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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포용적 전위주의와 경제발전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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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포용적 전위주의와 경제발전의 딜레마

admin | 토, 2021/08/21- 21:42

앞에서 나는 지식경제를 국한되고 얕은 형태와 확산되고 심화된 형태로 구분하여 해명하고 지식경제를 심화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요구사항들과 이러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배경조건을 탐구하였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 주제에 관해 더 큰 세 가지 시각을 검토하겠다. 첫 번째 시각은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선택지들과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두 번째 시각은 세계 최고 부국들의 정치경제학 및 정치와 포용적 전위주의의 관계다. 세 번째 시각은 경제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공급과 수요의 상호수용이나 반복적인 불균형)에 대한 지식경제(고립적 형태이든 포용적 형태이든)에 관한 나의 주장이 갖는 중요성이다. 이 세 번째 시각은 이어서 경제이론의 일부 중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이 함축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시각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연구가 경제생활의 가장 심층적이고 보편적인 특성들을 파악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판단을 지지한다.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은 명백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20세기 후반의 발전경제학의 중요한 공식은 산업화가 표준적인 형태의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수립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산업화를 통한 가장 부유한 경제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이 공식은 내가 차차 논의하려는 이유들로 인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이 공식에 대한 대안, 즉 지식경제의 확산되고 포용적인 형태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강력한 제도적 역량과 교육적자원을 가진 가장 부유한 경제들조차 이런 방향에서 크게 전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건에서 더욱 빈약한 개발도상국들이 전진한다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낡은 전략은 실패한다. 새로운 전략은 낡은 전략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까다롭고 너무 동떨어져 있다. 오늘날 발전에 대한 모든 사유는 이 딜레마와 교전함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 딜레마는 경제발전에 가장 절박한 실제적인 도전이 되었으며, 동시에 현재 활용 가능한 발전 관념들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폭로한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를 상기해보자.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은 기초 여건들, 즉 교육과 제도들에 의해 제약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전경제학이 ‘인적 자본’의 형성에 대해 했던 입에 발린 말에도 불구하고 발전경제학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 제도적 구조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에서 욕망의 현실적인 표적이었던 대량생산 방식의 산업화는 교육의 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주요한 요구는 노동자들에게 기계처럼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교육은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타 근본적 제도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발전경제학은 역사적 상황(규제받는 혼합적인 시장경제)에서 기성품으로 발견한 경제적 제도들을 거의 수정 없이 추천하는 것에 대체로 만족하였다. 중요한 관심사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재산에서 또한 재산이 창출한 소득흐름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점과 국가가 장기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러한 전략을 단기정책으로 전환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계획기구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주요 메시지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중단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최상의 방식은 노동자와 자원을 경제의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서 높은 부분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농업에서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제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대량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의 천편일률적인 특성과 대량생산을 위한 교육적 제도적 전제조건들의 상대적 소박성은 생산성 증가와 더불어 성장 증가가 단시간에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장 증가는 계속 전진하다가 기초 여건에서의 상응하는 전진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한계에 직면한다. 그러나 선행하는 제약조건들과의 충돌은 위험요소가 되기보다는 그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관철된 부문(포드주의 제조업)으로 노동자와 자원을 이전시키면서 시작되었던 변혁을 지속시키는 자극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대량생산이 가장 부유한 사회들과 연결되었던 세계경제에서 산업화는 국제적 노동분업의 증가를 의미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이러한 처방에 더는 의존할 수 없으며, 자신들과 가장 부유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도 없다.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오래 전부터 너무 이른 탈산업화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을 겪어왔다. 또 다른 개발도상국들은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거대기업들에 유용한 지구적 가치사슬에서 (국제기준에 비추어) 저임금과 분업화되고 종속적인 틈새를 결합함으로써 대량생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개도국들은 그 상부국가, 즉 전형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부국에서 실험주의적이고 지식집약적인 생산의 친숙한 고립적 형태를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의 상품화된 측면을 끌어안았다. 소수의 국가들(특히 중국과 인도, 어느 정도는 러시아와 브라질)만이 언제나 고립적 형태로서 세계적인 지식경제의 전초기지들을 설치해왔다.

발전경제학의 표준적인 산업화 처방이 작동을 멈춘 데에는 서로 연관된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세계에 산재한 그 독점적 기지들로부터 나온 선진적인 생산은 철 지난 대량생산을 점차 경쟁에서 물리칠 수 있다. 선진적인 생산은 전통적인 제조업의 제품들을 더 효율적으로 더욱 우수하게 생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내가 초-전위주의라고 불러온 체제 아래서는 선진적인 생산은 생산라인의 표준화된 부분을 대체로 임금과 세금이 낮은 다른 나라에 위치한 공장에 할당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은 발전경제학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전위라기보다는 이제 지구적인 생산라인들에 대한 위성(짝패)으로 변한다.

둘째,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적 산업화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의 증가와 더 이상 연관되지 않는다. 세계 경제에서 더 유효한 구분선은 제조업과 여타 모든 것(특히 농업) 사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분선은 (과학적) 영농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확립된 선진적인 생산의 프린지와 여타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한다.

셋째,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의 중대한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부문들 간의 구분들은 효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구분들의 경직성은 상대적 후진성의 신호를 나타낸다. 모든 형태의 지식경제는 일천하고 제한적인 형태이든 발전되고 확산된 형태이든 이러한 구분들을 전복한다. 지식경제는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차이를 약화시킨다.

넷째, 대량생산 제조업이 생존하는 경우에는 노동과 조세에서의 차익취득이 낙후한 생산의 입지를 몰아냄에 따라 대량생산 제조업은 더 낮은 임금과 더 작은 세금을 향한 경주에 입각해서만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생산의 기반설비로서 운송, 통신, 에너지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능력에 대한 공적투자 재원의 부재와 저임금은 전위부문을 향하는 운동을 위축시킨다.

그러나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계승형태는 대체로 어떤 일반적인 견해와 처방을 포기하였다. 그 계승형태는 빈곤층에 대한 상이한 정책들의 차별적인 효과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은 결함 있는 구조적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 계승형태는 현대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와 일치하여 구조적 비전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을 선호한다.) 실패한 공식에 대한 대안은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경제 여건에서 이곳에서 그곳으로 이르는 데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매개적인 조치들을 통해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에로의 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낡은 메시지에 대한 대안을 찾는 사람들은 당연히 낙담할지도 모르겠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약속과 그다지 격차를 보이지 않는 경제체제에서도 포용적 전위주의가 외견상 영웅적이고 불가능한 기획으로 머문다면, 포용적 전위주의의 교육적, 도덕적, 제도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일이 더욱 요원해 보이는 사회에서 포용적 전위주의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이러한 사회는 교육 및 법의 기초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극단적인 불평등과 방향들 및 체제들의 혼란(이러한 혼란은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독재를 통해서만 중단된다) 사이에서 자주 표류하는 나라들이다. 이러한 나라의 시민들은 최저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도 허약한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최대치를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지도 모른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을 고려하기 전에, 이 문제가 21세기 초반의 브라질과 같은 경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추구라는 과업이 제시한 도전이 부유한 경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불가피한 이유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한 사례도 문제를 해결하기 적합한 형태로 다시 규정하는 작업에 일조할 것이다.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자극 아래서 브라질의 남동부, 특히 상파울루 주에 위치한 브라질 제조업의 핵심은 대량생산이었다. 대량생산은 처음 설치된 시점에서도 이미 철 지난 것이었다. 대량생산은 제조업에서 탁월성의 기준에 도달하였고 그 이래로 일반적으로 이 기준을 유지해왔다.

어쨌든 대량생산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핵심에서 퇴행적인 제조업 생산양식으로 점차 변모해왔다는 부담 아래서 그렇게 해왔다. 이러한 철 지난 포드주의는 노동수익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빈번히 속류-케인스주의의 엄호 아래 제공된 신용보조금과 세금우대 등) 국가지원에 대한 의존을 대가로 해서만 경쟁력을 갖는다.

지식경제는 브라질에서도 출현했지만 매우 고립적인 형태로 몇 군데에서 신생기업들과 첨단 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출현하였다. 유명한 준(準)국가적인 기술학교와 지원센터의 네트워크(바르가스 치세의 조합주의의 유산)는 선진적인 제조업에서 이러한 고립적인 활동들을 지원해왔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은행 중 하나를 포함하여 막강한 공공은행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중소기업에 대한 가장 까다롭고 매우 이례적인 지원 형태, 즉 생산적 관행(농업 외의 확장 서비스)의 개선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기구도 보유한다. 이러한 지도관행에서 발전된 원리는 정부와 신흥기업 간의 분산적 협력관계와 그러한 기업들 간의 협력적 경쟁을 서술한 “지역적 생산 협정제도(local productive arrangements)”의 개념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경제체제들에서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선진적인 중견기업)은 대체로 결여되었다. 나아가 브라질의 제도적 장치나 발전의 원리들(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재정적 신뢰의 추구까지) 중 그 어느것도 브라질이 너무 이른 탈산업화의 가장 두드러진 실례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1세기 첫 10년간 상품가격의 상승과 농업, 목축업, 광업 제품에 대한 중국발 수요의 여파로 제조업은 생산과 수출품들의 백분율에서 극적으로 감소했다. 철 지난 포드주의는 대체되거나 전환되기보다 간단히 위축되었다. 브라질은 부자가 되기 전에 늙어가는 중이었으며, 지식경제를 성취하기도 전에 대량생산을 상실하고 있었다.

