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창립 30주 년 특별 기획으로 역 사만화 <친일파 열전> 이 나왔다. 지난해 8 월 <35년>(전 7권) 을 완간한 박시백 화 백이 정확히 1년 만 에 친일파만을 다룬 <친일파 열전>을 펴 낸 것이다. 올초 연구 소의 제안을 받은 박 시백 화백이 다른 작 업을 일시 중지하고 반년 동안 <친일파 열전> 작업에 집중한 결과이다. 박 화백은 1984년 고 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전두환 독재에 맞 서 1986년 건대 항쟁과 1988년 미문화원 점거 투쟁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후 박재동 화백의 뒤를 이어 <한겨레>에서 만평 을 그렸고 2001년 퇴사 후 12년 동안 <조선왕조 실록> 전 20권 완간해 이름을 알렸다. 2020년에 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35년> 전7권을 완간하 여 제14회 임종국상(문화부문)을 수상하였다. 8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출판 보 고회에서 박시백 화백은 “친일파들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한 상황에서 ‘친일청산’이란 무엇일 까. 그들의 친일행위 자체를 제대로 알리는 것 이 이 시대의 친일청산이 아닐까 싶다. <친일 파 열전>이 기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라 고 소회를 밝혔다. <친일파 열전>은 <35>년의 후속작 성격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중 연구소 연구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해방 이후까지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각 분야의 친일파 153명의 행적을 담았다. 정식 출간 전 예약 판매 때부터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역사 부문 1위에 오르더니 정식 출간 이후 2주 만에 예스24 종합 5위, 알라딘 종합 4위를 기록했고 광복절을 즈음해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박시백 화백과 한상준 비아북출판사 대표는 8월 23일 연구소를 방문해 인세 일부를 연구소에 기부했다. 한편 출간 직후부터 연구소 후원회원들은 격려와 함께 학교, 공공도서관 등에 <친일파 열전>을 다량 주문하며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 특히 40~50대가 전체 구매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것에 비추어 학생을 둔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읽기 위해 구입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가토신사(加藤神社), 당고개에 터를 잡은 왜군장수의 추모공간 다치바나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이 깊이 관여했던 신사의 건립과정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된 내력을 지녔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攝社)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1916년 5월 22일에 타니무라 요리타카(谷村賴尙) 외 69명의 출원(出願)에 따라 신사창립에 대한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의 제정 당시에 덧붙여진 부칙규정에 따른 조치였다. 여기에는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 후 경성신사는 1936년 8월 1일부터 국폐소사(國幣小社,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로 승격되었고, 이와 동시에 1936년 8월 11일에는 기존의 「신사사원규칙」을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령 제76호 「신사규칙(神社規則)」이 새로 제정되었다. 이곳 경성신사에서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국혼대신(國魂大神, 쿠니타마 오미카미)’, ‘대기귀명(大己貴名, 오나무치노미코토)’
, ‘소언명명(小彦名命,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을 제신(祭神)으로 삼았다.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 (1941)에 수록된 경기도 지역 신사(神祠) 목록이다. 가토신사와 한강신사를 비롯하여 신메이신사가 두루 나열되어 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한강 건너 흑석동에 있던 한강신사(漢江神社, 1912년 창립)를 비롯하여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 죽첨정(竹添町, 지금의 충정로) 지역에 이즈모대사(出雲大社), 삼각지 인근에 도하신사(稻荷神社, 이나리 신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메이신사(神明神祠)라는 것은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라는 점도 가늠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 터를 잡은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의 존재도 결코 이 목록에서 제외할 수 없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 1915)라는 책, 173쪽에는 “용산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 와카노이케(和歌の池) 옆에 있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의 신령(神靈)을 제사지내는 구마모토(熊本) 가토신사의 분령(分靈)을 대정 3년(1914년) 12월에 봉영(奉迎)했다”고 쓴 구절이 있는데, 이를 통해 최초에는 다른 장소에 터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철도여행안내> (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 지도를 통해 ‘와카노이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연못 곁에 가토신사가 처음 터를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나오는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조선철도여행안내>(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京城及龍山)」 지도자료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또한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제작된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를 통해 확인해본즉 그 당시 ‘경성부 용산면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9번지(전체면적 2,734평)’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16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춘계대제(加藤神社 春季大祭)」 제하의 기사에도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구마모토시 쿄마치(熊本市 京町) 가토신사에서는 작년 이래 구용산 야시마쵸 와카노이케(舊龍山 八島町 和歌之池) 측(側)에 키요마사공(淸正公)의 분령(分靈)을 봉사(奉祀)하였는데 내(來) 24일로 복(卜)하여 춘계대제를 집행하기로 목하(目下) 준비중인데 기일(其日)은 생화진열회(生花陳列會), 예기가무(藝妓歌舞), 소인스모(素人相撲) 등 여흥도 거행하기 위하여 유지자(有志者) 간에 주선중이라더라.
이 기사에서 언급한 ‘야시마쵸(八島町)’는 ‘오시마쵸(大島町)’의 인쇄 착오로 봐야할 듯싶다. 어쨌건 가토신사의 위치는 여러 자료에서 거듭 확인되는 바와 같이 ‘와카노이케’ 옆에 가까우면서 ‘원정 2정목’에 속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지번 주소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이보다 좀 더 세월이 흘러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0년 1월 1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개축(改築)」 제하의 기사는 이 신사가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 지역) 아래 공터로 자리를 옮긴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용산의 가토신사를 개축하여 용산의 사람들이 결혼(結婚), 기타 의식(儀式)을 그 신전(神前)에서 거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면 만사(萬事)가 편리할 것이라고 하는 몇 사람의 이야기에서 이 논의가 점차 진전되어 왔는데, 만약 이 이야기가 진전되면 이를 기회로 동(同) 신사를 문평산(文平山) 아래 공지(空地)에 신축하고 현재의 신사부지(神社敷地)를 경성신사(京城神社)의 어려소(御旅所; 신사의 제례 때 신령을 태운 가마가 순행하는 도중에 쉬거나 숙박하는 장소)로 충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결과로 그 이듬해인 1931년 4월 24일에는 가토신사의 춘계대제에 맞춰 참도개수준공봉고제(參道改修 竣工奉告祭)가 열리기에 이른다. 이때 새로 조성된 가토신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번구획입 대경성정도(地番區劃入 大京城精圖)> 제8호(1936)와 일한서방(日韓書房) 편찬, <대경성시가지도(大京城市街地圖)>(1937)의 후면에 수록된 「경성요부(京城要部)」 와 같은 지도자료를 통해 문평산 지역의 철도수도급수소(鐵道水道給水所) 바로 옆쪽에 표시된 것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참고할 수 있다.
일본어 신문인 <조선신문> 1931년 4월 2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참도개수 준공봉고제의 광경이다. 뒤로 보이는 언덕 일대가 이른바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이다.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고소사건 관련기사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조선국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가토의 통역이던 조선인 김관이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가토신사의 건립 내력과 관련하여 꽤나 흥미로운 내용 하나가 눈에 띄는데, <경성일보>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신사령(神社令)에 얽힌 가토신사(加藤神社)를 고소, 종교단체(宗敎團體)의 책동(策動)인가, 용산서(龍山署) 일응취조(一應取調)」 제하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을 주신(主神)으로 하고, 순화(順和, 순화군) 임해(臨海, 임해군) 양왕자(兩王子)와 당시 키요마사공의 통역(通譯)으로 종사하면서 위덕(威德)을 경모하여 내지(內地, 일본)에 귀화(歸化)했고 장렬한 순사(殉死)를 했던 조선인 김관(金官)을 배사(配祀)하는 내선동화(內鮮同化)의 신(神) 용산의 가토신사에 대해 수 일 전 용산서(龍山署)에 고소장(告訴狀)이 제기되어 목하(目下) 동서(同署)에서는 관계자를 불러 취조중이다. 측문(仄聞)한 바에 의하면 동(同) 신사는 대정 3년(1914년) 통감시대의 경무총장(警務總長)이던 육군중장(陸軍中將)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씨(氏)의 재임중(在任中)에 용산의 유지가 상계(相計)하여 봉신회(奉信會)라는 것을 조직, 키요마사공 분령소(分靈所)를 건설하고자 당국의 허가를 얻어 가토신사를 건설, 구마모토(熊本)의 본사(本社)에서 사사(社司) 타케시타 마사미(竹下眞美) 씨가 내선(來鮮), 동사 건설과 흥륭을 위해 진력했으나 그 후 일시 동씨(同氏)를 대신하여 엔인 히토시(圓印等)가 사사(社司)로서 사사(社事)를 맡았으나 이런저런 재미없는 문제를 야기하여 결국 그 부덕(不德)한 행위로 부터 용산부민(龍山府民)의 비난을 야기(惹起)하여 퇴사(退社)에 의해 내지(內地)로 물러났고, 재차 부민의 간망(懇望)에 의하여 타케시타 씨가 사사로 취임하여 금일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소(告訴)의 이유는 근년 동사 관계자와 유력자가 동사를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改名)하여 경성신사와 같은 모양으로 크게 하려는 의향에 당국에 출원(出願)했으나 당국으로서는 일부일사(一府一社)라고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허가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내 신사령(神社令)이 개혁(改革)되어 당시 이 신령(新令)에 부응하지 않는 전국의 각사는 5개월 내에 새롭게 신사(神社)로서의 허가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동사(同社)에서는 먼저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하려는 의향도 있어서, 개정된 신령에 따라 가토신사(加藤神社)로의 수속(手續)을 게을리 했던 관계상 형식적으로는 신사로서 존재 하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이유에서, 여기에 주목하여 부내(府內) 황금정(黃金町, 지금의 을지로)에 거주하는 원(元) 한강신사(漢江神社) 근무 우에자키 아무개(上崎某)와 용산〇〇교(敎) 일파의 아무개(某)가 책동하고, 이에 겸해 이름 하여 신도관구소(神道管究所)라는 것을 통해 사실 현존한 가토신사의 〇〇을 꾸몄던 것이다. (이하 생략)
며칠 후 <경성일보> 1932년 10월 25일자에 다시 등장한 고소사건의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익명(匿名)으로 표기된 종교단체의 정체는 천리교(天理敎)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우선 가토신사에는 왜군장수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그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국 왕자 임해군(臨海君: 1574~1609. 선조의 장자)과 순화군(順和: 1580~1607. 선조의 6남), 그리고 가토의 통역을 지냈다는 김관(金官)이라는 조선인도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부분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 겸 조선총독부 경무총장으로 새로 임명된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육군소장의 인물 사진이다. 그는 가토신사의 건립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매일신보> 1914년 4월 19일자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4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의 설립허가내역이다. 가토신사의 최초 설립은 1914년 12월의 일이지만, ‘용산신사’로 개명하려던 시도가 계속 지연되면서 총독부령에 의한 설립허가는 이때 처음으로 이뤄졌다
6년 가까이 조선에 머물렀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는 일제의 강압통치가 본격화하던 때와 고스란히 겹치며, 특히 그 자신이 헌병경찰제도의 수장인 ‘총독부 경무총장’을 지낸 만큼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자행한 장본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앞선 기사에서 눈길을 끌만한 또 다른 내용의 하나는 이곳이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일부일사(一府一社; 하나의 부에 하나의 신사만 두는 것)의 원칙에 따라 허가가 불발되었는데, 여느 신사들과는 달리 유독 이곳 가토신사에서는 1915년 8월의 「신사사원규칙」 또는 1917년 3월의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른 절차를 거친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가토신사의 신사설립허가에 관한 기록은 무려 19년 가까운 공백기를 지나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4월 18일자 「휘보(彙報)」에 “경기도 경성부 영정(榮町) 1번지에 가토신사(加藤神祠) 설립의 건, 사이키 츠구시(齋木胤志) 외 25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4월 11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고 기재된 것이 최초이다. 짐작컨대 이 마저도 앞선 기사에 채록된 1932년의 고소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신사(神祠)였던 것이 다시 신사(神社)의 격을 갖춰 설립허가를 새로 받은 것은 일제패망을 몇 달 앞둔 시점의 일이었는데, <조선총독부관보> 1945년 5월 18일자 「휘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신사창립허가(神社創立許可)] 경기도 경성부 용산구 영정(榮町)에 가토신사(加藤神社) 창립의 건,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 외 62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소화 20년(1945년) 5월 15일부로 이를 허가함.
여기에 나오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는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 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1927년 7월 14일 정토종 대념사(淨土宗 大念寺; 한강통 11번지)의 사원창립허가와 1943년 10월 20일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신사창립신청 때에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가토신사는 일찍이 조선을 침략한 왜군장수를 내선융화(內鮮融和)의 상징으로 삼았던 공간이니만큼 일제의 침략전쟁과도 전혀 무관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신보> 1941년 9월 26일자에는 이곳에서 산업진흥과 황군(皇軍, 일본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기원제와 아울러 시국영화(時局映畫) 상영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에는 이곳에서 약간 별스러운 행사가 벌어진 흔적도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비행기, 탱크, 오토바이로 남방보도(南方寶島)를 정벌(征
伐), 모모타로회 대표(桃太郞會 代表), 가토신사에 참예 맹서(參詣 盟誓)」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매일신보>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모모타로회(桃太郞會)’의 가토신사 참배 관련 기사내용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하면서 이곳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국민의 남방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부내 구용산 방면의 국민학교 생도들 사이에는 동화(童話) 속의 영웅 ‘모모타로(桃太郞)’가 남방의 보배섬을 쳐서 그곳의 금, 은, 보배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한 달 전부터 ‘모모타로’ 운동을 일으키게 되어 금정국민학교(錦町國民學校) 고등과 생도 야마모토 유키오(山本行雄, 15) 군을 비롯한 지원병지망소년의용대(志願兵志望少年義勇隊) 60명은 이 운동에 남 먼저 참가하여 모모타로회(桃太郞會)를 조직하여 26일 오후 3시반 원정(元町) 2정목 가토신사에 세 명의 대표자가 복숭아를 그린 ‘일본일(日本一)’의 깃발을 기증하며 다음과 같은 맹서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들은 옛날의 모모타로와 같이 씩씩하고 명랑하고 굳세인 소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모모타로의 꿩과 원숭이와 개 대신에 우리들은 비행기와 탱크와 오토바이를 가지고 남방의 보배섬을 치겠습니다.
” (사진은 모모타로회 대표들의 기도)
여기에 나오는 금정국민학교는 옛 용산공립보통학교에서 전환된 것으로 지금의 ‘금양초등학교(錦陽初等學校, 효창동 126번지)’를 가리키며, 이곳은 원래 조선인 학교였으므로 야마모토 유키오라는 학생 역시 창씨개명한 조선인 아동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이 이곳을 찾아 ‘모모타로’와 같은 소년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은 일제 패망기에 이르러 가토신사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
2020년 1월 10일 ‘아리랑 답사단’ 33명이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광주(광저우, 廣州)에 도착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이 공항에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아리랑 로드〉 답사는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과 연구에 앞장선 광동지부 회원들이 기획했다.
중국 남방지역 역사 답사는 드문 편이다. 이번 〈아리랑 로드〉는 독립운동사 전공자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 많고, 김산(金山)의 삶에서 가장 치열했던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여서 관심을 끌었다. 버스에서는 이정찬 교수의 열정넘친 중국 근대사 강의가 날마다 이어졌다. 〈아리랑〉과 〈김산평전〉을 읽는 답사자도 눈에 띄었다.
첫날 광주공항에서 동쪽으로 험한 길과 산을 넘어 용문현(龍門縣) ‘홍군 4사(紅軍 4師) 주둔지’에 도착했다. 1927년 12월 광주봉기(광저우기의) 실패 후 약 1,200여 명의 봉기군이 화현(花縣, 현재 화두 화성소학교)에서 개편한 부대가 홍군 4사이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20여 명이 홍군 4사에 있었다.
고담진과 해풍 답사
이튿날 고담진(가오탄, 高潭鎭)의 ‘붉은 거리’를 산책하며 본격적인 답사에 나섰다. 홍군 4사부대가 잠시 머물렀던 ‘붉은 거리’는 1927년 러시아혁명 10주년을 맞이해 조성되었다. 마르크스 동상이 세워진 광장을 중심으로 마르크스거리, 레닌거리가 이어졌고 건물마다 사회주의 혁명 구호가 적혀있다.
