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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열전, 화제의 신간으로 독자들의 호응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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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열전, 화제의 신간으로 독자들의 호응 높아

admin | 금, 2021/08/27- 02:48

[초점]

친일파 열전, 화제의 신간으로 독자들의 호응 높아

• 방학진 기획실장

연구소 창립 30주 년 특별 기획으로 역 사만화 <친일파 열전> 이 나왔다. 지난해 8 월 <35년>(전 7권) 을 완간한 박시백 화 백이 정확히 1년 만 에 친일파만을 다룬 <친일파 열전>을 펴 낸 것이다. 올초 연구 소의 제안을 받은 박 시백 화백이 다른 작 업을 일시 중지하고 반년 동안 <친일파 열전> 작업에 집중한 결과이다. 박 화백은 1984년 고 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전두환 독재에 맞 서 1986년 건대 항쟁과 1988년 미문화원 점거 투쟁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후 박재동 화백의 뒤를 이어 <한겨레>에서 만평 을 그렸고 2001년 퇴사 후 12년 동안 <조선왕조 실록> 전 20권 완간해 이름을 알렸다. 2020년에 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35년> 전7권을 완간하 여 제14회 임종국상(문화부문)을 수상하였다. 8월 9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출판 보 고회에서 박시백 화백은 “친일파들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한 상황에서 ‘친일청산’이란 무엇일 까. 그들의 친일행위 자체를 제대로 알리는 것 이 이 시대의 친일청산이 아닐까 싶다. <친일 파 열전>이 기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라 고 소회를 밝혔다. <친일파 열전>은 <35>년의 후속작 성격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중 연구소 연구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해방 이후까지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각 분야의 친일파 153명의 행적을 담았다. 정식 출간 전 예약 판매 때부터 예스24, 알라딘 등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역사 부문 1위에 오르더니 정식 출간 이후 2주 만에 예스24 종합 5위, 알라딘 종합 4위를 기록했고 광복절을 즈음해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박시백 화백과 한상준 비아북출판사 대표는 8월 23일 연구소를 방문해 인세 일부를 연구소에 기부했다. 한편 출간 직후부터 연구소 후원회원들은 격려와 함께 학교, 공공도서관 등에 <친일파 열전>을 다량 주문하며 성원을 보내주고 있다. 특히 40~50대가 전체 구매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것에 비추어 학생을 둔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읽기 위해 구입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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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3. 사마천으로서의 이병주

이병주를 작가가 되도록 만든 건 투옥인데, 감방에서 사마천을 만난 계기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사마천-사기의 세계????라고 밝힌다. 필시 일본평론사(1943)나 문예춘추사(1959)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연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두 번째로 이병주가 역사와 만난 건 2차대전 중 일본 군속으로 끌려가 전몰한 동포들의 명단이 발표되던 시기인 1966년 7월, 마르크 블로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이 인물에 감동받아 「변명」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여섯 아이의 아버지며 나이가 이미 53세를 넘은 블로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인 신분으로 일개 대위로서 자진 군에 입대했다. 불란서가 항복한 뒤 곧 항독운동에 참가, 리옹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6월 16일 나치스의 흉탄을 맞고 생을 마쳤다.((<마술사>, 한길사, 81)
이 작품도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정작 이병주에게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심어준 것은 역시 사마천이지만, 누가 봐도 사마천이 되기에 그는 체질적으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현실적인 데다 두뇌회전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초기에 그는 역사 대하소설을 쓰면서 정치사적으로는 이미 권력을 쥔 세력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치사적인 기득권 세력을 인정하면서 이를 논증해 나가는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했으며, 그 일련의 작품들은 마키아벨리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계열의 작품은 냉전체제의 반공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집권층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즐겨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고 일생을 마키아벨리즘으로 허송하기에는 그래도 진실을 보며 희생도 수용하라는 마르크 블로크의 충고는 물론 사마천의 영혼의 외침을 그는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사마천의 사관으로서의 글쓰기로 돌아선 뒤부터의 작품은 권력의 피해자거나 수난자에 초점을 맞추며, 권력자일 경우에는 비판적 관점이 주류를 형성하게 배치한다.
어림 잡아보면 사마천의 관점으로 이병주가 선회한 것은 1982년 <그해 5월>부터가 아닐까싶다. 바로 박정희 피살(1979.10.26.) 이후부터 이병주는 참아왔던 비판의 해부도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게 옳은 것이다.
국가관이나 민족국가의 정통성보다는 현실정치적인 접근과 통치력의 실세를 중시했던 마키아벨리즘적인 단계의 시각과는 달리 사마천의 단계에서는 통치권력의 집행이 얼마나 역사적인 당위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시각으로 분석해낸다. 물론 이런 분석의 가치기준은 민족사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그해 5월>과 <‘그’를 버린 여인> 등을 들 수 있다. 현대사에 등장했던 역대 집권세력과 그 비판세력과 진보세력을 민족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싸잡아 야유에 가까운 비판을 가한 게 전반기의 마키아벨리즘 계열의 소설이었다면, 후반기 작품은 균형감각을 갖추고서 진지하게 논구해 들어가는 보고문학적 요소가 더 강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전기의 작품이 문학적인 형상화와 구성이 치밀한 데 비하여 후기 작품은 실록적 요소가 더 강화되는 한편 허구적인 사건은 거의 사라지며, 정론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 작가의 연륜문제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의 정치적인 이해뿐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과거사 청산의 기초자료는 물론이고 처세술적인 읽을거리로도 손색이 없다고 평할 만하다.
<그해 5월>은 이병주의 현대사 5부 연작의 마지막 편에 속한다. ①일제 식민 말기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회색적으로 방황하는 지식인을 다룬 ????관부연락선????, ②같은 기간을 다루되 좌우의 이념적 변별성을 뚜렷하게 경계선으로 삼아 좌익 투사들의 입을 빌려 좌익을 비판하도록 만드는 빨치산 이야기인 <지리산>, ③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사건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집권과정을 합리화한 <산하>, ④분파와 좌절로 얼룩진 것으로 평가절하한 좌익운동사의 르포 격인 <실록 남로당>까지가 마키아벨리즘적인 이병주의 현대사 연작들이다.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처음
으로 발효시킨 소설이 현대사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⑤<그해 5월>이다. 이 소설은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개막된 드라마가 장장 18년을 끌다가 1979년 10월 26일 밤, 이윽고 그 막을 내렸다.
”라는 주인공 이사마가 1979년 10월 27일 일기장에 적은 기록처럼 박정희 통치 만 18년을 탐구대상으로 삼는다.
<사기>처럼 기전체(紀傳體)로 각종 사료와 논평을 곁들여 엮는 형식을 취한 이 소설은 차라리 ‘5·16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한 우수한 관찰자의 기초자료 모음집’ 같다.
여기서 연작 5부의 보너스나 부록 같은 작품 <‘그’를 버린 여인>이다. 이 소설은 박정희에게 두 번째 여인에 해당하는 특이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간 박정희의 역사적인 삽화를 다루고 있다. 이병주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는 이 연인을 만났기 때문에 김재규가 “박정희의 가슴팍과 머리에다 대고 탄환을 쏘아넣은 사실”이란 점이라고 밝힌다.
“‘그’를 버린 그 여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결단에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라는 게 작가의 인과응보식 역사의 변증법이다.

4. 이병주와 박정희의 첫 만남

부산의 명 일간지였던 <국제신보>의 상임논설위원으로 이병주가 영입(1958.11.5.)된 것은 전임자인 명 주필 황용주(黃龍珠)가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떠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영입과정에 대해서는 ① 이병주 자신은 ????국제신보????의 김형두 사장이 황용주에 대항할 만한 사람을 구하다가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고 했고, ② 김형두의 회고로는 인물을 찾다가 “감탄을 불금케 했던 인물로 진주농고의 후배이면서 전 주필 H(황용주) 씨와는 동창 간으로 마산대학에 재직중인 사람”에다 “천하호걸이며 재사이자 소설가인 나림 이병주”(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 시대> 까치글방, 2013, 301쪽)였다고 했는데, 두 주장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병주는 희대의 명문으로 <국제신보> 주필(1959.7.1.)에 이어 편집국장 겸 주필(1959.9.25.)로
부산지역뿐이 아니라 전국적인 명 논설가로 명망을 누렸다. 이승만 독재시절이라 시국은 답답했으나 사설은 끗발 나가던 이 시기에 부산군수기자사령부 사령관(1960.1.21.~7.30 전라도 제1관구 사령관으로 전보)이었던 박정희를 이병주는 처음 만났다. 신도성 도지사가 경남도청 의회 회의실에서 기관장 회의를 소집했던 자리였는데, 이병주는 <국제신보> 사장대리로 참석했던 것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얼마 전 여윈 몸집으로 작달막한 군인이 육군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색안경을 쓰고 가죽으로 된 말채찍을 든 채 회의장에 들어섰다. 도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도지사가 지정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회의장을 둘러보는 듯 하더니 획 하고 나가버렸다.
회의가 시작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호기심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도지사에게 물어보았다. 그 군인이 누구며 무슨 까닭으로 이곳까지 왔다가 불참하고 돌아간 이유가 뭐냐고.
신도성이 쓴 웃음을 띠고 한 대답을 요약하면, 그는 2관구 사령관 박정희 소장인데 자리가 도지사석과는 먼 말석인 것이 불만이어서 화를 내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 書堂, 1991, 90쪽. 이하 모든 인용문은 이 책) 그 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고조되자 4월 10일 전국비상계엄령이 내렸고,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맡은 박정희가 지역 기관장들을 소집해서 이병주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부산일보> 주필(황용주)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장군 곁으로 다가
가서 “아, 너 복세이키 아니야?”라고 하니 박 장군은 “음, 너 코류슈구나” 하며 서로 손을 붙들고 얘기를 주고받다가 황용주가 이병주를 불러 “이 사람이 박정희 장군이다. 나완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지. 그동안 소식을 몰랐더니만 20수 년 만에 만났구먼”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황용주는 역시 대구사범 동창으로 의사인 조증출과 함께 이병주도 동석시켜 어울렸는데,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박은 “이 주필, 이래 갖고 나라가 되겠소”라며, “이놈저놈 모두 썩어 빠졌어” “학생이면 데모를 해야지. 이왕 할 바엔 열심히 해야지”, “도대체 오열(간첩)이란 게 뭣고. 오열이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자유당이 필요로 하겠다 싶으면 출동하는 모양이지? 국민을 편하게 할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사람 죽일 궁리만 하고 있으니 원!” 등등 “욕설과 비난을 섞은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이승만의 이름은 물론이고 어느 사람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입에 올리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4월혁명이 나자 박정희는 학생들이 쿠데타를 망쳤다고 투덜거렸다.
1960년 4월 27일자 <국제신보> 사설에 「이대통령의 비극! 그러나 조국의 운명과는 바꿀 수 없었다」라 하고는 그가 물러난 지금은 이승만의 공죄를 논할 시기 아니다, 학생들에 배척받는 이승만은 결코 적이 아니라며 동정론을 폈다. 물론 이병주가 쓴 글로 그의 한계가 엿보이는 내용이었다. 이걸 보면 나중 <지리산>과 <산하>, <남로당>에서 이승만을 추켜세운 이병주의 역사의식을 예단할 수 있다.
그 며칠 뒤 이병주가 황용주, 박정희와 만나자 박정희는 “두 주필의 사설을 읽었는데 황용주의 논단은 명쾌한데 이 주필의 논리는 석연하지 못하던데요. 아마 이 주필은 정이 너무 많은것 아닙니까?”라고 이승만에 동정적인 걸 따지고 들었다. 이에 이병주는 “밉기도 한 영감이었지만 막상 떠나겠다고 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대요. 그 기분이 논리를 흐리멍덩하게 했을 겁니다.”라고 변명하니, 박은 “그거 안 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4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게 필주(筆誅)를 가해야 해요”라고 단호했다. 이에 이병주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거론하며 변명했으나 박정희는 “독립운동 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응대했다.
이어 박정희가 일본 청년장교들의 반역사건(5·15, 2·26 두 사건)을 거론하자 황용주는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라고 단칼에 비판했다. 이에 박은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항의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황이 “고루한 생각”이라고 하자 박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가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등등으로 둘 사이의 논쟁은 이어졌다.