한편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기업적 문화들 중 하나를 계속해서 지원했다. 두 번째 혼혈인종의 프티부르주아 계급과 이 계급의 경로를 따르려고 시도하고 독립성과 주도성을 추구하는 이 계급의 문화를 포용하는 수백만 명의 가난한 브라질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화의 강력한 담지자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경로를 따르고자 하였다.

동북부의 반-건조한 오지들과 같은 일부 극빈지역에서 17세기 선대제수공업부터 20세기 후반의 낡은 대량생산에 이르기까지 유럽 시장경제들의 다양한 관행, 법적 기구들, 심지어 기술이 공존하였던 페르남부코내지의 섬유산업지대와 같은 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기업가적 정신은 대체로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방향을 잃었지만 거의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였다. 국가발전의 새로운 의제가 제시되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례는 그러한 의제의 원재료였다.

이러한 상황들이 제기한 질문은 온 나라가 나중에 다른 것이 되기 위해 철 지난 포드주의의 연옥에서 한탄하면서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가 먼저 되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이 나라와 이 정부가 남동부의 낡은 산업 중심지들 바깥에서 포드주의 이전 단계에서부터 포드주의 이후 단계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조직할 수도 있는 지였다. 이 질문에 대한 전자의 답변은 이 장의 도입부에서 열거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자의 경로를 답습하는 것은 전자의 결과를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은 세상에 전례가 없는 어떤 것의 성취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앞선 지면에서 기술한 발전의 딜레마의 브라질다운 형태에 불과하였다.

브라질 사례는 발전 딜레마의 몇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첫 번째 요점은 이 딜레마가 허위의 딜레마라는 점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전진은 어떤 조건에서도 어렵지만, 개발도상국의 조건에서는 특히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조업에 사후(死後)세계를 부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기보다는 더 나쁜 것이며 실로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한 제조업은 고전적 발전경제학이 가정하였던 것과 같은 “무조건적 수렴”의 매개체로서 더 이상 복무할 수 없으며, 앞서 내가 논의한 모든 이유들로 인해 작동할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공장제 대량생산은 더 이상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아니므로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메시지는 더 위축되고 더 제한적인 어조를 띤다. 그 메시지는 개발도상국에게 “관례적으로 산업화하고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명백히 겸손함의 호소력을 갖는다. 메시지는 잘 알려진 경로에서 인내심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우리의 생산능력의 진화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 노동분업에서 일어날 불가역적인 변화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고전적 발전경제학의 주장은 모든 경제체제들이 자신보다 앞서는 경제체제들의 과거를 나중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의 미래로 예행연습하면서 똑같이 가차 없는 진화의 순서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견해에 의존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본성은 하나의 장소에서만 변화해온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은 세계의 모든 주요 경제체제에서 변화해왔으며 그 본성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입지는 직접적으로 또한 국제적인 노동분업에 대한 생산방식의 영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량생산을 국가적 발전의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브라질의 예에서, 브라질 경제의 나머지 부분을 20세기 중반의 상파울루로 바꾸려는 시도는 사라진 세계와는 다른 어떤 것(퇴각임과 동시에 투항으로 이해되는 후퇴, 달리 말하면 국제적 전위부문에서는 퇴각이고 생산의 전선에 도달한 국가들과 기업들에 대해서는 투항)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드러나는 두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세계의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포용적 전위주의와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구분해주는 (앞의 장들에서 논의한) 조건들의 하나가 아니다. 이는 모든 선진적인 방식의 형성에 관건적인 자원(사회에 널리 확산된 부단한 활기와 기업가적 충동)이다. 그 특징적인 의식형태는 엄청난 수의 빈곤한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기보다는 프티부르주아적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과 독립성을 열망한다. 욕망의 기본 목표는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가족기업이다. 경제의 핵심적인 불행은 기회와 수단의 부족으로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와 생명의 엄청난 저량(貯量)을 거부하고 통제하고 위축시키면서 탕진하는 것이다.

어느 경제에서도 대량생산은 자립과 주도성의 세계로 진진입하려는 후보자들 중에서 소수만을 채용해왔다. 대량생산과 제조업의 제휴와 표준화의 이면으로서 대규모 대량생산에 대한 의존은 대량생산이 다수에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고립적이고 일천한 전위주의의 엘리트주의적 제약 아래에 있는 것으로 현재 알려진 지식경제는 이와 같은 내재적 제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용적이고 심화되는 지식경제로 가는 경로는 고단하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에서 광범위한 경제성장을 위해 이와 같은 인간의 에너지를 활용하려면 두 가지 문제, 즉 정치적 전략적 문제와 개념적 제도적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정치적 전략적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기획을 자신의 대의로 삼는 좌파가 소생산자계급과 이들의 물질적 야망과 도덕적 태도를 공유하는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편견이다. 좌파들은 이러한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이러한 계급의 관점에서 만나고 이 계급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는 형태들에 대한 관념을 확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신에 전통적으로 이들을 적으로 선택하였으며, 이는 20세기 유럽 역사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러든지 혹은 말로만 그러든지 프티부르주아 계급에게 고립되고 후진적인 가족기업이라는 기본형태 이외에도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는 방법을 제공해야할 필요성이다. 그것은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조건에 대한 나의 앞선 논의에서 제시한 의제이다. 이 의제는 시장질서의 제도적 재구축에서 시작되고 거기에서 끝난다. 처음에는 생산자원의 접근 수단을 적절하게 수정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분권적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실험주의적인 조정을 형성하는 법적 혁신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분권화된 경제주체들이 사회의 자본자원을 이용하고 서로의 노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들의 근본적인 확대와 다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예증된 세 번째 요점은 포용적 전위주의에 봉사하도록 시장질서의 쇄신을 시작할 제도적 기제가 단편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제도적 기제의 부분들은 모든 주요 경제에 존재한다. 제도적 쇄신작업은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브라질 정부와 심지어 지역 주정부들도 내가 앞서 설명한 제도혁신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요구된 다수의 기구들에 의존할 수 있다.

즉 개발은행들, 자신의 관행을 개선하려는 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조직들, 개발도상국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업들이 보유한 수용의 여건과 역량에 기술을 적응시킴으로써 기술의 개발과 전수를 목표로 한 기구들, 선진적인 제조업을 전담하는 지원센터와 학교를 포함하여 기술학교들의 준정부적인 네트워크 등에 의존할 수 있다. 여전히 결여된 요소는 이러한 도구들을 종합하고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에 복무하도록 활용하는 방식이다. 접근형태들을 조정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보다는 대량생산이 절정에 이른 이후에 일어나는 발전경로에 관한 지도적인 이론적, 프로그램적 견해가 없다는 점이 더욱 중차대하다.

이러한 발전의 딜레마는 진짜 딜레마가 전혀 아니다. 이 딜레마의 한축(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이 권고한 경로를 계속 따라가고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개발도상국에 대한 현실주의적인 도달지평으로 수용하라는 선택지)은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내놓는다. 딜레마의 첫 번째 축이 제공하는 것은 기껏해야 미래의 전망이 없는 현상유지책이다.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접근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견해가 없으므로 이러한 후방진지는 현실주의라는 부당한 평판을 획득한다. 이러한 후방진지는 익숙한 것에 대한 공상적 견고함에 의존할 수 있다. 21세기 초에 부유한 북대서양 국가들에서 쇠락하는 대량생산을 국내외 경쟁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일이 우파 포퓰리즘과 동시에 전통적인 사민주의의 경제프로그램의 큰 부분을 이루었다.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의 영향은 이윽고 정신적 식민주의의 확립된 작동기제를 통해 개발도상국들에서 그 위신을 높여왔다.

이 딜레마의 다른 축(개발도상국의 여건에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지식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러한 대안을 실천하는 열쇠는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을 조각들로 분해하고 이를 단계별로 실천하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법적 제도적 요건들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하나의 체계를 실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중에 지도를 수정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궤도를 따라서 ‘결합되고 불균등한 발전’은 이 경로를 여행하는 하나의 가능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거의 항상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식]경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가장 부유한 국가들보다 주요한 개발도상국에서 더 제한적이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주장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장 발전한 국가에서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야 다른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비교해 보자. 마르크스의 추론은 경제사회의 조직형태들이 단선적인 진화적 계기를 이룬다는 동일한 가정에 의존하였고, 이러한 가정이 그의 모든 사회경제이론을 고무시켰다.  오로지 선진경제들만이 불가피한 여정의 모든 단계들 완성하였을것이기 때문에 선진경제들은 역사가 지정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는 마르크스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상대적 후진성의 조건에서 수행된 이행은 과정과 결과에서도 이론이 제시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서유럽에서 착수된 혁명적 사회체제들의 짧은 경험들이 보여주었듯이 선진경제국에서도 이행은 그러한 모형을 따르지 않았다.