답사단은 연화산(蓮花山) 선인동을 거쳐 해륙풍(하이루펑, 海陸豊)의 주요 도시인 산웨이(汕尾) 해풍(하이펑, 海豊)으로 향했다. 광동성 해풍현(海豊縣)과 륙풍현(陸豊縣)을 합쳐 부르는 해륙풍은 중국 최초로 농민소비에트가 세워진 곳이다.
농민혁명가 팽배(펑파이, 彭拜)가 일찍이 해풍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며 농민자위군을 창설했다. 광주에서 반혁명 정변(1927.4.15)이 일어나자 팽배가 지도하는 농민자위군이 해륙풍에 혁명근거지를 마련한다. 그 뒤 남창봉기(南昌蜂起,1927.8.1)에 참가한 부대가 해풍에 도착하여 홍군 2사(紅軍 2師)로 편성되었다. 마침내 홍군 2사와 혁명군이 봉기(1927.10.30)하여 해륙풍 일대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다.
‘팽배의 도시’답게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답사단이 ‘해풍혁명투쟁사기념관’에 도착하자 기념관장이 직접 안내를 했다. 해륙풍 소비에트 역사를 비롯해 광동꼬뮌과 중국대혁명(동정・북벌)에 참여한 조선인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김산 등 조선인 혁명가 15명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홍궁 홍장(紅宮 紅場)’은 해풍소비에트 대표회의와 군중대회가 열린 곳이다. 김산을 비롯해 홍군 4사가 해풍에 도착하자(1928.1.6) 수 만 명이 홍장에 모여 ‘인민대회’와 ‘조선인동지환영대회’를 열었다. 특히 홍장에는 홍군 2사와 홍군 4사 부대의 상봉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김산이 교편을 잡았던 ‘동강당교(東江党校, 현재 해성제2소학교)’를 방문했다. 학교에서 답사단을 맞아 환영회를 열고, 교장이 당시 조선인의 활약에 대해 설명했다. 김산은 동강당교 교관으로 세계혁명사,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선전공작을 지도했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은 해풍 소비에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언젠가 조국에 돌아가 이러한 운동을 이끌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곧이어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오파령(우푸링, 五坡岭)’을 찾았다. 〈아리랑〉에서 ‘오복령(五福嶺)’으로 잘못 표기된 곳으로 지금은 한적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1928년 5월, 홍군은 해풍을 포위한 국민당 정부군에 맞서 오파령에서 최후의 결전을 펼쳤으나 패한다. 김산은 생존자의 최후 집결지인 검유령(젠유링, 劍遊嶺)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하며 목숨을 건졌다. 광동지부에서는 연화산 일대를 검유령으로 추정하고 있다. 답사단은 ‘홍군 4사 임시사령부’가 있던 부담촌(浮潭村)에 들린 뒤 동관(東莞)으로 향했다. 동관은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이 일어난 곳이다.
광주(광저우) 답사
중국 광주는 중국 대륙 남부를 굽이쳐 흐르는 주강(珠江) 삼각주 하류에 자리 잡은 도시다. 광주에서 답사는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편의상 중국근대사 서술에 따라 답사 유적지를 정리했다.
1) 황화강72열사능원(黃花崗七二烈士陵園) 3・29봉기(황화강사건)의 희생자 72명이 묻혀있는 곳이다. 1900년대 초부터 쑨원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가 청나라에 맞서 무장봉기 했으나 거듭 실패한다. 1911년 4월 27일(음력3월 29일), 120여 명의 결사대가 다시 봉기했지만 86명이 희생되었다.
동맹회 회원 판다웨이가(潘达微)가 피로 얼룩진 시신 72명을 찾아 수습해서 황화강에 매장했다. 3・29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 해 10월 10일 우창봉기(武昌蜂起), 곧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도화선이 되었다.
2) 루쉰기념관(魯迅紀念館)・중국국민당1차대회의 구지
루쉰은 광주 중산대학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기념관에 루쉰의 숙소와 강의실 등을 꾸며 놓았다. 루쉰기념관에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린 강당이 보존되어 있다. 제1차 국공합작을 결정한 역사적 장소이다.
1924년 1월 20~30일에 중국국민당 대표회의가 열렸다. 공산당원 모택동(毛澤東)・구추백(瞿秋白) 등도 참여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된다.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권준(權晙)은 강당 2층에서 대회를 참관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두 사람은 그뒤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졸업하고 북벌에 참전했다.
3)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쑨원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24년 6월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이지만 광주시 황포 장주도(長州島)에 있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렀다. 개교 뒤 학교장에 장개석(蔣介石), 정치부 부주임에 주은래(周恩來)가 선임
되었다.
1925년 8월경 의열단 간부진과 단원이 광주로 오고, 의열단 본부도 광주로 옮긴다. 그 뒤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원과 많은 조선인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거나 교관으로 활동했다.
4) 중산대학 구지(中山大學 舊址)
쑨원(孫文)은 황포군관학교를 열고난 뒤 정치 간부도 양성하고자 1924년 11월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한다. 이듬해 쑨원이 서거하자 그의 호를 따서 1926년에 중산대학으로 개칭했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 학생명책〉에 따르면 50명에 가까운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김산은 1926년 중산대학 의학과에 편입하고, 유월(留粤, 광동의 별칭)한인청년동지회・조선혁명청년연맹에서 조직 활동을 한다. 시인 이육사(李陸史)도 김산과 함께 유월한인청년동지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5)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1926년부터 북벌이 시작되었다. 국민혁명군이 우한(武漢)을 함락하고 광주에 있던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옮겼다.
그러자 장개석이 상해에서 반공쿠데타(1927.4.12)를 일으키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운다. 중국의 정세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광주에서도 국민당이 대숙청을 벌였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에서 ‘기의(起義)’했지만 3일만에 무너지고 7,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 중에는 “광주와 중국을 혁명의 바람 속으로! 우리 조국을 독립의 바람 속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에 참여한 약 200여 명의 조선인도 포함되었다.
광주봉기를 기리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대규모 열사능원이 조성되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억센 손으로 총을 쥐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열사능원 공원에 있는 ‘혈제헌원정(血祭軒轅亭)’과 동상도 눈길을 끌었다. 옥중결혼식을 올리고 같은 날 처형된 저우웬용(周文雍)과 첸티웨진(陣鐵軍)를 추모하
기 위해 세웠다.
많은 한인들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찾는다. 중조혈의정 석비 앞면에 “중국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쌓은 우의여, 영원하라!(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는 글씨가 큼직하게 쓰여 있다. 아리랑 답사단의 묵념이 끝나자 열사능원에 어느덧 긴 어둠이 내렸다.
6)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
중산기념당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을 기리기 위해 축조되었다. 쑨원의 친필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글이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정문에 걸려있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백성을 위한다.”는 글 뜻에서 쑨원의 드넓은 흉금을 느낄 수 있다.
7) 대한민국임시정부광동청사(東山栢園)
광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건물이 남아있다.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정요인들과 가족이 호남성 장사(長沙)를 떠나 7월 22일 광주에 도착했다. 임정요인들은 광주 동산백원(東山栢園)에서 약 두 달 간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다. 2017년 건물의 현존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지만 입구에 아무런 표식이 없다.
8) 대신공사 옛 건물·동아대주점·대동빈관
유림대표 김창숙(金昌淑)이 1919년 광동으로 오자 환영회를 개최한 대신공사 옛 건물, 3·1 독립선언 4주년 기념식을 치른 동아대주점, 여운형(呂運亨)·신규식(申圭植)·민필호(閔弼鎬)가 묵었던 대동빈관 건물이 남아 있다.
답사를 마치며
광동성은 옛 월(越)나라 땅이었다. 변방은 변혁의 땅으로 거듭났다. 태평천국운동, 변법자강운동,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가 움텄던 중국혁명의 발상지 광동성은 곧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1920년대 김산・이영(李瑛, 이준열사아들)・박진(朴鎭) 형제 등 수많은 엘리트 조선인이 광동으로 왔다. 이념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진리를 탐구하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넷째 날 답사단은 영서봉림으로 이동해 송별회를 가졌다. 약 한 세기 전 뜨거운 조국애를 갖고 숨진 열사들을 기억하며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인터내셔널가’의 노랫소리가 광동성 널리 울려 퍼졌다. 분단으로 위축된 이념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보다 깊고 넓다는 것을 느낀 답사였다.
2020년 〈아리랑 로드〉 답사는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의 헌신과 노고가 아니었다
면 불가능했다. 김유 지부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끝까지 동행했고, 박호균 사무국장과 신광용・김선주 선생이 애정과 열정으로 답사를 이끌었다. 또 많은 광동지부 회원이 함께 동행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민족문학연구회(회장 맹문재)는 지난해 광복절에 펴낸 독립운동가 기림시선 1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올 3월에 기림시선 2집 〈겨레의 큰 별들〉을 민연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민족문학연구회 소속 작가 45인이 쓴 가네코 후미코와 그 남편 박열, 김구, 민영환, 유관 순, 유일한, 이동녕, 장준하, 차리석, 한용운 등 45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 45편이 실렸다.
‘책을 펴내며’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
림시선의 편찬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45편의 기림시뿐 아니라 45인의 독립운동가 약력을 수록했고 김성동 작가의 발문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다」를 실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기림시선을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01년 전 3·1운동의 함성 소리가 귀에 맴도는 요즘,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과거 역사를 더듬어보고 미래로 이어주는 중간지점이 한·러수교 30주년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데에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러시아가 소련의 많은 레거시(전통)를 부정했는데 현대까지 계속 유지되는 것 중 하나가 ‘꺼지지 않는 불꽃’ 이라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들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겠다, 그들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는 거죠.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독립운동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잊힌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새롭게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지켜나가고,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오성환 총영사 인터뷰에서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다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서간도를 답사한 후 제작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무명씨의 꿈〉(연출 : 이은지, 구성 : 홍기희)에 담았던 문장입니다.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도 이런 ‘투쟁’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필수적인 과정은 시간을 다툽니다.
기억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 양과 선명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대부라고 불렸던 ‘페치카 최’ 최재형의 손자인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이 지난 2월 14일 별세했습니다.
“이제라도 찾고, 우선 기억하는 것부터 기록해놓아야 한다”던 그의 한마디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에 저는 지난해 11월 해간도 항일독립운동 본거지라고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를 답사하고 온 기억들을 이곳에 기록합니다.
연해주(沿海州)는 해간도(海間島)로 불리며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3대 거점이라고 하죠.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의 동의회, 안중근의 단지동맹, 헤이그 특사 출발지,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와 1919년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등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한인들과 해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 되었던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① 한글 주소가 있는 곳,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당시 춘원 이광수는 신한촌을 두고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서울거리 집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7번지 일대― 한민학교와 이동휘 선생 집 추정 터
구글맵을 켜고 신한촌이 있었다던 산등성이를 올라가봤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춘원이 묘사했던 당시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립문이 있었다던 곳은 듬성듬성한 겨울나무로 채워져 있어, 추정만 가능할 뿐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바로브스크 울리짜 7번지에 살고 있는 김치보와 서울스카야 9번지에 살고 있는 채성하”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신한촌 일대에 서울 거리가 존재했다는 기록인데, 실제 ‘서울거리 A2’ 주소판이 부착된 집 한 채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가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구글맵을 켜고 영하 10도의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 폐가들로 둘러싸인 곳, 앞으로는 철로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언덕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대신 한 러시아인과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이 집을 알고 있나요?”
“네.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살았었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옵니까?”
“한국에서 방문객이 많이들 찾아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죠.”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로 나와 ‘얀덱스’를 켜보니, 이런!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하바로보스크 22번지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바로 그 주소였습니다. 역시나 이곳도 상점이 세워져있었습니다.
② 한인들의 터전 신한촌과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26A 신한촌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으로 향했습니다.
묵념을 하고 참배객을 기다리는 사이 30여 분간 한국인 관광객 2팀과 러시아인 부부 한 쌍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제 어머니는 어릴 적 한인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때 이곳에 거주하다가 탄압당한 한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저희는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이 기념비가 세워져서 선조들을 기릴 수 있어 기쁩니다”.
– 신한촌 기념비에서 만난 러시아인 부부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잘 사는 나라가 됐고 이렇게 행복하게 됐는데, 부디 이 얼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짐을 해봅니다. 굳이 여기를 한번와서 찾아 뵙고 싶더라구요”
– 신한촌 기념비에 참배하러 온 한국인 관광객 모녀
허술한 철조망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3개의 탑과 주변의 8개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념비를 세운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설명으로는 일제강점기 3개의 임시정부와 강제이주 당한 8개 지역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념비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을까? 같이 갔던 가이드는 당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라고 말했습니다. 기념비는 고려인 자원봉사자 부부가 관리하고 있다는데, 남편 되는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기념비 아래쪽과 위쪽의 색깔이 다릅니다. 러시아인들이 낙서를 하거나 오물을 버린 흔적이라고 합니다.
킹크랩을 먹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로 향했습니다. 맛집과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핫플레이스랍니다. 거리의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사진도 찍고 킹크랩과 독도새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이 과거에는 ‘개척기’로 불렸던 까리에스키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거리 344호에 해조신문사가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를 했다는 대동공보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우리 관광객들 중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걸었던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③ 블라디보스토크 역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시베리아횡단열차
출발점을 가리키고 있는 필자 이은지 PD
“어떤 역인지 알고 오셨어요?” “아니요, 여기가 무슨 역이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요. 이곳에서 누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어요.”
“전혀 못 들어봤는데.”
“몰라요.”
“가이드가 설명 안해주던데요.”
2019년 11월 25일 아침. 총길이 9,288킬로미터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이 철길에도 우리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고 하죠.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열사가 출발한 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각보다 조용히 역사를 들어오던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역사 안은 아담했습니다. 다만 입출구가 여러 개인데다 각각 거리가 상당하고 드나들 때마다 짐 검사를 받아야 해서, 탑승할 열차와 개찰구를 잘 확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저도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전속력 달리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우수리스크로 향하기 전, 오성환 총영사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와 우리 영사관이 협력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사탐방 지도를 제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에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적지를 찾아서 안내판 같은 것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러시아 시정부한테 제안해왔습니다. 신한촌, 구한촌… 여러 역사 유적지를 엮어서 하나의 관광지도로 만들면 블라디보스토크가 단순히 킹크랩 먹고 바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 거죠. 한러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영사관이 지도를 제작할 용의가 있다’고 하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 측에서도 사적지 지도 앱을 만들겠다고 이야기가 됐습니다.”
항일유적지 지도앱을 보면서 답사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④ 고려인 이주의 피눈물이 서린 철길, 라즈돌노예 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 우수리스크.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는데,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어 3시간 30분 가량 걸려 도착했습니다. 처음 정차한 곳은 라즈돌노예 역이었습니다.
기차가 아주 가끔 멈췄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그냥 천으로 덮어 기차역 플래폼에 남겼습니다. 역 객차에서 아이가 숨져 창문 밖으로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급히 볼 일을 보다 깔려죽기도 했어. 특히 위생상태가 불량해 많은 사람들이 앓았는데 병자가 생기면 그 즉시 실어 내갔고 모두 실종자가 되었지. 식량도 물도 받지 못했기에 오는 동안 풀과 뿌리를 모야 으깨어 먹었어. 아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지 – 김 블라지미르 회고록에서 기차역이 이토록 슬프게 보일 수 있을까. 눈 쌓인 철도가 이토록 서럽게 차가울 수 있을까.
눈발이 매섭게 날리던 날 라즈돌노예 역의 전경은 비통하다 못해 아팠습니다.
⑤ 강물소리에 묻힌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초입 수이푼강 근처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고종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허비는 왜 강가에 있을까요?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입니다. 이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 화장해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합니다. 수이푼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으로 흘러 동해에 다다른다고 하니, 그 위치 선정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유허비를 둘러싸고 물길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 말에 따르면, 2017년 김정숙 여사 방문 시에 자갈길을 깔았으나 그해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려갔고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큰 도로까지 물이 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이 빠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겨울이 와 얼어붙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러시아에서 9년을 살았다는 현지 가이드는 “관리가 정말 안 된다. 한국인들이 관리 안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라며 우수리스크 지역 내 독립운동 유적지 관리 문제를 지적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유허비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고 묵념을 했습니다.
