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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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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admin | 금, 2021/08/27- 03:14

[인터뷰]

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김동우 작가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정리 : 김혜영 선임연구원

‘뭉우리돌’의 사전적 의미는 ‘모난 데가 없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큼지막한 돌’이다. <백범일지>에서 차용한 이 단어는 독립운동 정신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 선생은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자신을 협박하자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올곧은 일에 생을 바치고자 했던 뭉우리돌들, 전 세계 곳곳에 굳건히 박혀 대한 독립을 일궈낸 뭉우리돌의 역사. 독립기념관 자료를 샅샅이 뒤져 주소 한 줄, 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니며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과 그곳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사진과 글로 남긴 김동우 작가를 만나보았다.
김동우 작가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신문사 기자로 일했으며 세계 60 여개국을 여행했다. 중국, 인도, 멕시코 등 10 여개국의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 200여 곳을 직접 방문, 카메라로 기록해 2019년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그 후 독립운동사적지와 그곳에 사는 후손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차례 개최했다. 지난 5월 18일부터 강북구의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 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열고 있으며, 최근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의 우리 독립운동 유적지를 다룬 <뭉우리돌의 바다>를 펴냈다.

●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의 포스터와 도록, 이번 <뭉우리돌의 바다> 표지가 모두 같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가?

● 근현대사기념관 전시 기획이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뭉우리돌의 바다>도 멕시코와 쿠바를 핵심 지역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멕시코와 쿠바 이주 한인을 상징하는 애니깽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다. 책이나 전시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사진이라 생각한다. 책의 제목도 그래서 ‘뭉우리돌의 바다’이다. 태평양을 건너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태평양을 건너가야 하고 멕시코와 쿠바도 그렇다. 표지를 정할 때 출판사에서 제가 찍은 바다 사진으로도 시안을 만들었는데, 바다가 들어간 사진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애니깽 사진으로 했다. 애니깽이 모든 걸 상징하기도 하고.

●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작 <뭉우리돌을 찾아서>와 제목도 비슷해서 사진집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 몰랐던 역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교과서 밖 이야기들을 전달하고 싶었다. 실제로 독립운동가 후손 분이 해주셨던 말씀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다. 사진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진이 만능은 아니다. 제가 없어도, 제 설명이 없어도 사진 한 장 한 장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충분히 이 책 한 권으로 소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는 학생들과 국군장병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국군장병들이 읽으면 나라를 지키는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다고 느낄 것 같다. 자긍심도 생기고.

●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가 사진으로 기록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 독립운동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간 세계 일주를 다녀왔고 다녀온 국가는 60개국 정도였다. 그러다가 2017년 인도 마날리를 여행하다가 결정적 계기를 만났다. 여행 중에 불현듯 친분이 두터운 PD님이 “홍범도 장군 묘역이 카자흐스탄에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인도에는 독립운동 사적지가 뭐가 있나 찾아봤더니 레드 포트(Red Fort)가 광복군 훈련지로 나오는 거다. 레드 포트는 인도 무굴제국의 왕도 건축물이다. 흔히 독립운동의 사적지라고 하면 상하이나 만주, 미주만 생각하는데 광복군이 인도까지 왔었다니 그 경위가 궁금했다. 그래서 마날리에서 라다크로, 다시 델리로 진입해 레드 포트에 갔고 현장을 카메라로 담았다. 지금까지 찍었던 세계 일주 사진과 전혀 느낌이 달랐다. 여정 중에 계속 고민을 이어갔던 중, 국외 독립운동사의 지역을 담아낸 분은 많은데, 하나의 궤로 엮어 본 사진작가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사적지에 가서 그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이를 기록하는 건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라고 결론짓고 이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 오래전의 국외 사적지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지 않았나?

● 집요한 시선으로 100년 전의 감정을 잡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출발 전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공부하고 지도를 펴 샅샅이 살피지만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글로 쓴다면 스토리를 담아내겠는데 저는 사진 한 장으로 얘기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잘하고 있는 건가. 내가 현장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게 맞는건가’ 하고 계속 생각했다.

