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202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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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현장 ‘긴급’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이유
제 고향은 대전입니다. 가끔 내려가서 야구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빵집을 갑니다. 11년간 했던 일이죠. 그러나 이번에 내려간 고향은 달랐습니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단일지역 최대 민간인 학살 현장, ‘대전 산내 골령골’입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대전 학살의 현장에 간 이유는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의 기사 때문입니다. 15일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상임대표 박규용)는 긴급 공지를 통해 “공동조사단에서 긴급히 일손을 찾고 있다”고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긴급’과 ‘호소’라는 단어가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관련 기사] “16일 대전 유해 발굴 현장보존 자원봉사자 찾아요” http://omn.kr/1qir2)
아버지의 금니

16일 낮 12시,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30분을 가서 ‘동구 낭월동 13번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단풍이 물든 평범하고 낮은 산입니다. 내리자마자 새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서울에서 왔다고 말하자 할머니 한 분이 사탕을 주며 꼭 안아줬습니다.
“아따, 고맙소잉. 돈 있으면 맛난 거 사주고 싶소잉. 젊은이들이 참 순해서 좋소. 내년에도 보소. 오메~ 참말로 이런 가슴 찢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대전에서 들은 광주 사투리였습니다. 박귀덕 할머니의 아버지는 민간인 학살 당시 광주에서 대전까지 끌려와 희생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광주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자주 대전에 방문해 위령패 옆 꽃을 바꿔놓습니다.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박귀덕 할머니의 손에는 ‘치아 유골’이 있었습니다. 치아의 금니를 만지며 ‘자신의 아버지도 금니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할머니의 말에 제가 어디 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금니가 달린 치아는 살아있는 사람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교회 문 열지 마세요”
“자원봉사에 오신 분들에게는 현장 설명을 먼저 합니다. 하지만 현장 설명보다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뼈더미를 보면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충격에 직면하죠.” (공동조사단 임재근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팀장)
도착하자마자 오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발굴지에서 나온 유골들은 세척 작업 후 아세톤이 가득 든 통에 담가둡니다.
저는 유골들을 아세톤 통에서 꺼내 건조 쟁반에 놓아두는 일을 했습니다. 길고 속이 빈 다리뼈를 통에서 들어 올리니 찬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세톤 냄새도 훅 덮쳐왔습니다. 쟁반이 부족할 정도로 유골이 많았습니다. 거리를 약간만 떼어 두고 번호가 붙여진 쟁반에 최대한 많은 유골을 배치했습니다.
쟁반이 다 차면 햇볕 좋은 곳으로 옮깁니다. 70년 만에 햇빛을 보는 희생자의 유골은 정말 많았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려 모아 놓은 장작 나무 같던 다리뼈, 두개골 뼈, 잘 부서지는 잔뼈, 그리고 단추, 신발 밑창, 옥색의 탄피, 탄피들.

함께 작업하던 박정순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국장이 말합니다.
“제가 간호학과를 나왔는데, 그곳에서 보던 것보다 이곳에서 훨씬 많은 뼈를 봤어요.”
임마누엘 교회에 딸린 화장실을 쓰면 된다는 안내를 받고 교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보게 된 광경입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래주머니를 나르는 개미들
“성미산학교, 지역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단체 등 많은 분이 자원봉사로 다녀갔어요. 발굴장에 사오십 명이 바글바글할 때도 있죠. 공동 발굴단은 멤버가 딱 정해져 있지는 않아요. 하루를 와서 조사해도 공동 조사단의 일원입니다.” (공동조사단 총괄 담당 안경호 4.9 평화재단 사무국장)
저는 올해 발굴작업이 다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골령골로 갔습니다. 유해 발굴은 겨울 동안 잠시 멈췄다가 2021년에 다시 시작합니다. 봉사자들은 내년에 있을 추가 유해발굴을 위해 파헤친 구덩이를 보존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뼈가 있는 부분은 천으로 단단히 감쌌습니다. 큰 비닐 포장을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붙잡고 구덩이 바닥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비닐 포장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모래주머니를 포장 이것 저곳에 올려놓았습니다.