⑥ 작은 간판 하나, 전로한족중앙총회 개최지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됩니다. 그 전신으로 1918년 6월 열렸던 제2회 전로한족중앙총회 자리가 현재 학교 운동장으로 변해 남아있습니다. 주소는 우수리스크시 막심고리끼거리 20번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안내문 하나를 설치해 건물 입구에 달아두었다고 하니, 타 유적지에 비해 다행인 일입니다. 문이 잠겨있어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였던 학교 건물과 안내문
⑦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있는 페치카 최재형의 집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태어날 당시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당시 탄압 대상자였습니다. 탄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최재형 선생의 DNA 덕분이 아닌가…….
우리의 가장 큰 역할은 기억하는 일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록해놓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 뒷일을 감당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재형 후손 최 발렌틴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모스크바 어느 한식당에서 최재형의 후손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그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 14일 별세했습니다. ‘조국은 최재형 선생은 잊은 적이 없다’ 라는데, 그는 사고 후 병원비 5만 유로가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은 당시의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한 벽돌집. 한쪽 창문이 깨진 상태 그대롭니다.
최재형의 집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라고 적혀있는 이곳이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집입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 선원생활을 하며 재력을 쌓았고, 그 돈으로 한인들의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의회, 대동공보, 권업회의 중추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구요. 안중근 의사의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택 안에는 최재형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미디어 교육실에서는 관광객들에게 최재형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다른 유적지의 황량함, 황무지에 내버려둔 듯한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최재형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료마다 QR코드가 부착돼있었는데, 현지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QR코드 연결은 힘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잡혀갔던 4월참변을 추도하는 기념비는 코마로바거리 1번지에 세워져있습니다. 러시아정부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올해는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잃어버린 해간도 항일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간 선조들의 해간도 투쟁 이야기.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 주축이된 이범윤 부대, 그리고 성명회와 최재형과 홍범도의 권업회·권업신문,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던 이동휘,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 정통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강제이주의 역사까지, 수많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곳.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성명회)의 역사를 이제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요. 1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가 기록해놓는다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이 기록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니까요.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긴 이야기를 마칩니다.
(경천아일록을 보며) 김경천 장군이 일기를 썼을 당시는 하나의 민족으로 살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남북으로 나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조국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평화를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그런 메시지를 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하 20도, 30도 그런 추운 기후에서 활동하셨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먹을 것도 없었던 그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어쩌면 그 모두가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기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잊혔거든요. 잊혔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바로 이 일기장에서 후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 김경천 장군 손녀 일레나와 갈리나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언덕에 자리했던 순직경찰관초혼비 3•1만세운동 때 처단된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원화성 팔달문 쪽에서 성벽 옆의 계단길을 삼백미터 남짓 따라 올라가면 서남 암문 앞쪽에 이르러 숲속의 작은 빈터에 자리한 ‘3.1독립운동기념탑’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1969년 3월 1일 ‘삼일독립기념탑’이란 명칭으로 중포산(中布山)에 조성되었던 것을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1969년 4월 12일 창립)에 의해 그해 10월 15일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전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기념탑 바로 옆에는 이것과 함께 옮겨온 약간은 이색적인 또 다른 기념비 하나가 남아 있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앞뒷면에 한글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라고 새겨넣은 것이 눈에 띈다. 한쪽 옆에는 ‘수원읍민 수원군내 학생 일동’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단기 4281년 8월 15일 건립(유근홍 씀, 이상훈 만듬)’이란 글씨가 있다.
수원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모습이다. 원래 수원화성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언덕에 있었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제막 관련 기사이다. 일제 때 조성된 ‘순직경찰관초혼비’를 헐어내고 바로 그 자리에 이 비석이 건립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 내력이 궁금하여 신문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한참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수원에서 대한독립기념비 제막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수원] 잔악무도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또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 왜적들로 말미암아 쓰러진 수많은 선열들의 거룩하신 유업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 땅의 독립을 영구히 빛내일 독립기념비의 거사는 수원읍내에 세우기로 결정되어 민(閔) 군수를 비롯한 26만에 달하는 군민들의 끊임없는 지성으로 지난해 10월 22일부터 착공하여 오던 바 연공사일 80일 만에 52만여 원에 달하는 거액을 던진 공사는 드디어 준공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동 독립기념비)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군민들의 기쁨은 더 한층 크련만 지하에 잠든 투사들의 영령 좋아 이 비(碑) 위에 감돌아 춤출 것이다. 이 뜻 깊은 기념비의 제막식은 드디어 지난 16일 상오 11시부터 이(李) 대통령 대리인 신(申性模) 안(安浩相) 신(申翼熙)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구(具滋玉) 경기도지사와 당지 유지 다수 참석하 먼저 국민의례에 이어 민(閔泰鼎) 군수의 열렬한 식사가 있고 제막이 있은 후 신 내무장관으로부터 뜻 깊은 독립기념비 제막에 당하여 여러 학생과 군민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열강이 승인한 독립국가이며 이 기쁨이란 바로 여기 세운 기념비와 같이 있는 것이다.(하략)
이 기사를 통해 이 비석은 표면상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듬해인 1949년 1월 16일에 제막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궁금증은 <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독립기념비, 내무장관 참석 제막식> 제하의 기사를 통해 풀어낼 수 있다.
16일 아침 9시 30분 경무대를 나선 내무장관 신성모(申性模) 씨 수행을 따라 경원(京原)간 40리(哩, 마일) 연도의 싸늘한 공기를 헤치고 기자는 이곳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언덕 위에 뜻 깊이 선 대한민국독립기념비(大韓民國獨立記念碑) 제막식에 참가하였다.…… 이 기념비는 지난 10월 22일에 착공하여 준공까지 연공사일(延工事日) 80일간 그리고 52만 원의 공사비로 민(閔) 수원군수와 유지를 비롯한 26만 명의 군민과 더불어 어린 3만 명 학도들의 열렬한 지성의 결정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비는 3.1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虐殺)하고 맞아죽은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과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追念碑)를 8.15 해방과 함께 분쇄(粉碎)하여 버린 그 자리에 지금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우리가 꿈속에도 그리워 마지않던 독립비는 당당히 그 자리를 힘차게 나타낸 것이다.(하략)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의 정체가 “3.1 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하고 맞아죽은 일본인 순사들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중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1889~1919)는 수원경찰서 순사부장으로 1919년 3월 28일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현지에 파견되었다가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권총을 발사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에게 쫓겨 돌에 맞아 처단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 1895~1919)는 수원경찰서 화수리경찰관주재소의 순사이며,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주재소로 몰려든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총격을 가하며 도망을 가다 그를 추격한 군중에 의해 역시 처결되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 (1937)에 수록된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관련 항목이다. 여기에는 “소요사건 때 폭동진압 중 투석(投石)에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적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1937년에 발행된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을 보면,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성일보> 1919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서 노구치 순사부장과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의 사망에 관한 보도내용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추모비를 걷어내고 이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비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리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숨진 만세시위대 희생자들을 기리는 뜻도 함께 포함된 것으로 풀이된다. 듣자하니 독립기념비의 기단석은 추모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니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일제치하를 벗어난 극복의 의미를 일부나마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은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비석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뚜렷한 자료가 알려진 바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일본어 신문 몇 종류를 뒤져보니, <경성일보(京城日報)>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순직경관 기념비, 27일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간신히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경성일보>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이른바 ‘순직경찰관초혼비’의 제막 당시 모습이다. 이 비석의 사진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원] 전부터 화홍문(華虹門)의 고대(高臺)에 건설중이던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기념비(招魂記念碑)가 준공되어 27일 오전 10시부터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렬자는 지원(地元, 그 지방) 수원(水原)및 경성의 관민 수백 명으로 순직자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유족(遺族, 모당, 누이, 딸)이 제막의 거적을 당겼고, 남성적인 여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기념비는 영원히 빛나는 순직자의 영예 그것과도 같으며, 식후 비전(碑前)에서는 무도대회(武道大會)를 거행, 도내 각서(各署)에서 30조(組)가 출장하여 장렬한 시합을 벌였고, 본사 기증의 특제메달을 받은 고점시합(高點試合)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념비) (이하 내용 생략)
여기에서 말하는 ‘화홍문의 고대’는 앞서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제막장소였던 ‘방화수류정 언덕’과 동일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특히 이 기사에는 그동안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비석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사진을 통해 비석의 전면에는 ‘순직경찰관초혼비(殉職警察官招魂碑)’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1937)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순직한 경찰관은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이외에는 전무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이 초혼비는 결국 전적으로 3.1만세사건 당시에 숨진 두 일본인 경찰관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서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해마다 4월이 되면 이들을 위한 초혼제가 거행된 흔적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4월 29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관(水原警察官) 초혼제(招魂祭) 집행」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착된다.
[수원] 일찍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폭민(暴民) 때문에 순직(殉職)했던 노구치(野口), 가와바다(川端) 양 경찰관에 대한 제17회 초혼제는 수원경찰서 및 경우회(警友會) 주최 아래 4월 27일 오후 1시부터 양씨 기념비전에서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우천(雨天) 탓에 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집행, 제주(祭主) 후지타 서장(藤田署長), 경우회장(警友會長), 곤도 토라노스케(近藤虎之助), 내빈(來賓) 오카와우치 군수(大河內郡守)의 제사(祭詞)와 옥관봉전(玉串奉典) 등이 있은 후에 후지타 서장으로부터 경우회 및 내빈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개연(開宴)이 있었는데 당일의 인원은 이백여 명으로 종래 그 예를 보면 성의(盛儀)를 이뤘다.
<매일신보> 1929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제9회 순직경찰관초혼제의 광경이다. 여기에는 경복궁 근정전 용상이 죽은 일본순사들의 제단으로 사용되는 모습과 야마나시 조선총독이 제단에 옥관(玉串, 타마구시)을 바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례도 살펴보니까 3.1운동 과정에서 죽은 일본군 헌병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위한 기념비가 건립된 흔적이 눈에 띈다. 우선 강원도 이천군에서는 이천헌병분견소(伊川憲兵分遣所)의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죽은 고세진(高世鎭)을 위한 비석이 건립되어 1921년 10월 15일에 제막된 일이 있었으며, 평안남도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에 중상을 당하여 결국 숨진 성천헌병분대장 헌병대위 마사이케 카쿠조(政池覺造)의 기념비가 특히 사이토 조선총독의 휘호를 받아 1925년 10월 10일에 제막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경우, 그들에 대한 초혼제가 수원지역에서만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초혼비가 건립되기 이전에 이미 1921년 4월 26일에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관으로 처음 시작된 ‘순직경찰관초혼제’에도 당연히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초혼제는 초기에는 남산공원 광장, 왜성대, 광화문 경찰관강습소 등에서 거행되었고, 1926년 7월 4일에 열린 제6회 순직경찰관초혼제 때에 경복궁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거행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막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 대홀에서 열렸다가 다시 1928년부터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 어김없이 초혼제가 개최된 바 있었다. 1935년부터는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곁들여 함께 거행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도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이 이들을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는 고약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처럼 죽은 ‘왜놈 순사들’을 극진히 모시는 초혼제는 해마다 거행되면서도 정작 그들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행사가 벌어졌다는 얘기는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동아일보> 1923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수원사건(水原事件)에서 김상옥사건(金相玉事件)까지, 허다참극(許多慘劇)의 와중(渦中)에 순직했다는 경관이 46명, 그 중에는 조선사람도 열아홉」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초혼제를 지켜보는 그 당시 조선인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늦은 봄비가 개일 듯 말 듯한 작일 왜성대(倭城臺)에서는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최로 소위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초혼의 제물을 받는 그들 중에는 전염병(傳染病)의 예방에 종사하다가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있으며, 저희들끼리 격검(擊劍)연습을 하다가 맞아 죽은 자도 있으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강도(强盜)나 절도(竊盜) 범인을 잡으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그리고 또한 가지는 무수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들을 죽이다가 다시 독립단들의 들쳐오는 총칼에 맞아 죽은 자도 있다. 그리하여 독립단의 손에 죽어 버린 자는 전체 일백 한 사람 중에서 마흔 여섯 사람이나 되며 다시 그 중에서 열아홉 사람은 조선의 아비를 모시고 조선의 아들을 거느린 조선사람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는 독립단과 또는 독립에 관한 사건으로 싸우다가 죽은 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3월 1일 탑골공원(塔洞公園)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 소리가 일어난 지 스물일곱째 날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피가 끓게 한 수원의 참사(水原慘事) 당시에 약한 주먹에서 날리는 백성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하여 금년 1월 17일 새벽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육혈포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 전촌(田村)으로 끝을 마치었다. (중략) 이와 같이 일백 한 명의 죽은 자를 위하여 그 남은 혼(魂)을 불러주는 자의 정성에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의 구별이 없이 또는 전염병을 예방하다가 죽었든지 독립단을 죽이다가 죽었든지의 구별이 없이 오직 사람으로의 최후의 목숨을 버린 그를 위하여 설워하는 줄을 아는 사람도 역시 그 ‘사람으로의 죽음’을 위하여 가석히 여기는 동시에 그 일이 명의 경관들이 죽어 넘어진 벌판에 다시 기백 천 ‘사람’의 죽음이 깔렸음을 과연 기억할는지, 일백 한명의 죽음은 초혼의 제물을 받치는 자나 있거니와 궂은비에 추추히 우는 기백 천의 영혼은 부칠 곳이 어디인가?
이 기사의 원문에는 원래 기사작성자의 표시가 없으나 해방 이후에 나온 소오 설의식(小梧薛義植, 1900~1954)의 <금단의 자유>(새한민보사, 1949), 150~151쪽에 이 기사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청년기자 시절의 그가 이 글을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순직경찰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는 수백, 수천의 불쌍한 죽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 하겠다.
해방 이후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초혼비가 헐리고 바로 그 자리에 ‘대한민국 독립기념비’가 들어선 것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 외면받고 있던 수백, 수천의 영혼에 대한 추모와 위령의 뜻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이화 선생 마지막 가시는 길에 찾아와 명복을 빌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수선한 시국에 멀리서 마음을 전해 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는 화창한 봄날 파주집 근처 공원묘지의 양지바른 곳에 편히 잠드셨습니다.
당신의 생전 사진과 때 묻은 수첩의 연락처를 정리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시고, 또 당신께서 사랑하신 분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생전에 당신께서 남기신 족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교류하신 폭과 깊이의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성심을 다해 그간의 과정을 준비해주신 장의위원회의 윤경로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
훈장 수여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힘써주신 분들
장례식장의 데스크를 지키고 밤늦도록 정리해주신 분들
멋지고 감동적인 추모 영상을 만들고 장시간 촬영과 기록을 해주신 분들
멀리 전주에서 오셔서 사흘 밤낮 상가를 지키며 함께 해주신 선생님
당신의 저서와 부고 기사를 가져와 영전에 올리신 분
평토를 마친 묘 위에 막걸리를 부어 주신 분
그밖에도 고인을 위해 울어 주신 모든 분들께 숙연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감사 올립니다. 당신께서 남기신 일들을 받들어 이어가는 한편, 그간의 위로에 보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새로운 봄을 맞아 모쪼록 건강하시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2020.4.1.
고 이이화 선생 유족을 대표하여
상주 이응일 올림
※ 고 이이화 선생님 아드님인 상주 응일 씨가 유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글을 보내왔다. 한편 장례가 끝난 후 유족들이 연구소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했고,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였다.
31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올해 2월 퇴직한 김해규 후원회원은 2004년 4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이후 평택지역 후원회원 모임 조직, 평택지역 내 일제잔재 조사 자문, 신흥무관학교 국외 답사 등 연구소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제자는 물론 동료선생님들과도 석별의 정을 나누지도 못한 채 교단을 떠나게 되는 아쉬움을 달래며 퇴임의 글을 보내왔다. 퇴임에 즈음하여 김해규 후원회원은 2월 6일 평택지역 인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활동을 하게 될 평택인문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에 취임했다. 저서로는 <평택역사산책> <근현대 평택을 걷다> <평택사람들의 길> 등이 있다.- 엮은이
역사학이 너무 좋아 역사책이라면 무엇이든 읽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역사박사’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역사과목 잘해봤자 선생밖에 더 돼’ 친구들은 비아냥거렸지만 소년은 ‘역사교사’의 꿈을 꿨습니다. 역사교사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알았습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말이죠.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도 겨우 입학한 처지에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사범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준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 눈치만 살폈습니다. 큰 맘 먹고 ‘아부지 저 고등학교 가요?’라고 물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한 번 가봐라’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허락이 떨어진 뒤에도 눈치만 살폈습니다. 소년은 인문계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실업계고등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고집을 피우자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저 윗동네 종삼이 봐라, 인문계 졸업하고 놀잖니. 우리 형편에 기술이라도 배워서 돈을 벌어야지’라며 실업계 진학을 종용했습니다.