● 사실 사진만 보면 무슨 사진인지 알기가 쉽지 않은데, 작가님 사진전을 갔을 때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느낌이 더 와닿더라. 그렇더라도 사진을 찍으면서 느꼈던 감정과 역사적 사실 등을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 같다. 책을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는 무엇인가?

●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여행의 여정을 붙이고 사진가로서의 고뇌도 담고 싶었다. 이 세 가지를 놓고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 쓰고 싶었다. 읽다보면 여행기인 것 같기도 하고 소회도 담겨 있기도 하고 그런데 거기 중간 중간에는 제가 논문을 조사하고 단행본을 뒤져가면서 발췌한 내용들을 다 녹여내서 쓰려고 노력했다. 이 책은 한 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그 다음 편은 중국을 중심으로 쓰려고 계획하고 있다. 현장 하나하나를 공부하면서 촬영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적지 한 곳 한 곳마다 훨씬 깊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맞물려 있었다. 이미지로 다 보여드리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쉽게 녹여내 완결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다.

● 시리즈면 다음 편 제목은 무엇인가?

●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중앙아시아 편은 뭉우리돌의 들녘, 중국 편은 뭉우리돌의 대륙으로 생각하고 있다. 뭉우리돌이 들어가는 제목은 유지하면서 바다, 들녘, 대륙으로 하려고 한다.

● 뭉우리돌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나?

● 제목을 정할 때 무척 고심했다. 사실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와 출판사도 다르고 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전 출판사 대표님께 양해를 구했더니 “뭉우리돌은 김구 선생님 건데”하며 흔쾌히 양해해주셔 이 단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 시리즈면 완결이 되어야 할 텐데 언제쯤 2, 3권을 만나볼 수 있나?

● (웃음) 사실 언제 완결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년까지 두 번째 책의 초고를 완성하려고 하고 있다. 내후년이면 두 번째 책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해서 장담할 수 없다. 이 책을 쓰면서 힘들었던 게 특정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 논문마다 다르게 나온다는점 등이다. 학계에서 정리가 안 된 게 너무 많은 거다.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에 시간을 많이 썼던 것 같다.

● 한 사건을 말하는 연도나 사실이 다른 경우 어떻게 취사선택했나?

● 예를 들어 숭무학교 개교기념일을 1909년으로 써놓은 논문도 있고 1910년으로 쓴 논문도 있다. 그런 경우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다른 전공자분들께 자문도 받았다. 그럼에도 어떤 걸 선택 할지가 참 힘든 숙제였다.

● 그 외에 작업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 흔적을 찾는 것도, 후손 분들을 추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사관에도 연락해보고 한인회, 현지 선교사님 등에게 물어물어 취재를 많이 했다. 사적지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독립기념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코너가 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적지를 비교적 잘 정리해 놓았는데 실제로 가보면 주소나 지도 표기가 잘못된 곳이 종종 눈에 띄었다. 조사한 지가 오래돼 그렇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조사해 업데이트가 됐으면 좋겠다.

● 앞으로 가보고 싶은 지역이 어딘가?

● 사적지 숫자에 비해 공을 못 들인 곳이 만주다. 동북 3성은 너무 광대하고 넓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농장을 만들어서 운영하던 곳이 내몽골까지 연결돼 있다. 앞으로 만주에 집중해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 끝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에게 기억과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