주변부 경제에 대한 중심부 경제의 우위성 관념은 도전적인 교란이 유발하는 독보적인 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관념은 다른 곳에서 수입된 제도적 안배들이 원래 있던 곳과는 달리 이곳에서 기능하지 않았고 기본적인 필요나 높은 희망을 충족시키지도 못함으로 인해 이러한 안배들을 거부하는 데에서 나오는 장점을 깨닫지 못했다. 중심부 경제에서 더욱 근본적인 대안들에 대한 개방성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 재앙의 자극이 없다면 점차 성취되기 어렵다고 드러났다. 그러한 자극이 존재하는 경우에도 엘리트들의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연대는 역사적 기회의 창을 닫아걸고 중요한 대안들로 인해 동요하지 않는 질서를 복원한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대체로 증명하였다.

다음 두 가지 요인들은 서로 결합하여 개발도상국들(특히 자신을 세계에서 지배적인 이익과 사상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라들)에게서 고립적 형태보다는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를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았다. 첫 번째 요인은 이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허약성이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집단적 전제주의에 희생되거나 아니면 그 변혁적 잠재력이 북대서양 국가의 헌법적 안배들을 모방하면서 빠져나갔다.

두 번째 요인은 정신적 식민주의이다. 개발도상국의 지적 생활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가장 체념적인 나라들에서 우세한 사조에 굴복하는 현상이다. 정신적 식민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발전과 제도의 지역적 이단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독제는 해독제가 겨냥하는 메시지만큼 그 목표에서 국제적인 메시지를 공식화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 정통[무조건적 수렴테제]에 맞서 이단들을 보편화시키는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은 기존 생산형태의 한계점에 도달한 사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 아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경제발전의 가장 믿을만한 공식[무조건적 수렴]이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응답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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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19의 영향 속에서도, 유엔창립 75주년이라는 소중한diamond자축의 자리를 마련하는 한 해이다. 동시에 유엔의 재정기여도가 가장 높은 미국이 세계보건기구 WHO의 지원을 철회하는 사태를 접하면서 과연 유엔이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앞서 유엔은 많은 현안들에 직면하여 있다. 유엔과 산하기관들은 공공보건, 교육, 평화 그리고 일부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한 빈곤 등 과제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해결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임무에 대해서도 유엔은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이라크와 르완다 그리고 예멘의 내전 상황, 현재 진행중인 코로나-19의 사태 등에 무기력하기만 하다.

이러한 유엔의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제2차 대전 주요 승전국들로 구성된 안보리의 영구적인 의석 즉 P5의 확대를 요구하여 왔다. 예를 들어 인도와 터키에게도 영구의석을 부여하자는 안, 안보리의 의석수를 늘리자는 안, 아프리카 지역에 더 많은 의석수를 배정하자는 안, P5의 거부권veto을 폐지하자는 안 등등.

그러나 상기 제안들은 애매모호하고 본질을 벗어나 있다. 핵심은 1945년과 2020년 상황의 주요한 차이점으로 탈-식민지화를 정확히 인지하고, 안보리의 영구적인 상임의석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을 아래에 기술하고자 한다.

유엔의 뿌리는 식민지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 1945년 당시 P5중에 4개국은 식민제국들이었다. 지난 75년 동안 80개국 이상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쟁취하였다, 인도와 케냐 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이러한 흐름은 회원구성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45년 당시의 P5인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는 창립회원 50개국의 10% 비중을 차지했으며 인구수로는 50%을 넘어섰다. 2020년 현재로는, 여전히 인구수의 26%를 차지하지만 회원국 숫자로는 겨우 3%에 불과하다.

비록 임기제인 비상임의 10개국이 공개적으로 할당되어 있지만, 2년간 임기의 의석을 차치하려고 수백만 달러의 로비자금을 뿌려가면서 치열한 경합을 벌리고 있어서, 자연히 부국인 유럽국가들에게 기회가 편중되어 있다. 연구조사에 의하면 세계인구의 17.1%에 불과한 서유럽과 동유럽 전체가 안보리 의석의 47%를 차지하여 왔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주요 강국들이 비상임 의석을 주도하여 왔다. 일본의 경우 22년간 의석을 지켜 왔고, 브라질은 20년간을 유지한 반면에, 아프리카 국가 중에는 오로지 나이지리아가 10년간 역할을 한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편향된 조직형태는 유엔의 다른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특별히 사무총장의 경우, 1945년 창립이래 9번의 사무총장 중에 유럽백인 총장이 4번을 맡은 반면에 무슬림 출신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도 없었다.

유엔의 지도자들은 이런 편향성을 완화시키고자 산하기관 또는 사무차장 등 요직의 인사를 다양하게 선정하고 있지만 개별적인 인물의 선택은 해답이 아니다.

코로나-19의 예를 들어보자, 에디오피아 출신이 WHO의 사무총장직을 맡아 빈국들의 사정을 대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실질적 힘을 보태줄 안보리는,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지구상의 모든 전투행위를 중지하자는 유엔사무총장의 요청에 따라, 겨우 제2532호 결의문을 낸 것이 전부이었다.

결의문을 제공한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응도 늦었고 가난한 빈국들이 격리조치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국제적 자금지원도 부족한 탓에 결국 수십만 명의 죽음이라는 사태에 이르러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에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유엔을 아예 무시하고, G20및 IMF에게 아프리카 질병예방 통제조직의 지원과 코로나 예방에 대한 조언을 직접 요청하였다.

조직의 균형적 할당이 왜 중요하냐고? 유엔의 지난 75년간 회원구성의 주요한 변화는 오로지 탈-식민지(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경제분석가들이 확인하고 있듯이, 회원국가간의 경제적 균형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1940년대에 P5가 세계GDP에서 차지한 비중이 47%였는데, 현재에도 여전히 49%를 차지하고 있다, 회원수로는 고작 겨우 2% 수준을 넘고 있는데 말이다.

P5가 지닌 유엔의 입지가 경제적 제국주의를 강화시켜왔는지? 아니면 이들의 경제적 힘이 유엔에서의 입지를 강화시켜왔는지? 이는 상호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주제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P5국가들을 배제하지 못해서 유엔이 구조적인 무기력에 빠졌다는 비판에 대하여, 그들 덕분에 경제사정이 나아졌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후자의 반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탈-식민지상황에 따라 조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 더하여 P5가 대부분의 회원국가들에게 경제발전의 혜택을 골고루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해답은 1945년 당시 이상적인 국제지정학을 꿈꾸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유엔이 창립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안보리라는 조직은 단순한 산술적 대표성보다는 집단적인 책임과 실질적인 책임에 기초하여 구상되었다. 제2차대전의 종전이 이루어진 후, 샌프란시스코에 마주 앉은 P5 지도자들은 자신의 국가들이 그간 제국주의를 추구해 왔지만 상황에 대한 책임과 이를 이끌어갈 역량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경제적 역량에서는 변화가 없었지만, 2020년 현재 안보리 국가들은 현안에 대한 책임과 역량에서 1945년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구나 2030년, 2045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75년 동안에 더욱 커다란 차이를 보일 것이고, 기후위기 등 지구적 도전의 현안들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안보리에 영구적인 의석P를 차지할 자격을 지닌 국가는 세상에 없다. 다른 국가들을 대신하여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역할을 맡아야 하며, 수행에 대한 책임과 역량이 투명하게 제시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안보리의 개혁모임은 15의석 모두가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5년제를 조건으로 임기제이어야 하며, 로비비용의 제한과 더불어 모든 지역에 활짝 개방된 경쟁을 통해 선발되어야 하고, 일방적 지배를 배제하고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해 30년 주기로 2번의 연임 만을 허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개혁작업으로 안보리를 유엔총회처럼 허울뿐인 민주적 조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회원국가들이 역사와 인구 그리고 군사적 역량과 상관없이 모두 한 표를 행사하되 거부권이 없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된다. 집단적 의지를 표방하면서 공개적이고 다양성을 지녔지만, 책임이 없는 기구이어서도 안되며, G-7과 BRICS 또는 G20처럼 힘있고 부유한 나라들이 따로 모여서 힘없는 국가들을 무시하는 방식도 안된다.

현재 임기제로 선출된 회원국가들이 하듯이, 15개 의석은 모두 다른 국가들에 의해 자격을 적정하게 평가받아 선출되어야 한다. 이들은 유엔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동맹을 형성할 필요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룹을 형성하여 지구적인 현안들인 가난과 기후위기에서 팬데믹과 금융위기까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위임을 통해 책임있는 역량을 발휘해야 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P5국가들도 안보리에 잔류할 수 있지만 이들 역시 경쟁을 통해 의석을 맡아야 한다.