소년은 공업고등학교,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기계과에 진학했습니다. 소년은 기계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몰랐습니다. 징그럽게 싫어하던 공학과목이 널려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소년에게 고등학교 3년은 지옥이었습니다. 더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큰 병까지 얻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졸업반 때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대학진학 예비고사
를 치렀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겨울방학 무렵 다른 친구들처럼 서울의 작은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설날 고향을 다녀간 뒤로는 평택의 선진기업이라는 책걸상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일당으로 2,500원, 한 달 월급이라야 5만 원도 안 되는 박봉이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말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것에 무척 만족해 하셨습니다. 먹는 입 하나 덜었고 학비걱정도 덜었다는 생각에 기뻤을 것입니다.
1981년 5월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 고등학교 때 하숙을 같이 했던 절친이 제 소식을 듣고는 평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친구는 치의대 진학을 목표로 서울에서 재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여의도 5.16광장에서 개최되었던 ‘국풍81’에 갔습니다. 무대 앞에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풍경에 특별한 감정 없이 무대를 응시하고 있
는데 친구가 그랬습니다.
‘부럽지. 너도 대학생이 되면 저들과 함께 놀 수 있어.’
머릿속에서 경주박물관 마당의 에밀레종이 떵~하고 울렸습니다. 내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평택으로 내려와 보따리를 쌌습니다.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동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부모님께 허락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고향집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생각하냐.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대학은 무슨 대학이여’ 아버지 말씀이 백번 지당했지만 퇴직한 마당에 돌아갈 회사도 없었습니다. 건넌방을 걸어 잠그고 무조건 굶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지만 우
는 척도 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버티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해보자. 어떻게 해줄까?’ 재수기간 6개월 동안 한 달에 10만 원씩 지원하고 대학은 스스로 벌어서 다니기로 계약이 성사된 것입니다.
재수 5개월 20일 동안은 정말 혹독했습니다.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독서실 구석에서 잠을 자며 쓰레기보다도 못한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실업계 출신이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좋은 성적을 받기란 무리였습니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입학 원서를 작성할 때 주저 없이 ‘역사교육과’를 기입했습니다. 다행히 그때까지만 해도 사범대학은 인
기가 없어서 내심 합격을 기대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마음이 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던 교회 전도사님이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권했습니다.
‘주의 종’이 되어 헌신하라는 간곡한 권유에도 저는 역사공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 의중을 파악한 전도사님은 총신대학에 역사교육과가 신설되었으니 학부는 역사교육을 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사당동의 총신대학은 3, 4만 평의 작은 캠퍼스에 두세 개 건물밖에 없는 미니대학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경건함이 넘쳤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이고 시골에서는 남다른 신앙으로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차원이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교양과목인 구약개요, 신약개요를 가르치
던 교수님과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신학이론 때문에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로 빙빙 돌다가 학교 내 아웃사이더 선배들과 어울렸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선배들의 영향으로 제 눈은 제법 삐딱해졌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목회자는 내가스스로 정한 진로가 아니라 교회 열심히 다니는 내게 주위에서 지워준 멍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거리를 헤매고,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한다며 공장으로 농촌으로 내려갈 때도 나는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제가 갈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직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4학년 2학기 때 제법 규모가 큰 출판사에 취직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일찍 취직한 것을 축하했지만 앞으로 계속 출판 일만 할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졸업식을 마친 어느 날 지도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안성에 고등학교 강사자리가 있는데 가려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재수를 결심할 때처럼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목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안성이라고 했던 학교는 평택에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재직했던 한광중・고등학교입니다. 1989년 3월, 꿈에 그리던 한광고등학교 강단에 섰습니다. 얼마 뒤에는 정규직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시골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을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친구들도 이름보다 ‘김선생’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기뻐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동네 분들도 ‘김선생 댁’이라고 불러야겠다며 부러워했습니다.
한광고등학교에서 2, 3년 근무한 뒤 1991년부터 한광여고로 옮겼습니다. 14년을 근무한 뒤에는 한광중학교로 전근했고, 지난해 한광여중에서 1년을 근무하고 퇴직했습니다. 지난 31년 동안의 교직생활은 꿈만 같습니다.
역사교사로 보낸 31년은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제 꿈이 실현되었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설릣고 교단에서 바라본 맑은 아이들 눈동자가 늘 새로웠습니다. 아내는 저를 보고 ‘당신은 좋겠어, 취미생활하며 월급 받아서’라며 놀렸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당신 같은 선생님만 만났다면 내 인생 달라졌을 거야’라는 엄청난 칭찬도 해줬습니다. 대학 때 제 자신과 약속한 것처럼 아이들을 자식처럼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참교육’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좌충우돌도 많이 했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전교조 비합법화 시절 후원
금을 냈던 것이 탄로 나서 오랫동안 감시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전교조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학교민주화투쟁에 동참했다가 20여 년 동안 각종 차별과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퇴직할 때도 조금은 당당하게 교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1991년 한광여고로 전근하서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역사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열풍에 힘입어 전국 곳곳을 휘저으며 지역답사도 하고 역사기행도 했습니다.
역사교사가 되면 ‘지역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평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사료는 무엇이든 구해서 읽고, 아이들과 시골마을에 들어가서 구술조사도 했습니다. 참교육 열풍으로 ‘학급운영’ 관련, ‘수업관련’, ‘상담관련’ 책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읽었습니다. 대학 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을 채우려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지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욕심에 박사과정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책도 여러 권 냈습니다. 각종 강연과 글쓰기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나눴습니다. 새로운 것에 목말랐던 시기, ‘참’이라는 가치에 경도되었던 참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얼굴 화끈해지는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미숙해서 잘못한 것, 알면서도 비겁했던 것, 미처 해결하지 못한 것들. 미숙함을 무기로 무모하게 가르쳤던 제자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런 것들을 접어두고 이제 퇴직합니다. 교직 30년 계획에 교감, 교장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습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만도 아니고 아이들의 잘못은 더더욱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근대교육이 이제 시효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학교에서 가르쳤던 전통적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 미래 세계의 가치를 구현할수 없습니다. 변화된 세상에 대응하려면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사도 변화발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화’와 ‘자기혁신’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남다르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할 산입니다.
산적한 과제들을 동료교사, 후배교사들에게 맡기고 저는 떠납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잘해주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 텃밭을 일구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여러분과 인생의 어느 길에서 만났을 때 잠시라도 쉬어갈수 있는 넉넉한 가슴 준비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20년 2월 29일)
3월 12일 오후 5시,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헤럴드경제 기자인 김수한 후원회원을 인터뷰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01년부터 20년 가까이 연구소를 후원해 온 김수한 회원이 작년 8월 동국대학교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연구 주제가 이례적으로 김정일·김정은 정권하의 북한 언론 현황에 관련된 것이었다.몇 년 전부터 ‘기레기’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언론 개혁과 기자들의 자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현직 기자로서 여전히 금단의 영역이면서 조심스러운 북한문제, 그것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한언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문 : 연구소는 언제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나요?
답 : 제가 95학번(고려대 노어노문학과)인데 2001년 2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상태에서 방학진 당시 사무국장 권유로 가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복학 후에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강좌나 소모임에 가끔 나갔었고, 2002년 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친일 예술인과 그들의 작품전’ 전시회 때 자원봉사도 했었죠. 그 무렵 누군가 고대 인촌(김성수) 동상에 페인트를 뿌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고려대 영자신문사 기자 출신으로서 ‘큰 사건’이라는 직감이 들어 방 국장께 전화해 사건을 알리기도 했었어요. 그때 방 국장이 전화통화 직후 즉시 고대로 와서 함께 현장을 둘러보기도 했었죠.ㅠ
문 : 1997년 창단된 한국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인 ‘붉은악마’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1997년 8월 고려대 영자신문사 편집국장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어요. 그때가 3학년 1학기를 마친 상태인데, 막상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오니 ‘은퇴’라는 것이 어떤 건지 체감이 좀 됐었어요. 신입생이던 1학년 1학기에 신문사 수습기자로 입사해 꼬박 2년 반의 기간을 기자로서 바쁘게 활동하며 학업도 병행한 셈인데 영어로 기사를 쓰랴, 전공 공부하랴 정말 바빴거든요.
근데 막상 ‘퇴임’하고 보니 별로 할 게 없는 거에요. 그동안 신문사 활동하면서 구멍 난 학점을 메꾼다거나, 자격증을 준비한다거나 이런 목표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번아웃’(어떤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다가 에너지가 방전된 것처럼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 왔는지, 아니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암튼 좀 쉬고 싶었어요. 제가 일하던 신문사 편집국은 퇴임 후에도 여전히 집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그 무렵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혼자서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다녔어요.
제가 경북 포항 출신인데 당시 K-리그의 포항스틸러스를 응원하러 다닌 거죠. 그때 우리 프로축구계에는 ‘서포터’라는 개념의 유럽식 축구 응원 문화가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그 경기가 열리는 스타디움에서 12번째 선수로서 응원에 참여하는 거죠. 서울과 포항을 오가며 경기를 쫓아다니다보니 포항스틸러스 서포터들끼리 많이 돈독해졌어요. 우연히도 당시 포항스틸러스 서포터 회장이 고등학교 후배이자 이동국 선수(당시 포항스틸러스 소속)의 중학교 동창이었고, 그밖에도 포항공대에 다니던 축구 매니아 형님, 대구에서 포항팀 응원하러 포항 경기 때마다 포항으로 오시던 형님, 포항스틸러스 구단 프론트에서 일하던 박대리님 등과 팀웍이 잘 맞아서 정말 즐겁게 축구를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그때까지 지금은 ‘붉은악마’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서포터가 만들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당시 각 프로팀 서포터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통신 동호회에서 공지사항과 각종 의견을 주고받았는데요. 그때가 97년 8월 15일이었어요. 그날 나이키 초청 한국 : 브라질 친선경기가 잠실경기장에서 열렸는데, 그 경기를 앞두고 각 프로축구팀의 서포터들이 붉은 색의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맞춰 입고 힘을모아 대표팀을 응원하자는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어요. 그리고 그 생각이 정말 실행으로 옮겨져서 각자 유니폼 비용을 계좌이체로 납부하고, 당일 경기장에 가서 물결 무늬의 붉은 색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배부받았어요. 저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K-리그 각 팀 서포터들이 사상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한 곳에 모여서 응원하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때 기분은 그냥 뭐랄까, 정말 뭔가 엄청난 잠재력과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암튼 너무 뿌듯했고, 기뻤고, 떨리고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날 경기 내용도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이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맞아 전반전에 1대0으로 앞서 가다가 후반전에 2골을 먹고 2대1로 지긴 했지만, 정말 잘 싸웠어요.
그날의 흥분과 감동이 오늘날 붉은악마가 태동한 배경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97년 9월 28일 우리가 흔히 부르는 ‘도쿄대첩’이 터집니다. 붉은악마 50여 명이 당시에 일본 도쿄 요요기 국립경기장으로 가서 응원전을 펼쳤는데, 저도 그 50여명 중 한 명으로 참가했습니다. 일본에게 1대0으로 지고 있다가 후반전 들어 서정원, 이민성이 동점골, 역전골을 넣어서 한국에서는 9시 뉴스에 ‘후지산이 무너졌다’, ‘도쿄대첩’ 등으로 난리가 났었지요.
1998년 새해를 맞아 고민 끝에 1학기를 휴학하기로 했어요. 그때도 고심했지만 지금 지나고나서 되돌아봐도 나름 인생의 큰 결단이었습니다. 1998년 6월에 프랑스 월드컵 본선이 열리는데, 제 어릴 때 꿈이 ‘1998년 월드컵 경기장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죠. 실제로 프랑스에 가든 안 가든 일단 월드컵이 열리니 오롯이 월드컵을 만끽하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면 학점이 엉망일 것이고, 등록금을 낭비하게 될 것이고, 복학해서 학점을 올릴 기회도 없어지게 될 테니 나름의 합리적인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이 다가오면서 붉은악마 사무국에서 원정응원 명단을 짜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프랑스에 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붉은악마는 예선 3경기를 다 보는 1진(14박 15일), 예선 2경기를 보는 2진(9박 10일), 예선 1경기를 보는 3진(4박 5일) 등 3개의 일정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2진으로 갈려고 했는데 제가 군 미필자에 휴학생이라 해외여행허가가 안 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게다가 2진 참가자가 내야 하는 경비가 200만원을 상회했는데 유럽 여행용 경비로서는 저렴한 편이었지만, 학생으로서 뾰족한 수도 없었어요.
저는 거의 반포기 상태가 되어 포항집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냥 ‘이제 좋은 추억으로 묻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붉은악마 회장(신인철씨)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너 꼭 갈거냐’고 묻길래 “꼭 가고 싶다”고 했더니 광화문으로 오라는 거에요. 그래서 서울로 다시 갔습니다. 가보니 군 미필자이면서 휴학생인데 프랑스 월드컵 본선 응원을 가겠다는 저 같은 동년배들이 6~7명 있었어요. 이들이 다 함께 모여 당시 광화문에 있던 문화체육관광부로 가서 공문서를 1장 받게 됩니다. 붉은악마 회장이 미리 요청해 장관 결제가 이뤄진 문서였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명의의 이 공문서에는 ‘이들이 프랑스로 월드컵 응원을 가고자하니 병무청장은 이들의 해외여행을 허락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문서를 받으러 정부청사를 방문한 우리들에게 ‘건강하게 잘 다녀오시라’며 환하게 웃던 공무원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문 : 어떻게 헤럴드경제에 입사했나요?
답 : 포항제철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지 ‘월계수’의 편집부장으로 활동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고려대 영자신문사 The Granite Tower에서 기자생활을 했어요. 1학년 때 수습기자를 거쳐 2학년 때 기자, 부장을 거쳤고 3학년 때는 편집국장을 했습니다. 고려대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남양주 광릉수목원 자락에 위치한 경희대 광릉캠퍼스 평화복지대학원에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여기서는 영문 학술지 ‘피스포럼’의 편집장으로 활동했어요. 입학생 중 싱가포르, 벨기에, 필리핀 등 외국인 학생들이 있어 강의와 졸업논문을 영어로 써야 하는 특수한 환경이어서 영어 훈련에 도움이 많이 된 거 같아요.
대학원 졸업을 앞둔 2004년 말 언론사 시험을 보다가 막연히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 사설을 매일매일 읽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사설을 프린트하던 중 코리아헤럴드 수습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혹시?’ 하는 생각에 지원을 했습니다. 대학교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했고, 영문 학술지 편집장도 했고, 영문 논문도 쓰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필기시험을 통과한 거 같아요. 영자신문 기자로 입사한 지 3년여 뒤에 같은 회사의 국문 경제지인 헤럴드경제로 옮겨왔습니다.
국문 경제지로 옮겨온 이유라면, 일단 영자신문 기자로서 평생 커리어를 쌓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요. 이런 고민을 지금은 작고하신 민영빈 YBM 회장님을 찾아가 털어놨더니 의외로 쉽게 ‘국문 매체로 가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분의 조언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민 회장님은 재학 당시 고려대 영자신문을 창간한 장본인이셨고, 졸업 후 첫 직장이 코리아헤럴드였거든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당시 회장 비서실에 문의하니 의외로 ‘몇날 몇시에 회장실로 오라’고 연락을 주셔서 2시간이 넘게 그분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제 인생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 초년병의 SOS 요청에 흔쾌히 시간을 내어주신 그분께 항상 빚을 지고 있는 기분입니다. 회장실에 찾아갔더니 당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으시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에게 첫 일성이 “너는 내 학교 후배에, 학교 신문사 후배에, 직장 후배이기도 하니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였습니다. 그날 주신 여러 조언에 대해 두고두고 감사하고 또 후배들에게 그분처럼 베풀고자 합니다.
헤럴드경제에서는 사회부, 연예부, 부동산팀 등을 거쳐 현재 정치부 외교안보팀 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문 : 기자생활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때는 언제였나요?
김수한 기자가 싸이월드에 올려놓은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기사를 캡쳐한 것
답 : 독자들로부터 좋은 기사를 썼다는 칭찬과 격려를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지금 돌아보니 특히 기억에 남는 기사로는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찬반 논란 관련 기사, 윤봉길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 아파트 실명을 노출해 독자의 항의를 받은 부동산 기사가 떠오릅니다.