● 멕시코의 경우 이제 ‘이민 7세대’까지 갔다. 국외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 겉모습에서 한인 모습을 찾아내긴 힘들다. 그런데 제가 가보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을 추억하는 방식은 똑같았다. 바로 ‘맛’이었다. 후손 분들이 하나같이 “자네, 오래 여행을 다녔는데 김치 먹고 싶지 않나?”라고 물어보더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후손 분들 전부 김치를 담근다. 한 번은 인터뷰 중에 김치를 입에 넣어주시기에 우물우물 씹는데, 울컥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어보다 질기고, 기억보다 또렷하다.’ 기억과 기록이란 게 그런 거 같다. 대물림돼야만 하는 것.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니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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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서울시와 강북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 후원으로 12월 18일 서울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항일음악회-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열었다. 좌석(670석)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부득이 계단까지 좌석을 마련하여 800여 명이 관람했다. 이번 음악회에는 장사익・노브레인 등 출연진 자신의 히트곡 외에 ‘광복군 아리랑’ ‘안중근 옥중가’ ‘압록강행진곡’ ‘앞으로 행진곡’ ‘목동가’ 등 항일음악 11곡이 연주됐다. ‘망국의 한’ ‘독립의 꿈’ ‘아이들은 자라고’ ‘해방의 노래’ 등 국권 피탈부터 독립까지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에 따라 구성된 항일음악회는 지난 8월 연구소가 기획하고 노동은 중앙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 담긴 곡에 대한 해설도 프로그램북에 충실히 담아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고자 했다. 장사익과 오단해, 인디밴드 노브레인, 국립전통예술고교 두레소리 합창단, ‘기쁨의 아리랑’ 뮤지컬 공연단, 강북구립여성합창단 등이 출연했으며 특별히 지난해 광복절 경축식에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된 여성광복군 오희옥 여사(92)가 무대에 올라 ‘안중근 옥중가’ 가사를 낭독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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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회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2011년 11월 개최한 항일음악회(총감독 노동은)에 이어 연구소가 주최한 두 번째 항일음악회다. 앞으로 연구소는 항일음악을 학교와 군대에 보급해 널리 불릴 수 있도록 힘쓸 예정이다. 이 음악회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큰아들인 노관우 씨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했고 연구소 팟캐스트 ‘역적’ 노기환 MC와 김초롱 MBC 아나운서가 사회를 담당했으며, 송복남・황동욱 회원이 영상 제작, 장이근 회원이 사진 촬영, 손재호 회원이 오희옥 여사의 차량이동을 맡아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8/01/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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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고 김상덕 선생(1892~1956)의 유일한 손자인 김진영 회원이 투병 끝에 8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사람에게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업보이지만 그래도 진영 군의 죽음은 그의 파란만장한 가족사와 더불어 더욱 주변을 안타깝게 한다.
김상덕 선생의 손자이자 김정육 선생(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의 외아들인 고인은 지난해 말기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으나 만삭의 아내와 딸 김예일리 양(3)을 남기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9월 8일 태어난 아들 김선리 군은 유복자가 되고 말았다.
연구소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을 잇는다는 설립 취지만큼이나 반민특위의 역사와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1998년 반민특위 가상법정 개최, 1999년 반민특위터 표석 설치, 2001년 반민특위 다큐(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 협조, 2005년 정부와 국회에 반민특위 명예회복 진정서 제출, 반민특위 기념우표 제작 요청 등이 대표적 활동이다.
연구소의 이러한 활동이 때로는 미약하고 때로는 부족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늘 연구소 활동이 곧 제2의 반민특위 활동이라면서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은 바로 김정육 선생이다. 연세도 있으시지만 같은 연배의 분들보다 목소리가 유독 작은 이유는 지독한 연좌제 탓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자신이 자랑스런 독립투사요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불이익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신 세월이었다.
그러던 김정육 선생에게 아들 진영 군은 자부심이요 희망이었고 또한 속 깊은 효자였다. 넉넉지 못한 집안형편 때문에 가족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공군부사관으로 복무했고 특유의 성실함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홀로계신 아버지를 가까이서 봉양하기 위해 공기업을 과감히 그만두고 아버지 집이 있는 의정부시청 공무원으로 뒤늦게 다시 취직한 그런 효자였다. 작년 초에는 의정부시청 안에서 보훈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면서 밝은 표정으로 연구소를 방문해 3·1절 기념 전시회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독립운동과 반민특위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하려는 결의를 보여주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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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첫딸 예일리를 낳고는 아버지께서 길한 꿈을 꾸신 다음 손녀의 이름을 지으셨다면서 이름에 대한 내력을 설명하고는 “이제 반민특위 4대가 연구소 회원이 되었다”면서 안부 인사를 전해오기도 했던 정 많은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올 여름 조심스럽게 안부 전화를 했다. 항암치료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련만 힘겨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서도 제대로 응대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던 우직한 청년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경기북부지부 몇몇 회원들과 건국대병원으로 문병을 갔지만 너무도 마르고 힘겨워하는 모습에 차마 병실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별세 소식을 접했다.