15개국이라는 안보리 이사회 숫자가 초기부터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협력의 원칙을 기반으로 의사결정과정을 효과적으로 진행해야 하며, 거부권에 관해서는 이를 동조하는 2개국 이상의 지지를 획득해야만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거부권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출범부터 무기력했던 유엔총회의 실패로부터 차별성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기 제안을 비판하는 측은 P5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결정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단한다. 실제로 P5의 몇 국가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유엔에 기반한 결정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5개의 상임국가 중 3개국은 유엔총회가 인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결정을 무시하고 있다. ICC는 그 동안 수백만은 아닐지라도 수십만의 세계시민들에게 정의를 제공하는데 크게 공헌하여 왔다. 유엔은 비록 P5국가들이 무시하더라도 ICC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지금도 역할을 하고 있다.

향후 다가오는 75년 또다시 세계를 무책임하고 불공정하게 방치할 수는 없다. 유엔개혁 모임은 미래의 도전에 과감히 호응하여 유엔을 목적에 부응하고 부여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조직으로 만들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출처 : 포린폴리시 FP(ForeignPolicy) on 2020-09-17.

Hannah Ryder

유엔개혁 및 발전모임의 좌장이자, 국제전략연구소의 아프리카 프로그램 책임연구자이며, UNDP 중국조직의 정책파트너십 책임자를 역임했다

화, 2020/09/2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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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국은행은 2017년 미국이 주도한 경제제제로 북한에는 -3.5%의 경제후퇴가 있었다고 발표하였고, 남한과 미국의 정책당국자들은 북한이 마치 제재에 굴복하여 미국과의 협상에 응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아래의 칼럼은 소련체제가 무너지기 이전부터 동유럽과 사회주의국가의 사회경제 문제에 정통해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교의 동아시아 학과장인 R. Frank 교수의 글로, 북한 경제는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으며, 제재가 풀리면 높은 수준의 경제적 성취도 가능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북미 간에 핵과 미사일시험, 그리고 서로 괴멸을 입에 담던 위험한 설전으로 얼룩졌던 2017년을 지나, 2018년의 한반도에는 정상회담과 비핵화와 협력선언들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에 대한 설명중 하나는,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펼쳐온 “최대압박” 캠페인이 성공을 거둬 김정은이 경제제재의 강도높은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장기전략이나 경제에 대한 평가 중 그 어느 것도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하지 않고 있다.

칼럼_190109

북한은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부터 비상체제 아래로 들어갔다. 선군정책 이라고 불리는 이 체제는 2013년 김정은에 의해 공식적으로 끝이 났고, 이제 핵과 경제개발을 동시에 진행하는 병진노선이 그 뒤를 이었다. 5년 뒤, 2018년 4월이 되자, 병진노선의 성공이 선포되었다. 병진노선은 5개년 계획에 따라 모든 자원을 경제개발에 투입하는 정책으로, 2016년 제7차 조선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바 있다.

북한이 빠른 경제발전을 위해 취할법한 방법으로 동아시아 개발모델의 형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방식의 변종은 일본, 남한, 대만, 그리고 중국에서 관찰되기도 한다. 권위주의적이고 강력한 국가, 수입대체제에 대한 선호, 인건비가 낮고 교육수준이 높은 노동력과, 북한에서도 부정될 수 없는, 유교적 노동관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가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아시아 모델의 구성요소 중 현재 북한에는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수출주도적인 경제구조, 그리고 많은 양의 기술과 자본유입이 그것이다. 이 요소들 중 어느 것도 쌍방간, 다자간의 경제제재가 유지되는 한 외부에서 도입될 수 없는데, 이러한 제재들을 지속하는 결정적인 역할은 미국이 수행하고 있다.

상기적 관점에서 볼 때, 지난 1월 평창 올림픽에서 시작된 뒤 1년간 몇 차례 이어진 남북 정상회담을 거치며 속도가 붙은 외교적 행동에는, 국제적 경제교류를 통한 북한의 장기적 경제발전에 대한 대한민국의 거부를 철회시키겠다는 전략적 목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략적 관점은 관계회복에 임하는 북한측의 동기에 대한 기존의 분석과는 다르다. 기존의 관점은 경제제재로 인한 상황의 악화를 통해 평양이 무릎을 꿇게 하였으며, 대화에 임하게 하였다고 판단하여 왔다. 하지만 북한의 현 상태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에 비추어 본다면, 상기의 판단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도 모순되는 주장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한국은행이 2018년 7월 발표한 수치를 보면 2017년 북한의 경제는 3.5퍼센트 후퇴하였으며, 이는 경기불황으로 인해 평양이 협상테이블에 앉을수 밖에 없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한국은행의 예측은 북한의 대외무역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대외무역의 주요한 상대는(관련자료의 출처 또한) 중국이다. 중국의 무역자료가 지닌 신뢰성에 대한, 그리고 자주와 경제자립정책을 수십 년 간 펼쳐왔던(비록 주장하는 바처럼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라의 경제상태에 대외무역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국영화 비율이 높은 국가들에서는 GDP규모를 엿볼 수 있는 수단인 북한의 공식 세수자료를 보면, 2017년 세수는 4.9 퍼센트 성장했다. 그리고 2018년 10월에 있었던 흔치 않은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경제학자는 북한이 2016-17년 사이에 2.96조 달러였던 GDP를 3.07조 달러로 성장시켰다고 주장했고, 이는 3.7퍼센트의 증가율이다. 두 가지의 수치 모두 한국은행의 -3.5퍼센트 성장률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올해 북한 내부에서 들려온 일화들로 미루어 봐도, 경제위기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규모 토목사업들 또한 관찰된다. 원산 관광특구나 삼지연 지방의 초대형 사업들뿐만 아니라, 평양에서 중국 접경지역인 신의주에 이르는 주요도로에 들어선 주유소들까지, 모든 것들은 늘어나는 경제활동의 지표이다. 고속도로들에선 소형 승합차들이 택시영업을 하고 있고, 트럭들이 새로운 중산층들인 부유한 상인들과 탈중앙화된 국영기업체들의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다. 평양은 반복되는 작은 규모의 교통체증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두 번의 연례 무역박람회는 비중있는 국제회사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들과 사업체들에게 있어 바쁜 행사였다. 바쁜 소비활동들이 장마당들과 광복지구 백화점의 쇼핑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Daily NK를 비롯해 북한에 자리잡은 정보망들을 통해 보고되는 물가 수준도 비교적 안정적이며,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의 압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18년은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북한경제에는 비교적 괜찮은 한 해 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는 없었던 한 해로 보인다.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현실은 일부 경제제재에 의한 것이며, 2018년에 시작된 관계회복의 진행이 멈추지 않는다면 이러한 제재를 제거하는 것이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다.

 

Rudiger Frank

University of Vienna 동아시아 학과장과 동아시아 경제사회위원회의 의장을 역임

수, 2019/01/0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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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올해는 ‘천당에서 지옥으로’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지지율의 부침이 극심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의 완벽한 복수라고 할 대첩의 기억은 이제 희미하기만 하다. 전운이 감돌던 위기감, 남북 정상의 연이은 만남이 가져온 감동과 기쁨, 사상 초유의 북미 정상회담이 야기한 흥분도 기억 저편에 있다. 눈 밝은 시인의 표현을 빌어 말해 보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룬 결과는 지지율 폭락

이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참여정부 당시의 경험을 오독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포스트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포함해 많은 경우 참여정부 당시에 포스트를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참여정부 실패(낮은 지지율, 연이은 선거패배, 정권채창출 실패, 노 대통령의 서거 등)의 가장 큰 원인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정책(물론 참여정부의 정책패키지가 근본적이고 급진적이었는가는 논쟁적인 주제다)의 추진에서 찾는 것 같다. 즉 ‘시간이 한참 경과한 후에 나타나는데다 다수 유권자들에게 소구되지도 않는 정책들을 펼치다가 지지율 하락과 선거 참패를 불러왔고 급기야 노무현을 잃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인식이 이런 수준이라면 펼 수 있는 정책 조합과 선거전략은 자명하다.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남북 경협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면 투자와 고용, 성장의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에 올인하고, 사회경제적 모순과 개혁은 관리하는 수준에서 운용하며,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적어도 사회경제 개혁에 관한 한 문재인 정부가 그간 보인 스탠스를 보면 이같은 분석이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과 처방이 모두 틀렸다는 데 있다. 남북 관계라는 마차로 사회경제적 모순이라는 말을 견인할 수는 없으며, 양극화로 집약되는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국민적 일체감과 유대감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정치적 반대자를 만들지 않는 정치는 반(反)정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정책과 정무를 복무시키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남북관계를 힘있게 추동해야 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 적극적 지지자들과 격렬한 반대자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언컨대 지속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위태롭기 그지 없는 지지율 80%보다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며 획득한 콘크리트 지지율 55%가 압도적으로 힘이 세며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는 근본적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미루고 그 대신 지지율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과는 재앙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게도 구럭도 잃은’ 셈이다.