황 :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박 :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황 : 배워야 할 것은 기백이 아니고 도의감이다. 도의심의 뒷받침이 없는 기백은 야만이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3, 조선일보, 2001, 186~187쪽)

이 대화로 박정희의 역사의식이나 정치관과 민족관의 피상성과 밑천의 마각이 드러나고도 남는다. 그리고는 이내 5·16쿠데타가 닥쳤다. 쿠데타 직후 <국제신보>는 사설 「민주발전에의 획기적 대사업이 되도록 혁명군사위원회의 성의 있는 노력을 바란다」(1961.5.17.)로 군부의 행동을 환영했다. 마치 쿠데타 세력과 교감이라도 있었던 투라 해도 지나칠 건 없다. 그만큼 박정희-황용주-이병주 사이에는 주석에서 온갖 정치론을 다 펼쳤던 게 입증된 셈이다.
그 나흘 뒤 오후 5시, 경찰은 편집국에서 이병주를 연행했다. 경남도경 유치장에서 만난 이병주와 황용주는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자? 우리는 도의혁명을 하자고 했는데 반공혁명이 뭐꼬?”(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까치, 2013, 359쪽)라며 어리둥절했다.

5. 쿠데타 직후에 구속당한 이병주

여수순천 병란(1948) 때 군부 내의 남로계 관련자 명단을 넘겨줌으로써 극형을 모면한 트라우마가 박정희에게는 강하게 작용했다. 이 전력 때문에 5·16 직후 미국이 그의 사상을 의심하자 쿠데타 세력은 좌익, 혁신정당, 교원노조, 각종 노조 지도자, 보도연맹원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서적포, 1995)
그래서 4천여 명 구금, 608명 혁명검찰부 회부, 216명 기소, 190명 유죄판결을 내렸다. 자유당 때 사형언도자 중 미집행 백여 명은 일거에 처형시켰다.
“박정희는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적 의혹을 받자 민족일보의 조용수를 자신의 면죄부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김삼웅, <한국 현대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황용주는 한달 만에 풀려났으나 이병주는 ‘특수범죄처벌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기소됐다.
정당 사회단체 간부로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에게 10년 이상 사형이었던 이 법. 그런데 이병주가 뒤집어쓴 ‘교원노조 고문’ 직함이 기록도 증언도 없자 논설위원 3명을 더 연행했다.
한편 경찰 공작반에서는 앞잡이를 시켜 남로당 재건운동을 탐색 중 한 청년이 걸려들었다. 이런 것도 모른 채 이병주는 경찰이 내사 중인 바로 그 청년의 주례를 맡았는데, 결혼식은 1961년 5월 22일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일망타진해 남로당 재건 공범으로 엮을 계획이었는데 공작반의 내막을 모르던 다른 부서에서 하루 전인 21일 이병주를 신문사에서 덜컥 체포해버렸다.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병주는 필화로 내몰렸다. 연행된 동료 논설위원 중 변노섭(1930~2005)은 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원회 무임소 상임위원으로 날카로운 논설 필자였기에 이병주와 공범으로 엮였다.(<그해 5월>, 한길사) “그런데 술친구였던 박 대통령이 자기를 2년 7개월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잡혔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원한이 사무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에는 예를 들어 <‘그’를 버린 여인>에서처럼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
다. ”(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하우스. 2014, 54쪽)
바로 이병주가 마키아벨리에서 사마천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관으로 쓴 두 편의 소설은 우리 시대 정치소설로서는 최고봉을 형성하고 있다.
(2015년 이병주 심포지엄 발제 및 여러 강연을 간추려 재정리한 글로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에 수록)

화, 2020/05/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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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어떤 인연 –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에 부쳐

김경현 후원회원(행정안전부 전문위원)

 

2001년 8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김경현 후원회원은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이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3팀장을 지냈다. 현재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글은 2018년 타계한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으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던 박노정 선생님의 2주기를 맞이해 고인과의 인연을 되돌아보고 쓴 회고담이자 추도사이다.- 엮은이

박노정 선생님의 생전 모습(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박노정(朴魯貞, 1950~2018) 선생님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분의 삶을 이야기해야 제가 맺은 인연에 대한 의미도 부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노정 선생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진주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주 교육장을 지낸 부친과 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형이 있는 교육자 집안이었습니다. 경상대학교 농과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해 전방에서 육군보병 소대장을 지냈으나 폭압적인 군대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의가사로 제대했습니다.
이후 출가하고 입산해 팔공산 원효암 등지를 전전하며 승려생활을 하다가 속세에 나왔는데, 고향 진주에 돌아온 후 시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습니다.
문인활동으로 ‘동기 이경순선생’ 전집간행위원회 상임위원, 진주문인협회장, ‘진주 가을문예’운영위원장, 진주민예총 회장, 이형기시인 기념사업회장, 경남시인협회장 등을 지냈습니다. 이경순(李敬純)은 일제 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진주의 시인이고, 이형기(李炯基)도 시 「낙화(落花)」로 유명한 진주의 시인입니다.
특히 사회단체활동으로 남성당 김장하(金章河) 선생께서 설립한 진주 남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를 비롯해 진주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진주정신지키기모임 대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6․15공동선언실현을 위한 진주시민운동’ 상임대표, 진주주민협의회 공동대표, 독도수호와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저지를 위한 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 겸 ‘친일잔재청산 시민운동 공동대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시민단체를 맡아 지역사회운동을 이끄는데 헌신했습니다.
박선생님의 지역사회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고 애정을 쏟았던 활동은 지역언론운동이었습니다. 1990년 3월 시민주를 모아 <진주신문>이 창간될 때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았는데, 창간 호에 축하시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2002년까지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내며 지역언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박선생님은 <진주신문> 발행인을 지낼 때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을 상대로 비리와 부정을 폭로하면서 여러 차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으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친일청산운동에 앞장서 친일화가였던 이당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논개영정(論介影幀)’을 논개의 사당인 진주성 의기사에서 뜯어내 폐출했다가 유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선생님은 ‘진주정신’을 지키고 역사정의를 세운 행위가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받겠다고 벌금납부를 거부해 강제노역형에 처해짐으로써 진주교도소 노역장에 유치되었습니다. 이에 진주시민들이 앞장서 모금운동을 벌여 그 성금으로 벌금을 납부해 풀려났으며, 남은 금액은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창립하는데 의미있는 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진주지역사회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실천적 삶의 모습을 보여준 박선생님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어떻게 박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의 끈을 맺게 되었을까요. 1980년대 중반 대학 재학 때 절친했던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선배를 통해 박선생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는 경상대 터울시조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여태전(余泰田) 선배였습니다. 어느날 저는 여태전 선배의 손에 이끌려 박선생님이 본성동 옛 진주시청 앞에서 운영하는 찻집 ‘아란야(阿蘭若)’[불교용어로 ‘수행처’를 의미함]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박선생님이 가르치는 <금강경(金剛經)> 강의를 듣다가 따분해서 밥만 몇 차례 얻어먹고 도망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박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저를 불러 <진주신문>에 들어오라고 이끌어 1991년 8월 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직업으로 팔자에도 없는 신문기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박선생님은 아란야를 방문한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蔡鉉國) 이사장에게 여태전 선배를 훌륭한 젊은이라고 소개해 여선배가 바라던 교직의 길을 걷게 해 주었습니다.
여선배는 양산 효암여상을 시작으로 진주 삼현여고 교사, 산청 간디학교 교감, 창원 태봉고교장을 거쳐 남해 상주중학교장을 지내며 대안교육에 힘쓴 훌륭한 교육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여선배도 박선생님이 추구했던 바와 같이 민족정신과 역사정의활동에 공감하여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한편 박선생님이 <진주신문>에 있을 때 가끔 직원회식을 가졌는데 드물었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술은 전혀 마시지 못했지만 노래는 꽤 잘 불렀습니다. 2차로 자리를 옮긴 노래방에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부르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이 노래는 음유시인으로 잘 알려진 백창우(白昌牛) 시인이 작사・작곡하고 가창력과 호소력이 있던 임희숙(任喜淑) 가수가 1984년에 불러 히트한 곡입니다. 노랫말과 음율이 마치 박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고단하고 힘들었던 신산한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3년 저는 박선생님과 함께 검찰조사를 받고 법정에 서야만 했던 운명적인 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가 당시 경남지역의 최대 현안사업이던 남강댐 보강공사에 따른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측량비리 및 부정보상에 대한 문제를 심층 취재한 기사를 작성해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때 이 기사를 본 사천군의회 이원식(李源植) 의원이 자신의 땅에 측량비리와 부정보상이 있다는 취지로 보도한 <진주신문>의 기사에 대해 취재기자였던 저와 신문발행인이었던 박선생님을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던 것입니다.
진주지청은 고소사건을 접수하자마자 경찰에 사건을 배당하지 않고 직접 수사에 착수해 신속하게 두 사람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검찰에 구속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당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의원은 당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순회심판 조정위원을 맡고 있었던 지역유력자로서 검찰과 법원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원식 의원은 당시 사천군의원으로서 지역현안과 관련해 언론보도 및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에 있었으므로 <진주신문>의 기사가 비방을 목적으로 작성된 사실무근한 허위사실로 보기 어려워 그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심 진주지원 재판에서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징역 3년씩을 구형했고 판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습니다. 그 결과 창원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 합의부재판에서는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사실관계가 입증되고 언론보도의 공익성이 인정되어 실형을 내린 원심판결을 파기했습니다. 그러나 기사에 일부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판단함으로써 벌금형이 선택되어 각각 벌금 100만원이 선고되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벌금형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다시 상고했는데 대법원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원심파기환송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1997년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사건을 창원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지역유력자이며 공적인 존재로서 현직 군의원에 대한 비리의혹은 정당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므로 언론보도로 인한 군의원 개인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기보다 지역민의 알권리가 우선되어야 함으로 이를 취재해 보도하는 언론의 행위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판결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창원지방법원 형사부로 되돌아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되면서 이 사건은 완전히 끝나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5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끌어온 <진주신문>에 대한 남강댐 수몰지 보상과 관련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사건이 무죄로 판결되면서 진실이 승리하고 정의가 살아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승리보다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박선생님의 승리였고, 또한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진주신문>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저는 <진주신문> 필화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신문사를 떠났습니다. 비록 IMF사태를 계기로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와 논개제에서 잠시 문화운동을 하다가 2004년 역사운동을 위해 진주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박선생님과 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주에서 친일청산운동을 하던 박선생님을 서울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2009년 <친일인명사전> 출간을 기념하는 국민대회가 열리던 자리였습니다. 원래 숙명여대 강당에서 열기로 예정되었으나 대학측의 거부로 효창공원의 백범 김구(金九) 선생 묘소로 옮겨져 열릴 때 그곳을 찾아온 박선생님을 발견하고 매우 놀라워하며 뜨겁게 해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시 저는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활동을 하면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편찬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박선생님은 2015년 형평문학선양사업회장 등을 지내며 만년에도 활발히 활동했으나 2018년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00세시대라는 요즘의 장수추세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너무 이른 야속한 죽음은 아니었는지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부인 황선옥(黃善玉) 여사께서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박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낯선 사내’를 스스로 지우고 먼 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박선생님이 지웠던 낯선 사내는 생애
의 전부를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던 박선생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 박선생님은 결코 낯선 사내가 아니었으며 그는 아직도 저의 ‘영원한 <진주신문> 발행인’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진주신문>도 박선생님도 없고 단지 이름만 같은 짝퉁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젊은 혈기가 넘치던 그때 그 시절의 <진주신문>과 박선생님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박선생님의 장례식 때 황여사께서 다음 생에는 부부가 아닌 좋은 친구로 만나자고 했던 말이 뇌리에 남습니다. 저 역시 다음 생에는 기자와 발행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인연이든지 끈이 이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도 괘념치 않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시집으로는 첫 시집 <바람도 한참은 바람난 바람이 되어>를 비롯해 <눈물공양>과 <운주사> 등이 있는데, 저는 첫 시집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아직도 귓전에는 박선생님이 신문사에서 저를 부르던 호칭이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김경현 기자’가 아닌 “경현 수좌”라고 부르곤 했던 다정한 목소리가 이제는 바람이 되어 다시 귓전을 스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또 다른 저의 사회학과 선배이던 양곡(暘谷) 시인의 시 「고 박노정 시인」을 인용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서 박선생님의 영면을 빌며, 2주기(7월 4일)를 앞두고 그분의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추억하고자 합니다.

