음 편은 중국을 중심으로 쓰려고 계획하고 있다. 현장 하나하나를 공부하면서 촬영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적지 한 곳 한 곳마다 훨씬 깊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맞물려 있었다. 이미지로 다 보여드리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쉽게 녹여내 완결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다.

● 시리즈면 다음 편 제목은 무엇인가?

●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중앙아시아 편은 뭉우리돌의 들녘, 중국 편은 뭉우리돌의 대륙으로 생각하고 있다. 뭉우리돌이 들어가는 제목은 유지하면서 바다, 들녘, 대륙으로 하려고 한다.

● 뭉우리돌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나?

● 제목을 정할 때 무척 고심했다. 사실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와 출판사도 다르고 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전 출판사 대표님께 양해를 구했더니 “뭉우리돌은 김구 선생님 건데”하며 흔쾌히 양해해주셔 이 단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 시리즈면 완결이 되어야 할 텐데 언제쯤 2, 3권을 만나볼 수 있나?

● (웃음) 사실 언제 완결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년까지 두 번째 책의 초고를 완성하려고 하고 있다. 내후년이면 두 번째 책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장담할 수 없다. 이 책을 쓰면서 힘들었던 게 특정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 논문마다 다르게 나온다는점 등이다. 학계에서 정리가 안 된 게 너무 많은 거다.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에 시간을 많이 썼던 것 같다.

● 한 사건을 말하는 연도나 사실이 다른 경우 어떻게 취사선택했나?

● 예를 들어 숭무학교 개교기념일을 1909년으로 써놓은 논문도 있고 1910년으로 쓴 논문도 있다. 그런 경우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다른 전공자분들께 자문도 받았다. 그럼에도 어떤 걸 선택 할지가 참 힘든 숙제였다.

● 그 외에 작업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 흔적을 찾는 것도, 후손 분들을 추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사관에도 연락해보고 한인회, 현지 선교사님 등에게 물어물어 취재를 많이 했다. 사적지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독립기념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코너가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적지를 비교적 잘 정리해 놓았는데 실제로 가보면 주소나 지도 표기가 잘못된 곳이 종종 눈에 띄었다. 조사한 지가 오래돼 그렇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조사해 업데이트가 됐으면 좋겠다.

● 앞으로 가보고 싶은 지역이 어딘가?

● 사적지 숫자에 비해 공을 못 들인 곳이 만주다. 동북 3성은 너무 광대하고 넓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농장을 만들어서 운영하던 곳이 내몽골까지 연결돼 있다. 앞으로 만주에 집중해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 끝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에게 기억과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

● 멕시코의 경우 이제 ‘이민 7세대’까지 갔다. 국외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 겉모습에서 한인 모습을 찾아내긴 힘들다. 그런데 제가 가보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을 추억하는 방식은 똑같았다. 바로 ‘맛’이었다. 후손 분들이 하나같이 “자네, 오래 여행을 다녔는데 김치 먹고 싶지 않나?”라고 물어보더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후손 분들 전부 김치를 담근다. 한 번은 인터뷰 중에 김치를 입에 넣어주시기에 우물우물 씹는데, 울컥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어보다 질기고, 기억보다 또렷하다.’ 기억과 기록이란 게 그런 거 같다. 대물림돼야만 하는 것.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니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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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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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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