서울에선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제가 오늘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모래주머니를 날랐습니다. 집에 와서야 중노동의 현장이었다는 걸 쑤신 몸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휴우’ 소리 한마디가 사치스러운 곳이었지요.
공동 발굴단은 호흡이 척척 맞았습니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짐을 지고 나르는 개미처럼 힘을 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여기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발굴단을 이끄는 안경호 사무국장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파스를 붙이는 사람이 많아요.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해야 하니깐요. 흙벽을 깎고 나르는 일이 상당히 고됩니다.”
저는 사람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발굴 현장에 참여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임재근 팀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희생된 분들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겠다는 부채감과 책임감이 큽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재발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나와 내 가족들도 그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공동조사단 모두는 자신의 가족 유골을 추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산속이라 오후 4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할 일이 많기에 누구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걱정도 미뤘나 봅니다. 유골을 꺼낼 때 마다 묻혀있던 아픔이 고스란히 제 마음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죽은 이로부터 배우는 인권

해가 완전히 졌음에도, 조사단은 작은 불빛에 의지해 세척, 분류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발굴 현장 한구석에 마련된 오두막에서 감식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도 있었습니다.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유가족을 찾아주는 게 문제 해결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요?
“유골이 집단으로 섞였기 때문에 디엔에이 검사할 필요도 없고 나오지도 않아요. 유족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검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공동조사단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각기 다른 정치 이념을 갖고 있던 남북한이 한국전쟁을 하며 발생했죠. (…) 유해발굴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인권을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70년 전 골령골에서 벌어진 일
1950년 골령골에서 특별경비대원으로 학살 현장에 있었던 김아무개씨는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나와 당시 지휘관이었던 심용현 중위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심 중위의 명령에 따라 경찰과 헌병이 각각 10명씩 조를 짜서 재소자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 헌병지휘관이 청년방위대에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

오후 7시. 공동조사단 숙소로 돌아가는 조사 단원 한 명과 함께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습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갈 기회다 싶었죠. 대전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주용성 사진기자에게 조사단 전원의 넘치는 열정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한 번 오면 계속 오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몸 힘든 것만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2021년에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한 번 더 오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달리는 택시 창문으로 보이는 산속 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로등 천국 서울에 사는 저는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70년 전, 오늘 제가 만진 유골의 주인들도 이런 어둠 속에 있었겠지요. 구덩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리던, 그리고 구덩이 안으로 떨어지던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 공포와 억울함, 그리고 한. 지난 70년이 흐르는 동안 골령골의 어둠 속에는 영혼의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
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를 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남한 정부는 보도연맹을 적으로 판단합니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 6월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승만 정부의 군인과 경찰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한 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했습니다.
희생자는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단일지역 민간인 피해 최대 규모입니다. 그들은 무참히 학살되어 암매장되었습니다.
학살 후에도 남겨진 가족들은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연좌제 때문입니다. 유가족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아픔은 계속되었습니다. ‘죽인 자’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들은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50여 년 간 이 사실을 덮었고, 진실은 2007년이 되어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희생자들은 어두운 땅속에 묻혀 있다가, 70년 만에 유해발굴을 통해 볕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월 8일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학살이 이뤄진 대전 골령골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처음으로 발굴됐습니다.
올해 40여 일간 진행된 유해발굴은 마무리되었고 2021년에 추가 유해발굴이 진행됩니다. 2022년부터 이곳 산내 골령골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평화역사공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공동발굴단이 될 기회는 1년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발굴이 다시 시작되면 그때 <오마이뉴스>를 통해 한 번 더 알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사단원 선배들이 남긴 편지를 소개합니다.
“이 순간에 함께 한 증인으로서 앞으로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하겠습니다.” – 성미산 학교 학생들