유발거사(有髮居士)였다/술은 마시지 못해 차를 즐기며/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언제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시(詩)를 좋아했고/문화와 예술을 좋아했다/무엇보다도 올곧고 결 바른 시대의/민족정신을 좋아했다????에나 진주사람이었다/옳고 바른 일에는 늘 앞장서고자 했고/시들어져가거나 꺼져가는 목숨들에게는 슬그머니 다가가/빙그레 미소 지으며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불어넣어주곤 했다.

화, 2020/05/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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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친일파 흉상 철거, 고등학생의 민원에 보훈처가 답하다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정태 흉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작년,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전남교육청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남청소년 역사탐구대회’를 진행해 왔으며 작년
으로 9회째를 맞이했다. 작년도 주제는 ‘임정 100주년·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전라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근로정신대의 실상과 해결방안’ ‘전남지역 친일잔재의 실상과 해결방안’이었으며 도내 중·고교 70여 팀이 참가했다.
참가팀 중에는 고흥 녹동고등학교 팀도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대회 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장에 김정태의 흉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정태(1869~1935)는 강제합병 후, 전남 영광군수, 광주군수, 순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전남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했다. 1924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한국병합기념장(1912),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 등을 받았다.
김정태의 아들 김상형(1897~?) 역시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전조선시국강연반 연사로 참여하였다. 중추원 의원 시절에는 내선일체 정신의 구현은 “반도민중의 일본화”에 달렸다고 주장하며 “천황폐하를 경모하여 받드는 정조(情操)를 고양”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학교에서 황거망배(皇居望拜)와 천양무궁(天壤無窮)을 기원하고 마음을 정화해 황국신민임을 맹세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 자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상형은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에 송치되었다.
이와 같은 김정태의 친일행적을 확인한 학생들은 2019년 8월 고흥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광복 74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역겨운 동상이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옥하공원에 버젓이 세워져 있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고흥 군민들을 내려다보며 분명히 비웃고 있을 것입니다. 동상이 철거된다면 주민들의 애국심과 지역 역사의식이 한층 더 함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친일파 동상이 버젓이 세워진 채로 우릴 내려다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학생의 민원 글 발췌

 

고흥군은 학생들의 민원을 국가보훈처에 이첩했다. 김정태 흉상이 자리했던 옥하공원 내 토지를 비롯해 약 56만㎡의 토지가 김정태 후손들의 소유였으나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서 국가로 귀속된 이후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관리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원 전까지 국가보훈처는 그 땅에 친일파의 흉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민원을 넘겨받은 국가보훈처는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그러나 후손들이 흉상 철거를 미루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결국 후손들은 4월 28일 오전 흉상을 철거했다. 철거는 국가보훈처와 고흥군청 관계자들이 오기 전에 신속히 진행 되었지만 필자는 오전 일찍 현장에 가 있었기에 다행히 철거의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지역언론사 등에 제공할 수 있었다.
김정태 흉상 철거는 아마도 친일파 기념물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고 고흥군과 국가보훈처 등 공공기관이 응답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흉상 철거를 담당한 국가보훈처 담당자는 배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행동과 민원 내용에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민원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백방으로 철거 방법을 알아내어 결국 성과를 이룬 보훈처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준 녹동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화, 2020/05/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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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58]

친일파 인사 35명이 요리집 식도원(食道園)에 급히 모인 까닭은?
표석 하나로 남은 이봉창 의사의 효창동 집터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36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조선식 요리점 식도원(食道園)의 근하신년광고이다.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를 남쪽으로 건너자마자 곧장 나타나는 한성은행(漢城銀行, 나중의 조흥은행)
을 끼고 두 번째 가게 옆으로 감아돌면 남대문로 쪽으로 출입구를 낸 식도원(食道園, 남대문로 1가 16번지 및 삼각동 78번지 일대)이라는 유명한 조선식 요리점이 그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기생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明月館)의 주인이던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이 1920년 11월에 식도상회(食道商會)와 더불어 설립하였으며, 궁중식(宮中式) 조선요리와 함께 일본식 및 서양식 요리를 곁들여 제공하는 한편 신식교육을 받은 젊은 신랑신부의 결혼식도 곧잘 벌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의 범인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친일파 인사 35명이 식도원 요리점에 급히 모
여 충성 결의를 하고 있는 장면이 수록된 『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그런데 1932년 정초가 되어 9일째가 되던 날에 이곳 식도원에 35명이나 되는 서울 장안의 난다 긴다 하는 친일파 인사들이 근심 어린 낯빛으로 줄줄이 모여들었다. 참석자 가운데 도지사 출신의 신석린(申錫麟)을 좌장으로 삼아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림이 잠시 이어지더니 이들은 다음과 같은 회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하나, 총리대신, 척무대신, 궁내대신 및 동상중(東上中)의 총독(總督)에게 봉위(奉慰)의 전보(電報)를 타전(打電)함.
하나, 7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총독부, 군사령부를 방문, 봉위의 뜻을 표함.
하나, 3일간은 일체 도락적 연회(道樂的 宴會)에 출석치 않음.
하나, 재성(在城) 신문잡지에 근신(謹愼)의 뜻을 표하고 동포(同胞)에게 근신의 지(旨)를 종용(慫慂)함.
하나, 전보 발신명은 좌(左)의 7명으로 함. 위원(委員) 한상룡(韓相龍), 박영철(朴榮喆), 신석린(申錫麟), 조성근(趙性根), 김명준(金明濬), 민대식(閔大植), 박승직(朴承稷).

 

곧이어 이들은 이러한 결의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봉위전문(奉慰電文)을 즉각 타전하였다.

 

작일(昨日) 돌발(突發)한 불경사건(不敬事件)에 대하여는 오직 공구불이(恐懼不已)이오며 충성(忠誠)으로써 근신(謹愼)의 의(意)를 표(表)하옵나이다. 경성조선인유지(京城朝鮮人有志).

 

이들이 이러한 위문전문을 서둘러 발송한 것은 바로 전날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사쿠라다몬사건(櫻田門事件)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내무성(內務省)의 발표에 따르면, 해마다 신년행사로 벌어지는 육군시관병식(陸軍始觀兵式)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본 천황의 노부(鹵簿, 의장행렬)가 경시청(警視廳) 앞을 닿으려 할 찰나에 누군가 이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그 범인으로 조선 경성 출신의 이봉창(李奉昌, 1901~1932)이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취조중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안절부절 못한 것은 이러한 ‘불경사건’의 범인이 바로 조선인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중추원 참의이자 조선생명보험 사장이던 한상룡(韓相龍)과 같은 이는 이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이러한 소감을 피력한 바 있었다.

불경사건은 공구(恐懼)의 염(念)을 금치 못하는 바요, 특히 범인(犯人)이 조선 사람이라 함을 들을 시에 더욱 황공무지(惶恐無地)외다. 따라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는 일층 더 근신(謹愼)하여야 하겠다는 외에는 무어라 말씀하여야 좋을지를 모르는 바외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숨졌을 때 얼빠진 친일단체와 몇몇 친일인사들이 사죄단(謝罪團)을 꾸려 일본까지 건너갔듯이 그 일을 고스란히 빼다 박아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꼴불견에 가까운 이러한 광경은 비단 식민지 조선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루야마 회장이 이끄는 상애회(相愛會) 회원 400명이 도쿄황거 이중교 앞에서 늘어서서 궁성요배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충성 맹세를 하는 광경이 수록된 『경성일보』 1932년 1월1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경성일보> 1932년 1월 12일자를 살펴보면, 황거(皇居) 앞 이중교(二重橋)를 배경으로 두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포착된 보도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알고 보니 이들의 정체는 도쿄 지역에 거주하는 상애회원(相愛會員) 4백 명이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상애회는 1921년 12월에 도쿄 지역 조선인 노동자의 상호부조단체인 노동상구회(勞動相救會)를 개편하면서 탄생하였고, 친일주구로 악명이 높은 이기동(李起東, 1885~1952)과 박춘금(朴春琴, 1891~1973) 같은 이가 이 조직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이후 1928년 4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출신(1922.6.17~1924.9.12 재임)의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 1883~1956)가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특히 박춘금은 그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1932년 3월 조선인으로 최초이자 유일하게 대의사(代議士,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문에는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맹세하다”는 구절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대불경사건이 조선인의 손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 그저 송구스러워 사건 바로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궁전 앞에 모여 요배(遙拜)를 하고 ‘천황폐하만세’를 삼창(三唱)하면서 절절한 충성 맹세의 장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행렬 앞에 나선 마루야마 회장은 “금후에는 국가를 위해 내선융화(內鮮融和)에 노력할 것을 맹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훈시를 덧붙였다.
전날의 거사를 벌인 이봉창 의사는 본적(本籍)을 ‘경성부 금정(錦町, 지금의 효창동) 118번지’에 두었으나 원래 출생지는 통칭 ‘당현(堂峴, 당고개)’으로 불렀던 ‘경성부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지번은 미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위로 이범태(李範泰)와 아래로 이점동(李点童) 외에 이복동생인 이봉준(李奉俊), 이봉운(李奉雲), 이종태(李鍾台), 이덕희(李德熙, 누이)가 있었다.