2010년 8월께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무상급식안에 대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반발하면서 무상급식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오 시장은 주민투표 결과에 자신의 시장직 사퇴까지 결부시켰고, 결국 시장직을 사퇴하게 됩니다.
당시 이 사안의 전후 사정을 담담히 써내려 간 ‘오세훈 불출마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제하기사에 독자들의 폭발적인 성원이 답지했습니다. 비록 그 기사는 당시 서울시장 측의 문제 제기로 삭제됐지만, 그때 독자들이 보내주신 댓글은 지금도 잘 간직하고 가끔 읽어보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사진 진위 논란 기사도 의미 있는 기사입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10월 8일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뒤 체포된 윤봉길 의사가 연행되는 사진에 대해 “진짜”라는 의견을 냅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윤봉길 의사의 연행 장면을 찍은 사진이 진짜라니, ‘그동안 가짜였나?’ 하는 의문이 들어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진위 논란이 일고 있는 윤봉길 의사 체포 당시 사진
그러다가 연구소의 방 국장으로부터 윤봉길 의사 사진 진위 논란을 처음 제기한 강효백 경희대 교수 이야기를 들었고, 강 교수로부터 윤 의사의 연행 사진은 가짜라는 의견을 다시 확인해 ‘사진 속 인물 윤봉길 아니다-강효백 교수 반론’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정부 기관은 ‘진짜’라고 했는데 논란을 제기한 주인공은 ‘가짜’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여전히 대립하는 이상한 사안이었습니다.
과거 상해 영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강 교수가 당시 사건 기록과 신문기사 등으로 재구성한 연행 정황은 사진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진 속 남성은 일본 경찰로부터 신사적으로 연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윤봉길 의사는 실신할 정도로 심하게 구타를 당해 달구지에 시체처럼 내동댕이쳐져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이 당시 신문기사 등에 생생히 남아 있었고, 강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기존 연행 사진이 가짜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당시 김학준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이 호응하고 성형외과 등 전문가 그룹이 윤봉길의사 사진과 연행 장면 사진을 비교해 연행 장면의 남성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명박 정부 출범 얼마 후 국가보훈처가 그 사진에 대해 다시 “진짜”라는 의견을 내 논란이 된 것입니다.
이후 이 논란은 SBS 저녁 8시 뉴스와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등으로 다뤄져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2011년 3월 1일 SBS 저녁 8시 뉴스에서는 “윤봉길 의사 아니다..연행사진 조작가능성 커”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거사 직전 찍은 윤 의사의 사진을 3차원 영상으로 복원해 문제의 사진과 비교한 결과에서도 두 인물은 달랐다는 결론을 얻어냈다”며 “무참히 폭행당한 윤 의사의 모습이 공개될 경우 식민지 한국과 침략 중이던 중국 국민들을 크게 자극할 것을 우려해 일본군이 사진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또한 같은 날 3·1절 특집다큐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인가’에서 해당의혹이 보다 심도 있게 다뤄졌습니다. 강 교수는 요즘도 가끔 저에게 “윤봉길 의사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종종 전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작성한 아파트 가격 하락 기사입니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폭락한 상황을 기사화하면서 아파트 실명을 기사에 그대로 썼는데, 이 기사가 포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입니다. 급기야 그날 오후 해당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한 독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독자님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실명을 써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전화기 너머로 큰 소리로 흐느끼셨습니다. 경험이 적었던 기자 초년병 시절의 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일부 주민들게 큰 피해를 초래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과 함께 해당 아파트의 실명을 이니셜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주신 독자분께 사과의 말씀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독자분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기자 생활을 하는 내내 종종 불현듯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분은 “기자님, 독자의 항의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소신을 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면서 본인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항상 자녀에게 “‘소신 있게살라’고 조언한다”고 하셨습니다. 언론인으로서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에 대해 보다 진지한 자세에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접근해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문 : 북한문제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답 : 제가 대학교에 입학한 1995년은 학생운동이 점차 사그러드는 시기였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며 막연히 가졌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은 현실과 많이 달랐고, 학생운동은 점차 갈 길을 잃고 있었습니다. 입학 후 내내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영부영 신입생 환영회 등의 통과의례를 모두 치르고, 온갖 술자리에 끼며 미래를 탐색하던 시절, 우연히 학교 신문사 수습기자 채용공고를 보고 신문사 입사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다행히도 합격을 하였고, 대학생 기자로서 학내 문제와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이슈와 국제 이슈를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종언은 우리 세대가 맞이한 큰 사회적 흐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일제 강점기의 시대정신이 ‘독립’, 군사독재 시절 시대정신이 ‘민주화’였다면, 9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온 이른바 X세대들의 시대정신은 ‘통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점차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쩌면 사치스러운 바람이겠지만, 상황이 허락된다면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싶다’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2006년 2월 석사 논문으로 한국과 미국의 탈북자 정책을 비교하는 내용을 주제로 삼았고, 2011년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19년 마무리한 박사 논문에서는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로동신문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주제로 했습니다. 석사논문 제목은 「The R.O.K. and U.S. Policies on North Korean Refugees(북한 탈북자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정책 연구)」(영문)이고, 박사논문은 ‘김정은 권력승계시기 로동신문의 변화 연구: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중심으로’입니다.
문 : 박사학위논문에서 로동신문사의 편집국 인적 구성과 기사내용 특징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북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답 : 자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이 정해진 신분인증 절차에 따라 자료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만, 논문을 쓰기 위해 실제로 어려운 건 자료 분석입니다. 로동신문 수년 치 자료를 모아서 이를 다양한 분석 기법을 활용해 여러 면에서 분석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습니다. 저는 자료 분석에만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분석에 기나긴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때로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 같고, 아무 것도 안하면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박사논문을 쓰기 전에 방법적으로 서툴러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습니다. 박사 논문을 시작하기 전에 로동신문을 주제로 한 소논문을 쓰기 위해 약 3개월치의 로동신문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요.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로동신문을 복사해 자료를 모으다 보니 약 3개월치 신문 자료 확보에 2달여를 허비하기도 했습니다.
문 :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가 김정일 사망부터 김정은의 권력 공고화 시기까지인데 이 기간에 로동신문의 변화 양상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세요.
답 : 제 박사 논문의 결론을 단순화하면 딱 2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로동신문 편집국의 규모가 축소됩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김정일 시대 로동신문 편집국에는 278명의 기자가 소속돼 있었는데, 김정은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자 수가 189명으로 급감합니다.
둘째 결론은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넘어가면서 로동신문의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정치나 사상과 같은 주제가 신문의 메인 주제였다면 김정은 시대에 가장 중요시되는 주제는 ‘경제 발전’이나 ‘과학기술 강조’ 등입니다.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 김정일 시대에서 김정은 시대로 이어지는 기간을 중대한 정치적 사건을 기점으로 총 5개 시기로 구분하여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로동신문 기명 기사 1만3252개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고, 5개 각각의 시기별로 약 3000여개의 기명 기사를 전부 수작업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자료를 기자별 기사 리스트로 재가공해보니 기자별 10~20개의 기사 목록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기자마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분야의 기사를 꾸준히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기자별 소속 부서를 유추할 수 있었고, 분석 기간 중 로동신문에 이름을 올린 기자의 소속 부서를 모두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결국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를 추정적으로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5개 시기별 로동신문 편집국 조직도가 도출됨에 따라 5개 시기별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 현황도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 밖으로 로동신문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대남 및 대미 메시지를 내는 조국통일부와 국제부 소속 기자들의 부서 이동은 상당히 제한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시기별 분석의 기간을 얼마만큼으로 잡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실 일간지 기자의 면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주일치 기사만 분석해도 부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언론인 로동신문의 특성을 고려해 처음에는 5개 시기별 1개월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는데, 왜냐하면 일간지 기자로서 1개월동안 기사를 1건도 쓰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공산주의 언론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 기간을 처음에는 2개월치로, 3개월치로 계속 늘려보다가 최종적으로 시기별로 6개월치의 기명 기사를 전수 분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주일치에서 1개월치, 2개월치로 늘렸다가 결국 6개월 동안 1건의 기사도 쓰지 않는 기자까지 잡아낼 수 있도록 연구 범위를 확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편집국 조직도가 구체적으로 파악된 후에는 신문의 내용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서구 신문방송학계에서 사용하는 내용 분석 기법을 차용하여 5개 시기별 로동신문 내용을 분석한 결과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 초기까지 로동신문에서 가장 빈도수가 많았던 기사주제는 ‘사회주의 혁명사상 고취’였으나, 김정은의 후계 체제가 공고화된 5번째 시기부터 ‘경제발전’을 주제로 한 기사들이 가장 빈도수가 많은 기사로 올라서는 변화가 포착되었습니다. 또한 1~4 시기에 주로 중하위권에 있었던 ‘과학기술 강조’ 관련 기사가 빈도수 3위로 올라섭니다.
이러한 논문의 결론은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방만한 구조의 로동신문 편집국 구조를 효율화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을 한편에서 제기하며, 또 한편으로 김정은 집권 후 실시된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주장한 비핵화 수용 및 경제 발전 추구 기조가 하루아침에 나타난 정책적 기조가 아니라 김정은 집권 후 서서히 꾸준한 과정을 통해 ‘빌드업’된 기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문 : 북한언론 연구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후원회원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답 : 제가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연구소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내었고, 앞으로도 계속 큰 성과를 내실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역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들 수 있습니다. 연구소가 방대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완료함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친일반민족 인사 여부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자체가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부 친일 인사들에 대한 논란 자체도 더 이상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논란 종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12년에 국방부에서 백선엽 장군에 대한 뮤지컬을 만든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언론 브리핑에서 그 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분인데 굳이 뮤지컬까지 만들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의가 있었는데,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뮤지컬 제작 계획 자체가 취소되었습니다. 그 취소의 배경에 친일인명사전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인사를 검증할 때 이런 식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이라는 검증요소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그만큼 연구소가 사회에 확고한 기준을 제공하는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소의 이런 긍정적인 측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일부 정치세력들이 연구소를 특정 정치이념에 편향된 집단으로 매도하고 비판하는 경우 또한 없지 않습니다. 이른바 ‘좌파’ 단체로 규정하고 연구소의 목소리에 색깔론을 씌우고 비판하는 것이죠.
저는 앞으로 연구소가 이러한 편견을 깨고 한 발 더 도약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어떠한 정치이념에 편향됐다는 비판에 휘말리지 않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연구를 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북이 진심으로 통일에 대해 논의하고,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는 시대가 곧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에 대비하여 우리 사회에서 향후 우리 사회 안의 친일문제에 대해 보다 더 활발한 논의가 진행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앞두고 나라를 한 번 고쳐 세우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이러한 논의를 위한 성숙된 이론적 기반과 자료 연구 및 조사가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남북통일을 더욱 당당히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연구소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해 겨울 그는 왜 맨발로 남산성벽을 넘어야 했나? 고봉근 집터, 일본인 순사를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항거지
이순우 책임연구원
서울 용산구에 있는 후암시장 삼거리에서 영락보린원(永樂保隣院, 후암동 370번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후암로 28길’을 따라 260미터 남짓 걷다보면 약간 언덕길을 이루는 지형이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갈라지는 골목길(후암로 28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의 초입에는 한울연립주택이 서 있고, 이곳과 남쪽으로 등진 자리에 2층짜리 단독주택 한 채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김상옥 의사 항거 터’ 안내표지판은 이곳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자리는 ‘옛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304번지’에 해당하며, 고봉근(高奉根, 1896~1961)의 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 당시 돼지고기 행상을 했던 고봉근은 다름 아닌 1923년 정초에 서울은 물론 조선 천지를 들썩이게 했던 의열투쟁의 주인공 김상옥(金相玉, 1890~1923) 의사와 처남 매제(妻男 妹弟)가 되는 사이였다.
지금은 이 일대가 온통 주택가 밀집지역으로 변한 통에 어떠한 주변 지형이 둘러싸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의 경성시가지도를 살펴보면 고봉근의 집은 조선은행 사택지(朝鮮銀行 舍宅地)가 넓게 포진한 지역의 외곽선에 간신히 터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곳은 삼판통 대로변에서 죽 이어지는 평지(平地)의 막바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뒤쪽으로는 곧장 남산에서 흘러내린 비탈면이 높게 치솟아 있는 것이 지형상의 특징이었다.
일찍이 1920년 여름 미국의원단(美國議員團)이 경성을 방문하는 때에 맞춰 조선총독과 총독부 고관들을 처단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던 김상옥 의사가 다시 빙판으로 변한 압록강을 도보로 건너 국내로 잠입한 것은 1922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국경선을 넘자마자 이내 경의선을 이용하여 일산역(一山驛)에 도착하였고, 그 이후 서울로 숨어 들어와서 각처에 며칠씩 유숙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당시 김상옥 의사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일본 국회에 참석하고자 조만간 일본으로 건너갈 것으로 알려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였다. 이를 위해 도쿄로 가는 출발지인 남대문정거장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하려던 계획에 따라 김상옥 의사는 이 주변을 계속 살피는 한편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대기하던 도중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에 종로경찰서 서편 급사실(給仕室)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범인색출에 혈안이 된 일제 경찰에 의해 김상옥 의사가 고봉근(당시 28세)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탐지되어 그해 1월 17일 새벽 5시에 경찰대가 이곳 삼판통 집을 포위하는 상황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일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김상옥 의사가 발사한 육혈포(六穴砲, 권총) 총탄에 맞아 일본인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종로경찰서 형사부장)가 즉사하고, 이마세 킨타로(今瀨金太郞) 경부(종로경찰서 사법계 주임)와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 경부보(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도 중상을 입고 함께 쓰러졌다.
그러고 나서 곧장 집 뒤로 이어진 남산자락을 맨발로 박차고 올라 순식간에 남산 성벽을 타고 넘어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쪽으로 피신하였다. 김상옥 의사는 여기에서 다시 산줄기를 따라 왕십리 방면으로 나가다가 그 뒤쪽 무학봉(舞鶴峯) 안쪽 골짜기에 자리한 안정사(安靜寺, 일명 ‘청련사’)로 숨어들었다. 그 당시 서울 근교의 사찰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이곳 역시 기생들이 시중을 들며 술과 고기를 파는 음식점 영업이 성황을 이루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도망자의 몰골이 역력한지라 “노름을 하다가 경관에게 발각되어 여기까지 도망하여 왔으니 사람을 좀 살려 달라”고 짐짓 애걸하는 시늉으로 하룻밤 묵을 것을 허락받은 뒤에 그 다음날 저녁나절에 짚신 한 켤레와 목출모자(目出帽子, 털실로 짠 방한모)를 얻어 쓰고 그곳을 빠져나오게 된다.
김상옥 의사가 남산 성벽을 넘어 탈출할 때 하룻밤을 지새운 왕십리 ‘안정사’의 전경이다. 하지만 이 절은 지난 2009년 주택재개발 지역에 포함되면서 경기도 장흥으로 옮겨갔고, 그 바람에 지금은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진 상태이다.
이날에는 다시 왕십리 근처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마침내 1월 19일이 되어 동대문 밖 창신동(昌信洞)에 있는 본가를 찾아가 모친을 잠깐 뵌 후에 다시 효제동 73번지 이태성(李泰晟, 이혜수 동지의 부친)의 집을 은신처로 삼아 그곳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며 또 다른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상태에서 앞서 체포된 전우진(全宇鎭)의 자백으로 인하여 김상옥 의사의 소재지가 들통 나고, 이에 따라 1월 22일 새벽 3시에 경성 전역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이 효제동 인근을 완전히 포위하며 체포를 시도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맞서 김상옥 의사는 옆집을 넘나들며 3시간 가까이 맹렬한 총격전으로 응전하다가 마침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무수한 총탄이 박힌 김상옥 의사의 유해는 가족에게 넘겨졌고, 그해 1월 26일 아침 장례절차를 거쳐 이문동공동묘지(里門洞共同墓地)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큼 강렬했던 의열투쟁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듬해에 다시 김상옥 의사의 자취를 상기시켜주는 또 하나의 기사가 신문지상에 등장하였다. 일찍이 그가 고봉근의 집을 벗어나 남산 쪽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서둘러 도망치다가 눈밭에 뒹구는 바람에 소지하고 있던 권총 한 자루를 분실한 적이 있었는데, 이 권총의 행방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소식이었다.