칼럼_190108

 

부동산공화국 혁파부터 시작하자

부동산 문제야말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대표적 영역이다. 집이 없는 중산층과 서민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 집값에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완전히 배신당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경제는 압도적으로 부동산이다. 작년 7월 이후 본격화 된 문재인 정부 지지율 하락이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과 타이밍을 같이 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놀라운 대목은 문재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책임이 큰 김수현 수석을 정책실장으로 승진시킨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지나간 것은 잊자. 앞으로가 중요하다. 사면초가 상태에 몰린 문재인 정부가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길은 자명하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하면서 그걸 지렛대로 정치적 지지층을 강력히 복원시키는 길이 그것이다. 어렵고 힘든 길임을 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소에 올인한다고 해서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공화국 혁파에 나서면 당장은 건설투자가 줄고, 고용지표가 악화되며, 부동산 자산이 감소할 것이다. 정치적 후폭풍도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되는 대한민국’, ‘공정과 혁신이 가능한 대한민국’,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부동산공화국을 혁파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공화국 혁파로 생기는 정치적 반대자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정치적 지지자들(그들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수혜자들(언뜻 비조직적으로 보이고 미덥지 않게 여길 수도 있는)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 그런 안목과 믿음 없이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이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역사와 대의에 헌신하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를 지닌 정치인과 정당을 시민들은 끝내 지지하고 지켜준다는 믿음의 결합이다. 노무현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노무현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이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해 올해부터 부동산공화국 혁파의 담대한 길을 뚜벅 뚜벅 걷길 희망한다.

화, 2019/01/0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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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리는 지난해에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에 의해 발생한 혹독했던 더위를 잊고 살아 가고 있는 듯하다. 한국은 일인당 탄소배출량과 플라스틱 및 비닐을 세계적으로 제일 많이 배출하는 국가군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강력한 환경보호 정책과 포장과 보관 방식에 일대 혁명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현안이 되어버린 미세먼지 절감이라는 현안 정책 외에는 한국 정부의 별다른 정책이 들려오고 있질 않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필자가 별종으로 보이는 사회이다. 아래의 글은 물론 미국의 환경운동가 시각에서 작성된 기사이지만, 삼면이 바다에 둘러 쌓여있는 한반도의 장래에도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예시적으로 잘 경고하고 있다.


 

칼럼_190126
10월에 발행된 IPCC의 특별 보고서는 0.5도의 추가적인 온난화만으로도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2018년의 여름은 격렬했다. 치명적인 산불, 이어지는 가뭄, 숱한 생명을 앗아간 홍수와 기록적인 더위까지, 과학자들은 각각의 날씨를 기후변화와 연결하는 일에 있어서 극도로 주의하는 편이지만, 인류의 소비활동으로 인한 세계적인 온도상승의 격렬함, 이러한 추세가 반복될 공산, 그리고 지속기간은 다 같이 심화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이 추세대로라면 2018년은 사상 4번째로 더웠던 해가 될 것이다. 2015년, 2016년 그리고 2017년만이 2018년보다 더웠다. 파리 기후협약은 온도 상승을 섭씨 1.5에서 2도 아래로 유지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대수롭지 않게 기후변화에 접근한다면, 세기말이 될 무렵 우리가 지금보다 섭씨 4도나 더 뜨거운 지구를 향해 질주하고 있을 확률은 93퍼센트에 이른다. 이는 잠재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수준의 온난화이다.

 

경고와 심판

이미 1992년, 세계 각자의 과학자 1,700명이 섬칫한 “인류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이 악명 높은 서신은, 자연을 파괴하는 활동들의 고삐를 붙잡지 않는다면 인류가 자연과의 “충돌 경로”에 돌입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종말적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겠으나, 그런 태도는 심판의 시간이 가까워진 이때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 2017년에는 184개국의 과학자 15,000 명이 갱신된 버전의(그리고 더 암울해진) 1992년 헌장에 공동으로 서명하였다.

최신 버전의 제목은 “인류에 대한 세계 과학자들의 경고: 두 번째 공지문”이었다. 이 버전은 원본에서 제기되었던 환경적인 어려움들이 (담수원의 고갈, 어족자원 남획, 생물다양성의 급격한 악화, 유지 불가 수준의 인구증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해당 문제들이 “훨씬 더 악화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데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삼림벌채, 그리고 농업 생산, 특히 육류 소비를 위한 축산 등으로 인해 대두되고 있는 잠재적 재앙 수준의 기후 변화와 현재 우리가 가는 궤적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 이라고 보고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저자들은 “우리는 대량 멸종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5억 4천만년 새에 6번 정도 일어난 일이며, 현재의 많은 생물들은 이번 세기 안에 전멸당하거나 멸종위기에 몰릴 것이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곧 있으면 실패의 궤적에서 벗어나기엔 너무 늦을 것이며,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고도 강조하였다.

최근에는 지난 11월 23일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부가 1,600페이지 길이의 제4차 국가 기후 평가서를 내 놓았다. 이 보고서는 13개의 연방 기구들에 의해 편찬되며, 4년 마다 발행된다. 이 보고서는 특히나 더 잦은 가뭄, 홍수, 산불, 극단으로 치닫는 날씨, 수확량 감소, 병원균을 운반하는 곤충, 그리고 해수면 상승을 포함한 암울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모든 시나리오들 중 하나라도 일어난다면,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미국의 GDP는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우리가 지난 여름에 본 것을 생각해보자. 인류가 힘을 모아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욱 심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 혼란한 기후 속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한 번 보도록 하자.

 

 1. 멸종

2018년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 제임스 쿡 대학교, 세계 야생동물 보호기금은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해당 연구는 세계 야생동물 보호기금이 지정한 35개의 “우선 지점”에 서식하는 80,000여 종에 이르는 식물, 조류, 포유류, 파충류 그리고 양서류에 대해 기후 변화가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기후 변화가 제지 없이 진행된다면 지구에서 가장 다양한 종들이 살고 있는 아마존에서는 양서류와 식물의 70%, 그리고 조류,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의 60% 이상이 자취를 감출 수 있다.

연구에서 제시된 가장 걱정스러운 예상 지점은 중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에 걸쳐있는 Miombo 삼림지대로 해당 장소는 기후 변화에 취약한 “우선 지점”들 중 하나이다. 만약 지구의 온도가 섭씨 4.5도 오른다고 했을 때, 연구자들은 양서류의 90%와 식물, 조류,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의 80%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들이 믿기 힘든 손실을 겪으면 인간에게도 그 영향이 미친다. 저자들은 “이는 단순히 어떤 종이 어떤 장소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수십억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생태계 시스템의 중대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 라고 경고했다.

 

 2. 식량안보 불안과 영양 결핍

기후 변화가 실제로 생육기간을 늘려주면서 추운 지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유럽의 열대와 아열대 지방들은 상당히 많은 경작지를 잃을 수 있다. 해안에 인접한 국가들에게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경작지와 음용수에 염해를 입는 것 또한 문제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2에 열량을 공급하는 주 작물인 밀, 쌀, 옥수수, 대두는 온도와 강수량,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 등에 매우 민감하다. 2017년의 전면적인 연구에 따르면, 온도가 섭씨 1도씩 올라갈 때 마다 밀의 수확량은 6%, 쌀은 3.2%, 옥수수는 7.4%, 그리고 대두는 3.1%씩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서 최근의 기사에 따르면, 2050년경 존재할 것으로 예상된 이산화탄소량은 쌀이나 밀 같은 주 작물의 영양가를 떨어뜨릴 것이다. 이는 1억 7,500만 명에게 아연 부족을(불균형 성장, 불균형 면역체계, 생식불능 등을 포함, 여러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으킬 수 있으며, 또한 1억 2,200만 명이 단백질 부족을 겪을 수 있다 (부종, 간 세포 지방축적, 어린 아이들의 근육손실, 성장발달저해 등을 유발할 수 있음). 추가적으로 연구자들은 10억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일일 권장 철 섭취량의 대부분을 손실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는 빈혈과 여타 질병들에 노출될 위험성을 증가시킨다.

 

 3. 해안 도시들과 섬 국가들에 작별을 고하라

열을 가두는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는다면 해수면이 2100년까지 약 3피트 가량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상하였다. 이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5차 평가 보고서에 등장한 내용이다.

해수면 상승은 높은 파도와 강력한 폭풍을 유발할 수 있으며, 연안지역에 거주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올해 NOAA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해수면이 3피트 상승하는 시나리오 하에서 마이애미의 일부, 뉴욕 그리고 샌프란시스코가 2100년 경에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잠길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모든 나라가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특히 남태평양에 33개의 환초와 암초로 이루어진 국가인 크리바티는 첫번째 중의 하나일 것으로 예상된다.