 

『황성신문』 1905년 10월 3일자에는 ‘용산 당현(堂峴, 당고개)에 사는 이진구(李鎭球)’가 낸 문권분실광고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이봉창 의사의 부친이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재력 덕분에 풍요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내 가세가 기울어 생계가 어려운 처지를 겪었다고 전해진다.(왼쪽) 『매일신보』 1932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이봉창 의거에 관한 일본 내무성 발표 내용이다.(오른쪽)

 

1932년 9월 30일에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한 사실과 이봉창 의사의 인물사진을 함께 수록한 『부산일보』 1932년 10월 1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사건 당시 총독부 경무국에서 조사 발표한 인적사항 관련항목에 “부모는 일찍 사망하고 ……운운”하는 대목이 있으나 이는 정확한 설명은 아닌 듯하다. 이봉창 의사 본인이 진술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에는 부친은 1930년에, 모친은 1927년에 각각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나온 여러 신문의 탐방기사에 이봉창 의사의 어머지 주씨[朱氏, 본명은 주간란(朱干蘭)]라는 분이 생존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 사람은 아버지 이진규의 첫째 소실(小室)이고 정봉희(鄭鳳姬)라는 이름의 다른 소실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예심판사 의견서(1932년 6월 30일 작성)와 판결문(대심원, 1932년 9월30일) 등에 기술된 내용에 따르면, “용산(龍山)의 자산가(資産家) 이진구의 차남으로 태어나 유년시절에는 편안한 생활을 보냈으나 …… 아버지의 병세와 사업차질로 인하여 이내 가세가 기울고 마침내 생계조차 어려워지기에 이르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라 소년 시절 이봉창은 사립문창학교(私立文昌學校)를 나오자마자 일본인 가게에서 고용살이를 하였고 1919년 8월에는 용산역(龍山驛)의 시용부(試庸夫)로 들어가 역부(驛夫)와 전철수(轉轍手)를 거쳐 연결수(連結手)로 일하였으나 빈곤상태를 떨쳐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4월에 이르러 조선인 차별대우에 대한 싫증과 신병(身病)을 이유로 용산역에서 근무하는 일을 그만 두기에 이른다. 그 이후 철도에 종사하던 후지하타(藤幡)라는 일본인이 내지(內地, 일본)로 돌아가던 차에 조선인 식모를 데려가고 싶다는 얘기가 있어서 이를 계기로 자신의 조카 이은임(李銀任, 형 이범태의 딸)과 함께 1925년 11월에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이때 이봉창 의사는 우선 오사카 지역에서 직장을 구하였고 키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차별대우에 대한 반발과 건강상의 이유로 몇 차례 취직과 사직을 반복하였고, 특히 1928년 11월에 교토에서 거행된 천황 즉위식을 참관하러 갔다가 한글로 표기된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검속에 걸려 부당하게 경찰서 유치장에서 9일간이나 구류되는 경험을 하였는데, 이때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탓인지는 몰라도 심지어 1929년 2월 이후 2년가량은 아예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비누상회, 해산물 도매상점, 가방상점 등에 일자리를 전전한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1년 쯤 도쿄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거쳐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자마자 이내 1930년 12월에 취업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던 와중에 ‘백정선(白貞善)’으로 통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김구(金九)와 만나 여러 차례 접촉과 교유를 하던 끝에 천황폭살에 관한 결심 피력과 거사 모의가 성사되었고, 1931년 12월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고 수류탄을 전달 받아 코베항을 통해 다시 일본으로 잠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2년 1월 8일의 거사가 결행되었고, 폭탄의 위력이 약해 뜻을 이루지 못한 이봉창 의사는 사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 30일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10일 후에 이치가야형무소(市ケ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이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광복 이듬해에 이르러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봉환이 추진되면서 마침내 1946년 6월 15일에 각각 최석봉(崔錫鳳, 한독당 경남지부장), 윤남의(尹南儀, 윤봉길 의사 동생), 이강훈(李康勳, 상하이 육삼정 의거 동지) 등 세 사람의 가슴에 안겨 이들 유해는 특급열차 조선해방자호(朝鮮解放者號)를 통해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내 수송동에 있는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로 운구되어 그곳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20여 일이 지난 그해 7월 6일에는 삼의사의 국민장(國民葬)이 거행되어 이들 유해는 옛 효창원 묘터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자에 수록된 「조국 광복에 바친 세 혈제(血祭)! 조기(弔旗) 아래 전시민이 애도」 제하의 기사에는 삼의사 장의행렬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듯이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1917년에서 1925년 사이에 거주)이 바로 장의행렬과는 불과 100여 미터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였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남다른 감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 (1929)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봉창 집터인 ‘금정(錦町, 효창동) 118번지’의 위치이다. 왼쪽 위에 보이는 199번지 구역은 옛 만리창 지역이고, 오른쪽 옆에 보이는 126번지 구역은 지금의 금양초등학교 자리이다.

 

이날의 장례를 조사하고자 맑게 개인 아침부터 수만 시민이 시내 태고사(太古寺)에 운집하였고 국민장의행렬은 상오 10시 3열사 봉장위원회의 지도를 받아 엄숙한 주악리에 효창원으로 향하였다.
…… 이리하여 행렬은 수만 시민의 봉배와 눈물어린 감회 속에 안국정 사거리를 종로로 남대문 앞을 지나 경성역을 거쳐 연병정으로 행하였다. 더욱이 동지의 유골을 받들은 김구(金九) 총리의 얼굴에는 새로운 감회가 깊이 우러나오는 듯 용산서 앞을 지나금정(錦町)에 이르니 이곳이 곧 고 이봉창(李奉昌) 의사의 출생지다. 연고 깊은 이곳 장지인 효창원에 도착한 것은 하오 0시 40분이었다.

 

『동아일보』 1932년 9월 11일자에 이봉창 의사가 살던 집이라고 소개된 ‘금정 128번지’ 및 ‘금정 118번지’의 모습이다. 전체 가옥의 구조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나마 이렇게라도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진자료인 셈이다.

 

옛 집터가 있던 구역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새로 들어선 ‘효창파크 KCC스위첸 아파트’ 안에 설치된 ‘이봉창 집터’의 표석(2018년 7월 제작) 모습이다.

 

효창공원 백범 김구기념관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이봉창 의사 동상(1995년 11월 6일 제막)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옛 집터 자리는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효창 제4구역 재개발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지금은 ‘효창파크 KCC스위첸’(2018년 9월 입주 개시) 102동 후면의 지하주차장 입구 옆쪽에 서울시에서 새로 설치한 표석 하나가 간신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듣자 하니 이 자리와 가까운 지점에 ‘이봉창 기념관’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무심하게도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이봉창 의사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나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그 내용을 덧붙여 보려고 한다. 거사 이후 취조과정에서 작성된 ‘제5회 신문조서(1932년 2월 9일 작성)’를 보면, 이봉창 의사가 용산역을 그만 둔 뒤 “용산 금정에 있는 관제묘(關帝廟)의 보존을 위해 봉사하거나 청년회를 조직하여 하수 청소와 야경에 종사하는 등 약간의 공공사업에 봉사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인해 본즉 실제로 <매일신보> 1924년 4월 24일자에 수록된 「관성묘(關聖廟) 철폐에 대하여 부근 주민 분개」 제하의 기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부내 관수동(觀水洞)에 있는 불교화광교원(佛敎和光敎園)에서는 대정 11년(1922년) 8월에 용산 금정에 있는 관성제묘(關聖帝廟)의 대지 70여 평의 불하를 얻어가지고 그곳에 학교를 짓고자 요사이에 와서 묘당을 헐려고 한즉 그 부근 일대의 주민이 백여 명은 떼를 지어 일어나서 묘당을 헐지 못하게 하고 지난 23일에는 용산경찰서 고등계에 모두 모여서 진정을 하였다더라.
그러니까 이봉창 의사 역시 본인 스스로의 진술대로 관우 사당의 철폐를 반대하는 행렬에 함께 서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동네 주민들의 희망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인지 여기에 거론된 관성묘의 흔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혹여 이 관성묘가 지금껏 잘 보존이 되었더라면 이봉창 의사의 흔적을 되새길 수 있는 참으로 마침맞은 공간이 되었을 테지만, 그러한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화, 2020/05/26-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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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효창독립커피의 제안자 김태욱 회원을 만나다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여러 가지 이력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답 : 저는 체육대학에서 운동재활과 트레이닝을 전공했어요. TV 스포츠 관련 프로그램에 트레이너라
고 나오잖아요. 그런 스포츠 관련학과입니다. 저는 운동재활 쪽에 집중했는데 그러다보니 트레이닝도
당연히 하게 되었어요. 학부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처음에 풍납동에 아산병원, 그때 당시에는 중앙병원이었는데 그곳 건강증진센터 내 스포츠의학센터에서 잠시 근무했어요. 그러다 학교 내의 생리학 실험실연구소에 자리가 나서 들어가게 됐죠. 병원 근무 후 모교에서 자리가 생겨서 대학원 강의를 들으면서 모교 연구실에서 근무했어요. 그러다 집안에 어른들이 아프시고 동생도 아프게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판단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알게 되었고 매장 투자방식으로 그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초창기 한 15개 정도 매장이 있을 때 같이 시작했죠

문 : 투자만 하신건가요?

답 : 돈이 조금밖에 없었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매장 투자를 결심했죠. 조금 넣고 일도 열심히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죠. 당시 저를 좋게 봐준 실장님이 계신데, 지금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마우신 분이죠. 그러다 나중에는 회사에 정상적인 출근을 했어요.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을 하기 전에 조교 임기를 마치고 당시 시간 강사로서 강의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인천대학교에 강사로 들어갔어요. 인천대에 교수로 있는 선배님이 제가 진행하는 운동생리학 실험을 좋게 봤는지 마침 그때 강의를 제안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인천대에 외부강의를 나가게 됐어요. 지금도 그 선배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문 : 커피 프렌차이즈 사업에서는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답 : 처음에는 매장 마케팅 업무를 했어요. 매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로컬 마케팅을 제 지인과 주변 인맥에 도움을 받아 진행했죠. 그러면서 규모가 조금씩 늘어났죠. 마케팅이라는 게 들어간 비용이 있으면 어느 정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케팅전문가들은 이번 홍보는 얼마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식으로 분석하는데 저는 그런 것보다 다른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시 글로벌 IT 기업에 근무하던, 옛날 소대원이었던 친구에게 술 한 잔 하면서 그 회사의 마케팅 방식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실전마케팅이란 말을 써가면서 어떤 제품을 팔면서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제품과 브랜드의 가치를 함께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답변해 주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어요. 그 중에서 가수 에픽하이와 함께 콜라보한 제품을 출시해 보았죠. 이후 회사 차원의 자체 컴필레이션 음반도 3장이나 진행했어요. 그 외 홈쇼핑 방송을 포함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했었죠. 그 당시 일과 강의를 병행하다가 마케팅 쪽이 더 재미있으니까 강의는 조금씩 줄여 나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주말마다 실험이 있으면 실험에는 꼭 참가하고 그랬었죠. 제가 또 실험실 출신이어서 실험에 대한 재미는 항상 느끼고 있었거든요. 마우스 테스트나 행동테스트 이런 것들을 선배 교수님이랑 종종 진행했었어요.