<매일신보> 1924년 10월 9일자에 수록된 「전촌부장(田村部長)을 살해한 김상옥의 권총, 오랫동안 의문에 쌓였다가 지금에야 형체를 나타냈다」 제하의 기사는 그 내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참 당시에 천하의 이목을 놀래이던 김상옥(金相玉)이 종로서의 전촌부장(田村部長, 타무라 순사부장)을 죽이던 육혈포(六穴砲)가 주인이 사라지기 전에 그 자취를 감추어 한 의문을 일으켰더니 주인이 죽은 후 해가 오래된 이제 와서 그 형적을 나타내었다. 시외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漢芝面 漢江里) 이만길(李萬吉, 27)은 작년 3월에 장충단(獎忠壇) 뒤 송림이 우거진 활터 근처 길가 눈 속에서 서슬이 시퍼렇고 탄알까지 박혀 있는 자동식 육혈포 한 자루를 얻어 가지고 한강리 근처 어떤 바위 밑에 감추어 놓은 후 작자만 나서면 팔아먹으려 하던 차 요사이에 이르러 들고 나서서 살 사람을 찾다가 동대문서원에게 발각되어 권총과 함께 체포되었다. 즉 이 권총이 김상옥의 사용하던 무서운 총인데 삼판통에서 전촌 부장을 죽인 김상옥은 남산을 타고 도망하여 장충단 근처에 이르렀을 즈음 얼음판에 미끄러지며 손에 쥐었던 권총을 놓치고 오랫동안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가 다른 사람을 놓아 이것을 찾고자 하였으되 이내 찾지를 못하였던바 이를 이혜수(李惠壽)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경찰에서도 그 근처를 모조리 헤매여 찾았으나 이내 찾아내지 못하였던 것으로 의외에 전기 이만길의 눈에 띄었던 것이었으며 이만길은 이 권총으로 인하여 처형되리라더라.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거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의열투쟁의 하나였던 김상옥 의사의 의거가 있고나서 그와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 8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던 이들도 대개 범인장닉(犯人藏匿)의 죄로 일제의 추궁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당연히 김상옥 의사의 매제인 고봉근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에게는 증거불충분을 사유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동아일보』 1961년 11월 25일자에 수록된 김상옥 의사의 매제 고봉근 지사의 사망관련기사이다. 그의 집주소가 ‘후암동 369번지’로 되어 있는 걸로 보면, 평생 동안 그는 이 동네를 떠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약간의 세월이 흘러 불과 6개월여 뒤에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을 촉발한 뉴욕증권시장의 주가 대폭락 사태가 벌어지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던 1929년의 어느 봄날, 세상 사람들을 잠시 어리둥절하게 만든 한건의 기사가 신문지상에 등장하였다. <동아일보> 1929년 3월 23일자에 수록된 「오개성상(五個星霜) 지난 금일(今日), 김상옥사건에 의운(疑雲), 일시 세상을 진동한 김상옥 사건에 종로서 폭탄범은 다른 사람이라고, 종로서 폭탄범(鍾路署 爆彈犯)은 타인(他人)?」 제하의 기사가 그것이었다.
일시 조선 천지를 놀래게 하던 김상옥 사건이라 하면 벌써 만 5주년 전의 일이지만 사건이 워낙 세상을 경동시켰을 만큼 아직도 일반의 기억에 새로운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하여 최근에 한 새로운 사실이 발각되어 시내 모 경찰에서는 방금 그 천명(闡明)에 활동중이라 한다.
『조선경찰관순직사』(1933)에 채록된 종로경찰서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경부의 공적내용이다. 그는 김상옥 의사를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의 범인으로 지목하여 검거활동을 펼친 공로로 ‘수훈자 표창’을 받았다.
김상옥이가 무덤에 들어간 지 5년 후인 오늘날에 새삼스럽게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은 김상옥이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진범인으로 지목받아 김상옥 사건에 유일한 공로자인 삼륜(三輪, 미와) 종로서 고등계 주임은 경관의 최고의 표창인 공로장(功勞章)까지 탔었는데 실상은 폭탄투척의 진범인은 김상옥이가 아니라는 것이 그 후에 우연히 발각되었으나 그 당시의 경찰부장이던 마야정일(馬野精一, 마노 세이이치) 씨는 공을 이룸에 급급하여 김상옥을 진범인 줄만 여기고 이때까지 지내왔으나 그 사실 진상이 차차 드러나자 필경은 모 경찰에서도 이 사건의 진상을 적발코저 방금 진범인을 수사 중이라더라.
비록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나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터지고 그 범인으로 쫓겨 김상옥 의사가 시내 여러 곳을 숨어 다니다 마침내 효제동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따로 있었다니 이건 무슨 얘기란 말인가?
그런데 이러한 지적은 알고 보면 1923년 사건 당시부터 이미 언급되어온 내용이었다. 실제로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에 게재된 ‘김상옥 사건의 전말’에 관한 보도의 말미에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폭탄범인(爆彈犯人), 상금(尙今) 누가 함인지 막연부지(漠然不知), 전기의 사실 내용을 볼 것 같으면 김상옥은 정녕 폭탄범이 아니다」라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담겨 있었다.
원래 이 사건이 일어나기는 종로서의 폭탄을 던진 것으로 인하여 삼판통 사건을 시작하여 효제동 사건 등 일월 이래로 시내에서 두 번이나 큰 사건 돌발하였는데 검사국에서 심문한 사건의 내용을 볼 것 같으면 김원봉에게서 보내인 폭탄은 안동현까지 와 가지고는 어찌되었는지 돌연히 자취를 잃게 되었으므로 김상옥에게 오지 아니한 것은 사실이 명백한 바이라. 그러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것은 정녕 김상옥의 소위가 아니오 다른 사람의 소위가 명백한 바이므로 경찰서에서는 지금까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야로 활동을 계속하여 혹은 북으로 서로 계속 탐지하는 중이라더라.
이러한 의구심만 잔뜩 던져놓고 여기에서 지목하는 진범에 대한 후속기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결론이 어떻게 맺어진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 당사자는 과연 누구라는 것일까?
영하 20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락없이 냉동고다. 천장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받아놓은 물도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도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콧속의 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위세를 총동원해서 만상을 얼어 붙이려고 기를 쓰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처럼 얼지 않고 있다.(<소설, 알렉산드리아>, 한길사 판)
이병주(왼쪽)가 1963년 12월16일 2년7개월의 수감생활 후 특사를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 이권기 경성대 일문과 명예교수 제공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 : 1921.3.16.~1992.4.3.)의 인문학기행은 영하 20도 이하의 겨울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종로 3가나 청량리 588처럼 지번으로만 서울의 우울을 상정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옥서(典獄署)였다가 감옥서(監獄署)로 바뀐(1895) 뒤, 일제에 의하여 사실상 법 집행권을 약탈(1906, 조선통감부 설치)당한 후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 아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곳(1908.10.21. 개소)이다. 민족사적 수난의 상징인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1920), 경성형무소(1946), 서울형무소(1950),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화류계 여성 이름 바꾸듯이 변성명하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으로 이전함으로써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우아하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 개관)이란 명칭으로 몇 동만 남아있다. 이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면 실로 세계적인 명물로 유네스코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고도 남을 아까운 유적이건만 이를 허물어버린 군부독재나, 그런 야만적인 조치를 막지 못한 민주세력의 역량을 생각하면 마냥 울화통이 치민다. 지금도 그 일대 독립공원엘 갈때마다 입구 보도에다 이 시설을 훼손한 자들의 동팡을 깔아두고 짓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면하는 울적한 심정이다. 어째서 이런 세계적인 명물을 서울시도 아닌 일개 구청에다 소속시켜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행여 관할 서대문구청이 잘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산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관리 운영하고 있지만, 깜냥도 안 되는 온갖 박물관들에 국민의 혈세가 투자되는 데 비해 너무나 푸대접을 받는다는 민족사에 대한 불공평한 처사가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병주가 이곳에 투옥당했던 1961~1962년(그는 10년형을 언도받고 1962년 부산교도소로 이감, 2년 7개월 만인 1963.12.16. 출감)은 서울교도소 시절이었다.
이런 감옥에서는 “원통형으로 굳어진 사등밥(통상 가다밥 혹은 콩밥으로 호칭)이란 관명(官名)이 붙은 밥”에, “소금 속에 미이라”가 된 새우, “된장의 향기를 살큼” 풍길 뿐 “들여다보면 거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멀건 국물이 한끼 식사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 황제다운 품위를 지키며 젓가락질”을 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중년 사나이.
그는 이 감방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카파레 안드로메다에서 악사로 있는 동생에게 “유폐된 황제의 사상을 아는가. 그건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하는 사상이다”라고 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야만적인 시설을 갖춘 서울교도소의 감방에 갇힌 나, 이 “고독한 황제는 환각 없인 살아갈 수 없다”, 그는 “유폐된 황제의 사상”으로 무장한 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만해 선사의 불교적 변증법에 도취해서 그 징역살이의 고통을 감내한다.
세상에 억울한 건 그 혼자만이 아니다. 사관 사마천도 그랬지만 천하의 명 제왕학 교재를 썼던 마키아벨리도 그랬다. 피렌체 공화정 시절에 정청 제2사무국장부터 대통령 비서까지 두루 거쳤던 그는, 추방당했던 메디치 가문이 외세(교황과 스페인)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조종, 귀국하여 재집권하자 중뿔난 죄도 없으면서 죄인으로 내몰렸다. 혹독한 날개꺾기 고문을 6회나 당한 뒤 바르젤로 감옥(현 국립미술관)에 투옥, 운좋게 간신히 풀려났으나 벌금에 파직까지 당했다.
도리없이 그는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의 농장으로 은둔, 거기서 <군주론>을 비롯한 명저들을 쏟아냈다. 이미 5살 아래 벗 프란체스코 베토리(서신교환 때는 로마주재 피렌체 대사, 나중 프랑스 대사, 피렌체 공화국 대통령)와 2년여에 걸쳐 43통의 왕복서한을 주고받았는데, 그 사연은 실로 사마천이 사형수 임안(任安)에게 보낸 안족서(雁足書)만큼이나 절절하다.
“운명은 나를 견직물업에 밝게 해주지도, 면직물업으로 돈을 벌게 해주지도, 금융업으로 입신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았으므로, 정치를 생각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단 말일세”라고 노골적으로 호구지책을 애원하면서도 마키아벨리는 유형이나 진배없는 농막에서의 삶을 시적으로 그려준다.
“나는 시골집에 있네……여기서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나무를 벌채시키고 있기 때문이지.
” 두어 시간 감독 겸 작업지시를 하고는 산림 속 옹달샘물로 가서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는데, 필시 목을 축이고는 나르시스처럼 그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샘물이라도 그걸로는 갈증을 달랠 수 없어 “한길로 돌아서 선술집으로 가네. 거기서는 나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 가난한 산장과 보잘 것 없는 재산이 허용해주는 식사를 들지.
”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식단인가를 암시하는 묘사다. 그래서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허전한 지라 이내 선술집으로 가서 “푸줏간 주인과 밀가루 장수와 두 사람의 벽돌공”과 어울려 “불한당이 되어 보낸다네. 카드와 주사위가 난무하는 동안 무수한 다툼이 벌어지고, 욕설과 폭언이 터져 나오고 생각할 수 있는 별의별 짓궂은 짓이 자행”된다.
이 대목을 읽노라면 그에게 맞춤한 밥벌이 자리라도 마련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베토리가 왜 그런 건 전혀 고려조차 않았는지 궁금해지지만, 이내 그 해답은 자동응답기처럼 튀어나온다.
어느 시대나 출세지향적인 몸보신주의자들은 험지에 빠진 동지나 벗들을 경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덕택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지난 2016년 가을 이태리 여행 때 험지인데도 하루를 투자하여 나는 산탄드레아의 그 농장을 찾아가봤다. 한촌이라 관광객조차 별로 찾지 않았는데, 5백여 년 전의 그 마을풍경을 상상, 유추해보니 추방자의 처량함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정황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기록한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서재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흙 같은 것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정제한 다음, 옛 사람들이 있는 옛 궁전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고, 그 음식물, 나만을 위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점지받은 음식물을 먹는다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들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 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말일세. 그들의 세계에 전신전령(全身全靈)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겠지.(시오노 나나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한길사 334~335쪽. 위의 인용문도 다 이 책에서 발췌)
이병주는 감방에서 고독한 유폐된 황제의 꿈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일개 정신(廷臣)으로 자족하며 인문학자가 되었다.
둘 다 유폐된 상황에서 궁중을 가상무대로 삼은 것은 고난을 돌파하려는 투지의 역설적인 수사법에 불과하다. 전락한 운명을 사사로운 영욕에 억매여 고통을 감내하기보다는 우매와 범죄로 억룩진 역사에 도전하겠다는 결연함을 응고시킨 의지이기도 하다. 누구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상적인 금자탑을 쌓고야 말겠다는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누추한 거처를 왕궁으로 날조할 수 있도록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인허를 받은 격이다.
이 두 수인의 꿈은 그 형식이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자신들처럼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하는 게 자연변증적인 전개일 터인데, 이병주도 마키아벨리도 그렇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병주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태리는 르네상스적 휴머니즘의 이상으로 공공적인 선과 자유로운 공민의 공동체를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추방당한 그에게 이런 사조는 공허했을 터였고, 공동체(도시국가)의 위기와 해체가 빈번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점점 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표변해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엿다.
그래서 <군주론>은 “군주는 자기 백성을 결속시키고 이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든가, “신의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인간미를 잃고 반종교적인 행동도 때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두어야 하겠다”는 등등으로 마키아벨리즘은 석화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이란 정겹게 품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짓밟아 깔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치명적인 피해에는 그럴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타인에게 손상을 입히려면 복수의 두려움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George Bull trans, The Prince, Penguin Classics, 1966, pp 37~38)
물론 이 대목은 극한 상황이나 점령지를 통치하는 경우에 빗대어 거론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독재체제를 두둔하는 한편 그는 외침을 당했을 때의 방어능력에서는 군주국보다는 민주체제가 더 우수하다는 모순된 논리를 편다. 로마에 잔혹하게 점령당한 군주국 카르타고는 식민지화되었으나, 스파르타에 패배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경험한 공화정의 자유주의 정신 때문에 결국 참주정치가 좌절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된 마키아벨리즘은 이병주의 초기 문학에 강력하게 반영된다.
이병주 문학의 핵심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에 있다. 여기서 그는 인본주의자로서의 휴머니즘에 입각하면서 교양주의적인 양비론자의 태도를 취한다. 민족사의 비극을 소재로 삼든, 독재권력을 주제로 올리든 작가는 시종 냉소적인 양비론자의 시각으로 초월적 입장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좌익은 순진하고 우익은 이악스럽다는 식이다.
반쪽 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적당주의자, 김일성은 사람을 많이 죽인 민족반역자, 박헌영은 미군정을 연구하지 못한 무식자, 여운형은 이름 팔기를 좋아한 매명주의자, 조봉암은 대인이지만 변절자, 제주 4·3사태 등으로 동포를 많이 살해한 장택상이나 이범석은 아주 나쁜 사람, 이런 식으로 그의 인문학적인 가치관은 판관 포청천처럼 날선 도끼가 역사의 도마 위에서 번득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중반기까지 실록 대하소설로 분류되는 한국현대사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지리산> <산하> 등)은 시종 마키아벨리즘적인 가치관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승만에 대하여 가장 호의적이며 이념적인 밀착도를 지닌 작가는 이병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죄하면서 이렇게 역사의 법정으로 몰아세운다.
“들먹여볼까요? 보도연맹학살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방위군사건, 중석불사건, 부산에서의 개헌파동, 그리고 (중략) 통일할 능력도 없거니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성의도 없고 국민을 사랑할 줄도 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힌 것으로 한 등장인물은 말한다.(<산하>) 박헌영으로부터 “수백 년 묵은 여우”(이병주, <남로당>)라는 별명이 붙은 이승만은 왕이 될
태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하도 들어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미군정 안에서도 “파시즘보다도 한 2세기 쯤 먼저 태어났어야 할 인물”이란 평가와 함께 왕조를 지향하는 성향 때문에 “부르봉”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이승만/융통성 없는 김구/포용력 없는 박헌영”이라는 형용구처럼 8·15 직후 정치인 중 이승만만이 마키아벨리즘의 정치술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고 이병주는 평가한다.