수면 아래로 잠기는 건 크리바티 뿐만은 아니다. 2016년 이후, 태평양에 위치한 섬들 중 적어도 8개 정도가 이미 사라졌고, 지난 4월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세기 중반이 되면 대부분의 환초에서는 살 수 없는 곳이 될 것이다.

 

 4. 사회적 갈등과 집단 이주

2017년, 뉴욕 매거진의 부 편집장인 데이빗 월러스-웰스는 “주거가 불가능한 지구”라는 제목의 충격적이고 널리 읽힌 에세이를 집필했다. 에세이의 거의 대부분은 최악의 기후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는 홍수로 인해 줄어드는 자원과 늘어나는 집단 이주로 인해 “이 나라의 사회적 갈등이 두 배 이상 늘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해당 기사의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으나, 세계 은행은 2018년 3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물 부족, 수확량 감소, 해수면 상승이 2050년까지 1억 4,300만명을 현 주거지에서 쫓아낼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해당 보고서는 늘어나는 세계 인구의 55%가 거주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집중하였다. 놀랍지 않은 이야기지만, 가장 가난하고 기후에 취약한 지역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5. 치명적인 더위

2017년의 한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인구의 30% 가량은 연간 20일 이상 치명적인 수준의 습도와 더위에 시달린다. 현재의 추세대로 온실가스 배출이 계속된다고 했을 때, 연구자들은 세계 인구의 74%가 치명적인 더위를 20일 이상 견뎌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지금껏 너무나 무모했고, 그로 인해 미래를 위한 좋은 선택지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해당 연구의 저자인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의 카밀로 모라가 내셔널 지오 그래픽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혹서에 관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최악과 차악 뿐입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혹서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6. 급증하는 산불

지난 11월 Butte county에서 150,000ac가 넘는 대지를 태운 캠프 화재는 85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캘리포니아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화재로 기록되었다. 6월에 시작되어 북부 캘리포니아의 대지 300,000ac 가량을 전소시킨 멘도시노 산불은 캘리포니아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다. 두 번째로 컸던 화재는 2017년의 토마스 화재였고, 이 역시 산타 바바라와 벤츄라 카운티의 대지 281,000ac에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주 정부가 지난 8월 발간한 제 4차 캘리포니아 기후변화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의 화재피해는 더 커지기만 할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가스가 계속해서 늘어났을 때, 25,000ac 이상에 피해를 입히는 대형 화재의 숫자는 현 세기가 끝나기 전까지 50% 이상 늘어날 것이며, 산불에 의해 피해를 입는 면적 또한 연 평균 77%씩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참여 과학자 모임은 자신들의 블로그 포스트에서 “봄과 여름의 높은 기온과 눈이 빠르게 녹는 현상으로 인해 토양이 더 오랫동안 말라있게 되며, 이는 가뭄과 산불 시즌을 더 늘리게 되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미국 서부에서 두드러질 것이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덥고 건조한 상태는, 낙뢰나 인간의 오류로 발생한 산불을 더욱 격렬하고 오래가게 만든다.”

 

 7. 태풍과 허리케인: 더 자주, 더 격렬해진다.

현재로선 기후의 변화가 2017년의 주요 허리케인들(파비, 어마, 마리아, 오필리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우리는 따뜻한 해수 위의 습도 높은 공기는 태풍과  허리케인의 연료가 됨을 알고 있다.

 “대기중의 모든 요소들은 현재가 그 어느때 보다 따뜻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CNN의 수석 기상학자인 브랜든 밀러의 발언이다. “대기 중에 더 많은 수증기가 차 있고, 해수는 더 따뜻한 상태입니다. 이 모든 점들의 영향은 결국 한 방향만을 향하고 그건 더 최악으로 치 달리고 있습니다. 폭풍들이 더 급증할 것이고, 폭풍들이 지닌 강수량도 늘어나겠죠.”

이번 6월, NOAA는 “온실 온난화가 앞으로 다가오는 허리케인들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고 강수량 또한 현재의 허리케인들보다 많아지리라 보는 게 타당하다”고 결론지었다.

 

 8. 녹아버린 북극과 영구 동토층

극지방은 나머지 지방들에 비해 두 배의 속도로 따뜻해지고 있으며, 얼음과 눈이 덮고 있는 지역의 넓이가 점점 줄어들면서 “해류, 대기 순환, 어업 특히 기온에 커다란 변화를 줄 것이다. 이는 온도를 내려주는 표면의 얼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라고 캠브릿지 대학 극지방 해양 물리학 그룹의 수장 피터 와담스가 퍼블릭 라디오 인터내셔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로 인한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린란드의 기류에 영향을 주고, 이로 인해 그린란드의 빙상이 녹는 속도를 증가시킬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얼어붙은 극지방의 토양(영구동토층이라고도 불린다)이 녹으면서 메탄가스가 방출되고,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온실가스이다. 영구동토층은 1.8조 톤의 탄소를 품고 있는데, 이는 지구 전체의 대기에 머무르고 있는 양의 두 배에 이른다. 와담스는 영구동토층이 “한 번에 급속하게” 녹지 않을까 하는 점이 우려된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한 차례의 거대한 파동을 타고 터져 나오는 메탄의 양, 그리고 그 양이면 0.6도 정도의 탐지 가능한 기후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세계 기후에 커다란 악재가 될 수 밖에 없다.”

 

 9. 병원균 전파

불안하게도 영구동토층은 병원균으로 가득차 있으며, 영구동토층이 녹는다면 한 차례 얼었던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들이 풀려날 수 있다, 이는 아틀랜틱 지가 보도한 내용이다. 2016년 시베리아 지방에서 탄저병이 확산되면서 12세 소년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병원에 입원했다. 2,000마리 이상의 사슴들이 감염되었다. 해당 지역에선 75년 동안 탄저병이 발병한 사례가 없었다. 이유는? NPR의 보도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장기간의 혹서가 수십 년 전 탄저병에 감염된 채로 죽은 사슴의 시체를 녹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얼어 붙어있는 병원균들이 인류를 몰살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는 반면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진드기와 모기, 여타 병원균을 운반하는 생명체들의 지질학적 활동범위 또한 넓혀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텍사스 남부에서도 뎅기열이 발병하고 있습니다” 미주리 대학교의 미생물 병리학 교수이자 가축 병리생물학부 학과장인 조지 C 스튜어트 교수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이야기 한 내용이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말라리아가 발병하는 고도와 위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콜레라의 전파자인 Vibrio cholarae는 높은 온도에서 더욱 잘 분열합니다.”

 

 10. 죽어가는 산호들

세계에서 가장 큰 이산화탄소 흡수계인 바다는 기후 변화의 예봉을 받아낸다 .하지만 바다가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할수록 (일일 220만 톤에 이른다), 물은 더욱 더 산성화된다. 이는 모든 해양생명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여기에는 산호초 생태계도 포함된다, 수천 종의 생물들이 산호초에 의지하고 살아가며, 세계에서 약 10억 명의 사람들이 산호초에 의지하여 가족을 부양하고 소득을 얻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사이언스 지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산성화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대부분의 산호초들은 세기가 끝날 때까지 차츰차츰 용해되어 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러한 기후 예측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들이다, 하지만 점점 따뜻해져 가는 이 행성에는 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네이쳐 클라이밋 체인지 저널에서 최근에 발행한 보고서는 “인류의 건강, 수자원, 식량, 경제, 인프라스트럭쳐, 그리고 안보가 온난화, 혹서, 강수, 가뭄, 홍수, 화재, 폭풍, 해수면 상승 그리고 지표면과 해양 화학 등의 기후적 위험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는 467 갈래의 증거”를 담고 있다.

 

0.5도가 만들어내는 차이

19세기 이후로, 지구의 기온은 섭씨 1도 상승했다. 10월에 발간된 IPCC의 주요 특별 보고서에서는 0.5도만 더 온난화가 진행되면 재앙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아주 조금의 온난화라도 의미가 있으며, 특히나 섭씨 1.5도혹은 그 이상의 상승은 생태계의 부분적 손실처럼 되돌릴 수 없거나 장기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험성과 연결되어 있다.” IPCC 워킹그룹2의 공동 의장인 한스-오토 푀르트너의 말이다.

 “섭씨 2도보단 1.5도에서 지구 온난화를 통제할 때,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사회를 유지하며 상생하기가 더 쉽다.” 고 그는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행정부가 발간한 보고서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지속 가능하고 깨끗한 사회는 이제 먼 꿈처럼 멀어지게 되었다.