문 : 커피 티백도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답 : 삼각뿔 모양의 커피 원두 티백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굳이 이렇게 먹을 필요가 있냐는 회사 사람들을 설득했죠. 삼각뿔 모양이니까 안에 들어가는 양도 늘려야 했어요. 우려내는 정도를 고려해서 부직포가 아니라 실크타입의 비싼 재료를 썼어요. 그래서 투과율도 좋고 부직포 티백에서 나오는 잔맛을 최소화했어요. 부직포 티백에서는 차맛을 왜곡시키는 잔 맛이 나거든요. 커피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고 그 이후 CJ 홈쇼핑에 런칭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완판이란 걸 해봤어요. 이렇게 하면 브랜드가 좀 더 사람들과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저를 믿고 함께 해준 홈쇼핑 담당자님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때의 조언이 지금도 제게는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문 : 연구소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답 : 저는 1991년도, 대학교 2~3학년 때 연구소가 생긴 걸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집에서 알게 되었는데, 집안 내력상 알 수밖에 없었어요. 이후 아버님과 어머님이 민족문제연구소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동국대학교 4·19 혁명동지회 초대회장이셨어요. 4·19 당시 3학년으로 법대를 다니셨어요. 4월 19일에 아버지는 교내 학생들과 교문을 뚫고 나가다가 선두에서 바로 경찰한테 잡혀서 끌려가셨는데 이승만이 하야한 날 지프차에 실려 있다가 집 앞에 버려졌대요. 답십리 해병대사령부에 잡혀있으면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다가 이승만이 하야한 것도 몰랐대요. 그러다 갑자기 지프차 타라고 했대요. 집에 와보니까 아버지 본인의 영정이 있더래요. 행방불명이니까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제사를 지내려고 한 거죠. 아버지께서는 그때 빨리 잡히신 게 그 나마 다행이었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당시 동지였던 노희두 씨는 경무대 앞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지금 4.19묘지에 계세요. 아버지는 법대 졸업 후 4.19 이후 상황에 회의가 들었는지 군대에 바로 갔고 제대 후에 교직원을 하시다가 교수를 하셨죠. 현재는 돌아가셔서 4.19 묘지에 여러 동지분들과 함께 계세요. 그런 아버지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문 : 어머님도 연구소와 인연이 있으신가요?

답 : 제 어머니가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친손녀에요. 저의 외할아버지가 ‘찬’자 ‘기’자 이신데 일제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중 일찍 돌아가셔서 해방되고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분들이 오실 때 유골로 같이 오셨어요.

 

김창숙선생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주로 지내셨다고 하셨구요. 어머님은 김구 선생님(어머니는 김구 선생님을 곰보 할아버지라고 부르시더라구요)도 직접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일화로 김구 선생님이 안두희의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곰보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효창공원에서 독립운동가들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
려고 할 때 김창숙 선생님이 혼자 시위했는데 외증조부의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따라다녔대요. 그리고 제가 여기 효창동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린 시절과 유년기 시절에는 말썽을 부리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그러면 안 된다고 일본놈들과 독재자들이 보면 얼마나 비웃겠냐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라서 제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초창기부터 알았던 거죠.

문 : 가입은 2015년에 하셨어요. 어떤 사연이 있나요?

답 : 민족문제연구소는 저한테 친숙한 단체예요. 이질감이 없는 곳이죠. 제가 결혼할 때 김시업 선생님이 주례를 해주셨는데 그분이 심산 김창숙 연구소 회장을 하시면서 심산상을 만드셨고 1992년에 고 임종국 선생이 수상자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대신 받았죠. 저한테는 그렇게 친숙한 단체라서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 해야 하나. 저는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 있으면서 탈북자 학교를 가끔 후원했어요. 아버지도 실향민이고 하니까. 그런데 너무 많은 곳에서 후원 요청을 하니까 좀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어요. 그 회사가 내 회사도 아니었고요. 그러다 2015년도에 회사를 나오게 되고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연구소 후원을 시작했죠.

문 : 효창독립커피 이야기를 해볼까요. 처음에 제안하신 계기부터 말씀해주세요.

답 : 제가 커피 프렌차이즈 회사에서 일한 게 2005년에서 2015년까지, 투자기간까지 합치면 10년이 넘네요. 그러다 보니 커피업계를 두루두루 알아요. 지금 현직에 계신 분도 알고 있고요.
효창독립커피도 그런 인연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죠. 방실장님을 만나서 최초로 그 말씀을 드렸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굉장히 좋은 취지, 정신 그리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주변에서 연구소의 취지나 사업내용을 잘 모르더라고요. 더군다나 젊은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예요. 그래서 연구소를 더 많이 알리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문득 효창독립커피 사업을 떠올려 그 제안서를 만들어서 연구소에 왔던 거죠. 젊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커피라는 주제를 가지고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에서요. 그리고 제안의 취지, 사업 목표와 방안에 대해 방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었죠.

문 : 효창독립커피를 위해 꾸려진 팀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답 : 제가 우선 민족문제연구소에 와서 방실장님에게 커피를 통한 수익사업을 제안하니까 방실장님이 커피 브랜드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셨죠. 이후 제가 브랜드 취지를 이해하고 이에 필요한 사람들과 논의하기 위해 카페리즈의 강인규 대표를 만났어요. 그분은 제가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낸 분이시고, 정말로 커피에 조예가 깊은 분이에요. 커피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분, 그분이 효창독립커피의 원두를 제공하기로 했어요. 거기에 유통은 성빈인터내셔널의 전혁준 대표가 맡아주기로 했어요. 이렇게 두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효창독립커피사업을 같이 하기로 했죠. 지금 효창몰이라는 쇼핑몰을 구축중이고 그곳을 플랫폼으로 효창독립커피와 또 다른 다양한 제품과 콘텐츠 사업을 하려고 구상중이고요. 여기에 첫 번째 독립운동가로 차리석 선생님을 선정하는데 그 후손인 차영조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고요. 그래피티 아티스트 레오다브가 그림을 그려주셨고 켈리그래프 예술가도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업과 독립운동가 후손 그리고 예술가가 한데 모여 뜻깊은 효창독립커피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문 : 사업의 제안자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가요.

답 : 막연합니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 형편이 좀 나아지고 또 여유자금이 생긴다면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에 쓰이면 좋겠어요. 제 생각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엄청나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좋으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 자부심은 본인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빛나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암암리에 숨겨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 사업의 수익을 통해 그런 세상보다는 우리의 선대가 행한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그분들의 정의를 위한 행동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구요. 그 후손들이 이러한 것들을 자랑스럽게 여겨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해방 후 남한에서 수립된 정권에 의한 전도된 가치관의 범람, 불의와 정의의 뒤바뀜으로 인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사회 보편적인 정의를 붕괴시키는 것, 허세와 위선, 기만과 권모술수로 인간관계를 파멸시키고 나아가서 남북 분단 상황을 조장, 이용하는 사회가 아닌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여기에 나라를 되찾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 하나라도 바치거나 희생하신 모든 분들과 민주주의와 모두의 정의를 위한 희생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화, 2020/05/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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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로 6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위령탑에서 ‘창군 80주년 광복군 합동추모제전’이 봉행됐다. 김영관(97) 한국광복군동지회장이 추념사를 했는데 현재 생존 광복군은 15명으로 그나마 거동이 자유로운 분은 김영관 회장뿐이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불리고 있으나 회원들이 점점 나이 들어가며 동지회 사무실 운영조차 어렵게 꾸려가고 있어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날 추모제전에는 국방부 등 유관 기관의 참여와 후원이 눈에 띄지 않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 무색했다. 이날 추모제전에는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참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6/23-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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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광복회가 국회의원 후보자 대상으로 국립묘지법 개정 설문조사를 실시하여여야 국회의원 90명이 법 개정에 찬성한데 이어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는 5월 24일과 6월 13일 각
각 서울과 대전현충원에서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과 연구소 후원으로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서울과 대전현충원이 속해 있는 서울 동작구와 대전 유성구의 이수진, 김병기, 조승래 의원이 직접 참석해 국립묘지법 개정을 약속했다.
국민여론 역시 친일파 이장에 긍정적이다.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2019년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청산 문제 전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당시 조사결과도 10명 중 7명(74.4%)이 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반대는 17.5%) 6월 2일 오마이뉴스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이장해야 한다’는 응답이 54.0%로 절반을 넘었다.(이장 반대 32.3%)

화, 2020/06/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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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광복회, 반민특위 습격일에 경찰청장 사과 요구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특 위 습격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또한 당시 습격의 책임을 지
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해 4월 3일 서울 광화
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4‧3 광화문 추념식에 참석, 경찰총수로서는 처음으로 “무고하게 희
생된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뜻을 밝혔으며 올해 5월 12일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 “경찰
의 지난날을 반성 한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이날 행사는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에 리본달기를 시작으로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임헌영 소장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의 연대사, 구호제창 순으로 마무리됐다. 김원웅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 2020/06/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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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0년도 1차 사원총회 열려

코로나 19 감염증으로 연기를 거듭했던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사원총회가 5월 30일 오후 4시 30분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여건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현안 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는 법정회원 정수 49명 중 26명이 참석하였으며, 2019년도 결산을 승인하고 2019년 12월〜2020년 4월 기간 입금된 기부금사용 승인 신청안건도 통과시켰다. 2019년 사업성과와 2020년 사업계획에 대한 보고와 검토도 진행됐다.
임기 만료된 함세웅 임헌영 윤경로 이사와 최수전 감사의 연임안도 승인되었으며, 지난 3월 18일 별세한 이이화 선생 후임으로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전 덕성여대 교수)를 신임이사로 보선했다. 이어 개정 정관에 의거해 1차로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권위상 김순흥 김희원 박동규 이순옥 조승현 운영위원을 선출하고 운영위원회 세칙안을 검토했다. 한편 올해 전국회원대회와 수련회는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개최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회원대회 보고서는 별도로 발송할 예정이다.

화, 2020/06/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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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광복회의 비전과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에 대해 듣다

인터뷰 MC노·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김혜영 선임연구원

이번 인터뷰는 6월 2일 연구소 5층 스튜디오에서 김원웅 광복회장과 가진,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5 제9화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를 요약 정리하였다. 인터뷰 전문은 유튜브와 팟빵에서 ‘내역사 김원웅 광복회장’으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편집자