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기에는 남아 있는 가족들의 삶도 녹록치 않다. 우선 김정육선생도 지난해 심장수술을 받은 환자의 몸이다. 진영 군 빈소에 배재정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다녀가는 등 정부에서도 지원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쪼록 김정육 선생과 진영 군의 유족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그 가족들이 견뎌야 했던 모진 세월을 이제는 우리 사회가 세심히 보살펴야겠다. 연구소 또한 반민특위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에 더욱 매진하려 한다. 끝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입회원 김진영입니다. 일천한 저를 민문연 가족분들께 소개해주신다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루빨리 사회의 주역이 되어 연구소 상근자 분들과 같이 큰 뜻을 펼치는 분들께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매일매일 희망하고 있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꼭! 그리될 것이니 기다려주십시오. 필승!
– 김진영 군이 2007년 2월 19일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며 남긴 글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10/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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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술을 전혀 안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니 1980년대 초 평생 마실 술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신군부 시절 불법으로 연행당해 며칠 동안 고초를 겪고 난 뒤 울화가 치밀어 매일 밤 독주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무법이 횡행하는 시절을 살아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복기, 김기춘, 우병우 등 시대를 막론하고 늘 ‘법꾸라지’들이 난무했기에 교수님은 ????화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라는책을펴내서법기술자들을질타했다.
또한 법 문구를 어렵게 만들고 난해하게 표현하여 특권층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며 <한글헌법 노트><한자숭배 나라망친다>는책을 펴내기도했다.법학자로서보기 드문 한글 사랑으로 한교수님은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일교포 단체 초청으로 일본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재일교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교수님은 원고 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잠시 강연하시더니 곧바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왔으므로 이제부터 한국말로 연설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신다. 실용에 앞서 자존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민족적 자존 나아가 인간의 존엄은 개성 출신으로서 6·25의 참화를 처절하게 겪어낸 한교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을 해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한교수님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교수님은 멀리 지방 출장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외출 때도 늘 작은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시집일 때가 많다. 한번은 나에게 “시인 중에 누굴 좋아하시나?”라고 물으시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시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모순과 싸운답시고 자칫 거칠고 메마를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이며 사회운동의 초심을 지키라는 조언이셨을 것이다.
지방 출장 중에 부득이 한방에서 묵어야 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평판에 올랐던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중용되어 지금까지도 몇몇은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인물평들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밖에 서울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로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법적, 역사적으로 박정희의 악행을 거론하며 흉상 철거는 정당하다고 저항권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던 한교수님은 피고인석에 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이제 연구소는 1991년 창립 이래 터 잡고 활동하던 동대문시대를 접고 용산시대를 연다. 동대문시대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했다면 용산시대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과 대중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동대문을 떠나며 가장 어려운 시절 연구소 2대 소장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던 한상범 교수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국가보안법? 허~ 참나. 머릿속의 생각을 벌주는 나라가 어딨어?”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18/01/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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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기념사업에 혈안이 되어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구미시가 2016년 4월 8일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의 요청으로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신청서를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에 신청했다.
신청서를 접수한 우정사업본부는 같은해 5월 23일 ‘2016년 제1차 우표발행심의위원회’를 열고 ‘박정희대통령 탄신 100주년’ 우표 발행을 결정했다. 총 17명 중 이날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위원 9명 전원이 찬성한 것이다. 하지만 백범김구기념관이 신청한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우표’는 찬성 4, 반대 5로 발행이 무산됐다. 이 같은 사실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는 했으나 촛불집회와 탄핵국면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신경민, 추혜선, 최명길 의원 등이 박정희 우표 발행의 부당성을 제기했고 미래창조과학부와 우정사업본부 노조에서도 반대하고 나섰다. 구미지역 시민사회단체들도 역시 우표 발행 중단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우정사업본부에는 우표 발행 문제와 관련해 200건이 넘는 반대 민원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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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단체들의 논리는 명확했다. 우정사업본부의 우표류발행업무처리세칙 4조는 ‘정치적·종교적·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우표 발행을 못하도록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표발행심의위원 중에는 국정농단의 공범인 김기춘의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이 포함되어 있음도 확인됐다.