 

Lorraine Chow

She is a freelance writer for EcoWatch

월, 2019/01/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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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모두 신년 벽두부터 북의 신년사를 분석하느라 무척 바쁘다. 격세지감이다. 언제부터 우리사회가 북의 신년사에 이렇게 관심을 가졌던가? 과거에는 주로 운동권이, 그것도 NL진영 정도가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 신년사가 이제는 대한민국의 정계, 언론계, 학계를 넘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희한한’ 일이다. 왜 그렇게 북 존재가 180°로 확 바뀌었을까? 뭐니 뭐니 해도 그 중심에는 북의 핵무력 완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도 없다. 그 전제하에 이 글은 총 세 번에 걸쳐 2019년도 북 신년사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유는 많은 분들이 북 신년사를 분석해 내었지만, 본질을 제대로 짚은 신년사가 많이 없기 때문이다.(본인 또한 제대로 된 신년사에 접근하기 노력할 뿐 ‘완전하다’는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1부는 <2019신년사 제대로 읽기: 북 내부문제>이다. 2부는 <2019신년사 제대로 읽기: 남북문제>이다. 좀 의역하면 남북문제에 있어 2019년 북 신년사에서 오독하지 말아야 할 것들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마지막 편에 해당되는 제 3부는 미국문제(대외정책)에 해당되는 <2019신년사 분석: “새로운 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실리게 된다독자들의 많은 필독을 원하고, 문재인 정부에게는 제대로 된 이해에 바탕 해 2019년도는 남북, 북미관계 정책을 세워내는데 도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에게는 북 드려다 보기와 관련해 꼭 빠져나와야할 하나의 ‘악마의 늪’이 있다. 필자가 누누이 얘기하고 있는 ‘희망적 사고’이다. 단 한 번도 이제까지 예측이 맞지 않았지만 지금이나 예나 북이 언젠가는 자본주의적 방식의 개혁·개방에 나설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서는 체제전환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그 믿음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본다. 결론에는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체제우월주의를 그 근간으로 하여 현실적으로는 현실사회주의 붕괴경험이 우리 사회(대한민국) 전체에 사회주의체제는 언젠가는 반드시 붕괴된다는 확신과 환상을 심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세계적인 역사학자들(대표적인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조차도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로 단언했고,(그러나 그도 지금은 자신의 과거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 획기적인 부의 재분배만이 오늘의 민주주의 후퇴를 해결할 수 있으며, 사회주의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강조, 필자) 없다고까지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기정사실화되었다.

즉, 망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체제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북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회주의체제인 북이 자신들이 설정한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을 위해 뭔가의 조그마한 변화 시도조차, 또는 제도를 조금이라도 손질하면 이건 금방 ‘개혁· 개방’의 신호, 체제전환의 징조로 확대 해석되었다. 강성국가 앞에 ‘사회주의’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는데도 말이다.

역지사지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인데도 절대 역지사지 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인 우리가 사회양극화 현상 및 비민주적인 제도를 개선한다하여 이를 (사회주의에로의) 체제전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비록 정치적 논쟁은 있을 수 있으나, 절대로 체제전환과 (사회주의에로 진입하기 위한) ‘개혁·개방’을 상상해내지는 않을 것이다. 똑같이 북에게도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해서 이번 신년사는 그 연장선상에서 쓰고자 한다. 철저하게 역지사지 할 것이고, 희망적 사고에 함몰되지 않을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북 사회를 들여다보고자 할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으니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즉, 이 ‘빈곤한 상상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북은 이제까지 열 백번도 더 체제전환이 일어났어야 했고, 개혁·개방이 되었어야 했으나 그러한 본질적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 늪과 인식오류에서 벗어나야만 함을 안내하고 있어서 그렇다.

8-90년대 사회주의권이 멸망했을 때도, 90년대 초 제2의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김일성 주석사망 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도 모든 언론과 정치권, (북)전문가들은 북은 이제 정말로 정권이 붕괴되거나 체제전환이 일어난다고 했으나 그러한 현실은 방생하지 않았다.

또 그 사이에 수많은 제도의 변화들, 7.1경제관리개선조치, 6.28방침, 포전담당제, 기업책임관리제 도입 등 수많은 조치들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개혁·개방’과 연결시키려했으나 북은 여전히, 아니 더 소리 높여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의 정당성만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도 ‘사회주의 강성국가’, ‘사회주의 완전승리’, ‘사회주의 문명국가’ 등 온통 ‘사회주의’뿐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변화’와 ‘조치’를 ‘개혁·개방’으로, ‘체제전환’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 그런 해석과 이해로는 절대 옳은 대북정책이 나올 수 없고, 옳은 남북관계가 만들어질 수 없다. 제발 이제는 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자. 그 연장선상에서 ‘공존·공리·공영’에 입각한 대북관을 세워내자. 그렇게 북을 온전하게 보고, 그만큼 옳은 대북정책과 남북관계를 만들어내자.

칼럼_190114 중앙일보
사진: 중앙일보

 

이번 신년사 해석이 그런 북을 인식하는데 일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글쓰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전제는 깔고 가고자 한다. 우선은 일반적 의미에서 북 신년사가 항상 그러하였듯이 그 기본골격이 북 내부문제, 남북문제, 북미문제(대외정책)였다. 올해(2019)도 그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음을 전제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신년사에서 필자가 눈여겨 본 단어가 네 개 였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첫째, “국가제일주의”, 둘째, “농장원”, 셋째, “전 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 그리고 그 넷째가 “새로운 길”.(첫째와 둘째는 1부에서, 셋째는 2부에서, 넷째는 3부에서 주로 다뤄질 것이다.)

또한 세부적인 내용은 많은 분들이 분석을 하였음으로 본 글은 주로 전략적 이해가 필요하거나 오독한 부분, 간과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참고사항은 다음과 같다. 영역별 총괄평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그 전제를 깔고, 그 전제와 눈여겨 본 ‘네 개’를 중심으로 내재적 관점에서 해석풀이(혹은, 주석달기)를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 북 내부: 자강력 중심의 사회주의 노선의 정당성 확인과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에 의거한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갈 데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표적 오독: 사회주의 국가인 북이 사회주의체제 방식으로 그 한해를 총화·결속하고, 그 방향에서 전망을 세워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울 텐데, 이를 죽자 살자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하고 개혁·개방에 대한 희망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

▶ 남북관계: ‘사실상의’ 전쟁 없는 남북불가침시대로 진입했으며, 이를 토대삼아 ‘민족공조’의 새 시대 개척과 전 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에 힘을 쏟는 한해가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대표적 오독: ‘대가없는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재개를 2020년 국가발전전략 5개년과 연동하여 해석해내는 것, 민족공조문제를 문재인 정부의 운전자론으로 축소·왜곡하는 것 등이다.)

▶ 북미관계: 핵동결 확약과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그리고 조선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및 ‘새로운’ 북미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표명, 그러면서도 북이 먼저 주동적으로 취한 선의의 행동에 대해 계속 미국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든다면 ‘새로운 길’모색이라는 엄중 경고를 날렸다. (대표적 오독: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불이해북핵만의 비핵화’, ‘새로운 길에 대해 병진노선의 부활이니, 중국과의 밀월 등으로 오독)

 

자, 그럼 한번 시작해보자.

“정세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고 우리 식으로 사회주의경제건설을 힘 있게 다그쳐나가며 세대를 이어 지켜온 소중한 사회주의 우리 집을 우리 손으로 세상에 보란 듯이 훌륭하게 꾸려나갈(중략)”

‘우리국가제일주의’가 공식적으로 신년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한 ‘우리민족제일주의’, 국가의 근본이 인민에게 있음을 강조한 ‘인민대중제일주의’에 이어 2017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올해(2019) 신년사에 이렇게 등장시킨 것이다. ‘민족’, ‘인민’, ‘(사회주의)국가’를 3위 일체화 한 것이다. 좀 더 그들의 사상인 주체사상에 입각해 그 (철학적)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수령-당-대중의 3위 일체라는 논리구조와 맞닿아 있다. 그렇게 민족, 인민, 사회주의국가를 운명공동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국가제일주의’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회주의체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최고야’라고 한 것과 같게 된다.

또한 주목해서 봐야할 지점은 사회주의 국가체제의 기본에 아주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제7차 당 대회(2016)를 통해 밝힌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 그 연장선상에서 신년사가 발표되어 있어서 그렇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 그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봐야한다.

“2018년은 우리 당의 자주노선과 전략적 결단에 의하여 대내외 종사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사회주의 건설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당의 자주노선’과 ‘전략적 결단’일 텐데 먼저, 당의 자주노선은 2016년 제7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을 일컫는 것으로 보이고, 다음으로 전략적 결단은 2017년도에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경제건설 총집중노선(이하, 경제건설 총력노선)의 선포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또 들여다봐야 할 것이 ‘사회주의 건설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이다. 어떤 의미일까? 2016년 제 7차 당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완전승리노선과 경제건설 총력노선에 의거한 사회주의 강국건설 그 내용적 형태가 사회주의 문명국가로의 ‘새로운 단계’진입일 텐데, 그 문명국가가 철저하게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렇듯 이번 신년사에서의 독해핵심은 총괄적으로 북 체제가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해내어져야만 하는 그 어떤 내용도, 또 체제전환과 관련한 그 어떤 힌트도 유추할 수 없는 완벽한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원인을 조금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희망적 근거가 그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북이 제아무리 수령제중심의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띄고 있다손 치더라도 수령 개인의 독단과 독선,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이미지와는 아주 거리가 먼 모습의 확인이다. 신년사가 2016년에 채택된 사회주의 완전승리노선에 의해 발표되어졌다는 그 사실이 집단과 조직 속에 있는 수령임이 확인되어져서 그렇다.