● MC노 2019년 21대 광복회장으로 취임하신 김원웅 광복회장님을 모셨습니다. 지난 1년간의 광복회 사업과 앞으로 광복회 비전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 김원웅 작년 6월 1일에 취임을 했으니까 딱 1년 됐습니다. 광복회는 독립유공자 후손 중 한명만 회원 자격이 주어집니다. 저 같은 경우도 7남매 중에 장남으로 저는 광복회원이지만 동생들은 광복회원이 아니고 독립유공자 유족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약 8,100명이 광복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 MC노 그렇군요. 광복회에서 주로 하는 사업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김원웅 광복회는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사업, 그리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사업 등을 하도록 정관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 MC노 김원웅 광복회장님에 대해서는 방학진 기획실장님이 소개해주세요.
● 방학진 많은 분들이 광복회장 김원웅보다는 정치인 김원웅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분의 숨겨진 이력 중에 하나는 부모님 두 분 모두 독립운동가십니다. 이런 분들을 우리는 ‘성골’이라고 하죠.(웃음)
● MC노 그러면 부모님 두 분은 어떤 분들입니까?
● 방학진 아버님은 김근수 선생님이시고 어머님은 전월선 여사님이십니다. 아버님은 1935년 중국 난징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셨고, 광복군 총사령부에 가담하여 선전 및 정보수집 활동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16세인 1939년에 중국 귀주에서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였고 이후에 광복군에 가담하여 활동하셨습니다. 부부 광복군, 부부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십니다. 그래서 김원웅 회장님의 고향이 중국 충칭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도 여러 일화들이 있는데요. 김근수지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 추도사를 연구소 2대 이사장이셨던 조문기 선생님께서 하셨습니다. 생전에 조문기 선생님도 본인이 추도사를 한 집안의 아들이 국회의원이 되어 친일진상규명법을 제정하니까 큰 보람이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 MC노 부모님과 관련해서 덧붙이실 이야기가 있을까요?
● 김원웅 저희 어머니는 의열단 후신인 조선의용대에 열여섯의 나이에 가입해서 스물한 살때 저희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셨어요. 당시에는 두 분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활동지역은 북쪽이고. 어머니는 남쪽 계림(桂林)이니까 서로 몰랐죠.
● MC노 그런데 어떻게 인연이 닿아서 결혼하셨어요?
● 김원웅 김원봉 선생과 김구 선생이 합작해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합류했을 때 거기서 만난 거죠. 김구 선생님이 두 분의 결혼을 주선해서 제가 1944년에 태어난 겁니다.
● MC노 부모님 두 분의 만남이 어떻게 보면 독립운동사와 맥을 같이 하는 거네요. 두 세력이 만나면서 두 분이 만나신 거니까요.
● 김원웅 제가 독립기념관에 있는 자료를 보다 보니까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데 쌀도 배급했더라고요. 1인당 쌀 두 말씩 지급한다는 표시로 이름 옆에 쌀미(米)자 쓰고 이두(二斗)라고 쓰여 있어요. 당시 제 화명(華名 : 중국 이름)이 왕원웅, 아버지는 왕석(王碩)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 MC노 광복회장 취임 전에 국회의원 김원웅으로서 친일청산활동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14대, 16대, 17대까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참여정부 시절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특별법이 제정되는데 이 두 가지 법 제정에 관여하셨습니다. 이는 반민특위 이후 국가 차원의 친일청산 활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MC노 이 당시에 법안 제정 과정에서 기억나시는 일이 있습니까?
● 김원웅 제가 1992년도에 마흔일곱 살 때 초선 국회의원이 됐어요. 그 당시에 이완용 후손이 재산을 찾아가겠다면서 재판을 하는데 법적으로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을 만들기로 하고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을 만들었습니다. 법안 제정을 주도한 사람은 법률가인 장기욱을 포함해 제정구, 장영달, 이철, 유인태, 저 이렇게 참여했는데 법안을 만들려고 국회의원들의 서명을 받다가 놀랐어요. 국회의원 중에서 친일파 후손이 너무 많은 겁니다. 지금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자신은 선대 때문에 서명을 못한다’고 합니다. 당시에 독립유공자 후손은 저와 이종찬 의원 단 둘밖에 없더라고요. 국회의원 중에 친일파 후손들은 많은데 말입니다. 그때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 기득권층에 얼마나 많은 친일반민족세력이 있는가 하고.
● MC노 소수일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딱 두 분밖에 없었다는 건 충격적이네요.
● 방학진 두 명이라도 있는 게 어딥니까. 그 당시가 기억이 나요. 1992년도인데 우리 연구소가 당시에는 반민족문제연구소였을 때인데 저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그 당시에 말씀하신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 기사를 열심히 스크랩했던 기억이 납니다. 탑골공원에서 서명운동도 하고.
● MC노 광복회장으로 취임하신 지 1년이 되신 거잖아요. 1년 동안 광복회가 많이 달라졌다고요?
● 방학진 개인적으로는 광복회가 정권교체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광복회가 1965년에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보면 박정희가 만든 관변어용단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MC노 그렇지만 출범 당시에도 독립지사 후손 분들의 단체 아닙니까?
● 방학진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서 국민적 저항과 친일정권이라는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제대로 광복회가 활동했으면 괜찮은데 국민들 눈높이에 맞지는 않았었습니다. 회장님이 오시면서 바뀐 것이 많은데요. 예를 들어서 현재 달고 계신 배지가 광복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배지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 김원웅 하나는 세월호 희생자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배지, 5·18 40주년 배지 그리고 광복회 배지입니다.
● 방학진 이전 광복회장님들은 언론에 나오는 게 일 년에 두 번쯤 됩니다. 삼일절과 광복절 기념식. 그런데 김원웅 회장님은 5·18은 기본이고 봉하마을 참배도 다녀오시고. TV조선과 채널A 재승인 취소요구, 윤봉길 의사 손녀가 미래한국당 비례대표가 된 것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남북정상간 응원 메시지도 남기셨고, 류석춘과 이영훈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전의 광복회장님들이 전혀 하시지 않았던 사이다 행보와 발언을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올해가 5·18 40주년인데 5·18민주묘지에서 광복회의 과오에 대해서 반성하시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 MC노 5·18과 관련해서 광복회가 사과해야 될 일이 어떤 건가요?
● 김원웅 광복회는 매월 광복회보를 발행합니다. 5·18 당시 광복회보에는 광주항쟁을 소요사태라고 했고 소요사태를 진압한 전두환의 리더십에 대해서 칭송한 글이 있습니다.

● MC노 1980년 광복회보에?
● 김원웅 예. 그것도 문제가 있고 최근 사례로는 박근혜 정부 때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노래라고 하면서 제창하지 못하게 했죠. 그때도 광복회는 다른 보훈단체들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각종 행사에 보이콧하겠다고 언론에 발표했었습니다.
● MC노 그 당시 광복회의 입장이 그랬습니까?
● 김원웅 제가 회장으로 취임한 후 알아보니 광복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관련해 논의한 적도 없고 언론보도를 보고 알았답니다. 그렇지만 침묵했죠. 거짓 발표에 대해서 본인들의 입장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 거예요. 이런 점들이 미안했습니다.
● MC노 김원웅 회장님이 작년 6월 취임사를 보면 ‘민족민주진영의 맏형이 되는 광복회가 되겠다. 친일청산으로 대한민국을 애국의 대상이 되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동안의 활동들은 취임사를 구현하겠다는 활동이신 거죠?
● 김원웅 그렇습니다.
● MC노 TV조선과 채널A 재승인 취소요구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하신 겁니까?
● 김원웅 TV조선과 채널A에 대해서 줄곧 조사했어요. 패널이 한 얘기긴 하지만 〈반일종족주의〉를 쓴 이영훈 교수에 대해서 학계에서 존경받는 분이라고 홍보하고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잘못된 판결이라고 이야기해요.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강제성이 없고 자발적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하고요. 친일을 비호하는 등의 이런 발언에 대해서 광복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고 이런 방송이 계속된다는 것은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면 안 되는 방송입니다. 저 혼자 한 것은 아니고 광복회원들의 의사를 듣고, 찬성하신 분들의 실명을 밝히고 방송통신위원회에 의견서로 제출했습니다.
● MC노 김원웅 회장님 취임하시면서 광복회가 역동적인 이미지로 바뀌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광복회는 박제화된 이미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에요. 용산구 청파동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생기고 오늘 처음 오신 건데 느낌이 어떠셨어요?
● 김원웅 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처음 생길 때 연구소 이사였습니다.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고, 잘 되기를 바랐고요. 그동안 연구소가 한국역사의 물길을 제대로 잡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를 각성하게 만들고 결집하게 만들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태서 같이 하자. 그래서 저희들이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 광복회 직원들이 연구소에 문의도 하고, 협의도 하고 있습니다.
● MC노 오늘 가장 중요한 주제인데 친일찬양금지법 제정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광복회가 이번 21대 국회의원 지역구 출마자 전원에게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에 관한 찬반의사를 물었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 253명 가운데 2/3가 넘는 190명이 찬성의사를 밝혔고 광복회는 친일찬양은 물론이고 5·18민주화운동 왜곡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는 역사왜곡금지법의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셨습니다. 이것과 관
련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김원웅 유럽은 나치찬양을 하면 처벌받습니다. 그것에 준하는 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이며 결과적으
로 일단 청신호가 켜졌는데 역사왜곡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5·18과 묶어서 하던지 별도로 하던지 검토할 계획입니다.
● 방학진 190명이라고 한다면 소위 이야기하는 민주진보진영뿐만 아니라 미래통합당까지도 찬성한 거죠.
● 김원웅 미래통합당 당선자 중에 55%가 찬성했습니다. 국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면 원내 의석이 있는 당에게 당론으로 채택해 달라는 공문을 보낼 계획입니다.
● MC노 올해 2020년은 봉오동과 청산리전투 100주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광복회에서는 어떤 일들을 계획 중이신가요?
● 김원웅 6월 6일이 현충일이지만 광복회에서는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했습니다.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친일경찰들이 모의하고 반민특위 요원들을 감금했던 곳이 서울중부경찰서입니다. 그 중부경찰서 앞에서 우리가 인간 띠 잇기 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경찰이 국가공권력을 가지고 역사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요구할 계획입니다.
● MC노 경찰 얘기를 했습니다만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해주셨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 김원웅 우리나라에서 보수라는 분들은 일본 천황을 지키고 해방 후에는 친일반민족세력들의 기득권을 지켜온 가짜 보수입니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구도가 아니라 민족과 반 민족의 구도다. 인류애와 반인류애의 구도다. 그런 관점에서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해방 후 75년 동안 사회모순의 핵심은 친일 미청산에 있습니다. 모든 갈등이 거기서부터 나옵니다. 친일을 청산하지 못하면서 친일세력을 기득권에 앉혀놓고 단결하라고 하면 일제의 내선일체와 뭐가 다릅니까. 국민통합이 불가능한 거죠. 국민통합을 위해서라도 친일청산을 이루어야 하며 그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화, 2020/06/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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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2)

조선·동아 전쟁범죄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기본 정신으로 성장한다. 자유는 언론이 성장하기 위한 토양이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적 성격에 저항하는 언론의 속성으로 상당한 순기능을 우리 사회에 가져다준다. 그러나 반대로, 권력의 위치에 선 언론이 행하는 ‘표현의 자유’는 국가의 이름하에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장치로 변질된다. 여기에 심각하게 경도된 언론들은 특히 전쟁이나 사변 같은 사태에 민중을 선동하면서 중대한 인권범죄를 합리화하거나 폭력과 증오의 ‘표현의 자유’를 외치기도 한다.
국제인권규약은 전쟁선동, 선전 등에 대한 언론의 자유에 분명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 제20조에 따르면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도 법률에 의하여 금지되며, 차별이나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만한 증오의 고취 또한 금지된다. 물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생한 국제적 선언으로 그보다 이전의 사례에 일방적으로 적용하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규약은 존재 자체로 언론의 전쟁부역 행위가 얼마만큼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이재승 교수는 규약 제20조가 “특정한 유형의 표현들이 갖는 파괴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언론이 앞장서 민중을 전쟁의 참상 속으로 이끈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적지 않다. 특히 여기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어진 일제의 침략전쟁 시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보인 ‘전범언론’으로서의 면모들을 조명해보기로 한다. 이는 한글신문 100년 역사를 자화자찬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분명한 ‘상흔’이고 어둠이다. 물론 이들이 전쟁부역언론으로 존재한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기에 불과하지만, 그 보도들은 전쟁이라는 극도의 사회적 불안에 떨었을 조선 민중을 달래고 전쟁의 양상을 투명하게 보도하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앞장서 전쟁을 선전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일본국민들의 입장에서 게재하라
두 신문은 과연 어떤 입장에서 전쟁보도를 시작했을까?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한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에서 중일전쟁과 그 이후의 보도경향을 “강요당한 친일지면”으로 정리했다. 말하자면, 총독부가 자신들의 보도태도를 ‘친일적’ 으로 바꾸려 압박했고 그에 따른 <언문신문지면개선사항>,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과 같은 “총독부의 모진 탄압”이 더해져 “획일화된 지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한층 강화된 언론통제책을 써서 언로(言路)를 막으려 한 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총독부는 1936년 8월 발생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언론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무기한 정간조치 했고, 이듬해 1937년 일본 황실기사 취급방침과 총독부 시정방침에 대한 보도 강화 등을 지시하는 <언문신문지면쇄신요항> 18개항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총독부의 압박이 본격적으로 가해지기도 전에 ‘스스로’ 굴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연구소가 찾아낸 경성종로경찰서 비밀문서 4466호,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주필 서춘, 편집국장 김형원, 영업국장 김광수 등은 조선총독부의 언론사 대표자 소집, 협조요청이 있기 전인 1937년 7월 11일, 이미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친일적’ 편집방침을 확고히 결정했다.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1938.5.24,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 문건에는 조선일보 간부진의 회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7월 11일 회의를 통해 기사를 일본국민의 입장에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당시 회의에서는 중일전쟁이 막 시작되던 시류를 일본적 입장에서 반영하여, “일본군, 중국 장개석 씨” 등의 용어를 “아군·황군, 지나 장개석” 등으로 고치고 논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입장에서 게재”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사장 방응모는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동아일보는 일장기 마크 1개 문제로 수십 만 엔의 손해를 입지 않았는가. 또 민중을 1919년처럼 지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 편집방향에 반대하던 김형원·김광수를 굴복시켰다. 이에 제2회차 호외부터 “일본국민의 태도”로써 편집하기로 했다.
동아일보의 실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복종을 다짐하는 청원서와 서약서를 제출하고 ‘사고(社告)’까지 특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부역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조선총독부 미츠하시(三橋孝一郞)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정간 해지 담화에서 동아일보가 “총독정치에 익찬(翼贊)할 것을 선서”하였고 “일본제국의 신문지로서 진(眞)사명에 매진할 것을 서약”하였다고 평가했다.(「동아일보 발행 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 1937)