“2차대전 이후 소련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조만간 공산국가로 될 것이고, 미국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자본제 국가가 되고 말 것”이라는 현실정치론(<지리산>)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8·15 당시에는 좌우익 최고 이론가들도 꼭 집어서 이처럼 단정 짓지 못했던 게 대미 인식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은 이병주가 한국전쟁 이후에 역사를 재점검하면서 낸 결과물이지만 8·15 직후에는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아, 동편 바다 왼-끝의 대륙에서 오는 벗이여!”라며, “이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연합군이야!/ 정의는, 아 정의는 아직도 우리들의 동지로구나”라고 감격하던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1945.8.20.)를 외쳤던 오장환 시인은 불과 넉 달 뒤인 12월에는 「가거라 벗이여- 흑인 병사 엘 에스 뿌라운에게」에서 “그대 내어친 발길/ 이 길을 똑바른 싸흠의 길로 듸듸라”라며 내친다. GHQ(도쿄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칭인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는 일본 점령 통치에서 폈던 정치적인 관용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점령 초기부터 반소 친미정권의 수립이란 제국주의적인 의도를 분명히 강압하며 민족독립사상을 탈색시키고 친일친미세력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기반을 조성했지만 그 마수의 정체를 몰랐거나 알고도 일말의 기대와 화해를 위해 유연했음을 숨길 수 없다.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기에 당 기관지 <해방일보>에서 미군정 비판기사가 처음 등장한 게 1946년 4월 2일이었다. 미군과 일본군 헌병의 차이는 키가 더 크다는 것뿐이라는 농담과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조선정판사사건(1946.5) 이후에야 공산당은 신전술(7월)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한반도 분할을 위한 국제정치쇼!)에 기대를 걸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했다. 당대의 최고 이론가의 하나였던 이강국은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조선인민보사 후생부. 1946년판을 범우사에서 2013. 재출간)에서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고, 하지 준장은 “실로 조선민족의 은인이며 민주주의의 사도”라고 했다. 백남운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조선민족의 진로>는 신건사, 1946,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은 민족문화연구소, 1947 출간된 것인데, 범우사에서 합쳐서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으로 2007 재출간)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를 ‘남조선 단독 조치설’과 결부시켜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박헌영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건 자신에 대한 체포령(1946.9.7.) 이후였고, 그는 여기에 정치적인 대안보다는 감정적인 조처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외신 기자들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러 왔다거나 러시아의 한반도 우위권을 막는게 미국의 목적이라는 설까지 흉흉한 가운데, 미 육군성의 해외기지 설치 예산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보도(1946.6)했는데도 여운형조차도 “풍설일 게고 불가능하도다”라고 논평할 정도로 태연한 척했다.
그러니 6·25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국(과 소련)을 정확하게 비판하며 민족적인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 논객은 오기영을 비롯한 민족적 양심세력과 젊은 소수 문학인들이었다.
하기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인정식의 번역으로 출간된 것이 1946년 3월이었는데, 이 명저는 레닌이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집필한 것으로 원제는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평이한 개설’이다. 미국이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와 태평양 일대 및 필리핀을 탈취하려는 노골적인 야욕으로 미서전쟁(1898)과, 영국이 남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야기한 남아전쟁(1899~1902)이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의 절실성을 제고한데다가, 제1차대전 전후의 제2인터네셔널 내부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 지지냐, 국제평화냐는 치열한 논쟁 등이 집필 배경이었다.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독일이 남의 나라 침략전쟁을 지지해도 좋다는 주장과, 어떤 침략전쟁도 반대라는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레닌은 제국주의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부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국내의 검열 때문에 주로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적 침략에 치중하여 독점은 식민지에서 형성된다는 입장에서 썼기에 이후 지구에서 횡행하고 있는 기상천외의 제국주의의 잔혹성과 교묘한 직간접적인 침략 양상은 피했다.
21세기의 레닌이 등장한다면 오늘의 신출귀몰하는 미 제국주의의 진상을 까발려 줄 수 있으려나?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 적지도 않건만 아직까지 미국의 정체를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만한 책 한 권 없다는 게 부끄럽다.
지금도 이런 판이니 당시야 어땠겠는가. 이런 갑갑한 정세였던 지라 작가 이병주는 아예 터놓고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끈덕진 나라다. 미국은 지길 싫어하는 나라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필요로 하는 나라다”(<지리산>)라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남한에서의 민족운동 전체를 비관적으로 썼다. 이 작가는 그런 미국에다 줄을 댄 이승만의 선견성을 적극 지지하는데, 그의 집권 이유로는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즘적인 원숙성에서 찾고 있다.
“정세를 이용하는 영리함”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용기”(<남로당>)를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는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의 참모습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이병주는 8·15 직후의 많은 암살사건조차도 “이승만 씨가 직접 조종한 것은 아닌” 다만 “과잉충성하는 놈들이 이승만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고 저지른 노릇”으로 관대하게 풀이(<산하>)해주며 그의 피 묻은 추악한 손을 씻어주고자 진력한다. 바로 이병주 소설의 한계다.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즘이 집권 중 단연 돋보이게 빛을 낸 장면으로 이병주는 농지개혁을 들었는데, <산하>는 이를 극명하게 묘사해준다.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조병옥 등과는 달리 이승만은 “농지개혁은 이떤 일이 있어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이유인즉 “공산당에게 농민을 선동하는 미끼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민당의 세력 기반(지주층)을 없애버리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대업을 위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조봉암을 앉혔는데, 그야말로 이 과업에는 적격이었을 터라 “조봉암이 빨갱이의 본색을 드러낼 요량”으로 임무를 멋지게 수행했다. 그것까지도 염두에 둔 이 늙은 여우는 농지개혁으로 인기를 얻을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치워버려야겠다는 결심도 동시”에 하는 것으로 이병주는 그려준다.
비판하며 지지한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 무렵 이병주 자신의 역사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서당, 1991)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전직 대통령을 다루면서, 「이승만 편-카리스마와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에서는 역사적인 거의 모든 과오를 되도록 비호, 변명해주는 입장이고, 「박정희 편-탓할 것이 있다면 그건 운명이다」에서는 안면몰수하고 사사건건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자세며, 「전두환 편-왜 그를 시궁창에서 끌어내야 하나」에서는 이병주의 모든 글 중에서 최하급의 졸문으로 전두환을 추켜대는데, 너무나 사리도 논리도 안 맞는 억지춘향이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1979년 10·26 이후의 과도기 때 이병주는 손세일의 주선으로 가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고, 김상현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났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인색했던 찬양을 전두환에게 풍성하게 나열하게 된 계기를 잡아준 건 이동화 송지영 윤길중 고정훈 신상초 선우휘 남계희 등 민주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이병주는 밝힌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이병주의 명성은 전두환 예찬으로 곤두박질 쳤다. 왜 이 작가가 이랬을까? 이병주의 아들 이권기 교수는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해서 전두환을 빗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점만으로는 뭔가 모자란다.
더구나 <전두환 회고록>(전3권, 자작나무숲, 2017)에는 이병주에 대한 언급이 장황하게 나오는데, 그 흑막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미궁이지만 설상가상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병주를 높이 평가하고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까닭은 박정희 신화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재미있는 기록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동시대의 독립운동가인 김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가장 인색할 지경인데, 이건 필시 학병으로 중국 체험자로서의 감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학병으로 중국 대륙 체험을 한 이병주로서는 상하이 임정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들었을 터지만, 이승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김구와 비교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박헌영과 대비시키기를 즐겼다.
박헌영에 대한 이병주의 입장은 너무나 단호하고 신랄하다. 영웅이기엔 “미학이 방해를 하는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수준을 넘어 냉대의 시각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의 항일경력에 대해서는 이승만 노선의 지지자인 이병주조차도 “공산당이 일제와 싸운 그 공적은 박당수, 아니 박헌영 선생이 몸소 증명하고 있지 않소”라는 이승만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냉대는 여전하다.
작가는 그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정치적인 노회함과 박헌영의 얕은 술수를 대비시키면서 모스크바 삼상회담 문제를 둘러싸고 만났던 두 사람을 “늙은 교사 앞에 앉은 젊은 학생”으로 비유한다.(<남로당>) 그러면서 “한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가장 겁내고” 있던 이승만이 박헌영과 당분간 밀월관계를 가질까도 고려했다가 실망, “불쌍한 인간! 감옥에서 자기 똥을 먹기까지 하며 양광(佯狂:거짓으로 미친 체함)을 부렸다더니 기껏 지능이 그 꼴밖에 되지 못하는군”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내려졌다고 묘사한다. 이병주가 박헌영을 유일하게 옹호한 대목은 그가 미제의 간첩은 아니라고 한 반북적인 주장뿐이었다.
이병주가 그나마도 호의적으로 그린 인물은 암살당한 이후의 여운형이다.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 남북을 털어놓고 투표로써 하나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될 기회가 있기만 하면 여운형이 결정적인 다수표로써 선출될 것이란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남로당>)(다음호에 계속)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4월 25일 오전 0시 5분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
종했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고인은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고인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동일방직사건대책위원회 위원장,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반대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2년 충남 공주군 유구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9년 사제로 서품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63년 뒤늦게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다. 2008년 2월 별세한 조문기 이사장을 이어 2008년 7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지내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이후 친일수구세력의 준동과 공격을 막아내는 등 역사정의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김 몬시뇰은 2018년 12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을 비롯해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역정(歷程)을 담았다.
정부는 ‘대한민국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유신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인천 서구 당하동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연구소는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을 2019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하여 올 4월 17일에 종료하였다. 객원연구자로 참가한 조재곤 교수, 김도훈 교수와 소내 조세열 상임이사와 이순우 책임연구원 등 9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다.
작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경기도에서 현재까지 향유되고 있는 무·유형의 문화 속 친일잔재를 체계적으로 수집, 기록, 관리하여 지속적인 연구 교육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의도하에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간 조사연구용역 사업은 착수보고 후 중간보고회, 자문회의 등을 거쳐 2020년 4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병행하며 일제잔재를 조사, 수집하였으며 기존의 잔재를 찾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원, 안성의 일제식 지명 존속이나 각급 학교 교표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는 등 새로운 성과도 일궈냈다.
1905년 러·일전쟁기부터 1945년 해방 전후기를 시간적 범위로 설정하고, 공간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기도 한정하여 유·무형의 친일문화잔재를 조사 연구하였다.
연구 보고서는 친일문화잔재 이상의 카테고리로 “일제잔재”의 개념 정리, 친일 인물과 문화계에 남겨진 그들의 행적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는 기념비, 송덕비, 기념탑, 동상 등의 기념물 및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그 뒤로 친일인물이 작사·작곡한 교가와 교표에 남겨진 일제 잔재 등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일본식으로 변경된 지명과 특히 “영동(榮洞: 일제지명 榮町)”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수원과 안성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해외의 친일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일제잔재의 청산 전망과 과제를 언급한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은 일상생활에까지 깊숙하게 뿌리박혀 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어 청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수조사의 필요성을 제시하였고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의 기초를 다졌으며, 더 나아가 시민의 역사의식을 제고할 수있는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3‧1운동 101주년인 올해 우리나라 거대 두 신문사가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5일 100주년 특집호 표지에서 “조선일보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거울”이었고, 조선일보는 “일제에 저항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고 자평했다. 다음 100년에도 “사실 보도라는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를 지키며 정론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도 실었다. 동아일보는 4월 1일 창간 100주년 사설을 통해 “무엇이 진짜 뉴스인지 궁금할 때면 눈을 들어 동아일보를 보라”고 말할수 있는 기준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과연 두 신문이 이렇게 당당하게 과거 100년에 이어 다음 100년의 존재가치를 말할만한 자격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적폐의 대명사, 살아 있는 언론권력으로 ‘검언유착’ ‘권언유착’을 일삼으며 한국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온 대표적인 신문이니 말이다. 100주년 기념사가 사과와 반성이 아닌 자화자찬 일색인 것은 놀랍지도 않다. 현재도 매 시각 쏟아내는 기사마다 의혹만 부풀리고, 갈등을 부추겨 정치쟁점화하고, 인신공격에 인격살인도 서슴지 않으며, 사실 왜곡을 확대 재생산해 독자들의 비판적 독해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진실은 주장에 갇히고 정의는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는 일들이 최근에 더욱 자주 목격된다. 조선‧동아 두 신문은 반민주적 반인권적 언론일 뿐 아니라 반역사적 기득권을 토대로 여전히 반역사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뉴스타파 <조동(朝東)100년 : 두 신문 이야기>
동아투위‧조선투위 등 57개 언론‧시민단체는 이미 작년 9월 ‘조선 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을 꾸렸다.
적폐언론 청산을 위해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발간, ‘조선일보100년’ 전시,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우리 연구소도 지난 100년 간 두 신문사가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은폐한 오욕의 역사를 되짚으며 그들 자신이 써낸 기사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밝히는 두 가지 기획을 준비했다.
첫 번째는 뉴스타파와 공동 기획한 ‘조동(朝東)100년: 두 신문 이야기’이다. 조선일보 창간일인 3월 5일부터 동아일보 창간일인 4월 1일까지 총 13편의 연속보도 가운데 연구소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6편의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우리 연구소와 역사디자인연구소, 뉴스타파는 두 신문의 창간부터 1940년 8월 폐간까지 기사를 시기별로 분석하고, 그 가운데 특히 1937년 이후 일제 침략전쟁과 총동원체제에 두 신문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 추적했다.
두 번째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 준비하는 기획전시이다. 두 신문사는 100주년 기념사에 여전히 ‘민족지’라는 타이틀을 자신의 대표적인 수식어로 내걸었다. 1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 그들이 민족사에 기여한 ‘자랑거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두 신문사는 1937년 이후 노골적인 일제 협력과 침략전쟁 미화에 지면을 할애한 전쟁부역언론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땅히 해방 후 철저히 청산되었어야 할 언론사였고, 사주들이었다. 그런데도 두 신문사는 부역의 역사를 은폐하고 온전히 ‘민족지’로 다시 포장해 과거를 날조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번 기획전시는 그들이 덧발라온 분칠을 벗겨내고 자신들이 내뱉은 기사를 통해 민족을 배반한 거짓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다.
기획전시는 경술국치 110년을 맞는 8월, 그것도 일제의 폐간 농간에 순응해 마지막 신문을 발행한 8월 11일에 개막할 예정이다. 개막을 앞두고 앞으로 3회에 걸쳐 <민족사랑> 지면을 통해 기획전의 일부 내용을 미리 소개한다.
누가 ‘민족지’인가
이번 호에 소개할 첫 번째 주제는 “과연 두 신문은 민족지인가”이다. 창간 65주년을 맞았던 1985년, 두 신문은 꽤 떠들썩하게 상대방 신문을 “친일신문”으로 공격한 적이 있다. 이른바 ‘민족지 논쟁’으로 불린 이 사태를 기억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모르는 분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아 구축한(!) 디지털아카이브에서 관련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85년 4월 1일자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이라고 첫 포문을 열자, 조선일보는 4월 14일자 사설에서 “반일, 친일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 사보 「애독자 제현에게 알려 드립니다-동아‧조선 창간과 ‘민족지’ 시비에 대하여」에서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공세에 나서 4월 19일자 사보 「우리의 입장-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에서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 동맹군인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신문이 동아일보”라며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 초대 사장”이었다고 반격했다. 또한 “민족사의 내측에 숨겨있던 친일 계보는 속속들이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갔다. 참으로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가 무려 35년 전에 ‘친일청산’을 주장했었다니 말이다. 물론 ‘민족지논쟁’ 이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독재를 찬양하고 민주화에 역행하는 부역언론의 길을 걸었다. 특히 친일청산을 국론분열・친북용공으로 몰아세우는데에는 ‘일심동체’였다.