더 불어 또 하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자력갱생의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가자.”라는 총적구호가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해석해 내어야 하는 것은 ‘새로운 북미관계’의 최종종착지가 서방세계의 경제지원이라는 비(非)등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와 그 조건으로 확보되는 열린 ‘경제적 공간’에서 그 사회주의 방식의 자립, 자강, 과학기술혁명에 의거한 ‘새로운 진격로’가 만들어 가겠다는 그런 방침을 확약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북이 요구하는 대북제재완화와 해제를 자꾸만 경제적 지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이유가 그렇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첨언하자면 제재완화와 해제는 자신들이 설정하고 있는 ‘사회주의 경제적 공간’을 확장하는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된다는 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음의 문장도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4월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는 병진 노선의 위대한 승리 하에 토대하여 우리 혁명을 새롭게 상승시키고 사회주의 전진 속도를 계속 높여나가는 데서 전환적 우위를 가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가 그것인데, 확인은 국가 핵무력 완성(2017.11.29.)에 따른 ‘경제건설 총력노선’으로의 전략적 노선의 정당성과 ‘사회주의 전진 속도를 계속 높여나가는 데서 전환적 우위를 가지는 중요한 계기’에서 확인받는 것은 병진노선에 의해 마련된 그 예비, 즉 “국방비를 추가적으로 늘이지 않고도 전쟁억제력과 방위력의 효과를 결정적으로 높임으로써 경제건설과 인민생활향상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2013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전환적 우위’로 말이다.

실천적으로도 위 총화가 이제까지 증명해내지 못했던 퍼즐이 완성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제까지 인민생활소비품에 있어 절대 다수(90% 이상)의 중국산에서 국산화비율이 높아진 이유확인이 그것이다. 즉, 북(조선)이 2018년 한 해 동안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노선으로 전환한 이후 자력갱생에 의한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얼마나 힘썼는가하는 점은 김정은 위원장의 경제집중 현지지도뿐만 아니라 ‘군수공업부문에서 군사장비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경제건설에 요구되는 각종 기계제품들과 인민소비품들을 생산한 사실’에서도 뚜렷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핵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노선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가 보다 분명해진 것이다.

참고로 이 부분과 관련된 부가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좀 하고자 한다. 농업부문인데, 아시다시피 북은 여전히 식량사정이 좋지 않다. 한 해 약 64만여톤(FAO발표, 2018년 기준)이 더 필요할 만큼 그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경제건설노선의 새로운 전환적 국면’에서 확인받듯이 관련하여 그 변화의 싹은 분명 보인다는 점이다.

즉, 과거에 비해 농업부분에서 지속적으로 현저히 개선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종석 박사조차도 <한겨레신문>에 “요즘 북한이 굶지 않는 이유, ‘다수확 농민’”(2019.1.06.)이라는 칼럼을 기고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2019) 신년사에서 언급한 ‘다수확 농장원(농민)’에 주목한다고 하였는데, 정확한 문장은 “농업부문에서 알곡증산을 위하여 이악하게 투쟁한 결과 불리한 일기조건에서도 다수확을 이룩한 단위들과 농장원들이 수많이 배출되였습니다.”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박사의 분석에 아쉬움이 좀 남는 부분 때문이다. 그도 사회주의 경제조치의 일환으로 마련된(제도 개선된) 포전담당제를 누구나 유혹에 빠지고 싶었던, 그 예의 자본주의적 방식의 ‘개인농’으로 이해했다. 과연 그런가?

 

반론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 첫째, 이 글을 쓰면서 대전제했던 그 수많은 제도개선과 같이 포전담당제도 농업부분에 있어 사회주의적 제도개선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6.28방침‘을 일컫는다. 그 방침에 따르면 기간 대단위 중심의 즉, 집단관리체제는 그 생산과 분배시스템에서 큰 약점이 발견되었는데 다름 아닌 평균주의(강조, 필자)가 농민들의 생산 열의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는 총화토대가 그것이다. 즉, ’필요에 의한 분배법칙‘이 작동되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능력에 의해 분배‘되는 사회주의체제하에서의 평균주의는 생산성 저하를 빗겨나가지 못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15-30명 내외의 분조개념을 5명 이내의 포전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즉, 제대로 댄 사회주의 분배원칙을 재구축해 생산성 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최적의 협동농장체제를 구축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북(조선)식 표현으로는 사회주의 경제법칙 내에서의 ‘개건’이 이고, 이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한다는 의미에서의 ‘개혁’과는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다.(물론 결과는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둘째는 북의 자립경제노선에서 근본정신에서 해당되는 자력갱생의 정신을 간과한 부분이다. 북은 아시다시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립이후 단 한 번도 자력갱생노선을 포기해 본적이 없다. 사회주의 우방국인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일관되게 자력갱생, 자립경제노선의 끈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 결과 사회주의권 경제가 망하고, 곧이어 불어 닥친 제2차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또 이 지구상에서 유례가 없는 각종 제재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북은 자력으로 현존하는 과학기술에서 가장 앞선 총합체라 할 수 있는 (국가) 핵무력을 완성한 그런 국가가 되었다. 자력갱생의 위력을 충분히 입증주고도 남는다. 따라서 농업부분에서도 국제사회의 지원과 의존보다는 ‘주체’농법에 의거한 자력갱생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그 문제의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셋째는 예의 그 “단위들과 농장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인데, 즉 국가계획경제의 통제범위를 벗어났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 역시 북이 이번 신년사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갖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일적 지도와 통제 하에 분명 있다. 그런 만큼 이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되는 점이다. 즉, 북은 사회주의 경제법칙에 따른 계획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그 개념이 국가의 통일적 지도와 통제이다. 그 전제하에 집단주의체제의 형태가 과거의 15-30명 내외의 분조개념에서 지금은 5명 내외의 포전담당제로 바뀌었는데 이 또한 국가중앙의 통일적 지도와 통제 범위 안에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북이 취하고 있는 관리방법의 혁신, 사업체계의 정비 등 모두는 국가 차원에서 그 통제와 지도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내각의 기업(협동농장) 지도, 기업(협동농장) 경영 방식 등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北 내부문제 분석 마지막 글로 북은 올해(2019) 그 총적구호로 “‘자력갱생의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가자.’”를 내새웠다. 이는 누가 뭐래도 자강력제일주의와 자체의 과학기술혁명에 의거한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을 명확히 했음을 의미한다. 해석은 이른바 서방세계와 보수수구세력들이 갖고 있는 그 희망적 기대; 개혁개방 노선과 체제전환에 대한 명확한 반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제가 해제된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자강력제일주의와 자체의 과학기술혁명에 의거한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을 보완해주는 역할(보완재) 그 이상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북의 경제노선은 철저하게 자립경제노선이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경제이론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개발도상국이 취하는 일반적인 방식 차관, 외자유치, 원조 등과는 확연히 다른 자립경제노선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경제특구를 통해 외자유치도 이는 말 그대로 제한된 특별구역에만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국가 경제성장의 주요 변수가 못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자본주의 경제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북의 경제노선이고, 이 노선이 과연 끝까지 성공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분명 지켜볼 일이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이 미국과의 관계개선 목적으로, 7.1경제관리개선조치 등 그 모두를 자본주의적 방식에로의 개혁·개방과 체제전환의 징조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도 관성적인 희망적 사고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자강력제일주의에 대해서도 ‘닫힌’폐쇄형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즉, 그렇게 폐쇄형 운운하기 이전에 미국과 국제사회가 언제 한번 북에게 기회를 준 적이 있었던가? 이것을 먼저 물어봐야 하고, 그 다음서야 국제사회와 유례없는 미국의 대북제제가 지속되고 있는 상태에서는 북(조선)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주’ 사회주의 자립경제노선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닫힌‘자주적’은 대북제제와 그렇게 연동되어 있고, 열린‘자주적’은 대북제제 해제와 그렇게 연동되어 갈 것이다. 또한 1960-80년대까지 그러하였듯이 미국과 관계가 개선된다 하더라도 ‘자주’개념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다음의 신년사 문장이 정확하게 해석가능 해진다. “우리는 자체의 기술력과 자원, 전체 인민의 높은 창조 정신과 혁명적 열의에 의하여 국가 경제 발전의 전략적 목표를 성과적으로 달성하며 새로운 장성 단계로 이행하여야 합니다.” 이를 통해 올해도(2019) 여전히 ‘인민생활 향상’이라는 국가목표를 완수하려 하는 북이 보인다. “인민 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은 우리 당과 국가의 제일가는 중대사입니다.”

통일뉴스, 2019년 1월 10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가 공동게재에 동의하여 실린 것임). 

월, 2019/01/1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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