 

전쟁선전의 서막 ‘무력철퇴를 가해야’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 발생 이후 전선이 상해로 확대되어 감에 따라 두 신문도 본격적인 전쟁 선전의 구호를 지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이들의 보도는 일제가 도발한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일본군을 “아군(我軍)” 또는 “황군(皇軍)”으로 내면화시키고 있었다.
1937년 7월 16일 동아일보는 조선신궁에서 거행된 기원제 보도에서 “황군”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며 전쟁선전의 막을 올렸다. 이어 8월 20일 사설을 통해 “황군은 드디어 화평해결의 희망을 방기하고 전단을 개시했다”며 스스로의 입장을 사설에 담기 시작했다.
바로 3일 뒤인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지나응징”의 구호를 사설에 게재하며 선전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슬로건처럼 유행했던 “폭려지나응징(暴戾支那膺懲)1”과 상응하는 어투의 사설이기도 했다. 더불어 조선일보는 중국정부에 “자진하야 전비(前非)를 깨닫는 날까지 무력철퇴를 가하는 것이 즉, 응징의 유일한 목적”이라며 호전적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본군이 침략의 전선을 확대하는 동안 수시로 날아온 ‘일본동맹통신발’ 전황보도를 두 신문은 별다른 수정이나 검토 없이 지면을 할애해 실었다. 조선, 동아는 일본 동맹통신사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의 전쟁선전에 일본 통신사들이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면 조선, 동아의 ‘받아쓰기’는 침략전쟁을 널리 퍼트리는 ‘확성기’나 다름없었다.
두 신문의 전쟁보도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937년 12월 중순, 난징침략 때였다. 이 12월을 기점으로 조선일보가 보도한 난징 관련 기사는 무려 161건, 동아일보는 109건에 이른다. 전쟁 사진 또한 ‘남경함락화보’, ‘사변화보’ 등의 제목으로 수시로 보도되었다. 특히 난징 ‘함락’ 하루 전인 12월 12일자 조선일보 석간에는 ‘남경함락축하행사’를 주제로 한 기사가 특필되기도 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충용한 황군장병의 우월”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내세우면서 이 전쟁이 중국 국민의 “배일환상(排日幻想)”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논리로 일본 정부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대변했다.
한편, 동아일보는 12월 12일 사설에 일장기까지 함께 게재했다. 통상 게재되지 않았던 일장기 이미지를 ‘난징함락’을 기념하며 조간 2면 1단에 특별 삽입한 것이다. 사설은 일본 정부가 “군사행동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장기전을 불사”해야 한다고 적으면서 난징 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시가전에 대해 “숙청(肅淸)공작도 시간문제”라며 전투적 논조를 사용했다.


1 인도(人道)에서 벗어난 모질고 사나운 중국을 혼낸다는 뜻

 

조선일보 1937년 12월 12일 석간 2면
해당 기사는 “오직 앞으로 남은 문제는 아직도 성중에 머물러 있어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시내잔적의 소탕이 있을 뿐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난징함락이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축제가 전 조선적으로 진행됨을 자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난징 침략 후 참혹한 시가전이 일어났던 시기에 보도된 기사들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12월14일 동아일보는 동맹통신의 기사를 인용, “격렬한 백주시가전 혈(血), 시(屍), 규환(叫喚)에 충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는 “적병 최후의 절규가 들”린다는 표현과 함께 “대일장기(大日章旗)는 욱광(旭光)을 받으면서 번양하고 있”는 풍경을 지극히 ‘일본적’ 입장에서 표현해내고 있었다. 참고로 이 보도는 난징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12월 13일~15일)에 게재됐다. 난징 대학살과 이 보도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증유의 대학살이 일어났던 시기에 ‘피와 시체, 규환’으로 넘쳐나던 전장을 그 어떠한 문제의식과 인도적 양심 없이 보도했다는 것에서 분명한 비판점이 있어 보인다.

 

전쟁, 그리고 ‘만들어 낸 영웅’
두 신문의 전쟁부역은 단순히 전황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1938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조선인의 병력 동원에 나서자 조선, 동아일보는 지원병제도를 선전하는 기획기사, 사설, 사진보도를 연이어 작성했다. 각 지역별 지원병 실적을 경쟁적으로 발굴, 보도했다. 신문 1면의 대부분이 지원병 특집 기사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들은 조선청년의 ‘지원열’을 선전하기 위해 각종 미담사례를 발굴해 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9년 ‘이인석 상등병 영웅화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동원된 이인석은 1939년 6월 중국 산서전선에서 전사했다. 조선인 지원병으로는 최초의 전사자였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이인석의 전사소식이 전해진 즉시 “영예의 전사”라는 수식어를 달며 미화했다. 이에 질세라 동아일보는 바로 이튿날 이인석의 가정방문 기사를 실었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겨있을, 부인의 소감을 어떻게라도 싣겠다며 고인의 자택을 찾아가는 ‘위문’을 감행한 것이다.
나아가 두 신문은 이인석 상등병의 고별식, 위령제 등이 행해지는 현장을 찾아가 이인석 상등병의 유가족들을 상대로 ‘셔터’를 눌렀다. 유가족들의 “애수”와 전사의 명예로움을 더해주는 기사를 쓰기 위함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1939년 10월 석간 2면 기사 “색연필”을 통해 이인석 상등병의 죽음이 “조선 사람에게 몇 갑절의 열매를 맺게 할” “고마운 주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두 신문이 동원된 조선청년에 대한 추모보다는 일제를 위한 전사자의 현창(顯彰)에 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9년 7월 9일 조간 2면. 동아일보 대전지국이 故 이인석 상등병의 가정을 방문, 미망인을 만난 내용을 담은 기사

 

조선일보 1939년 10월 1일 석간 2면. 위령제 관련 기사에서 보도된 이인석 상등병의 양친과 부인(가운데)

 

두 신문의 이인석 영웅화 보도는 조선, 동아 폐간 직전인 1940년까지 이어졌다. 지원병 제도의 성과를 올리고 지원을 부추기는데 이인석 상등병의 전사를 인용한 것은 물론, 이인석 상등병을 소재로 한 음악극(나니와부시)까지 만들어진 당시 상황에 편승해 적극적인 홍보기사까지 신문에 싣기도 했다.

 

100년 세월에도 부재한 ‘반성’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 시기들은 조선, 동아일보 입장에서도 분명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올해 100주년을 기념한 사설에서 중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과오를 그저 “100년 비바람을 버텨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라며 뜬구름 잡는 논평을 남겼다. 또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도 평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이번 100주년을 맞이해, 일제 침략시기의 언론부역에 대한 ‘사과’를 표명한 것은 나름의 진전 같아 보인다. 물론 그조차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되었다고 에둘러 변명하였기에 그 진정성이 완전하다고 하긴 어렵다.

일제강압과 신문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이 대체 왜 그 같이 현란한 전쟁부역으로 나타났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논평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일보에 있어 ‘크고 작은 상흔’이었다면 조선일보의 전쟁선전에 상처 입은 민중들의 아픔은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신문을 반성과 성찰의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 참고문헌
최상원 외, 「1937년 일본군의 중국 난징 점령 관련 한국언론의 보도태도」. <지역과커뮤니케이션> 14, 2010.2
박용규,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한 신문들의 논조 변화」, <한국언론정보학보> 2005.5
장신,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 역사비평, 2005.2
조선일보사, <간추린 조선일보 100년사 – 민족과 함께 한 세기>, 2020
이재승, 「증오적 표현과 역사의 부정」, 국회 토론회 <올바른 기억확립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토론회>, 2007.5.16.

화, 2020/06/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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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친일화가가 그린 이순신 표준영정, 47년 만에 지정 해제

 

우리 연구소는 지난 2004년부터 친일경력이 있는 화가들이 그린 위인들의 표준영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리고 연구소 충남지부와 천안아산지회는 2014년 10월부터 아산 현충사 앞에서 “친일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을 즉각 교체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과 서명운동을 벌여왔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2010년과 2017년 문화재청 산하 현충사관리 사무소는 문화체육관광부 영정심의위원회에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해제를 신청했지만 모두 반려됐다.
2010년 영정심의위원회는 심의규정에 ‘멸실, 도난, 훼손 등의 경우’에만 영정을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작가의 친일 논란은 지정 해제 사유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신청을 반려했다. 2017년에는 “충무공은 국민적 영웅으로서 표준영정 지정 해제에 따른 혼란과 갈등이 야기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은 국가사적지인 현충사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현상변경의 필요성에 대해 문화재위원회 사전심의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역시 신청을 반려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항일의 상징인 충무공의 영정을 친일 화가가 그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즉각 교체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지정해제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특히 김영주 의원은 영정심의위원회 규정과 심의위원회 구성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 결과 문체부는 지난해 12월 영정 심의규정에 ‘복식, 용모 등이 잘못 표현된 경우’와 ‘사회통념에 비춰 재제작의 사유가 발생한 경우’를 추가한 것이다. 즉 ‘친일’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사회통념’을 추가하여 사실상 작가의 친일 경력을 재제작 사유에 추가한 것이다. 또한 미술계 인사들이 대다수였던 심의위원에도 역사 분야 전문가를 대폭 추가해 다양한 판단이 가능하도록 했다.
문체부가 7월 중에 영정심의위원회를 열어 이순신 표준영정을 지정 해제하고, 광복절 이전에 현충사에 봉안된 영정을 철거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우고 2023년까지 새로운 충무공 표준영정 제작과 지정 절차를 마칠 예정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은 전체 표준영정 98점 가운데 14점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20/07/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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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여름 시민강좌 ‘차별과 혐오의 역사 넘어서기’ 강좌 진행

 

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지난 6월 30일부터 시민강좌 ‘차별과 혐오의 역사 넘어서기’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나날이 심각해가는 배외주의 분위기에다가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
믹까지 더해져 차별과 혐오가 노골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기반한 혐오범죄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써 촉발된 반차별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국제적 반차별 운동은 제
국주의 역사 기념물 철거운동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금도 지속되는 ‘차별과 혐오’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성찰해 보고자
이번 시민강좌를 기획하였다. 특히 이번 강좌는 ‘차별’의 오랜 기원이라고 할 제국주의 침략 역사와 과거 청산의 노력을 살펴보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차별과 혐오에 맞설 수 있는 공감과 연대의 힘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하였다.