항일 민족 언론의 부활, 조선독립신문
그렇다면 이들이 자인한대로 두 신문사는 과연 얼마만큼 ‘친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는 군대와 각종 식민지 악법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을 뿐 아니라, 모든 언로를 차단해 조선인들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일제 무단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문명과 번영을 기약한 “한일병합”은 무력 탄압과 차별로 점철된 “강점”이자 “병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제 강점 후 9년 만인 1919년, ‘조선의 독립과 자주민임’을 외치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터져 나온 만세운동의 열기는 일제의 탄압에도 반년 넘게 지속됐다. 혁명적 에너지는 이름 모를 청년 학생들이 한 장 한 장 만들어 배포한 지하신문들이 끌어 올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일제 강점과 동시에 모든 민족 언론이 폐간됐지만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언론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빨리 만들어진 지하신문은 바로 독립선언서와 함께 3월 1일부터 배포된 <조선독립신문>이다. 신문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호외 형태의 단면 인쇄지였지만, 항일 민족언론의 부활을 상징하는 신호탄이었다. <조선독립신문> 외에도 <국민회보> <신조선신문> <자유민보> <국민신보> <국민신문> <진민보> 등 약 30여 종의 지하신문이 1919년 내내 전국에서 발행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제 당국에 의해 ‘적발’돼 우리는 그 실체를 알 뿐이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 1919.3.1(연세대학교이승만연구원 소장) 최초로 발간된 지하신문. 초기 천도교 계열의 신문 발행 관계자들이 모두 체포되자 9호부터는 이름 모를 후계자들이 발행을 이어갔다. 현재까지 43호와 호외, 국치기념호가 제작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고 이 신문이 정확하게 몇 호까지 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출판물 차압의 건 보고 통보」 1919.4.23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가 출판법 위반으로 발매·배포를 금지해 압수 처분한 독립선언서와 지하신문의 목록들이다. 이 압수목록은 3•1운동 당시 얼마나 다양한 지하신문이 발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발행된 항일 지하신문들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3‧1운동을 축소‧왜곡 보도하자 이에 맞서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고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 <진민보>에 실린 신문의 역할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바라는 민족 언론의 사명 그 자체였다.
“우리의 민족적 운동을 한껏 옹호하라, 우리의 운동이 안팎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신속하게 보
도하라,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나아가더라도 소리만은 벽력같이 크게 질러라.” 항일지하신문은 조선총독부뿐만 아니라 3‧1운동을 폄훼하고 비난하는 친일파에 대해서도 질책했다.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국적 이완용·송병준을 비롯해 일제 주구가 된 친일경찰과 헌병보조원들, 허위‧왜곡보도를 일삼았던 매일신보 기자 등 다양한 직업군의 친일파들을 비판했다. 또한 조선 독립을 부정하고 식민통치를 인정하며 자치를 주장하던 친일파에 대한 비판도 신랄했다. 대표적인 자치론자인 민원식에 대해 <조선독립신문>은 “부여족의 면피(面皮)로서 일본의 혼을 가졌다. 인류의 골격으로서 짐승의 심장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굴뚝을 만들어야
이렇게 3‧1운동의 의의를 전파하고 혁명운동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조선인들의 자발적 언론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 당국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을 미리 막지 못한 이유를 조선인의 민심을 파악할 조선인 언론의 부재에서 찾았다. 지하신문을 압수하고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제는 신문발행을 허가해 조선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이를 통해 민심을 살피거나 여론 조작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와 함께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당시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기 위한 분출구, 즉 ‘굴뚝’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조선어신문의 허용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의 열기는 지하신문을 통해 조선 민중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민족 언론의 부활을 이끌었으나 총독부가 정작 신문 발행을 허가한 대상은 친일파들이었다. 조선인 신문 발행 곧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문화정치’의 상징과 같은 조치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총독부가 발행 허가한 신문―조선일보 시사신문 동아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신문은 민원식이 주도한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가 주도한 조선일보, 그리고 조선일보가 지적한대로 토착귀족 지주세력과 기성 친일언론인의 합작인 동아일보 세 신문뿐이었다. 앞서 지하신문들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민원식이 ‘동화주의’를 내걸고 참정권‧자치운동을 벌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은, 민원식이 항일투사 양근환에게 암살된 후 자연스럽게 폐간됐다. 이후 조선‧동아 두 신문이 조선의 언론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허가를 받을 때 비정치적인 ‘실업계 신문’을 표방했다. 이를 주도한 면면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시사신문과 함께 우군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인적구성을 가졌다.
조선일보 창간을 주도한 세력이 대정친목회였다는 사실은 조선일보 사사에도 간간히 밝혔지만, 발기인 39명 중 32명이 대정친목회 회원이자 임원이라는 것으로 봐도 분명하게 실체를 알 수있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전직 관료와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이 망라돼 내선융화운동을 주도한 조선 최대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3․1운동 직후 ‘자력으로 독립은 불가능하다’ ‘조선인은 실력을 길러야한다’며 일본 제국의 통치에 잘 따라서 산업 발달과 문화 향상을 이룰 것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주도한 조선일보는 초기부터 ‘친일신문’으로 민중의 배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일보는 극단적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창간 초기 30건의 압수, 23회의 발매 반포금지, 2회의 정간을 받을 정도로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당대 최대의 친일단체가 가장 탄압받는 ‘저항신문’을 발행한 꼴이다. 이에 대해 장신 박사는 <개벽> 제37호의 기사를 인용하며 그들이 ‘항일’ 기사를 게재한 이유는 경영난 타개를 위한 ‘판매 확장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동경유학생 등의 동아일보 「성토문」
그러면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 동아일보는 순항했을까. 최근 연구소는 1924년 일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의 원문을 입수했고 이번 전시회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 성토문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에서 발단이 됐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는 일제에 타협적인 정치운동을 주장한 이광수의 사설을 실었다. 즉각 동아일보에 대한 비난과 배척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멀리 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11개 단체도 ‘성토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성토문에는 동아일보를 향한 민중의 배신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아일보를 둘러싼 논란은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 사회까지 전파됐다. 민족지로서 자임하며 출발한 동아일보는 창간 4년 만에 김성수 일가에 장악당해 사익을 추구하는 언론사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된 신문이 아니라, ‘정론의 길’을 걷는 제대로 된 신문이다. 이들의 출발이 ‘친일’에 오랜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전시에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만남을 다시 꿈꾼다며 글을 맺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한일 두 나라가 갈등하면 몇 배가 더 아프고 두 나라가 잘 지내면 평안하게 꽃피는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들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일제시대 살길을 찾아 건너온 동포들의 후손으로부터 뉴카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선통신사가 머문 淸見寺를 찾아가는 날도 이런 다양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도 함께 했다.
조선통신사는 처음엔 두 나라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측에선 조선포로 귀환, 일본정세 파악 등이었고 일본측에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새로운 외교방침,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문화교류로 확대 발전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에 많이 전해졌고 일본 문화도 조선에 전해지는 무지개 가교였다. 마침 그날 여행에서 출출할 때 먹으려고 고구마를 삶아 가져갔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작물로 많은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구황작물이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진문물 중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속의 의술이 일본에 전해져 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귀한 역할을 했다. 그 귀한 역할을 이 시대 재일동포에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사회를 일본인들과 함께 만들며 공생하는 재일동포들, 그러나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협정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고 한편 조국의 버림 속에서 살아왔다.
몇 겹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동포들이 이제 노령을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동의보감’이 이 시대 재일동포들에게 빛과 힘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으로 끝난 한일정상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그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작년 오오타민단에서 역사탐방을 간 ‘고마진자(高麗神社)’ 쯤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곳은 고대 양국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곳이다.
꽁꽁 묶인 한일관계가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내년의 역사탐방은 좀더 재일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오타민단 지부에 전한다.
• 이 감상문은 오오타민단 소식지 제85호(2020.3.27.)에 간략히 실렸다.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침략전쟁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정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책임의 부정은 법과 정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온 문명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강제동원에 관한 진실을 두고 “조총련계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낳은 “빨갱이” 망령과 냉전적 사고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절멸의 대상인 적으로 설정하면서 역사전쟁을 운운하고 있다.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Specters of Marx(마르크스의 유령들), xviii).
2.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은폐이자 역사범죄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무리한 주장의 기반이 어딘지도 주목된다. 이들의 주장은 특히 2012년에 나온 강제동원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법적폐 세력의 주장과 판박이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일본의 가해기업인 신일본제철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으로서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즉각 이 판결에 반발하였고 한일 간의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나왔고 대법원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협정에 위배된 것이라며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닮아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저자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기득권을 지켜보고자 하는 세력의 매니페스토(manifesto)임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슬픈 인생에서 나온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반일 종족주의>란 책을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부정 문제에 대하여 전 세계적인 대응노력이 주목된다. 유대인에게 자행된 홀로코스트나 나치범죄는 물론이고 아르메니아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나 반인도적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형사입법과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 식민지배 시기 동안 있었던 학살, 수탈 등 식민지범죄에 대한 관심과 탈식민주의 요구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커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각종 과거사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도 많이 보이고 있다.
대일 과거사문제 역시 단박에 청산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가 적용되어 단죄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중대한 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이른바 불처벌(impunity) 문제에 대한 고민과 불처벌의 현실 속에서 확산되는 역사부정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 <반일 종족주의>에는 민족이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이른바 주류적 역사서술과 피해자운동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무슨 말인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이 말은 물질주의와 거짓말을 토템으로 하는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20-21쪽). 이 샤머니즘의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고 한다.
‘종족’(tribe 또는 ethnic group)이란 말을 현재와 “지난 60년간의 정신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하나의 분석개념으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엄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를 통하여 분석 단위로서 ‘민족’이란 개념을 비하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이러한 호명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 역시 민족이란 집단 현상을 도외시한 원자론적 서사와 감상의 나열이 그치고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종족주의의 차이를 말하지도 못하는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은 일제 강점이전의 조선이 갖는 국가성과 근대지향을 부정하려는 기획을 드러낸다.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가지는 ‘네이션(nation)’으로서 조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현대 한국의 네이션을 종족으로 대체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통해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류적 역사인식을 뒤틀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도 서구에서 만들어진 보편적인 범주로서 네이션은 현실로서 있었고 이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며 부단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실증의 근거로 제시하는 문서나 수치들은 바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 속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사료비판도 없다. 결국 이들은 문서작성자의 세계관에 동조한 나머지 일제의 식민지배는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곧 일제의 통치를 미화하려했던 식민사관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4. <반일 종족주의>에는 일제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없다
이 책은 또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비판이 없이 마치 강제동원과 ‘위안부’의 역사를 신화인양 부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비판하며 인종주의와 결부된 “종족적 민족주의”를 말한 바 있다. 이들이 한국사회를 비판하며 제시한 종족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제국주의 일본의 민족주의 비판에 걸맞다. 반일 종족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일제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제에 의한 “주권강탈”(42쪽)을 말하긴 한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하여 일본의 일부, 즉 자기나라로 만들었지만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모순은 해명되지 않는다. 일제의 통치가 잘된 일이었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에 바쁘다. 명색은 한일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현실은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총독에 의한 통치였다는 점, 조선총독은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
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칫하기까지 하
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 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
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
천황 이외에 어떠한 법적 통제를 받지 않았고 군대에 의해서만 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 식민지 조선에 실시한 법이라는 것은 천황제 아래 삼권을 가진 총독의 의사에 좌우되는 전제적인 것이었고, 그 마저도 일본 내지의 법과 별개의 이원적 체계로서 관료체제를 통제하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종주국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법이었다는 점, 일제의 식민지배에 법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은 통치술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 이러한 법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공백을 낳았고 오늘날까지 정의를 갈구하는 피해자들의 외침으로 현재화되고 있다는 점, 병합은 결국 영토의 통합 즉 일제의 영토 확장이었지 국민간의 통합이나 EU식 지역통합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조직적인 민족차별을 낳고 끝내 죽음의 강제동원으로 주민들을 내몰았다는 점, 병합과 식민통치 방식 사이의 모순은 결국 민족자결의 요구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해방’이라는 것은 민족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독립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권회복을 말할 여지가 없이 1948년에 건국했다는 스토리와 연결된다. 이는 바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여주고 지금도 일본의 우익이 견지하고 있는 역사관, 즉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이 분리독립하게 되었다는 역사서술의 한국판이다.
5. 청구권문제와 강제동원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한일 청구권문제와 관련하여 주익종은 특히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와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를 “팩트”라고 주장한다(115쪽). 그가 얘기하는 팩트라는 것이 사실 또는 진실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 주장들은 다 사실이 아니다. 먼저 “별로” 없었는지 있었는지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이는 말할 수 없는 명제이다. 별로였는지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사실 여부 또는 진위문제가 아닌 판단과 의견의 문제이다. 진실은 청구할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는 것, 별로 없었는지 여부에 대해 정확한 산정을 거친 끝에 3억불 해당의 무상공여가 된 것도 아니라는 점, 그 가운데 ‘위안부’문제는 한일회담에서 거론조차 안 되었고 따라서 “별로”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 여부 문제는 협정의 해석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규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끝났다’는 것도 팩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완전히 끝났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한일 정부가 입장 대립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이 어떻게 풀려갈지 지켜봐야 아는 문제이다. 현재진행형의 얘기를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지 잘 따져볼 문제다.
현재 판결을 받긴 하였지만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한 이들의 입장도 주목된다. 청구권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이 언급하고 있는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서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보상금”이 언급되긴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보상금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이 포함되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이 두 나라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주장해야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2018년의 대법원 판결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강제동원문제에 관한 주요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협정 규정에 대한 해석이고 규범적 주장이지 단순한 팩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 상대방도 동의하거나 양쪽이 따라야하는 유권적인 해석이 나와야 정리될 문제인 것이다. ‘끝났다’는 논리는 피해자들에게 윽박지르며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는 주익종(또는 아베 식의)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징용 노무자의 정신적 피해는 당초부터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126쪽)이라는 주장으로 이끈다.
그가 무엇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의 하나 그의 주장대로 청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법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에서 권리의 포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권리를 포기한다면 명확하게 포기한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6. 식민배상문제도 남아있다
주익종은 또 “국제법, 국제관계에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한국이 배상 받으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26쪽)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식민배상은 없었다, 즉 사실에 관한 서술을 하며 현실론을 전개하고 있다. 쉽게 쓰려다 보니 배상의 선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례가 없었다고 하여 그에 관한 “국제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사실문제 같아 보이지만 규범적 판단을 내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례가 없었다고 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은 선례를 만들어 법을 확인하는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규범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필자들이 일제하에서 재산권이 보장되었음의 근거로 드는 것이 조선민사령이다. 이는 일본의 민법을 총독의 명령에 의해 조선에 빌려 썼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현재 한국의 민법처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였음이 팩트이다. 이러한 손해배상문제를 다루는 것이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상문제를 다룰 법적 여지는 식민체제하에서도 있었던 것이지만 실현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일본의 패전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건 1965년 한일협정에서건 식민지배하에서의 배상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지금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은 아니다.2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식민배상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청구권협정이 재산문제를 해결한 “최선의 합의”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일본과의 과거사가 청산되었고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127쪽).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인 조류는 오히려 식민지배와 식민지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말고도 이탈리아와 리비아, 영국과 케냐 및 인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일과 나미비아, 프랑스와 알제리, 스페인과 멕시코, 카리브해 국가들과 구 종주국들 사이에 식민 지배 아래 발생한 각종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요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성과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19년 3월 26일에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유럽의회는 “유럽의 식민주의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는 부정의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역사를 유럽연합 기관들과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통과 시키기도 했다. 청구권협정의 진실은 협정으로 전쟁배상도 식민배상도 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있다.
2 116쪽의 표에서는 대일 강화조약 제14조의 내용을 (a) 일본인 재산몰수와 연합국의 추가배상 협상에 관한 권리와 (b) 연합국과 그 국민의 청구권 포기로 요약하고 있는데 제14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즉 제14조는 첫머리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전쟁 중에 일본에 의해 야기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배상금(reparations)을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고 하여 명확하게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원칙을 확인하고 있다. 청구권협정에는 이와 유사한 어떤 표현도 쓰여 있지 않고 따라서 배상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식민지하의 범죄와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로 초점이된 강제동원문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해결되어야할 것이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
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7. 맺으며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강제동원과 ‘위안부’문제와 같이 오늘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에 있어서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무엇이 팩트인가로 이슈를 단순화하면서 사실과 법의 문제를 뒤섞어놓고 그릇된 의견과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주 현실참여적인 책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한국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또 다른 최종심급 역할을 자임한다. 판례에 대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법원리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러한 법이해가 올바른지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와 법 또는 정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법의 문제는 법이 어느 사건이나 시기에 작용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배제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팩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법도 역사속에서 같이 흐르며 힘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행위를 합법이라거나 불법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팩트이다. 과거에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법적 의미를 가지는 팩트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필요에 따른 법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말을 다시 빌리면 언제나 이미 현재화될 가능성을 가진 법 또는 정의라는 유령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배회하고 있다. 과거의 법을 화석처럼 현재의 법과 단절된것으로 사유하지 않는 가운데 한일회담에서 그리고 청구권협정의 문구에서 배제된 이들의 희망을 쓰는 역사 서술을 기대해본다. (<월간 순국> 202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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