홍승주(hongsam3503)
<2020-11-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할머니가 손에 쥔 치아 유골… “교회 문 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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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4) ‘내역사’ 시즌 5: 사북항쟁 40주년 특집 방송 “1980년 4월 21일~24일까지의 기록”
☞ (11.17) ‘내역사’ 시즌 5: 19화 “해방 후 3년” _그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_박헌영편
☞ (11.10) ‘내역사’ 시즌 5: 18화 “해방 후 3년” _그들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_여운형편
☞ (10.27) ‘내역사’ 시즌 5: 17화 2부 “해방후 우리군은 숙군과정을 통해 어떻게 정치군인이 되었는가?
☞ (10.20) ‘내역사’ 시즌 5: 17화 1부: “해방후 우리군은 어떻게 창설되었나?
☞ (10.13) ‘내역사’ 시즌 5: 16화: 선출되지 않는 권력, 대한민국 판검사의 뿌리는? 2부
☞ (10.09)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_한글날 특집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 지켰나?’
☞ (10.06) ‘내역사’ 시즌 5: 16화: 선출되지 않는 권력, 대한민국 판검사의 뿌리는? 1부
☞ (7.28) ‘내역사’ 시즌 5: 15화: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서승교수와 함께 2부
☞ (7.21) ‘내역사’ 시즌 5: 15화: “평화로 가는 한국, 제국으로 가는 일본” 서승교수와 함께 1부
☞ (7.14)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2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7.07)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1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6.30) ‘내역사’ 시즌 5: 13화: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대표적인 7곡을 소개합니다”
☞ (6.25)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2부
☞ (6.23) ‘내역사’ 시즌 5: 12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옹진의 민간인 학살과 동키부대”
☞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1부
☞ (6.16)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리영희 10주기: 다시 돌아보는 삶과 정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인터뷰
“간결하고 정곡 찌르는 냉철한 글
지금의 언론인·학자들에 필요”

문학평론가 임헌영(79)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리영희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저작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에 대화 상대자로 나왔다. 1960년대 말부터 리영희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40여년 동안 가족 말고는 가장 가까이서, 가장 자주 지켜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임 소장은 리영희 선생을 “우리 사회과학을 ‘식민학문’에서 주체적인 학문으로 바꾸어낸 학자”로 기억했다. 인터뷰는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했다.
―가까이서 지켜본 리영희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
“대단히 냉철한 지식인인데, 냉철한 가운데 인간미가 있는 분이었다. 휴머니즘을 마음 바탕에 깔고 있었고, 사람에 대한 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할 줄 아는 분이었다.”
―어떤 계기로 리영희 선생과 가까워졌나?
“1960년대 말에 내가 잠깐 <주간경향> 기자를 했는데, 그때 <조선일보>에 계시던 리영희 선생을 찾아가서 만났다. 그분이 쓴 글이 존경스러워서 직접 뵙고 싶었다. 1970년 월간 <다리>가 창간되자 거기서 일하면서 리 선생을 자주 뵀다. 그러다 리 선생이 필화사건으로 1977년 감옥에 가고, 나도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통에 1983년에 출소한 뒤에야 다시 선생을 만났다. 1980년대 후반에 한길사에서 <사회와 사상>이라는 월간지를 냈는데, 리영희·강만길·박현채·김진균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편집위원을 맡았다. 잡지를 내야 하니까 수시로 만났고, 좌담회도 자주 열었다. 이 월간지에 리 선생이 ‘남북한 전쟁 능력 비교연구’를 비롯해 당시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한반도 관련 글을 발표했다.”
―리 선생은 언론인이고 학자였는데, 학자로서 리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나는 함석헌과 리영희를 분단시대의 두 지성으로 꼽는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함석헌, 70년대와 80년대는 리영희가 우리 지성사를 주도했다. 특히 리 선생은 사회과학 영역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리영희야말로 국제정치학을 주체적 학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베트남 전쟁과 현대 중국 연구도 우리 현실을 비판하고 타개하려는 궁극적 목적 아래서 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은 전혀 주체적이지 못했다. 우리 운명을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고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좌우하고 있는데,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국내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리 선생은 ‘한국 교수들 대다수가 미국 유학을 통해 거의 자기를 상실할 정도로 미국 숭배자가 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식민지 시대의 학문 태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을 깨뜨리고 우리의 관점에서 사회과학을 다시 세운 분이 리 선생이다.”
―문학평론가로서 ‘리영희 글쓰기’를 어떻게 보는가?
“리 선생은 9매짜리 신문 칼럼을 쓰기 위해 그 열 배에 이르는 자료를 메모해 줄여나가는 식으로 철저하고 꼼꼼하게 작업했다. 그런데 그렇게 쓴 글들은 이해하기 쉽고 명쾌했다. 특히 리 선생이 모범으로 삼은 사람이 중국 작가 루쉰이었다. 루쉰의 모든 작품을 깊이 읽었고,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글을 쓸 것인가’ 하는 글쓰기의 자세와 방법을 루쉰에게서 배웠다. 억압하는 강자들에게서 억압받는 약자를 해방하려는 루쉰의 태도와 정신에 늘 감명을 받았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르면서도 은유·풍자·유머·기지가 있는 문체가 거기서 나왔다. 사회과학적 글쓰기에서는 보기 드문 문체다.”
―리영희의 삶에서 후배들이 배울 점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리 선생은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세워 지켜 가려고 분투했다. 그런 자세를 지금 언론인들이나 학자들이 배워야 한다. 리영희의 기자정신이 지금 젊은 기자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하다. 리 선생이 기자 시절 수많은 특종을 했지만 누군가에게 얻어듣고 쓴 것은 거의 없고, 스스로 해당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완전히 파악한 뒤 취재를 통해 확인하는 방식으로 쓴 것들이었다. 그런 정신에서 나온 것이 리 선생의 책들이다. 리영희의 책들은 지금도 한반도 상황이나 미국의 본질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글 고명섭 선임기자, 사진 백소아 기자 [email protected]
<2020-12-03> 한겨레
여성 독립항쟁가도 볼 수 있기를
애국지사 사당은 ‘독립지사 사당’