 


이 강좌에는 차별반대, 과거사청산, 식민주의 극복의 연구와 실천운동을 펼친 연구자와 활동가가 강사
로 초빙되었다. 1강 염운옥 교수의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낙인과 폭력의 역사”는 강좌 주제 전체를 개괄 하였고, 2강 김민철 교수의 “‘차별’로 구조화된 일제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와 3강 이동기 교수의 “역사정의와 유럽의 과거청산-증오와 혐오를 넘어”는 제국주의 시대 차별 양산 구조와 과거청산의 현재적 실태를 살펴보았다. 4강 미류 인권활동가는 “질문으로서의 차별금지법”을 소개하며 차별 철폐
법제화의 의의를 강조하였고, 5강 조경희 교수의 “자이니치, 혐오와 차별에 맞서다”는 혐오범죄에 맞선 재일조선인 투쟁의 역사를 다루었다. 6강은 서승 교수가 “식민주의 극복, 동아시아 시민의 투쟁”이라는 주제로 할 예정인데, 마지막 강의인만큼 혐오와 차별에 맞서 우리가 연대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강좌는 117명이 수강 신청을 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연구소에서는 최초로 시도한 온라인생중계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비대면 강의의 편의성까지 더해져 수강생들에게 만족도 높은 강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수강생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최근 경험한 온라인 연수 중 최고였다’는 강의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이번 온라인강좌 진행의 경험을 발판삼아 온라인 비대면 강좌는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진행된 강의는 신청자에 한해 강의 후 2개월까지 다시 볼 수 있다. • 김슬기 학예실 주임연구원

월, 2020/07/2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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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김세형 매일경제 고문이 6월 9일자 매경닷컴에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칼럼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하여 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의 신뢰를 크게 손상시켰다. 즉 칼럼에서 “일개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보수・진보의 합의도 없이 입맛대로 정하다보니”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까지 모조리 친일 명단에 들어가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 등등 〈친일인명사전〉 발간 취지나 수록자 선정기준, 사전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허위 사실을 기사화했던 것이다. 연구소는 이러한 허위 왜곡보도를 바로잡고자 6월 18일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했다. 이어서 7월 2일과 15일 두 차례의 조정심리를 가졌는데 2차 심리기일에 처음 출석한 매경닷컴측은 연구소의 입장을 전면 수용하였다. 이에 언론중재위원회는 ‘반론보도’ 형식으로 김세형 칼럼 하단에 다음 문구를 영구적으로 게재하도록 결정했다.
연구소는 앞으로도 〈친일인명사전〉과 연구소를 허위 비방하거나 음해하는 세력과 언론매체
에 강력히 대응할 방침이다.


 

본 신문(매경닷컴)은 지난 6월9일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김세형 칼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성금으로 학계를 망라한 180여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8년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이뤄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공정성은 학계가 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보수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기관에서도 공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그 엄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칼럼에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고 허위의 사실을 서술하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는 등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하여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하였습니다. 이에 본 칼럼에서 위 내용을 삭제하고, 친일인명사전의 선정기준을 수록합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국세현 회원사업부팀장

월, 2020/07/27-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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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3)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자기 관사로 불렀다.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한 내용을 청취하고 총독부의 ‘언문신문’ 관리 의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던 미하시와 방응모의 만남을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諺文新聞統制ニ關スル件)」이라는 극비문서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문서에 ‘협의(協議)’로 정의된 둘의 만남은 이날부터 무려 10차에 걸쳐 이어졌다. 
12월 22일 첫 번째 만남에서 방응모는 먼저 이렇게 고백했다.

“신문사업을 경영한 지 6년여에 그 실비(失費)가 많아서 곤란함에 빠져 오히려 교육 기타 사회사업 등의 문화 사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하시는 반색했다. 2차대전 발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언론통폐합’을 통해 다잡으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모략을 언론사 사주(社主)가 스스로 나서 도와주는 셈이었다. 미하시는 실제로도 이 같은 방응모의 제안이 고마웠던지 통제방침에 잘 응하면, 방응모의 희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려를 할 수 있다”며 선심을 썼다. 이에 방응모 또한 “그 뜻이 크게 움직”였다고 문서는 적고 있다.
12월 24일 두 번째 만남, 이틀 전의 면담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협상에 응할 여지가 있음을 포착한 방응모는 이날부터 본격적인 사업상의 조건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응모가 총독부에 희망한 조건은 아래와 같다.

 


 

① 동아일보도 함께 처분될 것
② 본사 발행의 3종(조광·여성·소년) 출판물은 계속 간행될 수 있게 할 것
③ 폐간 당일까지 본 협의에 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해 극비에 부쳐질 것
④ 종업원의 취직·전직의 알선 및 수당 지급에 유감이 없게 할 것
⑤ 건물을 포괄 약 100만 원 정도로 양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
⑥ 장래 교육 또는 사회사업 방면에 활동하고자 희망함에 대해 원조해 줄 것

 


 

정리하자면 경쟁 언론사를 제거하고, 조선일보의 바통을 이어받을 출판사업은 유지하며, 새 사업으로의 진출과, 총독부의 원조 보상금 등을 충분히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자기네들은 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쟁사는 제거해버리는, 치밀한 ‘이면공작’이다. 방응모는 총독부의 약속을 토대로 조선일보의 출판부를 따로 독립시켜 ‘주식회사 조광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1940.4). 즉, 조선일보의 중요한 알맹이는 살아남은 것이다. 잡지 <조광>은 원색적 친일과 전쟁선동의 논조를 유지하며 한글 신문과 잡지가 폐간당한 상황에서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살아남는다.
세 번째 만남인 12월 28일, 방응모는 마침내 자신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반영된 각서를 조인한다. 폐간계 제출은 이 같은 협상이 일단락된 뒤 이뤄졌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사실상 사주 방응모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방응모의 협상은 10차에 걸쳐 계속됐고 이어진 협상과정에서도 폐간에 저항 따윈 없었다. 그저 폐간의 형식을 만들고 각종 이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확답을 받아내는데 진력했을 뿐이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와 중요한 협상안들을 마무리한지 한 달여 지난 시점에서야 동아일보와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폐간에) 응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총독부 당국의 평가와 경무국장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를 불러 ‘권설(勸說)’했다는 내용 등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 기록에 비해서는 대조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폐간’이라는 총독부의 극단적 조치를 대하는 두 신문사의 태도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미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논조의 기사와 일본 동맹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전쟁 보도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동아 두 언론사가 총독부의 언론통제 방침에 충실했음에도 1940년 언론통폐합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전황이 복잡해지고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총독부는 <매일신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두 한글신문의 활용가치를 더 이상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돈, 돈, 돈 … 퇴직사원들은 절망으로

이런 경과를 통해 두 신문은 1940년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20년의 사사(社史)를 잠시 마감한다. 조동 100년사에 남긴 두 언론의 공백, 즉 ‘폐간기’는 해방 전까지 약 5년정도 지속된다.(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에 복간을 선언했다)
물론 유력한 자본가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에게 ‘폐간’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20년간 실질적으로 신문사를 떠받치며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고생한 사원, 배달부들로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사원들에게 <매일신보>한테 받은 영업권 보상금에다 회사 차원에서 자금을 더 증액하여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는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조선일보는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의 실상은 참담했다. 불만이 쌓인 사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결국 조선총독부가 관련 사안을 진상조사하기에 이른다. 경기도경찰부가 경무국장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 「폐간 양언문지의 사원 퇴직금 지급상황에 관한 건(廢刊 兩諺文紙ノ社員退職金 支給狀況ニ關スル件)」에는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350명의 사원들에게 총 23만 2,891원을, 동아일보는 303명의 사원에게 37만 968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일단 총액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
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 지급율이 가장 저조한 계층은 배달원으로 조선일보는 배달원에게 ‘평균 6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가 배달원에게 평균 734원의 퇴직금을 지급한 것에 비추어 보면 122배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원, 준사원, 공장종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액 또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473원의 동아일보 평균 지급액에 비해 조선일보의 평균 지급액은 801원에 불과해 여기서도 2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한다. 다만, 퇴직금의 최고 지급액은 조선일보가 9,617원으로 동아일보 7,614원에 비해 높았는데 이 9,617원의 최고액을 가져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사장인 방응모였다.

 

 

조선일보의 퇴직금 문제를 조사한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일보사의 지급율은 전자(동아일보)에 대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액”이며 “양사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여 조선일보사원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 사원들이 “방응모에 면회를 구하여 하등의 구제책을 요구”했으나 방응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사주의, 사주에 의한, 사주를 위한 퇴직금 행정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사의 사주, 전쟁의 나팔수로 변신하다

신문이 폐간되고 사원들이 퇴직금 문제로 허덕이는 사이 김성수와 방응모 두 사주들 또한 분주했다. 바로 전쟁부역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쟁협력 관변단체에 참여했으며 시국강좌, 기사, 방송 등을 통해 전쟁 선동의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폐간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교육자를 자처했던 김성수의 학병지원강요 행적은 충격적이다. 김성수는 1943년 10월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병 지원 실적이 신통치 않자 직접 조회에 나서 학생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내에 조선군 논객 ‘에가미(江上守彦)’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학병지원병 독려를 위한 교장회의, 좌담회에 참여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글도 여럿 기고했다. 그 결과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석간 1면에 실린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일제의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인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이 같은 ‘교장’ 김성수의 전쟁선동 행위는 상당한 혼돈을 주었다.
실제로 학병지원 마감시점인 11월 17일, 보성전문의 학병 지원율은 53.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선전활동을 했음에도 학생들의 지원율이 저조하자 김성수는 “한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모진 발언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문약(文弱)’이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한편, 방응모는 일본 육해군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1933년에 이미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와의 거래에 밝았던 방응모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인 전쟁부역 행위에 나섰다. 1937년부터 경성군사후원연맹,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 이사 등으로 참여했으며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찬양하는가 하면, “일억국민의 총궐기”를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에 감정적으로도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 동아일보는 사라졌지만 사주들의 친일행각은 폐간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신문을 통한 친일행위가 사라진 만큼 더욱 열심히 부역에 매진한 듯도 보인다. 특히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후신인<조광>을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로 채워 완전한 친일잡지로 거듭났다.

 

민족을 배반한 한 세기. 반성 없인 영광도 없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양사의 사주 방응모와 김성수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재벌이 된 그 후손들은 2010년 당당하게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방응모는 2012년에, 김성수 2018년에 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부역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민족의 수난기를 함께 한 역사를 부각하며 ‘민족지’로서의 미화를 창간 100년이 된 이 시점에도 거듭하고 있다.
이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퇴행적 행태들을 볼 때마다 나치 부역언론을 단죄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숙청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에 대한 단죄도 강력하게 진행했다. 나치에 협력한 주류 언론은 모두 폐간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모든 시설과 공간 등 재산도 몰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해온 〈콩바〉, 〈데팡스 드 라 프랑스〉 등 지하언론이 사용하도록 조치됐다.
‘어쩔 수 없었다’ 식의 변명을 일삼던 언론인들도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다. 한 예로 나치독일을 미화한 일간지 〈르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조선, 동아의 사주들처럼) “압력에 못 이겨”라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독일 선전상 괴벨스의 품에 결국 안겼다”고 질타하면서 로잔에게 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나치청산에 대해 천착해온 주섭일은 “이 같은 (청산)과정들이 프랑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이정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엄정했던 프랑스의 청산사례들과 우리 역사의 청산과제들을 비교해 볼 때면 ‘한발 늦었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동아 100년을 맞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언론개혁을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마련했다. 3회에 걸친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의 연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오는 8월 11일 열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과 연계한 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도 함께 진행되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참고문헌
박용규,
「일제 말기(1937~1945)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9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9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1~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 2017

월, 2020/07/2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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