연구소는 우표발행 저지를 위해 신경민 의원실, 우정사업본부 노조 등을 방문해 연대키로 하고 2017년 6월 22일 광화문 1번가 국민인수위원회 앞에서 국가공무원노조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진데 이어 6월 29일에는 연구소 단독으로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열리는 서울중앙우체국 앞에서 발행 취소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결과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에 대해 재심의 결정을 내렸다 최근 적폐청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높아지면서 입장을 선회하고 원점에서 재논의한 결과 총 14명이 참석해 11명이 찬성, 반대 1명, 기권 2명으로 재심의가 결정됐다.
이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7월 12일 재심의 회의를 열고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여부를 다시 논의했다. 그 결과 전체 17명 위원 가운데 12명이 참석해 철회 찬성8명, 반대 3명, 기권 1명으로 최종적으로 우표발행이 취소된 것이다.
당초 우정사업본부는 재심의할 근거가 없다며 기존 결정대로 발행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데다 근거가 없다는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우정사업본부가 박정희 우표 발행 재심의에 나서게 된 근거로 내밀고 있는 것은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세칙’ 제17조 2항 2호이다. 세칙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는 우표발행 및 보급에 관한 사항에 관해 우정사업본부장의 자문에 응한다”는 규정에 근거해 김기덕 본부장이 우표발행심의위원회에 재심의 문제에 대한 자문안건을 올린 것이다. 이는 그간 입장을 뒤집는 것이라 허위해명 논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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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발행이 취소가 예견되자 세종시청사 내 우정사업본부 앞에서 우표 발행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였던 남유진 구미시장은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냈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7월 14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취소되었답니다’라는 전면 광고를 내보내는 등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박정희 기념사업 등 친일독재 미화와 역사왜곡 중단을 위해 최선을다할 것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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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에서 9월 12일부터 28일까지 2017년 특별강좌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를 개최했다. 강북구에서 처음으로 인근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 5인의 생애와 활동을 집중 조명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컸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 총 6강에 걸쳐 무료로 진행되었으며 강좌별 30명 내외를 선착순 모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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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위해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들이 강사로 나섰다.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주제로 한 첫 강좌는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가 맡아 명문가의 후손들이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세운 과정을 사료와 현장 사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
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의 활동을 다뤘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대표 33인을 이끌어 3‧1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선생을 주제로 강연하였다. 장원석 몽양여운형기념관 학예연구사는 풍부한 사진과 영상 자료로 여운형 선생의 독립운동과 정치활동을 살펴보았으며,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며 앉은뱅이가 된 심산 김창숙 선생을 주제로 홍윤정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학예실장이 강연을 이어갔다. 마지막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 관람과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 중 일부인 ‘초대(初代)’길을 걸으며 마무리되었다.
이번 강좌는 평일 오후 2시에 시작되고 무료 강좌의 특성상 출석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1강 25명, 2강 31명, 3강 23명, 4강 37명, 5강 26명으로 모집 정원 30명에 가까운 출석률을 보였다. 강좌마다 설문을 진행한 결과, 강좌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고, 수강생 전원이 향후 기념관의 다른 역사 강좌에 참가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개선점으로는 정원 24명의 강의실이 협소한 점과 기념관 주차 시설 확대, 강의 시간을 연장하거나 같은 주제로 2회 이상 진행해달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번 강좌는 평상시 이름만 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시대상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었으며, 전문가가 준비한 풍부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이해하기 쉬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의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개관1주년 기념 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을 준비 중이다. 또한, 기획전 주제에 맞춰 연속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목, 2017/10/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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