창원시가 전국 최초로 창원지역사랑상품권인 ‘누비전’에 지역 독립항쟁가를 새기기로 했다. 2021년 새해에는 바라만 보아도 가슴 뭉클한 창원의 대표적 독립항쟁가 얼굴이 새겨진 누비전이 시장과 동네가게를 찾는 창원시민들의 손에 들려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처음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지난여름 도의회에서 열린 ‘대일항쟁기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 토론회’에서였다. 발제 중 이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경남도에서 ‘도내 인물조형물 설치 내역’을 요구해 받아봤더니 도내 33개 동상 중 독립항쟁가는 불과 3개였다. 국가에서 훈·포장, 표창을 받은 도내 독립유공자 수만 해도 1039명이다. 입증할 서류가 없어서 서훈되지 못했으나 대내외로 인정받는 독립항쟁가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상당하다. 경남에 기릴 만한 독립항쟁가가 단 3명뿐이던가, 한탄하던 즈음이었다.
결국, 나는 지난 10월 지역사랑상품권에 독립항쟁가를 새기자는 5분 발언을 했고, 여기에 창원시가 제일 먼저 화답했다. 창원시에 큰 박수를 보낸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치열한 독립항쟁사를 가진 나라지만 화폐 속 인물에 독립항쟁가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그런 일을 창원시가 해냈다.
그런데 여기에 딱 두 가지만 보태려고 한다. ‘누비전’ 시안을 보면 경남의 여성독립항쟁가가 없다. 남녀 기계적인 형평성을 맞추자는 게 아니다. 여성 독립항쟁가는 잊히고 묻혔을 뿐 남성 독립항쟁가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시대를 생각해보라. 여성은 운신 범위가 결코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남은 많은 여성독립항쟁가를 배출했다.
김조이(金祚伊·1904∼?)는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사법살인의 희생자 조봉암 선생의 동지이자 아내로, 여성·민족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청년단체를 조직해 항일항쟁을 하다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으나 그나마 2008년 건국포장 수훈으로 국가의 위로를 받았다. 진해구 성내동 출신인 김조이는 조선왕조 마지막 진해(웅천)군수의 손녀였다.
김명시(金命時·1907~1949)는 마산합포구 오동동에서 태어나 19살 마산을 떠난 후 26년 동안 중국과 만주벌판에서 빛나게 암약했다. 일제에 붙들려 7년간 옥살이 후에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 입대, 총을 들고 무장독립투쟁의 최전선을 누볐다.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수식어는 김명시란 인물에 호기심을 갖게 하는 작은 기제일 뿐이다.
대표적으로 이 두 분을 언급했으나 경남의 여성독립 항쟁사가 유구하니 경남의 남녀 독립항쟁가 여러분이 누비전에 나란히 있는 모습은 의미가 클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현재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있는 애국지사 사당의 명칭이다. 애국지사는 법적 용어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항쟁으로 서거한 분은 순국선열, 생존한 분은 애국지사로 나뉘어 예우가 달라진다. 그러나 현재 애국지사 사당에는 순국선열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유족이 만든 기념비 등에서 용어를 혼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공공기관이 만든 사당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애국지사 사당 대신 ‘독립지사 사당’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김영진 경남도의원 ([email protected])
<2020-12-02> 경남도민일보
☞기사원문: 독립항쟁가 새긴 ‘누비전’에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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